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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의 소리] 문화양극화 해소안 마련할때/정경내

    최근 학력과 소득에 따른 문화소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다는 서울신문 기사(4월17일자)를 접하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최근 경기가 좋지 않아 일반인들은 먹고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단지 먹고산다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사회적인 제반 여건은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문화적 향유 기회를 뚜렷하게 구분짓고 있는 것 같다. 어지간한 공연 하나 보는데 몇만원, 몇십만원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보면 일반 서민들은 유명한 공연을 접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부에서는 저소득층이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 공연 티켓의 일정 부분을 서민들에게 할당하는 방안, 혹은 공연비용의 일부를 지원, 관람료를 낮추는 방안 등을 마련해주었으면 한다. 정경내 <부산진구의회사무국>
  • 문화소비 양극화 - 해법은

    문화소비 양극화 - 해법은

    ‘문화 양극화 해소의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문화예술 교육’ 문화 양극화가 사회 문제로 거론되면서 문화 나눔의 손길이 늘어가고 있다. 정부뿐 아니라 기업, 각종 사회단체들이 나서서 소외 계층에 공연 티켓을 전달하거나 직접 찾아가 공연을 여는 행사가 주류를 이룬다. 나눔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척 반갑고 고마운 일이기도 하지만 일회적이고 이벤트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양극화 해소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미흡하다. 그래서 자주 거론되는 대안이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예술교육이다. 아동복지시설 지온보육원의 김혜숙 팀장은 “소외 계층, 특히 상처받기 쉬운 어린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면서 “티켓 나눔이나 찾아가는 예술 공연 등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지만 골고루 자주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오히려 지속적으로 문화예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닫혀 있던 마음을 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한국메세나협의회는 문화관광부의 위탁을 받아 2004년부터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아동복지시설 아동을 대상으로 음악 국악 미술 연극 무용 영화 등 문화예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2004년 196개,2005년 201개 시설에서 올해 212개 시설 8300여명으로 그 대상을 점점 늘리고 있다. 복권기금과 30개 기업의 지원으로 그 규모는 50억원에 달한다. 메세나협의회는 경기지역 공부방 어린이를 대상으로 작은 크기의 문화예술교육도 꾸리고 있다. 유유미 한국메세나협의회 문화예술교육팀장은 “문화예술 교육을 통해 예술가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면서 “소외계층 아동들의 문화향유 능력을 기르면서 장기적으로는 밝고 건강하게 사회에 나갈 수 있는 마음을 갖추게 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즐기는 차원보다는 직접 배우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준다는 것이다.“아이들이 미술을 배우며 처음에는 어두운 색을 쓰다가 점점 밝은 색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걸 보게 된다.”는 문화예술교육 미술 강사의 말은 이러한 교육의 성과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 팀장은 그러나 “장애인과 노인층까지 교육을 확대하려고 했으나 당장 효과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그 효과를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도 없어 지원에 있어서 회의적인 반응도 있다.”고 전했다. 문화관광부는 창작자 지원 중심에서 향유층 육성 지원으로 정책 방향을 달리한 이후 소외계층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지원 규모를 2004년 35억원, 지난해와 올해 약 100억원으로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견줘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준이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아직은 걸음마 단계로 적확한 수요를 찾아가는 중”이라면서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자녀, 노인, 장애인, 결혼이주여성과 자녀, 소년원, 교정시설 등으로 지원을 점차 확대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단기적으로 효과가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장기적인 차원에서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첫걸음인 소외계층의 문화예술교육 사업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문화생산도 부익부 빈익빈…창작·유통·공유시스템 구축해야 문화 양극화는 소비뿐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서도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장르간 불균형과 장르 내부의 극심한 편차는 문화의 다양성을 위협하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당장 공연계만 해도 대형 해외뮤지컬과 대학로 연극의 제작, 유통 규모는 하늘과 땅 차이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의 폭발적 흥행 이후 뮤지컬계에서 제작비 100억원은 그리 놀랄 만한 액수가 아니다. 반면 대학로에서는 제작비 5000만원을 구하지 못해 정부 지원금에 목을 매는 극단들이 많다. 클래식과 국악도 마찬가지.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내한공연은 발 디딜 틈이 없지만 전통공연은 찬밥 신세다. 메타기획컨설팅 최도인 실장은 “정부가 기초예술부문에 대한 공공 재원을 늘렸지만 오히려 민간 단체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장르 내 ‘부익부 빈익빈’현상은 자본의 논리가 가장 첨예하게 적용되는 영화계에서 도드라진다. 거액을 들인 블록버스터급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는 언론의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수백개의 스크린을 독점하지만 독립 영화는 단관 개봉조차 감지덕지하는 실정이다. 출판 분야도 마찬가지다. 연매출이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단 한권의 책도 내지 못하는 출판사가 있다. 미술계에서도 억대를 호가하는 미술품을 사고파는 경매시장은 활기를 띠는 반면 인사동 화랑가는 찬바람을 맞고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문화 양극화는 지출비용 차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을 창작, 유통,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양극화 해소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문화소비 양극화] 국민 69% “양극화 공감”

    [문화소비 양극화] 국민 69% “양극화 공감”

    외환 딜러인 김경식(38·가명)씨의 달력에는 봤거나 보려는 공연 일정이 빼곡히 차 있다.4월 둘째주에만 메조소프라노 안네 소피 폰 오터 독창회,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독주회,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3편을 봤다. 그가 지난해 본 공연은 80여편, 티켓을 사는데에만 600만원을 넘게 썼다. 공연 DVD와 음반, 서적 구입비까지 합치면 한해 문화생활비는 무려 1000만원에 육박한다. 김씨는 “문화는 내게 휴식이자 활력소이기 때문에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수정(31·가명·서울 강남구)씨는 올초 내한한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여섯 번이나 봤다. 그것도 전부 20만원이나 하는 R석에서였다. 소문난 뮤지컬 마니아인 그는 ‘필’이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공연장을 찾는다. 이씨의 문화비는 한달 20만원꼴. 수도권 시립합창단원으로 일하며 버는 수입에 비하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이씨는 “공연에서 얻는 만족감이 훨씬 크다.”고 한다. 사회복지사가 장래희망인 여고 2학년 선영이(17·서울 영등포구)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조금씩 돈을 모아 2∼3개월에 한 번 정도 영화를 보러 간다. 그것도 조조할인으로만. 선영이네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이다. 건설 현장에서 뛰는 아버지는 요즘 경기가 나빠서인지 쉬는 날이 잦다.TV나 인터넷을 빼면 영화 보러 가는 게 선영이가 누리는 유일한 문화 생활이다.“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극장 가는 것을 사치스럽다고 하는 어른들도 있어요.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가는 게 재밌고,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 학교에 가서 할 이야기가 생기거든요.” 2006년, 문화를 향유하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얼굴들이다.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문화헌장제정위원회(위원장 도정일)가 오는 5월 공표 예정인 ‘문화헌장’초안은 ‘모든 시민은 계층, 지역, 성별, 학벌, 신체조건, 소속집단, 종교, 인종 기타에 의한 어떤 차별도 받음이 없이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문화를 맘껏 즐기는 ‘마니아층’과 생계에 찌들어 문화생활을 엄두도 못내는 ‘소외계층’이 공존한다. 수십만원대를 넘는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등 공연의 고가화는 이같은 문화 양극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학력과 소득에 따른 문화소비의 양극화는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전국 가구 가계 수지동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통계를 보면 지난해 전국 가구 중 소득이 상위 10%에 해당하는 계층의 교양·오락서비스 지출금액은 월 평균 25만 7500원으로 하위 10%의 3만 1400원보다 8배가 많았다. 또 학력별로도 대학원졸 가구가 14만 2000원으로 무학 가구의 2만 1700원보다 6.5배 많았다. 서울신문이 지난달 17일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문화 향수 및 인식’에 대해 전화 설문한 결과 69%가 ‘문화소비의 양극화 주장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정치·사회에서 문화로 급속히 옮겨가면서 문화향수 욕구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만큼 정부나 문화 생산자, 기업 등이 문화는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 공공성을 인식해 문화 양극화를 해소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녀 홍지민기자 coral@seoul.co.kr
  • 우리도 문화로 세상과 통하고 싶다

    배부르고 등따스워야 문화건 예술이건 있다고 생각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문화 향유는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며 서로와 소통하는 도구여서 먹고 사는 일과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비싼 공연을 즐겨야 정신적인 포만감이 늘어나고, 싸다고 해서 감동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문화를 통해 사회와 이웃과 친구와 소통의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사회복지사가 장래희망인 여고 2년생 선영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선영이도 또래처럼 노래방이나 놀이동산, 콘서트에 가고 싶고, 옷도 사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일을 나갈 때도 걸어다니는 아버지를 보면 용돈 얘기를 꺼내기 어렵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복지재단 산하 사회복지관 주선으로 대형 뮤지컬을 볼 수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흔치 않은 기회였다. 뒷좌석이었지만 멋진 스타들도 보고 화려한 무대도 봐 마냥 즐거웠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자랑할 보따리를 들고 학교에 간 것은 물론이다.40만∼50만원이 넘는 공연 티켓이 있다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지원을 받아 문화 공연에 가는 게 ‘난 가정 형편이 어려워’라고 떠벌리는 것 같아 마음 상할 때도 있어요. 양극화 해소요? 그런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과 기억이 되거든요. 친구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할 수도 있고요.” 정부가 2005년에 추산한 소외계층은 저소득층 320만명, 장애인 170만명, 노인 417만명 등 인구의 25%이다. 올해를 ‘문화 나눔의 해’로 정한 정부는 이들 말고도 이주노동자 40만명, 새터민 6000여명도 소외계층에 넣어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네팔 출신 미누 목단(35)은 한국에 온 지 14년이 된 이주노동자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록 밴드 ‘스톱크랙다운’을 2003년 겨울 결성했다. 그는 “일하고 잠자기 바쁜 이주노동자도 당연히 문화를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국내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온 지 20년. 주말이면 출신 나라별로 거리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가끔 운동을 즐기는 것으로 여가를 채울 때가 많다.“지자체나 사회단체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문화축제를 종종 마련해요. 힘든 노동을 잊고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이죠.” 하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당국에 등록한 이주노동자들은 체류 기간이 짧아 한국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점 때문에 문화에 관심을 돌리기 힘들다. 반면 체류 기간이 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약 18만명)은 불법 체류라는 약점 때문에 문화에 접근하기를 꺼린다. 미누는 직장 안에서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직장 동료들이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같이 관람하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편견을 깨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지민(27·가명)씨는 광명시에 살고 있다. 두 다리가 모두 불편하다. 오른손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지체부자유 1급이다. 동반자가 없으면 주로 집에 머물러야만 했던 그는 이제 홀로 바깥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전동 휠체어가 생기면서 서울로 나가 영화나 연극을 보러 다닌다. 그러나 장애인 편의 시설이 늘어나고 보행권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만 답답한 때가 더 많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에 다녀올라치면 왕복 5∼6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예사다. 길거리와 건물 입구의 턱도 지뢰밭 같지만 천신만고 끝에 공연 시설에 도착해도 객석에 입장하기까지는 왜그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그는 “아직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집에만 머무는 경우가 많아요.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가 자주 주어져야 해요. 장애인도 비장애인이랑 똑같은 사람이고, 문화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지요. 영화를 보든, 연극을 보든, 뮤지컬을 보든 그런 욕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용기를 갖게 되죠.”라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책꽂이]

