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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故박종철군에 명예졸업장”

    서울대는 지난 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희생된 고 박종철군(당시 언어학과 3년)에게 26일 열리는 졸업식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키로 했다.서울대가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에게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대 교무처 관계자는 20일 “박군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는 학장회의 의결이라는 절차가 남았으나 큰 이견은 없을것으로 본다”면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군을 기리기 위해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박종철 기념사업회, 서울대에 명예졸업장 요청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회장 金勝勳 신부)’는 6일 서울대에지난 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고 박종철씨에게 명예졸업장을수여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사업회는 이기준(李基俊) 총장에게 보낸 공문에서 “박씨의 죽음은민주통일운동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겼으며,헌신적인 죽음으로써정의와 진리를 소중히 하는 모범적인 자세를 만천하에 떨쳤다”면서 “오는 25일 졸업식에서 박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해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 관계자는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려면 사정위원회소집 등 행정적 절차를 밟아야 하나 시일이 촉박해 이번 졸업식에서수여 여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발언대] “남영동 대공분실을 박종철 기념관으로”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보안3과에서는 박종철열사 14주기 위령제가 열렸다.박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바로 그 현장에서열린 것이다.실로 14년만의 일이다.정권이 세 차례나 바뀌었지만 이곳은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웠다.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건만 모든것이 그대로였다.침대 욕조 변기 세면기 책상….‘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필자도 14년 전바로 이곳에서 고문과 협박 속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나왔다. 박종철 열사.스무살 꽃같은 젊음은 야수들의 물고문 끝에 스러지고말았다.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아니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열사는 노도와도 같은 87년 6월 대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그리고 이한열열사 조성만열사 강경대열사 김귀정열사 들과 함께 이 나라를 치떨리는 군사독재의 수렁에서 건져내었다. 그렇게 열사들의 죽음에 기대어 우리는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민주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대공분실은 ‘경찰청 보안3과’로 이름만 바뀐 채 지속되고 있다.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거듭나야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박종철 민주기념관’으로 성역화하자.그리하여 어두운 시절에도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열사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힘입어 우리는 민주주의를 일구고 인권을 지켜온,부끄러우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하자.그리하여 열사의 정신을 오늘에 계승하고 이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영원히 수호될 것임을 선언하자.그것이 부끄러운 역사를 자랑스러운 미래로 바꾸는 길이 아니겠는가. 장영달 [국회의원]
  • [현장] “종철아 아부지가 왔대이…”

    “종철아 아부지가 왔대이…” 12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보안분실)509호실. 지난 87년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중이던 박종철(朴鍾哲)군이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이곳에서 박군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렸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스님 3명과 함께 아들이 숨진 현장을 찾은 박정기(朴正基·72)씨는 준비해온 아들의 영정과 위패,촛불,국화·장미꽃다발 등을 제상에 하나하나 올리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지난 14년간 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굳게 닫힌 대공분실의 철문 주변만을 맴돌며 애끊는 마음으로 살아온 박씨. “이제야 너를 편히 보낼 수 있을 것 같구나.더이상 외로워 말고 편히 쉬거래이…” 박씨는 조사실 방 안에 진한 향내음과 함께 경남 양산 통도사 성전암 백우 주지스님 등의 염불과 목탁소리가 울려퍼지자 염주를 돌리며눈을 감은 채 고통 속에 숨져간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떨었다. 어머니 정차순씨(69)는 이날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아들이 고문을 당하다 숨져간 현장을 차마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령제가 끝난 뒤에도 박씨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4평 남짓한 어두운 조사실의 낡은 테이블과 침대,욕조 등을 어루만지며 조사실 곳곳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씨는 “종철이가 외롭게 떠난 자리에 직접 와보니 ‘종철이가 살아 있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매년 기일마다 이 곳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0여분 남짓 치러진 위령제가 끝나고 ‘고밀양춘삼박종철영가(故密陽春三朴鐘哲靈駕)’라고 씌어진 위패가 태워져 욕조 속으로 흩어지자 박씨는 다시 한번 영정 속의 아들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떨구었다. 조현석 사회팀기자 hyun68@
