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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서 들여온 19세기 불화 ‘실성여래도’ 도난

    미국서 들여온 19세기 불화 ‘실성여래도’ 도난

    미국에서 사들여 국내로 들여온 불화가 배송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국가유산청은 3일 개인 소장 비지정문화유산인 ‘칠성여래도’가 도났됐다고 공고했다. ‘칠성여래도’는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제작된 불화로, 칠성각에 봉안된다. 이번에 도난 공고된 칠성여래도는 밤하늘의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한 불화 가운데 한 점이다. 제작 시기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제작자와 봉안됐던 사찰 등에 대한 정보를 담은 기록인 화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불화를 구매한 사람은 한국인으로, 올해 2월 미국의 한 온라인 골동품 판매 플랫폼을 통해 불화를 사들인 뒤 4월에 항공편을 이용해 국내로 들여왔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난 최근까지도 그림을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누리집을 통해 도난 사실을 공고하고 전국 경찰청, 지방자치단체, 유관 단체 등에도 내용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 김대중 기념사업에 진심 다하는 마포

    김대중 기념사업에 진심 다하는 마포

    서울 마포구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마포구는 3일 마포구청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 동교동 사저 보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 동교동 사저의 보존과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한다. 이날 행사에는 김대중재단 관계자와 유족, 법률과 학계 전문가들이 참석해 사저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보존 방안을 토의한다. 구 관계자는 “동교동 사저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선제적인 행보를 통해 사저가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지난달 12일 서울시 문화유산보존과로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 요청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20일에는 사저 인근 도로를 ‘김대중길’로 명명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구는 사저를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추진 중이며 이번 회의에서 보존 사업의 실질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강수 마포구청장은 “동교동 사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이념을 초월해 후손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상징적 장소로 보존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 충남도, ‘마곡사 굴피자리’ 등 문화유산 지정

    충남도, ‘마곡사 굴피자리’ 등 문화유산 지정

    충남도는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公州 麻谷寺 大光寶殿) 굴피자리’와 ‘부여 무량사 묘법연화경(扶餘 無量寺 妙法蓮華經)’을 각각 충청남도 문화유산으로 신규 지정했다고 2일 밝혔다. 굴피자리는 참나무의 두꺼운 껍질인 굴피를 가는 올로 쪼개어 엮은 자리(席)다.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굴피자리는 대광보전을 중수한 1782년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돼 역사성과 학술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도는 마곡사 대광보전 굴피자리 보존 처리 및 정밀 조사를 거쳐 국가유산 승격을 추진할 예정이다. 1493년 간행된 부여 무량사 묘법연화경은 7권 3책이 온전히 전해지고 있어 완전성이 높고 조선 전기 불서 간행과 목판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다. 도는 △천안 각원사 소조보살좌상 △백자청화 이기하 지석 △류명 청난원종공신녹권을 대상으로 충청남도 문화유산 지정 예고 했다.
  • 여수 영취산 흥국사 일원, 국가지정자연유산 명승 지정

    여수 영취산 흥국사 일원, 국가지정자연유산 명승 지정

    국가유산청은 ‘여수 영취산 흥국사 일원’을 국가지정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한다고 2일 밝혔다. 이곳은 수만 그루의 진달래가 모여 군락지를 이루고, 기암괴석과 수계(지표의 물이 점차 모여서 같은 물줄기를 이룬 것을 총칭)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산 정상부에서 골명재 벚나무 군락지와 남해안 다도해의 해상 풍경, 여수반도의 전경 등 다양한 풍경을 함께 조망할 수 있어 뛰어난 경관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이다. 영취산 기슭에 있는 흥국사는 조선시대 의승수군이 활약했던 호국불교의 상징적 장소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흥국의 염원을 이름에 담고 있다. 보물 ‘여수 흥국사 대웅전’, ‘여수 흥국사 홍교’ 등 다수의 문화유산이 남아있고, 동백나무 등 여러 수목이 자생하는 지역으로 자연경관이 잘 보존돼 있어 높은 역사문화적·학술적 가치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은 “여수시와 협력해 이번에 명승으로 지정된 여수 영취산 흥국사 일원을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마포구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 속도… 동교동 사저 보존 추진위 구성

    마포구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 속도… 동교동 사저 보존 추진위 구성

    서울 마포구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마포구는 3일 마포구청에서 ‘고(故) 김대중 대통령 동교동 사저 보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 동교동 사저의 보존과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논의한다. 이날 행사에는 김대중재단 관계자와 유족, 법률과 학계 전문가들이 참석하여 사저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보존을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을 논의한다. 구 관계자는 “교동 사저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상징적 공간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서 “선제적인 행보를 통해 사저가 단순한 역사적 유산을 넘어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해 지난달 12일에 서울특별시 문화유산보존과로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 요청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20일에는 사저 인근 도로를 ‘김대중길’로 명명하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구는 사저를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추진 중이며, 이번 회의를 통해 보존 사업의 실질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강수 마포구청장은 “동교동 사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이념을 초월해 후손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상징적 장소로 보존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 “정년이는 평생 여성국극 무대가 그리웠지”…90세 조영숙 명인[월요인터뷰]

    “정년이는 평생 여성국극 무대가 그리웠지”…90세 조영숙 명인[월요인터뷰]

