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미군정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AI 인프라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부채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접전지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수사중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92
  • ‘뿔난 검찰’, 집단행동 나서며 여론전 총력…‘개혁 자구책’도 만지작

    ‘뿔난 검찰’, 집단행동 나서며 여론전 총력…‘개혁 자구책’도 만지작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추진에 반발하는 검찰의 기류가 심상찮게 흘러가고 있다. 11일에는 전국 검사장 긴급회의가 열리는 등 집단행동은 계속 확산하는 양상이다. 민주당에서 12일 정책의총에서 검수완박 법안 처리를 당론으로 결정할 경우 여당과 검찰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일선에선 반발성 사의표명 등 ‘검란’ 가능성도 제기된다. 대검찰청은 11일 오전 전국 검사장 회의를 열어 검수완박에 대한 검사장들의 의견을 모은다. 지방의 한 검사장은 10일 “화상회의로 참석해도 된다지만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에 지방 검사장도 대체로 직접 오프라인 회의에 참석한 뒤 일선에 복귀할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국 최대 규모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을 비롯해 제주지검 등 일선 지검에서도 속속 회의가 열릴 전망이다. 지난 8일에는 이미 인천·수원·의정부·대구·광주·울산지검에서 간부 또는 평검사 회의를 통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8일 일부 부장검사끼리 모여 검수완박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검사들은 내부 게시판에 릴레이 성토 글도 계속 올리고 있다. 일각에선 검찰의 입장을 법무부 장관을 통해 국회에 전달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조만간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돌아가게 될 박범계 장관이 굳이 검찰 의견을 대변할 가능성은 낮다는 시각이 많다.박 장관은 지난 8일 법무부 검찰국으로부터 “급격한 형사사법제도의 변화를 눈앞에 두고 매우 혼란스럽다”는 취지의 자체 회의 결과를 전달받았지만 아직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검찰 내에선 여당 주도의 검수완박을 막기 위해서는 검찰이 ‘개혁 자구책’을 내놔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검찰 출신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다음 달 취임을 앞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여소야대’ 국면에서 검찰이 172석의 민주당에 ‘강대강’으로 맞서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시각에서다. 지난 8일 고검장 회의에서도 ‘스스로 겸허히 되돌아보고 검찰의 공정성·중립성을 확보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만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비난 발언까지 나오는 등 과격한 여론도 감지된다.이복현 서울북부지검 형사2부장은 이날 검찰 지휘부를 미군정 시대 친일파의 태세 전환에 비유하며 “‘나카무라 스미스’씨도 우리의 직장동료이니 잘 지낼 수 있으면 원만히 지내고 싶지만 과거 창씨개명 시절 행적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사과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법조계에서는 검수완박이 사법시스템을 무너뜨릴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공익단체 착한법만드는사람들은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은 거악과 권력 남용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년여 전 단행된 검경수사권 조정 등 검찰개혁을 평가한 뒤 국민 동의를 얻어야 추가 개혁이 가능한 것”이라며 “이렇게 사활을 거는 것은 정권교체 이후 민주당 인사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한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이젠 ‘民의 땅’… 상춘재·녹지원은 포토존, 내부 구경은 다음 기회에

    이젠 ‘民의 땅’… 상춘재·녹지원은 포토존, 내부 구경은 다음 기회에

    분수 지나 춘추관, 왼쪽엔 여민관 녹지원엔 170년 한국산 반송 감상관저 뒤뜰선 ‘석조여래좌상’ 구경 대통령 침실 등 건물은 추후 개방 ‘완전 개방’ 북악산 남측 등산 추천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 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 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 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 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5월 10일 청와대 문 열리면 신분증·예약·검문 없이 구경 [INTO]

    앞으로 한 달 뒤면 청와대 안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다음달 10일 청와대 문이 국민에게 열리는 것이다. 미리 예약하거나 검문검색을 거칠 필요 없이 동네 공원처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918년 전 청와대 터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그곳은 왕조, 일제, 미군정, 국가수반이 자리한 관(官)의 땅이었다. 앞으로는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민(民)의 땅이 된다. 정부는 6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위한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을 의결했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홈페이지에 구체적인 계획을 적시했다. 그 계획에 따라 상상으로 청와대를 미리 방문해 본다.5월 10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두 개 정류소를 지나 효자동에 내렸다. 청와대 밖 분수를 지나쳐 춘추관의 춘추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남녀노소, 외국인 모두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 가운데 정문과 연풍문, 시화문을 지나 춘추문에 도착했다. 춘추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여민관이다. 여민1~3관까지 세 개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민 1관은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 집무실·비서실장실·정무수석실, 2관은 경제수석실·민정수석실, 3관은 홍보수석실 등이 있었다. 다만 청와대의 모든 건물 내부는 당분간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전날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비서진이 사용했기에 자료와 설비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민관 뒤쪽으로 녹지원과 상춘재가 보인다. 넓은 잔디밭에서 아름드리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손짓한다. 170년 된 한국산 반송(盤松)도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청와대는 ‘청와대 3대 나무’를 선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반송이다. 소반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대통령이 주요국 정상 등 특별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용하는 상춘재를 직접 보니 실감이 안 난다. 상춘재는 1983년 완공된 한옥 건물로,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했다.상춘재와 녹지원을 지나 10분 남짓 걸었을까. 역대 대통령들이 숙소로 썼던 관저에 도착했다. 한옥 건물 안에 있는 대통령의 침실, 주방, 식당 등을 무척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관저 뒤뜰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경주에 있던 보물이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였던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93~1994년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등 참사가 줄을 이었는데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 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공개된 바 있다. 이어 본관에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91년 완공된 건물로 왕궁건축기법을 사용했다. 15만장의 푸른 기와가 얹힌 팔작지붕 덕분에 웅장해 보인다. 100㎡(약 32.5평)에 달하는 대통령 집무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세종실, 연회장 용도의 인왕실 등은 추후 건물 내부가 공개되면 관람할 수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어가면 영빈관이 보인다. 1978년 지어진 현대식 건물로 18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그중 전면 네 개의 돌기둥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채에서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청와대 관람을 끝냈다. 이대로 청와대를 떠나기 아쉬운 시민들이 청와대 북쪽으로 이어진 북악산 남측면을 등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백악정을 거쳐 숙정문, 서울성곽길을 통해 창의문 안내소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고려시대인 1104년 남경(서울)의 이궁(수도 밖 별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청와대 터는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됐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자리에 경무대를 뒀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장 기능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총독관사로 이용했고, 그 건물은 1945년 해 방 후엔 미군정 사령관 관사로 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게 된 것이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 역사의 시작이다. 이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말로를 겪었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권력자들에게 선망하면서도 기피하는 곳이 됐다. 그래서 몇몇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지만, 경호와 대안 부재 등 한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은 아예 처음부터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관철하게 됐다. 이전 비용과 안보 공백, 시민 불편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여론은 현재로서는 썩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윤 당선인 쪽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경부고속도로도 처음엔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호평받았다며 막상 청와대가 개방되면 여론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반면 청와대는 단순히 권력자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상징물과 같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 견해가 맞는지는 결국 시간이 알려주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918년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바꿔 버리는 대한민국, 말 그대로 ‘다이내믹 코리아’다.
  • [서울광장] 식민-분단-독도 미군정 ‘블랙홀’/임병선 논설위원

