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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 다 읽고 간 사람… 그 이름 김현

    이 세상 다 읽고 간 사람… 그 이름 김현

    김현(1942.7.29~1990.6.27).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20년이다. 반복되는 노동과 휴식 등 일상의 삶에 치여 사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그는 문학평론가다. 한자 또는 식민지 언어가 아닌, 모국어로 사유하고 그 감성으로 글을 쓴 첫 세대인 ‘4·19세대’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의 짧은 삶을 아쉬워하는 것은 단순히 한 세대의 빼어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왕성한 독서욕과 성실한 읽기로 한국 평단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를 두고 “이 세상을 다 읽고 간 사람”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문체로 전개되는 그의 감수성 넘치는 비평은 훗날 수사학적 인상 비평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첫걸음이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지금도 그의 매혹적인 문장과 문체는 ‘김현체(體)’로 불리며 후학들의 전범으로 통한다. ●‘문학과 지성’ 창간… 48세 생애에 저서만 50권 순수·참여 문학 논쟁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던 1970년 가을, 그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이들은 ‘4K’로 불렸다-과 함께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만든다. 이른바 ‘문지’가 또 다른 대척점에 섰던 ‘창작과비평’(창비)과 함께 한국 문단의 묵직한 성처럼 우뚝 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학주의 이데올로그’인 그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비평가”(황지우 시인)라는 찬사에 걸맞게 그는 한국 문학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김현은 담배만을 안주 삼아 거의 매일 문인들과 그리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대학 3학년 때 늦깎이로 배운 술이었지만 그는 1980년대 ‘불꽃의 말’이라는 에세이에서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 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했을 정도로 술을 예찬했다. 심지어 몸이 너무 아플 때조차 “나 대신 마시라.”며 주변에 술값을 건넬 정도였다. ●건강 나빠지자 술값 건네며 “대신 마셔 다오” 그럼에도 1990년 마흔여덟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까지 23권의 책과 6권의 공저(共著), 7권의 편서(編書), 19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어디 그뿐인가. 무수한 논문에 소설까지 몇 편 얹었다. 김현식 표현을 빌리자면 ‘아, 놀라워라.’다. 문청들의 가슴에 시(詩)의 지독한 우울함과 설렘, 외로움을 심어 놓고 떠난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만들고 해설한 이도 그다. 그러고는 이듬해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기형도처럼 숱한 문청들에게 좌절과 동경을 함께 안겨준 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면 ‘김현 신화’는 얼추 완성된다. 김현은 전남 목포에서 약품공급업을 하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덕분에 구김살 없이 특유의 다독(多讀) 습관을 익힐 수 있었지만, 이는 또한 쉼 없는 갈등의 배경이 됐다. 김현은 언젠가 사석에서 “판사나 검사를 하지 않고 문학 나부랭이를 했다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꾸짖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이 같은 갈등이 없었다면 뒷날 그가 정립한 ‘무용한 문학의 유용성론(論)’이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김현은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라고 설파했다. 창조적인 문장과 수사적 표현은 평단(評團)을 넘어 작단(作團)까지 넘겨봤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66년 발표한 단편소설 ‘노숙’ 등이 대표적이다. ●고향 목포에 문학관 건립… 김현문학상 제정 주장도 20주기를 맞아 추모 열기도 뜨겁다. 문학과지성사는 18일 서울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말들의 풍경과 비평의 심연’이라는 주제로 ‘김현 20주기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제발표자로 나선 박성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김현 비평은 인식론에서 논증의 구조, 그리고 문체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개성과 특이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유명사로 통용이 가능하다.”며 김현의 문학사적 좌표를 명확히 했다. 이어 “일방적인 찬사를 통해 옹호하는 일이나, 수사적 전략으로 폄하시키는 일 모두 그를 특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인 만큼 폭넓은 연구를 통해 세대론적 시각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현의 서울대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스승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공개해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1977년 9월8일 날짜가 적힌 편지에서 김현은 “바 선생(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지칭)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다.”고 근황을 밝힌 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라고 적었다. 너무 심각했다 싶었는지 “이러니까 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라며 “일요일쯤 심심하면 놀러 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애주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김현의 고향인 전남 목포시는 올 연말까지 ‘김현문학관’을 세워 주요 저서와 필기도구, 편지, 일기장, 그림, 병상일지, 영수증 등 수천점의 유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김현문학상’을 제정하자는 주장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김현 ▲1942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 출생(본명 김광남) ▲1957년 목포 문태고 입학한 뒤 서울 경복고로 전학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 입학 ▲1962년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으로 등단. 필명 ‘김현’ 처음 사용 ▲1968년 4·19세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한 ‘68그룹’ 동인 결성 ▲1970년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 창간 ▲1974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임용 ▲1990년 간경화로 타계
  • “변동의 시대에 응답하는 문학적 자세를”

    “변동의 시대에 응답하는 문학적 자세를”

    시인 월하 김달진(1907~1989)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과 사단법인 시사랑문화인협의회(회장 최동호)가 함께 주최한 제21회 김달진문학상의 기념시(詩) 낭송회가 4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국제관에서 열렸다. 시상식을 겸한 이 행사에는 올해 시 부문 수상자 시인 홍신선, 평론 부문 수상자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를 비롯, 문단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동화 서울신문 사장은 축사를 통해 “두 분 수상자가 김달진문학상을 받게 돼 상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면서 “앞으로도 탁월한 문인들에게 상을 수여함으로써 상의 영예는 물론, 한국문학의 의의도 드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행사는 축사에 이어 시·평론 부문 심사소감 발표, 수상소감 발표 순으로 진행됐다. 시집 ‘우연을 점찍다’(문학과지성사 펴냄)로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홍 시인은 “인생 이모작의 첫 수확인데 알곡보다는 껍데기가 많다는 건 제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일”이라면서 “그 수확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터무니없는 욕심 부리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평론집 ‘현대시의 정신적 감각’(천년의시작 펴냄)으로 상을 거머쥔 홍용희 교수는 “이 상은 오늘날 변동의 시대에 응답하는 문학적 자세를 가지라는 주문으로 생각한다.”며 “좀 더 깊은 문학 공부를 위한 용맹정진의 기회로 삼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이 자리에는 지난해 수상자인 시인 황동규, 평론가 최유찬 연세대 교수가 참석해 수상자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했다. 또 김달진 선생의 유족들도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행사 후에는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등의 축하 노래와 시 낭송이 이어졌다. 한편 올해 9월 경남 진해에서는 김달진문학제가 열린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제21회 김달진문학상] “시와 타협 않고 뿌리 뽑겠다”

