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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특별시,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회 서울사방 북촌 편이 6월의 첫 주말인 지난 2일 북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북촌의 기와집 처마 아래로 흐르는 초여름 바람이 시원한 하루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예약자들이 몰려오면서 집결 장소인 안국역 2번 출구 앞이 갑자기 북적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예약 없이 무작정 나오거나, 친구 따라 온 몇 명도 무사히 투어에 합류했다. 다만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이 동나 진행 요원들이 양보해야 했다. 정순희 해설사는 일행을 ‘북촌 신세계’로 이끌었다.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백악산 아랫동네다. 저잣거리인 종로 운종가의 배후도시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족과 공신,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준 알짜배기 땅이다. 왕조의 심장부 북촌은 개화의 발상지다. 근대의 활시위를 당겼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가장 뜨거운 변혁의 물결이 휩쓴 역사의 무대였다. 개화의 사랑방 역할을 한 박규수의 집이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으로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집도 반경 200m 안에 모여 있었다. 북촌의 사대부들로부터 발화한 근대 개화사상은 기득권 세력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북촌의 붉은 기운은 1919년 3·1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계동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송진우·최남선·최린 등에 의해 싹텄다. 경운동 보성사(조계사 앞)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장이 이종일의 집(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전국에 배포됐다.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가회동 집과 불교계 대표 한용운의 계동 집도 지척이었다. 계동 보현빌딩(현대 사옥 맞은편) 자리는 해방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꾸려진 곳이다. 계동에 살면서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결국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터이고, 압류당한 홍영식 집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들어섰다. 1993년 헌재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맥을 이었다. 근대 교육과 근대 의료의 모태였다.북촌 한옥은 ‘오래된 도시’ 서울의 징표이자 존재 가치다. 북촌의 영과 욕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이 남긴 산물이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라는 선각자가 남긴 한옥은 현대 서울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유산이자 미래유산이다. 한옥을 조선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각종 문화재로 지정된 20여채를 제외한 모든 한옥은 1920~40년대 지어진 도시형 개량 한옥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도 1913년 준공됐다. 현존하는 서울의 기와집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북촌 한옥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일제 통치기구와 수탈기구, 일본식 가옥의 북촌 진입을 차단한 민간 차원의 방어선이었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기농의 작품이다.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도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인 기농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발과 북촌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은 적산가옥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기와집이 없는 서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경남 고성 출신인 기농은 북촌 한옥을 남긴 데 그치지 않고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도왔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해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나는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가 백난 중에서 회관을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라고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에 치하하는 글을 보냈다.한옥은 남았지만 그는 잊혀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른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건국훈장 애족장 하나뿐이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고, 서울의 미래를 남긴 선각자 정세권을 기리는 날은 없다. 정세권 문화상도 없고, 정세권 동상도 없다. 한편 이날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참가자들은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내세운 참신한 기획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진행과 코스, 해설 내용에도 대만족을 표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일시 : 6월 9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종로3가역 11번 출구 종묘광장공원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제작’ 주민·‘주연’ 주민 축제

    ‘제작’ 주민·‘주연’ 주민 축제

    7년 전 주민 기증 유실수로 황량한 산에 과수원 조성 남녀노소 즐기는 체험형 축제 예산 편성도 주민참여예산제 “주민이 직접 만든 명소에서 즐기는 축제라 더 의미 있죠.”지난 5일 서울 도봉구 창2동 작은 과수원에서는 ‘제4회 초안산 매실축제’가 열렸다. 초안산은 국가 사적지인 ‘내시묘’라는 역사문화유산을 보유한 곳이다. 산속 작은 과수원은 2011년 3월 초안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고자 주민들로부터 매실, 감, 앵두 등 유실수 200그루를 기증받아 조성했다. 창2동 주민자치회가 과수원을 관리하며 2015년부터 매실축제, 매화 사생대회 등을 통해 주민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날 축제 주최도 역시 주민이 했다. 강대훈 창2동 주민자치위원장은 “과거 태풍 피해를 입고 황량해진 산이었지만 주민들이 가꿔 과수원을 만들었다. 매실을 심은 지 7년 정도 됐고 축제를 열기 시작한 것은 4년이 됐다”며 “주민이 힘을 합쳐 만든 명소라 더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초안산 매실축제의 매력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축제’라는 점이다. 이날도 초안산 인근에 있는 창림초등학교의 학생과 학부모 400여명이 오전과 오후로 나눠 매실 따기 행사에 참여했다. 매실 수확에 나선 최지민(9)양은 “열매가 초록색이라 아직 안 익은 건 줄 알았는데, 지금이 매실 수확 철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매화나무 열매가 매실이라는 점도 배웠다”며 “교실에서 배우는 공부도 좋지만, 이렇게 체험하면서 배우는 공부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매실 수확 외에도 매화, 매실수를 이용한 천연 염색, 매화 꽃차 시음, 압화를 이용한 공예 체험, 묘목 나뭇가지를 이용한 브로치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부스도 주민의 눈길을 끌었다. 축제에 필요한 예산은 주민참여예산제를 활용했다. 주민참여예산제란 주민이 직접 지역에 필요한 사업을 제안하고 선정하는 제도다. 구 공원녹지과는 주민참여예산 1000만원과 시비보조금을 활용해 과수원 입구에 데크 계단을 설치하고 과수원 내 산책로에 야자 매트를 설치했다. 또 과수원 주변 그루터기와 고사목을 제거해 어린이들도 쉽게 매실을 수확할 수 있도록 했다. 정홍균 창2동 주민센터 동장은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요즘 학생들이 도심 속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수확의 기쁨을 누리면서 심신의 건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내년에도 주민참여예산을 활용해 풍성한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돋보기] “태릉선수촌, 국민 품으로” 왕릉과 공존안 새달 결정

    반세기 국가대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태릉선수촌의 원형을 어느 정도 존속시킬지가 다음달에 결정될 전망이다. 대한체육회는 500년 조선왕릉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1966년 처음 조성돼 50년 넘게 한국 엘리트 체육의 산실 역할을 해 온 태릉선수촌을 근대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문화재청과 협의해 왔다. 대한체육회 산하 문화재자문위원회 관계자는 5일 “선수촌 안 8개 건물을 그대로 남기겠다는 기존 방안과 많이 달라졌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과 명종과 인순왕후가 합장된 강릉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성된 선수촌의 원형은 보존하되 두 가지 다른 성격의 문화재를 국민들이 즐겁게 이용하는 시설로 함께 호흡하게 하자는 것이 골자”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점령하듯 조성한 태릉선수촌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올림픽 금메달 116개를 일군 한국체육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곳의 훼손 능역을 원상 복구하겠다는 문화재청과 이견을 빚어 왔다. 이에 따라 체육회는 2016년 3월 문화재청의 등록 심사 보류 결정에 맞서 보완 자료를 첨부해 등록문화재 재등록을 추진해 왔다. 이듬해 문화재와 각계 전문가를 초빙해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1년여 활동 끝에 이제 최종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한 상태다. 자문위원회 관계자는 “폐쇄적이었던 시설을 개방해 두 가지 성격의 문화재가 함께 호흡하며 국민들의 품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마련했다”며 “문화재청이나 전문가들에게도 선수촌이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로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많이 맞춰진 상태”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주무 부서인 근대문화재과 관계자는 “다음달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위원회(근대, 사적, 세계유산)를 열어 안건으로 상정해 검토할 예정”이라며 “문화재청도 태릉선수촌의 체육사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고 있으나, 다만 해당 지역이 조선왕릉 권역으로 국가 사적이자 세계유산인 관계로 공존 가능성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태릉선수촌의 보존, 활용계획 및 세계유산 영향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바람직한 안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자문위원회 관계자도 “현실적으로 8개 건물을 모두 지키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한두 건물만 상징처럼 남겨 사진만 걸어 놓는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문위원회도 문화재청과 이달 중 한 번 더 접촉을 갖고 우리 뜻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동남아 시장서 삼성을 깨기 위해 총공세 펴는 스마트폰 중국 3인방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동남아 시장서 삼성을 깨기 위해 총공세 펴는 스마트폰 중국 3인방