    [서울광장] 식민-분단-독도 미군정 ‘블랙홀’/임병선 논설위원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맡길 일이 아닌 일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근대사 가운데 미군정(1945년 9월 9일~1948년 8월 15일)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아주 미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 2월부터 우리 근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공부 모임에서 귀동냥을 하게 되면서다. 부끄럽기만 했다. 식민 지배를 당한 것도 치욕스럽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일제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답습한 미군정의 통치를 굴욕으로만 여겨서 그런 것 아닐까 짐작하기도 했다. 민족 전체가 3년에 가까운 긴 시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70년이 흘러서도 깊이 있게 돌아보지 못한 것 아닌가? 소련과의 분할 점령에 따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 오키나와 지역을 점령한 미국 태평양육군총본부(AFPAC)와 최상위 통치기구였던 연합군최고사령부(GHQ SCAP)의 이중 통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자는 게 공부 모임의 발족 이유였다. 미군정이 왜 일본은 기존 통치기구를 온존시키며 간접 통치한 반면 한반도 남부와 오키나와는 직접 통치했는가, 맥아더 원수와 하지 중장은 어떻게 대립했는가, 독도는 어떻게 인계됐는가 등등 참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시기 연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송병권 상지대 교수는 “식민지에서 분단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연속과 단절, 분단과 냉전으로 동아시아가 재편되는 과정, 현재의 한미일 관계를 낳은 맥락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고 갈파했다. 기자가 놀란 것은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농후해지던 1947년 미군정이 일종의 ‘한국화’ 시도로 남조선 과도정부, 과도입법의원 등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토로하는 연구자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사실 같은데 몰랐다니 다소 충격적이었다. 미군정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연구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무관심하거나 무지해서도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GHQ SCAP 자료 가운데 한반도 관련 자료 비중이 너무 작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자료와 비교해야만 입체적이고 유기적이며 통일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문제는 두 나라의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제대로 분류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군정 자료가 온전히 소장돼 있는 곳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도쿄대학 종합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출근해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밑도 끝도 없이 자료들을 뒤져야 한다. 논문 편수에 압박을 받는 대학 교수들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있을지 자신하지 못해 주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교수들은 개인이나 연구집단에 맡길 일이 아니라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월 첫 모임도, 3월 두 번째 모임에서도 결론은 같았다. ‘국민들과 사회의 관심을 끌어야 하며, 정부가 예산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두 교수는 그렇게만 되면 워싱턴과 도쿄에 거처를 마련해 자료들을 뒤지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달부터 7월까지 특정 대학 발표자의 발제 이후 참여자와 자유롭게 의견을 조율하는 콜로키움(https://peacemaker.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331500209§ion=peace_seminar_outside) 강좌를 개설해 관심을 유도하기로도 했다. 공부 모임에 함께하고 있는 임한택(전 외교부 조약국장) 외국어대 교수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일본 영토의 범위를 정의한 지령 ‘SCAPIN 677’에 독도가 포함된 과정에 대한 실증 자료 확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블랙홀이란 강력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시공간 영역이다. 근대사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선 안 되겠다. 독도 영유권 주장의 당위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미군정의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정부와 사회가 귀 기울였으면 한다.
  • 쌀에도 특허 있다?… 벼 신품종 가려내는 대한민국 하나뿐인 ‘米人’[공무원 어디까지 아니]

    쌀에도 특허 있다?… 벼 신품종 가려내는 대한민국 하나뿐인 ‘米人’[공무원 어디까지 아니]

