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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종 위기 바나나… 단일 품종이 부른 위험

    멸종 위기 바나나… 단일 품종이 부른 위험

    바나나 제국의 몰락/롭 던 지음/노승영 옮김/반니/400쪽/1만 8000원인류가 수확해 먹는 식물 가운데 현재 멸종이 가장 임박한 작물이 ‘바나나’다. 값싸고 영양과 맛도 좋아 대형마트에 가면 수북이 쌓여 있는 바나나가 멸종 위기종인 건 역설적이다. 자연 그대로 바나나를 놔뒀다면 이런 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맛과 크기, 향 등 유전자가 동일한 단일 품종인 ‘캐번디시’뿐이다. 50년 전에 먹던 바나나 품종인 ‘그로미셸’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 향과 당도가 훨씬 진해 현재 판매 중인 ‘바나나 우유’ 맛과 비슷했다. 캐번디시는 1960년대 치명적인 곰팡이균이 일으킨 파나마병이 그로미셸 종을 멸종시키면서 인위적으로 개발된 ‘클론 바나나’다. 곰팡이균에 강한 내성과 대량 재배가 되는 상품성으로 인해 지구에서 단 하나의 품종이 됐다. 바나나의 비극은 이 대목에서 연유한다. 파나마병을 일으킨 곰팡이균이 변종 바이러스로 진화하면서 캐번디시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품종이 개발되지 않는 한 바나나는 인류의 식탁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학계는 멸종 기한을 향후 15년으로 예측한다. 롭 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응용생태학 교수가 쓴 이 책은 인간의 욕망이 자연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냉정하게 짚는다. 인류가 명명한 30만 종 이상의 현생 식물 중 실제 섭취하는 열량의 80%가 단 열두 종의 작물에서 나온다. 콩고 분지 사람들은 열량의 80%를 고구마 같은 덩이뿌리 작물인 ‘카사바’ 한 종에만 의지한다.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도 럼퍼감자라는 한 종에 의지하다 감자역병의 발병으로 생긴 비극이다. ‘인류 운명의 날 저장고’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스발바국제종자저장고 같은 종자은행도 이 같은 멸종 위기 생물들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다. 각 개인도 힘을 보탤 수 있다. 식량을 덜 낭비하고, 육류 섭취를 줄이며 획일화된 식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분의 한 입은 야생의 자연을 위협하지만 그와 동시에 야생의 자연에 의존한다”는 문장으로 책을 끝맺는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9개 대기업, 중소 협력사 ‘상생 지원’

    9개 대기업, 중소 협력사 ‘상생 지원’

    삼성, 1조 펀드로 최대 90억 저리 대출 현대 500억·LG 8581억·SK 6200억 하도급 대금 인상·의료비·환경 등 개선 삼성전자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 안 돼” 대기업들이 각 사별 최대 1조원의 상생펀드를 조성해 중소 협력사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협력사에 하도급 대금도 올려준다.공정거래위원회는 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대·중소기업 간 상생방안 발표회’를 가졌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 LG디스플레이, 포스코, SK하이닉스, SK건설, KT, 네이버, CJ제일제당 등 9개 대기업과 만도(현대·기아차 1차 협력사), 대덕전자(삼성전자 1차 협력사) 등 대·중견기업 150개사가 참석했다. 삼성그룹은 1조원의 상생펀드를 만들어 협력사당 최대 90억원까지 저리 대출을 지원한다. 5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2차 이하 협력사에 30일 안에 현금으로 대금을 주는 1차 협력사에 무이자 대출을 해준다. 최저임금 인상 부담 완화를 위해 1차 협력사 하도급 대금을 700억원 증액했다. 협력사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400억원의 기금도 출연한다. 삼성전자는 협력사에 특허 2만 7000여건을 개방한다. 현대·기아차도 협력사 인건비 부담 완화를 위해 500억원의 상행협력 기금을 만들어 자금을 무상 지원한다. 1000억원의 신규 기금을 조성해 2·3차 협력사에 시중 금리보다 2% 포인트 낮게 빌려준다. LG그룹은 협력사 경영안정 기금을 올해 8581억원으로 확대한다. LG디스플레이는 상주 협력사 직원이 암이나 희귀 질병에 걸리면 본사 직원과 동일하게 의료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SK그룹도 협력사 경영안전 기금을 지난해 4800억원에서 내년 6200억원까지 늘린다. SK하이닉스는 임직원 임금 인상분의 20%와 같은 금액을 기금으로 만들어 협력사 임직원 임금 인상과 의료복지 지원에 쓰기로 했다. 임직원 인센티브의 10%를 협력사에 주고 근로환경 개선에 사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한편 이날 김기남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사장)은 “우리의 20년, 30년 노하우가 들어 있는 보고서를 공개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앞서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반박이다. 삼성전자는 일부 산업재해 피해자 등이 고용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제기하자 공개를 막기 위해 법원에 행정소송을 내고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는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시론] 노래의 공유, 시각의 공유/윤중강 음악평론가·연출가

    [시론] 노래의 공유, 시각의 공유/윤중강 음악평론가·연출가

    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남북 합동공연이 잘 끝나서 참 다행이다.남측의 공연단이 그간 평양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했지만 늘 환대를 받은 건 아니다. 1985년 9월 고향방문단과 함께 남측 예술단이 평양에서 공연을 했을 때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원로 가수 김정구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열창했다. 남쪽에선 ‘눈물 젖은 두만강’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연결시킨다. 북쪽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과 북한 주민의 가난한 실상을 강조한 라디오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 방랑기’ 방송이 시작될 때면 늘 이 노래가 나왔다. 입장을 바꿔 북측에서 남측으로 내려와 공연하면서 우리(대한민국)를 자극하는 노래를 불렀으면 어땠을까. 우리도 상대의 무지와 무례에 격분했으리라. 희한하다. 노래란 게 그렇다. 같은 노래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노래의 의미가 크게 산다. 이번 평양에선 강산에가 ‘라구요’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김정구의 노래에서 “두만강 푸른 물”을 가져왔으나 실향민의 부모를 등장시켜 통일을 노래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공연에 강산에가 참여한 건 참 다행이다. 그의 노래 중 ‘명태’가 있다. ‘명천 사는 태서방’이 등장하고, ‘함경도 사투리’로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라구요’에 이어 ‘넌 할 수 있어’도 불렀다. 강산에가 ‘선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전해진 것 같다. 강산에는 노래했다. “세상이 너를 무릎 꿇게 하여도 당당히 네 꿈을 펼쳐 보여줘.” 우리 민족이 남북을 떠나 모두 ‘굴하지 않는 보석 같은 마음’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2005년 8월 조용필은 평양에서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절대 안 부르기로 유명한 ‘가왕’이지만 북측의 요구에 이 노래를 불렀고 이제는 남북이 모두 부르는 대표곡이 됐다. 이번에 최진희가 ‘뒤늦은 후회’를 부른 것도 참 잘한 일이다. 남과 북의 연결고리가 됐을 뿐 아니라 남쪽에서는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장덕의 숨겨진 노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은 있으니까요.” 다시 들어 보니 이 가사가 마음에 파고든다. 남북은 모두 한반도의 이러한 장기적인 분단에 대해 ‘내 탓’으로 돌리진 않는다. 남북은 각각 상대의 체제로 인해서 분단이 고착화돼 가고 있다며 서로 ‘네 탓’으로 돌렸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남북이 ‘네 탓’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다. 이번 평양 공연에 관한 언론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국 시간’이란 말이 자꾸 걸린다. 같은 한반도에 사는데 30분의 시차가 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북한은 표준시를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변경했다. 노래가 ‘상황’과 ‘해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듯이 ‘표준시’ 또한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도 북한처럼 표준시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1908년 4월 1일 대한제국이 표준시를 처음 시행할 때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 땅에 맞춘 동경 135도가 됐다. 독립 이후 이승만 정권이 127도로 바꿨으나, 박정희 정권이 1961년 다시 135도로 변경했다. 기대한다. 대한제국 표준시에 의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기대한다. 이번 공연이 한반도의 양쪽이 서로의 시각(視覺)과 시각(時刻)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뜻깊은 첫걸음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우리는 하나”를 표방한 공연이었다. 이젠 남과 북은 서로서로 사안에 따라 사이좋게 한발씩 물러나거나, 한발씩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남북 교류가 여러 장르를 통해서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남북은 이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숨을 쉬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설 거다.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는” 기쁨을 경험하게 되길 바란다. 다행을 넘어 행복을 말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행복하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글을 하루빨리 쓰고 싶다.
  • [지금, 이 영화] 레이디 버드

