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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선 내 정치를 말한다] 새누리 민경욱

    [초선 내 정치를 말한다] 새누리 민경욱

    ‘청와대의 입’에서 선량(選良)으로 변신한 인천 연수을의 새누리당 민경욱 당선자는 “국회와 청와대 간 소통의 적임자”라면서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Q. KBS 앵커 출신에 청와대 대변인까지 지냈다. 뭐가 부족해 정치를 선택했나. A. 선택한 게 아니라 찾아왔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대변인직 제안을 수락하는데 나흘을 고심했다. 김 실장이 물러나기 전에는 따로 불러 “방송국에 계시는 분 모셔와 힘들게 해 미안하다. 민 대변인의 운명이다”고 하더라. 공직에 입문한다 생각했는데, 결국 정치를 하는 단초가 됐다. Q. 정치가 갖는 의미는. A. 고작 선거 한 번 치렀을 뿐이다. 아직 정치를 모른다. 유리상자 안에 나를 발가벗겨 유권자들의 평가를 받아야 했고, 혼신의 힘을 바쳤다. 정치는 전력투구다. Q. 정치인으로서 행복한가. A. ‘시키는 일’에서 벗어났다. 앵커와 대변인의 자리는 하고 싶은 일이나 시키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앵커와 대변인 당시 모습에 ‘거만하다’는 말도 참 많이 들었다. 그래서 선거 운동 기간 마술을 했고, 춤을 췄고, 창도 했다. 끼가 많은 원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행복하다. Q. ‘엄친아’ 이미지다. A. 진정성을 봐달라. 언론사 입사시험만 20번 떨어지고 가까스로 합격했다. 동기 중 나이가 제일 많아 더 열심히 했다. 기자 생활 23년 동안 청와대 출입은 못했는데, 청와대 대변인 역할도 했다. 정치를 하면서 위기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칙은 안 한다. 앞 다르고 뒤 다르다는 얘기는 듣지 않겠다. Q. ‘민경욱식’ 진정성이 현실 정치를 어떻게 바꿀 수 있나. A.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기자로서 대변인으로서 소중한 자산이다. 내 뜻을 굽힐 줄 알고, 인적 네트워크도 있다. 당·청 간, 계파 간, 여야 간 소통에 큰 쓰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Q. 20대 국회에서 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A. 막내라서 일하기 좋다. 기자 시절 여야를 출입했다. 국회라는 공간이 낯설지 않다. 대개의 초선 의원들은 중앙정치에 대한 이해가 낮은 편이라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 나는 아니다. 현 정부의 정치 철학도 공유했던 만큼 국회와 청와대 간 소통의 적임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Q. 정치적 롤모델은. A. 박근혜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문제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박 대통령의 ‘원칙은 지킬수록 강해진다’는 표현과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실제 선거를 돕겠다며 자리 청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권력을 잡기도 전에 팔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Q. 언제까지 정치를 할 것인가. A. ‘3위 일체’를 따를 것이다. 정치적 정열, 신체적 건강, 국민적 성원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언제든 정치를 그만둘 것이다. 세 가지가 있는 한 정치를 지속할 것이다. 글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사진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프로필 ▲1963년 경기 인천 출생 ▲연세대 행정학과 학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행정학 석사 ▲청와대 대변인, KBS 보도국 문화부장, 앵커, 워싱턴 특파원
  • 글쟁이들의 서정, 반달 화폭에 소담하게 담았네

    글쟁이들의 서정, 반달 화폭에 소담하게 담았네

    ‘나에게 말을 몇 필 다오/올해의 첫 배가 갖고 싶소/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의 말 중/가장 순결한 말을/노한 말을/갈기 세운 말을 다오/여윈 말도 좋소’ 둥글둥글 순박한 글씨 옆으로 붉은 말들이 힘껏 땅을 박차 오른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두 예인, 박완서 작가가 쓰고 김점선 화가가 그린 서화선(書畵扇)이다. 반달 닮은 여백에 문인들의 서정이 사뿐 깃들었다. 김춘수·서정주·박두진·구상·조병화·김남조·김상옥 시인, 김동리·박경리·박완서·최인호 소설가 등 시대의 글쟁이들이 부채에 새긴 글과 그림을 모아 놓으니 또 하나의 예술품이 됐다. 오는 29일부터 6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열리는 ‘서화선 명품전-작고 문인 중심’이다. 전시는 관장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와 남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부채 컬렉션에서 태어났다. 40여년간 부부가 모은 부채는 300여점. 이어령 선생이 문인, 서예가, 화가 등 예술가들에게 선물로 받거나 부탁해 받은 것, 강 관장이 서영은 작가의 도움을 받아 전해 받은 것들이 어느새 이만큼 모였다. 문인들의 서화선을 중심으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이응로, 천경자 등 유명 작고 화가나 서예가들의 작품까지 90여점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박종화 시인이 쓴 글씨 부채를 받고 너무 아름다워 그때부터 부채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강 관장은 “하나하나의 부채가 늘 우리에게는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부채 모으기가) 즐거운 축제가 되려면 그려 주는 분들이 기꺼이 동참해 줘야 하니 괜한 욕심을 부리거나 서둘러 모으려 하지도 않았죠. 특히 부채에는 대가 붙여져 있어 우툴두툴한 면에 그려야 하니 얼마나 악조건이겠어요. 최인호 작가도 내가 부탁하니까 겨우 해 줬지요. 글씨에 자신 없다고 거절한 문인들을 다그친 것도 용서를 빌고 싶네요. 하지만 이 하얀 반원형 공간은 그리는 사람마다 구도와 개성이 다르게 펼쳐지는 신묘한 화폭이지요. 많은 사람과 그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고 싶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글씨체로 자신의 시 ‘모른다고 한다’를, 김남조 시인은 아이처럼 천진한 서체로 시 ‘선물’의 구절을 부채에 새겼다. 제주도와 보름달 아래 풍광을 각각 부채에 담아낸 김승옥, 최인호 작가의 작품은 그림 솜씨가 화가 못지않게 빼어나다. ‘석류나무집 이야기’를 썼던 한무숙 작가의 서화선에는 발간 석류 다섯 알이 가지에 소담스레 맺혀 있다. (02)379-3182.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씨줄날줄] 라스코 동굴벽화/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라스코 동굴벽화/최광숙 논설위원

