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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In&Out] 韓미술사 연구 후원 현대차 글로벌 마케팅으로 돌파구?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1월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과 11년 장기후원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지난달 말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이하 LACMA)과 10년 장기후원 협약을 맺었다. 현대차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과 체결한 10년 장기후원과 함께 한국-미국-유럽을 잇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아트 프로젝트’를 구축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31일 서울 DDP에서 열린 ‘현대자동차-LACMA 글로벌스폰서십’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마이클 고반 LACMA 관장은 향후 ‘더 현대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로 ‘A+T(아트 앤드 테크놀로지) 프로젝트’와 한국미술사연구 지원을 비롯해 다양한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A+T 프로젝트’는 북미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맞서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LA과학역사미술관을 기반으로 1965년 개관한 LACMA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했던 미술관 과학기술 융합 프로그램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차의 후원을 받아 당시 참여작가였던 로버트 어윈과 제임스 터렐의 작품 각 1점을 소장하게 됐다. ‘A+T 프로젝트’가 사장된 지 44년 만에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부활하게 됐고, 수억원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게 됐으니 LACMA로서는 그야말로 로또 당첨보다 더한 ‘횡재’를 한 셈이다. 이 같은 글로벌 아트마케팅을 통해 세계적인 예술가 및 예술기관과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 개발과 기업경영 전반에 문화예술적 가치를 접목시켜 나갈 것이라고 현대차는 기대를 표명하고 있지만 국내 미술계의 반응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쪽이다. LACMA는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브리티시 페트롤 등 기업 후원도 많고, 개별 후원자도 적지 않다. 아쉬울 것 없는 유수의 미술관에 신세계,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후원사로 이름을 올리고 돈을 퍼 주는 것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국내 미술시장은 10년 넘게 장기불황이다. 젊은 예술가들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창작의 열정을 놓지 못하고 있다. 문을 닫는 상업갤러리들이 부지기수이고, 지방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이다. 미술계 관계자는 “한국 미술사의 역사와 뿌리를 찾는 ‘한국미술사 연구’ 지원 활동을 왜 LA에 가서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국내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국내는 외면하고 해외 유명 미술관에 돈을 퍼 주는게 이해가 안 된다”며 “국내 미술계부터 보듬고,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 제대로 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자세”라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회화, 다시보기

    회화, 다시보기

    뉴미디어와 대규모 설치작업이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됐던 회화가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작가들을 통해 회화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전이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루마니아, 폴란드, 영국, 중국, 미국 등 6개국 작가 12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대부분 1970년대생인 작가들은 서로 다른 주제와 스타일,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작업하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부터 레디메이드까지 무한히 확장하고 있는 현대회화의 맥락 안에서 붓과 물감, 그리고 캔버스로 이루어지는 가장 전통적인 붓질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한다. 미국 출인의 헤르난 바스는 요즘 크게 주목받고 있는 작가로 어린 소년들 사이의 성적 긴장감과 혼란을 미묘하게 표현하면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는 작품을 선보였다.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인 리넷 이아돔 보아케는 뛰어난 상상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허구적 인물화들이 주를 이룬다. 폴란드 출신인 빌헬름 사스날은 단순화한 이미지의 무제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작품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의 루마니아 작가 셰르반 사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포토샵을 이용해 회화적 구성으로 편집한다고 한다. 중국작가 리송송은 다양한 매체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분할된 화면에 파편화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 ‘장군’을 보여준다. 백현진은 ‘평상심’이라는 작품에 붓질의 시각적, 촉각적 특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성을 표현한다. 사진적 이미지를 회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동시대 삶의 순간들을 추적하는 박진아는 하나의 화면에 다수의 사진을 결합한 뒤 회화의 물리적 제작과정을 통해 다른 차원의 시간을 시각화한 작품 ‘여름촬영’을 그렸다. 셰르반 사부는 모국인 루마니아의 평범한 일상을 촬영하고 이를 포토샵을 이용해 회화적 구성으로 편집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오래된 사진을 떠올리는 빛바랜 톤의 작업은 미묘하게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전시는 6월 7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화가 황주리와 패션 ‘컬래버’/문소영 논설위원

    협력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은 줄여서 ‘컬래버’(collabo)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컬래버’를 호명할 때는 제2차 세계전쟁 때 독일 나치 정부에 협력했던 내통자나 부역했던 배신자들을 말한다. 주로 프랑스에서 사용했다. 현대에서 거론하는 ‘컬래버’는 긍정적이고 예술적이다. 예술가나 연예인들이 의류·도자기 등의 브랜드와 협력하거나, 다른 두 개 이상의 분야가 다른 브랜드끼리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컬래버’는 200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예술가나 연예인,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은 ‘한정판’(리미티드) 제품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값비싼 상품에 예술적 감성이 덧붙여지면 다른 경쟁 제품과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컬래버’를 주도했던 대표적 회사가 루이비통이다. 갈색의 모노그램 가방이 더이상 젊은 고객에게 소구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루이비통은 2001년 벽면 낙서처럼 보이는 그라피티 작가인 스티븐 스프라우스와 협업해 ‘그라피티’ 컬렉션을 선보였다. 변화의 조짐을 보고 2003년에는 일본의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멀티 컬러 모노그램’을, 2005년에는 ‘채리 모노그램’을 각각 내놓았다. 이후 무라카미 다카시는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루이비통은 2012년에도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여성작가 구사마 야요이와 ‘물방울 컬렉션’을 내놓았다. ‘아트 컬래버’ 덕분에 루이비통은 보수적이고 고루한 이미지를 떨쳐내고서 경쟁자인 구찌를 2003년부터 압도했다. 또 고가 상표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게 됐다. 국내 기업들은 예술가와의 컬래버가 그렇게 많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몇몇을 제외하고 황무지에 가깝다. 화가 황주리가 지난 20일 페이스북에 “지금 (서울 삼성동)코엑스에서 제 그림 이미지로 이영주 패션디자이너가 컬래버 패션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림 옷을 입고 워킹도 해요ㅡ하하!”라며 글을 올려 미술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현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프린트된 화려한 코트를 입고 찍은 ‘셀카’도 직접 올렸다. 황 작가의 그림 ‘불독 베티’가 티셔츠로 살아나고, 최근 작품인 ‘식물학 시리즈’의 각종 모티브가 고급 맞춤복이 돼 9등신의 모델들이 입고 활보하는 동영상을 보니 아트 컬래버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황 작가의 ‘식물학 시리즈’는 2013년에도 여행가방 브랜드인 샘소나이트와도 아트 컬래버 상품으로 나왔지만 생생한 현장의 느낌은 덜 하다. 황 작가는 “패션의 아트 컬래버는 생각보다 훨씬 활기 있게 작품들이 활용됐다”며 만족했다. 순수예술을 전시장에서만 본다는 관습이 깨지고 있는 시대에 더 많은 작가와 더 많은 영역에서 컬래버가 이루어지고, 패션이나 생활 소품에서도 예술이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집념/문소영 논설위원

