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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수계 2003년부터 용수달린다/우리나라­세계수자원현황·이용실태

    ◎한국 수자원 45% 유실… 실 사용량 23%뿐/지구촌 연 공급 9조t­수요 4조3천억t 「물,물,물…」.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전국이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먹을 물조차 모자랐다.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물」에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물은 넘쳐도 문제고 모자라도 큰 일이다.그러나 사람은 물없이 살 수 없다.먹는 차원을 넘어 농공업 용수에다 에너지원으로도 쓰인다.수질 및 대기 오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실로 인류의 생존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22일 「세계 물의 날」을 맞아 세계와 우리나라의 수자원 현황 및 이용 실태를 알아본다. 물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다.부존량이 무려 13억8천만㎞³이다.연간 물 공급량은 9천㎞³(9조t),사람이 쓰는 수요량은 4천3백㎞³(4조3천억t)이다.수치상으로는 공급이 남아도는 셈이다.하지만 바닷물과 남·북극의 얼음을 빼면 실제 이용할 수 있는 물의 부존량은 40조t이다. 게다가 인구 증가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세계의 물 사용량은 지난 50년대보다 5배 이상 늘었다.앞으로도 짧은 기간에 더 많은 물을 쓸 것이다.아직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물 부족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음껏 물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는 기껏해야 미국과 서유럽 등 일부에 불과하다.중국은 50여개의 도시가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중동 국가는 2000년에 물 공급량이 지금의 3분의 1로 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우리나라의 강수량은 연평균 1천2백74㎜이다.세계 평균 강수량 9백70㎜보다 높다.하지만 인구밀도가 높아 1인당 강수량은 3천㎜로 세계 평균 3만4천㎜의 11분의 1에 불과하다.더욱이 전체 강수량의 3분의 2가 우기인 6∼9월에 집중돼 있는데다 지역 및 연도 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심해 물을 다스리기가 여간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수자원 총량은 연평균 1천2백67억t.이 중 45%인 5백70억t은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증발되고 나머지 55%인 6백97억t이 강으로 흐른다.그러나 이 것도 연중 똑같이 흐르지 않고 4백67억t은 장마철에 바다로 한꺼번에 흐른다. 따라서 실제 이용가능한 물의 양은 연간 2백30억t이다.평소 댐에 가둔 양을 더하면 지난 93년 말 현재 당장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총 보유량은 3백10억t이다. 반면 우리가 1년에 쓰는 물은 93년 말 현재 2백90억t이다.우리나라 수자원 총량의 22.8%만 활용하는 셈이다.강물 1백64억t,댐과 저수지에 가둔 물 1백6억t,지하수를 20억t 쓴다. 지금은 쓰는 물보다 보유한 물이 약 20억t 정도 많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물의 사용량은 계속 늘 전망이다.건설교통부는 물의 수요량을 오는 2001년에는 3백30억t,2010년에는 3백70억t으로 추산했다. 반면 물의 확보량은 같은 기간 3백49억t,3백76억t에 그쳐 쓰고 남는 물의 비율인 예비율은 현재 7%에서 같은 기간 6%,2%로 떨어질 전망이다.수자원을 추가로 개발하지 않으면 물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는 얘기다.실제로 건교부는 전남 목포·강진·해남 지역의 수원인 탐진강 수계는 97년부터,여천·율촌에 물을 대는 섬진강 수계는 2000년부터,한강 수계는 2003년부터 용수가 부족할 것으로 우려한다.수자원의 이용률을 높이려면 그냥 바다로 흐르는 물을 보다 많이 가두는 노력이 필요하다.그러나 더 많은 댐을 지으려 해도 건설과 보상비가 갈수록 늘고 쌓을 곳도 적당치가 않다.건설 기간이 오래 걸려 빠르게 증가하는 물의 수요를 따라잡기 어렵다.그래도 물 부족 사태를 막으려면 저수시설을 늘리는 길이 최선책이다.물론 지하수 등 대체 수원의 개발도 뒤따라야 한다. 국민들이 물 한방울을 아껴쓰는 자세를 생활화하는 것도 절대 필요하다. ◎유엔물보호행동강령 ⓛ수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물의 중요성을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켜라. ②목욕보다는 샤워를 하고 수자원을 오염시키는 화학물질의 과도한 사용을 억제함과 동시에 재생된 물을 정원수로 써라.(이상 개인) ③캠페인과 교육,세금을 통한 합리적인 물사용 계획을 촉진시켜라. ④수자원 보호를 위해 대중을 정책결정에 포함시키고 여성의 역할을 향상시켜라. ⑤국가적인 계획수립 과정에서 통합된 수자원 계획 및 운영,그리고 깨끗한 물을 규제하고 감시하는 제도를 도입하라. ⑥효율적인 물사용을 통해 물의 보존량을 늘리고 사용자들로 하여금 물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 ⑦농업용수의 합리적인 사용을 위해 농민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라.(이상 정부및 지역사회) ◎우리나라의 물값과 사용량/서울 수돗물값 1t당 2백원/미국의 9%­일 도쿄의 38% 불과/1인 하루 206ℓ 소비… 독 보다 60ℓ 많아/전국서 10% 절약땐 부산 물 90% 공급 우리나라의 수돗물은 세계에서 값싸기로 유명하다.비교적 물이 많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물에 대한 관심이나 투자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적었던 것도 이유이다.바꿔 말하면 대충 만든 「싸구려」 상품이라는 얘기다. 서울의 수돗물 값은 1t에 2백원이다.5백㎖ 콜라병에 담으면 1원을 주고 10개를 살 수 있다.