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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문지문학상에 김멜라 작가, 백은선 시인

    올해 문지문학상에 김멜라 작가, 백은선 시인

    올해 문지문학상 수상자로 김멜라(38) 작가와 백은선(34)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단편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와 시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이다.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하는 문지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 2010년 제정된 이후 소설 작품을 대상으로 운영되다가, 올해부터 시 부문으로 확대됐다. 올해 소설 부문 제11회 문지문학상을 받게 된 김멜라 작가는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을 펴냈다. 수상작인 단편 ‘나뭇잎이 마르고’는 장애를 가진 성소수자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경계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퀴어·장애·여성이라는 요소의 울퉁불퉁한 접면에서 발생하는 여러 첨예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작가는 “문지문학상의 손짓이 저에게 다가와 잘 서 있었다고 말한다. 그 웃음에 조금은 마음을 놓고 주변을 둘러본다”면서 “저의 앞과 뒤에서, 또 옆에서 함께 소설을 쓰며 서 계시는 작가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소감을 밝혔다.시 부문 제1회 수상자가 된 백은선 시인은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 등이 있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작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에 대해 “감정의 고열과 압력으로 말문이 막히는 지경에서 말의 길을 찾는 것이 그의 세계인 것 같다”고 호평했다. 백 시인은 시 형태의 소감을 통해 “이제껏 내 시를 응원해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피리를 불어주고 싶다. 항아리를 기울여 물을 부어주고 싶다”며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감사의 방식, 가장 분명한 사랑의 표정”이라고 말했다. 시상식은 12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릴 예정이다.
  • [책 속 한줄] 밤새워 찾아가는 신문/김기중 기자

    [책 속 한줄] 밤새워 찾아가는 신문/김기중 기자

    영화에서, 신문은 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윤전기 소리와 가판대 앞 신문 판매원의 열띤 외침 소리로 등장한다. 그러나 새벽의 우편함에서 발견하는 신문에는 그와 같은 결기가 없다. 현재인 척하는 이 기사들은 졸음과 싸워 가며 밤새워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32쪽) 세상이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간다. 스마트폰만 켜면 바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어제 일어난 일을 아침에야 알려 주는 종이뭉치의 효용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문은 더이상 신문(新聞)이 아니라 구문(舊聞)’이라는 실없는 농담을 떠올린다. 신문사 기자로 잡문을 쓰며 사는 이로선 불안감마저 느낀다. 항간에 떠도는 자극적인 소문을 다루고 기본적인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기사들이 온라인 공간을 메운다. 한발 늦었지만 좀더 정확하게, 좀더 풍부하게 쓰자며 반면교사로 삼는다. 내가 어제 쓴 기사들이 밤새워 독자를 찾아갔을 때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길 바라며. 소개한 부분만 보면 무거운 책 같지만, 필리프 들레름의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문학과지성사)에 실린 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려둔다. 새벽 거리에서 갓 구운 크루아상을 먹는 일, 맥주 첫 모금의 의미, 바닷가에서 책 읽기의 즐거움, 지하 저장고에서 익어 가는 사과향의 풍부함 등 인생의 빛나는 조각들을 잘 다듬어 담아낸, 인생예찬집이다.
  • ‘세계 1위’ 조선소 철상자엔 하루살이 일꾼 산다

    ‘세계 1위’ 조선소 철상자엔 하루살이 일꾼 산다

    용접에 눈 다치고 추락 사고하청 노동자 위한 안전 뒷전작업자들, 고통 속 서로 연대올해 들어 국내 조선업계가 13년 만에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친환경·스마트 선박에 투자해 선박 수주량 세계 1위를 지키겠다는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조선업 사고 사망자는 78명에 달한다. 여전히 ‘죽음의 일터’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선업계를 보자면 “누구를 위한 세계 1위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입양아, 철거민, 위안부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의 애환에 주목해 온 김숨 작가는 신작 소설 ‘제비심장’에서 사려 깊고 집요한 시선으로 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된 조선소 하루살이 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조선소 물량팀 여성 노동자인 ‘나’는 용접공을 따라다니며 불티가 튀지 않게 감시하는 업무를 한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정규직, 하청업체, 하청업체에서 재하청을 받는 물량팀 노동자, 세 부류로 나뉜다. 조선소에서 하청을 주는 것은 노동자들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인건비가 적게 들어서다. 조선소에서는 60여t에 달하는 철상자 300여개를 조립하고 연결해 철배를 만든다. 용접공들은 강한 불꽃에 시력이 망가지고, 발판공들은 이 철상자 안에 공중누각을 짓다 추락하는 일도 발생한다. ‘나’는 불에 대한 공포감에 심장이 제비심장 크기로 오그라들 것만 같다. 작업을 끝낸 친구 ‘선미’는 철상자 안에 갇혀 죽음을 맞고, 선미의 짝이었던 최씨를 보며 그가 한 번쯤 뒤를 돌아보았다면 선미가 혼자 남겨져 길을 잃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하청업체 반장들은 작업 기간 단축과 인건비 절감에만 몰두해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당으로 임금을 받는 물량팀 노동자들은 이들의 눈 밖에 나면 다음 일감을 받기 어렵다. 나는 우리 자신이 유령과 같은 존재라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제비심장’은 작가가 ‘철’ 이후 13년 만에 다시 써낸 조선소 이야기다. 하지만 신체 건강한 남성들의 집단 노동에 초점을 맞춘 ‘철’과 달리 이 책의 주인공은 대부분 50~60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다. 남편과 자식보다 먼저 일어나 가사 노동과 조선소 일을 병행하는 이들의 시각으로 전통적 노동 소설에서 배제됐던 젠더 문제를 본격 제기한 셈이다. 게다가 재하청 물량팀 노동자인 나의 눈에 비친 노동 계급은 하나가 아니다. 철배의 심장에서 일하지만, 하청 노동자에 불과한 이들은 “철상자 속 우리는 있으면서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죽음도 없어”(217쪽)라고 자조하듯 정규직들에게도 소외당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철상자에서 보내지만, 정작 철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철상자는 소모품 취급받는 하청 노동자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공간이다.작가는 “20~30대 직장 여성보다 비교적 덜 주목받아 온 고령화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극한 현장에서 일하는 고충을 전하고 싶었다”며 “이들이 사실 우리의 어머니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달라”고 말했다. 작중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의성어 표현은 현장 소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한 이 소설의 또 다른 묘미다.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연대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대화 사이로 온기가 전해진다.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고 꼼꼼히 기억하는 김숨의 문학 세계는 그렇게 넓어지고 깊어진다.
  • 이창동·홍상수·봉준호 영화 속 ‘신령한 존재’를 사유하다

