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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⑨ 정동과 덕수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⑨ 정동과 덕수궁

    >> 정동 공사관거리 어떻게 형성됐나 서울 도심 한복판 중구 정동(貞洞)이 외국 공사관 거리로 바뀐 데에는 사연이 있다. 미국공사관이 1883년 정동에 처음 자리 잡으면서 열강이 속속 진입한 것이다. 서울에서 근대의 풍경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 정동의 형성은 우연한 계기로 이뤄진 셈이다. 1880년 우리나라에 첫 공사관을 개설한 일본 공사관이 들어선 곳은 서대문 밖이었다. 조선은 외국 공관의 사대문 안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진압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도성 안에 주둔하면서 금역은 깨졌다. 새 경계선으로 정한 것이 개천(청계천)이었다. 종묘사직이 있는 개천 안쪽만에라도 외세를 들여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일본과 청나라의 틈을 비집고 미국이 사대문 안 정동에 전격 상륙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정동이었을까?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 초대 공사 푸트에게 정동에 공관과 사택을 알선해 준 이는 수송동에 살고 있던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였다. 통역 윤치호의 처가가 정동에 있었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강원도 관찰사 민치상의 아들 민계호의 집을 외국인에게 선뜻 내어 준 것은 고종의 윤허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58세로 나이가 지긋하고 경력도 상당한 푸트에 대한 고종의 개인적 호감이 작용했다고 한다. 푸트는 1만냥을 주고 125칸의 건물이 딸린 한옥을 사들였다. 이 집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 나중에 미국 대사관저(하비브하우스)가 된다. 푸트는 정동에 정착한 최초의 외국인이 됐다. 이어 영국 영사관(1884년), 러시아 공사관(1885년), 프랑스 공사관(1889년), 독일 영사관(1891년), 벨기에 영사관(1901년) 등이 합류하면서 정동은 양인촌(洋人村)이 됐다. 정동은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 그들의 가족에게 여러모로 좋은 곳이었다. 인천항이나 한강을 통해 서울 진입이 손쉬운 마포나루와 양화진이 가깝고, 경복궁이나 경운궁에 접근하기 좋다. 사대문 성곽 안이어서 안전하고, 토지와 가옥 매입이 쉬우며, 특정 지역에 모여 살기에 편리했다. 19세기 말엽까지 서울에는 9개 나라의 공관이 있었는데 이 중 7개 나라가 정동 권에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공관만 정동 밖에 있었다. 개항기 서울에서는 모두 226명의 서양인이 117채의 집을 차지했다. 대부분 정동이나 연지동에 거주했다. 여기에다 청국과 일본인을 포함하면 외국인 수는 모두 3200여명에 이른다. 독립신문 1897년 4월 1일자는 “프랑스인 28명에 가옥 7호, 러시아인 57명에 가옥 22호, 독일인 9명에 가옥 7호, 미국인 95명에 가옥 40호, 영국인 37명에 가옥 41호, 청국인 1273명에 가옥 110호, 일본인 1758명에 622호 등 모두 3257명에 가옥 767호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이후 13년이 흐른 1910년 서양인 수는 308명으로 별 변화가 없었다. 같은 해 7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 수는 2344명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경성에 거류하는 외국인을 조사한즉슨 영국인이 88명, 미국인 131명, 프랑스인 57명, 독일인 19명, 러시아인 12명, 벨기에인 1명, 청국인 2036명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미국 공사관의 정동 진입 당시 일본 공사관은 남산자락 아래 예장동에 있었고, 청나라의 공사관 격인 상무총서(商務總暑)는 남별궁터(조선호텔)에 있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은 공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지낸 천수탕(陳樹棠)이 1883년부터 2년간 주조선(駐朝鮮) 상무위원(商務委員)이란 직함을 달고 활동했다. 실질적인 청국대사였다. 그는 외국사절단 회의석상에서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니 나의 직위는 외국 사신 중 우두머리이며, 조선의 정승보다 상석에 앉아야 한다”며 거드름을 피웠다. 후임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함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였다. 1885년부터 10년간 조선총독 행세를 한 위안스카이는 명동 옛 중국 대사관 자리에 총리아문이라는 집무실을 설치했다. 지금의 을지로입구와 마포나루에 청국경찰서와 청국파출소를 각각 두는 등 경찰력을 따로 운영했다. 이들의 위세를 업고 중국 상인들이 소공동을 중심으로 수표동과 관수동에 상권을 형성했다. 정동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만 왕자의 난을 치른 태종이 계모의 능을 정릉동으로 옮겨 버렸기 때문에 능의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았다. 미국 공사관 터가 정릉 터로 추정된다. 태조 때 정릉에 설치한 문인석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전성기 정동에는 외국 공사관을 비롯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학교와 손탁호텔, 성공회, 구세군 본영, 정동 제일교회, 덕수교회 등 종교시설 등 모두 25개의 큰 건물이 들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하고 분주한 동네였다. 현재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노르웨이, 네덜란드, 러시아 대사관 등 6개국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대사관저는 웬만한 대사관을 압도하는 규모다. 정동에 근대의 향기는 여전하지만 자취는 거의 사라졌다. 정동의 옛 공사관과 거리가 그때 그 모습으로 보전됐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을 감출 길 없다. >> 덕수궁인가 경운궁인가 ‘도심 궁궐’ 경운궁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궁이었다. 고종은 백성이 모이기 쉬운 경운궁과, 청과 일본의 군사력이 미치기 어려운 정동 외국 공사관을 이용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정사를 본 1896년 아관파천 이후 1910년 국치일 이전까지 서울의 정치 중심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다. 이곳에서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원구단과 황궁우를 짓는 등 위상회복을 꾀했다.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간 8㎞ 거리의 단선궤도 전차를 1899년 개설했는데 이는 도쿄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경운궁은 을지로와 충무로 등 주요 도로와 사통팔달 식으로 연결되는 방사성 교통 요충지가 됐다. 조선 500년간 왕족이나 명문가의 거주지이자 사색당파(四色黨派) 중 서인(西人)의 주거지이던 정동이 하루아침에 양인촌으로 둔갑하면서 사실상 열강의 조계지(租界地)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고종은 먼 나라와 친교를 맺어 가까운 나라를 공략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 계책에 따라 서구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과 청의 야욕을 막으려고 했다. 