    왕자가 된 소녀들의 무대. 1950년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을 다룬 tvN 드라마 ‘정년이’는 당시의 인기를 소환시켰다. 모티브가 된 ‘여성국극 1세대’ 조영숙(90) 명인을 만난 건 지난달 초 서울 북촌한옥마을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조 명인은 발탈(발에 탈을 쓰고 하는 전통 민속 연희)과 함께 여성국극 여러 대목을 풀어냈다. 서동과 헤어지는 선화공주가 돼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이몽룡을 만난 장모 월매로 변해 배꼽까지 웃겼다. 감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러 성큼 걸을 땐 굽었던 허리가 똑바로 펴진 듯했다. 지난달 28일 찾아간 서울 성북구 동선동 연습실에는 여성국극의 향수가 가득했다. 그는 1950년대 무대 아래 단체 사진을 보며 어제 일처럼 주·조연부터 악사들의 이름을 댔다. 처음 여성국극을 시작한 10대 소녀처럼, 당대 최고 남역(男役) 스타 임춘앵 여성국극동지사 대표를 여전히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에서 미러볼을 밀수해 설치할 정도로 완벽한 무대를 추구했던 시절”이라며 “여성국극 공연 소식은 전국에서 알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진도 조 명인을 면담해 제작에 참고했다. 그는 판소리 명창 조몽실(1900~1949)의 외동딸이다. 모친이 소리를 반대해 함경남도 원산에서 사범학교를 다녔다. 17세 6·25 전쟁통에 피란 온 전남 광주에서 우연히 구경한 여성국극이 시작이었다. 춘향전의 방자처럼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으로 유명했다. 텔레비전 보급 등으로 인기가 사그라진 후에는 관광요정과 밤무대에서 연기를 이어 가다 국가무형유산 발탈을 배워 2012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나이 78세의 일이다. 발탈에도 여성국극을 덧붙여 그만의 방식으로 승화시켰다. 지난 6월에는 제자들과 ‘조 도깨비 영숙’을 무대에 올렸다. 도깨비는 노래, 연극, 무용 등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던 어린 시절 별명이다. “73년이면 개구리도 개굴개굴 안 하고 한 소리 뽑겠다”고 눙치는 90세 예인. 그의 소망은 여성국극의 국가무형유산 인정이다. 본인은 이미 발탈 보유자다. 다름 아닌 제자들을 위해서다. 그는 “한평생 달려들었건만 힘만 빠졌다”며 “드라마의 인기가 정말 반가우나 우리 소리의 굵은 가지인 여성국극이 이어지려면 젊은 사람들이 기댈 언덕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여성국극을 시작한 계기는. “6·25 전쟁이 나고 원산에서 어머니 고향인 전남 화순까지 걸어서 갔다. 중도에 빨치산에게 붙잡혀 죽을 뻔하기도 했다. 광주에 사는 사촌 언니가 ‘여자들만 연극을 한단다’고 해서 가 보니 임춘앵 아줌마가 하던 여성국극동지사였다. 이북 말씨 때문에 돈도 못 버는 더부살이 처지에 숙식까지 제공한다니 반가워서 하겠다고 했다. 17세 때다. 비슷한 또래 김진진(여성국극 배우)이 임 선생님 조카였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나도 서울식으로 아줌마라고 부르게 됐다. 아버지처럼 소리꾼으로 키우지 않겠다며 학교를 보내 준 어머니는 크게 반대했었다. 그래도 곧잘 하는지 아줌마는 남자 대역을 시키려고 나를 가리켰다. 첫 무대는 ‘공주궁의 비밀’(1952년)에서 ‘군졸1’ 역이었다. 대사 두 마디였다. 이듬해에는 ‘황금돼지’에서 돼지 역할도 했다.” -전성기의 여성국극은. “통신이 없던 그 시대에도 여성국극단이 지방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은 전국이 다 알 정도였다. 가장 화려한 무대로는 아줌마 대역으로 견우 역할을 했던 ‘견우직녀’(1957년)가 기억난다. 황홀한 게, 일본에서 미러볼도 처음으로 밀수해 와 설치했다. 주인공만 걷는 ‘꽃길’ 무대장치도 만들었다. 연출은 당대 유명 연출가에게 맡겼다. 아줌마가 무대 욕심이 진짜 많았다. ‘경치가 좋아서 금강이더냐’라는 대목은 요즘도 부른다.” -여성국극과 다른 국악의 차이점은. “창극, 여성국극, 판소리 다 노래하는 법이 다르다. 뿌리는 한 뿌리인데 다른 가지다. 같은 선화공주의 서동이라도 내지르는 것부터가 다르다. 국극이 조금 더 설명조이면서도 감정이 담긴다. 손님에게 환영받으려면 함께 슬퍼서 눈물이 나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무대에선 너 자신을 버리고 맡은 역할이 되라고 한다.” -왜 여성국극이 무너졌나. “소리를 못해도 아무나 분칠하고 무대에 올랐다. 정말 싫었다.” -여성국극 무대가 사라지고 어떻게 지냈나. “1960년대 여성국악동인회는 신민요를 불렀다. 여성국극 무대를 올릴 힘은 이미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관광요정 중 풍림각에서 국악팀을 짜서 일했다. 한 번에 손님 300명 앞에서 화관무도 하고. 정치인들도 종종 왔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한 분은 ‘세상에 이렇게 조그만 무대에 설 분이 아닌데’라고 하더라. 고마운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고 야속했다. 내 노래는 한이 있어서 끈적하고 남을 울고 웃기는 재주가 있다. 손님들이 슬퍼서 울고 있으면 춘향전에서 나무꾼이 양반을 놀리는 ‘나무꾼막’으로 웃겼다.” -전남 진도까지 갔었다. “단칸방 신세에 돈 벌 데가 없으니 살길이 막막했다. 1970년에 지인이 진도에서 식당을 하자고 했다. 막상 서울식으로 요리하니 싱거워서 손님이 먹지도 않았다. 시골이니까 전부 외상이었다. 기가 막힐 일이 있었다. 거기서도 연극은 못 놓겠더라. 조상현씨에게 이도령을 맡겨 춘향전을 했었다. 내가 방자를 하고. 일류 악사까지 서울에서 데리고 왔는데 손님들이 전부 공짜 표였다. 결국 집에 한 푼이 없으니 악사들이 아들 저금통까지 들고 갔다. 좋아하는 연극 때문에 그런 꼴까지 견디고 살았다. 4년 있다가 아들도 크고 해서 맨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이사 다니다 대본을 다 잃어버려 아까울 뿐이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한 분은 ‘세상에 이렇게 조그만 무대에 설 분이 아닌데’라고 하더라. 고마운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고 야속했다.여성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 -여성국극 동료들은 뭐 하고 지냈나. “말하기 뭐하지만 예쁜 사람은 요정으로 빠지고 얼굴 못난 사람들은 나가라고 했다지. 약장수 가설무대에도 가고. 돈이 되니까. 한때 최고의 여성국극 배우 박미숙씨가 ‘같이 가 보자’ 해서 만나러 가 보니 글쎄 헝겊 지붕을 무대라고 하고 아래에서 밥을 해 먹고 있더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얼싸안고 통곡했다.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그래도 무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말이 관광요정이지 무대는 있었다. 처참한 생활을 했어도 비참하게는 안 살았다. 보험회사까지 다녀 봤다. 지인 집에 갔다가 치맛자락이 나오기 무섭게 철문이 닫히는데 마음이 쿵 가라앉더라. 아들 대학 보내야 하니 꽹과리 하나 들고 행사 많이 뛰었다. 김덕수 사물패랑 강강술래도 하고. 국악으로 밤무대도 뛰었다. 당시 서울타워 악단장이 잘 봐줘 성주풀이에 트럼펫도 배경으로 깔았다. 그러다 밤무대 돈도 매니저가 다 떼어먹어서 그만뒀다.” -국가무형유산 보유자가 된 발탈은 어떻게 시작했나. “종로 낙원상가 앞을 걷는데 진열장 안 TV에서 누군가가 ‘형님 조몽실 선생님의 딸 조영숙, 나한테 꼭 찾아오너라’ 하는 거다. 이동안 선생님이 무형문화재가 되고 한 인터뷰였다. 찾아가 보니 발탈을 같이하자고 했다. 대본을 보니까 괜찮겠더라. 남도민요 정수 육자배기에 경기민요, 꼽사리 춤, 비나리까지 있다. 성음이 다 다르니 차원이 높고 어렵다. 나는 여성국극 방식으로 성음을 조금 바꿨다.” -여성국극이 왜 다시 주목받는 것 같나. “우리가 완벽한 무대를 완성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전통과 새로운 것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양반 대감집네끼리 싸우는 걸로 바꿔 ‘청실홍실’(1954)로 올렸다. 연기자들의 실력, 무대 형태는 창극보다는 더 굵은 가지다. 국가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어렵다면 서울시가 나서야 한다. 발탈 공연 뒤에 토막극을 붙이고 연명하며 한평생 달려들었지만 힘만 빠졌다. 여성국극은 실력으로 하는 거다. 드라마의 인기가 정말 반가우나 우리 소리의 굵은 가지인 여성국극이 이어지려면 젊은 사람들이 기댈 언덕이 필요하다.” 처참한 생활을 했어도 비참하게는 안 살았다 …요즘은 여성국극을 끝까지 붙잡고 있기를 잘했구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정년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조영숙 명인 -제자들이 여성국극을 하고 있다. “어려서 국악을 배우겠다고 온 친구들이다. 기특하다. 제자들도 다른 데서 돈 벌어 여성국극에 쏟아붓고 있다. 그래서 좀더 잘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한 거다. 개구리도 73년이면 개굴개굴 안 하고 한 소리 뽑겠다. 눈물 쏙 빼고, 배꼽 쑥 내놓게 웃겨야 한다.” -드라마는 봤나. 윤정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종화를 울면서 봤다. 마지막에 남도민요가 아니라 살짝 비튼 서도민요를 한 게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여성국극 무대가 항상 그리웠다. 그래도 여성국극을 했기에 50대에 시작한 발탈을 빨리 소화했던 것 같다. 요즘은 여성국극을 끝까지 붙잡고 있기를 잘했구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정년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 “젊은 배우들 기댈 언덕 필요… 여성국극 국가문화유산 되어야”[월요인터뷰]

