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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富대물림 늘어난다

    상속·증여세가 급증하는 등 부(富)를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주식시장의 대주주들은 주가가 낮을 때 집중적으로 주식을 물려주는 등 이전 비용을 줄이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21일 재정경제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증여세 1조 841억원, 상속세 7341억원 등 모두 1조 8182억원의 상속·증여세가 걷힐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3년전인 2002년의 상속·증여세 8561억원의 갑절이 넘는 수치다. 상속·증여세는 2001년 9484억원에서 이듬해 8561억원으로 줄어들었으나 2003년 1조 3150억원,2004년 1조 7082억원, 올해 1조 8182억원 등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내년에는 2조 1983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이 기간에 세율 변동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산가액의 상승, 부의 이전 증가로 풀이된다. 한편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최대주주들의 주식 증여(상속 포함) 금액은 2001년 2072억원,2002년 4485억원,2003년 1674억원,2004년 3972억원, 올 상반기 717억원 등으로 나타났다. 증여액은 증시가 상승곡선을 그린 2003년에 큰 폭으로 감소했다.반면 지난해에는 조정 국면에서 급증세로 돌아섰고, 상승세를 보인 올 상반기엔 다시 급감했다. 주가가 낮으면 증여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셈이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英 “학교폭력 학생부모에 벌금”

    영국에서 반 친구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한 학생의 부모에 대해 최고 1000파운드(약 178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영국에서 교내 폭력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교육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다음주 ‘학교폭력 추방주간’에 앞서 이같은 내용을 백서에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19일(현지시간)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집단 괴롭힘은 동기가 무엇이든 영국 학교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이 명령한 양육 지시에 응하지 않는 학부모에게 최고 1000파운드의 벌금을 물림으로써 학교는 학부모에게 교내 폭력에 대한 무책임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백서에는 교사에게 (학생들의) 모든 잘못된 행동에 대해 확고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줌으로써 교사의 권위를 강화할 것”이라며 교사들에게 필요시 온당한 물리력을 사용해 학생들을 제지할 권한을 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런던 AFP 연합뉴스
  • [파산자의 희망찾기] 21세에 신불자… ‘파산 대물림’

    [파산자의 희망찾기] 21세에 신불자… ‘파산 대물림’

    파산을 선고받더라도 면책이 안 되면 삶은 지옥이 된다. 고스란히 빚이 남은 이들에게 ‘빈곤 세습’은 자녀 세대의 파산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1998년 6월 파산한 윤만호(표·가명·47·서울 독산동)씨. 같은 해 12월 면책이 기각됐다. 국내 개인파산 초기만해도 법원은 엄격한 면책 요건을 적용했다. 보증금 20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딸과 생활하는 윤씨는 그 후 7년째 파산자라는 낙인만 찍힌 채 1830만원의 빚을 떠안고 있다. 딸 은영(가명·24)씨는 21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윤씨가 파산을 신청했을 때 채무자를 구제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파산 신청→면책 기각→파산 대물림’ 은영씨 역시 채무자다.1800만원의 카드빚은 중졸의 그녀에게 큰 고통이다. 배드뱅크에 매달 10만 1000원씩 8년 동안 갚기로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파산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18세. 은영씨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유방암을 앓던 어머니(45)의 치료비와 생활비도 그녀의 부담이었다. 택시운전을 했던 윤씨는 150만원의 수입을 병원비에 썼다. 윤씨의 아내는 지난 4월 가출한 뒤 소식을 끊었다. 윤씨마저 허리 디스크로 자리에 눕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버지의 면책이 기각되면서 소녀 가장이 된 은영씨. 아버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다 카드빚이 커졌다. 은영씨는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카드 회사의 추심은 심해져 갔고 추심을 피해 윤씨 부녀는 무려 33차례나 이사를 했다. 윤씨 부녀에게 빚은 이미 대물림되고 있다. 그 대물림의 끝은 또다시 파산일지도 모른다. ●일부면책 그 ‘두번의 파산’ 파산을 했지만 채무의 일정액을 정해진 기간 동안 갚아야 하는 일부면책자도 빚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빚을 다 갚고도 복권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두번의 파산’절차를 밟아야 한다. 경남 거창에 사는 한순애(가명·49·여)씨.2003년 12월 파산한 한씨는 이듬해 6월 일부면책을 받았다. 카드 빚이 6000만원이나 됐던 한씨는 채무의 40%에 해당하는 2400만원을 갚아야 했다. 한씨는 창원지방법원에 항고했지만 2005년 6월 채무의 20%인 1200만원을 갚으라는 결정을 받았다. 2000년 3월 결혼정보회사를 시작했다가 적자만 보던 남편은 2004년 초 사업을 한다며 중국으로 떠난 뒤 생활비는 단 한푼도 보내오지 않았다. 한씨는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카드빚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씨는 “법원에서는 2년 안에 남은 채무를 모두 갚으라고 했지만 지금도 빚내서 살아가는 처지라 빚 갚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복권 됐지만 “평생 숨어살고 싶다” 법원의 일부면책으로 남은 채무를 모두 갚고 파산만큼이나 복잡한 복권 절차를 밟는 김홍수(가명·35·고교 수학강사)씨.2002년 5월 파산한 김씨는 일부면책 결정을 받았다. 채무의 10%인 1600만원을 3년 안에 모두 갚았지만 빚 갚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씨의 채권기관은 김씨가 파산하자 채권을 모두 팔아넘겼다. 김씨는 20곳에 가까운 은행과 카드 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채권이 팔려 나간 곳을 하나씩 확인했다. 김씨는 지난 9월에야 남은 빚을 모두 갚았다. 파산만큼이나 복잡한 서류를 꾸며 법원에 복권 신청을 했다. 복권이 결정되면 그의 호적지신원증명서에 기재된 파산 기록은 삭제된다. 김씨는 파산과 일부면책, 복권 과정을 거치면서 평생 제도권 밖에서 숨어살겠다고 결심했다. 결혼도 사실상 포기했다. 그는 “파산을 했던 지난 시간을 아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면서 “괴로움과 고통, 지긋지긋한 채무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말했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나란히 보증을 서는 ‘어깨보증´, 채무자가 잠적하면 보증인을 주채무자로 바꾸는 ‘엎어치기´ 등 농촌 사회에 퍼져 있는 편법적인 채무변제 방식이 연쇄파산의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파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파산에 이어 연대보증으로 얽히고설킨 농촌의 줄파산이 심각한 수위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농민들은 개인회생제도를 농촌 현실에 맞지 않아 꺼린다. 파산전문 박용석 변호사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카드빚이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 사람과 비교해 땅과 집을 담보로 잡힌 농민들이 많다는 점이다.1억원 농지에 근저당이 8000만원 설정돼 있다면 현재 개인회생제도에서는 이 8000만원을 빚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회생제도는 담보채권을 구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소득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번 돈 중에 최저생계비를 뺀 만큼 갚아나가는 개인회생제도는 급여제가 많은 도시민과 달리 농민의 소득수준을 산출해 내기에 적절치 않다. 이런 점 때문에 파산을 택하는 게 맞지만, 농촌에서의 파산은 줄파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구조에 놓인 일종의 뇌관인 셈이어서 이 또한 선택이 쉽지 않다. ●대부분 땅등 담보대출… 구제대상 안돼 전라북도 남원 인근의 한 마을에서 6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경영하는 구재진(가명·42)씨. 구씨는 현재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그의 빚은 2억 9000만원. 구씨는 지난 5년 동안 대출금의 만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보증인을 데리고 농협을 찾았다. 같은 마을 사람인 농협 직원은 그때마다 정책자금·가계대출·일반대출 등의 명목으로 500만∼2000만원까지 돈을 빌려줬고 이 돈은 곧바로 만기일이 돌아온 대출금을 갚느라 다시 농협으로 들어갔다. 구씨가 5년 동안 농협에서 받은 대출은 15차례. 대출을 위해 세운 보증인만 모두 6명이다. 동네 어른 3명, 마을 친구 2명, 친형까지 모두 구씨의 보증인이다. ‘보증인 돌려막기’방법으로 5년을 버텨 온 구씨는 지난 5월 6촌 형의 부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구씨는 지난해 6촌 형의 땅에 7000만원을 대출받아 비닐하우스를 세웠다.6촌 형은 부도 후 잠적했고 구씨의 비닐하우스는 경매로 넘어갔다. 그 뒤 농협에서는 더 이상 대출을 해주지 않고 있다. 매달 200만원 가까운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되자 구씨의 선택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씨에게 보증을 선 지인 3명은 지난해 농수산신용보증기금으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친형과 친구 2명은 그의 보증인이다. 구씨의 빚은 하우스를 짓기 위해 1998년 농협에서 3000만원을 대출받으면서 시작됐다.2001년 100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하우스가 주저앉자 다시 대출을 받았다.2002년 11월 전기 누전으로 하우스에 불이 나자 보증인을 세워 대출을 받았다. 구씨는 “내가 파산하면 같은 농사를 짓는 보증인들도 줄줄이 파산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일봉(가명·44)씨는 ‘어깨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2000년 함께 농민회 활동을 한 친구가 세운 미곡종합처리장의 보증을 섰다. 그러나 친구의 사업은 1년 만에 부도가 났고 이씨뿐만 아니라 ‘어깨보증’을 선 2명 모두 재산이 가압류됐다. 이씨의 전 재산은 7200여평 규모의 논과 밭이다. 이씨는 1995년 농업기반공사로부터 논과 밭을 매입한 비용 1억원 가운데 절반만 갚은 상태였다. 가압류는 청천벽력이었다.10년 동안 갚아 온 5000만원보다 당장 농사 지을 땅을 잃은 건 큰 충격이었다. 지난 9월 이씨의 땅은 경매로 처분됐다. 이제 빚을 갚기 위한 대출마저 불가능해졌다. 이씨의 현재 빚은 1억 7000만원.2000년 이후 태풍과 폭설, 폭우 피해가 날 때마다 이씨는 친구 2명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농협과 신협, 축협 등에서 수십차례 대출받았다. 이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2명에게도 맞보증을 서준 상태다. ●보증인이 주채무자로…엎어치기 파산 ‘어깨보증’을 선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되는 ‘엎어치기’도 농촌 줄파산의 원인이다. 전북 순창에서 개인택시를 모는 정용석(가명·46)씨. 그는 7년전 보증을 선 친형이 잠적하면서 형의 빚을 끌어안게 됐다. 형은 순창에서 젖소를 키우기 위해 농협에서 98년 7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때 정씨와 형의 친구 2명이 보증인이 됐다. 그러나 젖소 농장의 적자를 견디다 못한 형은 잠적했다. 정씨는 가압류를 피하기 위해 형의 채무를 자신 명의로 돌려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다. 농협 직원도 “압류를 당하면 금융거래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 있다.”면서 “형을 대신해 정씨가 주채무자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정씨는 꾸준히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지만 오히려 빚은 8000만원으로 늘었다. 정씨는 “택시 운전으로는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의 뒷바라지마저 힘들다.”면서 “아이들에게 빚이 대물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안동환·남원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월드이슈-프랑스 소요사태 확산] 소요 진원지 클리시수부아를 가다