고종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미국 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은 지 13년 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야밤에 경복궁을 탈출, 미국 공사관 안 쪽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경복궁에 더 머물길 원치 않았다. 이곳에서 1년 9일을 머물면서 경운궁을 정비했고,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궁(皇宮)으로 썼다. 1919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경운궁과 정동을 떠나지 않았다.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치러진 국장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나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동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이라고 이름을 바꿔 정문으로 썼다. 대한제국 시기 열강이 공사관과 교회, 학교 용도로 야금야금 잠식한 경운궁은 3분의1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1930년 덕수궁에는 전(殿) 6채, 당(堂) 7채, 헌(軒) 5채 등 18개 건물만 달랑 남았다. 궁궐 부지 2만여 평 중 절반을 또 공원용지로 떼어 냈다.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장충단공원, 남산공원과 함께 서울의 3대 공원으로 지정됐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심었다. 역사상 첫 황궁이던 경운궁은 창경궁과 함께 일개 공원으로 전락했다. 경운궁이라는 이름은 역사와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덕수궁이면 어떻고 경운궁이면 어떠하며, 대안문이면 어떻고 대한문이면 또 어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비록 우리 손으로 바꿨지만, 일제의 술수와 압력이 개명을 종용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운궁 명칭 회복운동이 몇 년 전 시작됐다.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경운궁으로 환원하자는 학계와 시민단체 등의 주장에 대해 문화재청은 잔재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덕수궁을 유지했다. 문화재위원회도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반대 의견이 많아 명칭 변경 안건에 대한 심의를 보류한다고 밝혔었다. 조선총독부를 해체한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는 곡절이 있다. 곡절의 진위를 캐묻는 의문과 왜곡 바로잡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실도 눈을 감고 말 것이다. joo@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문화재 관리부실, 더 이상은 안된다/유채윤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옴부즈맨 칼럼] 문화재 관리부실, 더 이상은 안된다/유채윤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역대 왕의 행적을 알려주는 인장이자 상징물인 조선왕실의 ‘어보’에 낙서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선 제8대 예종의 어보에서 한글로 ‘예종’이라고 쓴 글씨 이외에 썼다가 지운 흔적도 확인됐다. 이 문화재가 우리나라가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유물인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신문은 지난 16일 자(8면)에서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대표인 혜문 스님이 문화재청이 발간한 도록의 사진에서 예종의 어보에 낙서 흔적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훼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공문을 발송했다고 보도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와 민주당 안민석 의원실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주립박물관에 소장된 문정왕후 어보의 반환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불법 반출한 문정왕후 어보의 반환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이미 국내 국립고궁박물관에 관리 중인 예종 어보에 낙서 흔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지 않은가? 예종 어보 낙서사건을 계기로 서울신문이 낙서가 발견된 단편적인 상황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부실한 문화재 관리상황까지 짚었다면 더 생산적인 비판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문화재 당국은 언론 보도 이후 시민단체의 질의와 유물 훼손 여부에 관한 정보요청에 대응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어보에 한글로 ‘예종’이라는 글씨가 쓰인 것은 사실이나, 이는 낙서라기보다 이전에 유물의 관리를 위해 표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글씨를 새긴 것이 아니고 필기구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보존처리 기술로 쉽게 지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러나 유물의 관리를 위해 사인펜 등으로 유물에 직접 표기를 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이는 현재 문화재 부실관리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 2012년 국정감사에 제출된 서울시 문화재 관리 현황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서울시 소재 보물급 문화재 7건을 포함한 총 40건의 문화재가 훼손돼 26억원이 보수 예산으로 책정되었지만 유물 및 문화재의 상태는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법률소비자연맹 등 각종단체에서 저조한 목조문화재의 화재보험 가입률, 자연재해 위기대응 예방시스템과 실무 매뉴얼 부재, 문화재 안전관리 예산 감소, 잦은 도난과 7.2%에 불과한 회수율 등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은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불과 5년 전인 2008년 국보 제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다시피 했는데 문화재 관리의식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증거다. 우리나라 내 비종교적 전통 문화재의 90% 이상은 이미 소실된 상태라고 한다. 지난 6월 서울신문을 통해 보도된 경복궁의 엉성한 문화재 훼손기준을 지적하는 기사와 같이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문화재 관리 부실을 비판하는 글이 더욱 필요한 이유다. 서울신문은 앞으로 새로운 문화재의 발굴과 지정 못지않게 문화재의 관리·보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다뤘으면 한다. ‘문화재 기사는 따분하다’는 선입견은 진화하는 문화재 발굴과 보존·복원방법, 문화재와 지킴이들의 숨은 이야기 등을 통해 얼마든지 바꿔놓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문화재청은 어보 낙서 사례를 거울삼아 문화재·유물 보존·관리에 더욱더 심혈을 기울였으면 한다.
  •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유공 김원모·박보균 모란장 서훈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유공 김원모·박보균 모란장 서훈