    “젊은 배우들 기댈 언덕 필요… 여성국극 국가문화유산 되어야”[월요인터뷰]

    판소리 명창 조몽실 딸로 태어나모친 소리 반대로 사범학교 다녀17살 때 피란 온 광주서 보고 빠져미러볼 밀수해 달 만큼 최고 무대50년대 붐 이후 TV 등에 사양길관광요정·밤무대 전전하며 공연악사들이 아들 저금통도 들고 가‘발탈’ 배워서 무형유산 보유자로우리 소리 굵은 가지인 여성국극제자들 다른 데서 번 돈 부어 연명드라마 ‘정년이’ 최종화 울면서 봐끝까지 붙잡고 있길 잘했다 생각왕자가 된 소녀들의 무대. 1950년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을 다룬 tvN 드라마 ‘정년이’는 당시의 인기를 소환시켰다. 모티브가 된 ‘여성국극 1세대’ 조영숙(90) 명인을 만난 건 지난달 초 서울 북촌한옥마을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조 명인은 발탈(발에 탈을 쓰고 하는 전통 민속 연희)과 함께 여성국극 여러 대목을 풀어냈다. 서동과 헤어지는 선화공주가 돼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이몽룡을 만난 장모 월매로 변해 배꼽 빠지게 웃겼다. 감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러 성큼 걸을 땐 굽었던 허리가 똑바로 펴진 듯했다. 지난달 28일 찾아간 서울 성북구 동선동 연습실에는 여성국극의 향수가 가득했다. 그는 1950년대 무대 아래 단체 사진을 보며 어제 일처럼 주·조연부터 악사들의 이름을 댔다. 처음 여성국극을 시작한 10대 소녀처럼, 당대 최고 남역(男役) 스타 임춘앵 여성국극동지사 대표를 여전히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에서 미러볼을 밀수해 설치할 정도로 완벽한 무대를 추구했던 시절”이라며 “여성국극 공연 소식은 전국에서 알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진도 조 명인을 면담해 제작에 참고했다. 그는 판소리 명창 조몽실(1900~1949)의 외동딸이다. 모친이 소리를 반대해 함경남도 원산에서 사범학교를 다녔다. 17세 6·25 전쟁통에 피란 온 전남 광주에서 우연히 구경한 여성국극이 시작이었다. 춘향전의 방자처럼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으로 유명했다. 텔레비전 보급 등으로 인기가 사그라진 후에는 관광요정과 밤무대에서 연기를 이어 가다 국가무형유산 발탈을 배워 2012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나이 78세의 일이다. 발탈에도 여성국극을 덧붙여 그만의 방식으로 승화시켰다. 지난 6월에는 제자들과 ‘조 도깨비 영숙’을 무대에 올렸다. 도깨비는 노래, 연극, 무용 등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던 어린 시절 별명이다. “73년이면 개구리도 개굴개굴 안 하고 한 소리 뽑겠다”고 눙치는 90세 예인. 그의 소망은 여성국극의 국가무형유산 인정이다. 본인은 이미 발탈 보유자다. 다름 아닌 제자들을 위해서다. 그는 “한평생 달려들었건만 힘만 빠졌다”며 “드라마의 인기가 정말 반가우나 우리 소리의 굵은 가지인 여성국극이 이어지려면 젊은 사람들이 기댈 언덕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여성국극을 시작한 계기는. “6·25 전쟁이 나고 원산에서 어머니 고향인 전남 화순까지 걸어서 갔다. 중도에 빨치산에게 붙잡혀 죽을 뻔하기도 했다. 광주에 사는 사촌 언니가 ‘여자들만 연극을 한단다’고 해서 가 보니 임춘앵 아줌마가 하던 여성국극동지사였다. 이북 말씨 때문에 돈도 못 버는 더부살이 처지에 숙식까지 제공한다니 반가워서 하겠다고 했다. 17세 때다. 비슷한 또래 김진진(여성국극 배우)이 임 선생님 조카였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나도 서울식으로 아줌마라고 부르게 됐다. 아버지처럼 소리꾼으로 키우지 않겠다며 학교를 보내 준 어머니는 크게 반대했었다. 그래도 곧잘 하는지 아줌마는 남자 대역을 시키려고 나를 가리켰다. 첫 무대는 ‘공주궁의 비밀’(1952년)에서 ‘군졸1’ 역이었다. 대사 두 마디였다. 이듬해에는 ‘황금돼지’에서 돼지 역할도 했다.” -전성기의 여성국극은. “통신이 없던 그 시대에도 여성국극단이 지방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은 전국이 다 알 정도였다. 가장 화려한 무대로는 아줌마 대역으로 견우 역할을 했던 ‘견우직녀’(1957년)가 기억난다. 황홀한 게, 일본에서 미러볼도 처음으로 밀수해 와 설치했다. 주인공만 걷는 ‘꽃길’ 무대장치도 만들었다. 연출은 당대 유명 연출가에게 맡겼다. 아줌마가 무대 욕심이 진짜 많았다. ‘경치가 좋아서 금강이더냐’라는 대목은 요즘도 부른다.” -여성국극과 다른 국악의 차이점은. “창극, 여성국극, 판소리 다 노래하는 법이 다르다. 뿌리는 한 뿌리인데 다른 가지다. 같은 선화공주의 서동이라도 내지르는 것부터가 다르다. 국극이 조금 더 설명조이면서도 감정이 담긴다. 손님에게 환영받으려면 함께 슬퍼서 눈물이 나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무대에선 너 자신을 버리고 맡은 역할이 되라고 한다.” -왜 여성국극이 무너졌나. “소리를 못해도 아무나 분칠하고 무대에 올랐다. 