  • [씨줄날줄] 대공분실 위령제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20분.서울 남영동 경찰청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수사를 받던 한 청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선배를 숨겨주고 연계활동을 했다는혐의로 신림동 하숙집에서 잠자다 경찰에 연행된 뒤 4시간여 만이었다. 다음날 경찰은 청년의 죽음 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조사 경찰관이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언어학과3)씨가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순간이었다.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4개월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에 이은 일부 언론의 끈질긴 추적의 결과였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 박씨의 죽음은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정통성 없는 5공 정권의 뿌리를 흔드는 신호탄이었다.당황한 전두환(全斗煥)정권은 ‘박종철열사 국민추도회’와 ‘고문추방 대행진’을봉쇄하는 데만 10만명에 가까운 전투경찰을 동원해야 했다. 당시 각종 집회의 열기는 지켜보는 이의 숨마저 가쁘게 할 만큼 후끈했다.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으로 연결됐다.“종철아,잘 가거래이.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아들의 뼛가루를 뿌리며 흐느끼던 아버지의 모습은 민주화운동의 뒤쪽에 서 있던 이들에게도 가슴 저미는 아픔을 안겼다. 박씨의 위령제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다. 14주기를 이틀 앞둔 12일 아버지와 어머니·스님 등 3명이 참석해 박씨의 넋을 위로한다고 한다.‘인권수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고 있는 509호실을 유족들이 직접 둘러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고문 20여분 만에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물고문 욕조를 살펴보게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세상 돌아가는 데 어둡던’ 말단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뒤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로 나왔다.지금은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아들을 떠올리며 민주화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이들의 가족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민주화의 밀알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유명·무명 인사들의 노력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는 이 시대를가꿔 나가고 있는 것일까. 박씨의 14주기를 맞아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최태환 논설위원 yunjae@
  • 대법원 이근안 7년 확정

    대법원 제1부(주심 朴在允 대법관)는 26일 납북어부 김성학(金聲鶴)씨를 불법 감금하고 고문한 혐의로 기소된 전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이근안(李根安·62)피고인에 대한 상고심에서 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판결문에서 “제시된 증거 등을 종합해 볼 때 범죄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조치는 정당하고 양형이 무겁다는 피고인측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 지난 85년 12월 김씨를 70여일동안 감금하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한 혐의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 진 뒤 지난해 10월 10년10개월간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자수,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왔다. 김경운기자
  • [여성 선언] 박종철 열사를 생각함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묘지에 가면 입구 오른편 언덕빼기에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그곳은 원래 일반 공원 묘지였으나 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쓰러져간 넋들이 하나 둘씩 묻히면서 민주화의 성지가 되어 참배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중의 하나는 스물두살 꽃다운 나이에 물고문,전기고문으로 처절하게 죽어간박종철 열사의 묘역이다.그만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커다란 모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인물이있다. 1987년,한 젊은이의 고문에 의한 죽음과 그 사실을 단순 사망으로 은폐하려던 사건은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그의 넋은 오래도록 갚아야 할 빚으로남아 있었다. 못다한 그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고도 감히 생각했다. 어쩌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나는 그렇게 학생운동과투옥의 길을 걸었고,쉽지 않은 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그리고 골목마다나붙었던 수배 전단들,그중에는 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행방을 말하지 않았기에 고문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야 했다는 바로 그 선배의 얼굴도 있었다.사진속의 얼굴과 이름 석 자를 보며 자신 때문에 후배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그사람의 수배의 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있다. 또 다른 기억 하나,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어떤사람이 내려오면 수사관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곤 했다.그는항상 험악한 표정으로 나에게 온갖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고,그가 한번 다녀가고 나면 지하 조사실은 팽팽한 긴장이 다시금 감돌았다.당시 나는 그가 누구인지,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이후 그는 매일처럼 TV 화면에 나타났다.그는 안기부의 대공수사국장이었고 지금은 국회의원이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예전 안기부의 부훈처럼 음지에서 일하던 그는 국회의원의 신분이 되어 양지로 나왔다.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벌떡일어나는 악몽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비단 나만이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또 다른 의미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전환점을만든 계기가 된 인물이다.