거의 공짜인 셈이다.미국의 물값 2천3백10원의 11분의 1 수준이며 호주 시드니의 9백24원,독일 본의 7백24원보다는 3·4분의 1정도이다.프랑스 파리 5백74원이나 일본 도쿄의 5백29원에는 절반도 안될 만큼 싸다. 값이 싸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나라에 비해 수돗물을 지나치게 많이쓴다.가정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사용하는 물은 우리가 2백6ℓ로 영국 1백32ℓ,독일 1백46ℓ,프랑스 1백47ℓ,덴마크 1백94ℓ 등 선진국보다 훨씬 많다. 미국은 하루에 3백ℓ 이상 쓰지만 세차와 잔디에 뿌리는 물이 포함돼 절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일본도 2백36ℓ로 우리보다 많지만 목욕 문화가 발달된 데다 세탁기 보급 등 생활수준이 높아 우리가 물을 더 많이 쓴다고 할 수 있다. 양치질할 때 물을 틀지 않고 컵에 받아 쓰면 종전에 10외로 충분하던 물이 1ℓ로 가능,9회를 절약할 수 있다.설거지할 때 물을 받아 쓰면 1백20외를,수세식 변기에 벽돌 한장을 넣으면 하루에 1백15ℓ를,목욕할 때 샤워기 대신 욕조를 이용하면 3백ℓ의 물을 아낄 수 있다. 만약 이에 따라 전국에서 하루에 10%의 물을 절약한다면 부산에서 하루에 쓰는 물 1백62만ⓣ의 90%를 공급할 수 있고 영남 지방의 주민들이 전부 쓰고도 남을 물을 추가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은 더이상 무한재가 아니다.물의 가치도 없는 게 아니다.더욱 물의 귀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지금은 「물을 돈쓰듯」해야 할 때다. ◎「마지막 천연수자원」관리 어떻게/지하수 매장량 연강수량의 12배/무분별한 개발땐 수질오염·지반침하 우려/철저한 지질조사 거쳐 부작용 최대한 줄여야 물이 부족할 때마다 대체 수자원으로 지하수를 얘기한다.바닷물의 담수화나 중수의 이용기술,인공 강우 등도 거론되지만 경제성이나 기술문제로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하수는 매장량이 엄청나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웬만한 가뭄도 거뜬히 견뎌 낼 수 있다.우리나라의 지하수 부존량은 1조5천4백억t로 연평균 수자원 총량 1천2백67억t의 12배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매년 지하에 스며드는 물은 2백28억t이며 지하 침반 등 부작용 없이 실제 뽑아 쓸 수 있는 물은 1백30억∼1백40억t 정도로 추산된다.특히 우리나라는 강수량이 풍부하고 지질학적 특성도 지하수를 개발하기에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등 부작용도 엄청나다.일본은 지난 57년부터 10년간 도쿄에서 하루에 80만t씩의 지하수를 뽑았었다.그러나 사전에 지질 조사를 면밀히 하지 못해 1백60㎦에 걸쳐 지반이 4.58m까지 가라앉았다.일본 열도 36군데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다케미나미 지역에서는 과잉 채수로 지하에 바닷물이 침입,염소량이 증가했고 지난 82년 일본 15개 도시의 상수도용 지하수는 오염된 것으로 판정났다.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70년대 말부터 지하수 채수량을 하루 20만t으로 제한했다. 미국에서 지하수 사용률이 가장 높은 캘리포니아 산조아퀸 지역에서는 지하수위가 90m 이상 낮아져 1만3천㎦의 지반이 최고 8.8m나 내려앉았다.하와이나 중국,멕시코,태국 등에서도 지하수위의 저하로 지반 침하가 잇따랐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황산염에 오염,생태계를 파괴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부곡에서도 지하수를 유입량보다 4만t이 많은 연간 1백34만t을 뽑아 지하수위가 1백45m나 내려갔다.유리 섬유업체가 많은 인천 고잔동 지역에서는 폐기물에서 나온 오수의 침입으로 지하수가 오염됐으며 초정약수가 있는 충북 청원군초정리에는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로 우물이 마르는 등 피해가 심각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해 8월 지하수법을 제정,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지하수 개발을 추진 중이나 다소 늦은 감이 있다.지하수는 다음 세대에 물려 줄 마지막 천연 수자원이다.마땅히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 “한일 자랑스런 이웃되게 지혜모으자”김 대통령(김대통령 방일여로)

    ◎정상회담 예정시간 넘기며 북핵논의/교민리셉션 심수관씨 등 1천명 성황/「고향의 봄」 연주속 왕궁만찬… 가부키 관람도 ▷정상회담◁ ○…김영삼대통령은 일본방문 첫날인 24일 하오 도교에 있는 영빈관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일본총리와 1차단독정상회담을 갖고 북한핵문제와 두나라 우호관계증진방안을 1시간25분동안 집중 논의. 김대통령은 이날 부인 손명순여사와 함께 회담시작 5분전에 정상회담장인 영빈관내 아사히노마 입구에서 2분먼저 도착해 있던 호소카와 총리내외를 4개월여만에 만나 『다시만나 반갑습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라며 반갑게 인사를 교환하고 기념촬영. 김대통령과 호소카와총리는 별도환담을 위해 옆방인 히가시노마로 자리를 옮겨기는 영부인 및 총리부인과 헤어져 회담장에 입장,양국의 외무부아주국장(유병우,가와시마 유타카)과 통역만을 배석시킨 가운데 단독회담을 시작. 본격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김대통령과 호소카와 총리는 날씨 등을 화제로 잠시 환담했으며 김대통령은 『서울에서는 출발전눈이 내렸다』면서 「서설」이었다고 소개. ○“서울 서설내렸다” 두 정상은 이어 양국에서 진행중인 개혁작업,특히 정치개혁법에 실천의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최대 관심사인 북한핵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보조방안과 과거사정리문제,사할린동포귀한,군대위안부 후속조치,인적문화교류확대 등 현안을 진지하게 논의. 이날 정상회담은 두나라 정상이 최대 현안인 북한핵문제에 대해 장시간 논의하느라 예정시간을 10분 초과해 85분간 진행. 