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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석공의 흔적은 역사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은 신라로 건너와 석가탑을 만들었다. 아내 아사녀는 천리길을 달려와 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아사달은 연못에 다가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는 아내의 모습을 앞산 바위에 새기며 뼈 아픈 한을 달랬다. 그러다가 ‘아사녀! 아사녀!’를 외치며 연못에 빠졌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고 했고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했다. 석공의 슬픈 전설은 지금도 그렇게 전해진다. 이렇듯 신라시대의 석공은 많은 전설과 함께 오늘날의 ‘국보’와 ‘보물’이란 이름으로 우리들과 만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처음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120호) 석장(石匠) 부문을 신설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석공예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때 석조각 공예가 이재순(57)씨가 국내 최초로 무형문화재 석장이 됐다. 이씨는 김진영 선생의 제자로 경복궁의 석조물을 조각한 이세욱·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는 석조각계의 대가였기에 이 계통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씨는 요즘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숭례문 복원작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성곽 복원 전체 공정 중 85%가 진행됐고 오는 7월이면 거의 끝날 예정이다. 그는 12살 때부터 돌과 인연을 맺어 올해로 석조각 인생 45년째이다. 지난 26일 오후 경기 구리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입구에는 10여m 높이의 미륵상을 비롯해 사자상, 부처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돌이지만 다들 저마다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완성품도 있었고 아직 덜된 작품도 있었지만 다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습들이었다. 꽃샘추위를 담은 바람이 잠시 밀려왔다. 작은 부처상한테 물었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했더니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여.”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궁…. # 성곽 85% 복원… 옛 석공의 번뇌 읽다 그러는 참에 웃으면서 나타난 이씨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요새 무슨 일로 바쁘냐고 했더니 숭례문 복원공사 얘기가 나온다. “숭례문 성곽 복원이 85% 정도 완료됐습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의 길이를 대부분 복원했지요. 기나긴 세월의 풍화를 읽으면서 하는 작업이 정말로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 옛날 석공들의 고뇌와 번민 등 그런 부분을 알고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씨는 석공 선현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숭례문에 쌓아 올려진 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을 간직한 유물들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돌에 구멍이 있었는데 빗방울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이 순간 이집트의 신전이 생각났다. 커다란 돌을 옮겼던 기억이었다. 정사각형의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자리 이동을 해 벽을 쌓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숭례문 돌 모양들이 아주 자연 친화적으로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돌 가운데 구멍 뚫어 옮긴 흔적 발견 “숭례문에 있는 돌들은 아무렇게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에 맞게끔 친자연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석수(都石手)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도편수는 그동안 많이 나왔지만 도석수라는 말은 이번 복원공사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아마 당시 도석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관리 정도로 여겨집니다. 또한 돌마다 가진 물과의 관계, 즉 비가 오면 물이 밖으로 새도록 하는 등 아주 과학적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돌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점에 눈길이 쏠렸다. 얼핏 보면 부자연스럽고 서로 맞추기도 힘들 법한데 퇴물림 형식으로 쌓아놓은 돌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씨는 그런 돌을 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묻고 또 물었다. “선조들이 어떻게 돌을 다뤘으며, 또 어떻게 생각했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중간중간에 놓인 장돌들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지요. 위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을 장돌을 통해 견디도록 하는 지혜에 참으로 경탄했습니다.”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씨는 “(방화사건 직후) 처음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화재의 기운과 접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몇몇이 피부병에 걸렸을 정도였다.”면서 하지만 다들(20여명) 숭례문 복원공사가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고 술회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는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기계적으로 손을 대는 바람에 오히려 화재나 사고 등에 대해서는 무심했습니다. 정작 보존과 관리에 대해서는 진정성 없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아마 숭례문 복원은 이런 것들을 전부 고민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 都石手가 있었음을 처음 알게 돼 이씨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앞에 언급한 도석수라는 단어였다. 원래 도편수라는 말은 있었지만 도석수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면서 선조의 존엄성을 몸소 느꼈던 것. 또한 부석소(浮石所), 즉 지금의 채석장을 두고 돌 문화 창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특히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정교하게 빗물을 흘려보내는 것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을 깨는 방법이나 돌을 다듬는 방법이 정말 과학적이며 친자연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이동시켰다는 걸 알고 놀랐지요. 대체로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사방에 밧줄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밧줄을 빼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깁니다. 그런데 숭례문의 돌을 보면서 이런 과정까지 염려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흔들림 방지, 비 올 때 물의 흐름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를 숭례문 복원 공사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씨는 이런 점을 소중히 메모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수할 책을 준비하고 있다. “옛날에는 돌을 다루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석공들 또한 자부심이 강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돌이 안 들어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소중한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돌의 미학, 석공의 예술을 책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이씨가 그동안 제작한 작품은 2000여점에 이른다.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그의 손때가 대부분 묻어 있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기륭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 등에도 이씨의 작품이 보관돼 있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화 한토막. 2005년 일제가 가져간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비)의 환수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재청에서 북관대첩비가 환수될 때를 대비해 좌대와 옥개석을 복원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북관대첩비는 무사히 반환돼 남한을 거쳐 북으로 돌아갔다. 이때 북관대첩비는 이씨가 복원한 옥개석을 머리에 인 채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돼 북한으로 갔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돌을 만지는 장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 아니냐.”고 말한다. # 선조의 지혜 책으로 펴낼 계획도 이씨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에게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평소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팽이, 썰매 등 전통 놀이기구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던중 1970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스승 김씨는 40년간 석조계에 몸담은 베테랑으로 조선 철종, 헌종 시대 경복궁의 해태상 등을 조각한 이세욱 선생과 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이씨는 스승 김씨한테 1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을 따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보수작업을 하면서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으며 그 덕분에 불교미술 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돌 분야는 할 일이 많습니다. 현대와 전통을 접목시키는 것도 중요하고요. 사실 이제야 돌을 만지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은 정직합니다. 화난 사람이 돌을 마주하면 돌도 화가 나 있고, 예쁘게 돌을 보면 돌 또한 예쁜 대답을 합니다. 돌에는 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도 정이 많잖아요. ” 선임기자 km@seoul.co.kr 열두 살 때부터 돌 잡아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 1호 지정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2살 때 석공이었던 외삼촌에게 돌을 고르는 일을 배웠다. 문화재 공사현장을 다닌 것도 이때부터. 이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한테 돌을 다듬는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다. 전국 기능인경기대회에서 연속 2회 금메달과 함께 한국문화재기능협회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지정됐다. 1995년 타이완의 자항기념당에서 석굴암보다 더 큰 석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현재 부도를 비롯한 석조물의 복원과 정비, 각종 석조물의 해체 및 보수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성곽의 해체 및 복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본 오사카 보암사 석가노미불(1999), 경북 영주 석륜선원 부처 진사리석탑(2000),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기하형체(1977),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소상(1983), 북관대첩비 갑석(2005) 등 2000여점이 있다.
  •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다보탑 돌사자는 전통적 미술양식으로 볼 때에도 반드시 네 귀퉁이에 있어야 합니다. 국보 35호 화엄사 3층석탑,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의 경우 모두 네 귀퉁이에 돌사자가 위치해 있지요. 현재의 다보탑 돌사자처럼 중앙에 위치한 경우는 미술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원래의 자리인 귀퉁이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다보탑 돌사자의 위치 오류를 서울신문을 통해 지적한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21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문화재의 역사성’을 새삼 강조했다. 다보탑의 돌사자 중 3구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고 하나가 남았다면 현재의 중앙이 아닌 원래의 위치에서 사실 그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문화재란 수많은 세월을 함께하면서 가치를 더하는 것이기에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현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불국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도 일제가 저지른 반문화적 행위에 대해 분명히 고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원위치 이동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돌사자 1구만 원위치에 있으면 미관상 좋지 않아 중앙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일부 의견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세월의 풍상 속에 3구의 돌사자가 사라졌지만 나머지 1구의 돌사자가 제자리를 찾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잘못을 고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960년대 당시 문화재 보존정책이 지금처럼 학문적 고증을 거쳐 이뤄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의 실수를 변명하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재 보존 및 복원에 있어서 ‘원형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내걸고 있는 문화재청은 원위치가 확인된 돌사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상업사진 중단 후 ‘한국의 재발견’ 나선 사진가 김중만