한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참으로 이상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인연이라고 말하기에도 불쾌하고 역겹다.한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냈던 젊은 넋을둘러싸고 그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그 선배라는 사람과감옥에서 고문 은폐 사실을 알고 바깥 세상으로 그 소식을 전했던 사람, 그들을 기소하고 법정에 세워 징역을 살게 했던 사람,스물두살 청년을 고문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 당사자 중의 한 명인 사람,당시의 권력을 움켜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자들이 모두 한 정당에 모여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함께 손을 잡고 모두 한 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불행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가 처절하게 죽음을 맞은 젊은 넋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다시 한번 그를 죽이는 장면이 공개적으로 펼쳐지고 있다.정치란 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만큼의 신비로운 화해의 힘인가,아니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잔인한 탐욕인가.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어쩌면 나 자신으로 인해서도 어떤 다른 이의인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가장 두렵다.한때는 내가 존경하고 그들의 삶을 따라 배우고자 했던 사람들,그들을 이제는 내가 손가락질하고 있다.아직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차가운 땅 속에 누워 있는 박종철 열사는 그의 동지들과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 한편이 되어 손을 맞잡고 있는 광경을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임수경 美코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근안씨 징역7년 선고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具萬會부장판사)는 10일 납북 어부고문혐의로 구속기소된 ‘고문기술자’이근안(李根安·61·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피고인에게 불법감금과 독직가혹행위죄를 적용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지난 85년 납북어부 김성학(金聲鶴·48)씨를 간첩으로 몰아 불법감금하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이같이선고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이근안씨에 법정최고 징역10년6월 구형

    ‘고문기술자’이근안(李根安·61)전 경감에게 법정 최고형이 구형됐다. 납북 어부 고문사건 공소유지 담당변호사인 백오현(白五鉉·49)변호사는 27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具萬會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사건 결심공판에서 이 피고인에 대해 불법감금·독직가혹행위죄를 적용,법정최고형인 징역 10년6월에 자격정지 10년6월을 구형했다. 백 변호사는 논고문을 통해“피고인은 지난 85년 납북 어부 김성학(金聲鶴·48·강원도 속초시)씨의 간첩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김씨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다”며“대표적인 인권 침해사건의 주범이면서도 11년 동안 은신해 열심히 일하는 동료 경찰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밝혔다. 백 변호사는 또“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도 공소시효가 지난 김근태·함주명씨 고문사실은 시인하면서 이 사건 고문사실은 대부분 부인하는 교활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시효가 지났지만 김근태·함주명 고문사건도 양형에참작,법정 최고형을 구형한다”고설명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李根安씨 고문사건 2차 공판

    ‘고문기술자’이근안(李根安·61)전 경감의 납북어부 고문사건에 대한 2차공판이 16일 오전 10시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具萬會부장판사)심리로 성남지원 1호 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는 이 피고인의 납북어부 김성학(金聲鶴·48·강원도 속초시)씨 불법감금,폭행 혐의에 대한 김원진(金源鎭·40)변호사의 반대신문이 진행됐다. 이 피고인은 변호인 반대신문에서“간첩 혐의자에 대한 수사관행상 지난 85년 12월 김씨를 불법 연행,70여일 동안 감금하고 불가피하게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일부 혐의는 시인했지만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에 대해서는“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이날 법정에는 납북어부 김씨와 민주주의 민족통일 경기동부연합 소속 회원 10여명이 나와 재판을 지켜봤으며 일부 방청객들이 소란을 벌여 공판이 20여분간 중단되기도 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이근안씨 사건·행적 전모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 전 경감의 10년 10개월간의 도피행각과 이씨가 85년 민청련 의장이던 김근태(金槿泰·현 국민회의 부총재)씨 고문사건 등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사실이 검찰 수사결과 낱낱이 드러났다. ■도피행각 88년 12월24일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이던 박처원(朴處源)씨의 지시로 도피에 들어갔다.이씨의 도피행각은 지방도피,지방도피 및 서울아파트 은신,아파트 은신,가족과 동거 등 4단계로 이뤄졌으며 도피 당시 전치안본부 대공분실 2반장인 김수현씨와 손위처남 부부,가족 외에는 접촉하지않았다.항간에 나돌던 중국 도피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도피지원 세력 이씨는 도피생활로 가정이 어려움에 처하자 ‘생활비를 지원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인을 통해 박씨에게 전달해 98년 6월 1,500만원을 지원받았다.도피 초기 3년 가량은 대공분실 직원들이 매달 30만원씩마련해 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자수동기 장기간에 걸친 도피·은신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생활고 등을 이기지 못한데다 납북 어부 김성학씨에 대한 고문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부하 경찰관 6명 전원이 유죄선고를 받은 데 자책감을 느낀 게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박처원씨의 자금출처 박씨는 지난 88년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김우현(金又鉉)씨에게 대공문제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필요하다며 자금지원을 요구,김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라모씨의 소개로 당시 파라다이스개발 회장이던전낙원(田樂園)씨를 만나 기부금조로 10억원을 받아 경찰간부를 통해 박씨에게 건넸다. ■김근태 고문사건 85년 9월5일 박씨의 지시를 받고 이씨가 김근태씨 고문사건에 가담,대공수사요원 8명과 함께 23일 동안 김씨의 옷을 벗기고 고문대(속칭 칠성판)에 눕힌 뒤 전기고문,물고문,고춧가루고문 등 모두 10회에 걸쳐고문을 했다. 주병철기자 bcjoo@