    이창동·홍상수·봉준호 영화 속 ‘신령한 존재’를 사유하다

    입추 지나고 가을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던 날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솔출판사에서 임우기 대표를 만났다. 그는 박경리 ‘토지’를 비롯해 ‘카프카 전집’, ‘버지니아 울프 전집’, 김성동의 ‘국수’ 등을 펴낸 유명 출판인이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 혜안으로 한국문학을 해석해 온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최근 그가 이창동·홍상수·봉준호 감독을 다룬 첫 영화평론집 ‘한국영화 세 감독’을 냈다. 영화를 잘 보지 않고, 영화이론도 공부한 적 없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어느 식당에서 ‘기생충’ 오스카상 수상 뉴스를 보는데 동석했던 한 영화평론가가 유역문예론의 시각에서 봉 감독 영화평을 써 보라는 권유를 했던 게 우연한 계기가 됐어요.”뜻밖의 제안을 처음엔 웃어넘겼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문학이든 영화든 비평적 해석을 내놓아야만 ‘유역문예론’이 인정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더라는 것이었다. “영화에 별 관심이 없던 스스로에게 의심을 가지면서도 세 감독의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보고 분석하면서 영화비평을 즐거이 썼습니다. 이 책은 제가 입론한 유역문예론에 입각해 영화비평 방법론을 찾으려는 비평가로서의 책임과 도전에서 비롯됐던 거죠.” 그가 주창하는 유역문예론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 만도 하다. “오랫동안 우리 문학예술계에는 서구이론이 무차별적으로 수입돼 전통사상이나 문화를 경시하는 풍조가 퍼져 있었어요. 서구이론을 전적으로 거부하자는 게 아니라 저마다 살고 있는 자기 자리가 활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 유역문예론의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역’이 아니고 ‘유역’(流域)일까? “저마다 고유성을 지키면서 네트워크를 이루어 교류하는, ‘지역’보다 넓고 유동적인 개념으로서 ‘유역’ 의식”이라고 부연했다. 이렇게 보면 문학에서 획일적으로 표준어를 강요해 온 근대의식이나 서구문예를 표준으로 삼아 추종하는 이론체계는 근본적 도전을 받게 된다. 임우기는 ‘유역의 작가는 근원에 능히 통한다’는 명제를 통해 자신의 문예이론을 축성해 왔다. 이때 ‘근원’이란 작가가 살아온 역사성과 분리될 수 없는 본래성을 가리킨다. 가령 영화 ‘마더’에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이루는 무당 에너지가 작용하는 지점은 봉준호 영화의 근원을 잘 보여 준다. 봉준호 영화에서 무당 알레고리가 활용된 것은 그 안에 영성을 탐색하는 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창동 영화에는 전통 굿에서 보는 빙의나 제의의 모티브가 감춰져 있고, 홍상수 영화에는 세속의 삶에서 억압받는 무의식이 자연과 끊임없이 소통을 꾀하려는 지향이 숨어 있습니다. 이 또한 신령한 존재로서의 인간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걸출한 세 감독은 저마다 고유하고 개성적인 연출 역량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자기 안에서 영성의 상상력을 찾는 ‘자재연원’(自在淵源)의 자세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거였다. 서사적 스토리라인을 주로 읽어냈던 그동안의 영화 독법을 넘어서는 ‘근원’의 발견이 그렇게 가능해졌다.●문청에서 출판인으로, 동학과의 만남으로 임우기는 대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대학에서는 독문학을 전공했다. “그때만 해도 문학, 그것도 비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학창 시절 문학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요.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문학에 늦바람이 난 ‘문청 늦깎이’가 된 거죠.” 그때 평론가 김현 선생이 그를 문학과지성사로 이끌어 주었는데 선생은 그를 비평가로서도 인정해 준 분이었다. 출판사 대표로 ‘토지’ 신판 출간을 위해 박경리 선생과 만나게 된 것이 큰 전환점이 됐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의 계획에 따라 토지문화재단을 만들고 선생 뜻에 따라 초대 상임이사를 맡아야 했는데, 박 선생 주위에는 나중에 이명박 정권 수립에 공신이 될 폴리페서나 관리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갈등을 겪다가 건강이상까지 겹쳐 그는 선생과 헤어지게 됐는데 그때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1990년대 초 김지하 선생과 대화를 하게 된 것도 제 비평적 사유와 감성을 벼리게 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선생은 처음으로 제 마음에 수운(水雲) 동학의 씨를 뿌려 준 분입니다.” 그는 막 시작한 출판사업에 쫓겨 사느라 동학을 공부할 겨를도 마음도 없었다. 이 땅의 문화예술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전통 샤머니즘의 부활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을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지하 선생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유역문예론으로 돌아와 그 핵심을 물었더니 ‘자재연원’과 ‘원시반본’을 들었다. “특별히 ‘원시반본’의 정신은 원시적이고 신령한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자본에 의한 비관적 근대문명을 극복해 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서구 중심 문예이론이나 형식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령 그는 시에서 사투리나 속어 같은 비표준어를 쓰는 언어의식이 퍽 귀하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유역의 대화를 모두 표준어로 처리한 것은 한국문학의 명백한 퇴행이라고 단호하게 일갈한다. “일상 속에 감추어진 ‘자연의 조화(造化)’를 발견함으로써 홍상수 영화는 플롯 논리에 갇힌 ‘닫힌 영화’가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닮은 ‘열린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최령자’로 승화해 가는 개벽의 모토 그렇다면 유역문예론은 그동안 한국문학을 추동해 온 역사주의와는 어떻게 병립할 수 있을까? “역사주의가 반독재 민주주의를 향한 도정에서 끼친 공로는 말할 수 없이 크지요. 다만 우리의 근대문학예술이 과도하게 서구사상이나 이론에 의존적인 점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역사주의의 건강한 비판기능이 퇴락하고 점점 반동적 이데올로기로 퇴화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을 극복할 필요가 제기되는 가운데 유역문예론이 비롯된 것입니다.” 서구사상 일변도에서 탈피하고 역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미학적 요청이 유역문예론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인문학에서 영성 같은 전근대적 개념들이 빈번히 나오고 있고 최근엔 원로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2020)라는 두툼한 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특히 ‘개벽’이라는 개념이 심심찮게 쓰이는 걸 보는데 임우기 역시 ‘한국영화 세 감독’에서 동학의 ‘다시 개벽’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는 문학예술과 개벽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을까? “원시반본을 통한 ‘최령자’(最靈者)로 승화하는 것이 개벽의 조건이자 이 시대 문예활동의 과제입니다. 가장 신령한 존재라는 뜻의 ‘최령자’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무위자연 사상, 공(空) 사상, 음양론 등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최령자의 원형적 존재는 샤먼이지요.” 세 감독에게서 이러한 심오한 사상을 찾아낸 것 역시 영화를 통해 숨은 최령자의 가능성을 밝혀내고 각자 최령자 되기에 참여하는 작업이라고 그는 넌지시 말한다.●어두운 그늘 속에서 포착되는 ‘은미한 특이성’ “작품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특별히 영화 플롯에 감추어진 작은 일탈에 주목해야 합니다. 작품의 그늘 즉 잘 꾸며진 내용과 형식 모두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특이성, 은미한 이질성을 살피는 게 필요하고 여기에 작가의 내면적 고통이 은폐돼 있을 가능성을 찾아내자는 거죠.” 그는 문학평론집 ‘그늘에 대하여’(1996)에서 이미 전통 판소리에서 착상한 ‘그늘’을 중요한 비평적 개념으로 내세웠다. 뛰어난 소리꾼은 자기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는 가운데 ‘득음’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귀명창들은 소리에 그늘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 소리의 수준과 진실함을 평한다고 한다. “잘 빚어진 작품의 매끈한 구조보다 어두운 그늘 속의 ‘은미한 특이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깊이 살피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러한 사유는 문학평론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2016)를 거쳐 이번 영화평론집까지 관류하는 그의 뚜렷한 지론이 된 셈이다. 그 착상과 비전에 많은 분들의 관심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앞으로 그는 주위 분들과 함께 시작하는 ‘문예 웹진’ 창간 작업을 돕고, 틈틈이 등산하고, 전국을 돌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대화할 계획을 내비친다. 평론가를 만나는 일은 역시 어려운 개념적 소통 과정을 이렇게 겪는다. 그럼에도 이 척박한 시대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한없이 우뚝한 고집으로 서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던 은미(隱微)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어린이 책] 경주마가 못 돼도 괜찮아

    [어린이 책] 경주마가 못 돼도 괜찮아

    목장에서 자란 초등학생 새나는 경마장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 준 아빠·엄마처럼 기수가 되는 게 꿈이다. 그런데 엄마의 경주에서 말이 폐출혈로 쓰러지고 엄마가 부상을 당해 당혹스럽다. 엄마가 요양원으로 떠난 사이, 목장에서는 아테나와 아레스라는 두 망아지가 태어난다. 새나는 이들을 돌보지만, 뛰어난 경주마로 거듭난 아테나와 달리 아레스는 경주를 거부해 천덕꾸러기 취급만 받으며 도축될 위기에 놓인다. 제17회 마해송문학상을 받은 신현 작가의 ‘아테나와 아레스’는 목장을 배경으로 어린이와 경주마가 서로 교감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정감 있게 풀어냈다. 경주마와 기수들의 세계는 1등만이 주목받고 살아남을 수 있어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다. 새나는 처음엔 “경주마가 돼 우승하면 성공”이라는 신념을 지녔지만, 연승을 달리던 아테나가 사람들 욕심에 무너져버린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경주마가 되지 못한 말도 절망 속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귀한 동행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독자는 이를 통해 행복은 최고의 결과로만 빚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자기의 속도와 걸음에 맞춰 가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꿈과 목표를 이루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경주마를 타고 있듯 빠른 전개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이 책은 읽는 내내 말에 올라타 달리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재미를 준다. 동물 역시 치유와 공감을 해 나가는 주체임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국 문학, 해외 진출 길 넓힌다…국내외 26개 출판사 온라인 교류

    우리나라 문학의 해외 진출을 활성화하기 위해 해외 9개국 15개 출판사와 국내 11개사 관계자들이 온라인으로 만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문학번역원과 함께 8일부터 30일까지 ‘2021 한국문학 국내외 문학인사 온라인 교류’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이 행사는 해외 문학 출판사 관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나, 지난해부터 코로나19로 온라인 화상 면담 방식으로 전환했다. 국내에서는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산지니, 아작, 은행나무, 창비, 한겨레출판, 허블 등 11곳이 해외 9개국 출판사 15곳과 50여 차례 화상 면담을 진행한다. 해외 출판사 15곳에는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을 출간한 미국 크놉프 더블데이를 비롯해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을 일본에서 출간한 지쿠마쇼보, 김언수 ‘설계자들’의 영어 판권을 최초로 사들인 호주 텍스트 퍼블리싱 등이 포함됐다. 국내외 SF 출판사 간 면담도 활기를 띨 전망이다. SF 전문 출판사 허블과 아작은 영국 앵그리 로봇 북스와 일본 슈에이샤 관계자들과 만나 김초엽, 천선란, 김보영 등 국내 SF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20년 시공간 뛰어넘는 두 남자의 기묘한 만남

    20년 시공간 뛰어넘는 두 남자의 기묘한 만남

    살면서 한 번쯤은 나와 닮은 ‘도플갱어’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내 인생에 족쇄가 된다면 이를 거부하게 될까, 아니면 순순히 받아들일까. 이장욱 작가가 8년 만에 내놓은 장편 소설 ‘캐럴’은 이처럼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인물들이 기묘한 궤적으로 연결되고 엇갈리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201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투자자문업체 대표 윤호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수화기 너머 상대 대학생 도현도는 느닷없이 자신이 윤호연의 아내 선우정의 전 남자친구이고 오늘 자살할 것이라며 만나 달라고 청한다. 이들이 불쾌한 만남을 가진 뒤 20년 전인 1999년 어느 날 아침 모텔에서 깨어나는 도현도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도현도는 느닷없이 채권추심업체로부터 8억원에 달하는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자신이 윤호연이라는 인물의 연대채무자로 지정돼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인물의 이야기는 대사와 감정의 중첩을 통해 20년이란 시차를 가로질러 세밀하게 접합된다. 작가는 매개자인 선우정을 중심으로 현실적으로는 만날 수 없는 두 인물의 삶을 겹쳐 놓아 자기도 모르게 운명 공동체가 된 환상소설 같은 서사를 그렸다. 이 두 인물이 빠져들었던 사랑과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 그 때문에 치르게 된 대가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게 이 세계의 원리다”(236쪽)라는 말에서 보듯 소설은 우리 인생이 어쩌면 같은 궤적을 공유하는 단 하나의 삶일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작가는 “알 수 없는 사이에 우리를 조금씩 다른 세계에 접속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밝혔다.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PC통신이 등장하는 1999년 시대상은 40대 독자에게 아련한 향수를 일으킨다. IMF 외환위기를 겪는 20세기 말과 코로나19 팬데믹이 도래하기 시작한 오늘을 치밀하게 엮어 낸 내공이 놀랍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김상준 지음, 아카넷 펴냄)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가 ‘내장’과 ‘팽창’이라는 관점으로 근대 세계 문명사의 흐름을 짚었다. 저자는 서양 근대 팽창문명으로부터 동아시아의 내장 문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대전환을 분석하고, 공화·민주 전통에 기반을 둔 ‘협동과 우애의 공동체’가 갈 길이라고 강조한다. 968쪽. 4만 5000원.국경일기(정문태 지음, 원더박스 펴냄) 국제분쟁 전문 기자인 저자가 태국과 미얀마(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에서 만난 인도차이나반도의 비극적 현실을 에세이로 그렸다. 미얀마 소수민족 반군, 이주 노동자 등 권력이 멋대로 그어 놓은 경계선 밖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엮었다. 440쪽. 2만 2000원.감시자본주의시대(쇼샤나 주보프 지음, 김보영 옮김, 문학사상 펴냄) 쇼샤나 주보프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정보통신(IT) 기업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력이 커진 현 상황을 ‘감시 자본주의’로 명명하고 비판적으로 진단했다. 페이스북 등에서 누른 ‘좋아요’가 이들 감시 자본가들이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근원이 되고, 이들이 권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888쪽. 3만 2000원.부모님의 집 정리(주부의 벗사 편집부 엮음, 박승희 옮김, 즐거운상상 펴냄) 일본 ‘주부의 벗사’ 출판사가 고령화 시대에 맞춰 자식의 관점에서 부모님 집을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을 엮은 책. 2013년 일본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부모의 안전한 노후를 위해 물건을 정리한 다양한 사례와 버릴 물건들, 요양 시설 등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240쪽. 1만 5000원.팬데믹 다음 세상을 위한 텐 레슨(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권기대 옮김, 민음사 펴냄) CNN 국제정세 프로그램 진행자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가 코로나19와 관련한 10가지 변화와 기회에 대해 설명했다. 코로나19가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 큰 분기점이며, 글로벌 경제의 디지털화, 미국의 쇠퇴, 불평등 문제 등이 팬데믹 이후 심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388쪽. 1만 8500원.올해의 선택(황지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소설가 황지운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출간한 첫 소설집. 성소수자와 저소득 비정규직 등 소외 계층의 비애가 담긴 단편 8편이 실렸다. 성별과 성 정체성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췄다. 304쪽. 1만 4000원.
  • 새 학기 ‘집콕’ 어린이들엔 독서가 제격…선생님들이 추천하는 책은

