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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눈을 떴다. 문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암실에 있으면 의식도 시간도 모두 멎었다. 이곳에 온 후 나는 주로 암실에서 지냈다. 둥글게 몸을 말고 바닥에 누워, 불필요한 감각이 퇴화된 심해의 생물처럼 눈과 귀를 닫았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촉각이었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아래로 가라앉았다. 공기는 욕조 속의 더운 물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내 몸을 감쌌다.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경쾌한 리듬의 허밍이었다.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가게 안으로 누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몸 마디마디를 주물렀다. 피가 돌면서 눌려있었던 몸 왼쪽이 저려왔다. 암실 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다. 손그늘을 만들고 부신 눈을 떴다. 딱딱한 알루미늄 가방 위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햇빛 속에 앉아있는 여자는 스스로 빛나고 있는 빛 무더기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빛이 스러지면서 여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는 얼굴빛이 유달리 희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팔은 윤곽이 희미했다. 홀로그램의 영상처럼 반쯤은 투명해보였다. 악수를 청하는 것인지 자신을 일으켜 달라는 것인지 몰라 잠시 주춤거리다가 여자의 손을 맞잡았다. 여자는 손아귀 깊숙이 손을 넣고 힘차게 흔들었다. 자칫하면 못 찾고 그냥 돌아갈 뻔했어요. 초행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도시에서 상가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고 한다. 다리 건너편으로 버스터미널이 이전하면서 그쪽에 신시가지가 형성된 후로는 죽은 골목이 돼버렸다. 사진관은 옛 번화가의 뒷골목에 위치했다. 원래는 주택가였는데, 주택을 허물고 상업용 건물을 급조해 형성된 상가였다. 지금은 가게를 연 곳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이곳은 구식 양옥의 1층을 개조해 가게로 쓰던 것이어서 밖에서 보면 가정집처럼 보였다. 오기 전에 부동산에 들렀어요. 한 달 전에 이미 매매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저에게 세 놓을 생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임대를 목적으로 산 집이 아니었다. 여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중고로 구입한 17분 컬러 현상기가 한 구석에 놓여있을 뿐,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진관을 하려고 산 건물이지만 한 달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암실에서 보냈다. 배가 고프면 끼니를 때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얼룩져 더러워진 벽을 따라 걷다가 쪼그리고 앉아 바닥의 나뭇결을 들여다보았다. 곳곳의 정경들을 기억 속에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세밀하게 보았다. 여긴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오래전에 아버지가 여기서 사진관을 했어요. 위층에 살림을 차리고요. 여자의 나이를 가늠해봤다.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에 언뜻 보면 어려보였지만 눈가에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아래쯤일 것이다. 여기서 함께 지내게 해주세요. 처음엔 그냥 둘러보고만 가려고 했어요. 막상 와보니 여기 있고 싶어지는군요. 세를 놓는 건 싫다고 하셨죠? 대신 일을 하겠어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가게를 열면 가게일도 도와드릴게요. 여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말끄러미 보았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과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한데 섞여 있었다. 어떤 말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 집안일과 병간을 도맡았던 아주머니와 6개월여를 함께 지내본 적은 있지만, 나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여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점.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와 그곳에 살고 싶어 한다면 무언가 절박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어딘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태어났다는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와 묏자리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도로의 모퉁이에 나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가 느이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던 자리다. 나는 자동차 속도를 줄이며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골목은 동굴의 입구처럼 어두웠다. 가로수에 가려 골목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무성한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음산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는 이 길이 번화가였지. 세가 워낙에 비싸서 느이 아버지가 저 골목 끝에 있는 집을 사서 아래층을 가게로 개조했다.2층에다 신접살림을 차렸고, 너도 거기서 낳았어.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저기서 오래 살았을 게야. 그때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골목 어름을 언뜻 보고 지나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진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으로 성큼 들어서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생전의 아버지처럼 사진관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 머릿속은 어두운 골목으로 가득 찼다.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의 유순한 흐름을 따라 유유히 나의 생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49재를 치르고 어머니의 무덤에 왔다가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뽀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성한 것은 지붕까지 뻗어있는 담쟁이덩굴뿐이었다. 근처의 부동산을 찾아가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곧장 계약서를 썼다. 다니던 잡지사에 사직서를 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내 사진기자로 일하던 직장이었다. 지구 곳곳의 풍경을 주제로 하는, 사진 중심의 다큐멘터리 잡지였다. 사직서는 그날로 수리되었다. 잡지는 상업성이 강한 잡지들을 출간하는 모(母)기업의 품격을 위해 창간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사진이 실리는 잡지를 다수의 대중은 외면했다. 독자가 많지 않으니 당연 광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기가 침체되자 모기업은 서서히 경영에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권고사직을 당할 형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사무실 문을 나서자 동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통장으로 입금된 퇴직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보험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내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남긴 상자에는 어머니의 결혼 예물과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세 장의 보험증서가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나는 보험증서를 쥐고 오열했다. 오십 몇 년의 삶의 흔적이라기에는 세 장의 종이는 너무도 가볍고 쓸쓸한 것이었다. 2층의 방을 쓰세요. 저는 여기 암실에서 지내면 되니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됩니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로군요. 여자는 알루미늄 가방을 메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자연스럽게 밟고 올라갔다.2층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반으로 접히는 휴대용 침대를 암실에 갖다놓고, 내 물건들은 거실에 놓았다. 여자가 식사준비를 했다. 여자는 냉장고 뒤쪽 구석에 쑤셔 넣어두었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여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자기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처럼 양념통이나 필요한 재료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무언가 도와야 할 것 같아서 주위를 서성대던 나는 머쓱해져서 1층으로 내려왔다. 여자가 차린 상은 정갈했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인스턴트식품만 가득했었는데, 여자가 차린 밥상에는 찌개에 윤기가 흐르는 밑반찬까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여자의 음식은 어머니가 해주던 것과 맛이 흡사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요? 여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싱긋 웃었다. 환한 빛이 얼굴 가득 퍼졌다. 이곳에 머무는 대가로는 좀 과분하군요.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여자는 늘 조용히 움직였다. 내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암실에서 보냈다. 여자는 시간에 맞춰 요리를 했다. 거실로 내어 놓은 옷장 속에는 바싹 마른 옷가지들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여자가 내게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거칠게 그린 가게 구조도와 비용에 관한 세목이 적혀 있었다. 사진관을 열었으면 해요. 여자가 건넨 종이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종이 몇 장으로는 가게의 모습이 요연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내 생각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었다. 우선 가게에 있는 17분 현상기는 되팔았으면 좋겠어요. 오랫동안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해왔지만 사진관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증명사진이나 간단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작은 스튜디오를 갖추고, 현상·인화 서비스를 하면 되겠다 싶어 17분 컬러 현상기를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다. 여자는 내 옆으로 바투 다가와 앉아 손끝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계획을 설명했다. 암실은 공간이 꽤 넓으니까 두 개로 나누었으면 해요. 조명기기와 카메라 장비를 구입해서 작은 스튜디오를 만들고요. 표준화된 QSS방식으로는 사진을 기록물로만 여기는 사람들의 기대만 충족시킬 수 있죠.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돼서 현상만으로는 가게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암실을 개방해서 수작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차나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곳, 제가 꿈꾸고 있던 사진관이에요. 암실에서 나와 보니 벽에 호두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가게 구석에 있던 자동 현상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무릎을 대고 엎드린 채 기름걸레로 바닥의 나무를 닦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켜켜이 나무의 결이 살아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암실 공사하러 인부들이 올 거예요. 가벽을 세우는 거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조금 시끄러울 거예요. 어디 잠깐 다녀오는 건 어때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내려온 후로는 첫 외출이었다. 나오기는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SLR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내내 들고 다녔던 것인데, 검은 몸체의 카메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이물스러워 보였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버스에서 내려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들판에 앉아 서서히 땅에 내리고 있는 어둠을 응시했다. 구릉처럼 낮은 산의 언저리에는 스러진 햇빛이 모여 검붉은 노을로 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도 차도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사물의 윤곽이 어둠에 검게 물들어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피로하지 않았다. 끼니를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몸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불현듯 여자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가게에 걸려 있는 간판에 불이 환했다. 간판에는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암실카페 - 빛이 스며든 자리’라고 씌어 있었다. 공사가 끝났는지 가게 안은 조용했다. 출입문을 열자 직사각의 탁자 세 개가 보였다. 한쪽 면을 벽에 붙인 탁자에는 어림잡아 2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실과 스튜디오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는 주방이 들어섰다. 주방은 음료와 간단한 안주를 만들 수 있는 바bar 형태였다. 주방 옆에는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여닫이 유리문이 달린 업소용 냉장고 안에는 캔음료와 몇 종류의 맥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암실 옆의 공간에는 몇 개의 조명기구가 놓여있는 작은 스튜디오가 꾸며졌다. 스튜디오를 제외한 가게의 정경은 카페에 가까웠다. 늦은 시간에 맥주를 마시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겠군요. 사진관보다는 호프집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죠. 하지만 저는 이 이름이 썩 마음에 들어요. 어두운 방에 스며든 빛의 흔적, 그게 바로 사진이니까요. 여자는 벽의 진열장을 닦고 있었다. 이곳에 카메라를 진열해 놓았으면 해요. 예전에는 사진관에 카메라 진열대가 있었지요. 집집이 가정용 카메라를 구비해놓기 이전에는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대여했으니까요. 가방 속에 묵혀두는 것보단 가게로 내오면 오래된 사진관 이미지도 풍기고, 손님들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클래식 카메라도 보여주고 좋을 것 같은데요. 진열대는 애초부터 카메라를 놓으려고 만든 것 같았다. 천장에 진열대를 비추는 작은 조명이 있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선반 형식의 진열대에는 유리문이 달려 있었는데, 먼지가 새어들지 않도록 틈새에 실리콘으로 패킹 처리가 되어 있었다. 2층에서 카메라들을 가져왔다. 케이스에 넣어 상자에 보관해왔지만,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클래식 카메라를 사용할 기회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오토포커스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해 사용했고, 얼마 전까지는 디지털 카메라를 썼다. 내게는 꽤 많은 카메라가 있었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보유하게 마련이었다. 클래식 카메라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카메라는 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되던 해 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 그리움 따위의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첩에 꽂혀있는 사진이나 카메라처럼 정물적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대의 카메라도 팔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카메라를 꺼내 닦았다. 그 일은 어머니에게 지난 일을 추억하게 하는 사진첩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카메라를 닦으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는 추억은, 흐려지지 않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그림자는, 사막에 묻힌 수천 년 전의 미라처럼 영원히 썩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어머, 이건 콘탁스II네요. 여자의 음성이 높아졌다.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기 전에는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요. 처음 사진을 배울 때부터 이걸 썼어요.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주로 갖고 있는 카메라는 니콘FM2였다. 가격에 비해 성능이 꽤 괜찮은 제품이었다. 간혹 클래식 기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라이카를 들고 다녔다. 콘탁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카메라는 아버지가 월남전에서 돌아올 때 구입한 것이라 들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 카메라의 각별한 내력을 말했으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가 2층으로 올라가 알루미늄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앉아있던 가방이었다. 여자가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콘탁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카메라 앞면에는 키릴문자로 киев라는 로고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 카메라는 1949년에 생산된 키예프 카메라예요. 생산지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지방이지만 부품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왔지요.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소비에트는 전쟁배상금으로 콘탁스 카메라의 메이커인 자이스 이콘(Zeiss Ikon)을 요구했어요. 공장의 모든 부품과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우크라이나로 이송됐지요. 파견된 드레스덴의 노동자들이 자이스 이콘의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었으니 이 카메라는 콘탁스II와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인 셈이지요. 여자는 수건으로 자신의 카메라를 닦았다. 카메라를 만지는 여자의 손놀림은 병든 육친의 몸을 닦아주는 손길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해 보였다. 이 카메라는 제게 존재증명과도 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유품이거든요.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었지요. 월남에서 번 돈으로 이 카메라를 샀어요. 지금이야 회사원의 한 달 월급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 돈이면 읍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해요. 어렵게 구입한 카메라지요. 아버지가 월남에서 부쳐온 돈을 큰아버지가 들고나갔었다니까요. 장사를 해보겠다고요.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읍내의 모든 술집을 뒤졌대요. 동생이 목숨 걸고 번 돈인데 술맛이 나더냐고 꾸짖어 모셔왔대요. 정혼한 사이긴 했지만 결혼 전이고 손위 시숙인데, 어머니는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요. 큰아버지는 하는 일 없이 술과 여자로 평생을 보냈어요. 나쁜 분은 아니에요. 어느 집안에나 그런 무능하고 호방한 큰아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때 만약 어머니가 큰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더라면 제게 유품 같은 건 남지 않았겠지요. 지금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저 혼자니까요. 이 카메라 외에는 제 존재를 증명해줄 무엇도 남지 않았어요.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일까. 나와 비슷한 삶의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여자가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혈육처럼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 사진관으로 온 것도 여자가 카메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 막연한 불안감은,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무엇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회귀성 어류처럼 내가 태어난 이 사진관으로 흘러들었던 것인지도. 