    [김문이 만난사람] 상업사진 중단 후 ‘한국의 재발견’ 나선 사진가 김중만

    아주 먼 공간을 현재로 확 끌어당긴다. 좁혔다 늘였다, 모든 것이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변한다. 과학과 예술, 그리고 영혼이 버무려진 걸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뭘까. 바로 사진이다. 하여 누구나 사진을 감상하고 싶어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사진작가 김중만(58)씨. 요즘에는 어떤 앵글로 감동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5년 전, 더 이상 상업사진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새로운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기에 카메라를 든 그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우선 최근의 몇 가지 사례부터 들여다보자. 첫 번째, 서울대병원 본관 1층에 가면 ‘우리 모두에겐 희망에 대한 절대적 소망이 있다’는 주제의 흔치 않은 사진전을 감상할 수 있다. 김씨가 직접 병원 곳곳을 누비며 삶에 도전하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진료 현장을 뛰는 의료진의 숨김 없는 모습을 담은 사진 30점이 전시되고 있다. 김씨가 꼬박 3일 동안 병원에 기거하며 찍은 작품들이다. 이 전시는 ‘희망 기부, 나눔의 문화’에서 출발했으며 23일까지 계속된다. 두 번째, 병영문화 월간잡지 ‘HIM’을 통해 ‘그대들이 지키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제목으로 병사들을 위한 헌정 사진전을 시작했다. 그가 직접 몸으로 찍은 아름다운 국토강산의 사진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호에는 ‘강원도 영월 요선암’ 등 새로운 사진 8점이 포토 에세이 형식으로 지상 전시되고 있다. 세 번째, 지난 20일 동북아역사재단 등과 협약을 맺고 다음 달 1일부터 1년 동안 독도 전역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시작한다. 생활과 동식물 등 기록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총망라하게 돼 또 다른 차원의 독도 수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가 터치하는 독도의 사계는 어떤 모습일까. ●레게 머리 알아볼까봐 헤어스타일 바꿔 지난 19일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김씨를 만났다. 바쁜 촬영 일정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김씨 특유의 레게머리 스타일이 아니어서 의외였다. 헤어스타일을 왜 바꿨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하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라며 웃는다. 먼저 병원 전시 얘기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은 희망을 가져야 하거든요. 또 병원에는 좋은 의사들이 많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자는 취지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환자들, 나눔을 통해 값진 삶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병사들을 위한 헌정 사진전도 이 같은 ‘나눔’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아는 분의 권유도 있었지만 나라를 지키는 60만 병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지요. 그들에게 ‘아름다운 강산’, ‘국토사랑’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이 있어 편하게 살고 있으니 뭔가 해 줘야 한다는 ‘나눔의 생각’에서 말입니다.” 이어 독도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제가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이미지 작업을 한 지 5년 차가 됩니다. 첫 번째는 관광공사와, 두 번째는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어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작업을 했지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독도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독도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두 번 정도 다녀왔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좋은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진작가들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보물 같은 곳이지요” 그는 또한 “우리의 땅 독도에서 우리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을 만들어 독도를 세계에 알리고, 미래세대를 위한 영유권의 근거를 기록물로 남길 것”이라면서 “그들(일본)이 뭐라고 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꾸준히 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독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진 관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도 다음은 어디냐는 질문에 “제주도로 향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를 위해 틈틈이 제주도에 다녀온다고 귀띔했다. ●한국 전통·깊이 간과했던 지난날 반성 “그동안 한국의 전통과 한국적 깊이를 간과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작업을 하면서 반성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면서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지요. 뒤늦게나마 우리나라 이미지에 빠지면서 정체성을 생각했고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조금 (답을)찾아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진가가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상업사진 시절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1988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는 패션작가로 유명 연예인들과 사진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전도연, 비, 원빈, 정우성, 배용준, 이병헌, 강수연, 손예진 등 1000여명에 이르는 스타와 패션사진, 광고, 영화, 포스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 연간 17억원을 벌어들일 정도였다. 그러던 2007년 11월 어느 날 둑길을 걸으면서 문득 자신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고 상업 사진을 확 접었다. 연간 수입이 80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 더 일찍 고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안의 영혼과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어떤 절실함이 다가왔습니다. 중랑천 둑길을 걷다가 문득 수양버들을 보고 ‘너를 찍어도 되겠니’라고 몇 번 물었고 비로소 대답을 들었을 때 방향전환을 하게 됐지요.” ●阿 봉사한 부친 유언 따라 26곳에 골대 세워 이후 수양버들을 찍으면서 둑길에 있는 나무들과 친구가 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법한 외로운 나무들과도 가까워졌다. 어쩌면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찍은 둑길 사진만 무려 4만 5000여 장이다. “저는 사진작가로 생각 안 합니다. 그저 사진가일 뿐입니다. 사진가의 인생으로 반절 정도 왔습니다. 앞으로 5년 차의 사진가로서 우리나라를 정성으로 담아내려 합니다.” 화제를 아프리카로 돌렸다. 지난달에도 아프리카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그동안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걸린 아이 등 불우한 아이들과도 자주 만났는데 이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해 왔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종단 축구 골대 세우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 보츠와나, 나미비아, 잠비아, 짐바브웨, 케냐, 에티오피아 등 희망의 축구 골대로 아프리카의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26개의 축구 골대를 세웠다. 이는 아버지가 생전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1960년대 말 가족을 이끌고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해 평생을 진료에 바친 의사 아버지는 생전에 “아프리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아들에게 자주 강조했고 ‘아프리카 사진’ 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찍기 시작했다. 그가 목숨 걸고 찍은 아프리카 사진들은 현재 제주도에 있는 아프리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인생 37년… 75만장 찍어내 1975년 개인전을 통해 데뷔했으니 그의 사진 인생은 올해로 37년째. 그동안 찍은 사진만 무려 75만장이다. 내친김에 100만장까지는 찍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런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전쟁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치열한 전선으로 뛰어들어가 이기는 것입니다. 200년 사진 역사에 한국인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 것이 좋은데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열정과 한국의 혼을 가진 후배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앞으로 그 전쟁터는 더 치열해질 테니까요. 우리나라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1위 국가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사진가다운 DNA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름다운 것을 열망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는 그는 “일반 국민들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찍고 사진가인 저는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찍어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중만 1954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했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방향을 틀었다. 1975년 니스 ‘장피에르 소아르니’에서 데뷔 개인전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3살 때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됐다. 1988년 한국으로 귀화한 뒤 패션작가와 유명 연예인들 사진 작업을 하던 중 2007년 상업사진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세계 오지와 극지를 오가며 예술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는 ‘한국의 재발견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사진집으로는 ‘동물의 왕국(1999), ‘아프리카 여정’(2005), ‘김중만 사진집’(2005), ‘섹슈얼리 이노선트’(2006) 등이 있다. 아울러 패션사진가상(2000), 모델라인 2002 베스트 드레서 백조상(2002), 제5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2010) 등을 수상했다. 현재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 대표로 있다.
  • “다보탑 돌사자 보기 안좋고 비바람 맞아 스님들이 옮겼다”