    |실용|●오감 브랜딩(마틴 린드스트롬 지음, 최원식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싱가포르항공은 일찍이 1970년대 초부터 ‘싱가포르 걸’을 활용해 전통적인 브랜딩 장벽을 허물었다. 싱가포르항공은 ‘스테판 플로리디안 워터스’라는 싱가포르항공이 특별히 기획한 향을 이륙 직전에 제공되는 뜨거운 타월과 기내에 뿌렸다. 특허까지 받은 이 향은 싱가포르항공의 독특한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 책은 애플·디즈니·롤스로이스·스타벅스·뱅앤올룹슨 등 대표적인 감각 브랜드들이 어떻게 오감을 활용해 세계 최고의 브랜드가 됐는지 살핀다.1만 7000원.●허브(나가타 히로코 지음, 김용지 옮김, 시공사 펴냄) 허브의 어원은 ‘푸른 풀’이라는 뜻의 라틴어 허바(herba)에서 유래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허브에서 추출한 향유를 발라 살결을 부드럽게 가꿨으며, 로마시대에는 허브목욕이 사교의 수단이었다. 허브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 엘리자베스 왕조시대. 매너하우스(장원 영주의 저택)의 스틸룸(대저택의 식료품 저장실)이라 불리는 방에서 수확한 허브로 포푸리, 향기꽃다발, 포맨더(휴대용 향기주머니)등 여러 방향제품을 만들어 허브 향기를 생활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허브를 즐기는 40가지 방법을 소개.8000원.●배려의 기술(지동직 지음, 북스토리 펴냄)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뭔가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항상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링컨의 초상화를 쳐다보며 ‘링컨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자기계발 분야의 권위자인 나폴레옹 힐 또한 늘 위대한 사람의 사진을 보는 것이 성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책은 남을 배려하고 인격자를 가까이하는 것이야말로 세련된 삶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1만원.●글로벌 에티켓을 알아야 비즈니스에 성공한다(박준형 지음, 북쏠레 펴냄)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에는 문화재는 있으나 문화적 이미지는 없다.”고 혹평한 적이 있다. 그의 지적은 분명 ‘오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에티켓 수준을 든다면 우리는 그리 높다고만은 할 수 없다.‘문화훈련가’를 자처하는 저자는 “에티켓은 문화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국가별 비즈니스 프로토콜,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의 장애물, 에티켓과 매너의 차이 등을 다룬다.1만 5000원.
  • ‘황제테니스’ 청문회된 장관인사 청문회

    이명박 서울시장의 이른바 ‘황제테니스’ 논란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당대 당’ 전면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여당은 23일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도 이를 집중 거론했다. 이 시장이 서울시체육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것과 관련, 문화부가 체육정책 주무 부처란 논거였다. 반면 한나라당은 당 차원의 ‘이명박 감싸기’에 나서는 분위기다. 이날 문화관광위 인사청문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이 시장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포문은 이경숙 의원이 열었다. 이 의원은 “문화부에서 서울시체육회에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서울시체육회장을 서울시장이 겸하면서 사조직화하고 있다.”며 ‘황제테니스’ 논란을 인사청문회 쟁점으로 끌어들였다. ●李시장 정치적 용퇴 요구 김재홍 의원은 “‘황제테니스’ 사건은 국민들의 스포츠 향유권을 시장이 독과점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서 “체육정책 주무장관으로서 조사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이해찬 총리는 사퇴했는데, 이 시장은 같은 케이스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서 “정치적으로 용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노웅래 의원은 “이 시장이 남산테니스장의 토요일 전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전일을 독점 사용할 수 있도록 서울시테니스협회와 계약했다.”며 문화부의 전면 조사를 촉구했다. 한나라당은 이 시장의 이번 파문과 관련,‘신중한 관찰’에서 ‘적극 방어’로 선회하는 분위기다. ●한나라 ‘이명박 감싸기´ 나서 이계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여당이 사건의 본질을 침소봉대하고 부풀려서 정치 공세를 하고 있다.”면서 “이는 이해찬 전 총리의 골프 회동으로 불거진 정경유착 의혹을 희석시키고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략적인 공격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도가 지나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정현 부대변인도 “오늘부터 이 시장을 전면 지원할 것”이라고 가세했다. 이같은 변화는 여권의 전방위적 ‘이명박 공략’을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공세로 보고 파문 확산을 막으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김명곤 내정자 “스크린쿼터 축소재론 반대” 한편 이날 청문회에서 야당측은 김 내정자가 그간의 소신이었던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축소 반대 입장을 바꾼 점을 비롯해 탈세·투기·국민연금 미납·자녀의 위장전입 의혹 등 도덕성을 집중 공격했다. 김 내정자는 국민연금 미납과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선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종수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33)민간신앙과 차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33)민간신앙과 차

    새벽예불을 끝내고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흰장갑과 밀짚모자를 눌러쓴다. 싱그러운 햇차를 준비하기 위해 겨울을 이겨낸 차밭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삽과 괭이를 들고 차밭을 정리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젊은 노동력이 떠나버린 시골에서 사람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다행히도 일지암 차밭은 그리 크지 않아 혼자의 운력으로 가능하다. 차밭에는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이곳저곳 씨앗을 뿌려놓고 북상을 준비하고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냉이 등 봄나물들은 고단한 운력의 또다른 수확물 중 하나다. 아지랑이 바람결에 매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앙상하니 가시만 돋은 매화나무 가지 끝에 토실토실 맺혀 있던 새빨간 꽃망울들이 순서도 없이 중간중간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천리향인가 바람을 타고 햇살을 이고 산하대지에 골고루 그 향기를 뿌리며 봄이 지나가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온우주가 자궁이란 말이 실감난다. 차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차는 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차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차의 형식은 있고 그 정신적 내용은 빠진 빈 알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을 비롯한 옛 차인들이 차를 도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일상에서 완전한 삶의 행위로 간단없이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씩 차인들의 찻자리에 초대받으면 금방 알수 있다. 여기저기 제자리에 있지 않은 차도구들, 정결하게 준비되지 않은 청수들…. 그 찻자리는 청향보다 수다스러움과 번잡함이 넘쳐난다. 마음속에서 작은 실망들이 저절로 우러난다. 우선 찻자리는 상큼하고 청량해야 한다. 찻상과 차도구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먼저 찻자리까지 정리해야 한다. 그러면 일단 그 찻자리는 청량함과 신선함이 넘쳐난다. 그런 다음 물을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고 난 뒤의 뒤처리까지가 마치 물흐르듯 빈틈 없고 완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차의 도인 것이다. 그같은 차의 살림살이는 바로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옛 차인들은 바로 차의 일상을 살림살이와 함께 여여하게 가꾼 것이다. 우리의 차는 매우 그 역사가 깊다. 그리고 그 차의 역사 역시 일반 민중들의 삶속에 깊이 투영되어 함께 해왔다는 점이 간과되어 왔다. 차는 역사속에서 민중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차가 일반 민중들의 음료로서 애용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찻집같은 곳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찻집의 이름은 ‘다점’이었다.‘다점’에는 누구나 다 드나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차는 일반민중들이 애용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민요사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문수동에 문수동자/화개동천 차객들아/쌍계사의 대중들아/이 차 한잔 들으소서”라는 민요를 보면 화개동천에는 많은 차인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의 화개동천은 전통적인 차 주산지로서, 차가 일상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다른 민요를 살펴보자.“여보소 작설한잔 하는 재미 들어보소. 우리 사람은 서로 인연 따른 재미로 사네.”라든가,“작설 한잔 마시면서 내 간장을 달래보세.”“엄살많은 시애비는 작설 올려 효도하고”“동지섣달 긴긴 밤에 작설 없어 못살겠네.”라는 등의 민요에서 살펴지듯 작설차는 일상의 적요로운 삶을 달래는 친근한 민중음료였다. 또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그 민요속에 차가 가지는 정신적인 측면이 깊이 박혀 있다는 점이다. 잠 안오는 긴긴 동지섣달에 차를 마시는 것이며, 구박하는 시애비의 마음을 달래는 것 등 차에는 사람의 고단한 마음을 달래는 정신적인 측면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민요도 있다.“에헤야 대헤야 우리 인생 작설로 풀어보세”를 볼 때 차는 지친 우리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는 역할을 했다. 차는 우선 약용으로 쓰였다. 차를 생산하거나 차가 재배되는 곳의 민중들은 차를 찧어 발효시켜 메주처럼 처마밑에 차를 매달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엽전이나 수레바퀴모양의 이른바 ‘떡차’로 불리는 처마 밑 차는 두통약 뱃병약 소화제 해독제 등 만병통치약으로 널리 쓰였다. 구급상비약이었던 ‘떡차’는 차를 마시건 마시지 않는 사람이건 긴 실줄같은 끈을 사용해 처마밑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반민중들이 애용했던 차는 대부분 발효차인 ‘떡차’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반민중들은 당시 차를 따로 보관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구들도 태부족하거나 아예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반민중들은 차를 쉽게 마실 수 있기 위해서 평소 부뚜막에서 물을 끓이듯 마실 수 있는 차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차를 마시고 싶을 때 처마밑에 걸어둔 차를 한조각 빼어다가 구리솥이나 돌솥 가마솥같은 곳에 넣어 끓여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되는 차 민요를 통해 일반 선비들에게는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님은 님은 품에 자고/새는 새는 나무에 자고/우리님은 어디 잘고/새 혀 닮은 작설 잎은/선비품에 잠을 자네.”라며 차가 공부를 하는 선비의 곁을 지키는 도우미 같다는 것을 담아내고 있다. 이와 관련된 또다른 민요도 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차약을 먹고 장원급제를 간절히 비는 민요가 그것이다. “둥개 둥개 두둥개야/금자동아 은자동아/천리 금천 내새끼야/영축산록 차약일새/좀티 없이 자라나서/한양가서 장원급제/이 낭자의 소원일세/비나이다 비나이다/부처님전에 비나이다.” 차가 공부를 잘해 장원급제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를 지니고 차를 마시며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장원할 수 있다는 간절한 염원을 차에 담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차는 또 일반민중들에게 기복을 염원하는 매개처였다. 차는 그런 점에서 민중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물이었다. 신령스럽고 고귀한 차를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믿고 그 차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당산이나 용신제에도 차는 쓰였다. 옛사람들은 바다 연못 등 물속에 깃들어 있는 용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속에서 죽어간 고혼들을 위해 수륙재를 지낼 때나 또는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용왕에게 수륙재를 지냈다. 그와 관련해 불교의 (범음집)에는 감로다를 올리며 소원을 비는 다게가 있다. “이제 감로다를 가지고/용왕님들께 올리나니/간절한 마음 살피시어/부디 받아주소서” 이와 관련해 (범음집)에는 “용궁에 가득차 있는 설산의 향유(차)가 있어, 용신이 그 차를 좋아한다.”고 적혀 있다. 용왕에게 올린 차는 바다나 못에 뿌렸다. 차는 또 농사의 풍작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가신’(家神)에게 비는 고사에도 쓰였다. 제주도에서는 정월이나 2월 중에 고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밥 떡 쌀 식혜 다완 무명을 올렸다. 여기서 다완은 차를 담는 그릇이고 그릇에 담긴 것은 차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무녀의 고사 축원문에는 ‘찻잎을 찐 시루를 큰 다완에 담아 젯상에 올렸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무속인들은 대부분 고사를 지낼 때 차를 큰 사발에 담아올린다는 축원문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사는 집안에 행운이 오고 액운을 아달라고 비는 것으로, 차는 척사의 중요한 제물로 이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던 솜의 원료인 잠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다례를 했다. 세종때 (사시찬요)에는 “잠신제사는 음력 1월15일에 지내는데 누에 칠 여인이 제주가 되어 향과 음식과 떡을 갖추며 술을 쓰지 않고 차를 사용한다.”고 적혀 있다. 삼신 산신 토속신에게도 헌다를 했다. 여기에서 삼신은 환인이나 단군 또는 산신 마을을 지키는 토속신이기도 하다. 민중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이들에게 차를 달여 올리고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소원을 빌었다. “이슬감로로 다린 햇차를/삼신단위에 올려놓고서/금산 산신님 남해용왕님/나라세우신 태조님이요/두손 모아서 빌어 옵니다/이내 한소원 들어주소서” 일반민중들은 단군뿐만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들이 차를 매우 좋아한다고 믿고 제물로 올렸던 것이다. 이같은 것을 볼 때 차는 민중들의 삶과 신앙속에 오랫동안 하나의 삶으로 존재해왔다고 보여진다.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용으로, 긴긴밤 마음의 시름을 달래는 친구로, 또한 나쁜 액운을 막아주는 척사로, 그리고 긴급한 구급상비약으로 쓰여진 것이다. 차는 그런 점에서 우리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전통음료로서 새롭게 각인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지암 암주 ■ 민중들의 음료 ‘차’ 구전민요에도 담겨 차가 일반민중들의 속에 삶의 한 형태로 자리잡고 내려온 고유한 음료였다는 것은 채록된 구전민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지배계층은 각종 역사서나 개인의 시문집을 통해 차생활을 즐겼다는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으나 그같은 기록을 가질 수 없었던 일반민중들은 삶의 노래인 민요로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몇가지 차 민요를 소개해본다. “백운계곡 봄 안개에/물소리가 높아지네/고로쇠는 물오르고/보조스님 좋아했던/선동골에 작설나무/백설덮인 양지쪽에/나풀 나풀 돋은 새싹/한잎 두잎 따서 모아/두강 작설 그 맛내려/조심 조심 손질하여/봉지 단지 담아두고/삼짓날에 제비올때/순천장에 옥항아리/깍지말고 사왔어서/옥용골에 이슬받고/도선국사 파둔 샘물/개 안짖고 닭 안울때/옥항아리 물을길어/옥탕관에 물을 끓여/백운차를 달이어서/천년예언 도선국사/이 차 한잔 올리옵세/백운산에 산신님네/백운사의 보조스님/고로쇠물 풍풍솟게/두손 모아 비옵니다.” 이 민요에서는 첫물차를 정성스럽게 딴 후 약으로 쓰이는 고뢰쇠물을 많이 얻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고 있다. 차를 따고 물을 뜬 후 정성스럽게 달여 올리는 간절한 염원이 보인다. 다음은 김수로왕과 왕후 허황옥에게 햇차를 올리는 민요다. “다전리에 봄이오면/삼월이라 삼짖날에/다전리에 햇차 따서/만장산샘에 물을 길어/어방산에 솔갈비로/밥물솟에 끓인 물에/제사장님 다한 정성/김해그릇 큰 사발로/천겁만겁 우려내어/장군차로 올릴까요/바이 바이 차림니더/나라 세운 수로왕님/십왕자의 허왕후님/가락국가 세운 은혜/이 차 한잔 올립니더/합장하고 비옵니다/김해사람 복받으소/잘못한 일 점제하소.” 다전리에 햇차를 딴 후 만장산의 샘물을 길러 고마움을 축원하는 씨족들의 마음이 간절하다. 이 제문은 김해김씨 씨족의 제사때 불리는 제문겸 민요다. 이 민요는 김해가 차를 생산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다완을 생산하는 중요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이밖에도 자식의 점지를 기원하는 내용, 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고단한 삶을 노래한 내용들 등 차에 관련된 민요가 내려오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차는 일반민중들의 삶속에 상서러운 제물로 소원과 발복을 비는 축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 차는 또한 민중들의 삶을 수탈하기도 한 이중적인 모순을 지녔다. 국가의 어용 차를 생산하던 민중들은 극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같은 어려움을 김종직은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같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직접 차밭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긴긴 역사속에서 우리민중들의 삶과 같이 해왔던 차는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삶속에 다가오고 있다. 차 인구 700만시대가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의 삶과 걸맞은 새로운 차의 문화양식이 정립되어야 한다.
  • “군인들 다 나가니 뭘 먹고 사나”