    “머리인가? 다리인가?” 인류를 진화하게 한 최초의 원동력을 머리에서 찾을 것인지, 다리에서 찾을 것인지를 놓고 인류학자들을 오랫동안 갑론을박 논쟁을 벌였다. 인간 고유의 뛰어난 두뇌를 생각한다면 머리가 아닐까 싶겠지만 ‘인간다운 인류’의 시작은 두 발 걷기가 먼저라는 결론이 내려졌다.(인류의 기원, 이상희 저) 인간은 두 발로 걸으면서 요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네 발로 걸을 때 사용하던 윗몸을 일으키게 돼 숨쉬기가 편해져 목소리를 내게 됐다. 이는 언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앞의 두 다리(팔)도 자유로워져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됐다. ‘도구와 언어’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출발점이 됐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활동한 구석기가 되면서 인류 문화는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이전에 없던 암각화 같은 문화예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직립보행으로 생산적인 활동이 가능해짐에 따라 그저 먹을 것에만 열중하던 원초적인 생활을 벗어나 창작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석기시대 사람들도 현대인들처럼 예술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증명된 것이 바로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다. 1940년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베르제 강변의 몽티나크라는 도시에서 한 소년이 기르던 개가 사라지자 온 마을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벽화를 발견했다고 한다. 기원전 1만 5000~2만년에 그려진 이 동굴벽화는 ‘구석기 시대의 피렌체’라고 불릴 정도로 작품 수도 많고 수준도 뛰어나다. 여러 마리의 들소와 말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그림과 어린 말들 위로 뛰어오르는 커다란 황소 그림은 생생한 역동성과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걸작들이다. 이 벽화는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굴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은 당시 수렵생활을 하던 인간에게 중요한 먹을거리였기 때문에 생활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로도 해석된다.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영적인 삶도 보여 준다. 일례로 새의 머리를 한 남자가 들소의 공격을 받아 죽는 그림이 있는데, 새의 머리를 한 남자 아래에 또 한 마리의 작은 새가 있다. 이는 그가 죽는 순간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평범한 사냥 사고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통행을 묘사한 것이다.(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저) 한국에서도 이 동굴벽화를 볼 기회가 생겼다. 최근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경기도 광명시에서 라스코 동굴벽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이 전시장의 건축 및 전시를 맡았고 동굴벽화 복제 작품 등이 선보인다. 한국인 입양아 출신인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홍보대사다. 구석기 시대 인류 조상의 발자취를 한번 쫓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광명동굴 ‘라스코벽화전’에 오지·불우이웃청소년 초청한다

    광명동굴 ‘라스코벽화전’에 오지·불우이웃청소년 초청한다

    오지 산간과 섬지역에 사는 문화 소외 청소년들이 라스코동굴벽화 광명동굴전에 초청된다. 경기 광명시는 20일 이를 위해 라스코동굴벽화전 조직위원회와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광명시사회복지협의회 등 3곳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초청사업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개인이나 기업 기부와는 별도로 동문회와 향우회 등을 상대로 기금 모금을 권장할 방침이다. 광명시는 초청한 청소년들에게 라스코벽화전뿐 아니라 광명동굴과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 오리서원, 충현박물관도 보여줄 예정이다. 초청사업에는 한국계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과 김규리 영화배우가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후원은 전화가 060-700-0006(1통 3000원)이며, 은행은 농협 301-0102-6051-71, 우리은행 1005-102-959992으로 예금주는 경기공동모금회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적인 라스코동굴벽화 광명동굴전을 보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많지만 가정 형편상 도서벽지 학생들은 보러 오기 힘든 형편이다”며 “많은 분들이 기금 모으기에 참여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한지 한류, 문화적 가치 넘어… 패션·가구 등 상업적 활용 가능성 무한”

    “한지 한류, 문화적 가치 넘어… 패션·가구 등 상업적 활용 가능성 무한”

    고문헌 전문가로 한국정부 자문 “유럽 사람들 아직 한지 잘 몰라 인증 땐 시장 확대할 일만 남아” “한지(韓紙)는 굉장히 특별한 종류의 종이예요. 이탈리아 국립도서병리학연구소(ICRCPAL)는 세계 최고의 종이 복원 기관답게 테스트 과정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곳에서 발간하는 ‘문화재 복원 재료 가이드라인’에 한지가 등재되면 문화적으로도 의미 있겠지만 상업적으로도 더 많은 한지가 세계적으로 유통된다는 걸 뜻합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마리아 조반나 화디가 메르쿠리 전 주한 이탈리아 대사 부인은 한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고문헌 전문가로 한국 정부의 한지 세계화 프로젝트 자문역을 맡고 있는 그는 외교관 남편을 따라 1987~1989년, 2011~2015년 두 차례 한국에 머물면서 한글과 한지 등 한국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현재 로마 외국어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문화부 산하 도서관 및 기타 문화기관 관리총국 소속 문헌학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한지 인지도는 아직 낮은 편인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지 세계화가 탄력을 받으면 유럽 시장에서 한지 점유율이 제로베이스에서 올라만 갈 것이기 때문이다. “구멍이 나거나 찢어진 종이를 복원하면 텍스트 연구에 상당히 도움이 돼요. 도서 복원에 한지는 일본 화지(和紙)만큼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유럽에서의 한지 활용도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한지는 여러 분야에서 유용한 재질이고 무한한 활용 가능성도 갖고 있어요. 특히 가구 분야에 한지가 사용되면 좋을 것 같아요. 지난 1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서 한지 전시회가 있었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지를 이용한 가구를 본 뒤 한지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패션 분야에서도 널리 사용할 만한 재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했다. 1300~1500년 사이의 고전 문헌 연구로, 주로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텍스트를 고찰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유럽의 르네상스와 비슷한 문화운동이 시작됐다는 걸 알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공부하다 우연히 세종대왕 시대의 문화를 접했는데 굉장히 신선했다”고 말했다. 88올림픽을 전후해 한국에 처음 머물 당시 훈민정음에 매료됐고 한글을 적은 한지에도 주목했다. 인사동, 동대문 등지를 찾아 한지를 직접 살펴봤고, 한국을 찾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릴 만한 문화유산으로 한지를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그는 “2011년 주한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된 남편을 따라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너무 행복했다”면서 “남편의 두 번째 한국 발령 전에 이탈리아 문화부에서 관리하는 콜레조로마노도서관에서 일했는데 그곳에 보존된 책들 중 훈민정음 복사본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남편 메르쿠리 전 대사는 현재 이탈리아 외교부 국제화총국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 및 환경 담당 특명전권공사로 근무하고 있다. 글 사진 로마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인사]