    한민족 반만년을 함께해 온 솔푸드라면 뭐니 뭐니 해도 쌀이다. 삼시 세끼 쌀밥을 먹는 세상이야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던 태평성대인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소중하고 친숙한 쌀이지만 우리가 지금 먹는 쌀은 사실 조상들이 먹던 쌀과 품종이 다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쌀은 해마다 새 품종으로 바뀌고 있다. 품종 개량이 쉴 새 없이 이어질 뿐 아니라 나름 유행도 분명하다. 이자현 국립종자원 농업연구사는 ‘식물에 관한 특허’ 중에서도 쌀 신품종에 특허권을 부여하는 대한민국에서 한 명뿐인 공무원이다. 인사혁신처의 도움을 받아 지난 21일 경북 김천 국립종자원에서 이 연구사를 만났다. ‘식물 특허권’이란 국립종자원 전국 10곳 지원 설립감귤·화훼 등 지역 특성따라 담당벼 신품종 65개 항목 일일이 검사구별·균일·안정성 충족돼야 인정 -식물에 특허를 준다는 것 자체가 일반인에겐 생소한 개념인데. “품종이란 식물학에서 통용되는 최저분류 단위의 식물군을 말한다. 육성자(품종을 육성하거나 이를 발견해 개발한 사람)가 신품종 출원서를 제출하면 서류심사를 거쳐 임시보호권을 부여한 뒤 조건을 따진다. 재배심사를 통해 기존 품종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는지(구별성), 신품종의 본질적 특성이 충분히 균일한지(균일성), 품종의 본질적 특성이 두 세대를 거친 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지(안정성)를 측정해 모든 조건을 충족하면 신품종으로 인정하고 특허를 부여한다. 지금 담당하는 건 벼 종류다. 구별성과 균일성, 안정성을 모두 충족한다고 판단되면 새 품종으로 등록한다. 특허권자가 되면 본인 품종에 대해 다른 사람이 임의로 번식, 재배·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권리가 생긴다.” ‘종자주권’ 왜 중요한가 라일락, 한국 원산지인데 美 개량수수꽃다리 이름 잊힌 채 역수입日 샤인머스캣, 한국선 출원 안 해현재 로열티 하나 없이 국내 재배 -국립종자원은 어떤 곳인가. “국립종자원은 종자생명산업 발전을 통한 국부 창출과 미래 농업을 선도하는 종자전문서비스기관을 목표로 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소속기관이다. 크게 식량 작물 가운데 보급종 생산·보급과 품종 보호, 육성자 권리 보호를 핵심 업무로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현재 세계 8위 품종 보호 전문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부 보급종 생산과 공급을 위해 1974년 발족한 국립종자공급소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7년 국립종자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2014년에는 경북 김천혁신도시로 본원을 이관했다. 현재 전북 익산·정읍시, 전남 함평군·영암군, 경남 밀양시 등 전국 10곳에 지원을 두고 있다. 본원과 지원마다 주로 심사하는 식물이 다르다. 가령 감귤이나 한라봉 같은 아열대 과일은 제주지원에서, 화훼류와 콩 종류는 경남지원에서 담당한다.”-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현재 출원된 벼 신품종이 40종가량 된다. 국립종자원에 있는 논에서 직접 재배를 하면서 검사한다. 초엽부터 줄기 길이·잎몸의 길이와 너비, 각도·이삭의 색깔과 수, 길이·볍씨의 무게와 색깔, 폭 길이 등등 65개 항목을 일일이 검사해야 한다. 벼 심사를 더 잘하기 위해 이앙기와 트랙터 등 농기계 운전법도 배우고 있다.” -식물 특허에도 시대상이 있을까. “예전엔 메벼 위주였는데 차츰 찰벼가 많아졌고, 요즘은 흑미 종류가 대세가 됐다. 특히 요즘은 당뇨 환자에게 특화된 쌀, 쌀눈이 커지거나 필수 아미노산(라이신) 함량이 늘어난 쌀, 갈색이나 빨간색 등 색깔이 다양한 쌀처럼 기능성 쌀 출원이 꾸준히 늘어나는 게 눈에 띈다. 현재 농촌진흥청에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안남미도 개발하고 있는데 몇 년 안에 일반인 식탁에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화훼류 특허 심사도 담당했는데. “식량 작물은 주로 공공기관에서, 채소는 주로 민간기업에서 출원한다. 화훼류는 개인 출원자가 많다. 농장을 운영하거나 취미로 하는 분들도 있다는 게 특징이다. 경남지원에서 일할 때 5년가량 카네이션을 담당했다. 물론 카네이션도 유행이 있다. 예전엔 빨간색만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턴 색깔도 다양해지고 여러 색이 섞인 신품종이 계속 나오고 있다. 꽃받침 색깔, 꽃잎 모양, 꽃잎에 물결 모양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 꽃잎 너비와 지름, 마디 수 밀도를 밀리미터 단위까지 실측하고 관찰한다. 심사를 할 때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일련번호를 부여하기 때문에 시중에 나온 카네이션을 보면 번호만 기억이 날 뿐 품종 이름은 전혀 모른다.”‘농업연구사’ 어떻게 됐나 부친 농업교사·모친은 꽃집 운영자연스럽게 농학 연구자에 관심화훼류 출원 계기로 종자원 지원 -흔치 않은 길을 선택한 계기는. “아버지는 농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고등학교 농업 교사를 하셨다. 어머니는 꽃집을 20년 넘게 했다. 자연스럽게 농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화훼류(알스트로메리아) 신품종을 국립종자원에 출원했는데, 출원에 필요한 서류 절차를 맡으면서 국립종자원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됐다. 국립종자원에서 일을 배우는 데 연구원 때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예전보다 종자주권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 종자주권이 왜 중요한 건가. “샤인머스캣 사례를 들고 싶다. 일본에서 신품종 포도인 샤인머스캣을 개발해 등록을 했는데 한국에는 출원을 하지 않았다. 6년이 지나 버리니 법적으로 한국에선 누구나 로열티 한 푼 없이 샤인머스캣을 재배할 수 있게 돼 버렸다. 게다가 한국에서 재배한 샤인머스캣을 출원 등록이 안 된 중국이나 베트남에 수출할 수도 있다. 일본에선 큰 논란이 됐다고 들었는데, 불만이 없을 순 없지만 식물 특허 관련 국제규범상 한국에 항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 라일락이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나. “맞다. 라일락 원산지가 한국이고 ‘수수꽃다리’라는 이름도 있다는 걸 얘기해 주면 많은 이가 깜짝 놀란다. 미군정 시절 서울에서 채취해 간 수수꽃다리 종자를 미국에서 개량해 판매하면서 정작 우리는 수수꽃다리라는 이름도 잊어버린 채 역수입을 해야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민간 육종가나 기관들이 노력한 덕분에 국산 신품종으로 외국에서 로열티를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장미 신품종을 수출하는 경기도농업기술원이 대표적이다. 금 1㎏보다 파프리카 종자 하나가 더 비싸다는 얘기도 있다. 외국에서 품종을 수입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신품종을 육성하고 활성화하는 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하다.”
  • “ 30만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제주 4·3 학살자 박진경 추도비에 철창 조형물

    제주 시민단체들이 4·3 당시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친 학살 주범자 박진경 대령 추도비에 단죄의 의미를 담은 조형물을 설치했다. 11일 4·3기념사업위원회에 따르면 4·3 관련 단체와 도내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전날 오후 제주시 한울공원 인근 도로변에 있는 박진경 추도비에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라는 제목의 감옥 형태 조형물을 설치했다. 설치에 참여한 단체들은 “박진경은 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소위 출신에 미군정 지시로 4·3 학살을 집행했던 자다”며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추모비를 철창에 가둔다”고 밝혔다. 또 “역사의 죄인을 추모하는 일은 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조형물 설치를 통해 박진경을 단죄하고 불의로 굴절된 역사를 청산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박진경은 1948년 5월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도민에 대한 무차별 진압을 감행했다.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결국 부임 한 달여만인 1948년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박진경 추도비는 1952년 당시 도내 기관장 등이 관덕정 경찰국 청사 내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제주시 충혼묘지로 옮겨졌다가 최근 제주국립호국원이 개원하면서 한울공원 인근 도로변으로 이전됐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내일을 향해 쏴라/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내일을 향해 쏴라/미술평론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클레는 삼십대 중반이었으나 군에 징집됐다. 막사 한구석에서 그린 몇 점 안 되는 그림에는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전쟁이 끝나고 클레는 바우하우스 교수진에 합류했다.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클레는 마음껏 예술적 실험에 몰두했다. ‘꿈의 도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파랑, 녹색, 연보라색 도형이 리드미컬하게 겹쳐진 그림에서 희망찬 기분이 느껴진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선거는 평범한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하는 수단이다. 선거는 근대 사회와 함께 등장했지만, 일정한 나이 이상의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의 역사는 길지 않다. 초기에는 재산 유무, 교육 정도 등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했다. 사람들은 투표권을 얻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 영국 노동자들은 19세기 중반 투표권을 얻기 위해 차티스트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1918년에야 투표권을 얻었다. 프랑스는 1848년 처음 대통령을 선출했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납세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해 노동자를 선거에서 배제했다. 1871년 제3공화국이 들어선 뒤에야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늦게 선거권을 얻었다. 20세기 초 서구 여성들은 자신들의 불평등한 처지를 깨닫고 투표권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각국은 20세기 중반을 전후해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한국은 1948년 미군정의 법령에 따라 성인남녀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그해 5월 10일에 치른 제헌국회 선거에서 역사상 처음 투표를 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사람의 95.5%가 투표에 참여했다. 새 나라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뜨거웠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언론과 논객들은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둥, 차악 대결이라는 둥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너무나 범상한 권리가 돼 버린 한 표의 무게는 깃털만큼 가볍다. 그래도 나는 투표에 희망을 걸겠다. 우리가 던지는 한 표, 한 표가 모여서 혐오와 분노, 복수심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미래로 뻗어 나가는 조국, 사람답게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향해 쏘아 올리는 축포가 됐으면 좋겠다.
  •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 4·3 생존자 아픔을 보듬다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 4·3 생존자 아픔을 보듬다

