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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 혹한속 농촌현장을 가다

    ◎사료·기름값 폭등… 축산·원예 농민 신음/축산농 ‘기를수록 손해’ 인식 확산,존폐 위기/지자체들 농가살리기 지원대책 마련 부심 【전국 종합】 우리 농촌이 온통 울상이다. IMF 한파 이후 사료값과 기름값 등이 크게 오르면서 축산 및 채소 원예 농가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가는 적자폭에 신음하고 있다. 10여만원에 사육하던 소와 돼지를 팔아 치우거나 아예 폐기처분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IMF 시대 50여일만의 농촌 실정을 심층보도한다. ▷호남◁ 전남에서는 한우 51만3천마리,젖소 3만6천마리,돼지 68만2천마리,닭 9백32만6천마리 등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이후 3차례 사료값이 폭등하면서 ‘기를 수록 손해’라는 인식이 농촌에 퍼지고 있다.소 사료는 가장 싼 등급을 기준으로 부대당(25㎏) 5천510원에서 7천910원(43.6%),돼지는 6천850원에서 1만900원(59.1%)으로 각각 올랐다. 돼지 1천여마리를 키우는 순천시 송천리 김동철씨(43)의 경우,마리당 3만1천800원씩 한달에 1백33만5천600원씩 손해를 보고 있다. 김씨는 “20㎏짜리새끼를 120일 정도 키워 100㎏이 되면 14만9천원에 파는데 사료값 13만800원 새끼값 5만원 등 원가는 18만800원에 이른다”면서 “전기세 50만원과 2명의 인건비는 아예 계산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달 133만원 손해 농가도 시설원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천8백여평에 토마토 농사를 짓는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 문원주씨(42)는 “지난 2개월동안 기름값 2천만원에 인건비 5백만원 묘목값 1백60만원 등 2천7백10만원이 들었다”며 “궁여지책으로 하우스 온도를 18℃에서 15℃로 낮췄으나 품질이 나빠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전남 전북도는 축산농가에 축산경영자금 5백만원씩을 긴급 지원키로 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전북도의 경우,5백50여억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기간 1년에 연리 5%의 조건으로 대출하기로 했다. ▷경남·경북◁ 함안군에서 젖소 30마리를 키우는 정덕현씨(60 칠원면 오골리)의 경우,맥주공장에서 맥주 찌꺼기를 한달 10t정도 구입해 소에게 먹이고 있다. 정씨는 “하루 사료가 25㎏들이 12포대 정도 필요하지만 돈이 있어도 살수가 없다”고 말했다. 젖소 70마리를 기르던 중 사료난으로 사료량을 줄인 이상곤씨(32)는 착유량이 종전 하루 평균 마리당 25ℓ에서 2∼5ℓ씩 줄어들자 걱정이 태산이다. ○사료량 줄여 착유량 가소 마산에서 국화를 재배하는 김성동씨(37 진동면 요장리)는 기름값을 줄이기위해 하우스내 온도를 낮추는 바람에 국화 성장속도가 늦어져 큰 손해를 입게 됐다. 김씨는 “3월 예정인 출하시기가 5월 이후로 연기됐다”며 “지난해 6천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나 올해는 1천만원도 건지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군위군 의흥면 수서리에서 돼지 450여마리를 사육하던 권모씨(37)는 지난 9일 사료값 폭등과 외상값 독촉을 견디다 못해 돼지 400마리를 헐값에 처분하고 고향을 떠났다.미처 처분하지 못한 새끼돼지 50여 마리는 굶어 죽은 채 발견됐다. 이같이 농가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경남도는 수출 농산물 계약 재배농가에 연료비 5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특히 가지를 일본에 수출하는 부산 근오물산은 10㎏들이 상자당 1만6천원씩 농가에서 사들이던 것을 상자당 500원씩 값을 올려 농가돕기에 나섰다. 예천군은 최근 당근 사과껍질 등과 볏짚 암모니아를 섞어 만든 사료를 긴급 지원하고 있다. ▷강원◁ 축산농가는 모두 4만2천70가구(한우 11만2천,젖소 2만4천,돼지 28만2천,닭 4백49만 마리)에 이른다.하루 1천184t으로 연간 432t에 이르는 사료값은 지난 연말 3억1천8백만원이었으나 요즘 4억5천7백만원으로 급등했다. 이에 따라 한우 30마리를 사육할 때 연간 4백68만원,돼지 1백마리는 연간 4백만원,닭은 1천마리에 2백19만원을 더 부담케 됐다. 이 때문에 축산농가들은 앞다퉈 물량을 출하,값이 지난해의 3분의 1 이하 수준으로 뚝 떨어지고 있다. 춘천시 남산면에서 닭 12만마리를 키우는 이모씨(33)는 최근 산란계 3만마리를 마리당 200원에 급히 팔아치웠다. 10년째 젖소를 키우는 김모씨(41 철원군 김화읍 청양1리)는 이달 들어 사료량을 30% 줄였으나 착유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 농기계에 대한 부가세 부과와 함께 인건비와 물류비 상품포장비 등이 오를 것으로보여 농촌경제에 멍이 들 조짐이다. ○설탕품귀 양봉업 큰 타격 화천군내 꿀벌사육농가들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원당 가격이 대폭 인상되는 바람에 설탕값 폭등과 품귀 현상이 발생,양봉업자들이 설탕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화천지역 양봉업자들은 15㎏짜리 설탕 1포대가 종전 보다 값이 70% 오른 1만7천원에 팔리지만 이나마 공급부족으로 설탕을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농가에서는 진달래꽃이 피는 한달 가량 꿀벌의 먹이가 부족해 한 군에 3㎏정도의 설탕을 주고 있다. 20년 이상 양봉업을 하고 있는 김모씨(61)는 “설탕값 폭등과 품귀현상으로 국내 양봉업이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충청◁ 높은 사료값에 축산농가들이 사육두수를 줄이거나 아예 축산을 포기하는 일이 늘고 있다. 또 사육소를 앞다퉈 내다파는 탓에 최근 500㎏짜리 암소가격이 2백8만7천원에서 1백93만5천원으로,숫소는 2백26만7천원에서 2백15만9천원으로 떨어졌다. 한우의 사육두수도 지난해 9월 19만7천마리에서 현재 18만8천마리로 9천마리가 줄었다. 양계농가 역시 사육 규모를 줄이고 있다. 사육마리수는 지난해 9월 6백4만2천마리에서 지난 연말 5백42만9천마리로 격감했다. 공주시는 송아지 사육 지원을 위해 2억1천6백만원의 장려금을 확보,1마리당 9만원의 장려금을 주기로 했다. ◎공주시 웅비농장 서해중씨/음식쓰레기 사료화로 IMF 이긴다/발효사료 만들어 한우 50마리 사육/비용 크게 줄고 소 건강하게 잘자라 【공주=이천열 기자】 “최근 사료값이 껑충 뛰어 축산농가가 존폐의 위기에 몰려 있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와 지혜만 있으면 이 상황을 얼마든지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료값 폭등 등 국제통화기금(IMF)한파를 음식물찌꺼기 사료로 거뜬히 이겨내고 있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172 웅비농장(0416­857­1866) 대표 서해중씨(46). 음식물찌꺼기로 발효사료를 만들어 한우 50마리를 기르는 서씨는 “비싼 배합사료를 쌓아놓고 있는 집을 보면 안타깝다”면서 “IMF한파가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서씨는 음식물쓰레기 사료를 만들기 위해날마다 트럭을 몰고 시내 고기집과 함바(공사장 인부 식당)를 돌며 음식찌꺼기를 걷는다. “IMF시대라 그런지 잔밥량이 줄어 종전에는 식당을 3곳만 돌아도 됐지만 요즘은 5곳을 돌고 있지요” 음식찌꺼기에 물을 부어 염분을 씻어내고 옥수수가루 한약찌꺼기 왕겨 톱밥 깻묵 쌀겨 등을 섞어 사료발효기에 넣으면 ‘사료만들기’가 대충 끝난다.이 사료발효기에서 발효되는 양은 한번에 4백㎏에 이르러 이틀간 전체 소를 먹일 수 있다. 이렇게 사료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25㎏에 고작 3천원. 25㎏짜리 배합사료가 보통 7천∼8천원하는 것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더욱이 배합사료를 먹일 때 보다 소가 더욱 잘자라고 건강해 서씨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씨가 사료발효기로 사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부터. 85년 서울의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귀향,젓소를 키우다 1차 실패하고 한우로 방향을 돌린 직후였다. 자신의 자금 1천7백만원에 시가 지원해준 2천8백만원을 보태 2천5백만원짜리 대형 사료발효기를 구입했다. 서씨는 “어려운 시대에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전문인 밖에 없다”며 “앞으로 사육두수를 100마리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영욱 농림부 유통국장/배합사료 안정적 공급 최선/소 부화뇌동 출하땐 생산기반 붕괴/온실 에너지절감 설치비 적극 지원 “최악의 상황은 지났습니다.환율이 더 이상 오르지 않으면 어려움은 곧 극복될 것입니다” IMF사태로 어려워진 농심을 살피고 대책을 마련,추진하고 있는 농림부 김영욱 유통정책국장은 “환율인상분이 사료와 기름 값에 반영된데다 사재기 단속으로 재고가 늘고 있다”고 했다. ­소·돼지 값이 ‘개 값’인 데. ▲산지 소 값은 최근 보합세고 돼지 가격은 상승세다.돼지는 출하가 줄고 있다.소 값 안정차원에서 수매를 계속할 방침이다. ­사료 사정은. ▲신용장 개설이 늘고 가수요가 진정돼 재고량이 늘고있다.12월말 사료원료 재고량이 1백98만t(37일분)이었으나 1월24일 현재 2백32만5천t(43일분)이다.배합사료 생산량도 하루 5만3천t으로 전년동기보다 0.1%가 늘었다. ­문제가 없다는 얘기 같은 데. ▲현금부족으로 축산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정책자금의 원리금 상환연기와 돼지고기 비축자금 지원에 이어 축산경영지원자금을 2천억원 늘린 7천2백억원으로 확대했다.배합사료 추가인상 계획을 철회토록 하고 무리한 현금판매를 자제토록 하고 있다. ­어쨋든 소 돼지를 처분하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소 출하다.배합사료에 대한 부가세 영세율 적용과 경영안정자금지원,볏짚 등 조사료로의 전환정책을 펴고 있다.지금 소를 내다 팔 경우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파동이 우려된다는 말인가. ▲부화뇌동해서 팔 경우 생산기반이 붕괴되고 여파로 산지 소값이 뛸 수 있다는 얘기다. ­시설원예 쪽은 어떤 가. ▲온실에너지 절감설치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시설원예농가의 자금상환도 6개월 연장조치했다.면세유도 당초보다 17만㎘가 늘어난 2백46만㎘를 확보했다.
  • 제헌헌법 탄생과 훼절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3)

