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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석 총리 “제주4·3과 결코 작별하지 않겠다”… 진실규명·명예회복 최선

    김민석 총리 “제주4·3과 결코 작별하지 않겠다”… 진실규명·명예회복 최선

    “봄을 반기는 꽃이 제주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제주도민의 마음에 봄은 아직 먼 것 같습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 추념사에서 “내 가족이자 이웃이었던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된 7년 7개월의 비극 속에서 동백꽃 같은 붉은 피멍이 가슴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추도했다. 김 총리는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며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통한의 세월을 견뎌온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제주4·3의 역사적 교훈을 강조하며 최근 정치 상황과도 연결 지었다. 김 총리는 “78년 전 참혹한 비극의 중심에는 불법 계엄이 있었다”며 “2024년 12월 3일 불법 계엄의 망령이 되살아났을 때 제주도의회는 지방의회 가운데 가장 먼저 대통령 탄핵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고 제주도민은 단호한 목소리로 계엄 반대를 외쳤다”고 설명했다. 이어 “4·3의 역사를 잊지 않은 제주도민과 국민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켜주셨다”며 “다시 한번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김 총리는 4·3 진상 규명과 제도적 후속 조치를 추진하겠다는 정부 의지도 강조했다. 그는 “얼마 전 제주를 찾은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폭력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해 4·3사건 진압 공로 서훈 취소 근거를 마련하고 형사 공소시효와 민사 소멸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또 “4·3의 진실을 마주하고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역사적 사명”이라며 “국민주권 정부는 4·3의 진실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4·3사건특별법을 만든 김대중 정부,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사과를 했던 노무현 정부, 희생자 보상 근거를 법제화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유족 네 분을 희생자의 자녀로 인정하는 최초의 의결을 했다”며 “가족관계등록부에 비로소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게 된 고계순·김정해·김순자·이애순 어르신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제주4·3의 세계적 의미도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4·3 기록물 1만 4000여 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고, 4·3의 아픔을 담은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유럽과 미국의 주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했다”며 “진실과 화해, 상생의 가치로 승화된 4·3 정신을 전 세계가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끝으로 “4·3의 역사를 끝까지 기억하고 기리고 되새기면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 위에 더 큰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 나가겠다”며 “결코 제주4·3과 작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4·3의 역사는 평화를 품고, 역사의 기록은 인권을 밝히다’를 슬로건으로 한 이날 추념식에는 생존희생자·유족, 도민과 국민 등 2만여 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추념식에는 김 총리를 비롯해 우원식 국회의장, 정청래·장동혁·조국 등 여야 정당 대표와 의원 등 각계 주요 인사가 참석했다. 오영훈 제주지사도 이날 추념식 인사말을 통해 “이름 없이 스러져 간 모든 희생자 영령들께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머리 숙여 추모의 뜻을 전한다”며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오 지사는 “말할 수 없었던 기억과 숨죽여야 했던 진실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며 “제주는 기억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역사를 끝내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마주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제주4·3 희생자 고(故) 고석보 씨와 딸 고계순 씨의 친자관계가 확인된 사례를 언급하며 “국가 폭력으로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 세우는 첫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제주에서는 친생자관계 확인 신청 230건을 포함해 총 509건의 가족관계 정정 신청이 진행 중이다. 또 제주4·3 희생자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전 골령골, 광주형무소 옛터, 경산 코발트 광산 등에서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며 제주4·3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 지사는 “제주도는 마지막 한 분까지 희생자를 찾아내겠다는 각오로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제주4·3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훼손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그동안 제주4·3평화재단과 협력해 찾을 수 있는 분부터 반드시 찾는다는 원칙으로 유해 발굴과 유전자 감식 사업을 추진해 왔다며 마지막 단 한 분까지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각오로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에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제주4·3은 이제 세계의 역사”라며 “지난해 제주4·3 기록물 1만 4673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4·3의 진실과 가치는 전 세계의 역사가 됐다”고 전했다. 이어 “제주4·3은 아픔을 딛고 평화로 나아간 역사이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낸 인류의 유산”이라며 “도는 지난해 12월, 제주4·3의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오늘의 삶 속에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도민과 함께 ‘제주평화인권헌장’을 선포했다.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나아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김창범 4·3 희생자유족회장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을 견뎌내며 처절하게 몸부림쳐 온 절규는 4·3의 진실을 깨우는 원천이 됐고, 함께 흘린 피눈물의 외침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역사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피로 쓰인 역사는 숨길 수도 없고 왜곡될 수도 없는 것이 역사의 이치”라며 “아물지 않은 상처에 더 이상 폭력의 칼을 꽂지 못하도록 4·3 특별법과 국가유공자법, 상훈법의 조속한 개정”을 촉구했다.
  • 교보문고 X 뮤엠 폴리오 국어논술 북 토크쇼 성공적으로 시작, 4월에도 계속

    교보문고 X 뮤엠 폴리오 국어논술 북 토크쇼 성공적으로 시작, 4월에도 계속

    독서를 통한 국어 능력 향상으로 초등 문해력 저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뮤엠교육(대표 이광수)의 국어논술 전문 브랜드 ‘뮤엠 폴리오(MU:M Folio)’가 북 토크쇼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뮤엠 폴리오는 아이들이 평생 간직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을 만들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이번 북 토크쇼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교보문고 울산점에서 ‘무영이가 사라졌다’의 임수경 작가와 함께 첫 시작을 했으며, 이날 행사에는 총 2부로 나누어 1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내용들을 직접 작가에게 질문하며 책의 인사이트를 얻는 경험을 했고, 작가와 질의응답을 하며 특별한 독서 경험을 쌓았다. 이어 작가의 친필 사인회도 열려 학생들은 자신만의 작가 컬렉션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특별한 경험을 완성했다. 북 토크쇼에 자녀와 함께 참가한 한 학부모는 “이번 북 토크쇼를 통해 자녀가 독서의 재미를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작가님을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흔치 않은데,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뮤엠 폴리오 전국 북 토크쇼는 4월 4일 교보문고 일산점, 4월 11일 판교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5, 6월에도 전국적으로 이어진다. 4월에는 제7회 비룡소 문학상 수상작인 ‘한밤중 달빛 식당’을 집필한 이분희 작가와 함께한다. 북 토크쇼에 참여를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가까운 뮤엠 폴리오 학원으로 문의하면 된다.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나의 친구들(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다산책방) “예술이라는 건 원래 아주 희미한 불꽃이야. 한숨 한 번에도 꺼질 수 있단 말이야. 예술에는 친구가 필요해. 이 불꽃이 자기 힘으로 환하게 타오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몸을 맞대 바람을 막아주고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줄 친구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화염이 될 때까지 그럴 친구가.” 지독한 고독을 견디고 사는 이들을 위로하는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최근작. 학대, 따돌림 등 잔인한 현실 속에 놓인 10대 아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그린 ‘바다의 초상’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25년 후 거리에서 페인트 낙서를 하는 열여덟 살 루이사가 그림 속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유머와 눈물, 감동이 교차하는 루이사의 여정을 따라 어린 시절 우정이 어떻게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풀어냈다. 583쪽, 1만 8000원. 없을 때까지 있는 단어(김언 지음, 난다) “타인에 대해 존중과 배려가 없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망신시키는 사람이다. 문제는 자기 망신을 초래하는 일을 스스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전에 자기 성찰을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한 데서 생기는 일일 것이다.” 12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 네 번째 책. 겨울과 여름, 3월과 5월 사이 “그저 낀 상태로 머무는”(작가의 말) 애매한 4월을 보면서 시인은 삶의 품격을 떠올리고(4일 에세이) 슬픔을 말하며(17일 시) 새벽의 위로를 본다(22일 시). 매일 한 편씩 시인의 담백한 일기를 공유하는 맛이 있다. 200쪽, 1만 7000원. 돈 주운 자의 최후(이여민 지음, 유영근 그림, 비룡소) “내가 묻자 두현이는 기름 묻은 입가를 도복 소매로 쓱 닦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빠가 현금은 잃어버리면 끝이라고 다음부터 더 조심하라고 했어요, 형.”…툭하면 호주머니에 넣어 둔 돈이 도망간다는 1학년 선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두민이가 길에서 돈을 주웠다. 주운 돈을 경찰서에 갖다 줬다가 실망한 경험이 있는 두민이는 돈 주인을 직접 찾겠다고 했고, 여러 이유로 동네 아이들도 줄줄이 따라붙으며 ‘모험’이 시작됐다. 가치에 대한 생각, 타인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태도 등 어른들도 맞닥뜨릴 수 있는 질문을 남긴다. 올해 제15회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했다. 108쪽, 1만 4000원.
  • 후지산 북쪽엔 한일 경계인의 서사가 흐른다