    [제21회 김달진문학상] “시와 타협 않고 뿌리 뽑겠다”

    1930년대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고,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월하 김달진의 생애는 시(詩)와 선(禪)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짜여졌다. 모더니스트로서 서구적 이미지를 탁월한 시적 언어로 바꿔내는 능력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후에는 불교와 노장사상 등 동양사상에 뿌리내린 고고한 정신주의적 시의 정점을 선보였다. 올해로 21년 동안 이어온 문학상은 그의 문학 세계와 맥을 잇는 후세대 문인들을 찾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그런 까닭에 오랜 시간 동안 불교적 선 세계관을 기초로 시 창작을 펼쳐온 시인 홍신선(66)과 인간의 삶, 정신의 비의를 추구해온 문학평론가 홍용희(44)가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 ■시 부문-홍신선 시인 ‘우연을 점찍다’ 등단 이후 꼬박 45년이 지났다. 그의 웅숭깊은 시(詩) 세계는 지난 시절 시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내밀한 교과서 역할을 했다. 특히 현대 과학과 기계 문명이 승리를 선언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시는 더욱 빛을 발했다. 유교적 가치와 선(禪) 불교 사상을 뿌리 삼은 그의 시편들은 우리 사회가 천착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난히 상복이 없었다. 상이 문학적 성취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시인협회상(2002), 현대불교문학상(2006) 등 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참 상운(賞運)과 인연이 멀었다. 지난해 7년 만에 펴낸 시집 ‘우연을 점찍다’(문학과지성사)로 제 21회 김달진문학상을 받은 데 대해 마냥 기뻐하기가 겸연쩍은 이유다. “제가 쓴 시들이 그동안 독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고 봐야겠죠. 시운(詩運)과 문운(文運)도 없었던 것 같고요.” 시인 홍신선(66)이 25일 쑥스럽게 밝힌 수상 소감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월하 김달진 선생의 작품과 그가 직접 번역한 선시(禪詩)를 많이 읽었으며 그의 불교적 세계관이 내 시에 뿌리내려 맥이 닿았다고 생각한다.”면서 김달진문학상을 받게 된 기쁨을 표현했다. 이는 함께 수상작 최종 후보에 올랐던 최승자·최승호·황학주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아닌, 그의 시집이 뽑힌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월하 선생과 자신을 하나로 이어주는 시적 맥락이자 시에 다가가는 방법의 동일함을 ‘반상합도(反常合道)’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는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며, 선불교의 가치에 기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18년 동안 우직하게 써내려온 연작시 ‘마음·경(經)’은 55편으로 일단 마무리했다. ‘우연을 점찍다’를 통해 완성시킨 것이다. 홍신선 시세계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인 ‘마음·經’은 다듬고 보완해서 내년쯤 단행본 시집으로 내놓을 예정이라 한다. 이 밖에 ‘죽음놀이’, ‘성인용품점 앞에 서다’ 등 다른 시편들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선은 초가을 새벽녘의 우물물 한 바가지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지혜를 담고 있는가 하면, 삶과 늙음·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 한껏 무르익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2년 전 ‘드디어’ 동국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시를 업(業)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는 “시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뿌리뽑듯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면서 “강의 또는 논문을 위해 책을 읽곤 했던 것과 달리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죽음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을 인식하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으며,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집착과 욕망을 줄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전업시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45년차 새내기 시인’의 포부를 밝혔다. 글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사진 김태웅기자 tuu@seoul.co.kr ■시 심사평-불교적 상상력 시어에 접목 심사위원들은 든든히 뿌리박아 내리는 홍신선의 불교적 상상력에 한결같은 찬사를 보냈다. 또한 삶과 늙음, 죽음 등 인간 존재 보편의 사유를 겸손과 겸양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황동규는 홍신선의 시를 ‘시적 해방의 한 모습’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죽음놀이’, ‘마음 경’ 등은 지금까지 시인이 추구했던 유교적인, 혹은 금욕적인 구도의 직선적인 길에서 풀려난 인간의 상태를 보여준다.”면서 “유교적 의지가 피워낸 불교적인 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럽고 절절하다.”고 수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김인환 역시 “불교를 시세계로 삼는 것이 자칫 공소한 정신의 고공비행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 편견임을 일깨워줬다.”고 평했다. 조정권은 ‘일장춘몽 생애에 대한 가장 빛나는 포상은 죽음임을’(‘포상 빛나는’ 중)과 같은 시 구절에서 정서적 황홀감에 이은 해방감까지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숭원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을 절제하며 홍신선이 김달진의 이름을 단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모름지기 연기(緣起)에 속하는 일”이라고 평했다. 심사위원 황동규 김인환 조정권 이숭원 최동호
  • 방콕 매춘가서 만나는 비루한 삶

