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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북촌에서… 삶의 소소한 만족을 보다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북촌에서… 삶의 소소한 만족을 보다

    특정한 공간은 시인과 시인의 언어에 어떤 자취를 남길까.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집이 최근 나란히 나왔다. 신달자(73) 시인은 두 해 전 이사한 서울 북촌의 한옥집에서 ‘생의 출발점과 종착지’를 실감했다고 시집 ‘북촌’(민음사)에서 토로한다. 재독 시인 허수경(52)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로 이국의 땅에서 모국어로 새긴 시간의 지층을 쓰다듬는다. ‘봉숭아 씨’만 하고 ‘구절초 한 잎’만 한 방에 몸을 누인다. 시인은 그제서야 ‘나직한 귀향’을 실감한다. 두 해 전, 열 평짜리 한옥으로 터전을 옮기며 북촌의 풍경을 이룬 신달자 시인의 얘기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8길 26. 시인의 한옥 대문에는 명함 한 장만 한 당호가 붙어 있다. 공일당(空日堂). 원로 시인 김남조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공(空) 자는 좀…”이라며 저어했지만 신달자 시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비우면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다 비우면 새롭게 쌓이는 법/공이 만(滿)이 되는 것이라/혼자건 둘이건 비우건 쌓이건/다 같은 것이라/그 순간 시간이 출렁 섰다가 가네’(공일당) 북촌에서 보낸 시간은 그 믿음을 촘촘히 채워 준다. 곳곳을 걸을 때마다 “사랑의 또 다른 무늬”가 새겨지고 “열 평만 내 것인 줄 알았는데/북촌이 다 내 것”(내 동네 북촌)이라는 자족이 흐른다. 이번 시집의 출발선은 시인이 북촌으로 이사한 첫날 밤 그어졌다. 새 노트에 ‘북촌’이라는 글자를 새긴 게 시작이었다. 시인은 “익숙함이 내 마음을 가리기 전에, 감동이 있고 놀라움이 있을 때 쓰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 조급함과 부지런함이 밀고 나간 70편의 시들이 이번 시집을 이뤘다.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서늘함) 옹색한 방이 불편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곳에서 삶의 소소한 잔무늬가 주는 위안과 가치를 깨닫는다. ‘여기가 내 생의 중심인 것 같은/이곳이 내 혼의 종착지인 것 같은/아니/내 생의 출발 지점같이’(가회동 성당 1) 느껴지는 이유다. 노년의 시인 안에 열세 살 속마음이 고향집 툇마루를 밟던 발바닥처럼 꼼지락거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애걔걔/강아지 혓바닥만 한 툇마루를 봤나/내 귀만 한 툇마루에 햇살 비치면/발바닥이 저릿하네/강을 천 개나 건넜는데/내 몸에/어린 발바닥 꼼지락거림이 아직 남았는가’(툇마루) 늘 ‘기쁨의 계단을 오른’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북촌에 사는 동안 내내 아팠다”고 토로한다. “지병의 통증이 내 의욕을 뿌리째 흔들었지만 북촌에 대한 의욕으로 통증을 견디어 내기도 했다”는 그는 “북촌 사랑에 대한 작은 미소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이 시집을 내는 용기를 냈다”고 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타국에서… 모어를 새로 만나다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타국에서… 모어를 새로 만나다

    특정한 공간은 시인과 시인의 언어에 어떤 자취를 남길까.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집이 최근 나란히 나왔다. 신달자(73) 시인은 두 해 전 이사한 서울 북촌의 한옥집에서 ‘생의 출발점과 종착지’를 실감했다고 시집 ‘북촌’(민음사)에서 토로한다. 재독 시인 허수경(52)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로 이국의 땅에서 모국어로 새긴 시간의 지층을 쓰다듬는다. “망각의 그늘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기억, 그 기억을 어떻게 보듬는가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질을 정해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기억의 일은 ‘어떻게 가장 오래 지속되는 장례식을 지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6일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한 허수경 시인이 독일에서 보내온 수상 소감이다. 상은 지난해 펴낸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향한 것이지만, 그의 소감은 이번 시집을 품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중략)빙하기의 역에서/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헤어졌다 헤어지기 전/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빙하기의 역) “오래된 시간의 영혼을 노래하는”(이광호 문학평론가) 시인의 언어가 영그는 곳은 이국의 땅이다. 1992년 독일로 떠난 그는 뮌스터에 움을 트고 고고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의 자리로 돌아왔다. 내년이면 등단 30년을 맞는 시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모어(母語)와 이별하고 재회한다”고 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후 5년 만에 낸 이번 시집은 이렇듯 독일어로 살면서 모국어로 사유하는 ‘긴장’ 속에서 새로 발견되고 잉태된 시어들로 수놓였다. 폭력적인 세계를 서늘하게 응시하고 약자들을 위무하는 그의 성정은 여전하다. ‘그들은 천년 전에 지어진 수도원을/내가 어제 폭파했다고 했다/그 수도원에는 이 시장에 더 존재하지 않는/방언들을 모은 자료실이 있었다고 했다/그러니까 내가/그 말들을 함께 폭파한 거라고 했다//나는 어제 집에만 있었는데!/천년을 살아도 낯선 내 그림자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는데!//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잠 속에서 깨어나면/투명한 벌레 한 마리가 될 날씨다’(카프카 날씨 1)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나는 역을 떠났다/다음 역을 향하여’라는 시인의 말은 다시 고대하게 한다. 그의 새 언어를.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일상 파고드는 불안·무력…회색 속 묘한 활기 찾았죠”

    “일상 파고드는 불안·무력…회색 속 묘한 활기 찾았죠”

    “아침에 그레이트풀 데드 음악을 좀 듣다 왔어요. 죽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미국 록그룹인데 산 듯 죽은 듯 살아 있는 사람들이죠. 그들처럼 제 인물들에도 묘한 활기가 있어요.” 소설가 강영숙(49)은 불안과 파국의 조짐에 누구보다 기민하다. 하지만 무너지는 세계도, 무너지는 내면도 무심하게 슥슥 펼쳐 내는 작가다. 우울과 무력, 비애의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소설에 활기라니, 언뜻 짝이 맞지 않는 단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새 소설집 ‘회색문헌’(문학과지성사)을 들여다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땅,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뎌지게 하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활기’나 ‘열정’이란 단어가 어울릴 법한 기묘한 여정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예고 없는 실연 뒤 고향으로 향하는 ‘그녀’는 모르는 남자를 뒤따르다 정신 나간 여자와 동행하고 낯선 고향에서 아이들을 돌본다(귀향). 환경운동의 선구자인 K이사를 인터뷰하는 J는 기면증으로 만날 때마다 곯아떨어지는 K이사에게 속으론 불만에 찬 대거리를 하면서도 그녀가 오라는 곳으로 매번 찾아간다(폴록). 25년간 근속하던 직장을 떠난 정연은 우연히 동시에 자신의 집을 찾은 모르몬교 선교사, 택시 기사, 가사 도우미와 뭉쳐 술을 마시러 갔다가 지하철 막차가 대기하는 기지에 당도한다(검은 웅덩이). 이처럼 강영숙의 인물들은 아무 개연성 없는 사람들과 느닷없이 엮이고 어떤 위험 혹은 어떤 우연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장소로 재차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는 국경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없다. 때론 돌발적이고 극적이라 부조리극을 연상시킨다. 이를 작가는 ‘활기’라고 명명했다. “이질적인 사람들을 끌고 술을 먹으러 가는 정연이나 실연을 당하고 점을 보고 떠도는 ‘그녀’나 모두 활기가 있어요. 계속 움직이는 여정이나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과의 유대를 통해 느끼는 이질적인 감각 자체가 불안과 파국을 극복해 보려는 열정 아닐까요. 물론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달라지는 것이 ‘요만큼’이라 할지라도요.” 2011년 봄부터 지난해 가을까지 쓴 8편의 소설을 묶은 이번 책은 그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책 제목을, 폐기를 운명으로 하는 ‘회색문헌’이라고 붙인 이유를 묻자 작가는 ‘진심’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사실 몇 년간 힘들었어요. 데뷔한 지 오래됐는데 문장도 읽기 힘들고 서사도 특출나지 못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죠. 스스로 작품이 ‘후지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문득 모아 놓은 걸 보니 울퉁불퉁하고 톤도 자의식이 과해요. 하지만 이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작품의 정서에 나름의 진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앓고 나니 오히려 소설에 대한 애착과 자신감, 한국적인 상황에서 좋은 소설이 뭔지 실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그가 수년간 끌어안고 있는 장편 ‘지진을 몰고 오는 사람’(가제)도 그 의미 있는 실험 가운데 하나다. 내년에 출간할 예정인 작품은 지진을 겪은 인물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여기에 피해 지역을 제철단지로 설정하면서 제철이 부국강성의 상징이었던 산업화 시기,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해 나간다. 화자는 강영숙 소설의 ‘주류’인 여성이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 개인의 역량이나 감수성이 저평가된다는 생각은 늘 따라다녀요. 그렇다 보니 소설 속 여성들은 자신에 대한 존재 의식이 강하고 들끓는 존재로 비치는 거죠.”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청소년기 관계의 틈새, 글 쓰는 동력이 됐어요”