    후지산 북쪽엔 한일 경계인의 서사가 흐른다

    후지산 절경에 숨어 있는재일교포 이양지 문학비경계인의 흔적 되짚어 봐‘인증샷 핫플’ 혼마치 거리 낮은 건물 늘어선 골목 끝후지산은 마치 액자 같아‘후지고코’ 5개 호수 명소주변에 관광 인프라 가득후지큐 하이랜드도 아찔후지산을 처음 본 건 오래전 신칸센 차창 너머였다. 일본 도쿄에서 서쪽 방향으로 달리던 열차가 도심을 벗어날 무렵, 느닷없이 차창 밖으로 거대한 흰 봉우리가 들이닥쳤다. 정상에 눈을 이고 있는 후지산이었다. 그 박력 넘치는 등장에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탄성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야마나시는 바로 그 후지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현이다. 야마나시현은 한국인에게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 전하려는 건 조선과 한국을 사랑했던, 후지산 북쪽 기슭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이 거닐었던 풍경에 관한 이야기다. 야마나시현은 도쿄에서 특급열차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다. 주말이면 어지간한 관광지 주차장은 도쿄 지역 번호판을 단 차들로 북새통이다. 그만큼 도쿄 사람들에게 야마나시는 근교 여행지로 인식되고 있다. 야마나시현은 내륙의 분지다. 전체적으로 고도가 높다.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강원 평창군의 700m 보다 높은 800~900m 정도의 고지대에 대부분의 도시가 형성돼 있다. 한국인에겐 마음 불편한 벚꽃길 먼저 후지요시다시의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부터 간다. 야마나시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특히 벚꽃이 피는 봄철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산인해다. 과장 좀 보태 100개 나라 언어를 한꺼번에 듣는 느낌이다. 해마다 벚꽃 필 무렵에 주민 축제가 열렸지만 올해는 취소됐다. ‘오버 투어리즘’ 때문이다. 공원뿐 아니라 도시에 산재한 명소들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곳곳에서 주민 불만이 터져 나오는 형국이다.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을 먼저 소개하는 건 야마나시를 대표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불편할 수 있는 여행지라는 걸 무엇보다 앞서 말하고 싶어서다.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은 가장 일본적인 풍경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후지산과 벚꽃, 붉은색 오층 건물이 완벽한 구도로 어우러져 있다. 일본을 소개하는 관광 포스터에서 수없이 봤던 바로 그 풍경이다. 문제는 추레이토(충령탑)라 불리는 붉은 오층탑이다. 야마나시 출신 전사자의 위패가 이 탑에 합사돼 있다. 한데 이들이 어느 지역 전투에서 사망했는지가 불분명하다. 한반도에서 빚어진 양국 간 전쟁에 투입됐다가 전사한 군인의 위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유명한 공원에서 기필코 마주해야 할 건 재일교포 이양지 문학비일런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비는 찾기가 쉽지 않다. 야마나시 최고의 풍경을 굽어보는 ‘명당’ 인근에 옹색하게 숨어 있어서다. 이양지(1955~1992)는 재일교포 소설가다. 일본 이름은 다나카 요시에. 한국계로는 두 번째로 1989년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제주도 출신 부모를 둔 이양지가 나고 성장한 곳이 바로 후지요시다이다. 도쿄의 명문 와세다대학을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한국말로 떠드는 관광객을 만났다. 당시 재일교포 사이에서 신분을 노출할 수 있는 한국어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런데도 ‘2류 국가’에서 온 한국인은 거리낌이 없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1982년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국과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탐색했다. 그 경험이 소설 속 인물들의 언어가 됐다. 그는 재일 한국인 유학생의 좌절과 환멸을 다룬 소설 ‘유희’(由熙)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한 제목 ‘유희’는 ‘밝음에 이르지 못한 존재’를 뜻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한국무용을 공부하던 그는 1992년 일본으로 돌아가 장편소설 ‘돌의 소리’를 집필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서른일곱 안타까운 나이에 숨을 거뒀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던 작가가 어린 시절 매일 올려다보던 하늘, 후지산이 보이는 이 공간에 문학비가 세워진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 센겐 공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시모요시다 혼마치도리가 있다. 편의점인 로손 가와구치코마에점에 견줄 만큼 소셜미디어 핫플로 떠오른 곳이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옛 상점가로, 낮게 깔린 건물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그 골목 끝에 후지산이 액자처럼 걸렸다. 맑은 날이면 거리를 걷는 내내 후지산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골목을 천천히 걸으면 오래된 시계점, 된장 가게,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전통 양식의 건물들도 곳곳에 남아 있다. 관광지인데도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 일상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고소한 튀김 냄새를 따라가면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소박한 식당이 나온다. 후지요시다 명물인 요시다 우동을 파는 곳이다. 얼요기 정도로 먹는 건 나쁘지 않지만, 한 끼 식사로 생각하지는 마시길. 아직 야마나시 현민들의 소울 푸드, 호토 국수가 남아 있다. 복사꽃 산골서 만난 가네코의 삶야마나시를 대표하는 건 물론 벚꽃이다. 하지만 복사꽃의 위세도 만만하지 않다. 4월이면 야마나시 분지 전체가 복사꽃 연분홍으로 물든다. 복사꽃 향기를 따라 야마나시시 마키오카초의 산골 마을로 들어서면 ‘문제적 여자’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시비와 만난다. 가네코의 동지였던 구리하라 가즈오 등이 1974년 그의 삶과 행적을 기려 세운 시비다. 가네코는 ‘불량스러운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지사 박열(1902~1974)의 아내였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한 일본인 독립유공자다. 그가 태어난 곳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지만 성장한 곳은 야마나시다. 시비가 건립된 곳은 가네코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유년 시절을 야마나시에서 보낸 그는 아홉 살 때 충북 청주시 부강면(현 세종시)의 고모 집으로 건너가 7년을 살았다. 후지산을 빼닮은 부강면의 부용산이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가던 위안의 산이었다. 부강에서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야마나시로 돌아와 혁명의 길로 들어선 그는, 도쿄에서 만난 박열과 함께 일왕 폭살을 계획하다 체포돼 스물세 살에 교도소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야마나시에 남은 그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키오카초의 시비, 그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 가족이 2017년까지 살았던 집 정도가 고작이다. 다행히 2003년부터 짝수 해마다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과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가 공동으로 시비 앞에서 추도식을 연다. 조선의 美 사랑한 아사카와 형제 야마나시현 동북쪽에 가네코가 있다면 서북쪽 호쿠토시엔 아사카와 형제가 있다. 형인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 불린다. 1913년 경성(현 서울)의 소학교에 미술교사로 온 그는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33년 동안 조선 도자 연구에 몰두했다. 1914년엔 그의 권유로 동생 다쿠미도 조선에 온다. 다쿠미는 황무지 같았던 한반도의 녹화운동에 헌신했다. 현 한국 인공림의 37% 정도가 그의 공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쿠미는 급성 폐렴으로 40세에 요절하면서 “조선의 옷을 입혀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관을 매겠다며 나선 조선인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동생을 먼저 보낸 노리타카는 이후 반평생 모았던 공예품과 도자기 등을 신생 한국에 기증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1964년에 세상을 떴다. 아사카와 형제의 고향인 호쿠토시에 일본 내 3대 ‘장수 벚꽃’으로 꼽히는 ‘야마타카진다이 자쿠라’가 있다. 믿기 어렵긴 한데, 공식적으로 수령이 2000년에 이른다고 한다. 이웃한 니라사키시엔 와니쓰카 벚꽃이 있다. 들녘에 핀 ‘홀로 벚꽃’으로, 후지산 등 주변 풍경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벚꽃이 피는 시기엔 경관 조명을 한다. 이 장면 하나 보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과 사진작가들이 몰린다. 야마나시현과 시즈오카현 사이에 솟은 후지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데 자연유산이 아니라 문화유산이다. ‘신앙의 대상’과 ‘예술의 원천’이 등재 이유다. 후지산과 주변 신사, 호수 등 25곳의 구성 자산이 포함됐다. 후지산 관찰에는 새벽부터 이른 오전 시간대가 좋다. 말간 공기 덕에 선명한 후지산을 보기에 유리하다. 치맛자락처럼 뻗은 후지산 아래로 여행 명소들이 별처럼 박혔다. 다섯 개 호수를 이르는 이른바 ‘후지고코’(富士五湖)가 대표적이다. 모토스코, 쇼지코, 사이코, 가와구치코, 야마나카코 등이 후지고코다. 1707년 후지산 대분화로 형성됐다. 오감이 만족하는 후지산 기슭가장 유명한 건 가와구치코다. 후지산이 물 위에 거꾸로 비친 모습, 이른바 사카사후지(逆富士)로 이름났다. 그러니까 데칼코마니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건데, 사실 맑고 바람 없는 날엔 다섯 호수 모두 이 같은 풍경을 펼쳐낸다. 다만 일본인 시각에서 그 장면이 가장 빼어난 곳이 가와구치코인 거다. 명성에 걸맞게 주요 명소를 도는 ‘레드 라인’ 버스, 텐조산 정상까지 오르는 케이블카, 호수 북쪽의 오이시 공원 등 다양한 관광시설이 조성돼 있다. 호수 북쪽의 가와구치 아사마 신사는 인증샷 성지다. 특히 신사 뒤 요배소(遥拝所)가 인기다. 붉은 도리이 사이로 후지산이 담기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다른 호수들도 저마다 한 가지 ‘캐릭터’는 갖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 붙어 있으니, 렌터카를 가져갔다면 천천히 다섯 호수 전체를 돌아보길 권한다. 가와구치코와 후지요시다 사이에 후지큐 하이랜드가 있다. 이른바 일본 내 ‘4대 절규 머신 성지’ 중 하나다. 하늘 위로 사람들을 ‘내던지는’ 놀이기구들이 득시글댄다. 후지산을 보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재미가 각별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향토 음식 먹고 온천으로 마무리 속이 출출할 때는 호토가 딱이다. ‘며느리라면 호토를 잘 끓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마나시현민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음식이다. 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이튿날 아침으로 먹는 것이 현지 가정집의 오랜 방식이라고도 한다. 우리 수제비와 비슷한데, 꽤 맛있다. 과자 ‘쫀디기’를 닮은 길고 끈적한 면과 단호박, 감자, 표고버섯 등의 채소가 걸쭉한 국물과 어우러진다. 가와구치코 인근에 호토만 내는 집들이 몇 곳 있다. ‘오픈런’을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식당에서 한 시간 남짓 대기해야 한다. 이 지역 별미인 말고기 육회를 곁들여 먹길 권한다. 값이 비싸 지갑은 홀쭉해지겠지만. 후지큐 하이랜드 바로 앞에 후지야마 온천이 있다. 이 온천의 자랑은 일본 최대 규모의 순수 목조 욕탕이다. 천장 높이가 12m를 넘고 100평(약 330㎡)이 넘는 대욕장은 전통 건축 방식인 못을 사용하지 않는 이음새 공법으로 지었다. 온천수엔 혈당 수치를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는 바나듐이 풍부하게 함유됐다고 한다. 3층에 다다미 전망 라운지가 있다. 누워서 후지산을 볼 수 있다.
  • 한강의 ‘눈부신 우울함’… 4·3 상흔을 어루만지다