    조선시대 집념의 대명사로 ‘명의’ 허준이 손꼽힌다. 작가 이은성이 쓴 장편소설 ‘동의보감’이나 TV드라마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허준은 선조 7년인 29세에 의과에 급제해 내의원에서 일했다. 동의보감은 한국 자생 약재를 많이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인삼의 효능을 크게 자랑했다. 17세기에 일본 에도에 ‘만병통치약’으로 조선 인삼 신드롬을 일으켜 가격 폭등이 일어난 배경에는 막부가 동의보감을 높이 평가한 것도 있다. 허준 단독 집필로 알려진 동의보감 편찬은 사실 선조의 국책 사업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전 중인 1596년에 허준 등에게 책을 쓰라고 명령했고, 정유재란으로 편집을 중단했다가 다시 허준에게 단독 편집을 맡겨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완성했다. 물론 허준의 노력은 칭송받을 만하다. 한국 미술계에도 허준 못지않은 집념의 사나이가 있으니 ‘한국 미술 아카이브’를 마련하겠다던 김달진 미술연구소장이다. 그는 오랜 노력 끝에 최근 서울 종로구 홍지문 상명대 입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열었다. ‘언제 자료박물관을 만들겠나’ 하고 회의하던 사람으로서 결실에 크게 감동했다. 질긴 사람이 이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그림만 그렸으면…” 세상에 첫발 디딘 ‘은둔작가’

    “그림만 그렸으면…” 세상에 첫발 디딘 ‘은둔작가’

    기신기신 계단을 올라 전시장에 들어서니 꾸덕꾸덕한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가자미가 그 속살을 드러낸 채 햇볕과 바닷바람에 말라가고 있다. 도루묵의 장렬함은 또 어떤가? 이름도 낯설었는데 알고 보니 볼락이었던 열갱이 두 마리가 처참하게 제 살이 뼛속으로 말라붙는 찰나를 기억하겠다는 듯 줄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이 내음은 우리가 터널이 생기기 전 미시령 마루에서 맡았던 그것이다. 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에서 초대전 ‘속초다’를 열고 있는 화가 김종숙(50)은 본격적으로 붓을 든 지 20여년이 됐다. 2년 전 친구들이 그림 볼 줄 아는 눈을 찾아 인사동을 헤매다 기획자 박인식(64)씨의 눈에 들었고, 박씨는 그녀가 웅크리고 있던 속초 청호동 집을 여러 차례 찾아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전시장을 찾은 11일 18점의 작품 옆에 붉은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미술계가 불황이고 생애 첫 전시회임을 감안해도 유별난 일이다. 생전 처음 작품을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고 털어놓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제도 어제도 찾았다며 또 찾는 이들이 적지 않고, 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선 내음만큼이나 신산한 삶이었다. 평안도 태생인 아버지가 오징어 덕장을 생업으로 삼았기에 오징어 매만지는 일을 배웠다. 강원대 미대를 졸업한 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황태덕장을 돌거나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혼자 아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캔버스를 마주한 계기는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였단다. 물감을 사기 위해 식당 설거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밤을 잊고 그림에 몰두하다 새벽에 소주 반 병 비우고는 잠을 이룬 뒤 다시 일어나 그림에 매달렸다. 전시장을 지키면서도 “속초 집에 가 그림이나 그리고 싶다”고 했다. 삶의 목표를 묻자 어눌한 말투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릴 수 있었으면”이라고 답했다. 입성도 여느 작가만 못하고 그 흔한 작가티도 찾을 수 없다. 말본새도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인적 끊긴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묘사한 그림처럼 쓸쓸하고 늘 혼자라 했다. 어떻게 이런 작가가 여태 숨어 있었을까 싶다. 본인은 “그저 그림이 좋아 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속초에 가는 이들이 많이 찾는 ‘대포동 아지매’ 얼굴처럼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 속초의 모든 것이 오롯하다. 판화가 이철수는 ‘물감을 이겨 바른 듯 그려낸 세상풍경이 신산스러운 삶의 고백을 듣는 것처럼 진합니다. 그림이 말이지요? 강렬한 말, 통렬한 언어인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라고 적으며 지인들에게 그림 보러 갈 것을 권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회를 열 요량을 내게 해준, 동화작가 박기범의 ‘그 꿈들’에 그린 원화 31점도 전시되는데 참담함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이라크와 덤으로 만날 수 있다. 그 꾸덕꾸덕한 내음 맡으려면 24일까지다. 김 작가는 그 뒤 청호동 돌아가 그림 그리며 소주잔을 비울 것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그림만 그렸으면…” 세상에 첫발 디딘 ‘은둔작가’

    “그림만 그렸으면…” 세상에 첫발 디딘 ‘은둔작가’

    기신기신 계단을 올라 전시장에 들어서니 꾸덕꾸덕한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가자미가 그 속살을 드러낸 채 햇볕과 바닷바람에 말라가고 있다. 도루묵의 장렬함은 또 어떤가? 이름도 낯설었는데 알고 보니 볼락이었던 열갱이 두 마리가 처참하게 제 살이 뼛속으로 말라붙는 찰나를 기억하겠다는 듯 줄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이 내음은 우리가 터널이 생기기 전 미시령 마루에서 맡았던 그것이다. 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에서 초대전 ‘속초다’를 열고 있는 화가 김종숙(50)은 본격적으로 붓을 든 지 20여년이 됐다. 2년 전 친구들이 그림 볼 줄 아는 눈을 찾아 인사동을 헤매다 기획자 박인식(64)씨의 눈에 들었고, 박씨는 그녀가 웅크리고 있던 속초 청호동 집을 여러 차례 찾아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전시장을 찾은 11일 18점의 작품 옆에 붉은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미술계가 불황이고 생애 첫 전시회임을 감안해도 유별난 일이다. 생전 처음 작품을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고 털어놓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제도 어제도 찾았다며 또 찾는 이들이 적지 않고, 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선 내음만큼이나 신산한 삶이었다. 평안도 태생인 아버지가 오징어 덕장을 생업으로 삼았기에 오징어 매만지는 일을 배웠다. 강원대 미대를 졸업한 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황태덕장을 돌거나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혼자 아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캔버스를 마주한 계기는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였단다. 물감을 사기 위해 식당 설거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밤을 잊고 그림에 몰두하다 새벽에 소주 반 병 비우고는 잠을 이룬 뒤 다시 일어나 그림에 매달렸다. 전시장을 지키면서도 “속초 집에 가 그림이나 그리고 싶다”고 했다. 삶의 목표를 묻자 어눌한 말투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릴 수 있었으면”이라고 답했다. 입성도 여느 작가만 못하고 그 흔한 작가티도 찾을 수 없다. 말본새도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인적 끊긴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묘사한 그림처럼 쓸쓸하고 늘 혼자라 했다. 어떻게 이런 작가가 여태 숨어 있었을까 싶다. 본인은 “그저 그림이 좋아 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속초에 가는 이들이 많이 찾는 ‘대포동 아지매’ 얼굴처럼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 속초의 모든 것이 오롯하다. 판화가 이철수는 ‘물감을 이겨 바른 듯 그려낸 세상풍경이 신산스러운 삶의 고백을 듣는 것처럼 진합니다. 그림이 말이지요? 강렬한 말, 통렬한 언어인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라고 적으며 지인들에게 그림 보러 갈 것을 권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회를 열 요량을 내게 해준, 동화작가 박기범의 ‘그 꿈들’에 그린 원화 31점도 전시되는데 참담함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이라크와 덤으로 만날 수 있다. 그 꾸덕꾸덕한 내음 맡으려면 24일까지다. 김 작가는 그 뒤 청호동 돌아가 그림 그리며 소줏잔을 비울 것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구한말 어린이들은 어떻게 놀았을까

