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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은소리] “장애인 눈높이로 세상보기 나섰죠”

    [낮은소리] “장애인 눈높이로 세상보기 나섰죠”

    ■ ’장애인 주권알리기 활동’ 김주영씨 “하고 싶었던 것은 나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나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만나기로 한 그 날, 하필이면 늘 다녔다는 그 길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약속장소에서 직선거리 10m를 남긴 채 잠시 난감해하던 그는 전동휠체어를 이내 돌렸다. 인터뷰는 그렇게도 ‘지극히 현실적’으로 시작됐다. 지체 1급 장애를 지닌 김주영(26)씨.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다. 휠체어가 아니면 외출은 꿈도 못 꾼다. 장애가 심한 그가 지난해 직접 주인공으로 나서고, 내레이션은 물론,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도맡으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외출 혹은 탈출’.11분 54초라는 짧은 러닝 타임에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다큐는 지난 5월 KBS 1TV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인 ‘열린채널’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또 최근 각종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덕분에 이제는 유명인. 동네 지하철역 직원에서부터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까지 그를 알아보고 “잘봤다.”며 말을 건넨다. 그럴 때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자기를 알아봐줘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작품을 보고 장애인에게 한발 더 다가오는 비장애인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이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 안에만 있으면 악순환만 계속되는 것 같아요. 장애인이 편하게 나다니기에는 너무도 열악한게 우리 현실이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시각을 바꾸면 안 나오려고 해도 결국 나서게 되더군요.”그가 다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 여름. 비장애인과 함께 하는 미디어교육이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말 그대로 ‘무작정’ 갔다. 아니 작정은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상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 달랑 그거 하나였다. 김씨 역시 취직을 생각 안해본 것은 아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수술받아 몸을 추스린 뒤 전문학사를 따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다. 역시나 어느 곳에서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보통의 장애인처럼 그에게도 ‘밖’이라는 단어는 ‘공포’나 ‘두려움’일 뿐이었다. 어려운 길일수록 이것저것 고민하면 안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아닌가. 그냥 무엇인가 해보자며 나섰다. 그 첫걸음이 그의 삶을 차츰 바꿨다. 말이야 쉽지, 처음에는 광명 집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간다한들 강의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카메라를 만져야 하는데 김씨에게 그나마 자유로운 손은 오직 오른손 한쪽뿐. 처음에는 카메라 만지기조차 무서워 멍하니 쳐다만 봤다. “그만 둘까도 했는데 이럴거면 왜 나왔나 싶은 오기가 생기더군요.”오기는 무서웠다. 촬영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의 손길도 뿌리쳤다.“직접 해보고 싶다.”, 정말 그거 하나였다. 아예 6㎜ 비디오카메라를 휠체어에 달았다.“내 눈높이에서 세상을 그대로 담기로 했죠.”한시간짜리 테이프는 어느새 6개나 쌓여갔다. 물론 온전히 혼자의 힘은 아니었다. 저시력장애인 김언식씨와 비장애인 홍승아씨와 함께 작업했다. 처음에는 참 많이 다투기도 다퉜다.“돌이켜 보면 장애와 비장애를 뛰어 넘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지요.” 김씨는 내친 김에 한발 더 나아갔다. 다큐 찍은 인연으로 지난 3월부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맡은 업무는 장애인 관련 방송 모니터링. 매주 20시간에 월급은 30만원, 기간은 6개월이다. 그래도 김씨는 즐겁다. 제 힘으로 번 돈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보처리사 자격증까지 땄다. 여기에다 이번 가을 두번째 장애인미디어교육 때는 ‘조교’로 나선다. “장애인이 이동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지만 장애인의 하루가 마치 48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아직도 많아요.‘외출’이 ‘탈출’이 아니라,‘진정한 외출’이 될 때까지 영상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서글프게 웃긴’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김씨가 휠체어를 타고 가면 꼬마들이 엄마를 붙잡고 물어본다.“엄마, 저 누나는 왜 저래?”어머니는 뭐라 대답했을까.“엄마 말 안들어서 그래.”장애인의 진정한 외출을 위해 그가 카메라를 들고 찍고 또 찍어야 할 이유다. 광명 글 사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현실의 벽’ 깨는 장애인단체들 김씨는 사실 예외적인 경우다. 현실의 벽은 여전하다. 장애인 4명 가운데 3명은 한 달에 한 번 외출할까 말까다. 여기다 장애인들은 대부분 실업자다. 당장 생계문제가 급하다. 이런저런 문화행사가 있다지만 ‘그림의 떡’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김씨처럼 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 스스로를 표현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연극 영화 노래 등 장르도 다양하다. 고생해가며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한다. 그들도 표현욕구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제 장애인들도 “문화 즐기기”에서 “문화 만들기”로 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대에서, 카메라 들고, 마이크 잡고… 비장애인들이 장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3회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장애인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들이 출품됐다. 김씨처럼 장애인 작품이 퍼블릭액세스 채널을 통해 공중파를 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장애인단체들이 서서히 문화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서서히 미디어교육이나 영상워크숍 등을 꾸리고 있다. 이 가운데 장애여성문화공동체 끼판은 연극에서 영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미 연극을 통해 인정받은 연출력과 연기력이 자산이다.2003년부터 연극팀 ‘춤추는 허리’를 결성해 활동하는 장애여성공감도 있다. 중증 장애인이 중심이되 비장애인과 함께 활동하는 극단 휠도 단발 공연에서 순회공연으로 슬금슬금 영역을 넓히고 있다. 노래도 인기다. 2003년 장애인노래패 ‘시선’을 앞세워 공연을 열었던 장애인문화공간은 올 가을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노래 공연을 다시 열 생각이다. ●우리 얘기는 우리 입으로…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의 시선으로 자신들을 얘기한다는데 있다. 기존 문화나 매체들이 장애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존 문화 매체들이 나빠서라기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시선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왜곡된 모습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잡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다. 최재호 장애인문화공간 대표는 “왜곡을 고치려면 직접 말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이제는 장애인 스스로 느껴서 만든 문화를 비장애인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혹, 먹고 사는 문제와 이동권마저 보장이 안된 상황에서 조금은 사치스러운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이에 대해 정영란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은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들처럼 문화에 대한 재능과 끼가 있다.”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것이 이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은 일부 장애인들의 얘기들일 뿐이다. 그래도 희망은 접지 않는다. 누군가 통로를 열어두면 다른 장애인들도 적극적으로 문화 활동에 뛰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박성준 장애인문화센터 팀장은 “아직 바깥 세상과 단절된 장애인들이 더 많다.”면서 “이들을 열린 공간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문화를 만들고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태성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장애인 창작활동 애로점 장애인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산넘어 산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실제 공연 무대도 마련하기 어렵다. 장애인 입맛에 맞는 영상 기자재도 없다. 그 중 으뜸은 역시 재정 문제다. 최근 늘고 있는 장애인 주체 문화 창작 활동은 대부분 비영리 민간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회비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이들 단체는 사무실 유지 등 기본 운영비를 마련하는데도 헉헉 거리는게 현실이다. 그러니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못한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때문에 이들 단체들은 대부분 정부나 지자체의 예산이나 기금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서울시 장애복지계정이나 여성발전기금, 사회복지기금 등이 내건 이런저런 사업 공모에 지원서를 내는 것이다. 이것도 거의 각개격파식이다. 각 개별 기관에서 따로 추진하는데다 정례화된 것도 아니고 단일화된 창구조차 없다. 노리고 있다가 재깍 신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기금이, 어떤 예산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다 보니 이름이 덜 알려진 소규모 단체들은 지원서 한장 내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박성준 장애인문화센터 팀장은 “예산이나 기금이 급격하게 늘어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 현실”이라면서 “예산·기금 등을 다루는 곳과 장애인 문화창작단체 사이의 정보를 한꺼번에 공유할 수 있는 센터나 인터넷사이트 등 허브축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올해 정부 예산 가운데 장애인 복지재정은 7393억원. 지자체 소관으로 이전된 부분이 있어 지난해보다 9.5% 줄었다. 내역을 들여다 보면 창작 활동과 관련된 예산을 찾기 힘들다. 최근 정부는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연 관람을 지원하는 ‘문화바우처’ 제도를 도입했지만, 걸음마 수준. 창작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까지는 범주를 넓히지 못하고 있다. 올해 문화예술진흥기금 가운데 장애인 문화예술 사업을 위해 약 6억원의 예산이 그나마 책정됐다. 하지만 실제 장애인 창작 활동으로 연결된 부분은 1억 7500만원(13건)에 불과했다. 지난해 문화관광부는 ‘창의 한국’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발표했다. 그 가운데 장애인 창작 공연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센터 건립 등 관련 내용이 있어 기대를 모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조태성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잿빛서울 벽화단장 때깔낸다

