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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호 기자 고발뉴스에 MBC “명예훼손·모욕 민형사상 대응” 왜?

    이상호 기자 고발뉴스에 MBC “명예훼손·모욕 민형사상 대응” 왜?

    이상호 기자 고발뉴스에 MBC “명예훼손·모욕 민형사상 대응” 왜? MBC가 자사 해직 기자인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고소할 방침이어서 파장이 일고 있다. 16일 MBC에 따르면 이 회사는 “8일 이상호 기자가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고발뉴스를 진행한다며 ‘MBC가 언론이기를 포기한 노골적인 왜곡 보도로 박근혜 대통령을 옹위하고 있다’는 허위 사실을 적시해 MBC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이상호 기자와 고발뉴스 발행인을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MBC는 이상호 기자가 ‘기자가 아닌 시용기자가 만드는 뉴스가 아닌 흉기’라고 비난한 부분도 문제로 지적했다. MBC 홍보국 관계자는 “이상호 기자가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허위 사실을 주장 했고, 불특정 다수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상태로 고발뉴스 사이트와 유투브 등에 게재하는 등 공영방송인 문화방송의 사회적 명예와 위신을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이상호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에 “MBC에 훼손될 명예가 무엇이 남아있는지 성실하게 짚어드리겠다. 고발기자질 20년, 85번째 소송 흔쾌히 받아드린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수장학회 소송’ 김지태씨 유족 재산 못 찾는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김지태씨 유족이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재산을 되찾기 위해 국가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결국 패소했다.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지난 13일 김씨의 장남 역구(76)씨 등 유족 6명이 낸 주식 양도 등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심리불속행은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 사건 가운데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은 더 이상 심리하지 않고 청구를 기각하는 제도다. 이에 따라 유족은 김씨가 강압에 의해 재산을 헌납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도 더 이상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됐다. 부산지역 기업인으로 2~3대 민의원을 지낸 김씨는 1962년 부일장학회가 강제 헌납되기 전까지 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주식 100%를 보유했다. 그러나 부정 축재자로 분류돼 재판을 받던 중 주식 등을 박정희 정권에 증여했다. 당시 검찰은 김씨를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해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이후 김씨는 문화방송 등 언론 3사 주식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 공소가 취소돼 풀려났다. 당시 정권에 강제 헌납된 부일장학회는 이후 5·16장학회에서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김씨 유족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자 정수장학회 등을 상대로 빼앗긴 재산을 돌려 달라며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압에 의한 주식 증여를 인정한다면서도 증여에 대한 취소권 행사의 법적 기한이 지났다며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 역시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강압적 재산 헌납을 인정한다”면서도 1심과 같은 이유로 유족의 항소를 기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노무현 비하사진, 희귀암 특집에서 왜 故노무현 얼굴이? ‘경악’

    노무현 비하사진, 희귀암 특집에서 왜 故노무현 얼굴이? ‘경악’

    노무현 비하사진 경고 MBC ‘기분 좋은 날’은 26일 방송에 앞서 “MBC는 지난 2013년 12월18일 방송된 ‘기분 좋은 날’ 프로그램에서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비하할 목적으로 만들어져 유포된 이미지를 외국 화가 사진인 것처럼 노출한 사실이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 14조 객관성, 제 20조 명예훼손 금지 제 2항, 제 27조 품위 유지 제 1항을 위반한 것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제재조치 결정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해당 방송 프로그램의 관계자에 대한 징계 및 경고 조치를 받았다”고 명시했다. 제작진은 “이러한 제재조치 내용을 알려드리며 문화방송은 이를 계기로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등 관련 법규를 준수하고 보다 좋은 프로그램을 방송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공식 사과했다. 한편 ‘기분 좋은 날’은 지난해 12월 방송된 ‘생활 속 희귀암’ 특집에서 악성림프종으로 세상을 뜬 유명 화가 밥로스를 소개하던 중 밥로스의 몸에 故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합성된 사진을 내보냈다. 해당 사진은 우익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어서 논란이 일었다. 사진 = MBC (노무현 비하사진)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3500곡 작사… 전설의 작사가 정두수