    지난 3월 29일 밤, 세계 최대의 불교 건축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보루부드르사원은 화려한 조명 불빛 아래 젊음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중국의 스마트폰 업체 비보(Vivo)가 신제품 ‘V9’ 출시에 맞춰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가수 아그네즈 모(Agnez Mo)를 비롯해 현지 유명 가수들이 총출동한 콘서트를 곁들인 갈라쇼를 개최해 젊은이들을 유혹한 것이다. 비보의 V9 출시 행사는 현지 TV 방송국 12곳의 전파를 타며 인도네시아 스마트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이 행사는 비보뿐만 아니라 오포(OPPO), 화웨이(華爲·Huawei) 등 스마트폰 중국 3인방의 인도네시아 시장 장악을 알리는 ‘축포’ 성격을 띠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동남아시아 스마트폰 시장 공략에 ‘올인’하고 있다. 특히 중국 3인방이 동남아 시장에서 일제히 약진함에 따라 삼성전자의 1위 자리 수성마저 위태로운 형국이다. 아시아 경제전문지 닛케이 아시안 리뷰,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 등은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동남아 시장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 수익성에 아랑곳 없이 광고와 판촉에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공을 들이고 있다고 지난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미 지난해 중국 3인방의 동남아 시장 전체 판매량은 삼성을 간발의 차로 따돌렸다.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IDC에 따르면 지난해 이들 3개 업체는 동남아 주요 신흥 5개국(인도네시아와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모두 2980만대(시장 점유율 29.6%)의 스마트폰을 팔았다. 삼성의 2930만대(29.1%)를 50만대나 넘어섰다. 2016년에는 삼성이 2330만대(23%)를, 중국 업체들이 2180만대(21.5%)를 각각 판매해 삼성전자가 소폭 앞섰으나 불과 1년 만에 전세가 뒤집힌 것이다. 이들 3대 업체의 판매대수는 2013년과 비교했을 때 무려 20배나 증가하면서 삼성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동남아 시장에 총공세를 펼치는 것은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중국 국내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판매량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정보통신연구원에 따르면 중국 스마트폰 출하량이 지난해 처음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감소한데 이어 올들어서도 4개월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2018년 4월 중국 내 스마트폰 출하량은 전년보다 16.7%가 줄어들었고 올해 1~4월 중국내 누적 출하량도 23.7%가 감소한 1억 2200대에 그쳤다. 이 가운데 중국산 브랜드 출하량도 전년보다 25.1%나 감소했다. 여기에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화웨이 등 중국 통신장비·스마트폰 업체를 내쫓으려 하고 있는 데다 중싱(中興·ZTE)의 경우 미국이 천문학적인 벌금(17억 달러·약 1조 8200억원)을 부과할 것으로 알려져 결국 스마트폰 사업을 접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광대한 미국 시장의 공략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FT는 “중국 업체들은 세계 제1위의 스마트폰 시장인 중국 국내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데다 미·중 통상갈등이 격화되면서 미국 시장보다는 인도와 동남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 집중 공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남아 시장에서 이들 3인방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인은 엄청난 물량 공세 덕분이다. ‘스타 파워(star power·유명인을 이용한 인기몰이)’를 통해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동시에 대도시에서 시골에 이르기까지 판매망을 구축하는 등 철저한 물량 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역과 쇼핑센터 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는 현지 유명 배우가 중국 제품 광고판을 점령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태국 방콕 중심가 상업지구로 진입하는 거리와 수쿰윗 지하철역 등에는 이들 광고판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대형 쇼핑몰 ITC쿠닌간에 있는 스마트폰 판매점 공간은 온통 녹색의 오포와 파란색의 비보 간판들이 채우고 있다. 매장 주인은 “중국 업체들은 판촉물을 공짜로 주는 것은 물론 광고 수수료도 내준다”며 “진열된 50대의 스마트폰 모두 오포와 비보 제품 뿐”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에 제품을 협찬하는 간접광고(PPL)에도 적극적이고 제품 프로모션에 필요한 물품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체험마케팅을 강화해 현지인들과 친밀도도 높이고 있다. 비보는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2018년, 2022년 월드컵 스폰서 계약도 맺었다. 동남아에 축구가 인기가 있는 만큼 브랜드 파워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다. 닛케이 아시안 리뷰는 “오포와 비보의 광고비에는 상한선이 없다”며 “민간 기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업체들은 판매 보조금 등을 지원하며 오프라인 매장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스마트폰 전문 판매점의 간판 순서조차도 매장 관리자에게 웃돈을 줘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배치한다. 판매점은 물론 영업사원에게도 1대당 수백엔(수천원)의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미얀마에서는 오포와 비보 스마트폰 15대를 주문한 매장에 인테리어 장식과 함께 판촉사원 1명도 파견하기도 했다. 젠슨 오이 IDC 애널리스트는 “중국 업체들은 매장 단위의 판매 장려금 외에 영업사원 개인에게도 장려금을 지급한다”며 “스마트폰 1대를 팔았을 때의 수익이 삼성보다 많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판매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중국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2015년 태국의 오포 판매점은 2000개를 밑돌았으나 지난해 9월에는 1만 개를 넘었을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저가정책 전략도 한몫한다. 비보의 신제품 V9의 가격은 1만 1000바트(약 36만 8000원)로 2015년 출시된 구형 모델인 아이폰6(1만 8500바트)보다 훨씬 저렴하다. V9은 6.4인치의 패블릿급 대화면 사이즈와 안면인식기능 등을 탑재해 품질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 여성은 “아이폰·오포·비보 간 차이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오이 애널리스트는 “동남아 시장에서 휴대전화 가격은 100 달러~150 달러(약 10만 7000~16만원) 선으로 책정돼 있다”면서 “구형 아이폰 조차 이 부분에서는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애플의 아이폰은 지난 한 해 동안 동남아 시장에서 450만대를 판매하는데 그쳤다. 2016년에 비해 감소한 수치다. 오포와 비보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은 비록 처음에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은 저가폰으로 시장점유율을 늘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오포 R9 등과 같은 신제품은 애플의 아이폰, 삼성의 갤럭시 못지 않은 첨단 스펙을 갖추고도 가격은 휠씬 싸기 때문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중국 업체들이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을지 의문도 제기된다. 이들 3인방이 보여주는 공격적 마케팅은 브랜드 인지도를 제고하고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윤을 감소시키는 부작용으로 연결된다. 더욱이 동남아 시장 규모가 정체된 상황은 수익적 측면에서 중국 업체들의 고민을 가중시킨다. IDC는 올해 동남아 시장의 스마트폰 판매량을 지난해보다 4% 증가한 1억 5000만대 수준으로 추산했다. 오이 애널리스트는 “오포와 비보가 정말로 돈을 잘 벌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 카운터포인트리서치가 집계한 지난해 4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수익 상위 10개 모델에 중국 업체는 하나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전체 10개 중 8개가 애플의 아이폰 시리즈로 채워진 가운데 최신 제품 아이폰X가 전체 이익의 35%를 독식하며 1위를 차지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병자년인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전국 곳곳에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포위를 뚫고 남한산성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런 탓에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정 대신들의 무인(武人)들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하다. 인조실록은 ‘임금이 외로운 성에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다’고 적기도 했다.하지만 포위된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 왕의 격문이 닿기도 전에 군사는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충청도 군은 성남 분당의 동막천, 강원도 군은 하남시와 광주시 사이의 검단산, 경상도 군은 광주시 쌍령동까지 진출했지만 패퇴했을 뿐이다. 물론 전장(戰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만 하던 장수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산성에 피신해 갑론을박만 벌이던 대신들이 패전 책임을 일선에서 싸운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돌리는 것은 비겁하다.승리한 전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전라병사 김준룡은 1월 4일 20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은 다음날 청군 5000명을 격퇴한 데 이어 이튿날에도 화포를 동원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김준룡은 유격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적장 양고리(揚古利)를 사살했다. 당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이 칼을 들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가운데 필사의 의지를 보이자, 병사들이 모두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다.…어떤 오랑캐가 산꼭대기에 큰 깃발을 세운 뒤 갑옷 차림으로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자…공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병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치며 전투를 독려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와 그 좌우 몇 장수가 일시에 탄환을 맞았다.…죽은 장수는 선한(先汗)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였다.’ 백양고라가 곧 양고리다. ‘선한’이란 청태조 누르하치를 말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었다는 인물이다.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다. 누르하치가 ‘전장에서는 몸을 좀 사리라’고 했을 만큼 겁이 없었다는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미수가 적은 대로 김준룡 부대가 ‘오랑캐의 시신이 겹겹이 쌓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승리를 거두자 남한산성의 임금과 대신들은 처음에는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 부대는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수원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전공(戰攻)을 세운 김준룡이지만 이때의 철군을 이유로 훗날 파직된 것은 물론 유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 쪽 기록인 ‘청사고’(淸史稿)의 분위기는 다르다. 이날의 패전은 충격이었다. 양고리의 시신이 광교산에서 진지로 돌아오자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제사를 지내며 곡을 했고 임금의 의복을 내려 염하게 했다. 심양에서도 양고리의 상여가 조선에서 도착하자 태종이 교외까지 나가 맞이했고,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福陵)에 배장했다. 홍타이지는 이때도 직접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조총 탄환을 양고리에게 명중시킨 박의(朴義)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그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했으니 졸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벼슬은 평안도 직동의 종9품 권관(權管)에 머물렀다. 승진은커녕 변방으로 좌천된 꼴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고려의 김윤후는 몽골의 살례탑을 활로 쏴 죽여 대장군에 제수됐다. 그런데 박의는 직동 만호에 그쳤으니 사람들은 애통해한다’고 자신의 문집인 ‘영재집’에 적었다. 만호는 권관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이다. ‘직동 권관’의 착오일 것이다. 청나라에 항복했으니 청황제의 가까운 인척을 사살한 군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수는 있다. 김준룡의 승전을 재평가하는 논의는 정조시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1791년(정조 15) 사직 신기경이 ‘병자년 난리 때 김준룡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장려해야 한다’고 상소한 것이다. 화성 축조를 앞두고 수원 지역의 현안을 일일이 점검하는 자리였다. 정조는 이듬해 김준룡에게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정부의 차관급 벼슬인 찬성(贊成)도 추증했다. 오늘은 병자호란의 역사를 바탕으로 광교산으로 간다. 해발 582m의 광교산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과 고기동, 의왕시 일부에 걸쳐 있다. 호란 당시 김준룡 부대는 서남쪽 수원에서 광교산으로 접근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이 있는 동북쪽에서 몰려왔으니 광교산 전체가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시루봉 남쪽의 토끼재 아래 해발 400m 지점에는 김준룡 장군의 승전을 알리는 각자(刻字)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김준룡 장군 전승지와 전승비’라고 부르는데 자연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 將軍 戰勝地)라는 큰 글자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음각했다. ‘김준룡 장군 전승지’가 현대적인 글귀인 데다 ‘병자청란’이라는 표현도 익숙지 않다는 점에서 누군가 당초의 글자를 고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광교산 대첩’을 알리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는 ‘화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들은 좌의정 채제공이 새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번암 채제공은 정조 시대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당시 성역총리대신(城役總理大臣)을 맡고 있었다. 화성 건설의 총책임자다. 화성 축조를 전후해 김준룡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김준룡 전승지는 수원에서 광교유원지를 거치거나 용인에서 신봉도시개발지구를 지나 오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수원 쪽 광교산 들머리에는 창성사 터, 용인의 산자락에는 서봉사 터가 있다. 창성사 터와 서봉사 터에는 모두 고려시대 고승인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와 현오국사탑비가 각각 남아 있다. 지금 천희의 탑비는 화성 내부 방화수류정 옆으로 옮겨져 있다.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창성사는 신라 말 창건 이후 중창과 폐사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출토 유물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7세기 폐사 이후 18세기 후반 중창이 이루어졌다. 17세기 폐사는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 서봉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발굴조사에서도 병장기가 적지 않게 수습됐다. 그러니 두 절터는 전승비와 함께 ‘광교산 대첩’의 중요한 기념물이다.김준룡 장군의 무덤은 경기 시흥시 군자동에 있다. 그는 호란 이후 전라도병마절도사와 영남절도사를 지내고 1642년 세상을 떠난 뒤 고향인 양천 땅에 묻혔다. 지금의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1972년 도시화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서 소개한 허목의 전투 장면 묘사는 무덤 앞에 세워진 신도비 비문의 일부다. 양고리 유적이 경기 하남시에도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남한산성 북문이 가까운 법화사 터다. 양고리는 ‘법화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전사하자 청태종이 그의 고향 법화둔의 이름을 따 법화사라는 원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청나라 장수를 사살한 것에 한 가닥 위안을 삼고자 비극의 현장인 남한산성에 이런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걷기’와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서울 인문역사기행…‘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출간