    한강의 ‘눈부신 우울함’… 4·3 상흔을 어루만지다

    소설 분야서 한국인 첫 수상… 비영어권 문학선 3번째 영예심사위원장 “속삭이는 문체… 강렬한 꿈처럼 오래 머물러”李대통령 “고통스러운 역사, 시적으로 풀어내며 깊은 울림”수상 계기로 소설 판매량 다시 급증… 최대 10배 이상 늘어 “나는 여전히 우리들 안에 깜빡이는 빛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빛을 굳건히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에서) 국가 폭력이 만든 역사의 비극을 되살리고 ‘기억의 윤리’라는 인류 보편의 주제로 풀어낸 ‘작별하지 않는다’가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상을 받은 것은 제주 4·3 사건 78주년을 앞두고 전달된 낭보라 더 각별하다. 이예원과 페이지 모리스가 번역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영어판(‘We Do Not Part’)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소설 부문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소설 심사위원장을 맡은 헤더 스콧 파팅턴은 작품에 대해 “눈부신 우울함, 황량한 날씨, 그리고 속삭이는 문체가 어우러진 작품”이라면서 “대기처럼 감싸면서 강렬하게 사로잡는 꿈처럼 오래 머문다”고 평가했다. NBCC는 도서평론가들이 전년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선정해 시·소설·논픽션·전기·번역서 등 부문별로 시상한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은 퓰리처상, 전미도서상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도서상으로 꼽힌다. 비영어권 번역 문학에 대해선 보수적이라 지난 50년간 단 두 편의 번역 소설이 상을 받았는데 ‘작별하지 않는다’가 세 번째로 역사를 썼다. 한국인으로는 2024년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 이후 두 번째다. 2021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가인 주인공 경하와 그의 친구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인선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입원한 인선의 부탁으로 그의 제주 집을 찾은 경하가 환상 속에서 4·3 피해자인 인선 어머니의 아픈 과거사를 마주하게 된다. 영어 번역본은 2025년 초에 출간됐다. 당시 많은 서평에서 관광지로 잘 알려진 제주에서 한국전쟁 전후 최소 3만명이 사망한 민간인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제주 4·3 사건을 상기시켰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그해 1월 22일자 서평에 “1948~1949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제주 인구의 10%를 학살했다”면서 “한강은 위장(stomach-wrenching)이 뒤틀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역사를 자연의 이미지를 빌려 시적인 산문으로 엮었다”고 표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월 2일자 서평에 “제주 4·3은 미국 군대가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학살에 공모했는데도 많은 미국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면서 “지금 펼쳐지는 권위주의적 위협에 맞서려 애쓰는 우리에게,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사건이 소름 끼치는 경종을 울린다”고 썼다. 영국 가디언 역시 2025년 2월 6일자 서평에서 “최근에 탄생한 걸작을 읽는 것, 이 문장들 이 시대를 견디며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참으로 보기 드문 특권”이라면서 “실로 경이롭다”고 덧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수상 소식이 알려진 27일 소셜미디어(SNS) 엑스(X)에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며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인간의 존엄과 기억, 서사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며 “고통스러운 역사를 시적으로 풀어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고 밝혔다. 수상을 계기로 해당 소설의 판매량이 다시 급증하고 있다. 지난 27일 예스24는 오전 9~12시까지 3시간 동안 ‘작별하지 않는다’의 판매량이 전날 하루치보다 5배 늘었다고 집계했다. 교보문고는 지난 27~28일 판매량이 수상 전인 25~26일과 비교해 10배가량 늘었다고 전했다. 한강은 1970년 겨울 광주에서 태어나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했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국내 문학상의 주인공이 됐고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평화 지키는 말과 글…세계 문학인 DMZ로

    평화 지키는 말과 글…세계 문학인 DMZ로

    전쟁이 ‘잠시’ 멈춘 DMZ(비무장지대)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문학인들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오는 27일 개막하는 ‘DMZ 세계문학페스타 2026’이 DMZ와 경기 파주시 일대에서 개최된다. 이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왼쪽·벨라루스)와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황석영(오른쪽)의 기조 강연을 시작으로 29일까지 2박 3일간 열린다. 알렉시예비치는 우리에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7일 ‘침묵의 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는 법을 배웠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2020년 벨라루스 시위를 재구성한다. 독재가 횡행하고 침묵이 당연해진 요즘, ‘저항으로서의 말하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알렉시예비치·황석영 기조연설 최근 500년 된 팽나무 이야기 ‘할매’로 돌아온 소설가 황석영은 ‘바로 저 앞에 밝은 빛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DMZ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환기한다. 어느덧 86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와 화합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첫날은 50년 넘게 미군기지로 사용되다가 반환된 뒤 현재는 역사문화공간으로 보전 중인 군사분계선 인근 ‘캠프그리브스’에서 행사를 치른다. 분단과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 등을 주제로 여러 작가의 다채로운 대담이 마련됐다. 아흘람 브샤라트(팔레스타인), 이스마엘 베아(시에라리온), 사르지 라케스타(필리핀), 주킬레 자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무대에서 평화와 인권을 위해 활약하고 있는 작가들이 목소리를 전한다. 특히 아흘람 브샤라트는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중동 상황이 긴박한 가운데 상당히 어렵게 방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에서도 그림책 작가 고정순, 북한문학 연구자 김민선, 시인 김수우, 소설가 조해진·김홍·최진영·정지아 등이 나선다. ●문 前 대통령도 ‘평산책방’ 북페어 참여 강연과 대담 뿐 아니라 다양한 북페어도 함께 열린다. ‘사이에서’라는 이름으로 파주출판도시 지혜의숲에서 열리는 이번 북페어는 출판사 중심의 도서전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준비됐다. 출판사 대신 전국에 있는 동네책방들이 모인다. 이들은 생명과 평화, 공존의 메시지를 주제로 독특한 큐레이션을 선보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출판사의 책들을 살펴볼 귀한 기회다. 평산책방의 책방지기인 문재인 전 대통령도 28일 북페어 공간에서 독자들을 찾아온다. 이윤엽 판화가의 ‘평화예술퍼포먼스’, 임진택 명창의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 등의 공연도 준비돼 있다.
  • 토요일 밤 8시, BTS ‘아리랑’ 울려 퍼진다… ‘한국 촌놈들’ K컬처 이정표 새로 쓴다