    “다보탑 돌사자 보기 안좋고 비바람 맞아 스님들이 옮겼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 돌사자는 인간문화재에 맡겨서 모조품 3개를 만든 뒤 진품 1개와 함께 네 모서리에 앉히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다보탑의 돌사자 역사에 누구보다 밝은 단국대 석좌교수 정영호 박사는 21일 경기도 용인 단국대에서 서울신문 기자와 만나 이렇게 강조했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문화재위원회가 만들어진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임명돼 2003년까지 문화재위원을 지낸 우리 문화재의 산증인이다. 정 박사는 “당시 돌사자 1개만 모서리에 앉아 있었는데 밸런스가 맞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칫 돌사자 1개만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었으며, 석조 구조물의 훼손을 고려해 기단 중앙부로 옮기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통인 1952, 53년 서울대의 부산 피란 시절, 사범대 역사과의 답사로 불국사를 봄철에 찾았는데 그때 불국사 극락전 오른쪽 축대에 있던 돌사자를 처음 목격했다.”면서 “이미 일제 강점기에 탑에 있던 돌사자가 극락전으로 옮겨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다보탑 돌사자를 처음 본 건 언제였나. -1952년, 53년 봄철 두번 봤다. 불국사의 연화교, 칠보교를 지나 안양문에 접어들어 가면 석등 안쪽으로 축대가 있고 극락전이 있는데, 극락전에서 절을 하고 나와서 왼쪽 축대 위에 있는 돌사자를 봤다. 즉, 돌사자는 극락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잘 모셔져 있었다. →그 뒤에 돌사자를 본 것은 언제인가. -1962년 창설된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유형문화재 담당인 1분과 소속으로 자주 출장을 다녔는데 그때 기억에 돌사자가 다보탑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돌사자가 탑 기단 중앙부로 옮겨간 경위는. -문화재 전문위원 겸 숙명여고 역사교사를 하던 시절이니 단국대 교수로 옮긴 1966년 이전의 일인데, 고등학생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으로 불국사에 갔다. 그때 학생들에게 휴식시간을 20분쯤 줬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불국사 스님들이 “돌사자 1개가 탑 귀퉁이에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탑이 찌그러진 것처럼 보인다. 비바람도 많이 맞는 것 같아 옮기려고 한다.”고 하길래 “돌사자 보존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해줬다. 당시로선 돌사자 훼손을 줄이고, 안정감도 생기고, 다보탑 돌사자는 귀퉁이에 있는 1개란 오인을 줄 우려가 있어 중앙부로 옮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박사님 말을 듣고 옮겨 놓은 것인가. -스님들이 이미 옮기려고 하는데 내 생각을 묻길래 말해준 것이다. 내가 감히 불국사에 가서 이리 옮겨라, 저리 옮겨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돌사자를 기단 서쪽에 놓은 이유라도 있는가. -보통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것보단 서쪽 방향에서 많이 본다. 많이 보는 쪽에 있어야 도둑도 안 맞는다. 게다가 서쪽이어야 석가탑을 보게 된다. →돌사자가 제자리(모서리)에 있는 게 맞지 않는가. -돌사자를 중앙부에 놓아도 큰 잘못은 아니다. 1개 이상을 더 찾으면 제자리에 놓자는 얘기를 1960년대 스님들에게는 했다. →1904년 일본 학자의 기록에는 돌사자가 탑 네 모서리에 있었다고 한다. -돌사자란 원래 네 귀퉁이에 있는 법이다. 탑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를 넣는데 부처님을 지키는 사자는 네 모서리에 앉는다. 화엄사 사자탑 등을 보면 네 모서리에 있다. →제자리에 돌사자 진품 1개를 놓고 3마리는 해외로 반출된 역사를 적어놓으면 될 일 아닌가. -석조 문화재는 놓았을 때 원위치가 아니더라도 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산성비 때문에 석조물의 보존각을 짓는다든지, 마애불의 경우 전실을 짓거나 한다. 목조와는 다르다. 석조 문화재가 어렵다는 것은 자연조건도 있고, 잘못하면 풀이끼가 나오기 때문이다. 곰팡이가 피면 퍼석퍼석해진다. 이런 이유들로 석조 문화재를 다루는 게 힘들다는 거다. →문화재청에서 다보탑 돌사자와 관련해 의견을 구해오면. -돌사자 모조품을 3개 만들어 진품과 함께 네 모서리에 앉히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모조품은 인간문화재 석장부문 이재순 같은 분들에게 맡기면 된다. 다보탑 실측 도면 같은 것도 존재하니까 그대로 조각하라고 하면 손색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문화재청은 왜 모조품을 만들어 배치할 생각을 안 했나. -모조품 만들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 위원을 50년 한 나도 사실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의 여건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3개의 진품이 더 발견되면 모조품과 바꿔치기하면 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 다보탑처럼 진품 다보탑에도 돌사자 4마리가 앉아 있어야 한다. 모조품 제작에 대해 학계나 불국사에서 반대할 일은 없을 거다. 글 사진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정영호 박사는 1934년 강원 횡성 출신.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를 수료하고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1962년 문화재 전문위원 1호로 위촉된 뒤 2003년까지 문화재위원을 지냈다. 숙명여고 교사를 거쳐 단국대, 한국교원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미술사학회 회장, 한국범종연구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문화상(1979년), 만해학술상(2001년)을 수상했다.
  • “돌사자 4마리”… 나머지 3마리 어디갔나

