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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의 끝, 그 경계에 서다…세상 끝, 그 묘함을 보다

    악의 끝, 그 경계에 서다…세상 끝, 그 묘함을 보다

    “경계선까지, 끝까지 해보고 싶었습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의 언론배급시사회가 끝난 뒤 무자비한 추격자 레이 역을 맡은 이정재의 일성이 그랬다. 본인 스스로 “과도한 연기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 뒤에 나온 얘기였다. 피를 보면 눈을 번득이는 ‘인간 백정’ 레이는 그만큼 욕심 나는 배역이었다. 5일 개봉하는 영화 ‘다만악’은 마지막 미션을 끝으로 청부살인업에서 손을 떼려는 킬러 인남(황정민 분)과 그로 인해 형제를 잃은 레이의 추격전을 그린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다. ‘관상’(2013), ‘암살’(2015) 등을 통해 ‘악역을 맡으면 영화가 잘된다’는 속설을 가진 이정재가 또 한 번 악역으로 분했다.●문신과 액세서리로 표현한 맹수의 본능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정재는 “제작자들이 저한테 자꾸 악역만 의뢰할 거 같아서 불안한 느낌”이라며 웃었다. “악역이라는 것이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는 거 같아요. 레이 역할 제안받고서도 ‘어떻게 하면 좀 더 새롭고 흥미롭게 그릴까’ 고민할 때가 제일 즐거웠어요.” 다른 작품에서는 ‘인간 이정재’가 나올까 봐 캐릭터 구현에 많은 의견을 내지 않는 그이지만, 이번에는 의욕적으로 참여했다는 설명이다. 이정재가 레이로서 집중한 것은 ‘맹목적인 사냥 본능’이다. “형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는 핑계일 뿐”이라고 설정하고 “누군가를 사냥해야 하는 맹수에 가까운 인물이라 쫓아가는 데 희열을 느끼는 묘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 ‘묘함’을 잘 살리면 왜 그렇게 인남을 쫓는가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고 부연했다. 이를 살리는 방법 첫 번째는 비주얼적 구현이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문신, 주렁주렁한 스틸 액세서리에 화이트 룩으로 형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레이가 관객들과 만나는 첫 신이다. ‘관상’의 수양대군 못지않은 강렬한 등장이다. “(관객들이) 레이를 처음 봤을 때 ‘쟤는 왠지 죽을 때까지 쫓아갈 것 같아’라는 믿음을 심는 게 중요했어요. 검은 정장 차림이 아닌 건 형의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이죠.” 극적인 비주얼 연출을 위해 핑크색 가발까지 집어 들었다 내려놨다는 그다.●고무줄처럼 튕겨오른 찰나의 액션 표정 ‘묘함’을 살리는 두 번째는 표정 연기다. 액션 신도 전체 동작보다는 찰나의 표정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남과 레이가 처음 만나 싸우는 복도 신 같은 데서도 레이는 떨어져 나갔다가도 고무줄처럼 바로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바로 들어가는 거죠.” 치열한 추격전을 펼치다 그는 왼쪽 어깨 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이어지는 작품 ‘오징어 게임’의 촬영으로 여태껏 수술을 하지 못했다. 486만 관객을 동원한 ‘신세계’(2013)에 함께 출연했던 황정민과는 7년 만의 재회다. 소감을 묻자 그는 “정민이 형은 그때도 ‘체력이 진짜 좋구나’라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여전하네’ 했다”며 “현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거기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재회를 기대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신세계’는 누아르(암흑가) 영화였고, ‘다만악’은 액션 영화죠. 충분히 액션을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컷 ‘맹수 본능’을 얘기하던 이정재가 예의 그 착해 보이는 실눈 웃음을 만들며 답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광주시, ‘너른고을 알리미’홈페이지 접수