    잿빛서울 벽화단장 때깔낸다

    ‘벽화로 다시 태어나는 서울’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25개 자치구에서 낡은 담장에 수준 높은 벽화를 그려넣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하고 있다. 낡은 콘크리트가 잿빛 헌옷을 벗고 ‘벽화’라는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곳은 건축현장,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학교, 공공시설물 등 다양하다. 재건축 공사현장의 펜스서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서민들의 주거지에는 격조높은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이곳저곳을 물들였던 벽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공공미술로서의 벽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단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여느 시민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재정난은 만성화된 지 오래다. 화실만을 고집하는 미술계의 관행, 대중과 살아 숨쉬는 미술의 인식이 부족한 지방자치단체 사이에서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공공미술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관련 법의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시민들도 미술 작업에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의 손에 의해 지역 사회가 무지갯빛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재건축이 한창인 지난 7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2단지재건축 동쪽 현장. 공사장 펜스에 화가 한 명이 뙤약볕을 받으며 회화에 열중하고 있다. 스케치에 붓이 닿자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건축단지 펜스에 주민 그려져 잠실 재건축단지 펜스에 벽화가 등장한 것은 2년 전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격’이 달라졌다. 송파구민들이 높이 4.5m 길이 5.2㎞의 2·시영단지 펜스 벽화의 주인공이 됐다. 모두 3억 7000여만원이 들었다. 벽화의 주제는 ‘송파의 어제와 오늘, 내일’.▲황포돛배, 배틀, 송파장터 등 과거의 모습을 담은 북쪽은 어제 ▲주민들이 등장하는 동쪽은 오늘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서쪽은 내일을 뜻한다. 잠실대로와 붙은 남쪽은 현정화 등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모습과 올림픽공원에서 인라인·자전거 등을 즐기는 주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벽화의 정수는 동쪽이다. 어머니와 아이들, 자매, 친구들 등 60여명의 송파구민들이 등장했다. 지난달 26·27일 석촌호수에서 신청받은 주인공들이다. 재건축이 끝나는 2007년까지 벽화 속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간다. 이번 벽화 작업을 기획·감리하는 홈디자인 최기필(36) 대표는 “건설사의 홍보판으로 전락한 펜스에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를 그려 지역과 미술이 만나는 공공성을 드러내려했다.”면서 “주민들이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에 와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호응이 높다.”고 설명했다.2단지 옆 5단지 주민 서미경(29·여)씨도 “삭막하고 으슥한 재건축 단지 펜스에 주민의 얼굴이 그려져 분위기가 따뜻하게 바뀌었다.”고 흐뭇해했다. 잠실 시영단지 남쪽에도 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등장한다.200여명의 주민들이 삼국시대 백제 사람으로 분장해 한성백제문화제 행렬도를 재현한 모습이다. 송파구 외에 다른 자치구들도 벽화를 통해 분위기를 내고 있다. 용산구는 서계동 청파어린이공원 담장에 동물과 나무를 담은 벽화를 그렸다. 숙명여대 회화과 학생들이 자원 봉사했다. 광진구는 중곡빗물펌프장을, 마포구는 동교동 윗잔다리 공원을 벽화로 꾸몄다. 최근에는 지역사회와 미술이 만난 공공미술로서의 벽화도 등장하고 있다. 작가와 주민의 구분이 없다. 기획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벽화 작업의 모든 단계에 참여한다. 대상지는 강남 등 부촌(富村)이 아닌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이 대부분이다. 주변 환경이 열악한 탓에 평소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던 주민들에게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주민이 작가로 참여하는 벽화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단체는 임옥상미술연구소와 공공미술프리즘이다. 대표적인 민중화가인 임옥상씨가 만든 임옥상미술연구소는 지난 2003년부터 삭막한 학교를 벽화로 다시 꾸미는 ‘꿈꾸는 별이 뜨는 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 가리봉2동 영일초교, 인천 석남3동 천마초교 등의 안쪽 담장과 식당 벽, 건물 벽에 다양한 모습의 벽화를 그렸다. 올해는 인천 남구 남인천중·고, 문학초교, 선화여상, 인천기공 등의 학교를 벽화로 꾸미기로 했다. 공공미술프리즘은 지난 2003년 11월에 만들어진 단체다. 상근자 4명에 자원활동가 30여명 정도로 규모와 역사는 짧지만 여느 단체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벽화는 두 번 제작했다. 지난해 8월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벽면에 ‘나의 그림이 있는 벽화 그리기’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지역 학생들과 함께 시멘트의 일종인 피그먼트 바탕에 타일조각 등을 이용해 꽃, 나무 등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그해 9월에는 가리봉2동 영일초교 바깥 벽면에 나뭇잎·새 등 초교 학생들의 작품을 벽화로 담은 ‘걷고싶은 문화마을 가꾸기’ 프로젝트를 열었다. 한달 가까이 주민·학생들과 작업한 결실이다. 올해에는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족구장 바닥을 벽화로 꾸미는 ‘동네와 일터에 우리가 만든 족구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 경기도 고양시 덕이동 일산가구공단에 이어 탄현동 고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족구장에 화사한 꽃 모양 등의 벽화를 그려넣었다. 군포시 한세대 족구단 전용구장 등에도 벽화를 그릴 예정이다. 공공예술프리즘 김상필(36) 기획실장은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스포츠와 미술을 결합한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라면서 “앞으로도 미술과 대중과의 다리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유다희 공공미술프리즘 대표 “대중들은 프린트된 작품들만 접합니다. 삶의 영역에서의 벽화, 더 나아가 도시계획 단계에서 미술적인 관점이 적용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공공미술프리즘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공공미술로써의 벽화에 매진하고 있는 단체다. 유다희(29·여) 대표는 다른 상근자들과 함께 2003년 11월 공공미술프리즘의 산파가 됐다. 유 대표가 공공미술을 접한 것은 지난 2003년. 전북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미술교육과에 입학했을 때였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그림만 그리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대중과 동떨어지고 학벌 위주로만 굴러가는 미술계를 피부로 접하게 됐다. 이런 구조가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 대표는 “그림만 그리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거나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데 아무 힘도 없었다.”면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하다가 공공미술을 시작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공공미술프리즘은 대중과 작가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도 은행원, 보험설계사, 입시준비생 등 비전문가가 많다. 이들의 고민은 단순히 대중에게 미술을 보여주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평소에 붓 한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활 환경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벽화 작업보다도 시민들과 어떻게 미술 현장에서 함께 할 것인가 등을 푸는 게 더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미술적인 혜택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도시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미술 작가들이 골방에서 나와 사회로의 ‘침윤’을 계속 시도해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유 대표는 “현재의 입시 체제에서 행정가나 건축가가 되면 미술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삭막한 도시를 만들게 된다.”면서 “건축과 미술 등이 함께 도시계획에 개입해야 인간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공미술프리즘은 올해부터 활동을 체계화했다. 시민들과 함께 마을을 가꾸는 ‘우리가 만드는 우리 마을’, 안산 사할린마을, 나눔의 집 등 소외된 이들의 공간을 꾸미는 ‘더 넓게 세상 보기’, 공공미술 교육 프로그램인 ‘오늘은 미술로 놀아요’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유 대표는 “긴 호흡의 자세로 대중이 미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공공미술로서의 벽화는? 사실 공공미술과 벽화는 직접적인 공통분모가 없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대중의 참여에 의한 미술이라는 공공미술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미술 장르가 벽화이다. 공공미술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벽화에 주목하는 이유다. 공공미술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다. 미국 연방정부는 1930년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가들에게 벽화나 조각 등을 의뢰했다. 이때까지의 공공미술은 ‘공공에 있는 미술’이라는 창작자 중심의 개념이었다. 정작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지난 1967년에 와서다. 영국 학자 존 월렛의 ‘도시 속의 미술’이라는 책에서 등장했다. 세계를 휩쓴 ‘68혁명’ 발발 전해였다. 월렛의 공공미술의 개념은 기존 관공서가 발주하는 미술품이 화상, 평론가 등 소수 전문가들의 기준에 의해 선택되고, 이를 대중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고 있었다. 공공미술은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이어야 한다는, 창작이 아닌 수용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공공미술에서 중요한 개념은 ‘개입’이다. 미술작품이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닌 사회적 비판과 미술적인 비전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관람객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민들이 작가들과 함께 만드는 벽화 작업은 참여민주주의가 미술에 적용된 공공미술의 좋은 사례다. 장승·성황당의 돌탑 등 주민이 작가였던 우리 전통미술이 창작자 중심인 서구 미술보다 공공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국에 공공미술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84년부터다. 서울시를 시작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세우는 건축주에게 건축비의 0.7%에 해당하는 비용의 미술작품을 설치하게 하는 건축물 미술장식제도가 시행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든 5600여점의 미술품 가운데 조각이 4000여점이나 된다. 거기다 대중과의 소통은 커녕 담합과 부실이 횡행하면서 ‘공공공해’라는 비난까지 일었다. 이에 문화관광부는 건축비 일부를 공공미술기금으로 내거나 지자체장에게 설치 대행을 의뢰하고, 문화부 산하에 공공미술 정책과 작품의 기획·심사를 담당하는 공공미술진흥위원회를 두는 내용의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을 마련한 상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너무 가까우면 상대를 깊게 알 수도 있지만 뜻밖에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대마도(‘쓰시마’라는 현지 표기 대신 용어의 역사성을 고려해 대마도로 쓴다.)와 한국의 관계가 그렇다. 누구나 아침 6시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8시40분에 부산역에 내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대마도행 페리를 탈 수 있다. 불과 1시간30분이면 하타가쓰항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서울에서 흑산도 가는 것보다도 빠르다. 날씨만 맑으면 당연히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며, 반대로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한국의 남해안이 지척에 보인다. 거리만 가까운 것일까?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대마도는 우리와 ‘하나’가 아닐까. ●부산서 1시간30분… 너무도 가까운 섬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는 알지만 이키(壹岐)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이키는 한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가는 징검다리였으며, 일본 입장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섬들임에도 두 섬의 정체성이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대마도가 한반도에 밀착되어 있다면 이키는 보다 일본적인 곳이다. 대마도 스스로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모두 걸친 속국, 혹은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사적으로 대마도가 비일본적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정체성이 한반도에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한반도 문화를 모두 걸러낸다면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대마도가 오늘처럼 확고하게 일본 본토에 속하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대한(對韓)외교권을 중앙 정부로 가져가 이를 일본 정부에 편입시킨 결과일 뿐이다. 대마도는 국제법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일본 땅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우리와 더욱 가깝다. 대마도 서쪽 해안은 가히 한국 쓰레기들의 종합 전시장이다. 우리나라의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가 이곳 서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은 옛적 표류민 표착의 단서가 된다. 한반도 동남부에서 표류를 해도 자연스럽게 대마도에 닿곤 했으니 신라인 박제상이 이곳에서 죽은 것도 실은 이같은 교류사의 내역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나 신라식 산성이 존재함은 대마도의 선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에서는 대마도가 우리 주권 하에 복속된 섬은 아닐지라도 조선 영토의 일부로 보기도 했다. 지방에 내려보내는 경차관을 대마도에 파견했는가 하면 대마도 사람들이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의 벼슬과 녹봉도 받았다. 일찍이 고려 조정은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 즉 변방과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책임진 관직을 내렸다. ●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 본토인들 입장에서는 대마도가 한반도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 거북스러움을 느낄 터이지만, 정작 역사시대의 일본인들 스스로가 대마도를 별종의 섬으로 간주하여 본토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보았다. 오늘날도 대마도는 ‘국경의 섬’식으로 인식돼 대륙에 맞서는 자위대 기지가 곳곳에 위치하는 전략적 가치만 인정받을 뿐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사키현에 붙어서 소외받을 바에는 차라리 부산시 영도구에 붙어서 잘 살아보자는 농담도 나온다. 그 농담이 농담으로만 여겨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이키 관광상품을 개척한 범주항공의 신우진 차장은 “이키에는 주로 후쿠오카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대마도는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들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통계 수치까지 제시한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어 기본 단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이는 근래의 일이 아니다. 대마도 역사자료관에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본격 한국어 교재가 있다. 한국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학습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증거다. 대마도는 남북이 81㎞에 이른다. 작은 섬이라고 여기는 일반의 인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미국 밑에 쿠바가 있듯이 한반도 코밑에 거대한 섬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일간 절묘한 곳에 자리잡은 대마도에 왜구가 득실거리기라도 할라치면 한반도는 밤잠을 못이루었던 것이다.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왜구들 극성 대마도는 한마디로 ‘먹고살기 힘든 섬’이다. 북쪽 히타카쓰항에서 남쪽 이즈하라까지 근 2시간여 거리를 달려 보지만 보이는 것은 산뿐이다. 섬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다에 산들이 떠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배고픈 사람들이라 눈 앞에 건너다 보이는 조선을 바라보며 해적질을 꿈꾸었던 게 무리는 아니다. 대마도의 이름난 사찰마다 조선에서 얻어온, 정확하게 말해 약탈해 온 불상이나 범종들이 한두 개씩은 놓여 있다. 이키의 안국사에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팔만대장경 초판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약탈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고립된 조건 속에서 고귀한 문화유산들이 멸실되지 않고 남아 전하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일정한 식량을 공급하고, 무역을 허락하며, 왜관을 열어 회유함으로써 왜구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대마도는 부족한 식량을 조선을 통해 해결하는 반면 일본 본토와 조선 사이에서 조정능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대마도는 에도 바쿠후를 대리하여 대한 외교를 수행했다.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막중한 권한을 가지고 바쿠후와 한반도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중재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일종의 생존전략인바, 그들은 양자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이윤을 냈으며, 그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이런 탓에 임진왜란 이후에 일시적으로 한·일간 국교가 단절되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들도 대마도민들이었다. 현재 나가사키현에 속한 대마도와 이키는 히라도(平戶)와 더불어 왜구의 본거지였다. 태종 때 대마도정벌에 나선 이종무 장군의 아소만 소탕작전도 왜구를 청소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소만을 바라보니 왜 이 장군이 한달여 동안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왜구를 소탕하지 못했던가가 자명해진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다. 섬들이 은하수의 별처럼 흩어져 있어 섬 사이로 신출귀몰한다면 강력한 대군도 왜구 몇을 감당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이키와 히라도에서 출발한 왜구들은 이곳 대마도 왜구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며 끊임없이 한반도의 해안을 침탈해 댔으니 고려와 명나라가 왜구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절반은 진실에 가깝다. ●전쟁과 평화 교차하는 ‘국경의 섬´ 그런데 일본의 후소샤판 교과서에는 ‘왜구란 조선반도 및 중국 대륙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집단을 뜻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왜구는 대마도, 이키제도와 히라도 등을 포함해 세토나이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해적 및 악당들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최근 들어 왜구의 구성을 국적이나 민족을 넘어선 차원의 인간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당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가공된 역사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왜구 근거지는 북규슈 지역의 도서 연안이고, 발생 원인도 일본 내의 정치적 혼란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왜구의 시대에 이어 이번에는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가 등장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번 전란의 꼬투리는 대마도주 소오(宗義智)의 수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의 딸 마리아가 바로 이 소오의 아내였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된 고니시의 출병에는 조선말을 잘하는 대마도 사람 8000여명이 동원된다. 웬만한 남자들은 전부 동원됐다.‘전쟁이 끝나자 남자는 없고 과부들만 들끓어 대를 이을 수 없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이키도 대규모 병사를 내어 한반도에 출병했다. 과거의 왜구들이 왜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통신사 맞이하는 기착지… 친선의 가교로 전쟁이 끝나고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재개되자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는 한반도에서 오는 귀한 문화사절단을 맞이하는 기착지로 변신한다. 수백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는 그 자체가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전하는 통로였다. 조선정부는 성심성의껏 사신을 조직하였으며, 대마도와 이키 등지의 번주들도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맞았다. 대마도와 이키는 조선통신사를 통한 친선과 교류의 장이었지만 때로는 왜구의 본거지로 역사의 굴절을 계속했다. 이키의 아름다운 ‘원숭이바위’가 있는 곳에는 2차대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대마도에도 거대한 지하포대가 있다.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아소만 일대에 군함을 잠복시켜 놓고 반세키(万關)운하를 통해 러시아함대를 기습·괴멸시켰다. 근래 대마도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곳곳에 러일 친선을 기원하는 전승비를 세웠다. 명분은 친선이겠지만 본래 목적은 딴 곳에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니 이처럼 일본은 대마도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마도를 자국 본토와는 달리 오로지 ‘국경의 섬’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대마도와 이키는 한·일 간의 친선을 돋우는 징검다리도, 침략의 가교도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최익현 선생이 단식 끝에 절명했을 때, 대마도 사람들은 선생의 유해를 지극정성으로 이즈하라의 슈젠지(修善寺)에 모셨다. 이키에는 해방되던 해, 꿈에 그리던 조국을 향해 귀환선에 몸을 실었다가 집단 수장된 우리 동포 160명을 애도하는 비가 한국쪽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또 와니우라 포구의 팔각정 형태의 한국 전망대에는 1703년 무려 112명의 역관사들이 조난당해 생을 마친 사실을 기록한 비석도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바다가 국제교류의 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진실된 한일교류의 징검다리되어야 17세기 대(代)의 외교관으로 한국말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효슈의 말처럼 대마도와 이키는 진정한 ‘친선교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고, 문화재가 불타 버렸지만, 강제 동원되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했던 대마도나 이키의 백성들도 운명은 비슷했다. 조선통신사가 오고 갔듯이 이제 한·일간의 해양 네트워크는 더이상 침탈의 역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러일전쟁 100주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국을 꺾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분을 지금껏 향유하려고 드는 한 국제사회에서 그들이 ‘소인배’라는 비난과 지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1년 전인 1984년.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대마도와 이키의 역사·고고·미술·민속·언어·물질문화 등을 망라한 보고서를 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바다를 통해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목적의 대마도·이키 답사가 21년 만에 다시 서울신문 지면에서 재현된 셈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 기념의 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친선의 바다인가, 침탈의 바다인가.’ 그 난해한 화두를 대마도와 이키에서 다시 곱씹어 본다.
  • 복권기금 지원받아 ‘기사회생’