    새 학기 ‘집콕’ 어린이들엔 독서가 제격…선생님들이 추천하는 책은

    새 학기를 맞아 설레는 3월이지만, 코로나19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어린 자녀가 집에서 독서를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나, 학부모로서는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어떤 책을 읽게 할지 고민이다. 학교도서관저널 도서추천위원회가 교육 현장의 교사, 사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발간한 ‘2021 추천도서목록’을 통해 추천한 어린이 문학 목록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초등 고학년엔 성장·심리·역사 소설 등 추천 초등학교 5~6학년을 위한 문학으로는 ‘5번 레인’, ‘내 가방 속 하트’, ‘내 친구의 집’, ‘너를 만났어’, ‘너의 운명은’, ‘맞바꾼 회중시계’ 등이 있다. ‘5번 레인’(은소홀 지음, 문학동네 펴냄)은 초등학교 수영선수인 한 소녀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미움·사랑·갈등·이해·용서라는 다양한 감정을 겪음으로써 1등을 못했더라도 스스로 만족스러웠다면 큰 가치가 있다는 걸 깨우치게 된다.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작이다.‘내 가방 속 하트’(주미경 지음, 창비 펴냄)는 사랑, 미움 등 아이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쓴 동화 일곱 편이 담긴 작품집이다. 짝사랑하는 아이의 문자에 심장 소리가 멋대로 자라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구성됐다. ‘내 친구의 집’(우미옥 지음, 사계절 펴냄)도 다섯 단편을 모은 책으로 등장인물로 나오는 아이들은 저마다 고민이 있다. 조용한 성격의 고학년 여자아이들에게 권한다. ‘너를 만났어’(이선주 외 2인 지음, 씨드북 펴냄)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이야기 세 편을 담은 모음집이다. 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여러 인물을 통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너의 운명은’(한윤섭 지음, 푸른숲주니어 펴냄)은 1910년대 일제강점기 열한 살 소년이 지게 하나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항일운동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이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과정이 감동적이다. ‘맞바꾼 회중시계’(김남중 지음, 토토북 펴냄)도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을 그려낸 역사 동화다. 주석과 부록을 실어 이해를 도왔고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추천한다.●중간 학년엔 신박한 동화나 우정·모험 이야기 3~4학년용 문학 도서로는 ‘길 위의 길’, ‘나는 황태자, 놀부 마누라올시다!’, ‘바바얀과 마법의 별’, ‘복도에서 그 녀석을 만났다’, ‘코리와 악어 공주’ 등이 있다. ‘길 위의 길’(안순희 지음, 머스트비 펴냄)은 조선 제일의 소목장인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은 소희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여자인 소희가 소목장의 길을 걷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나, 소희의 모습은 꿈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나는 황태자, 놀부 마누라올시다!’(이송현 지음, 산하 펴냄)는 놀부 마누라의 처지에서 본 새로운 버전의 ‘흥부전’이다. 무능한 흥부를 질책하는 놀부 마누라의 심정이 이해되는 새롭고 재미있는 발상이다. ‘바바얀과 마법의 별’(키쿠 아다토 지음, 박신순 외 1인 옮김, 한솔수북 펴냄)은 춥고 어두운 동굴에 사는 괴물 ‘바바얀’의 여행 이야기로 우정과 모험을 다뤘다. ‘복도에서 그 녀석을 만났다’(이혜령 지음, 책과콩나무 펴냄)은 학교 폭력과 괴롭힘의 문제를 다뤘다.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다른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느끼는 혼란스러운 심리를 어린이의 시각에서 그렸다. ‘코라와 악어 공주’(로라 에이미 슐리츠 지음, 이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는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의 조기 교육에 지친 공주의 하소연을 통해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조명한다. 어른들도 함께 읽을 만하다.●저학년 학생에겐 읽기 쉬운 우정·동물·판타지 동화 1~2학년이 읽을만한 문학 도서로는 ‘공룡 친구 꼬미’, ‘돼지 저금통의 기차 여행’, ‘이불 바다 물고기’, ‘피터와 에르네스토는 단짝이야’, ‘황금 글똥의 비밀’이 있다. ‘공룡 친구 꼬미’(김혜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소녀 하나와 꼬마 공룡 ‘꼬미’의 따스한 우정을 그렸다. 시공간을 초월한 우정이 감동을 주고 철학적 주제로 다채롭게 담았다.‘돼지 저금통의 기차 여행’(무라카미 시이코 지음, 김숙 옮김, 북뱅크 펴냄)은 주인공 겐이치가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돼지저금통을 데리고 할머니네 집에 가는 이야기다. 돼지저금통을 의인화한 발상이 신선하고, 그림책 독서에서 글 책 독서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 책을 추천한다. ‘이불 바다 물고기’(황섭균 지음, 웅진주니어 펴냄)는 순수하고 따뜻한 느낌의 판타지 단편 동화집이다. 이야기들이 아이의 작은 상처조차 읽어내고 보듬는 듯 섬세하다. ‘피터와 에르네스토는 단짝이야’(그레이엄 애너블 지음,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 펴냄)는 나무늘보 피터와 에르네스토의 우정과 모험, 위기를 그린 만화다. 대화체 중심이라 저학년 어린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황금 글똥의 비밀’(김미형 지음, 바람의아이들 펴냄)은 밥 먹고 똥을 싸는 것처럼, 생각하면 글을 써야 한다고 하는 선생님과 학생 윤솔이의 이야기다. 작가는 생각을 글로 표현할 때 무엇이 우선돼야 하는지 일러준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지난 15일 시인 김형영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한 이래 55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이다. 오랜 세월 ‘시’와 ‘신앙’이라는 두 바퀴로 조용조용 달려온 그의 정결한 생애를 두고 빈소에 모인 지인들은 깊은 추념과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는 선생이 지상을 떠나던 그날 지상에 내려앉았다. 투병하던 당시 시인 스스로 그동안의 시집 10권에서 213편을 선정해 최종적으로 정본 작업을 완료한 시적 에센스가 영정 앞에 놓인 것이다. 비록 고인은 만져 보지 못했지만 그 책은 그 순간 선생의 몸이 되어 그가 천생 시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저항의 세계에서 통회의 심연으로 선집 체재는 네 개의 시기별 분류를 택했다. 시인 스스로 ‘저항’→‘신앙’→‘자유’→‘교감’을 키워드로 해 자신의 삶의 궤적을 조감하도록 배려한 결과로 읽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초기시는 폭력이 미만한 세계에 대한 항의와 저항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시는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조용하게 솟구쳐 오르는 나지막한 것이었다. 그 은유적 상관물로 시인은 ‘모기’를 택했는데 가령 시인이 간절하게 속으로 외친 소리는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모기’)처럼 작고 소소한 이들의 마음으로 현상했다. 2015년 박두진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저는 지금도 왜 시를 쓰느냐고 자신에게 가끔 묻는다. 쓰면 쓸수록 어렵기만 하고, 때로는 숨이 막히게도 하는 시”라고 말씀한 그 ‘시’를 평생 떠메고 모기 소리처럼 작은 저항의 세계를 온축했던 선생은, 원치 않은 병고로 말미암아 스스로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도 나는 김형영의 ‘통회(痛悔)시편’ 연작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도 신앙의 문전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저를 죽이지 마소서./화가 나시더라도/ 흐느끼는 이 소리 들으소서.// 뼈 마디마디 경련이 일고/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 목숨 살리소서.”(‘통회시편 1’) 1980년대에 쓴 이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어 그로 하여금 ‘영성의 시인’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게끔 해 주었다. 무릇 모든 존재자는 현상계에서 물질적 존재 방식을 한시적으로 취하다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라져 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소멸이란 온통 비극적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평생 통회의 심정으로 탐구하고 형상화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해 갔다. 선생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은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형영은 이때부터 평범한 일상에서 근원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전율의 세계를 길어올린다.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원하는 시인의 품과 격을 보여 준 것이다. 깊은 영성을 시로 담아 냄으로써 남루한 존재자들이 신성한 존재와 연루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탐구하는 지향을 일관되게 개척해 간 것이다. 그만큼 시인에게 가톨릭에 기반을 둔 사유와 감각은 신성한 존재를 희구하고 물어가는 실존적 사건이었으며 그러한 시선이 마침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회귀성을 가지게 해 주었다. 세례명이 ‘스테파노’인 그는 수많은 이들의 대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동균 시인은 “가톨릭 영성을 심층적으로 서정성과 결합해 탐색해 낸 정말 보기 드문 시인”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신성의 자유로운 현장으로서의 자연 후기로 갈수록 김형영 시의 주된 요소는 자연과 시인이 상응하는 장면에서 일어나게 된다. 말하자면 자연 사물의 구체성과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지표가 서정적 순간성 속에서 견고하게 결속한 것이다. 그 빛나는 순간을 통해 우리는 김형영 브랜드인 형이상학적 빛을 한껏 쬐게 되고 이때 우리도 스스럼없이 환한 서정과 영성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후기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을 읽어 보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만나고 싶거든/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안아보자.”(‘땅을 여는 꽃들’) 물론 자연은 신성의 거소(居所)이자 고유의 향기와 소리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성 자체이기도 하다. 작은 입으로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봄날의 꽃을 온전하게 만나기 위해 시인은 눈도 귀도 입도 마음까지 닫은 채 크나큰 품으로 온전하게 봄날의 꽃들을 안아 들인다. 그러한 신성과의 소통 과정을 일러 시인은 ‘교감’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영혼이 오가는 순간을/ 어찌 귀와 입으로 붙잡겠는가./ 눈도 아니다./ 생각도 아니다./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사랑의 숨결이다.”(‘교감’) 이처럼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과 영혼의 소리에 우리도 가장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김병익 선생도 시선집 해설에서 “육신의 회복과 정신의 부활을 치르면서 김형영의 시는 이 세계와의 교감과 공감을 싱싱하게 드러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그에게 ‘시’는 생명의 리듬이 만져지고 보이는 음악이요, 숨결의 형식이 선연하게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시선집 ‘시인의 말’에서도 선생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라고 적었다. 이러한 김형영 시의 지향은 결국 실존적 형이상학의 세계로 귀납될 것이고, 그때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샘터, 아버지, 그리고 봄 햇살을 따라 선생은 ‘샘터’에서 30여년간 편집자로 일했다. 이 오랜 전통의 월간지가 정점을 구가할 때였을 것이다. 법정, 이해인, 최인호, 정채봉 등 이 책을 그득하게 채웠던 언어들은 지금도 한국문학의 보석이 되어 빛을 뿌린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들어갔는데, 입사 직후의 그를 만나러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얼떨결에 선생을 뵈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선생의 시집 해설도 쓰고 같은 잡지의 자문편집위원도 하면서 선생의 말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마지막 투병 중 전화로 들었던 선생의 떨리는 목소리의 힘으로 선생의 시에 대한 기록을 더 깊이 수행해 갈 다짐을 해본다. 빈소에서 인사를 나눈 둘째아들 김상조씨와 장례를 마치고 전화 통화를 했다. “저나 형한테는 늘 친구 같은 아버지셨어요. 같이 식사하고 탁구나 배드민턴도 같이 치고, 힘들 때 서로 전화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던 분이셨습니다.” 상을 치르면서는 지인과 후배들이 휴대폰에 남긴 내용이나 빈소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새삼 ‘큰 분’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지난해 12월 20일에 온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을 발견했어요. 자신이 한없이 방황할 때 신앙으로 인도해 주신 마음에 고마움을 표하는 감사 카드였습니다.” 선생의 묘역은 따로 없다. 가톨릭대학에 시신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상조씨는 아버지가 ‘유언시’라고 하시면서 1월 중에 보내 주신 작품 한 편을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처음 공개되는 선생의 마지막 작품 전문이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죽거든/ 무덤일랑 만들지 마라/ 납골당에도 가두지 마라// 나를 먼지로 만들어/ 관악산 중턱 후미진 곳에서 뿌려다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구름이 흘러가면 구름 따라/ 새들 지저귀면 새소리로/ 꽃들 향기 뿜으면 그 향기에 취해/ 천지사방 허공을 떠돌며/보이지 않는 자연이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화살시편115-내가 죽거든’) 지금쯤 선생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훨훨 흘러가고 계실 것이다. 이제 선생은 스스로 언어의 화살이 되어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나는 새삼 그의 세례명을 생각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햇살보다 더 밝은 얼굴로 신에게 영혼을 의탁하는 모습이 기록된 분이다. ‘김형영 스테파노’의 얼굴에도 그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간 그날 출간된 시선집 제목처럼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따뜻한 봄 햇살로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스스로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작품 한 편을 선집에서 꺼내어 봄 햇살에 비추며 읽어 본다. “별이 하나 떨어졌다./ 눈에 없던 별이다.// 캄캄한 하늘에 비질을 하듯/ 한 여운이 잠시/ 하늘에 머물다 사라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보다 작게/ 보다 낮게/ 한 점 남김없이 살다 간 사람.// 그를 기억하소서./ 그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한때 우리들의 이웃이었던 그를.”(‘무명씨’)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단독]‘우후죽순’ 문학상에 문체부 “매뉴얼 내놓겠다”… 실효성은 얼마나