이에따라 당초 거론키로 했던 한·일·중 3국간 한자의 국제화를 위한 공동협의체 구성등 3가지 사업은 논의하지 못하고 26일 2차 확대정상회담으로 이관. ○“핵무장 결코없다” 김대통령은 회담에서 과거사문제와 관련,『소위 침략이나 억압을 당한 사람이 수치이지만 침략,억압한 사람도 수치』라면서 『한국은 우리 나름대로 과거치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일본도 나름대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 호소카와 총리는 일본으 핵무장가능성에 대한 일부의 우려를 의식단 듯 『이는 기우』라며 『일본은 핵의 평화적 이용원칙을 견지할 것이며 결코 핵무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명. ▷환영만찬◁ ○…김영삼대통령내외를 위해 24일 저녁7시30분 왕궁 「호메이덴」연회장에서 아키히토 일왕내외 주최로 열린 국빈 환영만찬은 김대통령내외와 일왕내외의 양측 참석자 접견,만찬,일왕 만찬사및 김대통령 답사,민속공연관람등의 순서로 3시간동안 진행. 김대통령내외는 이날 숙소인 영빈관에서 승용차편으로 궁성 남쪽현관 미나미다마리 입구에 도착,일왕내외의 영접을 받아 나루히토왕세자 및 왕족일행 10여명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쓰카제노마실로 이동. 이날 만찬에는 우리측 공식수행원 전원이 연미복 차림으로 참석했고 일측에서는 호소카와총리,도이 중의원의장,하라 참의원의장등 3부요인 등이 역시 연미복차림으로 참석. 김대통령내외와 일왕내외는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만찬장으로나란히 이동,실내악의 연주속에서 함께 만찬.일왕은 식사가 끝난뒤 후식이 제공되자 통역없이 만찬사를 낭독. 일왕은 만찬사 서두에서 『김영삼대한민국대통령각하께서 이번에 영부인과 함께 국빈으로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신데 대해 본인은 마음으로부터 환영한다』고 인사. 이어 일왕은 『귀국은 우리나라에 있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사람들의 교류는 역사책에 밝혀지기 이전의 먼 옛날부터 이루어져 왔다』며 『귀국으로부터 다양한 문물이 우리나라에 전달되어 우리들의 선조들은 귀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양국간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상기한뒤 과거사에 대한 반성발언을 시작. 일왕은 또 『신한국 창조와 일·한양국관계의 강화를 진지하게 추진하고 계시는 대통령각하의 금번 방일은 양국장래에 있어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확신한다』고 평가. 이날 왕궁만찬의 주메뉴는 양식이었으며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동요인 「고향의 봄」과 일본동요 「사쿠라」등 양국 국민들의 귀에 익은 노래들이 교대로 연주. 김대통령내외와 일왕내외등 양국 참석자들은 만찬이 끝난뒤 20여분동안 일본 민속공연 「가부키」를 관람. ▷도쿄도착◁ ○…이에앞서 김영삼대통령내외는 서울 공항을 출발한 지 2시간반만인 24일 상오 11시30분 도쿄 하네다(우전) 국제공항에 도착,2박3일의 일본공식방문 일정에 돌입. 김대통령은 공항에서 와타나베(도변) 일의전장과 공노명주일대사의 기상영접을 받고 특별기 문으로 나와 환영나온 교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 공항에는 교민 2백여명이 나와 태극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김대통령 내외를 맞이했으며 교민들은 김대통령이 다가서자 『대한민국 만세』 『잘 오셨습니다』 등을 연발하며 환호. ▷환영식◁ ○…김영삼공식환영식은 이날 하오 2십2터 김대통령숙소인 영빈관 정원에서 15분간 거행. 김대통령내외는 영빈관 2층 숙소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다 하오2시 정각 1층 현관홀로 내려와 왕궁에서 승용차편으로 약간 늦게 도착한 아키히토(명인)일왕내외와 인사를 교환. 김대통령은 먼저 아키히토일왕과 악수하며 『반갑습니다』라고 인사. 김대통령내외와 인사를 마친뒤 팡파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현관밖 테라스로 나와 붉은색 카펫위에 나란히 서서 애국가와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부동자세로 경청. 김대통령내외는 이어 아키히토일왕내외의 안내를 받으며 테라스 아래로 내려와 대기중이던 나루히토(덕인) 왕세자내외,호소카와 총리내외와 인사를 교환한뒤 사열대에 등단. ○「선구자」 연주 은은히 ▷교민리셉션◁ ○…김대통령내외는 이날 하오 궁성에서 일왕내외를 예방한뒤 뉴오타니호텔로 이동,쓰루노마실에서 열린 교민리셉션에 참석. 김대통령내외는 하오 3시30분 공노명 주일대사,정해용 민단중앙본부단장,신용상민단의장,김창휘민단감찰위원장 등 민단간부들의 안내로 1천여 교민들의 뜨거운 박수와 실내악단의 「선구자」연주가 은은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리셉션장에 입장. 김대통령은 즉석연설을 통해 『오는 서울에서는 눈이 갑자기 많이 내렸는데 축복을 알리는 단설이라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왔다』면서 『도쿄에 오니 날씨가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고 소감을 피력. 김대통령은 또 『이국땅인 도쿄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니 진심으로 기쁘다』면서 『3월로 예정됐던 민단 단장선거가 나의 일본방문으로 연기됐다고들었는데 미안하지만 내 일정으로 정단장의 임기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자 좌중에 폭소. 이날 교민리셉션에는 민단간부들과 신현호 한일협력위원회위원장, 이승윤 한일협력위사무총장, 김우한 한일친선협회회장, 정석모 한일친선협회 부회장,나웅배 한일의원연맹간사장,유성환의원,도예가 「14대 심수관」씨 등 1천여명이 참석해 성황. ▷정상부인 환담◁ ○…김영삼대통령과 호소카와총리가 단독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손명순여사와 호소카와 가요코(가대자)여사는 영빈관 2층 히가시노마실에서 30여분 동안 양국의 정치개혁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주례로 환담. 손여사가 『지난해 가을 경주에서 만난뒤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자 가요코여사는 『짧은 시간이지만 일본에 계시는 동안 편안하고 유쾌하시기 바란다』고 답례.