    “동생은 1948년에 아버지가 끌려가서 행방불명된 뒤 다음 해 1월 눈이 엄청 올 때 민오름 굴속에서 태어났어. 마을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이지. 아기가 막 우니까 순찰대가 들이닥쳐 ‘남편 어디 곱는냐(숨겼느냐)’ 하면서 어머니를 주정 공장으로 끌고 가 마구 때렸어. 동생의 등이 꼽추가 돼서… 다음다음 해 여름에 걸어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어.” 제주시 중앙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2층 한 귀퉁이에는 4·3트라우마센터가 있다. 제주 4·3 국가폭력 생존 희생자와 유족 등을 대상으로 정신적·신체적 치유와 재활을 돕는 곳이다. 4·3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론 어린 남동생까지 잃은 강춘희(77·고향 오라동 연미마을)씨도 이곳에서 예술치유를 받고 있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4·3트라우마센터가 생존 희생자와 유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16일 밝혔다. 2020년 4월 말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3 생존 희생자 중 후유 장애인 98명, 수형인 34명, 1954년 이전 출생한 4·3유족 1세대 1만 7369명 등이 트라우마 치유 대상자로 나타났다. 이들 중 39.1%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그해 5월 6일 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후 지금까지 센터를 이용한 사람은 1만 7086명이나 된다. 예술치유 프로그램 이용자 1742명, 운동치유 이용자 6336명, 심리상담(전화·심층·전문의 상담 포함) 798명 등이다.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맺힌 가슴 풀고 사세요) 같은 4·3이야기 마당을 비롯해 음악, 미술, 원예, 문학, 명상, 숲치유 등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해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있다. 지난해 운영평가 결과 만족도는 98.47점으로 매우 높았다. 코로나19로 잠시 쉬었던 치유 프로그램은 이달 말 재개된다. 강은정 정신건강간호사는 “따뜻한 시 한 구절, 흙 한 줌 만지며 유족들이 치유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는 지난해 12월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올해 센터가 ‘4·3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승격되길 고대하고 있다. 김승배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등록자 증가로 시범사업 규모로는 시설 이용자 수용이 한계에 이르렀다”며 “고령의 고위험군 트라우마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원활한 방문 서비스를 위해 국립 트라우마센터 설립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제주지방법원은 제주4·3특별법 전면 개정 이후 첫 특별재심을 개시했다. 미군정 재판 피해자도 재심에 포함되면서 재심 청구가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4·3트라우마센터, 생존 희생자들의 아픔을 보듬다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4·3트라우마센터, 생존 희생자들의 아픔을 보듬다

    “동생은 1948년에 아버지가 끌려가서 행방불명된 뒤 다음해 1월 눈이 엄청 올 때 민오름 굴속에서 태어났어. 마을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이지. 아기가 막 우니까 순찰대가 들이닥쳐 남편 어디 곱?는냐(숨겼느냐)’ 하면서 어머니를 주정 공장으로 끌고가 마구 때렸어. 동생의 등이 꼽추가 되어서…다음다음해 여름에 걸어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어” 제주시 중앙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2층 한 귀퉁이에는 4·3트라우마센터가 있다. 제주 4·3 국가폭력 생존 희생자와 유족 등을 대상으로 정신적·신체적 치유와 재활를 돕는 곳이다. 4·3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론 어린 남동생까지 잃은 강춘희(77·고향 오라동 연미마을)씨도 이곳에서 예술치유를 받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4·3트라우마센터가 생존 희생자와 유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16일 밝혔다. 2020년 4월 말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3 생존 희생자 중 후유 장애인 98명, 수형인 34명, 1954년 이전 출생한 4·3유족 1세대 1만 7369명 등이 트라우마 치유 대상자로 나타났다. 이들 중 39.1%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그해 5월 6일 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후 지금까지 센터를 이용한 사람은 1만 7086명이나 된다. 예술치유 프로그램 이용자 1742명, 운동치유 이용자 6336명, 심리상담(전화·심층·전문의 상담 포함) 798명 등이다. ‘맺힌 가슴 풀엉 살게 마씀(맺힌 가슴 풀고 사세요)’ 같은 4·3이야기 마당을 비롯해 음악, 미술, 원예, 문학, 명상, 숲치유 등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해 마음 속 깊이 묻어둔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있다. 지난해 운영평가 결과 만족도는 98.47점으로 매우 높았다. 코로나19로 잠시 쉬었던 치유프로그램은 이달말 재개된다. 강은정 정신건강간호사는 “따뜻한 시 한 구절, 흙 한줌 만지며 유족들이 치유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는 지난해 12월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올해 센터가 ‘4·3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승격되길 고대하고 있다. 김승배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등록자 증가로 시범사업 규모로는 시설 이용자 수용이 한계에 이르렀다”며 “고령의 고위험군 트라우마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원활한 방문서비스를 위해 국립 트라우마센터 설립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제주지방법원은 제주4·3특별법 전면 개정 이후 첫 특별재심을 개시했다. 미군정 재판 피해자도 재심에 포함되면서 재심 청구가 잇따를 전망이다.
  • “대통령 개인의 신념이 정책에 영향“…강경 발언 쏟아진 전국승려대회