사진관에는 손님이 없었다. 몇 차례 늦은 시각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맥주를 찾았다. 여자는 암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이라고 가게에 대해 설명한 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첫 손님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자애였다. 주민등록증에 쓸 증명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로 즉석에서 사진을 올린다고 말했다. 여자애는 알고 있다며 한 음절씩 힘주어 말했다.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여자애는 탁자에 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검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자애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주었다. 커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여자애는 기름종이로 이마와 콧등의 유분을 닦고, 콤팩트 퍼프로 꼭꼭 눌렀다. “왜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이건 증명사진이니까요. 처음 발급받는 주민등록증이거든요. 원판이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사진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숫자와 지명과 이름과 125분의 1초 동안의 모습과 소속된 나라 외에 또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이라는 말이 하나의 역설처럼 느껴졌다. 증명이 목적인 플라스틱 카드는 정작 중요한 것은 증명할 수 없었다. “저는 디지털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진은 원판이 없잖아요. 디지털 사진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고, 삭제하는 것도 복사도 고치는 것도 쉽지만, 어쩐지 그것들은 떠도는 이미지들처럼 느껴져요. 상이 음각으로 새겨진 필름의 원판은 이를테면 이미지가 깃드는 집 같은 거죠.” 여자애의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다. 작고 까맣고 윤기가 도는 점이었다. 나는 보정을 원한다면 점을 없애주겠다고 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었다. “눈 아래에 있는 점은 눈물점이라고 어른들이 빼라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저는 이 점이 좋아요. 점도 제 몸의 일부니까요. 사람들은 이 점 때문에 저를 쉽게 기억해요. 아마 아저씨도 그럴걸요.” “사진은 내일 찾으러 와요. 여기서 직접 현상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요.” 사진을 담아두는 봉투를 내밀었다. 여자애는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썼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였다. 여자애는 이현아라는 이름 옆에 한쪽이 지나치게 부푼 하트 문양을 그려 넣고, 내게 찡긋 윙크를 했다. 여자애가 지갑을 꺼냈다. 첫 손님이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 암실도 이용할 수 있나요?” “암실에서 직접 현상할 수도 있고, 현상을 맡길 수도 있어요. 스튜디오도 사용할 수 있고요.” “좋은데요.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곧 손님이 늘어날 거예요.” 암실에 누워 있다가 몹시 갈증이 나 밖으로 나갔다. 진열대의 조명등만 켜져 있었다. 여자는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들고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암실은 깊은 바다 속 같아요. 햇빛이 닿지 않아 어둡고 추운 곳. 암실에서는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농밀한 어둠뿐이에요. 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거기에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곳에 있나요? 거기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요? 두려움, 고독, 침묵, 약간의 위안, 그리고 나. 암실에 누워 있으면 또 다른 내가 보여요.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예요. 수면에 비친 모습처럼 좌우가 바뀐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해요. 암실에 누워있는 나와 나를 응시하는 나 중에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존재하는 걸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주변이죠. 당신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당신을 보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가 조금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주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이 거울 속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 반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빅뱅 직후 물질과 반물질이 각각 우주와 반우주를 형성했으며, 이 둘은 서로 맹렬한 속도로 멀어져갔다고 추측했다. 반물질은 물질을 만나는 순간 백만 분의 1초보다 빠른 속도로 상쇄되기 때문에 물질계에 있는 우리들은 반물질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맥주잔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싶었다. 여자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었다. 내 손이 여자에게 닿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사진관에 온 두 번째 손님은 가게로 들어와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잡은 손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는 이현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눈에 그가 이현아의 오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현아의 증명사진이 든 봉투를 건넸다. “현아 오빤 거 어떻게 아셨어요? 신기하네. 남매지만 닮은 데가 별로 없거든요.” 굳이 닮았다고 한다면 이미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이미지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아가 다녀가고 난 후 그 다음 손님이 현재였기 때문이었다. 곧 손님이 늘어날 거라던 현아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형.” 그는 가방에서 세 통의 필름을 꺼냈다.‘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접했던 현상·인화 작업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두 개의 필름을 그에게 다시 건넸다. 외형발색 필름이었다. 외형발색 필름은 유제층 안에 발색제가 없어서 필름제조회사에서만 현상할 수 있었다. 암실 수납장 안에는 약품부터 액정에 불이 들어오는 디지털시계, 라텍스 장갑까지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현재가 알고 있는 것은 암실작업의 일반적 과정뿐이었다. “암실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말 놔요, 형.” 현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암실 작업도 사진 찍는 것과 같아.” 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놓는 편이 아니었다. 막상 말을 놓고 보니 현재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인지, 웃음기 많은 얼굴 때문인지 현재에게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없었다. 세이프라이트를 켜자 현재가 암실 문을 닫았다. 작업을 하며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현재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열심히 이론공부를 해도 직접 찍어보기 전에는 실력이 늘지 않잖아. 암실작업도 그래. 온도와 시간을 지킨다고 발색현상이 잘 되는 건 아냐. 날씨나 환경에 따라 그날그날의 기온과 습도가 다르니까. 적절한 온도와 시간은 암기가 아니라 감이야. 감을 잡으려면 결국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어.” 현재는 인화된 사진을 보며 뿌듯해 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인물사진이었다. 수준급인 사진도 더러 있었지만 사진의 노출이 대부분 오버돼 있었다. 현재는 다음 동호회 모임은 이곳에서 갖기로 했다며, 이제부터는 손님이 꽤 늘어날 거라고 했다. 동호회 사람들은 현재와 비슷했다. 제일 먼저 현재가 현아와 함께 왔고,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암실에서 작업을 하거나 각자의 사진을 돌려보았고, 더러는 일찌감치 술판을 벌이는 치들도 있었다.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나이도 직업도 각색인 듯 보였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거나 현재처럼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격 없이 대했다. 그들은 원래는 풍경사진을 주로 찍는,‘미라지Mirage’라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호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시야를 좁혔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게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물었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한 잔 더 해야겠다며 여관방을 잡아 나갔다. 현재가 가게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고 했지만, 돌려보냈다. 가게 문을 닫고 어질러진 탁자를 그대로 놓아둔 채 암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데다가 몸이 몹시 피곤했다. 구석에 접어놓은 침대를 펼치자마자 나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문소리에 잠이 깼다. 열린 문 사이로 새어든 달빛이 바닥을 은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는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자는 내 뺨을 감싸 쥐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 사이로 여자의 혀가 들어왔다. 여자는 혀로 내 잇바디를 훑었다. 여자의 혀는 복족류의 속살처럼 차고 부드럽고 미끈거렸다. 가슴이 더워졌다. 나는 팔로 여자의 등허리를 감고 입을 열어 여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잠이 든 체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뜨거워진 가슴을 달랬다. 여자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걸어 나가 문을 닫았다. 늦게야 일어나 암실에서 나왔다. 여자의 둥근 등이 보였다. 여자는 암실을 등지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가게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몸속의 색소가 다 바랜 것처럼 여자의 얼굴빛이 창백했다. 당신의 사진에는 색이 없군요. 하나같이 흑백사진뿐이에요. 게다가 당신의 사진은 너무 어두워요. 노출이 부족해요. 노출이 모두 -2스톱이군요. 글쎄요. 저는 적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슬라이드 필름을 쓸 때에는 노출이 오버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배웠거든요. 카메라는 어두운 방이죠. 무언가를 찍기 위해서는 빛이 들어와야 해요. 조리개를 조금만 더 열고 셔터 속도를 늦춰요. 햇빛 때문일까. 뒷면에 양면테이프를 붙인 사진을 스크랩하는 여자의 손끝이 투명하게 보였다. 물에 떠 있는 한천질의 자포생물처럼 손가락 아래로 사진이 흐릿하게 비쳤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한 것이 아니었다. 눈과 코와 입술의 윤곽이 희미해져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봤다.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감았다 뜬 사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탁자를 보자 여자는 여전히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여자를 보자 여자는 싱긋 웃었다. 여자는 자주 사라졌다. 몇 시간 또는 며칠씩 사라지기도 했다. 돌아온 여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안일을 하고 가게를 돌봤다. 손님이 점차 늘어서 가게일이 바빴다.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가게 안에 있던 여자가 어느새 연기처럼 희미해져 실루엣으로만 넘늘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여자가 완전히 사라지던 날, 현재가 현아와 함께 찾아와 라이트 페인팅 작업을 했다. 사진 관련 잡지에서 루미노그램(Luminogram,光跡사진)에 대한 글을 보고 실제로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끝에 불이 들어오는 펜 모양의 라이트를 들고 온 현아는 이민 간 친구에게 라이트 페인팅으로 편지를 써서 보낼 거라며 몹시 들떠 있었다. 라이트 페인팅은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었다. 암실에서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키고 릴리즈를 연결한 후 세이프라이트를 껐다. 셔터 속도를 Blub에 놓았다. 현아는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으며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셔터를 Blub에 맞추고 1 스톱 부족의 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조사하면 글씨를 쓰고 있는 연출자의 모습이 사진에 나온다. 현아의 작업이 끝난 후 여자가 펜라이트를 들었다. 여자는 허공에 대고 천천히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켜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있던 라이트펜이 따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님들은 여전히 가게로 찾아와 암실을 사용하고 차를 마시고 더러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누구도 여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여자가 사라진 후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암실로 들어갔다. 암실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어둠 속에 누워있었다. 나는 스스로 어둠 속에 갇혔다. 시간은 여전히 흘렀고, 어두울수록 더욱 명징해지는 의식은 여자에 대한 기억을 쫓고 있었다. 문밖에서 경쾌한 멜로디의 허밍이 들려왔다. 처음 내게로 왔던 날처럼 빛에 둘러싸인 채 여자가 앉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여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외로움이 불러낸 환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자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우주의 반대편에서 달려온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내가 마음을 열려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현상한 라이트 페인팅 사진을 꺼내보았다. 필름의 마지막 장에는 서정주의 시구가 씌어 있었다. 물 위에 뜬 유성물감처럼 글씨의 획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다.‘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여자가 서 있었을 사진의 오른쪽 모서리 공간은 검은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시의 남은 구절을 읊조렸다.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바람처럼 사라진 여자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내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자가 택한 이별이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젠가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입 맞춘다면, 거리낌 없이 이를 열어 여자가 내민 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 몸이 완전히 스러지고 난 후 먼먼 내생의 어느 날이어도 좋았다. 진열대에는 여자가 남기고 간 키예프 카메라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옆의 콘탁스를 꺼냈다. 노출을 오버스톱으로 다시 맞추고 뷰파인더에 키예프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여자가 자신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라고 말했던 키예프 카메라는 내게는 여자에 대한 기억의 증거가 되었다. 이 사진은 어두운 방에 잠시 스며들었던 빛, 그 빛의 흔적을 기록한 한 장의 루미노그램으로 남을 것이다.(끝) ■ 당선소감 제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다는 사진관을 스쳐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상가 2층 건물이었지요. 그 후부터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 아버지의 사진관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관을 열고 싶었습니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 오래된 사진기가 들어있는 곳. 증명사진을 찍으러온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웃으세요, 한 마디에 어색한 미소를 짓는 곳. 소읍의 탄생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을 기록하는 곳. 돈을 벌어도 좋고 벌지 못해도 좋은, 그런 사진관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 사진관을 넣어두고 저는 수시로 꺼내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사진관 안에는 허약한 식물이 자랐습니다. 제 소설은 결여의 토양에서 결핍의 양분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지닌 게 없어도 너무 지독하게는 살지 말자고 제 마음을 다독일 즈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약한 소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구효서 선생님!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기뻐요. 한결같이 제게 여여한 미소를 보여주셔서 마음이 든든했어요. 가족과 문우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응오씨, 당신은 제 삶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입니다. 저를 존재하게 하는 건 당신이에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승미 ●약력 1974년 강원도 양구 출생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작품은 각기 그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문학도들에게 패기와 정열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삶의 이름으로건 예술의 이름으로건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소설 같은 소설’ 한 편을 적당히 꾸려내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러나 그 가운데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특별히 주목한 작품은 ‘소년’‘달을 보고 짖는 개’‘펑크로커 실종기’‘빛이 스며든 자리’ 등 4편이었다. ‘소년’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미래없는 삶을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지만,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삶에 대한 진실을 움켜 쥘때 문학적 형상화도 함께 따라올 것이다.‘달을 보고 짖는 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솜씨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지만, 주제와 구성에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잘 만든 이야기, 그러나 너무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반복되는 낡은 이야기에 새로운 진실이 담기기는 어렵다. ‘펑크로커 실종기’는 누아르 서사의 형식 속에 펑크족들의 생활양태를 담은 소설로 문장이 경쾌하고 구성이 치밀했다.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그만큼 많았다. 무엇보다도 한 세계의 겉과 속을 심도있게 성찰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문화적 코드들을 조합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펑크족은 펑크족이다.’라는 말 이상의 매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풍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시선에서 온다. ‘빛이 스며든 자리’는 구렁각시의 민담과 피그말리온의 전설을 현대의 사진예술론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현실과 환상을 정교하게 봉합해서 꾸며낸 예술가 소설이다. 새로운 창조의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는 주제의 설정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을 빈다. 현길언 황현산
  • 청담동발 새해 컬렉션 ‘바로 이 가방’ 입니다