    문화재청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1주년을 맞아 20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유공자들에게 서훈과 포상을 수여했다. 서훈자는 2명으로 공사관의 잊힌 사연을 처음 알린 김원모(왼쪽·79) 단국대 명예교수와 공사관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정립한 박보균(오른쪽·59) 중앙일보 대기자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김 교수는 1983년 워싱턴 등기소에서 조선공사관 부동산 문건을 발견하고 ‘주미조선공사관을 되찾자’라는 사설을 단국대 교내 신문에 게재했다. 일본이 이를 대한제국으로부터 단돈 5달러를 주고 빼앗아 갔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박 대기자는 공사관 환수와 관련해 여론 형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0년 이후 20여 차례 현장을 방문해 기사와 칼럼을 작성했다. 이 밖에 공사관 환수 주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대통령 표창을, 공사관 환수를 위해 협상을 지원한 현대카드주식회사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미국 현지 협상과 종합조사 등을 수행한 씨비알이코리아주식회사와 강임산(4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지원팀장은 문화재청장상을 각각 받았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1889년 ‘대조선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주차’는 ‘주재’, ‘화성돈’은 ‘워싱턴’의 당시 한자 표기)으로 개관해 대사관의 역할을 맡았다. 지난달 워싱턴DC 로건서클 역사지구 내 문화재 탐방로로 지정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옛 공사관을 2015년 이후 문화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숭례문 ‘대형 퍼포먼스’ 사고로 무산