    ◎48년 7월17일 대통령제·단원제 공포/48년 5·10총선후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 출범/대통령제­내각제·단원제­양원제 17차례나 격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 50년’이 지니는 가장 값지고 유별난 의미는 그것이 헌정의 역사라는데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그 탄생부터 굴절과 훼절로 출발했고 이는 곧 헌정의 비극,나아가 국가와 국민의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은 정부수립 작업에 탄력을 붙여놓았다. 그 선거를 통해 개원한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날부터 무엇보다 급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초안을 만들어낼 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을 선출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다음날 기초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10명이 선정됐고 6월 1일에는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헌법학자 유진오 등 전문위원 10명도 위촉됐다. 헌법 초안 작성의 중추역을 맡은 유진오는 양원제,내각책임제,농지개혁,중요 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한 안을 내놓았다.이때 미군정 사법부장이던 전문위원 권승렬이 예고없이 독자안을 제출,위원회는 두 안을 각기 원안과 참고안으로 삼아 심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헌법 굴절의 역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1차독회 국회 부분에 이르러 한민당계와 조봉암이 양원제 반대론을 폈다. 이어 곧바로 다수위원의 반대로 확산,양원제는 졸지에 단원제로 바뀌었다. ○기초위선 내각제 원안 통과 여기서 유진오의 헌법초안 작업 참여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국회가 공식으로 제헌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김성수의 한민당 등 정부수립의 3대 주축세력으로부터 각각 초안작성을 의뢰 받았다. 이때 그는 앞의 중요 골자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3대 세력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놓은 터였다. 따라서 기초위의 단원제 채택은 의원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묵시적으로 담합한 성격이 강했다. 유진오안이 근본적인 변질의 길로 들어선 것은 6월 16일 제2차 독회때부터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이날 부의장 신익희를 대동,심의장소인 중앙청 회의실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유진오의 내각제 옹호설명을들은 뒤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자신은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며 반드시 대통령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마친뒤 휭하니 나가버렸다.바로 한달전 신익희를 통해 유진오에게 “내각책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할 일이 적어지지만 부득이한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각책임제가 대세였다. 오히려 내각제 반대를 주장하던 허정도 지지쪽으로 돌아설 정도였다. 이승만의 뜻에 관계없이 기초위는 관련조항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잠시 유진오 등을 상대로 회유에 나서봤지만 여의치 않자 며칠뒤 다시 기초위에 찾아와 협박을 가했다. 단순한 반대 표시가 아니라 만일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채택되면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 말을 던진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에 기초위원들은 허정과 유진오,전문위원 윤길중을 이화장에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는 등 내각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버팀목은 이내 무너져갔다. 한민당이 먼저 굴복했다. 22일 계동 김성수의 집에 모인 백관수 김도연 서상일 조병옥 등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초안수정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 수정안은 이튿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본회의는 17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가 이미 이승만쪽으로 기운데다 핵심 골간이 결정된 터여서 대통령중심제가 우세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안건상정 20일만인 7월 12일 내각책임제는 만세삼창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만장일치로 공화국 헌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만장일치라는 이승만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날 표결방법은 기립이었다. 당시 대동청년단 소속의원이던 생존 제헌의원 김인식(현 제헌동지회장)은 “이문원 의원이 의원석 중간쯤에 기립하지 않고 끝까지 앉아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제를 택할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확실시되는 사실상의1 인 권력자였다. 대중적 지지면에서 그와 겨룰수 있는 김구와 김규식은 5·10 총선을 거부,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어떠한 정치행위에서도 입지가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윤길중은 나중 “제헌당시 한 사람의 고집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것이 그후 우리 헌정사에서 독재,장기집권,정통성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어떻든 대한민국 헌법은 7월 17일 이승만의 서명 공포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그탄생의 내력은 윤길중의 증언처럼 장차 전개될 헌정사의 불행을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승만 고집 대통령제로 이를 입증하듯 1952년 7월 7일 제1차 개헌이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달여 전 총선 참패로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의 자유당은 직선제를 시도했다. 그것도 국회제안 개헌안과 행정부제안 개헌안 가운데 일부를 발췌,국회에 공포분위기를조성한뒤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1954년 11월 29일의 2차개헌(사사오입 개헌)도 헌정사에 얼룩을 덧칠했다. 자유당은 직선제의 문은 열었지만 대통령 중임제한규정에 부딪치자 이 벽을넘기 위해 다시 개헌을 꾀했다. 국회 투표결과는 의원정수 203명중 가결에 필요한 찬성표가 136명에서 1명 모자라는 135표로 나왔다. 부결이 선포됐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계산원리를 끌어들여 가결로 밀어붙였다. ◎증언/“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 요소 많아”/김인식 제헌동지회장 1948년 7월 제헌헌법의 탄생과정을 지켜본 제헌의원은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중 3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은 김인식 제헌동지회장(85) 등 둘뿐이다. 김회장은 당시 헌법이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책임제로 급변한 상황을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본회의에서 헌법초안축조토론을 많이 했지만 대통령제에 대한 토의는 활발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이박사(이승만)가 고집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지요.” 김회장은 그러나 제헌헌법은 문제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으며 의원들의 자부심도 컸다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적 요소가 많이 가미돼 권력집중을 막을수 있었어요. 실제로 제헌국회때는장관도 국회에서 불신임 가결만 하면 곧바로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정기적으로 국회에 나와 국정에 대해 설명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2대국회 중간쯤부터 이대통령이 국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헌법도 자기 뜻에 맞춰 갈아치우기 시작하더군요.” 김회장은 우리 헌정사의 불행의 출발이 바로 여기서부터 싹텄다고 지적했다. “평범한 개인도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는 애착이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자기가 지은 멀쩡한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물었어요. 나라의 장래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그 생각이 맞아들어갔어요.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김회장은 제헌의 주역으로서 헌정사 5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정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만들던 그때의 건국정신과 제헌정신만 지켰다면 그런 불행들은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호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사설유치원 근저당권 무효”/춘천지법