    “대통령 개인의 신념이 정책에 영향“…강경 발언 쏟아진 전국승려대회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으로 터져나온 불교계의 정부를 향한 ‘종교편향’ 불만은 매우 거셌다. 21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강하게 비판하는 발언이 쏟아졌고, 참석 스님들은 직접 사과를 하고 싶다는 뜻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이 조계사 대웅전 마당과 주차장 등 경내를 가득 채운 가운데 단상에 오른 스님들은 강경한 비판을 토해냈다. 조계사 주지 지현스님은 고불문(부처님께 아뢰는 글)에서“일제강점기 이후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불교와 전통문화의 영향력을 위축시키고자 노골적인 종교편향과 차별정책을 펼쳤고, 오늘날까지 종교편향과 불교왜곡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며 불교계의 불만의 뿌리가 깊다는 점을 알렸다. 이후 경과보고에서는 지난해 10월 5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문화재관람료를 ‘통행세’, 관람료 징수 사찰을 ‘봉이 김선달’로 지칭한 발언을 시작으로 승려대회의 도화선이 최근 사례들이 열거됐다. 정 의원이 불교계 반발에도 같은 해 10월 21일 종합감사에서 “극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근처에 있다고 영화관람료를 받으면 안 된다. 기사 댓글 대부분이 정청래 말이 맞다는 의견이고 이것이 국민 여론이라 생각한다”며 “잘못도 없고 사과할 수도 없다”고 발언한 점도 꼬집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가 캐럴 활성화 캠페인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도 주요 종교편향 사례로 지적했다.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봉행사에서 “(정부편향·불교왜곡) 중심에 정부가 있다.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도 불공정했으며 결과도 정의롭지 못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사 발언을 인용하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 승가공동체의 결집은 불교계만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며 전통문화를 수호하기 위함”이라면서 “편협하고 차별적인 사회를 향한 외침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파사현정의 몸부림”이라고 강조했다. 조계종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인 덕문스님은 문화재관람료 논란에 대해 언급하며 “이제는 여당의 국회의원이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사찰과 스님들을 조롱하는 사태에 이르렀다”며 “통행세를 받는 산적 취급을 하고 봉이 김선달에 비유해 사기꾼 집단으로 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 도각스님은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취임 축복 미사를 드리고 해외순방길에는 빠짐없이 성당을 방문하며 국가원수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알현’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우리 민족의 평화를 교황에 부탁하는 등 특정 종교에 치우친 행보를 해왔다”면서 “대통령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공공의 영역에 투영돼 정부와 공공기관 사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도각 스님은 그러면서 경기 광주시의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포함한 천주교 성지순례길 조성사업 발표, 전국 국공립 합창단에서 여는 기독교 음악 중심의 공연 등을 예로 들었다.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캐럴 캠페인에 대해선 “충격적 소식”이라고도 했다.‘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낭독한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정문스님도 정 청래 의원 발언으로 인한 논란의 경과를 거론한 뒤 “이렇게 불교계가 들끓는 상황에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다시 발생했다”며 캐럴 활성화 캠페인을 비판했다. 이어 “기독교인 국회의원의 불교 폄하와 천주교인 장관의 종교편향 정책은 이제 종도들 모두가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승려대회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승려대회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와 정부·여당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포함한 근본적 대책 수립, 또 전통문화유산의 온전한 보존과 계승을 위한 대책 수립 등을 요구했다. 정부와 민주당이 승려대회에서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참석 스님들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영상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곧 야유가 터져 나왔고 결국 영상 재생을 중단했다. 단상에 올라 사과 발언을 하려던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곧바로 돌아서 나왔다. 정 의원도 이날 조계사를 찾았지만 입장도 하지 못하고 국회로 발을 돌렸다.
  • 세월호 사고 이후 해체·재창설… 경찰 임무, 바다의 모든 것 책임

    해양경찰청 홈페이지에는 이 기관이 1962년 5월 내무부 소속 해양경찰대로 발족해 1991년 5월 31일 제정·공포된 경찰법에 의거, 같은 해 8월 1일 해양경찰청으로 개편됐다고 소개돼 있다. ●1946년 日어선 단속 위해 창설 그러나 조선해양경비대란 엄연한 조직이 미군 군정 때인 1946년 창설됐던 것으로 보인다. 손원일 해군 제독이 불법 조업을 일삼는 일본 어선을 단속해야 한다며 미군정에 건의했더니 미국과 같은 조직을 만들라고 해서 ‘Korean Coast Guard’로 창설했다가 1948년 민정 이양과 함께 해군이 되면서 해경 조직이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그 뒤 1953년에 우리 해군이 일본의 불법 조업 어선을 나포하니 일본 측이 ‘민간인을 왜 군인들이 나포하느냐’고 항의했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리가 있다며, 민간인을 다루니 경찰 조직을 만들라고 지시해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해경의 한 고위 간부는 “우연히 미국 해안경비대에 지원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교재 ‘코스트 가드맨스 매뉴얼’을 구해 살폈더니 앞 대목에 ‘1946년에 11~12명이 직접 한국으로 가 (한국 해안경비대) 창설을 도왔다는 대목이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 간부는 “해군과 해경 어느 쪽이 먼저 창설됐느냐를 놓고 따지기보다 한 뿌리 조직임을 인정하고 함께 연혁을 정확히 규명하는 작업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임무 과소평가… 잦은 부처 변경 해경은 막중한 임무를 떠맡고 있는데도 국민, 국회 등이 바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정부 안에서조차 제 위상을 평가받지 못해 여러 부처의 산하 기관으로 자주 바뀌었다. 1991년 8월 해양경찰청으로 개편된 뒤 1996년 해양수산부 외청으로 승격됐고, 다시 2005년 7월 차관급 외청으로 승격됐다. 2014년 세월호 구조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해체의 아픔을 겪었다. 담당 업무는 경찰청과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이관됐으나, 2017년 7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국민안전처가 폐지되면서 해양경비안전본부의 업무를 승계, 재창설됐다. 2020년 3월에야 해양경찰청법에 근거해 제17대 해경청장이 취임했다. ●집행력 확보에 좋은 ‘경찰’ 신분 워낙 소속 기관이 자주 바뀌는 데다 경찰청의 단순 하부 조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한 현직 지방청장은 “근본적으로 ‘제복 조직’은 어떤 신분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따져 소속 기관을 정하게 마련”이라며 “미국은 군인 신분, 중국과 일본은 공안 개념을 부여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센카쿠 분쟁이 전쟁으로 변해 총을 들고 임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군인 신분으로 바꿨다. 우리는 집행력 확보에 가장 좋은 것이 경찰 신분이라고 판단한 결과”라고 밝혔다. 그는 나아가 “육지에서는 여러 행정기관과의 협업이 용이한 반면 바다에서는 해양경찰이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만큼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는데 단순히 경찰 임무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현장 인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경에 취업하는데 이 점을 간과하곤 한다”고 말했다.
  • 19년만에 정부 차원 4·3사건 추가 진상조사 나선다

    19년만에 정부 차원 4·3사건 추가 진상조사 나선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에 따라 19년 만에 추가 진상조사가 이뤄지며 보상금은 하반기부터 지급될 것으로 보인다. 4·3중앙위원회 추가진상조사분과위원회(위원장 주진오)는 지난 6일 4·3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4·3추가 진상조사에 대한 기본계획안을 의결했다고 10일 밝혔다. 4·3사건 추가진상조사는 앞으로 3년간 시행되는데 ▲지역별 피해실태 ▲행방불명 피해실태 ▲4·3시기 미국·미군정의 역할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활동 ▲재일제주인 피해실태 ▲연좌제 피해실태 조사 등 6대 주요 주제가 선정됐다. 특히 유족들은 연좌제 피해를 당할까봐 제주4·3 당시 부모, 배우자 등 가족의 희생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앞으로 내실있고 공정한 조사를 당부하며, 이미 고령인 4·3희생자 및 유족들에 대한 증언 조사, 정부·기관 소장 자료 발굴, 미국 현지 조사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등 희생자들의 보상금은 1인당 9000만원이며, 보상청구권은 현행 민법상 상속순위에 따라 부여하기로 했다. 유족으로 결정된 사실상의 배우자도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제사봉행과 무덤 관리를 하면서 이미 유족으로 인정된 4촌 이내 방계혈족이 사망한 경우, 그 자녀(직계비속)에 대한 청구권도 인정된다. 추가진상조사 분과위원회 주진오 위원장은 “앞으로도 더욱 충실한 추가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위원회 차원에서 적극 지원할 것”을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 확정된 추가진상조사 계획은 이달 말로 예정되어 있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김부겸 국무총리)’에 회부돼 최종 의결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제주4·3평화재단은 관련 기관 기록 수집·사료 조사·증언 채록 등을 위해 재단 조사연구실을 중심으로 추가진상조사단을 꾸리고 전문 인력을 추가 확충할 예정이다.
  • [오늘의 서울 톡]