  • 張永達의원 고문경험담

    이근안(李根安)사건과 관련,박처원(朴處源) 전 치안감에 대한 검찰 수사가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17일 국민회의 장영달(張永達)의원이 고문받은 경험담을 털어놓아 시선을 끌었다. 장의원은 이날 ‘차라리 죽여달라고 매달려야 했다’는 제목의 논평에서 “내 청춘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30여차례의 연행과 구류,8년여에 걸친 투옥생활로 독재권력의 형벌에 묻혔고 이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문에 시달렸다”고 말문을 열었다. 고문대인 ‘칠성판’에 누워 고문이 가해지기를 기다려야 했고,두 손과 발이 묶여 허공에 매달린 채 ‘매타작’을 당했다고 말했다.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 채 진술을 강요당했고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구둣발에 짓밟히며 바닥을 기었다고 술회했다. 특히 지난 86년 8월 말에는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처원(朴處源) 당시 경무관의 방으로 직접 끌려가 온갖 회유와 협박,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장의원은 밝혔다. 김대중(金大中) 당시 야당지도자와 ‘연계시키려는 작업’이 실패하자,박씨는 부하들을 시켜 물고문,몽둥이 타작을가했다고 털어놓았다.무지막지하게가해지는 고문에 장의원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소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장의원은 “고문으로 괴롭힌 자들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지만 독재권력의하수인으로 고문을 자행한 박처원·이근안 등에 대한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이들이 국민 앞에 사죄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유민기자 rm0609@
  • [사설] 고문없는 나라 만들기

    고문수사 사건에 관련됐던 전직 경찰관들을 상대로 국가가 구상권(求償權)청구에 나섰다.국가는 28일 경찰청을 소송수행자로 삼아 박종철(朴鍾哲)씨고문치사 사건과 김근태(金槿泰)씨 고문 사건에 가담했던 강민창(姜玟昌) 전 치안본부장 등 전 치안본부 소속 경찰관 13명을 상대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한 금액을 갚으라”며 각각 2억4,000여만원과 5,890여만원의구상금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낸 것이다. 국가는 지난 87년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씨 유족과 85년 고문수사를 당한 김근태씨(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각 패소가 확정돼 모두 2억9,890여만원의 손해배상을 한 바 있다. 강제연행과 고문수사는 명백한 불법행위다.따라서 공무원이 불법행위로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면 국가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구상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그런데도 이 사건에서 구상권을 행사할 것인지를 놓고 그동안 논란이있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고문은 그 자체가 비인도적인 범죄행위다. 범죄를 징치(徵治)하는 게 국가의 임무 아닌가.더구나 국민의 정부는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고문 경찰관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면일선 수사관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은 전시대적 발상이다.고문을 자행한 수사관은 형사 처벌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도 받아야 한다.그래야만 고문의 불법성에 대한 경각심이 생긴다.따라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정부가 이들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을 평가하고 싶다.그것은 고문을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대공수사기관에 끌려간 피의자들에게 혹독한고문이 가해진다는 것은 국민적 상식이었다.잠안재우기,물고문,전기고문,비녀꽂기,통닭구이 등등 고문의 종류도 갖가지로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였다.고문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것은 부도덕한 정권이 그것을 용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용공조작도 서슴지 않았다.이런 경우 당연히 고문이 동원됐다.고문행위가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당국은 고문이라는 말 대신 ‘가혹행위’라는 말을 썼고 언론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쓴적도 있다.그러나 이제는 그런 암울했던 시대와 결별해야 한다.고문 경찰관들에 대한 정부의 이번 구상권 행사가 ‘고문 없는 나라’ 만들기의 의미있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 서양화가 홍성담 ‘1999 탈옥’전

    ‘오월(五月)화가’‘통일화가’‘인권화가’….서양화가 홍성담(45)에게는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그러나 그는 정작 80년대 민중미술계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활동가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심정이랄까.요즘 그는 한 단계 성숙한 의식과 명상을 통한 자아의해방을 꿈꾼다.1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1999 탈옥(脫獄)’전은 저항에서 명상으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의식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다.이런 배경 아래서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는 민중미술이 태동한 것은 당연한 시대적요구였다.홍성담은 변혁운동의 중심부에서 민중적 사실주의 미술운동을 펼쳤다.89년에는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사건으로 투옥돼 3년간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그 감옥의 기억은 지금도 작가의 의식을 옥죄는 심리적 올무다.