    “강원도 전방지역 군장병들의 외출·외박지역 확대를 철회해 주오.” 1일 강원도에 따르면 최근 육군에서 군장병에 대한 외출·외박 지역을 작전책임지역(위수지역)을 벗어난 전국을 대상으로 추진하면서 고성, 인제, 화천, 양구, 철원 등 접경지역 주민들이 생계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도내 군부대들은 1월부터 장병을 대상으로 외박(2박3일)때 작전책임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까지 갈 수 있도록 한 제도를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제도가 시행되면서 인제군 북면 원통리 지역주민들은 “주말이면 북적이던 군장병들이 대부분 춘천 등 외지로 모두 빠져나가 읍내가 썰렁하기만 하다.”면서 “지역 상공인들이 이제는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강원도는 이날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에 “수십년 간 인근 군부대와 군장병에 의존해 생활해 오고 있는 전방지역 주민 및 소상공인들의 열악한 경제여건과 지방자치단체의 취약한 산업 구조를 감안해 해당 제도 시행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규화(양구)도의원은 “군장병 외출·외박지역의 전면 확대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는 접경지역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라며 “강원도 전체의 민생경제와도 직결돼 있는 만큼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화천 등 군장병 외출·외박에 따른 경제 의존도가 절대적인 해당 자치단체와 군의회 등이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정갑철 화천군수는 “외출·외박지역 확대는 접경지역 경제를 위축시키고 나아가 강원도가 추진하고 있는 군의 도민화운동 등 민·관·군의 신뢰성 제고정책에도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라며 군당국의 재고를 촉구했다. 강원도와 해당 자치단체들은 이와 함께 ‘군의 우리도민화 운동’을 확산시켜 군장병에 대해 신뢰 쌓기와 친절운동 등을 펼치고, 군장병 우대가맹점 제도 확대 시행 등 전방지역 각종 소상공인들의 군장병 유인시책도 병행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에 대해 1군 사령부 관계자는 “군장병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져 기본권과 문화향유권을 확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이 장병을 흡수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경쟁력을 강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9) 가치와 사실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9) 가치와 사실

    누구나 인생을 가치있게 보내려 한다. 그 가치가 무엇인가? 가치는 경제적 가격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쉽게 말해 시장에서 인기가 있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사람도 만인의 인기에 의하여 그 가격이 결정된다. 가격이 비싼 사람은 그만큼 가치도 많아 보인다. 현대의 정치와 문화가 모두 상업화되어 가는 마당에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모두 총력을 기울인다. 가치가 꼭 가격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가치는 슬픔의 상처를 안고 밀려난다. 역사에 이런 슬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격과 가치가 불일치한 경우다. 좌우간 가치나 가격은 세상사가 다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기에 생긴다. 이 말은 사회생활에서 상대방의 인정과 승인을 얻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소유욕을 말한다. 소유욕은 단적으로 인간사이에 먹으려는 욕망이 원초적이라는 것과 통한다. 불교에서는 이 먹고 싶은 욕망을 사식론(四食論)이라 부른다. 음식을 쓸어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싶은 단식(段食), 남녀간에 피부로 접촉해서 먹고싶은 촉식(觸食), 상호간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을 설득 동화시키고 싶은 의사식(意思食), 자기의 지식으로 대상을 정복해서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식식(識食) 등을 사식이라 한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잘 통찰한 바와 같이, 사회생활에서 타자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얻고 싶은 욕망은 불교적으로 보면 다 타자를 먹고 싶은 소유욕과 같다. 음식 먹기도 문화여서 타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맛있고 우아하게 먹으려 하고, 성욕도 사회적인 승인을 통해 배출하려 한다. 원초적으로 인간의 사회생활은 먹고 먹히며 서로 인정받고 승인받기 위한 투쟁과 갈등의 연속이다. 가격과 가치가 그런 상호주관적인 욕망관계에서 생긴다. 그런데 가치는 가격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격은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도태되면 그것으로 수명이 끝이지만, 가치는 인간의 마음이 개입된 복잡한 욕망의 주장이다. 가격경쟁에서 실패했지만, 마음이 겨냥한 가치가 무의미하게 사라졌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상호주관적 욕망이다. 비록 시장에서 탈락되었으나, 언젠가 나의 가치를 인정승인할 날이 올 것이라고 앙앙불락 기대한다. 그것이 신념일 수 있고, 나쁘게 보면 고집일 수 있다. 인류사의 가치론을 볼 때 한때 가격에서 탈락되었으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엄청난 경쟁력을 새롭게 지니게 된 가치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가격과 가치가 불가분이지만 꼭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그 가치가 무엇인가?‘내가 가치있게 살고 싶다.’할 때의 그 가치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정치적, 도덕적, 예술적, 학술적 생각을 사회적으로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앞의 사식(四食) 가운데 의사식(意思識)이나 식식(識食)이 주로 여기에 해당하겠다. 가치는 상호주관적 사회생활에서 소유론적 욕망과 직결된다. 사회생활이 없다면 가치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cogito)’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의사식이나 식식에서 타인을 설득시키고 지식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논리를 정리하고 이념을 창출한다. 이것이 시장에서의 광고처럼 이념에서의 선전이다. 이념의 선전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cogitamus)’으로 만들기 위한 소유욕의 책략이다. 특히 소유욕의 책략에서 정치적 가치가 예술적 가치보다 훨씬 강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가치는 세속적 지배를 원하는 종교적 가치처럼 지배의지를 진리의지와 동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구조주의 철학자 라캉이 그의 저서인 ‘기록’에서 한 말이다.“내가 존재하는 곳에 나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무슨 말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호주관적 사회생활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기 위함이지,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언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고, 생각이 일어나서 분별하는 경우는 모두 소유를 위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는 모두 호오와 시비와 선악을 내가 취사선택한 한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가치는 나의 생각의 산물이고, 이것은 또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의사식과 식식의 경우에만 ‘나는 생각한다.’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단식과 촉식의 경우에도 내가 먹는 음식이나 나의 몸매가 만인이 부러워하는 선망의 표적이 되게끔 만인을 홀리려 한다. 라캉의 생각처럼 사회생활에서 모든 것이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로 환원된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사회생활이 그래왔었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트 계통의 학자인데, 결국 성욕이 인류사회의 가장 원초적 언어활동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겠다. 성욕과 소유는 같은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무의식중에 가치있는 인생을 향유하기를 기원해 왔다. 가치없는 인생은 타자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가치는 결국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만인에 의하여 평가받고 싶은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가치는 나의 기호를 만인의 기호로 변경시키려는 확장욕에 불과하다. 이 확장욕은 우리가 앞 글(1·2·3·6·7·8회)에서 여러 번 지적한 본능의 소유욕에 해당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어떤 충격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가치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서 가치가 결국 무의식적 본능의 소유욕을 의식의 명분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가치는 각자의 심층적 소유욕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각별하게 연관된 것일수록 더 사회지향적 선전이 심하다. 그런 가치는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그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도록 각색한다. 대개의 역사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세계사를 통하여 널리 확산되어 왔었다. 그래서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초기 실존주의에서 후기 사회혁명주의로 기운 철학자 사르트르와의 역사논쟁에서 사르트르적인 공산주의 지향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면서, 역사는 늘 어떤 이념적 경향성을 잠복시킨 내용적 편파성과 외연적 부분성을 띠고 있으므로 역사를 과학으로 인정하기를 그의 저서인 ‘야생적 사유’에서 거부했다. 그는 이념적 가치의 편향성에 의한 사실왜곡이 거의 없는 인류학과 민족학을 역사에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정치적 사회적 이념의 가치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을 언명함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세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세가지의 한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그것이 가장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선택했다는 한계고, 다른 하나는 자기선택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한다는 한계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가치의 선동선전에 미쳐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반가치(4회 참조)를 품고 있는 측면을 전혀 도외시한다는 한계다. 그러면 모든 가치는 다 문제적인가? 세상을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경향성이 희소한 순수 종교적, 예술 미학적 가치가 가장 사실성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지? 그러면 무엇이 진짜로 사실인가?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한 것만을 사실성으로 인정하는 실증주의적 시각이 옳은가? 실증주의는 사실성을 밝히는 데 너무 좁고 미흡하다.10여년 전 뒷길 교통신호대도 없는 네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내가 냈는지 당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에 그 사고의 원인은 길 건너 앞차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차의 진로를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 거기에 신경이 빼앗겼기에 다른 차와 접촉하는 사고가 생겼다. 이것은 나의 심증이지 물증이 없다. 이처럼 실증주의는 사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너무 좁다. 소유론적 무의식을 지닌 가치가 다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사실의 왜곡에 기인한다면, 지공(至公)한 사실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앞으로 21세기적 모든 학문의 의미는 가치론보다 사실론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모든 가치는 결국 자아중심적 소산이다. 자아가 어떤 색깔로 물들어 있어서 그 색깔로만 세상을 바라보므로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는 자는 두가지 부류겠다. 하나는 이념적 가치를 위하여 일부러 사실을 거짓말로 속이는 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어떤 특정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모르고 그 색깔로 세상을 늘 보는 자이다. 무의식의 소유욕이 그런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전자는 진짜로 언급할 만한 거리도 못되는 정신적 사이비다. 그러나 후자는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무의식의 업장에 갇힌 자이고,20세기 프랑스의 현상학적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용어로는 잠재적인 ‘암묵적 전(前)의식’의 집단무의식에 갇혀 사는 자이다. 다 같은 생각을 개진한 것이겠다. 업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걸리면, 그 업과 무의식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은 생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식이 모른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미래의 교육에서 가치관 형성에 열을 올리지 말고, 인간이 자아를 가진 한에서 얼마나 편견과 아집의 노예가 되기 쉬우며, 가치의 이름으로 세상을 헛보게 만드는가를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가치가 반가치를 필연적으로 띤다는 것(4회), 가치는 자기 기호의 선택이므로 전체를 보는 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아를 무아로 점진적으로 바꾸는 교육이 실제로 자아의 가치관교육보다 더 미래의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말해주어야겠다. 역사와 세상과 자연의 전체 사실을 여여하게 보는 눈을 키우는 공부가 미래의 철학교육이리라. 미래의 철학은 어떤 특정가치를 세상에 뒤집어 씌워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아의 탐욕이 없는 마음에 비쳐지는, 존재하는 필연성을 아는 데 있겠다. 신경병도 과거 억눌렸던 상처를 알아차리는 데서 치유된다. 가치의 주입이 아니라 무명(無明)의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 눈 뜬 장님들이 세상의 사실을 왜곡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Zoom in 서울] 서울시 문화예술 중장기계획