    토요일 밤 8시, BTS ‘아리랑’ 울려 퍼진다… ‘한국 촌놈들’ K컬처 이정표 새로 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부순 ‘일곱 소년’이 시대의 고전이 되어 귀환한다. 이 역사적 현장을 확인하려는 세계인의 보랏빛 시선이 21일 서울의 중심 광화문으로 쏠린다. ●광화문 일대 약 26만명 운집 예상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완전체 복귀 무대는 단순한 아이돌 공연이 아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기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성취가 역사적 정점에 다다랐음을 자축하는 성대한 축제로 기록될 전망이다. ‘한국적인 것’을 둘러싸고 안에서는 자부심, 밖에서는 호기심이 강하게 맞물려 있는 지금, 마침내 BTS의 ‘아리랑’이 전 세계 관객을 향해 울려 퍼진다. ●대형 스크린·넷플릭스 생중계로 즐겨 경찰은 이날 공연에 약 26만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행사에 20만명 이상이 모이는 건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거리응원, 2016년 탄핵 촉구 촛불집회 이후 처음이다. 무료 티켓 2만 2000장은 진작에 동이 났지만, 그렇다고 공연을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다. 광화문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공연을 중계할 예정이다. 심지어 광화문에 직접 오지 않아도 된다. 공연 실황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생중계된다. “우리가 여전히 한국에서 온 촌놈이라는 사실”(넷플릭스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 예고편 중) BTS는 2013년 ‘노 모어 드림’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남다른 강렬함으로 거친 힙합의 매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한다. 남다른 고민이 싹텄다. ‘한국적인 것’의 영향력은 오직 한국 안에서 그쳐야만 하는가. 그 자체로 세계와 접속할 순 없는가. BTS 이전 수많은 ‘한국인 예술가’의 고민이었다. ‘봄날’, ‘DNA’ 등의 히트곡을 잇달아 선보였다. 세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국 ‘빌보드 200’과 ‘핫 100’ 1위를 석권했다. K팝 사상 최초였다. 이렇게 한국 문화의 물줄기가 확 틀어졌다. ‘우리 것’은 더이상 변방의 비주류가 아니다. 우리만의 외로운 외침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곧장 세계인에게 닿는다. BTS가 한 일은 이것이다. ●1896년 美서 최초 녹음된 ‘아리랑’ 영감 신보의 제목 ‘아리랑’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BTS는 지난 13일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리랑’에 어떤 메시지가 담겼는지 밝혔다. 1896년 미국 워싱턴에서 아리랑이 최초로 녹음됐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리랑’이 ‘한국적인 것’임을 부정할 한국인은 없다. 세계 어디서 가락이 흘러나오더라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자칫 너무나도 우리 것이어서 진부하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온 촌놈들”은 그 ‘촌스러운 것’에서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한가운데에 이정표를 남길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 역사는 폭력·평화의 무한 반복… 모순을 안고 사랑을 결단하라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역사는 폭력·평화의 무한 반복… 모순을 안고 사랑을 결단하라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평화는 영원히 도달 못 할 이상향쟁취된 자유·평화 과연 정당한가절대적인 선악은 없고 ‘친구와 적’적을 없애면 과연 적은 사라질까폭력과 아름다움 양면성의 모순불안정한 평화 속 끝없는 대화뿐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다.”(카를 슈미트, ‘정치신학’) 평화는 찰나였다. 세계는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돌이켜보면 역사는 평화보단 폭력으로 점철돼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가 무엇인지 깊이 음미해야 한다. 예외상태는 전쟁인가, 평화인가. 그동안 무수히 많은 전쟁을 일삼았던 인간에게는 오히려 평화가 예외상태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주권자의 의지로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가. 평화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역사와 정치는 그곳을 무한히 추구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사야마 하지메 원작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정치적 결단의 복잡성을 치밀하게 구조화한 작품이다. 지난해 국내 개봉한 뒤 큰 성공을 거둔 극장판 ‘더 라스트 어택’이 오는 13일 재개봉한다. 불완전한 평화를 위해 주인공 에렌 예거가 슬프게 결단했던, ‘땅울림’의 철학적 의미를 다시 곱씹을 기회다. “구축해 주마. 이 세상에서 한 마리도 남김없이!”(‘진격의 거인’ 주인공 에렌의 대사) 에렌은 벽 안에 갇힌 인류에게 자유를 선사하리라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몰아서 쫓아낸다’는 뜻의 다소 생소한 일본식 한자 ‘구축’(駆逐)은 에렌의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벽 안으로 몰린 에르디아인과 파라디섬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에렌은 작품에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인 ‘땅울림’을 기어코 결단한다. 수천만의 ‘초대형 거인’을 일으켜 인간과 문명을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 땅울림으로 인류의 80%가 말살됐다. 아무 죄가 없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까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쟁취된 자유와 평화는 정당한가. 평화를 누릴 존재조차 없는 텅 빈 들판의 막막한 고요. 그것을 과연 우리는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사상 최악의 악인으로 손꼽히는 하메네이가 사망했다. 이것은 이란 국민뿐 아니라 하메네이와 그의 잔인한 깡패집단(THUGS)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위대한 미국인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이를 위한 정의 구현이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루스소셜, 2026년 2월 28일)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자타공인 세계 최강 패권국 미국은 자신들의 적장을 단숨에 처단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됐다. 트럼프는 이것을 ‘세계 정의를 위한 결단’으로 포장했다. 무자비한 폭격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 건 “악당” 하메네이만이 아니다. 이란 남부 미나브에 있는 한 학교에서는 초등학생 17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권 단체에 따르면 이란 전역에서 1100명 정도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만화에서나 그려져야 할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현실에서 펼쳐진다. 결단의 무게를 짊어진 ‘진격의 거인’ 에렌은 슬프고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트럼프는 다르다. 한껏 상기된 표정이다. 멋진 제스처까지 취해 보이는 그에게서는 세상을 고통에서 해방한 영웅의 흥분이 엿보인다. 지난 9일(현지시간) 공화당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는 흥겨운 리듬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하메네이를 처단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트럼프 댄스’를 추는 이란인들의 영상이 공유됐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진정 본인이 세계 평화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세계는 잔혹해. 그리고 아름다워.”(‘진격의 거인’ 중 미카사 아커만) 폭력과 아름다움의 모순이 세계를 추동한다. 이 양면성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메네이가 실제로 악(惡)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힘은 본디 나에게 있으면 선한 것이고 적에게 있으면 악한 것이니까.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고 했던 슈미트의 오래전 진단처럼 우리 세계에 절대적인 ‘선악’은 없다. ‘친구’와 ‘적’이 있을 뿐이다. 적을 없애면 적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새로운 적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적대와 폭력은 영원하다. 지구라는 좁디좁은 행성 안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갉아먹는 이 지긋지긋한 ‘내전’은 그렇게 무한히 반복된다. 서서히 종말로 치닫는 세계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머지않아 봉착하게 될 멸망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도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다시 ‘진격의 거인’으로 돌아가 보자. 에렌의 폭주 이후 땅울림을 멈춘 건 그의 친구 미카사였다. 미카사는 자기 자신보다도 사랑했던 에렌의 목을 직접 자르고 그의 얼굴을 품에 안았다. 수심이 가득했던 에렌의 얼굴은 미카사의 품에 안겼을 때 마침내 평화를 찾았다. 물론 에렌의 죽음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파라디섬의 에르디아인들은 땅울림 이후 살아남은 인류의 보복이 두려워 군비를 증강한다. 미카사와 친구들이 파라디섬에 평화사절단으로 파견되지만,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힌트가 있다. 전쟁이 아니라 끝없는 대화를 선택하는 것. 그렇게 달성한 평화가 불완전할지라도 계속 추구하는 것. 그리하여 적대 대신 ‘사랑’을 결단하는 것. 이 모든 건 인간이 폭력만큼이나 아름다움도 추구할 줄 아는 존재임을 알아챌 때 가능한 일이다.
  • [열린세상] 세계 언어로서의 한국어, 한국문학

