[열린세상] 문혁이란 수수께끼/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
길고도 긴 역사, 중국사에는 온갖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다 있다. 문화대혁명(문혁)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중국사의 미스터리다.
금년은 문혁이란 사건(1966년부터 1968년까지)이 발생한 때부터 40년, 문혁이란 기간이 종료된 1976년으로부터 30년이며, 뒤집어 말하면 마오쩌둥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 30년이 되는 해다.
역사는 늘 해석되는 것으로, 역사풀이의 방향을 장악하는 자가 권력도 갖고, 권력을 쥐어야 역사해석의 주도권을 잡는다. 이 같은 역사쓰기에 중국 공산당은 늘 발군의 능력을 보여 왔지만, 문혁에 대해서는 단지 1981년에 마오의 정세 판단 실패와 린뱌오·4인방의 정치적 야심의 합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린 채 더이상 언급이 없다. 문혁이란 역사의 수수께끼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도 문혁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흥미롭게도 문혁에 대한 시각 차이가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한 진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에 영향을 받은 세대에게 문혁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 이전의 세대에게는 ‘공산주의 발악’쯤으로 이해됐다. 그리고 이교수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는 월드컵 거리응원 정도의 이벤트로밖에 쳐 주지 않는다.
이렇듯 다양한 이해가 존재한 까닭은 문혁 자체가 아이러니와 역설로 가득 차고, 아예 수단과 목적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으며, 결과가 의도와 그토록 달랐던 모순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혁명 후 등장한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은 관료기구 중에서 가장 위계질서가 뚜렷한 군의 권력 장악으로 끝났다. 문혁의 주체요, 수혜자로 설정됐던 농민은 문혁의 최대 피해자로 남았다.
문혁의 혼란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마오의 모순된 생각에서 비롯됐다. 문혁의 시작과 함께, 그는 홍위병에게 건설이 아닌 파괴를 지시하고, 계승이 아닌 거부를 훈령으로 내렸다. 미국의 마이즈너 교수가 지적한 대로, 문혁은 유토피아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상하게도 (50년대 말의 대약진운동과 달리) 부정적인 유토피아주의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던 운동이며, 문혁의 지도자는 미래의 긍정적 비전보다는 과거의 짐에 더 많이 집착했다.
결국 마오에게 과거는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과거에 대한 추상적 비판을 토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정함으로써, 수단과 목적이, 의도와 결과가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덩샤오핑이 ‘실사구시’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문혁 종결의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혁은 권력투쟁의 산물에 불과했을까? 홍위병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빨간 색의 마오 어록을 흔들며 열광했던 것은 단순한 대중조작 때문이었을까?마오의 과거 부정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비전이 급속히 퇴색하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했고, 당시의 중국 대중 사이에서도 그같은 현실인식에 대한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점점 커가는 사회적 불평등, 새로운 관료 특권층의 형성 등은 실제로 혁명 성공 후 15년이 지난 사회주의 중국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사회주의 비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를 마오와 대중들은 공유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지도자가 대중의 공포감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한 것은 과거에 대한 비판과 거부였을 뿐 미래에 대한 긍정적 비전이 아니었다. 이렇듯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한 마오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란 대중을 속인 것이 아니라, 대중을 혼란과 절망 속에 빠뜨린 것에 불과했다.
말과 행동이, 의도와 결과가 뒤죽박죽인 모순투성이의 문혁은 ‘죽의 장막’ 밖에 살던 우리에게 더욱 수수께끼 덩어리였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온갖 상반된 견해가 속출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세대간 역사인식 격차와 맞물려 문혁은 오랜 기간 미궁의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