    거기, 한 사내가 있다. 15년의 시간 동안 태국 방콕 나나역 근방 ‘수쿰빗 소이 16’을 네 차례 찾아들었다. 한 번 머무는 기간은 돈이 떨어질 때까지였다. 여섯 달, 여덟 달씩을 넘나들었다. 호기롭게 돈을 뿌려대는 서구의 부호 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몇 년 동안 벌어온 돈이 있으니 거리의 여인들에게 제법 쏠쏠하게 풀어대는 돈주머니 역할도 했다. 또한 거기 사람들은 원하지도 않건만, 그들의 전생(前生)을 애써 얘기해주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그, ‘레오’가 탐한 것은 몸을 파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여인 ‘플로이’의 사랑이었다. 레오와 플로이는 500년 전 전생(前生)으로 얽혀진 사랑이었다. 플로이가 있기에 그는 정주(定住)를 넘봤다. 비루하고 남루한 삶들이 바글거리는 매매춘의 거리일 뿐이건만 그에게는 어미의 품이나 되는 양 꼭 돌아가야할 곳이었고, 그들 삶의 틈바구니로 엉덩이 비집고 들어가야할 운명의 힘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 하지만 ‘늘 뒷주머니에 여권을 꽂고 다니는’ 이방인에게 허용되는 공간은 한 조각도 없다. 그저 이방인으로서만 호명(呼名)될 뿐이다. 박형서(38)의 첫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문학과지성사 펴냄)는 한국인 레오가 태국 방콕의 매춘굴 사람들과 어울리며 겪는, 사회적 관계의 총합으로서 인간에 대한 핍진한 기록이자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무거움과 인간 존재의 평등함에 대한 판타지적 보고서다. 또한 끝없이 현지 생활인이 되기를 원했던, 그러나 많이 서툴렀던 한 이방인의 여행기이기도 하다. 어릴 적 앓은 열병 때문에 얼굴 근육에 문제가 생겨 고통스럽거나 화를 내도 늘 미소와 폭소로만 비춰지는 얼굴을 가진 열 다섯 매춘녀 까이, 늙은 항문성교 전문 매춘부 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살기 위해’ 매춘 거리에 발을 디딘 콴, 싸구려 마약 ‘야바’를 파는 샨, 최하급 매춘부들인 ‘한 줄 의자’의 여인들, 이 모든 이들의 벗이 된 독일인 우웨, 그리고 레오의 사랑이자 이 모든 낮은 삶들끼리의 연대의 중심축이 됐던 플로이까지. 소설은 이처럼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지만 결코 그 거리 누군가의 삶, 그 삶이 그리는 신산한 궤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삶과 삶 사이에 얽혀있는 것, 관계를 통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한다. 총합 1년 몇 개월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지냈던 레오 또한 전생을 운운하며 겉돌 듯 그들 곁에 머물 뿐이다. 레오는 이방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합리화한다. ‘우리가 어디론가 가는 것은 그 곳에 꼭 가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더이상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되뇌이면서 말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플로이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전생에 광대나 저능아였거든 언제든 얘기해도 좋아. 하지만 현재보다 나았다면, 제발 말하지 마. 지금 사는 인생이 내 몫의 최선이라 믿고 싶어.”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며, 화려한 전생의 사연을 듣는 이는 고통스러울 뿐이다. 레오는 수쿰빗 소이 16에서 15년에 걸쳐 어울려 지내며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수백, 수천의 전생이 있기에 모두 한때는 살인자였고, 배신자였고, 도둑이었고, 희생양이었고, 매춘부였음을 절감한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맡은 배역이 다를 뿐’이라고 술회한다. 2000년 등단한 뒤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등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박형서는 소설 서사의 무대를 한껏 확장시킨다. 재기 넘치는 문체와 꼼꼼한 취재력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005년 동남아 여행 중에 작품을 구상한 뒤 2008년 꼬박 일곱 달을 방콕에 머물며 취재했다고 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조국떠나 50년 맑은 詩語로 인류애 읊다

    조국떠나 50년 맑은 詩語로 인류애 읊다

    원망도 회한도 없다. 디아스포라(이산·離散)의 삶은 그저 운명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개성으로, 서울로, 마산으로 떠돌며 자란 것은 오히려 시(詩)의 자양분에 가까웠다.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소아방사선과 의사 생활을 한 것도, 낯선 언어의 홍수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것도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과였지만 그 역시 그저 운명이었다. 그렇게 꼬박 50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는 어두운 밤길 밝은 등불처럼 오롯한 희망이었다. 물이 흘러가듯 자유롭고 맑은 언어(言語)와 문장의 운용은 아버지가 물려준 자산이었다. 마냥 순응하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맞닥뜨렸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자신의 시(詩)가 어머니 나라의 국경도, 순혈을 고집하는 민족의 협애함도 뛰어넘고 보편의 인류애로 나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종기(71)가 4년 만에 펴낸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 펴냄)은 등단 50년을 맞은 노() 시인이 품을 수 있는 회한과 그리움, 새로운 전망을 가득 담고 있다. 그는 내친 김에 1950년대부터 써왔던 수백편의 시 중 50편을 직접 골라 에세이 형식으로 시작(詩作) 노트를 펴냈다.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펴냄)는 가슴이 더웠던 어린 시절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냥 시인으로 살려고 했건만 의사가 되었고, 그 뒤 우여곡절을 겪었던 그의 삶과 가족의 비사(悲史), 시 세계의 바탕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한다. 조국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한 죄로 44년 전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세상을 사는 게 내 의지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만 얘기했다. 그는 군의관 시절이던 1965년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고,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겪은 일을 발설하지 말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 생활에만 전념하라.”는 조건으로 조국을 떠났다. 그렇게 그리움만 품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재미(在美) 시인이라고 불렀다. 한시도 모국어의 아름다운 결을 잊은 적이 없건만 이따금씩 한국을 찾아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모아뒀던 시를 슬그머니 꺼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곁에 있었다. 게다가 시작 에세이 덕분에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느낌의 시어 속에서 구사되는 따뜻한 시정(詩情)은 4년 전 펴낸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등 지금까지의 시편들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황혼’, ‘이별’, ‘내 나라’ 등 시편에서 보여주는 정서는 늘 결핍됐던 조국애를 훌쩍 넘어섰음을 여실히 확인시킨다. 그는 “조국의 땅 자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극복한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강박관념처럼 핏줄의 순결함만을 강조할 이유가 없어요. 문학에서 순혈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움직임이 더 많으면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 치매에 걸려 ‘울지도 웃지도 않으시고 물끄러미/ 긴 세월을 돌아 나를 보시는 어머니’(‘자장가’)이자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 만나신다고/ 박명의 빈 들판을 향해 매일/ 먼 길 떠나시는 내 어머니’(‘치매’)를 위해 슬픈 자장가를 부르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울컥해진다. 또한 에세이에는 창졸간에 세상을 떠나버린 동생, 비행기 표값이 없어 임종하지 못한 아버지, 치매에 걸려 과거로만 돌아가는 어머니, 그립고 원망스러운 조국에 대한 회억까지, 이역의 밤에 시를 쓰는 마종기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의 시는 쉽고 편안한 입말로 이뤄져 있다. 시를 모른다고, 시는 시인들만의 것이라고 외면하기엔 너무도 쉽게, 따뜻하게, 가슴이 절로 움직이게 쓰여져 있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시는 인간과 세상의 비의(秘意)를 수줍지만 정직하게 담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국내 문단에서 동화의 영역을 개척했던 마해송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재능이 천부(天賦)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책꽂이]