    “돌사자 4마리”… 나머지 3마리 어디갔나

    경주 불국사의 국보 20호 다보탑 돌사자의 기구한 운명은 일제 침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문화재청이 2011년 낸 ‘불국사 다보탑 수리 보고서’에 따르면 도쿄대 교수를 지낸 세키노 다다시가 작성한 ‘한국건축조사보고’(1904년 간행)에 “다보탑 기단 모서리 4곳에 돌사자가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일제 병탄 직전까지는 돌사자 4마리가 온전히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돌사자의 위치는 세키노가 1916년부터 1935년까지 펴낸 15책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세키노는 1909년부터 1912년 사이에 조선의 문화유적을 한 차례 더 조사한 뒤 ‘조선의 건축과 예술’을 내는데 거기에 “다보탑의 돌사자 1쌍이 없어졌다.”고 기록했다. 나머지 2마리 중 1마리에 대해선 작가 현진건이 1929년 동아일보에 쓴 ‘고도순례 경주’란 칼럼에서 밝히고 있다. 현진건은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00만원을 주어야 내놓겠다고 하던가?”라고 적고 있다. 즉 1925년 이전까지 돌사자 4마리 가운데 3마리가 수탈돼 해외로 반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1마리는 어떻게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가. 수리 보고서는 “사자상의 경우 정수리, 꼬리, 입, 가슴 부위, 남측 다리와 발가락 등이 파손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지금 다보탑에 남아 있는 돌사자는 얼굴에 난 상처 덕분에 제자리를 지키게 됐다.”고 설명했다. 훼손됐다는 이유로 다행히 수탈을 면한 1마리는 1936~1944년 사이의 기록을 보면 불국사 극락전 앞에 있었다. 수탈을 위해 다보탑 기단에서 끌어내렸으나 훼손된 것을 알고는 극락전 앞에 방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돌사자는 광복 이후 원위치인 기단의 모서리에 배치된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의 다보탑 복원 공사 때 1마리만 모서리에 있는 모양이 어색하다고 판단한 불국사 측이 공사팀과 상의해 지금의 기단 서쪽 중앙부로 옮겨놓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국립경주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복제품 다보탑은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이전의 다보탑을 그대로 살려놓은 모습이다. 경주박물관은 안내문에서 “분황사 석탑이나 화엄사 사사자석탑, 흥덕왕릉에 있는 사자 네 마리가 모두 네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다보탑도 네 귀퉁이에 불법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사자를 배치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보탑 돌사자 이동이 확정되면 다보탑이 들어가 있는 현행 10원 주화를 비롯해 역사 교과서, 국가 기증품 등의 수정, 이동이 불가피하다. 10원 주화는 다보탑을 기본 문양으로 1966년 8월 처음 발행한 데 이어 1970년, 1983년, 2006년 등 4차례 도안을 바꿔 가며 45년간 총 72억개를 발행했다. 1966년과 1970년에 발행한 주화는 다보탑을 정면에서 바라본 도안을 채택했는데 이 도안에는 돌사자가 없다가 1983년 발행분부터 지금의 다보탑처럼 기단의 중앙부에 돌사자가 들어갔다. 한국은행은 천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에 있던 도산서원의 금송(錦松)이 일본풍이라는 논란에 휩싸이자 2007년 1월 신권 발행 때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로 대체한 바 있다. 10원 주화 외에도 우리 정부가 칠레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해 칠레 수도 산티아고 리베라수르공원에 기증한 다보탑에도 돌사자의 위치가 잘못돼 있다. 또한 올해 2쇄를 낸 비상교육의 검정교과서 ‘중학교 역사(상)’의 101쪽에도 지금의 다보탑 사진이 실려 있다. 김문·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다보탑 돌사자 멋대로 옮겼다 기단 모서리로 이동키로

    다보탑 돌사자 멋대로 옮겼다 기단 모서리로 이동키로

    반세기 가까이 엉뚱한 자리에 있던 국보 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가 제자리를 찾는다. 문화재청은 18일 다보탑 서쪽 기단 중앙부에 있는 돌사자를 원래 위치인 기단 모서리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60년대 초 복원하다 생뚱맞다며 옮겨 돌사자 이동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이 다보탑 돌사자 위치가 잘못됐다며 지난 1일 국민신문고를 통해 질의하고 이동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혜문 스님은 국민신문고에서 “다보탑 돌사자 자리가 원래의 위치에서 달라진 사실을 발견했다.”면서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돌사자 4개 중 3개를 훔쳐 가던 과정이나 해방 이후 다보탑 보수 중에 옮겨지거나 변형됐다고 생각한다.”고 질의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6일 회신을 보내 “일제강점기에 다보탑 돌사자 4마리 중 3마리가 없어졌고 한 마리가 극락전 앞에 보존돼 있었다.”면서 “과거 기록이나 사진을 통해 기단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배치돼 있었으며 1969년 추진된 불국사 현황 조사 때 돌사자가 지금의 서쪽 기단 중앙부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다.”고 오류를 시인했다. “돌사자의 위치가 달라졌다면 원래 위치로 옮길 의사가 있는가.”라는 혜문 스님의 질의에 문화재청은 “돌사자를 원위치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되면 전문가 등의 심층 검토를 거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미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1마리씩 앉아 있는 다보탑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경주박물관 다보탑 복제품 돌사자 4개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1960년대 초반 다보탑 복원팀과 불국사 측이 논의한 결과 원래 모서리에 있던 돌사자 한 마리의 모습이 생뚱맞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당시 공사 참가자의 증언이 있다.”면서 “돌사자 이동은 고증 자료를 더 확보한 뒤 불국사 측과 협의해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없어진 돌사자 3마리 중 적어도 2마리는 일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화재청이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문·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2012년 2월 13일 창덕궁 앞 석등이 사라졌다. 멀쩡하던 석등이 왜 없어졌을까. 창덕궁에 달려 있는 우리 문화재로 착각했던 그 석등이 실은 일본풍 장식물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설치한 것일까. “1970년대 궁궐 주변 정비를 위해 설치한 펜스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청의 기가 막힌 대답. 석등의 오류를 지적하고 철거를 이끌어 낸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대표 혜문 스님이 얼마 전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작은숲 펴냄)를 출간했다.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의 환수를 주도하는 활동가답게 책은 시종 우리의 신물(神物)인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문화재를 지켜 내야 할 당국의 무신경을 콕콕 집어낸다. 창덕궁 석등과 비슷한 사례가 일본식 석등을 어깨에 인 청와대 정문(사진①)이란 게 혜문 스님의 주장이다. 그는 “석등은 조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자(死者)의 영혼을 위로하거나 부처님께 공양을 하기 위한 법구(法具)로 우리나라에선 사찰이나 능묘에서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신사에서나 있을 법한 석등은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의 그것(②)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분개한다. 청와대에는 지난 2월 하순 석등 철거에 관한 요청이 접수됐다고 한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지만 돌아오는 광복절 전까지 청와대가 철거하지 않으면 행정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2004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뛰어든 혜문 스님은 평생 50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포함해 16가지는 이뤘다.”는 그는 남은 34가지 중 우선적으로 해결할 ‘4대 목표’를 소개했다. 조선 왕실에서 전래되던 제왕의 투구,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석탑, 고려시대의 사리와 사리구, 금강산 종이다. 제왕의 투구는 일본 도쿄의 국립박물관, 두 석탑은 도쿄의 오쿠라호텔 정원, 사리구 등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 금강산 종은 중국 다롄에 있다. “남의 나라 왕실의 투구나 석탑, 사리를 그들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 우리 것이 제자리를 잡도록 찾아와야 한다는, 듣다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지금까지 왜 아무런 자각이 없었을까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게 없거나 엉뚱한 자리에 있는 것들이 유난하게 잘 보이는 신묘한 눈을 가졌냐고 물었더니 “이 일을 하다 보면 법력이 생겨 절로 보인다.”며 웃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눈을 부릅뜨고, 발로 뛰어 확인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일본식 배열을 한 석등, 환구단의 일본풍 석등, 비틀어진 광화문 등 그가 지적하는 문화재 오류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우리 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 제대로 후손에 전해 줘야 할 문화재청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의 권위적이고, 한편으론 태평한 태도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보통 사람이 알기 힘든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는 고집이 우리 문화재의 오류, 오해를 낳는다.”고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까 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의 환국이 현실이 된 것처럼 다른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될 우리의 문화 유산은 찾아와야 하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는 혜문 스님. 제자리를 찾는다는 환지본처(還至本處)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글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해군 “구럼비 노출암 이번주 발파” 주민 “모든 수단·방법 동원해 저지”