    [지금, 이 영화]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세어셔 로넌)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본인을 명명한다. “레이디 버드”(LADY BIRD).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레이디버드(ladybird)라고 붙여 쓰면 ‘무당벌레’ 혹은 ‘연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레이디 버드를 ‘아가씨 새’로 직역하고 싶다. 진부하게 들리겠으나, ‘데미안’의 저 유명한 구절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자칭 레이디 버드는, 기성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살려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레이디 버드는 두 개의 세계에 맞선다. 하나는 그녀의 고향 새크라멘토다. 이곳은 캘리포니아주에 속해 있다. 그러나 같은 행정 구역인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 영화 오프닝에 아예 이런 문장이 나올 정도다.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자는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 봐야 한다.” 새크라멘토 출신 작가 존 디디온의 말이다. 한마디로 새크라멘토는 흥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심심하고 지루한 동네라는 이야기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레이디 버드가 기어코 뉴욕 같은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그녀가 맞서는 다른 하나의 세계는 엄마 매리언(로라 멧캐프)이다. 매리언은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겠다는 레이디 버드를 향해 차갑게 대꾸한다. “넌 그런 학교 못 가. 그냥 시립대학에나 가. 그런 정신 상태로는 시립대 아니면 감방밖에 못 가. 그런데 들락대다 보면 자립 방법은 배우겠지.” 아무리 평소 딸의 행실을 잘 알고 있어도 지나치다 싶은 언사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평범함을 거부하는 레이디 버드의 성품이 어디서 왔겠는가. (이 대화는 매리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이루어졌고, 레이디 버드가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면서 끝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정말로 죽을 만큼 싸우는 것이다) 모전여전이다. 이 영화는 이처럼 두 개의 세계에 대항하는 레이디 버드의 분투기를 담아낸다. 한데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거리도 던진다. 이를테면 ‘알은 새를 가두기만 하는, 그러니까 산산이 부숴버려야 할 세계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레타 거위그 감독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뒤로 가면서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다. 새가 아니었던 어떤 생명체가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지켜준 세계가 바로 알이라는 사실이다. 새가 알을 깨야 하는 것은 맞다. 그래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 하나 그렇다고 새가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해 왔던 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다. 새크라멘토―엄마라는 알 없이는 레이디 버드도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것을 체감한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기묘년인 1519년(중종 14년) 12월 20일 능주에는 밤새 내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목욕을 마친 뒤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마지막 소회를 담담히 써 내려 갔다.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였고 愛君如愛父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憂國若憂家 밝은 해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白日臨下土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추는구나 昭昭照丹衷 -정암집 부록 권1 죽음을 앞두고 지은 시-#자신만의 길을 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김일손이 사초(史草)에다 기록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화의 빌미가 됐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이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는 훈구세력의 참소를 믿었다. 무덤에 묻힌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의 문집도 불태워졌다. 김종직 제자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김굉필과 정여창은 먼 지방으로 유배됐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던 무오사화다. 사화를 겪은 뒤로 사림의 기세가 꺾이고, 자기를 수양하는 공부보다는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힘쓰는 풍조가 만연했다. 무오사화가 있던 그해, 17세 소년 정암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 김굉필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김종직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화를 당하는 무서운 세상에 김종직 수제자인 김굉필을 찾아가 배운다는 것은 웬만한 선비도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약관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이미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는 선비의 지조를 지녔던 셈이다.#공론(公論)을 세우다 정암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데다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일찌감치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재주와 학식을 가진 그를 하늘은 초야에 묻어두지 않았다. 1515년(중종 10년) 6월 34세 정암은 성균관의 천거로 6품직에 올랐다. 정암은 벼슬에 오른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 명성만 드러나는 것을 나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반드시 벼슬길에 나가야 한다면 차라리 과거를 통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과거 시험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정암이 사간원 정언(正言)일 때, 사림 출신 신진 관료인 김정과 박상이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했다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됐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직후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에 의해 폐위된 중종의 원비였다. 정암은 언관으로서 글을 올려 사림의 공론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흥망과 가장 관계돼, 통하면 다스려지고 평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합니다.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과 백관으로부터 아래로 마을과 시장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정암집 권2 사간원에서 양사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 이 계사 덕분에 김정과 박상을 탄핵했던 모든 사람이 파직됐으며, 정암은 중종의 신임을 받게 됐다. 정암은 연산군의 독재를 겪으면서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려면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열린 언론을 통해 이뤄진 사림의 공론에 의한 정치가 바로 유교의 왕도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묵은 폐단을 개혁하다 중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정암은 벼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홍문관 실무 책임자인 부제학에 올랐다. 사림을 선도하고 임금을 도와 유교의 교화를 펼치는 자리를 맡은 그는 묵은 폐단을 개혁하는 조치로써 소격서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풀지 못하고 하늘에는 믿음을 받지 못하면서 도리어 아주 어둡고 근거 없는 곳에다 헛된 보답과 영원한 천명을 기원하니 매우 식견이 모자란 것입니다.”(정암집 권2 홍문관에서 소격서의 혁파를 청하는 상소) 소격서는 도교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다. 사교(邪敎)를 통해 복을 비는 것은 합리주의와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교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중종은 소격서가 선대부터 대대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폐지할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폐단을 개혁해 순수한 유교 국가를 실현하려는 정암의 굳은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임금과 신하가 꼬박 한 달 동안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소격서가 마침내 혁파됐다.#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다 정암은 바름과 부정함,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격했다. 임금에게 인의를 실천하는 바른 군자와 사욕을 추구하는 부정한 소인을 밝게 분별해 달라고 요구했다. “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비록 바름으로 부정함을 억제하더라도 부정함이 바름을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목을 가지고 보더라도, 잡초와 잡목을 비록 호미로 열심히 제거해도 여전히 무성합니다만, 지초와 난초 같은 아름다운 화초는 날마다 북돋아 줘도 도리어 시들고 맙니다. 부정함이 쉽게 이기고 바름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초목에 비유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규명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셔야 할 것입니다.”(정암집 권4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계사) 그는 국가가 병든 근원에 사리사욕만을 좇는 훈구세력이 있다고 봤다. 부정함을 바로잡는 일단의 조치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을 개정할 것을 청했다. 정국공신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였다. 훈구세력들이 자기 친인척 중에 공이 없는 사람도 마구 끼워 넣어 공신이 무려 117명에 이르렀다. 훈구세력의 탐욕과 부정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국공신을 개정하자 공신에서 삭제된 자가 76명이나 됐다. 이전부터 정암이 추진하던 개혁에 불만이 쌓였던 훈구세력은 이를 계기로 정암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519년 11월 15일 야밤을 틈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경복궁 신무문으로 은밀히 입궐해 중종에게 밀계를 올렸다. 조광조 등을 위시한 사림들이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종도 정암의 급진적인 개혁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민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던 터였다. 그날로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암은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사형에서 감형돼 사흘 만에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는 한 달 뒤에 사약을 받았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기묘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부른다.#왕도정치 실현 꿈꾼 선구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정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학문에만 전념하려던 꿈을 접고 벼슬길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맞이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나의 백성을 요순의 백성처럼 만들도록 온 힘을 다한 것뿐이었다. 정암은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대해 주던 임금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만은 밝은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정암은 뛰어난 학문적인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유려한 문장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고 그에 대한 선비들의 존경심은 매우 깊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유교의 최고 목표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선조 때 윤근수가 경연(經筵)에서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을 향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조광조가 쏟은 공력의 결과입니다”라고 한 말은 후세에 끼친 정암의 영향력을 잘 보여 준다. 정암은 비록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조선이 완전한 유교 국가로 정립되는 초석이 됐던 것이다. 양기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 ■정암집 해제 정암 시신 수습한 학포 후손 주도…조선시대 세 차례 간행 정암집은 조광조의 시문집이다. 조선 시대에 세 차례 간행됐다. 처음 간행은 1681년 남원에서, 두 번째 간행은 1685년 대구에서, 세 번째 간행은 1892년 능주에서 진행됐다. 특히 세 번째 간행된 문집은 정암의 동지였던 학포(學圃) 양팽손의 후손들이 주도해 간행한 것이다. 정암이 유배됐던 능주는 학포의 고향이었다. 정암이 세상을 떠나자 학포가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학포 후손들의 정암에 대한 존경심과 학포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정암집 간행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한국문집총간에는 능주 간행본 정암집이 수록됐다. 정암집에 수록된 글 가운데 정암이 손수 지은 것은 많지 않다. 생애가 길지 않았고 사화에 희생돼 유고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록문자로는 이황이 지은 행장, 이이가 지은 묘지명, 노수신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됐다.
  • 호날두 오버헤드킥에 지단 감독 “유베 팬들도 일어나 경배하라”