    ‘걷기’와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서울 인문역사기행…‘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출간

    서울은 삼국시대 초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한성백제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의 유적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이 설치되었고, 조선 개국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도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서울의 문화유산은 안타깝게도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고, 일제에 의해 훼절 왜곡되었으며, 한국전쟁의 참화를 견뎌야 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유산의 상당수는 개발논리에 밀려 원형을 잃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서울의 문화유산은 상처투성이인 채 점으로 존재할 뿐이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이다. 이에 서울에도 걷기 좋은 길이 부쩍 늘고 있다. ‘서울학교’는 지난 6년 동안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코스를 개발해왔다. 또한 시민들과 함께 진행한 수십 차례의 역사기행을 통해 내용을 검증하였다. 하나하나의 코스는 5시간 남짓 걷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그동안의 성과 가운데 10개의 코스에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해 세상에 내놓는다. 필자는 서울학 전도사이자 길 위의 스토리텔러로서 새로운 모습의 서울을 알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최연 서울학교장이다. 이 책의 특징은 하나하나의 길이 주제를 지닌 걷기 코스라는 점과 사람들이 흔히 아는 사대문 안, 그리고 궁궐 위주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內四山: 백악, 인왕, 낙산, 목멱)과 각각의 산이 품고 있는 마을(삼청동천, 옥류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을 하나하나의 테마로 다루는 스케일도 남다른데, 지리적으로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안산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우백호 산줄기며, 한강 너머 서달산과 옛 양천 고을의 강화길까지를 각기 독특한 테마길로 개발하였다. 서울 도심 기행을 ‘대한제국의 길’과 ‘기미년 만세운동 길’로 테마를 부여한 점 역시 눈에 띈다. 저자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특색 있는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의 문화유산을 시민이 함께 복원하는 인문역사기행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폼페이 유해 발굴, 최후의 날 비극 담겨

    폼페이 유해 발굴, 최후의 날 비극 담겨

    이탈리아 고대도시 폼페이 최후의 날의 비극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해가 발굴됐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폼페이 당국은 29일 큰 사각형 돌 아래로 삐져 나온 유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이 유해는 3월부터 새로 시작된 폼페이 ‘V구역’ 발굴 과정에서 발견됐다.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유해의 주인은 화산재를 피해 달아나다 돌에 맞아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슴 부위 뼈는 으스러진 상태였고 머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큰 사각형 돌은 화산 구름의 폭발적 힘에 의해 날아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남성은 정강뼈에 감염 병변이 발견된 점에 비춰볼 때 걷는 데 문제가 있었으며, 이런 보행상의 불편 때문에 화산폭발 초기에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연구원들은 분석하고 있다. 폼페이 고고학 지구 사무총장인 마시모 오산나는 이번 유해발굴이 “당시의 문명과 역사를 더 잘 보여주는 데 기여하는 특출한 발견”이라고 전했다. 연구원들은 이번 유해를 통해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과 질병 등을 파악하고, 화산폭발 당시 공황상태에 빠진 주민들의 대피 상황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 고대도시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됐다.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를 비롯해 여러 개 마을이 화산재에 묻혔으며, 18세기부터 고고학적 발굴이 이어지면서 세계 문화유산 유적지로 등재돼 있다. 영상팀 seoultv@seoul.co.kr
  • 英 해리왕자 부부 加 앨버타로 ‘허니문’

    英 해리왕자 부부 加 앨버타로 ‘허니문’

    지난 19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영국 해리(33) 왕자와 메건 마클(36) 왕자비 부부가 허니문 여행지로 과거 증조부모와 조부모 커플이 묵었던 캐나다 앨버타의 유명 휴양 호텔을 선택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연예매체인 TMZ는 두 사람이 로키산맥의 최대 국립공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재스퍼 국립공원 내 호텔인 ‘페어몬트 재스퍼 파크 로지’에서 신혼을 만끽할 것이라고 28일(현지시간) 전했다. 별도의 독채로 구성된 객실은 557㎡(약 168평) 규모로 하룻밤 숙박료만 734만원(약 6818달러) 정도다. 시설 규모가 26만 4000여㎡(약 8만평)가 넘는 천혜의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이 호텔은 다채로운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캐나다의 파라다이스’로 불린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신세계 별마당도서관, 코엑스몰 상권 살렸다