    ◎학교부지 담보제공 불가 판결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사설유치원에 대해 대출과정에서 설정된 근저당권은 무효라는 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춘천지방법원 강문원 판사는 명보유치원 대표 박효경씨(47·춘천시 후평동)가 춘천지법에 낸 경락 및 경매개시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경락취소와 함께 경매개시 결정을 취소했다. 강판사는 결정문에서 “해당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학교교육에 직접 사용되는 학교법인의 재산중 교지와 교사 등은 이를 직접 매도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 없다”며 “대출과정에서 교지 등에 설정된 근저당권은 무효”라고 밝혔다. 명보유치원 대표 박씨는 지난 92년 춘천시 조양동의 신일상호신용금고에 유치원 부지 및 2층짜리 건물을 2억1천만원에 근저당을 설정한 뒤 지난 96년 5월 3억원을 대출 받았으나 이를 갚지 못하자 신일상호신용금고측에서 학교부지와 건물에 대해 경매를 신청,지난 9월 29일 2억8천2백55만원에 경락됐었다.
  • 18세기 조선 인물지/이규상 지음(화제의 책)

    ◎영·정조시대 인물들의 행적·일화 소개 조선 영·정조 시대의 선비인 일몽 이규상의 저서 ‘병세재언록’을 한글로 알기 쉽게 옮겼다.‘병세’는 동시대를 뜻하는 말이며 ‘재언록’은 빼어난 인물들의 기록을 의미한다.이 책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과 일화가 소상하게 담겼다.‘유림록’에서부터 ‘규수록’에 이르기까지 18개 항목에 걸쳐 180여명을 대상으로 삼았다.그중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도 적지않아 영·정조시대의 사회와 문화,예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문원록’‘서가록’‘화주록’은 일종의 만록형식의 열전식 문학비평서이자 서화비평서로 이 시기 문예동향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다.특히 ‘문원록’의 팔문장·초림체·경성여항인에 대한 서술은 문학사적으로 자료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화주록’에서 당대의 서양화 화풍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당시의 다른 저술에서는 볼 수 없는 대목.또 ‘방기록’에서는 조각가이자 기술자인 최천약과 걸인 달문 등 당시로서는 천대받던 인물을 다루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인물지 성격의 기록으로는 19세기에 지어진 조희룡의 ‘호산외기’,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등이 있다.그러나 ‘병세재언록’은 여항인을 중심으로 엮은 ‘호산외기’나 ‘이향견문록’보다 앞설뿐 아니라 한 시대 인물의 전체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 옮김 창작과비평사 1만5천원.
  • 문덕수 문진원 원장 사표