    구한말 어린이들은 어떻게 놀았을까

    한국 미술계에 참 별난 인물이 있다. 초지일관 미술자료 수집에 정열을 바친 김달진(60) 씨다. 45년간 모은 자료를 이고 지고 통의동, 창성동, 창전동 등에서 전·월세 생활을 해야 했던 그가 서울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 입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 281.28㎡ 규모의 버젓한 사옥을 마련하고 오는 12일부터 재개관 기념전을 연다. 고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부터 미술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그는 2001년 평창동에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소한 데 이어 200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자료 전문박물관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만들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전용공간임차지원사업’ 지원으로 창전동에서 한국미술정보센터를 운영해오다 지난해 9월 정부 지원 중단으로 평생 모은 자료 가운데 2만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보관할 장소가 없어 고민하던 끝에 그는 그동안 모은 돈과 은행 융자를 받아 건물을 샀다. 낡은 건물은 건축가인 김원 광장건축환경연구소 김원 소장의 재능기부로 새롭게 단장됐다. 이번 개관전 ‘아카이브 스토리: 김달진과 미술자료’전에선 그동안 축적한 자료 중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단행본, 화집, 정기간행물, 리플릿, 작품 등 주요 소장품 250여점을 전시한다. 김 관장은 “한국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주요 자료 카테고리로 정리했다”며 “아카이브가 역사적 자료를 수집 보존하는 저장소의 의미를 넘어 박물관이라는 기관이 수행하는 다양한 연관 콘텐츠, 아카이브 활용이 이뤄내는 지형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요 전시 작품으로는 구한말 조선 어린이들의 놀이와 풍속을 다룬 이시이 단지의 ‘조선아동화담’(1891) 외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협회보 창간호(1921)와 종간호(1922),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3회 도록(1924)과 5회 도록(1926),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도판 화집 ‘오지호·김주경 화집’(1938), 김환기 친필 엽서와 백남준 친필 연하장 등 다양하다. 또 캐나다인 제임스 게일이 1909년 저술한 ‘전환기의 한국’, 영국 빅토리아앤알버트 뮤지엄에서 동양도자기 전시 중 최초로 한국도자기 전시를 열면서 펴낸 ‘르블랑 한국도자기 컬렉션도록’(1918), 베네딕트수도회 신부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가 지은 ‘한국미술사’(1929) 등 근현대 한국학관련 자료도 소개된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02)730-6216.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2015 미술계 판도가 궁금해?… 그곳에 가면 多 보인다

    2015 미술계 판도가 궁금해?… 그곳에 가면 多 보인다

    올 한 해 미술계의 판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행사인 화랑미술제가 오는 21~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3층 D홀에서 열린다. 지난달 새 진영을 꾸린 사단법인 한국화랑협회 주최로 열리는 화랑미술제는 1979년 처음 행사가 개최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품 견본시로 올해로 33회째를 맞는다. ●작가 500여명 작품 3200여점 전시·판매 화랑협회 소속 147개 회원 화랑 중 올해는 87개 화랑이 작가 500여명의 작품 3200여점을 전시, 판매함으로써 미술 대중화와 시장 활성화, 미술품 거래 질서 확립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다. 화랑협회 측은 미술시장 구성원의 동반 성장과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특정 작가의 작품이 여러 화랑에 중복으로 출품되는 것을 방지하고, 특히 젊은 작가들의 시장 진출을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해마다 참여 화랑에 전속 화가 제도 정착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안하고 있으며 전시작으로 원로들의 작품뿐 아니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 출품을 독려하고 있다고 화랑협회는 말했다. 지난해의 경우 94개 화랑이 참여한 가운데 3만 6000여명이 다녀가 37억원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대중화·화목 도모… 젊은 작가 출품 독려 올해 행사에선 일상생활 속에서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자 김선현 차병원 미술치료클리닉 원장의 강연 ‘나를 치유하는 그림의 힘’을 두 차례 준비한다. 또 화랑미술제 기간 최고의 작가 또는 최고의 부스를 뽑아 5월을 전후한 시기에 롯데백화점 본점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공동으로 열 계획이다. 박우홍 화랑협회장은 “미술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회원 간 화목과 의견 수렴이 가장 중요하다”며 화랑미술제를 통해 관람객과 고객뿐만 아니라 좋은 작가와 작품을 전시할 화랑들이 행복할 수 있는 행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람객을 위한 작품 전문 해설(도슨트) 프로그램이 하루 9회 진행된다. 도슨트 프로그램과 전문가 강연 모두 현장 접수와 이메일 예약이 가능하며 선착순으로 운영된다. 화랑미술제 입장권은 일반 1만원, 학생 8000원이다. 화랑미술제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artkorea.info), (02)766-3702~4.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국립현대미술관장 인선 앞두고 미술계 들썩 “논공행상 안 돼 ‘전문가’ 앉혀야”

    국립현대미술관장 인선 앞두고 미술계 들썩 “논공행상 안 돼 ‘전문가’ 앉혀야”