    ■코트라 △경영지원본부장(부사장) 이태식 ■문화일보◇논설위원실△논설주간 이용식 △논설위원 최영범 ◇편집국△편집국장 김병직 △사회부장 김상협 △문화부장 장재선◇제작국 △윤전1팀장 김부식 ◇기획관리국 △기획팀장 김동욱
  • [세종로의 아침] 누가 동강할미꽃을 꺾는가/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누가 동강할미꽃을 꺾는가/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며칠 전 국립수목원에서 매달 가볼 만한 야생화 명소를 선정해 발표하겠다고 했다. 야생화를 제대로 알고 즐길 수 있도록 꽃에 대한 여러 정보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누구라도 반길 만한 소식이다. 한데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야생화 명소가 과연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을까. 이런 걸 두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공연한 걱정이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초봄이 되면 유난히 몸살을 앓는 꽃이 있다. 동강할미꽃이다. 강원 영월, 정선 등의 바위벼랑에 위태롭게 피는 자태가 예뻐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찍자고 덤벼드니 문제도 생긴다. 서식지가 훼손되거나 하루아침에 꽃이 사라지는 일도 생긴다. 자신만 소유하려는 집착이 부른 참극이다. 올해도 우려했던 일이 빚어졌다. 최근 페이스북에 뿌리 부근이 날카롭게 잘린 동강할미꽃 사진이 올라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누군가 집에서 잘 기르기 위해 데려갔을 것”이란 비아냥과 자조가 뒤섞인 댓글도 이어졌다. 해마다 반복됐던 일이 어김없이 되풀이된 셈이다. 누가 할미꽃을 꺾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전의 기억에 비춰 볼 때 일부 ‘개념 없는’ 사진작가의 행위였을 거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모양새다. 이는 일부 사진작가들이 보여 준 그릇된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앵글에 방해가 된다며 국내 최고령 대왕송의 가지를 자르고, 예쁜 사진 찍겠다며 어린 새를 둥지에서 꺼내 나뭇가지에 일렬로 세워 놓기도 한다. 그러다 문제가 불거지면 “예술로 봐 달라”고 강변한다. 2014년 경북 울진의 대왕금강송 가지를 잘라 물의를 빚었던 이는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당시 촬영했던 대왕송이 포함된 사진전을 열어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상황이다. 이뿐인가. 얼마 전 수리부엉이(천연기념물 제324-2호) 둥지 앞의 나뭇가지를 쳐내고, 한밤중에 플래시를 펑펑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 구설에 올랐던 이들도 그들이다. 오페라 공연장에서 플래시를 칠 수 없듯 야행성 동물을 향해 플래시를 쳐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이 아닌, 사진작가의 윤리에 속한 문제다. 그런데도 일탈 행위에 대해 꾸짖으면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며 되레 목소리를 높인다. 야행성인 수리부엉이에게 예민한 시력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인데 카메라 플래시가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사진작가들의 도덕불감증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앞서 든 예는 일부에 불과하다. 명자깨나 날리는 전국의 사진 촬영 명소들을 돌다 보면 혀를 차는 장면들과 수시로 마주치게 된다. 이쯤 되면 미술작품 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릴까 싶어 카메라를 소지조차 못 하게 하는 나라에서 자연과 야생 동식물에 대한 배려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반감도 생긴다. 이제 어떤 형태로든 일부 사진작가들의 일탈 행위를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 늘 그렇듯 문제는, 또 사고는 남과 다른 것을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소유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꾸짖고 비난해도 안 되면 강제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 angler@seoul.co.kr
  • 광명동굴 라스코동굴벽화전 16일 개막