    청담동발 새해 컬렉션 ‘바로 이 가방’ 입니다

    수입브랜드 본사와 플래그십 숍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 패션 1번지. 고급스럽고 격조있는 외관의 건물 속은 호수 위에 떠있는 우아한 백조의 다리처럼 분주하다.2005년을 겨냥해 마니아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제품 구입을 노리던 잠재된 고객까지 끌어당길 만한 ‘잇백(it-bag)’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 스타일에 따라 각기 다른 가방을 소지해야 한다는 요즘은 가히 ‘가방의 춘추전국시대’라 불리지만 소장가치와 대중성을 겸비한 ‘바로 그 가방’이란 뜻의 잇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전하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는 가방,2005년을 앞두고 톱 디자이너들이 선보이는 업그레이드된 가방 라인이 청담동에 전진 배치되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그레이스 켈리의 프린트, 구찌 1966년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됐던 스카프의 문양을 사용한 플로라 라인을 준비한다. 구찌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인 액세서리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풍부한 색감, 우아함, 럭셔리함, 그리고 현대적인 감각의 결정체”라고 소개한 이 라인은 사계절의 다양한 꽃에서 추출한 색상을 담은 플로라 프린트와 구찌의 전통적인 패턴을 젊고 신선하게 재해석했다. 면사와 마사를 혼합한 방식으로 짜 소재의 결을 잘 살린 ‘플로라 캔버스’와 비즈, 스팽글 등을 이용한 자수기법을 사용한 ‘플로라 캔버스 임브로이더리’ 두 가지의 소재로 소개할 계획. 핸드백 외에도 수영복, 타월, 지갑, 슈즈 등 다양하게 선보인다. 가격미정.3479-1223. ●즐거운 자신감, 펜디 탄생 80주년을 맞는 2005년에 펜디는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아이템이 아이디(ID)·테이프(tape) 라인. 특별한 스타일을 원하는 현대여성의 신분증과 같다는 의미의 아이디 라인(36만∼76만원선)은 소지품을 충분히 넣을 수 있는 넉넉한 사이즈의 백에서 모던하고 세련된 핸드백까지 다채롭게 선보일 계획. 강렬한 태양처럼 밝은 노랑, 열대 바다의 파랑, 부드러운 브라운과 클래식한 블랙 등의 다양한 색상의 캔버스에 각각 어울리는 컬러의 가죽을 트리밍하고 골드버클과 더블 F로고로 펜디만의 디자인을 살렸다. 즐거운 감성으로 매력을 뿜어내는 여성을 위한 테이프라인(80만원선)은 더블 F 스트랩이 특징. 여름 태양같이 환한 노랑, 강렬한 빨강, 기품있는 블랙 컬러를 준비했다. 부드러우면서 튼튼한 캔버스 소재로 멋스러운 여성의 옷차림에 잘 어울린다.3479-1271. ●더욱 젊어진, 에트로 다양한 컬러의 가죽패치와 가죽을 트리밍해 보다 젊어진 감각을 표현한 컬러 아르니카 라인(67만원선)이 들어온다. 다양한 색상의 스트랩을 꼬아 만든 손잡이는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에트로의 컨셉트를 표현했다. 심벌인 페가수스 버클을 메탈소재로 장식하고, 슬림한 디자인과 과감한 장식으로 기존의 디자인보다 젊은 감각을 연출한다.511-2572. ●꿈의 잇백까지, 지미추 ‘전세계 여성들의 꿈의 구두’로 찬사를 받은 지미추가 가죽 소품 라인을 선보인다. 브랜드의 대표적인 잇백으로 떠오른 백(83만원선)을 비롯해 지갑(53만원선), 코스메틱 파우치, 명함지갑 등으로 라인을 확대했다. 최상의 에니멀 가죽에 라스베리 레드, 풀 그린, 크리스프 화이트 등 독특한 컬러에 골드 블러시 버클로 마무리해 지미추만의 화려함을 보여준다.3443-4570. ●린느 깡봉의 유혹, 샤넬 샤넬의 2004년 히트 아이템 ‘린느 깡봉’을 더욱 다양하게 선보인다. 샤넬의 상징인 두개의 C로고를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귀퉁이로 밀어보내면서 여성스럽고 약간은 보수적인 샤넬의 이미지를 젊고 유쾌하게 변신시켰다. 부드러우면서 질긴 소가죽 소재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퀼트와 로고 스티치를 기본으로 더욱 다양한 스타일과 컬러 조화를 소개할 계획이다. 기존의 검정과 하얀색에서 벗어나 브라운 C로고를 선보이고, 뱀피를 사용해 더욱 우아한 제품도 들여올 계획이다. 가격 미정. 3708-2716.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0)포항 호미곶의 해맞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0)포항 호미곶의 해맞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은? 재론의 여지없이 독도나 울릉도다. 그러면 육지에서는 어디일까. 이 역시 재론의 여지없이 포항시 호미곶이다. 동경 129도 34분 03초인 이곳은 동해로 돌출되어 있어 몇 분이라도 먼저 새해 해맞이를 하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다.12월21일, 동짓날 그곳을 찾았다. 옛날에는 동지를 아세(亞歲·작은 설)라 하여 동지제사를 지내며 액운을 물리치는 날이다. 또한 한해를 동지에 시작하였으니, 옛 전통을 되살려 호미곶으로 달려 내려간 것. ●육지서 가장 먼저 해뜨는 호미곶 호미곶을 가려면 포항 시내에서 삼십여분을 더 달려야 한다. 일출의 짧은 순간을 놓칠 것을 걱정하고 있는데, 서울에서부터 내내 동행한 해수부 항로표지담당관실의 진한숙 사무관이 선뜻 장기곶등대에서의 1박을 권하였다.“체험하고, 그냥 들르는 것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등대는 많이 다녀보았지만 하룻밤 체험은 쉽질 않아 선뜻 등대의 관사에 여장을 풀었다. 마침 울릉도등대에서 찾아온 박영식·정태영 등대지기와 포항항만청의 정용호 과장과 조재준 계장 등 ‘등대사나이’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이바구’에 여념이 없었다. ‘등대지기’, 좀 더 정확히 말하지만 이들 항로표지원들의 삶 자체가 워낙 외롭고 고달프기 때문에 대단한 단결력을 과시한다. 그러지 않고는 고립된 등대의 삶을 견뎌낼 수가 없을 것이다. 유물 수집 과정을 묻자, 이문희 등대박물관장은 “전국 등대에 연락을 취하고 긴밀하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과거의 등대유물을 속속 수집하여 올린 덕분에 인멸해 가던 근대 문화유산이 집결되어 오늘의 등대박물관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준다. 밤새 북풍이 불었다. 등대의 칸델라가 빙빙 돌아가면서 쏘아대는 불빛이 요동치는 파도에 떨어지자 물빛이 기괴한 빛을 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칸델라는 일일이 손으로 깎은 렌즈들의 집합체로 빛이 없어도 그 자체로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으니, 그냥 퍼지는 파장이 아니라 렌즈의 오묘한 프리즘이 연출해 내는 ‘빛의 향연’인 셈이다. 해맞이광장 한편에 자리잡은 육중한 풍력발전기의 대형 풍차가 엄청난 가속도로 돌았다. 동해로 돌출된 삼각지대답게 호미곶 바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곳을 일제가 ‘토끼 꼬리’라 불렀으니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땅의 기세가 호랑이 꼬리가 분명하다. 그것도 잠자는 호랑이가 아니라 태산을 흔들며 포효하는 호랑이 꼬리다. 일찍이 남사고가 호미곶을 호랑이 꼬리로 보았음은 역시 조선시대 절세의 풍수지리가다운 안목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국토의 튀어나온 부분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무려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에 호미곶이 한반도의 가장 동쪽임을 분명히 하였다. 동물의 꼬리란 ‘꼬리곰탕’이나 끓여먹는 대상이 아니다. 돌진할 때 몸의 균형과 스피드를 조절하고, 꼬리를 움직여서 온갖 신호를 보낸다. 꼬리치는 강아지에게서 꼬리를 뺏는다고 상상해 보라. 어쨌든 호랑이 꼬리에 얹혀서 잠을 잔 것 치고는 아주 편한 잠을 잤다. 등대의 침실이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기 때문이다. ●바닷가 한복판 ‘상생의 손’ 감동 새벽 6시 바다로 나갔다. 해가 가장 짧아서 ‘노루꼬리’ 같다는 동지답게 해가 뜨려면 아직 이르다. 신년도 아닌데 벌써 해맞이를 나온 이들이 서성거린다. 필자처럼 새해맞이를 ‘당겨서’ 맞으려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나왔다는 교포 1.5세를 만났다. 부친은 미국인, 모친은 한국인이란다. 한국문화 체험을 하려고 겨울연휴를 이용해서 ‘어머니 나라’에 왔으며, 동해 일출을 한반도의 제일 끝자락에서 맞이하고 싶어서 서울에서 달려왔단다. 해가 뜬다. 늘상 그렇듯 일출 조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름이다. 구름이 가린다면 만사가 틀어진다. 수년 전, 동해 일출을 지켜보는데 먹장구름이 흘러가면서 끝내 해가 제 모양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망이란, 해맞이가 아니라 흡사 해의 죽음을 조문하러 온 표정들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해가 떠올랐다. 일출은 그야말로 순식간. 뻘건 혓바닥, 아니면 좀 험하게 표현해 갓 잡은 동물의 붉은 간 같다고나 할까. 진홍색 빛을 불쑥 내밀며 천천히 바다로부터 치고 올라온다. 신라의 고승 원효의 이름을 풀면 ‘첫 새벽’이다. 새해 첫 날, 첫 새벽에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해맞이 전통은 흡사 힌두교도들이 빛의 주인인 크리슈나의 현현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불가의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빛은 외관(外觀)하고 생명은 내감(內感)한다.’고 하였으니, 빛이 있는 곳에 무한한 공간이 조견되고, 목숨 있는 곳에 무한한 공간이 심증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빛은 생명 그 자체로 인식된다. 그러한 즉,‘생명있는 온갖 것’들이 해맞이 광장에 모여들어 빛에 감응하고 생명을 느끼고 돌아감은 새해 일출이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이다. 호미곶광장의 연오랑과 세오녀 기념비에 쓰여 있듯, 그들 부부가 일본으로 떠나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사신을 보내어 비단을 받아오자, 해와 달이 다시 온전해졌다.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것처럼 비극적인 것이 없으니, 호미곶 해맞이에서 해마다 연오랑과 세오녀를 시민 가운데서 선출해 가장(假裝)의 축제를 벌이는 것도 빛을 간구하는 축제의 오랜 전통을 재현해 낸 것이리라. 호미곶 해맞이가 한결 유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닷가 복판에 세워진 상생의 손 때문이다. 청동으로 빚어진 그 거대한 손 위로 해가 올라선다. 흡사 손으로 해를 받쳐올리는 모습이다. 손노동으로 이룩된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듯이 해와 손이 어우려져 감동을 자아낸다. 바닷가에 세워진 온갖 군더더기 조형물과 달리 상생의 손으로 해를 감싸 안으면서 한해 내내 싸우지들 말고 오순도순 잘 살아나가길 바라는 성싶다. 우리 국회의원들은 단체로 이곳에 와서 이런 가르침을 배워야 할 듯하다. ●등탑 층마다 새겨진 배꽃 문장 눈길 해맞이를 끝낸 이들은 등대박물관을 방문하곤 한다.1908년 12월20일에 완공되었으니,2008년이면 100년.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 무려 26.4m 6층 높이의 건조물을 철근 하나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벽돌로만 축조했다. 이러한 축조기술은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 근대건축사의 살아 있는 학습장 아닌가. 반드시 등탑의 층마다 붙어 있는 조선왕실 상징물인 이화(梨花) 문장을 보아둘 것을 권한다. 가문이나 왕실을 표시하는 특별한 꽃모양이나 동물문양을 뜻하는 문장으로 ‘오얏 이’의 상징물인 배꽃이 등대마다 각인되어 있다. 풍전등화 신세였던 통감부 시절에 등대를 세우면서 무슨 연유인지 배꽃을 층마다 새겼다.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은 배꽃을 철판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국화문장을 새겼다. 해방이 되어 철판을 떼내자 아무도 몰랐던 배꽃이 제 모습을 드러내어 오늘에 이른 것. 누군가 농을 던진다.“이화여대생들은 반드시 한번쯤 와야 할 필수 코스 아닙니까.” 호랑이 꼬리가 토끼 꼬리로 강등되면서 모진 세월 내내 서러움을 받던 호미곶에 수십만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동해바닷가에서 한해의 염원을 실어보내는 것 자체가 이제 ‘신(新)세시풍속’으로 자리잡은 것이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호미곶 일대는 보리판으로 뒤덮여 있다. 어려운 물사정으로 논농사가 불가능한 지형의 특성을 살려 곳곳에 보리를 심어 마치 겨울바다에 녹색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호미곶에는 이육사가 포항의 포도원에서 시상을 떠올려 그의 명시 청포도를 창작하였다는 청포도비도 서 있어 바닷물과 더불어 이래저래 청색과 녹색의 시대를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겨울보리의 녹색이 추위를 녹인다면, 호미곶의 봄바다에는 화사한 유채꽃이 만발하여 다시금 찾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니 유혹의 강도가 너무 강하여 좀체 벗어나기 힘든 곳이 아닐까. ●태양 앞에선 만인이 평등하더라 이제 정신 없던 연말도 끝나가면서 새해맞이를 떠날 이들이 엄청 많을 것 같아 차제에 사족을 달아본다. 호미곶 해맞이공원처럼 그야말로 시설과 조건이 두루 갖추어져 볼 것도 많고 편리한 곳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아니면 조그마한 어촌의 언덕에 올라 가족이나 연인끼리 동해 일출을 바라봄도 권할 만하다. 유명세 치르는 곳만 찾을 일은 아니란 뜻이다. 가령, 부산의 기장 같은 곳에서는 국립수산과학원의 너른 공간 속에서 수산과학관이 주관하는 자그마한 새해맞이도 열려 해마다 ‘귀밝이 술’도 권하면서 조촐한 축제를 벌이고 있으니, 이렇듯 전국 곳곳을 찾아보면 주차 걱정없이 일출의 관해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 산재해 있다. 구름이 끼어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보지 못하면 또 어떠랴. 마음의 빛이 더욱 소중한 것일진대, 눈 감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내일의 태양을 향하여 소리칠 일이다. 해는 어김없이 뜰 것이며, 일출은 어느 누구도 한 장소에서 한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것이니, 만인은 해 앞에서만큼은 평등한 것이다.
  • ‘답사여행 길잡이’ 시리즈15권 완간