    “청소년기 관계의 틈새, 글 쓰는 동력이 됐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아동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황선미(53) 작가가 ‘관계의 틈’에 주목했다. 최근 펴낸 세 번째 청소년 소설 ‘틈새 보이스’(문학과지성사)에서다. 신작에는 ‘정상’의 경계 안에 안착할 수 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 화자인 ‘나’부터 평범치 않은 수식어란 수식어는 다 거느리고 있다. 아빠에게 부정당하고 엄마에게 두 번 버림받은 ‘부정의 존재’이자 유년기엔 이리저리 맡겨지고 거부당하기를 반복한 ‘잘못 배달된 물건’이었다. ‘나’ 때문에 버림받았다며 온갖 패악을 부려 대던 엄마와는 가족의 외피를 걸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슬아슬하다. 이런 내게 세상이란 ‘모든 구멍을 다 틀어막은, 검은 물속’이나 다름없다.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청소년기 겪어 ‘내’가 유일하게 타인과 포개지는 장소는 빌딩 틈 허름한 분식집인 ‘틈새’다. 이곳에서 나와 인연을 맺는 소년들도 모두 평범하지 않다. 틱 장애로 대한민국에서 욕을 가장 빨리 잘하는 윤, 미국 유학을 갔다가 검정고시 학원으로 유턴한 도진, 전교 1% 성적에 아르바이트로 주가 조작을 한다는 기하 등이다. ‘틈새 보이스’는 처음엔 ‘뱉지도 삼켜지지도 않는 가래’처럼 껄끄럽던 이들이 어느새 곁을 내주고 온기를 나누며 유대를 맺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그려 나간다. 황선미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역시 관계의 단절을 경험했던 청소년기를 어렵게 통과했기 때문이다. ●삶을 이끄는 주체는 결국 자기 자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못 가면서 친구들을 다 잃었어요.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고등학교를 가서도 아는 친구가 없어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청소년기를 겪었죠. 그래선지 요즘 아이들의 힘겨움과 외로움을 적잖이 짐작해 볼 수 있었어요. 친구라고 생각하고 어울리고는 있지만 어느 관계에나 다 밀착되기 어려운 틈새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는 당시의 외로움이 작가가 되는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쓸쓸했던 시간이었지만 작가로서는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어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마음이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스스로에 대한 책임 깨달아야 해묵은 상처를 통과의례로, 동력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이끄는 주체는 결국 자신이라는 깨달음 때문이다. ‘틈새’에 모여드는 소년들이 각자의 상처와 문제를 껴안고 분투하듯이, 그리고 서툴게 서로를 향해 믿음을 내어주면서 성장과 사랑을 배워 나가듯이. 작가는 관계가 일치했다 어긋났다 할지라도 그 간극에 남은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청소년 독자들을 다독인다. 그 순간 함께 ‘공감’해 줄 대상이 있다는 것이 곧 응원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팀원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혼자이므로 스스로에 대한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곁에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랄 뿐이다. 아마도 그런 게 사랑 아닐까.’(작가의 말에서)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詩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죠”

    “詩는 일상의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죠”

    “시는 보이지 않는 언어로 보이는 것을 쓰는 대신, 보이지 않는 마음을 울리고 머리를 때려요. 가능과 불가능의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면서요. 그러니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혁명이죠.” 그의 ‘언어 부리기’는 천진한 아이의 놀이 같다. 유머와 장난기 어린 시어들은 읽기는 쉽다. 하지만 능수능란하게 배열된 시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금세 알아채게 된다. 그의 말놀이가 불현듯 날린 잽처럼 현실을 간단하게 전복시키고 있다는 걸. “그는 시에서 끊임없이 놀이를 벌인다. 그리고 그는 그 놀이로 혁명을 시도한다”(권혁웅 평론가)는 평이 붙은 이유다.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를 펴낸 오은(34) 시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론 비루하고 때론 잔혹한 현실을 찌르는 언어 유희의 쾌감이 은근하면서도 강해졌기 때문일까. 새 시집은 출간 하루 만에 재쇄와 삼쇄를 연달아 찍을 정도로 빠른 호응을 얻고 있다. “그간 말놀이라는 건 문학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영역이었어요. 1980년대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이 시인이 나이가 들어도 재치가 있네’라는 정도로만 여겨졌지 문학적으로 의미 있게 다뤄진 적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너무 말놀이로 주목을 받다 보니 ‘형식은 그렇지만 내용은 그게 아닌데’ 싶더라구요. 이번 시집에선 회사인으로서의 오은과 시인으로서의 오은이 함께 주변을 관찰하며 사회에 대한 의견을 확고히 다지게 됐어요. 헬조선, 청년실업 등의 현실을 보면서 이전 시집들에선 ‘내’가 중요했다면 이젠 ‘바라보는 자로서의 내’가 중요해진 거죠.”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하나만 중요했다//살다의 반대말은 죽다가 아니야/떨어지다지/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누군가는 떨어졌다는 것이다//오늘부로 너는 우리에서 이탈하게 된다/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서바이벌) 그의 시편들은 발랄함과 재치를 유지하면서도 일상에 끊임없이 균열을 낸다. 약자를 거세하는 고장난 자본주의, 헛발질만 거듭하는 교육 제도, 처세와 이해관계만 중시하는 세태 등 세상의 부조리를 조롱하면서. ‘학교에 있던 학생들이/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준비물처럼/책상 위에 가만히 있었다/그리고 우리는 사용되었지 우리 학원에서/우리가 우리를 사용할 때/우리는 주어일까 목적어일까/영어 선생님이 물었지/자기도 모르면서/학생이었으면서/옛날에 우리 학원에 다녔으면서/샤프심처럼 뚝뚝 끊어지고/지우개처럼 똥을 끌고 다니고/자처럼 재기 바쁘다가/노트처럼 갈가리 찢어졌으면서’(우리 학원) “시는 일상의 비루함, 지지부진함에서 우리를 구원해줘요. 일상이란 건 패턴이잖아요. 출근해서 밥 먹고 야근하고 씻고 자는 패턴들요.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기쁨이 일상에 균열을 내주듯, 시를 읽고 쓰는 것도 일상의 지리멸렬함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균열이자 촉매인 거죠.” 그래서 오은은 매 걸음 스스로를 갱신하는 시를 짓는다. 마르지 않는 펜촉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지면 위를 걷는 것처럼. ‘지면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이 그를 걷게 한다. 그의 시작은 매 걸음 갱신된다. (중략) 다음 지면이 할애될 때까지 너는 커서처럼 껌벅이기로 한다. 마르지 않는 펜촉처럼, 너는 땀 흘린다.’(지면)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문학의 또 다른 진화, 문예지 ‘색다른 초대’