    신세계 별마당도서관, 코엑스몰 상권 살렸다

    매달 신간서적 1000여권 비치 개관 1년 만에 2100만명 방문 SNS 입소문… 매장고객 두배↑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고객의 시간을 빼앗아야 한다’며 야심차게 선보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의 별마당도서관이 개관 1주년을 맞았다. 주위에 새로운 상권이 들어서면서 침체기를 맞았던 코엑스몰에 별마당도서관의 모객 효과가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분석이다. 신세계프라퍼티는 지난해 5월 별마당도서관이 개관한 이후 지난 25일까지 약 2050만명이 스타필드 코엑스몰을 찾았으며, 1주년을 맞는 오는 31일에는 2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27일 밝혔다. 앞서 신세계는 정 부회장이 강조하는 ‘인문학 경영’ 사업의 일환으로 이벤트 공간으로 쓰이던 2800㎡ 규모의 중앙광장에 13m 높이의 대형 서가 3개, 최신 잡지 약 600종을 포함해 서적 7만여권을 갖춘 도서관을 선보였다. 매달 약 1000권의 신간 서적과 잡지 등을 구매해 비치하는 등 신세계가 지난 1년 동안 책 구매에 쓴 비용만 약 7억원에 이른다. 매주 두 차례 명사 초청 강연과 문화 공연 등을 진행해 같은 기간 모두 142회의 문화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와 건축가 승효상, 혜민 스님 등이 강단에 섰다.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이 늘면서 인근 상권 매출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별마당도서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하루 평균 200건, 모두 8만 2000건가량이 올라온 것으로 집계됐다. 김진숙 키엘 코엑스몰점 매니저는 “별마당도서관이 생긴 이후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이 두 배 정도 늘었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조선시대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를 보면 양주목(楊州牧)이 도성(都城)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에는 양주목과 함께 도성과 한성부에 속한 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그려 넣었다. 양주목과 한성부는 북쪽으로 연천과 마전, 동쪽으로 포천과 가평, 남쪽으로 광주와 과천, 서쪽으로 고양과 파주와 마주하고 있다.지도에서 읍치는 양주목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경기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남쪽이다. 지금 서울에서 옛 양주읍치에 가려면 의정부를 지나서도 한참을 달려야 한다. 그만큼 양주목이 관할하는 지역은 넓었다. 고양시 지축동 일대와 파주 광탄면, 구리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포천시의 일부, 서울시의 광진·노원·강북·도봉·성동·중랑·은평·성북구는 물론 종로구와 중구의 일부도 양주 땅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양주면(古楊州面)이다. ‘옛 양주’라는 뜻이니 과거 양주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서 고양주면은 망우면과 노원면 남쪽인 아차산 아래 한강변이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양주읍치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에 있었고, 1067년(고려 문종 21) 양주가 남경(南京)으로 승격하면서 북악산 아래로 옮겨 갔다는 연구도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의 ‘양주도호부’ 대목은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으로…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한산군으로 바꾸었다. 고려가 양주로 고쳤다’고 했다. 아차산 아래 한강은 오늘날 광진(廣津)으로 불리지만, 양진(楊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광주 땅인 남쪽은 광진, 양주 땅인 북쪽은 양진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양진에는 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양진당(楊津堂)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정종이 1399년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태종은 1404년 다시 서울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른다. 양주 땅이 수도가 된 만큼 읍치는 새로 물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1395년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이라 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때 옮긴 양주의 읍치가 오늘날의 고읍동(古邑洞)이다. 옛 읍치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옛 견주의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양주목은 1506년(중종 1) 치소를 유양동으로 옮겼다. 1922년 당시 양주군은 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했고, 2000년 지금의 양주시청 자리로 돌아갔다.양주는 큰 고을이었다.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유양동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바라보면 ‘교통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물류를 인력이 아니면 소와 말이 끄는 수레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은 달랐다. 양주 유양동은 임진강의 호로하에서 한강의 광진을 잇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 호로하 북쪽에는 고구려성인 호로고루, 남쪽에는 신라성인 칠중성이 있었다. 표주박 허리처럼 좁아진 물길이라는 뜻의 호로하는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하류다.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대부분 이 일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광진 일대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다. 호로하에서 임진강을 건넌 한반도 북부지방의 교통량은 다시 광나루에 모였고, 여기서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삼남지방의 물류는 당연히 역순으로 북부지방으로 올라갔다.그러니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당연히 양주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양주에는 별산대놀이와 소놀이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양주농악과 상여와 회다지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연희가 발달했다는 것은 물산이 풍부하고 돈이 도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다. 유양동 관아는 양주군이 의정부로 옮겨 갈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중심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은 것을 2000년부터 5차례 발굴조사를 벌였고, 지난달 동헌과 내아 복원을 마무리했다. 새 집 냄새가 물씬해 유서 깊은 유적이라는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기 시작하면 역사성도 차근차근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불곡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양주목 관아는 복원공사와 함께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됐다. 널찍한 주차장에 내리면 왼쪽에 제법 규모 있는 관아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탐방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정면의 비석거리다. 맨 앞에 있는 것이 ‘양주 관아지 유허비’다. 양주읍치가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다.그 옆으로 양주목사를 역임한 열여덟 분의 선정비와 불망비, 유방비, 추모비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유방이란 유방백세(流芳百世)를 줄인 말로 ‘명성을 후세에 길이 남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양주목사를 역임한 비석 주인공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백인걸(1497~1579)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에 스승을 잃고 을사사화에 파직됐으며 정미사화로 안변에 유배됐다. 학문에 뛰어나 파주 파산서원과 남평 봉산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정대년(1503~1578)은 ‘네 임금을 섬기며 아부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 차례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당대 명경(名卿)’으로 불리웠다. 무신 출신으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관여한 이완(1602~1674),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던 남용익(1628~1692), 제주목사 시절 ‘탐라순력도’를 남기고 ‘병와가곡집’으로 음악사에도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형상(1653~1733)도 양주목사를 지냈다. 양주목사란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다른 사람은 직함이 모두 ‘목사’지만 유일하게 ‘군수’인 사람이 홍태윤이다. 고종 시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주목이 양주군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 군수를 역임한 양주의 마지막 목민관이었다. 무인 출신으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여주까지 피신시켜 포천현감에 오른 인물이다. 홍태윤은 도성을 오가는 길목이었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쌍문2동주민센터 앞에도 선정비를 남겼다. 그런데 선정비는 1903년, 불망비는 1904년 세워졌으니 현직 양주군수 시절이다. 어쨌든 목민관으로는 선정을 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포천에도 선정비가 있다고 한다. 비석거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현대적 야외공연장은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다. 해마다 6월부터 9월까지 넷째 주 토요일에 상설공연을 했는데, 올해 일정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듯하다. 그 너머에는 양주향교가 있으니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6·13지방선거 부천시장] 장덕천 더불어민주당 후보 “원도심권 도시재생 추진하고 마을주차장 조성에 주력”

    [6·13지방선거 부천시장] 장덕천 더불어민주당 후보 “원도심권 도시재생 추진하고 마을주차장 조성에 주력”