    “2015년 어느 날 서울 청계천을 산책하던 소설가 구보씨의 발길이 ‘광화문 도서관’에 멈췄다. 구보씨가 다니는 대학로 ‘창작스튜디오’에서 만난 동료 문인이 추천한 신간을 빌리기 위해서다.10년 전만 해도 대형서점에나 가야 책을 찾을 수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밤에는 ‘이중섭 특별전’을 보러 동네 미술관에 가볼 작정이다. 지난달 자신이 펴낸 소설의 설명을 위해 주민들과 대화를 가진 곳이다.” 이처럼 10년 뒤에 서울시가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꽃피울 수 있을까. 서울시는 27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한 ‘비전 2015 문화도시 서울’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가 문화·예술부문의 중장기 계획을 세운 것은 처음이다. ●전문가들 1년여동안 50여차례 모여 집중논의 계획은 장밋빛이다. 곧 ▲삶이 곧 문화가 되는 문화예술 구현 ▲사람 중심의 쾌적한 도시공간 조성 ▲기본적인 문화 향유가 보장되는 문화복지 실현 ▲지식과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산업 육성 ▲더불어 사는 시민문화 정착에 두고 있다. 권영규 문화국장은 “삶의 질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문화부문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1년여 동안 전문가들이 50여차례 모여 집중논의한 끝에 나온 계획”이라며 “전문가와 시민들이 ‘서울문화포럼’을 구성해 시장의 교체와 상관없이 꾸준히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27개 세부 추진과제를 제시했다.10년 동안 시예산·민간자본 7조 6000억여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순수문화예술 분야의 예산비중도 현재 2.6%에서 5%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동네에 풍기는 문화향기 가까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2015년까지 미술관(25곳→50곳), 박물관(83→150곳), 도서관(75곳→175곳)을 대폭 늘릴 예정이다. 특히 마을문고·구립도서관·시립도서관 등 도서관 연계망을 구축한다. 서울시 대표도서관은 올해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이나 청계천 주변에 부지를 선정, 본격적인 건립작업에 들어간다. 문화예술인의 창작스튜디오도 확충(2곳→15곳)하고 작품제작 지원금액(19억원→120억원)도 늘린다. 또 ‘축제육성 조례’를 제정해 다양한 축제를 발전시키고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교향악단 수준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전통과 자연 되살리는 도시 경희궁 추가 복원과 서울성곽·북한산성·탕춘대성 복원 등을 통해 역사유산을 되살리기로 했다. 청계천과 한강을 수변 문화벨트로 꾸미고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소외계층을 포함한 시민들의 문화 향유기회를 확대할 방침이다. 연내 도시디자인 조례를 만들어 간판, 광고물, 야간경관 등 건축물·도시계획 부문에서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을 계획이다. 주택가 골목길에 소규모 미술전시장을 확보하고, 자원회수시설·물재생시설에 생태학습장, 청소년 문화체육시설 등을 입주시켜 복합문화공간으로 가꿀 계획이다. 그러나 설립장소 등의 구체적 시행안 마련과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숙제로 남아 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Zoom in 서울] 서울시 문화예술 중장기계획

    “2015년 어느 날 서울 청계천을 산책하던 소설가 구보씨의 발길이 ‘광화문 도서관’에 멈췄다. 구보씨가 다니는 대학로 ‘창작스튜디오’에서 만난 동료 문인이 추천한 신간을 빌리기 위해서다.10년 전만 해도 대형서점에나 가야 책을 찾을 수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밤에는 ‘이중섭 특별전’을 보러 동네 미술관에 가볼 작정이다. 지난달 자신이 펴낸 소설의 설명을 위해 주민들과 대화를 가진 곳이다.” 이처럼 10년 뒤에 서울시가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꽃피울 수 있을까. 서울시는 27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한 ‘비전 2015 문화도시 서울’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가 문화·예술부문의 중장기 계획을 세운 것은 처음이다. ●전문가들 1년여동안 50여차례 모여 집중논의 계획은 장밋빛이다. 곧 ▲삶이 곧 문화가 되는 문화예술 구현 ▲사람 중심의 쾌적한 도시공간 조성 ▲기본적인 문화 향유가 보장되는 문화복지 실현 ▲지식과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산업 육성 ▲더불어 사는 시민문화 정착에 두고 있다. 권영규 문화국장은 “삶의 질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문화부문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1년여 동안 전문가들이 50여차례 모여 집중논의한 끝에 나온 계획”이라며 “전문가와 시민들이 ‘서울문화포럼’을 구성해 시장의 교체와 상관없이 꾸준히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27개 세부 추진과제를 제시했다.10년 동안 시예산·민간자본 7조 6000억여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순수문화예술 분야의 예산비중도 현재 2.6%에서 5%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동네에 풍기는 문화향기 가까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2015년까지 미술관(25곳→50곳), 박물관(83→150곳), 도서관(75곳→175곳)을 대폭 늘릴 예정이다. 특히 마을문고·구립도서관·시립도서관 등 도서관 연계망을 구축한다. 서울시 대표도서관은 올해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이나 청계천 주변에 부지를 선정, 본격적인 건립작업에 들어간다. 문화예술인의 창작스튜디오도 확충(2곳→15곳)하고 작품제작 지원금액(19억원→120억원)도 늘린다. 또 ‘축제육성 조례’를 제정해 다양한 축제를 발전시키고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교향악단 수준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전통과 자연 되살리는 도시 경희궁 추가 복원과 서울성곽·북한산성·탕춘대성 복원 등을 통해 역사유산을 되살리기로 했다. 청계천과 한강을 수변 문화벨트로 꾸미고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소외계층을 포함한 시민들의 문화 향유기회를 확대할 방침이다. 연내 도시디자인 조례를 만들어 간판, 광고물, 야간경관 등 건축물·도시계획 부문에서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을 계획이다. 주택가 골목길에 소규모 미술전시장을 확보하고, 자원회수시설·물재생시설에 생태학습장, 청소년 문화체육시설 등을 입주시켜 복합문화공간으로 가꿀 계획이다. 그러나 설립장소 등의 구체적 시행안 마련과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숙제로 남아 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책꽂이]

    ●그는 지도 밖에 산다(제임스 캠벨 지음, 김유경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가 된 알래스카. 면적(153만 694㎢)은 미국에서 최대이고 인구(62만여명)는 아이오밍 주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특히 알래스카의 북동부 내륙지역은 산맥과 툰드라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기후 변화가 심하고 추위가 혹독한 곳이다.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척박한 땅에도 사람은 산다.‘알래스카 최후의 변방인’으로 불리는 하이모 코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은 그의 ‘선택받은’ 삶의 기록이다.1만 2800원. ●신선전(갈홍 지음, 임동석 옮김, 고즈윈 펴냄) 동진시대 갈홍이 ‘포박자’ 내편을 완성한 뒤 신선들에 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10권의 지괴(志怪)소설이자 신마(神魔)소설. 도교문학을 대표하는 이 책에 실린 신선 중 유향의 ‘열선전’과 중복되는 인물은 용성공과 팽조 두 사람뿐. 나머지는 갈홍이 직접 수록해 선보이는 신선들이다. 책에는 실존인물도 등장한다. 도가가 한나라 때는 ‘임금된 자의 통치술’로 일컬어졌고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종교로서도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를 이해할 만도 하다.1만 8000원.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조완묵 지음, 정신세계사 펴냄) 줄다리기·횃불싸움·놋다리밟기 등 마을 전체 구성원이 참여하는 공동체적 놀이, 줄타기·농주(弄珠)같은 개인기예, 태껸·활쏘기·검술 등 전쟁기술에서 발전돼 나온 전통무예 등을 다뤘다. 신라 29대 임금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이 함께 뛰는 모습을 통해 오늘날 축구와 같이 발로 공을 차는 놀이인 축국(蹴鞠)을 설명하는 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곁들였다. 민족유희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국내 첫 전통스포츠사.1만 5000원. ●루 살로메(프랑수아즈 지루 지음, 함유선 옮김, 해냄 펴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작가 루 살로메의 이지적인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오묘한 매력은 늘 주위에 정신적·육체적 동반자들을 불러모았다.21세 때 니체를 만나 그의 절망적인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36세 때는 연하의 릴케를 통해 진정한 낭만을 향유했으며,50세 때부터는 프로이트와 애정어린 우정을 지속했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장관이자 언론인이었던 저자는 마력의 뮤즈이자 팜므파탈인 루 살로메의 삶의 동력을 자유를 향한 영혼의 고투라는 시각에서 재현해낸다.1만 2000원. ●혁명과 문학의 경계에 선 아나키스트 바진(박난영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바진(巴金)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 중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루쉰에 비견될 만한 탁월한 작가라는 시각이 있지만, 그의 허무주의적이고 아나키즘 성향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수원대 동양어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중국에서의 바진에 대한 평가는 모순점이 있다.”며 “탁월한 작가로서 바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측면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따라 바진의 아나키즘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중국 연구가들의 당위적 측면이 그것”이라고 지적한다.1만 7000원. ●발해고(유득공 지음, 정진헌 옮김, 서해문집 펴냄)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발해사를 체계화시킨 조선후기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저작을 완역.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까지 우리역사에 넣어 남북국사를 쓰지 않았던 점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발해영토를 되찾으려 해도 근거가 없어져버렸다며 통탄한다. 유득공은 우리나라의 통일은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남북국시대 이후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여진에 넘어갔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8500원.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웅진씽크빅 펴냄)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을 그린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여인’, 책을 읽으며 루이 15세를 기다리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그린 프랑수아 부셰의 초상화,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 등 책읽는 여자들의 그림을 통해본 독서의 역사.1만 3800원.
  • [여성&남성] 2535 여성들이여 만화잡지 ‘허브’로 모여라