    [열린세상] 세계 언어로서의 한국어, 한국문학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관련 좌담회에 몇 차례 참석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번역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바로 원어, 즉 한국어로 읽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넘어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한국문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을 위해 지금까지 유일한 통로였던 번역 수준 향상, 번역대학원 설립 등 번역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 더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21세기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혁명 시대의 변화에서 한국문학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한국문학개론에서 금과옥조처럼 정의했던 “한국문학은 한국인이,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정의는 이제 사실상 무화되었다. 30년 가까이 지속되는 K컬처의 영향으로 한국어 글쓰기는 한국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또 많은 한국문학 작품은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넘어서서 보편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한국어’만이 한국문학의 유일한 정체성으로 남은 것이다.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영미문학이나 프랑스문학의 창작자와 독자는 영국, 미국, 프랑스 사람 외에 그들 국가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와 아랍 그리고 그들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나라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주요 문학상 수상자로 이주민 출신들이 호명되는 것 또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언어의 확장이 결과적으로 세계 주류 문학과 문화의 위상을 유지하거나 더 굳건히 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언어와 문학은 사유와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환경과 과정이 다르지만 이것은 K문학의 길이 한국어의 호환성을 높이고 한국어를 세계 언어로 확장해 가는 노력을 통해 보편적 예술 언어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문화 강국으로 가는 길임을 알게 해 준다. ‘나의 문학적 자양분은 한국문학에 있다’라는 한강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문학이 축적한 힘은 이미 널리 확인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언어와 문화의 변방에 있어 번역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거쳐야 했기에 중심으로의 진입이 늦어졌고, 지금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번역이 현재의 문제라면 보편적 예술 언어로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의 위상 변화는 장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화두다. 이에 따라 ‘한글로 문학하기’의 확장을 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AI 디지털 시대의 특성이 자유로운 인적·물적 이동, 지식과 정보의 축적 및 융복합,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생성 그리고 시공간을 동시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시대에 부합하는 문학은 민족성과 세계성, 정체성과 다양성, 이방인·소수자·경계인으로서 겪는 타자성과 탈경계성 그리고 이것이 빚어내는 혼종성 등을 잘 담아내는 데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은 19세기 후반 이산 경험에서부터 최근의 탈경계 및 문화 혼종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을 축적하며 작품화해 오고 있다. 여기에 제국주의적 그림자가 없는 K컬처의 큰 흐름은 한국어에 관한 관심과 사용자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문학이 보편적인 예술 언어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오랜 준비 끝에 2022년 창간한 디아스포라 한글문학 웹진 ‘너머’가 8호를 끝으로 2025년 초에 중단된 일은 아쉽기 그지없다. 전 세계에서 한글로 글 쓰는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지면으로 연간 12만명 넘는 접속자를 갖고 있었음에도 지난 정부의 예산 삭감이라는 칼날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그늘을 씁쓸히 바라보며 조속한 복간을 기원한다. 곽효환 시인·경남대 교수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아버지를 업고(채길우 지음, 난다) “열 살 무렵 개나리/ 그늘 아래 나란히// 사십대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보면// 중년이 된 지금의 나는/ 사진 속 어린 나보다/ 그 시절 아버지를 더 닮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아버지는 지금 저/ 꽃 안에서 웃고 있다.// 옆에서 덜 핀/ 나도 그렇다.” 중년이 된 아들과 딸이 어릴 적 아버지, 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보며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당신을 닮았다’고. 이런 상념을 담은 ‘부활’을 비롯해 49편 시가 수록된 채길우 시인의 신작 시집이 난다시편 7번으로 출간됐다. 시인은 “세수를 마친 거울”, “느리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의 낡은 그림자”, “조그만 아이의 하품”처럼 모든 곳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며 시를 썼다. 시인과 아버지의 추억으로 채운 시이지만 보편적 감성으로 공감이 인다. 124쪽, 1만 3000원. 죔레는 거기에(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은행나무)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로도 현실의 일부로서 이번에도 현실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지만, 간접적으로 양분을 얻은 그 현실과 이 작품은 여기에서 읽히는 예술적 형식 안에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아무런 관련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지난해 노벨문학상 주인공이 된 헝가리 거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어느 이름 없는 마을 작은 집에서 죔레라는 이름을 가진 개와 함께 사는 90대 카다 요제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왕정복고, 네오나치 등의 현상을 그리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책은 한 장이 쉼표로만 연결된 한 개의 문장(또는 두 문장)일 정도로 호흡이 긴, 독특한 형식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블랙코미디 속에 불안감을 퍼뜨리는 작가의 소설 세계가 제대로 구현돼 있다. 392쪽, 1만 8000원. 고양이가 커진 날(김효정 글·그림, 사계절)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 느껴진 날//…// 고양이가 커진 날// 사실은 내가 작아진 날” 몸과 마음이 지친 어느 날, 집에 왔더니 키우던 고양이가 커져 있다. 고양이가 구워준 소소한 빵 한 조각이 알맞은 온도로 부풀어 오른 덕분에 마음이 빵빵해졌다. “괜스레 움츠러드는 날, 슬며시 손잡아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짧은 그림책 속 따뜻한 그림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44쪽, 1만 5000원.
  • 실수한 킬러와 부실한 형사… 블랙 유머로 비튼 잔혹 스릴러

    실수한 킬러와 부실한 형사… 블랙 유머로 비튼 잔혹 스릴러

    佛거장 미발표 첫 작품 뒤늦게 출판이후에 쓴 유명작들의 원형인 소설 웃음·불편함 사이 아이러니가 묘미 킹코브라의 주식은 동족이다. 다른 먹이도 있지만 주로 뱀을 먹는다. 킹코브라가 다른 뱀을 증오해서 잡아먹는 건 아니다. 살기 위한 방식일 뿐이다. 정말 무서운 건 먹을 생각도 없이 죽이는 것이다. 자연계에선 드문 일이, 인간 세상에선 아주 흔하게 벌어진다. 새 책 ‘대문자 뱀’은 노련한 여성 킬러를 앞세운 장편 범죄 스릴러다. 프랑스 추리문학의 장인이라 불리는 피에르 르메트르(75)가 썼다. 주인공은 감정을 배제한 채 임무를 수행하는 냉혹한 인물이다. 크든 작든 사정권에 들어온 뱀은 ‘착실하게’ 죽인다. 그렇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단순한 악인은 아니다. 외모부터 그렇다. 화가 나면 공연히 함께 사는 개에게 화풀이하는, 살집 많은 늙은 여자다. 이런 일상적인 모습과 사소한 실수,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겹치며 점점 그의 인간적 균열이 드러난다. 킬러의 대척점에 선 형사도 왠지 부실하다. 장신에 날렵한 체형이지만 어딘가 휑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책이 덜 폭력적이거나 덜 잔혹한 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가 그렇듯, 산만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샌가 작고 예쁜 뱀 한 마리가 대구경 권총에 맞아 아랫배가 큼지막하게 뚫린 채 살해되는 식이다. 잔혹과 희극을 오가는 이런 균열과 블랙 유머가 흐름에 은근한 긴장을 불어넣고, 웃음과 불편함 사이의 묘한 아이러니를 안긴다. 작가는 책만큼이나 독특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06년, 그는 55세였다. 늦깎이로 데뷔해 추리물 같은 장르 소설로 필명을 날리다, 불과 7년 만인 2013년에 장편 ‘천국에서 만나’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거머쥔다. ‘대문자 뱀’은 1985년 작품이다. 말하자면 ‘늙은 신인’ 같은 책이다. 발표도 하지 않았던 책을 문단 데뷔 20년 만에 내놓은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누아르 소설은 흔히 순환적이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하나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출판하는 마지막 누아르 소설이…, 바로 내가 쓴 첫 번째 소설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대문자 뱀’에 허점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냥 냈다. 이해가 어려운 몇몇 구절은 손봤지만 구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 작품들에서 발전시킨 주제, 장소, 인물의 유형 등이 이미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그를 프랑스 장르 소설의 장인 반열에 올려놓은 원형질의 모습이 ‘대문자 뱀’에 있다. 그의 팬들은, 그의 실수를 발견해낼 수 있을까.
  • 태몽 없이 태어난, 퀴어… 시로 채운 서사의 빈터

    태몽 없이 태어난, 퀴어… 시로 채운 서사의 빈터

    “바다 밀려오든 남김없이 밀려가든규정 밖 우린 영원히 여기 서 있어”남녀 규정 거부 비이분법적 퀴어부재·불일치 감각으로 독자 압도교보 출판브랜드 북다 시인선 1번기사·태몽의 정의·변희수 하사 초상여러 텍스트·이미지 시와 어우러져 꿈은 존재의 시(詩)다. 이성과 논리가 다 포섭할 수 없는 존재의 잉여를 도발적으로 품어낸다. 어쩌면 그것은 저 거대한 무의식이 숨기고 있는 존재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일지도 모른다. 김선오(34) 시인의 새 시집 ‘말 꿈 몸’을 펼치기 전 시집 마지막에 실린 ‘작업노트’를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로서 나에게 태몽이 없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개인 서사의 빈터를 시로 다시 써볼 수 있을까. 나를 환영해 줄 장소가 전통적 가족 공동체의 내부는 아닐 것이다.” 부재와 불일치의 감각이 시를 밀어붙인다. 강력한 힘으로 독자를 단숨에 압도한다. “번들거리며 희박해지는 잉어와 나. 유리창이 모자이크를 걷어낸다. 나의 눈동자에 얹히는 잉어의 눈동자, 기꺼이 잉어의 살이 되려 하는 나의 뺨. 한 개의 몸으로 응결되지 않으려는 몸짓.// 보여? 또렷이/ 보여? 익사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된단다.// 우리?”(‘하나’ 부분)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면, 태몽은 어느 한 집단의 ‘문화적 무의식’이다. 거기에는 젠더를 둘로 나누는 데 익숙해진 언어의 편견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인의 작업은 태몽의 내부를 폭파하는 것이다. ‘잉어가 나오는 꿈을 꾸면 아들을 낳는다’는 신화적 망상을 해체하는 일이다. 시적 자아와 “잉어”가 ‘하나’가 되려는 순간, 그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엮이려는 찰나에 시인은 과감히 물음표를 찍어버린다. ‘일치’를 거부하며 당연시되던 관습을 의문시하는 태도. 시의 힘은 여기서 비롯된다. “꿈은 나를 달래고 보호합니다./ 꿈은 열망과 고통을 식히고 기도에 몰두하게 합니다./ 꿈이 없었다면, 나를 낫게 하는 꿈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누더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기도는 꿈꾸지 않게 해달라는 것……/ 대신 나의 꿈을 세계에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시 ‘깃과 기척’(42쪽) 바로 앞쪽에 실린 이 글에는 딱히 제목이 없다. 시인지 산문인지 불분명하다. 만약 이 글이 시라면 화자의 말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시인 김선오의 목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다. 시인과 화자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게 김선오의 의도일 수도 있다. 이분법적 구분은 이제 질색이니까. “꿈이 투명한 실처럼 내게서 풀려나와 세계의 찢어진 부위를 부드럽게 봉합할 수 있기를……” 언어는 세계를 둘로 나눈다. 그러나 언어 바깥에 있는 꿈은 언어가 찢어놓은 세계를 다시 연결한다. 아주 부드럽게. “꿈을 말하는 목소리는 노이즈다. 사회적, 역사적 거대 서사를 구성하는 패턴화된 리듬에 포섭되지 않는다. 노이즈로서의 꿈-말하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 어떤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을까. 끝없이 ‘노이즈 캔슬링’ 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이 소음을 들리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작업노트’ 부분) 김선오는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신춘문예, 문예지 신인상 등 일반적으로 시인이 되는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 지난해 문지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최근 평단의 주목을 받는 시인이다. 이번 시집은 교보문고의 출판 브랜드 북다의 시인선 ‘어떤시집’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어떤시집’은 하나의 테마로 하나의 시 세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시집이다. 시인이 고른 키워드를 중심으로 시집 전체를 기획한다. ‘말 꿈 몸’도 구성이 독특하다. 단순히 시만 있는 게 아니라 신문의 기사, 꿈과 트라우마에 관한 논문, 태몽의 사전적 정의, 동료 시인 김리윤이 그린 고 변희수 하사의 초상 등이 아울러 실려 있다. 다채로운 텍스트가 시와 맞물려 한 편의 대화처럼 읽힌다. 자기 몸과의 불일치, 세상과의 불화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시인이 전하는 낮은 위로처럼 읽히는 시구가 있다. “바다 밀려오라,/ 밀려가라, 남김없이/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다”(‘밝고 밝아 보이는 세계’ 부분)
  • 전쟁과 폭력 일상화된 세계… DMZ서 ‘문학의 힘’ 외치다