    ●아름다운 하루(안나 가발다 지음, 허지은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가족을 감수성 짙은 문체로 써내려간 프랑스 소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멀어지지만, 그래도 언제나 서로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는 형제자매들의 정에 대해 그렸다. 30대에 접어든 삼남매 시몽, 롤라, 가랑스는 격식을 차린 사촌의 결혼식장에서 갑자기 빠져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로 떠나며 행복을 느낀다. 9000원. ●농담이 사는 집(조명숙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장편 ‘바보이랑’, 소설집 ‘헬로우 할로윈’ 등을 쓴 작가의 첫 성장소설. 고등학생 영은이의 이모는 어느 날 핀란드로 ‘코끼리’를 찾으러 가겠다고 한다. 코끼리는 핀란드인 여행가로 이모는 그를 자신의 친아버지라 믿고 있다. 9000원.
  • 최하림 시인 간암으로 별세

    최하림 시인 간암으로 별세

    시인 최하림(본명 최호남)이 22일 오전 11시쯤 경기 양평군 자택에서 간암으로 숨졌다. 71세. 1939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김현, 김승옥, 김치수 등과 더불어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1976년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로 시작해 2005년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순수시와 참여시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대한 타협도, 쏠림도 없이 자신만의 작품성 넘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오월 광주를 매개로 해서 노골화한 죄의식과 폭력, 생명, 죽음 등 인간 보편의 가치를 탐구했다. 이산 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최우수상 등을 받았다. 올해 2월에는 서울예대 제자들과 문단의 후배들이 한 데 모여 ‘최하림 시 전집’(문학과지성사)을 내고 출간기념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지난해 간암 판정을 받은 고인은 전집 서문에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 듯한 말을 남겼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나는 바위에 앉습니다. 비린 내음을 풍기며 강물이 철철철 흘러갑니다.(중략)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유족으로는 부인 장숙희씨와 아들 승집, 딸 유정·승린 1남 2녀가 있다. 승린씨는 소설 ‘아홉개의 숲’을 낸 작가다.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화장할 예정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꾸려졌으며, 장지는 양평군 양수리 갑산공원이다. 발인은 24일 오전 5시. (02)2258-5957.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4·19는 한국적 근대민주주의가 제 모습 드러낸 것”

    [4·19혁명 50주년] “4·19는 한국적 근대민주주의가 제 모습 드러낸 것”

    4·19혁명이 ‘한국적 근대 민주주의의 원(原)체험’이라는 주장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곧이어 일어난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인해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평가받던 것과 다소 다른 맥락이다. 이승만 정권을 끝장내고도 박정희 군사정권을 불러들인 게 혁명의 한계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18일 학계에 따르면 한국적 근대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처럼 근대를 추동할 수 있는 세력이 우리에게도 있었느냐는 점이다. 식민사학 타파를 내건 국사학계는 조선후기에서 답을 찾으려 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미 상공업과 화폐와 시장이 발달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서양식 근대의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열등감으로 인한 작위적 해석이라는 반론이 쏟아졌다. 최근 국사학계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찾은 인물은 고종이었다. 이 역시 쉽지 않다. 왕실 주도의,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점을 부각하려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를 빼앗겼다는 점 때문에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반론에 막혀서다. 최근 몇 년간 논란이 됐던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를 근대세력으로 본다. 아무리 미워도 근대적 제도와 체험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이 원한 것은 우리의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의 팽창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반론을 낳았다. 역사를 연속적으로 본다는 대목은 매력적이나 때로는 몰이해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드러낸 과도한 정치적 편향 때문에 아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19혁명 때 비로소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가 이뤄지면서 근대적 시민으로 세례받았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관심을 끈다. 지난 14일 4·19혁명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고트프리트 칼 킨더만 독일 뮌헨대 명예교수는 전통적 유교개념을 토대로 한 이승만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학생들이 주도한 것에 대해 “미국식 민주주의 원칙과 자유세계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와 이승만정권이 형식적으로 근대나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내용적으로 근대와 민주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19 아니냐는 얘기다. 지난 15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 ▲분단·전쟁으로 피난민의 도시유입 ▲매스컴과 근대교육의 보급으로 시민의식이 성장한 것 등을 혁명의 뼈대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마저 4·19혁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1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홍성대 고려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자는 “4·19기념탑이 박정희에 의해 세워진 것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혁명의 열기에 정치적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한 포섭의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민정이양 이후 대통령 취임식에서 “4·19의 혁명이념을 계승한다.”고 연설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들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4·19혁명을 재조명한 책 ‘4·19와 모더니티’(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프랑스혁명 뒤 나폴레옹 황제가 등장했다는 점을 들어 4·19혁명 뒤 5·16쿠데타가 있었다 해도 혁명 정신 자체는 유산으로 남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교수 역시 해방 직후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4·19혁명에서 민족자주·인민주권·민족자립경제 등 ‘최대정의적(maximalist) 민주주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평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상처에서 나온 희망, 시