정말 싫었다.” -여성국극 무대가 사라지고 어떻게 지냈나. “1960년대 여성국악동인회는 신민요를 불렀다. 여성국극 무대를 올릴 힘은 이미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관광요정 중 풍림각에서 국악팀을 짜서 일했다. 한 번에 손님 300명 앞에서 화관무도 하고. 정치인들도 종종 왔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한 분은 ‘세상에 이렇게 조그만 무대에 설 분이 아닌데’라고 하더라. 고마운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고 야속했다. 내 노래는 한이 있어서 끈적하고 남을 울고 웃기는 재주가 있다. 손님들이 슬퍼서 울고 있으면 춘향전에서 나무꾼이 양반을 놀리는 ‘나무꾼막’으로 웃겼다.” -전남 진도까지 갔었다. “단칸방 신세에 돈 벌 데가 없으니 살길이 막막했다. 1970년에 지인이 진도에서 식당을 하자고 했다. 막상 서울식으로 요리하니 싱거워서 손님이 먹지도 않았다. 시골이니까 전부 외상이었다. 기가 막힐 일이 있었다. 거기서도 연극은 못 놓겠더라. 조상현씨에게 이도령을 맡겨 춘향전을 했었다. 내가 방자를 하고. 일류 악사까지 서울에서 데리고 왔는데 손님들이 전부 공짜 표였다. 결국 집에 한 푼이 없으니 악사들이 아들 저금통까지 들고 갔다. 좋아하는 연극 때문에 그런 꼴까지 견디고 살았다. 4년 있다가 아들도 크고 해서 맨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이사 다니다 대본을 다 잃어버려 아까울 뿐이다.” -여성국극 동료들은 뭐 하고 지냈나. “말하기 뭐하지만 예쁜 사람은 요정으로 빠지고 얼굴 못난 사람들은 나가라고 했다지. 약장수 가설무대에도 가고. 돈이 되니까. 한때 최고의 여성국극 배우 박미숙씨가 ‘같이 가 보자’ 해서 만나러 가 보니 글쎄 헝겊 지붕을 무대라고 하고 아래에서 밥을 해 먹고 있더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얼싸안고 통곡했다.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그래도 무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말이 관광요정이지 무대는 있었다. 처참한 생활을 했어도 비참하게는 안 살았다. 보험회사까지 다녀 봤다. 지인 집에 갔다가 치맛자락이 나오기 무섭게 철문이 닫히는데 마음이 쿵 가라앉더라. 아들 대학 보내야 하니 꽹과리 하나 들고 행사 많이 뛰었다. 김덕수 사물패랑 강강술래도 하고. 국악으로 밤무대도 뛰었다. 당시 서울타워 악단장이 잘 봐줘 성주풀이에 트럼펫도 배경으로 깔았다. 그러다 밤무대 돈도 매니저가 다 떼어먹어서 그만뒀다.” -국가무형유산 보유자가 된 발탈은 어떻게 시작했나. “종로 낙원상가 앞을 걷는데 진열장 안 TV에서 누군가가 ‘형님 조몽실 선생님의 딸 조영숙, 나한테 꼭 찾아오너라’ 하는 거다. 이동안 선생님이 무형문화재가 되고 한 인터뷰였다. 찾아가 보니 발탈을 같이하자고 했다. 대본을 보니까 괜찮겠더라. 남도민요 정수 육자배기에 경기민요, 꼽사리 춤, 비나리까지 있다. 성음이 다 다르니 차원이 높고 어렵다. 나는 여성국극 방식으로 성음을 조금 바꿨다.” -여성국극이 왜 다시 주목받는 것 같나. “우리가 완벽한 무대를 완성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전통과 새로운 것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양반 대감집네끼리 싸우는 걸로 바꿔 ‘청실홍실’(1954)로 올렸다. 연기자들의 실력, 무대 형태는 창극보다는 더 굵은 가지다. 국가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어렵다면 서울시가 나서야 한다. 발탈 공연 뒤에 토막극을 붙이고 연명하며 한평생 달려들었지만 힘만 빠졌다. 여성국극은 실력으로 하는 거다. 드라마의 인기가 정말 반가우나 우리 소리의 굵은 가지인 여성국극이 이어지려면 젊은 사람들이 기댈 언덕이 필요하다.” -제자들이 여성국극을 하고 있다. “어려서 국악을 배우겠다고 온 친구들이다. 기특하다. 제자들도 다른 데서 돈 벌어 여성국극에 쏟아붓고 있다. 그래서 좀더 잘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한 거다. 개구리도 73년이면 개굴개굴 안 하고 한 소리 뽑겠다. 눈물 쏙 빼고, 배꼽 쑥 내놓게 웃겨야 한다.” -드라마는 봤나. 윤정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종화를 울면서 봤다. 마지막에 남도민요가 아니라 살짝 비튼 서도민요를 한 게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여성국극 무대가 항상 그리웠다. 그래도 여성국극을 했기에 50대에 시작한 발탈을 빨리 소화했던 것 같다. 요즘은 여성국극을 끝까지 붙잡고 있기를 잘했구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정년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 검찰, ‘레고랜드 관련 배임 혐의’ 최문순 전 강원지사 소환조사