    [단독]‘우후죽순’ 문학상에 문체부 “매뉴얼 내놓겠다”… 실효성은 얼마나

    “문학상 운영 매뉴얼 만들겠다” 밝힌 문체부표절 방지 시스템 만들고, 형사처벌 고지하도록소설 ‘뿌리’ 베낀 손모씨 경우 형사처벌도 가능남의 작품을 베낀 출품작으로 문학상을 받은 손모씨 사태가 일파만파 하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올 상반기까지 ‘문학상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운영진과 응모자들에게 표절에 관한 경각심을 고취하겠다는 의도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체부 관계자는 27일 서울신문과 통화에서 “올해 말까지 시행하는 문학 실태조사에서 우선 문학상 부문을 3월부터 전수조사하고, 문인협회 등과 협의해 6월까지 운영 매뉴얼을 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매뉴얼에는 문학상 운영 단체가 선정 과정에서 표절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표절 적발 시에는 응모자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는 내용 등이 담긴다. 이번 문학상 논란은 앞서 손모씨가 대학생 작가 김민정의 소설 ‘뿌리’를 도용해 지난해에만 5개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한국저작권위원회 관계자는 “손씨의 사건은 저작물 도용 사례로 친고죄에 해당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전국 문학상 448개…손씨 응모문학상은 집계 안 돼문단 “일부러 소규모 문학상 골라 출품했을 수도” 문체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문학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국 문학상은 모두 448개에 이른다. 특히 2001년부터 2018년까지는 209개가 신설됐다. 한 해에 11.6개씩 생겨난 셈이다. 손씨가 받은 5개 상 가운데 4개는 문체부 실태조사에서 빠졌다. 문체부가 집계조차 하지 못한 문학상이 여전히 많다는 뜻으로, 손씨가 상금을 노리고 소규모 문학상만 일부러 골라 출품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주일우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전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신문사나 대형출판사 등이 진행하는 문학상은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표절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소규모 문학상은 그렇지 않은 곳이 상당수”라고 설명했다. 소규모 문학상은 지자체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사례가 많다. 지자체가 지역문학 진흥, 신진 작가 발굴 등을 이유로 지원금을 내고, 소규모 잡지사나 협회, 학교 등과 같은 주최 측이 이를 받아 진행한다. 홍보 효과를 노린 지자체와 금전적 이익을 받는 주최 측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셈이다. 이러다 보니 소규모 문학상이 매년 우후죽순 늘어난다. 문학상이 이처럼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결국 통제 불능 상태까지 갔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심보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기관은 홍보를, 문단은 자신의 위신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돼버려 과포화 상태에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학상 많고 운영방식 다양해 매뉴얼 실효 의문“표절 심각성 공론화하고 강력한 처벌 병행해야” 이에 따라 문체부 매뉴얼이 실효를 거둘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김호운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은 “문체부가 일일이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고, 문학상의 운영 방식도 다양해 매뉴얼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론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했다. 신현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도 “상금 사냥이나 오디션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관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자정 작용에 맡기는 게 더 낫다”고 주장했다. 다만 어느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의견도 나온다. 김 이사장은 “전국 문학상 수상작들을 디지털화하고, 검색 이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규제를 두어 활용하는 방식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그래도 표절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결국 문제를 공론화하고 사회 전반에 대한 도덕적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는 이런 의견에 관해 “최근 강단에서는 타인의 텍스트를 가져와 문학적으로 재가공할 때 표절로 봐야 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표절의 경계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어 이 문제를 공론장으로 우선 끌어내 제대로 된 논의부터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소 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표절로 밝혀지면 수상 내역을 비롯해 상금 등을 모두 몰수하고, 일정기간 공모 기회를 박탈하는 식으로 실제적인 불이익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딸의 펜 끝서, 우리 기억서… 2021 박완서를 다시 쓰다

    딸의 펜 끝서, 우리 기억서… 2021 박완서를 다시 쓰다

    ‘한국 문학의 어머니’로 불린 박완서(1931~2011) 작가가 오는 22일로 타계한 지 10년을 맞는다. 출판업계는 전쟁, 이념, 사랑, 여성의 삶 등을 진실하게 전달한 박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에세이와 소설 개정판 등을 잇달아 출간하고 있다.민음사 출판그룹의 시각문화 전문 브랜드 ‘세미콜론’은 15일 박 작가의 딸 호원숙 작가가 어머니와 얽힌 추억을 기려 펴낸 에세이집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을 발간한다. 호 작가는 이 책에서 박 작가의 산문집 제목이기도 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렀던 ‘노란집’에 대한 추억을 되새긴다. 그리고 어머니의 추억이 어린 이 집에서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은 책상이 아니라 부엌이었다고 고백한다. 출판사 측은 “호 작가는 엄마의 부엌에서 삶을 이어 갈 밥을 해 먹는다. 이것은 숭고한 노동이자, 유연한 돌봄이자, 생존에 대한 원초적 의지였다”며 책에 이런 마음을 담아냈다고 소개했다.세계사는 지난달 박 작가가 생전에 집필한 에세이 35편을 엮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출간했다. 1931년생인 작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이름을 써야 했던 학교 생활, 6·25전쟁 이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가의 어머니, 여류 문인이 드문 시절 40대에 문인의 길에 들어선 사연 등이 담겼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웅진지식하우스는 이달 중에 박 작가의 연작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개정판을 낸다. 두 책은 박 작가의 어린 시절과 그 이후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이번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에는 고 김윤식, 이남호 평론가의 작품 해설과 국내 젊은 소설가 정세랑, 강화길, 정이현, 김금희 작가의 추천사와 서평을 수록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지난해 작가의 중·단편 10편을 엮은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펴냈다. 이 책에는 박 작가의 1975년 초기작 ‘도둑맞은 가난’부터 6·25전쟁을 견뎌 낸 여성의 이야기 ‘공항에서 만난 사람’, 생명의 고귀함을 다룬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2000년대 작품인 ‘빨갱이 바이러스’ 등 10편이 수록됐다. 이 밖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13일부터 15일까지 작가의 단편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작가정신), ‘기나긴 하루’(문학동네), ‘지렁이 울음소리’(민음사) 3종을 리커버 한정판으로 판매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국 문학 어머니’ 박완서 10주기 조명 에세이·소설 잇따라

    ‘한국 문학 어머니’ 박완서 10주기 조명 에세이·소설 잇따라

    ‘한국 문학의 어머니’로 불린 박완서(1931~2011) 작가가 오는 22일로 타계한 지 10년을 맞는다. 출판업계는 전쟁, 이념, 사랑, 여성의 삶 등을 진실하게 전달한 박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기리는 에세이와 소설 개정판 등을 잇달아 출간하고 있다. 민음사 출판그룹의 시각문화 전문 브랜드 ‘세미콜론’은 15일 박 작가의 딸 호원숙 작가가 어머니와 얽힌 추억을 기려 펴낸 에세이집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을 발간한다. 호 작가는 이 책에서 박 작가의 산문집 제목이기도 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렀던 ‘노란집’에 대한 추억을 되새긴다. 그리고 어머니의 추억이 어린 이 집에서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은 책상이 아니라 부엌이었다고 고백한다. 출판사측은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은 엄마의 부엌에서 삶을 이어 갈 밥을 해 먹는다. 이것은 숭고한 노동이자, 유연한 돌봄이자, 생존에 대한 원초적 의지였다”며 이같은 마음을 담아 책을 펴냈다고 평가했다.세계사는 지난달 박 작가가 생전에 집필한 에세이 35편을 엮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출간했다. 1931년생인 작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이름을 써야 했던 학교 생활, 6·25전쟁 이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가의 어머니, 여류 문인이 드문 시절 40대에 문인의 길에 들어선 사연 등이 담겼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웅진지식하우스는 이달 중에 박 작가의 연작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개정판을 낸다. 두 책은 박 작가의 어린 시절과 그 이후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이번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에는 고 김윤식, 이남호 평론가의 작품 해설과 국내 젊은 소설가 정세랑, 강화길, 정이현, 김금희 작가의 추천사와 서평을 수록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지난해 작가의 중·단편 10편을 엮은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펴냈다. 이 책에는 박 작가의 1975년 초기작 ‘도둑맞은 가난’부터 6·25전쟁을 견뎌 낸 여성의 이야기 ‘공항에서 만난 사람’, 생명의 고귀함을 다룬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2000년대 작품인 ‘빨갱이 바이러스’ 등 10편이 수록됐다. 이 밖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13일부터 15일까지 작가의 단편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작가정신), ‘기나긴 하루’(문학동네), ‘지렁이 울음소리’(민음사) 3종을 리커버 한정판으로 판매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서평전문 계간지 ‘서울리뷰오브북스’ 특집기획호