    시인 최승자는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고 했다. 또 시인 도종환은 “상처 그 밑에서 새 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고 노래했다. 이 말들처럼 시인은 그 누구보다 상처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또 이들은 자기 마음의 생채기를 헤집고 다스려 그 안에서 보편적 감성을 이끌어 낸다. 그런 점에서 시인 류근은 예리한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펴냄)에는 긴 시간 동안 생기고 아무르고 다시 덧난, 축적된 상처 속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이 있다. 1992년 등단 이후 어떤 지면에도 시를 발표하지 않았던 그가 18년간 쌓은 상처의 기록이다. 제목처럼 작품 속 화자는 상처에 지독히도 예민한 체질이다. 그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나 갈 길 가로막는 노을에서도 흔히 다친다.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 이름은 늘 있다’(‘상처적 체질’ 중)고 고백하는 그에게는, 자신 앞에 놓인, 또 자신이 바라보는 세월 자체가 모두 상처다. 그의 상처는 많은 부분 누군가의 부재(不在)에서 온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도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 약속한 삶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처럼 시집 곳곳에는 작별로 상처 받고, 그리움으로 상처가 곪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사랑은 애절하다.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 비우는 것이다’(‘벌레처럼 운다’ 중) 같은 사랑의 맹세는 통속적 연애시에 가깝다 할 정도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내 슬픔은 삼류다.’라며 통속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면서 그 통속(通俗)을 통해 세상(俗)과 널리 통(通)하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해설을 붙인 문학평론가 최현식도 “류근의 시는 통속의 재현이 아니라 통속미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시집에 통속적 사랑과 그리움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포근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들 사이에는 여유로운 해학성이 묻어나는 작품도 더러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웃음과 함께 전해지는 가슴 한편 찌릿함을 피할 수가 없다. ‘하루 종일 장래 희망이 퇴근이었던 나는 / 풀려난 강아지처럼 성실하게 / 아랫도리를 흔든다 /(중략) 노을 끝에 비스듬하게 내 하루 동안의 욕설이 / 내어 걸린다 아아, / 쓰벌!’(‘퇴근’ 중)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책꽂이]

    ●프로테우스의 탈주-접속 시대의 상상력(우찬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 지성’ 편집위원으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문학평론가 우찬제가 2001~2010년 발표한 문학평론 24편을 모았다. 김중혁, 이기호, 정이현, 한유주 등 젊은 작가들을 주로 다뤘다. 1만 5000원. ●여덟 번째 방(김미월 지음, 민음사 펴냄) 작가의 첫 장편소설. 2008년에 계간 ‘세계의 문학’에 연재한 것을 모았다. 상처받은 청춘의 꿈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시종일관 해학적이고 발랄한 문체로 그려낸다. 1만 1000원.
  • 손바닥 위에 쓴 가와바타의 삶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俳句)는 한 줄 문장 안에 우주를 담아낸다고 한다. 극히 짧은 형식으로 커다란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시에 하이쿠가 있다면 소설에는 콩트가 있다. 콩트는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이야기로 한 손바닥에 써질 정도의 분량이란 뜻에서 ‘장편(掌篇)소설’로도 불린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며 ‘설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는 일생동안 콩트를 썼다. 그가 40여년 동안 남긴 175편의 콩트는 여러 평론가, 연구자들에게 ‘가와바타 문학의 고향’, ‘가와바타 문학을 여는 열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남긴 짧은 소설들이 ‘손바닥소설’(문학과지성사 펴냄)이란 재치있는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다. 가려뽑은 68편의 손바닥소설들은 보통 원고지 15장 내외, 적게는 2장, 길어도 30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다. 하지만 짧은 호흡 안에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특징들은 고스란히 살아난다. 서정적인 문체도 그대로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신 손바닥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의 손바닥소설에는 시와 같은 아늑함이 있다. 가와바타는 보통 콩트에서 기대하는 기발한 반전이나 재치·풍자보다는, 차분하고 애수에 젖은 분위기를 통해 삶의 비의(秘意)를 포착해 낸다.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 그리움 등 남녀 간의 심리나 애정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주로 그가 20대 초반에 쓴 것들로, 서정적 문체와 맞물리며 여리고 감성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부모, 부부, 아이 3대째 폐병을 앓지만 “당신과의 결혼 덕분에 행복하다.”고 병상에서 서로 말하는 부부, 보름 동안 임시 아내로 함께 했던 항구의 남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여인 등이 그런 예다. 가와바타의 삶과 서로 통하는 자전적 내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어머니’라는 작품에서는 부모의 죽음을 처연한 어조로 전한다. 또 첫사랑 소녀 이야기를 그린 ‘양지’에서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남의 집 신세를 지게 되면서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음을 고백하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두 책으로 본 性의 역할

    당신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이것은 참인 명제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이라면 여성다워야 한다. 이것은 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명제다. 성(性) 역할 구분의 당위성에 대한 가치 명제로서 사람마다 판단 기준을달리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 역할의 구분에 대한개별적, 혹은 사회적 판단 기준을 어떻게 형성하고 쌓아 왔을까. 【 오리온의 후예 】찰스 버그먼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사냥꾼으로 길러진 남성성 남성, 남성다움, 그리고 여성, 여성다움에 대한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 나왔다. 동일한 기준과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남성, 여성의 비교 연구는 아니지만 함께 살펴보는 것으로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다. 강제되어 온 성 역할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 아니라 집단 속에서 개인의 역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등으로 인식의 폭이 한껏 확장됨을 확인할 수 있다. ‘오리온의 후예-사냥으로 본 남성의 역사’(찰스 버그먼 지음, 권복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쉼없이 무언가를 뒤쫓고 포획하려 하는 남성성에 주목하고 있다. 남성들의 늘 충족되지 않는 추격의 욕망을 그리스 신화 속 사냥꾼인 오리온의 후예로 비유하고 있다. 특히 신화, 문학, 인류학 속에서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 공공연히 드러나고 있는 ‘사냥꾼 본능’의 남성 모습을 드러내며 현대 남성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를 밝힌다. 즉, 무언가를 붙잡아 지배하려는 사냥꾼 본능에 사로잡혀 여성, 짐승, 자연과의 교류 의지를 잃어버린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남자들은 사냥꾼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서 “다만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사냥꾼으로 길러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족,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하면서까지 사회적 지위와 연봉을 사냥하려는 것이 과연 남성다운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또한 남성이 이러한 원초적 욕구로부터 해방되어 남성성만이 아닌 새로운 인간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대중독재와 여성 】임지현·염운옥 엮음/휴머니스트 펴냄 ●여성의 정치참여는 해방의 수단 반면 ‘대중독재와 여성-동원과 해방의 기로에서’(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 임지현·염운옥 엮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또 다른 측면에서 ‘대중독재’로 일컫는 파시즘 시대에 사회 참여의 폭을 넓히며 ‘절반의 여성 해방’을 이뤄낸 여성들의 곤혹스러움을 다양하게 조명한다. 7년째 계속되고 있는 ‘대중 독재’에 대한 공동연구 학술서인 만큼 읽기가 그리 녹녹지는 않지만 문제의식은 선명하다. 연구에서는 나치, 러시아 소비에트, 프랑스 비시정권, 중국 문화혁명 시기 등을 20세기 파시즘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당시 대중들의 모습을 단순히 희생자만이 아니라 정치적 한 주체로서 지지하고 동의했기에 가능했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즉, 희생자이면서 공범자라는 논리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조금 더 미묘하다. 많은 여성들은 파시즘 체제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일자리를 갖고, 투표권을 얻었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여성 해방과 평등의 기반을 얻었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단순히 여성 억압적인 체제로 보기보단 체제를 개조하려는 정치 목표를 위해 여성 대중을 동원한 ‘젠더 정치’로 보고 있다. 여성은 때로 저항하고 희생당했지만, 주로는 적극적 공범자이자 소극적 동조자 역할을 했다. 17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좌파 독재, 우파 독재 시기 여성의 모습들을 조명한다. ‘오리온’ 2만 5000원, ‘대중독재’ 2만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죽음 통해 발견한 삶의 의미