    검찰, ‘레고랜드 관련 배임 혐의’ 최문순 전 강원지사 소환조사

    강원도 춘천 레고랜드 조성 사업과 관련해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를 받는 최문순 전 강원도지시가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있다. 춘천지방검찰청은 29일 오후부터 최 전 지사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검찰은 지난 12일 도청 감사위원회, 투자유치과, 문화유산과 등 3곳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최 전 지사는 2018년 레고랜드 조성 사업 당시 사업을 맡은 강원중도개발공사에 GJC(당시 엘엘개발)가 영국 멀린사에 800억원을 지원하도록 지시해 GJC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강원도의 임대수익이 30.8%에서 3%로 줄어든 사실과 2014년 도의회 의결을 얻지 않고 채무보증 규모를 210억원에서 2050억원으로 늘리는 과정에 대해 제기된 문제점 등의 의혹도 있다. 앞선 2022년 11월 국민의힘은 최 전 지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업무상 배임, 직권남용, 직무 유기 등의 혐의로 강원경찰청에 고발했다. 경찰은 지난 1월 최 전 지사를 피고발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고,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 새해 소망 적어 돌문화공원 ‘소원탑’에 걸어보세요

    새해 소망 적어 돌문화공원 ‘소원탑’에 걸어보세요

    제주돌문화공원이 새해 소망을 적어 탑에 매달며 기원하는 소원탑을 만든다. 29일 제주돌문화공원에 따르면 한 해를 마무리하고 2025년 새해를 맞는 소망을 기원하는 특별한 ‘소원탑’ 만들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연말연시를 맞아 방문한 관람객들이 소원을 적어 직접 탑에 매달며 서로의 소망을 응원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획됐다. 29일부터 내년 초까지(휴무일인 매주 월요일은 제외) 제주돌문화공원 방문객은 누구나 소원지를 작성 후 소원탑에 매달수 있다. 이번 ‘소원탑’ 프로그램은 전통 제주 돌문화의 상징성과 연말연시에만 느낄 수 있는 소망을 담아 낸 특별한 체험으로, 제주돌문화공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돌탑을 활용한다. 참여자들은 자신만의 소망을 적은 소원지를 소원들을 밝힌 돌탑에 매달며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이번 프로그램은 아기오백장군 돌탑에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직접 소원지를 매달아 보는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소원탑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는 소원지를 모두 모아 2025년 4월에 개최되는‘제주 돌챙이 축제’에서 제주도 민속 문화유산인 방사탑을 만들고 탑 안에 소원지를 묻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행사도 진행하게 될 예정이다. 제주돌문화공원 관계자는 “제주도의 신화와 문화를 간직한 특별한 장소인 돌문화공원에서 연말연시의 따뜻한 의미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소망을 나누고 기원하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며 “제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살린 프로그램을 통해 행복한 추억을 남기길 바란다”고 전했다. 제주돌문화공원은 제주도 창조의 여신인 설문대할망과 그녀의 아들 오백장군을 주제로 하여 제주 돌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담은 대표적인 문화 관광지다. 설문대할망의 전설은 제주탄생신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신화속 여신 설문대할망은 거인으로 묘사된다.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한 발은 성산일출봉에, 또 한발은 현재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할 정도다. 제주의 368개의 많은 오름들도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 흘러 생겼으며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것이 한라산이 됐다고 전해진다. 다양한 전시와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제주 고유의 문화적 가치와 전통을 널리 알리고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은 연간 관람객수가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 ‘금강 첫물’ 장수군 뜬봉샘·수분마을, 국가생태관광지역 지정

    ‘금강 첫물’ 장수군 뜬봉샘·수분마을, 국가생태관광지역 지정

    전북 장수군이 국가 대표 자연 생태 우수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장수군은 지난 27일 환경부의 ‘2024년 국가생태관광지역’에 ‘금강첫물 뜬봉샘’과 ‘수분마을’이 신규 지정됐다고 28일 밝혔다. 국가 생태관광지역은 환경 측면에서 보전 가치가 있고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체험·교육할 수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협의로 지정되며 이번 신규 생태관광지역은 장수군을 포함한 5곳이다. 이번 지정으로 금강첫물 뜬봉샘과 수분마을은 생태관광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 생태관광 기반 시설 관리, 지역협의체 구성 및 주민 교육, 홍보활동 등 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 추진을 위해 내년부터 3년간 환경부의 국비 지원을 받게 된다. 장수군은 또 생태탐방로, 에코촌 등 관련 인프라 확충 사업에도 국가의 우선 지원을 받아 보다 완성도 높은 생태관광 환경을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금강첫물 뜬봉샘과 수분마을은 금남호남정맥인 신무산을 중심으로 보전산지(수원함양림)로 지정된 곳이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수달, 2급인 수리부엉이, 하늘다람쥐, 세뿔투구꽃, 1급 지표수종 옆새우 등 총 1348종의 야생동식물이 서식해 ‘생물다양성의 보고’로도 불린다. 여기에 전국 최남단 자작나무 숲과 수국정원 등이 조성돼 다양한 생태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근대문화유산인 ‘수분공소’ 등을 간직하고 있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설화 및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도 지정돼 우수한 인문학적 생태관광지로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 최훈식 장수군수는 “청정 생태자원의 보고인 ‘금강첫물 뜬봉샘과 수분마을이 국가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받음으로써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장수의 천혜의 자연환경과 가치를 알리고 지역주민과 협력해 생태관광을 활성화하여 자연생태계 보전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강진 청자 ‘大平명’ 양각해석류화문와, 문화유산 지정