    해군이 제주기지 사업 부지 내 구럼비 해안 노출암에 대한 발파 작업도 조만간 실시하기로 해 강정마을 주민들의 큰 반발이 우려된다. 해군 제주기지사업단은 13일 “이번주 중 선착장 설치 등을 위해 구럼비 노출암에 대한 발파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당초 오늘 실시하기로 한 노출암 발파 작업은 기상 상태가 나빠 잠시 연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럼비 해안 바위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반대 단체 등이 환경적 보전 가치가 있다며 해군의 발파에 크게 반발하고 있는 곳이다. 강정마을회 강동균 회장은 “해군의 구럼비 바위 발파는 강정마을과 제주도민에 대한 도전”이라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구럼비 바위 발파 작업을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해군은 그동안 구럼비 해안 노출암 인근 육상에서 케이슨 작업장 확보 등 기지 평탄화 기반 공사를 위해 발파 작업을 벌여 왔다. 구럼비 해안 바위의 가치에 대한 논란도 이어졌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구럼비 바위에 대한 문화재청 조사가 엉터리라는 자신의 주장을 반박한 문화재청에 대해 “구럼비 바위는 일반적 가치가 아닌 특수한 가치”라며 재반박했다. 황 소장은 “제주에서 넓은 너럭바위에서 사람들과 어울린 민속이 있는 형태는 구럼비 바위가 유일무이하다.”면서 “즉시 공사를 중단,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문화재청은 황 소장의 주장에 대해 “소중하다는 일반적 가치 판단으로 모든 것을 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수 없다.”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를 찾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한편 제주도의회는 해군 측의 “선거 기간이어서 정치인의 공사장 방문을 사절한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해군기지공사 현장 방문을 강행, 해군 측과 실랑이를 벌였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판매 300만부 돌파

    미술사학자이자 전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펴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출간 20년 만에 30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고 출판사 창비가 12일 밝혔다. 국내 인문서 가운데 300만부 돌파 기록을 세운 것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처음이라고 창비는 설명했다 “서양은 알 만큼 알면서 오히려 우리 것의 가치를 외면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힌 저자는 “초심을 잃지 않고 ‘답사기’를 열심히 써서 이 시리즈를 완결시키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993년 1권이 나온 뒤 순차적으로 6권까지 출간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고 싶다/황성기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고 싶다/황성기 문화부장

    훈민정음을 온누리에 퍼뜨리고자 만든 게 해례본(解例本)과 언해본(諺解本)이다. 해례본은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 해설서, 언해본은 한글로 풀이한 해설서다. 언해본은 세조 5년(1459년)에 간행한 서강대 소장본 등 4개가 현존한다. 해례본은 아쉽게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간송본’이 유일하다. 적어도 2008년까지는 그랬다.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편의상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라고 불러온 제2의 해례본은 2008년 7월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가 해례본의 일부를 실물로 봤고, 그 실물의 촬영본을 감정한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동일한 목판본이라는 진품 평가를 내렸다. 국보 70호인 해례본과 같은 목판으로 찍어낸 것이고, 보관 상태는 기존 해례본보다 좋다고 하니 상주본도 가히 국보급이라고 하겠다. 고서적 전문가인 남권희 교수는 “상주본에는 한글 발음에 관해 붓으로 글씨를 써놓고 공부한 흔적이 있으며 간송본에는 없는 ‘오성제자고’(五聲制字攷·다섯음으로 만든 글자에 대한 고찰)란 표지가 있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라고 평가한다. 그게 ‘상주본 비극’의 시작이었다. “집 천장에서 발견됐다.”며 상주본 감정을 의뢰했던 골동품 수집상 배모씨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평소 배씨와 거래하던 상주의 골동품상 조모씨가 “내가 진짜 주인이며 배씨는 내 가게에서 훔쳐갔다.”고 나선 것이다. 소유권을 둘러싼 진흙탕 다툼이 시작된 지 3년반. 조씨가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대법원은 배씨의 절도 사실을 인정하고 상주본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배씨가 상주본을 내놓지 않자 훼손을 염려한 문화재청이 나서 문화재 절취, 은닉·훼손 혐의로 배씨를 검찰에 형사고발했다. 지난 2월 1심에서 배씨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는 드물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례적인 중형 선고만 남았을 뿐, 상주본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화재청이나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실정법과 높은 형량이란 무기로 압박하면 배씨가 상주본을 내놓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는데, 그게 오산이었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기자로선 문화재청의 낙관이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상을 했었다. 상주본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배씨에게 검사의 일방적 공세만으론 상주본의 회수는 어려울 것이라 봤다. 만일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을 우리 형법에서 인정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를테면 검사가 배씨에게 상주본을 내놓는다면 기소를 유예한다든가, 구형 수준을 대폭 낮춘다든가 하는 일종의 거래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배씨의 구속기소 후 6개월을 끌어온 지루한 재판은 피고와 검찰 양쪽의 항소로 2심으로 넘어갔다. 1심 재판장은 플리바게닝을 암시하는 주문을 피고 배씨에게 했다. “상주본을 내놓는다면 2심 법원에서 선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재판장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주문을 판결에 덧붙였을까 싶다. 1심 선고 직후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배씨는 “항소건, 항고건 끝까지 가겠다.”고 했다. 중형 선고에 격앙됐던 배씨가 2심 재판을 앞두고 심경을 바꾸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2심이 시작되기 전 문화재청이 배씨 집과 부근을 수색하는 강제집행을 시도할 것이라고 한다. 2008년에도 3차례 배씨 집에 대한 압수수색을 했지만 해례본을 찾지 못했던 터라 이번에야말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샅샅이 뒤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상주본은 우리 모두의 소중한 유산이다. 문화재 보존전문가도 아닌 배씨가 3년반 가까이 어떻게 상주본을 숨겨 놓았을지, 그 보물이 훼손 없이 성하게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해례본은 2006년과 2009년, 그것도 잠깐 세상에 나왔을 뿐이다. 제자리를 찾는다는 환지본처(還至本處)의 뜻처럼 상주본은 우리들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해례본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고 싶다. marry04@seoul.co.kr
  • [제주 해군기지 충돌] 해군기지 건설 둘러싼 세가지 쟁점