    [김문이 만난사람] 3500곡 작사… 전설의 작사가 정두수

    1961년 어느 봄날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서울 서대문에 살던 그는 걸어서 남대문 직장까지 출퇴근했다. 하여 덕수궁 돌담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어다녔다. 당시 돌담길은 우마차도 안 다니던 한적한 산책로였다. 그러나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를 걸었던 연인들은 대부분 사랑에 실패한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대학을 나오면 대체로 남자는 군대를 가고 여자는 시집을 가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다. ‘덕수궁 돌담길을 가지 마라, 징크스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 취기에 젖은 채 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제대복을 입은 한 청년이 돌담길에 기대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그는 집에 와서 펜을 들고 써내려 갔다.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그로부터 2년 후였다. 부산문화방송 전속 가수로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시 한 편 달라기에 ‘덕수궁 돌담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건네줬다. 어느 날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 노래로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게다가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서정가요로 선정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제1회 국제신보사 제정 작사상을 비롯해 문화공보부와 전국예술인총연합회 제정 작사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마포종점’, ‘흑산도 아가씨’, ‘가슴 아프게’, ‘마음 약해서’ 등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한국 가요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인기를 끌었다.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배호, 문주란, 최희준, 하춘화, 주현미, 조용필, 태진아, 설운도, 조항조 등 명가수들과 함께하며 우리나라 대중가요사를 썼다. 그가 작사한 노래만 해도 무려 3500곡이 넘는다. 시대를 초월해 항상 가요 현장에서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이라는 명콤비는 말 그대로 ‘가요산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노래 시(詩)들은 대중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인정을 받았고 각종 시상식에서 390여 차례 넘는 수상 기록을 남겼다. 고향 하동 등 전국 13곳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 6일 우리나라 가요사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작사가 정두수(77)씨를 경기 광주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시인 정공채의 동생이다. 오는 4월 말 고향에 정 시인과 나란히 시문학관이 생긴다. 감개가 무량할 터. 환하게 웃으며 담배를 한 대 피운다. “그동안 작사도 작사지만 시를 쓴 것도 많아요. 서사집이자 장시집인 ‘백두대간’도 있고 ‘사랑으로 꽃핀 노래’ 1, 2권도 있어요. 형님은 ‘정공채 문학관’, 저는 ‘정두수 시문학관’이 생기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정두수 노래비도 그 옆에 있지요.” 정씨는 ‘알기 쉬운 작사법’, ‘한국가요 걸작선집 해설’, ‘노래 따라 삼천리’ 등 책을 여러 권 썼다. 시집은 4권이다. 다 함께 전시된다. 잠시 회상을 한다. 담배 한 대를 더 입에 문다. 그래서 물었다. “선생님 대표곡을 굳이 꼽으라면 어떤 것일까요.” “‘흑산도 아가씨’, ‘가슴 아프게’ 등 많지요.” 시곗바늘을 돌린다. 1965년 봄이다. 작곡가 박춘석씨와 충무로에서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는 다방에서 만났다. 석간신문을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름 아닌 ‘흑산도 어린이들과 청와대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흑산도 어린이들의 꿈, 이뤄지다! 영부인 도움으로 해군함정에 실려와 서울 구경도 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학용품을 받다’이다.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거센 풍랑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 여사가 나서서 소원을 들어줬다는 미담 기사였다. 정씨는 박씨에게 “이번 이미자 노래는 흑산도로 합시다. 어린이 대신 아가씨로 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이 조선 정조 때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내용과 당시 전남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도 바다를 바라보며 흑산도의 형을 간절하게 그리워했다는 내용 등을 귀띔했다. 박씨도 ‘좋다’고 했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이때부터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라는 셋을 하나로 묶는 고정 레퍼토리가 시작됐다. ‘그리운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등이 연이어 탄생한 것이다. 이번에는 ‘가슴 아프게’를 뒤적인다. 1966년 어느 봄날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비를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젊은 여주인이 혼자 라디오 앞에 앉아 열심히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웅~’ 하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술집에서 뛰쳐나왔다. 