    장덕천 더불어민주당 경기 부천시장 후보는 24일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할 정도로 미세먼지가 심각하다. 시장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 장 후보는 “마지막 남은 부천의 노른자땅 대장동에는 현 시책을 이어받아 친환경산업단지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장 후보는 박근혜 정부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자 이에 부당함과 제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전국 최초로 제기한 바 있다. 획일화되고 강제주입식 교육을 철저히 배격한다는 판단에서였다. 평소 ‘평등은 약자 편’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율사 출신이다. 다음은 장 후보와의 일문일답. ⇒왜 부천시장이 되려고 하나. —정치란 국민의 삶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민주주의 제도를 어떻게 정착시키느냐에 있다. 촛불정국과 지난해 대선을 거치면서 지금 지방분권이 매우 강화되는 추세다. 앞으로 자치단체장이 할 일도 많아지고 있다. 시장이 자치분권을 이해해야 하고 제도로 활용하고 시민 삶을 개선해야 한다. 변호사로서 정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특화돼 있다고 본다. 시장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시장에 도전했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은. —도로위 미세먼지가 발생량의 70%를 차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도로위 미세먼지를 확실히 줄이겠다. 큰 도로보다 작은 도로, 이면도로 같은 곳은 골목골목길을 작은 도구를 사용해 미세먼지를 처리할 수 있다. 또 원도심과 신도심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원도심을 중심으로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역량마을과 공유경제마을, 안전마을, 친환경마을, 문화마을을 만들겠다. 공동체 활동으로 주민들이 함께하는 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도시재생시 시민의견을 적극 수렴하겠다. ⇒핵심정책 톱3를 든다면. —첫 번째로 원도심권 도시재생을 지원하고 마을주차장을 조성하겠다. 주차장 관련해서는 정부서 추진하는 도시재생문제와 연계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고도 정수처리하고 있다. 현재 부천시는 표준정수처리인데 갈수기 때는 냄새도 난다. 고도 정수처리해서 안전하고 더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겠다. 세 번째로 빠르고 편리한 교통정책을 추진하고 싶다. 부천은 인구가 줄어들고 발전이 정체돼 있다. 장기적으로는 미래먹거리와 세수확보를 위해 도시를 발전시킬 생각이다. ⇒현재 대장동 친환경산업단지를 추진 중이다. 농업생태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현 시책대로 친환경산업단지 개발 형태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대장동은 부천 미래살림 성장동력의 한 축이다. 부천시 노사정 협력 노하우를 활용해 대장동 산업단지를 노사상생특구로 선정하겠다. 일각에서 환경파괴 염려가 많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단순한 산업단지가 아니라 관광농업테마파크와 거점별 생태 서식공간인 비오톱(Biotope)을 조성해 우수한 지역인력을 공유하고 재정을 확충할 계획이다. 기업을 대거 유치해 7만여명 일자리를 만들겠다. 산업용지와 상업용지를 조정해 녹지와 관광농업용지의 증대 변화를 구상하고 있다. 여월농업단지 같이 일자리창출도 하는 단지를 4곳 더 추진할 생각이다. ⇒상동 영상문화산업부지에 신세계영상복합산업단지 조성이 물거품됐다. 향후 어떻게 활용할 건지. —만화산업을 조성하고 웹툰과 관련된 산업을 유치해서 미래먹거리로 육성하고 싶다. 웹툰융합센터에 예술인행복주택을 포함해 부천기업혁신클러스터를 만들 것이다. ⇒부천은 문화특별시라 할 정도로 다양한 축제가 있다. 그런데 부천문화생활에서 전통소리인 판소리문화가 거의 없다. —판소리는 서양식 뮤지컬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한국적이다. 국민 정서에 부합한 훌륭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저는 판소리 본고장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많다. 좋은 제안이 있다면 앞으로 우리 전통문화인 판소리 문화 저변확대를 위해 공연사업 등 열심히 지원할 생각이다. ⇒변호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2015년11월 박근혜 정부때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부당함과 제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전국 최초로 제기했다. 제 아내와 아들을 대리해서 제기한 거다. 민변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제가 추진한 것과 병합돼 올라갔다. 문재인정부로 정권교체된 뒤 각하판결됐다. 각하된 내용이라도 법리적 판단을 해줘야 하는데 그점이 없어 아쉬웠다. 획일화되고 강제주입식 교육을 철저히 배격한다는 판단에서 제기한 거다. ⇒민주당 예비후보 경선에서 최종후보로 결정됐다. 탈락한 후보들 보듬을 원팀 방안은 . —모든 후보들이 치열했지만 깨끗한 경선을 했다. 성숙한 선거문화를 부천 후보들이 선도했다고 본다. 원팀을 넘어 드림팀을 구성했다. 화학적 결합으로 경선 부담을 덜었다. 특별히 ‘나벤저스지원단’이라고 명명한 나번 후보자만을 위한 별도 지원조직을 뒀다. 나번 후보들을 대상으로 정책과 캠페인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SNS활동을 강화하고 오프라인 소음을 최대한 줄이겠다. ⇒시장 후보로서 장점은 뭔가. —‘평등은 약자 편’이라는 정치적 신념이 있다. 사회 약자정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부천시와 경기도 고문변호사를 맡았다. 지방정부 행정을 잘 알고 있다. 자치분권이 강화되는 때 시장으로서 제역할을 잘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정치입문 계기는. —누구 소개로 정치입문한 게 아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현실정치를 고민해왔다. 그래서 더디지만 꼼꼼히 다지며 준비했다. 최종 결정하기 전 제 자신을 살피고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며 ‘너는 정치를 할 수 있느냐’, ‘정치를 선도할 준비가 돼 있느냐’고 수차례 자신에게 반문하고 고민했다. ⇒가장 중시하는 정치철학이나 행정철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해왔다. 그것이 곧 제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자 정치철학이다. 행정은 대민서비스다. 불편을 해소하고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는 행정서비스를 약속하겠다. 부천시와 경기도의 법률자문 역을 맡은 바 있고 지방정부 행정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부천시민들에게 이익을 챙겨주는 행정서비스를 펼치겠다. ⇒시장에 나서는 각오 한마디. —희망을 더하고 갈등은 빼겠다. 혁신을 곱하고 행복은 나누겠다. 내 곁의 시장이며 시민의 든든한 빽이 되겠다는 초심을 지키는 시장이 되겠다. 비록 더불어민주당 시장후보이나 저를 지지하지 않는 분들도 모두 부천시민이다. 모든 시민의 시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언덕길 오른쪽에 서울도큐호텔이 들어선 것은 1971년이었다. 그것은 흉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숭례문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25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1970년대 막바지 대학에 들어가 주변을 지날 기회가 더 잦아진 뒤에는 더욱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건 ‘할짓’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자본의 호텔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문화유산을 돋보이게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숭례문에는 정말 미안한 표현이지만, 호텔 화장실처럼 왜소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일본 호텔 자본이 철수하고 지금은 단암빌딩으로 이름을 바꾼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김중업 선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서울의 도시 및 건축 계획과 관련한 정부 시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서울도큐호텔이 문을 연 바로 그해 프랑스로 사실상의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런 김 선생이 도큐호텔 같은 건물의 설계를 수락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도큐호텔 이후에도 반성은 없어 오늘날 숭례문이 고층빌딩으로 포위당하는 처지가 된 것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해도 파리 르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도 공부한 김 선생이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리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숭례문과 서울도큐호텔의 악연을 떠올린 것은 지금 부산 복천동 고분군 안팎에서 빚어지는 파문 때문이다. 지금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주변에서 고층 아파트 건축을 위한 허가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66만㎡ 남짓한 부지에 5층에서 32층에 이르는 아파트 6000가구 안팎을 짓는 대형 공사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969년 무허가 판자촌을 택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처음 고분이 드러났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에서 200기 안팎의 2~7세기 무덤과 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금동관, 목걸이 등 1만 2000점 남짓한 유물이 확인됐다. 출토 유물은 긴급 발굴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다. 학계는 얇은 철괴인 철정(鐵錠)에 주목했는데, 사실상 화폐처럼 사용한 철기 재료였다. 이듬해는 말머리 장식 뿔잔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유행한 뿔잔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점에서 학계는 동서 교류의 흔적으로 봤다. 1980년에는 420가구의 연립주택을 짓는 공사가 다시 추진됐다. 부산시 문화재 관계자들의 주민 설득으로 발굴 조사가 시작되자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대량으로 나온 판갑(板甲)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불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판갑은 쇠를 두르려 얇게 펴서 만든 갑옷을 말한다. 그동안 가야의 판갑은 일본에서 수입한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4세기 판갑이 복천동에서 대거 나오자 5세기 것이 대부분인 일본은 할 말을 잃었다. 고대사의 공백기라는 가야사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복천동 고분군에서 찾아지자 발굴 현장 4만 5576㎡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1996년에는 복천박물관도 문을 열었으니 하나의 발굴 현장을 위한 박물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례가 드물다. 지금 추진되는 고층 아파트 건축 계획의 문제점은 둘이다. 우선은 1969년과 1980년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공사를 위해 고분군 주변을 판다면 가야 무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음은 문화재를 둘러싼 경관의 문제다. 지금도 복천동 고분군의 일부는 고층 아파트로 막혀 있다. 숭례문을 위축시킨 도큐호텔처럼 새 아파트가 건설되면 고분군의 가치는 더욱 퇴색할 것이다. 지역 고고학자의 모임인 영남고고학회도 ‘경관 보호를 위한 초고층 아파트군의 건설허가 재고’와 ‘고분군 주변을 개발하는 경우라도 철저한 발굴 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개발 계획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앞으로의 문화유적 주변은 옛 지형을 유지하는 저밀도 개발과 같은 ‘문화재 친화적 개발’을 유도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시뿐 아니라 정부와 모든 지자체가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 노원, 태릉서 영유아 생태체험

    서울 노원구가 태릉의 문화유산과 자연생태를 체험하는 영유아 프로그램 ‘왕의 숲 태릉, 봄의 숲에서 놀자!’를 운영한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프로그램은 23~25일 1일 2회 태릉에서 영유아 21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관내 122개 어린이집 원아와 개인이 회차별 350명씩 참여한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대한제국공사관 간 文 “136년 한·미 관계 굳건”