    강진 청자 ‘大平명’ 양각해석류화문와, 문화유산 지정

    전라남도는 고려 전기 청자 제작소인 강진 사당리 발굴품 강진 청자 ‘大平명’ 양각해석류화문와를 도 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 고시하고, 곡성 태안사 금고와 사적기 일괄, 순천 환선정 현판을 지정 예고했다. 강진 청자 ‘大平명’ 양각해석류화문와는 강진 청자 요지인 사당리 발굴품으로 휘어진 모양의 청자로, 이런 형태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확인되지 않아 희소성이 매우 높다. 청자의 바깥면에는 해석류화문(海石榴華文/동백꽃문양)과 뇌문(雷文)이 시문 돼 아름답고 우수한 조각 기법을 엿볼 수 있다. 내면에는 ‘大平’이라는 명문이 음각돼 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곡성 태안사 금고(谷城 泰安寺 金鼓/쇠로 된 북)는 사찰 의식 법구 중 하나로 측면 음각을 통해 제작연대(1770년), 봉안 지역의 사찰, 제작자를 알 수 있다. 크기가 대형이고 조형미와 문양의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 불교 공예사·역사적 지정 가치가 높다. 곡성 태안사 사적기 일괄(谷城 泰安寺 事蹟記 一括)은 태안사 기록에 관한 자료들로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필사본 문적이다. 태안사 각 전각의 내력을 알 수 있고, 역대 주지 스님과 그 시대의 불사, 사찰 운영 등을 알 수 있어 불교문화사와 향촌사회의 측면에서 역사적 학술 가치가 크다. 순천 환선정 현판(順天 喚仙亭 懸板)은 2매로 정자 명칭을 새긴 편액으로 조선시대(1543년) 순천도호부사 심통원이 휴식과 정무 공간으로 지은 환선정에 1613년 배대유가, 1886년에 순천 부사 이범진이 쓴 현판이다. 각 현판은 서체가 웅건하고 활달하며 크기가 대형으로 서예사적·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김지호 전남도 문화자원과장은 “강진 청자‘大平명’ 양각해석류화문와는 현재 출토 사례가 없는 희귀한 유산이므로, 향후 국가유산 지정을 추진하겠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 문화자원을 지속해서 조사해 후대에 보전토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남도는 지정 예고 문화유산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 의견을 수렴해 검토한 후 문화재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 [씨줄날줄] 日 훼손 문화유산의 가치

    [씨줄날줄] 日 훼손 문화유산의 가치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기 이전 고려왕조의 무장으로 1380년 남원 황산에서 왜구 대부대를 섬멸한 전투를 이른다. 왜구는 500척 남짓한 선단으로 금강 하구에 몰려들었는데 최무선이 화포로 모두 불사르자 내륙을 떠돌다 황산에서 대패했다. 일제는 1945년 1월 황산대첩비의 글자를 쪼아내고 몸돌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앞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1943년 경무국에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오랜 교류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조각난 황산대첩비의 잔해는 지금도 1957년 다시 세운 대첩비 보호각의 내부 바닥에 흩어진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일제는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는 네 동강 냈고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는 파괴해 땅에 묻었다. 해남 충무공 명량대첩비도 파묻은 것을 광복 이후 제자리에 다시 세웠다. 금산의 칠백의총 조헌 일군순의비는 훼손된 것을 복원했고, 의병장 고경명순절비와 권율 이치대첩비는 폭파된 당시 모습 그대로다. 더 큰 문제는 일제가 훼손한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가치판단이다. 황산대첩비 일대는 1963년 대첩비지(址)라는 이름의 사적으로 지정됐다. 비석은 조각났으니 터를 국가유산으로 지정했다는 뜻이다. 파괴됐다는 이유로 일군순의비, 고경명순절비, 이치대첩비도 국가는 물론 지자체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지 않으니 안타깝다. 이제라도 훼손됨으로써 역사적 가치는 오히려 높아졌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당시 파괴된 기념물을 한데 모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역사유산을 무도하게 파괴한 증거는 전 세계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나라를 지킨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사도광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없어요).” 지난 25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한 행사장에선 한평생 거친 바다를 밭 삼아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 온 삼춘(어른을 뜻하는 제주 방언) 해녀 11명의 은퇴식이 열렸다. 가족을 위해 평생 물질을 해야 했던 해녀들의 헌신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자리다. 사단법인 제주해녀문화예술연구협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엔 고순신(85), 김대순(85), 김순희(87), 김실지(82), 김영제(88), 김옥순(75), 김춘자(82), 백찬옥(85), 송순선(89), 오죽향(89), 유춘선(87)씨 등 11명이 참석했다. 해녀는 제주 여성의 역사이자 삶이다. 척박한 땅에서 물질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고단한 노동이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제주 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2017년엔 국가무형문화재(132호)로도 이름을 올렸다. 협회는 ‘사라지는 제주의 유산들’을 기리기 위해 은퇴식을 열고 있다. 지난 5월과 10월 각각 한림읍 귀덕2리와 구좌읍 하도리에서 은퇴식을 진행했고 이번이 세 번째다. 이날 한국걸스카우트는 은퇴 해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명예지도자증을 헌정했다. 최고령 은퇴자인 송순선씨는 지도자증을 받으며 “스무 살 전에 해녀를 시작해 70년 넘게 물질만 하고 살았다. 평생 오늘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없어요).” 지난 25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한 행사장에선 한평생 거친 바다를 밭 삼아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온 삼춘(어른을 뜻하는 제주 방언) 해녀 11명의 은퇴식이 열렸다. 가족을 위해 평생 물질을 해야 했던 해녀들의 헌신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자리다. 세계적으로 해녀는 제주도와 일본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사단법인 제주해녀문화예술연구협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엔 고순신(85), 김대순(85), 김순희(87), 김실지(82), 김영제(88), 김옥순(75), 김춘자(82), 백찬옥(85), 송순선(89), 오죽향(89), 유춘선(87) 씨 등 11명이 참가했다. 삼춘 해녀들을 자신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해녀는 제주 여성의 역사이자 삶이다. 척박한 땅에서 물질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고단한 노동이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제주 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2017년엔 국가무형문화재(132호)로도 이름을 올렸다. 말이 좋아 문화재지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거는 노동이다. 그래서 ‘해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저승으로 들어가고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때 2만명이 넘었던 제주 해녀는 지난해 말 기준 2800명까지 줄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70대 이상 고령 해녀다. 매년 300명 은퇴하지만 물질을 하겠다고 나서는 젊은 이는 한해 30명도 안된다. 협회는 ‘사라지는 제주의 유산들’을 기리기 위해 은퇴식을 열고 있다. 지난 5월과 10월 각각 한림읍 귀덕2리와 구좌읍 하도리에서 은퇴식을 진행했고 이번이 세 번째다. 이날 한국걸스카우트는 은퇴 해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명예지도자증을 헌정했다. 최고령 은퇴자인 송순선(89)씨는 지도자증을 받으며 “스무살 전에 해녀를 시작해 70년 넘게 물질만 하고 살았다”며 “평생 오늘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양종훈 제주해녀문화협회 이사장은 “등에 관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고된 직업이 해녀”라면서 “앞으로도 제주 해녀 문화를 보존하고 이어가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