소년 시절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낸 시절이 떠올랐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저절로 ‘무엇이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바다와 나 사이를 짓누르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써내려 갔다. 19세의 신예 남진이 혜성같이 등장했고 국내는 물론 일본 열도까지 뜨겁게 달군 한류 1호 ‘망향의 노래’로 빅히트했다. “노래마다 대부분 사연이 조금씩 있어요. ‘마포종점’은 마지막 전차에서 이별하는 것이고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시킨 ‘물레방아 도는데’는 어린 시절 헤어진 삼촌과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지요. 1972년에 써서 문주란이 부른 ‘공항의 이별’은 서독으로 가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이별하는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이미자와 남진한테 약 500곡씩 써준 것 같네요.”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물레방아 도는데’로 했다. 가장 애착이 가느냐고 물었더니 “고향 하동을 노래했고 ‘소식도 없는 주인공’은 바로 일제강점기에 전쟁터로 끌려가 주검으로 돌아온 삼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의 문학성과 음악성은 한학자인 조부, 시인인 형, 그리고 하동포구라는 지리적 배경이 한몫한다. 특히 어릴 때 하모니카 불기를 좋아해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동래고 2학년 때 진주 개천예술제 시부문에 참가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무렵 고향이 진주인 가수 남인수씨를 만나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시를 써 주기도 했다. 또한 ‘남인수 모창’을 그럴듯하게 했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에서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란 제목으로 당선했다. 이듬해 KBS의 건전가요 가사 공모에 ‘즐거운 여름’으로 최우수상에 뽑혔다. 작사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즐거운 여름’은 원래 현인씨가 불렀으나 나중에 서수남·하청일씨가 불러 히트시켰다. “시인이 되려면 신춘문예나 현대문학 등 문예지를 통해 등단해야 하는데 당시 국내에는 공식적인 작사가 등용문이 없었어요. KBS 공모전에 당선하니 모두 작사가로 인정해 주더군요. 상금도 많아서 전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MBC 전속 가수였던 양병철씨가 대중가요 전문 작사가의 길을 가라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미리 써둔 ‘덕수궁 돌담길’을 주었지요. 한산도씨가 작곡을 하고 진송남이 불러 히트시키면서 지구레코드사 소속 전속 작사가가 된 것입니다.” 작사가, 작곡가, 가수 중에 누가 영향력이 클까라는 우문을 던졌다. 노래 내용이 있어야 작곡을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냐고 지체 없이 반문한다. 역사성과 아픔이 적힌 시를 보고 곡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사는 아버지이고 작곡은 어머니로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와 작사의 한계에 대해 물었더니 “둘 다 어렵다. 요즘도 생각이 날 때마다 메모를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최근에 작사한 것을 잠시 보여 준다. ‘비 오는 날은 가수 배호가 어떨는지요/ 그의 노래는 비 오는 날 더 흐느끼기 때문이다/ 결박당한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일반인들은 (작사가를) 그저 유행가 가사나 적는 사람으로 여길지 몰라도 시대의 정서를 정확히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작사가를 한 수 아래로 보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유행가 노래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하면 아마 도망갈걸요. 가수의 성향과 음색, 작곡자의 취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거든요. 조용필, 이미자가 생명력이 긴 것도 바로 옛 가요의 정서를 바탕으로 현실을 노래하기 때문이지요.” 현재 작사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1만여명 되는 것으로 전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저작권료는 얼마나 되느냐고 하자 “좀 받고 있지만 얼마인지 정확히 모른다. 왜냐하면 집사람 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부인은 경희대 성악과 출신이고 슬하의 딸 셋 중 둘째는 성악을 하고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작사가 정두수는… 1937년 경남 하동 출생이다. 부산 동래고와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라는 제목으로 당선했다. 1962년 KBS 건전가요 공모에서는 ‘즐거운 여름’이 당선됐다. 1963년 가요 ‘덕수궁 돌담길’로 대중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흑산도 아가씨’의 이미자, ‘가슴 아프게’의 남진,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 ‘공항의 이별’의 문주란, ‘그 사람 바보야’의 정훈희를 비롯해 조용필, 하춘화, 진송남, 은방울 자매, 패티김, 들고양이, 최희준, 김부자, 설운도 등 인기가수 100여명이 그의 노래를 불렀으며 지금까지 작사한 곡은 3500여곡에 이른다. 1995년 장시 ‘지리산’ ‘섬진강’ ‘백두대간’ ‘하동포구 이야기’ 등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비가 전국 13곳에 세워져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알기 쉬운 작사법’ ‘시로 쓴 사랑의 노래’ 등이 있다.
  • 김유정 포토 타임, 쇄골 드러내고 ‘성숙美 발산’ 폭풍 성장