    제주 해군기지 건설 논란은 크게 세 가지 쟁점으로 압축된다. 해군이 발파 작업에 나선 구럼비 바위 해안의 환경적 가치와 2007년 참여정부가 추진한 민·군 복합 관광 미항이 현 정부에서 해군기지로 변질돼 추진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 그리고 지난해 삭감된 예산 등 공사 계획의 실효성 논란이다. 구럼비 해안의 바위는 길이 1.2㎞, 너비 150m에 이르는 거대한 용암 너럭바위다. 크고 작은 돌덩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로 이뤄졌다. 지질 전문가들은 오래전 제주도가 형성되던 시기에 바다로 흘러간 용암과 바다에서 솟은 바위가 한 덩어리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바위와 인근 해안에는 천연기념물인 연산호 군락과 붉은발말똥개, 맹꽁이 등 멸종 위기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공사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나눔문화’의 이상훈(28) 연구원은 “구럼비 바위 앞 범섬 일대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공사를 강행하면 생태계 파괴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국방부 측은 “구럼비 바위는 제주 전역 해안선 195㎞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질 해안 노출암으로, 지난해 10월 문화재청 현지 조사 결과 국가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특별한 비교 우위가 발견되지 않은 곳”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붉은발말똥개 등 사업 부지 내 멸종 위기종은 전문가 조사 등을 거쳐 대체 서식지로 옮기는 등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둘째 문제는 항구의 성격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해군기지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던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측은 “2007년 해군기지 건설 추진 당시에는 민과 군이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했었으나 현재는 해군기지 위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 시절엔 민·군 복합 관광 미항으로 개발하려 했는데 현 정부가 해군기지로 항구의 성격을 바꿨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당초 강정마을 기지는 해군만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그 이후 지속된 도민들의 지역 경제 활성화 요청을 수용한 것”이라며 “2008년 9월 최대 15만t급 크루즈 선박이 기항할 수 있는 민·군 복합형 관광 미항으로 건설키로 확정했다.”고 반박했다. 셋째 문제는 예산이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31일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산을 정부 원안인 1327억원 가운데 49억원만 남기고 1278억원을 삭감했다. 항만 등 기지 시설 공사 1065억원, 토지보상비 196억원, 설계 조사비 38억원 등을 삭감한 것이다. 이에 따라 당장 정부가 공사에 착수한다 해도 무슨 돈으로 이를 집행해 나갈 것이냐는 의문이 따른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지난해 반대 측의 현장 점거 등으로 공사가 지연돼 미집행된 이월예산 1084억원을 감안해 국회가 감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예산 49억원과 합쳐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제주 해군기지는 제반 인허가 과정, 부지 매입 및 어업 보상이 완료된 상태로 항만공사 진도율은 약 13%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는 수중 평탄화 작업과 케이슨 제작장 부지 조성 등 항만공사에 1075억원을 투입해 2015년 12월 완공 목표에 차질이 없도록 진행할 전망이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행정재산 2000필지 중 59%가 ‘노는 땅’

    교육과학기술부는 국립 국제교육원 건립을 위해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9936㎡를 보유하고도 5년 넘게 신축 공사를 하지 않았다. 전남 여수지방해양항만청 역시 여수산업단지 부지로 4만 8442㎡를 취득했지만, 활용하지 않고 있다. 경남 남해군은 해안도로를 만들기 위해 부지를 매입했지만 그중 일부인 1025㎡를 활용하지 못했다. 기획재정부와 조달청이 지난해 8~12월 행정재산 2000필지에 대해 활용실태를 점검한 결과 이처럼 취득한 뒤 5년이 넘게 정해진 행정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경우가 전체의 59%인 1171필지로 나타났다. 본래 행정목적으로 사용중인 재산은 829필지로 41%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이 된 부처와 청은 교과부와 국토해양부를 비롯해 국방부,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환경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문화재청, 산림청 등 10곳이다. 정부는 올해 전 부처와 청을 대상으로 일반회계 재산 중 국유재산 대장상 지목이 대지로, 건물이 없는 행정재산 6만여 필지에 대한 활용실태를 중점 파악하기로 했다. 실태파악이 끝난 뒤 정부는 장기간 행정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해 사실상 유휴재산이 된 필지를 취합, 범정부 차원의 활용계획을 다시 세우기로 했다. 정부에서 활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민간인에게 대부 또는 매각할 방침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7월까지 전수조사를 벌인 뒤 부처의 국유재산 과다 보유 경향을 불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경주·공주·부여·익산 古都지구 지정

    경주·공주·부여·익산 古都지구 지정

    국내 대표적 4대 고도(古都)인 경주·공주·부여·익산에 고도 지구가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2004년 ‘고도 보존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 8년 만에 이들 고도 가운데 핵심지역을 ‘특별보존지구’와 ‘역사문화환경지구’로 나누어 지정했다고 5일 밝혔다. 4개 지구의 지정 총면적은 1만 3097필지 894만 3000㎡. 이 중 특별보존지구가 전체 61.8%인 552만 8000㎡이며 나머지 38.2%인 341만 6000㎡가 역사문화환경지구다. ‘특별보존지구’는 원형(原形)을 보존해야 하는 절대 보전 지역에 가까운 곳이다. 반면 ‘역사문화환경지구’는 특별보존지구 주변 지역 가운데 현상의 변경이 제한되는 곳을 말한다. 경주 고도지구(277만 1000㎡)에는 황룡사지·월성·읍성·대릉원 등 중요 유적지가, 공주 고도지구(203만 6000㎡)에는 공산성·송산리 고분군·정지산 유적이 각각 포함됐다. 부여 고도지구(292만 4000㎡)는 부소산성·관북리 유적·부여 나성 등이, 익산 고도지구( 121만 3000㎡)에는 금마 도토성(都土城)·익산 향교 등이 들어간다. 향후 10년에 걸쳐 총 81건(경주 24건·부여 21건·공주 19건·익산 17건)의 보존사업도 추진된다. 경주는 황룡사지 정비·경주읍성 복원·신라 도심고분공원 조성 등을 추진하고, 공주는 공산성 발굴·고마나루 경관 회복사업을 벌인다. 부여는 사비왕궁터 정비·부소산 경관 정비사업 등을, 익산은 금마 도토성 발굴과 익산향교 정비사업을 각각 추진한다. 문화재청은 “이번 고도보존사업을 통해 그간의 규제 위주 문화재정책에서 벗어나 문화재보호와 함께 주민을 위한 지원 사업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경주·공주·부여·익산 ‘古都지구’로