    서평전문 계간지 ‘서울리뷰오브북스’ 특집기획호

    서평 전문 계간지 ‘서울리뷰오브북스’가 3월 정식 출간을 앞두고 특집 기획호를 발간했다. 잡지는 ‘뉴욕리뷰오브북스’, ‘런던리뷰오브북스’ 등 고급 서평 전문지를 모델로 한다. 강예린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권보드래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심채경 한국천문연구원,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등 사회학, 경제학, 자연과학, 인문학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13명의 편집위원이 참여한다. 앞서 진행한 펀딩에서 2주 만에 목표액의 971%를 달성해 화제가 됐다. 최근 이슈를 중심으로 하는 ‘ISSUE RE-VIEW’와 주제에 구애받지 않는 ‘RE-VIEW’로 구성했다. 여기에 소설과 에세이를 수록한 ‘LITERATURE’로 별책으로 따라온다. 특집 기획호 주제는 ‘2020: 이미 와 버린 미래’다. 김준혁 소아치과 전문의가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푸른역사)를 중심으로 감염병의 역사를 고찰하고, 공포를 이용해 누가 이득을 얻는지 질문을 던진다. 홍성욱 과학기술학자는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생각의힘),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돌베개) 등 코로나19 관련 서적을 돌아보며 팬데믹 사회를 성찰한다. 건축가 강예린이 ‘정크스페이스’(문학과지성사), ‘짓기와 거주하기’(김영사) 등으로 팬데믹과 공간을 이어본다. ‘RE-VIEW’에서는 특정 주제가 아닌 전문가들의 문제의식을 모았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체르노빌’로 참사의 흔적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다. 별책부록 ‘LITERATURE’에서는 김영민 교수의 신작 소설 ‘먹물누아르’를 비롯해 김초엽 작가 단편, 김혼비·박솔뫼 작가 에세이 등을 수록했다. 잡지 측은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국에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서평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창간한다”고 소개하고 “좋은 책을 발굴하기 위한 사유의 장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짧은 소설, 에세이 등 다채로운 글을 수록해 다양성과 재미 역시 놓치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4·3’ 조명한 한강… 기후 재앙 꺼낸 빌 게이츠

    ‘4·3’ 조명한 한강… 기후 재앙 꺼낸 빌 게이츠

    코로나19 사태에도 출판 분야는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책을 찾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올해 신간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주요 출판사의 올해 출간할 주목할 만한 책들을 살펴봤다.(일부 확정됐지만 책 제목 대부분은 가제다.) 우선 문학 부문에서는 한강, 최은영, 강화길, 박상영, 신경숙, 장류진, 조남주 등 유명 작가들의 신간이 독자들을 만난다. 문학동네는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상반기 중 출간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처럼 현대사의 아픈 과거인 제주 4·3사건을 조명한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은 5년 만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유명한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도 올여름 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가족 4대의 삶을 비추며 100년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를 훑는다. 강화길 작가의 신작 장편 ‘대불호텔의 유령’, 2019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받은 박상영의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도 올여름 문학동네에서 나온다.신경숙 작가가 ‘창작과 비평 웹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창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고통을 참으며 자리를 지켜 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나’와 아버지의 삶을 교차하며 풀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심훈문학대상을 받은 장류진 작가의 소설 ‘달까지 가자’도 상반기 중 출간한다. 민음사는 오는 3월 조남주 신작 소설집 ‘오기’를 낸다. ‘가출’, ‘여자아이는 자라서’, ‘오기’ 등 단편소설을 수록했다. “전작을 둘러싸고 작가가 받은 심리적 고통과 갈등으로 여성 서사를 돌아본다”고 출판사 측은 설명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이장욱 작가가 2017~2018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밤과 미래의 연인들’을 출간한다.외국 작가들의 기대작도 속속 출간된다. 민음사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오는 4월 출간한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다. 7월에는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페스트의 밤’이 예정됐다.비문학 분야에서도 주목할 책이 여럿 나온다. 김영사가 다음달 출간하는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가 직접 쓴 책이다.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그동안 진행해 온 환경·기후 관련 연구 결과와 해법 등을 담았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신, 만들어진 위험´으로 올해에도 무신론을 주장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로 지난해 국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야마구치 슈의 신간 ‘일의 철학´은 직업 선택을 위한 마음의 자세와 실제 준비 과정, 직업과 이직에 관한 논의를 담았다. 지난해 활발한 출간으로 국내 인지도가 높아진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 ‘세상에 없는 나의 조각들’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 저자로는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의 ‘미래의 질문´이 눈에 띈다. 김영사는 “팬데믹, 외로움, 세계화, 음모론, 트라우마 그리고 사랑 등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본질과 미래상을 뇌과학자의 시선으로 돌아본다”고 설명했다. 시공사는 ‘카라반 모녀’ 사진으로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을 받은 김경훈 로이터통신 기자의 사진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효리네 민박’에 출연해 유명해진 문경수 탐험가가 쓴 천문학책 ‘우주로 가는 밤´도 곧 선보인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물들도 이어진다. 예술가의 고향을 기행한 아르떼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지난해까지 26권이 나왔다. 올해는 정준호 음악평론가(차이콥스키), 노승림 음악평론가(말러) 등이 이어 간다. 서울대 교수들의 명강을 담은 북이십일의 ‘서가명강’은 올해 15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홍진호 독어독문학과 교수, 구범진 동양사학과 교수, 장병탁 컴퓨터공학과 교수 등이 바통을 잇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만질 수 없음을 만지는 언어:촉각의 소노그래피/전승민