    강서 비대면 아동 구강보건교육 지원 강서구는 구강보건교육 영상과 교육용 물품을 활용한 비대면 치아건강 꾸러미 사업을 추진한다. 아동들에게 ‘칫솔질 모래시계 만들기 세트’를 제공해 3분 칫솔질 습관을 잘 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세트엔 교사들을 위한 안내 자료도 함께 들어간다. 이와함께 구는 교육에 활용할 수 있도록 칫솔질 인형, 동화책, 치과놀이 가운 등을 교육기관에 대여한다. 교육에 참여하려는 기관은 오는 11월 2일까지 신청서를 작성해 강서구보건소 의약과에 내면 된다. 용산 ‘위수감옥 역사’ 30일 심포지엄 용산구가 오는 30일 오전 10시~오후 6시 용산문화원 3층 대강당에서 ‘용산위수감옥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연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참석 인원을 제한하고 용산문화원 유튜브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한다. 위수감옥은 군령을 어긴 일본 군인 등을 가두기 위해 용산기지 내 건설했던 군 시설이다. 발표 주제는 ▲일제강점기 용산위수감옥의 역사 ▲미군정기 대한민청사건과 용산위수감옥 ▲한국전쟁 전후 용산위수감옥의 역사 등 5개다. 종로 ‘스마트팜 사업’ 중앙고 등과 협약 종로구가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도심형 스마트팜 사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중앙고등학교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구는 스마트팜 설치를, 해당 학교들은 시설 유지·보수·관리 및 프로그램 운영을 맡는다. ‘스마트팜’은 ICT를 농업에 접목시켜 작물의 생육 환경을 관리하고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농장이다. 구는 다음달까지 130여개 개체를 식재할 수 있는 스마트 제어 식물재배기 설치를 마무리한다. 중랑 ‘봉제강사 교육’ 새달 6일까지 중랑구가 오는 6일까지 면목 봉제 강사양성교육을 운영한다. 참가자는 20명으로 모두 패션봉제업체에서 5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우수 봉제인들이다. 교육은 패션산업 및 이미지메이킹 전문가가 초빙돼 면목 패션봉제특구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강의하며 지난 23일 첫 강의가 열렸다. 오는 6일까지 3주간에 걸쳐 ▲패션산업의 이해 ▲기초기술지도 교수법 ▲이미지 메이킹 기법 등 실제 강사양성에 필요한 내용을 위주로 진행한다. 강동 건축행정평가 서울 자치구 중 1위 강동구가 국토교통부 주관 ‘2021년 대한민국 건축행정평가’에서 서울시 자치구 중 유일하게 우수기관(장관상)으로 선정됐다. 강동구는 ▲건축행정절차 합리성 분야 ▲건축관련 안전관리 분야 ▲건축행정 개선 노력 분야 ▲유지관리 적절성 분야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 건축안전센터 설립·운영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1위를 기록했다. 구는 건축행정 건실화를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과단위로 운영하는 ‘건축안전센터’를 설치했다.
  •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1894~1960) 박사는 1919년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 때 미국 유학 중이었다” 충남 천안시는 지난달 8일 병천면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 ‘그날의 함성’ 조형물 중 조병옥 박사 동상(청동)을 철거했다고 26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 박사는 아우내 만세와 무관하다”며 철거를 요구한 때문이다. 대신 시는 5000만원을 들여 그 자리에 인물을 특정할 수 없는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그날의 함성 조형물은 2009년 10월 ‘3·1 운동 90주년’을 맞아 모 작가가 횃불을 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1919년 4월 1일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당시 시위군중 10명을 동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 박사를 닮은 조형물은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작가가 유관순 열사 뒤에 만세운동을 한 일반 주민의 동상을 만들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조 박사 부친의 조형물을 넣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몰라 조 박사 사진을 보고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동상에 조병옥 박사라고 표기하지 않았지만 관람객들이 조 박사로 알아 시민단체에서 줄기차게 철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1918년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25년 귀국했다.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는 2년 전부터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빨갱이란 이념의 잣대를 씌워 제주도를 피로 억압한 조병옥을 독립만세 기념공원에 동상으로 건립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천안시에 철거를 요구했다. 제주 4.3 사건 때 조 박사는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있었다. 이들은 이날 천안시청에서 조 박사 동상 철거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조병옥은 ‘공’이 있지만 ‘과’도 분명하기 때문에 동상 교체 과정을 기록한 표지판을 설치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추가로 요구했다. 이에대해 시 관계자는 “동상 교체 과정을 담은 표지판을 세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 [씨줄날줄] 1945년 8월 16일/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1945년 8월 16일/임병선 논설위원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풀려난 1945년 8월 15일 그날 광복의 감격을 오롯이 누리지 못했다. 고(故) 함석헌 선생의 말마따나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 이날 아침 경성 시내에 ‘낮 12시 천황의 중대 발표가 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일왕의 연설을 라디오로 들을 경성 시민은 많지 않았다. 일왕이 한 연설은 황족어라 웬만한 일본 지식인도 알아듣기 어려웠고, 일왕은 항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무자비한 공격 때문에 많은 일본인이 희생돼 어쩔 수 없이 저들의 조치(포츠담 선언)를 정부가 받아들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달라”는 취지였다. 패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제 야스쿠니신사를 찾아 공물을 바친 아베 신조 전 총리 등 극우 진영의 논리와 판박이임은 물론이다. 조선총독부는 일왕의 연설을 공표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과 약탈이 벌어질까 두려워서였다. 일본의 항복을 5일 전쯤 미리 알았던 사람들도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총독부 2인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은 오전 6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이끄는 여운형을 만나 전국 형무소 등에 수감된 정치범 등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여운형에게 일본인 보호를 약속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정치범들이 환영 인파와 어울려 만세를 부른 것이 8월 16일 점심 무렵이었다. 교과서에 소개돼 우리가 늘 광복을 맞은 날의 감격이라고 기억하는 사진이다. 서울 계동 여운형의 집에 군중이 몰려와 민족의 앞날을 어떻게 그리는지 연설해 달라고 했다. 휘문중(현 현대 사옥)으로 옮겨 연설도 했다. 그 무렵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온다는 뜬소문이 퍼져 10만 군중이 경성역(현 서울역)에 운집해 만세를 부르게 됐다. 건준 세력은 이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경성방송국(현 KBS)을 접수했다. 우리가 진정 광복의 기쁨을 만끽한 날은 8월 16일이었다. 그 기쁨도 잠시, 임시정부가 미처 환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종전에 맞닥뜨린 우리 민족은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다음달 2일 미국과 일본이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에 조인한 뒤 같은 달 9일 조선총독의 식민 통치권을 미군사령관에게 넘겨주는 문서가 체결됐다. 총독부에 일장기가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다. 건준은 와해됐고 이승만 정부가 1948년 광복절에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올해 일요일에 맞이한 광복절부터 대체공휴일법이 적용돼 8월 16일은 대체공휴일이 됐다. 자력으로 맞이하지 못한 해방, 좌우로 분열된 지도자의 미흡한 준비, 미군정에 거부된 임시정부 등을 돌아보는 날이 됐기를.
  • 1946년의 기록...백범 김구 연설 등 온라인에서 본다