    ‘소외계층 문화재 체험행사’와 ‘전국 38개 대학박물관 특별전’의 공통점은? 그동안 예산·인력 등의 문제로 개최되기 어려웠지만 최근 복권기금 지원을 받아 마련된 ‘의미있는’ 행사다. 문화관광부가 이달 말부터 오는 11월까지 진행하는 소외계층 대상 ‘전통문화·역사체험 프로그램’은 농·어·산촌 주민과 독거노인,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외국인노동자 등 6만여명에게 다양한 문화유적 답사 및 전통문화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복권기금으로부터 34억원을 받는다.1차 프로그램으로 전국 170여 지방문화원에 800여만원씩 지원해 관내 향토문화유적 체험기회를 준다.2차에는 지방문화원 우수프로그램에 1200만∼3500만원씩 후원, 전통문화·역사체험 등을 진행한다. 대상자의 자율신청은 물론 지자체·사회복지단체 등의 추천으로 수혜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주관으로 이달부터 연말까지 열리는 ‘대학박물관 소장 비지정문화재 특별전’도 총 11억 1000만원의 복권기금을 받았다. 전국 대학박물관의 릴레이 전시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학별 심사를 거쳐 1000만∼5000만원씩 지원됐다. 전국 38개 대학박물관에서 고고자료 및 서화·공예·복식·민속자료 등 총 9400여점의 전시 및 체험행사, 세미나 등이 진행된다. 오는 11월에는 서울과 지방 2곳에서 각 대학 소장 중요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 연합순회전도 개최할 예정이다. 대학박물관협회 관계자는 “대학박물관은 지역의 중요한 문화재 기관이지만 예산·인력부족 등으로 유물전시·행사가 어려웠다.”면서 “이번 특별전 개최를 통해 지역시민에게 더욱 다가가 국민의 문화유산 향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열린세상] 지속가능한 지역축제를 위하여/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축제는 말 그대로 축(祝)과 제(祭)가 혼합된 문화현상이다. 애초 시작부터 농경사회의 풍요를 하늘에 기원하고 감사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신명나게 쉬는 것이 축제였다.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상업성이 이제는 축제의 종교성을 박제시키고, 유희성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5월, 전국의 지방마다 축제가 한창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단절되고 파괴되었던 한국의 지역축제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지역축제의 부활 자체가 성장제일주의에 대한 반성,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염원,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반영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잠재욕구들이 지방자치라는 시대적 환경과 맞아떨어져 우리나라 곳곳에서 1000여개의 축제가 1년 내내 펼쳐지고 있다. 등장하는 소재도 다양하다. 지역적 특산물이 가장 눈에 띈다. 녹차, 인삼, 고추, 수박, 마늘, 송이버섯, 목화 등 농산물이 축제의 소재이다. 황토, 진흙, 고로쇠약수와 같은 천연자원도 활용된다. 빙어, 병어, 전복, 고래, 새우젓, 키조개, 장어와 같은 수산물도 축제의 무대에 올라 있다.‘장보고축제’ ‘왕인문화제’ ‘다산문화제’ ‘율곡문화제’에선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5월에 열리는 축제 가운데 친환경축제가 특히 눈길을 끈다. 함평에서는 나비와 꽃과 곤충의 축제가 열린다. 유채꽃과 자운영꽃이 물결을 이룬 가운데 수십만 마리의 나비가 날아 오른다. 아름다운 봄꽃 사이로 비행하는 호랑나비, 노랑나비, 배추흰나비 등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별천지로 안내한다. 경남 하동의 야생차 축제도 인상적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공이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심은 곳으로, 올해로 10회째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 방문객들은 차 잎을 따고 차를 마시면서 푸르른 자연의 향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지역축제가 모두 성공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축제가 왜 이곳에서 개최되어야 하는지 그 연관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 연예인이나 불러 1회용 주민동원 잔치를 벌이는 곳, 예산을 낭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지역도 허다하다. 무슨 엑스포니 해서 축제의 규모가 클수록 예산의 낭비와 부패의혹이 축제의 뒷전에 무성하다. 상업성과 정치성이 앞서는 지역축제일수록 실패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대체로 성공하는 지역축제는 친환경, 친역사적 특징을 갖는다. 지역적 정체성을 발굴하고, 지속가능한 소재를 활용했다는 얘기이다. 역설적으로 지역홍보와 관광수입 효과를 일차적 목표로 하는 축제일수록 실패한다. 지역축제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축제 행사 자체가 아니라 축제를 즐기고 향유하는 지역민들의 모습이다. 그 축과 제의 향연에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기대가 관광객의 가장 큰 욕구인 것이다. 우선 지역민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축제라야 지속가능성도 있고 지역홍보나 경제적인 면에서도 성공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공적인 지역축제의 전형으로 인용되는 일본의 마쓰리나 독일의 맥주축제 역시 지역민의 잔치가 먼저이다.6만 여 지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마쓰리는 대부분 지역사회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모티브로 하는 일종의 제례적, 전통계승적 축제이다. 그만큼 지역민 동원력이 크고 전국적인 주목도 받는다. 독일의 맥주 축제는 10월 추수의 절기에 맞춰 지역민들이 함께 어울려 즐기는 휴식의 장이다. 지역민들의 흥겨운 어깨동무와 노랫소리에 참여하고자 전국에서 600만명의 방문객이 몰려들고, 경제효과도 9000억원에 달한다. 지역축제의 만개는 무너진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지역발전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제는 사라진 제의 의미 대신 공동체의식을 회복하고 함께 어우러짐을 즐기는 대동의 의미를 살리는 장이 되어야 한다. 농경의 기반이 사라진 도시지역 축제일수록 대동과 어울림의 의미를 되살리지 않으면, 길거리 포장마차들의 잔치판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도시지역은 도시의 특성이 반영되도록 주민과 대학, 기업이 어울리는 축제를 구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첨단과 유용성, 공동체의식을 구성원들이 나눌 수 있는 장이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아자!아자!시민기자] 홍수교수 ‘음악과 인생’ 특강