    김유정 포토 타임, 쇄골 드러내고 ‘성숙美 발산’ 폭풍 성장

    ‘김유정 포토 타임’ 아역배우 김유정의 ‘MBC 연기대상’ 포토 타임이 화제다. 김유정은 지난 3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문화방송에서 열린 ‘2013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 아역상 시상자로 참석했다. 이날 시상식에 앞서 열린 포토 타임에서 김유정은 어깨를 드러낸 원피스를 입고 한층 성숙해진 미모를 뽐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김유정은 포토 타임 후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날 대기실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김유정의 청순한 미모가 감탄을 자아낸다. 네티즌들은 “김유정 포토 타임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김유정 포토 타임 못 알아볼 뻔”, “김유정 포토 타임, 폭풍 성장이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연예팀 boh2@seoul.co.kr
  • ‘mbc연기대상 신인상’ 백진희·전소민 공동 수상 ‘임성한 작가 언급’

    ‘mbc연기대상 신인상’ 백진희·전소민 공동 수상 ‘임성한 작가 언급’

    배우 백진희·전소민이 MBC 연기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공동 수상했다.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문화방송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2013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배우 백진희·전소민이 MBC 연기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공동 수상했다. 여자 신인상 후보로는 ‘구암 허준’의 박은빈, ‘기황후’의 백진희, ‘구가의 서’의 이유비, ‘오로라 공주’의 전소민이 올랐고 백진희·전소민이 공동 수상했다. 전소민은 “신나게 마음껏 연기할 수 있게 해주신 임성한 작가님께 감사드리구요. 사랑하는 부모님, 설설희 같은 저희 대표님...심장이 너무 뛰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부한 표현같지만 항상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백진희는 “신기한 거 같아요. 제가 이 자리에 설 줄이야. 기황후로 상을 받았지만 금나와라 뚝딱도 포함될 거 같아요. 더 열심히 해서 단단한 배우 되겠습니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한편 이날 2013 MBC 연기대상 시상식은 이승기와 한지혜가 사회를 맡았다. 온라인뉴스부 chkim@seoul.co.kr
  • 김지태 유족 ‘정수장학회 주식반환’ 2심도 패소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김지태씨의 유족이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주식양도 소송에서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1·2심 모두 김씨가 박정희 정권의 강압에 의해 재산을 헌납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증여를 원천 무효로 볼 수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김창보)는 16일 김씨의 장남 영구(75)씨 등 유족 6명이 국가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주식양도 등 청구소송에서 원심과 같이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5·16 혁명정부가 중앙정보부를 통해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해 강압적으로 김씨 재산을 헌납하도록 한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김씨의 의사 결정 여지가 완전히 박탈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구속된 김씨가 수갑이나 포승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부인과 면회한 점, 부산교도소 병동에 특별 대우를 받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난 2010년 6월에야 소송을 제기했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돼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1962년 부정 축재자로 분류돼 재판을 받던 중 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부산일보 주식 등을 정권에 증여했다. 당시 검찰은 김씨를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해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김씨는 언론 3사 주식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공소가 취소돼 풀려났다. 김씨 유족은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뒤 “정수장학회는 빼앗아간 주식을 반환하고, 반환이 어려우면 국가가 10억원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부고]

    ●이재형(서울신문 대전노은지국장)씨 모친상 26일 서울의료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2276-7691 ●김정수(연세대 명예교수)씨 별세 명경(미국 국립보건연구원 연구원)덕경(삼성서울병원 교수)창경(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전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씨 부친상 정재항(미국 국립보건연구원 연구원)씨 장인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 (02)3410-6919 ●박찬길(디지텍시스템 주임)수진(학생)씨 부친상 박구서(JW홀딩스 대표이사 사장)씨 동생상 26일 부천성모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30분 (032)340-7300 ●왕윤국(동원수산 명예회장)씨 별세 기용(동원수산 회장)기주(새시대정책개발연구원 이사장)기철(동원수산 사장)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10시 (02)3010-2631 ●양동성(한국은행 글로벌협력팀장)문선(의사)윤선(화정고 교사)씨 모친상 박경수(서울의대 교수)김세용(고려대 교수)씨 장모상 26일 서울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2072-2022 ●이병훈(ACPC 대표이사)씨 모친상 권재호(연산병원 진료원장)씨 장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2)3410-6902 ●윤정문(두산중공업 상무)씨 모친상 강영주(전 정주상사 대표)김영남(전 현대종합상사 사장)권용현(뉴질랜드 거주)씨 장모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2)3010-2265 ●이득로(손해보험협회 상무)씨 장모상 26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2258-5940 ●양승만(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씨 별세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02)3010-2000 ●이덕형(전 한양대 부장)씨 별세 진아(뉴욕주립대 교수)용성(포브스코리아 기자)씨 부친상 장준익(뉴욕주립대 교수)씨 장인상 전현주(메가북스 차장)씨 시부상 26일 한양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2290-9455 ●이희재(숙명여대 명예교수)씨 별세 인재(문화방송 부국장)선재(한국방송 광주총국장)현재(엘아이티 대표)씨 누님상 26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2)2227-7500
  • [부고] 김우석 前 국회의원·내무부 장관