    문덕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이 지난 16일 문화체육부에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문원장은 지난 3월 감사원의 문예진흥원에 대한 감사에서 지적받은 내용과 처리과정으로 인해 업무지속에 대한 갈등을 느껴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문원장은 지난 95년3월 문예진흥원 비상임 원장으로 취임했었다.
  • 고액과외 학원장 11명 구속/검찰/대성·고려등 유명입시학원 포함

    ◎불법 개인교습 학생강사 5명도 구속기소/학원서 소개비 등 받은 교사 10명 기소키로 서울시내 입시학원과 보습학원들이 법정 한도를 넘는 수강료를 징수하고도 매출액을 누락시키는 방법으로 거액의 세금을 포탈하는 등 온갖 불법·탈법을 저질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 불법을 저지른 학원 대표 가운데는 교육개혁위원회 위원과 전·현직 서울시 교육위원도 2명이나 포함돼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지검 특수2부(안대희 부장검사)는 3일 학원가의 탈세와 고액 과외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학원 등에 대한 일제 수사를 벌여 고려학원 및 한샘학원 원장 문상주씨(49·교육개혁위원회 위원)와 한국학원 원장 장기영씨(55·전 서울시교육위원) 등 학원 대표 7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세명보습학원장 이항수씨(45) 등 4개 보습학원장은 소속 강사들에게 과목당 30만∼1백80만원씩의 고액 과외를 시켜 부당 이득을 취하고,이병훈씨(54) 등 과외 교사 5명은 1백50만∼2백50만원의 고액 과외를 해오다 학원의 설립·운영 등에 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제일학원 원장 문원주씨(63·시교육위원) 등 대형 학원 원장 10명과 양재보습학원 원장 이옥배씨 등 보습학원 원장 8명 등 18명은 조세포탈 등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적발된 15개 입시 학원은 수강료를 법정 한도보다 10만∼90만원씩 더 받고 수강 인원을 속이는 수법으로 95년 한해에만 3백억원 이상의 수입을 누락시켜 온 것으로 드러났다. 고려학원 원장 문씨는 실제 수강 인원을 30% 가량 줄이고 가짜 영수증으로 매출을 누락시켜 95년도 소득세 10억여원을 포탈하고 교재 채택비로 현직 교사들에게 1억5천만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종로학원장 정씨는 사위를 대표로 세워 위장 설립한 「종로학습자료사」 등을 통해 진학지도비와 교재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수강료를 초과 징수,95년도 법인세 5억7천만원을 포탈하고 종로학원이 출제한 모의 수능시험을 채택해준 대가로 2억5천만원을 제공했다. 종로·대성 등 입시학원들은 전국의 고교 담당교사들에게 자신들의 부설업체가 주관하는 대입 모의수능시험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그 대가로 학생 1인당 수험료 3천원의 15∼20%를 리베이트 명목으로 제공,1년에 34억∼46억원을 건넨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지금까지 리베이트 수수 사실이 드러난 교사들 가운데 강남 지역 K고교 교장 1명을 포함해 5백만원 이상을 받은 10명 안팎을 불구속 기소하고 1백만원 이상을 받은 160여명은 교육청과 협의해 징계하기로 했다. 기소된 학원장 및 과외교사 26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속(16명)=▲종로 정경진 ▲고려 문상주 ▲대성 김석규 ▲서연 김삼용 ▲교연 김준성 ▲한국 장기영 ▲교신 유창한(이상 입시학원) ▲세명보습 이항수 ▲신성보습 박동수 ▲대청람보습 황태희 ▲혜성외국어 원웅연(이상 보습학원) ▲대종 이병훈 ▲청솔 김기철 ▲대종 이순병 ▲대원보습 오상확 ▲ 〃 김덕환(이상 과외교사) ◇불구속(10명)=▲강남청솔 김섭옥 ▲ 〃 김웅곤 ▲제일 문원주 ▲ 〃 임영규 ▲대종 김흥수 ▲정일 홍철화 ▲신한 권재덕 ▲남부제일 문희남 ▲서울종로 최도성 ▲대건 임채환
  • 지하철 2호선 또 고장/출근길 시민 큰 혼란

    26일 상오 9시23분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선로 변환장치인 전철기 고장으로 회차 중이던 제2170호 전동차(기관사 문원식·41)가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을지로입구에서 홍대입구 사이 양방향 선로에 있던 전동차 10여편의 운행이 35분 동안 중단됐고 홍대입구역에서 회차됐던 2호선 전동차는 을지로입구역에서 방향을 바꿔 을지로입구역∼당산역 구간만 운행했다. 올들어 서울 지하철이 운행도중 멈춘 사고로는 11번째이다. 이 사고로 출근길 승객 등 5천여명이 전동차에서 내려 버스와 택시 등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기 위해 지하철역 밖으로 몰려나와 홍대입구역과 을지로입구역 사이 6개역 주변의 교통이 크게 밀렸다. 승객 500명은 매표구에 몰려가 요금을 환불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 “「설공찬전」 최고 한글소설 아니다”

    ◎한국고소설학회 연구발표회서 잠정 결론/한문본 국역… 한글표기 소설로는 최고/이번 발견본은 구전된 것 일부 옮겨쓴듯 「설공찬전」은 한글로 표기된 최고의 소설이다.하지만 창작소설이 아니고 한문소설을 한글로 번역,표기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한글소설로 공인되고 있는 「홍길동전」보다 앞선 최고의 한글소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국문학계는 지난 10일 대전 한남대에서 열린 한국고소설학회 37차 연구발표회를 거치면서 「설공찬전」에 대해 대체로 이러한 잠정적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최근 발견된 「설공찬전」 한글본은 이문건의 묵제일기(1535∼1567년)에 기록된 조선 중종때 채수의 작품으로 「홍길동전」(1618년)보다 100여년 앞선 것으로 밝혀져 「최고의 한글소설」이냐의 여부를 놓고 국문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설공찬전」 한글본을 독점적으로 연구해온 서경대 이복규 교수는 이날 발표회에서 「설공찬전:국문본 발견 경위와 의의」라는 주제 발표문을 통해 『「설공찬전」은 한글로 표기된 최고의 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을 등장케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국문학사에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문소설의 번역이긴 하지만 같은 시기에 한글로 번역돼 유통된 것이 조선실록에도 나오는 만큼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표기 소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설공찬전」과 같은 류의 국역소설이 있었기 때문에 「홍길동전」과 같은 완벽한 형태의 한글 창작소설이 등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최고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이 너무나 완벽한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 혹시 한문원본을 국역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는 훌륭한 증거로 「설공찬전」이외에도 이번에 묵제일기에서 함께 발견된 권필의 「주생전」 그리고 「왕시봉전」 등 저자를 알 수 없는 3개의 한글표기 소설을 들고 있다. 토론자로 나선 고려대 강사 소인호 박사는 『유일한 역사기록인 중종실록에 「설공찬전이 한문으로 베끼거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됨으로써…」라고 되어있어 한문본을 국역했음이 분명하다』면서 『한글소설로 분류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한글소설은 처음부터 한글로 창작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교수도 이에 동의해 『「설공찬전」의 한글본 제목이 「셜공찬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한문원본의 제목으로 추정되는 「설공찬이」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문원본 「설공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한문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1465∼1470)의 바로 뒤를 잇는 전기소설로 초기 고소설사의 80여년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충남대 사재동교수(국문학)는 『이번에 발견된 한글본은 내용이 너무 부분적이고 허술해 한글번역원본이라기보다는 구전되던 것을 일부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늙은 젊은이」 늘어가는 세상인데(박갑천 칼럼)