    광명동굴 라스코동굴벽화전 16일 개막

    아시아 최초로 프랑스 라스코동굴벽화전이 16일 광명동굴에서 개막한다. 경기 광명시는 가학동 광명동굴 라스코 전시관 앞에서 ‘프랑스 라스코동굴벽화 국제전시 광명동굴전’ 개막식을 열고 5개월간의 전시 일정에 들어간다고 12일 밝혔다. 이날 개막식에서는 ‘이상봉 패션컬렉션’이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2주년을 맞아 디자이너를 꿈꾸던 단원고 고 이장환 학생의 사연을 모티브로 꾸민 ‘드림로드-하늘로 가는 길’이다. 개막식에는 플뢰르 팰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페이로 프랑스 하원의원,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김창준 전 미국 하원의원 등이 참석한다. 식후 행사는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총연출을 맡았다. 개막식은 ‘어둠과 빛, 시간과 흔적’이란 주제로 ‘라스코벽화를 재현한 미디어아트’와 ‘석기시대 테마 무용 퍼포먼스’,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컬렉션’ 순으로 진행된다. 라스코동굴벽화 전시관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이 건축과 전시를 맡았다. 컨테이너 62개를 쌓아 라스코동굴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해 전시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는 9월 4일까지 열리는 라스코동굴벽화전은 2만년 전 구석기시대 인류의 대표적 동굴벽화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라스코동굴벽화를 재현한 전시회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명동굴과 라스코동굴벽화 전시회를 주중 무휴로 관람할 수 있도록 정기휴장일인 매주 월요일에도 문을 열기로 했다”며 “여름에는 야간에도 문을 열어 관람에 불편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 같은 인생…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 같은 인생…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지난 1일 서울 도봉구 삼양로 캠퍼스에서 만난 이원복(70) 덕성여대 총장은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깔끔한 인상이 그랬고, 빠르고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화법이 또 그랬다. 그는 50년 이상 만화를 그려 왔지만, 정해진 마감 시간을 어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첫 어린이 신문 연재로부터 55년째를 맞은 그의 만화와 인생 얘기를 들어 봤다. -“원복이라고 했지? 네가 만화를 그렇게 잘 그린다며? 어디 실력 좀 한 번 볼까?” 친구 아버지가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셨다.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찾아간 서울 종로구 중학동의 소년한국일보 편집국. 1962년 당시 나는 경기고 1학년이었고, 친구 아버지는 그 어린이 신문의 주간이셨다. 아들로부터 ‘교내 학보에 만화 그리는 친구’라고 소개받은 그분은 내가 즉석에서 그린 만화를 보시더니 꽤 만족해하셨다. “우리 신문에 만화 연재해 볼 생각 없니?”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나에게 다른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친구 아버지는 당시 유명 언론인이자 수필가,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조풍연(1914∼1991) 선생이셨다. 조 선생은 한국일보에서 문화부장, 사회부장 등을 지내고 이태 전 소년한국일보가 창간될 때 초대 주간으로 왔다. -그때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만화를 그렸다. 솔직히 만화를 ‘그리는’ 것은 아니었고, 미군 부대에서 나와 돌아다니던 명작만화들을 ‘베끼는’ 일이었다. 원본 만화 위에 습자지를 대고 그 아래 비치는 그림의 선을 따라 본을 뜨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내가 작업을 마치면 영어 번역자가 만화 속 말풍선에 한글 대사를 집어넣었다. 나의 첫 연재물은 월터 스콧의 소설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였다. 이어 ‘엉클 톰스 캐빈’, ‘마르코 폴로’ 등을 차례로 그렸다. -아무리 베낀 그림이라고는 해도 나의 손끝을 떠난 그림들이 많은 학생들이 보는 신문에 실린다는 건 고1 학생에겐 꽤 자부심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기쁘게 했던 건 찢어지게 가난한 고등학생의 손에 쥐여진 노란 봉투였다. 처음 받은 돈이 3000원이었는데, 그 돈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처분했다. 1000원을 떼어 형에게 주고, 남은 돈으로 영한사전 한 권 사고 대한극장에서 영화 ‘벤허’를 봤다. 그랬는데도 몇백원이 남았다. 만화가 내 생계수단이 된 출발점이었다. -내가 다섯 살 때 6·25가 터졌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대전에서 꽤 부유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면서 시내에 큰 여관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모두 폐허가 돼 있었다. 아버지는 이것저것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서울에 가면 좀 나아질까 해서 7남내 중 막내인 내가 열 살 되던 1955년 가족을 데리고 마포에 정착했다.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코딱지만한 월세방에 부모님과 4형제가 누우면 몸을 뒤집기도 버거웠다. 우리 7남매 중에 큰누나가 결혼해 부산에서 형을 데리고 살고, 둘째 누나가 돈 벌러 지방에 내려가 있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한데에서 잠을 자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되는 일 없기는 서울이나 대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옷수선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대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 갑작스럽게 고생을 만난 탓인지 서울에 올라오고 얼마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몇 년 뒤 낙향하셨고,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는 7남매에게 물려주신 게 없었지만, 약간의 재능은 주셨다. 대체로 공부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그중에서도 나에게는 그림에 대한 재능까지 내려 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내 그림 실력은 유명했다. 너댓 살 때부터 영화 같은 걸 보고 나면 그것들을 똑같이 따라 그리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동대문국민학교에 전학했는데, 공부는 늘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어렵지 않게 경기중학교에 들어갔는데, 2학년 때 미술반에 가입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외제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난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얼마 후 미술반을 나왔다. -점심이면 식모 아주머니가 자가용차를 타고 와서 따뜻한 도시락을 전달해 주고 가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굶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절대빈곤의 시대. 내가 사는 동네에 오면 다 우리 집 수준이었다. -고1 때부터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으니 학업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전체 석차가 중하위권에 머물렀지만, 내가 경기고 학생이라는 데서 오는 대학입시의 자신감, 이런 것은 좀 있었다. (실제로 우리 경기고 61회 동창 480명 중에 360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내가 만화 그리느라고 시간을 빼앗겨서 그렇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서울대 의대는 충분히 갈수 있을 거야.”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정한 목표였다. 하지만, 우연히 병원에서 피투성이가 돼 있는 환자를 보게 됐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바꾼 장래 희망이 건축가였다. 당시 나에게 건축가는 T자와 제도기를 들고 폼 잡고 앉아 ‘언덕 위의 하얀 집’을 그리는 직업이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직업으로서 만화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자만했던 걸까, 대학에 낙방을 하고 말았다. -재수를 해서 1966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세계의 유명한 거장들처럼 나만의 랜드마크를 하나 만들겠다는 야심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수업 첫날부터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수학 미적분이라니….’ 의지가 차츰 꺾이더니 얼마 후에는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좀 어려울 것 같아. 오늘 수업 그냥 빠질란다. 대신에 이따가 저녁에 내가 술 한 잔 살게.” 수업에 빠지는 날이 늘어갔다. 하루 종일 기숙사에서 만화를 그리고 빨리 어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달디 단 술이 나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달려나갈 생각뿐이었다. 만화를 그리다 보니 수중에 돈이 좀 있었다. 그 시절, 나와 안 노는 친구는 있었어도, 나를 알면서 내가 사는 술을 안 마신 친구는 없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돼서는 나름 나만의 그림체와 스토리를 갖게 됐다. 순수한 나의 창작 만화를 그려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했다. 명랑만화, 스포츠만화, 순정만화 등 분야도 다양했다. ‘야망의 그라운드’, ‘미니 바람 꽃구름’, ‘사랑의 학교’, ‘자마곰 삼형제’ 같은 작품이 그 시절 내 대표작인데, 신문사에서 편집국 한쪽에 내 자리를 따로 만들어 줬을 정도였다. 사실 신문사 입장에서는 적당히 인기 있는 원고 넘겨주지, 마감시간 또박또박 잘 지키지, 원고료 많이 줄 필요 없지 나 같은 보물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한창 때는 소년한국일보에 작품 3개를 동시에 싣기도 했는데, 그걸 다 ‘글·그림 이원복’으로 할 수가 없어서 ‘이상권’, ‘성창경’ 같은 친구들 이름을 필명으로 쓰기도 했다. 상권이나 창경이는 자기 이름이 공짜로 신문에 나가는 것도 모자라 나한테 술까지 얻어먹는 호사를 누렸다. -결국 나는 만화가 생활 때문에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장을 따지 못했다. 1972년 군대에 들어가 1975년까지 만화만 그렸는데, 그러는 사이 형들은 ‘형제들의 다짐’을 속속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둘째 형을 제외한 우리 형제들은 1966년 첫째 형(이정복·86·전 한양대 교수)이 독일로 철학을 공부하러 간 뒤 약속을 한 게 있었다. 우리도 학비가 무료인 독일로 유학을 하되 먼저 간 형이 바로 아래 동생의 초기 정착금을 위해 1년간 돈을 벌자는 거였다. -셋째 형(이창복·80·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이 쾰른대에 독문학을 공부하러 갔다. 형은 대학 입학을 1년 동안 미루고 식당에서 일해 넷째 형(이정춘·74·전 한국언론학회장)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내 주었다. 넷째 형은 독일 뮌스터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나중에 중앙대 교수가 됐는데, 나 역시 그 형의 덕을 보았다. 1975년 뮌스터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독일에 도착한 날부터 유럽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창작한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새소년’에 6년간 연재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전편인 셈이다. 그런데 너무 초기에 그린 만화여서 나중에 보니 오류가 많았다. -여행과 독서는 내 창의력의 밑천이자 큰 자산이었다. 사람들은 내 유학생활이 꽤 어려웠을 것으로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이 5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면 난 100만원을 쓰고 살았다. 한국에 그려 보낸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원고료 덕이었다.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1000달러쯤 주고 사서 1만∼2만㎞ 정도 달리고 버렸다. “내가 여기를 언제 또 올 수 있겠나.” 이곳저곳 다니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내 인생과 내 청춘에 대한 의무감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독일 유학 중에 잠시 한국에 나왔다가 당시 김수남 소년한국일보 사장을 만났다. 그때는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 끝나 있던 상태였다. 다시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자고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어때?”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제목은 이렇게 탄생했다. 1981년 10월부터 1986년까지 소년한국일보에 5년여에 걸쳐 총 1376회를 연재했다. 이듬해인 1987년 그걸 묶어 책으로 만드니 6권(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이 나왔다. 2012년 전체적으로 새로 그려 재발간을 하고 2013년 스페인편까지 완성했다. -잠시 귀국해 덕성여대 교수 임용을 확정 짓고 1984년 5월에 짐을 싸기 위해 독일에 다시 들어갔는데, 스물세 살의 한국 여학생이 언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우리 마을에 와 있었다. 당시 나는 서른 여덟이었다. 3개월간 교제를 했다. 그녀는 유학을 포기하고 15세 연상인 나와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결혼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국내에서만 1700만부가 팔렸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글로벌화라는 세계적인 기조의 순풍을 잘 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유럽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책의 인기를 높여 주었다. 유럽편의 내용들은 상당 부분 내 삶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 자체다. 그렇지 않은 중국편과 일본편을 위해서는 공부를 위해 각각 20회와 50회 이상 현지를 다녀왔다. 미국은 1999년 방문교수로 가서 살았던 게 도움이 됐다. -교수를 하는 동안 외부 활동을 주로 했다. 정작 덕성여대를 위해 기여를 못한 게 아쉬워 지난해 3월 총장직을 맡았다. 선거 공약으로 ‘남녀공학 전환’을 내세웠고 장기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젊어서는 ‘기러기 아빠’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지금은 ‘독거 노인’이 됐다. 얼마 전 서울 잠실의 우리 집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왔다. 요즘 혼자 살다가 변사하는 노인이 많아서 현황 파악을 하겠다고 했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내 현실인 걸 어쩌겠나. 내 건강의 비결은 운동을 전혀 안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가장 정밀한 기계이기 때문에 아껴 쓸수록 오래 쓴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인데, 최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은 우리나라 교양 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글로벌 시대 지구촌 각국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 한국인의 국제적 시야를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55년의 만화 경력에 더해 일러스트레이터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독일 뮌스터시·코스펠트시 초청 개인전을 가졌고, 권위 있는 2009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전에서 한국 일러스트레이터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에 선정됐다. ▲1946년 대전 출생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건축공학과(수료), 독일 뮌스터대 서양미술사·시각디자인 석사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 석좌교수, 제10대 총장 ▲한국 애니메이션 만화학회 회장,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먼나라 이웃나라’, ‘가로세로 세계사’, ‘와인의 세계·세계의 와인’,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 ‘세계사 산책’ 등 저서 다수
  • 한인 2세 변겨레씨 아르헨 차관보에