    “이번엔 제대로 앉혀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 임명을 둘러싸고 미술계가 또 들썩이고 있다. 관장직은 전임 정형민 관장이 지난 연말 불명예스럽게 직위해제된 이후 후임자 선임을 위해 지난 9일 공모를 마감한 상태다. 이번 공모에는 김용대 전 대구미술관 관장,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 대표,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윤진섭 호남대 미술학과 교수, 김찬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문위원, 김정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 15명이 응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전 의원의 경우 서울대 미대와 프랑스 파리대 대학원(미술사학)을 졸업하고 2009년 미래희망연대(당시 친박연대) 소속 비례대표 의원으로 18대 국회에 진출한 바 있다. 인사혁신처는 이번 주 서류 심사에 들어가 후보를 5명으로 추리고 면접을 거쳐 3~5배수로 최종 후보를 압축하게 된다. 신임 미술관장 인선은 다음달 중순에나 마무리될 전망이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응모자들 중 상당수가 한국 미술문화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할 국립현대미술관장 후보로 부적격하고, 특히 논공행상식으로 자리를 줄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범미술인행동300’이 24일 낮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미술계 원로들의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23일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연 긴급 기자회견에서 이제훈 범미술인행동 공동대표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한국 미술의 중심 역할을 하는 상징적이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합지 않은 사람들이 공모에 응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술계의 우려를 표명했다. 이 공동대표는 “2013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당시 미술관 전시의 파행과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운영을 지적했으나 이후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면서 “새 관장은 전문성이 없거나 비리에 연루됐거나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 그동안 미술계와 동떨어져 현장과의 소통이 없었던 사람, 정치권 출신 인사 등이 후보로 압축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기본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는 미술관 행정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만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면서 “응모자들 중에서 철저한 경력 점검을 거쳐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고 직업윤리의식이 뚜렷한 사람을 찾아 소임을 제대로 펼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전쟁·가난·질병… 판화로 담아낸 인간의 삶과 고통

    전쟁·가난·질병… 판화로 담아낸 인간의 삶과 고통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이는 독일을 대표하는 판화 예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8세에 불과했던 둘째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예술가로서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콜비츠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사진갤러리 1, 2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 민중예술의 어머니’로 불리는 콜비츠는 전쟁의 비참함 외에 가난, 질병, 실직, 매춘 등 인간의 삶과 고통을 직시하며 이를 검은색, 회색, 흰색의 선 굵은 판화로 강렬하게 표현했다. 작가 루쉰이 1930년대 중국에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아시아에 소개된 후 20세기 아시아 민중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시립미술관과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이번 전시에는 일본 오키나와 사키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판화 55점과 조각 1점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기점으로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그의 작품이 소개된다. 콜비츠는 전쟁 이전에는 빈민, 노동자 계층의 억압받는 삶을 표현한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쟁의 참상으로 가난, 죽음, 어머니의 사랑 등을 주로 다뤘다. 콜비츠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주요 판화 작품인 ‘직조공 봉기’ ‘농민전쟁 연작’ ‘전쟁 연작’ ‘죽음 연작’, 그리고 브론즈 입체 작품인 ‘피에타’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전쟁 연작은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 중 ‘어머니들’(1922~23년 작)은 작가 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브론즈 조각 ‘피에타’는 종교적인 피에타와 달리 인간의 고통을 넘어서 죽음에 대한 애도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그의 후기 작품 세계를 대변한다. 또 다른 연작 ‘농민전쟁’은 ‘밭 가는 사람’으로 시작해 ‘능욕’ ‘날을 세우고’ ‘무기를 들고’ ‘폭발’ ‘전투’로 이어지다 ‘잡힌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마무리된다.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꿈꾸며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북서울미술관은 이번 전시와 연계해 ‘콜비츠의 고향을 가다’ ‘콜비츠의 삶과 예술’ ‘콜비츠 그림 읽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전시는 4월 19일까지. (02)2124-8800.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피카소 손녀 “상속받은 작품 팔아 자선사업”

    피카소 손녀 “상속받은 작품 팔아 자선사업”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를 할아버지로 둔 소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소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생활비를 얻으려고 할아버지의 근사한 대저택 문 앞을 자주 서성이기도 했다. 남처럼 살던 20대 때 갑자기 할아버지의 19세기풍 빌라와 함께 1만여 점의 유작을 유산으로 받았다. 환갑을 훌쩍 넘긴 손녀 마리나 피카소가 이 중 상당수를 팔아 자선사업에 쓸 계획이라고 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유작 가운데 회화만 300여점에 이른다. 마리나는 인터뷰에서 “사랑 없는 상속이었다”며 “작품을 팔아 현금화해 인도적 목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그녀는 베트남의 어린이병원,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노인과 불우 청소년 돕기 프로그램 등 자선사업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마리나는 “조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팔 예정이며 어떤 작품을, 얼마나 팔 것이냐는 필요에 따라 하나씩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일단 첫 번째 매물에 대해서는 결심을 굳혔다. 피카소의 1935년작 ‘가족’(La Famille)이다. 그녀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 내게 상징적인 작품이지만 우리 가족은 가족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마리나는 피카소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파울로의 딸이지만 집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경매회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작품을 팔려는 그녀의 계획에 미술계는 술렁이고 있다. 전문기관을 거치지 않으면 공신력 있는 가격 책정이 어려운 데다 피카소의 작품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값을 떨어뜨릴까 우려해서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기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함혜리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기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함혜리 선임기자

    연초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출장을 다녀왔다. 우아함과 절제의 미학을 상징하는 달 항아리와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정신적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 마련된 ‘텅 빈 충만: 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 전시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현지인들은 K팝과 드라마를 통해서 친숙해진 한국의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면서 이처럼 정신성을 중시하는 순수예술이 있었다는 것에 감탄했다. 이만하면 전시회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고도 남는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으로 기획된 전시는 중국에서 시작해 동남아를 거쳐 오는 11일부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브라질에서도 열린다. 단색화 열기는 올 한 해 다른 곳에서도 이어진다. 세계적 경매회사인 소더비 홍콩은 3월 아트바젤 홍콩 기간 중 단색화 전시회를 마련하고, 올해 120주년을 맞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5~11월)에 단색화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단색화 경향의 작가들이 국내외에서 집중 조명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단색화의 부흥을 ‘기계문명에 각박해진 현대인들이 물성을 통해 깊이 있는 정신성을 추구한 명상적인 작품을 찾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라고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제서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1970년대부터 제작된 단색화들이 국제적으로 조명받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재조명받는 단색화 작가들 중에는 정창섭, 권영우, 윤형근 등 이미 작고한 분들이 포함돼 있다. 동서양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수 추상회화를 추구하며 묵묵히 살다 간 이들이 생전에 이렇게 조명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현재의 단색화 열풍이 지나친 쏠림현상을 만들어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을지, 실험성 강한 젊은 작가들이 더 곤궁해지는 것은 아닐지도 우려하게 된다. 길지 않은 체류 기간에 짬짬이 자카르타 시내의 미술관과 갤러리 몇 곳을 둘러봤다. 놀랍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던 점은 인도네시아 컬렉터들의 작품 구매가 대부분 자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시류나 유행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작가를 지켜보면서 격려하고, 작품을 구입해 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컬렉터들이 수없이 많았다. 실제로 자카르타에서 만난 예술 애호가 멜라니의 집에는 그가 20년간 후원했다는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작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구입하는 이들 덕분에 작가도 살고, 미술시장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국제 미술계에서 인도네시아 작가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순수예술은 대중문화와 달리 단기간에 성과를 끌어낼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지만 ‘기적’은 없다. 작가가 흘린 땀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후원하는 순수한 마음의 문화 소비자들이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낼 뿐이다. lotu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기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함혜리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기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함혜리 선임기자