  • 일 잔재 없애 민족자존심 찾기/옛 조선총독관저 철거의미와 약사

    ◎옛총독부청사 헐기와 같은 맥락/미나미총독 건립… 아베까지 사용 김영삼대통령이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철거토록 한데 이어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구본관도 헐도록 지시한 것은 민족자존심을 되찾는다는 결단으로 평가되고있다.즉 민족정기를 살리고 민족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며 이제 우리도 그만한 국가역량을 가졌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한을 풀자는 감정적차원이 아닌 미래를 향한 정신적 기둥을 새로이 정립하자는 의미이다. 행여 의식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잔재를 차제에 털어버리고 국제화시대에 발맞춰 이를테면 일본식관행·식민지시대의 잔영을 하루빨리 청산하자는 것이 결단의 배경으로 보인다. 물론 청와대 구본관은 지난 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초대대통령(48·8∼60·4)부터 윤보선(60·8∼62·3),박정희(63·12∼79·10),최규하(80·3∼80·8),전두환(80·8∼88·2),노태우전대통령(88·2∼90·10)까지 역대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이다. 그러나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기로 한만큼 그 건물의 부속건물이자 총독이 살았던 건물도 철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데 따른 결정이다. 특히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비가 샐정도로 상당히 낡은데다 현재 식당과 의무실을 제외하고는 빈건물로 철거비용도 많이 들지않아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일제때인 37년 10월 미나미 지로(남차낭)총독이 짓기 시작하여 39년 7월 완공되어 미나미총독을 비롯하여 고이소 구니아카(소기국소),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총독이 해방되기 전까지 살았다. 해방 직후 아베총독이 건물내부를 불태웠으나 미군정청의 하지중장이 수리해 사용했다. 48년 정부수립후 이건물은 경무대로 불리면서 이대통령이 기거했고 4·19이후 청와대로 불리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겸 관저로 사용됐다. 노대통령 때인 90년 10월에 새관저가 완공되고 91년 7월에 새본관이 완공됨으로써 구본관건물은 사실상 그역할을 마감했다. 풍수지리학자 중에는 일제가 우리민족의 기를 누르기 위해 머리격인 북한산 인수봉에는 철주를 박았고,입 부분인 근정전과 광화문사이에는 총독부청사를,목 부분에 총독관저를,심장격인 현서울시청자리에 경성부건물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일」자형의 조선총독부건물과 총독관저가 헐리고 나면 서울에는 「본」자형의 현서울시청건물및 동경역사를 본떠 만든 서울역사,조선은행으로 사용했던 현한국은행이 일제의 잔재로 남게된다.
  • 옛 총독 관저(청와대 구본관)도 철거

    ◎김대통령 지시… 새달까지 헐기로 김영삼대통령은 구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토록 조치한데 이어 조선총독관사였던 청와대 구본관을 빠른 시일내에 철거하라고 11일 박관용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청와대는 이에따라 현재 의무실과 간이식당,경호원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이건물을 9월중 철거할 예정이다. 지난 39년 7월 건립된 구본관은 미나미 지로,고이소 구니아키,아베 노부유총독이 45년까지 관저로 사용하다 해방이후에는 지난 90년 10월까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이 관저겸 집무실로 사용했었다.