    전쟁과 폭력 일상화된 세계… DMZ서 ‘문학의 힘’ 외치다

    노벨상 알렉시예비치 등 150여명세계 평화 위한 문학적 연대 도모분단·디아스포라 등 주제로 대담“지역의 상처, 세계사적 사유 확장문학은 평화 상상 언어 길어내고공존 서사 쓰는 일 시작할 수 있어” “위법한 비상계엄 시도를 겪은 뒤 우리의 삶의 조건이 사실 굉장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인식했습니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민주주의와 평화의 토대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단 걸 깨달았죠.”(김대현) 극우의 부상과 기후 위기, 거기다 전쟁까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이곳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열리는 ‘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의 고민이다. 한국작가회의와 경기도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단지와 DMZ 캠프그리브스 일대에서 개최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를 비롯해 호시노 도모유키(일본), 아흘람 브샤라트(팔레스타인) 등 국내외 작가 150여명이 모여 평화를 위한 문학적 연대를 도모한다. 이번 축제를 기획한 문학평론가 3인(최진석·남승원·김대현)을 1일 서울 마포구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전쟁 휴전으로 마련된 군사력의 완충지대인 DMZ(비무장지대)의 면적은 여의도의 약 340배라고 합니다. 전쟁의 흔적인 동시에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죠. 생명과 평화, 공존의 정신을 내세우는 이번 행사를 개최하기에 이보다 상징적인 장소가 있을까요? 문학은 파괴된 땅에서 자라나는 생명성에 귀를 기울입니다.”(남승원) 3일간 분단과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 등 다채로운 주제로 대담이 열린다. 국내외 작가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생명·평화·공존을 위한 대회 선언문’을 통해 ‘문학적 연대’를 도모한다. 첫날 기조 강연을 하는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에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같은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핵심은 세계문학 질서의 바깥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참여하고 연대한다는 데에 있다. “가령 아흘람 브샤라트는 현재 이스라엘의 민간인 공격이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에서 오는 작가입니다. 평화에 관한 이번 페스타의 구호가 결코 언어에 그치지 않아야 함을 몸소 증언하러 오는 셈이죠. 다른 작가들 역시 전쟁과 내전, 군부 독재, 종교적 갈등, 난민과 이주의 현실을 자기 언어로 기록해 온 이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피해의 증언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이 안고 있는 상처를 세계사적 사유로 확장해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번 만남은 또 다른 세계문학의 지평을 한국 독자들이 직접 마주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최진석) 한국작가회의는 이번 축제를 계기로 ‘생명·평화·인권 세계작가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올해 처음 열리는 이번 축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이들의 포부다. 문학은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한다. 그러나 거대한 폭력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글은, 저 거대한 탐욕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을까. 세 사람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피해자가 그저 숫자로 치환되는 세계에서 문학은 무기력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죠. 문학은 숫자로 집계된 희생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구체적인 개인의 것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국가의 명령이 지워버린 슬픔과 공포, 분노를 다시 인간의 감정으로 복원하죠. 전쟁을 추상적 전략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파괴로 인식하게 만드는 힘. 여기에 문학의 윤리가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문학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즉각 중단시키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상상할 수 있는 언어를 길어내고, 적대의 서사를 꺾어 공존의 서사를 쓰는 일은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이광호의 어찌보면] 계엄의 밤들을 지나서

    [이광호의 어찌보면] 계엄의 밤들을 지나서

    ‘86세대’는 생애를 통해 적어도 세 번의 계엄을 통과했다. 유년 시절에는 박정희 유신 시대의 계엄령들이 있었다. 집에 찾아온 대학생 어른들의 낮은 수군거림과 불안한 목소리의 톤으로만 간신히 기억할 수 있는 한 시대의 소음은 청각적인 기억에 가깝다. 또렷한 계엄의 이미지를 새기게 해 준 것은 1979·1980년의 계엄이다. 재래식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 마지막 세대로서 숨 막히는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십대의 모호한 불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갈증은 어떤 출구도 찾지 못했고, 불투명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1979년 10월의 광화문 거리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는 군중들 사이로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애도를 표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그때 광화문에서 느꼈던 날카로운 공기의 감각을 완전하게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학에 입학하고 그동안의 제도권 교육의 모든 지식이 허위인 것처럼 여겨질 때, 청소년기 계엄의 기억은 무거운 부끄러움으로 돌아왔다. 제도권 교육의 언어와 매스컴의 정보들 바깥에 엄청난 세계가 있었다. 무지에 대한 치욕감과 자기혐오가 비장함의 정동(精動)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서울 명동 미도파백화점 앞을 가득 메운 엄청난 인파 속에서 한 시대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자연스러웠다. ‘계엄’이라는 단어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는 역사적 유물처럼 보였다. 계엄의 핵심이 ‘언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황동규의 시 ‘계엄령 속의 눈’에 나오는 문장들, “아아 병든 말(言)이다/발바닥이 식었다/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처럼, ‘병든 말’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내뱉은 말들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어서 초현실적이었다.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 같은 낡고 녹슨 언어들이 잊고 있던 계엄의 밤들을 소환하며 ‘농담처럼’ 다시 찾아왔다. 이 장면들이 21세기에 재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포고령 언어들의 폭력성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놀라웠다. 농담 같은 계엄은 ‘5시간’ 만에 끝났지만, 이 기이한 농담을 끝낸 것은 진부한 언어의 발설자가 아니라 일상을 파괴하는 조작된 ‘예외 상태’를 용납하지 않은 시민들, 주권자들이었다. 그 계엄의 밤 바로 다음 아침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주최 측에서 공지한 노벨상 시상식 참석자들의 표준 옷차림은 연미복이었다. 수상자와 왕족이 아닌 일반 참석자들까지 모두 연미복을 입어야 한다는 보수적 규정에 대한 어설픈 반감 때문에 준비를 미루다가, 출국일이 임박해서 간신히 연미복을 대여해 급하게 트렁크를 싸고 있던 그런 개인적인 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밤은 이 모든 개인들의 사소한 순간들에 공동체적 의미를 새겨 넣어 주었다. 계엄 포고령에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믿을 수 없는 조항이 있었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행사를 앞두고 이런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망상적 인지부조화에 가깝다. 국회와 시민들이 계엄을 무력화시킨 그날 아침, 내가 속한 출판 단체(한국출판인회의) 명의의 계엄 규탄 성명을 서둘러 발표하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계엄이 내려졌던 나라의 땅에서 육중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의 기이한 착잡함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계엄이라는 ‘예외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 역설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법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법질서 자체를 정지시키는 기이한 역설이 계엄이라는 예외 상태다.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법 바깥의 폭력이 동원되는 것은 법이 그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정상’과 ‘예외’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은 독선적인 권력자에게서 나와서는 안 된다.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특정 권력이 독단적인 의지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권력의 공백이어야 한다. 불법 계엄을 종식하려는 시민들의 싸움은 86세대가 경험한 무거운 비장함과는 달랐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시야에서 손에 움켜쥔 돌의 광물적 두려움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다중적인 주체들과 시위의 퍼포먼스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몸짓들은 촛불 시위에서 이미 볼 수 있었다. 창의적이고 발랄한 투쟁에서 빛과 색을 바꾸는 응원봉은 저항의 리듬 자체를 변화시켰다. 촛불의 따뜻하고 아날로그적인 빛과는 달리 LED 응원봉은 다른 전자적인 유동성과 리듬을 가진다. 자신들이 누리는 문화적 레퍼토리와 집단적 표현 방식은 다른 정치적 신체와 언어를 생성한다. 정치와 취향, 놀이와 저항의 경계를 허무는 퍼포먼스는 새로운 시민성의 탄생을 보여 준다. 혁명은 거대한 명분과 이야기와 정치인들의 입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저 다른 언어들, 몸짓들, 스타일들, 리듬들, 그리고 ‘그냥 익숙하게 살던 대로 사는 것’을 거절하는 것. 저 새로운 빛들의 리듬 앞에서 계엄의 밤들은 흩어져 버린다. 세대적 간격에 대한 질투가 아닌 척하면서, 나는 저 빛들의 잔광 속에서 눈을 한번 떠 본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 [나태주의 풀꽃 편지] 문학관 앞에 고개 숙인다