    태평양전쟁때 일본해군 연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산본오십육).그 이름이 좀 색다르다.그의 아버지가 쉰여섯에 낳았기에 그리 지었다 하여 당시의 초등학생들끼리 떨떨해하며 낄낄거렸던 기억이 새롭다.『와,할아버지가 애를 낳았대요』 우리에게도 「쉰둥이」라는 말이 있다.아버지나 어머니가 쉰살에 낳은 아이를 이르는데 그 말에는 「드문 일」이라는 뜻이 곁들인다.하지만 쉰여섯에 낳는 것쯤 저리 가라는 사례도 있는 세상 아니던가.이를테면 청천당 심수경같은 사람.조선 선조때 영중추부사에 이르는 청백리였다.그가 75세에 아들을 낳은데 이어 81세에 또 아들을 낳고서 겸연쩍었던지 시 한수를 읊조린다. 『일흔다섯에 아들낳는 것도 세상에 드문일인데/어쩌자고 여든살에 또 아들을 낳는 것인고/알겠노라 조물주가 얼마나 바쁜지를/늙은이몸 하는 짓 내버려두는걸 보면』(한문원문 생략:「대동기문」).그 3년후 타계하는데 건강한 노년이었던 듯하다.세상에는 그런 늙은 젊은이가 있는가하면 골골거리는 젊은 늙은이도 있는 법.그러니 나이로만 늙고젊고를 따지는건 장님 코끼리만지기(군맹무상)같은 겉핥기가 된다고도 할 것이다. 이런 얘기가 더 신기하게 들리는건 70이 고래희이던 시절의 일이기 때문이다.한데 이젠 우리도 남녀 합한 평균수명이 70을 넘어선지 오래다.낳으려들자면 심수경같은 노인이 어찌 하나둘이랴.그렇긴해도 노인이라 할때는 아직까지 65세를 기준삼으면서 경로우대증도 내준다.그 노령은 해마다 늘어가기만.얼마전 통계청도 그 사실을 알려준바 있다.95년 기준으로 65세이상 노인은 2백64만명이었는데 이는 5년전에 비해 22.1% 늘어난 수치였다. 이같은 흐름따라 일본후생성 자문기구는 고령자를 지금까지의 65세에서 70세로 올리자고 초들었다.세계최고장수국인 일본이 고령화사회대책을 연구하면서 나온 결론.『65세면 한창 일할 나이』라는 것이었다.우리도 멀잖아 그뒤를 밟게 되는 것이리라.북한얘기긴 해도 62세 현역씨름선수가 우승도 하는 세상이 돼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궁극에 이르면 변한다(궁칙변:「주역」계사하)고 했다.흐르는 세월속에 변치않는건 없는터.언젠가 『70은 청춘』이란 말이 안나온다고야 하겠는가.한데,우리 사회 한구석엔 젊은 늙은이 만드는 잘뚜마기도 있구나싶다.〈칼럼니스트〉
  • DJ 전력시비 일단락(의정 초점)

    ◎“부딪쳐봐야 상처뿐”/여야 한걸음씩 양보/야­문제부분 삭제 요구… 정면대결은 자제/여­총리인준 등 의식 「DJ공격」 수위조절 3일 국회 본회의는 DJ(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사상전력 공방 재연 여부가 관심사였다.지난달 25일 여야격돌끝에 연기됐던 통일·외교·안보분야의 대정부질문이 이날 재개되면서 또다시 「충돌」이 우려됐다.그러나 여야 모두 한발씩 물러남으로써 정면충돌은 피하게 됐다. 이날 국민회의는 간부회의에서 전략을 수정했다.DJ의 「색깔론」을 제기한 신한국당 이용삼 허대범 의원의 질문원고에 시비를 걸지 않기로 했다.지난번 정면대결로 사태를 악화시켜 손해만 입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대신 박상천 원내총무가 교섭단체 대표발언을 통해 「용공음해 조작」을 부각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이는 대외적인 발표였다.박총무는 신한국당과의 접촉을 통해 문제부분의 삭제를 요구하는 양면작전을 폈다. 신한국당측이 바빠지기 시작했다.서총무는 두 의원 설득에 나섰다.그러나 본인들이 거세게 버티면서 질문 직전까지 진땀을흘려야 했다.두 의원은 결국 문제부분 삭제에 응했다.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이의원은 『DJ가 밀입북한 서경원을 통해 북한돈 1만달러를 받았다』는 내용은 뺐다.그러나 DJ의 「안보관」 등을 문제삼은 부분은 그대로 낭독했다.질의에 앞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에 대한 입장과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못박기도 했다. 국회본회의장의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 자리에 김옥두 박광태 남궁진 이윤수 의원 등 소속의원들이 모여 대책을 숙의하는 모습이 보였다.『남한권력 내 간첩이 5만명이라면 정권을 내놓아야지』『의장,이의원에게 경고주세요』 등 비난이 계속됐다. DJ의 「공산당 전력」의혹을 제기했던 허의원은 『국가 지도자는 안보관이나 군경력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사상검증을 수백번이라도 거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신한국당이 사실상 국민회의측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4일의 신임총리에 대한 임명동의 등 의사일정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 당지도부가 「DJ공격」 수위조절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 풍산그룹 임원 인사/풍산 부회장 정훈보씨/풍산사장 유진씨