  • 창씨개명뒤 버젓이 일본의 밀정노릇/서훈취소 심의대상 8인의 행적

    ◎총독부 단체에 참여… 학병지원 권유/김성주/「2·8선언」후 변절… 전국서 친일강연/서춘/친일계 신문인 「만선일보」에 몸담아/이은상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각종 훈·포장을 받았던 김성수씨등 8명에 대해 정부가 친일 여부를 정식 조사하고 있어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 모두가 부통령·국회의원등 고위공직을 지냈거나 언론계·문학계등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사회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친일혐의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전혀 아니다. 일부 학계인사와 사회단체등에서는 광복직후부터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꾸준히 그 행적을 추적해 왔다. 다만 이승만정부 수립이후 좌­우 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이승만정부가 친일여부를 가리지않고 마구 등용하는 바람에「친일파를 가려내 청산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뒷전으로 밀렸을 뿐이라고 할수있다. 따라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재평가에 나서 이들「거물」들을 조사대상에 올린 것은 뒤늦게나마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반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관련학자·단체들이 조사·공표한 이들 각자의 친일행각을 보면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씨의 경우 1940년 10월27일 미나미 당시 조선총독이 결성한 총력동맹에 이사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매일신보」「경성일보」등지에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실었으며 시국강연반에 들어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다. 이갑성씨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였으며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인물로 자유당정권에서 당의 최고위원과 국회의원을 지냈고 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상해에서 이와모토(암본)로 창씨개명한 뒤 일본의 밀정노릇을 했으며 미쓰비시사의 만주 신경출장소장,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촉탁으로 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윤치영씨는 초대내무부장관을 비롯,이후 역대정부에서 고위직을 누렸다. 윤씨는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시기로 인정받은 41년 12월20일 친일잡지「동양지광」이 주최한「미·영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석해『황국신민으로서 참전은 우리 어깨에 지워진 공정무사한 대사명』이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은상씨도 일제말 친일계 신문인「만선일보」에 재직한 사실이 있다. 이밖에 이번에 조사대상 8명에 포함된 서춘씨(매일신보 주필)는 이광수와 함께 2·8독립선언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 인물로 39년 7월 배영동지회 평의원,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낸 외에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고 승려인 이종욱씨는 총독부 지원으로 월정사 주지와 조선불교 종회의장을 지냈다. 윤익선씨는 서울 원서정 총대(현 동장)와 경성부 북부정회총대회 간사를 지냈으며 전협씨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신임을 얻어 그의 추천으로 부평군수를 지냈으며 일진회 평의장도 역임했다.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은『정부 차원에서 친일파 재조사작업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칠레:1/10년째 무역흑자… 연5%지속성장(중남미를 다시본다:8)

    ◎나윤도특파원 현지 리포트/민선정부 수립후 사회형평 공감대 형성/주택·의보·연금등 복지정책 폭넓은 지지 「중남미의 호랑이」­이는 70년대 중반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시장경제체제를 채택,82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째 무역흑자를 유지시켜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안정기조속에 연5%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뤄오고 있는 칠레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울에서 싱가포르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남북 4천3백㎞의 좁고 긴 국토를 갖고 있는 칠레는 면적은 75만6천㎦로 한반도의 3.5배에 불과하지만 안데스산맥과 태평양으로 외부와 고립돼 있으면서 사막·화산·극지등 지구상의 모든 지형은 물론 사계 또한 상존하고 있는 다양성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시장경제체제 도입 칠레가 중남미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 경제적 안정을 이룩할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아벨리우크 마나세비치 생산진흥부장관(61)은 『지난 73년 쿠데타로 집권,89년까지 16년간 통치해온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과감한 개방정책추진과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말하고 『더욱이 90년 파트리시오 에일윈 민선대통령정부 수립이후 분배및 사회평등에 대한 노력이 국민의 컨센서스를 조성,안정기조를 확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칠레는 50,60년대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이뤄왔으나 지난 19 70년 세계최초의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정권이 등장,주요산업의 국유화등 급격한 사회주의정책을 펼쳤고 이는 결국 경제파탄으로 이어졌다. 이에 반발,73년 육·해·공군과 경찰의 연합쿠데타를 주도,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폐쇄및 정치활동을 금지시킨후 군정비판에 대해서는 체포·국외추방·국내유배등 강압정책을 펼쳤다. ○외국투자 적극 유치 그러나 피노체트정권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대대적인 개방정책으로 시장경제체제를 확립시켰으며 경제안정기조를 구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가지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군사독재의 주역이었던 피노체트장군이 민선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군참모총장직을 계속 맡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이에대해 많은 칠레사람들이 『그가 비록 독재정치는 펼쳤어도 부정부패가 전혀 없는 깨끗한 정치를 했기 때문에 건재하는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민선정부의 안정을 바탕으로 국민적 합의하에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칠레정부가 세운 금년도 경제목표는 경제성장률 5%,인플레율15%,실업률 5%로 돼있다. 이를위해 적극적인 경제외교 추진으로 대외경협및 외국인투자유치를 적극 확대,미국·일본·EC등 14개국으로부터 5억2천5백만달러 규모의 유·무상국제협력자금을 공여받을 계획이다. 이같은 경제목표의 달성을 위해 카를로스 오미나미 경제부장관(42)을 중심으로한 젊은 경제팀은 지난해 관세를 15%에서 11%로 인하하고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NAFTA(북미자유무역지대) 참여에의 길을 연것을 비롯,금년2월에는 약8%의 대미환율절상을 시도하는등 강력한 정책을 펴왔다. 특히 정부의 엄격한 조세제도 운영으로 기업의 세금포탈은 불가능한 실정이며 국민들도 적극 협조,일상생활에서 영수증을 주고받는 것이 생활화돼있다.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도 영수증을 주며 택시를 타도 영수증을 발급해주는 철저한 영수증사회를 이루고 있다. 또한 공무원들의 청렴도 역시 매우 높은 편으로 경찰공무원까지 국민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정부와 국민간 신뢰를 바탕으로한 강력한 사회기강을 확립하고 있다. ○한국과의 경협 모색 현재 칠레정부의 정책중 국민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정책은 근로자들에 대한 복지정책.고용주로 하여금 피고용인에 대해 기본급의 13·5%에 해당하는 연금기금조성비와 기본급의 7%에 해당하는 의료보험료등 사회보장기금을 부담토록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를 개인집의 가정부에게까지도 적용시키는등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다.또한 무주택자의 경우 주택구입시 일정액의 무상지원도 해주고 있다. 파리대학 경제학박사인 오미나미장관은 『지속적 경제안정은 거시경제에 입각한 정부의 건전하고 엄격한 경제정책 운용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으로 가능했다』고 밝히고 현재 칠레경제의 성장에 있어 장애요인으로 ▲1차산품의존의 경제구조 ▲고부가가치상품의 수출부진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 ▲비효율적인 자원배분등을 지적했다. 오미나미장관은 또 특히 한국과의 경협방안에 대해서 『칠레는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배우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정부간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개발의 경험을 배우고 과학기술분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며 상호간의 인적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나윤도특파원 현지 리포트(중남미를 다시본다:1)