    한인 2세 변겨레씨 아르헨 차관보에

    아르헨티나한인상인연합회는 대통령 관보를 인용해 한인 2세 변겨레(29)씨가 문화부 차관보에 발탁됐다고 4일 밝혔다. 변씨는 아르헨티나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 고위직 인사에 올랐다. 그는 이반 페트렐라 문화부 차관이 시의원이었던 2013년부터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어 왔다. 산타페주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 법대에 입학했다. 2012년 독일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유학했으며 이듬해 졸업과 함께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 [In&Out]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인가?/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In&Out]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인가?/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신선한 충격’, 이것은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프랑스 파리도서전을 다녀온 출판인, 작가, 그리고 취재기자들의 한결같은 소감이었다. 이번 파리도서전에는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돼 30여명의 한국 작가와 많은 출판인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15명에 이르는 취재기자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의 책에 대한 가치 인식이 근본적으로 우리와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에 크게 놀랐다. 프랑스인들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문화부 장관의 입을 통해 알게 됐다. 파리도서전 기간 동안 매일 전시장을 찾은 오드리 아줄레 문화부 장관은 자국의 출판문화 발전과 관련해 “프랑스에서 문화는 심장과 같다”, “그 문화의 한가운데에 책이 있다”고 말했다. 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끈 문화의 힘이 바로 책에서 비롯됨을 천명한 명언이었다. 계속해서 우리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렇게 파리도서전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데 정부는 어떤 지원 정책을 펴고 있는가?” 장관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1980년대부터 시행한 도서정가제를 통해 출판시장의 안정화를 꾀했고, 지역 서점과 도서관을 적극 지원해 독자들이 책과 자주 접할 수 있도록 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이번 파리도서전은 1200여개의 출판사와 3700여명의 저자들이 참석해 20여만명의 독자들과 만난 책의 잔치였다. 그 어떤 부스에서도 책을 싸게 팔고 있지 않았으며, 할인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도서정가제의 필요성 여부를 놓고 아직까지 왈가왈부하고 있는 한국 출판계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렇다면 프랑스 출판사들은 왜 도서전에 참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프랑스 출판협회 회장과의 대화에서 들을 수 있었다. “출판사의 도서전 참여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이자 의무다. 저자들은 도서전을 통해 독자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독자들은 도서전에서 출판사들의 책을 한 곳에서 보고 선택할 수 있으며, 저자를 만나고, 또 책 관련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책과 독서, 그리고 문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해득실을 떠나 책과 함께하는 진정한 도서 축제의 장 마련은 불가능한 것인가. 하루아침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는 없겠지만, 생각과 습관을 만드는 좋은 환경, 즉 책 읽는 문화를 조성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돼 문화로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이 같은 책 읽는 환경 조성은 정부 주도하에 계획되고 진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배가되는 파급효과로 국민 정서를 이끌어 낼 수 있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6월이 되면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다. 한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시장이다. 서울도서전에서 우리 출판사들은 우리 회사 책을 사준 독자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만남의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하며, 저자들 또한 내 독자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정부에게도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이고, 문화란 무엇인가.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주창하고 있지만, 과연 책 읽는 문화 없이 국가의 미래를 논할 수 있겠는가. 마침 올해는 ‘출판문화산업진흥 5개년 계획’(2017~2021)을 수립하는 해다. 물론 거시적인 계획들이 있겠지만, 계획 수립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출판을 통해 문화를 살리고자 하는 정부의 강한 의지다. 정책이 바로 서야 출판이 산다. 출판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 [사고] 서울신문 총선 특별취재팀 가동

    서울신문은 오는 4월 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보도 특별취재팀을 가동합니다. 특별취재팀은 전국 253개 선거구에서 펼쳐질 여야 후보들의 열띤 유세 활동과 유권자들의 표심을 독자 여러분에게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또 여야의 정책공약을 전문가들과 함께 면밀히 분석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선거가 되도록 이끌겠습니다. ●20대 총선 특별취재팀 = 오승호 편집국장, 이도운 부국장 겸 정치부장, 김태균 사회부장, 문소영 사회2부장, 김상연 이지운 장세훈 임일영 이재연 황비웅 안석 이영준 김민석 장진복 이범수 강윤혁(이상 정치부) 이제훈 이두걸 이경주 이민영 강신 이성원 홍인기 오세진 김희리 서유미 조용철(이상 사회부) 한준규 최여경 남상인 김상화 최치봉 조한종 김병철 이명선 강원식 이천열 황경근 박정훈 최종필 한상봉 남인우 김학준 임송학 한찬규 김정한(이상 사회2부) 송한수 이현정(이상 정책뉴스부) 류찬희 전경하 김경두(이상 경제정책부) 임주형(금융부) 홍희경(산업부) 김승훈(문화부) 김명국 안주영 정연호 손형준 박지환 박윤슬(이상 사진부) 기자.
  • [부고]

    ●최종배(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전략본부장)씨 모친상 20일 포항의료원, 발인 22일 오전 6시 (054)245-0427 ●손종률(전 유한대학장·전 강남대 총장)씨 별세 성철(전 TSC시스템즈 사장)성모(현대모비스 상무)씨 부친상 박종우(삼성SDI 상담역 사장)씨 장인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3일 오전 9시 (02)3410-3151 ●백우영(전 한국일보 문화부장·전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씨 별세 준(파란컴퓨터 차장)연(삼성중공업 주임)씨 부친상 최연호(양평병원 정형외과 과장)씨 장인상 1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2)3010-2251 ●박화진(MBC 영상미술국 영상1부 국장급)씨 부친상 20일 강동경희대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 (02)440-8923 ●이형운(시사위크 대표이사 겸 발행인)씨 장인상 20일 성남장례식장, 발인 22일 오전 6시 30분 (031)752-0404 ●이준형(아주경제 아주스타 국장)씨 모친상 20일 이대목동병원, 발인 22일 오전 9시 (02)2650-2747 ●최명익(서울시 동부수도사업소 시설관리과장)씨 모친상 김복환(SR 대표이사)한일우(건화 부사장)김용균(현대자동차 이사)씨 장모상 20일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 070-7816-0349 ●이석우(CHASEN TECH 부사장)씨 모친상 유계수(유내과 원장)고원중(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장)성수제(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송상욱(경천흥업 대표이사)씨 장모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30분 (02)3410-3151 ●한상엽(무등통신 대표이사)씨 별세 민정(동시통역사)윤지(JTBC 정치부 기자)승윤(복지법인 인애동산 사원)범희(LG디스플레이 사원)씨 부친상 20일 광주 금호장례식장, 발인 22일 오전 10시 30분 (062)227-4000
  • 한강·정유정 작품 불어판 인기몰이… K-Book 새 지평을 열다