    ‘스물 다섯의 자신감, 서른 다섯의 여유.’ 국내 유일의 성인 여성 대상 월간 만화잡지 ‘허브’가 다시 태어난다.2004년 7월 창간돼 수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해 온 허브가 판형을 키우고 콘텐츠를 강화해 격월간지로 재탄생한다. 그동안 허브는 ‘2535’(25∼35세) 여성을 타깃으로 그들의 삶과 밀접한 소재를 다룬 순정만화를 실어 높은 인기를 끌었다. 최근 순정만화 ‘궁’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돌풍을 일으키며 순정만화를 즐겨보는 남성 독자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허브의 변신은 눈길을 끈다. 허브는 애정문제를 주로 다루는 순정만화보다는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현실을 다루며 여성들만의 순수문화 향유에 앞장서 왔다. 한 여성이 직장에 입사해 적응하고, 성과를 이뤄내는 과정과 상사와 갈등을 빚는 과정 등을 현실적으로 터치한 임현정의 ‘불가항력적 직장여성 진화론’, 한 여성의 성장 이야기를 면밀하게 묘사한 말리의 ‘도깨비 신부’, 여성간 동성애를 소재로 한 한혜연의 ‘월식’,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식으로 다룬 김보현의 ‘나블루스’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바람의 나라’로 유명한 김진 작가가 죽음이라는 소재에 진중하게 접근한 ‘조우’와 고려 말과 조선 초 격동기 역사를 재구성한 김혜린의 ‘인월’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들은 1980년대 말∼90년대 중반 만화를 오락거리로 삼으며 10대를 보낸 여성 ‘2535’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여성독자뿐 아니라 전체의 10%에 이르는 남성 독자들로부터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허브가 이달 중 재창간 작업에 나선 이유는 발행 간격을 늘려 콘텐츠를 좀더 충실히 하고 작품별로 책으로 소장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단행본 작업을 병행하기 위해서다. 판형도 신국판(15.2㎝22.5㎝)에서 대국전판(17.2㎝24.2㎝)으로 키워 시각적인 질을 높이는 한편 여성들을 위한 칼럼 등을 보충해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소재에 대한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점을 활용해 그동안 터부시돼 왔던 주제도 다양하게 다룰 계획이다. 최근 붐이 일고 있는 ‘남성간 동성애 코드’를 다룬 작품, 여성들의 솔직한 성담론을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시티’ 스타일의 작품, 여성들의 남성적 문화 향유를 다룬 작품 등이 추진되고 있다. 박관형(35) 편집장은 “‘풀하우스’나 ‘궁’ 같은 순정만화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만화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허브의 재창간은 의미가 있다.”면서 “다만 우리는 히트작의 흥행 성공 방식보다는 이제까지 다뤄온 콘텐츠를 충실히 다루는 방식으로 성인 여성 만화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갈 것”이라고 밝혔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7)茶室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7)茶室

    붉디붉은 동백꽃이 벙그러져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퍼득이는 새의 날갯짓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붉은 동백의 무리들은 마치 절망 속에서 자신의 삶을 내던져 버리는 중생들의 아픈 추락비행 같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속에 깃든 의미는 아마 희망이었던 것 같다. 추락과 날개는 상반된 감각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추락이 절망이요 포기라면 날개는 곧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로지 한 곳을 향해 집중하고 인내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넉넉한 삶의 여유다. 신년 들어 일지암에서 중생의 평안과 차인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다회를 열었다. 멀리 서울과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초의차문화연구원들이 참석했다. 신년다회는 일지암 초당에서 열렸다. 까실까실하고 상큼해 보이는 새 볏짚으로 엮어올린 지붕을 가진 일지암 초당에는 3평 남짓한 차실이 있다.3방향으로 문을 해닫고 한쪽에는 차를 덖을 수 있는 부엌으로 만들어 놓은 일지암 초당 옆으로는 그 유명한 유천이 흐른다. 초당의 문을 열면 두륜산의 광활한 산맥이 울퉁불퉁 튀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늦은 오후 맑은 석양에는 서해바다의 잔잔한 물소리가 바람과 풍경소리를 타고 월담을 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다탁으로 한 일지암 초당의 다실은 그야말로 담백하다고 말할 뿐이다. 갈아 붙인 회벽에 몇겹으로 이어 붙인 회백색 벽지와 3명 정도가 마실 수 있는 작은 차 도구가 전부다.2∼3명의 찻자리는 늘 고요하다. 오직 바람소리와 유천의 물소리를 벗삼아 자신의 마음을 흘려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지암의 차실을 두고 ‘무애의 차’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차인들에게 차실은 차, 차도구와 함께 매우 중요한 것중 하나다. 차를 하면 할수록 자신만의 차실을 하나쯤 가꾸는 염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차실을 소유하는 차인들이 늘고 있다. 작게는 3∼4평, 크게는 10여평의 차실을 근사하게 가꾼 후 가까운 차인들을 초대해 차회를 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도심의 아파트에서도, 먼 산골의 초막에서도 차실을 꾸며 차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차실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일본의 차실이다. 일본의 차실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도의 문명을 향유한 일본문명의 상징처럼 일본의 차실은 세계적인 눈길을 끌었다.100여년이 넘는 대숲속의 차실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도 동양문명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이른바 초암으로 불리는 일본의 다실들은 실로 담백하기 짝이 없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몰려 앉아 무릎을 맞대고 먹어야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차실이 바로 이 시대의 차인들과 서양인들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초암의 백미는 텅 비어 있고 작다는 데 있다. 초암에 대해 조선시대 이형상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내 집은 초려삼간/세상일이라곤 전혀 없네/차 달이는 돌 탕관과 고기 잡는 낚싯대 하나/뒷산에 절로 난 고사리 그것이 분수인가 하노라.”라며 소유하지 않는 자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초암의 핵심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작지만 위대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한적한 대숲이나 정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초암은 흙과 볏짚을 혼합해 바른 벽이나, 대나무와 흙으로 엮어 만든 벽이 대부분이다. 방바닥 역시 마찬가지다. 대나무 자리를 깔거나, 갈대를 엮어 만든 것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암 차실은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집 같은 것이다. 이른바 건축의 기본을 도외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쉽게도 일본 초암차의 원류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우리의 옛 초가집의 소박한 멋이 원형인 것 같다. 최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일본 초암다실의 원형은 우리나라라는 것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센리휴에 의해 완성된 초암차실은 당시 강대했던 무사계급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꺾으려는 정치적 목적도 가미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록 자결은 했지만 도요토미의 왕사역할을 했던 센리휴는 차의 근본정신 회복을 통해 일본 지배계급의 야만성을 희석시키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굽어보게 하는 소박한 다실인 초암은 우리나라의 초가집들과 매우 닮았다. 초암다실이 세계적인 다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사성과 함께한 정신성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근원적 투쟁심을 탈각시켜 버린 무소유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물신주의의 총아인 자본주의는 불가사리처럼 무엇이든 거대화시키고 조작해낼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그러나 초암은 그런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역설의 미학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곧게 수직으로 뻗어내린 직선의 미학에 휘어지고 굽어진 곡선의 미학으로 맞서고 있다. 화학화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작한 재료 대신 흙과 집 그리고 대나무 등 천연재료를 사용,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데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작고 어두운 초암은 폐쇄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사방을 개방해 누구라도 들고 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열린공간은 신분의 차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암은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하기 위해 손가는 대로 지어낸 띠집인 초암, 가난한 선비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고 청빈함과 검소함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던 모사(茅舍), 초려(草廬), 초정(草亭), 또한 왕이나 왕세자 등이 제를 지내기 위해, 잠시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은 모옥(茅屋), 초옥(草屋) 등이 존재했다. 먼저 초암은 원래 스님들이 살던 암자의 명칭이기도 하다. 대중수행을 피해 홀로 수행을 하기 위해 깊은 산중에 아무렇게나 지은 작은 암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암은 천연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검소하고 청빈한 삶의 원형을 그대로 담아내게 된 것이다. 설잠 스님의 ‘모암’이란 시는 이같은 상징성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른 산 깊은 곳에 귀틀집 한 채 얽었는데/집 아래로는 맑고 맑은 만길 깊은 못이로세/가는 곳 되는대로 구름따라 함께 가고/머물 때엔 한가로이 달 아래 절방에 함께 있네.” 선비들이 독서나 차를 마시는 데 이용했던 초정이나 누실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호연지기와 청빈함을 자랑했던 초정이나 누실 역시 작고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암의 원형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 점에서 초암은 자연주의의 원형이랄 수 있다. 그같은 것은 차가 지닌 자연성과 우주성을 일체화한 독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암은 또 차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역사성과 현실성에서 시작된 것이겠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에 와서 초암은 문명의 역설성을 상징하고 차의 본연성을 담아낸 천연의 기제로 자리매김될 만하다. 차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하심(下心)에 있다. 넓고 큰 집, 넓고 화려한 광채가 나는 차실은 바로 현대인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또 다른 기제다. 그러나 초암으로 대별되는 차의 정신은 내 욕망을 내려놓은 하심을 구조적으로 추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좁고 작아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문들, 도대체 막힘이 없는 사방으로 열린 공간들, 울퉁불퉁 튀어나온 소나무의 서까래 등 순수한 자연의 미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초암에서 소박한 미의식을 본다. 소박한 미의식이란 작고 볼품없는 공간속에서 채워낼 수 있는 정신적 충만감을 의미한다. 일지암 초당의 신년차회는 바로 이같은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바싹 마른 장작을 구들에 넣고 사방으로 환히 열어젖힌 초당의 문들, 바로 앞의 작은 연못과 붉게 핀 매화 향, 그리고 손에 잡힐 듯 툭툭 꽃봉오리를 벙그러올리는 동백꽃이 바로 또 다른 차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그들은 그 찻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스님 참으로 부끄럽고 초라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자연의 경이 앞에서,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박함 앞에서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그들은 자연을 품에 안았고, 현대사회 속에서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작고 초라한 모습을 관조할 수 있었다. 찻자리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차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자연을 나누고 결국은 우주를 나눌 수 있다. 한발짝 더 나아가 차를 통해 자신을 개벽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육신을 망치지만 차는 사람을 가라앉히고 육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신묘로운 작용을 한다는 말이있다. 차 한잔은 이렇게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기도 하다. 일지암 암주 ■ 현대인의 차실은… 차실은 차인의 품격과 인격을 나타내는 척도다. 요즘 찻자리에 초대되어 가보면 이른바 명품으로 치장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은 누구의 작품이며 이것은 얼마나 값어치가 나간다고 자랑을 한다. 그럴 때 그 찻자리에는 은근히 질시와 불편함이 싹튼다. 이른바 차회가 아니라 과시회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차가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상승시켜주는 인격체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보며 씁쓸해한다. 흔히들 차를 격식의 문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갖추어진 다실에서 갖추어진 다구와 차를 준비한후 예법에 따라 마시는 것이 바로 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은 바로 차가 격식화되어 있는 것이다. 차는 격식의 문화가 아니다. 물론 의식을 통해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차는 당연히 격식의 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차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함 그리고 편안함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우선 차는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를 마실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공유하는 나눔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거실이나 방에서 행다를 해도 된다. 차실은 가급적 비린내가 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은 곳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깨끗하고 아담한 분위기 연출을 위한 곳이면 더욱 좋다. 먼저 다실을 꾸밀 공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다. 다실의 크기는 3∼4평 정도가 제격이다. 다실의 크기가 너무 넓으면 주위가 산만하고 어지럽기 때문에 오히려 차실로서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실은 손님을 접대할 몇 가지 가구와 다구, 요란하지 않은 화분이나 서화로 간단하게 장식되어 있으면 더욱 좋다. 다실에 놓여진 난과 꽃은 차실의 분위기를 한층 품격있게 만들기도 하다. 다만 너무 요란스럽게 꾸며진 장식물들은 오히려 차실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실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차선책으로 응접실이나 서재를 이용해도 된다. 우선 차를 마실 수 있는 차도구를 위한 상시적인 공간을 마련한다. 그곳의 넓이는 0.5평 정도면 된다. 가능하다면 창문을 통해 밖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좋으며 조촐하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소나무 화분이나 꽃 등을 준비해 놓아두면 더욱 좋다. 마지막으로 응접실이나 서재도 없는 단칸방에서도 차는 가능하다. 평상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를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 다음 차를 마실 때 자리를 마련해 마시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행다란 다실의 유무에 있지 않고 그것을 소박하고 검소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미술과 기부의 만남’