    ◎연5천% 인플레극복… 경제가 살아난다/마이너스성장 탈피… 1인소득 증가세 침체와 상실의 80년대를 거치면서 「잊혀진 대륙」으로 멀어졌던 중남미가 90년대를 희망과 기대의 시대로 변화시키며 「재도약의 대륙」으로 부상하고 있다.서울신문은 국제부 나윤도기자를 중남미 현지에 급파하여 경제악순환의 수렁에서 헤어나와 다시 일어서고 있는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 4개국의 오늘을 심층취재 보도함으로써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경제의 내일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아울러 이민역사 30년을 맞는 교포들의 활기찬 삶의 현장을 소개한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 중남미 각국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는 고위관료들은 한결같이 중남미경제의 현주소를 이같이 진단하고 있다. 이는 중남미국가들이 현재 이룩해가고 있는 가공할 인플레의 진정,경제파탄으로까지 몰고 갔던 외채부담의 경감,민영화를 통한 흑자재정 기반조성등 획기적이랄수 있는 변화에 비추어볼때 지나치게 조심스런 진단으로 볼수있다. 칠레 산티아고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라틴아메리카­카리브경제위원회(CEPAL)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의 91년도 실질경제성장률은 전년도의 마이너스성장으로부터 탈피,2.7%의 플러스성장을 기록했으며 1인당소득도 4년만에 증가세로 돌아설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미주개발은행(IDB)도 중남미경제가 91년부터 연평균1.5∼2%씩 성장,95년부터 2천년까지는 연평균5%의 성장을 보일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대해 중남미에서 10여년간 가장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해오고 있는 칠레의 아벨리우크 마나세비치 생산진흥부장관(61)은 『중남미경제의 가장 큰문제는 아직도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빈민계층을 어떻게 정상적인 경제활동분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다』면서 『어떤 경제모델하에서도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떻게 절대다수의 국민이 풍요로움을 공유하도록 하느냐의 구조적인 해결없이는 올바른 성장이라고 말할수 없다』고 강조했다. 80년대 후반 중남미 각국에서는 군사독재정부가 차례로 무너지면서 민선정부가 들어섰고 이들 신정부는 정치민주화를 통한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해왔다. 「살리나스트로이카」라고 불릴 정도로 적극적 개방과 개혁정책을 펴고있는 카를로스 살리나스대통령의 멕시코정부는 88년12월 출범이후 중남미에서 가장 활력있는 경제성장을 해오고 있다. 또한 89년7월 취임한 카를로스 메넴대통령의 아르헨티나 정부도 출범직후 연5천%에 달하는 초인플레를 극복하기 위해 「제로경제정책」으로 불리는 신경제정책을 비롯,국영기업의 민영화를 골자로한 「행정개혁법」,도밍고 카발로 경제장관의 대달러화 「무제한 태환정책」등을 실시,인플레를 잡는데 성공했다. 70년대 중반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개방 및 자유시장정책을 펴온 칠레는 90년3월 패트리시오 에일윈대통령의 민선정부가 들어선후 안정적 경제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해 80년대 중반이래 연평균 5%의 성장과 무역흑자기조를 지속해오고 있다. ◎외국투자 늘고 해외도피자금 계속 환류 군부독재를 거쳐 25년만에 탄생한 브라질의 페르난도 콜로르대통령의 민선정부 역시 90년3월 출범이후 힘겹게 경제안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지난 2년간 은행예금 동결,인플레 억제,재정적자 감축,물가및 임금동결등 경제안정화정책을 추진,인플레율을 다소 감소시키고 마이너스성장을 플러스로 전환시켰다. 이같은 중남미 각국의 적극적인 경제안정화 노력으로 최근들어 이 지역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외국투자증대 ▲도피자금환류의 증가 ▲친미화경향의 대두 ▲역내협력강화 ▲분배균등노력의 강화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첫째 외국투자의 증대는 민선정부들의 폭넓은 경제구조개편정책이 대내외에 신뢰성을 주게되면서 중남미국가들이 투자최적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도피자금환류는 80년대 모국의 경제불안으로 해외로 도피시켰던 자금들이 모국의 경제회복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환류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미주개발은행(IDB)은 현재 중남미의 해외도피재산은 1천7백억달러로 이는 이들 국가 전체외채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셋째 친미화경향은 그동안 외채문제와 다국적기업의착취등 이른바 남북문제로 미국과 다소 소원한 관계에 있던 중남미국가들이 소련방의 붕괴와 제3세계 세력의 와해등으로 다투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넷째 중남미 역내협력의 강화는 국제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따라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에 이어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우루과이 4개국이 「메르코술」(남미공동시장) 창설조약을 체결,95년 발족을 목표로 칠레등 인접국 영입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분배균등을 위한 노력은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균형분배를 위한 것으로 칠레의 경우 기업소득세를 배증시켜 사회복지재원을 조성하고 있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등도 부유세를 신설,서민층 복지대책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같은 과정에서 이들 중남미국가들이 한국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기술협력」과 「자본투자」의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브라질의 로베르토 마세로 경제기획및재무부차관(48)은 『한국의 자동차·조선·전자공업등의 분야에서 앞선 기술의 협력과 특히 하이테크분야를 중심으로한 한국자본의 많은 투자를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또 아르헨티나의 엔리케 토레 경제부투자국장(45)은 『지난 1989년 기존의 국내외투자법을 동일하게 개정,해외투자의 혁신적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과 빠른 시일내에 「상호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한국자본이 아르헨티나의 수산업·조선·전자·철강산업등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중남미국가들의 대부분 경제정책입안자들은 한국경제에 대해 80년대의 경이로운 성장을 높이 평가하며 현재의 침체상태는 과도기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칠레의 카를로스 오미나미경제부장관(42)은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성장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고 전제하고 『현재 한국경제의 어려움은 전세계수출시장의 위축에서 오는 일시적 현상이지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남미의 경제는 이처럼 상호협력을 절실히 원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경제진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지구의 반대편이라는 지리적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호이해의 부족이 더큰 이유로 볼수 있다.