    문학의 또 다른 진화, 문예지 ‘색다른 초대’

    민음사 새 문예지 ‘릿터’ 공개 아이돌·드라마 등 장르 다양화창비 새 잡지·문지 혁신호 출간 “스타 작가 의존성 여전” 지적도 문예지가 ‘변혁의 시대’를 맞았다. 지난해 민음사의 ‘세계의 문학’ 종간은 문예지의 쇠락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졌다. 정부의 문예지 지원 삭감으로 ‘폐·휴간’ 사태도 잇따랐다. 하지만 최근 문예지들은 스스로 ‘변신’을 꾀하며 외면하던 독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민음사는 2일 “‘세계의 문학’의 전통을 이으면서 혁신을 가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새 문학잡지 ‘릿터’(Littor)를 공개했다. 영어로 문학(Literature)과 ‘~하는 사람’(tor)이란 뜻의 접미사를 합쳐 ‘문학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릿터’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편집위원단을 구성해 이끌어 가던 기존 문예지와 달리 편집자들이 직접 기획하고 만든다. 기존의 문학 콘텐츠뿐 아니라 아이돌 그룹 샤이니 멤버 종현의 인터뷰부터 영화, 드라마, 만화,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품고 있다. 책임편집을 맡은 서효인 민음사 국내문학팀장은 “문학을 평소에 많이 찾아보는 독자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팬들도 문학의 독자로 들어왔으면 했다. 그래서 그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부분을 초대장처럼 넣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촉발된 문학권력 논란에 휩싸였던 주요 문학 출판사들도 하반기 새로 창간하거나 기존의 것을 재정비한 문예지를 잇따라 내놓을 예정이다. 창비는 30~40대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편집위원을 맡아 이끄는 젊은 감각의 문예지를 이르면 오는 10월 선보인다. 강영규 창비 문학출판부 부장은 “기존 문예지나 문단 질서에 편중된 작가군에서 벗어나 지역, 세대 구분 없이 주목받지 못하던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장르·르포 문학 등도 아울러 문학의 외연을 확장할 것”이라며 “종이잡지뿐 아니라 온라인도 연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계간 ‘문학과 사회’(문학과지성사)도 이달 말 출간될 가을호부터 ‘혁신호’로 꾸민다. 이근혜 문학과지성사 문학 담당 편집장은 “‘문학과사회’ 본권에 별권을 더해 2권으로 펴낼 예정이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논문 등을 적극 소개하는 등 그간 ‘문사’가 견지해 온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이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최근 나란히 창간 1주년호를 낸 ‘악스트’(은행나무)와 ‘미스테리아’(문학동네)는 ‘문예지도 독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소설가들이 꾸려 가는 ‘악스트’는 매호마다 1만부가 소진되고 1, 4, 5호는 품절돼 “중쇄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만큼 호응이 높다. 추리소설 마니아층을 겨냥한 ‘미스테리아’도 창간호 5000부에 이어 매호 4000여부씩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꾸준하다. 전통적인 문예지의 형태에서 벗어나 젊은 세대들의 구미에 맞는 감각적인 디자인·편집에, 내용 면에서도 ‘선택과 집중’을 꾀하면서 차별화를 이뤄냈다는 평을 받는다. 새로운 형태의 문예지들이 잇따라 생겨나는 현상에 대해 이경재 문학평론가는 “침체를 벗어나려는 고육책이기도 하지만 창작집단과 독자들의 다양성, 일반인들의 높아진 인문학적 소양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며 “이에 따라 평론가 등 전문가들이 생산한 문학 담론이 중심인 전통적인 문예지에서 벗어나 출판사 편집자가 기획하고 등단, 비등단 작가를 가리지 않는 ‘경계 해체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문학의 또 다른 진화”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형식의 변화가 내용의 변화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새로 선보이는 문예지들이 출판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성, 스타 작가에 대한 의존성 등 기존 문예지가 갖고 있는 문제들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여전히 어렵다”며 “디자인의 혁신, 판매 부수의 증가도 긍정적이고 중요한 현상이지만 얼마나 새로운 글쓰기와 담론, 글쟁이들을 배출하느냐가 진정한 혁신일 것”이라고 짚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소설의 반격’이 시작됐다. 올 초까지만 해도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자취를 감췄던 한국 소설은 지난 5월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정유정의 신작 발표 등 호재를 맞아 출판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19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한국 소설 판매는 올 1월 1일부터 지난 17일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2.3%(권수 기준) 급성장했다. 지난해의 경우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9.3%로 처참한 성적을 냈던 것과 대조적이다. 올해 판매 신장률은 최근 5년간 같은 기간의 수치를 따져 봐도 최고치다. ●맨부커상 호재에 신선한 작품들 한몫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는 50만부,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행나무)은 15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1, 2위(한국출판인회의 기준)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3년 ‘정글만리’(해냄)로 150만부를 팔아 치운 밀리언셀러 작가 조정래의 신작 ‘풀꽃도 꽃이다’(해냄)도 초반 기세가 무섭다. 지난 12일 출간된 책은 일주일 만에 1·2권 각각 5만부씩 10만부 판매된 데 이어 추가로 10만부를 제작 중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소설 담당 구환회 MD는 “한강, 정유정이라는 대형 이슈 외에도 이기호 소설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등 젊고 신선한 감각의 작품들이 우리 소설 지형을 다채롭게 만들었다”며 “최근에는 조정래 신작이 출간과 동시에 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시장 확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소설이 휴가철인 여름 책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데다 하반기에도 박범신, 성석제, 하성란, 천명관, 정이현, 김중혁, 장강명, 알랭 드 보통 등 주요 국내외 작가들의 신작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성석제·장강명 등 하반기 풍성한 신작 다음달 선보일 소설 목록부터 풍성하다. 이야기꾼 성석제의 신작 소설집(제목 미정·문학동네)이 8월 말 출간된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과 두 번째 소설집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단편 10편을 모은 ‘첫사랑’도 동시에 나온다. 괴물로 태어나거나 괴물이 돼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경계 없는 악의 세계를 그린 백민석의 장편 ‘공포의 세기’(문학과지성사), 1990년대 부산 건달들의 짠내 나는 인생을 담은 김언수의 한국형 누아르 ‘뜨거운 피’(문학동네)도 다음달 서점가에 깔린다. 김중혁 작가는 올여름에만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한다. 코미디언과 우주비행사인 이복형제를 그린 경장편 ‘나는 농담이다’(민음사)가 8월, 비행 중 돌연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1971년의 기적’(스윙밴드)이 9월 출간 예정이다.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은 소설가 장강명도 하반기 두 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북한을 배경으로 한 장편 스릴러 ‘우리의 소원은 전쟁’(위즈덤하우스)이 10월, SF소설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은행나무)가 12월 독자들과 만난다. ●모바일 연재물·해외 기대작들 출간 대기 9월에는 모바일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해 화제를 모은 작품들이 책으로 잇따라 묶여 나온다. 아비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떠돌이가 된 남자의 인생 역정을 그린 박범신 작가의 ‘유리’(은행나무), 인천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엮은 천명관의 장편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제·위즈덤하우스)다. 정이현 작가의 새 소설집(제목 미정·문학과지성사)은 10월, 하성란 작가의 장편 ‘여덟 번째 아이’(창비)는 12월 출간 예정이다. 해외 작가들의 기대작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새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행나무)이 다음달 말 선보인다. 국내에서만 소개된 정이현 작가와의 공동 기획 소설 ‘사랑의 기초’를 제외하고 작가가 20년 만에 쓴 소설인 데다 결혼 이후 내놓은 작품이라 과거 연애 3부작과 달리 결혼 생활의 민낯과 관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 관심을 모은다. 10월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문학동네)을 읽을 수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함께 그의 대표 전쟁 연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년들과 생존자, 희생자 어머니들의 증언으로 써내려 간 통렬한 논픽션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소설의 반격’이 시작됐다