이번 전시에서는 일련의 ‘감옥’ 연작을 통해 감옥으로부터의 진정한 탈출을 시도한다.고문과 감옥이라는 소재를명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홍성담의 탈옥’은 무한한 상상의 지평을 얻는다.특히 그의 근작들은 민중미술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줘 관심을 모은다. 전시 작품은 크게 옥중체험을 토대로 한 ‘식구통(食口通)’연작과 ‘밥’연작,물고문 명상시리즈,92년 출소 이후의 대표작들로 나눠 볼 수 있다.옥중장면 그림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정사각형 캔버스 화판에 흙으로 만든 안료로 그린 ‘밥’연작이다.‘밥’ 사상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수십개의 화판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또 저항과 명상이라는 주제를 차분히 소화해낸 ‘물속에서스무날’도 주목할만한 작품.작가의 물그림 시리즈는 유화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1996)와 같은 직설적인 배설(排泄)의 작품에서부터 연꽃이 피어오르고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이 잠을 자는 상생(相生)의 경지를 다룬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그 그림들은 선(禪)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표현한 ‘십우도(十牛圖)’를 보는 것 같은느낌을 준다.나아가 작가가 대립과 갈등의 터널을 빠져나와 화해와 상생의밝은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번 전시는 내용뿐 아니라 양식적인 면에서도 특색이 있다.작가는 자신의사회적 이념과 내면세계를 도상학적인 형태로 보여준다.부적문양과 물결문양 등 민화나 전통회화의 도상양식이 등장한다.그의 작업은 캔버스에 종이찰흙으로 부조형태의 도상(圖像)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20여가지의 흙과 안료를 발라 색을 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감옥이나 고문 등 강한 주제를 부드러운 흙색으로 녹여내고 있어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한다. ‘1999 탈옥’전은 작가가 서울에서 갖는 첫 개인전이다.지난 20년동안 우리 역사의 현장을 뜨겁게 지켜온 ‘저항화가’로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계에공식 데뷔하는 셈이다.그런 만큼 그의 각오는 새롭다.“멕시코 혁명기의 3총사 화가였던 시케이로스와 오로스코,리베라는 만만찮은 성과를 남겼음에도항상 제3세계 작가로 폄하되곤 합니다.저항성에 치중하다 보니 직관에 의한명상이 부족했던 것도 그 한 원인이죠.저항과 명상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되는 진정한 리얼리즘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김종면기자 jmkim@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끝)-리영희교수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기의 내부에서 무너지는 괴로움은 매우 큰 것이다.절대적인 것,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잠을 캐우는-괴로움을 준다’(‘우상과 이성’(한길사)서문 일부). 70년대 중반부터 10여년동안 ‘지성의 전당’ 문턱을 넘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대했을 문구다.그 속에는 단숨에 책을 읽은 뒤,뿌옇게 밝아오는 창문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부르르 떤 기억도 배어있을것이다. 리영희씨(70·한양대 대우교수)의 ‘우상과 이성’은 대학 새내기들에게 ‘껍데기를 벗는’ 아픔을 준 동시에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리교수 자신도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가장아끼는 저서라고 말한다. “제 책을 읽은 많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감옥 등 예기치 못한 길로 접어든 사실에서 ‘도의적 미안함’같은 게 들 때가 있습니다.하지만 다시 그런상황이 오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겁니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산 입구에 자리잡은 한양아파트.정체성 없는 삶이 싫어아파트에 문패를 달고 사는 ‘당대의 논객’은 여전히 꼿꼿했다. ‘대쪽과 선비’.리교수의 삶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기자와 교수로서 두번씩 ‘잘린’ 기이한 인생역정은 현대사에서 양심을 지키려면 당연히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였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짓’이 태생적으로 맞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왔나 봅니다.특히 대중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면서 개인적인 치부나 향달에 몰입하는 권력집단의 거짓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그들은 전 국민을 비인간화하고 인간다운 권리와 정체성을 박탈하는 집단이죠” ‘거짓과의 싸움’.아주 쉬워 보이지만,그러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 소신을 지키기 위해 리교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64년 11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가시밭길 인생길이 열린다.‘대기자’의 꿈을 품고 57년 ‘언론계 공채 1호’로 합동통신에 들어간 뒤 7년만에 부딪친 첫 필화(筆禍)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비동맹회의 외상들이 남북한 대표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유엔가입 문제를 논의한다’는 기사를 썼는데 ‘반공법 위반’의 올가미를 씌운거죠.해설기사도 아니고 있는 사실만 다루었는데 죄가 되었던 것은박정희가 서서히 군부독재를 강화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선고유예로 나왔다.‘거짓’과 타협할 줄 모르던 ‘지성’은 마침내 68년 해직통보를 받았다.외신부장이던 당시 ‘베트남 파병’의 본질을 꿰뚫고 한국 언론계에선 유일하게 반대논리를 펴다가 회사와정부의 미움을 받았던 것. “정부의 압력으로 강제해직되었지만 사실 제 맘속에도 ‘염증’이 생겼습니다.신문사 간부라는 인텔리가 정권이나 체제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을 속이고 진실을 가릴 능력을 박탈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교수는 이후 1년 6개월 동안 애써 ‘인텔리의 옷’을 벗으려고 노력했다. 할 수없어 ‘책 보따리’장수로 나섰다.소설가 고 이병주씨와 출판사를 차린 뒤 책을 팔려고 서울시내 중·고교를 발이 터지도록 다녔다.그러나 지식인의 때를벗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우선 먹고 사는 일이 힘들더라구요.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지식’으로 먹고 살던 놈이 딴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죠.