  • 청와대 새 관저 준공

    ◎“대통령 일가 살림집”… 팔작지붕 전통미 살린 단층/내년 집무실 완공되면 일제의 잔재 씻는 셈/노 대통령,“옛 중앙청 이전,경복궁 복원해야” 전통 한옥형태에 청기와를 올린 새 대통령 관저가 청와대내에 마련됐다. 청와대는 25일 상오 노태우 대통령 내외,비서실 직원,공사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관저 준공식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금명간 새로 마련된 관저에 입주,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지금까지 1,2층 계단을 오르내리던 출퇴근에서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맛을 느끼게 됐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건물은 1층이 집무실이고 2층이 살림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 동쪽 약간 뒤편 계곡에 자리잡은 새 관저는 본채(2백44평),접대시설이 마련된 별채(1백50평)와 사랑채 부속건물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지면적은 1천2백60평이다. 전통 한옥형태로 4면에 추녀를 달아낸 팔작지붕(까치박공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전통미를 살린 단층인 이 관저는 얕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살림공간 분위기를 내고 있고 솟을 대문에는 「인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해 8월28일 착공,4백25일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이날 준공된 신축 관저는 총 공사비 60억원에 연인원 8만1천명과 연 2천3백대의 장비가 동원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준공테이프를 끊은 뒤 별채에서 참석자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과거 같았으면 대통령이 새 집을 짓는다면 장기집권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을지 모르나 나는 그럴 염려가 없는 사람 아니냐』고 반문한 뒤 『처음 신축 건의를 받았을 때는 임기만료 6개월 전쯤 완공하면 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라졌다』고 피력.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항간에 대통령 관저가 훌륭하게 건축되고 있는 점을 들어 앞으로 내각제를 하기는 어렵다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자 『말레이시아에 가보니 국왕과 수상이 있는데 수상은 국정의 온갖 일을 다하느라 위세를 부릴 시간도 없다고 하더라』고만 말해 청와대 관저 및 집무실(내년 7월 완공) 신축과 내각제문제는 연관이 없음을 시사. 노 대통령은 또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한국식으로 새로 짓고 경복궁도 옛 모습대로 복원하면 일제 침략의 역사로부터 나라의 위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일제 총독 부청사였던 옛 중앙청(현 국립박물관) 건물도 다른 곳으로 옳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은 1937년 3월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남차랑)가 일본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이곳에 총독 관저용으로 착공,2년 만에 완공했던 것. 독립한 지 40여년이 된 국가의 대통령이 식민통치하의 총독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를 신축하게 된 배경이라고 한 관계자는 설명.
  • 청와대 경내 대통령 관저 신축지/“천하명당” 4백년전 표석 발견

    ◎공사중 우연히 드러나 「풍수설」 화제로/화강암 암벽에 「천하제일 복지」 음각/글씨크기 가로ㆍ세로 50cm… 해서체로/정도전도 “명당” 지목… 낙관자리 「연릉 오거」 규명이 열쇠 청와대 구내 대통령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뒷산 암벽에 천하 명당자리라는 표석이 최근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표석은 수직으로 된 화강암 암벽을 깍아 가로 2m50cmㆍ세로 1m20cm의 암벽면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50cm,획의 굵기는 9cm인데 해서체로 씌어있다. 낙관자리에는 가로 세로 12cm 크기로 「연능 오거」라고 새겨져 있어 이 표석의 글을 쓴 사람이 아닌가 여겨진다. ○획 굵기는 9cm 정도 청와대측은 지난 20일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인 청명 임창순옹을 초빙,1차 감정한 결과,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3백∼4백년전인 조선조 중기쯤으로 추정되며 글씨체로 미뤄 중국 청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같다는 의견을 들었다. 「연능오거」의 인적사항이 규명되면 더 정확한 내용이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조선조때 서예대가로 오거라는 인물이 없는것 같고 연능이 아호인지 아니면 연능에 사는 오거인지도 불확실하다. 오거가 명필이 아니라면 조선초기나 중기의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는 터에 「천하제일복지」라는 선인들이 새긴 표석이 기초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무언가 길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표석이 발견된 암벽은 현 청와대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백50m 떨어진 가파른 지역인데 암벽 전면이 나무로 가려져 있는데다 이 쪽에는 길이 없어 그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작년 5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서 총독관저로 사용해온 현 청와대 건물 대신에 대통령 집무실(현 본관의 서북쪽 1백50m)과 함께 관저를 이곳에 새로 착공하면서 최근 공사를 위한 배수로를 치다가 이를 발견한 것이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북악의 언저리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때부터 궁터로 점지되었던 곳이다. 한양천도 당시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 자락에 동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한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남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이태조가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지금처럼 북악산의 정남쪽에 경복궁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한양천도 당시 풍수지리에 따른 주산(터를 등지고 있는 산) 결정과 도읍의 좌향 논의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학이 한양의 세를 보며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북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ㆍ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궁궐은 임(서북서)좌병(남쪽)향하여 백악현무,인왕백호,낙산청용으로 해야 한다』 청와대 주변 터는 한양천도 이전인 이미 고려 숙종때 지기가 쇠해가는 송도의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이궁터로 선택됐다. 