    문학의 칼 칼날과 포옹할 수 있을까? 한강에게 언어는 세계와 자신을 가르는 칼이다. 언어는 전체 의미 중에서 표현 가능한 부분만을 잘라 기표에 담으므로 진실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그래서 문학 하는 이들에게 언어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고통이다. 문학의 괴로움은 그것이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비-진실해지는 이 운명에서 비롯한다. 현실의 경험을 기표로 쪼개어 재조합하는 언어로는 그 어떤 실재에도 완벽히 다다를 수 없다. 현실을 조각내지 않는 언어는 과연 가능할까?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2011)은 진실을 조각내는 언어의 칼금과 대결하며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포착하려 한다. 그것은 현실을 분절하는 한계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을 가장 훼손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의 언어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언어가 언어이기를 포기할 때 획득되기에 순수를 추구할수록 더욱 비-순수해지는 역설 속에 있다. 그 ‘순수’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에게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어떤 인과나 합리적 추론으로 증명되는 참인 명제가 아니라 오직 몸으로 살아낼 때만 느끼는 힘의 압력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남자와 여자는 이 거대한 진실을 유한한 인간의 몸뚱이로 견디는 사람들이다. 남자의 진실은 영원한 실명, 여자의 진실은 계속되는 실어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실과 고통은 보상이나 처벌의 체계에서 비롯하지 않으며 당위나 인과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각자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영원히 실패한다. 예정된 실패의 운명 속에서 ‘희랍어 시간’이 길어 올리는 물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발버둥치는가이다. 이 궁극의 물음에 대해 소설은 질문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파괴하는 재귀적인 답을 제시한다. 삶이 인간에게 들이미는 통각은 소거되어야 할 병증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생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은 인물의 아픔에 관한 원인을 굴착하기보다 그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통과한다. 서사는 플롯의 인과와 시간의 합리적 흐름에 복무하지 않고 다만 고통의 양태와 통각을 소슬히 응시하기 위해 흐른다. 그래서 ‘희랍어 시간’에서의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고 소설의 언어 역시 일반의 언어로부터 탈구되어 있다. 요컨대 한강은 인간과 문학이 삶에 대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 그러나 ‘왜’로 시작할 수밖에 없으므로 언제나 오류일 수밖에 없는 어떤 질문과 대결한다.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105쪽) 신성의 잠재태로서의 고통 ‘희랍어 시간’의 시간은 환(環)으로 흐른다.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26쪽) 소설에서 읊어지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첫 번째 장은 ‘1’에서 시작해 21번째 장까지 진행된 후 마지막 장에서 ‘0’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1에서 0을 향해 구부러지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삶이 전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전사(前史)는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2013)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1) 남자와 여자는 ‘해부극장’ 연작에 나오는 백골의 전생이며, 백골의 고통은 곧 여자가 느끼는 통증이다. 그것은 말의 소리가 신체의 발음 기관을 경유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갈 때 발생하는 비릿하고 붉은 통각이다.2)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희랍어 시간’·165쪽) 여자의 고통이 언어가 파열될 때 발생한다면 남자의 고통은 반대로 무언가가 덩어리로 뭉개질 때 발생한다. 완전히 실명하게 되리라 진단받은 마흔을 목전에 두고, 그는 마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처럼 16년간의 독일 생활을 접고 모국으로 돌아온다. 사물과 풍경의 날카로운 경계는 그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는 실명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다. 남자의 삶 역시 독일과 한국에서 보낸 시간으로 분절되어 있으므로(“그때 내 인생은 거의 정확히 절반씩 두 언어, 두 문화로 쪼개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40쪽) ‘희랍어 시간’은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는 고통 그 배면의 시간이다. 여자는 두 번째로 찾아온 실어 증상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강의를 신청하고, 남자는 자신을 둘로 쪼개는 힘을 피해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 (…)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119쪽)과 같은 희랍어 속으로 숨어든다. 이 공통의 시간 너머에 있는 그들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백골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아픔은 단지 붉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성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파야만 하는 것이다. 까닭 없이 고통받는 인간은 신을 찾아 헤맨다.3) 소설의 1인칭 화자는 마지막 장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의 고해는 세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발송되는 편지는 독일에서 살던 시절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장애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를 욕망한다.(“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 47쪽) 그는 “백치처럼 순진하게”(47쪽) 그녀에게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말을 해 보라고 요청한다. 남자는 그녀의 청각장애를 자신의 예정된 실명과 동등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그녀의 독순술이 그의 ‘결핍’을 보충하는 자질이 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누군가의 언어 행위는 그의 자발적 선택과 의지에 의한 것이지 다른 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언어는 강요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품는 모든 욕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되고 그것이 그녀에게도 좋은 것이라 ‘백치처럼’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사과하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세계를 두 눈으로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왜곡되지 않은 상(像)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부 사물을 보는 눈과 인간의 고통을 보는 눈은 다르다. 한편으로, 인간이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은 그 또한 다른 인간으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음을 내포한다. 두 번째 편지의 수신인은 여동생 란이다. 그는 여동생에게, 앞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될 그의 운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똑같은 병을 앓았던 아버지였음을 말한다. 그의 시력 상실은 부계 유전질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스름이 정말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지”(82쪽)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자신과 똑같은 아들을 끝까지 멀리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에 결국 실패하면서 삶으로부터의 자기 소외 속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빛 속으로 한 발짝도 걸어 나가지 못했던 셈이다. 이제, 앞서 소설이 던진 유일한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 도착한다. 인간이 부서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영혼 안에 어리석고 나쁜 것과 함께 어떤 좋음 또한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을 감각하고 수용하는 능력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새’는 그것의 체현물이며(“그의 얼굴 속에 새 같은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따스한 감각이 그녀에게 즉각적인 고통을 일깨운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147쪽) 개별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다.(“새 같은 무엇인가가 문득 육체를 떠났고, 그 육체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었다.” 145쪽) 말하자면 새는 인간이 생의 통각에 반응하는 마음의 일부로서 육체와 정신을 이어 준다. 새를 통해 인간은 육체의 통증을 실존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뒤에서 논의되겠지만, 인간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새’로 인해 자기 파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를 두고 인간이 각자 품고 있는 어떤 신성(神性)의 잠재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유한자로서의 운명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적이지 않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그 무엇은 분명 신성하다. 요컨대 인간은 선험적인 신성을 배태하므로 고통받는다. 여자는 특히 이 신성의 언어적 측면이 육화된 존재다. 문자가 소리로 변할 때 언어가 겪는 분절의 고통을 그녀는 자기 몸의 통증으로 겪는다. 심장과 혀를 경유하여 귀로 도달하는 모든 파열하는 소리는 여자에게 폭력이다. 그래서 실어증은 파괴하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응이다. 침묵은 그녀를 에워싸고 보호한다. 실어의 원인은 심리치료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55쪽)다. 여자는 언어의 신성 그 자체이지만 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녀 역시 구원을 바란다. 어머니가 뱃속의 그녀를 지우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실 속 무언가의 실존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우연에 기대고 있는지 아는 그녀는, 그래서 무언가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변형시키는 힘에 대해 온몸으로 대항한다. 그녀에게 폭력은, 어떤 존재를 그것의 고유한 자리로부터 박탈시키는 모든 종류의 유형력이다. 목소리 역시 그러하다. 음성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다른 존재들을 밀어낸다.(“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51쪽) 여자에게 말은 육체적인 고통이다. 그러므로 실어는 존재들을 지켜내기 위해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는 사랑의 행위-신의 사랑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 대신 언어를 시선으로 번역한다.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104쪽)라는 대학원생의 물음은 반쯤 정답을 향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무참히 다룬 죄를 고해하고 받은 상처를 토로하던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남자가 찾던 신의 모습은 여자의 몸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과연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신과 인간의 소노그래피 그녀가 희랍어로 힘겹게 써 내려가는 시는 마치 예수가 부활하기 전 무덤 속에서 썼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 흙. (64쪽) 차가운 무덤 속에 묻힌 신의 눈에는 흙이 있고, 입과 목은 차가운 눈으로 막혀 있다. 그녀는, 신은 말할 수 없다. 무덤 안은 남자와 여자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다. 카타콤베 묘지에 갔던 남자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러분, 왜 관 속에 유골이 없을까요? (…) 박물관에 가져다놓은 거 아니에요? (…) 누군가가 훔쳐갔나요? (…) 다아 여기 있습니다. (…)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153쪽) 백골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남자는 자신이 곧 그 백골이라는 것을 안다.(“수천 구의 육체들이 뼈까지 깨끗이 삭아버린 거대한 무덤 속에, 그토록 따뜻한 몸을 가진 우리가 모여 있었다는 게.” 155쪽) 그는 구토감을 느낀다. 온몸에 묻은 죽음의 흙냄새와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여자에게 고해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마치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가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고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느냐 묻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다.(요한복음 20:15) 그는 앞으로 펼쳐질 영원한 어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신에게 거듭 질문한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내 말, 거기서 듣고 있나요?(161쪽) 두 사람의 과거로 구부러졌다 돌아오곤 하던 현재는, 남자와 여자가 ‘어둠’ 속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는 배타적인 둘만의 시간, 즉 17장부터 21장까지의 시간 동안 직선으로 그러나 더 천천히 흐른다. 건물 안으로 날아온 새를 구하려던 남자는 발을 헛디뎌 안경을 깨뜨리고 강의실로 돌아가지 못한다. 밖으로 나온 여자가 남자의 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밖으로 나간다. 빈자리들이 이상한 통각을 띠고 그녀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160쪽) 남자의 시간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자신의 시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39쪽) 두 사람의 대화는 남자의 빈자리가 발생시키는 시간의 진동을 여자가 감지하면서 시작된다. 이 시간의 감각은 파동의 형태로 전달된다. 남자는 여자의 구두 소리를 듣고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려 자신이 있음을 알린다.(“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 진동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133쪽) 여자가 ‘들은’ 것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몸 전체, 피부 세포에 닿아 그것들을 흔드는 진동이다. 그들의 대화는 시신경에 의한 시선도, 청신경에 의한 소리를 통해서도 아닌 바로 이 촉각의 소노그래피(sonography)를 통해 이루어진다.4) 시인이 존재들에게 엑스선을 투과시켜 백골들의 영상을 얻어낸다면(“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해부극장 2’)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는 소노그래피를 통해 육체의 말랑한 조직들, 피부나 혀, 심장에서 반향된 영상을 보여 준다. 엑스선은 말랑한 것들을 찍을 수 없고 초음파는 뼈를 투과할 수 없다. 통증은 말랑하고 붉은 것의 감각이다. 뼈에는 통각 세포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뼈가 육신을 가졌을 적의 고통의 서사다. 소노그래피의 언어는 존재 자체가 내뿜는 파동이므로 소리로 쪼개지지 않는 언어다. 이것 역시 몸으로부터 유래하지만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55쪽) 가는 목소리가 갖는 폭력성은 없다. 여자가 말 대신 택한 시선의 언어 역시 그런 점에서 비육체적이다.(“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55쪽) 이때 접촉의 감각은 시각이나 청각이 배제된 상태의 대리보충, 즉 실제 피부의 감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5) 소노그래피의 촉각은 오감의 유무와 관계없이 존재가 뿜어내는 살아 있음의 파동, 즉 여자가 말한 ‘시간’의 감각이다. 한강은 특유의 독특한 문체로 두 인물 사이에 반향되는 소노그래피를 형상화한다. ‘희랍어 시간’에는 큰따옴표나 작은따옴표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자유간접화법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자유간접화법은 문장 안에서 형식적 서술자와 서술 내용이 담는 의식의 주인을 불일치시키며 서술자보다 인물을 부조한다. 그러나 한강의 문장에서 3인칭 화자는 남자와 여자의 의식 이면으로 유보되지 않는다. 따옴표 없이 곧장 전해지는 말은 인물의 목소리를 3인칭 서술자와 동일한 층위에 위치시키며 그들 간의 위계를 무너뜨린다. 모든 소리는 세계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자기 안으로 시를 틈입시킨다. 인용부호에 의해 절단되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말뭉치(corpus)를 만들어 내는 서술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3인칭 서술자 각각의 인격을 부각한다. 목소리들이 어우러지는 한 공간-소설 안에서 인물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시가 되고 그들의 모든 말은 행과 연의 형식으로 배열된다. ‘희랍어 시간’은 세 인격의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 풍경(soundscape)이다.6)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 그늘진 그의 얼굴을, 그녀는 지금 온 힘을 다해 건너다보고 있다.