    대한제국공사관 간 文 “136년 한·미 관계 굳건”

    한·미 정상회담차 방미한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재개관 현장을 방문해 “136년 동안 유지돼 온 (한·미 관계) 역사가 대단하다”며 한·미 동맹의 의의를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조(선)·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해 “열강이 우리를 노리던 시절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체결한 첫 조약”이라며 “자주 외교의 노력으로 중요했던 관계가 136년 동안 유지돼 온 역사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136년 전인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는 점을 언급한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에 보고를 받았는지 아는 듯했다”고 전했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도 잘됐고 이런 날 주미공사(관)가 재개관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문 대통령은 “우리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나라가 아니다”라며 근대 외교공간 보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날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의 손녀 등 공관원 후손들과 만나 “처음 박정양 선생이 공사관으로 왔을 때 정말 막막했을 것”이라며 “당시만 해도 나라의 위세가 기울 때 외교를 통해 힘을 세우려 없는 살림에 큰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양은 귀국 이후 미국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미속습유’와 ‘미행일기’를 남겼다. 초대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는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민족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문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들이 제대로 기록으로 남아 알려져야 한다”며 “그 시기 개설한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 등 공관들도 확인해 보고 문화재청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대한제국공사관은 1889년 우리나라 역사상 서양 국가에 최초로 설치된 곳으로, 근대 외교공간 중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단독 건물이다. 지상 3층·지하 1층의 미국 빅토리아 양식 벽돌 건물로 워싱턴DC에 남아 있는 19세기 외교공관 중 내·외부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곳이다. 대한제국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일본은 건물을 5달러에 강제로 사들이고 다시 10달러에 미국인에게 매각했다. 이후 2012년 문화재청이 문화유산국민신탁을 통해 미국인 젠킨스 부부로부터 350만 달러에 재매입하고 보수·복원 공사를 마쳤다. 귀국길에 오른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재개관한 주미공사관 앞길엔 많은 교민들이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맞으며 태극기를 들고 긴 시간 기다려 줬다”며 “뜨겁게 환영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울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워싱턴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궁예가 불 지르고 왕건이 중건한 영월 흥녕사 터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궁예가 불 지르고 왕건이 중건한 영월 흥녕사 터

    법흥사(法興寺)가 있는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武陵桃源)면은 2016년 수주(水周)면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무릉도원이 중국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무릉도원면으로 이름을 바꾸자 “이러다 유토피아면도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무릉도원면에는 예부터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역사성과 동떨어진 작명(作名)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도화원기’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강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가다 복숭아꽃 만발한 살기 좋은 산속 마을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금은보화와 산해진미가 널린 호화로운 천국이 아니라 달콤한 향기가 감돌고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박한 꿈속의 마을이다. 무릉도원면이 그런 동네다. 많은 사람이 찾아들면서 법흥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름다운 계곡에는 펜션이며 캠프장이 수없이 들어섰다.법흥사는 영월과 평창, 횡성에 걸쳐 있는 해발 1167m의 사자산 아래 자리잡고 있다. 절을 창건할 때 도승(道僧)이 사자를 타고 왔다고 하여 사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자는 부처를 상징한다. 깨달음을 이룬 이가 앉는 자리가 사자좌(獅子座)이고, 그가 말하는 진리의 가르침이 사자후(獅子吼)다. 법흥사는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으로 꼽히는 성지다. 신라승려 자장(590~658)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전수받아 643년 돌아왔다.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이어 마지막으로 사자산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당시 사자산에 창건한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진신사리란 부처의 유골이니 적멸보궁은 곧 부처의 무덤이다. 한국 불교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모신 무덤과 그 무덤을 바라보며 배례하는 전각을 가리킨다. 부처의 유골이 묻혔다면 그 산 전체가 적멸보궁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대산, 태백산, 영축산, 설악산이 모두 부처의 무덤이고, 사자산이 또한 그렇다. 흥녕사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던 신라 말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철감 도윤(797~868)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개창한 곳은 화순 쌍봉사지만, 그의 제자 징효 절중(826~900)이 흥녕사에 머물며 선맥을 이어 감에 따라 문파의 중심지로 부각된 것이다. 흥녕사는 역사에 기록된 대로 891년(신라 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된 것을 944년(고려 혜종 1) 중건했다. 그 뒤 다시 불타서 천년 가까이 소찰(小刹)로 명맥만 이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은 1912년 다시 소실됐고, 1933년에는 적멸보궁을 지금의 터로 이전 중수했다고 법흥사 측는 홈페이지에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작고한 미술사학자 호불 정영호 선생의 1969년 동국대 석사학위 논문이 ‘신라 사자산 흥녕사지 연구’다. 그는 1955년 절터를 처음 답사한 뒤 1967년과 1968년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장을 다시 조사했다. 1934년생이니 일선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35세가 되어서야 석사학위 논문을 쓴 것이다. 선생은 논문에 ‘현재 절터 일대는 경작지로 변해 지상의 유구마저 파괴되고 광활한 사역에는 주초석 몇 점만 잔존하여 청자 및 기와 조각을 수집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유물은 모두 석조물로 고려 초기에 건립된 징효대사보인탑비를 비롯해 석조부도 2기와 석실, 석관, 석조불대좌 등이 오래된 것으로 잔존한다’고 덧붙였다. 법흥사를 두고는 ‘금세기에 들어와 흥녕사 옛터에 조영된 사찰로 선문과는 직접 관련은 없다’고 적었다.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흥사를 돌아봤다. 법흥계곡을 따라 난 길이 끝날 때쯤 나타나는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새로 지은 일주문이 보인다. 사실 ‘새로 지은’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약간의 시간차가 있을 뿐 모든 전각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에서 조금 더 차를 달리면 놀이공원을 방불케 할 만큼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법흥사와 적멸보궁을 찾는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리면 절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적송숲이 먼저 눈길을 끈다. 이 정도의 노거수(老巨樹)가, 그것도 토종 적송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절 초입에 보이는 2층 전각은 원음루다. 부처의 가르침을 소리로 전하는 법고, 운판, 목어가 있다. 이 세 가지와 더불어 사물(四物)을 이루는 범종은 극락전 앞에 있다. 원음루에 다가가니 1층에 ‘금강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성역(聖域)이다. 정면으로 곧바로 난 산길로 10분 남짓 오르면 적멸보궁이다. 전각 안에는 다라니경을 외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밖에도 두 손을 모으고 수없이 전각을 도는 기도객들이 보인다. 전각 너머에 정영호 선생이 언급한 석분이 있다. 입구가 직사각형인 석분은 기도를 위한 돌방으로 안쪽으로는 사리를 모셨던 돌널이 있다고 한다. 다시 산을 내려오면 원음전 서쪽은 극락전 권역, 동쪽은 요사채 권역이다. 요사채 권역에 숙소로 쓰는 듯한 큼지막한 전각에 붙은 ‘흥녕원’(興寧院)이라는 편액이 눈길을 끈다. 구산선문 시절의 흥녕선원 터에서 법등(法燈)을 이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서쪽의 극락전 앞마당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극락전 오른쪽에 보이는 커다란 비석이 흥녕사터 징효대사탑비다. 비문에는 징효 절중이 출생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석은 대사가 입적하고 44년이 지난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워졌다. 왼쪽 산비탈에는 그의 부도가 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절중과 후삼국의 관계다.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알려진 궁예는 오늘날 영월 남면의 세달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양길도 멀지 않은 원주에서 세력을 키웠다. 흥녕사가 소실된 891년의 병화는 ‘북원의 적수 양길이 그 부장 궁예를 보내 백기(百騎)를 거느리고 북원 동쪽의 부락과 명주 관할인 주천 등 십여 군현을 침습하게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학계는 본다. 궁예가 군사를 몰아 험준한 영월 지역으로 들어간 목적은 사자산문의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한편 징효대사탑비의 건립과 흥녕사의 중건은 고려 왕실이 주도했다. 탑비에 적힌 시주자 가운데 왕요군(王堯君)과 왕소군(王昭君)은 훗날 정종과 광종이 되는 태조 왕건의 아들들이다. 또 태조의 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16비 소광주원부인, 혜종비 후광주원부인의 아버지인 광주(廣州)의 왕규를 비롯해 왕건의 장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결국 절중과 사자산문이 궁예와는 적대적이었던 반면 왕건과는 우호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지방선거 후 평양 방문… 경평 축구 등 교류 논의”

    “지방선거 후 평양 방문… 경평 축구 등 교류 논의”