    국보 1호인 숭례문 뒤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이를 촬영하려던 이명호(38)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의 퍼포먼스가 캔버스가 넘어지는 사고로 좌절됐다. 이 교수는 18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8일 오전 2시부터 기중기 3대를 동원해 숭례문 뒤에 흰색 초대형 캔버스를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오전 6시 45분쯤 캔버스를 지탱하던 지지대 한쪽이 무너지면서 캔버스 틀이 숭례문 주변 울타리와 감시초소를 덮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숭례문에는 피해가 없었다. 이에 숭례문 관리소의 현장관리를 전제로 행사를 허용했던 문화재청은 오전 7시 30분쯤 퍼포먼스를 중단해 달라고 이 교수 측에 통보했다. 이로써 50여명의 스태프와 2억 1000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 행사는 무산됐다. 이 교수는 “경기 용인의 야구장에서 벌인 리허설과 구조 검토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숭례문이 화마에 스러진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고, 복원된 숭례문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친일논란 인사의 물품이 문화재? 역사 눈감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가 최근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백선엽, 민철훈, 윤웅렬, 윤치호, 민복기 등의 의복과 유물 등 총 11건 76점의 문화재 등록을 보류한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21일 이들 유물이 “의생활 분야에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며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으나, 곧바로 항일 독립운동가 단체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등은 아예 이달 초 기자회견까지 열어 “친일행위자들의 물품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문화재 당국을 압박했다. 이는 역사적 맥락을 읽기보다 단순히 보전가치만을 따진 ‘기계적’ 행정이 불러온 결과로 풀이된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24일 경기 파주 소재 ‘감악산 결사대 사당’을 비롯한 6·25전쟁 관련 역사문화유산 5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면서도 현장 답사도 없이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국가수호사적지 조사보고서’만을 근거로 결정하는 무성의함을 드러냈다. 친일 논란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문화재 행정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백선엽(92) 전 육군참모총장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1943년 4월부터 해방 때까지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며 항일단체들과 직접 교전까지 벌였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은 가장 죄질이 나쁜 친일 행위”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백 전 총장의 장군복 등 5점을 무더기로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재판했던 판사인 민복기(1913~2007) 전 대법원장도 마찬가지. 해방 이후 검찰국장과 대통령 비서관, 검찰총장을 지낸 그는 대법원장까지 오른다. 대법원장 시절인 1975년에는 인혁당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사법살인’이란 오명까지 남겼다. 민철훈(1856~1925) 대한제국 오스트리아·독일 전권대사는 한술 더 떠 1910년 국권 피탈 뒤 일본 황실로부터 아버지에 이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문화재청은 민복기의 검사 법복, 민철훈의 대례복과 코트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려 했다. 구한말 정치가인 윤치호(1865~1945)와 부친인 윤웅렬(1840~1911)도 반발을 불러왔다. 윤치호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로 변절해 조선 청년들의 자원입대를 독려하며 일본제국의회 귀족의원까지 지냈다. 윤웅렬은 구한말 형조판서, 대한제국 군부대신 등을 지냈으나 국권 상실 뒤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문화재청은 이들 일가가 소유한 교지, 마패와 복식류 등 69점을 무더기로 문화재 지정 예고했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추진 유물 조선왕실 어보에 ‘한글 낙서’ 발견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추진 유물 조선왕실 어보에 ‘한글 낙서’ 발견

    조선 왕실의 의례용 상징물인 ‘어보’(御寶)에서 한글 낙서가 발견돼 훼손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어보는 역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의 행적과 공덕을 담은 인장(印章)으로, 우리나라가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유물이다. 국내에는 모두 324과(顆)가 남아 있다.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최근 조선왕실어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선 8대 왕인 예종의 어보에서 낙서로 의심되는 흔적을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단체의 대표인 혜문 스님은 문화재청이 발간한 도록의 사진에서 예종의 어보 하단, 거북의 머리 앞쪽에 한글로 ‘예종’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훼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공문을 발송했다. 혜문 스님은 “조선왕실의 어보는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종묘에 보관돼 있던 중요한 문화재”라며 “측면에 한지를 붙이고 한문 묵서로 누구의 어보인지 표기하는 것이 관례인데 예종 어보처럼 한글로 직접 쓰여진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예종 어보 하단에는 이 같은 낙서 외에 또 다른 글씨를 썼다가 지운 듯한 흔적도 발견됐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당국의 부실한 문화재 관리 행태를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라며 “누가 새겨넣은 것인지, 볼펜으로 쓴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은 펜으로 쓰여진 흔적으로 판단해 조만간 간단한 보존처리를 거쳐 복구한 예종 어보의 모습을 공개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경북 예천의 윤우식 생가와 대구의 옛 교남(嶠南) YMCA회관 등 항일유적지 2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14일 밝혔다. 남석(南石) 윤우식(尹雨植·1906~1934)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단체인 무명당(無名堂)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33년 9월 예천 지역에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구속돼 이듬해 재판 중 사망했다. 그의 예천 생가는 영남 지역의 전형적인 가옥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ㄴ’ 자형 건물인 사랑채와 ‘ㄱ’ 자형 건물인 안채가 ‘ㅁ’ 자형 배치를 이루며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당이 자리한다. 옛 교남 YMCA회관은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이 회합하던 장소다. 교남 YMCA의 임원과 회원 등 17명은 해방 뒤 건국훈장 애국장 등 포상을 받았다. 또 물산장려운동과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新幹會)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 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곳이다. 1914년 건립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1층과 2층 사이가 ‘돌림띠’(Cornice)로 장식됐다. 창 위쪽은 아치로 인방(引枋)을 만들어 사각형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1920년대 조적조(組積造) 건축양식을 대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향후 30일간의 등록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불허” 번복… 반가사유상 美 간다