    이정희의 친구, 서인주가 죽었다. 1년 전 폭설이 퍼붓던 겨울 새벽 미시령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인주를 사랑했던 미술평론가는 죽음을 자살로 단정짓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 탁월한 그림 작품, 불행한 개인사, 드라마틱한 죽음 등을 근거 삼아 예술가적인 열정에 의한 자살로 미화한다. 그러나 얼핏 불행해 보일지라도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확신했기에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리 없다고 믿으며 정희는 친구의 죽음을 실체적으로 밝히고자 직접 나선다. 1년 전 정희는 한 남자를 간절히 죽이고 싶었으나 차마 행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자신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왼쪽 손목에 주저흔만 세 개 남겼을 뿐 실패에 그친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정희가 사랑했던, 예술을 사랑하고, 우주를 사랑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을 가르쳐준 인주 외삼촌의 죽음이 있다. 한강(40)의 새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삶의 곳곳에 포진해 있는 죽음의 비의(秘意)와 맞닥뜨리며 힘겹지만 물러섬 없는 투쟁을 전개한다. 무기는 한강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 그리고 먹그림의 시각적 이미지와 생의 기원, 우주의 신비에 대한 천체 물리학적 사유, 진실을 좇아가는 미스터리식 서사 얼개다. 작품을 구상하고서 책이 나오기까지 4년 6개월이 걸렸다. 한강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던 환자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쉬는 바람에 환자의 호흡과 인공호흡기의 호흡이 부딪치는 것인 ‘브레스 파이팅(Breath fighting)’에서 소설이 시작됐다.”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서 숨과 숨이 맞부딪치는 팽팽한 긴장의 순간으로 점철된 삶에 대해 사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차라리 죽어서 끝내고 싶은 통증을 겪는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는 큰 울림 속에서 마친다. 시인 남진우가 폴 발레리의 시편 ‘해변의 묘지’ 중 유명한 구절인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빌려썼듯 한강 역시 강렬한 삶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발레리에게 의탁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문학·인문학의 창의적 플랫폼을 향해

    문학과지성사가 22일 ‘웹진 문지(http://webzine.moonji.com)’를 창간했다. ‘문학과 인문학의 창의적 플랫폼’을 표방하는 ‘웹진 문지’는 한국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학·인문학 콘텐츠를 담는다. 창간호에는 김태용의 ‘벌거숭이들’, 백가흠의 ‘향’, 이홍의 ‘이별의 시대’ 세 편의 장편소설이 연재를 시작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에세이 ‘바라보다’와 ‘3호선 버터플라이’ 밴드의 보컬이자 시인인 성기완의 기타 에세이도 실렸다. 주 3회나 월 1회 등 각기 다른 업데이트 주기로 내용이 바뀐다.
  • 46년 詩作의 기록, 그 다양한 스펙트럼

    1960년대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한 문학평론가 김치수는 함께 활동한 시인 최하림(71)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우리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다.”라고. 그 평가처럼 최하림은,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기에 드넓은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출판업, 신문사 논설위원, 미술평론가 등 외도는 차치한다해도, 낭만적 유희의 끝에서 치열한 현실 참여의 첨단까지 이어지는 그의 문학 스펙트럼은 쉽게 흉내내기 힘든 경지다. 이제 시작(詩作) 반세기를 맞는 그의 시편들이 ‘최하림 시전집’(문학과지성사 펴냄)으로 묶여 나왔다. 여기에는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발을 내딛었던 때부터 최근까지 46년의 이력을 고스란히 담은 시 363편이 수록돼 있다. 전집 첫 장을 장식하는 작품은 등단작인 ‘빈약한 올페의 회상’.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의 목소리를 빌린 이 작품은 유려하고 낭만적인 감성이 깔려 있어, 당시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의 영향이 짙다고 평가받기도 했었다. 시작은 폴 발레리지만 최하림의 시는 이후 상징주의에 대한 역반응처럼 서서히 시대의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다. 4·19세대였던 시인은 1980년 5월 광주를 지나면서, 권력이 자행한 비인간적 폭력과 인간성 상실을 치열하게 까발린다. 최하림은 또 거기 안주하지 않고,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 자연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냐의 존재론적 문제로 시의 눈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시선의 변화와 대상의 확장 속에서도 변치 않은 건, 그 변화와 확장을 담아 두는 틀은 언제나 시였다는 점이다. 최하림은 병마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영속적인 낭만과, 역사의 흐름, 존재의 문제를 모두 시의 행간 속에 붙잡아 두기 위한 뼈아픈 노력을 계속했다. 이번 전집도 지난해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시인이 병상에 눕기 직전에 직접 작품을 다듬고 추려서 모은 것이다. 1976년 나온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부터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에 이어 2005년 낸 마지막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까지 7권 시집을 담았다. 등단 전에 쓴 습작 10편과 2005년 이후 쓴 근작 21편도 함께 묶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책꽂이]