    ‘미술과 기부의 만남’

    한 예술가의 유족이 국내 첫 온라인 갤러리란 실험적 전시와 함께 ‘미술과 기부의 만남’이란 새로운 예술문화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한국 퍼포먼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고 강국진 화백의 미망인 황양자(58)씨는 남편의 실험적 예술혼을 이어받아 ‘강국진닷컴’(www.kangkukjin.com)을 개설, 국내 처음으로 온라인 개인전을 연다.12일 정식 오픈하는 갤러리에선 강 화백의 작품 500여점은 물론, 작가의 생전 활동을 담은 방대한 기록을 담았다. 또 작품 판매 액수의 20%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겠다고 약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미술 전시에 기부문화를 접목한 새로운 예술풍토 조성에 나선다. 고 강국진 화백은 네온과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인 ‘시각의 즐거움’(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남기는 등 국내 최초로 테크노 아트를 시도했으며, 한국적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현대 판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다. 황양자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작품과 작가 관련 기록을 제한없이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작가의 실험적 예술혼에 부합하는 온라인 전시회라는 답을 찾게 됐다.”고 밝혔다. 온라인갤러리에선 유화 350여점과 판화 등 황씨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물론,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걸려 있는 대작 ‘역사의 빛’(300호) 등 국내 주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 화백 작품들을 기법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작품 관련 평론, 보도자료, 에세이, 고인에 대한 회고록 등 폭넓은 자료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작품 규모와 기록은 그동안 자료 빈곤에 허덕이던 미술 전공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황씨는 기대했다. 또 일반 애호가들도 언제 어디서나 작품 감상과 작가의 정신세계를 향유할 수 있어 미술 대중화를 위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부 약정서 체결은 예술계의 기부문화에 신선한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름다운재단 유창순 국장은 “작고한 작가의 뜻을 소외계층과의 나눔의 방식으로 실천하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1회성이 아니라 그림 판매액 중 상당액을 지속적으로 지원받게돼 문화예술계의 나눔운동 확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유럽 최고 석학에 듣는다] 자크 아탈리 특별인터뷰

    [유럽 최고 석학에 듣는다] 자크 아탈리 특별인터뷰

    |파리 함혜리특파원|“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만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불모지를 삶의 터전으로 바꿔가며 살아가는 유목민(노마드)의 문화를 현대인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해 반향을 일으킨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63). 그는 지난 연말 파리 교외 뇌이의 자택에서 가진 특별 인터뷰에서 “미래 사회를 제대로 수용하려면 노마드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면서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알고, 타인의 문화를 존중하며, 항상 창조하는 사람만이 끝없는 변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어느 분야에서든 창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기술, 교육, 정치, 시장경제 등 모든 제도와 환경은 그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방향으로 진보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전지구적 노력만이 21세기의 인류가 바라는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노마드문화가 미래지배…끝없는 창의력 요구” ▶21세기는 하드웨어 방식의 사고에서 지식·문화 등 소프트웨어가 기반이 되는 사회라고 한다. 이같은 전환은 어디에서 오나. -소프트웨어인 문화는 정신에 기초하며 사회는 이런 문화 발전에 의해 진보한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반적으로 힘의 사회에서 정신의 사회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를 발전시켜 온 동인은 고통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물질 영역을 떨쳐 버리고 정신이 중시되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 ▶이런 변화는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나. -변화가 완결된 것이 아니며 진행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곳곳에서 폭력과 불평등을 목격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소프트 사회’, 즉 고도의 정보 사회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새로운 개념의 풍요로움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물질 재화는 내가 남에게 주면 내게서 사라지지만 정보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더라도 남아있다. 이것은 혁명적인 변화이며 사회 진보를 위해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투명성, 민주주의, 정보 공유 등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는 새로운 풍요는 물질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인류가 추구해야 할 ‘비폭력의 세계’를 향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21세기에 가장 중시되는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물질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하나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 사람들은 투쟁한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나 혼자만 누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언어, 휴대전화가 그렇듯이 함께 소통하고, 나누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을 때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따라서 미래 사회에서는 ‘공동의 이익’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인류는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환경오염, 물 부족, 기아 등을 같이 해결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그런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인류는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나쁜 방향으로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쁜 면을 발전시키는 도구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 야만스러운 지식, 인간복제, 가상세계 탐닉 등은 인류를 자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발전한다. 언젠가 악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선을 창출하는 도구들을 파괴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우려스럽다. ▶당신은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의 입장에서 인류의 미래를 성찰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이동을 원치 않지만 할 수 없이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아탈리는 정보를 창출하는 극소수의 상류계층을 하이퍼 노마드, 정보를 향유하되 소비만 하는 것은 버추얼 노마드, 정보를 향유하지도 못하고 물질적 빈곤에 시달리는 계층을 인프라 노마드로 구분했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인류는 지금까지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극복하고 있지만 인류의 절반은 가난과 기아에 여전히 허덕이고 있다. 그들에게 이런 발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선 절대빈곤층이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인프라 노마드에서 버추얼 노마드를 거치지 않고 하이퍼 노마드로 합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지적으로 무장하고, 단순하게 소통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창조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행동양태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 접속하고 소통함으로써 모든 구성원이 창조의 주체가 되는 그런 문명 형태가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다. ▶노마디즘과 유토피아는 어떤 관계인가. -유토피아는 이상적 사회이고, 매우 완벽하지만 추상적이다. 하지만 노마디즘은 현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보다 잘 살기 위해 이동하는 인프라 노마드는 비참하지만 현실이다. 노마디즘에서도 유토피아는 존재한다. 끝없이 이동하면서도 전통과 가치를 간직하고, 과거를 수용하면서 창조해 나가는 창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누리는 사회가 바로 노마디즘의 유토피아다. ▶어떤 사람이 미래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나. -노마드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 즉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고 동시에 사회의 위험을 감시하는 사람, 끝없이 창조하는 사람, 집단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와 타인에 대한 존중, 적응력, 창의력이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끝없는 변화 속에 살고 있으며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하는 변화에 적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창조적인 사람은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창의력은 중요하다.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느 분야에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빠른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집단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가치, 전통을 공유할 수 있으며 이런 가치 공유를 통해 인류는 변화 속에서 진보하는 것이다.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하나.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사라진다.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한가. -이런 변화를 정의하고, 경향을 예측하는 데 지식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지난 15년간 인류의 역사를 유목민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 관점에서 인류가 부닥친 많은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많은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행동한 나머지 현실참여를 피한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무의미하다. ▶미래에 인류가 직면할 최대의 도전은 무엇인가. -시간의 한정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더 이상 공간적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기술진보와 공동의 이익 추구를 통해 인류는 조만간 시간의 한정성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간은 물질이나 정보와 달리 생산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살 수도 없다. 미래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이다. 시간은 ‘좋은 시간’과 ‘나쁜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쓰거나, 창조하는 데 쓰면 ‘좋은 시간’이 되지만 파괴하고, 약탈하며, 탐욕을 부리면 ‘나쁜 시간’이 된다. 올바른 정치란 사회나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좋은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에 대해 지적한다면. -한국은 큰 잠재력을 지닌 나라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도의 신기술을 진보시킨 한국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신기술의 중심에 서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중심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들 나라와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따라 한국의 미래는 달라진다.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면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신기술을 발전시킨다면 대단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네트워크를 이용한 가치 생산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lotus@seoul.co.kr ■ 자크 아탈리는 누구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자 유럽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구·저술활동, 폭넓은 지식과 혜안으로 미래를 짚어내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왔다. 1943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인 에콜폴리테크닉에서 공학을, 에콜 드 민에서 토목공학을, 시앙스폴리티크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최고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를 거쳐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대 초반부터 지난 85년까지 시앙스폴리티크와 에콜폴리테크닉, 파리 9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74년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당수의 경제고문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뒤 81년 사회당 정부 집권 이후 91년까지 대통령 특별보좌역을 맡았다.‘미테랑의 휴대용컴퓨터’란 별명을 얻으며 17년간 사회민주주의의 실현, 유럽경제통합 등을 기획했다. 공산권 붕괴 이후 동구권의 경제재건을 위해 91년 유럽개발은행(EBRD) 설립을 주도했고 93년까지 초대 총재를 지냈다. 현재 국제컨설팅회사인 ‘아탈리&아소시에’ 대표, 제3세계 소상공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구호기구 플래닛파이낸스(PlaNet Finance) 회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 1980년 기아구제기구 창립,84년 유럽신기술 개발프로그램 EUREKA 창설,89년 방글라데시 구호기구 설립, 유럽 고등교육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30여권의 저서는 27개 언어로 번역돼 500만권 이상 팔렸다. 대표적 저서로 ‘인간의 길’(2004),‘유목인간’(2003) 등이 있다.
  •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백제 과학의 산물’ 종이 만들기