    한강·정유정 작품 불어판 인기몰이… K-Book 새 지평을 열다

    한국이 주빈국으로 처음 참여한 프랑스 파리도서전이 16일(현지시간)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20일까지 열리는 파리도서전은 55개국 1500개 출판사가 참여하고 전시장 규모가 4만㎡에 이르는 세계적 규모의 도서 전시 행사다. 지난해에는 25만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프랑스는 올해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출판 산업 분야의 교류 확대를 위해 우리나라를 주빈국으로 초청했다. 주빈국관은 ‘새로운 지평’이라는 주제 아래 전시장 중심에 506㎡ 규모의 거대한 태극 문양 형태로 설치됐다. 전시 기간 내내 문학, 아동, 만화·웹툰, 인문 분야 작가 30명이 참가하는 한·불 문학행사와 양국 출판 교류를 위한 세미나가 다수 열린다. 프랑스국립도서센터(CNL)와 프랑스문화원(IF) 등이 공동 개최하는 한·불 작가 행사는 총 47차례 열린다. 한국에서는 황석영, 이승우, 한강, 김애란, 정유정, 문정희, 오정희, 마종기 작가 등이 참석해 프랑스 작가와 교차 강독 형식의 작가 행사 및 사인회, 낭송회 등을 진행한다.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주빈국인 한국관을 찾아 방명록에 ‘문화를 향해 같은 열정을 나누는 프랑스와 한국 독자들에게’라는 글을 남겼다. 올랑드 대통령은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양국이 문화협력 강화를 위해 여러 행사를 기획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도서관 주빈국 행사”라고 밝혔다. 대통령을 수행한 오드레 아줄레 문화부 장관은 “한국 문화가 프랑스에서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다. 한국 문학 번역도 더 많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문학 번역서와 웹툰, 아동 도서들은 프랑스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는 분위기다. 한국 문학 및 인문학 번역본 1200종 1만여권을 위탁 판매하는 프랑스 대형서점 지베르 죠셉의 리샤 드부아 총괄지배인은 “영화, TV 드라마, 음악, 애니메이션과 웹툰 등 한국 문화 자체가 프랑스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어 케이북도 호평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현장 판매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바람이분다, 가라’ 프랑스어판과 정유정의 ‘7년의 밤’ 프랑스어판 및 독일어판,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 프랑스어판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시 역시 관심을 모았다. 시인 문정희는 “‘찬밥 먹는 사람들’로 번역된 시집이 특집 방송으로 다뤄지고 시 낭송 행사도 있었다”면서 “개막식에서 700~800부의 시집이 팔렸다”고 전했다. 여성 특히 어머니에 대한 정서가 프랑스인들에게 동양적 모성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 전 부문에 걸쳐 수상작을 낸 한국 아동문학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뜨고 있다. 동화작가이자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위원인 김서정 박사는 “양국 수교 130주년을 맞아 130권의 우리 동화책을 선정해 전시하고 있다”며 “‘고양이학교’의 김진경 작가, 그림작가 김재홍,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의 윤석남 작가와 이수지, 김재홍 작가 등 5명의 책이 풍부한 감정 표현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이수지 작가는 한국인 처음으로 지난 2월 발표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문화체육관광부 윤태용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은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주빈국 행사를 통해 한국 작가와 작품이 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파리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방통위 1인 방송, 직원 참여 확대 성과… 국민 삶 체감 위한 공무원 변화 노력을”

    “방통위 1인 방송, 직원 참여 확대 성과… 국민 삶 체감 위한 공무원 변화 노력을”

    “방송통신위원회는 기관 특성을 살려 ‘모자이크 TV’라는 1인 방송을 시도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직원끼리 지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참여를 활성화하는 등 좋은 성과를 보였습니다. 따라서 조직 문화도 상당히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의 문화와 분위기가 좋아질 때 국민에 대한 서비스도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긍심을 갖고 일하게 됐습니다.” 엄정환 방통위 창조기획담당관 소속 사무관은 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국무위원식당에서 열린 ‘정부3.0 달인’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통위는 행정기관에 설치된 PC 영상회의 시설을 활용해 주 1회씩 직원이 번갈아가며 60분짜리 영상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오찬을 겸한 간담회에서 김성렬 행정자치부 차관은 “중앙행정기관 영상회의를 처음 실시할 때만 해도 아주 낯설게 여겨졌지만 이제 효율적인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운을 뗐다. 이어 “오프라인이라면 경직되기 마련인 데다 장관 발언이라고 100%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영상회의로 거를 수 있어 좋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행자부는 처음으로 정부3.0 달인 20명을 선정해 이날 인증패를 수여했다. 정부 부처 10명,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각 5명이다. ‘1시간 만에 끝내 주는 정부3.0’이란 강의로 공직 사회에 이름을 알린 전영하 경북도 창조경제과학과 사무관은 “2014년부터 정부3.0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있는데,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라는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행사 때 최고 정책결정권자가 다녀간 뒤엔 깃발을 내리는 게 맞다는 말엔 “그럼 아예 게양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부3.0 달인들은 또 “공공기관 내부에서만 통용될 실적을 알리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실제 국민 삶의 최일선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공무원들의 일하는 조직 문화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대전지역 대학 학점 인정 연합교양대학 개강…일반인도 수강 가능

    대전 10개 대학이 학점을 인정하는 연합교양대학이 8일 중구 선화동 옛 충남도청 대전평생교육진흥원에서 개강했다. 자치단체 출연기관과 대학들이 손을 잡고 학점을 인정하는 과정은 국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진흥원 식장산홀에서 열린 개강식에 권선택 대전시장, 4년제 10개 대학 총장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참여대학은 충남대, 한밭대, 한남대, 건양대, 대전대, 목원대, 배재대, 우송대, 을지대, 침례신학대다. 1학기 15주 동안 진행되는 개설과목은 ‘인문학의 향기’, ‘대전학’ 등 2개 공통강좌와 대학별 대표강좌인 ‘영화와 역사’, ‘한국 사상의 이해’, ‘도시와 나무’, ‘인체와 건강’ 등 모두 6개 과목이다. 과목마다 2학점이 인정된다. 진흥원 관계자는 ”2012년 처음 개강해 모두 280명의 수강생을 받고 있는데 매년 신청이 넘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수강신청은 자기 학교에서 하고 강의는 이곳에서 받는다. 일반인도 수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는 관련 대학교수 외에 남궁진 전 문화부 장관, 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이혜강 인포그래픽 전문가 등이 초빙 교수로 나서고, 대전학은 지역 중·고 교사와 전문가가 강의를 맡는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오늘의 눈] 부산국제영화제가 정말 칸처럼 되려면/홍지민 문화부 기자