    연초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출장을 다녀왔다. 우아함과 절제의 미학을 상징하는 달 항아리와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정신적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 마련된 ‘텅 빈 충만: 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 전시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현지인들은 K팝과 드라마를 통해서 친숙해진 한국의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면서 이처럼 정신성을 중시하는 순수예술이 있었다는 것에 감탄했다. 이만하면 전시회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고도 남는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으로 기획된 전시는 중국에서 시작해 동남아를 거쳐 오는 11일부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브라질에서도 열린다. 단색화 열기는 올 한 해 다른 곳에서도 이어진다. 세계적 경매회사인 소더비 홍콩은 3월 아트바젤 홍콩 기간 중 단색화 전시회를 마련하고, 올해 120주년을 맞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5~11월)에 단색화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단색화 경향의 작가들이 국내외에서 집중 조명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단색화의 부흥을 ‘기계문명에 각박해진 현대인들이 물성을 통해 깊이 있는 정신성을 추구한 명상적인 작품을 찾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라고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제서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1970년대부터 제작된 단색화들이 국제적으로 조명받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재조명받는 단색화 작가들 중에는 정창섭, 권영우, 윤형근 등 이미 작고한 분들이 포함돼 있다. 동서양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수 추상회화를 추구하며 묵묵히 살다 간 이들이 생전에 이렇게 조명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현재의 단색화 열풍이 지나친 쏠림현상을 만들어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을지, 실험성 강한 젊은 작가들이 더 곤궁해지는 것은 않을지도 우려하게 된다. 길지 않은 체류 기간에 짬짬이 자카르타 시내의 미술관과 갤러리 몇 곳을 둘러봤다. 놀랍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던 점은 인도네시아 컬렉터들의 작품 구매가 대부분 자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시류나 유행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작가를 지켜보면서 격려하고, 작품을 구입해 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컬렉터들이 수없이 많았다. 실제로 자카르타에서 만난 예술 애호가 멜라니의 집에는 그가 20년간 후원했다는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작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구입하는 이들 덕분에 작가도 살고, 미술시장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국제 미술계에서 인도네시아 작가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순수예술은 대중문화와 달리 단기간에 성과를 끌어낼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지만 ‘기적’은 없다. 작가가 흘린 땀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후원하는 순수한 마음의 문화 소비자들이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낼 뿐이다. lotus@seoul.co.kr
  • [새 영화] ‘빅 아이즈’ 팀 버튼, 커다란 눈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다

    [새 영화] ‘빅 아이즈’ 팀 버튼, 커다란 눈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다

    표절이란 다른 사람 창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래 가져다 제 것처럼 쓰는 행위다. 동서고금,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음험한 그림자처럼 예술의 이름 뒤에 흔히 따라붙는 단어다. 국무위원 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들은 제자 논문 표절 사실이 들통나 쩔쩔매고, 어떤 시인은 이름 짜한 문학상에서 표절 사실이 드러나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음악계에서도 잠잠할 만하면 표절 논란이 터져 나온다. 문제는 표절을 증명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팀 버튼의 새 영화 ‘빅 아이즈’는 화가 마거릿 킨(88)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1950~1960년대 미국 미술계에서 눈 큰 아이 작품들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팀 버튼이 “어릴 적 할머니집에도, 치과에도, 어디에도 눈 큰 아이 그림이 있었다”며 예술적 영감의 한 배경이었음을 이야기할 정도였다. 딸을 데리고 홀로 살던 무명화가 마거릿 킨은 월터 킨을 만나 재혼했다. 남편 역시 무명 화가. 두 사람은 갤러리를 열어 킨의 그림뿐 아니라 포스터를 팔고, 그림엽서를 팔며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그림을 그린 사람은 마거릿 킨이지만 바깥에서는 월터 킨이 화가로 행세했다는 사실이다. 1986년 마거릿 킨이 월터 킨을 고소하면서 비로소 진실이 알려지게 됐다. 마거릿 킨(에이미 애덤스)의 답답하리만치 나약한 모습이며 수완 좋은 사기꾼 월터 킨(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는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낄낄대게 만들며 ‘표절의 법정’에 앉은 배심원인 관객들에게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짓게 한다. 팀 버튼은 킨의 ‘눈 큰 아이’ 그림의 표절을 주된 소재로 삼으면서도 표절에 대한 얘기에 머물지 않는다. 표절은 이미 윤리와 도덕 바깥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고, 사악한 가해자와 절대적인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월터 킨은 아내에게 돈을 벌기 위해서는 미술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 화가라야 한다고 설득하고, 아내는 찜찜해하면서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부부는 역시나 큰 돈을 번다. 하지만 양심의 목소리와 작가로서 명예의 욕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마거릿 킨은 결국 진실을 세상에 밝힌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남편은 결국 무일푼으로 파산하고 만다. 악은 응징됐고, 진실은 승리했다. 그런데? 팀 버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 듯하다. 월터 킨을 비웃고 비난하는 당신은 표절을 둘러싼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냐고, 악마와의 거래를 떨치지 못한 채 얻은 달콤함을 누린 당신도 표절의 공범이 아니었냐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가위손’ 등 무려 여덟 작품을 함께했던 자신의 페르소나인 조니 뎁이 나오지 않는 팀 버튼 영화다. 감독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판타지 가득한 작품 분위기와 달라진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옆…‘무한대’ ‘다름’을 바라보다