    1946년의 기록...백범 김구 연설 등 온라인에서 본다

    광복 76주년을 기념해 해방 2년차인 1946년 1년간의 기록을 담은 뉴스영화가 온라인에 처음 공개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12일부터 기획전 ‘1946년을 담다. 뉴스 필름으로 보는 해방 2년 차의 기록’을 통해 광복 이후 기쁨과 혼란이 공존했던 당시 모습을 담은 뉴스영화 8편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www.kmdb.or.kr)에 선보인다. 이 작품은 미국 공보부가 제작한 뉴스영화 ‘시보’ 4편과 조선 영화인들이 제작한 뉴스영화 ‘해방 뉴-쓰’ 4편이다. 일부 내용이 제한적으로 공개된 적은 있지만, VOD로 온라인에 작품 전체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보’는 해방 직후 영화 제작과 수입, 배급을 총괄했던 미군정 공보부가 뉴스영화 시리즈로 1946년 1월부터 1947년 말까지 총 27호로 제작한 것으로 이후 ‘조선전진보’, ‘대한전진보’, ‘대한뉴스’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이번에 공개되는 4편에는 미국 육군장관 로버트 P. 패터슨 방한과 미소 1차 정식회담, 비상국민회의 설립,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 등 1946년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이 담겼다. 영상 속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였던 총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초대 군정 장관, 소련 측 수석대표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 중장 등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해방 뉴-쓰’는 광복 다음 날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해방의 감격을 필름에 담았던 조선영화사 소속 영화인들이 제작했다. 앞서 일본과 미국, 북한에서 상영된 바 있으며, 이번에 소개되는 영상은 재일본조선인연맹의 산하에 있었던 민중영화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에 소개된 버전으로 추정된다. 영상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연설하는 8·15 1주년 기념식, 한글 반포 500주년 기념행사, 김규식 박사의 좌우합작 회담 결과 발표 등의 굵직한 역사적 기록이 포함됐다. 전국 특산품 전람회, 공예품과 농작법 전시회, 도시 대항 야구대회 및 조미 대항 야구대회 등 일반 국민이 참여한 문화·체육 행사도 담겼다. 이 밖에도 ‘시보’와 ‘해방 뉴-쓰’에는 친일파 사업가 김계조의 서울지방법원 재판 풍경, 개성역에서 펼쳐진 남북 우편물 교환, 수해 및 화재 방지 캠페인, 군대의 제식훈련과 사열 모습, 정부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정부 요인들에 대한 의전 등 다양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미군정이 청사로 사용한 조선총독부 건물과 미소 공동위원회 같은 큰 회의가 있을 때 주요 회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덕수궁의 석조전, 동화백화점, 광화문 등 당시 서울의 모습과 사람들의 옷차림, 착용 액세서리 등을 엿볼 수 있다.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고,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김구 ‘백범일지’) “어머니!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열악하다 못해 인격을 말살하는 감옥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의 수단이라고 할 만큼 혹독했다.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유관순, 이육사, 윤동주, 김동삼, 오동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런 감옥 생활을 18년 5개월이나 견뎌낸 독립운동가가 정이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사람은 일왕 암살을 기도한 박열로 22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일본 감옥에서 복역했다. 정이형은 더 악명 높은 국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최장기 복역수다.“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 될까.”(선생의 회고록 중에서)●평북 의주 출신… 장성에서 ‘3·1운동’ 시위 선생은 1897년 9월 16일(음력) 평북 의주 월화면에서 태어났다. 김평식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는 복벽주의(復主義·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친형 정원익도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가였다. 형과 스승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선생은 1919년 1월 독립운동가 김계순, 서상연을 만나 의기투합해 전남 장성으로 내려갔다. 이주 직후 3·1운동이 발발하고 장성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섰다. 친형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장성 북하면에 4년제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 선생은 체포돼 취조를 받았고 다행히 풀려났지만, 장성에서 더 활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조직인 연통제에 참여해 의주 군감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11월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일경에 체포된 형 원익이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자 그 길로 떠난 것이다.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선생은 관전현에 있던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오동진, 김창환을 만났다. 1923년 12월 대한통의부가 군사 체제로 개편되면서 선생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의 부관을 거쳐 이듬해 가을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이 됐다. 첫 임무는 부하 10여명과 봉천성 환인현에서 반(反)통의부 분자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반목 속에 일어난 통합 운동으로 대한통의부는 그해 11월 10여개 독립운동 단체와 더불어 군정기관인 정의부로 확대 개편됐고 선생도 참여했다. ●조선인 밀정·친일파 처단 등 임무 수행 정의부는 정부 형태를 갖추고 서간도 한인 동포들을 통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이청천이 군사위원장, 만주의 광복군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이 사령장을 맡아 군사조직을 지휘했다. 선생과 양세봉·문학빈 등 주로 평안도 출신이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25년 3월 18일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 등과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일제 경찰서 습격 계획을 세웠다. 그날 자정,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선생은 부하 6명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새벽 5시쯤. 목표로 삼은 벽동경찰서 여해경찰관출장소에 접근했다. 안에는 일경 5명이 있었다. 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니시카와 류키치와 임무, 신현택 등 순사 3명은 절명했고 일본인 순사 1명은 크게 다쳤다. 선생은 대원들과 출장소 건물을 불태우고 총기류 등 군수품을 노획했다. 1926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부하 병사 20여명과 지린성 한인 동포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 활동도 하면서 조선인 밀정과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은 독립군을 정탐하는 밀정 처단을 일제와 싸우는 일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쓰야협정’(조선 총독과 중국 측이 독립군 탄압을 목적으로 맺은 협정)으로 군사 활동이 더 어려워지자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복벽주의도 수용하면서 진보주의를 표방한 좌우합작 정당인 고려혁명당이다. “이념 없는 혁명, 이데올로기 없는 독립투쟁은 오히려 무자비한 반동밖에는 초래하지 못한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기치를 내세웠다. 천도교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도 동참해 1926년 4월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출범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10여곳에 세포조직을 만들며 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 이동락과 당원들이 일제에 체포돼 당의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선생은 하얼빈으로 이동해 조직 재건을 꾀했지만 1927년 3월 11일 동지 6명과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1차 공판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의 공포의 빛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1928년 4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마포·대전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시형 아들 최동희 동참해 세 키워나가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풍속(汚風俗)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1941년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에 다니던 맏딸 문경씨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딸의 앞날을 걱정하고 올바른 품행을 당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문경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선생과 같이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규창(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과 결혼했다. 광복 후 선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1947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률조례 제정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남다른 의지를 갖고 활동했다. 일제와의 투쟁과 친일파 엄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었다.●맏딸 정문경씨 독립운동가 이규창과 결혼 “애국자들은 (조선인) 순사들에 의해 죽음에 가까운 고문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남한 과도정부는 그런 왜놈 앞잡이와 매국노 편을 드는 듯합니다.” 선생은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친일파 중용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 조례를 폐기하며 무시했다.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도 고려혁명당 때부터 지녀온 신념 때문이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난 선생은 감시 속에 서울 장교동 집에서 유폐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56년 12월 10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서울광장] 김원웅 광복회장께/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김원웅 광복회장께/김상연 논설위원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미국은 일본 열도를, 소련은 만주를 각각 우선적으로 차지(점령)하고 싶어 했다. 한반도는 그다음 순위였다. 특히 미국은 소련이 일본 점령에 숟가락을 얹는 시나리오를 극도로 경계하며 대응 전략까지 수립했을 정도다. 반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1943년 12월 카이로회담 이전에 이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국 공동의 신탁통치를 구상했다.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반도가 미국에 그다지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미 전쟁성 민정국은 1945년 7월 6일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이익이 크지 않으므로 소수의 미군을 사용해 연합국에 의한 국제 신탁통치에 참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작성했다. 반면 부동항 확보 등 영토적 욕심이 컸던 소련은 한반도에 친(親)소련 정권을 세워 공산화한다는 계산 아래 치밀하게 움직였다. 1944년 당시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대사가 “소련의 최대 목적은 만주와 조선, 대마도, 쿠릴열도를 지배하에 두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을 정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달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이라고 표방했고,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밝혔다”며 미국을 비판한 발언은 위험하다. 단편적 역사적 사실을 들어 전체적인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발언에서 점령군은 침략군의 뉘앙스를 풍긴다. 또 소련이 야욕을 감춘 채 겉으로 해방군이라고 밝혔다고 해서 호평하는 것은 나쁜 사람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소련의 참전은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은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 정부 비밀문서 등을 통해 이미 확인됐고, 학계에서도 논쟁이 끝난 사안이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이 한국인을 ‘개무시’했다고 한 광복회의 비판도 지나치다. 지금 눈높이로 보면 고압적이지만, 해방 직후의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당시 미군은 일본과 필리핀에서의 전후 처리 때문에 종전 후 거의 한 달이 돼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 틈에 좌익세력이 이미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미군정으로서는 공산화를 경계해 단호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김 회장은 역대 광복회장 중 가장 직설적으로 친일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지나치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비판을 비판하고 싶다. 광복회장이 친일을 비판하지 않으면 누가 비판해야 하는가.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회 곳곳의 힘있는 자리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로 비판할 수 있는 건 보통의 용기로는 힘들다. 다만 반일 주장이 종북(從北)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친일 비판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이념 공세의 빌미를 준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해 논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지사의 발언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 틀린 게 없다. 다만 점령군이란 표현이 비판적 문장에 들어가면 침략군의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그냥 ‘미군정’이라고 표현했다면 완벽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개무시’라는 말은 지나치지만 해방 전후 미국이 우리를 무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으로 입국해 일본 총독부의 항복을 받은 존 하지 중장은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은 고양이”라고 폄훼했다. 미국이 그런 마인드였으니 한반도에 크게 애정이 없었고 편의상 38선을 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에 너무 집착해 미국을 탓하는 것은 일견 구차하다.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지 못한 책임을 면제하고 강대국에 기대려는 습성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종전(해방) 후 일본에 머물던 맥아더는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해 이런 연설을 한다. 읽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인위적인 장벽이 여러분의 국토를 양분하고 있다. 이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며, 반드시 제거될 것이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국가의 자유스러운 인간으로서 통일하는 것은 누구로부터도 저지돼서는 안 된다. 한국 국민은 명예를 존중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만큼 분열을 일삼는 외래의 사상에 굴복해 그 신성한 대의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준석 “미 점령군? 이재명, 분열로 이득보려는 얄팍한 술수”