    ◎머스코 풍산사장 김상준씨 풍산그룹(회장 유찬우)은 지난 1일자로 정훈보 (주)풍산 대표이사 사장을 부회장으로,유진 풍산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계열사에 대한 임원인사를 단행했다.머스코풍산(주)대표이사 사장에는 김상준씨가 임명됐다.인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풍산〉 △관리본부장(부사장) 이진우 △전무이사 서진택 △제1영업본부장 이문원 △제2영업본부장 김기문 △상무이사 이우탁·이병호 △이사 유윤하·허인원 △이사보 손신명 △상임고문 김사철 △비상임고문 이근수·김동영 〈풍산금속상사〉 △대표이사 전무 곽무석 〈풍산기계〉 △대표이사 전무 김갑정 〈풍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상무 이우진 〈부영공업〉 △이사 김태희
  • 오늘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 질의 「전운」

    ◎「DJ 사상전력」 재격돌 예고/신한국 이용삼·허대범 의원 “삭제불가”/국민회의 “법적대응 불가피” 강경자세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사상전력」시비 파문으로 3일로 연기된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의도 짙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달 25일 미리 배포된 질문원고에서 『김총재가 지난 88년 서경원 밀입북사건때 북한으로부터 1만불을 받았다』 『김총재는 6·25당시 공산당원이었고…』 등을 밝힌 신한국당 이용삼(강원 철원·화천·양구)·허대범(경남 진해) 의원이 3일 대정부 질의에서도 문제내용의 「삭제불가」를 고수하는 가운데 야당측은 법적 대응으로 맞설 태세다. 이·허의원측은 2일 『야당은 터무니 없는 온갖 설을 동원해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만 우리는 엄연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며 『원고의 삭제는 있을수 없으며 신상발언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이에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는 『대정부 질문에 앞서 총무발언을 통해 허·이의원이 주장하는 사실이 거짓임을 명백한 증거를 통해밝힐 예정』이라며 『그래도 이들이 문제내용을 고집할 경우 법적인 대응은 피할수 없다』고 말했다.
  • 논란빚은 원고내용/이용삼 의원­88년 간첩 서경원에 돈받아

    ◎허대범 의원­DJ 6·25당시 공산당원이었다 25일 통일외교안보분야의 대정부질문에 앞서 여야간 논란이 됐던 신한국당 이용삼,허대범 의원의 질문원고중 문제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용삼 의원=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88년 8월 간첩 서경원이 밀입북하여 북한으로부터 받아온 5만달러중 1만달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 바 있는데,그런 전력 때문인지 사상문제만 나오면 「용공음해」니 「용공조작」이니 하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우리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급 인사 가운데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가 또는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언행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수 없다. 허대범 의원=김총재는 간첩 서경원사건,문익환목사 밀입북사건,92년 대선 당시 주사파가 포함된 운동권 연합체와의 정책연합,김일성 조문론 파문 등 국민들로부터 안보위해 전력과 색깔에 대해 강한 의혹을 받은 바 있다.일본 월간잡지 「정계」의 96년 2월호에는 『김총재가 6·25전쟁 시 공산당원이었고,당시 체포된 450여명과 함께 미해군 함정에서 총살형이 되기 직전 미 해군 정보부에 있던 고향친구 김진하의 조언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이 실렸다.미국 『워싱턴 투데이」의 1면(95년 8월24일자)에도 크게 보도된 것이다.또한 해군본부 역사문헌 어디에도 없는 목포 경비부 예하 해상방위대에서 부사령관으로 근무했다고 하는 미확인 군경력을 자랑하는 김대중 총재는….
  • 대형서점 등소평사후 분석 서적 각광

    ◎「포스트 등」은 누구? 중국의 앞날은?/새로운 황제들­모택동의 신임과 박해 등 두거물 초점/등소평 문선­75년 첫 정치활동이후의 연설·담화문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삶과 사상 혹은 「포스트 등」을 주제로 한 책들이 독자들의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이를 반영하듯 교보문고·종로서적·을지서적 등 서울시내 대형서점들은 등소평 관련서적 특설코너를 이미 마련,독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현재 서점에 나와있는 등소평 관련 책은 그를 직접 다룬 것만 10여종.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새로운 황제들」(해리슨 E.솔즈베리 지음,다섯수레),「등소평 문선」(등소평 지음,범우사),「나의 아버지 등소평」(전2권,등용 지음,삼문),「등소평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김영화 지음,문원),「등소평 사후의 중국」(하빈 지음,연암) 등이 꼽힌다.앞의 3권이 등의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뒤의 2권은 「등이후」 정치·사회 등 예측에 비중을 두고있는 것이 특징이다. 「새로운 황제들」은 국공내전,백화제방,대약진운동,문화혁명,천안문광장 대학살 등 현대중국을 주조해낸 큰 사건들을 모택동·등소평 두 거물에 초점을 맞춰 살핀다.등소평이 어떻게 모택동의 비밀사업인 「3선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그의 신임을 얻어 권좌에 올랐으며 문화혁명시기에 모택동으로부터 어떤 박해를 받았는가,등소평이 모택동의 부름을 받고 복권된 뒤 어떻게 강청에 의해 다시 숙청당했으며 엽검영 원수는 어떻게 강청과 사인방을 타도하고 등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켰는가….지은이는 이 모든 과정을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보여주듯 생생하게 재구성해 그린다. 「등소평 문선」은 등소평이 문화혁명에서 축출된 뒤 재차 복권돼 당부주석·당정치국상임위원·중앙군총참모장을 맡아 처음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1975년 1월 중공당 제10기 2중전회부터 최근까지의 연설·담화·회견 등을 모은 것.이를 통해 독자들은 등소평의 국가경영철학과 신념을 어렵잖게 엿볼수 있다.「나의 아버지 등소평」은 등소평의 셋째딸인 등용이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일생을 서술한 책이다.등소평이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고학하는 과정과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 변모해간 전후사정을 상세하게 다루며 등소평의 가정과 혼인,성격,취미 등도 충실히 소개한다. 「등소평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는 등소평의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과정과 그의 사후 중국정치 전망을 담은 국내 학자의 연구서.등소평은 『방법상의 타협은 있을수 있지만 원칙상의 타협은 결코 있을수 없다』고 했다.그는 정치적 원칙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하를 겪게 됐지만,그가 다시 삼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인간적 포용성과 아량 때문이었다.하나의 예로 등소평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고 언제든 재기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정치적 금도를 보였다.요컨대 등소평은 정치권력보다는 정치권위를 통해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할수 있다.이런 관점에서 지은이는 등소평의 지도력을 「탄력적 리더십」으로 규정한다.이 책은 등소평 이후 중국정치에 관해서는 『강택민 중심의 주류파와 조자양 중심의 비주류파가 대립구도를 이루겠지만 개혁개방의 흐름은 완급을 조절하며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등소평 사후의 중국」은 「중국 태자당」「주용기전」의 저자인 중국의 정치분석가 하빈이 천체물리학자 방려지 등 세계석학 43명의 중국정세 진단을 토대로 쓴 책.「등이후」 양안관계에 대해 이 책은 대만이 독립을 선포하지만 않는다면 북경이 대만에 강경정책을 취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으로 내다본다. 이밖에 「문혁수익자」 화국봉과 「문혁수해자」 등소평을 비교분석한 「중국을 움직이는 사람들」(김소중 지음,종로서적),등소평의 내면세계와 외부활동을 아울러 소개한 「태상황제 등소평전」(비라치 디네스 지음,신서원),등소평 사후의 문제를 폭넓게 다룬 「등소평 이후의 중국」(왕조군 등 지음,조선일보사) 등도 눈길을 줄만한 책이다.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도서출판 자유문고,「이향견문록」 해석본 상·하권 내