    [부고] 김우석 前 국회의원·내무부 장관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우석 전 의원이 11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77세. 경남 진해 태생인 고인은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문화방송 보도부장 등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다. 이후 운수업계에 투신, 1971년 대한통운 대구·인천지점장을 거쳐 1974년 대양운수 대표를 지냈다.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의 사조직이던 ‘민족문제연구소’ 특별보좌역을 거쳐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송파갑에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김영삼 당시 대표최고위원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토지개발공사 사장에 이어 건설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유족으로 아들 한권(아산정책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씨와 딸 주원(박덕흠 국회의원 보좌관)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3일이다. (02)3410-6915.
  • “정론의 저널리즘 실천하고파”

    “정론의 저널리즘 실천하고파”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 담당 사장으로 옮기는 손석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는 10일 자신이 진행하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하차했다. 이날 마지막 방송에서 손 교수는 “지난 13년은 최고의 시간이었고, 청취자 여러분들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하차 소감을 밝혔다. 손 교수는 “30년 동안 일한 문화방송이 새 출발을 하려는 시점에서 내 역할이 여기까지라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 시선집중도 언젠가 새 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그것이 이 시점을 택한 이유”라고 하차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종편행에 대해 일고 있는 논란을 의식한 듯 “내 선택에 많은 반론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나의 고민을 풀어낼 수 있는 자그마한 여지를 남겨준다면 진심으로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또 “최선을 다해 정론의 저널리즘을 내 의지로 실천해보고 좋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법인카드 유용’ 김재철 지난 15일 검찰 조사받아

    문화방송(MBC) 김재철(60) 사장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서울남부지검은 27일 “김 사장을 지난 15일 소환 조사하고 문화방송 지역사로부터도 최근 자료를 제출받아 조사했다”고 밝혔다. 김 사장과 관련해 수사기관에 계류된 사안은 모두 5건이다. 이 가운데에는 경찰이 열 달 동안 조사를 하다 무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도 있어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김 사장은 2010년 취임 뒤 법인카드로 7억여원을 쓰면서 핸드백이나 귀금속을 구입하는 등 회사돈을 개인적 용도로 쓰고, 내연 관계 의혹을 받는 여성 무용가에게 21억여원의 공연을 몰아줬다는 혐의로 지난해 노조로부터 고발당했다. 김 사장 측은 “정씨의 무용단에 지급된 비용은 특혜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며 “회사돈은 공적 용도로만 썼다”고 주장했다. 김 사장의 횡령과 배임 혐의 등을 조사해 온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올해 1월에 무혐의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이 최근 경찰의 조사 내용에 더해 추가적인 자료 확보에 나서고 있어, 무혐의 판단이 뒤집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이 자료를 제출받은 안동·전주·청주 문화방송은 해당 여성 무용가가 공연을 주최한 곳들이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부고]

    ●심규성(전 문화방송 경영이사)규식(심수원 대표)규혁(전 대우건설 토목이사)씨 모친상 조병태(전 한양대 대학원장)김상학(참항공 대표이사)씨 장모상 심범용(레온어드바이저 대표)성용(대한항공 과장)씨 조모상 김준범(삼성물산 사원)씨 외조모상 1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9일 오전 8시 (02)3410-6919 ●한석호(전 곡산군수)씨 별세 용성(대한전선 부사장)용훈(호주 거주)용문(보건의료노조 통일위원장)씨 부친상 허미자(충암여중 교사)김희선(호주 거주)김미향(의정부성모병원 간호사)씨 시부상 16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19일 오전 6시 30분 (02)2227-7580 ●이동민(서귀포경찰서장)씨 모친상 17일 전주예수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63)230-8997 ●박만수(삼광유리 상무이사)씨 모친상 16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2)2227-7587 ●김시환(한국도로공사 원주지사장)씨 모친상 김상인(포항1대학 교수)류석호(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씨 장모상 17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31)787-1501 ●배숙자(전북대 입학사정관)씨 모친상 이종민(전북대 영문과 교수·전북일보 이사)씨 장모상 17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19일 오전 6시 20분 (02)2227-7560 ●김낙수(전 농협 임원)낙중(전 보건소장)낙성(전 국회의원)낙풍(전 안기부 임원)낙인(사업)낙순(전 초등학교 교사)씨 모친상 15일 충남 당진 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9시 (041)355-7980
  • [DB를 열다] 53명의 목숨 앗아간 1972년 서울 시민회관 화재