    [아자!아자!시민기자] 홍수교수 ‘음악과 인생’ 특강

    사회 전반에 ‘웰빙’이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웰빙 가전, 웰빙 식음료, 웰빙 아파트 등….‘웰빙(well-being)’은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웰빙은 잘 먹는 것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나 싶다. 진정한 웰빙의 시작은 잘 먹어 건강한 육체를 가지는 것이나, 그 완성은 풍요로운 마음으로 고품격의 문화를 향유함으로써 건강한 정신상태로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웰빙족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지난 8일 성동문화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음악과 인생’이라는 강좌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한국교원대학교 이홍수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연 속에서 얻은 해답은 바로 행복한 인생을 위해 음악을 가까이 하고 즐기는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결코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건강한 정신을 갖고 올바른 삶의 목표를 향해 살아야 한다. 이홍수 교수는 “건강한 정신을 위해 인간 지성의 최고의 산물인 음악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음악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늦어도 8,9세 이전에 적절한 음악 학습을 시작해서 계속 체계적인 경험을 한다면 누구나 음악을 향유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그 나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진 수많은 음악들이 존재하는데 음악이라는 것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살피고, 삶의 모습에 주목하며, 소리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음악을 느껴지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한다. 눈과 귀를 열고 마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을 감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과 함께하는 행복한 인생 만들기의 시작일 것이다. 태교음악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이 단연 최고로 손꼽힌다. 아이가 어렸을 때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게 하면 아이의 두뇌 발달뿐만 아니라 감성 발달에도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이나 동물이 건강히 잘 자라게 하는 데에도 음악의 효과가 탁월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다. 부모가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하면 자녀도 똑같이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 가족끼리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때 가족의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음악을 향유하며 건강한 정신을 가꿔 잘 먹고 잘 사는 진정한 웰빙족으로 거듭 나보자. 최점순 시민기자
  • 지자체 ‘무료 문화행사’ 뜬다

    지자체 ‘무료 문화행사’ 뜬다

    서울시는 올 여름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매주 두 차례 무료로 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가 “선거법 상 저촉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은 예정대로 서울광장에서 ‘한여름밤의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문화관광부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의 협의를 거쳐 기존 선거법에서 금지됐던 지방자치단체의 문화행사를 대폭 허용한 덕분이다. 그동안 제동이 걸렸던 서울시와 각 자치구를 포함해 전국의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무료 문화 사업의 숨통이 트인 것은 물론,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을 막아왔던 빗장이 한꺼번에 풀린 셈이다. ●기존 선거법,‘무료행사 NO’ 8일 서울시에 따르면 문화관광부가 최근 ‘지역 문화예술·관광·체육·청소년 진흥시책 기본지침’을 만들어 서울시 등 광역자치단체에 통보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만들어진 이 지침은 최근 서울시내 각 구청을 비롯한 전국 기초자치단체에도 전달됐다. 이러한 지침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해 3월 개정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무료 문화행사를 기부행위로 보고(112조 1항) 이를 연중 제한(113·114조)하도록 강화했기 때문이다. 문예진흥법이나 지방재정법, 지자체 조례 등에 근거하지 않은 무료 문화행사는 불법이라는 뜻이다. 선거를 1년 앞둔 시점부터는 지자체장의 이름을 밝히거나 지자체장이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행사는 원천적으로 금지된다(86조 3항). 내년 6월 지방선거를 1년 앞둔 오는 6월부터는 구청이나 구청장 이름으로 할 수 있는 행사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지난 1월 중앙선관위는 공선법에 위반될 소지가 있는 전국 지자체의 올해 예정된 문화행사들을 골라내 통보했다. 서울 132건을 포함, 전국적으로 573건의 행사가 지적됐다. 이에 따라 송파구의 경우 ‘석촌호수 여름음악회’와 ‘한성백제문화제’를 폐지하기로 하는 등 해당 지자체들의 사업취소 및 재검토가 잇따랐다. ‘문화행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지자체의 지적과 함께 ‘중앙선관위가 문화 향유권을 빼앗고 있다.’는 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문화관광부는 지침을 통해 지자체의 무료 문화행사를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무료영화, 청소년 쉼터 등 가능 개최할 수 있는 문화행사는 크게 ▲문화예술 ▲관광 ▲체육 ▲청소년 ▲문화산업 기반확충 ▲문화공간 운영 등 6개 부문이다. 문화예술 부문에서는 지역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개발·운영을 활성화하고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 지원하는 것 등이 가능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지역별 공연예술행사와 순회음악회 등 찾아가는 문화행사, 야외 공연행사 등이 허용된다. 전통 재현행사는 물론, 무료영화 상영회도 열 수 있다. 관광 부문에서는 지자체가 지역의 역사·생태 자원을 관광자원으로 발굴하고 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게 했다. 관광휴양지를 조성, 각종 특산물축제와 지역문화제 개최 등도 허용됐다. 청소년 분야에서는 청소년 단체를 지원하고 청소년을 위한 연극·음악제·축제 등을 열 수 있다. 청소년 쉼터·상담실 지원, 청소년 문화지대 조성 등 청소년 보호 프로그램도 가능하다. 생활체육대회를 개최하거나 체육교실을 운영하는 등의 체육부문 행사의 제약도 사라졌다. 지자체가 주관이 된 체육의 날 행사도 계속 열린다. 이밖에 ▲독립영화제·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나 도서·출판전시회 등 문화산업 기반확충 ▲구민·문화회관 등 지역 시설에서의 주민 대상 무료 교양강좌나 공연·전시행사 등 문화공간 운영도 제한이 풀렸다. ●“복지행정 규제도 풀어야” 다만 무료 문화행사는 최근 2년 평균 실시 횟수에서 130%를 넘어서면 안 된다. 또 선거일 60일 전 문화행사 금지 조항은 공정한 선거를 위해 그대로 적용된다. 서울시 문화국 관계자는 “이번 지침에 따라 서울시의 문화 행사 운영의 폭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송파구 관계자는 “경로당이나 장애인 시설 등을 도울 수 있는 복지 행정은 여전히 선거법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면서 “문광부 지침과 유사한 보건복지부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5)통영의 해양문화와 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5)통영의 해양문화와 굴

    국방, 예술, 수산, 관광, 생태. 이 복잡하고 동거가 불가능해 보이는 항목들이 한 동네에 밀집된 곳을 한 곳만 들라면 나는 주저없이 남해안 통영을 꼽겠다. 무언가 하나쯤이 돋보이는 바닷가는 많지만, 통영같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곳이 또 있을까. 이름하여 ‘조선의 나폴리’. 섬과 섬이 꼬리를 문 한려수도의 미려한 절경이 펼쳐진 가운데 하얀 집들이 초록빛 바다색과 어우러지고, 비구름이 섬 봉우리를 감싸도는 풍광은 가히 ‘조선의 나폴리’란 별칭이 어울릴 만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탈리아의 통영’이란 표현이 오히려 걸맞을 것 같기도 한 곳. ●군사와 예술이 묘하게 어우러진 곳 그래선지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윤이상 김상옥 박경리 유치환. 그들의 고향도 통영이다. 임진왜란의 엄혹했던 시절,‘지고도 이긴 그 전쟁’을 상징하는 세병관이 있는 곳인가 하면, 코 앞에 한산도가 있어 당대의 피어린 해전을 돌이켜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보니 승전무 같은 ‘국방예술’을 비롯, 나전칠기, 통영갓, 소목, 두석 같은 수공업이 발달했다.1604년 통제영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육방이 설치돼 군수품·관수품·민수품 등 다양한 수공예품이 생산되었다. 통영오광대, 남해안별신굿 같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가 가장 많이 밀집된 곳 또한 통영이다. 군사와 예술이라는, 언뜻 서로 조화될 것 같지 않은 양자가 절묘하게 결합해 예부터 예향의 본거지로 꼽혔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도 기실 어부 김천손의 첩보에 힘입은 것이었다. 숱하게 왜구에 시달려 온 이곳 어부들은 평소에는 고기를 잡지만 유사시에는 전선에 배치돼 그들을 물리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전략가적 자질을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 어부들의 숨은 공로가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통영 사람들은 배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살아 바다생활에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팔라우제도의 원주민들을 보면 그들이 천부적인 뱃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작은 배로 망망대해를 용하게도 떠다닌다. 자잘한 다도해의 섬 사이를 누비면서 거칠 것 없이 달리고, 맘 먹은 곳에 닻을 내리고, 정확하게 낚시를 던진다. 해저 지형은 물론이고 조류, 어종, 바람, 암초 등 선대에게 배우고 스스로 체득한 온갖 바다정보를 유전인자처럼 내장하고 바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통영사람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바다를 마당 삼아 살아온 덕분에 왜병을 물리치는 든든한 파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 이순신이 새삼 강조되는 시대에, 그 이순신을 가능하게 한 인적 토대로서 바다사람들의 삶을 한번쯤 진지하게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왜란 때 통신수단으로 사용… ‘충무 방패연’ 통영의 삼덕포구, 한산도, 사량도, 견내량, 적덕, 착량, 걸망포 등은 당시 승첩의 현장이거나 함대의 병참·기항지로 제 역할을 다한 곳들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지금의 통영땅 전신인 두룡포에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을 관장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오게 된다. 두룡포기사비문에 ‘서쪽으로는 판데목에 의지하고 동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으로는 큰바다와 통하고 북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을 겪으면서 국가적으로 건설된 계획적인 군사도시가 곧 통영이니, 그로부터 일제에 의해 통제영이 철폐될 때까지 300여년간 지속되면서 독특한 해양문화를 형성해 온 셈이다. 돌이켜 보면 ‘상처입은 용’ 윤이상 선생이 애타게 보고싶어 하던 고향도 바로 통영의 푸른 바다였다. 그는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도 ‘보고 싶은 고향땅 쪽빛 바다’를 애달프게 증언하지 않았던가. 그는 아마 꿈 속에서 훨훨 날아오르는 유명한 ‘충무 방패연’을 상상했을 것이다. 내륙지방에서 만든 한지 반장짜리 연과 달리 바람이 센 바닷가 통영의 연은 대문짝만 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유서깊은 그 연 아닌가. 그 연에 날지 못한 윤이상 선생의 비원이 서려 있는 듯하다. ‘통영문화의 지킴이’ 김세윤 문화원장은 “윤이상 선생이 통영에서 살 적만 해도 국악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며 통영의 문화적 환경을 설명한다. 그의 음악에서 한국적 정서를 읽을 수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고향 바닷가에서 싹 틔우고, 배불린 것이리라. 그는 “통영이 예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통제영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활발한 수산업에 기반한 물적 토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향’ 만들어낸 또 다른 공신, 굴 옳은 말이다. 수많은 통영의 예술인이 외국 유학을 떠날 수 있는 배경에는 수산업으로 형성된 진취적 기질과 풍요가 바탕이 된 셈이다. 이렇듯 통영의 역사와 문화라는 것도 모두 어업에 종사하며 삶을 일궈 온 통영 사람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배태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전통시대의 뛰어난 해군이자 노련한 어민들이었다는 사실이 곧 이곳의 역사이자 문화인 셈이다. 오늘날의 통영 어업을 이해하려면 통영항에 위치한 ‘굴수하식수산업협동조합’이란 다소 긴 이름의 조합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굴의 80%가 이 조합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굴이 없다면 통영경제도 사실상 ‘끝’이며, 도시의 소비자들도 굴 대신 금을 먹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굴껍데기를 까는 여성 노동력, 굴 양식에 필요한 자재를 공급하고 판매하는 이들, 굴을 조리해 파는 음식점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무려 4만여명이 굴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 그만큼 굴은 통영 경제에 절대적이다. 20대에 굴조합에 뛰어들어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굴 하나에 바친 이 조합 이종훈 전무를 만났다. 그에 따르면 굴은 바위에 붙어사는 바위굴, 그리고 줄에 매달아서 물 속에 드리워 키우는 수하식 굴로 나누는데, 바위굴은 전체 생산량의 10%도 안 된다.90%의 굴이 수하식이다. 그런데 그 수하식을 사람들은 ‘양식’이라고 ‘오해’한다. 굴은 엄밀하게 말해 양식이 없다. 긴 줄에 수직으로 매달아 키워낼 뿐 인공 먹이를 주거나 하는 따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굴은 양식어류와 달리 제공하는 사료가 아닌 자연 플랑크톤을 먹고 성장한다는 아주 간단한 상식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한국인의 수산물 선호도는 높아가지만, 정작 수산물 이해도는 아직 낮다. 굴에 대해서도 엄청난 오해를 갖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맹종죽을 이용한 뗏목식 시설을 도입했다. 그러나 비싼 대나무값 때문에 물 속에 줄을 드리워 굴을 매다는 연승로프식인 수하식을 개발했다. 한국 굴의 대부분이 자라는 통영, 거제, 고성, 여수 바닷가에 둥둥 떠있는 긴 줄과 부표들이 바로 수하식 굴밭의 표지판이다.“수하식은 바다면적을 늘리는 일대 전환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싸게 좋은 굴을 섭취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수하식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FDA도 인정한 통영의 굴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바위에 붙은 작은 굴, 즉 석화를 선호한다. 반면에 알이 큰 수하식 굴은 상대적으로 낮게 친다. 바위굴은 썰물 때 성장을 멈추는 반면 수하식굴은 항상 물 속에 잠겨 있어 물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외국에서는 그래서 우리와 달리 수하식 굴을 더 위로 친다. 실제로 미국 FDA는 매년 조사관을 파견해 통영, 고성, 여수, 고흥, 거제 일대의 굴밭을 샅샅이 조사한다. 미국은 물론 EU 및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수입식품으로 인한 자국민의 공중보건상의 위해를 차단하기 위해 자국으로 수입되는 수산물에 대하여 수출국이 그 위생상태를 보장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이렇게 현지조사를 벌이고 있으니, 그들의 검증이 곧 상품의 보증이기도 하다. FDA는 고흥, 여수, 남해, 통영, 거제, 고성 등의 남해안 일대를 수출용 패류생산 지정해역으로 설정, 엄정한 검사기준을 적용해 수입을 허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까다로운 선진 외국에서 그 청정성을 인정해 사들이는 굴이 이곳 남해안의 수하식 굴이며, 국내 소비량도 90% 이상을 이곳에서 공급한다. 한려수도가 한국 최고의 청정해역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씨알 작은 자연산 굴이 아무래도 좋다.”는 오해로는 더 이상 우리의 식탁 안전과 소비량, 낮은 가격 등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곳에서는 오후 6시면 전국 유일의 굴공판장이 열린다. 저마다 자신들이 생산한 굴을 박스에 담아 낸다. 굴조합 엄철규 과장은 “생산자들의 이름이 모두 등록되며, 같은 굴이라도 실명제로 체크되어 가격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굴이 클수록 비싸다. 이곳에서는 ‘벗굴’이라고 부르는, 크기가 주먹만 한 굴을 접시에 올려놓고 칼로 썰어먹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선호하는 ‘쪼잔한 굴’은 상품으로 치지도 않는다. 알이 꽉 차서 영양가가 오를대로 오른 큰 굴이 그들의 기호에 어울린다고 믿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예전에 먹던 식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국 생산량의 10%에도 못미치는 바위굴을 선호한다. 사실 바위굴 중에는 깨끗한 곳에서 나는 것도 있지만 갯가의 오염된 환경에서 채취되기도 해 식탁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일도 없지 않다. 한국인의 보수성과 과거 집착은 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거기에서 비롯된 온갖 편견과 오해가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회는 물론 전, 찜, 튀김, 구이, 국이나 죽, 밥, 젓 등 세기조차 어려운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굴은 그저 날로 먹는 것으로만 아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선호하는 굴은 말린 건굴이며, 미국인들은 통조림문화에 길들여져 면실유로 만든 통조림을 수입해 간다. 반면 우리는 이만큼 다양한 굴음식을 향유하고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은 이렇듯 보수적이다. 술꾼들 해장용으로 선짓국, 콩나물국 등은 알려졌지만 굴국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철마가 새끼치고, 돌계집은 노래하고 통영을 떠나오면서 습관처럼 미륵섬 미륵사를 찾았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그가 미륵섬에 온 것은 한국전쟁 때. 도솔암에서 도솔선원을 차려 문제(門弟)들을 거느리고 선정(禪定)에 들었다. 아름다운 다도해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아 미래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니, 그도 미륵의 당래하생을 염원했던 것일까. 미래사 입구에 세운 효봉 스님 비문에 담긴 화두를 떠올린다.‘천지가 뒤바뀌고, 철마가 새끼치며, 돌계집은 노래하고, 나무장승 춤을 추다.’ 이 뒤집힘의 엄청난 미학까지 통영 바닷가에서 배우고 온다.
  • [시론] 문화 토론이 없다/김용석 영산대 철학과 교수