    ‘답사여행 길잡이’ 시리즈15권 완간

    전국 구석구석에 산재한 우리 문화유산을 답사기 형식으로 소개해온 답사여행 안내서 ‘답사여행 길잡이’(돌베개 펴냄) 시리즈가 서울편을 마지막으로 11년 만에 15권 전권이 완간됐다. 1994년 전북편을 시작으로 이번에 마지막을 장식한 서울편까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회원들이 우리 문화유적 하나하나를 일일이 찾아가 사진을 찍고 해설을 붙여 엮은 이 책엔 우리나라의 주요 문화유적이 빠짐 없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시리즈가 완성되기까지 유 청장을 비롯해 30여명이 넘는 문화유산 전문가들이 발품을 팔았다. 비교적 상세하면서도 쉽게 읽힐 수 있는 해설과 생생한 사진 등에 힘입어 이 시리즈는 첫 발간 이래 현재까지 모두 40만 부 가량 판매되는 인기를 누렸다. 전국을 문화권 또는 행정구역으로 나눠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담긴 유ㆍ무형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되, 누구나 쉽게 답사여행할 수 있는 가이드로서의 역할에 비중을 두었다. 이를 위해 각 문화유적을 소상히 소개하는 한편, 그와 관련된 인물 이야기, 전설 등과 함께 문양·그림을 다양하게 수록했다. 또한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경우 답사지 현장을 찾아가는 길과 잠자리·먹거리 등 기본 여행정보도 빠짐없이 곁들여 여행 실용서로도 손색이 없다. 각권 부록에는 각 지역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주제별 답사코스와 기차ㆍ고속버스ㆍ시외버스 시간표, 각 지역 문화재 안내문 등을 담았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改名신청 한해 4만여건…65%가 여성

    改名신청 한해 4만여건…65%가 여성

    지난해 말 어려서부터 꿈꾸던 스튜어디스 시험에 응시해 최종 임원면접을 앞두고 있었던 박후남(24)씨는 제복을 보자마자 고민이 생겼다. 스튜어디스를 상징하는 비행기 날개 문양 옆에 달린 이름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 어려서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던 후남씨는 지난 3월 법원에 개명 허가 신청을 냈다. ●“개명신청자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여성” 이름을 바꾸려는 여성이 꾸준히 늘고 있다.21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개명을 신청한 4만 8886명 가운데 83.9%인 4만 1025명이 이름을 바꿨다. 지난 2000년에는 3만 3210명이 신청,79.9%인 2만 6535명이 개명 허가를 받았다. 개명 신청자나 허가율이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5년 동안 개명신청을 대행하고 있는 법무사 장성일(40)씨는 “최근에는 한달 평균 80여명의 고객 가운데 65%가 여성이며, 젊은층보다 30∼50대가 많다.”고 밝혔다. 김정자(29)씨는 결혼 8개월 만인 지난달 이름을 바꾸고 혼인신고를 했다. 연애할 때는 가명을 사용하던 김씨는 혼인신고를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남편에게 본명이 탄로났다. 주부 김화분(36)씨는 지난 5월 자영업에 종사하는 남편의 수입이 줄자 대형 할인점에 자리를 알아봤다.‘○○엄마’라고만 불리던 김씨는 막상 본명으로 사회생활을 하려니 어린 시절 놀림받던 기억이 떠올라 개명 신청서를 냈다. ●개명 1995년 이후 활발 신향미(32·申香米)씨는 대학시절 교수의 농담섞인 말 한마디 때문에 개명을 결심한 케이스. 강의 도중 “이름에 ‘미’(米)자가 들어가면, 평생 닭이 모이를 쪼듯 콕콕 쪼이면서 살 것”이라고 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 신씨는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름 탓이라고 생각됐다.”고 털어놨다. 신씨는 2002년 ‘쌀 미(米)’자를 ‘아름다울 미(美)’로 바꿨다. 개명 신청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슬기·보람·하늘·이슬 등 ‘한글이름’붐이 일어난 1989년 전후 출생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한 학급에 같은 이름을 가진 학생이 2∼3명에 이른 것. 급기야 법원은 ‘놀림을 받는 이름에 한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1995년 한해 동안 한시적으로 초등학생에 한해 학교장의 허락만 받으면 개명을 허용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름을 바꾸려는 사람도, 실제 바꾼 사례도 드물었지만, 당시 개명사례가 일반인에게 알려지면서 개명 신청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깜찍한 한글 이름이 어른이 된 다음에는 오히려 놀림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명을 원하는 사람도 꾸준하다. 수원에 사는 주부 신문자(39)씨는 “1991년 딸을 낳은 뒤 대학생 조카가 추천하는 ‘슬비’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크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면서 “슬비를 좋은 뜻을 가진 한자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름도 시대 유행 반영 지난 2000년 인기드라마 ‘가을동화’가 방영된 직후에는 주인공 은서, 준서의 영향을 받아 신생아 이름에 ‘서’자 돌림이 유행하기도 했다.2∼3년 전에는 영어식 표기가 편한 ‘유리’‘지나’ 등이 인기를 얻었다. 부모의 성을 이름에 넣는 것도 새로운 추세. 연예인 부부 김태욱·채시라씨는 딸의 이름을 ‘김채니’라고 지었다. 최근에는 ‘한가족 한자녀’현상이 두드러지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은재·현경·민성·성인 등 중성적인 이름도 유행하고 있다. 8년째 구청을 찾는 민원인을 대상으로 신생아 1800여명의 이름을 무료로 지어주고 있는 이동우(53) 서초구청 민원여권과장은 “80년대 후반 ‘한글이름’붐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이름이 사회변화와 꾸준히 연관지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청자상감’ 10억9000만원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의 작품이 나왔다.17일 오후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열린 제92회 서울옥션경매에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靑磁象嵌梅竹鳥文梅甁)’이 10억 9000만원(이하 수수료 별도)에 팔려 국내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 작품은 앞면과 뒷면에 매화와 대나무 사이의 새를 상감기법으로 그려 넣은 작품으로,7억원에 경매가 시작돼 최고가로 개인미술관에 낙찰됐다. 그동안 국내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작품은 2001년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7억원)였다.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은 일본에서 경매의뢰가 들어온 상감청자로, 도자기의 조형과 맑고 투명한 비색 유약의 상태, 문양의 회화적 표현이 빼어난 명품이다. 아랫부분에는 뇌문대(雷文帶)를, 입구 아래 어깨 부분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흰색으로 상감했으며 도자기의 형태도 완전하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패션+α]