    [월드이슈-프랑스 소요사태 확산] 소요 진원지 클리시수부아를 가다

    파리 교외 저소득층 지역에서 지난달 27일 이래 계속되고 있는 소요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소요사태가 독일, 벨기에 등 이민자가 많은 인근 유럽 지역으로까지 번질 조짐마저 보인다. 이번 사태는 주로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이 몰려 사는 대도시 교외 저소득층 지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새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청소년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검문을 피하던 소년들의 죽음과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우범지역 범죄에 대한 초강경 대응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뿌리깊은 소외의식이 극단적 방식의 분노로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 안목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방화가 차량 뿐 아니라 학교, 탁아소, 체육관, 상업시설 등으로 확대되고 인명 피해마저 발생하면서 저소득층 지역 주민들조차도 “이제 폭력은 그만”을 외치며 하루빨리 일상의 평정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클리시수부아 함혜리특파원| 7일 오후 3시(현지시간) 파리 북동부 교외에 있는 올네수부아의 부아욤 고등학교 앞 광장.40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흑인, 혹은 북아프리카 계열의 유색인들이다. 아직 학교가 끝날 시간이 아닌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도 몇몇 눈에 띈다. 청소년들의 야간 소요사태로 유리가 깨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다. 학교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전화가 와 모든 학생들이 대피했다는 것이다. 이 여학생은 “우리 학교뿐 아니라 근처의 3개 학교가 폭발물 위협을 받았다.”며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내지 않는 한 소요사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단의 대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최소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감전사 사고에 대해 공개사과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사르코지(내무장관)는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막 도착한 버스에 뛰어 올랐다. 올네수부아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클리시수부아. 지난달 27일 경찰의 검문을 피하던 10대 소년 2명이 감전사하면서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소요사태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밤마다 차별과 소외에 대한 무슬림 청소년들의 분노와 방화로 점철됐던 것과 달리 이곳의 오후 풍경은 평화스러웠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장을 보러가는 무슬림 여성, 길 모퉁이에 삼삼오오 몰려있는 흑인 청소년들…. 대부분이 흑인이거나 아랍인들이다. 클리시수부아의 주민 2만 8000여명 중 이방인은 70%가 넘는다. 파리의 고색창연한 주거건물들과는 달리 노후한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어 한눈에도 슬럼가임을 알 수 있다. 아기를 안고 가는 한 주민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20여년 전 터키에서 이민 왔다는 칸(35·전기공)은 “청소년들의 폭력은 물론 나쁘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정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의 50% 정도가 실업자라고 소개한 칸은 “부가 세습되는 것처럼 가난도 대를 물린다. 그들이 현재 상황에서 탈피하도록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조금 벗어나자 왼쪽으로 거의 불에 탄 채 흉물처럼 남아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6일 새벽 5시쯤 방화로 불에 탄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이다.1997년 준공된 이곳은 바로 옆에 있는 루이즈 미셸 중학교 학생들이 체육시간을 보내고 어린이와 학생, 시민들이 태권도, 유도 등 여가시간을 이용해 체육활동을 하는 장소였다. 루이즈 미셸 중학교에 다닌다는 사디(12)는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왜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체육관을 불태웠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분별없는 폭력에 분노보다는 차라리 슬픔이 앞선다.”고 말했다. 사디의 학급은 모두 23명. 이 중 순수한 프랑스인은 단 한명이라고 했다. 이날 저녁 5시 30분 클리시수부아 시청 앞에서는 자녀들을 대동한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모여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 화재사건과 지난달 27일 이후 끊이지 않는 일련의 폭력사태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클리시수부아 출신의 육상선수 이름을 딴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은 우리들의 자랑거리였고, 청소년들이 유일하게 체육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소였다.”고 토로한 뒤 25년이 걸려 건설된 체육관을 불과 몇분만에 잿덩이로 변하게 만든 방화범들에게 분노를 나타냈다. 주민 포리셰는 “30년째 이곳에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 다른 지역에서도 학교와 탁아소 등 공공시설물에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는데 이번 사태가 하루빨리 진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이 불에 탄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포함,200여명에 이르는 태권도 동호회 회원들과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학부모들이다. 등에 ‘태권도’라는 한글이 선명하게 박힌 흰색도복을 입은 아들 야쿱(4)의 손을 잡고 시청 앞에 나온 베니나는 “우리 아이가 9월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이제 어디에 가서 태권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허탈해했다. 이민 가정의 청소년들과 클리시수부아 시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하나시 목데드(28)는 “이곳 청소년들의 삶은 깊은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열악한 주거환경, 학교생활 실패, 가족과의 갈등, 실업문제는 이곳 청소년들을 끝없는 분노로 치닫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들은 분명 법을 어기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젊은이들이 사회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lotus@seoul.co.kr 유럽 각국은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있는 무슬림 청소년들의 폭력사태가 남 얘기 같지가 않다.9·11 테러 이후 유럽에서 무슬림과 비(非)무슬림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무슬림의 불만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리 사태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벨기에와 독일 등 일부 주변국에서 유사 사건이 발생하자 관련국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달 영국에서는 북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이주민들간에 유혈충돌이 발생, 인명피해를 낳았다. 앞서 지난 7월 7일에는 런던 지하철과 버스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52명이 숨지고 700여명이 다쳤다. 용의자로 현장에서 즉사한 영국 국적의 파키스탄계 4명이 지목됐다. 2004년 11월 2일에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보수 성향의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가 모로코계 이민 노동자 2세인 부예리에 의해 살해됐다. 같은 해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역에서 열차 연쇄 폭발로 191명이 숨지고 1800여명이 다쳤다.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유럽 땅에서 무슬림과 관련된 공격이 잇따르면서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그에 비례해 무슬림들의 소외감과 반발 역시 커져만 가고 있다. 현재 유럽에 사는 무슬림 인구는 1500만∼2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유럽 인구의 4∼5%다. 높은 출산율과 이주 인구의 꾸준한 증가로 오는 2025년에는 그 수가 두 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북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의 유럽 이민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2차대전 이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번 소요사태의 중심층은 생활고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이민 1세대가 아닌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2,3세대. 스스로 ‘유럽인’이라 여기며 성장한 이들은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부터 뿌리 깊은 차별대우에 직면하면서 ‘2등 유럽 시민’이라는 냉엄한 현실에 맞닥뜨린다. 주류사회 편입 실패와 가난의 대물림, 사회적 편견, 문화적 소외 등으로 유럽 무슬림들의 인내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9·11 테러 이후 잇단 테러에 대한 대책으로 이민 제한책을 선택했던 유럽 각국은 뒤늦게 다문화통합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그런 점에서 5년 이상만 거주하면 국적을 주고, 언어를 배워 현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스웨덴식 이민지원책이 관심을 끌고 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프랑스 소요사태 일지 ▲10월27일 파리 북동쪽 클리시수부아에서 경찰 피해 달아나던 북아프리카계 소년 2명 감전사. 분노한 청년들 수백명 차량 23대 불태우고 경찰과 투석전. ▲10월28일 클리시수부아에서 청년 수백명 경찰과 충돌. 일부 경찰 향해 사격. ▲10월29일 주민 500명 침묵시위, 야간에 폭력사태 재발. ▲10월30일 경찰 최루탄이 이슬람사원에 발사돼 무슬림 분노 증폭 ▲10월31일 폭력사태 인근 교외지역 확산. ▲11월2일 드 빌팽 총리와 사르코지 내무장관 해외 방문 일정 취소. 파리 주변의 22개 소도시로 소요 확산. ▲11월3∼4일 디종, 마르세유, 루앙 등 전국으로 소요사태 확산 ▲11월5일 파리 중심가서 방화 사건 발생 ▲11월6일 시라크 대통령, 폭력행위 엄벌 천명 ▲11월7일 파리 교외서 첫 사망자 발생. 베를린·브뤼셀서 모방 방화 사건 발생 ▲11월8일 정부, 지역 도지사 야간 통행금지령 발동권 승인
  • 2세들 ‘성인아이 증후군’ 고통

    남편의 알코올중독으로 10여년 전 이혼한 김모(56)씨.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남편에서 비롯된 질곡은 여전히 그를 옭아맨다. 큰 아들(31)은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둘째 아들(28)은 매일 밤을 게임에 빠져 지샌다. 셋째 아들은 성격이 극도로 예민해 집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이 아들 3형제에게 정신적 상처로 남아 ‘성인아이증후군’을 가져왔다고 했다. 세 살배기 아들의 엄마 서모(28)씨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실 날이 없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다. 서씨의 부모는 남편의 알코올중독 때문에 서씨가 중학교 2학년때 이혼했다. 서씨는 “아버지 때문에 삶의 희망을 잃었고 어렵게 이룬 가정마저 깨질 것같다.”고 괴로워했다. 이렇게 알코올중독자 2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기 위한 전문기관 설립이 국내 최초로 추진된다. 전문가들은 알코올중독 가정의 자녀들을 먼저 치료해야 중독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2세 치료기관 설립추진의 주인공은 사회복지사 신양호(54)씨. 그 역시 알코올중독의 대물림으로 고통받았다. 알코올성 중풍으로 사망한 할아버지, 술 때문에 대학 학장자리에서 물러난 아버지, 술로 인한 간암으로 사망한 작은 아버지를 보고 자란 신씨는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됐다.75년 명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전문대 교수로 재직했지만 알코올중독에 빠져 36세에 이혼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인천 부평에서 10여년간 알코올중독자 가족들을 상담해 왔다. 현재는 임상심리학자, 가족치료전문가, 의사, 간호사, 목사 20여명과 함께 상담소의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안에 보건복지부 산하 비영리단체 인가를 받는다는 목표다. 인가를 받는 즉시 강화도 마니산 언덕에 200평 규모의 ‘쉼터’를 설립해 알코올중독 2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알코올중독 2세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중독자 자신들보다 덜하지 않다. 최근에는 심리·사회복지 학계에 중독자 2세들이 ‘성인아이(Adult Child)증후군’으로 고통 받는 사례가 알려지면서 치료의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성인아이 증후군´이란‘성인아이’는 몸은 어른이지만 감정표현 방법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어른이된 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말한다. 부모의 알코올중독, 일중독, 이혼 등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부모의 불화에 억눌려 아이답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극동상담심리연구원 박수영 연구원은 “특히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자란 성인아이의 경우 아버지의 모습을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아버지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 아버지를 닮아가거나 아버지를 닮은 배우자를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가장의 중독에 따른 제2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실전 논술] 가난의 책임 소재와 국가 역할