    1900년대 초 일부 프랑스 학자들은 전문 술어로서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삶 전체를 지칭하는 사회라는 말과 의미적으로 중첩되며, 문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혼동될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프랑스 하면 문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프랑스인들도 스스로 문화 국가를 내세운다. 지금도 문화는 대표적인 다의성(polysemy) 단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문화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으며, 의미의 혼동이 있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기보다는 그 다양한 의미들 속에서 나름의 사용법을 찾아 쓰는데 적응해가고 있는 듯하다. 문화의 어의적 다양성과 어울려 살 수 있는 것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인 것 같다. 최근 ‘소프트 파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문화의 화두는 더욱 중요해졌다. 대통령도 연두 기자회견에서 “문화 관광 레저가 어우러진 복합 소비산업에 대한 종합 청사진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브랜드를 세계에 심기 위한 구체적 정책도 중요 과제다. 그것은 한번 심으면 지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어려운 과제다. 유난히 변화를 앞세운 시대에, 역설적으로 ‘불변의 원리’를 이용하는 게 브랜드 창출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문제는 이것 말고도 끝이 없다. 문화인프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경제 논리에 따라 상품화할 대상을 문화에서 찾은 것으로 문화산업은 만족해야 하는가, 우리 문화향유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등등…. 오늘날 문화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연관 연구기관도 있다. 문제는 문화가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데도 지속적인 문화 토론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정치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문화의 세기에는 좀 바뀌려니 했는데,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공공의 차원에서는 더욱 심하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토론의 장’에서 문화의 주제가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 정부의 토론 지향성 때문에 미디어의 토론 프로그램은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공영 방송을 비롯해,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들이 주로 다루는 것은 정치적인 주제들이다. 정치 토론만 하니까, 나라가 밤낮 싸우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주 메뉴는 정치적 주제이고 적지 않은 토론자들이 자기 입장만 반복 강조하는 정치인들이다. 교육에 열성적이다 보니 교육정책이 가끔 주제가 되기도 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면 경제 토론도 한다. 하지만 문화 토론은 미미하고 산발적이다. 인터넷 미디어가 제공하는 토론의 장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 문화 토론은 정치 토론의 십분의 일이 안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문화는 ‘21세기의 식량’이라고도 하는데, 문화의 구체적인 주제들은 그 식량으로 섭생할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 다양한 미디어들 사이에서 공론의 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화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 경제 토론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공적인 토론의 장에서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 문제들을 균형 있게 다루자는 제안이다. 정치 토론하다 보면 핏대를 세워야 하고, 뾰족한 수 없이 경제 토론하다 보면 침울해지기 쉽다. 하드한 주제로 토론하기 때문이다. 문화 토론은 본질적으로 소프트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다. 토론에서도 하드와 소프트를 섞어야 사람들이 토론을 즐긴다. 문화 토론은 또한 생산적 토론이 될 가능성이 높아, 정치와 경제에 아이디어를 줄 수도 있다. 목소리 큰 사람들의 토론이 아니라 창의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토론이기 때문이다. 공공 매체에서부터 문화 토론의 비율을 늘려 가는 것은 또한 ‘토론 문화’를 풍성하게 해서 우리 모두의 문화향유의 질을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김용석 영산대 철학과 교수
  • 초중고 문화예술교육 ‘脫교실’ 제도화 추진

    초중고 문화예술교육 ‘脫교실’ 제도화 추진

    초·중·고교의 문화예술 교육을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문예회관 공연장 각종 문화시설과 직접 연계하는 내용의 입법이 추진된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미술·음악 등 교과과정에 교내 동아리 활동, 방과 후 특기 적성 교육이 포함돼 문화예술 교육의 대대적인 질적 개선이 이뤄질 전망이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12일 초·중·고교생들의 문화예술 교육을 획기적으로 전면 개편하기 위해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 의원은 이 법안을 대표발의해 올해 안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문화예술 교육이 학교 안의 한정된 자원과 시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학교 밖의 문화시설인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문예회관 공연장 등과 연계된 학습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내용이 법안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법안은 또 문학 대중음악 재즈 영화 등 10여개 문화예술 분야로 분류해 전문 강사에 대한 자격조건을 엄격히 규정, 전문성과 함께 교사 자질도 한층 높일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문화예술의 범위를 문학, 조형예술, 공연예술(음악 무용 연극), 전통예술(국악 민예), 문화유산(유형·무형 문화재), 문화산업(영화 캐릭터 애니메이션 광고 디지털콘텐츠) 등으로 포괄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초·중·고교의 교과과정에 활용하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민 의원은 “지금까지의 문화예술정책이 예술인이나 예술단체를 지원하는 데 머물고 있으나 앞으로는 문화의 향유자인 국민, 특히 학생들에게로 지원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관광부는 이 법의 제정을 앞두고 지난달 18일 문화예술교육과를 신설하고 내년도 소요 예산 250여억원을 편성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울광장, 대중 공감 얻도록 쓰세요”

    ‘외국인들의 광장 사랑?’ 서울 잔디광장이 집회장소로 쓰이는 데 대해 외국인 경제단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서울시에 답지하고 있다. 이들의 편지는 서울시가 광장을 용도변경해 집회를 원천 봉쇄하기로 한 시점과 맞물려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시는 3일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와 주한 캐나다상공회의소, 유럽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이같은 내용의 서한이 잇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상공회의소(AMCHAM)는 이날 제프리 존스 회장의 명의로 서한에서 “서울광장 조성 공사가 진행될 무렵 극심한 교통정체를 빚어 주한 미국인들로부터 민원이 쏟아졌다.”면서 “그러나 광장의 아름다움과 공개성 때문에 교통정체는 잊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부분이 서울광장이 2002월드컵축구대회 때와 같이 대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문화적, 공공적 성격의 이벤트를 벌이는 장소로 쓰이는 게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또 “원래 서울시가 서울광장을 조성하면서 내세운 취지와 규정에 걸맞게 특정 정치단체나, 사적인 경제이익을 꾀하는 단체들이 사용하는 데에는 제한할 것을 희망한다.”고 적기도 했다. 그는 서한의 말미에 “우리는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민주주의를 향유할 권리를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서울시나 다른 지방정부가 이러한 권리를 뺏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이러한 목소리를 낼 때는 서울광장 말고도 다른 장소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이에 대해 서울시 김병일 대변인은 “3일 열린 주한 외국인들의 ‘2004서울타운미팅’에서도 서울광장에서의 대규모 집회로 정작 문화행사나 시민들의 휴식시간을 뺏는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반겼다. 그는 이어 “광장이 잘못 이용돼 외국 투자자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는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만큼 집회 허가권을 가진 경찰의 분별을 촉구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서울광장엔 4일에도 보수단체의 ‘반핵 반김 집회’가 예정돼 있어 또 한번 홍역을 치를 것으로 보인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연극하는 주부 ‘그녀들의 반란’