    ●휠라코리아는 31일까지 성인·아동 스키복과 패딩을 구입하는 고객을 추첨해 스키캠프에 초대한다. 구매고객 1인당 1장의 응모권을 주고 성인·아동 100명씩 선정할 계획. 성인스키캠프는 2005년 1월10∼13일 보광휘닉스파크에서, 어린이스키캠프는 1월18∼20일 용평리조트에서 진행된다.(02)3470-9579. ●미쟝센은 21일 오후 8시 역삼동 포스틸에서 영화 ‘키다리 아저씨’ 시사회 및 자선경매 이벤트를 연다.19일까지 레이디 아시아나 홈페이지(www.ladyasiana.com)에 자신의 가장 스타일리시한 사진을 올린 응모자 중 추첨을 통해 50명을 선정, 이벤트 참가 기회를 준다. 자선경매 행사에서는 미쟝센에서 제공하는 헤어 제품 100여개와 유명 연예인의 소장품 등이 경매될 예정이다. ●아이닥안경은 2005년 1월31일까지 ‘안경테·선글라스 보상판매’를 실시한다. 새 안경을 구입하면 낡아서 못쓰게 된 안경 및 선글라스를 교환해 주는 행사. 국산품은 5000∼3만원, 수입품은 1만∼4만원까지. 이 기간동안 모든 방문객에게 자외선 차단이 가능한 디스포저블렌즈(2주 착용)를 무료로 증정한다. 보상판매점 명동점(02-754-0110), 엘리트안경 일산점(031-902-7711), 룩아이안경원(032-422-1088). ●ABC마트는 31일까지 전 매장에서 슈퍼메가세일을 진행한다. 나이키 푸마 아디다스 등 50여개 유명 신발 브랜드의 제품(일부 품목 제외)을 최대 80%까지 할인하고, 일부 품목은 균일가로 특가 판매할 계획. 행사기간 동안 모든 구매 고객에게 2005년 ABC마트 달력을 주고, 반스 호킨스 등 세일에 참여하지 않는 브랜드 제품을 구입하면 ABC마트 상품권(1만원 상당)을 증정한다.(02)587-7880. ●제미유통은 ‘쌉스탑 크리스마스 양말’을 출시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레드를 중심 색상으로 별, 트리, 루돌프, 눈사람 등 다양한 문양을 넣어 감각과 개성을 뽐낼 수 있는 시즌 핫 아이템. 남성용 5000원, 여성용 6000원, 아동용 3900∼5400원. ●베이직하우스는 단일 의류브랜드로 올들어 유일하게 지난 13일 매출 2000억원을 돌파했다. 대부분의 캐주얼 브랜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가운데 베이직하우스는 출범 4년 만에 단한번의 세일없이 거둔 성과다. 매출 2000억원 돌파를 기념, 전국 157개 매장에서 26일까지 7만원 이상 구매고객에게 고급 숄더백 2만개를 증정하고 전 구매고객 중 2000명을 추첨, 영화초대권 2장을 선물한다.
  • [마니아] 한지 공예 푹 빠진 외국여성들

    [마니아] 한지 공예 푹 빠진 외국여성들

    “It’s very nice lamp.Cut this blue paper and put on a right side.”(“등을 예쁘게 잘 만들었네요. 이제 파란색 한지를 오려 등 오른쪽에 붙여보세요.”) 지난 10일 오전 서울 이태원의 한지공예 작업실 ‘Song’s studio’.5명의 외국인 여성들이 등과 쟁반 등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문양을 붙이고 있었다.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한지공예가 송수정(30·여)씨와 이들의 다정한 대화는 10평 남짓한 공방을 밝게 감싸고 있었다. 이들은 혈통과 국적은 다르지만 그 순간은 ‘문화적 한국인’이었다. ●미·호주·레바논·남아공인·대사부인등 수강생 다양 송씨가 외국인들에게 한지 공예 강습을 시작한 것은 1998년. 그동안 송씨 손을 거친 외국인만 벌써 200여명이다. 방학과 휴가철을 제외하고 40여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수강생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대부분은 미국과 호주 등 영미권 국가와 아시아, 유럽 출신들. 그러나 레바논, 남아공, 헝가리 등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기업인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가정 주부가 대다수. 각국의 대사 부인들도 종종 수업에 참여한다. 한지 공예에 어느 정도 ‘물’이 오르기 위해서는 6개월 정도 걸린다. 그러나 송씨의 공방에는 2년 가깝게 수업을 들은 외국인들도 많다. 예술미와 실용성을 겸비한 한지 공예의 매력은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 캐나다 출신의 영어 강사 캐서린 무노즈 스미스(26·여)는 “한지로 온갖 색깔의 실용품을 만드는 재미에 1년 반 가까이 배웠다.”면서 “한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격찬했다. 송씨는 “한지만의 따뜻한 질감은 세계 각국의 어느 종이도 따라오지 못한다.”면서 “더구나 비교적 짧은 시간에 스스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성취감과 작품을 실생활에서 쓸 수 있다는 실용성에 외국인들이 매료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따뜻한 질감·성취감·실용성에 매료 송씨의 전공은 미술이 아닌 무역학(강남대 93학번)이다. 대학 4학년 때인 지난 97년에야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뒤에는 여행사와 헤드헌터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늦게 접한 한지공예에 매료된 송씨는 결국 한지공예 전문가의 길로 나섰다. “원래 영어 회화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외국인을 상대로 한지공예를 가르치면 희소성도 있고 우리 문화도 알릴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서울 한남동 국제루터교회 창고를 어렵사리 빌려 작업실 겸 강의실을 차렸지만 처음에는 수강생이 네덜란드 출신 주부 한 명에 불과했다. 집에서 용돈을 받는 생활이 한동안 계속됐다. 문화적 차이도 큰 벽으로 다가왔다. 송씨는 “외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때면 ‘왜 이렇게 해야 하냐.’라고 이유를 꼭 묻는다.”면서 “선생님의 지시에 일단 따르는 우리 문화와는 달라 처음에는 애를 먹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송씨의 수업이 입소문을 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한지공예 영어 강습이었기 때문. 어느새 송씨의 강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명물’이 됐다. 지난 2002년에는 재경 외국여성 단체인 시와(SIWA·Seoul International Women’s Association)에 송씨가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가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대화식 영어강습… 한국문화 이해의 폭 넓혀 송씨의 수업은 강의식이 아닌 대화식. 외국인들은 송씨와 함께 한지 공예뿐 아니라 서울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외국인들이 송씨를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쌓는 것은 당연한 일. 또 1주일에 서너 시간 동안 1년 넘게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수강생들과 친구가 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힘든 일은 수강생 친구들을 떠나 보내는 일. 송씨는 “가장 가까운 친구도 일본, 헝가리 등 외국 출신”이라면서 “가끔씩 해외 여행이나 인터넷 화상 채팅으로 이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미소지었다. 송씨는 한지공예 선생님 이전에 어엿한 한지공예가이다. 지난 1월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주위 동호인들과 함께 한지공예 작품전을 갖는 등 해마다 전시회를 거르지 않는다. 이태원 등 전통제품 매장에서 작품을 팔기도 한다. 최근에는 인터넷에 ‘외국인과 함께하는 우리한지공예’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주말마다 국내 동호인들에게도 한지공예를 가르치고 있다. 송씨의 계획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강생들이 꾸준히 한지공예를 접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화상 수업도 하면서 한지공예 재료를 저렴하게 팔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조만간 구축할 생각이다. 전통 한옥에 작업장 겸 강의실을 마련하는 것도 또 다른 목표. 송씨는 “한지공예 등 뛰어난 우리의 문화 유산들이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보다 세계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면서 “우리 것을 세계화하는 한국 문화의 ‘전도사’로 계속 남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한지공예 ?? 한지(韓紙)는 보통 조선 종이로 불린다. 닥나무(楮)나 삼지닥나무(三枝楮) 껍질을 원료로 우리만의 기법으로 제작한 독특한 종이다. 한지공예는 천연 염료로 물들인 한지를 다양한 기법으로 등이나 쟁반, 차받침 등 실용품과 인형, 가면 등 장식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적, 청, 황, 흑, 백 등 다섯 가지 색깔이 쓰인다. 한지공예의 기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먼저 지승공예(紙繩工藝)는 한지를 실처럼 꼬아 엮은 뒤 옻칠을 해 바구니, 망태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지호공예(紙湖工藝)는 물에 불려 찹쌀풀과 반죽한 한지를 그릇의 골격에 붙여 말린 뒤, 골격을 떼어내고 옻칠로 마무리하는 기법. 반짇고리, 접시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혼례용 꽃을 만드는 지화공예(紙花工藝)는 한지를 여러 번 접고 오리는 기법. 지화공예(紙畵工藝)는 한지 위에 민화나 글씨를 그려 집안을 꾸미는 데 사용됐다. 이밖에 다양한 색깔의 한지 위에 여러 무늬를 오려 붙이는 전지공예(剪紙工藝) 등 다양한 기법이 있다. 찻잔이나 접시 등 기초 수준의 한지 공예는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는 편. 기본 요령은 인터넷의 한지공예 사이트에 비교적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인터넷 쇼핑몰이나 인사동 한지공예 매장에서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또 최근에는 ‘DIY’(Do It Yourself) 붐을 타고 모양대로 잘린 골격과 한지도 등장했다. 집에서 접착제 등으로 붙이기만 해도 어엿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등이나 반짇고리 등 비교적 까다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좌를 들어야 한다. 각종 문화센터나 서울 인사동에 한지공예 강좌가 많이 개설돼 있다. 강좌료도 한 달에 10만원 안팎으로 저렴한 편. 종이를 이용한 장식품은 세계적으로는 한지공예보다 일본의 오리가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영어인 페이퍼폴딩(Paper folding) 대신 미국에서도 통용될 정도. 현재 일본 초등학교 정규 교과과목에도 채택돼 있다. 그러나 장식품 이상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 실용성의 면에서는 한지공예를 따라오지 못한다. 한지공예에 합리성을 중시하는 서구인들의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글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인사동을 가다]우리옷 전문점