    ‘소설의 반격’이 시작됐다

     ‘소설의 반격’이 시작됐다. 올 초까지만 해도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자취를 감췄던 한국 소설은 지난 5월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정유정의 신작 발표 등 호재를 맞아 출판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19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한국 소설 판매는 올 1월 1일부터 지난 17일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2.3%(권수 기준) 급성장했다. 지난해의 경우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9.3%로 처참한 성적을 냈던 것과 대조적이다. 올해 판매 신장률은 최근 5년간 같은 기간의 수치를 따져 봐도 최고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는 50만부,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행나무)은 15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1, 2위(한국출판인회의 기준)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3년 ‘정글만리’(해냄)로 150만부를 팔아 치운 밀리언셀러 작가 조정래의 신작 ‘풀꽃도 꽃이다’(해냄)도 초반 기세가 무섭다. 지난 12일 출간된 책은 일주일 만에 1·2권 각각 5만부씩 10만부 판매된 데 이어 추가로 10만부를 제작 중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소설 담당 구환회 MD는 “한강, 정유정이라는 대형 이슈 외에도 이기호 소설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등 젊고 신선한 감각의 작품들이 우리 소설 지형을 다채롭게 만들었다”며 “최근에는 조정래 신작이 출간과 동시에 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시장 확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소설이 휴가철인 여름 책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데다 하반기에도 박범신, 성석제, 하성란, 천명관, 정이현, 김중혁, 장강명, 알랭 드 보통 등 주요 국내외 작가들의 신작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달 선보일 소설 목록부터 풍성하다. 이야기꾼 성석제의 신작 소설집(제목 미정·문학동네)이 8월 말 출간된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과 두 번째 소설집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단편 10편을 모은 ‘첫사랑’도 동시에 나온다. 괴물로 태어나거나 괴물이 돼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경계 없는 악의 세계를 그린 백민석의 장편 ‘공포의 세기’(문학과지성사), 1990년대 부산 건달들의 짠내 나는 인생을 담은 김언수의 한국형 누아르 ‘뜨거운 피’(문학동네)도 다음달 서점가에 깔린다.  김중혁 작가는 올여름에만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한다. 코미디언과 우주비행사인 이복형제를 그린 경장편 ‘나는 농담이다’(민음사)가 8월, 비행 중 돌연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1971년의 기적’(스윙밴드)이 9월 출간 예정이다.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은 소설가 장강명도 하반기 두 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북한을 배경으로 한 장편 스릴러 ‘우리의 소원은 전쟁’(위즈덤하우스)이 10월, SF소설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은행나무)가 12월 독자들과 만난다.  9월에는 모바일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해 화제를 모은 작품들이 책으로 잇따라 묶여 나온다. 아비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떠돌이가 된 남자의 인생 역정을 그린 박범신 작가의 ‘유리’(은행나무), 인천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엮은 천명관의 장편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제·위즈덤하우스)다.  정이현 작가의 새 소설집(제목 미정·문학과지성사)은 10월, 하성란 작가의 장편 ‘여덟 번째 아이’(창비)는 12월 출간 예정이다.  해외 작가들의 기대작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새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행나무)이 다음달 말 선보인다. 국내에서만 소개된 정이현 작가와의 공동 기획 소설 ‘사랑의 기초’를 제외하고 작가가 20년 만에 쓴 소설인 데다 결혼 이후 내놓은 작품이라 과거 연애 3부작과 달리 결혼 생활의 민낯과 관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 관심을 모은다.  10월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문학동네)을 읽을 수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함께 그의 대표 전쟁 연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년들과 생존자, 희생자 어머니들의 증언으로 써내려 간 통렬한 논픽션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김선우 작가 발견문학상 수상

    김선우 작가 발견문학상 수상

    시 전문 계간지 ‘발견’이 주관하는 제5회 발견문학상 수상자로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46) 작가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지난 4월 펴낸 다섯 번째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이다. 발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경이로운 상상력과 여리면서도 강한 언어로 노래하면서, 정치와 인간에 대한 질문을 가능케 한다”고 평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오는 23일 열린다.
  • 문학과 삶의 사이에서… 책과 반세기 살아온 원로 평론가

    문학과 삶의 사이에서… 책과 반세기 살아온 원로 평론가

    반세기 동안 책과 어깨를 겯어온 문학평론가가 개인의 역사로 한국 문학의 전경을 부감한다. 문학과지성사 전 대표인 김병익(78) 평론가의 글 모음집 ‘기억의 깊이-그 두런거림의 말들’(문학과지성사)이다. 1965년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계간 문학과지성의 동인, 문학과지성사의 대표 등을 지낸 그는 저자, 번역가, 편집자, 발행인, 평론가 등 책의 자장 안에서 아우를 수 있는 직업을 두루 거쳤다. 때문에 40여년 전의 글부터 최근에 몇 해간 써낸 글을 묶은 책은 ‘개인의 역사를 통해 보는 가장 미시적인 한국문학사’라 할 만하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아 ‘사생아 콤플렉스’가 있다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한국 문학의 국제화와 출판계의 미래에 대한 고언, 동세대 작가들에 대한 회고 등 노평론가의 두런거림은 경계 없이 자유롭다. 최근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이 세계 문단에서 주목받는 가운데 저자는 우리 문학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열정, 고통스러운 현실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진지한 고민, 고통이 많았기에 그만큼 구원에 대한 열망도 컸던 한국인의 내면에서 솟아난’ 것이라며 해외 관계자들에게 이를 ‘발견’해 달라고 호소한다.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려온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압축한다. “1980년대에는 한국에도 독자적인 언어와 문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면 1990년대에는 한국에도 시인·소설가·비평가 등 이른바 문학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홍보했으며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도 작품이 있다는 것에 주목시켰고 2010년을 넘어선 이제야 한국 문학도 세계문학에 편입될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난해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으로 불거진 문학 권력 논란에 대해선 “현장에서 물러나 거리를 둔 지 오래된 처지여서 잘 분석해내지 못하겠다”면서도 이렇게 가늠한다. “경제적 부가 넉넉해지면서 상업적 성과가 문학적 성취에 우선하게 되었다는 것, 숱한 문학상과 우수 작품의 선정으로 나타나는 현실적 이권이 문단 내부에 크게 늘어났다는 것, 숱하게 창간된 문학지들이 지자체의 지원과 신인 등장의 대가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 등등 비문학적 타산으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박경리를 ‘문학인으로서의 위엄, 작가로서의 의연함,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을 곧추세웠던’ 작가로, 이청준은 ‘복수의 방법으로 글을 선택했고 문학을 통해 이 고통스러운 세계와 삭막한 인간들과의 관계에 용서와 화해를 일군’ 작가로 돌아보는 지점에서는 존경과 애정이 감지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詩 르네상스 이끈 지기 그들이 토한 병든 시대