    호날두 오버헤드킥에 지단 감독 “유베 팬들도 일어나 경배하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4·레알 마드리드)의 믿기지 않는 오버헤드킥이 작렬하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몸부림친 이가 있었다. 그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유벤투스 홈 관중들을 향해 일어나 환호를 보내라고 손짓했다. 선수 시절 이곳 토리노에서도 여러 차례 환상적인 골 장면을 연출했던 지네딘 지단 레알 감독이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팻 네빈 BBC 라디오5 해설위원도 마찬가지로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공이 그를 지나칠 것 같아 보이자 누구나 ‘오 오버헤드킥을 할 것 같진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빵 터졌다! 와우! 그냥 봤다. 봤어”라면서 “자연스럽지 않았다. 사람들은 호날두가 어떻게 나이들어가는지에 대해 말해왔는데 그런 플레이를 할 수 있다면 전혀 몸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타이밍이 워낙 특별하기 때문에 그걸 상상하는 일조차 특별하다”고 감격했다. 이어 “유벤투스의 많은 팬들도 호날두에게 박수를 보내려고 남아 있었다. 이 콜리세움을 완전히 자기 편으로 만든 걸 보면 천재라 불러도 좋다”면서 “여러분이 축구 역사에 다시 못 볼 멋진 골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그의 두 골은 여러 모로 기록적이다. 레알 유니폼을 입고 뛴 최근 10경기에서 21골째였고 A매치까지 합하면 14경기 27골째였다. 올 시즌 리그 36경기 39골을 기록해 유럽 5대 리그 선수 가운데 최다다. 지난 시즌 결승과 올 시즌 9경기 등 대회 10경기 연속 득점으로 16골째를 기록했다. 대회 통산 119골로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에 19골이나 앞서 있다.이날도 두 골을 헌납한 세계적인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을 상대로 11개의 유효슈팅을 날려 9골을 뽑았다. 대회 14경기 가운데 10경기에서 팀의 첫 득점은 그의 몫이었다. 대회 8강전에서 뽑은 그의 22골은 유벤투스 전체보다 하나 더 많았고, 레알 등 오직 5개 팀만이 그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올 시즌 레알의 대회 25골 가운데 14골 3도움으로 68%에 간여했다. 유벤투스와 상대한 6경기에서 9골을 뽑아 대회 어느 선수보다 특정 팀을 상대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많은 이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정작 호날두는 “팀 가즈아”라고 담백한 반응을 남겼다. 부폰은 “호날두는 각별한 챔피언이다. 리오넬 메시와 더불어, 그는 팀의 가장 중요한 승리를 꿰뚫을줄 아는 유일한 선수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펠레와 비견될 만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2002년 레버쿠젠과의 대회 결승에 엄청난 발리슛으로 대회 가장 빼어난 득점 장면의 하나로 손꼽혔던 지단 감독은 제자와 자신의 득점 가운데 어느 게 낫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오 내 골! 당연히 내 골”이라고 답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예능이야 홈쇼핑이야… ‘쇼퍼테인먼트’ 열풍

    예능이야 홈쇼핑이야… ‘쇼퍼테인먼트’ 열풍

    홈쇼핑에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더한 ‘쇼퍼테인먼트’ 열풍이 거세다. 단순히 연예인 게스트가 출연하는 것을 넘어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그대로 본뜨거나 아이돌 그룹의 새 앨범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등 콘텐츠가 전문화되고 있다. 티커머스 등 유사 판매 채널이 늘어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데다 온라인 쇼핑으로 빠져나가는 소비자를 끌어오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개성 있는 방송 콘텐츠 강화에 나섰다는 분석이다.CJ오쇼핑은 오는 12일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와 두 번째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1일 밝혔다. 슈퍼주니어는 이날 자신들이 모델로 활동하는 마스크팩 ‘에이바자르’ 판매에 직접 나설 예정이다. 지난해 11월 처음 출연해 21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 CJ E&M과의 합병안을 발표한 CJ오쇼핑은 쇼퍼테인먼트 콘텐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사 티커머스 채널인 ‘CJ오쇼핑 플러스’를 통해 다음달 말까지 개그맨 김기리, 치어리더 김맑음, 영국 남자로 인기를 끌고 있는 유튜브 스타 조쉬, 올리 등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예능, 쿡방 등을 순차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다.롯데홈쇼핑도 업계 최초로 3일 아이돌그룹 ‘오마이걸’의 신규 앨범 쇼케이스 방송을 진행한다. 문화 공연 소개 전문 프로그램 ‘엘스테이지’(L-STAGE)의 일환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최초 공개되는 오마이걸의 한정판 스페셜 앨범 및 사진 카드, 관련 기념품을 단독 패키지로 구성해 판매하고, 오마이걸이 직접 출연해 새 앨범 타이틀곡 ‘바나나 알러지 원숭이’ 무대를 처음 공개할 예정이다. 롯데홈쇼핑은 지난 29일에도 YG푸즈의 기획 상품인 ‘삼거리푸줏간 불고기세트’ 판매 방송에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 ‘아이콘’을 출연시켰다. 김종영 롯데홈쇼핑 마케팅부문장은 “고객에게 즐거운 쇼핑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예능과 쇼핑을 접목한 쇼퍼테인먼트 콘텐츠 개발 경쟁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경복궁 명예수문장 된 마크 테토