    TV 드라마 ‘서동요’는 백제 무왕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서동요’라는 향가로 더욱 친숙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서동의 특이한 출생, 성장 과정, 권력 투쟁과 더불어 당시 교육기관이었던 ‘태학사’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백제의 과학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백제는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화를 향유했음에도 삼국 가운데 남아있는 사료와 유적이 가장 부실하다.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백제의 뛰어난 과학기술 전통을 음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백성을 위한 격물(과학)을 중시하는 ‘아좌 태자’(백제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에 유학과 한문학을 전파한 인물) 진영과 권력을 위해 격물을 이용하는 ‘부여선’(위덕왕의 조카) 진영의 투쟁을 보면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과학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다. 또 태학사 기술사들의 신기술 개발과정을 보면서 과학기술은 많은 이의 아이디어와 실패, 땀 등으로 이뤄진 것이며, 그러한 노력의 보상은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엄정한 심사에 의한 인정과 백성의 삶을 이롭게 했다는 보람임을 깨달을 수 있다. 백제의 태자 아좌는 장차 무왕이 되는 장이(서동)에게 이렇게 말한다.“너는 백제의 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사람을 감동시키는 격물과 기술로 하늘과 땅과 바다를 경영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격물의 이권만 챙겨 영토를 정복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라는 것이야.” 드라마에서는 또 태학사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개발하는 과정도 나온다. 장이와 태학사 기술사들은 수나라에서 전량 수입하던 종이를 처음으로 국산화해 모든 백성이 쉽게 종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사료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종이가 삼국시대부터 쓰인 것은 확실하나 신라 종이와 고구려 종이가 드물게 유물로 남아있을 뿐, 백제 종이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닥을 이용한 닥종이가 주로 쓰였다. 고려시대부터 중국에 수출되어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았다는 우리 종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전통 종이 제조법을 살펴보자. 먼저 닥나무를 큰 가마솥에 넣고 쪄서 껍질을 벗겨 말리면 ‘흑피’가 만들어진다. 흑피를 물에 담가 불린 다음 표피를 제거하고, 햇볕 아래서 표백시킨 것이 ‘백피’이다. 백피를 물에 담가 불린 후 물, 석회, 목회를 넣어 잘 섞은 뒤 가마솥에 끓인다. 이어 자루에 넣어 흐르는 물에 씻어 불순물을 제거하면 ‘펄프’가 된다. 펄프를 햇볕 아래서 표백시킨 후 방망이로 두드려 곱게 빻은 다음 나무로 만든 통에 넣고 물을 부은 후 섬유 사이를 결합시켜주는 닥풀을 넣어 잘 저어준다. 액상의 펄프를 발틀에 담아 올려 전후좌우로 흔들어서 골고루 퍼지게 한 뒤 걸러진 종이에서 수분을 빼 한장씩 떠서 건조판에 붙여 햇볕에 말려서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거친 표면을 큰 돌로 두드려 다듬질을 하면 매끄러운 종이가 완성된다. 한국 종이 제조 기술은 우리 민족이 1000년 동안 창조적으로 개량 축적한 기술이다. 전북 전주의 ‘팬아시아 종이박물관’에 가면 누구나 한지 만드는 과정을 견학·실습할 수 있다. 한문정 서울 숙명여고 교사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23)한국 차문화의 다양성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23)한국 차문화의 다양성

    눈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에는 아스라한 차 향기처럼 포근한 향기가 넘쳐난다. 허공을 타고 내려오는 눈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한줌의 눈속에도 생멸이 있다. 멀리서 뚝뚝 끊어지는 설해목의 비명소리가 마치 눈속에 꺾여 비닐하우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하늘을 원망하는 농심(農心)소리 같다. 무너지는 눈의 산(山)이 마치 무너지는 농심 같다. 그래서 아프다. 자연은 늘 인간의 삶속에 고통을 주기도하고,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삶이란, 차의 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의 삶속에서 고통스러운 여정을 다스리고 위안하고 친구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속에는 희망도 있고 절망도 있고 고통스러운 아픔도 있다. 차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고통스러운 길을 가는 중생들의 위안처요 친구인 것이다. 우리곁에 차 문화는 과연 있는가. 있다면 어디까지 와있는가. 매우 궁금한 대목이다. 비공식적이지만 차 인구 700만 시대를 돌파하고 , 차 도구를 만드는 장인들의 전시회는 봇물처럼 이어지고, 차를 생산하는 농가와 다인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차를 애용하고, 차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2000년 초입 한국에는 우후죽순처럼 국적 없는 차 문화가 생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란 원래 잡식성이 강하다. 여러 갈래와 흐름이 합쳐지고 그 합쳐짐 속에서 어떤 주도권이 생겼을 때 그것은 하나의 문화로 일상에 향유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차 문화는 마치 백가쟁명의 시대처럼 다양한 문화적 코드가 생성되고 결합되고 있다. 급속하게 변화되고 있는 디지털시대 차 문화 역시 다양한 문화적 영역과 충돌하고 하나의 문화코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 방향성이 없더라도 정신의 고전이랄 수 있는 차와 현대문화의 버전들이 급속하게 변형·결합되는 것은 너무도 반가운 현실이다. 먼저 가장 큰 변화는 몇몇 대학에 다도학과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나의 학으로서 차 교과목이 개설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일반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점을 이수할 정상적인 교과목으로서 다도학은 차가 중장년층의 문화에서 청장년층의 문화로 학습되기 시작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디지털대학의 다도학과도 풍요로울 정도로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급속하게 늘어나는 차 인구를 교육할 교육자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차교육의 핵심은 형식과 내용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인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필수품인 교양의 한 방법론으로서 차 교육은 절대적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차 교육자의 양성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중 하나다. 한 사람의 차인이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성숙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일상의 차인으로 차의 형식과 내용은 한계가 있다. 결국 궁극적인 지향점은 차인으로서 정신성에 대한 담보가 얼마만큼 확보되어 있는가에 그 관건이 있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디지털적인 청년들에게 차는 하나의 호사일 수가 있다. 그같은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정적인 움직임으로 변환 시킬 수 있는 절제의 문화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현대 차인들의 산실일 수 있는 차 대학원과 모임들, 즉 차인회다. 전국을 포괄하고 있는 대규모 차인회 그리고 각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차인회등 전국에는 수천개의 차인회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다. 차인회는 오늘 한국차를 있게 한 산증인들이자 산실들이다. 기라성 같은 차인들이 차를 교육하고 제다하고 음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척박한 한국 차문화를 한단계 성숙시킨 원동력들이다.80년대 초반 1세대 차인들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차 생산지를 돌아보고 차인들의 역사를 복원하고 차를 학습하고 교육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들은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차에 대한 열정 하나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냈다. 지금 각 지역에서 차인회를 이끌고 있는 이들은 1.5세대 차인들로 불려질 만하다. 다음은 오늘의 차 문화를 이끌고 있는 하나의 힘이 있다. 바로 종교 차인회가 있다. 차의 본산이랄 수 있는 불교를 비롯, 기독교, 천주교 등에서 차회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차는 각 종교에서 명상차원이나 교양차원에서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많은 종교인들의 마음과 손을 사로잡고 있다. 종교차회는 차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을 깊고 깊은 차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차는 또한 문화적 변형을 과감하게 실시하고 있다. 명상, 음악, 공연, 음식 등 젊은이들의 문화적 코드와 결합돼 활발하게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음악분야다. 차음악은 명상음악과 함께 다악(茶樂)이란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수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다악공연은 설치미술과 만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도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차와 음악의 결합은 아직까지 매우 실험적이다.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기에는 아직은 매우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는 행다공연이다. 행다공연은 전국에서 교육의 장을 맡고 있는 차인회의 핵심행사 중 하나다. 접빈다례, 궁중다례, 헌공다례, 들차회 등 다양한 다례를 일반대중들에게 시현하는 것이다. 많은 차인회에서는 행다공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자기 차회(茶會)만의 독특한 행다 아니면 전통적으로 해석된 행다 등 다양한 행다를 일반대중들을 위해 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병폐 또한 만만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차 문화는 마치 형식만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많은 차인들이 행다공연을 위해 헌신한다. 오랜 시간을 걸쳐 똑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그같은 형식은 대중들의 구미를 채워주지 못한다. 행다를 공연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의 보완이 절실한 것이다. 공연예술로서 행다를 하기 위해서는 무대, 조명, 음악, 시나리오 등 가장 기본적인 절차나 형식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형식은 많은 재원과 그에 필요한 스태프들이 필요하다. 동호회나 차인회에서 행다공연은 차 문화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볼때 원천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인회와 차인회, 아니면 차인회 내의 행다공연이나 겨루기는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행다는 또한 차 문화의 뿌리를 갖출 수 있는 조건이란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들차회는 행다문화의 새로운 접점을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할 수 있다. 들차회는 봄과 가을 특정날을 선택해 차인회 내에서 각기 연습한 행다 겨루기를 축제형식으로 치르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인회만 참가할 수 있는 폐쇄된 들차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열린 차회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1년동안 각자 배웠던 행다를 보여주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또한 노래도 함께 부르며 내면에 쌓인 번뇌의 찌꺼기를 대중들 속으로 날려보낼 수 있는 들차회는 그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행다문화의 새로운 풍속도로 제기되어볼 만하다. 초의차문화연구원의 들차회는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초의차문화연구원의 들차회는 가을에 열린다. 돌부처님이 아름다운 곳인 운주사를 비롯해 전국의 아름다운 사찰을 찾아 들차회를 1년에 한차례씩 갖는다. 서울 광주 부산 대구 등에서 공부해오던 각 지회 차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자리를 방문한 일반관람객들과 하나가 되어 찻자리를 즐기는 것이다. 노래도 하고 시도 함께 읊고 자신들이 연마한 행다의 기량도 한껏 선보이는 계기가 된다. 열린 공간에서 열리는 차 축제인 들차회는 그런 점에서 향후 차인들의 행다 시연에 많은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가장 빠르게 응용되고 있는 것은 차의 먹을거리화이다. 한국대중 차를 선도해온 거대기업에서 도심에 만든 차 카페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접점을 시사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라는 명동에 자리잡고 있는 이 카페는 젊은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차 먹을거리와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반응 역시 매우 폭발적이다. 이 카페에서는 차로 만든 케이크, 차로 만든 아이스크림, 차 국수, 차 비누, 차 샴푸 등 다양한 차 관련 상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심지어 차와 우유의 만남을 통해 차라떼는 젊은이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차의 문화적 상품화의 변형은 한발짝 더나아가고 있다. 차를 이용한 벽지, 차를 이용한 속옷 등 웰빙상품으로서 차는 다양한 영역으로 파고들고 있다. 차와 웰빙은 이제 하나의 문화상품으로서 그 변형의 끝이 어디까지랄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차는 지금 현대인들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웰빙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차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건강한 정신적 삶의 추구를 통한 체용(體用)의 일체화다. 체용이란 정신과 육신의 건강을 함께 추구하고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의 문화적 양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차의 본질을 외면하고 하나의 건강상품으로서 차가 일반대중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할 일이다. 세상이 온통 눈이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눈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앞산도, 뒷산도, 일지암도 온통 눈에 파묻혀버렸다. 바람이 마치 칼처럼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다. 눈이 마치 폭풍처럼 일어났다 안개처럼 허공을 감싸며 사라진다. 시끄럽고 활활타는 세상을 식히는 듯하다. 설잠 김시습의 ‘간설’(看雪)이란 시가 생각난다. “여섯 모 가진 꽃이 공중으로부터 내리는데/ 창을 열고 누워서 보니 낮게 맴도누나/ 천상의 향기 없는 꽃을 전해줄줄 알아. 인간에 심지 않은 매화를 피워주네/ 동곽은 가난을 안고 길을 따라 돌아가고/ 자유는 흥겨워서 배를 타고 돌아오네/ 늙어가며 일이 없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도공의 차 한잔을 달여 마시네” ■ 일상화 된 차 명상 조선시대의 유명한 고승 서산 스님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스님 대여섯 사람이/내 암자 앞에 집을 지었네/새벽 종 치면 함께 일어나고/저녁 북 울리면 같이 자네/한 시냇물 속의 달 그림자 밟으며/물 길러 차 달이매 그 푸른 연기 나는데/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는가/염불과 참선일세” 차는 자신의 내면을 수행할 수 있는 보조도구로서 매우 훌륭한 도반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차 명상이 많은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차 명상, 이른바 선다(禪茶)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참 행복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방법이다. 차 명상센터가 서울을 비롯해서 각 지방에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차 명상은 차의 정신을 통해서 지친 마음에 휴식과 활력을 주고 정서적 평온을 체험하며 차 마시기와 주변 일상생활을 명상화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꾸어주는 일련의 정신훈련과정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선일미’(茶禪一味),‘중정청경(中正淸境)’ ‘화경청적’(和敬淸寂) 등 차 정신을 실현함과 동시에 참 행복을 열어가는 것이 목표이다. 차 명상은 사념처 팔정도 수행을 기본으로 하여 자각력·집중력·통찰력을 계발하고 강화시키는 데 있어 일상에서 활용하기 쉽도록 차 마시기와 일상생활 속의 친숙한 행위들을 명상의 주요한 실천 도구로 이용한 명상법이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복잡하지 않고 일정하고 체계적인 동작이기 때문에 명상의 도구로 쓰기 좋으며, 적절한 행위 변화가 지속되기 때문에 지루해지지 않고 꾸준히 명상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정신적 긴장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쉽게 실습할 수 있으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원리와 방법을 쉽게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다. 또한 일상 속에서 혹은 다른사람들과의 만남속에서도 명상을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차 명상의 장점이다. 차를 통해서 기본적으로 예와 절제를 배우고 건강을 도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명상으로서 활용하게되면 자기 이해와 발전을 가져오고 육체적·정신적 건강도 함께 도모할 수 있다. 차명상은 차와 일상생활을 통해 명상을 실현하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고 익숙한 우리의 행동양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부담감을 덜 느끼게 된다. 차뿐만 아니라 커피·음료수·냉수와 같은 것들도 모두 활용되며 일상생활에서는 걷기, 서있기, 청소하기, 씻기, 누워있기, 앉아있기 등 우리가 흔히하는 행동들에서 명상을 체험하게 된다. 차 명상은 일상에서 우리를 괴롭혀온 모든 번뇌 즉, 스트레스를 일상 속에서 해소해낸다는 점에서 권해볼 만한 명상법으로 보여진다. 차뿐만 아니라 차명상 역시 참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임을 명심해볼 일이다.
  • [서울이야기] (33) 축제 신명나게 즐기기