    “불허” 번복… 반가사유상 美 간다

    국외 반출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결국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전시된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매년 6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문화재청은 오는 10월 29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에 반가사유상의 반출을 허가하기로 방침을 바꿨다고 9일 밝혔다. 문화재청이 지난달 29일 반가사유상의 반출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국립중앙박물관에 통보한 지 11일 만이다. 이번 결정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포장 및 운송 과정에서 전시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조건으로 반출 허가를 재요청한 데 따른 것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적극적으로 중재한 끝에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문화재청은 반가사유상이 그동안 전시를 위해 3000일간 해외로 반출된 바 있고, 선진국들은 훼손을 우려해 중요 문화재의 국외반출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출 불허 결정을 내렸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추수감사절, 성탄절, 신년에 걸쳐 접근성이 가장 좋은 1층 기획전시실에 반가사유상을 전시할 계획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4대 궁·종묘·조선왕릉 만 24세까지 무료입장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의 무료 관람이 만 24세 이하 국민으로 확대된다. 문화재청은 5일 청소년의 문화유산 관람 기회 확대를 위해 현행 만 18세 이하로 되어 있는 무료 관람을 국제 청소년의 날인 오는 12일부터 만 24세 이하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무료 관람 확대는 문화재청이 주간에 유·무료로 개방하는 일반 관람에 한하는 것으로 창덕궁 후원과 경회루 연향, 경복궁·창경궁 야간 개방 등 특별 관람은 해당되지 않는다. 궁·능 무료관람을 희망하는 경우 해당 궁·능의 매표소에서 학생증, 청소년증,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등을 제시하고 무료관람권을 발부받아 입장하면 된다.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청소년 단체 사전예약제’와 ‘지도교사 등 인솔자 지원 할당제’도 실시한다. 내년 1월 1일부터 의무화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2013 창덕궁 달빛기행 사전예매 3분 만에 매진

    2013 창덕궁 달빛기행 사전예매 3분 만에 매진

    ‘2013 창덕궁 달빛기행’ 사전예약이 3분 만에 매진됐다. 6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된 ‘2013 창덕궁 달빛기행’ 예매 3분 만인 2시 3분 현재 모든 입장권이 매진됐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행사로 이달 20일부터 오는 10월 20일까지 15차례 개최된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대표적인 야간 고궁 행사로 사전예매를 통해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2010년 시작된 창덕궁 달빛기행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며 예매사이트 예매 1위를 기록하는 등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지금까지 총 58회 진행됐으며 내국인 6200여명, 외국인 1500여명이 참가했다. 하반기에는 늘어나는 외국인들의 수요에 맞춰 인터파크 외국인 페이지(http://ticket.interpark.com/global)를 별도로 운영하며 외국인 전용 안내 창구도 개설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해남 대흥사 천불전 보물 됐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 보물 됐다

    문화재청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대흥사 천불전(千佛殿)을 보물 제1807호로 지정했다고 5일 밝혔다. 1813년 중건된 천불전은 대흥사 남원(南原·금당천 남쪽)의 중심 건물이다. 1821년 풍계 현정 스님이 기록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등을 통해 건물의 중건과 천불 조성·봉안의 역사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공포의 구성과 세부적 조각 수법, 빗천장과 우물천장의 장식과 구성 등은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으며 견실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공포와 빗천장 등의 구성과 세부적 수법은 인근에 위치한 미황사 대웅전(1754년), 불갑사 대웅전(1764년), 불회사 대웅전(1808년) 등과 유사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2013 공직열전] (3) 국무총리비서실 실·국장급 주요간부