    경복궁 명예수문장 된 마크 테토

    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홍례문 앞에서 개최된 ‘경복궁 수문장 임명 의식’에서 미국 기업인이자 방송인인 마크 테토(오른쪽)가 명예수문장패를 전달받고 있다. 올해로 7회를 맞이한 경복궁 수문장 임명 의식은 1469년(예종 1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수문장제도 설치와 수문장 임명’을 역사적으로 근거해 국왕이 친히 경복궁 홍례문에 행차한 후 2명의 수문장을 새로 임명하고 이를 축하하는 전통문화행사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서적] 삶의 깨달음을 감수성으로 풀어

    [서적] 삶의 깨달음을 감수성으로 풀어

    서예가로, 수필가로 살아온 작가의 첫 번째 책이다. 작가는 삶을 돌아보며 얻은 깨달음과 삶의 단면들을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풀어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깊은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글 사이사이 일상을 잔잔하게 어루만져주는 문인화는 삶의 여유와 따스함을 전해준다. 이 책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고, 급격하게 발전해온 사회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담백한 어조의 문장들은 삶의 깊고 단단한 자국들로 남아 용기와 지혜를 가르쳐 주고, 기억해야 할 가치를 알려준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천만 열차 다시 탈까

    천만 열차 다시 탈까

    “천만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다시는 저한테 올 수 없는 로또 복권 같은 것이죠. 제 작품을 봐주는 시선이 더 많아졌으니 부담이 클 수밖에요.”(추창민 감독) “어쩌다 온 ‘흥행 감독’이란 수식어를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제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어요. ‘염력’은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워져 보자’고 만든 거고요.”(연상호 감독)●추창민 “광해 흥행은 로또 당첨” 각각 ‘광해’, ‘부산행’으로 ‘천만 감독’ 수식어를 단 감독들의 말은 큰 흥행의 환희 끝에 뒤따르는 중압감을 잘 보여 준다. 전작의 성공은 곧 차기작의 짐이 된다. 이를 두고 영화계에선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용어를 쓴다. 첫 작품에서 성공한 뒤 내놓는 차기작이 흥행이나 완성도에서 전작에 비해 부진한 상황을 일컫는 것. 올해 잇따라 신작을 선보이는 ‘천만 감독’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주목된다. 지난 28일 개봉한 ‘7년의 밤’은 그런 점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한국 영화다. ‘광해, 왕이 된 남자’로 1231만 관객을 모은 추창민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화가 기대되는 소설 1위’로 꼽혀 온 정유정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7년의 밤’ 원작 무게 덫으로 원작의 무게는 영화의 ‘힘’이기도 했지만 ‘덫’이기도 했다. 추 감독도 “이야기의 힘이 굉장히 좋고 회화적인 부분도 커서 모든 감독들이 탐냈으나 영화로 푸는 건 불가능하다 싶어 처음엔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베일을 벗은 ‘7년의 밤’에서는 그 부담과 고민의 깊이가 뚜렷이 짚인다. 영화는 ‘극단의 사이코패스’인 오영제(장동건)와 찰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살인자가 된 최현수(류승룡)의 심리를 파고드는 데 주력했다. 운명을 극복하려는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 비뚤어진 부성애에 공을 들이며 인간의 내면을 묵직하게 통찰하지만 내내 음울하고 무겁게만 가라앉는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서 서늘하고 속도감 넘치는 문장으로 직조했던 스릴러의 짜릿함은 반감됐다. 추 감독은 “후반 작업을 하면서 여러 버전을 만들어 관계자들과 논의했는데 합의가 쉽지 않아 작품 개봉이 늦어졌다”며 “하잘것없는 인간이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운명을 극복하려 하는 이야기와 선택, 그리고 그 이유를 녹여내고 싶었는데 그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건 알지만 창작자로선 만족한다”고 했다.지난 1월 말 극장가에 선보였던 ‘염력’도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점에서 개봉 전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연 감독은 작가 정신이 빛나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내놓다 도전한 첫 실사영화 ‘부산행’으로 1156만 관객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염력’은 관객수 98만명에 그치며 흥행에 참패했다. ●연상호 “‘염력’ 전작 부담 덜고 즐겨” 소포모어 징크스를 피하지 못했지만 연 감독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부산행’ 이후 자유롭게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20대 때 좋아하던 블랙코미디 영화를 해 보고 싶었다. 또 철거민 문제를 상업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꼈을 지점이 뭔지 고민도 된다. 하지만 창작자로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구현한 ‘염력’은 내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했다.●오달수 여파에 ‘신과 함께2’ 재촬영 지난해 12월 ‘신과 함께-죄와 벌’로 흥행 감독으로 자리를 굳힌 김용화 감독의 차기작 ‘신과 함께-인과 연’도 오는 8월 개봉 예정이다. ‘신과 함께’ 1편이 1441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오른 터라 2편은 ‘이미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다. 1편만으로 극장 매출 1157억원을 기록하며 두 편의 제작비 400억원을 모두 회수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2009년 ‘국가대표’로 8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천만을 코앞에 뒀다. 하지만 4년 뒤 제작비 300억원을 쏟아부은 ‘미스터 고’(132만명·2013년)에선 참패를 맛봤다. 이 때문에 ‘신과 함께’ 1편은 그가 명예 회복을 이룬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신과 함께’ 2편은 여름 개봉을 앞두고 최근 ‘악재’를 만났다. ‘미투’ 폭로 과정에서 작품에 출연한 오달수·최일화의 성폭력 의혹이 제기된 것. 제작사 측은 두 배우의 촬영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조한철, 김명곤을 새로 투입해 다음달 초 재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2013년 ‘7번방의 선물’(1281만명)로 ‘천만 감독’이 된 이환경 감독의 신작 ‘이웃사촌’도 미투 암초를 만나 휘청이고 있다. 국정원 요원과 정치인 간의 우정과 권력 암투를 그린 작품인데 오달수가 주연을 맡아 촬영을 완료하고 개봉 날짜만 고르고 있었다. 제작사 측은 “오달수가 주연이라 촬영 분량이 상당해 (재촬영은) 쉽게 결정 내기 힘든 사안”이라며 “연내 개봉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학원 못 보내는 아이 걱정된다고요?… 영어책 읽게 하세요