    [DB를 열다] 53명의 목숨 앗아간 1972년 서울 시민회관 화재

    1972년 12월 밤 8시 28분쯤 서울 세종로 서울시민회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날 시민회관에서는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행사로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하춘화와 신인상 수상자 김세환·정미조, 특별상 수상자 김추자, 코미디언 구봉서·곽규석 등도 공연에 참가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밖으로 나오는 사이 갑자기 무대 위 조명장치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전기 과열로 말미암은 합선이었다. 공연이 끝났기 때문에 막이 내려오고 있었고 불길은 막으로 옮겨붙어 삽시간에 번졌다. 관객 중에서 3분의2 정도는 퇴장한 상태였지만 아직 나가지 못한 사람도 많아 회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대 쪽에서 시작된 불은 천장 쪽으로 치솟았고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아래층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관객들은 서로 먼저 나가려고 밀치고, 계단에서 넘어졌으며 여성들과 아이들이 깔렸다. 2층에 있던 관객 수십명은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 화재로 53명이 죽고 76명이 다쳤으며 부상자 중에는 가수 문주란과 김상희도 있었다. 김상희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지만, 문주란은 화장실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렸다가 허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시민회관 화재는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함께 1970년대 서울의 3대 화재 사건 중 하나다. 시민회관은 1956년 6월 1일 착공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 국가 최대의 프로젝트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원래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우남은 이승만의 아호다. 야당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1961년 10월 31일 완공됐지만 이미 4·19, 5·16이 지난 뒤여서 우남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은 당연했다. 시민회관은 1960년대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공연과 음악회가 자주 열렸고 10층 옥탑은 당시 주변 건물 중 가장 높아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완전히 소실된 시민회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1974년 1월 착공되어 1978년 4월 완공되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위기의 검찰] ① 정권사수 ‘첨병’

    [위기의 검찰] ① 정권사수 ‘첨병’