    [2013 공직열전] (3) 국무총리비서실 실·국장급 주요간부

    총리비서실은 국무총리가 국정을 이끌고 나갈 수 있도록 보좌한다. 비서실 주요 자리들은 총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데려와 쓸 수 있도록 특채가 가능한 ‘복수직’으로 열어놓고 있다. 비서실의 정무·민정·공보 등 3개실 실장 셋 모두 특채로 들어온 별정직이다. 비서실 10명 가운데 4명꼴인 37.5%, 고위공무원단 10명 가운데 7명인 70%가 특채 출신이다. 국무조정실 특채가 100명 가운데 2명꼴인 것과 대조적이다. 정무·의전·청문 등 일반 공무원들과 다른 역할을 하는 것도 특채가 많은 이유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자기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이 자리를 메웠다. 배경과 ‘출신’이 같지 않고, ‘잡고 있는 줄’도 다르다. 생각과 개성도 제각각이어서 불협화음으로 덜거덕거리기도 하고, 긴장과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이태용 실장은 취임 초부터 관심을 끌었다. ‘박근혜 정부 막후 실세’라는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의 추천을 배경으로, 대구·경북(TK) 인사들이 밀었던 후보자와 치열한 전투 끝에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실장 자신도 “김용환은 나의 보스고, 나는 영원한 ‘꼬붕’(수하)”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저돌적인 성격에 말과 행동도 거침없다. 신중한 정 총리가 “그게 일개 실장이 총리에게 보고하는 태도냐”고 꾸중을 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옛 자민련 출신으로 여론과 민원 취합, 주요 정책의 진전 상황 파악 등 ‘청문 업무의 칼’을 쥔 현직을 발판으로 선거직에 뜻을 두고 모색 중이다. 총리의 국회와의 창구역할을 하는 김희락 정무실장은 정국 흐름을 짚어내고 대응책을 처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 같은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정권 부침 속에서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에 걸쳐 12년 동안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일했다. 총리실 국장으로 정무 업무를 다룬 경험도 있어 일과 조직에 친숙하다. 섬세하고 균형감 있는 일처리와 판단력이 돋보이는 ‘영국 신사’다. 무리 없이 원만한 해결책에 치중하는 게 흠이라면 흠.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여권 인사들과의 친분도 두텁다. 신중돈 공보실장은 10여년 동안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특파원을 지낸 중앙일보 출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 때 국회로 영입돼 박희태·강창희 의장과 호흡을 맞추며 여의도와 정계에 발을 넓혔다. 1960~1970년대 6년 5개월 동안 총리실 인사와 살림을 주무른 명 총무수석 신성재(83)씨가 아버지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비서팀장으로 5년 남짓 일해 의전과 한국사회 인맥에도 일가견이 있다. 긴 미국생활로 “문화 차를 느낀다”는 지적도 있다. 임충연 비서관은 대학 1학년 때 최연소로 공직에 입문, 다양한 업무를 거친 공직 34년차의 베테랑. 9명의 국무조정실장을 보좌한 명 비서관 출신.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등 과거 모셨던 상사들과도 끈끈한 관계다. 이대현 비서관은 박근혜 정부 고위공직자 가운데 현역 언론인으로 최근 발탁된 유일한 인사. 한국일보 문화부장과 대기자를 거친 문화통. 감성적이고 섬세한 글쓰기로 이름 높다. 문화재청 심의위원을 역임, 행정 경험도 있다. 김철휘 비서관은 청와대, 총리실에서 20년 넘게 역대 대통령과 총리 말씀에 감동과 메시지를 담아온 연설 전문가다. 김성환 의전관은 김황식 전 총리에 이어 정권을 넘어 의전관 자리를 꿰차고 있다. 문고리 권력을 쥔 ‘악역’ 담당이지만 책임감과 업무 능력, 순발력은 합격점. “고향의 지자체로 자리를 옮겨 경륜을 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전언. 정무실 국장들은 정권이 바뀌면 의례 교체되지만 황기영 비서관은 정 총리의 인정을 받아 유임된 사례다.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국회 업무에 밝고 일처리도 민첩하다. 세종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부여 낙화암 고란사 고란초 낙석 방지 철망에 고사위기