    한림읍 수원리 해녀 11명 은퇴식 열려등에 관 짊어지고 들어가는 직업이 해녀90세 해녀 “한평생 오늘처럼 기쁜 날 없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어수다(없어요).” 지난 25일 서귀포시 안덕면 소재 플레이사계에서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 은퇴하는 해녀삼춘들의 이름이 한분 한분 불려졌다. 고순신(85), 김대순(85), 김순희(87), 김실지(82), 김영제(88), 김옥순(75), 김춘자(82), 백찬옥(85), 송순선(89), 오죽향(89), 유춘선(87) 씨. 플래카드에 쓰인 은퇴식 문구처럼 ‘바다가 기억할 마지막 숨비소리’의 주인공들이었다. 제주도 한림읍 수원리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제주해녀문화협회가 주관하는제3회 해녀 은퇴식에서 이름을 부르며 공로상을 수여하자 해녀들은 참았던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평생 물질했던 헌신에 감사하며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금세 눈물바다가 웃음바다가 됐다. 송순선(89)씨는 “스무살 전에 해녀를 시작해 70년간 물질만 하고 살았다”며 “오늘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협회는 지난 5월 한림읍 귀덕2리에서 첫 ‘해녀은퇴식’을 한 이후 10월에는 구좌읍 하도리에서 두 번째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해녀은퇴식이다. 오영훈 제주지사를 대신해 배우자인 박선희 여사는 “은퇴해녀 분들의 그 동안의 노고와 헌신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다른 어촌계 해녀 삼춘들의 은퇴식도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인사를 전했다. 한국걸스카우트에서는 은퇴 해녀들에게 명예지도자증을 헌정하기도 했다. 김종희 한국 걸스카우트 총재는 “명예지도자증을 받는 해녀삼춘들이 제주도 걸스카우트 대원들에게 해녀의 공동체 삶에 대해 강의를 해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해녀들은 실제 걸스카우트 대원들에게 강연할 것으로 알려졌다. 해녀서포터즈 염준희(제주국제학교 SJA) 학생은 제주해녀 문화를 세계로 널리 알리기 위해 영어로 답사를 해 눈길을 끌었다. 축하공연에서 중문어촌계 강옥래의 아리랑이 울려 펴지자 은퇴해녀들과 귀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춤을 추는 따뜻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 해녀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에 등재돼 관심을 끌지만 제주해녀들은 여전히 목숨을 내걸고 바다에 들어간다. 그래서 ‘해녀들은 먹고 살기위해 저승으로 들어가고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양종훈 제주해녀문화협회 이사장은 “해녀들은 등에 관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직업”이라며 “앞으로도 제주 해녀 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다양한 활동과 함께 제주 해녀들의 삶과 역사를 널리 알리는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한편 12월 9일에는 제주시 한림읍 금능어촌계, 월령어촌계 해녀들의 은퇴식이 예정돼 있다. 이날 은퇴식에서는 90세 해녀들이 새내기 해녀들에게 물질하며 썼던 물건들을 증정할 예정이다.
  • “반일병 지긋지긋하다”는 日…서경덕 “역사왜곡이 더 지긋지긋”

    “반일병 지긋지긋하다”는 日…서경덕 “역사왜곡이 더 지긋지긋”

    일본 우익 성향 매체인 산케이신문이 지난 24일 열린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추도식에 한국 정부가 불참한 것을 두고 “한국의 반일병(病)은 지긋지긋하다”고 맹비난한 데 대해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일본의 역사왜곡이 지긋지긋하다”고 일침했다. 서 교수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잘 아시듯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이라면서 “이런 곳을 참배하는 것은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꼴 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그러면서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 왜곡병이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면서 “그 중심에는 늘 산케이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케이는 한일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언론으로서의 기본적인 정도(正道)를 지키길 바란다”면서 “역사를 올바르게 대하는 자세부터 배워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산케이신문은 지난 26일 ‘한국의 반일병은 어이없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사도광산 추도식에 한국 정부가 불참한 배경으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이 과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언론 보도로 자국 내 반발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산케이신문은 그러면서 “일본 정치인이 전몰자를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고 외국으로부터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산케이신문은 그러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국회의원이 정부 요직에 취임하는 것은 예삿일”이라며 한국 정부가 일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의지가 없다고 비난했다. 서경덕 “日, 조선인 ‘강제노역’ 표현 안 해” 앞서 서 교수는 일본이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 노동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조선인을 비하하는 내용의 전시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최근 사도광산을 답사하고 돌아왔는데,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서도 조선인의 가혹한 노동은 기술돼 있지만 ‘강제성’ 표현은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반도인(조선인)은 원래 둔하고 기능적 재능이 극히 낮다’, ‘반도인 특유의 불결한 악습은 바뀌지 않아’ 등 오히려 조선인을 비하하는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군함도 등재 당시 일본은 희생자를 기리는 정보센터 설치를 약속했지만, 센터를 현장이 아닌 1000㎞ 떨어진 도쿄에 설치하고 강제성을 부인하는 자료를 전시하는 것에 이어 또 뒤통수를 맞은 꼴”이라고 비판했다. 서 교수는 이같은 일본의 행태를 유네스코 측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쪽짜리’ 추도식 놓고 신경전 사도광산 추도식은 일본 사도광산에서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개최되는 행사다.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일본 정부가 약속한 후속 조치 중 하나다. 당초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서 차관급 정무관이 참석할 것을 요청해왔는데, 일본 측 참석자인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이 2022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일본 교도통신 보도가 문제가 됐다. 다만 추도식 이후 교도통신은 이쿠이나 정무관이 취임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보도했다며 오보를 인정했다. 한국 외교부는 추도식 하루 전인 23일 불참을 결정하고는 그 배경에 대해 “양국 외교 당국 간 이견 조정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치 않아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추도사 등 협의 과정에서 일본의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인근 아이카와 개발종합센터에서 한국 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반쪽짜리’ 추도식을 열었다. 우리 정부는 다음날 사도섬 사도광산 인근에 남아 있는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외교부 주최로 별도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식 이후에도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신경전을 벌였다. 한국의 추도식 ‘보이콧’에 대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25일 “한국 정부와 정중한 의사소통을 해 왔는데 안타깝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또 이쿠이나 정무관의 추도식 참석에 대해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외교부는 이날 밤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유감을 표명했다. 외교부는 “이 문제가 더 이상 불필요한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고, 개별 사안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긴밀히 소통할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 외교부 “사도광산 추도식 日 태도에 유감 표명”

    외교부 “사도광산 추도식 日 태도에 유감 표명”