    옆…‘무한대’ ‘다름’을 바라보다

    “옆의 빛, 옆의 아름다움, 옆의 의미, 옆의 옆, 옆의 숨소리. 우리는 지금까지 위아래, 귀천만 얘기했지 옆을 무시해 왔잖아요. 근본의 부재입니다. ‘옆’이란 차이, 다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크게 보면 배려, 사랑이 되겠죠. 무한대의 개념이 바로 옆입니다.” 싸구려, 짬뽕, 뽀글뽀글, 알록달록, 플라스틱…. 가치와 현학을 넘나들며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온 최정화(53)의 생각은 요즘 ‘옆’으로 무한확장 중이다. 그게 뭐라고? 그것도 예술이 될까? 의아해지지만 시장이나 후미진 골목에서 발견한 하찮은 일상의 사물들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 세계 유수 미술관과 비엔날레를 섭렵한 그이기에 이번엔 또 어떤 둔갑술을 보일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지난해 4만여명의 관람객이 찾은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의 대규모 개인전 ‘최정화-총천연색’을 비롯해 삼성미술관 리움의 개관 10주년 기념 ‘교감’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의 ‘최치원 풍류탄생’전 등 굵직한 전시들에 이어 올 한 해 동안에도 국내외 유명 미술관과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등에서 수많은 전시를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청담동 박여숙화랑을 찾았다. ‘타타타:여여(如如)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에서 그는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연금술’(알케미)과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이오니아 스타일의 기둥 머리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세기의 선물’, 우레탄을 입힌 거대한 꽃, 둥근 플라스틱 꽃다발 등 누가 봐도 ‘최정화스러운’ 작품들 외에 철, 유리, 나무를 이용한 신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수십 개의 공예용 장도리에서 머리만 떼어서 길게 쌓아 올린 작품, 기다란 못을 노랗게 물들이고 나무처럼 쌓아 올린 작품, 철 수세미를 이용해 만든 조각 등 일명 ‘철기시대’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1990년대 플라스틱 소쿠리를 쌓아 올려 별것 아닌 물건들에서 미학적 가치를 이끌어 냈던 쌓기의 신공이 상업 갤러리를 겨냥해 만든 것 같은 참한 작품들이다. 안쪽에는 유리 가루를 커다란 구슬처럼 뭉쳐서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관계항’이라는 작품이다. 하나는 한 병에 100만원이 넘는 최고급 샴페인 돔페리뇽, 다른 하나는 소주병을 부숴서 우레탄 접착제로 만들었다. 이거나 그거나 부숴 놓고 보니 매한가지다. 빡빡 민 머리에 잠자리 눈처럼 커다란 뿔테 안경, 검은 재킷에 빨간 가죽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최정화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전시를 앞두고, 새로운 개념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가 가장 흥분된다”면서 “3월 열리는 온양민속박물관 전시에선 ‘옆’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표현해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개발에 밀려 철거되는 박물관 옆 동네에서 반세기 넘게 살았던 교장 선생님 생활의 역사를 보여 주려 합니다. 1952년에 제대로 공들여 지어진 집인데 27일 철거되고 오갈 데 없어진 가구와 문짝, 집기들을 기증받기로 했어요.” 그는 “우리는 박물관에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 전통이라고 하지만 현재 우리가 몸담으며 살고 만들어 가는 게 진정한 전통”이라면서 “생활에 대한 애정, 삶의 흔적들을 최정화의 화법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그가 선보인 작품들의 주제인 ‘생생활활’, ‘꽃’에서 그랬듯이 ‘옆’에 대한 그의 생각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 작품이 되려면 좀 걸릴 것”이라면서도 그의 생각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것 같았다. 옆의 옆, 옆과 옆, 옆의 깨달음, 옆의 힘, 옆의 원근법, 옆이라는 주인공. 옆의 떨림, 옆의 울림, 빛의 옆, 옆의 탄생, 옆의 자연, 예술 옆의 쓰레기, 쓰레기 옆의 예술. 세상의 모든 옆을 보여 주겠다는 듯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디어들을 손글씨로 적어 놓은 A4 용지가 두툼하다.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작가임에도 자신을 여전히 ‘예술가인 척하는’, ‘작가인 듯’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올해 스케줄을 물어봤다. “3월 27일부터 방콕의 엠포리움 쇼핑몰에서 개인전이 있고 5월에는 밀라노엑스포와 베이징 파크뷰 개인전, 6월엔 프랑스에서 벌룬 페스티벌, 그리고 밴쿠버 비엔날레, 9월에는 프랑스 릴에서 ‘르네상스’라는 제목으로 도시 곳곳에서 전시가 열리고 호주 브리즈번의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에선 어린이박물관을 만들어요. 12월에는 로마에서 건축과 미술을 아우르는 ‘트랜스포머’전이 열립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인테리어, 건축, 영화 미술감독, 무대 디자인과 연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전방위 예술가로서 그의 다음 작업 무대는 서울 청담동에 새로 문을 여는 복합공간 G라운지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큐레이터, 문화공간 루프의 민병직 디렉터 등과의 협업으로 ‘봄을 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와 공연을 보여 주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추사와 김종학 화백의 작품을 통해 작은 공간에서도 인문 정신을 살려 동서고금, 고전과 현대의 문화와 역사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 줄 계획”이라며 앞으로 여름 열음, 가는 가을, 겨우 겨울 등으로 1년에 네 차례씩 선보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국내에서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답한다. “어떻게 보든 저는 다 좋아요. 작품을 만드는 것은 관객이에요. 우리 사회는 언제나 정답을 요구하지만 예술을 보는 방법, 이해하는 방법은 설명서가 필요 없거든요.”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자연을 다스리지 않는 자기 수양의 도구일 뿐”

    “자연을 다스리지 않는 자기 수양의 도구일 뿐”

    “단색화의 바탕은 자연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자연과 합일되는 동양적 자연관이 바탕이 됩니다. 그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수양의 한 도구로서 끝없이 반복 수행하며 붓글씨를 쓴다든지 그림을 그리는 조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선비정신과 같은 맥락의 작업입니다.” 단색화 1.5세대에 속하는 작가로 이번 ‘텅빈 충만’전에 물과 빛, 색의 침전을 이용한 작품 ‘숨 빛’ 연작을 선보이고 있는 작가 김택상(56·청주대 교수)은 “단색화란 색의 문제가 아니라 작업에 임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말했다. 서양의 모노크롬 회화와 단색화의 차이에 대해 그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내가 바깥세상과 만나는 것인데 서양의 입장은 자연을 착취해서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고 동북아시아의 태도는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 내가 있는 것”이라며 그런 태도가 그대로 단색화 회화에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양의 모노크롬 페인팅은 색을 이용하는 색면추상이지만 단색화라는 감수성을 갖고 작업하는 화가들은 재료의 물성을 존중하면서 어떻게 관계를 지속가능하게 이끌 것인가를 고민한다”면서 “재료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재료의 물성을 존중하면서 그 재료의 속성을 끄집어내서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서양의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과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전시된 그의 작품도 많은 양의 물에 엷게 물감을 타서 물을 흡수하는 캔버스에 침전시키는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광 아래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균 4~7개월, 길게는 2년까지도 걸린다. 박서보, 윤형근, 최영명 등 단색화 1세대의 제자인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경향인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최근 국내외에서 급부상하고 있지만 좀 더 국제무대에 알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를 위해 단색화에 대한 체계적인 담론화 작업과 역사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술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공부하고 그 결과를 작업에 반영한 사람들이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이라며 “한국 모더니즘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단색화 1세대 작가들에 대한 평가 작업이 제대로 돼야 후학들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국제 미술계에서도 단색화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국내여행 | 아라리오 제주 시대