(169쪽) 촉각의 소노그래피가 만드는 소리 풍경 안에서 듣는 일은 곧 보는 일이며, 보는 일은 곧 듣는 일, 존재의 파동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진동은 소리가 글자로 박제되는 것과 달리 발생하고 감각되는 즉시 사라진다.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소노그래피는 존재를 파열시키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다만 투명하게 통과한다. 모든 인물의 말이 인용부호 없이 제시되지만 특히 여자의 목소리는 서사 세계 안에서도 음성화되지 않는 가장 시적인 목소리다. 여자의 문장들은 기울어지면서 남자의 목소리와 구분된다.7) 19장 ‘어둠 속의 대화’ 후반부에는 이렇게 목소리가 뒤섞이면서 두 사람의 파동이 중첩되는 대목이 있다.8) 서사 표층에서 실제로 발화되는 음성은 남자의 목소리뿐이므로 소노그래피가 아니라 일반적인 감각으로 읽어낼 경우, 소설은 오직 남자의 독백으로만 가득 찬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각자가 소환하는 기억의 단위들로 교환되며 소리가 아닌 언어, 파동의 접면들이 교차하며 이루어진다.(“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155쪽) 언어의 칼금을 막아내기 위해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소설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겹치며 일으키는 간섭을 현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 독한 취기 같은 피로가 그녀의 의식을 둔하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인 것처럼, 아주 먼 곳에서부터 토막토막 끊긴 채 울려온다.(166쪽) 여자의 파동은 남자에게로 전해진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려 애쓴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려 애쓴다.(167쪽) 여기서 남자의 응답은 여자의 파동과 똑같은 기울임체로 발화된다. 두 존재가 고막을 통해 소리를 교환하지 않고도, 살을 맞대지 않고도 그 무엇보다 깊은 층위에서 교감하는 장면이다.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과거로 여러 통의 편지를 쓰던 인간은 신의 고통 안에서 그와 함께 현재적으로 공명한다. 이 장면에서 남자의 목소리는 여자의 그것으로 중첩되며 같은 기울임체로 서술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남자의 그것으로, 다시 말해 기울어진 목소리가 평평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여자는 신성의 체현자이기 때문이다.(“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78쪽) 구원의 빛이 침묵의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온다. 나를 만지지 마라 이제, 소설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이 제시된다. 인간의 혼이 파괴되지 않는 이유는 고통을 감각하는 신성이 서로에게 중간태인 동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어에는 수동태와 능동태가 아닌 제3의 태, 중간태가 있다.(18쪽) 중간태는 어떤 행위가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게 했던 행위가 다시 주체로 돌아오는 이 재귀적 운동은 소노그래피의 언어가 보이는 양태다. 소노그래피의 방식은 그 자체로 중간태적 추론이다. 그는 대상에게로 뻗어 나간 자기 파동의 반향을 소노그램으로 읽어 낸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원인을 축자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일이다. 아무리 유사한 경험을 하더라도 고통은 결코 동일한 정도로 감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와 같은 유전질환으로 인해 시력을 이미 잃은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동일한 조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주파수를 오롯이 피부로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의 삶을 추체험하는 일이다. 가령, 남자가 곧 실명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자기 눈에 갖다 대며 “이건 소파고 이건 책장이야. (…) 이렇게 걸어도 안 넘어질 수 있어.”(146쪽)라며 일부러 왔다 갔다 하던 여동생처럼 말이다. 동생은 오빠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닥칠 ‘어둠’이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을 거라는”(147쪽) 위로를 보낸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은 내가 영영 닿을 수 없는 점근선의 영역이다. 반면 마지막 고해, 요아힘과의 이야기는 남자 역시 언어의 육체성이 자아내는 폭력을 경험했음을 들려준다. 그 폭력은 곧 타인의 고통을 주체의 자기동일성 안으로 포획하여 해석해 버리는 일이다. 요아힘은 남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욕망을 타인과 자신의 고통 안에서 어떻게 겹쳐 두어야 하는지 모르므로 남자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그는 고통의 완전한 극복과 단절을 믿는다. 시한부 선고의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10쪽) 말하는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꼭 같은 경험을 몸의 기록으로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어둠과 죽음의 병실을 물리친 그에게 생의 감각은 생동하는 육체의 폭발적인 감각,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다. 요아힘은 여자에게는 고통이었던 육체적인 것과의 접촉을 갈망한다. 남자가 어둠을 품은 이라면 요아힘은 빛의 질서를 품은 이다. 남자가 비논리와 모순을 껴안는 문학을 사랑한다면 요아힘은 사고를 명징하게 자르는 철학을 사랑한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났다고 믿는 이의 강한 확신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누구보다도 눈을 멀게 만든다. 자신이라면 완전한 어둠이 다가올 그때를 위해 점자를 배워 두겠다는 철학자의 명랑한 조언은 남자의 신앙인 소멸의 이데아를 산산조각 낸다. 다시 한번, ‘백치처럼’ 순진한 이 조언은 남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요아힘에게 그것은 단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118쪽)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118쪽) 빛이 소멸한 세계에서 앞으로의 생을 계속해야 하는 남자에게 요아힘의 논증, 어둠 속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반박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꺼트린다.(“네 말을 들은 순간, 덧없는 전 세계가 빛을 잃었지.” 118쪽) 그래서, 점자를 통해 남자와 진정으로 닿기를 바라던 요아힘의 욕망은 언어의 폭력적인 육체성과 실상 같은 것이다. 남자는 요아힘으로부터 깨닫는다. 자신이 독일에서 여자에게 던진 사랑의 말, 너는 나의 목소리가 필요할 테니 같이 살게 될 것이라는 그 고백이 폭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받은 상처로부터 타인에게 준 상처를 깨달은 마리아는 이제 눈앞에 현전한 예수ㅡ언어의 육신을 본다. 신과 인간의 목소리는 구별되지 않고 한데 뒤섞인다. 남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의 파편들,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희랍어 시간의 여자 그 자체다. 그녀의 이름은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100쪽)이다. 고통받는 두 인간의 신성은 한데 섞이고 소노그래피는 중첩된다. 말할 수 없는 이와 볼 수 없는 이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해는 공통원소 없는 그 존재들의 배면에서 투명한 파동을 통해 전해진다. 파동은 한 곳으로 수렴하지 않고 서로의 몸 안을 투과하며 지나간다. 이제, 신은 요아힘과는 다른 ‘접촉’의 방식으로 남자를 구원하고 눈으로 목이 막혔던 그녀 역시 그 구원으로 인해 부활한다. 따로따로 제시되던 목소리는 한 연으로 묶이면서 말을 주고받는 직접적인 대화의 국면에 도달한다. 1인칭 단수 화자들은 ‘우리’를 직감한다.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167쪽) 구원은 끝없이 멀어지는 존재가 내 안으로 들이닥쳐옴을 느낄 때 일어난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는 말을 남기며 떠나간다.(요한복음 20:17) 멀어지는 자신을 붙잡지 말라는 이 말은 타자를 주체의 자기동일성 안으로 납치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타자를 몇 번이고 무한히 떠나보냄으로써 그의 존재를 부조하라는 율법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부축해 그의 집까지 데리고 온 여자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바닥에 쓴다. 그녀가 그에게 최초로 대답한 말은 떠난다는 말이다.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171쪽)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이 접촉은 소설이 시종일관 지양해 온 폭력적인 접촉과 다르다. ‘어둠 속 대화’의 절정 이후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두 몸의 접촉 이후 다만 ‘모른다’는 진실의 무자비한 범람만이 남자를 압도한다.(“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183쪽) 그가 그녀를 안자마자 뒤이어 열네 번의 ‘모른다’가 연속해서 등장한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출 때까지도 둘의 접촉은 항구적인 비접촉이 되는 것이다. 강력하게 현전하는 단 하나의 진실은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184쪽)나는 ‘시간’이다. 마리아는 이제 떠남 속에서 빛이 아닌 어둠을 본다. 이때의 ‘봄’은 시각과 무관하게 생의 파동을 온몸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적을 의미하지 않는다.9) 그것은 죽음 안에서 떠나가는 생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구원은 영생이 아니라 떠나감의 현전 안에서 일어난다. 보르헤스가 말한 시간-존재를 태우는 불(122쪽)이 여자와 남자를 통과하고 나면 새는 날아가고 백골만이 남는다. 개별 존재의 신성이 육신 속에서 체현된 것이 새라면 죽음 이후부터 그 신성은 뼈들이다. 플라톤이 말했듯 진실에 대한 앎은 전생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상기할 뿐이다. 전생의 기억은 시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의 숲에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 마침내 당신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낼 때까지, 입술 사이로 둥글고 가냘픈 물거품이 새어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185~186쪽, 21장 ‘심해의 숲’) ‘심해의 숲’의 다른 이름은 ‘해부극장 3’으로 부활 이후 무덤가에 나란히 누운 여자와 남자의 그림이다.10) 죽었던 신과 고통받는 인간이 함께 나란히 누울 수 있다면, 인간의 신성은 더는 논증이 불필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인간의 혼이 파괴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의 신성과 달리 인간의 신성은 죽음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고통을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다만 죽음 안에서 옆에 누운 다른 이의 뼈를 쓰다듬는 일이다.11) 구원을 바라던 신은 부활하여 드디어 입술을 연다. 시종일관 남자의 목소리를 사용하던 1인칭 화자는 마지막 장 ‘0’에서 오직 한 번 여자의 목소리로 발화한다. 현전하는 이 말씀, 로고스는 음성도 문자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도 파괴하고 밀어내지 않는 언어, 촉각으로 전해지는 파동의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는, 우리는,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어긋나는 방식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결국, 구원의 반증은 ‘우리’라는 단어다. 그래서 소설은 ‘0’의 끝에서 다시 ‘1’로 돌아간다. 신은 말한다. 에모스, 에메테로스. 나의, 우리들의.(10쪽) 역설의 구원 한강의 문학에서 시간은 정말로 환(環)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희랍어 시간’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읽은 이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는 눈사람이다.(‘작별’12)) 언 몸이 진눈깨비로 흩날리며 조금씩 사라지는 중이다. 눈사람은 남자가 갈망하던 소멸의 이데아의 현현이면서 새와 백골의 중간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많은 것을 안다. 그는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몸 안의 심장을 얼리는 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150쪽)다고 확신한다. 아이와 애인과 가족과 작별하며 그가 마주하는 최후의 질문은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150쪽)이다. 이는 ‘희랍어 시간’이 던지는 질문과 같은 물음이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13)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최후까지 남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눈(雪)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소멸하는 것처럼 한강의 인물들은 사랑할수록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나 바로 그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서로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작별’, 133쪽)가 된다. 나와 당신은 같아질 수 없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나를 떠나는 중이므로 나는 당신과 연결된다. 눈사람은 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실체는 다만 촉각의 소노그래피뿐이며 그것은 “변함없이 진동하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134쪽)음을 안다. 그리고 이 파동을 타고 전해지는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134쪽)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랑은 강렬한 접촉이 아니라 다만 끝없이 멀어지는 ‘사이’에서 전해진다. 언어는 이때 비로소 완전한 순수에 도달한다. 의미는 분할되거나 상실되지 않는다. 따옴표로 분절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행과 연을 만들면서 소설 속에 시를 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죽음 안에서 삶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작별’과 ‘희랍어 시간’의 마지막 장면이 모두 두 존재의 입맞춤으로 끝나는 것은 붉은 혀와 입술이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일 테다. 우리는 서로를 만지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진실을 감각한다. 나의 파동이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살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뼈, 시간의 불에 타고 남은 마지막 눈의 결정이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기에 당신은 나를 구원한다. --------------------------------------------------------------------------------------------- 1) 시집의 해설을 쓴 비평가 역시 한강의 시들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의 화자들을 ‘희랍어 시간’ 속 남자와 여자로 잠시 연결하며, ‘희랍어’를 “순수한 언어의 능력에 집중하는 소설”이라 평한 바 있다. 조연정, 해설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42~143쪽. 2)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라고/ 견디며 말한다” 한강, ‘해부극장 2’, 한강, 위의 책. 3)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한강, 위의 글. 4) 소노그래피는 초음파를 이용해 시각 영상을 재현하는 기술이다. 5) 양현진은 실명과 실어가 몸짓, 촉각에 의한 소통에 주목하게 한다고 본다. 그러나 피부의 직접적인 접촉과 몸짓만을 대화로 보는 것은 국소적인 독해다. 소설에서 시각과 청각이 배제될 때 도드라지는 것은 시간, 즉 파동의 흐름이다. 양현진, ‘한강 소설의 촉각적 세계 인식과 소통의 감수성’, ‘한국문학이론과비평’, 70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16. 6) 사운드스케이프는 여러 가지 소리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듣는 영상’으로 단지 소리가 만드는 공간적 환경 그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지각하는 청취자의 지각 속에서 그려지는 풍경이다. 7) 한강은 대상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기울임체를 사용한다. 시집에 수록된 ‘해부극장 2’의 백골과 ‘조용한 날들 2’에 등장하는 달팽이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타난다. “(건드리지 말아요) (…)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8) 서로 다른 두 개의 물질이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파동은 동일한 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두 파동이 동일한 지점에서 교차할 때 일으키는 상호작용을 파동의 중첩 현상이라 한다. 9)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믿는 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꿋꿋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장뤼크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37쪽. 10) 한강의 시 ‘해부극장’ 연작은 두 편뿐이지만 소설의 ‘심해의 숲’은 남자가 쓰는 또 한 편의 시다. 11) 낭시는 예수의 부활을 수직 변화로 이해하지만 소설이 말하는 인간의 신성은 수평적이다.“이 ‘자세’가 (…) ‘부활’을, 다시 말해 ‘들어올림’이라는 사태를 만든다. (…) 무덤의 수평성과 직각을 이루는 수직성으로서의 들림 혹은 일으켜 세움인 것이다.” 장뤼크 낭시, 위의 글. 12) 한강, ‘문학과 사회’, 2017년 겨울호, 문학과지성사. 13) 한강, ‘회상’, ‘서랍에’, 문학과지성사, 2013.
  • [책꽂이]