    부여 낙화암 고란사 고란초 낙석 방지 철망에 고사위기

    “나이 드신 관람객들이 ‘옛날에는 고란초가 많았는데 왜 지금은 없죠’라고 물어보세요.” 충남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고란사 주지 탄공(49) 스님은 “20여년 전만 해도 절 뒤에 고란초가 꽤 많았는데 지금은 두세 포기밖에 남지 않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란초 ‘원조’ 고란사의 고란초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백제 멸망 시 3000궁녀가 백마강에 목숨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낙화암 위의 고란사 뒤편 절벽에 자생하는 고란초는 수학여행을 가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고란초라는 이름이 고란사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연간 25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이곳 고란초가 줄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지질조사 이후다. 교수들은 이 절벽에 균열이 생겨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뿔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깎아내고 낙석 방지용 철망까지 설치했다. 이런 환경 변화가 고란초에 독이 됐다. 햇볕에 자주 노출되자 말라 죽기 시작했다. 고란초는 길이 5∼15㎝, 너비 2∼3㎝에 포자가 점처럼 박힌 풀로 바위틈과 이끼가 붙은 곳에서 잘 자란다. 그늘과 습기가 충분해야만 한다. 이계영 부여군 문화재관리팀장은 “고란초는 강가 절벽이나 바닷가 숲 등 일부 다른 곳에서도 자라지만 원조는 고란사 게 아니냐”면서 “이를 살려 보려고 군농업센터에서 양식도 하고, 바위에 가로 90㎝, 세로 60㎝ 크기의 유리관도 설치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고란사가 매일 물을 뿌려 주기도 어렵고, 관리가 안 된다”고 전했다. 백제 의자왕이 고란사 약수임을 확인하기 위해 약수에 잎을 띄우게 했다는 고란초. 전 고란사 주지와 부여 출신 변호사 등이 모임을 만들어 이곳 고란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것을 추진하고 나섰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부여군이 천연기념물로 신청하면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조사에 나설 계획”이라며 “역사성과 문화재 가치 등이 기준이 되지만 선정이 된다 해도 천연기념물 분과위원회 심사 등이 필요해 족히 1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부여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씨줄날줄] 반가사유상의 외출/서동철 논설위원

    경복궁 안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것은 1995년이다. 논란이 뜨거웠는데, 존경하는 어르신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찬성하는 쪽도 옳고, 반대하는 쪽도 옳아. 그런데 없어지면 다른 건 몰라도 눈은 시원할 거야. 광화문 거리에서 북악산도 보이고….” 생각해 보면, 온갖 당위를 끌어 들였던 찬반 논리는 간데없고 지금은 어르신의 말씀만 진리가 되어 남았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미국 전시가 결국 불발됐다. 문화재청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반출 허가를 신청한 목록에서 반가사유상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중앙박물관을 비롯해 반출에 찬성한 쪽은 한국 문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 문화 중심지인 뉴욕의 대표적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그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무산됐다고 한숨짓는다. 반출을 반대한 쪽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국가대표급 문화재의 해외 전시에 신중해야 하는 만큼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반긴다. 총독부 청사 철거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 얘기는 맞고, 누구 얘기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저 사유상이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결론이 내려졌을 뿐이다. 전시를 추진하는 사람들조차 가정이지만, 사유상이 없는 중앙박물관이란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전시회 대표 유물의 반출이 좌절된 중앙박물관 심정도 이해가 간다. 전시가 확정된 문화재는 국보 9건과 보물 14건을 포함해 130점 남짓이다. 선산 금동보살입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불교 문화의 정수라면,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들은 왕실 문화의 꽃이다. 특히 현대적 감각이 물씬 느껴지는 황남대총 남분의 금목걸이는 뉴욕의 멋쟁이들도 탐낼 만한 명품이다. 감은사터 서삼층서탑 사리장엄구와 경주 계림로 보검, 황남대총 남분 유리잔이 더해진 것은 신라의 황금 문화가 로마 및 페르시아 문화와 활발하게 교섭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의 부재(不在)는 전시회가 현지 관람객들에게 던질 문화 충격을 감소시키고, 전시장의 구성마저 다시 손보아야 할 만큼 치명적이다.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과 중앙박물관·문화재위원회 모두 직분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이제 남은 것은, 달라진 여건에서도 중앙박물관이 메트로폴리탄 전시회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반가사유상 못지않게 뉴욕에 가는 문화재 하나하나가 중요한 문화 자산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훼손 우려… 금동반가사유상 해외전시 안 된다”

    “훼손 우려… 금동반가사유상 해외전시 안 된다”