    학원 못 보내는 아이 걱정된다고요?… 영어책 읽게 하세요

    “학원 보낼 수 없는 우리 아이 영어교육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달부터 초등학교 1, 2학년의 학교 방과후 영어 수업이 금지되면서 난감해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교육당국은 “영어는 정규과목으로 배우는 초3 때부터 공부해도 된다”는 입장이지만 학부모 입장에서는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영어학원 등에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적지 않은 비용이 문제다. 학부모가 직접 아이들이 영어를 접하도록 도울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영어책을 활용하면 아이가 쉽게 영어를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초 1, 2학년을 위한 자가 영어책 학습법을 살펴봤다.●영어책 고를 때 레벨보다 흥미 중요 영어 전문가들은 “초교 저학년 때는 영어를 듣고 읽는 등 자연스럽고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정도로 노출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부도 올해 안에 ‘학교 영어교육 내실화 방안’을 만들 계획인데 원어민 보조교사나 온·오프라인 독서 프로그램을 활용한 듣기 수업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영어책은 초교 1, 2학년 학생들에게 좋은 교재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어휘와 상황에 맞는 표현을 쉽게 익히고, 영어권에서 실제로 활용하는 생활영어를 접할 수 있다. 단어, 문장을 무작정 외우려 하기보다는 책을 통해 영어를 언어로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아이가 아직 어리다고 쉬운 책만 고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송주희 서울 송파어린이작은도서관 관장은 “부모들이 영어책을 골라 줄 때 나이에 따른 수준만 고려하기 쉬운데 레벨보다 흥미가 더 중요하다”면서 “공룡에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한글책을 주든 영어책을 주든 다 이해한다”고 말했다.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책을 읽게 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질릴 수 있다는 조언이다. 송 관장은 또 “영어책을 꾸준히 읽는 것이 중요하며 듣기만 하지 말고 소리 내 읽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1주일에 1번 이상 최소 4년은 해야 어학 실력이 쌓이고 부모와의 친밀도도 높아진다는 얘기다. 영어책을 소리 내 읽으면 자연스럽게 듣고, 쓰고, 말하는 공부가 한번에 될 수 있다. 영어책을 한 번 읽고 책장을 덮어버리기보다 독서 전후 활동을 병행하면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먼저 영어책을 읽기 전에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키워 주는 활동을 하면 좋다. 예컨대 책 표지와 제목을 보면서 어떤 내용일지 추측해 보거나 주요 단어나 표현을 배워 보는 방식이 괜찮다. 이런 활동을 통해 아이는 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게 되며, 상상력과 이해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부모와 함께 줄거리를 얘기해 보거나 내용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다. 이보영 윤선생 국제영어교육연구소 교육팀장은 “책에 대한 대화나 질의응답은 핵심 내용을 파악해야만 가능하기에 아이들이 조금 더 집중해서 책을 읽게 된다”면서 “스스로 핵심 내용을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정보를 찾는 능동적인 읽기 습관을 길러 준다”고 말했다. 책 속 단어로 빙고 게임을 하거나 결말을 다르게 맺어 보는 등 다양한 독서 후 활동을 해 볼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기록을 남기도록 해 보자. 읽은 날짜, 제목, 작가 등을 적고 느낌이나 생각 등을 간단하게라도 적도록 한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거창한 감상문을 기대하면 꾸준히 작성하게 하는 데 실패할 수 있으므로 아이의 연령과 영어 수준에 따라 다양한 방법의 감상을 남기는 것이 좋다. ●‘맘스 북클럽’ ‘스토리 저널’ 등 인기 지역마다 있는 영어도서관을 활용하면 다양한 장르의 영어책을 구해 교육할 수 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운영 중인 영어도서관은 200여개다. 또한 월정액으로 결제하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영어 책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온라인 영어도서관도 있다. 이러한 온·오프라인 영어도서관은 영어책 대여뿐 아니라 독후활동이나 토론, 연극 등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운영하고 있어 자녀의 영어 학습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송 관장은 “학부모가 영어책을 활용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맘스 북클럽’과 초교 저학년생들이 전문 영어 강사가 영어책을 읽어 주는 ‘스토리 저널’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가 좋다”고 말했다. 영어 도서관 프로그램은 무료가 많지만 일부 프로그램은 내실화 등을 위해 실비 수준의 비용을 받는다. 또 영어 수준이 뛰어난 아이들을 위한 토론 수업 등도 있으므로 수준에 맞춰 프로그램을 정하면 좋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최고 자산가’ 김병관 의원은 누구? “가난한 농부의 아들”

    ‘최고 자산가’ 김병관 의원은 누구? “가난한 농부의 아들”

    20대 현역 국회의원 293명 중 최고 자산가는 게임업체 웹젠의 대표이사를 지낸 더불어민주당 김병관(경기 성남분당갑) 의원인 것으로 나타났다.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29일 공개한 2017년 정기재산변동 신고내역에 따르면 김 의원의 재산은 4435억2625만원으로 나타났다. 김 의원은 웹젠 주식 943만5000주(시가 3753억3273만원)와 건물, 배우자 재산을 포함한 예금 등을 보유하고 있다. 김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표시절 직접 영입한 인재다. 국내 온라인 게임업계 1.5세대로 손꼽히는 IT경영인으로 웹젠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경영학과 석사를 밟은 뒤 게임회사 넥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벤처기업 ‘솔루션홀딩스’를 창업했고 2003년 솔루션홀딩스가 NHN에 흡수되면서 NHN에 합류했다. 김 의원은 NHN에서 게임제작실장, NHN한게임사업부장, 가엡사업본부 부문장을 지내다 2005년 NHN게임스가 분리되면서 대표이사를 맡았다. 당시 NHN게임즈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2010년 7월에는 NHN게임스와 웹젠이 합병하면서 합병법인인 웹젠의 대표이사가 됐다. 2012년부터 웹젠 이사회 의장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웹젠은 2000년 설립된 게임회사로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뮤(MU)’로 유명하다. 뮤의 지적재산권을 제휴하는 방식으로 중국에서 출시한 웹게임 ‘대천사지검’, ‘전민기적’으로 2014년 시가총액 1조원을 넘겼다. 뮤의 모바일버전인 ‘뮤 오리진’을 출시해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매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병관 의원은 민주당 입당 당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자랐다. 흙수저와 헬조선을 탓하는 청년에게 ‘노력해보았나’를 물어서는 안 된다. 열정으로 도전하는 청년에게 안전 그물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안철수 의원에 대해 “직장인으로서 그 분이 사장인 회사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그분이 사장이면 의사 결정의 투명성 등에서 제가 납득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SK브로드밴드, “소상공인 돕자” 클라우드캠 소호 출시

    SK브로드밴드, “소상공인 돕자” 클라우드캠 소호 출시

    SK브로드밴드는 소상공인 전용 인공지능 폐쇄회로(CC)TV 상품을 출시해 상생과 함께 최근 떠오르는 ‘소호(소규모 자영업) 영상보안 시장’ 공략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 소상공인에게 꼭 필요하지만 요금 부담이 있는 기존 CCTV 상품 중 매장에 필요한 기능만을 선택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클라우드캠 소호’를 출시했다. 클라우드캠은 별도의 저장장치 없이 클라우드 서버에 영상을 보관하고 스마트폰이나 PC로 실시간 영상 확인을 할 수 있는 CCTV다.클라우드캠 소호는 필수 기능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저장일수(15일, 30일)나 카메라 화소(100만, 200만), 지능형 기능, 도난보험 등 세부 서비스는 고객이 필요한 만큼 선택할 수 있게 만든 상품이다. SK브로드밴드는 상품 출시 기념으로 다음달 30일까지 가입자 전원에게 1000만원까지 보장하는 도난보험도 무료로 제공한다. 소상공인이 인터넷을 가입하면 최대 3개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상품은 보안 기능 외에도 방문객 수를 시간대, 요일별로 파악하고 매장 내 혼잡도를 표시하는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이방열 SK브로드밴드 기업사업부문장은 “최근 지속적인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 사업 성공에 보탬이 되기 위해 상품을 출시했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국정교과서 朴정부가 기획·감독…교육부는 손발