    연극하는 주부 ‘그녀들의 반란’

    “여성의 사회 참여가 지금처럼 활발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이제서야 연극을 통해 사회에서 제가 해야 할 몫을 찾았습니다.”육아와 가사에 파묻혔던 평범한 주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연극에서 잠재된 ‘나’를 발견하고 감춰왔던 ‘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서울시내 자치구 가운데 두번째로 창단된 강서구립극단은 아마추어가 진정한 프로 연극배우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창단 공연인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비롯, 지금까지 세 차례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변한 세상에 당황스러웠다.” 25일 강서구민회관 구립극단연습실에는 내년 초 가족뮤지컬 ‘솜사탕은 누가 지키지?’의 앙코르 공연을 앞두고 20여명의 단원들이 모였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흐름 등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다. 참석자 가운데 대다수는 30∼40대 가정주부다. 이범녀(49·여)씨는 “무대공포증 등으로 처음에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반문했다.”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난 뒤 보람을 찾고 싶어서 연극을 뒤늦게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이금순(50·여)씨도 “집에만 있으면 사람이 게을러지기 마련인 데다 활력있는 삶을 원해 구립극단에 지원했다.”면서 “무대에서 대사를 잊어버리는 등 쉽지 않은 목표이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라고 밝혔다. 여성의 사회참여율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비하지 못한 30∼50대 주부들의 소외감은 커졌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잉여 시간이 늘자 무위(無爲)가 우울증을 양산하는 사례도 생겼다. 이들이 20∼30대이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지금과 정반대였다. 여성들은 전업으로 주부를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분위기가 바뀌자 주부들은 상대적으로 뒤처져 보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더군다나 아이들까지 성장하자 새로운 삶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송미숙 강서구립극단 상임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제대로 걷는 데만 5년 이상이 소요되며, 감정을 표현하는 데 10년 정도 걸리는 등 연극계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적어도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이라면서 “연극을 ‘화두’로 삼은 주부들에게 배우란 쉽게 달성될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장기간 동안 해야 할 무언가가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연극에서 자아를 찾아 단원들 가운데 절반은 전업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연극 주위를 맴돌았다. 학창시절부터 대학 연극동아리나 주부극단에 몸담았던 사람들로 연극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작품을 통해 연극을 배웠기 때문에 체계적인 학습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구립극단에서는 발성부터 신체훈련까지 기초부터 꼼꼼하게 가르친다. 김영인(44·여)씨도 “취미로 시작했지만 연극이라는 재능을 통해서 소외계층에 위문공연을 하는 등 사회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과 주부극단에서 10여년 동안 활동했던 조은정(39·여)씨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워 연극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습득했던 지식에 대해 정리가 된 느낌”이라면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졸업후 하지 못했던 연극을 남편과 아들의 후원으로 비로소 하게됐다.”고 덧붙였다. 정영신(49·여)씨도 “이론과 실제를 병행하는 강도 높은 수업방식이라서 작품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요구한다.”면서 “하지만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작품에 몰입하기 때문에 집안일 등 잡생각을 아예 잊게 된다.”고 말했다. 연극은 이들의 삶에 새로운 변화도 일으켰다. 작품을 위해 책을 가까이 하거나 주말이면 대학로에 나가 연극을 관람하기도 한다. 또 연극을 단순하게 자신의 취미생활이나 자기만족으로 치부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활동으로 평하기 시작했다. 양승순(42·여)씨는 “혼자 시작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며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다.”면서 “최근에는 신문이나 뉴스에서 문화 관련기사를 챙겨 읽는 등 시야가 넓어졌다.”고 덧붙였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구립극단 어떻게 운영하나 서울시내 25개 자치구 가운데 극단을 운영하는 기초자치단체는 강동구와 강서구 두 곳뿐이다. 자치구들이 지역내 구민회관이나 교향악단 등 문화콘텐츠를 확대하는 추세지만 선뜻 투자하기 힘든 것은 비용대비 효과라는 경제적인 문제가 항상 작용해서다. 구립극단의 시초는 지난 1997년 설립된 강동구립극단이다. 김충환 당시 구청장의 제안으로 창단자금 500만원으로 출범했다. 현재 단원은 20여명으로 연출가에게는 사례비, 나머지 단원은 교통비 정도만 지급받는 자원봉사 형태다. 연 운영비는 구청에서 지원하는 4000만∼5000만원으로 지금까지 ‘이수일과 심순애’를 비롯, ‘로미오와 줄리엣’ 등 8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99년에는 입장료 2000원으로 유료화를 시도했지만 680명의 객석 가운데 70∼80석만을 채웠다. 자치구에서 주최하는 공연은 ‘무료’라는 인식이 깊숙하게 자리잡은 탓이다. 최강지 강동구립극단 연출가는 “주부 2명과 일부 주민들을 빼면 단원들 대부분은 제가 운영하는 학원 제자들”이라면서 “구청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단원을 모집하면 지원자들이 모두 급여를 요구하지만 빠듯한 예산으로 자원봉사자가 아니면 단원 확보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에 비하면 강서구립극단의 사정은 좀 나은 편이다. 올해 5월에 정식 출범한 강서구립극단은 연출가와 수석단원 1명, 준단원 3명 등 모두 5명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나머지 연수단원에게는 교통비 수준으로 지급하지만 배우 4명은 급여를 받는 만큼 주연급 전문 배우를 확보하기 쉽다. 이외에도 강서구는 작품에 소요되는 3000만∼40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있다. 내년에는 구민회관 지하에 소극장도 개관할 예정이다. 유영 강서구청장은 “한 자치구가 독자적으로 극단을 운영하는 것은 공연 횟수가 적어서 예산 대비 효과가 크지 않다.”면서 “인근 자치구와 협의를 거쳐 컨소시엄 형태로 지역을 순회하는 극단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상임연출가 송미숙씨 “대학로에는 나이가 지긋한 40∼50대 배우들이 부족합니다. 구립극단에서 연극의 기본기를 제대로 다진다면 여기에서 대학로에 진출하는 ‘역수출’도 가능하겠죠.” 경력 23년의 베테랑 연극 연출가가 문화변방지인 강서구에 둥지를 틀었다. 극작가이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송미숙(45·여)씨는 지난해 3월 공채를 통해 강서구립극단 상임연출가에 임명됐다. 그는 “항상 좋은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서 신설 극단의 연출가는 힘들다.”면서도 “무언가를 새로 개척하기 때문에 보람되며, 만일 문화인프라가 잘 갖춰진 자치구에서 연출가를 모집했다면 아마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1년정도 동아리 형태로 연수과정을 거쳤지만 단원 가운데 절반쯤은 초짜 배우로 출발했다. 게다가 연극은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40대 주부들의 굳은 몸은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연출가에게 ‘짐’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지긋한 나이가 연기에서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반박했다. “연기란 본래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라서 다양한 인생 경험을 가진 분들이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단원들의 의욕이 대단해서 오히려 제가 감명을 받았습니다.”무대에서 배우의 임무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지 경력의 유무는 아니라는 뜻이다. 연극을 통해 주부들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며 집안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또 이들이 내놓는 연극은 주민들에게 문화상품으로 다가선다. “외국처럼 우리도 자신의 마을에서 고급 문화를 향유할 때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구립극단의 공연은 만원 사례를 이뤘는데 관객들은 평소 연극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학로처럼 연극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지역이라서 문화욕구가 크다는 방증이죠.”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7)울산 장생포 고래잡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7)울산 장생포 고래잡이