    [나태주의 풀꽃 편지] 문학관 앞에 고개 숙인다

    아직 살아 있는 문인을 위해서는 문학관을 세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학전집도 만들지 않고 문학상도 제정하지 않는 걸로 되어 있다. 그것이 오랫동안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불문율을 어기고 그 모든 것을 다 해 버렸다. 우선은 운이 좋았다. 공주 태생도 아닌데 8년 동안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한 것이 주요하게 영향을 주었다. 공주시와 충남도의 공무원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했으며 공주 지역 문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처음엔 아주 초라하게 시작한 문학관이다. 공주시에서 일제강점기 지어진 낡은 적산가옥 한 채를 매입해 복원한 일이 있는데 그 집을 사용해 문학관을 열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공주 풀꽃문학관’이라 간판을 달았다. 그것이 2014년 10월. 그해에 또 공주시의 상금 지원으로 고맙게도 ‘풀꽃 문학상’을 제정·시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엔 1박 2일 일정으로 ‘풀꽃 문학 축제’까지 해마다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충청 지역 시인들을 중심으로 ‘풀꽃 시문학회’까지 조직되어 창작 활동을 하고 있으니 더없이 좋은 동행자들을 만난 셈이다. 그렇게 10년 풀꽃문학관을 운영해 오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현대식 문학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역시 공주시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에 의해 그 문제도 점진적으로 해결되어 2025년 7월에는 현대식 문학관을 새롭게 개관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건평이 300평에다가 3층 규모로, 건축 경비 70억원을 들인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 건축 경비 또한 오로지 공주시 것으로만 하지 않고 중앙정부의 돈과 충남도 지원금을 보탠 것이라서 더욱 의미가 있는 돈이었다. 개관을 하면서 이번에는 아예 ‘나태주 풀꽃문학관’이라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이는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역시 공주시에서 조례 개정까지 서둘러 그렇게 한 것이다. 심히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문학관은 여러모로 기존의 다른 문학관과 구별된다. 다른 문학관이 기념관, 전시관, 박물관 성격을 갖는다면 우리 문학관은 체험관, 참여관, 휴식 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처음부터 내 주장과 생각이었다. 또 내부 공간 구성이나 시설물, 전시물도 단순 명쾌하게 하자는 것이 내 뜻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에 칸막이나 문을 만들지 말자고 해서 층마다 통으로 열려 있어 헌칠한 느낌을 준다. 날마다는 아니지만 가끔 나도 볼일이 있거나 직원들을 만나 협의할 일이 생기면 문학관에 들르곤 한다. 그런데 갈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야, 좋다. 그런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특히나 조망이 초특급이다. 1층이나 2층 창가에 가서 서면 통창으로 공주 시내 풍경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어디 먼 곳 서양의 한 나라에 여행 와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정말로 공주가 그런 곳이다. 그러길래 나는 열다섯 살 나이에 공주를 처음 만나고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공주에 와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세웠던 것이리라. 거듭 민망하고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생전에 내 이름을 딴 문학관을 가진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영광이고 감사다. 문학관을 마련했을 때 딸아이가 한 말이 생각난다. ‘아빠는 이제 화석이 되어야 해.’ 화석이라면 돌 속에 박힌 죽은 생물의 시체를 말한다. 내가 아직은 살아서 움직이기도 하고 글도 쓰고 문학 강연도 하는 사람인데 어찌 화석이 된단 말인가! 그만큼 조심해서 살라는 충고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 가옥으로 된 문학관을 ‘구관’이라 부르고 새로운 문학관을 ‘신관’이라 부른다. 두 채의 문학관은 서로 버티지 않고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치 좋은 가족처럼 서로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애당초 설계자가 그런 의도로 설계했고 시공사가 그것을 성실히 실현해 낸 까닭이다. 아무리 보아도 두 채의 풀꽃문학관은 나로서는 기적의 산물이다. 글 쓰는 일로 일생을 버틴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크고도 아름다운 선물은 없다. 더없는 포상이며 영광이다. 문학관 앞에 고개를 숙인다. 나태주 시인
  • 영화·OTT·뮤지컬 넘어 연애프로 출연까지… 고전의 재발견

    영화·OTT·뮤지컬 넘어 연애프로 출연까지… 고전의 재발견

    문화 콘텐츠의 양적·질적 포화 속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고전’을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서사와 작품성이 이미 보장된 옛것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가장 먼저 주목할 작품은 지난 11일 개봉한 영화 ‘폭풍의 언덕’(에머랄드 펜넬 감독)이다.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배우 마고 로비가 주연 겸 제작자로도 참여하며 이목을 끌었다. 제작사 워너브러더스가 넷플릭스를 제치기 위해 8000만 달러(1150억원)나 되는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넷플릭스가 지난 13일 공개한 오리지널 시리즈 ‘순수 박물관’은 튀르키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약혼녀가 있는 부유층 자제 케말과 그의 가난한 친척으로 순수하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퓌순 사이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다. 오는 25일 개봉하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은 희곡 ‘햄릿’을 탄생시킨 세기의 거장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삶을 다룬 매기 오패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셰익스피어는 1596년 당시 11세에 불과했던 아들 햄넷을 잃는다. 그리고 4년 후 1600년경에 ‘햄릿’을 무대에 올린다. 소설과 영화는 상상력을 발휘해 셰익스피어가 겪었을 상실의 아픔에 주목한다. 다음 달 열리는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올 상반기 최대 기대작이다. 독자들에게 원작을 새롭게 읽히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구독형 독서 플랫폼 밀리의서재는 최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책 100권을 새롭게 추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해 기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열람한 회원 중 20~30대 여성 독자가 40%를 넘을 정도로 젊은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이런 현상을 반영해 밀리의서재는 고전 속 주인공이 현대에 환생해 ‘연프’(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콘셉트의 독자 참여형 기획형 ‘환생연애’도 마련했다.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의 엘리자베스, ‘데미안’(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의 바틀비 등이 연프 출연자가 된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고전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한 참신한 시도가 돋보인다.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지난 5일 진행한 토크 콘서트 ‘페이지&스테이지’도 같은 결이다. 오는 20일부터 다음 달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레프 톨스토이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과 뮤지컬을 나란히 놓고 다채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 누구나 각자의 ‘탈출구’는 있지

    누구나 각자의 ‘탈출구’는 있지

    “거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과 일하면 의사소통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설마 젊다는 이유로 잘하지도 못하는 장소 찾기 일이 주어지는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248~249쪽, ‘술집에 이천 번이나 가고 난 뒤에’ 중) 영업부 10년차 직원 요코이는 40년 근속 후 퇴직을 앞둔 선배 마루오카를 위한 송별회 자리를 찾는 ‘귀찮은’ 일을 맡게 됐다. 제안한 장소를 몇 번 퇴짜 놓은 마루오카에게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두 군데 다 다른 회사 사람들과 간 곳’이라는 이유를 듣고는 단순 계산을 해봤다. 열여덟살에 입사해 40년을 근속한 선배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고객사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고 치면 2000번 넘게 술집에 가야 했을 것이다. 2001번째일 수도 있는 그를 위한 회식 장소를 찾는 과정을 읽으며 뭔가 모를 연민이 피어오른다. “마사오,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꼭 행복해져야 해. 그렇잖아도 지켜보고 있어.”//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 하루요.”(218쪽, ‘우리 회사의 심령사진’ 중) 사내 행사 사진을 확인하다가 발견한 낯선 사람, 회의 녹음에서 발견한 존재하지 않는 자의 목소리. ‘헉’ 소리가 날만큼 무섭게 시작한 이야기는 끝에 다다르며 울컥하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다자이 오사무상, 아쿠타가와상 등 일본 내 굵직한 문학상을 받은 쓰무라 키쿠코는 평범한 일상을 정교하게 비추는 작가다. 11개 단편을 묶은 ‘거짓말 컨시어지’도 성가신 인간관계가 가득하다. 엄마의 그릇을 깨뜨리는 사람(‘세 번째 고약한 짓’), 지하철 승강장을 찾는 워킹맘(‘지나가는 장소에 앉아서’), 6학년인데 4학년 남아있는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방과후 시간의 그녀’)에게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책의 3분의1 분량을 차지하는 표제작 ‘거짓말 컨시어지’와 ‘속거짓말 컨시어지’는 남을 돕기 위해 거짓말 능력자가 된 회사원 ‘나’와 ‘나’의 일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거짓말에 대한 ‘철칙’까지 세웠다. 불편한 동아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교육비를 받아내기 위해 기꺼이 거짓말로 도움을 주는 ‘나’의 기쁨, 고민, 민망함에 왠지 모를 공감이 인다. 표제작을 빼고는 꽤 짧고 담담한 이야기지만 누구나 탈출구를 찾고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문을 열어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 이토록 위태롭고 황홀한 달콤함이여