    詩 르네상스 이끈 지기 그들이 토한 병든 시대

    1980년대 ‘시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시인들이 나란히 새 시집을 냈다. 1979년 등단해 1980년대 스타 시인으로 군림한 최승자(64), 1980년에 데뷔해 단단한 서사를 품은 장시를 장기로 부려온 김정환(62) 시인이다. 이들은 문학으로 곁을 함께하면서 1980년대 출판사 홍성사에서도 같이 일한 오랜 지기다. 두 시인은 죽음의 이미지, 세계·문명에 대한 비애가 두드러지는 새 시집으로 ‘병든 시대에 대한 울화’를 드러냈다. 정신분열증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 온 최승자 시인은 5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첫 시집의 첫 시에서부터 스스로를 ‘천년 전에 죽은 시체’라 일컬었던 시인은 과거 독하고 예리한 언어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부정 혹은 비극의 시학’으로 이름났던 청춘을 지나 이제 그는 부운몽(浮雲夢) 같은 삶과 죽음을 굽어본다. ‘살았능가 살았능가/벽을 두드리는 소리/대답하라는 소리/살았능가 죽었능가/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벽을 두드리는 소리만/대답하라는 소리만/살았능가 살았능가//삶은 무지근한 잠/오늘도 하늘의 시계는/흘러가지 않고 있네’(살았능가 살았능가) ‘내 존재의 빈 감방/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감방이에요/그런데도 감방은 감방이로군요’(내 존재의 빈 감방) ‘세계 전체가 한 병동’(나의 생존 증명서는)이라는 최승자의 인식은 ‘세계가 늙고 세계의 언어가 늙는다’(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는 김정환의 비관과 맥이 닿아 있다. 김정환 시인은 “시를 쓴 지난 3년간 인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감각하게 한 일들이 많았다”며 “‘사는 게 사는 건가’, ‘살아 있는 게 맞는가’ 등 시인이란 자들이 남들보다 더 전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질문들을 곱씹은 결과”라고 했다. 새 시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문학동네) 얘기다. 시집에는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의 시로 여겨질’(김민정 시인) 만큼 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장시들이 묵직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시인은 세월호 참사를 압축한 장시 ‘물 지옥 무지개’의 참혹한 서사와 ‘우리가 당분간 유지할 것은 연민의 각도’(각도)라는 일갈은 ‘타인에 대한 감각’을 강조한다.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평소가 돌아왔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평소가 가장 음란한 포르노 같고, 가장 냄새나는 추문 같다.(중략)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물 지옥 무지개) ‘우리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그건 차라리 낫겠지. 그때 사라지지도 못한/사람들 생각하면 생이, 잔존하는 생명이/끔찍 그 자체일 수 있다. 원전 노후,/그것은 괴물이 스스로 그러기 전에 자신을 폐해달라는 말.’(원전 노후)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황순원 ‘소나기’ 뒷이야기 있다면…

    황순원 ‘소나기’ 뒷이야기 있다면…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은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이 대화만 봐도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소설이 있다. 황순원(1915~2000) 작가가 쓴 국민 단편 ‘소나기’다. 소년과의 추억을 입고 떠난 소녀와 흰 조약돌처럼 해사한 소녀를 잊지 못하는 소년. 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소년의 청년, 중년,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황순원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들이 그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소나기’ 이어 쓰기에 나섰다. 전상국,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 노희준, 구병모, 손보미, 조수경 등 9명의 작가들이 쓴 ‘소나기’의 뒷이야기가 ‘소년, 소녀를 만나다’(문학과지성사)로 묶였다. 전상국 작가가 1963년, 조수경 작가가 2013년에 데뷔했다는 걸 감안하면 등단 연차 50년을 아우르는 작가 군단인 셈이다. 속편들은 모두 30매 내외의 엽편 소설이다. 지난해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기획해 탄생한 작품들이다. 황순원문학촌장인 김종회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번 작업은 우리가 함께 안타까워하고 한숨짓던 가슴 설레는 어떤 가능성의 멸실, 어쩌면 속절없이 멸실되었기에 더 순후하게 슬프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그 가능성을 오늘의 시각과 문맥으로 다시 되살려보는 데 뜻이 있었다”며 “9편의 글은 소년 소녀가 나눈 맑고 여린 첫사랑 이야기를 기발하고 여운 있게 형상화한 수작들”이라고 소개했다. 손보미의 ‘축복’은 소년과 소녀의 아름다운 동행을 질투하는 또 다른 소녀 ‘나’를 들여보낸다. 까맣고 못생긴 ‘나’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소녀를 좋아하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가 죽어버리길 바란다. 실제로 소녀가 세상을 떠나자 ‘나’는 더이상 소년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혜경은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토물’이란 단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공장에 취직한 소년이 여전히 소녀의 곁을 맴돌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소년은 산을 넘어 등·하교할 때마다 산에 묻힌 소녀와 대화를 나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잡지에서 소녀와 닮은 여학생 사진을 보고 몰래 찢어 품고 다닌다. 조수경은 노년이 된 소년을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써냈다. 중학생 때 가족과 고향을 떠나서도 소녀를 잊지 못한 소년은 결국 소녀와 닮은 여자와 결혼한다. 노년의 아내는 치매에 걸려 벌거벗은 채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른다. 아내를 두려워하며 아내의 목을 조르고만 그는 고향의 꽁꽁 언 개울가에 드러눕는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詩 사는 공간 아닌, 詩 얻는 공간 되길