    ●다음 글을 읽고, 가난 문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살펴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술하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해 1600자 내외(±)로 쓸 것.) 장 발장은 라 브리 지방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는 글도 배우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파브롤에서 나뭇가지 치는 일을 해 왔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잔 마티외였고, 아버지는 블라장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필시 별명으로 브알라 장을 줄인 것이었을 것이다. 장 발장은 음울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인정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장 발장이라는 인간은 어딘지 멍청해 보였고, 눈에 선뜻 띄는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산후 몸조리를 잘못해서 죽었고,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나뭇가지 치기가 직업이었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장 발장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자식 일곱을 낳고 과부가 된,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이 하나뿐이었다. 장 발장을 키운 것은 이 누이로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동생을 집에 데려다 키워 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 일곱 아이 중 제일 큰 아이가 여덟 살이고 제일 작은 아이가 한 살이었다. 장 발장은 그때 스물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한 집의 가장이 되어, 이번에는 자기를 길러 준 누이의 가족을 떠맡아야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무슨 의무처럼 되어 버려서, 장발장으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 고장에서 ‘애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를 쫓아다닐 틈이 없었던 것이다. 저녁이면 그는 녹초가 되어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수프만 먹었다. 잔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누이는 종종 그 옆에 앉아 돼지고기, 또는 양배추 속 같은 그의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그의 접시에서 떠다가 아이들에게 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식탁에 바싹 엎드려 머리를 수프 접시에 처박다시피 하고서, 긴 머리카락을 접시 가로 늘어뜨리고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척 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파브롤에는 장 발장의 오두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길 건너편으로 마리 클로드라고 불리는 소작인 아낙네가 있었다. 늘 허기져 있는 장 발장의 아이들은 가끔 어머니 심부름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는 이 마리 클로드한테 가서 우유를 한 되 얻어다가 생울타리 뒤나 길 모퉁이에서 서로 우유 그릇을 빼앗아 가며 마시곤 했는데, 너무 급히 서두르는 통에 작은 계집 아이들은 흔히 턱밑이나 앞치마 위에 엎지르는 것이었다. 만약에 어머니가 그런 속임수를 알았다면 호되게 야단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장 발장은 퉁명스런 말투로 투덜대면서도 누이 몰래 클로드에게 우유값을 치러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벌을 받는 일이 없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치는 계절에는 하루에 24수씩 벌었다. 그리고 추수를 거드는 일이라든지 잔손일, 농가의 소몰이, 혹은 인부로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했다. 누이 역시 일을 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일곱이나 있었던 만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갈수록 가난에 쫓기고 몰리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혹독한 겨울이 왔다. 장 발장은 일이 없었다. 집에는 빵이 없었다. 그야말로 한 조각의 빵도 없었다. 어린 아이들이 일곱이나 있는데도! 어느 일요일 저녁, 파브롤의 성당 앞 광장에 면한 빵집의 주인 모베르 이자보는 막 잠이 들려다가 가게의 창살 달린 유리 진열장이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창살과 유리를 한꺼번에 주먹으로 깨뜨린 구멍으로 팔 하나가 쑥 들어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팔은 빵 하나를 움켜쥐고 나갔다. 이자보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둑놈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이자보는 그를 쫓아가 붙잡았다. 도둑놈은 이미 빵은 내던져 버렸으나, 그 팔에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둑은 바로 ‘장 발장’이었다. 이것은 1795년에 일어난 일이다. 장 발장은 ‘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한 혐의’로 재판소에 불려 나갔다. 그는 오래전부터 소총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총을 쏘는 솜씨에 있어서는 어떤 명사수에 못지않았다. 또 가끔 밀렵도 했다. 그것이 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밀렵자라고 하면 당연히 나쁜 놈 취급을 해 버린 것이다. 밀렵자는 밀수입자와 더불어 비적과 비슷하게 취급된다. 그러나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이러한 자들과 도회지의 끔찍스런 살인자들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밀렵자는 숲 속에 살고 밀수입자는 산 속이나 바닷가에 산다. 도시는 부패한 인간을 만들고, 또한 잔인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 산과 바다와 숲은 야성인을 만들어 낸다. 산과 바다와 숲은 인간의 거친 면을 키워 주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면을 파괴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장 발장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문(法文)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문명 사회에는 끔찍스런 순간이 있다. 형법이 인간의 파멸을 선고하는 때가 바로 그러하다. 사회가 그 옷자락을 거두어 가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을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다 내팽개치는 순간은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장 발장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 ●지문의 배경 이해하기 이 작품은 인도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된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서사시적 작품이다. 작가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자가 한 사제(司祭)의 자비심으로 선악에 눈뜨게 되고, 사회에 항거해 가면서 고민하다가 점차 순화되고, 성화(聖化)되어 죽음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찾게 되는 영혼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청년 장 발장은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에게 하룻밤의 숙식을 제공해 준 신부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쳤다가 다시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을 때, 밀리에르 신부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 은촛대는 자기가 장에게 준 것이라고 증언하여 그를 구해 준다. 여기서 장은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어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고 시장으로까지 출세한다. 그러나 경감 자베르만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닌다. 때마침 어떤 사나이가 장 발장으로 오인되어 체포되고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장은 스스로 나서서 그 사나이를 구해 주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곧 탈옥하여 예전에 자기가 도와주었던 여공의 딸 코제트가 불행한 생활에 빠져 있는 것을 다시 구출하여 경감의 눈을 피해서 수도원에 숨겨준다. 코제트는 그때 공화주의자인 마리우스와 사랑하게 된다. 장은 1832년 공화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구출하여 코제트와 결혼시킨다. 장 발장의 신분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일시 그를 멀리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다. 장 발장은 코제트 부부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둔다. 결국 이 작품은 중세 계급 사회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한 개인의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출제의도 제시문은 주인공 장 발장이 잘 살아 보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노력하지만, 가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는 내용이다. 이런 문제를 통해 가난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차원의 구조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의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빈곤 문제는 어떤 사회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관심거리가 될 수 있고,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 문제화됨으로써 그 사회 자체의 존립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는 그 원인이 개인에게 있든 사회에 있든 간에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책은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보느냐, 사회적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빈곤의 문제를 사회적 책임으로 볼 때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 제도를 통해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모든 국민들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복지 국가를 지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 발장의 행위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국가가 져야 한다는 관점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사회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해 보도록 하고, 그와 관련된 논의 전개 능력을 평가하고자 하는 데 출제 의도가 있다. ●생각하기 이 논제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빈곤 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관점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사회 복지 정책의 관점에서 빈곤 문제를 국가가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빈곤 문제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본다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빈곤 문제는 개인적 차원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장 발장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빈곤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IMF 경제 위기 이후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빈곤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런 현상을 순수하게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논술문의 서론에서는 빈곤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고 보는 입장과 사회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음을 정리하고, 전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다는 정도로 내용을 제시하면 다루려는 논의의 방향도 정리가 된다. 둘째 논점은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복지 국가의 관점에서 국가가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구체적인 활동으로 사회 보장 제도의 실시나 각종 국가 정책을 제시하면 될 것이다. 빈곤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모순점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점을 본론에서 언급해야 한다. ●어떻게 쓸까 이 문제는 가난 문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국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러므로 주제의 방향은 사회적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잡을 수 있다. 먼저 서론 부분에서는 문제의 출제 의도를 고려하여 빈곤 문제를 보는 관점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빈곤 문제를 개인적 측면에서 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볼 것인지에 대해 언급해 글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본론에 들어가서는 빈곤 문제를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관련된다는 측면에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빈곤 문제가 개인적 노력으로 쉽게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토대로 가난 대물림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예로 제시문에 드러난 장 발장의 예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논의의 심화를 위해서 빈곤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보는 관점의 문제점을 제시하면 좋다. 실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질적 기회 균등의 보장,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의 보장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사회 복지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된다.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사회 복지 정책 등에 대해 언급하면 된다. 결론에서는 논의한 내용을 마무리하여야 하는데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좋을 것이다. 이석록 서울대치메가스터디 원장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외교부 라인업 ‘안정’ 위주로

    홍석현 전 주미 대사의 불법도청 테이프 ‘X파일’ 사건 연루로 흐트러졌던 외교 라인이 마침내 정비됐다. 정부는 29일 홍석현 전 주미대사 후임에 이태식(60) 외교부 1차관을, 1차관 자리에 유명환(59) 2차관을,2차관에 이규형(54) 대변인을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태식 주미 대사 내정자에 대한 미국측 아그레망절차가 끝났다.”고 말했다. 이번 외교라인업은 재벌 언론사주 출신의 주미대사 임명이란 ‘파격카드’를 내세웠다 낭패를 본 뒤 나온 직업외교관 위주의 안정적 인사 기조. 반기문 외교장관부터 1·2차관, 김재섭 주 러시아대사, 김하중 주중 대사 모두 내외에서 검증된 커리어 출신들이다.4강 대사 가운데 주일 대사관의 나종일 대사만 학자 출신이다. 특히 이 주미대사 내정자의 경우 현직 차관으로 이례적(94년 박건우 차관 이후 처음)인 케이스.4강 대사의 경우 장관 및 총리를 지낸 ‘초중량급’들이 임명돼 왔는데 이번 인사를 계기로 4강 대사의 ‘급’이 전체적으로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 내정자는 대학시절 학생운동 전력으로 6회 외무고시 면접에서 탈락한 외교관으로선 보기 드문 ‘운동권’출신. 어떤 자리에서건 할 말은 하는 강한 성격이다. 특히 한·미관계 전환기인 2003년 후반 차관보를 지낸 이후 탄탄대로를 걷고 있어 ‘늦관운’이 트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외시 33회인 아들 이성환(29) 청와대 행정관이 노무현 대통령의 통역을 맡아 한미정상회담 때 부자가 함께 배석하는 진풍경이 나오게 생겼다. 한·미, 한·일 등 양자관계를 담당할 유명환 제1차관 내정자는 외교부 내의 자타 공인 ‘미국통’이다.7월 말 다자담당 제2차관이 된 지 두 달 만에 양자담당인 제1차관이 됐다. 외교부 생활 35년 가운데 20여년을 ‘미주라인’에서 일했다. 동기인 이 주미대사 내정자와 자리 물림이 눈길을 끈다.2002년 차관보 인사에서 이 주미대사 내정자에게 밀린 뒤 이 내정자가 있던 이스라엘 대사로 갔고, 필리핀 대사를 거쳐 차관자리를 받은 것. 이규형 2차관 내정자는 유엔과장과 국제기구정책관 등을 역임한 명실상부한 다자업무 전문가다.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당시 유엔과장으로서 실무주역을 맡기도 했다. 지난여름 ‘때로는 마음 가득한’이란 시집도 출간한 이 내정자는 실제로 부드러운 친화력으로 선후배들의 신망을 받는 ‘시인’외교관이다. 홍석현 전 대사 경질로 이태식·유명환·이규형 세 사람의 연쇄승진이 이뤄져 외교부에선 ‘1타(打)3(得)’에 성공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다음은 주요 약력●이 주미대사 내정자 ▲경북 월성 ▲경북 사대부고·서울대 외교학과 ▲외시 7회 ▲주미1등서기관 ▲주오스트리아 참사관 ▲통상국장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차장 ▲주이스라엘 대사 ▲차관보 ▲주영국 대사●유 1차관 내정자 ▲서울 ▲서울고·서울대 법대 ▲외시 7회 ▲북미과장 ▲공보관 ▲대통령 외교비서관 ▲북미국장 ▲주미공사●이 2차관 내정자 ▲부산 ▲외시 8회 ▲서울고·서울대 외교학과 ▲주일본 1등서기관 ▲유엔과장 ▲주유엔 참사관 ▲공보관 ▲국제기구정책관 ▲주중 공사 ▲주방글라데시 대사박정현 김수정기자 jhpark@seoul.co.kr
  • 술~술 새는 5조…매년 술로 사회적 비용 막대