    이토록 위태롭고 황홀한 달콤함이여

    폐허 속 남은 것들에 관한 질문들‘나’와 ‘너’ 사이 미묘한 감정 그려내“단맛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갈망거스를 수 없는 찰나의 순간 기억” 입에 넣는 즉시 밀려오는 짜릿함. 그러나 길게 지속되진 않는다. ‘달콤함’은 찰나의 감각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달콤한 것을 찾아 나서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게 녹아내리는 세계에서 우리는 달콤함을 붙들 수 있을까. 무너짐 속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고 단단히 유지하고 있는 달콤함이 있다면,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가 주이현(26)의 첫 단편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에 수록된 작품 다섯 편을 읽으며 부질없는 감각의 난장(亂場)으로 침잠한다. “이후 율은 말라붙은 생크림 속에서,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설탕 인형 하나를 끄집어냈다. 흰 원피스를 입고 등에 날개를 매단 채 오른손에 별 모양 지팡이를 들고 있던 그것은, 엉망이 된 케이크 속에서 유일하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물체처럼 보였다.”(‘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표제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린 폐허 속에서 남은 것과 남은 자에 관해 질문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인 P시에서 루와 주안, 율, 키코 네 사람의 일상이 느릿하게 전개된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 걸쳐진 관계. 언어와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소통. 소설은 네 인물을 통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미묘한 마음의 문제를 건드린다. 다만 어느 하나의 입장을 택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여러 문제를 늘어놓고 그것의 단면만 골똘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도시의 땅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공룡의 발걸음 소리 같기도, 종말이 다가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도시는 무너지고 이야기는 그것의 잔해를 더듬는다. 하나둘씩 P시를 떠나는데, 율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아직 여기에 있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가 독자에게 질문 같기도 하다. 모든 게 줄줄 흘러내리는 처참한 멸망 속에서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고. “그 애의 곁에서, 나는 나를 백지처럼 깨끗이 비울 수 있었어. 그 애의 완벽한 그림자가 될 수 있었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애가 이미 했던 말의 메아리거나, 곧 하게 될 말의 이른 기척이나 다름없었어. 나는 제로. 제로로 존재하였어.”(‘보아’) ‘너’에게서 ‘나’를 완전히 떼어낼 수 있는가. 그리하여 ‘너’를 말하지 않고 ‘나’를 말할 수 있는가. 단편 ‘보아’는 형이상학적 근원으로서 ‘너와 나’의 문제를 시적(詩的)으로 추적하는 작품이다.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나’는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욕망과 기억을 끊임없이 거스르다 보면 최초의 ‘너’가 있다. ‘너’를 향한 끊임없는 동경과 열망으로 ‘나’는 추동된다. 따라서 ‘너’를 떼어낸 ‘나’는 무(無), 즉 “제로”다. 이걸 깨달은 ‘나’는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며 한탄하는 어느 아저씨의 말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아저씨. 뭐가 망해간다는 거야. 세상은 망할 수가 없는데. 세상은 없는데. 내가 태어나던 순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동일하게 없는 곳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이현은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짧은 호흡의 도도한 문장으로 묵시록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직조해 낸다. 표제작(슈가)뿐만 아니라 ‘한밤의 스키틀즈’, ‘몬 몬 캔디’ 등 ‘달콤한 것’이 책을 지배하고 있다. 작가에게 물었다. 달콤함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 부질없는 것에 이토록 목매는가. “달콤함을 향한 이끌림은 우리가 태어나 가지게 되는 가장 원초적인 갈망이다. 거부하고 싶어도 우리의 몸은 결국 주기적으로 단 것을 취할 수밖에 없게끔 설계돼 있다. 생존과 직결돼 있으면서도 그 맛이 너무 중독적이어서 어느 순간 반대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해 오기도 하고. 달콤함을 떠올릴 때마다 불가능한, 위태로운, 동시에 몹시 황홀하고 눈부신, 그래서 또 한번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찰나의 순간들을 기억하게 되는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 [성낙인 칼럼] K컬처와 동행할 K민주주의는 요원한가

    [성낙인 칼럼] K컬처와 동행할 K민주주의는 요원한가

    2025년 12월 31일 밤 12시 직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2026 숫자와 함께 장식한 로고가 바로 ‘KIA’였다. 한국 제품이 세계인의 가슴에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시민들이 애용하는 휴대전화·텔레비전도 한국산이 압도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전자제품 전시장의 한가운데 제일 화려한 화면은 삼성·LG TV가 장식한다. 이제 지구촌의 일상은 Made in Korea와 함께한다. 대한국민은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세계 최빈국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제 지구촌에 우뚝 섰다. 2025년 1인당 국민소득 3만 6624달러라는 객관적 지표가 이를 증명한다. 이는 인구 5000만 이상 국가로서는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6위다. 2년 연속 일본보다 앞선다. 그야말로 경제는 선진국 대열에 안착하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전기전자에 마스가(MASGA)로 상징되는 조선과 방산까지 세계를 선도한다. 선진경제 진입에는 산업에서 문화로 자리잡은 K컬처도 크게 기여한다. 2025년 혼돈의 탄핵 정국에도 K컬처는 수출 200조원을 달성했다. K뮤직은 팝에서 클래식까지 세계인을 사로잡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서 BTS를 거쳐 로제의 ‘아파트’를 넘어 케데헌의 ‘골든’에 이른다. 김영욱·정경화·조수미에 이어 조성진·임윤찬이 빛을 발한다. K미술·문학도 백남준·김환기·이우환을 이어 마침내 한강이 꿈에 그리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생충’·‘미나리’를 거쳐 K영화와 드라마도 흥행을 보장한다. 화장품도 올리브영의 K뷰티가 대세다. 된장녀·김치 냄새로 폄하되던 K푸드도 불닭면에서 비비고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래도 과연 우리가 선진국인가라는 의구심은 여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일제의 강점 등으로 시달려 온 역사에 대한 열패감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 해 입장객 600만명을 넘어섬으로써 세계 4위에 오른 국립중앙박물관과 이건희 컬렉션은 문화강국 K컬처의 상징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가 꽃을 피우기는 어렵다. 가난한 나라살림에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인간다운 문화적 삶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제34조 제1항)는 원래 의식주 해결에 급급한 추상적인 생존권적 권리에 불과했다. 이제는 물질적인 생존을 뛰어넘어 문화적 생존권으로 진화하면서 구체화된다. 그러기에 의식주 걱정 없는 튼튼한 경제에 기반한 문화국가로의 진입은 자축해도 좋다. 문화국가의 기본원리는 “국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제 아래 작동한다. 김구의 이른바 문화강국론은 탄생 15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 세계기념의 해’로 부활한다. 이제 한껏 꽃피우는 K컬처를 통해서 보여 준 국민적 열정은 국리민복을 구현하는 K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비상계엄, 탄핵, 대통령선거로 이어진 혼란 속에서도 서로를 아끼고 따뜻하게 보듬는 ‘커피값 선결제’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창출했다. 찬탄·반탄의 갈등 속에서도 헌법재판소라는 사법기관의 최종적인 결정에 순응함으로써 정치적 평화를 구축했다. 그 누구의 강요나 지시가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민주공화국 시민임을 확인한다. 그런데 아직도 정치적 갈등의 승화는 요원해 보인다. 해가 바뀌어도 변화되지 않는 곳이 정치권이다. 국민들을 갈라치기하면서 권력 향유에만 집착한다.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갈등과 투쟁만 증폭시킨다. 공동선(common good)은 사라지고 당리당력만 추구하는 곳에 K민주주의는 갈 길이 멀다. 야당은 아직도 전임 대통령이 저지른 비상계엄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부여당은 상대방의 패착에 따른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3개 특검에 이어 2차 종합특검을 강요한다. 사법 정의의 이름으로 특검이 휘두르는 칼날이 작동하는 곳에 정치적 평화는 설자리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 행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와 화해 정신’을 계승하는 정당인지 의심스럽다. K컬처를 일군 젊은 세대들에게 정치권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가 있어야 한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헌법학
  • 이금이 작가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

    이금이 작가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

    이금이(64) 동화작가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24년에 이어 두 번째 최종 후보에 오른 것으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국제적 성과를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결과라는 평가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한국지부는 “IBBY가 발표한 2026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이 작가가 포함됐다”고 1일 밝혔다. 최종 후보에는 아흐마드 아크바르푸르(이란), 마리아 호세 페라다(칠레), 티모테 드 퐁벨(프랑스), 팸무뇨스 라이언(미국), 마이클 로젠(영국) 등이 이름을 함께 올렸다. 안데르센상은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을 기리기 위해 1956년 제정된 아동문학상이다. 2년마다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그림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시상한다. 그림 부문에선 이수지 작가가 2022년 수상한 바 있다. 수상자는 4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발표된다. 이 작가는 1984년 단편동화 ‘영구랑 흑구랑’으로 데뷔했다. 스테디셀러 ‘너도 하늘말나리야’와 후속작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 등 3부작을 비롯해 ‘유진과 유진’,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허구의 삶’ 등을 펴냈다. 특히 일제강점기 여성을 조명한 ‘알로하, 나의 엄마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슬픔의 틈새’에 이르는 디아스포라 3부작을 통해 역사와 기억,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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