    국내여행 | 아라리오 제주 시대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새빨간 뮤지엄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주 버킷리스트의 맨 윗줄을 다시 고쳐 썼을까. 그것도 부족해 빨간 밑줄을 그었을까. 예술로 시작하는 도시 재생 지난 가을, 대한민국 미술 기자들의 이목을 한데 모았던 미술계의 핫이슈는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였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드디어 공개되는 날, 그 규모와 수준 그리고 의미에 대한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By Destiny’ 개관전의 타이틀부터 의미심장하다. 예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뜻이고 그 운명의 주인공은 물론 김창일 회장이다. 지난 35년간 수집한 3,700여 점의 소장품 중 일부를 3개의 건물에 풀어 놓고, 또 그 사이에 자신의 작품 ‘By Destiny’를 배치하며(그는 씨 킴Ci Kim이라는 이름으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김 회장의 가슴은 또 얼마나 뛰었을까. 소장품 리스트는 이탈리아 메디치가가 부럽지 않다. 다만 그 버전이 클래식이 아니라 컨템포러리 아트일 뿐. 앤디 워홀부터 시작해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제이크 & 디노스 채프만 형제까지, 영접조차 영광스러운 거장들이다. 국내 미술품을 주로 수집했던 김창일 회장은 1981년 LA 현대미술관을 관람한 뒤 해외로 눈을 돌려 영국 YBAsYoung British Artist와 독일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독일 라이프치히 화파의 작품으로 수집 범위를 넓혔고 이후 중국, 인도 등 동남아 신진작가들의 작품에 집중하여 방대한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다. 가치는 작품에만 있지 않다. 아라리오 뮤지엄은 공간의 원형을 보존하는 데 힘을 써 오고 있다. 말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의 ‘공간’ 사옥을 결국 아라리오가 인수하기로 결정했을 때 모두가 안도했었다.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은 지난 9월 아라리오의 신념이 담긴 예술 공간으로 다시 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주의 탑동이다. 여기 방치되어 있던 영화관, 상업빌딩이 보존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탑동시네마 건물은 1999년 제주 최초의 복합상영관으로 개관하여 한때 제주 젊은이들이 몰리던 문화시설이었지만 이후 신축 영화관들에 밀려 2002년 한 차례 증축까지 했고 결국 2005년 폐관했다. 바로 옆에 있는 탑동바이크숍은 바이크숍, 이벤트회사, 여행사 등이 입점해 있던 평범한 상업시설이었다. 그랬던 건물들이 지금은 ‘섹시한’ 빨간색 뮤지엄으로 환골탈태했다. 동문모텔도 마찬가지다. 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문재래시장 맞은편에는 간판마저 빛바랜 모텔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그중 동문모텔은 1975년 여관으로 문을 열었다가 1982~1994년 사이에는 덕용병원으로 1996~2005년에는 한미여관으로 영업했던 곳이다. 낡은 침구, 입던 옷가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에는 필연적으로 사연들도 남아 있다. 손때와 냄새와 기운들.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기억들. 현재는 제주에 머물며 제주의 기억을 쫓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장기투숙에 들어간 상태다. 각자의 사연을 딛고 운명을 개척하듯 멋지게 용도 변경한 건물들은 과연 제주 구도심 재생을 위한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예술 애호가들의 잦은 발걸음이라는 거름을 기다리는 중이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 Arario Museum Jeju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아라리오 뮤지엄 탑동바이크숍 제주시 탑동에 방치된 영화관과 상업건물을 개조해 세계적인 컬렉터인 김창일 회장이 수집한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탑동바이크숍에서는 김구림 작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도 제주시 탑동로 14 064-720-8201, 8204 성인 1만2,000원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동문재래시장 앞의 낡은 여관 건물을 개조해 제주를 주제로 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내년 3월에는 동문모텔Ⅱ도 개관할 예정이다. 제주도 제주시 산지로 37-5 064-720-8202 성인 6,000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내일의 거장… 불안의 치유

    내일의 거장… 불안의 치유

    부조리하고 불편한, 그리고 기이한 세상에서 젊은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며, 이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 낼까.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전’, 금호미술관의 ‘영아티스트 2014’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작가전’ 등은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전시회들이다. 엄격한 심사과정과 공모를 통해 선정된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미술계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실험정신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신진작가 8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젊은 모색 2014’전을 열고 있다. 1981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청년 작가’전으로 시작해 1990년부터 현재의 ‘젊은 모색’전으로 이름을 바꿔 2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다. 18회째를 맞아 회화, 한국화,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각 분야에서 8명이 최종 선정됐다. 미술관 측은 “20∼30대인 참여작가들은 회화,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여러 분야 작품에서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현실을 적절히 혼용해 우회적으로 현대사회 또는 일상,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권용주는 싸구려 건축자재, 공사 폐기물 등 버려진 오브제를 이용해 하나의 거대한 인공폭포를 중앙홀에 설치했다. 김도희는 어린아이의 오줌 얼룩이 쌓인 장지를 이용해 우리 사회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깨닫게 한다. 김웅용은 영화매체를 구성하는 오디오, 영상, 시간 등의 요소를 뒤섞어 인간의 이중성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했다. 김하영은 현대 과학기술이 현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주목한다. 노상호는 리어카를 개조해 만든 ‘메르헨 마차’를 거리에 끌고나가 일상에서 이야기와 이미지를 수집했다. 구전으로 받은 이야기를 다시 먹지 드로잉, 페인팅, 퍼포먼스 등의 매체로 확장한다. 오민은 개인의 감정이 배제된 채 불편한 균형을 주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 작업을 통해 사회의 파워게임, 폭력, 통제를 다룬다. 윤향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세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대변하는 대중문화에서 따온 이미지들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조송은 일상에서 만나는 이미지들을 이용해 인물과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 욕망, 질투, 상대적 우월감으로 얼룩진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전시는 3월29일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자 2004년 시작된 금호미술관의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은 곽이브, 장종완, 황지윤 등 4명의 젊은 작가들을 각각의 개인전 형식으로 소개한다. 도시공간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탐구를 바탕으로 한 곽이브의 설치작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사유를 조각으로 표현한 백승현의 설치작품, 자본과 권력의 뒤틀린 유토피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담은 장종완의 페인팅과 영상작품, 동서양의 풍경화를 재해석한 황지윤의 페인팅작업이 전관에서 펼쳐진다. 전시는 25일까지. 2000년 에르메스 재단이 한국의 역량있고 창의적인 젊은작가 지원을 위해 제정한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15회 후보 작가 전시회에는 ‘슬기와 민’(최슬기+최성민), 여다함, 장민승 등 3팀이 최종 선정됐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슬기와 민은 오늘날 예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테크니컬 드로잉’ 으로 표현했다. 기술적 용도로 쓰이는 이미지의 세부를 흐릿하고 거대하게 확대한 프린트 작업으로 ‘무차원 세계의 원근법 회화’를 그들의 방식으로 시도했다. 조소를 전공한 뒤 음악 코디네이터, 가구디자이너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장민승은 ‘보이스리스’라는 제목으로 영상, 설치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한 뒤에 느낀 무기력과 우울증에 대한 자기 치유적 과정으로 작업을 했다”고 소개했다. 여다함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포장재 등 각각 다른 계기로 수집한 사물들을 한데 엮어 재구성한 실험작으로 현대사회에서 소비욕과 실존의 의미, 시대가 옳다고 믿는 진리의 오류 가능성 등을 이야기한다. 강남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후보 작가 전시회는 2월15일까지. 시상식은 같은 달 13일 열린다. 광주시립미술관 서울갤러리(GMA)에서 열리는 ‘광주 영아티스트전’에는 백상옥(조각), 이조흠(영상, 뉴미디어), 이인성, 설박, 노여운(이상 회화), 윤종호(조각) 등 30대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는 2월 22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어제의 거장… 태동의 감격