    국정교과서 朴정부가 기획·감독…교육부는 손발

    “역사 제대로 안 배우면 혼 없어” 朴, 2013년 논설실장들에 피력 2회 여론조사 후 비밀TF 가동 2015년 ‘차떼기 여론조작’까지‘총감독은 박근혜의 청와대, 행동대장은 교육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28일 발표한 국정화 추진 과정은 이렇게 요약된다. 검인정 체제로 발행되는 기존 역사 교과서 대부분이 ‘좌편향’이라고 생각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시켜 국정화를 기획했고, 교육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손발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진상조사위의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을 재구성했다.“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자라면 혼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7월 10일 언론사 논설·해설위원들을 만나 이런 말을 던졌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의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순간이다. 다음달인 8월에는 뉴라이트 등 보수 학자들이 쓴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라는 비판 속에서 검정 심사를 통과해 논란이 됐다. 조사위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그해 10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교과서를 바로잡으려면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면서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나서야 박근혜 정권 5년 내에 좌파를 척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청와대의 시나리오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2013년 10월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이학재 의원은 “국가적 통일성을 위해 역사 교과서는 국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고, 염동열 의원은 “(역사 교과서를 위한) 중립적 검정위원회를 만들거나 국정교과서로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은 2014년부터 노골화됐다. 교육부는 여론 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두 차례 여론조사를 한다. 교육부는 산하기관인 한국교과서연구재단과 교육과정평가원에 여론조사를 맡기면서 비용도 지급하지 않았다. 형법상 직권남용 등이 적용될 수 있는 행위다. 청와대는 2015년 실무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했던 김정배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한 게 신호탄이었다. 비슷한 시기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에게 “교육부 내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교육부 2인자였던 김재춘 전 차관은 교육부 관료인 오석환씨를 단장으로 공무원 21명이 투입된 비밀 TF를 만든다. ‘차떼기’ 여론 조작도 이때 발생했다. 교육부는 2015년 10월 국정교과서 행정예고를 하면서 찬반 의견을 수렴했는데 동일한 양식의 찬성 의견서 1000여장이 트럭에 실려 무더기로 접수됐다. 조사위가 찬성 의견서를 검토한 결과 동일인이 100장 넘게 내기도 했고, 인적사항란에는 ‘이완용’, ‘조선총독부’ 등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며 국정교과서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청와대는 국정교과서 편찬 기준(가이드라인)의 세부 내용까지 치밀히 관여했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 기준을 만들던 2015년 9월 청와대 행정관이 21개의 ‘수정 요구’를 담은 문서를 교육부에 전달한다. ‘동학농민운동 관련 내용과 독립협회 활동의 한계를 담은 내용을 삭제해 달라’거나 ‘남북 평화 모색 활동과 관련한 내용도 없애 달라”, “(경제발전 과정과 관련한 항목에서) ‘사회 양극화’와 ‘환경오염’을 삭제해 달라”는 등의 요청이 담겼다. 또 “‘새마을운동 성과와 한계를 서술한다’는 문장에서 ‘한계’를 빼고 ‘의의’를 넣어 달라”고도 요청했는데 실제 편찬 기준에는 ‘새마을운동이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추진됐고 이 운동이 최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음에 유의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청와대 의견 21건 중 18건이 편찬 기준 최종본에 반영된 것으로 조사위는 판단했다. 청와대는 또 우호 여론 조성을 위해 교수 102명의 국정화 지지 선언을 기획했고, 교육부가 시민단체 명의로 국정교과서 홍보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도록 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정봉주, 거짓해명 시인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봉주, 거짓해명 시인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인터넷 언론사를 고소했던 정봉주 전 의원이 28일 고소를 취하하면서 그동안 내놓은 자신의 해명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정 전 의원은 이날 언론사에 대한 고소를 취하한 뒤 보도자료를 통해 “저의 카드사용내역을 확보해 검토해본 결과 그 호텔에서 결제한 사실을 확인했고, 즉시 스스로 경찰에 자료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당일 일정을 기록한 780여장의 사진 중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에 따르면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 방문장소는 홍대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 단 두 곳 뿐이었다”며 “이에 따라 당일 호텔에서 피해자 A씨를 만나지 않았다고 확신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A씨는 27일 기자회견에서 오후 5시 이후 호텔에 있었던 사진을 공개했고, 이에 저는 오후 5시 이후 제가 여의도가 아닌 곳에서 있었다는 점을 입증할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다”며 “그러던 중 당일 오후 6시43분 해당 호텔 카페에서의 결제 내역을 스스로 확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 전 의원은 “이처럼 당일 저녁 제가 그 호텔에 갔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됐다. 저는 이 사실을 변호인에게 알렸다”며 “덮고 가고 싶은 유혹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스스로 공개하는 것만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책임을 지는 길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하지만 직접 결제내역을 확보했고, 제 눈으로 확인한 이상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들었다”며 “기억이 없는 것도 저 자신의 불찰”이라고 덧붙였다. 전 의원은 마지막으로 “제 거취에 대해서는 이른 시일 안에 직접 별도로 말씀을 드리겠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인숙의 해방촌에서] 말, 말, 말