    [오늘의 눈] 부산국제영화제가 정말 칸처럼 되려면/홍지민 문화부 기자

    100억원을 들여 1000억원가량의 경제 효과를 거둔다고 하니 이만 하면 창조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우리 영화를 세계에 소개하며 한국 영화 르네상스에 한몫하고 부산을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니 문화 융성의 대표적인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부산이 유네스코 영화 창의 도시로 선정됐을 때 부산 시민이 아니더라도 어깨가 으쓱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박지성처럼, 김연아처럼 우리에게 ‘사이다’ 같았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온갖 부침 속에서도 지난해 성년식을 훌륭하게 치러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갈등 사태가 다시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7개월가량 남은 올해 영화제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지난달 17일 서병수 부산시장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는 영화제 조직위원장 자리를 민간에 넘기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1년 반 넘게 이어지던 사태가 일단락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과정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영화인이 대다수다. 영화제를 놓아 주겠다는 서 시장에게서 진심이 그다지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 시장은 지난 20년간 영화제를 이끌어 온 주역들을 구조 조정 대상으로 규정한 모양새다. 영화제가 향후 100년을 가기 위해서는 영화제를 사유화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일부 ‘영화 권력자’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제의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면 공허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안을 놓고 바라보는 방향도 다르다. 부산시는 민간 조직위원장을 복수 추천된 후보자 중에서 시장이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제 운영을 책임지는 집행위원장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반면 영화제 측은 민간 조직위원장을 총회에서 선출하는 방안을 원하고 있다. 영화제 측이 정관 개정을 위해 독자적인 임시총회를 추진하자 서 시장은 법적 대응을 예고하는 한편 20년간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던 영화제 임원회의를 열어 정관 개정 방향을 논의하겠다고 한다. 현재 23명의 조직위원회 임원들이 참석하는 자리다. 영화인은 강수연 집행위원장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부산시장을 비롯한 부산시 공무원과 부산 지역 경제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계 인사들이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시장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면면이다. 영화인 입장이 제대로 반영될 수 없는 구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비를 해마다 60억원이나 들이고 있어 당연히 감도 놓고 싶고, 대추도 놓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감 놓고 대추 놓다가 빛을 잃은 경우를 우리는 여럿 보아 왔다. 적어도 문화 분야에서만큼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지켜질 때 창조 경제, 문화 융성이 이뤄진다고 본다. 칸국제영화제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가 된 방법은 별 게 아니다. 몇 번 위기가 있었지만 이러한 원칙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칸도 정부와 시 등에서 큰 지원을 받고 있다. 우리만 부산을 지켜보는 게 아니다. 세계가 보고 있다. 어떻게 키워 온 부산국제영화제인데 이대로 침몰해서야 되겠는가. icarus@seoul.co.kr
  • [부고]

    ●서상기(새누리당 국회의원)씨 장모상 3일 경북 안동성소병원, 발인 7일 오전 9시 (054)850-8506 ●정호진(사업)현목(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씨 부친상 김신회(사업)씨 장인상 3일 여의도성모병원, 발인 6일 오전 6시 30분 (02)3779-2190 ●김승권(경남신문 사진부 부장)씨 장인상 4일 거제 맑은샘병원, 발인 6일 오전 7시 (055)636-4800 ●지성호(연합뉴스 경남취재본부 부국장대우)씨 모친상 4일 진주 경상대병원, 발인 7일 오전 7시 (055)750-8448 ●성권영(전 한국세무사협회 상임이사)원영(전 법무부 사무관)완영(리다디자인 대표)장영(금융감독원 광주지원 부국장)창영(산다 대표이사)씨 모친상 곽재순(건옥 대표이사)이민재(사업)씨 장모상 4일 대구의료원 국화원장례식장, 발인 6일 오전 10시 (053)560-9570 ●설영기(대한방직 사장)씨 모친상 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7일 오전 8시 30분 (02)3410-3151 ●권성탁(연세의료원 사무국장)씨 모친상 4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6일 오전 7시 (02)2227-7500
  • [인사]

    ■인사혁신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스마트교육과장 구혜리 ■한국교육개발원 △부원장 겸 기획조정본부장 류방란◇기획조정본부△연구기획실장 임소현△대외교류홍보실장 문성룡△지식정보화실장 강성국◇초중등교육연구본부△본부장 겸 인성교육연구실장 정미경△학교교육연구실장 정광희△교원정책연구실장 박영숙△자유학기제지원특임센터 소장 김경애△지방교육재정연구특임센터 소장 김지하◇글로벌미래교육연구본부△본부장 겸 방송통신중·고등학교운영센터 소장 강영혜△글로벌교육개발협력연구실장 윤종혁△고등·평생교육연구실장 홍영란△통일교육연구실장 김정원◇교육조사통계연구본부△본부장 김창환△조사분석연구실장 남궁지영△교육통계연구센터 소장 박성호◇교육현장지원연구본부△본부장 겸 방과후학교연구센터 소장 장명림△교육정책네트워크연구센터 소장 황준성△학교폭력예방연구지원센터 소장 박효정△영재교육연구센터 소장 김주아△교육시설·환경연구센터 소장 조진일◇대학평가본부△본부장 임후남△대학평가연구기획실장 김정민△대학평가·컨설팅운영실장 김기수 ■한국인터넷진흥원 △정책협력단장 김주영△인터넷산업단장 조준상△개인정보보호단장 김호성 ■연합뉴스 △편집국 외국어에디터 겸 다국어뉴스부장 황두형△문화부장 권정상△경제부장 주종국△증권부장 박세진△사회부장 안수훈△전국부장 윤근영△국제경제부장 정준영△영문경제뉴스부장 유청모△정보사업국 홍보사업팀장 이동경△영문뉴스부장 이준승△아바나단기특파원 김지헌△아프리카순회특파원 김수진 ■건국대 △이과대학장 권용경△생명특성화대학장 이충환△총무처장 정백교△글로컬캠퍼스 대외협력처장 이용우△출판부장 신봉수△글로컬캠퍼스 언어교육원장 김상욱 ■아주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유희석△법과대학장 겸 법학전문대학원장 이준섭△약학대학장 이범진△보건대학원장 전기홍△임상치의학대학원장 김영호△IT융합대학원장 김영길△총무처장 임재익△진료부원장 박문성△교육인재개발부원장 이광재 ■건양대 △의과대학장 최용우△의과학대학장 정명현△창의융합대학부학장 김두연 ■강원대 △공과대학장 은희창△농업생명과학대학장 주진호△IT대학장 김진호 ■건양대병원 △진료부원장 배장호△진료부장 장영섭△진료지원부장 김선문△연구부장 이성기△기획조정실장 권희욱△기획조정부실장 김종엽△적정진료관리실장 나상준△적정진료관리부실장 김형준△대외협력홍보실장 황원민△교육수련부장 김철중△암센터 원장 최인석△수술실장 조춘규△권역응급의료센터장 박성수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情에 취하고 추억에 취했던 인사동 거리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情에 취하고 추억에 취했던 인사동 거리