    국내 대표적 4대 고도(古都)인 경주·공주·부여·익산에 고도 지구가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2004년 ‘고도 보존에 관한 특별법’(이하 고도보존법) 제정 이후 8년 만에 이들 고도 가운데 핵심지역을 ‘특별보존지구’와 ‘역사문화환경지구’로 나누어 지정했다고 5일 밝혔다. 4개 지구의 지정 총면적은 1만 3097필지 894만 3000㎡. 이 중 특별보존지구가 전체 61.8%인 552만 8000㎡이며 나머지 38.2%인 341만 6000㎡가 역사문화환경지구다. ‘특별보존지구’는 원형(原形)을 보존해야 하는 절대 보전 지역에 가까운 곳이다. 반면 ‘역사문화환경지구’는 특별보존지구 주변 지역 가운데 현상의 변경이 제한되는 곳을 말한다. 경주 고도지구(277만 1000㎡)에는 황룡사지·월성·읍성·대릉원 등 중요 유적지가, 공주 고도지구(203만 6000㎡)에는 공산성·송산리 고분군·정지산 유적이 각각 포함됐다. 부여 고도지구(292만 4000㎡)는 부소산성·관북리 유적·부여 나성 등지가, 익산 고도지구( 121만 3000㎡)에는 금마 도토성(都土城)·익산 향교 등이 들어간다. 향후 10년에 걸쳐 총 81건(경주 24건·부여 21건·공주 19건·익산 17건)의 보존사업도 추진된다. 경주는 황룡사지 정비·경주읍성 복원·신라 도심고분공원 조성 등을 추진하고, 공주는 공산성 발굴·고마나루 경관 회복사업을 벌인다. 부여는 사비왕궁터 정비·부소산 경관 정비사업 등을, 익산은 금마 도토성 발굴과 익산향교 정비사업을 각각 추진한다. 이들 지구에서는 각종 건축물이나 시설물의 신·개·증축, 이축, 택지 조성이나 토지 개간 또는 토지 형질변경 등이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주민 소득증대사업이나 복리증진사업, 주거환경 개선사업, 도로나 주차장·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개선사업, 기타 주민 생활편익, 교육문화사업 등은 국고 지원을 받는다. 문화재청은 “이번 고도보존사업을 통해 그간의 규제 위주 문화재정책에서 벗어나 문화재보호와 함께 주민을 위한 지원 사업이 가능해졌다.”면서 “앞으로 해당 지자체와 지역주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주민 생활환경 개선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적극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봉건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유럽 대학과 교류… 문화재 보전·복원기술 발전”

    김봉건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유럽 대학과 교류… 문화재 보전·복원기술 발전”

    “숙원 사업을 해결해 속이 시원하다. 대학교로 명칭하고, 대학원도 7월에 설치할 수 있게 됐으니 유럽의 전통 학교와 교류해 문화재 보전 및 복원 기술을 발전시키겠다.” ●한예종도 못이룬 ‘대학교’ 명칭 사용 김봉건(56)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가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라는 이유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용상 ‘4년제 국립대학교’였지만 대학교라고 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4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올해부터 대학교란 표현도 사용하고, 대학원 설치도 가능해졌다. 2000년 개교한 뒤 12년 만의 개가로, 한국예술종합학교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대학교로 칭할 수 있게 되자 평소 5대1 정도였던 입학 경쟁률이 9대1까지 치솟았다. 현재 전통건축, 전통미술, 문화재복원, 유적학과 등 6개 학과가 개설돼 있다. ●전통건축·미술 등 6개 학과 개설 김 총장은 “전통 학교를 만들 때 실무자로서 설치령 만들고 기본설계를 했는데, 총장이 돼서 마무리까지 할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 덧붙였다. 전통대학교는 영국의 요크 대학,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학교,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교 등이 유사 모델이다. 이들 학교와 인적·학문적 교류를 하고 싶어도 대학원이 없어서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총장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재 복원·보전 기술을 고스란히 계승할 필요도 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기술·기법을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낀다고 했다. 전통 건축이 전공인 김 총장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졸업하던 해에 기술고시 13회(행시 21회)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상공부 공무원이었는데, 군대를 갔다 온 뒤로는 문화재청에서 20여년 이상 쭉 일했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는 김 총장은 “관련 법안이 통과될 때 여야 국회의원들이 모두 힘을 모아 줬다.”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전통문화를 아끼는 한국의 행보를 보고 동남아시아국가들은 너무나 부러워한다.”고 자랑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명화 반출 금지/최광숙 논설위원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혹함을 그린 대작이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요청으로 나치가 고국 스페인의 게르니카 지역을 공습하자 피카소는 분노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그는 스페인 당국의 요청으로 이 그림을 그려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화로 출품했다. 하지만 그 후 이 그림은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내라는 피카소의 뜻에 따라 뉴욕 현대미술관 등으로 40년 넘도록 방랑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프랑코 사후 고국으로 가야 할 이 작품은 피카소의 딸 마야의 반대로 지체됐다. 1981년 마야도 결국 스페인의 여론에 굴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의 품에 안긴 이 작품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을 거쳐 1992년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둥지를 틀었다. 그 후 스페인은 이 명작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정원’도 해외 반출 여부를 놓고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한 작품이다. 소유주인 자크 발테르는 1982년 경제적인 이유로 이 그림을 스위스 경매에 부치려 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미술품 반품규제법’을 내세워 불허했다. 이 그림을 뉴욕에서 사들여 ‘일시적 수입품’으로 들여왔던 그는 1988년 “일시적 수입품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며 다시 반출 허가를 요청했으나, 프랑스는 이 작품을 ‘역사적 재산’으로 지정해 버렸다. 관련법에 따라 역사적 재산으로 지정된 미술품은 해외 반출은 물론 매매도 신고해야 하며 복원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소유주는 프랑스 경매에 이 그림을 내놓았으나 국제 시세의 6분의1 가격인 77억원에 팔고, 해외반출 금지로 손해를 보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최근 영국 정부가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클라우스양의 초상화’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나섰다. 소유자인 사전트 가문이 503억원에 그림을 팔기로 해외 구매자와 계약을 맺자 영국 정부가 8월까지 한시적으로 금수령을 내리고, 국내 박물관이 이 그림을 구입하도록 했다고 한다. 개인 간 예술품 거래세 약 365억원도 면제해 주기로 했다. 애슈뮬린 박물관이 이 그림을 구입하고자 약 139억원의 모금을 시작했다고 한다. 박물관이 구매 대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그림은 해외 구매자에게 넘겨진다. 영국은 프랑스처럼 미술품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 까다워서다. 그래도 문화재청이 몇해 전 반출 관리를 소홀히 해 반출 금지 문화재가 해외로 수출된 우리보다는 몇배 낫지 싶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귀중한 고미술품 자식에게 상속 말고 박물관에 기증 하세요”

    “귀중한 고미술품 자식에게 상속 말고 박물관에 기증 하세요”