    사상 초유의 내부 반발로 검찰총장이 불명예 퇴진했다. 항명 파동은 정권에 휘둘리는 정치 검찰,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 등 검찰의 고질적인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검찰 스스로 이번 사태를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자정에 나설 경우다. 위기에 빠진 검찰 조직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쇄신 해법을 시리즈 5회로 모색한다. “검찰이 정치적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습니까. 늘 정권 사수의 첨병 노릇을 했습니다.” 검사들도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걸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권력에 줄을 서서 권력을 창출하고 그 권력의 입맛에 맞는 수사 결과를 내놓는 악순환을 되풀이해 온 것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의 중도 사퇴를 초래한 ‘특수부발 검란(檢亂)’은 검찰 조직의 누적된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줬을 뿐이다. ‘정치 검찰’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검찰 간부는 “검찰 출범 이후 김대중 정권 때까지 권력이 검찰을 좌지우지했다.”면서 “검찰은 권력의 입맛에 맞게 야당 의원을 수사 미끼로 여당에 입당시키는 등 검찰 본연의 자세를 잃었고, 반정권 인사들의 도청도 비일비재했다.”고 털어놨다. 다른 관계자는 “노무현 정권 땐 검찰과 청와대가 사이가 나빠 정권 차원에서 검찰 수사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권부 입김은 곳곳에서 작용했다.”고 말했다. 심재륜 전 대구고검장은 1999년 항명파동 당시 검찰 수뇌부를 향해 ‘정치권력의 시녀화’ ‘정치권력에 영합하는 집단’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정치 검찰은 권력의 ‘기형아’다. 검찰을 잡아야 정권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임 뒤 대구·경북(TK) 및 고려대 출신을 검찰 요직에 전진 배치했다. 김경한(경북 안동) 법무부 장관은 검찰 내 대표적인 TK 인사로, 요소요소에 TK 인사들을 심었다. 지난해 8월에는 대구 출신의 권재진 민정수석이 법무장관에 기용돼 논란을 일으켰다. 민정수석이 곧바로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적은 역대 정권에 한 번도 없어 사법 중립성 훼손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검찰총장에는 인사청문회에서 자질시비가 있었던 고대 출신의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을 임명, 정치 검찰의 막장을 보여줬다. 정치 검찰의 폐해는 컸다. 반정권 인사들의 표적 수사가 속출했다.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한 문화방송 ‘피디수첩’, 정연주 KBS 사장,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수사 등 검찰 안팎의 비판을 받는 수사가 이어졌다. 정권 관련 수사에서는 ‘왜곡·은폐·조작’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 BBK 가짜편지, 이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등 이 대통령 일가와 그 측근 인사들이 관여된 대형 권력비리 수사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전 검찰총장이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구형을 최저 형량 수준으로 낮추도록 압력을 넣었다거나 LIG그룹 회장 일가의 사법처리 수위 결정에도 관여했다는 의혹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한 고위 인사는 “노무현 정권 때를 제외하곤 어느 정권이나 수사 개입이 심했다. 현 정권도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관여했다.”고 말했다. 검찰 안팎에서는 정치 검찰의 문제는 인사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검찰 수장 임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검찰이 정치권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검찰 간부는 “검찰 인사를 독립해야 한다.”면서 “정권이 조직내부의 신망 있는 사람보다 정권 유지에 검찰을 이용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뽑기 때문에 사건 왜곡이나 편파 수사 등이 빚어진다.”고 지적했다. 한상훈 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찰 인사 독립이 정치 검찰 척결의 최우선 과제”라면서 “판사, 변호사 등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인사위원회를 구성해 총장 등 주요 보직 인사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부산고법도 “김지태 재산헌납 강압 있었다” 인정

    고(故) 김지태씨의 재산 헌납 강압성 여부를 놓고 유족과 정수장학회, 정치권 등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고등법원이 강압성을 인정한 판결을 내려 주목된다. 김씨가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려고 구입해 본인, 부산일보, 부일장학회 임원 명의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했다가 1962년 언론 3사 주식과 함께 국가에 헌납한 땅 1만 5735㎡를 돌려 달라며 유족이 정부와 부산일보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다. 부산 부산진구, 남구, 해운대구에 있는 이 땅의 소유권은 1962년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로 넘어갔다가 이듬해 정부로 귀속돼 현재 대부분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부산고법 민사5부(부장 윤인태)는 김씨 유족이 제기한 ‘진정명의 회복을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등 청구 소송’ 1심에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고 28일 밝혔다. 재판부는 “군사정부의 다소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증여하지 않으면 김씨나 가족 등의 신체와 재산에 해악을 가할 것처럼 위협하는 위법 행위를 중앙정보부가 했다.”며 “김씨의 증여 의사 표시는 대한민국 측의 강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가 강박으로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헌납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증여 의사 표시를 무효로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증여 의사 표시를 취소할 수 있었지만 시효(10년)가 지났다는 판단이다. 김씨 유족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는 유족이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2월 내린 결론과 유사한 판결이다. 당시 재판부는 5·16군사정변 직후 강압에 의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을 넘겼다며 제기한 주식 반환 청구 소송에서 “김씨가 국가의 강압에 의해 5·16장학회에 주식을 증여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 권총을 차고 와 겁을 주고 관세법 위반 등으로 군검찰이 구속 기소했다가 기부 승낙서에 날인한 뒤 공소를 취소한 사실 등을 들어 “김씨가 국가의 강압에 의해 5·16장학회에 주식 증여 의사 표시를 했음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다만 “김씨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여지가 완전히 박탈될 만큼 증여 행위를 무효로 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의사 표시 취소권을 10년이 지날 때까지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또 “국가도 군사정부의 강압에 대해 김씨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지만 김씨가 1962년 구속됐다가 석방된 날로부터 10년이 지났기에 역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덧붙였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대선 위해 아버지 비방하다니… 박근혜 후보, 공식 사과하라”