    7000원짜리 ‘고래탕’을 시켰다. 맛은 육개장과 흡사한데 방아잎을 넣어 향내가 비할 데 없이 진하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은 고래고기를 한 점 입에 물더니 더 이상 젓가락질을 못한다. 그런데도 길 안내를 도와준 지역 인사는 “역시 고래고기가 최고야!”를 연발한다. 음식은 어릴 적부터 먹어온 취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출신지에 따라 선호도가 분명히 갈리기는 고래고기도 마찬가지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고래생회 4만원, 수육 4만원, 육회 3만원, 모듬 7만원 등이다.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 깔아 놓은 터수라 상당히 비싼 고기다. 한 평생 고래고기만 팔아온 ‘왕고래집’의 주인장은 “비싼 게 문제가 아니라 없어서 못판다.”고 했다. 우연히 정치망에 혼획되는 밍크고래 따위가 들어올 뿐이다. 포유동물인지라 목살, 배, 대창, 갈비, 혓바닥, 대롱창 식으로 분류해 주문에 따라 따로 낸다.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파는 것에 견줄까. ●고래고기는 해방 당시까지 민중음식 해방 당시만 해도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멀리 대구까지 가서 팔았다. 쇠고기가 귀한 시절에 고래만한 대체육이 없었으니 ‘민중의 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보릿고개를 넘기자면 고래고기를 먹어야 했다. 겨우내 비실비실하던 개에게 고래 연골을 먹이면 금세 털빛에 윤기가 흘렀다. 그만큼 고단백에 불포화지방산이 많다는 증거. 우리 식생활사에서 고래고기 섭취는 선사시대로 소급된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장생포 고래잡이는 수천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내재적 연속성이 너무도 극명하다. 고래 문화의 장기지속성이 적어도 울산 땅에서만큼은 지금껏 입증된다.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상류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암각화가 있어 엊그제까지 살다가 방금 전에 떠난 듯한 선사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다. 반구대에 각인된 고래는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따위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배의 밭고랑 무늬가 돋보이는 참고래, 배 타고 고래를 포획하는 선사인의 어로활동, 아기를 업고 가는 어미고래, 고래고기를 분육(分肉)한 듯한 분배 그림도 엿보인다. 캐나다 밴쿠버의 누트카,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쿠릴열도의 아이누, 태평양 알류트 등의 고래잡이와 비교되는 소중한 해양문화 유산이다. 동해안에 자주 회유해 오는 고래는 긴수염고래과(북극고래, 긴수염고래), 참고래과(브라이드고래, 밍크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돌고래, 흰긴수염고래), 향고래과(향유고래), 참돌고래과(흰옆돌고래, 돌고래, 참돌고래), 곱시기과(곱시기, 흑곱시기), 귀신고래과(귀신고래) 등이니, 대개 이들 고래가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 선조들의 주식이 고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암놈이 죽으면 수놈이 같이 잡히는 귀신고래 수많은 고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고래는 역시 귀신고래이다. 우리나라 연안에는 예부터 귀신고래가 많아서 19세기 말 일본 선단에 잡힌 고래의 태반이 귀신고래였다. 세계 고래학명에서 우리 학명이 붙은 고래는 귀신고래를 뜻하는 ‘Korean Grey Whale’뿐이다. 일부일처제로 금실이 좋아 암놈이 죽으면 수놈이 곁을 지키다가 마침내 같이 잡혀 죽음을 맞는다.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 어미가 새끼 곁을 빙빙 돌다가 또한 같이 잡힌다. 동물의 정을 역이용한 인간의 야비한 사냥방식이다.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된 귀신고래의 어쩌면 인간보다도 진한 혈육의 정을 보면서 귀신고래를 멸종시킨 인간의 잔혹함에 미안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캄차카반도의 차가운 바다에서 귀신고래들이 유영하는 모습이 간혹 관찰되고 있으니, 행여 우리나라로 돌아올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른다. 경상도에서 보편적으로 먹던 ‘민중의 음식’인 고래고기가 ‘귀족의 음식’으로 둔갑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985년 ‘느닷없이’ 포경이 금지되면서 ‘고래 항구 장생포’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느닷없이’라고는 하였지만 국제적 반포경운동이 불러온 예정된 결과였다. 수요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공급원이 사라지자 고래집도 거의 명맥을 잃게 되었고 고래도 ‘금값’이 되었다. 포경금지에 관한 국제협약의 파장이 장생포에도 강력하게 휘몰아쳤다. 포경선은 항구에 묶였고, 포신은 녹슬어 갔다. 이제 장생포에서 포경선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포경을 반대하는 구미 선진국은 본디 전세계적 규모로 포경을 주도해온 나라들이다. 한반도의 고래씨를 말린 나라들도 바로 이들이다. 어느 동물의 포살보다도 잔혹한 고래 포살을 보면서 동물애호가들이 전선에 나선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어제까지 세계를 주름잡던 포경국들이 반포경에 나선 것은 사실 역사의 아니러니다. 산업적 남획에 나섰던 구미열강, 그리고 후발 주자 일본 등은 고래기름과 부산물로 양초, 윤활유 및 수백가지의 공산품을 생산했다. 오로지 공산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고래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석유가 발견되어 더 이상 고래기름의 필요성이 소멸될 즈음에는 이미 고래 자체가 희귀존재가 돼버렸고, 그들에 의해 포경금지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래 멸종이 문제가 되자 상업포경은 금지하되, 본디부터 고래를 먹어온 이들의 원주민 포경은 용인한다는 결론이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도출되었다. 일본이나 노르웨이, 혹은 고래잡이를 해온 소수민족들 사이에 원주민 포경이란 이름으로 고래잡이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국제적 관계의 산물이다. 과연 상업포경과 원주민 포경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가능할까. ●1985년 포경금지로 몰락의 길 한반도는 ‘고래의 낙원’이었다. 국립수산과학원이 파악하고 있는 한반도 연해의 서식 고래류는 대형 고래류 9종, 소형 고래류 26종, 도합 35종이다. 전 세계 5대양과 강에 80여종이 분포하는 것에 비하면 한반도 고래분포의 다양성은 꽤 높은 편이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영일만 일대는 예로부터 고래바다, 즉 경해(鯨海)로 불렸다. 1849년 무렵 한반도 연안에서 조업한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에는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포경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간혹 해변으로 몰아서 잡거나 기력을 잃고 떠내려온 놈을 생포하는 그야말로 ‘소박한 수준’이었다. 동해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광란의 역사는 무능한 조선 정부를 무시하고 몰려든 일본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포경선에서 비롯되었다. 해방 이후에 대형고래는 거의 사라지고 어쩌다 등장하는 참고래, 그리고 예전에는 포경 대상에 끼지도 못했던 소형고래인 밍크고래 따위만이 남게 되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노르웨이 등의 남획이 불러온 비참한 결과였다. 해방 이전의 포경업은 전적으로 일본인 주관이었다. 고래고기집 주인 박경열(76·여)씨의 증언.“할배가 영덕에서 철공소를 했지요. 고향이 장생포라 해방되면서 고래잡이를 하려고 돌아왔지요.70㎜ 사제 대포를 만들고 뇌관은 일본인이 남긴 것을 썼어요.” 작고한 그의 남편 양원호씨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포경포 제작자이다. 장생포에서는 해방 직후에 200여명이 공동출자해 50t급 낡은 포경선 2척으로 고래잡이를 시작했다. 장생포 앞은 구로시오난류가 흐르니 연해주 쪽에서 내려오는 한류와 만나는 길목. 그래서 고래가 많았다. 동짓달까지 영일만 일대에서 잡다가 어청도까지 이동해 조업하곤 했다. 동해 고래가 유명하지만 서해와 남해 할 것 없이 흔했다. 고래잡이만큼은 장생포 사람들이 장악했기에 유독 동해 고래가 돋보일 뿐이다. 포경선에는 높다란 망통에서 목시(目視)로 망보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물색만 보아도 고래 종류를 알아맞혔다. 이제 그 때의 노련한 포수들은 거의 사망하고 없다. 남은 이들은 사실 후발주자들로, 전통적인 고래잡이를 증언할 만한 이들은 거의 없다. ●동해 ‘피바다’ 만든 외국인들이 포경금지 앞장 고래보호와 포경을 둘러싼 문제는 대단히 복잡 미묘한 국제적 사안이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장인 김장근 박사는 “고래 연구는 이제 출발입니다. 일본 같은 고래 대국이 해놓은 연구와 정책적 비전을 따라잡자면 장기투자가 뒤따라야 합니다.” 내년 5월30일부터 울산시에서 열리는 국제포경위원회 연례회의를 계기로 ‘솎음포경’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일찍부터 반구대유적과 장생포를 중심으로 전개돼 온 고래문화의 재현과 고래축제 등을 이끌어 온 울산시는 고래박물관과 고래 연구센터도 만들어 명실공히 ‘고래도시’로 발돋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고래식용 재개의 전제로 역사문화 및 사회·경제적 사유를 국제사회에 입증할 필요성이 있다. 사실 돌고래같이 엄밀하게 따져서 ‘훼일(Whale)’이 아닌 ‘돌핀(Dolphin)’류에 속하는 고래 외에 바다 포유류에 관한 입장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니 이른바 ‘과학포경’은 요원한 형편이다. 김 박사는 서식지 교란, 혼획, 선박 충돌, 수중음파 교란으로 사망하는 고래를 지적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래로 인한 어장 교란과 어구 피해, 어업자원과의 경쟁 등 고래와 인간의 마찰도 거론했다. 그의 말에서 ‘포경’과 ‘보호’라는 두 개의 과제를 동시에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육지를 마다하고 바다를 택하여 살아온 특이한 포유동물. 허먼 멜빌이 ‘모비 딕’에서 그렸듯 ‘고래등같이 큰’ 포유동물과 인간의 교감은 매우 복잡 미묘하여 고래와 인간의 갈등과 투쟁은 쉽게 종식되지 않을 전망이다.‘귀신고래가 돌아온다면 바다에도 평화가 깃들어 경해(鯨海)라는 옛 명칭이 부끄럽지않은 날이기도 할 것인즉, 행여 돌아올 수 있을는지.’하는 생각으로 장생포의 쓸쓸한 고래고기집 골목을 빠져 나오다가 다시 ‘고래도시 울산’이란 입간판과 마주쳤다.
  • [열린세상] 대한장애인체육회를 설립하자/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장애인계가 다시 시끄럽다. 장애인의 체육활동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농성 및 공청회로 장애인들은 단풍놀이를 대신했다. 문제의 본질은 그동안 장애인 체육활동이 비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하면 심각한 차별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다소 시정되기는 했지만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금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수급자격만 박탈함으로써 생활을 더욱 곤궁하게 몰고가는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도 받았다. 장애인전용 체육시설 하나도 제대로 없어 합숙훈련을 하는 동안 여기저기를 전전해야 하는 서러움을 감내해오고 있다. 더구나 지역사회에는 장애인들이 편안하게 접근하여 운동을 하고 몸을 풀 수 있는 시설이 거의 없어 넓은 의미의 여가문화 향유는 아예 사치스러운 개념이 되어버렸다. 장애인계는 이러한 차별상황이 초래된 주된 원인을 소관부처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장애인체육은 보건복지부에서 관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복지부가 설정한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인하여 열악한 중증장애인들의 시설보호, 기초소득 보장 등이 복지부의 주된 관심사항이며, 체육활동 지원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온 것도 사실이다. 지난 10월25일 공청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장애인체육 영역을 문화관광부로 이관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우선 장애인 당사자들이 이러한 뜻을 매우 진지하게 개진했고 그동안 난색을 표시해 오던 복지부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전체적으로 방향은 잘 잡은 듯이 보인다. 장애인특수교육을 복지부가 아닌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관장하고, 장애인 고용분야를 노동부 소관에 두는 행정분업의 정신을 감안하면 장애인체육도 일반체육을 관장하는 문화관광부에서 맡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광부에서 맡는다면 장애인체육이 비장애인체육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한들 두번째로 위치 지워질 수 있어 복지부보다는 지원의 폭이 커질 수 있으며 이미 구축된 전국의 체육시설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장애 변수만 고려하여 덧붙인다면 장애인체육분야의 발전을 통한 사회의 통합성을 더욱 공고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체육분야의 문광부 이전이라는 행정행위가 장애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우선 업무의 이관 이전에 문광부 체육국에 최소한 과 단위의 추진체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업무만 이관하면 장애인체육이 올림픽의 비인기종목처럼 소외되어 또다시 장애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체계적인 업무의 개발 및 예산작업의 원활화를 위해서도 과 단위의 인력확보를 위한 정부의 조직개편이 요구된다. 둘째, 현재의 장애인복지진흥회의 체육업무를 문광부로 이관하면서 대한체육회에 상응하는 ‘대한장애인체육회’를 설립해야 한다. 이는 장애인체육을 비장애인체육과 동일한 반열에 놓고 추진하기 위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할 사안이다. 이러한 기관이 있어야만 장애인의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을 전국적인 맥락에서 조화롭게 수행해 나갈 수가 있다. 셋째, 장애인체육을 엘리트 중심의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으로 양분하던 기존의 개념에 재활체육을 첨가함으로써 중증장애인시설, 특수학교 학생 등 중증장애인의 재활에 필요한 운동기능의 중요성을 정책으로 담아내야 한다. 문광부로의 기능이관이 자칫 재활영역의 블랙홀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중증장애인의 운동을 통한 재활 역시 매우 중요하며 이 영역은 복지부에서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업무인수과정에서 분명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모든 개혁작업이 그렇듯이 방향이 잡히면 그 다음에는 추진의 틀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전보다 더 나은 질을 확보하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유형과 정도, 그리고 의지에 맞게 재활시설에서, 운동시설에서, 올림픽경기장에서 밝은 얼굴을 보이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지는 것이다. 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 [함혜리특파원 유럽은 지금] 佛, 동성애자 전문 TV채널 개국