    ●풀밭 위의 식사(전경린 지음, 문학동네 펴냄) 전작 ‘엄마의 집’에 이어 다시 사랑의 본질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지우지 못하는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여자 ‘누경’, 그리고 그 여자의 곁을 지키는 남자 ‘기현’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사랑이 가진 아름다운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1만원. ●서유기(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경전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린 동양고전 서유기의 보급판. 2003년 전문가용으로 완역했던 10권 분량에서 한시, 주석 등을 제외하고 주요 장면과 스토리만 엮어 3권으로 줄였다. 삽화를 중간중간 삽입해 이해를 도왔다. 각 권 1만원. ●천 년의 침묵(이선영 지음, 김영사 펴냄) 수학이 철학과 만나고, 역사와 몸을 섞은 뒤 신화에 다다르며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문학작품이 됐다. 고대 그리스를 무대로 피타고라스 정리를 둘러싼 진실의 추적과 피말리는 암투는, 작가에게 이견 없이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문학상을 안겼다. 기존 문단에서 보기 드물게 탄탄한 구성과 지적 재료가 긴장감 있게 버무려졌다. 작가의 등단작이자 첫 장편소설이다. 1만 2000원. ●선학동 나그네(이청준 지음, 윤종현 사진, 청년정신 펴냄) 이청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천년학’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이번에는 사진작가 윤종현의 작품과 어우러져 남도의 황톳길, 남녘 포구의 애잔함, 갯벌의 모성을 함께 읽고, 볼 수 있도록 재탄생했다. 단편소설의 유려한 문장 하나하나가 시편처럼 읽히는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8000원. ●천일야화 1~6(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천일야화 원전의 국내 최초 완역판이다. 그동안 알려졌던 판본은 리처드 버턴의 ‘아라비안 나이트’로 원전을 각색하고 이야기를 덧붙인 버전이다. 버턴판본과 비교하면 외설적인 내용과 잔인한 내용이 빠져 있다. 읽는 재미가 덜할 수도 있지만,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가슴 먹먹해지는 사랑 이야기는 왜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지 확인시켜 준다. 각권 9800원.
  • 소설 ‘엄마를 부탁해’ e-북으로 나왔다면…

    지난해 서점가를 양분했던 베스트셀러 ‘1Q84’나 ‘엄마를 부탁해’가 전자책(e-북)으로 나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승효과를 일으켜 폭발적 판매를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됐을까, 아니면 기존 시장을 갉아먹는 종이책의 무덤이 됐을까. 최근 태블릿 PC 아이패드가 출시되면서 전자책 시장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대세는 전자책이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출판계와 유통계, 작가 등 이해당사자들의 셈법은 각자 다르다. ●대형서점 등 유통가는 잰걸음 국내 전자책 시장 규모는 지난해 1200억원 정도였다. 올해는 20~30% 이상 늘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삼성전자의 파피루스, 아이리버의 스토리, 아마존 킨들 등 국내·외 대기업들이 전자책 단말기 시장을 선점한 가운데 SKT, KT 등 이동통신사까지 나서서 전자책 시장을 타진하고 있다. 기존의 교보문고 외에도 알라딘, 예스24, 영풍문고, 리브로 등이 손을 잡고 만든 ‘한국 e퍼브’도 전자책 콘텐츠 유통 사업에 가세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교보문고에서만 6만 5000종의 책이 전자책으로 나왔으며 단말기 보급도 10만대를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빛좋은 개살구’라는 지적이 있다. 같은 책을 놓고 비교하면 전자책 매출은 종이책의 1~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자책 단말기 등을 제외하면 콘텐츠 판매도 집계 자체가 미미한 수준이다. 이 탓에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 또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자기계발, 재테크, 장르소설, 외국어 학습 등 정보성 실용 서적이 전자책 콘텐츠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전자책 판매순위를 봐도 베스트셀러급으로는 김별아의 장편소설 ‘미실’ 정도만이 눈에 띈다. 박웅영 디지털교보문고 디지털컨텐츠사업팀 대리는 “출판사나 작가들 모두 아직은 출판물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해 전자책과 종이책을 함께 펴내는 것을 꺼려한다.”며 전자책 콘텐츠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출판계는 기대 반 우려 반 콘텐츠를 공급하는 출판사들은 유통업계의 장밋빛 전망에 선뜻 동조하지 않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거대 자본 중심으로 유통업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방식의 전자책 시장 형성에 대한 우려가 가장 많다. 3만여개 출판사 가운데 영세 출판사와 1인 출판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통업계가 주도하는 전자책 사업 모델이 전면 부상하게 되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은 뻔한 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강일우 창비 상무는 “전자책을 하더라도 출판사와 유통계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식으로 사업 모델이 형성돼야 한다.”면서 “유통업계가 일방적으로 주도하게 되면 자칫 출판 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여러 책을 접할 독자들의 권리도 침해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콘텐츠 무단복제를 방지한다고 하지만 그 기술(DRM)에 대한 불신과 우려도 적지 않다. 작가와 출판사 등 콘텐츠 권리를 갖고 있는 쪽은 콘텐츠가 노출될 경우 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창비, 김영사, 문학과지성사, 더난, 시공사, 문학동네 등 중대형 출판사들이 지분 투자를 통해 ‘한국출판콘텐츠’(KPC)를 설립, 대자본의 유통업계를 거치지 않고 콘텐츠를 직접 공급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근본적 이유다. 염현숙 문학동네 편집국장은 “전자책은 시장성, 수익성, 온라인 전송권, 무단복제 방지 등 고려할 사항이 무척 많다.”면서 “올해 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를 놓고 치열하게 논의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독자는 어디에? 가장 큰 문제는 출판계와 유통계의 미묘한 주도권 싸움 속에서 독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통업계가 특정 콘텐츠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면 궁극적으로 다양한 출판 콘텐츠 확보가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영세 출판사의 고사(姑死)와 특정 분야에서 질 낮은 콘텐츠 공급을 야기, 독자들의 전자책 선택권이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출판사의 목소리가 커질 경우, 무단복제 방지 등 기술적 영역에만 집착하게 돼 시장 발전을 더디게 한다. 이 역시 독자들의 전자책 접근권을 위축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창비 강 상무는 “출판계, 유통계, 작가, 독자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출판 생태계’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며 “그러자면 각자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최승자 병마딛고 11년만에 새 시집 출간