    詩 사는 공간 아닌, 詩 얻는 공간 되길

    만남과 헤어짐, 도착과 떠남이 매일 교차하는 서울 신촌 기차역 앞에 ‘시의 공간’이 움튼다. 시단의 현재를 이끄는 젊은 시인 유희경(36)이 차리는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다. 그가 시집 서점을 낸다는 소식은 문인들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미 소문이 왁자하다. 새달 7일 오픈에 앞서 2일 열리는 김소연 시인의 시 낭독회는 유료지만 이미 매진이다. ‘어쩌자고 시집 서점을 차렸냐’는 질문에 시인은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며 “어쩌자고”란 말을 되뇌었다. 착상은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편집자 생활을 9년 했는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놀 순 없고 글을 쓰면서 재미있는 걸 해보자 했더니 할 줄 아는 게 시밖에 없더라구요. 박준 시인에게 처음 얘기했더니 ‘나는 시집 리어카를 해보고 싶었다’며 웃더라고요. ‘상업적으로 오래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성실히 잘 가꾸면 형한테 많은 게 남을 것 같다’고요. 빚만 남지는 않겠죠.”(웃음) 문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용기 있는 결정”, “편이 되어주겠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시인들이 좋다고 해서 용기는 많이 얻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인들이란 돈 셈을 못 하니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더라구요(웃음). 지금 워낙 관심이 많아서 한두 달은 잘될 것 같은데 저는 2년 정도 봐요. 회의적인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다 쏟아붓겠다는 각오죠. 시를 ‘사는’ 공간이 아니라 시를 ‘얻어가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바람이에요. 안 망할 순 없을 것 같고(웃음) 신촌 향레코드처럼 누군가에게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됐으면 해요.” ‘위트 앤 시니컬’이란 서점 이름은 그가 대표로 있는 시 잡지 ‘눈치우기’ 멤버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제가 발음이 좋지 않아요. 한번은 제가 ‘위트 있는 시’라고 말했더니 하재연 시인이 ‘위트 앤 시니컬이 뭐야’라고 되물어서 우리끼리 깔깔대다 헤어졌죠. 명사와 형용사의 조합이라 문법적으로는 오류예요. 하지만 모든 시가 위트(재치)와 시니컬(냉소적)이라는 성정을 갖고 있잖아요. 마음에 들었죠.” 요즘 일부 시집이 잘 팔리는 추세를 미리 짚은 것일까. 시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형 서점에 가면 팔리는 시집만 눈에 띄는 매대에 나와 있고 오히려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 권수는 대폭 줄었다”면서.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복합문화공간 카페 파스텔 안에 자리잡은 3평짜리 서점에는 2000여권의 시집이 채워진다. 매대의 주제는 외국시집 특별전, 시인의 첫 시집 등 늘 생동감 있게 바뀔 예정이다. 감각 있는 시인이자 눈 밝은 편집자가 그려주는 시의 지도, 시의 무늬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만 찾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이 읽었던 시는 선배들의 시거든요. 그래서 ‘시의 계보’를 큐레이팅 해보려고요. 나만 알고 있고 숨겨놓고 싶은 보석 같은 시집들,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 같은 대형 문학 출판사뿐 아니라 작은 출판사들이 펴낸 희소한 외국 시집들, 제대로 발굴 안 되거나 지금은 팬덤이 사그라져 찾지 않는 좋은 시집들…. 절판된 것도 많아서 중고책방을 열심히 뒤질 생각이에요. 제일 빨리 들여놓고 싶은 건 절판된 성석제 소설가의 시집 2권이에요. 매대를 보면 저뿐 아니라 시인들이 추천하는 시집들을 짚어볼 수 있을 거예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사진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시 사는 공간 아닌 시 얻어가는 공간으로”

    “시 사는 공간 아닌 시 얻어가는 공간으로”

     만남과 헤어짐, 도착과 떠남이 매일 교차하는 서울 신촌 기차역 앞에 ‘시의 공간’이 움튼다. 시단의 현재를 이끄는 젊은 시인 유희경(36)이 차리는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다.  그가 시집 서점을 낸다는 소식은 문인들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미 소문이 왁자하다. 새달 7일 오픈에 앞서 2일 열리는 김소연 시인의 시 낭독회는 유료지만 이미 매진이다. ‘어쩌자고 시집 서점을 차렸냐’는 질문에 시인은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며 “어쩌자고”란 말을 되뇌었다. 착상은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편집자 생활을 9년 했는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놀 순 없고 글을 쓰면서 재미있는 걸 해보자 했더니 할 줄 아는 게 시밖에 없더라구요. 박준 시인에게 처음 얘기했더니 ‘나는 시집 리어카를 해보고 싶었다’며 웃더라고요. ‘상업적으로 오래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성실히 잘 가꾸면 형한테 많은 게 남을 것 같다’고요. 빚만 남지는 않겠죠.”(웃음)  문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용기 있는 결정”, “편이 되어주겠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시인들이 좋다고 해서 용기는 많이 얻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인들이란 돈 셈을 못 하니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더라구요(웃음). 지금 워낙 관심이 많아서 한두 달은 잘될 것 같은데 저는 2년 정도 봐요. 회의적인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다 쏟아붓겠다는 각오죠. 시를 ‘사는’ 공간이 아니라 시를 ‘얻어가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바람이에요. 안 망할 순 없을 것 같고(웃음) 신촌 향레코드처럼 누군가에게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됐으면 해요.”  ‘위트 앤 시니컬’이란 서점 이름은 그가 대표로 있는 시 잡지 ‘눈치우기’ 멤버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제가 발음이 좋지 않아요. 한번은 제가 ‘위트 있는 시’라고 말했더니 하재연 시인이 ‘위트 앤 시니컬이 뭐야’라고 되물어서 우리끼리 깔깔대다 헤어졌죠. 명사와 형용사의 조합이라 문법적으로는 오류예요. 하지만 모든 시가 위트(재치)와 시니컬(냉소적)이라는 성정을 갖고 있잖아요. 마음에 들었죠.”  요즘 일부 시집이 잘 팔리는 추세를 미리 짚은 것일까. 시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형 서점에 가면 팔리는 시집만 눈에 띄는 매대에 나와 있고 오히려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 권수는 대폭 줄었다”면서.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복합문화공간 카페 파스텔 안에 자리잡은 3평짜리 서점에는 2000여권의 시집이 채워진다. 매대의 주제는 외국시집 특별전, 시인의 첫 시집 등 늘 생동감 있게 바뀔 예정이다.  감각 있는 시인이자 눈 밝은 편집자가 그려주는 시의 지도, 시의 무늬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만 찾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이 읽었던 시는 선배들의 시거든요. 그래서 ‘시의 계보’를 큐레이팅 해보려고요. 나만 알고 있고 숨겨놓고 싶은 보석 같은 시집들,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 같은 대형 문학 출판사뿐 아니라 작은 출판사들이 펴낸 희소한 외국 시집들, 제대로 발굴 안 되거나 지금은 팬덤이 사그라져 찾지 않는 좋은 시집들?. 절판된 것도 많아서 중고책방을 열심히 뒤질 생각이에요. 제일 빨리 들여놓고 싶은 건 절판된 성석제 소설가의 시집 2권이에요. 매대를 보면 저뿐 아니라 시인들이 추천하는 시집들을 짚어볼 수 있을 거예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문학계 어른’ 3인이 발굴한 시인들