    캐나다,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이 TV 채널이 등장했다. 화제의 채널은 이미 개국이 예고됐던 ‘핑크 TV’. 이 방송은 25일(현지시간) 하오 8시30분 르노 도느뒤 드 바브르 문화부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 시내 샤이오궁에서 열리는 개국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첫 전파를 내보낼 예정이다. ‘동성애자와 동성애자 옹호론자들에게 자유와 관용의 문화를 향유하게 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이 방송사는 프랑스 최대 민영 TV방송국인 TF1과 유로채널인 카날 플뤼스(Canal+), 오락전문 채널 M6 등 상업 방송사들이 공동 출자했고 TF1의 전 임원 파스칼 우즐로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다. 핑크 TV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게이 가족이 인정되고 남자끼리 결혼이 논쟁의 대상이 된 데다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이 동성애자임을 공개 선언한 사실들을 근거로 프랑스에서도 동성애 전문 채널이 설립될 만한 분위기가 성숙됐다고 보고 있다. 파스칼 우즐로는 “오늘날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채널을 선보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핑크 TV는 자체 조사 결과 프랑스에서만 약 350만명의 동성애자가 있으며 이들의 84%가 동성애자 전문 채널이 생기면 가입해 시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방송은 1개월 시청료로 9유로(약 1만 3000원)를 책정했으며 2년 안에 가입자 18만 2000명을 확보해 광고 수입을 전체 수입의 20%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동성애 관련 내용이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토크쇼,TV 시리즈물, 영화, 실험영화, 기록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일 예정. 프로그램 중에는 특히 매주 자정 이후에 방영될 게이 포르노 영화 4편이 우선 주목받고 있다. 최초의 남성 포르노물 ‘아웃 오브 아테네’가 개국 첫날 밤에 방영되고 다음달부터는 ‘마담과 이브’를 시작으로 레즈비언 프로그램도 선보인다. 앞서 2001년 캐나다에서 ‘프라이드비전’이,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게이 TV’가 개국했고 미국에서도 ‘로고’가 내년 3월 방송을 시작하는 등 동성애에 대한 이해와 수용 추세에 맞춰 서구에서 관련 채널 설립이 잇따르고 있다. lotus@seoul.co.kr
  • [책꽂이]

    ●문장기술(배상복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평소의 상식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하면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중앙일보 기자인 저자는 처음부터 잘 쓰려고 욕심을 부려선 글을 완성하기 힘들다며 일단 말하듯 줄줄 적어내려간 뒤 찬찬히 읽어보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고쳐나갈 것을 권한다.1만원. ●사기를 탄생시킨 사마천의 여행(후지타 가쓰히사 지음, 주혜란 옮김, 이른아침 펴냄) 사마천은 스무 살 때 장강에서 회수·산동·황하 유역을 여행했으며, 그 후에도 관리로서 혹은 무제를 수행하면서 한나라의 주요 지역을 거의 돌아봤다.‘사기’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일곱 번에 걸친 중국대륙 여행이 있었다. 이 책은 사마천의 중국대륙 여행이 ‘사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밝힌다.‘사기’는 중국 전설 속의 제왕인 황제 때부터 하·은·주의 3대, 춘추전국시대, 진왕조를 거쳐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최초의 기전체 통사다.1만 2000원. ●캔터베리 이야기 연구(김재환 지음, 소화 펴냄)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의 미완성 운문 설화집. 캔터베리의 순교자 묘지를 참배하러 가는 순례자들이 여관에서 주고받았다고 하는 스물세 가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의 틀은 심한 격자결함(lattice deformity, 물질의 결정 안에 있는 원자의 배열이 규칙적이지 못하고 문란해진 현상))을 드러내는 등 현대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작품이다. 저자(한림대 교수)는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초서의 작가의식을 살핀다.1만 5000원. ●나는 학생이다(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들녘 펴냄) 중국의 대문호 왕멍(王蒙)의 인생철학 담론서. 왕멍은 열네 살의 나이로 중국혁명에 뛰어들어 지하당(공산당)에서 활동했지만,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파로 낙인찍혀 사막의 땅인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16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마침내 복권돼 문화부 장관까지 지냈다. 첫 장편소설 ‘청춘만세’를 비롯,‘볼셰비키의 경례’ ‘변신인형’ 등이 그의 작품.“인생은 명랑한 항해”라고 말하는 왕멍은 배움을 통해 인생을 통달하고 향유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9800원. ●퍼팅, 마음의 게임(밥 로텔라 지음, 원형중 옮김, 루비박스 펴냄) ‘게임 안의 게임’ ‘골프대회는 곧 퍼팅 콘테스트’라는 말처럼 퍼팅은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골퍼들은 퍼팅을 매우 두려워한다. 닉 프라이스, 데이비스 러브 3세, 존 댈리 등 세계적인 골퍼들을 상대로 정신적 조언을 해주고 있는 미국의 스포츠 심리학자인 저자는 세상에 완벽한 퍼팅 기술은 없다며 자신의 퍼팅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퍼팅은 퍼팅 스트로크를 할 때 머리와 신경계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놓아두라고 말한다.1만 2000원. ●버즈 마케팅(메리언 살즈만 등 지음, 김상영 옮김, 사람과책 펴냄) 버즈(buzz)란 용어는 원래 벌이나 기계 등에서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엔 고객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에 열광해 일종의 신드롬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버즈 마케팅은 구전 마케팅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생겨난 바이러스 또는 바이어럴 마케팅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책은 마케팅에서의 버즈 효과를 소상히 다룬다.1만 7000원.
  • ‘비목’ 작사가 한명희씨, 퇴임 후에도 왕성한 활동

    “이제 ‘비목 피스밸리(peace valley) 조성’에 전력을 쏟아야지요. 또 중앙아시아와 문화교류의 일도 많아지네요. 아울러 우리 문화원(이미시 문화원)에서 한문강좌도 새롭게 열었습니다.”‘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는 국민가곡 ‘비목’. 작사자 한명희(65) 서울시립대 교수가 최근 정년퇴임했다. 그러나 현역 때보다 더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단다. 우선 그의 숙원사업인 피스밸리(6·25추념문화단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지난 6월 한 교수의 자택인 ‘이미시 문화원’(남양주시)에서 시작됐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조성태 전 국방장관·김형국 서울대 교수·김후란 시인·서경석 예비역 중장 등 30여명의 인사가 모여 문화단지 건립의 뜻을 모았던 것. 한 교수는 “최근 남양주시가 이를 추진하기 위한 용역예산을 확보함에 따라 내년 6·25 55주년 이전까지 청사진을 제시하고 관련행사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단지 조성 규모는 12만여평. 6·25전쟁 60주년에 완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중앙아시아 전통음악계와 교류를 맺은 지 벌써 15년이나 됐습니다. 서로의 음악적 공감대를 찾고 향유하기 위해서지요.‘비목’ 역시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도 소개됐지요.” 그는 퇴임을 앞두고 이미시 문화원에서 매주 작은 음악회를 열어왔으며, 최근에는 한문강좌를 더 추가했다. 대상은 주로 지역 주민들이지만 가끔 서울에서 지인들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는 “퇴임해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아져 행복하다.”면서 “우리 음악의 미학적 특성을 새롭게 연구·정리할 계획.”이라며 또 다른 ‘음악적 결실’을 맺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PD시절 가곡운동을 함께 벌이던 장일남씨의 부탁으로 시 한 수를 지은 것이 ‘비목’이 됐다. 그의 이번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19일 저녁 국악인과 제자들이 국립국악원에서 ‘비목콘서트’(국립국악원)를 개최했다. 기념문집 출간기념회도 함께 열렸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핸드메이드 라이프/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더 단순하게 사는 방법을 찾을 때마다 우리는 두가지 점에서 남을 돕게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 세상의 자원을 소비하는 경우가 줄어든다는 점, 그리고 이웃의 풍족한 삶을 모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을 제시해 준다는 점이다.’(166쪽) 미국 메인주 북부 해안가에서 40여년간 자급자족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해 온 저자는 그 스스로가 단순한 삶, 자연친화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향유하는 역할 모델이 돼 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코트·헬렌 니어링 부부 등 자연주의자의 인생 철학을 잇는 그의 소박한 일상은 현대인에게 진정한 웰빙의 의미를 묻는 동시에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라고 격려한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전통 주거형태인 ‘유르트’에 매료된 그는 유르트 재단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현대식 유르트를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책은 저자가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터득한 삶의 공예술과 자급 생활방식을 토대로 얻은 성찰을 담고 있다.‘내 손으로 일구는 삶’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내손으로 만드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이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연주의자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그의 관심사는 단순히 개인적 삶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한다. 소박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발적 참여와 더불어 행복한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피력하고,‘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을 하는 생산 시스템을 꿈꾼다. 그가 추구하는 또다른 삶의 방식은 ‘문화혼합’이다. 책에는 그가 적극적으로 부딪친 여러 문화권 사람들과의 우정, 그들에게서 배운 소수 민족의 지혜와 그 안에 담긴 독특한 미의식이 담겨 있다. 손에 꼭 맞는 손도끼를 갖게 된 사연, 인디언의 나무공 만드는 법 등을 적은 글에는 저자의 애정어린 마음이 전해진다. 세계 곳곳의 민속 공예품과 대자연, 땀흘려 일하는 이들의 소박한 일상을 담아낸 사진작가 피터 포브스의 컬러 사진들도 인상적이다.1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아자! 아자! 시민기자] 노원문예회관 ‘난타’를 보고

    [아자! 아자! 시민기자] 노원문예회관 ‘난타’를 보고

    지난 10일 오후 7시30분 노원구 중계본동에 위치한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넌버벌 퍼포먼스인 ‘난타’를 아내와 초등학교 1학년인 딸과 함께 관람했다. 공연의 줄거리는 심술많은 매니저가 3명의 요리사와 자신의 조카에게 정해진 시간 내에 결혼피로연 음식을 마련하라고 주문한 뒤 이를 준비하는 요리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이렇다할 대사 없이 퍼포먼스로만 진행됐지만 초등학생인 딸도 쉽게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난타’라는 제목에서 공연이 매우 시끄럽게 진행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종일관 규칙적이고 흥겨운 리듬에 어깨가 절로 움직였다. 특히 관객이 직접 무대에 오르고 배우가 관람석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통해 배우와 관객이 일체감을 이룰 수 있었다.공연 막바지에 객석을 향해 던져진 플라스틱 공을 받은 딸은 자신이 배우가 된 듯 즐거워했다.이~ 때문인지 공연은 예정보다 10분 넘겨 90분 가까이 진행됐다. 관람객들의 관람태도도 일류 공연장에 못지않았다.공연장은 예술의 전당에 비해 작았지만 조명이나 시설면에서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이번 공연은 R석 3만원,S석 2만 5000원,A석 2만원으로 그동안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다른 공연보다 비쌌지만 난타전용관에서 관람하는 것보다 최대 40% 저렴한 것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같은 공연을 볼 기회가 자주 없다는 것이다.문화를 향유하려는 주민들의 욕구가 높아지는 만큼 각 자치구들도 보다 수준높은 공연을 유치해 개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평점 ★★★★☆.(평점은 별 다섯개 기준.☆은 ★의 절반을 나타냄.) 유진상 시민기자·유진상 내과 원장 dr0912@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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