    ◎조선시대 민장들의 287가지 사연/1862년 문인 유재건이 엮은 여항 전기류/서민에 초점 맞춘 민중사 연구 귀한 자료 조선시대 서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기록한 전기집 「이향견문록」해석본 상하권(이상진 옮김)이 도서출판 자유문고에서 나왔다.조선 후기의 문인 유재건이 1862년에 편찬한 「이향견문록」은 제목이 암시하듯 「이향」(백성들이 사는 동네)에서 보고들은 다양한 인물군상들의 이야기를 적은 책.현재 전하는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이나 자료들이 대부분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하고있는 반면,이 책은 중인이하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조선시대 민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책에는 규장각에 근무했던 중인계층 서리인 엮은이가 각종 문집과 기록 등에서 채록하거나 스스로 지은 287조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대상인물은 일반 백성에서부터 기인,신선,기생에 이르기까지 311명.비슷한 성격의 「여항전기류」인 「호산외기」와 「희조일사」가 각각 42명,85명을 다루고 있는 것과 비교할때 그 규모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향견문록」은 손으로 직접 베껴쓴 필사본으로 모두 10편으로 이뤄져 있다.「덕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들」「충신과 효자 효부들」「지모를 겸비한 호걸들」「가정을 일으키고 지킨 여인들」「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상중하)「한폭의 작품과 싸운 화가 서예가들」「의사 약사 바둑 음악 점술의 대가들」「신선 도사 승려 기인들의 행적」등이 그 내용.이 가운데 중인계층의 시인,문사들의 이야기가 3편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후기에는 기술직 중인인 의관이나 역관,승문원·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한 문학 즉 「여항문학」이 특히 발달했다.이 책은 당나라 시인 고적·잠삼에 버금간다는 칭송을 들은 홍세태를 비롯해 시모임 직하사를 결성한 최경흠,「매화시 미치광이」로 불린 김석손 등 71명의 문장가들의 구체적인 작품세계와 일화를 통해 19세기 여항문학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고 있어 주목된다.
  • 현대의 축지법… 「대재터널」 뚫는다(박갑천 칼럼)

    『연못수면 어둑어둑 물연기 고요한데/밤깊은 베개맡에 물고기 뛰는소리/밝은 여강 달은 기까이서 대하건만/대재(죽령)가 하늘을 가려 그대 볼수 없구려』(한문원문 생략) 망헌 이주(망헌 이주)의 칠언절구(제충주자경당)다.이망헌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갑자사화때 죽은 선비.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다.죽령이 가려서 못본다고한 그대(군)는 누구였을까.유성룡은 시의 경지가 깊다면서 그 보법을 극찬하고 있다. 이망헌이 한탄했듯이 죽령은 예나 이제나 천험.「삼국사기」에는 이고갯길을 신라 8대임금(아달라니사금)5년에 열었다고 적어놓았다.임진왜란때도 밀려오는 왜군이 새재(조령)와 함께 이 「대재­죽령」을 넘어섬으로써 된바람의 기세로 우두망찰해있는 이땅을 휩쓸어 올라갔던것 아닌가.두 고갯길만 잘 지켰더라면 싸움은 달라졌을 것을. 옛날 어떤 도승이 대지팡이 짚고 이고개를 넘다가 쉬면서 땅에 꽂았다.그게 살아나 잎이 돋았으므로 「대재」 또는 「죽령」이라 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그건 전설일뿐 토박이이름은 「대재」고 그걸 한자로 쓴 것이「죽령」이다.「대」는 크고 넓고 밝다는 뜻을 갖는 우리 옛말.전국 땅이름에 보이는 「대섬·대뫼·댓개·댓들·대뜸·댓말…」 등이 그것이다.대재가 「죽령·대치·대산…」으로 된것과 같이 대섬은 「죽도·대도」로 되었다. 「삼국유사」에 있는 효소왕대죽지랑을 이 「대재­죽령」과 연관짓기도 한다.거기 나오는 「죽지령」을 죽령이 아닌가 어림잡으면서.이 죽지령에서 신묘한 꿈과함께 태어난 아이 죽지가 김유신과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다.이에 근거했음인지 옛날에는 대재 고갯마루에 김유신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영주시·영동군 펴낸 「우리고장의 전통문화」). 충북 단양(용부원리)과 경북영주(풍기읍)를 잇는 대재터널공사가 시작됐다.4.13㎞로 국내에서 가장 긴 이 공사는 2002년에 끝낸다고 한다.지금까지도 죽령터널이 있긴 했다.용부원리 죽령역에서 경북 희방사역까지의 4.5㎞에 이르는것.일제가 군수물자 나르고자 빙빙 돌아서 만든 「또아리굴」이었다.그걸 이제 우리가 정공법으로 뚫는다. 이건 현대의축지법이다.다만 「죽령터널」보다는 「대재터널­대재굴」로 불러나가게 됐으면 어떨지.〈칼럼니스트〉
  • 국민대서 북 찬양서적 대량 발견/경찰 출처파악 수사