    [황인숙의 해방촌에서] 말, 말, 말

    아주 오래전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 도시라는 디에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디에프는 바다를 굽어보는 백악 절벽이며 성당이며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는데, 바다 냄새도 맡지 못하고 딸랑 해산물식당에서 밥만 먹고 왔다. 식사에 초대한 이는 노르망디 바다의 음울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지극하게 토로했는데, 오후에 파리를 떠나 어둠이 내릴 때 도착한 데다 식당에서 훌쩍 시간이 지났고, 내내 비가 흩뿌리고 있어서 그랬을 테다. 파리를 벗어나기 전부터 내리던 비가 점점 거세졌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바다로 간다는 흥에 더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비의 장막을 뚫고 달리는 몽환적인 기분에 겨워서 내가 “와, 멋있다!” 환호성을 지르자 차를 몰던 초대자가 울컥해서 무안했던 순간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으로서는 그렇잖아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뭐 이런 덜떨어진 인간이 있나 싶었을 테다.버터에 구운 커다란 바닷가재며 생굴이며 포도주를 곁들인 잘 차린 식탁에 둘러앉아 두 시간 넘게 떠들면서 먹었다. 한 초로의 신사가 계산대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머뭇머뭇 우리 자리에 오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스페인 사람들이냐고. “아니다, 한국인이다” 라는 대답에 그는 역시 수줍은 미소를 띠고 갸웃거리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는 동양인들이 스페인어로 떠드는 게 이상하고 참을 수 없이 궁금했던 게다. 스페인어도 한국어도 모를, 스페인어를 들어 본 적은 있을 프랑스 사람에게 우리가 하는 말이 스페인어처럼 들렸다는 게 신기했다. 일행 모두 표준 한국어, 서울 말씨 사람들인데 말이다. 음성학자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얘기를 주고받을 때, 의미를 소거하고 들어 본 적이 있다. 목소리에 실린 강세와 리듬을 음미하면서 외국인은 우리말을 이런 느낌으로 듣겠구나 생각했다. 길을 가다가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콕 박히는 때가 있다. 언젠가 연인 사이로 보이는 청소년 둘이 스쳐 가는데, “걔, 개~못생겼어!” 하는 여자애 말이 들렸다. 남자애와 나는 동시에 쿡, 웃음을 터뜨렸다. ‘개소리’ ‘개 같은’ 등 전에는 부정적으로 쓰였던 ‘개’가 요즘엔 최상급을 표하는 접두사로, 종종 긍정적으로 쓰인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말이지만, 단박 ‘개이득’이 떠오른다. 어쩜 그리도 뜻이 확 와 닿을까. 감각적으로 와 닿는 신조어들은 대개 소위 ‘급식체’에서 비롯된 말일 테다. 아, 청소년! 최근에 나온 사노 요코의 이야기집 ‘꿈틀꿈틀 해줘 고릴라야. 그저 돼지지만’에서 가장 짧은, 두 줄짜리 이야기 ‘벌레’를 읽고 감탄했다. ‘송충이라든가 애벌레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요?/우리는 그저 사춘기일 뿐이에요.’ ‘중2병’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이야기다. 미국에 사는 내 조카 하나가 사춘기일 때 툭하면 건방진 표정으로 뱉던 말이 “생큐 포 너싱”(Thank you for nothing)이었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그 애가 제 동생과 서울에 왔던 10여년 전(방학을 맞은 애들이 제 친구들과 즐거운 계획이 있어서 오기 싫어했는데, 언니가 혼자 다녀가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애들 고아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끌고 왔다) 사랑하는 조카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영어 공부를 하자고 결심했는데 이때껏 실행하지 못했다. 지난 2월에 평창동계올림픽을 본다고 그 건방졌던 조카가 다녀갔다. 한마디, 한마디, 머리에 쥐가 나도록 쥐어짜는데, 귀에 쥐가 났을 조카는 간간이 차마 못 들을 말인 듯 내 영어를 바로잡아 주었다. 사노 요코가 이야기의 달인이라면 우리 시인 김언은 언어의 달인이다. 그의 시집 ‘한 문장’은 이 시인이 언어 운용에 얼마나 빼어난 재능을 가졌는지 절감시킨다. ‘간장공장 공장장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얼마나 바르고 빠르게 읽는지 시합하던 생각이 난다. ‘한 문장’은 언어폐색증이 온 시인들의 굳은 혀나 굳은 뇌를 풀어 줘서 글쓰기 시동을 거는 데 썩 유용한 시집이라고 하면 김언에게 실례일까. ‘실례’라고 하니, 그 옛날 한 친구가 나이트클럽에서 외국인과 부딪치자 농담이랍시고 던진 “익스큐즈 유!”가 생각난다.
  • 장동건, 장동건을 버리다

    장동건, 장동건을 버리다

    자기복제 연기 벗고 새로운 도전 매일 면도해 M자형 탈모 만들고 격투 장면 찍다가 귀 40바늘 꿰매 “제일 열심히 한 영화로 남을 것”“그간 제 스스로에 대한 식상함이 있었어요. 결과물들이 좋은 평가를 못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어느 순간 연기에 재미를 못 느끼고 뭘 해도 새롭지 않을 것 같았죠. 자기복제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엄습했어요. 그때 ‘7년의 밤’의 오영제 역을 제안받았는데 ‘새로운 것들이 내 안에서 나올 수 있겠다’ 싶었죠.” 영화계 안팎에서 수년간 기대작으로 꼽혀 온 ‘7년의 밤’이 오는 28일 극장가에 내걸린다. 문단에서 보기 드문 치밀한 스릴러로 50만부가 팔린 정유정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데다, ‘광해’(2012)로 1200만 관객을 모은 추창민 감독의 6년 만의 복귀작이라 더욱 관심을 모았다.일찌감치 소설의 팬이었던 배우 장동건(46)에게도 ‘7년의 밤’은 연기 인생에 새로운 동력이 된 기대작이었다. 우연한 사고로 살인자가 된 최현수, 그로 인해 딸을 잃고 복수에 나서는 사이코패스 오영제. 두 사람의 통렬한 대립을 밀도 높게 쌓아 올린 소설을 읽고 그는 ‘악인인 피해자’가 ‘선인인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플롯에 매료됐다. “소설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였어요. 오영제를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도 났는데 운명처럼 제안이 왔죠. 추 감독님과 처음 만나고 나서 들뜬 마음이 걱정으로 바뀌었어요. 제가 그린 오영제와 감독님이 설정한 오영제가 너무 달랐거든요.” 그는 오영제를 예민하고 섬세한 사이코패스이자 섹시한 매력이 있는 악당으로 해석했다. 문장에서 위트 있는 묘사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님은 지역 유지 이미지를 만들자며 ‘몸무게는 10㎏ 정도 불리자’, ‘M자형 탈모를 만들자’고 제안하시더라구요. ‘그러려면 M자형 탈모가 있는 연기 잘하는 배우를 쓰지 왜 나를 쓰나’ 싶었죠(웃음).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충격과 완충의 과정이 있었던 셈이에요. 하하.” 영화에서 그는 ‘잘생김’을 무너뜨리는 ‘M자형 탈모’에 서늘하고 견고한 악인의 무표정을 체화해 ‘장동건만의 오영제’를 빚어냈다. 캐릭터를 빚어내기까지 중압감은 컸다. 올해로 연기 생활 26년째지만 어린 딸을 허리띠로 매질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죄책감이 들었다. 딸의 살인범을 징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아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가려는 오영제의 심리를 이해하는 과정도 힘겨웠다. 물리적인 후유증도 컸다. 9~10개월 동안 매일 면도를 해서 만든 M자형 탈모를 회복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류승룡(최현수 역)과의 격투 장면에서는 귀를 다쳐 40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여한이 없어요. 자신이 있다, 없다 혹은 만족한다, 안 한다를 떠나 제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는 다 했거든요. 제 필모그래피에서 ‘인생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일 열심히 한 영화로 남을 것 같아요.” 지난해 선보인 ‘브이아이피’, 곧 개봉을 앞둔 ‘7년의 밤’에 이어 최근 촬영을 마친 ‘창궐’까지, 그는 줄곧 ‘센 캐릭터’를 도맡고 있다. “영화에선 악역 제안이 주로 들어와요. 말랑말랑한 캐릭터는 예전에도 섭외가 별로 없었어요. 제 스스로도 영화에선 선 굵은 역할, 극적인 감정선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더라구요. 저를 선한 이미지로 보시는 분들이 많아 반대의 성정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올해는 여느 때와 다르게 다작 행보가 눈에 띈다. 요즘은 다음달 25일 KBS 2TV에서 첫선을 보일 드라마 ‘슈츠’ 촬영에 한창이다. 인기 미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전설적인 변호사로 변신해 가짜 신입 변호사(박형식)와 호흡을 맞춘다. 지난달 중순에는 ‘공조’(2016)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의 신작 ‘창궐’ 촬영을 마무리했다. “어느 순간 연기 경력에 비해 작품 수가 적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품 선택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요. 예전엔 공들이고 신중을 기해 작품을 골랐는데 그렇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상업적인 흥행을 따져봤던 것들이 잘 안 되니까(웃음). 이젠 단점이 있어도 장점이 더 크면 하려는 마음이라 작품을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됐어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즐라탄 “내가 월드컵 출전 여부 결정한다” 신태용호 어쩌나