    [인사동을 가다]우리옷 전문점

    한국의 ‘전통’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복. ‘전통의 현대화’ 바람이 거센 인사동길에는 한복을 현대적으로 만든 ‘우리옷 전문점’이 10여군데 자리를 잡고 있다. 고가형 한복점이 모여 있는 압구정동, 실속형 한복점의 집산지인 종로5가와 달리 10만원 미만의 저렴한 생활한복부터 100만원이 넘는 고가의 명품한복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개량한복점이 있다는 것이 인사동의 특징. 혼수가 아닌 생활복으로 한복을 즐겨입는 ‘우리옷 마니아’들이 이곳을 찾는다. 단골손님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요 소비자인 까닭에 유행이나 경기변화에도 큰 변화없이 흘러오던 인사동 우리옷 전문점에도 최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생활한복은 더 싸게, 명품한복은 더 고급스럽게 변해가고 있다. 우리옷 전문점 ‘파랑돌’ 대표 정선희씨는 “불황이 지속되면서 싸고 실속있거나, 아주 고급스러워 구매 가치가 있는 한복들만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만의 전략으로 외국인 관광객들과 우리옷 마니아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인사동의 대표적인 개량한복점을 다섯 군데를 찾아봤다. “이월상품은 70%, 겨울 신상품도 20% 싸게 팝니다.” 생활한복점 ‘모둠삼방’ 인사점을 운영하는 이영주씨는 “전국 10여군데의 대리점 중 인사점에서만 특별 할인행사를 열고 있다.”며 “씀씀이가 줄어든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둠삼방, 겨울 신상품 20% 할인 탑골공원 방향의 인사동길에는 싸고 편한 한복으로 소비자들의 발길을 끄는 생활한복점들이 모여 있다. 세일행사로 가격을 대폭 낮춘 ‘모둠삼방’과 ‘베틀가’, 저가를 유지하면서 실용성을 살린 ‘돌실나이’가 대표적인 중저가 생활한복점이다. 모둠삼방에서는 치마와 저고리 한복세트는 20만원에서 30만원대, 겨울용 누비 한복은 30만원 정도면 살 수 있다.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면으로 된 생활한복 세트로 가격은 14만 8000원에서 18만원까지. 이씨는 “일상복으로 편하게 입을 수 있고 유행을 타지 않는 편”이라며 “오래 입기를 원한다면 면소재의 한복세트가 무난하다.”고 조언했다. ●베틀가, 간편한 스타일 일상복 인기 ‘다물’과 ‘베틀가’라는 이름으로 인사동길에만 두 개의 지점을 두고 있는 ‘베틀가’도 신상품을 20∼30%까지, 이월상품은 50∼70%까지 할인해 팔고 있다. 면으로 된 생활한복은 10만∼20만원대, 바지와 저고리가 함께 누벼진 한복 세트는 22만∼28만원. 이곳에서도 명절 때 잠깐씩 입을 수 있는 화려한 디자인의 한복보다는 일상복으로 입을 수 있는 간편한 스타일의 생활한복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은 “누비 한복 바지는 가볍고 따뜻해서 평소에 즐겨 입는다.”면서 “나이들어 보인다고 한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20대 아들도 따듯하고 실용적인 생활한복을 입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베틀가 인사지점장 배민지씨는 “전통적인 한복의 디자인에 질기고 편하게 빨아 입을 수 있는 합성섬유를 사용한 개량 한복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면서 “‘설빔’으로도 평소에 입을 수 있는 한복을 선물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돌실나이, 양장과 같이 입게 디자인 우리옷 마니아들 사이에서 중저가 브랜드로 유명한 ‘돌실나이’는 양장과 함께 입을 수 있는 변형된 한복 디자인의 옷들이 많아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양장에 걸쳐 입어도 자연스러운 두루마기(25만 8000원), 조끼와 저고리, 치마로 구성된 스리피스(30만원대)는 따로 입을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전통적인 소재와 문양을 사용한 양장에 가까운 원피스 형태의 옷도 젊은 여성들의 중심으로 잘 팔리는 품목이다. 저가형과는 대조적으로 외국산 유명 브랜드 옷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고가의 ‘명품한복’을 만들어 차별화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인사동로 중심부에서 안국역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왼편에 나오는 우리옷 전문점 ‘파랑돌’과 ‘꼬세르’가 그곳. 수작업 위주의 소량생산으로 옷의 가치를 높여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꼬세르, 외국인·연예인이 많이 찾아 꼬세르는 얼마 전 일본에서 패션쇼를가진 디자이너 배영진씨의 매장이다. 한복에서 모티브를 따온 현대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의 옷들이 많아 무대복이나 파티복을 사러 오는 대사관 부인들과 연예인들이 많은 편이다. 고려시대의 ‘당의’나 고구려시대의 ‘철릭(무관복)’과 같은 전통의상을 새롭게 변형시킨 옷들이 눈에 띈다. 가격은 100만원대가 주류를 이룬다. ●파랑돌, 본견·명주등 우리원단 사용 40만∼50만원대의 한복을 위주로 판매하다가 ‘고급화’를 선언한 정선희씨의 ‘파랑돌’도 80만∼100만원대의 고가형 한복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디자인은 한복과 양장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변형된 형태가 많지만, 소재는 수입 원단을 사용하지 않고 본견, 모시 등의 우리 원단을 사용한다. 전통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겨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 이곳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 여성들은 정씨가 저고리와 치마를 코디해 보여주자 ‘멋있다.’며 탄성을 질렀다. 정씨는 “‘한복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양장만 비싸라는 법은 없다.”면서 “외국산 명품으로 돋보이려 하기보다는 전통적인 분위기의 우리 옷으로 품격을 높여보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글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특별한’ 청자·목공예품 한눈에

    ‘특별한’ 청자·목공예품 한눈에

    국내 3대 사립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서울 신림동 호림박물관이 14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호림박물관 구입문화재 특별전’을 연다. 호림박물관이 지난해 구입한 문화재 100여점 중 특별히 예술ㆍ학술적 가치가 큰 작품들을 골라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자양각연판문표형주자(靑磁陽刻蓮瓣文瓢形注子)를 비롯한 청자와 백자 등의 도자기류와 목공예품 90여 점이 공개된다. 청자류 전시는 순(純)청자와 상감청자, 철화청자를 중심으로 꾸며진다. 특히 청자양각연판문표형주자는 은은한 비색과 정교한 문양이 돋보이는 걸작. 또 조선시대 제작된 청자장군은 백자의 바탕흙에 청자유약을 입힌 작품으로, 조선시대에도 청자 제작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청자·분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이 백자다.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지만 조선 건국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돼 조선 말까지 꾸준히 이저졌다. 조선 전기에 등장한 순백자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조선 중기 이후에 나온 철화백자는 순백자와는 다른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선 후기 백자 문화를 대표하는 청화백자류는 광주 분원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번 전시품중 백자청화괴석모란문병은 농담을 잘 살린 문양 솜씨가 일품으로,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목공예품으로는 조선 후기의 목가구류와 나전칠기류가 나온다. 목제경상(經床)은 단아한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을 엿보게 하며, 목제나전화조문경대에서는 사대부가 여인들의 취향이 묻어난다. 목공예품의 일종인 나전호작문 베갯모는 민화의 친숙한 소재인 까치와 호랑이가 나전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점이 눈에 띈다.(02)858-2500.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미니스커트·부츠속 타이츠로 깔끔하게

    미니스커트·부츠속 타이츠로 깔끔하게

    종아리까지 오는 양털부츠, 허벅지를 드러낸 미니스커트와 함께 올 겨울 여성의 다리를 책임질 아이템은 바로 타이츠. 올 하반기 유행 스타일인 단아한 숙녀 분위기의 ‘레이디라이크 룩’과 영국의 사립학교 여학생 같은 ‘스쿨걸 룩’이 인기를 끌면서 같이 매치할 수 있는 타이츠가 다양하게 변신했다. 겉옷이 화려하고 과감해짐에 따라 타이츠 무늬는 작고 차분하다. 작은 도트(물방울), 헤링본(등뼈 무늬 같은 사선), 스트라이프(줄무늬) 등이 화려한 패션을 정리해준다. 색상 역시 카키, 퍼플브라운, 블루블랙 등으로 채도가 낮아졌다. 스쿨걸 룩에는 미니스커트에 무릎 길이의 판탈롱 스타킹을 신고 양털부츠를 신는 게 유행이다. 투박한 무릎길이의 양말보다 훨씬 얇은 데다 탄력이 좋아 다리를 잘 감싸준다. 그러나 이런 코디는 자칫 키가 작아 보일 수 있으므로 스트라이프나 헤링본 무늬로 타이츠를 신은 부분이 길어보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비비안은 망사도트, 헤링본무늬의 패션 타이츠(1만 8000∼2만원)를, 이탈리아 브랜드 도나펠라는 작은 파란색 하트무늬가 들어간 타이츠(2만 5000원)를, 오스트리아 브랜드 월포드는 은사 스트라이프 타이츠(8만 9000원)를 각각 선보였다. 이탈리아 오로블루의 종아리 옆면에 식물넝쿨 장식을 넣은 타이츠는 1만 9000원, 프랑스 딤(DIM)의 로고문양과 레이스 등으로 밴드를 처리한 스타킹은 2만∼5만원선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아트 & 이슈] 낙서도 이젠 당당한 예술?

    세계의 도시 특히 뉴욕의 지하철에서는 흔히 스프레이 물감을 이용한 낙서그림을 볼 수 있다.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또는 스프레이캔 아트(spraycan art)라고 불리는 낙서미술이다. 이런 그래피티 미술이 ‘거리의 예술’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부터다. 경기장 벽이나 지하철, 거리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외되고 억눌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도시의 골칫거리로 치부되던 그래피티가 현대미술로 인정받게 된 데는 무엇보다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와 80년대 거리문화를 이끈 키스 해링의 공이 크다. 낙서미술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각각 마약중독과 에이즈로 요절하고 말았다. 미국에선 이미 1989년에 낙서미술관까지 문을 열었을 만큼 그래피티 아트가 자리를 잡았다. 이 자유분방한 영혼의 예술은 이제 우리에게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서울 서교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스타일 큐브 잔다리에서 19일 동안 열린 ‘거리의 작가’전은 ‘한국적’ 낙서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하나의 시험무대였다. 전시에는 jnjcrew, day­z, wk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20대의 세 팀이 참가했다. 특히 가수 서태지와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진 day­z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분노의 감정을 ‘악마’라는 소재를 통해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낙서미술가라 할 이들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기하학적 문양, 문자 등 다양한 형태를 통해 보여줬다. 90년대 초반부터 힙합문화와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 한국의 그래피티 아트는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외국의 경우 하나의 독립된 장르, 나아가 제3의 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여전히 ‘낙서’라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박제된 미술교육을 받아온 이들에게 상상력의 물꼬를 터주는 계기가 됐다. 개막일에는 100여명의 그래피티 팬들이 전시장에 몰리는 등 우리 낙서미술 인구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이번 ‘거리의 작가’전은 우리에게도 바스키아나 해링 같은 낙서미술의 대가가 나올 날이 머지않았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그래피티는 이제 ‘비(非)예술’‘반(反)예술’의 수모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그 자체 예술로서 당당히 심판받아야 한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伊 ‘보석·시계 디자인대회’ 계명대 윤선영씨 대상

    대구 계명대 패션정보기획전공 4학년 윤선영(24)양이 최근 이탈리아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가 주최한 ‘보석, 시계, 액세서리 국제디자인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 윤양은 우리나라의 전통문양을 바탕으로 한 ‘Allure East(동양의 유혹)’란 컨셉트로 시계를 디자인한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수상했다. 이번 국제경진대회는 세계 3위의 럭셔리 브랜드 그룹인 스위스의 리치몬드 그룹(Richemont Group)에서 설립한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가 개최한 대회로 입상자는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미 장학생으로 선발된다.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청담동+α]

    [청담동+α]

    ●프라다는 3개월의 리뉴얼을 끝내고 청담동 플래그십 숍을 재개장했다.1층은 여성라인,2층은 남성라인으로 구성된 숍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로베르토 바치오키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매장과 홍콩 알렉산드라 하우스 매장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선보이는 뉴 인테리어 컨셉트 숍이다. 현재 이 매장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아이템은 뱀과 악어 가죽을 매치시킨 ‘스키퍼백’. 프라다가 팝가수 마돈나를 위해 만들어 ‘마돈나백’으로 더욱 유명한 이 백은 터키옥색, 그레이, 삼림지그린(woodland green), 콘페티핑크 등 다양한 색상이 뒤섞여 멋을 더한다. 새로운 디자인의 금속 버클을 사용했다.3218-5330. ●밀라숀 스포츠는 1970년대 레트로와 클래식한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라이프스타일 웨어를 선보인다. 특히 체크와 벽돌 프린트 등 다양한 그래픽 패턴에 입체감 있는 원단, 압축 니트 소재를 스웨터에 사용한 것이 특징. 고급스러운 고기능성 소재를 사용해 체열이 방출되는 것을 막아준다. 골프웨어는 캐시미어 트위드 소재를 사용한 스웨터, 패딩 팬츠, 보온 안감이 부착된 니트 등 방한성을 보완했다. 자카드 니트와 우븐 콤비는 역동적이면서 경쾌하다.515-3873. ●토즈(Tod’s)는 말 안장 제작 기술의 가죽 커팅법이 돋보이는 제이피티백을 선보인다. 에나멜과 스웨이드 가죽의 고급스러운 감각. ●로에베는 최고의 가죽에 아나그램 로고를 메탈로 연출하고, 버클 마감으로 장식한 알·안달러스 컬렉션의 칼라하리 백을 선보였다. 알·안달러스는 스페인의 문화와 기술 유산을 완벽하게 재현해 로에베의 장인정신을 표현한 컬렉션.3441-8864. ●블루마린은 화려한 스팽글과 섬세한 자수 장식, 그리고 호피 밍크가 돋보이는 고급스러운 파티룩을 전시한다. 골드 컬러의 재킷은 매치하는 아이템에 따라 다양하게 코디가 가능하다.3445-3936. ●비아스피가는 레이디 라이크룩을 반영한 슈즈. 에나멜 처리된 블랙과 화이트의 절제된 컬러 대비가 돋보이는 이 펌프스는 구두의 테두리를 따라 연속적인 펀칭 장식과 스크랩으로 귀여운 멋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542-7966. ●크리스찬 라크르와 옴므는 캐릭터 셔츠에 착안한 몬스터 시리즈를 내놓았다. 만화 몬스터 캐릭터를 그려넣은 시리즈는 다양한 색상의 새틴 천으로 아플리케 장식을 하고 그 위에 정교한 비딩 장식으로 캐릭터 문양을 고급스럽게 표현했다.542-2888.
  • [수도이전 위헌 파장] ‘관습위배’ 이유 憲訴 제기 늘듯