지금부터 9백28년전인 숙종9년(1062)에 이궁을 지었으나 1백50년이 채 못된 고종19년(1210)에는 강화천도와 더불어 폐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 이 자리가 경복궁 후원으로 단장된 것은 세종8년(1426)이었으며 서현정ㆍ취로정ㆍ관전ㆍ충순당ㆍ융문당ㆍ융무당ㆍ경농제ㆍ연무장ㆍ과거장 등을 설치했다. 그후 국운의 흥망에 따라 성쇠를 함께해 임진왜란 이듬해(1593) 경복궁의 소실로 황폐화되었으며 고종8년(1868)에 경복궁이 재건되자 이곳 또한 과거ㆍ열무ㆍ근농의 행사 등이 치러지는 후원으로 옛 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조선왕실 유린으로 이곳도 훼손돼 융문당ㆍ융무당 할것 없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조선조때 건물도 남아있는 것은 약간 자리를 옮겨 일부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별채와 같은 20평 남짓한 침유각과 2평 가량의 오운정이 옛날의 향취를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일제 식민통치의 제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남차랑)가 착공,중일전쟁으로 한차례 공사를 중단하는 곡절을 겪으며 착공 2년반만인 1939년 9월 준공을 했다. 당시 미나미는 남산의 왜성대,용산의 사택,현 적십자병원 자리의 임시사택 등을 옮겨가며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사택 신축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의 후원으로 경복궁이 눈아래 보이는 이곳을 택했다. ○청대 서체 영향 받아 일제는 조선 주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그 전면에 총독부 청사(현 국립박물관ㆍ구 중앙청)를 지은데 이어 그 후면에 총독관저를 지어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에 있어 용맥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항설에 의하면 일제는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총독부 청사­총독관저로 이어지는 남향축이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북악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왕궁을 건설한 풍수의 맥을 압살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중에서 보면 경성부 청사건물이 「대」자형,총독부 청사가 「일」자형이고 총독관저 건물 구조가 「본」자형으로 돼있어 동대문쪽에서 서대문쪽을 바라보면서 이를 읽어보면 「대일본」으로 읽혀진다는 항담도 있다. 그러나 풍수에 밝은 술가들 사이에는 당시 일제의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징발되었던 조선인 풍수지관이 본래 「임좌병향」의 북악의 용맥과는 약간 비켜나 있는 현 위치를 잡아주어 그 건물에 기거하게 되는 총독들이 망하도록 했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수 없지만 이번에 발견된 표석이 북악의 혈(풍수에 있어 음양이 합해지고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에 해당되는 곳이라면 그럴법도 하다. 청와대 당국이 현재의 이 본관건물을 역사의 전면에서 퇴진시키고 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짓기로한 결정적인 동기도 이 건물이 지난 반민족적 역사성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독립한지 45년이 되고 전인류의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식민통치의 채찍을 휘두르던 일제 총독의 사택을 집무실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민족자존을 국정의 제1 지표로 내건 6공화국 정부의 이념에는 물론 민족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집무실의 건물은 영빈관쪽 출입문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본관 건물 서쪽 뒤편 구릉에 신축되고 있으며 한옥지붕 양식의 2층으로 총건평은 현재 본관 건물(1층 집무실ㆍ2층 대통령 살림집)의 9백평 보다 약간 적은 8백평 규모이다. 완공시기는 내년 상반기쯤으로 잡고 있어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 1년반을 이곳에서 집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저는 명당표석이 발견된 곳으로 부터 남쪽 아래로 50여m 떨어진 곳에 동향인 본채와 남향인 별채로 나뉘어 지어지고 있는데 역시 한옥 양식의 단층으로 건축되며 총건평은 8백평 가량 된다. 관저는 빠르면 금년 9월께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집무실과 관저가 모두 한국전통의 청기와 지붕형태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영빈관 건물,그리고 오는 7월쯤 완공되는 보도관(프레스 센터)건물 등이 한데 어우러져 현 청와대 경내는 우리 고유의 전통건축미로 조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측은 앞으로 집무실과 관저가 완공되면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윤보선ㆍ박정희ㆍ최규하ㆍ전두환 전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보관,전시하는 기념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길조로 받아들여” 대통령 관저의 신축장소가 명당표석이 발견된 지점과 일치된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청와대 주변지반은 대부분이 암반이어서 공사하기에 쉽게 좀 넒은 터를 찾아보니 이곳이 눈에 띄었을 뿐』이라며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설명했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긴 표석의 역사적인 고증은 앞으로 전문가들의 조사와 검토가 더 있어야 밝혀지겠지만 현 본관건물 2층에서 기거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뒤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새 관저 신축을 계기로 대통령의 임기가 평화롭게 끝나고 물러나서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전직대통령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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