    1980년대를 지나는 문학청년들에게 시인 최승자(58)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이 보여준 어두운 내면 침잠과 자기 모멸적 시어들은 교묘한 매력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그러다 1999년 ‘연인들’ 이후 시인은 문득 펜을 놓는다. 작품에서 보여준 절망적 자폐가 시인의 심신에도 옮아 병상에 몸을 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1년.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여섯 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오랜 침묵 뒤에 찾아온 변화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내 시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 오랫동안 내 시밭은 황폐했었다 / 너무 짙은 어둠 (중략)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내 시는 지금 이사가고 있는 중’)처럼 시인은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고 했던 지난 시간들을 이제 관조의 시선으로 돌아보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책꽂이]

    ●두근거리다(위선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전작에서 보여준 대상에 대한 투명한 감각들을 되살려 여기에 ‘빛기둥이 받치고 선 아뜩한 높이가 보였다. 그때 /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것이다! 두근두근거리는, 저어, 아뜩한 높이를 두근두근거리며 쳐다보았다.’(‘두근거리다’ 중) 같은 깊이와 높이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시 61편을 선보인다. 7000원.   ●꾼-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이화경 지음, 뿔 펴냄)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자유, 사랑을 얻고자 했던 조선시대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 정조의 문체반정을 배경으로 항간의 이야기를 상품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던 이야기꾼 김흑의 활약을 다뤘다. 김흑을 중심에 둔 서사는 물론 소설 속에서 그가 풀어내는 메타픽션도 흥미롭다. 1만 1000원.
  • [2010 문화 5대 관전포인트 (2) 거장을 기억하라]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렌다

    [2010 문화 5대 관전포인트 (2) 거장을 기억하라]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렌다

    해마다 출판·문학계 행사에는 추모사업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지난해도 신동엽 시인 40주기, 기형도 시인 20주기 행사 등이 열렸고,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박태원 등도 집중 조명됐다. 올해는 유난히 이런 거장들의 특별한 주기가 몰려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장편소설도 잇따라 나올 예정이라 기대감을 키운다. 우선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개최하는 ‘탄생 100주년 문인 기념문학제’가 눈에 띈다. 이미 문단의 연례 행사가 된 이 문학제는 올해 1910년생 문인들을 대상으로 학술대회와 함께 전시회, 문학제 등 다양한 조명행사를 결들인다. 식민지시대 ‘천재작가’ 이상(1910~1937)과 수필가 피천득(1910~2007)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대표 거장이다. 시 ‘오감도’, 소설 ‘날개’ 등으로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이상은 학계에서 끊임없이 재조명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이상 전집 및 해설서를 냈던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올해 키워드로 정리한 이상 문학을 발간할 예정이다. 수필집 ‘인연’으로 유명한 금아 피천득은 2008년 서울 잠실 롯데월드 안에 개관한 ‘금아 피천득 기념관’에서 재조명된다. 올해로 작고 10주기를 맞는 서정주·황순원도 빼놓을 수 없다. 미당 서정주의 경우는 이달 말 미당기념사업회가 창립돼 본격적으로 재조명 작업이 시작된다. 그가 말년에 머물렀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봉산산방은 철거 직전까지 내몰렸으나 위기를 넘기고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재단장된다. 하반기에 문을 열 계획이다. 11월에 열리는 미당문학제도 10주기를 맞아 확대되며, 전집 발간작업도 올해 착수한다. ●서정주·황순원 10주기… 김현 20주기 추모행사 황순원 추모사업은 지난해 발족된 황순원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대표작 ‘소나기’의 배경을 옮겨 놓은 경기 양평군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그를 기리는 다양한 학술·문화 행사가 열린다. 황순원문학제도 커지며, 올해는 양평군과 경희대 공동으로 ‘소나기문학상’도 제정한다. ‘문학과지성 1세대’를 구가했던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20주기도 올해다. 고향인 목포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평론가 안함광(1910~1982), 소설가 허준(1910~?) 등 북한에서 활동한 문인도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해외 작가로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가 작고 100주년을 맞는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고 1910년 11월20일 눈을 감았다. ●젊은 작가들 신작도 줄줄이 대기 떠나간 거장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 외에 남아 있는 대가들의 단행본 출간도 올해를 달굴 이슈 중의 하나다. 특히 인터넷 연재를 끝낸 인기작가들의 단행본 출간이 두드러진다. ‘개밥바라기별’에 이어 또다시 인터넷 연재를 끝낸 황석영의 ‘강남몽’이 상반기에 단행본으로 묶일 예정이고, 지난해 ‘엄마 돌풍’을 일으켰던 신경숙의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연말에 연재가 끝난다. 신문에 연재했던 이문열의 ‘불멸’도 상반기에 나온다. 젊은 인기작가들의 신작 소설집도 기대된다. 상반기에는 배수아·박민규·하성란이, 하반기에는 편혜영·김애란이 톡톡 튀는 상상력을 담은 단편소설을 모아 소설집을 발간한다. 시는 상반기에 고형렬·마종기·박형준·조연호·정호승·최승자 등이, 하반기에는 장석남·권혁웅 등이 작품집을 낼 예정이다. 지난해 완간된 고은 시인의 ‘만인보’도 전11권에 부록을 포함한 완간판으로 3월쯤 출간될 예정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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