    술~술 새는 5조…매년 술로 사회적 비용 막대

    알코올 도수 21도인 소주 한 병(360㎖)을 마시면 술 마시는 사람말고 사회가 1149원씩을 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3일 조세연구원이 서울 가락동 연구소에서 연 ‘주세율 개편에 관한 공청회’에서 장근호 홍익대 교수는 순 알코올 1ℓ(1000㎖)당 사회적 비용은 1만 5200원이라고 밝혔다. 사회적 비용이란 음주자 본인이 지불하지 않는 비용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데 따른 세수감소, 치료와 예방 등 의료비, 범죄와 교통사고 처리 등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 등을 말한다. 소주 한 병에 들어간 순 알코올은 75.6㎖다. 따라서 사회적 비용은 1149원으로 계산된다. 알코올도수 4.5도인 생맥주 한 잔(500㏄)을 마시면 순 알코올 22.5㎖을 섭취하고 사회가 내는 비용은 342원이 된다. 장 교수는 소주나 맥주 외에도 포도주, 위스키 등 알코올 섭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2003년 기준 4조 8970억원이라고 추산했다. 이는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0.65%다. 술 먹는 데 쓰인 돈은 2003년 GDP의 2.35%로 계산됐다. 음주 비용과 음주에 따른 사회적 비용까지 합하면 2003년 GDP(721조원)의 3%인 21조 6300억원이 음주 관련 비용으로 쓰였다. 장 교수는 “우리나라의 음주행태는 후진국형으로 그 폐해가 심각하고 이는 술값이 싼 것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술값이 10% 오르면 음주운전 은 8%, 범죄율은 1.3%, 유아학대는 2%, 가정폭력은 4%가 각각 줄어든다. 장 교수는 “3년에 걸쳐 주세율을 소주는 150%, 맥주는 120%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했다. 소주의 현재 주세율은 72%, 맥주는 90%다. 소주가 서민주인 것은 사실이지만 고 알코올주임에도 생수와 비슷한 값에 팔려 음주를 세대물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포도 눈물/류기봉 지음

    ‘시를 쓰듯이 포도를 키우고, 포도를 키우듯이 시를 써온’농부 시인 류기봉(40)의 시선집 ‘포도 눈물’(호미)이 나왔다. 류 시인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산97에서 아버지의 포도밭을 대물림해 15년째 포도 농사를 짓고 있다.1993년 ‘현대시학’에 김춘수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장현리 포도밭’ ‘자주 내리는 비는 소녀 이빨처럼 희다’등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시선집 ‘포도 눈물’은 지금까지 쓴 시들 가운데 포도 농사에 관한 것만 27편을 골라 실었다. ‘수만 가지 보랏빛으로 익는 포도알은 봄부터 가을까지의 내 혼이 담긴 나의 시들’이라고 서문에 쓴 것처럼 시인에게 포도 농사를 짓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다르지 않다. 포도에 대한 그의 순정한 사랑과 자부심은 다음 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나를 키우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1974년에 태어난 그 나무를 보고 나는 할멈, 할멈 한다.(중략)30년 동안 내게 옷 주고 집 주고 학비 주고 詩人 되게 해준 나무, 눈빛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는 나무에게 몇 년 전에 내가 쓴 시 ‘내가 지게에 짊어진 눈물’詩를 읽어주어야겠다.”(‘반곱슬머리 나무’중) 이 땅을 딛고 사는 농부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의 농업정책 등 열악한 현실에 대한 자괴감과 분노도 숨기지 않는다.‘포도 한 송이가 일천원인데/아내는 포도 열다섯 송이 값으로 커피를/나는 포도 열다섯 송이 값으로 맥주를/마셨다. 아, 열애 아, 열애/우리는 금방 포도나무 한 그루를 먹어치웠다./열애를 하지 못하고 나왔다.’(‘아, 열애’중)에선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고,‘농민 류기봉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농업 부적격자이기에 오늘 이후로/포도나무들과 함께 눈물을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눈물1-한, 칠레 자유무역협정 타결’중)에선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지난 3월 시인은 포도밭에 나가는 대신 다른 일거리들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포도밭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포도 농사짓기 서른한 해. 하마터면 내 포도밭에는 서른한 번째 봄이 오지 않을 뻔했다.´ 6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신들의 땅, 히말라야를 품다