    박원순 서울시장은 17일 이번 6·13 지방선거가 끝나면 평양을 방문해 남북 교류·협력 방안으로 경평축구 문제 등을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박 시장은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서 “그동안 (남북 교류 관련) 3대 방향과 10대 정책을 준비해 놓고 있다”며 “그중에 경평축구나 내년에 서울에서 열릴 전국체전, 그 외에도 역사 유적을 발굴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록하는 등 중·장기적 협력 방안을 지난번 북한 대표단이 왔을 때 충분히 설명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박 시장님은 언제나 초청돼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가 잘 끝나고 나면 평양을 방문해 이 문제를 논의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남북 교류에서 지방정부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박 시장은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의 중요한 내용을 지방정부가 해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서울시 미세먼지 대책과 대중교통 정책 등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박 시장은 미세먼지 대책으로 대중교통 무료 정책을 시행해 150억원의 예산을 낭비했다는 지적에 대해 “보다 효과가 있는 차량 강제 2부제나 차량 등급제로 가는 마중물 정책”이라고 반박했다. 박 시장은 서울시가 검토 중인 택시요금 인상 계획에 대해선 “여러 위원회를 통해 상황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다음 결정할 것”이라고 즉답을 피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서울신문이 지난 12일부터 서울시 및 서울도시문화연구원 등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를 시작했다. 올해로 세 번째다. 미래유산이란 아직 문화재로 등록되진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 물려줄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서울 근현대 문화유산이다. 지난해 투어와 비교할 때 유형의 유산에서 무형의 유산으로, 사대문 안에서 사대문 밖으로 답사 영역을 넓힌 게 특징이다. 투어는 지난해 참가자들이 재체험을 희망한 사대문 안 주요코스 6개,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새로 선정된 무형 서울미래유산 6개, 그리고 지역별·어젠다별·계절별 코스 23개 등 총 35개 코스로 편성했다. 오는 12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리며 혹서기인 7, 8월 두 달 동안은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5회 동안 야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2일(토)과 마지막 날인 9월 26일(수) 2회는 ‘한가위 특별투어’로 운영한다. 전문성을 갖춘 18명의 베테랑 해설자가 투입되며 매회 3명 이상의 진행요원이 안전한 투어를 보장한다. 국내 도보답사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도입했다. 소음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해설사 앞에 있어야만 들리던 불편도 해소할 수 있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편안하게 답사여행을 할 수 있다. 이르면 7월부터 서울시 각 중학교에서 추천, 선발된 ‘미래청소년 기자단’도 동행해 탐방 분위기를 풋풋하게 띄울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에서 참여하기, 탐방, 접수 순으로 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그주 참여자를 선착순으로 30명 받는다. 대기자도 10명 선착순 모집한다. 무료다.# 도로원표·광화문지하보도…걸음마다 미래유산 2018년 첫 투어가 시작된 5월의 두 번째 토요일인 지난 12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날 10시쯤 종각역 4번 출구 앞에서 집결해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지급한 뒤 사용법을 시연할 예정이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져 역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등행사 등으로 광화문과 종로 일대 차량 진입이 통제돼 불참 및 지각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우였다. 답사용 단체 카톡방에서 교통통제 및 집결지 변경을 알리는 긴급 메시지를 수신한 예약자 30여명이 예외 없이 시간을 지켰다. 형형색색 우산을 받쳐 든 참가자들은 진행자들의 ‘철통 호위’를 받는 가운데 이기훈 해설사와 함께 정시에 보신각을 출발했다. 지난달 새로 설치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보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 공인 맛집인 청일집, 미진, 청진옥을 둘러봤다. 중학천을 따라 고종즉위40년기념 칭경비전과 교보문고 앞 벤치에 편안하게 모신 ‘3대’의 작가 횡보 염상섭도 만났다. 도로원표와 광화문지하보도, 충무공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차례차례 누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에서 비에 젖은 백악산과 경복궁의 운치를 만끽한 뒤 세종로공원에 서 있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에 얽힌 해설과 세종문화회관 40년사를 들으면서 비에 젖은 세종로 투어를 마무리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처음 지급된 고감도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덕분에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큰 불편 없이 낭만적인 투어를 즐길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참가자 단체 카톡방에서 바로바로 찾아볼 수 있는 해설 자료는 덤이었다. ‘한국의 얼굴’이자 서울의 중앙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의 지층은 현재 아스팔트 지상보다 무려 8m 아래에 있다.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이 활보하던 최초의 인공도로면 위에 조선 중후기 도로 층이 쌓이고, 또 19세기와 일제강점기 때 지층 등 모두 11개의 지층이 겹겹이 덮여 지금의 표면을 이뤘다. 광화문 8m 지층 속에 600년 묵은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서울의 주축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북한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풍수설에서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이요, 지리산에서 뻗은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조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향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종로(운종가)이다.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는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광화문광장 끝자락에서 왼쪽으로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이른바 정(丁)자형 길이다. 서울의 주축(主軸)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서울 중앙의 매력에서 음식을 뺄 수 없다. 서울음식이란 무엇일까. 명물 음식점은 도심재개발로 옛 터를 잃고 빌딩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투어단은 이날 빈대떡의 청일집, 해장국의 청진옥, 메밀국수의 미진을 순례하면서 서울음식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오른 42개의 음식점 중 종로구에는 이들 3곳을 포함해 이문 설농탕(설렁탕), 진아춘(중식), 형제추어탕(추어탕), 열차집(빈대떡),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떡볶이), 유진식당(냉면) 등 모두 9곳이 포진한다. 중구에는 용금옥(추어탕), 은호식당(꼬리곰탕), 문화옥(설렁탕), 우래옥(냉면), 안동장(중식), 명동 할매낙지(낙지볶음), 부민옥(해장국), 오장동 함흥냉면(냉면), 고려 삼계탕(삼계탕), 유림면옥(메밀국수), 산골막국수(막국수), 진주회관(콩국수), 라 칸티나(양식), 무교동 북어국집(북엇국), 전주중앙회관(비빔밥) 등 무려 15곳이 선정됐다. 종로·중구 2개 구에만 전체의 절반이 넘는 24곳이 집중돼 있다.# 궁중요리 등 서울 전통음식은 잊혀져 가 한결같이 서민음식이다. 궁중요리와 반가음식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아남은 미래유산은 서울의 전통요리가 아니라 지방과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퍼뜨린 팔도요리와 외국음식이란 점이 특징이다. 보통 서울음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궁중요리와 설렁탕, 빈대떡, 민어탕, 불고기에서 서울음식의 지평이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음식은 종로의 설렁탕과 빈대떡, 신당동 떡볶이, 을지로 평양냉면과 골뱅이, 동대문 닭 한마리, 오장동 함흥냉면, 신림동 순대, 마포 돼지갈비, 왕십리 곱창, 장충동 족발, 성북동 칼국수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특정 음식이 손꼽힌다. 서울로 모여든 이북 사람, 영호남 사람이 음식과 함께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 두루 섞였다. 비빔밥 문화이다. 안타깝게도 서울토박이 음식은 뒷전으로 밀렸다. 글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동촌(대학로 일대) ●일시 및 집결장소 : 5월 19일(토) 오전 10시 혜화역 2번 출구 마로니에공원 좋은공연안내센터 앞
  • [단독] 2020년부터 초등 신입생에 문화비 年10만원씩 지급