    1950년 9월 김재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재임 1945~1970년)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북한군이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에서 문화재 이송에 필요한 짐을 꾸리고 있었다.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북한군은 서울의 문화재를 싸들고 북으로 가겠다고 했다. 북한 체제가 완료되기 직전 1947년 개성박물관에서 고려청자 등 귀중한 유물을 다 싸들고 내려왔던 김 관장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들키면 죽을 각오를 하고 낮이면 문화재 포장을 하는 척했다가 밤이면 그 포장을 풀었다. 결국 북한군은 문화재 북송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문화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아버지가 초대, 자신은 11대 박물관장이라는 사실에 기분 좋아하는 소녀의 감수성을 지녔다. 그 감수성으로 김 관장은 지난해 가을 유품으로 간직하던 운보 김기창의 독락도(獨圖) 등 29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품엔 1950년대 한·타이완 학술대회 때 갑골문자 해독의 권위자인 둥쭤빈(董作賓·1895~1963)이 써준 갑골문서예(甲骨文書藝),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촌이 써 준 서예 등도 있다. 기증품을 엄격히 골라서 받아들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의 안목을 고려할 때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하다. 다만 기증품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미술시장에서 한국화가 평가절하되고 있어서다. 김 관장은 26일 “수집한 골동품들이 아니고 대부분 아버지가 선물 받았던 것인데, 가격 환산은 어렵다.”면서 “국제 교류가 적었던 시절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세계 박물관들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 보여 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대략 미술계의 감정가 등으로 미뤄볼 때 29점의 가치는 수억원대로 평가된다. 1954년에 그려 아버지 이름으로 증정된 운보의 ‘독락도’에는 일화가 있다. 그는 “덕수궁 석조전으로 가기 전에 국립박물관이 남산에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그 근처에 집을 사서 살았고,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다시 김기창과 우향 박래연 화백이 살았던 게 인연이 됐다.”고 했다. 그 집터는 현재 서울시가 운영하는 ‘문학인의 집’이 됐는데, 1950년대에는 연합참모본부가 사용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구매 예산은 연간 29억원에 불과해 1960~1970년에 골동품을 수집했던 애호가들의 기증이 꼭 필요하다.”면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중 20%는 기증에 의한 것으로, 국보급·보물급 등 모두 기증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 관장은 “1960~1970년대에 골동품을 수집하셨던 분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기증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비단이나 한지에 그린 그림들은 전문가가 아니면 보관이 어렵다. “완벽하게 보관하고 전시하게 되면 ‘○○○ 기증’이란 꼬리표를 꼭 달겠다.”고 말했다. 외국 주요 박물관 큐레이터의 주요 업무가 좋은 작품을 많이 가진 수집가들에게 기증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일이듯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오래 몸담은 큐레이터들도 이 업무를 ‘한국적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2월 9일 취임해 벌써 취임 1주년을 넘긴 김 관장은 올해 ▲터키문명전(5월) ▲미국 소재 한국 미술전(6월) ▲고대마야문명전(9월) ▲천하제일 비색 청자전(10월) 등을 계획하고 있다. 외국 문명 전시 시리즈를 지속하는 이유에 대해 김 관장은 “세계화 시대에 외국을 잘 알수록 우리를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라며 “온종일, 일주일 내내 놀고 뒹굴 수 있는 박물관을 임기 내에 만들어 보려고 하니 기대해 달라.”고 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김영나 관장은 근대미술사를 주로 연구한 미술사학자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하던 중 지난해 2월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됐다. 언니는 불교 조각 연구의 권위자인 김리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서양미술사학회장, 문화재위원, 서울대 박물관장을 지냈다. 경기여고를 나와 미국 물렌버그대학 미술학과를 거쳐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서울생.
  • 김기창 화백 ‘독락도’ 등 29점 중앙박물관 기증

    김기창 화백 ‘독락도’ 등 29점 중앙박물관 기증

    김영나(61)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의 ‘독락도’(獨圖·1954년) 등 근현대 미술품과 고서적 등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29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은 지난해 10월 30일 이뤄진 것으로, 김 관장은 기증 사실과 기증품 내역을 26일 서울신문에 처음 공개했다. 기증품은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아버지 김재원(1909~1990) 박사의 유품으로, 일반에 공개된 적이 한 차례도 없는 문화재다. 김 관장은 “기증한 유품은 아버지가 친하게 지내던 학자나 예술인들에게서 받은 선물들로 골동품 수집을 하지 않았던 유지를 받든 것”이라면서 “큰언니 김리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도 비슷한 시기에 14점의 유물을 기증했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의 맏딸 김리나(70) 위원과 김 관장은 2005년에도 유품 도서 4000권을 기증한 바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보물’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보물’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문화재청은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와 포항 중성리 신라비 등 문화재 15건을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고 22일 밝혔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중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과 복장(腹藏) 유물,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 유물, 속초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경산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양산 신흥사 대광전 벽화, 불조삼경(佛祖三經) 등 불교 문화재가 10건이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조선시대 산학(算學) 기본서인 양휘산법(楊輝算法), 조선 중기 문인 김응남의 전기(傳記) 자료인 김응남 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 및 관련 고문서, 이순신 장군 관련 고문서인 사패교지(賜牌敎旨), 증직교지(贈職敎旨)도 보물로 지정됐다. 한국적 수각형(獸脚形) 향로인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출토 경위가 확실하고 보존 상태가 완벽한 데다 통일신라 시대 대형 향로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빨라 문화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전주 탄소공장 부지서 유물 다량 출토

    전주 탄소공장 부지서 유물 다량 출토

    토지주들의 반발로 착공에 어려움을 겪었던 전북 전주시 탄소공장 부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돼 공장 건립이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22일 전주시에 따르면 동산동 일대에 조성 중인 전주친환경첨단산업복합단지 3-1단계 부지 26곳을 대상으로 문화재 표본조사를 한 결과 청동기~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유구 100여점이 발굴됐다. 이곳은 효성그룹의 탄소공장 1라인 건설 예정지다. 삼국시대 타날문토기편(조각)을 비롯해 고려∼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 무문토기편, 조선시대 백자편,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 등이 대거 발견됐다. 표본조사를 맡은 전라문화원은 “친환경산단 전체 면적 28만 3000㎡의 1.4%에 해당하는 3900㎡에 대한 조사에서 다량의 유물과 함께 삼국시대 문화층 및 농경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유구, 구상유구, 사람과 소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친환경산단 조성공사는 지난 7일 첫 삽을 뜬 지 14일 만에 일시 중단된 상태다. 정밀 발굴조사도 불가피, 양산공장 착공이 늦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시는 공장 착공의 시급성을 감안, 문화재청과 협의해 시굴조사를 생략하고 즉시 발굴조사로 전환해 다음 달 중순까지 발굴을 마칠 계획이다. 또 기반시설이 들어설 나머지 부지인 2∼3라인에 대해서도 발굴조사 면적을 확정한 뒤 부분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오는 27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시굴과 발굴조사 허가가 나오면 28일부터 곧바로 조사에 들어가 토지수용 절차가 마무리되는 다음 달 15일까지 발굴조사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에 발굴된 유물과 유구 등은 인접 지역인 장동월드컵경기장 부지 등에서 출토된 적이 있어 발굴조사 기간이 짧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유물 출토 지역이 넓을 것으로 추정돼 지표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유물 발굴 지역은 한번 훼손되면 영원히 복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장 건립을 서두르기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철저하게 조사를 선행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편 시는 신소재로 각광받는 탄소 소재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해 효성그룹을 유치, 탄소공장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효성은 1단계로 2500억원을 투자해 중성능(T700급) 탄소섬유 공장을 내년 2월까지 완공한다. 여기서 국내 최초로 국산 탄소섬유 제품을 출시하고 2020년까지 1조 2000억원을 투입해 연간 1만 4000t의 탄소섬유를 생산할 계획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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