    즐라탄 “내가 월드컵 출전 여부 결정한다” 신태용호 어쩌나

    “내가 원하면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할 것이고, 원하지 않으면 출전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나 싶어 화를 냈다가 스웨덴 골잡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라면 가능한 얘기라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 24일 미국 메이저리그사커 LA 갤럭시 입단을 공표하는 자리에서 스웨덴 국가대표팀 복귀 여부에 관한 질문에 “최근 스웨덴축구협회가 복귀를 요청하고 있다”며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브라히모비치는 이어 “하나씩 차근차근 과정을 밟고 싶다”며 “난 뛰고 싶다. 축구경기에 목이 마르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축구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브라히모치가 러시아월드컵 출전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본선 조별리그에서 스웨덴을 만나는 신태용호로서도 신경을 바짝 쓸 수 밖에 없게 됐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이날 밤 11시 ‘가상의 스웨덴’ 북아일랜드와 평가전을 치르는데 머릿속으로는 이브라히모치가 뛰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며 경기를 이끌고 지켜보게 됐다.스웨덴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인 이브라히모비치는 지난 2016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뒤 꾸준히 복귀 요청을 받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지난해 4월 오른쪽 무릎 인대를 심하게 다치면서 올 시즌 출전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결국 대서양을 건넜다. 한편 그는 LA갤럭시 입단에 앞서 지역 최대 일간지인 LA타임스에 전면 광고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LA갤럭시에 입단해 고맙다는 팬들의 응원에 ‘Dear Los Angeles,You’re welcome.(친애하는 LA, 천만에요)‘란 두 문장으로 화답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가혹한 운명… 가혹한 ‘파친코의 굴레’

    가혹한 운명… 가혹한 ‘파친코의 굴레’

    파친코1·2/이민진 지음/이미정 옮김/문학사상/각 권 368·400쪽/각 권 1만 4500원재미교포 작가 이민진(50)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한국과 일본 어느 나라로부터도 환대받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의 뼈저린 애환을 담은 책이다.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약 80년간의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4대에 걸친 일가족이 경계인으로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좇는다. 재일 조선인들이 겪은 차별과 멸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면글면 애썼던 생존의 역사는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고 극적이다. 작가는 대학교 3학년 때였던 1989년 미국 예일대의 한 강의에서 조선계 일본인과 그 후손을 일컫는 ‘자이니치’의 역사와 고충을 처음 접했다. 조선계라는 이유로 졸업 앨범을 훼손당한 중학생 남자아이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충격이었다. 이를 실마리로 1996년 소설의 초안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2007년 도쿄로 발령 난 남편을 따라 일본에 살면서 조선인을 직접 만나 취재하며 원고를 수차례 다듬어 지난해 이 책을 내놨다. 책은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에게 시집가는 가난한 집 막내딸 양진이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던 양진은 온갖 궂은일을 다하면서도 딸 순자를 묵묵히 키운다. 엄마를 닮아 매사에 진중하고 착실하던 순자는 인생의 항로를 크게 뒤흔든 생선 중매상 한수와 사랑에 빠진다.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의 아이를 임신한 순자는 절망에 빠지지만 그녀를 가엾게 여기던 목사 이삭과 결혼해 이삭의 형 요셉 가족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떠난다.순자는 오사카에서 한수의 아이인 노아를 낳은 뒤, 이삭의 아들 모자수도 낳는다. 공부를 잘하는 노아는 일본 명문대에 입학하지만 가족의 품을 떠나 파친코에서 일을 한다.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모자수 역시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두각을 드러낸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미국에서 유학한 뒤 영국계 투자은행의 일본 지사에 취업하지만 일본인 동료의 배신으로 결국에는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는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노아와 솔로몬도 끝내 선택하는 ‘파친코’는 재일 일본인들의 굴레와 같은 삶 그 자체다. 일본인들에게는 ‘더러운 조선인’들이 일하는 ‘더러운 업계’인 파친코 사업은 ‘조국 같지 않은 조국’에서 조선인들이 돈과 권력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도박 같은 운명 앞에서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한계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산다. 양진과 순자, 순자의 동서인 경희는 여자로서의 인생은 잊은 채 강인한 엄마, 헌신하는 아내로서 자신의 삶을 오롯이 가족에게 바친다. 경희의 남편이자 이삭의 형인 요셉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다. 순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건설적인 미래를 꿈꾸지만 ‘자이니치’라는 굴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 나가는 이들의 끈질긴 노력은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 때문에 가능했다. 순자가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 이삭의 묘석 앞에서 흐느껴 울던 끝에 아들들의 사진을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건 가혹한 운명을 피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다름없기에. 이 마지막 장면을 마주한 뒤에 책의 첫 문장을 본다면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올 터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김정태 3연임 확정… KB금융 ‘노동이사제’ 또 무산

    김정태 3연임 확정… KB금융 ‘노동이사제’ 또 무산

    삼성전자 ‘이사회 중심’ 경영체제 구축 KT도 이사회가 회장 후보 선정하기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사내이사 재선임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3연임을 확정지었다. 2012년 첫 임기(3년)를 시작한 김 회장은 이로써 2021년까지 9년간 하나금융을 이끌게 됐다. 하나금융은 23일 서울 중구 명동 본점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김 회장의 3연임 안건을 출석 주식 수 대비 찬성률 84.6%로 통과시켰다. 금융지주 회장이 3연임에 성공한 건 라응찬(2001~10년 4연임) 전 신한금융 회장과 김승유(2005~12년) 전 하나금융 회장에 이어 김 회장이 세 번째다. 김 회장과 김병호 부회장, 함영주 하나은행장 등 3인 체제로 운영된 사내이사를 김 회장 단독 체제로 개정하는 안건도 통과됐다. 김 회장의 경영 체제가 더 공고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금융 당국과 갈등을 빚은 금융사 최고경영자(CEO)가 오래 버틴 전례가 거의 없다는 점은 걸림돌이다. 강정원 전 국민은행장은 2009년 KB금융지주 회장에 내정됐지만 당국의 고강도 검사가 계속되자 자진 사퇴했다. 라 전 회장도 2010년 3월 4연임에 성공했으나 그해 10월 금감원이 금융실명법 위반 혐의로 중징계 방침을 통보하자 스스로 물러났다. 금융 당국은 최근 사임한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의 채용비리 의혹이 제기된 2013년 하나은행 채용 과정에 대해 고강도 조사를 예고하는 등 단단히 벼르고 있다. 삼성전자도 서울 서초사옥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이사 선임, 발행주식 50대1 액면분할 등의 안건을 처리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불참한 이날 주총은 행사장 밖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이 부회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시위도 벌어졌지만 비교적 순탄히 진행됐다. 창사 이래 최초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이 분리되며 이사회 경영의 투명성이 강화됐다. 신임 사내이사로 이상훈 사장과 김기남·김현석·고동진 부문장(사장), 이사회 의장으로 이상훈 사장이 선임됐다. 사외이사 1명 추가와 이사회 의장직 분리로 이사회 규모는 기존 9명에서 11명으로 늘었다. KT는 이날 주총에서 회장 후보 선정 주체를 기존 CEO추천위원회에서 이사회로 바꾸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확정했다. 신임 사외이사로는 참여정부 출신의 이강철 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김대유 전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이 선임됐다. 롯데쇼핑 등 롯데그룹 5개 계열사도 주총을 열고 국정농단 관련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인 신동빈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했다. KB금융지주 주총에선 관심사였던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이 또다시 무산됐다. KB노조는 지난해에도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지만 부결됐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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