    [책꽂이]

    다큐의 기술(김옥영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40년간 다큐멘터리 작가와 제작자로 현장을 지킨 저자가 다큐멘터리에 대해 쓴 첫 입문서. 다큐멘터리는 ‘내가 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한 문장으로 새로 정의된다. 자신의 관점과 스타일을 만들어 가려는 다큐 창작자는 물론 일반 독자에게도 본질적 안내서가 된다. 423쪽. 1만 8000원.클라우제비츠와의 마주침(김만수 지음, 갈무리 펴냄) 19세기 프로이센 전쟁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전쟁론’은 명실상부한 군사학의 최고 고전이다. 이 책은 지난 60년간 한국 사회에서 전쟁론이 어떻게 잘못 이해됐는가를 담았다.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명제는 정치를 계속하려면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740쪽. 3만 9000원.감염병 시대, 도시 변화의 방향을 묻다(강명훈 외 18명 지음, 서울연구원 펴냄) 코로나19로 제기되는 도시 변화와 각종 사회 의제를 분석하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직결된다는 인식을 주면서 공동체주의의 실용성을 확인하게 해 줬다는 분석을 담고 있다. 432쪽. 1만 5000원.남극에서 대한민국까지(김태훈 지음, 푸른향기 펴냄) 사진작가인 저자가 아내와 함께 남극 탐험을 한 뒤 배로 귀국하던 도중 코로나19 확산으로 선실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체험기다.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한 군상과 악몽, 에고이즘과 휴머니즘이 공존하는 실화를 담았다. 276쪽. 1만 5000원.시장의 속성(레이 피스먼·티머시 설리번 지음, 김홍식 옮김, 부키 펴냄) 시장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며 우리의 후생을 좌우하는가. 시장 설계의 역사와 2차 세계대전 이래 시장이 밟아 온 길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학자들이 시장을 어떻게 연구하고 정교하게 다듬었는지, 아마존·구글·애플 등이 어떻게 시장을 선도하는지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 준다. 352쪽. 2만원.계속되는 이야기(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문학동네 펴냄) 네덜란드의 대표 작가이자 유럽 문단의 거장 세스 노터봄의 걸작 소설. 죽음의 예감 속에서 회상의 여행을 시작한 한 남자의 끝없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여 준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주제 ‘죽음’을 두고 독자의 오감을 자극한다. 160쪽. 1만 3000원.
  • 한강·최승자 등 여성시인 4인 시집, 새 디자인으로 재출간

    한강·최승자 등 여성시인 4인 시집, 새 디자인으로 재출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을 비롯해 여성 시인 4명의 시집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됐다. 문학과지성사는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최승자·허수경·한강·이제니 시인의 시집 1편씩을 주목받는 여성 북디자이너 김동신, 신해옥, 나윤영, 신인아의 디자인을 입혀 새롭게 출간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에 선보이는 시집은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1981), 고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1992년),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 이제니 시인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이다. 이근혜 문학과지성사 주간은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폭넓게 사랑받은 여성 시인들을 선별했다”면서 “표지만 바꾼게 아니라 모바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종이책의 질감을 맛보고 책 읽은 재미를 더하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시집인 ‘이 시대의 사랑’은 유신과 군사독재의 억압 속에서, 정통적인 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뿜어올린다. 이 시대가 부서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사랑과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언어적 결단이다. 격동의 19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처절한 분노로, 치명적인 중독으로, 그리고 가슴 먹먹한 이름으로 자리한다.●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2018년 작고한 고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은 세간의 비참과 내면의 허기를 노래해온 시집이다. 일말의 포즈 없이 진정성을 향한 열망으로 씌어진 시편들은 하나같이 버림받다, 아프다, 무너지다 같은 절망적 어사들로 짜여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 또한 드러낸다. 시를 읽은 일은 삶의 지속이 곧 상처를 증식시키는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수용하며 나아가는 시적 고행을 조심스레 뒤따라보는 과정이 된다.●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주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이 당선돼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가 등단 20년 차를 맞은 2013년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중 60편을 추려 묶어낸 시집이다. 부서지는 육체의 통각을 올올이 감각하면서도 쓰고 사는 존재로서 열정에 불을 지피는 시적 화자의 거대한 생명력은 읽는 이에게 무한한 영감과 용기를 북돋는다.●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이제니 시인은 “어제의 여백을 돌아본다. 상실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들, 오래 품고 있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은 시에서 문장들 사이사이 문득 끼어드는 어떤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그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사람, 헤쳐온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분노했다, 어긋난 윤리… 강해졌다, 저력의 여풍… 탄생했다, 코로나 문학

    분노했다, 어긋난 윤리… 강해졌다, 저력의 여풍… 탄생했다, 코로나 문학

    2020년의 한국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 시대의 문단, 창작 윤리를 치열하게 질문했다. 여성 작가들의 강세가 여전한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을 문학에 담는 작가들의 노력이 보였다.●이상문학상·김봉곤 사태, 문학 윤리를 묻다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연초마다 문학 애독자들을 설레게 했던 이상문학상이 일으킨 사태의 파장은 길었다. 우수상 수상 예정자였던 김금희·최은영·이기호 작가가 저작권 양도에 문제 제기를 하며 수상을 거부해 불거졌고, 이후 전년도 대상 수상자인 윤이형 작가의 절필 소식이 알려졌다. 작가·시인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 운동을 벌이며 사태가 커졌다.7월에는 사적 대화를 소설에 무단으로 인용, 사생활 침해 논란을 낳은 김봉곤(35) 작가의 책이 전량 회수 및 환불 조치에 들어갔다. 김 작가는 이 작품으로 수상한 제11회 젊은작가상을 반납했다. 이를 기점으로 ‘오토 픽션’(자전 소설)에서 실제와 허구는 어디까지 구현돼야 하는가를 놓고 논의가 일기도 했다. 출판·창작 윤리에 대한 활발한 문제제기는 세대교체의 한 흐름이라는 게 문학계의 평가다. 노태훈 문학평론가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문학을 신비화한 예술로 보기보다는 계약에 따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행위라는 인식들이 퍼져 있다”며 “관행적인 부조리를 더는 이어 가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젊은 여성작가 강세… 청소년 소설 인기 상승 지난해 문학계를 이끈 장르가 에세이였다면, 올해는 소설이었다. 이달 교보문고가 발표한 2020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 내에 소설 분야만 17종이 포함됐다. 특히 한국소설과 청소년소설의 반향이 두드러졌다.한국소설의 약진은 젊은 여성 작가들이 견인했다. 정세랑 작가는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선보인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을 비롯해 교보문고의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30위 내에 3종을 올렸다. ‘영 어덜트 소설’(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보는 소설)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창비), 신예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은 청소년, 성인 독자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청소년들의 개학이 미뤄지고, 학원도 휴원하면서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이들 소설의 판매고를 올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전자책으로 먼저 출간됐다 종이책으로도 나온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20만 부 이상 출고되며 신예 작가의 저력을 보여 줬다. ●이 시대를 선명하게 담은 ‘코로나 문학’ 코로나19는 작가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이른바 ‘코로나 문학’을 낳았다. 코로나19를 소재로 한 소설 앤솔러지, 기획 시집, 수필집들의 출간이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알마)와 ‘혼자서는 무섭지만’(보스토크프레스)은 코로나19로 위축된 일상을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품집이다. 시인과 소설가, 에세이스트, 그림 작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필진이 참여해 감정 교류를 시도했다. 코로나19가 보여 주는 사회 모순을 고발하는 소설 앤솔러지로 젊은 여성 작가 네 명(조수경, 김유담, 박서련, 송지현)이 써내려간 ‘쓰지 않을 이야기’(아르테)도 있다. 김초엽, 듀나, 배명훈 등 SF(과학소설) 작가들은 전염병을 소재로 미래 사회를 떠올린 앤솔러지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문학과지성사)를 쓰기도 했다. 18개국 56명의 시인들도 코로나19 극복을 노래하며 프로젝트 시집 ‘지구에서 스테이’(앤드)를 펴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어린이 책] 나의 동물 친구들 지켜주고 싶어요

    [어린이 책] 나의 동물 친구들 지켜주고 싶어요

    아빠의 사업 실패로 시골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 살게 된 현우. 옆집 할머니가 집을 비우게 되면서 얼떨결에 그 집 닭과 거위들을 맡아 키우게 된다. 달걀 판 돈을 다 가지라는 할머니의 제안에 홀딱 넘어가지만 난생처음 닭과 거위를 돌보면서 하루하루 전쟁터가 따로 없다. 돈을 모아 읍내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자는 생각도 잠시, 매일 모이를 주고 눈도 맞추며 어느새 현우는 동물들과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는 조류독감이라는 대재앙이 닥쳐온다.책 제목이기도 한 ‘위풍이와 당당이’는 현우가 거위들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자 전염병이라는 난제 앞에 현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엄마는 서울에 남고, 아빠는 과수원 일로 바쁜 일상에서 현우가 정을 붙일 수 있는 존재들을 위협하는 질병. 위풍이와 당당이 그리고 닭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현우는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할머니와 아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은 도시에 살던 아이가 동물과 교감하다가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현실과 부딪히며 겪게 되는 혼란과 슬픔, 어른들과의 갈등, 생명에 대한 경외를 그렸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어린이들이 자라서 법을 만들고 정책을 세울 때 위풍이와 당당이를 떠올리고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법을 만들면 좋겠다’고 썼다. 알면 지나칠 수 없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동물들을 ‘아는 존재’로 여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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