    이준석 “미 점령군? 이재명, 분열로 이득보려는 얄팍한 술수”

    “정부 수립 폄하하는 분열 정치 정체성”이재명측 “해방기 미 ‘점령’ 맞다, 발언 왜곡”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5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미 점령군’ 발언 논란을 두고 “국민 분열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보고자 하는 매우 얄팍한 술수”라면서 “친일 논란을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를 폄훼하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이날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지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해 (미 점령군과) 친일 세력의 합작이라고 단정을 지은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 지사는 지난 1일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했다”고 발언했다. 이 대표는 이 지사 행보를 두고 “이 지사는 2017년 (대선에) 출마할 때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는 참배할 수 없다며 분열의 정치를 본인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당선 이후 정당을 대표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현충원에서 예를 갖췄다. 이것은 2015년 문재인 대표의 당선 이후로 내려오는 민주당의 문화인 것으로 안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이 대표가) 이번에는 유사한 논란을 의식한 것인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지 않기 위해 아예 모든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지 않는 황당한 판단을 했다”면서 “민주당은 분열의 길을 미래로 삼을 것인지 갈수록 궁금해진다”고 말했다. 앞서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도 이 지사를 겨냥해 “대한민국의 출발을 부정하는 역사 인식”이라고 비판했다.이재명 측 “한국정부 수립 전 미국이 日무장해제 후 통제했으니 ‘점령’ 맞다” 이에 대해 이 지사의 대선후보 캠프 대변인단은 발언을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대변인단은 “해당 발언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방공간에서 발생했던 일을 말한 것”이라면서 “승전국인 미국은 일제를 무장해제하고 그 지배영역을 군사적으로 통제했으므로 ‘점령’이 맞는 표현이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고증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점령군 주한미군을 몰아낼 것이냐는 황당무계한 마타도어마저 나온다”면서 “주한미군은 정통성 있는 합법 정부인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군대다. 일본의 항복에 의해 주둔한 미군정의 군대와는 명백히 다르다”고 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