    신들의 땅, 히말라야를 품다

    마음 속의 찌든 때까지 모두 버릴 수 있는 땅, 히말라야에 대한 기대는 여행을 넘어섰다. 그러나 신들이 살고 있다는 거대한 산을 첩첩이 품고 있는 히말라야는 좀체 인간의 발길을 허락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욱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한해 히말라야로 가는 국내여행객도 1만명을 넘어섰다. 자연을 경배하고, 욕심과 분노덩어리인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히말라야는 트레킹마니아들의 천국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과 얼음, 드넓은 초원과 에메랄드빛 빙하가 흘러내린 호수, 야생화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셰르파족 등…. 히말라야에서 지낸 20여일은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글·사진 히말라야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서,‘히마’는 빙설(氷雪),‘말라야’는 살고 있는 곳, 즉 ‘눈의 거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쿰부 히말라야(KHUMBU HIMALAYA)는 히말라야산맥(약 2800km)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가 우뚝 솟은 지역 일대를 말한다.원래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영국인이었던 측량국 관리의 이름을 본떠서 붙인 이름으로서 네팔어 정식 명칭은 사가르마타(SAGARMATHA)이다. ■ 마칼루·바룬 - 쿰부히말라야 26일간 대장정에 오르다 에베레스트의 이름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란 권위가 담겨있다. 높이에 대한 감탄뿐이 아니라 범접하기 어려운, 우러르는 마음을 갖지 않고선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경외감까지 포함돼 있다. 또한 로체, 마칼루, 초오유 등 8000m이상의 산들이 즐비한 지역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꿈, 그리고 죽음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전문 산악인들만을 위한 산은 아니다. 이곳에도 초등학생부터 70세의 어르신들까지 히말라야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히말라야의 또다른 미덕이다. 배타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산 히말라야가 오라고 손짓해서, 그래서 떠났다. ‘동네 뒷산처럼 쉽게 갈 수 있다’는 쿰부 히말라야코스, 산에 다녀 본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가는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코스 등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 산악부원 12명, 해외원정 경험이 많은 단장, 대장, 지도위원 4명. 그리고 1년에 고작 한두번 뒷산에 오르는 나까지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2005 한국청소년오지탐험’ 마칼루팀은 7월23일, 서울을 떠났다. 우리팀은 히말라야 지역을 한바퀴 도는 트레킹을 계획했다. 히말라야에 머무는 날은 20일정도, 오가는 비행길까지 포함해서 26일간의 여정은 시작됐다. 옛날 광부들이 다니던 길로 5000m의 패스(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는 준전문가들용 코스인 마칼루와 바룬지역을 지나, 일반인들의 여행코스인 쿰부히말라야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여기에서 하이라이트는 전문가들이라야 갈 수 있다는 6461m의 메라피크 등반이었다. 산을 전문적으로 타는 산꾼들과 함께 히말라야로 떠나게 된 초보의 심정, 막상 떠나려니 가슴이 무겁고 두려웠다. 준비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장비는 3년된 등산화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히말라야를 향한 꿈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 장비를 구입하고, 빌렸다. 사용법도 모른 채 장비를 카고(등산용 커다란 가방)에 쑤셔넣고 떠났다. ●아름답고 낯선 관문 루클라 히말라야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국내공항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날개 양쪽에 프로펠러가 있는 장난감 같은 20인승 경비행기에 올라 루클라로 향한다. 가뿐하게 하늘로 날아 오른 비행기는 몇 번을 날라가다 뚝 떨어지고 옆으로 밀려가는 통에 자이로드롭을 탄 듯하다. 마음을 졸이며 50분을 날아 루클라 비행장에 도착했다. 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비행장으로 서울의 편도 4차선 크기의 달랑 하나뿐인 활주로가 눈에 띄었다. 경사가 15도 정도 기울어져 착륙을 돕는다. 반대로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가며 이륙한다. 활주로 끝은 천길 낭떠러지, 아찔했다. 이렇게 도착한 비행장은 내전 때문에 가 제법 삼엄하다. 아직도 포카라지역은 마오이스트들(마오쩌둥을 추종하는 무리)이 제법 많아 정부군과 교전이 잦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총멘 군인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손에 잡힐 듯한 산들, 어디선가 쏟아지는 물소리, 파란 하늘과 구름들. 히말라야의 첫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후에 접어들자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별을 보며 저녁산책을 하리라는 꿈을 접고 롯지(산장)에 앉아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비구경을 했다. 히말라야는 9월말까지 몬순기간이라 거의 매일 비가 온다. 내리는 비를 뚫고 산을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마침 셰르파가 다가왔다. 이름은 왕추, 나이는 31살.5명의 셰르파와 60여명의 포터의 대장인 ‘사다´로 에베레스트를 무려 8번이나 올라갔단다. 내 걱정을 알겠다는 듯 그는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잠자리에 들라.”고 말해줬다. 산사나이의 말을 믿고 습기로 축축한 침대에 올랐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에 잠을 깼다. 먼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럴 수가. 간밤의 오던 비는 꿈이었던가. 파란 하늘이 내 눈으로 빨려 들어온다. 아침을 먹고 드디어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딛는다. ●오후만 되면 비내리는 몬순의 고산지대 우리는 쿰부히말라야 일반적인 트레킹코스와 반대로 간다. 마칼루와 바룬지역으로 해서 쿰부히말쪽으로 돌아서 루클라로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다. 마칼루와 바룬지역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루클라부터는 을 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물론 전화, 전기도 들어 오지않는다.(큰 롯지에만 자가발전기를 쓴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도 무용지물이다. 가진 자나 그러지 못한 자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오직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걸었다. 여기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포터나, 집을 고치기 위한 나무를 지고 가는 주민들처럼 우리도 히말라야를 한발 한발 내디디며 마음이 아닌 온몸으로 히말라야를 느껴간다. 루클라를 떠난 지 1시간이 지나자 스티마 쿠알라계곡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자연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집채만한 바위 위를 파랗게 덮고 있는 이끼. 조그만 씨앗 하나가 몇백년동안 저렇게 바위에서 자신의 몸집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콸콸콸’하고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물에 압도당한다. 그런데 이곳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스틱에 의지하며 건너간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 ‘찌릿찌릿’전기처럼 다가오는 차가움. 몇 발을 떼자 아예 통증이 된다. 루클라를 떠난 지 4시간30분만에 캠프사이트인 추탕가에 도착했다. 첫날인데 벌써 다리가 아프고 힘이 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가 되니 비가 내린다. 몬순기간에 고산지대는 오후가 되면 기온이 상승하며 구름을 만들어 비가 내리고 새벽에는 기온이 내려가 날씨가 맑아진다. 히말라야에 머문 20일 동안 단 이틀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은 날씨였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은 봄과 가을이 제철이다. 비로 눅눅해진 텐트에 몸을 눕혔다.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 고소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고소’, 즉 고산병이다. 고도를 갑자기 올리는 것이 원인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생긴다. 몸속에 산소가 부족해서 혈액순환이 저하돼 두통이나 소화불량, 불면증, 무기력증, 손발 저림, 실어증 같은 것을 동반하며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소증세는 단 몇백m만 아래로 내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씻은 듯이 낫는단다. 그래서 일반적인 트레킹에서는 고소적응 기간을 두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지만 우리는 짧은 일정탓에 바로 4000m이상 올라 갔다. 4610m의 체트라고개를 넘어 4300m의 틸리 카르카에서 캠핑을 한다.3시간을 걷자 3910m까지 올라갔다. 앞에는 하얀 봉우리를 날카롭게 드러낸 커리륭이라는 7500m의 산과 여기저기 부서져 있는 바위들, 파란 초지,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4000m를 넘자 이젠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아니 이 숨막히게 한다. 가도 가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셔터를 누를 때 숨을 잠시 멈추면 바로 ‘헉헉’하고 몇 번 숨을 몰아 쉬고 걸어야 한다. 사진 한장 찍는 것이 고통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다.1시간 전에 웃고 떠들던 대원들도 단한마디 말이 없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양사헌의 시조가 생각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그래 가자 가. 그렇게 5시간을 넘게 오르자 체트라정상에 섰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이름모를 산들. 마치 양탄자처럼 떠 다니는 구름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체트라 정상 구석에서 덩치가 제일 큰 원준희(춘천대 3)대원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구토를 한다.“괜찮아?”하고 묻자 손만 내저을 뿐, 말을 하지 못한다. 몇 명의 대원들이 고소로 정신을 못 차린다. 말로만 듣던 고소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수천년 이어져온 자연의 힘 너덜지대를 걷는다. 돌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지대로 평지보다 걷기가 힘들다. 돌을 밟고 미끄러져 한바퀴 구른다. 아예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떻게 4000m가 넘는 곳에 이렇게 돌들이 많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바람에 날려 왔을 리도 만무하고…. “이게 자연의 힘이에요. 여름에 물기를 머금은 바위산이 겨울에 얼면서 갈라져 저렇게 커다란 바위가 생기고 또 바위가 여름에 물기를 머금고 겨울에 팽창을 하는 물 때문에 갈라져 이런 바위 너덜지대가 생겨요. 수 천년동안 이런 현상의 반복으로 바위가 없어지기도 해요.”라고 옆에 있던 서병란(43)지도위원이 대원들에게 설명한다. 자연의 위대함에 머리를 숙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4시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오늘 무려 9시간을 걸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할 걸.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친다. 서울 가면 반드시 운동하리라, 지키지 못할 맹세도 했다. 간밤에 내리던 비도 어느덧 멈추고 그토록 괴롭히던 고소도 상당히 좋아졌다. 오늘은 3690m로 내려가 모솜 카르카에서 캠핑을 한다. 변변한 길도 없이 하루종일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정말 때묻지 않은 자연이란 말은 이럴 때 어울린다. 커다란 고목이 쓰러져 있고 고목을 뒤덮고 있는 이끼들을 보니 정글에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답다. 고도를 내리자 고소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4356m의 탕낙을 지나 5045m의 카레캠프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젠 5000m를 넘어서자 기온이 달라진다. 날씨가 초겨울 날씨같다. 이젠 5400m의 메라베이스 캠프다. 가파른 오르막과 험준한 산을 넘는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확실히 산소가 희박해짐이 느껴진다. 호흡을 일정하게 가지고 가야 한다. 간혹 기침을 한번 하면 자리에서 서서 숨을 고르고 가야한다. 사진을 찍는 것뿐 아니라 수통에 있는 물을 마시기조차 힘들다. 아니 0.1초라도 숨을 멈추고 있으면 바로 죽어버릴 것 같다. 모 등산화광고에서 엄홍길씨가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숨을 몰아 쉬는 것을 보고 연기인 줄 알았는데,5000m를 넘어서자 비로소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된다. 3시간을 걸으니 이젠 거대한 설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메라라’ 라는 만년설로 덮힌 언덕. 보는 순간 그 거대함에 압도당한다. 안전을 위해 등산화를 벗고 이중화와 안전띠를 착용한다. 난생 처음 신어 보는 이중화. 스키부츠와 비슷하다. 겉면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설산에서 며칠을 있어도 방수가 완벽해 동상을 막아주는 신발이다. 그러나 정말 무겁다. 거기에 아이젠을 끼웠다. 그리고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띠를 착용하고 자일을 잡고 메라라를 오른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숨은 가쁘지만 가슴이 뻥 뚫린다. 몸속에 있는 독소와 스트레스가 히말라야의 기운으로 바꿔 채워진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날 것 같다. 수천만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얼음절벽 위에 서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메라픽 정상을 가는 길과 홍구를 거쳐 추쿵을 가는 갈림길이다. 어디를 갈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히말라야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메라 베이스캠프부터 홍구, 판치 포카리까지는 거의 평지이며 바위 너덜지대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번 트레킹의 마지막 고비인 5800m의 암푸랍체가 우리를 기다렸다. 더구나 눈까지 내려 생각보다 힘들었다.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힘들다는 말이 실감난다. 길이 좁고 눈이 계속 내렸기 때문에 미끄러운 암푸랍체의 하산길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편안한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는 쿰부히말라야다. 히말라야 마을 중 가장 오지이며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4730m의 추쿵. 왼쪽으로 8500m의 로체, 정면에는 6160m의 아일랜드피크, 오른쪽에는 6812m의 아마다블람은 거칠고 황량하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만들어 낸다. ‘어머니의 목걸이’라는 뜻을 가진 아마다블람은 히말라의 보석으로 불린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늘어선 하얀 허리를 가지고 있는 산. 그 선이 매우 날카롭지만 웅장하고 고왔다. 역시 많은 산사나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손 꼽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보는 일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지만 추쿵은 셰르파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다. 몇 개의 롯지가 모여 트레킹족의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이제 진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향한다. 여기 추쿵부터는 일반인들이 쉽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다. ●히말라야 하이웨이 추쿵부터 루클라까지를 히말라야에선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고속도로란 뜻이다. 길이 잘 이어져 있고 마을을 거쳐가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다. 일단 여기부터는 롯지가 계속 있고 마을에 가게도 있어 콜라며 맥주, 과자 등을 사서 먹을 수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일단 300루피(약 70루피가 1달러. 한화로 4000원)를 주고 시원한 산미구엘 맥주를 사서 한 모금을 마셨다.‘우∼ 세상에 맥주가 이런 맛이었나. 이렇게 맛있다니’ 히말라야에서 먹는 맥주는 입에 쫙쫙 붙는다. 어제와 오늘은 단순한 하루 차이지만 나의 느낌은 지옥과 천당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걷기도 편하다. 집들이 이어지고 돌담이 쳐진 밭에서는 감자와 보리들이 자라고 있다. 정말 즐거운 트레킹이다. 이제 며칠동안 햇빛을 못 본 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찍을 만큼 마음도 몸도 여유가 생긴다.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트레킹족들은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히말라야를 다녀온 것인데, 나는 지옥훈련을 택한 셈이다. 2시간을 걷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는 딩보체가 닿는다. 마을 입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라마의 문구를 새겨 놓은 돌을 쌓아서 만든 돌탑인 스투파. 포터들은 발길을 멈추고 스투파에서 기도를 하고 지나간다. 셰르파족인 그들은 그렇게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겨간다. 우리들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아무 욕심없이 라마교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고 있다. 머리에 40㎏의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 다니는 락기리(17) 또한 아버지의 직업인 포터를 대물림하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아무리 고산지대에 사는 셰르파족이라도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다는 것은 고통일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 오는 락기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해한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알고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그들의 인생은 우리의 잣대로 가르는 것은 옳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소년 락기리가 좀더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기를 빌었다. ●희망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 딩보체, 팡보체를 지나 탕보체 가는 길에 히말라야의 웅장한 산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바로 험준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이 지역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길고 짧은 다리를 만난다. 그런데 다리에 여러 색깔의 깃발이 걸려있다. 처음에는 ‘멋으로 했겠지.’하고 지나쳤지만 다리마다 걸려 있는 오색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곳 사람들은 다리를 신성시하여 카타와 룽다(기도 깃발)를 걸어놓는 것은 물론 지날 때마다 ‘부디 하는 일 잘 되고 가족 모두 아무 탈 없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오늘도 사람들의 희망과 바람을 가득 담은 오색깃발은 바람에 따라 춤을 춘다. 3860m의 탱보체는 라마사원으로 유명하지만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등 유명한 산들을 같은 방향에서 조망할 수 있는 히말라야의 전망대이다. 또한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도 후원을 한다는 티베트사원인 콤파를 만나게 된다. 탕보체의 콤파에는 많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콤부히말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었다가 붉은색 벽돌로 다시 지었지만 중후한 분위기와 차분함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잔뜩 흐린 날씨에는 제1전망대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정상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남체 바자르로 향했다. 계곡의 물소리 정겨운 작고 아담한 마을, 우거진 숲.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쿰부히말라야의 명동 쿰부히말라야의 제일 번화가는 당연히 남체 바자르다. 해발 3440m에 위치한 쿰부 히말라야의 상업적 요충지이며 등반과 트레킹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곳이다. 또 이 마을은 매주 토요일마다 장이 열린다. 쿰부히말라야에 사는 모든 셰르파족들이 생필품을 여기서 구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시장과 상점들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빵집과 레스토랑, 클럽, 당구장 등이 밀집해 있어 깊은 히말라야의 산중이란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든다. 이 마을 뒷산 꼭대기에는 히말라야의 설산 풍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와 네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그래도 새벽은 온다. 이번 탐사의 하이라이트는 메라피크 정상에 서는 것이다. 메라피크는 해발 6461m로 히말라야 트레킹피크 중에서 제일 높다. 윤대장이 은근히 나를 떠본다.“베이스에서 쉬시지?”내가 등반대장이라 해도 걱정이 되겠다. 장비라고는 제대로 된 것 하나 없지, 자일을 타 보길 했나, 설산 경험이 있나. 하지만 나는 큰소리쳤다.“해발 6000m, 자신있습니다.” 큰소리 지만 긴장과 두려움으로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다.5800m의 메라 하이캠프로 올라간다.3명의 대원은 고소가 심해 베이스에 남았다. 눈부신 설원을 밟으며 걷는 대원들을 뒤에서 보고 있노라니 마치 파란 하늘을 향해 걷고 있는 천사들 같다. 하얀 천국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온통 하얀색뿐이라서 그런지 1시간을 걸었는데도 제자리인 것 같다.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오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일단 하이캠프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다음날 새벽 2시.8명이 정상으로 향했다. 서로 몸을 자일로 묶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며 오르기 시작했다.8명중 4번째 내가 섰다. 앞뒤 사람과 보조를 맞춰야 걸을 수 있다. 내가 못가면 앞뒤 사람이 다 못간다. 처음 1시간은 잘 걸었지만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잠시 대기”라는 외침이 입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3∼4발자국을 걷기가 힘들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로 거대한 설산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자 이젠 마지막이야. 여기만 오르면 정상이야.”라는 외침에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해 걸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간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 메울 때 “정상이야. 메라픽 정상이야.” 하는 외침이 들린다. 나는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는 앉아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상은 정상이다. 그런데 표지 하나 없다. 약간 허탈했다. 그때 셰르파가 다가 오더니 저기 보이는 산이 에베레스트라고 가르쳐 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신기루처럼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에베레스트. 불가능 같았던 산이 거기에 있었다. 신기루처럼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모든 고통이 잊혀진다. 마치 짝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만봐도 행복해지듯…. 눈앞에 드러낸 웅장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잠깐, 서둘러 사진을 찍고 하산한다. 햇볕에 눈이 녹으면 발이 빠져 걷기 힘들기 때문이다. ‘잘 있거라. 언제 다시 만나리라는 기약은 없지만 안녕!’ 13시간을 눈밭에서 구르다 베이스에 도착했다.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길고 힘든 하루였다. ■ 네팔 가려면 네팔은 우리나라의 3분의2 정도 크기의 면적에 인구는 약 2500만명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15분 늦다. 화폐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루피(Rupee).1달러가 69루피 정도. 신용카드가 되는 곳이 드물며 한화는 환전을 할 수 없으므로 출국하기 전에 달러로 바꿔야 한다. 환전은 공항이나 카트만두에 있는 타멜시장의 시설 환전소를 이용하면 된다. 네팔은 비자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미리 네팔 비자를 받고 싶으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명예 네팔영사관(02-555-9040)’에 전화예약 후 방문하면 된다. 발급은 보통 이틀 걸린다. 비자수수료는 32달러. 카트만두 공항에서도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이 낫다. 단 비자수수료는 한국보다 2달러 싼 30달러. 비행기는 직항노선이 없다. 홍콩, 방콕, 상하이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www.nepal.pe.kr,www.nepaltour.pe.kr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트레킹 하려면 혜초여행사(02-6263-3330,www.hyecho.com)는 네팔 트레킹의 선두주자. 한 해에 3500명 이상이 혜초여행사를 통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선다.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코스를 알려주며 네팔 현지 지사에서 셰르파나 포터뿐 아니라 필요한 물품도 공급해준다. 셰르파의 고향 남체로 찾아가는 9일 일정의 에베레스트 하이라이트 트레킹은 205만원,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의 완성인 17일 일정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60만원. 푼힐전망대에서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는 9일 일정의 로얄 트레킹은 185만원,180도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파노라마를 느낄 수 있는 13일 일정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20만원. 또 10월쯤이면 루클라에서 출발, 추탕가와 메라베이스, 암푸랍체를 거쳐 쿰부 하말라야인 추쿵, 남체를 거치는 20일 일정의 히말라야 일주 트레킹 상품도 나올 예정이다. 이밖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일정에 맞춘 다양한 트레킹 여행도 가능하다. 네팔 트레킹은 여행기간이 길고 오지로 떠나기 때문에 전문여행사를 통해서 가야 한다.
  • [사설] 국민 7명 중 1명이 빈곤층인 나라