    만약 올해 안에 남북통일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태극기가 아닌 ‘한반도기’를 정식 국기로 참가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을 인정한 결정을 하면서 등장한 화두다. 헌재 결정이 없었다면 대통령령인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만 바꾸면 된다. 국무회의 의결만 있으면 태극문양과 4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관습헌법이 인정된 이상 국기를 태극기에서 한반도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남북한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헌재가 태극기가 국기인 점을 관습헌법으로 인정하는 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전통으로 내려와 관습으로 정착한 것에는 ‘한국어’,‘애국가’,‘호주제’,‘동성동본 금혼’ 등 여러가지가 있다. 만약 헌재가 호주제나 동성동본 금혼 등이 관습헌법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면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민법 개정안은 무의미해진다. 법률개정 사항이 아닌 헌법개정 사항이기 때문이다. 관습헌법이 실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일부 학자나 법조인은 당장 헌법소원 또는 위헌법률심판의 대상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특정 법률조항이 평등권이나 자유권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특정 법률조항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과거 전통적인 관습에 위배되는 만큼 위헌이라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습헌법에 대한 대상과 범위가 명확해질 때까지 헌법소원 남발이 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입법부의 활동도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법을 새롭게 만들 때 과거에는 성문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만 따지면 됐지만 앞으로는 관습헌법에 위배되는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심층적인 입법활동이 필요한 대목이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문장으로 보는 유럽사/하마모토 다카시 지음

    문장(紋章)이란 원래 가문을 표시하는 도형을 말한다. 그것은 중세 유럽의 기사가 전장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방패에 그린 문양에서 비롯됐다. 이후 군주나 귀족들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 됐고 나아가 도시나 길드, 교회, 대학 등 공동체의 상징으로도 이용됐다. 문장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엄연히 살아 숨쉰다. 유럽 어디를 가든 탑이나 성문, 시청, 선술집 간판, 가구 등에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심지어 맥주나 와인의 상표, 수표, 공식서류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같은 문장의 의미와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유럽사를 들여다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장으로 보는 유럽사’(하마모토 다카시 지음, 박재현 옮김, 달과소 펴냄)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문장이 유력한 키워드임을 보여준다. 일본 간사이대 교수인 저자는 문장이라는 창을 통해 중세와 근대, 현대에 걸친 유럽의 역사를 폭넓게 살핀다. 교회에서는 어떤 문장이 사용됐을까. 교회에서 처음 문장을 사용한 사람은 13세기 말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 그후 교황과 주교들은 각기 고유한 문장을 채택해 자신의 직무와 그에 따른 생활신조를 나타내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중관과 성배, 교차된 열쇠로 이뤄진 문장을 사용한다. 문장은 차별의 표지로도 사용됐다. 황색과 세로 줄무늬는 유대인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1215년 로마의 제4회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옷차림을 규제하는 결의가 이뤄졌다. 그후 1267년 빈의 성무원(聖務院, 개신교의 최상위 입법기관)에서는 유대인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뾰족한 모자를 쓰게 했다. 모자의 색은 대개 황색이었으며, 미파르(mi­parti, 세로로 색 구분이 된 옷)를 입도록 요구받았다. 또한 나치스는 유대인들에게 ‘황색 다윗의 별’을 가슴에 붙이게 했다. 황색이나 세로 줄무늬는 매춘부나 광대의 상징. 사형 집행인은 줄무늬 작업용 바지를 주로 입었고,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전설에 나오는 주인공인 쥐잡이 남자의 복장도 줄무늬 바지다. 책은 일본의 문장에 대해서도 다룬다. 유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된 일본의 문장은 곡선을 이용해 우아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 저자는 가문(家紋)으로 발달한 일본의 문장에서는 미적 감각을 중시하는 대칭형의 문장 원칙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문장학 혹은 기장학(旗章學)은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분야다. 소략하지만 문장학 입문서로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1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심우찬이 본 ‘2005 파리컬렉션’

    심우찬이 본 ‘2005 파리컬렉션’

    |파리 함혜리특파원| ‘더욱 여성스럽게,더욱 고급스럽게,그러나 자유롭게‘ 내년 봄·여름의 유행 키워드는 하이퍼 페미니티,울트라 시크,로맨틱 이그조티즘,네오 히피룩이 될 전망이다.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2005년 봄·여름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에서 톱 클래스의 디자이너들은 최근 3년간 강세를 보인 여성성과 이국풍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를 보다 더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변형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우아함을 추구하면서도 격식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현대여성을 타깃으로 한 의상들이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패션컨설턴트 심우찬(‘파리여자·서울여자’의 저자)씨의 도움말로 내년 봄·여름의 유행경향을 이번 파리컬렉션을 통해 알아본다. 이번 컬렉션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한가지 특징을 딱 꼬집어 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만큼 다양한 문화와 경향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입니다.해외 여행이 대중화되고 인터넷 등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이에 걸맞은 ‘세계적인 문화’에 근거해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아프리카나 인도의 전통의상에서 비롯된 이국풍과 1960년대 팝아트,70년대 히피룩 등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면서도 초점은 3년째 강세를 보이고 있는 여성성에 맞춰져 있고 기본적으로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샤넬이나 디오르,셀린 등 유명 브랜드의 경우는 어떤가. -기성복을 뜻하는 프레타포르테는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을 보여주기 위한 오트쿠튀르(고급맞춤복)와 달리 상업성이 중요시됩니다.유명 브랜드라고 상업성을 무시할 수 없지요. 독자적인 라인을 발표해 온 샤넬,디오르,루이뷔통 역시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각 메이커의 독특한 분위기는 유지하되 세계적인 흐름을 무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밀라노 컬렉션에 소개된 프라다,질 샌더 등도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재 측면에서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오간자 등 가볍고 고급스러운 소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우아함을 돋보이게 하는 레이스와 속이 비쳐보이는 얇은 망사를 사용하기도 하고,화려함을 강조할 수 있는 반짝이는 소재(스팽글 등)들이 이브닝드레스에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프린트된 소재도 눈에 띕니다.앞서 밀라노 컬렉션의 돌체 앤 가바나는 동물 문양 프린트 가죽을,런던컬렉션의 폴 프랭크는 꽃무늬 프린트를 주로 사용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액세서리는 어떤 것들이 주로 사용됐는지. -액세서리는 크고 강하게 포인트를 준 것이 특징이고 아프리칸 스타일의 커다란 목걸이가 히피룩,이국적 정취의 의상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모자 특히 밀짚으로 된 중절모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라거펠드 갤러리,장 폴 고티에 컬렉션에서는 모델들이 드레스에도 모자를 쓰고 나왔습니다. 이번 컬렉션은 유명 브랜드의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데뷔무대를 가진 것으로 아는데. -이번 시즌에 새로 선보인 디자이너들이 많았습니다.톰 포드가 지난 시즌을 마지막으로 구치와 결별하면서 그가 맡았던 구치 여성복은 알렉산드라 파치네티가,이브생로랑 리브고슈는 스테파노 필라티가 각각 맡았습니다.셀린에서는 마이클 코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로베르토 마니체티가 그의 첫번째 컬렉션을 선보여 관심을 모았습니다.전임 디자이너들의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그들의 그림자를 지워버리기에는 좀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중간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고 봅니다. 파리 컬렉션이 밀라노에 비해 우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밀라노는 원단 회사와의 긴밀한 협조가 강조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디자인 측면에서 창의성이 떨어집니다.지나치게 소재의 변화에 치중하고 상업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아르마니,프라다,질 샌더,돌체 앤 가바나,펜디 등 밀라노 컬렉션의 의상들은 새로운 유행을 만든다기보다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반면 파리는 실용성은 결여됐으나 창의성 측면에서 강하기 때문에 모든 유행은 파리에서 시작된다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파리 컬렉션도 실용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습니다.그동안 쇼를 위한 컬렉션이라는 비난을 의식한 듯 실용성을 감안한 디자인들이 대거 선보였습니다.대표적인 사례가 디오르였습니다.의상사 박물관에나 소장해야 할 것 같은 화려한 의상을 발표해 왔던 디오르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이번에는 트위드 재킷,니트,카디건,티셔츠 등 당장 입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입기에 부담이 없는 의상들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습니다.갈리아노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적인 분위기가 강세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의상은 옷장에 모셔 놓기 위해 구입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컬렉션을 꼽는다면. -네덜란드 디자이너인 빅터 앤 롤프의 컬렉션을 꼽고 싶습니다.굉장히 전위적인 디자인과 획기적인 쇼형식을 선보여 온 이들은 이번 컬렉션에서는 랑콤과 제휴한 자신들의 첫번째 향수 ‘플라워 봄브’를 발표하는 것과 때를 맞춰 향수의 개념을 시각화한 창의적인 의상들을 발표했습니다.‘플라워 봄브’ 향수의 상징인 리본을 다양하게 변형해 활용한 파격적이고 기발한 의상들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디오르 쇼에서 존 레넌의 이메진 등 1970년대의 평화와 사랑을 주제로 한 음악들을 배경으로 ‘디오르,낫 워’라는 글씨가 등에 프린트된 의상들로 피날레를 장식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lotus@seoul.co.kr
  • 서울현대도예전 대상에 이지혜씨