어쩌면 그 역시 ‘관념론’이었다는 반성을 하고 합동통신사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정쩡한 반지식인이 되기보다는 더 철저한 지식인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극악한 권력’과 더 치열하게 싸우기로 한 것이다.결과는 두번째 옥고였다.71년 1월 박정희가 유신헌법의 고삐를 한창 조일 때 ‘지식인 64명서명’운동을 전개한 혐의다.다시 쫓겨났다.그러던 중 한양대에서 제의가 와 기사 대신에 강의로 양심의 소리를 이어갔다.비록 60만명의 독자는 없어졌지만 ‘우상’에 길들인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이성’을 들려주었다. 첫 결실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 74년)였다.인식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의지는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77년) ‘우상과 이성’(한길사 77년)등 ‘화려한 금서’를 잇따라 터뜨렸다.감옥이라는 코스는 당연했다.만만하면 걸고 넘어지던 ‘반공법 위반’으로 2년을 쇠창살 속에서 보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검·경찰의 합동작품인 ‘불온한 이념서적 30권’ 리스트에 리교수의 저서 3권 모두가 상위에 자리잡았음(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1,2위, ‘우상과 이성’ 4위)은 그의 위치를 증명한다. 그는 언변이 화려하지 않고 눌변이다.그러나 그 속에는 일관되게 ‘지성’을 지켜온 고집이 들어있다.더디지만 꾸준한 걸음이었기에 80년대 거세게 몰아닥친 ‘극좌’의 목소리에도 휩쓸리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잽싸게 변신하는 ‘역풍’에도 초연했다.오히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면서 버티고 있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지만 실제는 절반의 승리와 패배가 공존합니다.이기심에 근거한 동기부여로 물적 생산력을 극대화하여 현실 사회주의에 이겼지만 인간의 가치를 물질의 하위 범주로 만들었거든요.인간을 더 중요시하는사회주의라는 ‘마이신’을 만들지 못하면 타락·부패합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득세하는 현실에 뼈아픈 일침을 가한 그는 마지막으로개인적 소망을 들려주었다. “이제 지적 활동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라고 봅니다.평생고생한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하고 즐겁게 책이나 읽고 싶습니다.무엇보다 노욕(老慾)을 피하는게 최대의 목표입니다.‘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추하지 않고 올곧게 사는게 후학을 격려하는 자세라고 봅니다”이종수기자 vielee@'금지문화'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 해 6월 13일 시작한 기획시리즈 ‘금지문화 금지인생-이제야 말한다’가 23회로 끝을 맺습니다. 대중음악·출판·문학·연극·판소리 등의 다양한 문화판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작품과 그것을 일군 삶을 조명하는 작업은 우리현대사의 기형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금지인생’의 사연은 절절했고 탄압의 빌미는 어쩌구니 없었습니다. 그저 좋아서 부른 서정적 노래(양희은),국토에 대한 사랑(조태일),올바른역사 기술(‘해방 전후사의 인식’),전통 춤이나 소리로 현실을 읊은 것(이애주,임진택,김명곤)이 모두 금지당했습니다. 검열의 잣대도 다양했습니다.“앨범표지가 장발이다”(이정선),“대통령찬가를 만들지 않았다”(신중현),“노래 제목이 물고문을 연상시킨다”(한대수)….공통점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한 권력집단은 늘 ‘당근과 채찍’을 병행합니다.우리가 확인한 ‘금지인생’에는 정권의 당근을 거부하고 채찍을 자청한이들만이 뿜는 향기가 풍겨납니다.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금지인생’이 가르쳐준 지혜도 많습니다.혹독한탄압으로도 ‘진실은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 없다’는 것과 역경을 헤쳐온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의 문화주역으로 각자의 장에서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것입니다.아울러 우리 사회가 진보했지만 여전히 다른 얼굴을 한 ‘금지’는 존재하고 우리의 주역들은 그것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이시리즈는 단순히 먼지 가득한 창고에서 케케묵은 과거를 들춘 게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제기한 셈입니다. 그동안 바쁜 일상생활에도 취재에 협조해주신 여러 ‘금지인생’의 주역들과 시리즈에 관심을 표명해주었던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종수기자
  • 鍾哲이가 그리던 세상은 언제…

    “정권이 바뀌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지만 종철이가 그리던 세상은 아직오지 않았습니다.” 14일 오후 3시 서울대 인문대 ‘박종철 기념비’ 앞. 지난 87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숨진 朴鍾哲씨(당시 23세)의 12주기 추모식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잿빛으로 흐린 날씨 속에 열린 추모식에는 아버지 朴正基씨(71)를 비롯,87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李韓烈씨의 어머니 裵恩深씨(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장),金勝勳신부(60·기념사업회장),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20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했다. 아버지 朴씨는 추모제를 알리는 검정색 플래카드 사이로 아들의 흉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종철이가 떠난 지가 벌써 12년이 지났지만 당시 그 기막힌 심정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새 정부가 출범한 뒤 첫번째로 열린 추모제였지만 아쉬움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金신부는 “우리가 바라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자행된 의문사와 이들의명예회복 등의 조치는 아직도 취해지고 있지 않다”면서 “朴鍾哲열사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은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특사로 풀려난 白씨는 “朴鍾哲열사는 ‘대학문화연구회’ 후배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회상하고 “이제 독재정권의 암흑에서 벗어난 만큼 장기수 문제 등 우리의 인권상황과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40여분 남짓한 추모식이 끝나자 朴鍾哲씨를 위한 추모곡 ‘그날이 오면’이 쓸쓸한 기념비 사이로 메아리쳤다.