    어제의 거장… 태동의 감격

    올 한 해 국내 주요미술관과 주요 갤러리에서는 근대부터 동시대 전위예술까지, 회화부터 미디어 아트까지 각 장르와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전시회가 마련된다. 특히 광복·분단 70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예술적 시각으로 풀어 보는 특별기획전도 다양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올해의 첫 번째 화두는 미디어·비디오 아트다. 우선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 ‘W3-백남준’전이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2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의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를 비롯해 10점 내외의 작품이 전시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오는 27일부터 5월 25일까지 2000년 위암으로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를 재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1세대 비디오아티스트스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는 그가 비디오라는 기술로 표현한 동양적 정신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3300㎡에 달하는 원형전시실을 ‘만다라 시리즈’ 등 그의 대표 작품으로 채울 계획이다. 2012년 기증된 그의 아카이브 2만 점을 정리해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백남준의 제자로 지난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1951~)의 개인전도 3월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광복·분단 70년 기획전시도 풍성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한때 월북화가라는 낙인이 찍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근대 회화의 거장 이쾌대(1913~1965)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휘문고보 시절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입선했고 이중섭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던 이쾌대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화가로 참여했다가 포로가 됐고 포로교환 때 월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금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이 간직해 온 초기 습작과 드로잉, 스케치부터 한국전쟁 포로수용소 시절까지 대표작과 유품, 사신, 제국미술학교 시절의 자료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유화 60여점, 스케치 및 드로잉 350점 등 이쾌대의 작품을 망라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7월 21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리는 ‘분단 70년 주제전:북한 프로젝트’는 국내외 작가들의 북한에 대한 예술적 상상력을 집대성한 대규모 전시로 기대를 모은다.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아트선재센터의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도 8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야심 차게 준비한 ‘한국 포스트모던 미술전’을 7~9월 서울관에서 갖는다. 1990년 이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 젊은 모색전 등을 통해 유입된 포스트 모던 경향이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과 실험성, 탈장르와 융합 등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자리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전시를 마련한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설치작가 양혜규의 대규모 개인전(3월)에 이어 7∼9월 한국 미술의 정수 가운데 세밀한 특징이 있는 작품으로 ‘세밀가귀(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전을 준비해 아미타삼존도, 청동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등을 전시한다. 11월에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전통건축을 사진, 영상, 모형 등으로 재해석하는 ‘한국전통건축예찬’전을 연다. 젊은이들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전시를 이어 온 대림미술관은 7월 패션과 예술의 영역을 넘나드는 덴마크 출신의 괴짜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의 한국 첫 전시회를 연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비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도 여럿 마련된다. 멕시코 출신의 개념미술가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의 개인전이 4월 18일부터 8월 2일까지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펼쳐진다. 인도 출신 탈루, 필리핀 민중화가 레슬리 드 차베스의 전시도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상반기에 마련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철학·문학·영화·연극·오페라 분야에서 조형적 실험을 펼쳐온 윌리엄 켄트리지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는 4~6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인도네시아 여성작가 크리스틴아이추의 국내 첫 개인전을 연다. 한편 5월 9일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영국 테이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이숙경씨가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아 대표작가로 선정된 전준호·문경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시론] 국립현대미술관장, 비전형 리더십 갖춰야/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사비나미술관장

    [시론] 국립현대미술관장, 비전형 리더십 갖춰야/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사비나미술관장

    요즘 미술계의 핫이슈는 차기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다. 미술계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은 데다 정형민 관장이 직위 해제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미술인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세간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수장이 될 자격을 갖춘 유능한 관장을 뽑는 일이 이번에도 결코 쉽지 않겠다는 우려가 따른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선 과거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장 공개 모집 공고문에 실린 관장의 주요 업무에는 국가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취지 및 목표, 실천 과제, 향후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실린 관장 인사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국민 여러분께 한층 가까이 다가가면서 문화가 있는 행복한 삶을 드리고자 합니다. (…) 복합예술, 과학, 인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이 현대미술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의 산실로 거듭날 것입니다.’ 미술관의 존재 목적과 경영이념이 담긴 설립 취지를 명문화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물이다. 설립 취지는 미술관을 이끌어 가는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될 뿐만 아니라 미술관 직원들을 확고한 단합의 정신으로 뭉치게 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미술관의 설립 목표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한국과 달리 선진문화국의 국립미술관은 설립 목표와 핵심 과제를 국민들에게 명확히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의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는 대중들을 위한 미술관이라는 설립 취지를 개관부터 지금껏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 런던의 관광 명소인 트라팔가 광장에 국립미술관이 위치한 것도, 무료 관람 원칙을 굳게 지켜 오고 있는 것도 예술품에 대한 취미를 대중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셔널 갤러리는 아이들의 입장을 허락한 최초의 미술관이기도 한데, 이는 육아 도우미를 구하기 어려운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중친화적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듯 다른 미술관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1998년 이미 모든 소장품을 데이터 베이스화해 대중에게 공개했다. 프랑스의 국립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은 프랑스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설립 취지에 담아 미술관 조직과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루브르 미술관은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즐길 수 있는 미적 안목을 길러 주고 민주적 원칙을 교육시키는 국민들의 평생학교’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야심차게 실천하고 있다.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를 고전미술품 수집과 보존에 두고 있는 것도 고대에서 근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예술작품을 시대별·사조별로 종합적이고도 완벽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다. 작품 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고, 카탈로그를 출간한 것도 고전미술사를 완벽하게 공부할 수 있는 국민의 궁전으로 만들겠다는 핵심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루브르 미술관은 수십만 점에 이르는 고전미술품을 소장하는 세계 최대 미술관이며 미술 교과서 그 자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고유의 철학이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명확히 전달되지 못해 국민적인 공감을 얻지 못하는 현실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어떤 인물이 국가대표 미술관의 새로운 관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는지 밝혀졌다. 관장은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취지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명문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국립미술관이 나아갈 방향과 지향해야 할 비전을 확실히 제시하고, 이를 소신과 열정으로 실천하는 비전형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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