    [단독] 2020년부터 초등 신입생에 문화비 年10만원씩 지급

    문체부 ‘워라밸’ 실현 등에 초점 예술가 지위 보장·처우도 개선 남북 문화·체육 교류 대폭 확대 이르면 2020년부터 초등학교 신입생 1인당 연간 10만원의 문화비가 지급된다. 현재 낙후·폐쇄된 놀이터를 문화 체험이 가능한 일종의 ‘키즈 카페’인 ‘문화놀이터’(가칭)로 재단장할 방침이다.문화체육관광부는 16일 발표한 새 문화예술 기조인 ‘사람이 있는 문화-문화비전 2030’과 새 예술 정책인 ‘사람이 있는 문화, 예술이 있는 삶’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문체부가 발표한 새 문화예술 정책은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가 ‘일 중심의 과로사회’를 문화예술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다운 삶으로 전환하는 ‘삶의 질’ 혁신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전 생애주기별 문화복지를 국가가 보장하는 의무적 권리로 접근하는 인식이다. 특히 아동기부터 문화 체험 기회를 의무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초등 입학생을 위한 ‘첫걸음(New Step) 문화카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문체부는 매년 45만명 규모인 초등학교 신입생 전원에 한해 연 10만원을 지급하는 방안을 수립하고 기획재정부와 협의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실현을 위해 공휴일 전후의 연차 사용 의무화를 추진하고, 중소기업 근로자 휴가지원제도도 2022년까지 연간 10만명으로 대상을 대폭 확대한다. 이 밖에 문화놀이터, 저소득층 고령자에 대한 통합문화이용권 지원금도 확대할 계획이다. 올해 현재 3만 2000여개인 문화동아리를 2030년까지 10만개로 양성하고, ‘1시·군·구 1스포츠클럽’, 1인 가구와 노인들에 대한 문화예술치유 프로그램 제공 등도 헌법상 보장하는 ‘문화권’으로 추진된다. 문체부는 문화다양성 제고를 위해 장애인예술 정책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장애인예술 전용 공연장과 문화예술학교, 수어와 점자의 위상을 한국어·한글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방침이다. 둘째는 예술가의 지위 보장 등을 통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체부는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2020년부터 공공기관에서 제외하고, 문예진흥법 개정을 통해 ‘한국예술위원회’로 명칭도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 위원장은 호선제로 선출되고, 예술창작 지원을 제외한 나머지 기능은 타 기관으로 이관된다. 국가 문화예술정책의 민관 협치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컨트롤타워’인 ‘문화비전위원회’ 구성도 검토되고 있다. 앞으로 예술가의 지위는 법령으로 보장된다. 문체부는 ‘예술가의 지위 및 권리보호에 관한 법률’(가칭) 제정을 추진하고, 예술가권리보호위원회와 예술가보호관(개방형 직위)도 신설한다. 예술창작의 사회적 보장 차원에서 예술인 고용보험과 복지지원센터(가칭)를 설립하고, 스포츠 인권 보호와 비리 근절을 위한 스포츠윤리센터(가칭)도 신설한다. 셋째 남북 문화예술·체육 교류의 대폭 확대다. 문체부는 남북 간 교류협력의 안정적 제도화를 위한 남북 문화교류협정 체결과 남북 문화교류협력진흥원(가칭) 설립을 추진한다. 여기에는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분단 전 언어·음식·예술 원형 확보를 위한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 북한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지원 계획도 포함됐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이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국민과 문화예술인들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정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정부 대변인 자격으로 공식 사과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잘츠부르크서 마지막 담금질…‘결전의 땅’ 상트페테르부르크 입성

    잘츠부르크서 마지막 담금질…‘결전의 땅’ 상트페테르부르크 입성

    잘츠, 러와 기후 비슷·시차 적어 상트, 밤 11시도 밝고 습도70% ‘신태용호’가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마지막 두 차례 평가전을 치르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레오강은 베이스캠프가 차려지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조별리그 경기가 펼쳐지는 세 도시와 기후가 비슷하고 시차가 한 시간밖에 나지 않아 사전 캠프로 낙점됐다. 상트로 이동할 때의 동선도 좋고 전지훈련 경험이 많아 선수단에 협조적이며 조용하고 아늑한 점도 좋은 점수를 얻었다. 다음달 11일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는 비공개로 치러지지만 나흘 앞서 열리는 볼리비아와의 경기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방침에 따라 팬들에게 공개된다. 유럽 각국의 교민이나 유학생, 여행객들이 신태용호의 전력 담금질이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모차르트의 고향… 곳곳 음악 축제 잘츠부르크는 수도 빈에서 서쪽으로 300㎞ 떨어져 있어 오히려 독일 뮌헨에 더 가깝다. 해서 대표팀도 러시아에 입성할 때 뮌헨 공항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스위스쪽 알프스보다 오히려 경관이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는 알프스를 끼고 있어 쾌적하고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음악의 향기를 맡아 보는 것도 좋겠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옛 시가지와 호엔잘츠부르크성, 미라벨 궁전, 헬브룬 궁전, 모차르트 생가와 카페, 지역맥주인 스티겔 맥주 양조장 등을 돌아보고 시 곳곳에서 음악 축제를 즐길 수 있다. 27유로(약 3만 4500원)만 내면 대중교통과 유람선을 이용하고 맥주 시음에다 주요 관광지 입장도 가능한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베이스캠프이기도 하면서 대표팀이 F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면 경기를 치르는 곳이다. 조별리그 세 경기를 하면서 계속 상트를 오가야 하는 대표팀으로선 내심 조 1위를 벼르는 이유가 된다. 6~7월 평균기온은 섭씨 17.3도이며 비오는 날이 17.5일로 잦지만 양이 많지는 않다. 습도가 70%로 높다. 캠프가 차려지는 곳의 해발고도는 176m다. ●상트, 조 1위 땐 16강 경기 치러 유리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640㎞ 거리에 있다. 북극에서 멀지 않아 백야 때문에 밤 11시에도 환하다.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세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시작됐으며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됐고, 1924년 레닌 사망 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가 1991년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무대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가혹한 포위 공세를 견뎌낸 도시로 유명하다. 건축적으로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도시로 손꼽힌다. 핀란드만과 네바강을 따라 운하와 수로, 다리들이 많아 북방의 베네치아로 통했다. 옛 해군부 건물,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된 겨울궁전, 그 광장에 세워진 무게 600t에 높이 50m의 알렉산드르 기념주, 데카브리스트 광장, 표트르 대제 기마상, 넵스키 대로, 스트로가노프·아니치코프·슈발로프 궁전, 카잔 대성당, 푸시킨 극장 등이 유명하다. 250개의 조각품을 거느린 여름정원과 초기 바로크 양식의 여름궁전도 빼놓을 수 없다. 수녀원이었다가 볼셰비키 본부로 이용된 스몰니 학원도 있다. 10월 혁명 때 겨울궁전으로의 진격 포성을 울린 순양함 오로라호가 영구 정박돼 있다. 레닌이 스위스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핀란드역도 둘러볼 만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러시아 명화만 모은 국립박물관, 푸시킨 하우스 문학박물관도 놓치면 곤란하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스톤헨지, 50만 년 전 ‘빙하’가 옮겼을 것” 새로운 주장

    “스톤헨지, 50만 년 전 ‘빙하’가 옮겼을 것” 새로운 주장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석군 중 하나인 스톤헨지의 ‘비밀’을 찾았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나와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스톤헨지는 수도 런던에서 서쪽으로 130㎞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에 있다. 원형으로 배치된 거대한 입석 구조물 유적으로, 스톤헨지에 사용된 석재는 셰일(대사암)과 블루스톤(휘록암)이다. 이 두 종류의 암석으로 이뤄진 스톤헨지는 바깥쪽 원을 셰일 서클, 안쪽 원을 블루스톤 서클이라고 부른다. 스톤헨지의 건설과 관련한 많은 가설과 논란이 있으며, 특히 5000년 전 50t에 가까운 돌을 수 백㎞ 떨어진 곳까지 운반했는지에 학자들의 관심과 의문이 쏠렸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브라이언 존 박사는 최근 자신이 발간한 책 ‘스톤헨지 블루스톤’에서 “스톤헨지를 둘러싼 각종 이론은 ‘신화’에 가까우며, 실제로는 50만 년 전 빙하에 의해 거대한 돌들이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펼쳤다. 5000년 전 누군가 거대한 돌을 옮기거나 끌어서 스톤헨지를 만들었다는 게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인데, 이와 달리 존 박사는 석기시대의 고대 인류가 어떻게 이러한 ‘위업’을 달성했는지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스톤헨지 안쪽에 사용된 블루스톤은 50만 년 전 원래의 자리였던 영국 남서부 지역에서 현재의 지역으로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서부 지역에 풍부했던 빙하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이론은 스톤헨지를 세운 고대 인류가 거대한 돌덩어리를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영적인 물체로 인지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즉 당시 고대 인류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얼음(빙하)에 실려 온 거대한 돌덩이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 또한 스톤헨지를 건축하는데 쓰인 돌은 고대 인류가 채굴한 것이 아닌 본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이며, 블루스톤을 실은 빙하의 얼음이 녹은 뒤 현재의 솔즈베리 평원에 돌만 남아있는 것이 현존하는 스톤헨지의 역사라고 존 박사는 설명했다. 실제로 다양한 크기의 돌들은 솔즈베리 평원뿐만 아니라 켄트와 버크셔, 에섹스, 옥스퍼드셔 등에서도 소량으로 발견된다. 어떻게 돌들이 이동했는지 여전히 불분명한 돌들의 기원도 스톤헨지와 유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영국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기념물 중 하나인 스톤헨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스톤헨지가 고대의 천문대였다는 학설부터, 스톤헨지가 로마인들이 건설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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