    월소득이 최저생계비(4인가구 기준 113만 6000원) 이하인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차상위계층 등 빈곤층이 716만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민 7명 중 1명꼴이다. 지금까지는 통계청의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빈곤층이 500만명이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보건복지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통계청 조사에서 빠진 1인가구, 농어촌가구, 자영업자 등을 포함해 3만가구를 표본조사한 결과, 이같이 집계됐다고 한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716만명 중에는 적지 않은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도 있다. 정책지원대상 기준인 5445만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315만명을 제외하면 소득과 재산이 모두 취약한 최악의 빈곤층은 401만명이라고 한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지난달 총리실 간부들에게 빈곤층의 실태를 직접 조사토록 지시한 것도 소득기준과 자산기준의 지나친 격차, 과도한 빈곤층 숫자 등이 직접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장기 불황과 고용 악화로 저임금 근로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기반이 붕괴되면서 빈곤층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우리나라는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에 비해 15.28배나 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소득 불균형이 심하다. 남북분단, 동서분단에 이어 빈부양극화 분단이라는 제3의 분단이 생겨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양극화는 선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빈부격차 심화가 선진화의 동력인 양 호도했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덫에 빠진 빈곤층으로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고소득층의 주머니가 흘러 넘치면 저소득층의 바닥도 적시게 된다는 ‘적하(滴河)’현상은 이미 실종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소득층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정부가 빈곤층 소득보전을 위해 추진하는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에 기대를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7일 TV 하이라이트]

    ●우리말 우리글(EBS 오후 4시40분) 우리나라에는 4000여 종의 식물이 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식물들 하나하나에도 그에 걸맞은 이름이 있다. 풀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준다면 자연과 더욱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산으로 바다로 여행하기 좋은 요즘, 밖에 나가 우리 풀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자.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미국에서 가장 춥고 광막한 곳 알래스카. 알래스카는 자연 그대로의 황무지와 원유 매장지라는 서로 다른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어느 새 송유관과 정유공장, 원유 수출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부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2005 대한민국 음악축제(MBC 오후 6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인정한 국가대표급 가수 김건모, 아시아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Girls on Top’ 보아, 동방의 여심을 사로잡은 다섯명의 꽃미남 동방신기, 록의 계보를 잇는 신세대 록그룹 버즈 등 신세대 최고의 가수들이 뜨거운 여름,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다. ●도전!1000곡(SBS 오전 8시30분) 21세기 꽃미남으로 불리는 오지헌의 노래 실력은? 또 매력적인 가수 린, 이소은, 별의 열창 무대도 지켜본다. 린과 이소은 그리고 별은 댄스곡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 솜씨를 뽐낸다. 아이돌스타 SS501의 환상적인 매트릭스 댄스와 길건의 뜨거운 무대도 흥미를 끈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지난 달 8일, 진품명품 코너에 커다란 분청 항아리 한 점이 의뢰되었다. 광주에 사는 의뢰인의 집안에서 무려 13대를 걸쳐 대물림되었다는 이 도자기는 2억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감정가를 받은 것일까? 또 조선시대 여성들이 사용했던 장신구들도 선을 보인다. ●반올림#2(KBS2 오전 8시) 욱이의 존재를 알고부터 말수가 적어졌던 여명. 하지만 여명은 왜 그러느냐며 다그치는 옥림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않겠다면서 노란손수건을 건넨다. 옥림의 정확한 마음이 알고 싶은 여명은 우체국 봉사활동 기간 동안 옥림이 손수건을 집 앞에 매달아 놓으면 자기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다.
  • 대림그룹 3세 경영권승계 잰걸음

    대림그룹 이준용 회장의 장남 이해욱(37)씨가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대림산업은 2일 “대림산업 경영기획실 이해욱 전무가 지난주 유화부문 부사장으로 승진했다.”면서 “당분간 유화부문 대표이사인 한주희 부사장과 투톱 체제를 이끌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사장은 이 회장의 3남 2녀 가운데 맏아들로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지난 1995년 대림산업 유화부문에 입사했다. 외환위기때 유화부문 구조조정 등 기반을 다진 뒤 경영 수업을 쌓기 위해 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부터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이 부사장의 유화부문 복귀는 대림산업에서 유화부문이 차지하는 매출이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이 부사장의 다양한 경영 경험 쌓기 과정으로도 해석된다. 대림산업 상반기 매출은 1조 9485억원이며 이 중 유화부문이 3190억원으로 16%를 차지했다. 유화부문은 건설과 함께 대림산업의 양대 줄기이며 현재 한화와 50대50으로 투자한 여천YNCC를 비롯, 외국 업체와 합작 투자한 포리미레와 KRCC 등을 거느리고 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그러나 이 부사장의 지분은 아직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는 해석도 적지 않다. 대림 관계자도 “이번 승진은 경영수업 차원에서 받아들여야지 단순 경영권 물림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라며 조기 경영권 이양을 경계했다. 또 “이준용 회장이 아직 건강에 문제가 없어 당장 경영권 승계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경영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삼호 1.85%, 비상장 운송회사인 대림에이치앤엘 100%를 소유하고 있어 아직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분 이동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사설] 스타교수도 연구비 떼먹는 풍토