    [서울이야기] (33) 축제 신명나게 즐기기

    ‘참여경험 14%,1년 평균 참여횟수 0.23회, 만족도 70점.’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서울시민의 문화욕구 및 향유실태 보고서(2002)’에서 밝힌 2001년 서울시민들의 축제 향유실태다. 시민 10명 가운데 1명이 5년에 한번 꼴로 축제에 참여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시간이 없거나(40%), 정보가 없거나(36%), 흥미로운 축제가 없기(20%)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02년 시청앞 광장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서 붉은 악마들의 축제가 펼쳐졌다. 바로 월드컵이다.230만명의 서울시민들이 거리에 몰려들었다. 시간이 없는 시민들은 밤 늦게라도, 정보가 없는 시민들은 입소문으로, 붉은 옷이 없는 사람들은 태극기를 온 몸에 휘감고 축제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명나는 축제의 본질을 제대로 체험해보지 못한 시민들에게 월드컵은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축제로 가득찬 서울 월드컵에는 16강,8강,4강 진출이라는 연이은 간절한 소망(제의성)이 있었고, 축구 경기 자체의 짜릿한 즐거움 외에도 재미를 주는 응원전과 공연 등 즐길거리들(유희성)이 있었으며, 거리와 광장에서 기획되지 않은 수많은 행위들(현장성)이 있었으며, 함께 응원하고 즐기고 만들어가는 화합과 단결(대동성)이 있었다. 이러한 축제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이후 서울에서 개최되는 축제에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의도벚꽃축제에는 500만명, 하이서울페스티벌에는 160만명, 세계불꽃축제에는 130만명, 동대문패션페스티벌에는 100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축제의 수도 늘어났다. 서울시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축제만 해도 2005년 현재 145개에 이르며 한해 지원예산도 210억원에 이른다. 그 가운데 전문가들이 서울대표축제, 이른바 서울형 축제로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선정한 축제도 35개에 이른다. 축제 유형도 천차만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종묘대제와 설렁탕의 역사를 재현하는 선농제향과 같은 역사전통형 축제가 있는가 하면, 서울의 연극계와 무용계가 하나가 되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비주류 문화예술인들이 총집결하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미디어와 같은 순수예술형 축제가 있다. 이 외에 1월 설날 민속축제에서 12월31일 송년축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서울은 1년 내내 축제가 열리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를 꿈꾸는 시민들 왜 이렇게 많은 축제들이 열리는 것일까. 시민과 지역사회, 정부, 문화예술계 모두에게 축제는 관심꺼리인 탓이다. 시민들에게 축제는 문화적 욕망을 충족하고 삶을 성찰하며 일상을 새롭게 일구는 기회가 된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하(Huizinga)는 인간의 유희적 본성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축제라고 정의하면서 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 칭한 바 있다. 이를 발전시킨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일상에서 억압되고 간과된 감정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기회를 축제로 정의하면서 축제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리켜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라 부른다. 일상의 이성적 사고와 축제의 감성적 욕망 사이를 넘나들며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이러한 호모 페스티부스들에 의해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 만큼 축제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휴식과 카타르시스와 욕망 분출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축제를 열망한다. 도시정부와 지역사회의 입장에서 축제는 장소정체성 형성과 주민통합의 계기를 부여 함과 아울러 지역 이미지의 재창출을 위한 도시 및 장소마케팅의 정책적 수단이 된다.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주민화합을 도모하는 한성백제문화제와 강동선사문화축제, 송파다리밟기 같은 역사전통형 축제나 하이서울페스티벌과 청룡문화제 같은 시민화합형 축제, 지역이미지 재창출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을 활성화하려는 이태원지구촌축제나 산업경제형 축제들이 여기에 속한다. 문화예술인들에게 축제는 시민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문화교류와 소통,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의 인류학적 풍속을 교류하는 세계통과의례축제, 아시아의 비주류문화예술인들에게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여성들의 삶을 공유하는 서울여성영화제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축제 이렇게 즐겨라 이렇게 다양한 축제들이 서울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도 시민들에게 축제는 다가가기 어렵고 제대로 즐기기도 녹록치 않다. 이름만 축제일 뿐 축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벤트성 행사가 판치는 것도 문제지만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다. 축제를 제대로 즐기려면 축제의 여섯가지 키워드, 즉 의례성, 집단성, 현장성, 유희성, 일탈성, 창조성을 이해하고 그에 걸맞게 참여하고 실천하면 된다. 우선 의례성은 축제의 소망과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16강 진출을 열렬히 기원했던 월드컵 축제, 등불을 밝히며 한해 소망과 염원을 비는 송파다리밟기처럼 자신이 일상 속에서 애절하게 기원하는 것이 있다면 축제에 참여해 온몸으로 그 희망을 빌어보자. 집단성은 축제가 비슷한 삶과 희망을 지닌 개개인이 모여 능동적, 자발적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대동제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연인이나 친구와 혹은 가족이나 친지와 혹은 동네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축제에 참여해 보자. 현장성의 경우 축제는 열린 공간에서 개최되며 그 장소는 고유성과 역사성을 지닌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종묘대제가 종묘에서 열리고, 홍대앞에서 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모든 축제에는 축제의 꽃이라 일컫는 거리퍼레이드가 있다. 현대판 지신밟기라 할 수 있는 퍼레이드에 참여해 축제공간의 의미도 생각해보고, 축제현장의 역사와 정서를 탐색해 보자. 유희성은 ‘축제는 즐거움과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제는 한판 놀이판이다. 제기차기, 널뛰기 같은 전통민속놀이를 실컷 즐길 수 있는 남산골단오민속축제나 타악기에 온몸의 리듬을 실어 즐기는 드럼페스티벌, 화려한 조명과 불꽃의 화려함을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루미나리에와 불꽃축제, 친구에게 엽서를 쓰며 자연이 선사하는 감동을 즐기는 하늘공원억새축제에서 때론 동적으로 때론 정적으로, 때론 시각적으로 때론 청각·촉각적으로 한판 신나게 놀아보는 것은 어떨까. 일탈성은 축제는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축제에는 항상 기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행위와 사건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잠든 심야에 홍대 클럽데이에서 테크노와 국악의 협연에 맞춰 신명나게 음악과 춤에 젖어보면 어떨까. 하이서울페스티벌의 퍼레이드에서 열린 도심을 활보하며 평소 차량으로 가득했던 공간을 맘껏 장악해 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창조성의 경우 축제는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 꿈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이라는 것이다. 호모 판타지아라는 말이 있듯이, 최첨단 미디어와 예술이 만나는 실험이 전개되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나 만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을 성찰하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처럼, 현대 도시의 삶 속에서 잉태되는 다양한 꿈과 상상력을 축제를 통해 체험하고 발산해 보자. ●축제의 문화관광상품화를 위해 축제는 우리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축제는 관광상품이자 자원이다. 아쉽게도 아직 서울은 대표적인 관광축제로 손꼽힐만한 축제가 별로 없다. 해외의 유명 축제들처럼 축제를 관광자원화하려는 노력들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다. 해외사례들을 통해서 축제의 관광상품화 전략을 몇가지 세워볼 수 있다. 우선 축제의 역사성을 복원해야 한다.2002년 월드컵에 버금가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즐겼던 조선시대 다리밟기나 석전(돌싸움)에서 보듯,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고유성, 우리만의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창출해야 한다. 또한 주류페스티벌에 참여하지 못한 젊은 문화예술가들이 변두리 구석에서 자기들만의 축제를 개최한 데서 비롯한 에든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서 보듯, 기획되지 않은 즉흥적이고 때론 일탈적인 축제의 성격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다. 아울러 축제의 콘텐츠는 쉽고 단순명료해야 한다. 테크노음악과 그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자체가 관광상품인 베를린의 러브퍼레이드처럼 백화점식 축제가 아닌 핵심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공간과 지역을 연계한 패키지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6개 도시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호주의 빅데이아웃 축제나 도시를 음악장르에 따라 테마공간화한 파리의 음악축제처럼 공간패키지 기획을 통해 관광객을 유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환경과 예술, 민속을 활용해 계절별로 축제화함으로써 이벤트의 천국이라 불리고 있는 일본의 삿포로 축제에서 보듯 무엇보다 지역의 개성, 즉 지역성을 충분히 활용해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 ●축제도시 서울을 위해 문화도시를 꿈꾸는 서울은 그 꿈이 축제가 되고 축제를 통해 그 꿈이 실현되는 진정한 축제도시를 갈망한다. 서울시는 축제유형별로 특화된 서울형 축제를 개발해 서울의 대표축제로 만드는 축제정책을 구상 중이다. 하이서울페스티벌과 서울불꽃축제 같은 대형축제의 정례화를 통한 축제의 서울성 확립,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알리는 고유축제 개최, 디지털 인프라와 기술을 활용한 축제의 산업화 도모, 순수기초예술을 육성하는 순수예술축제 개최, 자치구 축제의 특성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축제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대표축제 개발과 같은 프로그램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축제 전담조직 마련 및 민·관파트너십의 구축, 전문인력 양성과 축제교육 프로그램 지원 등 축제 주체적 요소와 거리퍼레이드 지원, 공공문화시설의 축제공간화, 인프라 지원 등 축제 공간적 요소도 아울러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축제 프로그램과 주체, 공간의 삼각네트워크를 통해 서울성과 축제성을 고루 겸비한 축제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축제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서울축제의 임무와 비전, 목표와 전략, 실행사업과 평가에 이르는 일련의 서울 축제지원정책 체계를 마련해, 보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으로 서울축제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를 통해 축제와 일상이 결합되는 서울, 서울다운 축제와 축제다운 서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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