    ◎서울·과천 주택가서도 김일성찬양전단 서울대와 서울 마포구 주택가에서 김일성 찬양전단 등 불온문건들이 잇따라 발견된데 이어 국민대에서도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불온서적 283권이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학교 임상용 열람과장은 9일 낮 12시45분쯤 학교시설을 점검하던 중 교내 성곡도서관 지하 1층 학생 사물함 위에 불온서적들이 신문지에 덮여 쌓여있는 것을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52쪽짜리 책자에는 「다시 보는 북부조국」이라는 제목과 「이북거리 자료집」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으며 발행인은 「자주 국민 제4기 조국통일위원회」로 돼 있다. 경찰은 책을 수거해 내용의 이적성 여부를 분석하는 한편 발행인이 조국통일위원회인 점을 중시,「한총련」산하 조국통일위원회와 관련이 있는지를 수사 중이다. 한편 국민대 총학생회는 『국민대 조국통일위원회는 지난해 해체됐으며,제4기는 93년도에 있던 조직』이라며 『당시에 배포되지 않았던 책자들이 뒤늦게 발견된 것으로 현 총학생회는 책자의 제작 및 배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과천=조덕현 기자】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서울대공원 부근 야산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불온 전단과 소책자 등 16점이 발견돼 경찰이 출처파악에 나섰다. 과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9일 상오 2시20분쯤 부림파출소 박태진 순경이 순찰도중 문원동 야산과 주택가 주변에 떨어져 있는 소책자 「별빛」 8권과 김일성 사망 2주년을 기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불온 전단 8장을 발견,수거했다. 10쪽짜리 소책자에는 북한의 전자산업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 담겨있고 전단에는 「김일성 주석의 통일유혼을 기필코 이뤄내자」는 제목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중,4인방 요문원 석방

    【홍콩 AFP 연합】 중국은 문화혁명때의 악명 높은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71)을 20년간의 형기가 끝난후 6일 석방한다고 홍콩의 명보가 중국소식통들의 말을 인용,4일 보도했다.
  • 중국인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택동/학빈 북경대 부총장(해외기고)

    ◎사망 20주년을 맞아/공·과 엇갈린 평가속 연구·출판 활발 모택동이 이 세상을 하직한지 9일로 20주년을 맞았다. 『동녘이 밝아오고 태양이 솟아오르듯 모택동이 중국에 나타났다』 금세기 중반 서북부 오지에서 연해 대도시까지 중국전역에 널리 불렸던 노래가사의 일부다.모택동이 이끈 혁명은 절대다수 중국인,특히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유례없이 개선시켰다.「신중국」을 세운 그의 이름은 이같은 업적을 바탕으로 점점 신성시됐으나 그와함께 잘못된 정책결정도 더 빈번해져 갔다.인민에게 재난을 가져다준 잘못된 정책결정은 76년 모사망때까지 계속됐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모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을까.과오에도 불구,그는 12억 중국인 모두가 기억하는 몇명의 위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전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평가다.천안문광장의 모택동기념관에 아침 일찍부터 줄을 늘어선 인파,그의 출생지 호남성 소산에 건립된 기념관과 13년동안 생활한 서북부 황토고원의 토굴집을 천리가 멀다않고 찾아가 참배하는 각양각색의 중국인들…. 그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속에서도 20년의 세월은 존경의 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그 변화가운데 하나는 외부의 강제적 압력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존경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시하게 됐다는 것이다.공과,시비를 한몸에 지닌 모이지만 중국 일반인들은 그를 매우 가깝게 느낀다.몇년전 일부 남부지방의 장거리 버스 운전기사들이 작게 축소해 만든 모사진을 운전석앞에 걸어놓고 다닌것이 순식간에 중국 전역에 하나의 유행으로 퍼졌고 이젠 어느곳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운전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는 더이상 「문화혁명」시기의 우상이 아닌 상서로움과 평안,부유를 내려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음을 발견케 된다.오늘 중국과 현재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의 기반은 50년전 모가 닦아놓은 것이란 생각이 오늘을 사는 중국인의 뇌리속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20년전과 다른 또 한가지는 존경의 표시와 함께 과오에 대한 거리낌없는 비판이다.초기 모의 업적은 그의 결정이 모두 옳은 것으로 맹종케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냈다.이같은 경향은 60년대 최고조에 올랐으나 그의 말년에 이르러 갈수록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됐다.그가 사망하고 왕홍문·장춘교·강청·요문원 등 「4인방」이 숙청된뒤 78년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3중전회)는 「어떠한 모주석의 결정과 지시라도 따라야 하고 지켜야 한다」는 원칙(「양개범시론」)을 부정하게 됐다. 이 결정은 일부에서 모업적을 전면부정하게 만들기도 했다.이같은 변화속에서 등소평은 80년3월부터 81년 6월사이에 9차례의 지도성 담화를 발표,모택동의 재평가 작업을 마무리지었다.이로써 그에 대한 맹종과 완전부정이라는 극단적 두 시각은 부정과 긍정을 담은 커다란 강줄기로 통합돼 역사위에 남게 됐다.중국혁명과 건국에 끼친 모의 공은 과오를 넘어선 것이고 젊은시절 그의 활약과 이론은 무한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혁명가 박일파가 3년전 저술한 한권의 책은 오늘날 중국인들이 모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오랫동안 부총리직을 담당했던 그는 「몇가지 중요한 정책결정과 사건에 대한 회고」란 책에서 49년부터 66년까지 이루어진 43건의 중요한 정책결정및 사건에 대해 기술해 놓고 있다.이 책은 모의 정책결정에 긍정적 평가와 함께 정책상 오류의 원인과 바로잡아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이 85세의 노인은 모택동의 추종자로서 범한 오류를 낱낱이 털어놓으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그는 『이 시기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객관적 분석은 앞으로 우리가 국가건설에 있어 역사를 거울로 삼아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철저한 자기반성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속에 중국에선 모택동연구가 한창이다.북경대학을 비롯 각 대학에선 학생들도 모관련과목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76년이후 지금까지 모의 저작은 끊임없이 출판돼 왔다.「모택동 저작선독」은 한번에 73만권이 인쇄되기도 했고 5백만자에 달하는 「건국이래 모택동 문고」는 이미 9권이 출판된 상태다.이 문고는 그의 글과 지시문,결재의견,연설문요지,주석,서류상에 가필한 글자등이 망라되고 있다.이밖에도 「모택동 철학비주집」은 철학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모택동 신문공작문선」은 기자와 신문편집인들사이에 즐겨 인용되고 있다.그의 서신선집과 시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모는 신의 위치에서는 끌려내려왔지만 여전히 역사의 거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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