    ‘문학계 어른’ 3인이 발굴한 시인들

    시 몇 편으로 한 시인의 내공과 문학적 지도를 가늠할 수 있을까. 문단에 진입하는 주요 통로인 신춘문예와 문예지의 등단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이에 황현산 문학평론가, 김혜순, 김정환 시인 등 문학계의 큰어른 3인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로 될성부른 시인을 가려내겠다는 것. 그리고 엄정한 판단을 거친 시인을 세상에 소개하겠다는 것이다. 시작을 알린 건 2013년 7월이었다. 이후 시집선의 기획위원인 황현산 평론가와 김혜순, 김정환 시인은 3년간 매달 한두 차례씩 모여 투고된 시들을 읽어 나갔다. 지원자는 지금까지 200여명. 한 사람당 50~60여편으로 이뤄진 원고를 보낸 만큼 이들이 읽은 시집은 200여권에 이른다. 기획위원들의 눈에 들어온 작품들은 평을 붙여 주인에게 반송했다. 고쳐 보내온 시들은 또다시 심사대에 올렸다. 최근 출간된 삼인 시집선 1·2권의 탄생 배경이다.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유진목(35)의 ‘연애의 책’, 경기 안성에서 소를 키우는 조인선(50)의 ‘시’다. 첫 권을 꿰찬 유진목 시인은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적이 없는 ‘생짜 시인’이다. 문학과지성사를 패러디한 문학과죄송사에서 펴낸 시집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가 문학적 이력의 전부다. 제도권의 굴레에 얽히지 않아서일까. 그는 감각적이고 대담한 시어들로 능수능란한 언어유희를 펼치며 “한국 최고의 연애시”(황현산 평론가)들을 빚어냈다. 조재룡(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는 시집을 가리켜 “아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연애시”라며 “매우 뛰어난 방식의 사랑에 대한 기술(記述)이자 연애의 마음을 눅눅하게 받아 적은 필사의 기록으로, 끝내 당신을 죽인다”고 평했다. ‘시옷에서 이응까지 선 채로 포개었다가 아득히 눕는 이야기 보드라운 바람이 창문을 넘어오고 눈부신 커튼이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우리는 동그랗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가느다란 입술이었다가 오므린 입술이었다가 벌어진 입술로 누워 있는 사이 속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발끝에 거는 사이’(사이) 황현산 평론가가 “한국에서 자생한 초현실주의 작가”라는 찬사를 보낸 조인선 시인은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다섯 권의 시집을 냈지만 소를 키우는 농민으로 생업을 이으면서 잠시 시업을 중단했다. 따라서 이번 시집 ‘시’는 그가 다시 시인으로 발을 내딛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삶이 엿보이는 많은 시편이 ‘시’를 향해 간절히 손을 뻗고 있다. ‘시’라는 같은 제목의 시만 다섯 편에 이른다. 구제역으로 키우던 소를 구덩이로 내던지면서는 “언어는 왜 그리 매혹적인지/빈 축사에 들어서면/텅 빈 말씀이 가득했다”고, 닭 모가지를 따며 ‘다시는 짐승처럼 태어나지 말라’는 베트남 아내의 말에선 “감각은 그렇게 응축되고 결정화된다”고 읊는다. ‘속이 꽉 찬 배추는 문자를 닮았다/튼실한 놈일수록 속이 익었다/언어를 향한 바람의 깊이마저 다른지/칼로 쳐봐야 피 한 방울 없지만/배추 몸통 하나의 무게가 온전히 시 한 편이다/뿌리가 보잘것없다고 탓하지 말라/그것이 자연이라면/농부의 마음이라면/도박 아닌 인생 없고 팔자 아닌 운명 없다’(뿌리에게)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주의 어린이 책] 방치된 아이들, 스스로를 추스르는 아이들

    [이주의 어린이 책] 방치된 아이들, 스스로를 추스르는 아이들

    해피 버스데이 투 미/신운선 지음/서현 그림/문학과지성사/195쪽/1만원 엄마는 며칠째 내리닫이로 술만 들이붓는다. 그런 날은 집을 비우기 일쑤다. 먹은 거라곤 그저께 끓인 라면 하나에 김치 몇 쪼가리뿐. 동생은 쓰레기 더미 곁에서 무력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이제는 사회면 뉴스에 흔하게 등장하는 ‘방치된 아이들’. 아이들의 황폐하고 상처 난 내면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동화가 나왔다.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하는 제12회 마해송문학상 수상작 ‘해피 버스데이 투 미’다. ‘나’는 사회복지사들의 손에 이끌려 아동보호소로 향한다. 굶을 걱정도 없고 깨끗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어서다. 그건 ‘계속 상처 난 내 얼굴을 마주봐야’ 하는 꼴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에선 응석을 부려서도, 엄살을 떨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아챈다. 그게 아이의 본능이자 역할 아닌가. 그래서 동화는 내내 아프게 읽힌다. 하지만 이야기는 섣불리 희망을 주입하지도 절망을 부풀리지도 않는다. 다만 단단하게 스스로를 추스리는 아이를 믿고 바라봐 준다. 도서관, 아동보호소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 교육, 독서를 통한 상담 치료를 해오던 작가의 등단작이다. 보호소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망울에서 ‘빚’을 느껴 책을 썼다는 작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아이들을 불러내 햇빛 좋은 곳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는 내내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회가, 어른이 잘해야 한다는 당위를 떠올렸다”고 했다. 초등 고학년.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오래된 아름다움(김치호 지음, 아트북스 펴냄) 고미술 컬렉터이자 경제학자인 저자가 고미술이란 무엇이며 고미술 컬렉션은 어떠한 속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한국미의 원형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컬렉션’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본업이 경제학자인 저자가 들여다본 고미술 컬렉션 시장은 꼭 경제학 이론대로 움직이지는 않는 독특한 곳이다. 특히 컬렉션 발전사를 보면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본과 미가 컬렉션의 장에서 소통하고 화해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를 ‘차가운 자본의 논리를 넘어 따뜻한 감성과 열정으로, 때로는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360쪽. 3만원. 기억 속의 보좌신부님(안병영 지음, 흰물결 펴냄) 대학에서 35년여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부 장관을 두 차례나 역임하며 국정에 참여했던 안병영 전 연세대 교수의 에세이집이다. 10여년 전 강원도 고성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쓴 지난날 삶의 기록을 묶었다. 해방과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세계화 등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격동적인 시간을 지내 온 그가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제철공장에서 일하며 노동과 공부를 병행했던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등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각별한 인연들과 사유, 삶의 단상들을 올올이 엮어 냈다. 그의 따뜻하고 담백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자기 내부로 눈을 돌려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성을 만날 수 있다. 191쪽. 1만 3000원.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엘리자베스 아치볼드 지음, 서민아 옮김, 스윙밴드 펴냄) 11세기 몬테카시노의 수도사로 아랍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는 양파씨와 금불초, 참새 뇌, 야자 수나무 꽃, 백향목으로 만든 ‘정력 강화제’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읽히고 전파됐던 각종 문헌 자료를 연구해 물 위를 걷는 법, 투명인간 되는 법, 예쁜 아이 잉태하는 법 등 각종 처세술과 노하우, 요리법, 연금술 등을 선별해 엉뚱 발랄한 유머스러움으로 전한다. 다양한 문헌에서 발췌한 178개의 실용적인 조언들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다. 352쪽. 1만 5000원.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저자의 전작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미국은 드라마다’에 이은 ‘주제가 있는 미국사’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역사학자인 이언 모리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저서 ‘전쟁의 역설’에서 전쟁은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류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전쟁의 축복’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설명한다. 미국은 독립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등을 거치면서 정체성이 형성됐고, 이후에도 전쟁을 통해 제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는 188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70년간을 다뤘다. 360쪽. 1만 6000원. 삶과 나이(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독일 철학자이자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의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강연록이다. 저자는 삶의 특정 시기를 찬양하는 통념에 반대한다. 청춘의 가치가 절대화되고, 노년의 가치가 잊혀 가고 있는 오늘날의 상식을 비판한다. 노년기야말로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는 것이다. 저자는 “모든 하루하루, 모든 한 해 한 해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생생한 시기들”이라면서 “모든 삶의 시기가 전례 없이 새롭고 유일하며 또한 영원히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사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 삶의 긴장, 즉 바로 그때 그 시기의 삶을 살려는 아주 내밀한 충동이 나온다”고 일깨운다. 192쪽. 1만 2000원.
  • [문화마당] 아무도 쓰지 않는 책을 재미있게 쓴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아무도 쓰지 않는 책을 재미있게 쓴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내가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괴수대백과사전’이라는 책을 팔았다. 가격이 오백 원이었던가, 세월이 30년 가까이 흘러 가물가물하지만 네스니 빅풋이니 하는 괴수들을 보며 ‘이런 걸 직접 마주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고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궁금해하기만 했을 뿐 직접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당연히 없다. 왜 당연하냐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는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와세다대학 탐험부 시절 다카노 히데유키는 텔레호에 서식하고 있다는 ‘모켈레 무벰베’(일명 콩고 드래건)를 찾아 아프리카로 떠난다. 오지의 밀림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 호기심만으로는 실행하기 어렵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링갈라어를 배우고 말라리아와 사투를 벌이며 무벰베를 쫓는데 이 여정은 다카노의 데뷔작 ‘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라’에 기록돼 있다. 글이라곤 써 본 적이 없어서 한 달 동안 빈 원고지만 노려보다가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는 투로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분으로 완성한 책이 결국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줄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리라. 이후로 다카노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아무도 쓰지 않는 책을 재미있게 쓰자”는 모토 아래 탐험(작)가의 길을 걷는다. 아마존강을 하구에서 원류까지 조사하거나, 중국의 변방으로 야인을 찾아가고, 미얀마의 마약 지대에 잠입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준비하는데 하나는 탐험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그 나라의 문학을 읽는 것이다. 이를테면 콜롬비아에 환각제를 찾으러 가기 위해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본다. “소설이야말로 그 나라의 관습이나 문화를 안쪽에서 느끼는 데 필요한 최고의 실용서”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다른 하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가난해서 통역을 구할 돈은 없고 낯가림이 심해 현지인들과 사귀려면 필요하다는 이유로 구사하게 된 언어는 대충만 따져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링갈라어, 타이어, 베트남어 등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별난 친구들의 도쿄 표류기’에 묘사돼 있다. 지난 4월 11일 두산아트센터와 문학과지성사가 공동 주최한 행사에 강사로 초대받아 한국에 온 다카노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관절 몇 개 국어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현지인들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필요했을 뿐이고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라며 머리를 긁적이는 바람에 약간 감탄했다. 이런 겸손한 성정이랄까 담백한 자세는 그가 쓴 책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다카노의 탐험담은 무엇을 읽어도 ‘나는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려운 일을 하는 특별한 인간’이라는 식의 더부룩한 대목이 전혀 없다는 게 매력이다. 한데 이렇듯 유쾌한 책들이 국내에도 다섯 권이나 출간됐지만 몇 권은 구하기조차 쉽지 않은 듯해 안타깝다. 어째서일까. 고민한들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그가 계속 탐험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싶다는 것이 내가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한 ‘수수께끼의 독립 국가 소말릴란드’와 ‘아편 왕국 잠입기’ 정도는 번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유머러스함과 통찰력을 내가 보증한다고 말해도 그다지 설득력은 없을 것 같지만.
  • 죽은 시인의 사회?… 스테디셀러 시집의 존재감