    헌책방 ‘통문관’엔 천명이 한 자씩 쓴 천자문…화장실이 급해 들렀다가 붓 잡고 휘이 탁자 서너개·촛불 뿐인 허름한 술집은 주머니 얇은 청춘·문인들 마음의 고향 한옥 뜰앞에 핀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저항의 불덩이 품은 가슴도 촉촉해졌네 “한 글자만 써 주고 가시게.” 붓 한 자루를 건네주며 글자 한 자 써주기를 부탁해 왔다. 그는 통문관(通文官) 주인 고 이겸로(1909~2006)옹이었다. 나는 그가 제시한 글자 중 귀할 귀(貴) 한 자를 진땀 흘려 쓰고 빠져나왔다. 1980년대 초 화장실이 급해 들렀던 인사동 고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이옹은 자신의 손자를 위해 천인천자문을 제작하고 있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한 글자씩 받아 만든 책이다. 그러다 보니 글자마다 필체가 다르다. 이렇게 천 명의 정성으로 완성된 천자문은 첫돌 때 선물로 전해진다. 후손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내공이 경지에 이른 이옹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쟁쟁한 인사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쉬가 급해 들어왔노라”며 서너 차례 거절하는 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이옹은 끝끝내 손에 붓을 쥐여 주었다. 쉬 한번 하러 갔다가 졸지에 선생의 손자를 위한 천자문 한 글자를 메우게 된 것이다. 그 천자문을 받은 손자가 지금의 통문관 주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 당시 통문관을 단순한 헌책방으로 알았다. 고 이겸로 선생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문을 연 이래 고서 관련 문화유산 발굴의 중심에 있다는 거룩한 명성은 먼 훗날 알았다. 80년대 서울 인사동은 그런 거리였다. 조악한 기념품 가게와 호떡 장사가 판치고 있는 지금과는 많이도 달랐다. 백만 년 전 그 시절 나는 황당한 꿈이나 꾸는 몽상가였다. 나는 당시 군대를 다녀와 놀고 있었다. 스몰이라 불리는 검은 물을 들인 미제 군복 바지를 입고 복학 일까지 허구한 날 주색잡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신세. 신촌과 종로통을 오가며 술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과외로 주머니가 얼마간 채워지면 여자를 만나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밤이 오면 신촌이나 이태원의 히피들이 모이는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는 데카당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허해지면 인사동에 들렀다. 그 시절 인사동은 고풍스러웠다. 요샛말로는 빈티지나는 동네였다. 신촌은 술집만 즐비해 무언가 허전했고 명동은 시골 출신인 내가 나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인사동은 묵향이 넘치던, 스물 몇 살의 청년이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였다. 거리 분위기가 유가풍에서 자란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도 부담 없는 동네였던 것이다. 그중 승동교회 안쪽 골목에 있던 티롤은 나의 단골 술집. 서너 개의 탁자가 전부이고 탁자마다 작은 촛불이 켜져 있던 소박한 술집이었다. 티롤이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방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이고 무식하게도 그 시절 난 그저 티눈의 사촌쯤으로 생각했다. 80년대는 험악했다. 폭력과 야만이 넘치던 시대이자 어둠의 시대였다. 단언컨대 최루가스가 공기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불덩이를 서너 개씩 달고 다녔으며 감내하기 어려운 순간순간을 술로 버텼다. 그 중심에 티롤, 시인학교, 평화 만들기, 소설 같은 술집과 선천, 사천, 토방 등 밥집, 절 음식집 산촌,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꾸려 가던 귀천 등등이 있었다. 술집은 초라했고 밥집은 대개 네모꼴의 낡은 한옥이었다. 남루한 한옥에서 밥을 먹다가 뜰앞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마음까지 촉촉해지곤 했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던 고향의 꽃이 아니던가. 술집 밥집만 아니다. 당시 인사동에는 학고재 등 수많은 고미술 가게와 화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술집과 밥집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시절 술꾼들이란 대개 종로 관철동 ‘낭만’ 같은 술집에서 입가심으로 생고구마 조각을 곁들여 1차로 맥주 한잔 걸치고 인사동으로 옮겨 밤늦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임은 술과 엮여 있다. 같은 학교 졸업자들이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 동문회이고 산에 올랐다가 하산 후 술 먹는 모임이 산악회다. 새벽에 모여 공을 찬 뒤 해장술 한잔 걸치는 것이 조기 축구회이고 고향 사람끼리 모여 술 먹는 모임이 향우회가 아니던가. 초상집에서도 술을 같이 마셔야 성이 풀리는 사회가 한국사회다. 많고 많은 술집 중 카페 ‘평화 만들기’도 떠오른다. 이십대 초반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이십대 후반까지 단골로 다녔다. 사실 인사동에 꽤 멋진 술집이 많았는데 유독 이 집만 유명했었다. 아마 일간지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는 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문학 하는 사람들이 뒤풀이 단골로 가는 곳인데, 나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작업 중인 여자 친구에게 뭔가 있어 보이게 하기엔 딱인 술집이기 때문이다. 창가 말석에 앉아 저명 시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문인들, 예술가들은 원래 낙천적인가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인 고 기형도(1960~1989)가 있었다. 인간관계는 전혀 없었고 가끔 단골 술집에서 낯이 익어 눈인사만 나눌 정도였다. 80년대 후반 이미 그는 이름을 날리던 문화부 기자였다. 알려진 대로 그는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다. ‘평화 만들기’의 계단을 오를 때 맑고 고운 노래가 들리면 그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 고운 테너의 목소리로 ‘왓 이즈 어 유스, 임페추어스 파이어’(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를 부르면 술집 안은 순간 고요해진다. 영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그 옛날 긴 생머리의 올리비아 허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인사동 인근 안국동 로터리의 전설적인 술집도 추억해야 한다. 카페 ‘브람스’다. 75년 문을 연 신촌 미네르바, 동숭동 학림과 나란히 30년 넘게 로터리 귀퉁이 이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내가 서울에 온 갓 스물부터 지금까지 잊혀질 만하면 들르는 카페다. 바닥과 벽이 모두 나무로 치장되어 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유년 시절 초등학교 목재교실 같은 느낌이다. 주말에도 손님은 많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꾸려가는지 나와 같이 늙어가는 여주인에게 노하우라도 한 수 배우고 싶다. 살고 있는 곳이 멀고 또 지금 일하는 공장이 신촌이라 그저 1년에 한두 번 찾을까 말까 하는 카페다. 어쩌다가 지나는 길, 긴 구레나룻의 브람스 얼굴 간판이 차창 너머로 눈에 띄면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들렀다가 “꼭 1년 만에 오셨네요”라며 아는 체하는 여주인의 인사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 집에 가게 되면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를 청해 듣는다. 조르주 비제의 조개잡이 중에 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1925년 레코딩)이다. 모노로 듣는 질리의 음성은 애절하다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다. 당장 한번 들어 보시라. 언제 들어도 심쿵이다. 우리들의 이십대는 이처럼 수많은 거리의 술집과 함께 갔다. 인사동 골목은 그 시절 내 인생의 ‘아타락시아’였다. 지금의 중년들이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으며 취해 돌아다녔던 추억의 거리다. 인사동은 아주 오래된 거리였고 그때 우리는 너무 젊었으며 세상은 그 무엇도 만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잔치는 오래전에 끝났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언론학·매체경영) 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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