    정수장학회(옛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장학회 설립자인 고(故) 김지태씨 유족들이 24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김씨의 5남 영철(61)씨는 이날 국가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주식양도 청구 소송의 항소심 첫 공판이 끝난 뒤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선 후보는 개인 목적을 위해 아버지를 비방하고 있다.”며 박 후보의 사과를 기다리겠다고 밝혔다. 박 후보가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고 김지태씨는 4·19 때부터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5·16 이후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면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자진해 재산을 헌납한 것”이라고 말한 데 따른 것이다. 영철씨는 “박 후보가 아버지(박 전 대통령)를 아끼고 있다면 상대방 아버지의 인격도 아끼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박 후보가 아버지를 부정축재자라고 말한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말했다. 유족 측은 당장 법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박 후보의 입장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아량이 없다고 생각지는 않는다.”면서 “당장 사자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내기보다는 박 후보 측의 공식 사과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박형남) 심리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유족들은 “강제 헌납된 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부산일보 주식과 토지를 돌려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공판에는 김씨의 장남 영구(73)씨를 비롯한 유가족 4명이 출석했다. 이들은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부일장학회 재산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강탈당한 것이 명백하다.”면서 “이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서 강탈이었음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수장학회 측 변호인은 “김지태씨의 의사 결정이 박탈될 정도의 강압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만일 강탈이 인정된다고 해도 제척기간과 소멸시효가 지난 만큼 반환 책임은 없다.”고 맞섰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국가의 강압에 의해 김지태씨가 주식을 증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강압의 정도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고 제척기간이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바 있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신망 두텁다고 안기부 파악”

    부일장학회 설립자인 고(故) 김지태씨의 차남 영우씨는 22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욕하는 죄를 저질렀다.”면서 박 후보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2005년 7월 국정원이 작성한 ‘부일장학회 헌납 의혹 조사 결과’ 보고서 등을 토대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김지태씨가 부정부패로 헌납의 뜻을 밝혔다.’는 박 후보의 발언에 대해 “1962년 당시 안기부 부산지부가 작성한 존안문건에는 선친이 ‘지조가 강하고, 재벌가로서 산하업체 종업원 및 원주민으로서 연고자들의 기반이 강하며, 부일장학회 관계로 신망을 받고 있다’고 적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4·19 때는 시민들이 시위하기는커녕 선친의 도움을 받은 넝마주이 등이 집이 시위대에 휩쓸릴까 봐 밤새 지켰다.”고 말했다. 박 후보가 부산일보를 ‘부실기업’으로 규정한 것과 관련, “‘한국신문 100년’에 따르면 부산일보가 ‘국내 최초의 사설 무선국과 전광 뉴스판 설치 등 시설 확충에 진력했고 서독제 최신형 고속 윤전기도 1963년에 도입했다고 했는데 이는 ‘(박 후보가 주장한) 자본이 980배나 잠식’된 신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일장학회는 1962년 5월 강탈당하기까지 3년 동안 부산·경남 지역의 초·중·고 대학생 1만 2364명에게 모두 1억 7300여만환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5·16 때 7년 구형을 받은 것은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문화방송을 빼앗기 위해 선친을 겁박하려고 꾸민 술수”라고 항변했다. 송수연기자 songsy@seoul.co.kr
  • “동양척식회사서 전답 받아”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22일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故) 김지태씨에 대해 사실상 ‘부정부패한 인물’로 낙인찍었다. 이 단장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언론 보도를 인용하며 “김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양척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해 충실하게 근무했고, 동척으로부터 경남·울산의 전답 2만평을 받았다.”고 말해 친일을 통해 재산을 형성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적산기업이었던 아사이방직 관리를 맡으면서 전국 10대 재벌에 올랐고,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 축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는 기사가 있다.”면서 “혐의는 밀수와 재산 해외 도피 등이며, 징역 7년이 구형됐고 공소 취하의 대가로 이런저런 것들을 헌납하고 풀려났다.”며 당시 혐의 내용과 재산 헌납 과정을 소개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도 전날 정수장학회 관련 기자회견에서 “안타깝게도 당시 김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았던 분”이라면서 “4·19 때부터 이미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분노한 시민들이 집 앞에서 시위할 정도”라고 했다. 부일장학회의 재산 규모에 대해 박 후보는 “당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규모는 현재 부산일보와 MBC 규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면서 “부산일보는 당시 자본이 무려 980배나 잠식돼 자력으로 회생하기 힘든 부실 기업이었으며, MBC도 라디오방송만 하던 작은 규모였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오히려 (부산일보와 MBC가) 너무나 견실하게 성장해서 규모가 커지자 지금 같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지적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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