    서울대 공대 오모 교수가 어제 연구비 등 1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서울공대 교수로는 지난 7일 조모 교수가 같은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두번째이다. 이번에 구속된 오 교수는 지난 4월 미국의 관련 학회가 제정한 ‘올해의 논문상’을 받는 등 해당 학계의 소위 스타교수였고, 지난번 구속된 조 교수도 승승장구하던 소장 엘리트 학자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돈에 눈이 멀어 학자적 양심을 포기한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검찰이 서울공대 교수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하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오히려 두려워지는 심정이다. 횡령 혐의로 구속된 두 교수의 사례를 보면 그 수법이 참으로 유사하다. 연구 과제를 맡아 연구비를 타낸 뒤 실험자재 구입비용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과다하게 책정했으며 연구를 돕는 제자들의 급여를 떼어먹어 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는 제자와 제자의 부모 등을 동원해 허위 세금계산서를 만들어 이를 숨기려고 했다. 이같은 행태는, 연구과제 유치는 개인의 치부 수단이요 제자들은 어떻게 부려먹어도 탈이 없다는 식의 교수사회 특유의 타락한 풍토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의 교수 구속 사태와 관련, 서울대는 연구비를 투명하게 지출하는 종합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있다. 물론 제도를 정비해 부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천봉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교수사회의 의식 자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연구성과보다는 개인적인 인맥·충성도를 기준으로 교수 자리가 대물림되는 현실에서 부정부패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바라는 일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할 것이다.
  • [일본을 다시본다] (4) 대를 잇는 시니세 생존법

    [일본을 다시본다] (4) 대를 잇는 시니세 생존법

    이번 취재는 중소규모의 기업이나 음식점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시니세라고 하면 저울의 다니타, 제약회사인 류칵산(용각산), 간장의 기코망, 건설의 시미즈 등 폭넓다. 한때 일본을 석권했던 마쓰시타 전기도 시니세에 포함시킬 수 있다. 대를 잇는 가게나 기업들이 많은 유럽처럼 일본의 시니세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일군 기초이자 저력이다. 기술, 장인, 경영의 노하우를 대물림하면서, 전통을 이어가고 발전시키는 동력이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의 반성에서 일본식 경영이 쇠퇴하고, 미국식 경영이 밀려들면서 시니세의 존재방식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 시니세 기업의 합병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최근 복고붐을 타고 시니세식 경영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후계자 선정문제, 장인의 감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호 등으로 시니세가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갈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특별취재팀|일본에는 대를 잇는 가게(기업),‘시니세(老鋪)’가 많다.500년 넘은 곳만 700개가량 있다는 통계도 있다. ‘잃어버린 10여년’의 빙하기를 거치면서 몇몇이 문을 닫았지만, 시니세의 대부분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새것의 홍수 속에 전통을 고집하는 이들 시니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본을 읽는 키워드의 하나로서 시니세를 찾아본다. 일본 전통과자(和菓子·와가시)의 간판격인 ‘도라야’가 도쿄의 롯폰기 힐스 빌딩에 ‘도라야 카페’를 낸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벤처기업의 신흥부자들이 몰려 있는 유행의 첨단 롯폰기에 400년된 일본과자집이 들어선다?” 전통의 맛 하나로 승부해 온 도라야가 지구촌의 맛이 모인 롯폰기 힐스에 진출해 자리잡을 수 있을까, 그 자체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라야의 17대째 CEO인 구로카와 미쓰히로는 “제안이 왔을 때 주 고객이 젊은층이라는 말에 망설였다.”고 털어놨다. 망설임도 잠시, 젊은세대의 입맛을 분석한 뒤, 도전해볼 만하다며 카페 문을 열었다. 콩이나, 잣, 팥고물 같은 일본 과자의 필수재료에 젊은층 취향을 가미해 제리, 카스텔라, 빵을 만들어냈다. 도라야의 브랜드에, 웰빙 건강식품을 추구하는 젊은층의 선호, 옛것과 현대를 절묘히 배합한 신제품과 가게 인테리어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안겨다 줬다. 2004년 웬만한 중견기업에 맞먹는 159억엔의 매상을 올린 도라야에 이 카페의 실적은 미미한 것일 수 있지만, 오래된 가게들이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새것에 호기심이 많고, 유행에 민감한 일본인의 입맛을 브랜드의 힘이나 전통만으로 지켜내기 힘든 까닭에 이 회사는 20년 전부터 많은 돈을 들여 정밀한 입맛조사를 하고 있다. 기술자인 ‘쇼쿠닌(職人)’을 키우는 방법도 과거와 다르다. 구로카와 사장은 “처음 3년간은 청소만을 시키는 옛 방식은 하지 않는다. 쇼쿠닌이 되려면 10년 정도는 필요하지만 지금은 컴퓨터에 기술정보를 공개하기도 하고 외부 연수를 시키기도 한다.”고 말했다. 종업원 800명 중 200명 정도가 쇼쿠닌인 도라야는 기술자 중심의 경영방침은 여전하지만 “기계로 만들어서 제대로 된 맛이 난다면 굳이 손으로 만들기를 고집하지 않는다.”(구로카와) 시니세의 강력무기인 소비자의 애정과 신용, 그 결정체인 브랜드의 힘을 유지하는 데는 전통도 과감히 변형시키는 유연한 사고가 경영에 녹아있는 듯 보였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을 받는 유일한 강점 ‘미마스야’는 올해로 창업 100년을 맞은 선술집이다. 도쿄의 간다 뒷골목에 있는 미마스야는 그 흔한 자동문 하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무명천(노렌)을 젖히고 미닫이 문을 열어야 가게에 들어설 수 있다. 기자가 찾아갔던 시간이 저녁 7시 무렵이었는데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한 샐러리맨으로 득실댄다. 이곳을 3대째 잇고 있는 오카다 가쓰다카(59)는 대학을 졸업한 후 가업을 물려받았다. 손님들이 잘 보이도록 메뉴와 가격을 써놓은 나무판이 벽면에 걸려 있고, 가게 곳곳을 떠받치는 기둥, 목제 테이블 어느 곳 하나 세월의 손때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간단한 모둠회, 일본식 미꾸라지탕, 이면수 구이 같은 500∼1400엔짜리 메뉴들은 퇴근길 한두잔에 배를 채우고 귀가하는 서민들에겐 딱 알맞다. 맛이야 고급 술집에 댈 수 없어도,100년의 세월이 만든 안온한 분위기가 60여명의 손님들에게 입맛을 더하는 듯했다. 이 가게 단골인 선술집 평론가 오타 가즈히코 도호쿠공예대학 교수는 “이곳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변화를 하되 손님이 눈치를 못 채도록 하고, 손님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안심하게 된다.”고 그 비법을 설명했다. ●장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가게도 이쑤시개 하나로 300년간 장사를 해온 ‘사루야’는 이쑤시개를 손으로 깎는 장인들이 몇명 남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위기라면 위기입니다.” 주식회사 사루야의 사장인 야마모토 가즈오의 상황인식이다. 장인이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최대량은 2000개인데 450개 들어가는 수제 이쑤시개 한 봉지의 판매가격이 1500엔이니, 기껏해야 꼬박 하루를 일하고도 6000엔 정도밖에 못 버는 셈이다. 그나마 도쿄 인근의 지바에 있던 장인은 없어지고, 오사카쪽밖에 남지 않았다고 야마모토 사장은 걱정이 태산이다. 그렇지만 활로가 없지는 않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해 내는 슈퍼마켓용 이쑤시개 공급이 1년 매상 1억 5000만엔 중 60%를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사루야의 브랜드가 들어가는 수공 이쑤시개는 중국에서도 들여오기 시작했다.“세월이 흘러도 이쑤시개 수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야마모토 사장은 수제 이쑤시개의 전통은 중국산을 통해서라도 잇겠다는 생각이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장인이 만들어낸 이쑤시개로 브랜드를 지켜가겠다는 생각이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 1951년 도쿄에는 잿더미 속에서도 전통을 부활하고 지켜가자는 뜻에서 ‘도토우노렌카이(東都のれん會)’라는 협회가 결성됐다. 가업 승계 3대·창업 100년 이상, 도쿄 시내에 자기의 가게를 갖고 있는 엄격한 조건을 갖춘 시니세 55개 점포가 모인 것이다. 김, 기모노(일본 전토의상), 전통과자, 이쑤시개, 빗 같은 다양한 업종으로 구성된 이 협회는 일본의 독특한 가업승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협회의 고문격인 호소다 야스베는 “세월이 흐르고 길러야 생존하는 이끼 같은 존재가 시니세”라면서 “이끼처럼 지키고 키워가는 것이 바로 시니세의 비밀”이라고 말했다. marry04@seoul.co.kr ■ 150년된 민물장어집 ‘지쿠요테’|특별취재팀|도쿄의 번화가 긴자의 180평에 자리잡은 민물장어집 ‘지쿠요테(竹葉亭)’ 본점은 15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어둑한 돌다리를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다다미가 깔린 80년된 목조 건물에 다다른다. 침침한 불빛 아래의 널찍한 상이 보인다.1980년 부엌을 개조하고,3년 전 방바닥이 흔들거려 손을 본 것 말고는 처음 지어진 모습 그대로다.7대째 사장인 벳푸 마코토(60)는 “정원이건 실내건 가급적 손질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장어의 배를 갈라 그대로 굽는 간사이(關西)지방과는 달리 등을 갈라 한번 쪄낸 뒤 구워, 소스를 발라내는 간토(關東)지방 요리법을 고수하고 있는 이곳에는 하루 100명의 단골손님이 드나든다. 보통 한명에 1만 2000엔 정도의 코스요리를 먹는다고 할 때 하루 100만엔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1평에 6100만엔, 일본에서도 1급지로 불리는 긴자에 지쿠요테가 깔고 있는 땅값만 111억엔. 요리 장인 10명을 포함한 종업원 30명의 인건비, 재료비, 유지비 등을 계산하면 가게를 갈아엎고 빌딩을 지어올리는 편이 짭짤할 법하지만 장어구이를 고집하는 까닭은 뭘까. “노렌(가게 입구에 쳐진 무명천)을 지킨다는 생각입니다.” 이들에겐 고객과 맺은 신용의 상징, 노렌이야말로 시니세 어디를 가든 걸려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자랑인 듯 보인다. 이곳의 요리부는 일본 정통요리(가이세키)를 만드는 5명과 민물장어만을 다루는 5명으로 나뉘어져 있다. 민물장어부는 이 가게에 15살 때 들어온 대장(56)이 요리장이다.‘꼬치꽂기 3년, 칼로 다듬기 5년, 굽기 평생’이라는 업계의 속담처럼 대장은 다듬어진 장어를 구워, 그릇에 담아내는 일만 한다. 두번째(61세), 세번째(36세) 장인까지만 요리의 전 과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장어를 다듬거나 장어에 바르는 양념장(다레)을 전담한다. 네번째(22세) 요리사는 꼬치를 끼고, 막내(18세)는 온갖 잡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운다. 도쿄 대공습 때 장이 든 단지를 먼저 대피시켰을 만큼 양념장에 쏟는 정성은 각별하다. 전국의 10개 지점 어디서나 똑같은 지쿠요테의 장어구이 맛을 내는 비결은 바로 장인이 이어온 양념장에 있다는 것이 벳푸 사장의 설명. marry04@seoul.co.kr
  • [사설] SK의 ‘사회적 약자’ 특채 기대 크다