    외교부는 26일 첫 사도광산 추도식이 ‘반쪽’으로 열린 것과 관련해 전날 일본 측에 ‘유감 표명’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추도식 논란이 한일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일본 측과 소통하겠다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전날 밤 외교부 당국자가 주한일본대사관을 접촉해 그간 협의 과정에서 일본이 보여 준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고 공개했다. 강인선 외교부 2차관도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일본 주최 추도식에 우리 측이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당초 한일 간 합의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는 추도식을 일본이 개최하는 것에 대해 우리 정부가 강하게 항의를 한 것”이라며 “일본 측이 제시한 최종 추도식 계획은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한일 간 합의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전날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우리가 먼저 추도식에 불참하며 항의를 강하게 한 것이고 그에 대해 일본 측이 유감 표명을 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외교부가 유감 표명 사실을 밝힌 것은 최근 추도식 논란을 둘러싸고 일본의 거듭된 무성의에도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국내의 비판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회의를 계기로 이탈리아 피우지에서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대신과 약식회담을 갖고 사도광산 추도식으로 불거진 문제가 양국 관계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고 이제까지 가꿔 온 양국 협력의 긍정적 모멘텀을 이어 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일본 측도 한일 간 협력에 방점을 두는 모습이다. 하야시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전략 환경하에서 한일이 긴밀히 협력해 나가는 것은 쌍방의 이익에 있어 중요하다”며 “한국 측과 계속 긴밀히 의사소통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교도통신이 일본 정부 대표로 추도식에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보도문을 낸 것에 대해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보도가 이뤄져 추도식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이날 오전 도쿄에서 특파원 간담회를 갖고 사도광산 문제에 대해 “어제 일한의원연맹 회장인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를 만나 유감 표시를 했다”고 밝혔다.
  • ‘반쪽짜리 추도식’에 적반하장 日…외교부 “유감 표명”

    ‘반쪽짜리 추도식’에 적반하장 日…외교부 “유감 표명”

    외교부는 지난 24일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에 대해 한일 간 협의 과정에서 일본이 보인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고 26일 밝혔다. 외교부는 이날 기자단에 보낸 공지를 통해 “외교부 당국자가 전날 주한일본대사관 측과 접촉해 입장을 전달했다”면서 “이 문제가 더 이상 불필요한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고, 개별 사안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긴밀히 소통할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 24일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강제 노역했던 사도광산 유적이 위치한 니가타현 사도시에서 노동자 추도식을 열었다.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일본 측은 사도광산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 대한 추도식을 매년 열기로 우리 정부에 약속했다. 당초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서 차관급 정무관이 참석할 것을 요청해왔는데, 일본 측 참석자인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이 2022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일본 교도통신 보도가 문제가 됐다. 다만 추도식 이후 교도통신은 이쿠이나 정무관이 취임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보도했다며 오보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쿠이나 정무관 논란을 제외하고도 추도사에 조선인 강제징용을 어떤 식으로 언급할지, 조선인을 위로하는 내용이 담길지도 불투명했으며, 한국 유가족의 추도식 참석 경비를 한국 외교부가 부담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우리 정부는 추도식 전날인 지난 23일 “양국 외교 당국 간 이견 조정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치 않다”며 추도식에 불참한다고 밝혔고, 추도식은 우리 정부 측 인사가 불참한 가운데 이뤄졌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주최한 추도식을 ‘보이콧’하고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 인근에 남아 있는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외교부 주최로 별도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식이 ‘반쪽짜리’로 진행된 데 대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 정부와 정중한 의사소통을 해 왔는데 안타깝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또 이쿠이나 정무관의 추도식 참석에 대해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외교부는 “자체 추도 행사를 개최한 것은 과거사에 대해서는 일본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 표현”이라고 밝혔지만, ‘반쪽짜리’ 추도식을 한국 탓으로 돌리는 듯한 일본 측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 또, 또 적반하장 일본…“韓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 어이 없다”

    또, 또 적반하장 일본…“韓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 어이 없다”

    일본 우익 성향 매체인 산케이신문이 사도광산 추도식 한국 정부 불참에 대해 “한국의 반일병은 지긋지긋하다”고 강하게 비난하며 적반하장식 주장을 펼쳤다. 신문은 26일 “한국의 반일병은 어이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 측의 불참 사유를 문제 삼았다. 사도광산 추도식은 일본 사도광산에서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개최되는 행사다.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일본 정부가 약속한 후속 조치 중 하나다. 산케이신문은 한국 정부가 불참한 배경으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따른 한국 내 반발 정서를 지목했다. 신문은 “일본 정치인이 전몰자를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고 외국으로부터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신문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국회의원이 정부 요직에 취임하는 것은 예삿일”이라며 한국 정부가 일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의지가 없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연내 방한 예정인 나카타니 겐 방위상도 200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압박했다. 반면 한국 외교부는 추도식 하루 전인 23일 불참을 결정하고는 그 배경에 대해 “양국 외교 당국 간 이견 조정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치 않아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추도사 등 협의 과정에서 일본의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양국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수용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지지율이 20% 안팎으로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 [씨줄날줄] ‘근대 유산 도시’ 유감

    [씨줄날줄] ‘근대 유산 도시’ 유감

    소설가 채만식(1902~1950)의 ‘탁류’는 전북 군산이 배경이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지대가 맞닿은 군산항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전진기지였다. ‘탁류’는 무자비한 수탈과 흥청거리는 지역경제에 걸맞은 인간성의 추락을 그렸다. 작품 속 사기꾼이자 호색한 고태수는 조선은행 군산지점 직원이다. 일본 상인들에 대한 특혜로 일제의 이른바 침탈적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대표적 금융기관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이제 군산근대건축관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군산시 문화관광 사이트는 일제강점기 유산 코스에 ‘시간여행 마을’이라는 낭만적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군산근대미술관과 호남관세박물관으로 각각 바뀐 일본18은행 군산지점과 군산세관, 일본 사찰 동국사를 돌아보고 있자면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일제강점기 유산을 관광자원화한 군산의 ‘성공사례’는 전남 목포로 이어졌다. 국가유산청은 옛 외국인 거류지 일대를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도 했다. 목포는 옛 러시아영사관 건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찰인 옛 동본원사 별원이 남아 있는 것까지 군산과 닮은꼴이다. 최근에는 경북 포항도 구룡포 일대의 일본 어민과 수산물 상인의 집단 거주 지역을 ‘근대문화역사거리’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하는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일본이 사도광산 추도식을 국제사회와 약속한 대로 강제동원 희생자 위로가 아니라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자리로 변질시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근대유산 정책에는 작명(作名)의 원칙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국가유산청부터 식민통치와 강제 노역 및 수탈의 역사가 담긴 근대유산은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이름을 다시 지으면 좋겠다. 지방자치단체에도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화(美化)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드러내는 문화유산 보존 및 관광 정책으로의 전환을 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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