  • 민주열사 열전:16/연세대생 李韓烈(정직한 역사 되찾기)

    ◎‘최루탄 희생’ 6월항쟁 시민참여 계기로/대학입학후 사회의식 눈떠 시위 적극 동참/‘뇌사상태’ 알려지자 시민·학생 공감대 확산 1987년 6월9일은 80년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시민 승리의 한 분수령이 됐던 날이다.그날 일어난 연세대생 李韓烈(경영학과 2년)의 최루탄 피격 사건이 민주화 열망이 폭발한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시민들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그는 피를 흘리며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힘없이 동료에게 안겨 있었다.외국기자가 찍은 그 한장의 사진은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에 충분했다.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그 분노의 폭발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신문사진 보고 시민들 분노 이한열은 그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6·10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그리고 오후 5시 쯤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달리다 SY44 최루탄에 ‘직격’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그가 쓰러진 교문 안 3m 지점과 최루탄을발사한 경찰과의 거리는 20m에 지나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쫓겨 들어가던 한 학생에 부축돼 경찰의 손을 피한 그는 동료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申廷淳 세브란스 병원장이 발표한 이한열의 용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입원해 있던 그는 두개골 골절 및 뇌좌상,뇌출혈,뇌이물질 등으로 의식불명이고 수술은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러나 그의 절망은 민주화의 희망으로 승화됐다.그는 입원한지 27일만에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입원기간 동안 밖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도도한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고 있었다. 그 물결은 87년 1월 서울대생 朴鍾哲 물고문 사망사건으로 비롯된 물줄기가 불어난 것이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점화된 국민의 분노는 정권의 고문사건 축소조작 음모가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뜨겁게 타올랐다.4월 5공정권의 직선제 개헌 유보 발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다.‘호헌철폐’‘독재타도’로 압축된 외침은 서서히 학교를 빠져나와 도심 곳곳에 울려 퍼졌다.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독재정권에 결정타가 됐다.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회사원들이 빌딩 위에서 꽃다발과 휴지다발을 던지는 현상을 보고 외국언론은 ‘충격적’이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형태의 민중의 힘’이라고 보도했다.‘넥타이부대’를 비롯한 중산층이 시위에 적극 가세하면서 부터는 6월항쟁을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중산층의 민주화 욕구 분출로 결론짓기도 했다.6월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6월항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인파인 25만여명이 참여했고,결국 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넥타이부대’ 대거 시위 참여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禹相虎씨(36)는 “한열이의 최루탄 피격은 학생과 시민의 결집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6월9일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투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지만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학생·시민들에 확산됐다는 것.그것은 도심 가두시위에 겁을 내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은 당시 학생운동권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와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학년 2학기 이후 시위에 적극 참여했는데,이는 운동권 조직원으로서가 아닌,개인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대학에 들어와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고 분노한 수많은 학생 중 한명이었으며 고문 추방을 외치며 명동과 을지로 골목을 누비던 ‘보통학생’ 중 하나였다. ‘…그대 왜 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끼고 갔는가’라며 박종철의 죽음을 목놓아 서러워 했던 여린 마음의 젊은이였다. 특별히 과격하지도 않은 우리의 착한 아들 딸도 정권폭력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때문이었을까.이한열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시민들은 6월29일 당일보다도 오히려 이한열의 장례일인 7월9일 6·29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했다. ○시청앞 1백만 장례 행렬 연세대에서 10만여명으로시작된 추도행렬은 신촌네거리 노제를 지내며 30만,시청 앞에선 100만여명으로 불어났다.대형 태극기와 영정,‘한열이는 부활한다’‘한열아,너의 가슴에 민주를’ 등이 적힌 300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운구행렬을 수십만의 시민·학생이 따랐다.참으로 장엄했다.그것은 이한열을 애도하는 인파였고,민주사회를 갈망하는 국민 염원의 물결이었다.