    지난해 노동계가 임단협의 주요 의제로 ‘사회공헌기금’ 조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로 한 뒤 소외계층을 배려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대기업 임직원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무료급식 현장에서 자원봉사하는가 하면, 경제단체장들은 쪽방을 찾아 양극화 그늘에 가려진 불우이웃들을 위로했다. 또 사회단체나 대학에 대한 기부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불과 1년 사이에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기업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성장이 보장된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SK가 발표한 ‘사회공헌 로드맵’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내용면에서 앞으로 3년간 3100억원을 투입해 40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도 눈길을 끌지만, 전체 채용인원의 일정비율을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 기초생활보장 수급권 자녀 등 대학 특별전형 합격자 중에서 특채하겠다는 것은 신선한 시도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제시했던 소외층 지원 프로그램이 일회성, 전시성 성격이 짙었다면 SK의 로드맵은 일부이기는 하나 안정적 일자리 공급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술 습득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기술을 습득하더라도 안정된 직장을 잡기란 극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정부가 고용의무제나 각종 지원금제도 등을 통해 소외층 구제에 나서고 있으나 기업이 자발적으로 호응하지 않으면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따라서 기업도 기부식 사회공헌 방식을 뛰어넘어 SK처럼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통해 소외계층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원제도를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기업들은 지금 66조원이 넘는 현금을 쌓아둔 채 투자할 곳이 없다고 푸념한다. 자신만을 위한 투자로 시선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주변의 불우이웃으로 눈길을 돌려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할 때다.
  • [독자의 소리] 보호관찰소는 ‘수용기관’ 아니다/노청한

    4월27일자 1면 톱 ‘범죄 피해경험이 범죄 부른다’ 기사를 관심을 갖고 읽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최근 펴낸 ‘소년범의 범죄화 과정 및 보호방안 연구’ 보고서를 분석한 특종으로 ‘청소년기의 범죄 피해경험이 경험으로만 머물지 않고 가해를 학습시킴으로써 범죄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는 요지이다. 끊이지 않고 대물림되고 있는 학교폭력이나 군대내 가혹행위 등과 무관하지 않은 유용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사에서는 이 보고서가 “전국 9개 보호관찰소에 수용돼 있는 소년범 1000명을 개별면접 방식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시의성 있고 심층 분석한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혼동할 수 있는 ‘옥에 티’가 있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년원은 수용기관이지만 보호관찰소는 수용기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용하고 있는 청소년이 아니라 보호관찰하고 있는 청소년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우리나라에 보호관찰제도가 도입된 지 벌써 16년이다. 전국 35개의 보호관찰소에서 연간 15만명에 이르는 보호관찰,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 대상자에 대한 법 집행업무를 맡고 있는 데도 열독률이 높은 신문사가 형사사법체계의 중심축인 보호관찰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 다른 언론사도 ‘보호관찰’을 ‘보호감찰’로,‘보호관찰관’을 ‘감찰관’으로, 심지어 보호관찰과 각종 명령을 집행하는 업무를 보호관찰 공무원이 아닌 경찰이 맡고 있다고도 했다. 형사사법 절차의 근간에 어긋나는 내용이다. 그때마다 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같은 부정확한 기사로, 전국에서 주·야간 범죄 예방을 위해 진력하는 보호관찰 공무원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걱정된다. 노청한
  •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분노의 30년…위령비 찾는 한국인 이젠 친구”

    ■ 가족잃은 피해자들의 용서 “36년 전 총질을 해대던 그들에게 난 이미 죽었어. 하지만 정말로 눈 감기 전에 당신들이 날 찾아와 줬구먼. 우리 손자가 살아 있다면 딱 당신들 또래일 텐데….” 김현아(38·여)씨는 베트남 할머니 응웬티니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2003년 8월 어느날, 베트남 쾅남성의 시골마을 투이보촌. 마을 어귀에서 위태롭게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응웬티니 할머니는 그의 손을 꼭 감싸쥐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턱을 힘겹게 움직여 짓는 희미한 미소. 한국군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증오와 절망의 세월을 지내온 할머니는 그렇게 원수의 나라와 화해를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85세로 세상을 떴다. 김씨를 비롯한 시민단체 ‘나와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우연히 베트남의 항구 도시 다낭에 갔다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전해듣고 현장을 찾았다. 응웬티니 할머니를 통해 들은 67년 12월21일의 이야기는 참혹했다. 한국군 1개 소대가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며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땅굴로 숨은 주민들을 밖으로 끌어내 무차별로 총질을 했다.145명이 죽었다. 응웬티니 할머니는 아들과 딸, 사위를 잃었고 3살배기 손자는 품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 자신도 왼쪽 턱과 혀 반쪽이 날아갔다. 쾅아이성 푹빈촌에서 만난 응웬리(75) 할아버지는 “66년 9월 한국군을 피해 사탕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와 형제, 조카 등 9명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면서 내내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울부짖었다. 같은 마을 레티티엣(64) 할머니는 “갓난 아들을 보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아들은 뇌손상을 입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끔찍한 기억을 가진 베트남 사람들과 그 말을 믿기 어려웠던 한국인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당혹스러웠다. 마을 어귀부터 서럽게 울면서 따라다니는 할머니도 있었고, 간간이 노려보거나 원망을 토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매월 할머니·할아버지 10명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고, 피해 지역 묘지 조성과 위령비 건립, 베트남 평화 기행, 한-베트남 평화 캠프 등을 통해 ‘속죄’를 구하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66년 10월 112명이 죽은 쾅아이성 지엔니엔촌 사건의 생존자 팜티메오(85) 할머니도 그랬다. 가족 11명이 죽었고 자신도 가슴에 커다란 총상이 남아 있다. 나직이 말을 이어가다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는 “내가 우니까 부담스럽지 않으냐.”며 오히려 마주앉은 한국 사람들을 걱정했다. “한국인인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때의 한국 군인들은 증오하지. 하지만 당신들은 그때 겨우 태어난 사람들인걸. 그동안 아무도 묻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정말 고마워.” 69년 10월 쾅남 빈영사 사건에서 일가족 8명을 잃은 판반카(72) 할아버지는 “30년간 한국 사람들에게 치를 떨었지만 2002년부터 꾸준히 찾아와 위령탑에 진심으로 참배하는 한국인들을 이제는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 했던 한국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그래선지 한 할머니는 2003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소식에 또다시 같은 일을 한다며 걱정해 주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가 먼저 화해니 용서니 하는 것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해지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삶에 작으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전쟁 피해자인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도 동참하고 있다. 평화 박물관 사업은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당시 83세)·김옥주(당시 77세) 할머니가 “더 이상 우리 같은 전쟁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며 낸 성금 7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추진됐다. 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이옥선(79) 할머니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나와 우리’ 김정우 사무국장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한국군의 행위를 무조건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라면서 “그래야만 우리도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과거사 감추기에 당당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아직도 베트남전을 반공성전이나 국위선양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인접국 ‘진출’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베트남전을 진실되게 조명하는 노력이 진정한 한·베트남 관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포용의 戰前세대’ 딩반득 교수 “이제는 과거를 닫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 2월부터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딩반득(62) 교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베트남 전쟁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한국이나 미국에 대해 크게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한다. ●베트남 복구위해 평화 택한것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얘기할 때면 저는 늘 괜찮다고 말합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한국이 싫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평화를 원했고 썩은 시체와 말라버린 초목만 남은 나라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싶었기에 베트남은 증오를 버리고 평화를 선택했다고 딩 교수는 전했다. 그는 전쟁 당시 하노이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4년간 학생들과 산에서 숨어 지냈지만 도시에 떨어지는 폭탄,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성 등 전쟁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썩어가는 시체들조차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잠을 설치게 만드는 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그에게는 커다란 괴로움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사과는 감정적인 문제”라면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과거에 대한 사과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베트남 투자, 영화, 한류(韓流)로 대표되는 문화적 교류로 양국이 함께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엽제 피해 대물림… 꼭 해결돼야 그는 양국의 우정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딩 교수는 “고엽제로 인한 고통은 전후 세대까지 대물림되고 있다.”면서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베트남의 동반자로 인정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냉정한 戰後세대’ 원지통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의료·교육 등 어떤 식으로든 베트남에 한국은 보상을해야 합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베트남 학생 원지통(26)은 한국에 대해 전쟁 세대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는 한국인의 모습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죠. 한국·베트남 우호 관계를 말할 때 흔히 투자를 얘기하지만 그건 한국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베트남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요.” ●“한국 투자가 우리를 위한 선행인가” 원지통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좋아하고 눈물나게 매운 불닭을 즐기며 세련된 차림의 한국사람들에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과거 문제는 별개다. 그는 “윗세대들은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면서 “증오심을 꺼내 보이면 과거 악몽이 떠올라 자신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우리는 동반자’라는 미명 아래 모든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미국 법원이 고엽제 소송을 기각한 데 대해 “고엽제 문제는 누가 누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는가의 차원이 아니다.”라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가족이 고통받고 있는 만큼 미국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나쁜감정은 없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잔혹한 이미지까지 바꿀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갖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베트남 사람들이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독도 분쟁과 비슷한 문제로 중국에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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