    해외 전시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국행이 무산됐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반가사유상의 해외 전시가 최종 불허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와 해외 홍보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란이 재가열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0일 오는 10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나라 신라특별전’을 위해 문화재청에 반출 허가를 신청한 문화재 목록 가운데 금동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토기, 토우장식장경호 등 3점에 대해 반출 불허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전날 박물관에 보낸 공문에서 “다량 유물 및 장기 국외 반출 자제 권고, 서류 보완 제출”이라는 문화재위원회의 ‘조건부 가결’을 근거로 “문화재위 권고 사항에 따라 3건 3점을 조정(불허)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문화재위 동산분과는 격론 끝에 반가사유상 등의 해외 반출을 조건부로 가결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반가사유상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는 허용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잦은 해외 전시로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문화재위의 반출 허가 결정을 뒤엎었다. 문화재 반출 허가의 최종 결정권은 문화재청장이 가지고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39조)은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등의 국외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도 국외 전시 등의 문화 교류 목적 반출은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박물관은 이번 결정으로 10월 29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세계 3대 박물관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국보 12점, 보물 14점을 포함한 대규모 전시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반가사유상은 보험 평가액만 500억원에 이르는 국내 최고의 문화재인 까닭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반출 여부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제주흑우’ 천연기념물 지정

    ‘제주흑우’ 천연기념물 지정

    문화재청은 22일 조선시대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던 ‘제주흑우’(黑牛)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46호로 지정해 안전행정부 관보에 공고했다고 밝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옻칠 채색 ‘채화칠장’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옻칠 채색 ‘채화칠장’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옻칠에 천연안료를 배합해 공예품 표면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전통공예인 채화칠(彩畵漆)을 하는 장인인 채화칠장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채화칠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 예고하고, 이의식(59)씨를 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고 22일 밝혔다. 채화칠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한 칠기장식기법으로 나전칠(鈿漆)이 창안되기 이전 우리 칠기장식의 대표적인 문양 표현 방식이다. 이의식씨는 전북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1998년 인정) 기능 보유자로, 1968년 이후 꾸준히 전승활동을 하면서 칠공예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석가탑서 통일신라 금동불

    석가탑서 통일신라 금동불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국보 제21호)의 기단 속에서 금동불입상(銅佛立像) 1점을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불상은 연구소가 지난 17일 불국사 삼층석탑 상층기단의 면석을 해체하기 위해 기단 내부 적심석을 수습하던 중 발견했다. 발견 위치는 북측 상층기단 면석 외곽에서 석탑 중심부 쪽으로 48㎝, 동측 상층기단 면석 외곽에서 석탑 중심부 쪽으로 100㎝ 지점이다. 불상은 통주식(通鑄式)으로 주조된 소형 금동불입상으로 높이 4.6㎝, 지름 2.3㎝ 크기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도금 흔적이 미세하게 확인됐다”고 전했다. 연구소 측은 이 불상이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석탑이 조성된 742년 나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진단구 성격으로 납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불상의 얼굴과 신체는 고려 정종 2년(1036) 등 수차례 일어난 지진 때 기단부가 무너져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발견된 ‘불국사 서석탑중수형지기’에 따르면 보수는 2년 뒤에야 이뤄졌고 불상 역시 이때 재납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최성은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많지만 발견 위치와 크기가 이례적”이라며 “석가탑의 기단에서 나온 데다 이렇게 작은 불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대전 괴곡동 700년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545호로 지정

    대전 괴곡동 700년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545호로 지정

    대전 서구 괴곡동의 700여년 된 느티나무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45호로 지정됐다고 문화재청이 17일 밝혔다. 괴곡동 985번지에 자리한 이 느티나무는 높이 16m, 밑둥치 둘레 9.2m로 수형이 무척 아름다우며 규모나 나이로 봐도 문화재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고 문화재청 측은 덧붙였다. 또 마을에서 오랫동안 수호목(守護木)으로 여겨 매년 칠월칠석이면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목신제(木神祭)를 올릴 만큼 지역사회에서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지정 구역은 2필지 389㎡로, 대전 지역 제1호 천연기념물로 기록됐다. 문화재청은 괴곡동 느티나무를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자연유산으로 보전·활용해 나갈 방침이다. 아울러 문헌연구와 함께 생태·인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등 3종 보물 지정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등 3종 보물 지정

    문화재청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건원릉과 태종 이방원의 헌릉, 세종 영릉 등 조선 초기 왕릉의 신도비 3기와 해인사 관음암 내전수함음소(觀音庵 內典隨函音疏)를 각각 보물(1803~1806호)로 지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고관의 사적(事蹟)을 기록해 묘 앞에 세운 비석이다.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에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1335~1408)의 조선 건국 과정과 생애, 업적 등이 담겼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는 세종 4년(1422) 이방원(1367~1422)의 무덤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태조 건원릉의 신도비를 지은 변계량(1369~1430)이 지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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