    서울현대도예전 대상에 이지혜씨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이 주최하고 한국도자기가 후원한 제24회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서 도예가 이지혜(30)씨의 작품 ‘우주 Ⅱ’가 대상을 차지했다. 11일 발표된 심사결과에 따르면 우수상은 최중열(47)씨의 ‘허와 실’이 받았으며,특선은 박선신(28)씨의 ‘치유’,이주석(31)씨의 ‘상념’,김종문(38)씨의 ‘자연의 율-생성’,전지현(26)씨의 ‘쉿!,바람소리’,전소영(32)씨의 ‘빛-탄생’에 돌아갔다.입선은 김현주씨 등 33명.대상에는 500만원,우수상에는 200만원,특선에는 1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공모전 심사를 맡은 미술평론가 장동광(숙명여대) 교수는 “올해 심사에서는 신인발굴의 차원에서 도예의 형상성과 개념성을 살린 참신한 작품을 찾는 데 주안점을 뒀다.”며 “특히 대상작 ‘우주 Ⅱ’는 사각형의 몸체 위에 여러 단위소들을 조합,건축적으로 축조한 ‘기념비적 조각성’을 지닌 작품으로 건축적 활용가치도 높다.”고 평가했다.심사는 장 교수를 포함,심사위원장인 김수정 이화여대 교수·노경조 국민대 조형대학장·원경환 홍익대 교수·장수홍 서울대 교수 등 5명이 참여했다. 시상식은 11월29일 오후 5시 서울 태평로 서울갤러리에서 열리며,수상작은 11월29일부터 12월4일까지 서울갤러리 전관에서 전시된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심사평-‘우주Ⅱ’ 독창적 아이콘·상징성 돋보여 1981년 서울도예공모전을 시작한 이래 24년 동안 선각자적 사명감으로 도자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발전을 모색해 온 서울신문에 감사를 드린다. 올해에는 출품작은 많지 않았지만 수준은 오히려 정선된 느낌을 주었다.심사의 주안점은 신인 발굴의 뜻을 살리는 차원에서 새로운 형상성,개념성을 담보한 참신한 작품 찾기에 두었다.심사위원 5명이 공개 토론한 후 1차로 선정한 40점의 입선작 가운데 7점을 특선작으로 정했으며,특선작 중에서 대상과 우수상을 결정했다. 이 가운데 이지혜의 ‘우주Ⅱ’는 지난해 작품의 미흡한 점을 보완해 입체성과 공간 구성에 주력한 결과,심사위원 대다수의 표를 얻어 별 논란없이 대상작으로 결정됐다.사각형의 몸체 위에 단위소들을 조합한 기념비적 조각성을 지닌 작품이다.검은색의 바탕유약 위에 기하학적,추상적 사인(Sign)들을 다양한 색감으로 조율해 동심과 환상에 찬 교향곡을 들려주는 듯했다.현대적 감각으로 변형시킨 세포와 같은 아이콘(Icon)의 상징성과 변용 가능성,대량 복제성이 산업·건축적으로도 활용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우수상 수상작인 최중열의 ‘허와 실’은 놀라운 기술력과 치밀한 형태 성형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등나무 재질로 짜여진 의자를 보는 듯한 사실적인 표현과 등받이 부분에 요철을 줌으로써 개념적 의도를 극대화했다.장인정신이 주는 깊은 숨결과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는 성취할 수 없는 수작이다. 특선작 전지현의 ‘쉿! 바람소리’는 부조적 형식을 지닌 도자벽화로,구성미와 회화적 감각이 돋보였다.김종문의 ‘자연의 율-생성’은 탄탄한 조형감각과 흙의 고유한 질감을 살려내는 숙련된 기술적 측면이,전소영의 ‘빛-탄생’은 유기적인 형태가 주는 몽환적 분위기와 유약 흩뿌리기가 주는 회화성의 결합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박선신의 ‘치유’는 인간의 두상과 새의 형상을 결합한 설치형식의 작품으로,독특한 유약의 발색효과는 현실의 지평을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엿보게 했다.이주석의 ‘상념’은 불상의 형태를 지닌 작은 소조작품으로 명상적이면서도 동양적인 형상성을 보여주었으며,응모작의 크기나 형식이 일상의 규범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기한 수작이었다. 전체적인 경향은 기물보다는 조형미 추구에 편중되었으며 유약의 연구가 미흡한 점이 눈에 띄었다.공모전은 신진을 발굴해 한국 도예의 새 지평을 열어가도록 장려하는데 뜻이 있다.스승과 선배의 지도나 영향력에 의존하거나 비슷한 형식의 변주를 통해 대상을 꿈꾸기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도예가의 길을 찾아가려는 마음 가짐을 입선자나 낙선자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김수정 이화여대 교수 장동광 숙명여대 교수 ■인터뷰- 대상 이지혜씨 “서울신문사가 주최하는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도예공모전으로,여기서 대상을 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자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도예작가들의 설 자리가 날로 줄고 있는 현실에서 도자예술의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올해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지혜씨는 “무릇 예술 일반이 다 그렇지만,도자예술의 경우 작가로서의 활동공간이 너무 비좁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이씨는 그런 맥락에서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을 보다 내실화하고 출신 작가들의 모임이나 전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주최측이 좀더 적극적인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홍익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이씨는 “홍대 도예과 교수 네 분 가운데 원경환·우관호·이인진 등 세 분이 서울신문사 현대도예공모전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이씨는 지난해에도 ‘우주’라는 작품으로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올해 대상작 ‘우주 Ⅱ’는 그 연장선상의 작품으로 순수미술적인 측면을 강조한 조형도자다.석고틀에 흙물을 부어 떠내는 ‘슬립 캐스팅’ 작업을 거쳐 수백개의 기학학적인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만들어내는 고난도 작업이다. “물레를 차고 전통가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제 작품을 보고 그게 플라스틱이지 무슨 도자기냐고 합니다.하지만 현대도예의 새로운 감각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저의 모던한 스타일을 좋아하지요.저도 물론 점토를 사용하고 가마작업도 하지만 흙이 지닌 물성이나 마티에르를 강조하기보다는 디자인이나 원색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1950년대 중반,회화와 도자를 접목해 도예를 순수예술의 범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미국 도예가 피터 볼커스 등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세라믹 조각’이 시도된 이래 ‘현대미술로서의 도예’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이씨의 작품 또한 도예의 이런 순수미술적 속성을 적극 수용한다. 이씨는 조형도자 못지않게 테이블 웨어 등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도자 작업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경기도 파주 헤이리 아트밸리의 한향림 갤러리 전속작가인 그는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은 조형도자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기능성을 강조하는 생활도자 작가들은 출품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며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처럼 조형부문과 생활부문으로 나눠 공모하는 것도 도자예술의 저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했다.“조형의지를 표현하는 데 있어 도예만큼 우월한 장르도 없다.”는 이씨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전업작가로서 더욱 일로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인터뷰-우수상 최중열씨 우수상 최중열씨 “미국의 현대도예 1세대 작가인 루디 오티오 몬태나대 명예교수는 올해 나이가 78세입니다.하지만 그는 지난해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에 출품해 당당히 동상을 차지했습니다.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나이가 좀 들어 도예공모전에 작품을 내면 망신당하기 십상입니다.30대 중반쯤 되면 점잖게 강의나 나가야지 공모전에 출품하는 건 창피하다고 여기는 게 우리 풍토입니다.50대는 물론 40대 응모자도 손에 꼽을 정도예요.” 올해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서 47세의 ‘고령’으로 우수상을 따낸 최중열씨는 “장인의식이 부족한 우리 예술계의 전반적인 풍토가 예술가들의 손발을 스스로 묶고 있다.”고 개탄했다. 최씨는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의 문을 두드린 지 6년만에 우수상을 받았다.“서울현대도예공모전은 도예작가로서는 꿈의 관문입니다.더구나 신문사와 같은 공적인 권위를 지닌 기관에서 ‘소외 장르’인 도예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것은 작가로서는 더없이 큰 힘이 되지요.” 최씨의 수상작 ‘허와 실’은 10㎝ 정도 크기로 나눈 점토조각 수천개를 대나무 마디처럼 이어 붙여 만든 순수 조형작품.작가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마디쌓기’ 기법이라 부른다.“마디를 만들어가는 성형기법은 저만의 독창적인 방식입니다.‘마디쌓기’를 주제로 논문까지 썼지요.앞으로 도예가 최중열의 트레이드마크로 가꿔나갈 작정입니다.” ‘허와 실’에는 탐욕과 욕망이 들끓는 이 시대,대나무 속처럼 마음을 비우고 살자는 작가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최씨는 경희대 도예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홍대와 서울대의 벽’을 깨고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그러니 더욱 감격스럽고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한국 사회가 온통 그렇듯 예술계에서도 ‘제1의 기득권’인 학연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라도 패거리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서울현대도예공모전부터라도 그런 모범을 보여 사회의 경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토원(土元)’이라는 개인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최씨는 대부분의 도예작가들이 그렇듯 조형도자와 생활도자를 병행하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제24회 서울현대도예공모전 입선자 33인 명단 맹안희 김현주 서예나 채효연 배주영 강화정 이승희 장인옥 정미희 김은주 정희성 조미라 김시원 김진미 김자민 윤정선 최연주 남행선 김삼현 윤주철 정혜원 윤경혜 홍승철 유정민 손은정 이난희 전대숙 주성옥 차동기 황연화 이영석 최애리 곽항
  • 청담동 구두패션 트렌드 9cm의 ‘마법’

    청담동 구두패션 트렌드 9cm의 ‘마법’

    ‘지금 청담동은 9㎝ 높이의 눈부시게 화려한 언덕(힐) 위에 있다.’ 요즘 청담동을 걷다 보면 유독 강렬한 컬러와 과감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옷도 가방도 아닌 구두 얘기다.‘섹스&시티’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두에 관심을 갖지만 막상 구입하게 되는 것은 단정한 검정 혹은 갈색 구두다.하지만 이곳에선 단정하다 못해 지루한 검정색 단화는 이미 잊혀진 패션 아이템이다. ●화려하게 높게 그리고 시간을 초월해 이제 골드와 실버는 구두 색으로서는 평범한 축에 속한다.온갖 원색들이 청담동 여인들의 발을 감싸고 있다. 디자인은 기본형에 디테일이 강조된 것이 인기.모양은 얼핏 평범해도 뱀피,스웨이드,송치(송아지 털),애나멜 등의 소재로 탄생하면 특별해진다.여기에 크리스털과 같은 반짝이는 장식과 만나 그 화려함은 극에 달한다. ‘나인웨스트’를 수입하는 개미플러스의 유현정 실장은 “청담동의 눈은 소재,문양뿐만 아니라 가격에 대한 저항감 없이 편하면서도 가장 트렌디한 구두를 찾고 있다.”며 “이러한 성향으로 구두가 과감해질대로 과감해졌다.”고 설명했다. 힐의 높이도 만만찮다.디자이너 구두 ‘최정인’의 브랜드 매니저 김준응씨는 “가장 아름다운 실루엣이 나오는 높이는 5㎝나 7㎝가 아닌 9㎝”라며 “이것을 ‘맛본’ 이들은 좀처럼 힐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계절을 초월하는 구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가을로 접어들어 겨울을 바라보고 있지만 오픈토(구두코 부분이 뚫린 신발)이거나 샌들이 여전히 인기다. ●청담동 구두패션 리더 화려하면서 편안한 구두로 유명한 ‘수콤마보니’에서는 이번 가을 각종 인조보석이 활용된 구두가 눈에 띈다. 심연수 이사는 “고객 대부분이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구두를 찾는다.”며 “특히 캐주얼한 코디네이션에 섹시미를 가미하기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 디테일을 강조한 구두가 인기”라고 전했다.형형색색 인조보석으로 만든 나비 장식을 탈부착할 수 있는 새틴소재의 구두는 32만 8000원.한정 판매하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빼곡히 박힌 구두는 59만 8000원.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할리우드 스타가 열광하는 ‘지미추’는 국내에서는 조금 소심한 느낌이다.지난 9월 처음 선보인 지미추는 대중적인 발 뒤꿈치가 뚫린 슬링백이나 납작한 펌프스 등 대중적인 디자인이 소개됐다.복숭아뼈 부근에 리본장식이 달린 토페컬러(카키와 베이지의 중간색) 구두(133만원)가 히트상품.발등에 새틴 소재 리본이 달린 오픈토 슈즈는 83만원.정장에 어울릴 만한 매듭장식의 구두는 67만원.다음주부터는 보다 화려한 디자인도 국내에 선보일 예정이다. 런칭 1년 남짓 된 기간에 다수의 마나아를 확보한 ‘최정인’의 가을 핫아이템은 오픈토와 슬링백.봄·여름에 인기 있는 이같은 디자인이 이미 청담동에서는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사계절 아이템으로 꼽힌다.색상은 레드가 주를 이룬다.고객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구두는 다크 레드와 베이지 색 벨벳 샌들(31만 8000원).단조롭지 않으면서 우아한 느낌의 뱀피 소재 구두는 59만원. 최여경 나길회기자 kid@seoul.co.kr
  • [청담동 + α]

    [청담동 + α]

    ●랄프로렌은 매년 10월 전세계적으로 진행하는 유방암 예방 캠페인인 ‘핑크불빛 밝히기’ 행사에 맞춰 핑크포니 물량을 확대했다.회사측은 분홍색 말이 그려진 이 제품의 판매 금액 일부를 한국유방건강재단에 기부한다.반팔티셔츠(블랙·화이트) 13만 5000원,지퍼 카디건 98만원,트레이닝바지 88만원선. ●고급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노블레스가 회원용 온라인 포털사이트 ‘노블레스닷컴(www.noblesse.com)’을 정식 오픈했다.새 단장한 노블레스닷컴은 매달 새로운 내용으로 업데이트되는 월간 노블레스웹진과 발 빠른 명품 정보를 제공하는 특화 쇼핑몰.회원 간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유도하는 커뮤니티,온·오프라인을 연계하는 이벤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언더웨어 DIM(딤)은 올 가을 유행색인 바이올렛과 퍼플을 주요 색상으로 한 ‘올레비에 레크레숑’ 라인을 선보였다.꽃문양,다양한 스티치 등 디테일로 독창적이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에 면 소재로 편하다.(02)569-5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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