    죽은 시인의 사회?… 스테디셀러 시집의 존재감

    TV·SNS로 젊은 시인에 호응 “수요 꾸준 … 건강한 성장 상징” 책이 안 팔리고 시가 안 읽힌다는 자조가 일상인 시대다. 이런 시류에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호출을 받으며 굳건히 존재감을 곧추세우는 시집들이 있다. 출간된 지 많게는 수십년, 적게는 수년이 흘러도 매년 쇄를 거듭해 찍는 스테디셀러들이다.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정호승, 최영미, 도종환 시인 등 문단을 묵직하게 지켜 온 원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은 출간된 지 20~30년이 지났어도 매년 한두 차례 중쇄하는 건 기본이다. 출판사와 판매 추이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시집은 1쇄를 500부~3000부가량 찍는다. 기형도 시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 시인선 가운데 가장 많이 팔려 나간 시집이다. 1989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한 시인의 사후 2개월 뒤 출간된 시집은 매년 8000~9000부를 찍을 정도로 여전히 각광을 받으며 ‘기형도 현상’을 이어 가고 있다. 13일 현재까지 중쇄 횟수만 56쇄, 팔려 나간 부수는 28만 5000부에 이른다. 1980년 나온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도 매년 증쇄하는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뒹구는 돌…’은 지난해 11월 50쇄를 찍었고 2개월 만인 지난 1월에 51쇄를 다시 찍었다. 이 책은 지금껏 6만 7000부가 판매됐다. 황지우 시인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9)는 33쇄(10만 6000부),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1981)은 44쇄(4만 6000부)를 찍었다. 창비 시인선에서는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가 51쇄를 찍어 52만부가, 정호승 시인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는 40쇄를 찍어 13만부가 팔려 나갔다. 최근에는 TV 방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향유되고 입소문을 탄 젊은 시인의 시집들도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케이블 채널 tvN의 책 소개 프로그램 ‘비밀 독서단’에서 다뤄지며 폭발적인 증쇄에 들어간 박준 시인과 심보선 시인의 시집이 대표적인 예다. 2012년 출간된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는 지난해 9월 방송을 타면서 지난 1년간 무려 14차례(4만 6000부) 찍었다. 지금까지 6만부가 나가면서 2011년 시작된 문학동네 시인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이 됐다. 심보선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는 문지 시인선에서 최근 1년간 가장 많은 중쇄(7차례) 및 부수(1만 9000부)를 찍어 총 3만 5000부(24쇄)가 나갔다. ‘비밀 독서단’에서 다뤄진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에만 네 차례 증쇄할 정도로 인기였다. 3년 전 출간된 한강 작가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기존에도 꾸준히 찾는 독자들이 많았지만 최근 맨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더 주목을 받는 사례다. 1만 6000부(9쇄)가 팔린 시집은 지난해 10월에 이어 지난 4일 3000부를 더 펴냈다. 이근혜 문지 편집장(문학 담당)은 “요즘 출판 환경에서는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난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출간 직후에만 ‘반짝’ 팔리고 사라지는 책들이 대부분”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세월이 지난 시집을 꾸준히 찾는 독자들이 있고 이를 절판하지 않고 계속 펴내는 출판사들이 있다는 건 시장 일부에선 건강한 성장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짚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60년대 압축 성장 밑바탕에 만주국 있다

    60년대 압축 성장 밑바탕에 만주국 있다

    만주 모던/한석정 지음/문학과지성사/518쪽/2만 8000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나는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학교 조회 시간마다 암송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지고, 충성과 효도를 강조하는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가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백의종군했던 이순신 장군이 민족정신의 화신으로 떠오른 시기는 1960년대다. 모두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닦기 위해 도입된 교육 이념, 사상들이다. 국민 소득 100달러 수준의 절대 빈곤 시대에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정신들을 바탕으로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며 압축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저자는 1960년대 우리 체제의 뿌리를 만주국에서 찾는다. 철도 건설을 명분으로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에 세운 괴뢰 정부(1932~1945)다. 만주국은 권위주의 체제와 불도저식 건설을 토대로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적 정책을 수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선근, 정일권, 유석창, 신기석, 김성태, 이인기 등 많은 지도층이 만주 인맥이라는 점에서 만주국 체제가 모방·차용·변형되며 이식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국토 개발, 반공대회, 대량 전단 살포, 표어 제작, 주민 점호 등 1960~70년대 우리 일상들이 만주국 유산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60년대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친일 대 민족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만주국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요컨대 식민 경험이 오로지 고난의 시기였던 것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후일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옛 식민자를 능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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