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의 발전이었다. □양력 ·1966년 8월 전남 곡성 출생 ·82년 2월 광주 동성중 졸업 ·85년 2월 광주 진흥고 졸업 ·86년 3월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87년 6월9일 연세대 교문 안쪽에서 시위 중 최루탄 피격 ·87년 7월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 ◎이한열 어머니 裵恩心 여사/아들 소망 풀려고 민주화 운동/의문사 진상규명 법 제정해야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어두웠던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머니들.이들의 가슴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자식이 죽기전 이루고자 했던 소망도 고스란히 묻혀 있다.이한열의 어머니 裵恩心(58) 여사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관심과 100만 추도 인파 속에 ‘성대히’ 아들의 장례를 치뤄 ‘속없는’ 사람들의 ‘부러움’까지 샀던 배여사.하지만 배여사는 오늘도 여의도 국회 앞 차가운 천막속에 있다.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벌써 24일 째다. “민주를 달라고 싸우다 숨진 사람들이 아직도 범법자의 굴레를 쓰고 있어요.암울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숱한 의혹을 남긴 죽음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이것을 그대로 묻어둔 채 진정한 새출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장례식에서 “이제 다 풀고 가라.엄마가 갚을란다.한열아… 한아 가자,우리 광주로”라고 피끓는 통곡을 토해냈다.그 이후 아들의 소망을 풀기 위해 민주화와 노동운동 현장에 항상 있었고,지금도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배여사는 “대통령도 특별법 제정 검토를 지시했고,국회의원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협조하겠다는데 법안은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며 답답해 했다. ◎피격현장 동료 이종창씨/한열이 모습 아직도 생생/항쟁의 정신 잊지 말아야 6월항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이한열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힘없이 늘어져 있고,한 학생이 그를 껴안은 채 분노의 눈빛으로 앞을 쏘아보고 있는 사진이다.로이터통신 기자가 극적으로 잡은 이 장면은 세계 곳곳으로 한국 민주화투쟁을 알리는 생생한 기록으로 알려졌다. 그 분노한 눈빛의 주인공인 이종창씨(32·연세대 상경대도서관 사서)는 “‘내일 시청 앞에 가야 하는데’라고 힘없이 말하던 한열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도서관학과 2학년이던 그는 그날 학교 앞 택시정류장 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경찰에 쫓겨 최루가스로 거의 앞이 안보이는 상태에서 뛰어 들어가다 왼쪽에 검은 물체를 느꼈지요. 한열이었습니다. 20여m 앞에 전경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를 껴안고 무조건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는 이한열을 20m 이상 끌고 가다 먼저 쫓겨갔던 학생들이 달려왔을 때에 야 기진맥진해 주저앉았다.“쓰러진 한열이가 경찰 손에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씨도 6월항쟁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다.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은 며칠뒤 그 또한 학교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았다.2회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한 가운데 있던 그는 항쟁의 정신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 했다.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는 학생들에게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진을 보이자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라는 것.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던 그때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의 참뜻은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꼭 살아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고문 기술자 李根安 정식재판/서울고법,피해자들 재정신청 받아들여

    ◎잠적 10년째… 시효 15년 다시 적용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 李根安 전 경감(60)이 잠적 10년 만에 정식재판에 회부됐다.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朴松夏 부장판사)는 28일 납북어부 金聲鶴씨 등 3명이 고문에 못이겨 간첩으로 몰렸다며 지난 87년 李씨 등 당시 경기도경 소속 경관 16명을 상대로 낸 재정신청에서 李씨 등 8명에 대한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신청인 金씨와 피신청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때 李씨 등 8명은 金씨를 70여일 동안 불법 감금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조사하면서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잠을 재우지 않고 폭행·물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李씨 등 8명은 불법감금 및 가혹행위 혐의로 이 사건 관할인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정직재판에 회부된다. 그러나 李씨는 지난 88월 12월 잠적 이후 10년 가까이 검경의 추적을 피해왔기 때문에 실제 李씨를 법정에 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잠적 때부터 기소중지 상태였던 李씨는 이날 정식재판에 회부됨에 따라 앞으로 재판시효 15년이 만료되는 오는 2013년까지 신병만 확보되면 언제든 법정에 서야 한다. 물고문·전기고문 등 국민회의 金槿泰 의원의 고문사건으로 ‘저승사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李씨에 대해 법원이 뒤늦게 재정신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李씨의 사법처리 여부는 다시 한번 수사기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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