    광주시, ‘너른고을 알리미’홈페이지 접수

    경기 광주시는 시정정보 문자알림서비스인 ‘너른고을 알리미 (사님)’를 오는 3일부터 시 홈페이지에서 신청이 가능하다고 31일 밝혔다. ‘너른고을 알리미’는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인 일자리, 복지, 지방세, 문화, 생활정보 등 분야별 유익한 시정정보를 문자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SNS사용이 불편한 시민들도 시정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시청 홈페이지에서 휴대전화번호 본인 인증 후 바로 신청할 수 있으며 인터넷 사용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방문신청도 가능하다. ‘너른고을 알리미’ 신청은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접촉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난 4월 서비스 시작 이후 4300여명의 서비스 신청자가 모집될 정도로 호응을 얻었으며 시는 온라인 신청 서비스가 개시되면 더 많은 신청 접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너른고을 알리미’ 문자서비스로 생활 밀착형 시정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시정 참여를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한국고미술협회, ‘옛 삶으로 마음을 열다’전 개최

    한국고미술협회, ‘옛 삶으로 마음을 열다’전 개최

    한국고미술협회는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연례 회원전 ‘옛 삶으로 마음을 열다’를 개최한다. 전국 지회 소속 회원 400여명이 출품한 서화, 고가구, 도자, 공예품 등 150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협회는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옛 선인들의 수준 높은 미감과 삶의 지혜가 담긴 고미술품을 감상하며 경직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회원들의 염원을 담아 주제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대표작은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향완 쌍’, 주물로 만든 고려시대 도장 ‘대고려국새’ 등이다. 한 쌍으로 된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향완’은 사찰에서 향을 피우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넓은 구연부를 가진 몸체와 나팔형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고려국새(大高麗國璽)’라고 쓰인 주물 도장은 12×9㎝ 크기로, 지금까지 공개된 것 가운데 가장 크다.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의 친필 액서, 조선 중기 문신 황헌의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조선백자항아리는 높이 37㎝의 비교적 큰항아리를 포함해 총 4점이 출품된다. 배나무를 주요 재료로 쓰고 가래나무로 판재를 사용한 ‘사층책장’을 비롯한 고가구들도 다양하게 소개된다. 전시 연계행사도 풍성하다. 고미술 입문자를 위해 국내외 서적을 한자리에 모아 서가를 꾸민다. 26일 오후 3시에는 고미술애호가인 김치호 박사의 강연이 마련된다.전시장에 열화상 카메라를 설치하고, 마스크 착용을 필수로 하는 한편 방역 기준에 맞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지되도록 입장 인원을 조절할 방침이다. 한국고미술협회 박정준 회장은 “힘든 시기일수록 옛 물건을 찾고 감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고미술 애호가들의 저변확대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임병선의 시시콜콜] ‘나쁜놈’ 배우 트레호의 옥중 교화 경험 다큐로

    [임병선의 시시콜콜] ‘나쁜놈’ 배우 트레호의 옥중 교화 경험 다큐로

    정말 무섭게 생겼다. 얼굴이며 온몸이 흉기로 보일 정도다. 영화 ‘콘에어’와 ‘좀비 헌터’, ‘메가몬스터 샤크(3-Headed Shark Attack)’에 출연했다는데 이 얼굴 낯이 익긴 하다. ‘나쁜놈’ 단골이었다. 나오는 영화마다 총 맞고, 흉기에 찔리고, 뭉개지고, 심지어 먹히고, 고문 당하다 죽는 것으로 출연 분량을 끝냈던 배우다. 그의 이름은 대니 트레호(76)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영화나 TV 드라마, 게임에 죽는 역할로 출연한 배우 중에 단연 가장 많은 죽는 연기를 선보였단다. 그는 10일 영국 BBC 라디오 뉴스비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제 얼굴이 먹어주거든요”라고 이죽거렸다. 긴 머리를 꽁지 땋아 말아 올리고 가슴팍을 열어 제치면 온통 문신이다. “내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아주 친한 친구들이 얘기하더군요. ‘온 세상이 널 영화 스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넌 그러면 안돼’ 라고요. 난 그냥 영화배우가 아니라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처음 영화에 출연할 때부터 배역은 늘 ‘죄수 1번’이었다. 실제로 중범죄를 저질러 악명 높은 샌 ?틴 주립교도소에서 복역한 경험이 있다. 해서 곧 개봉될 다큐멘터리 영화 ‘죄수 1번-대니 트레호가 뜨기까지’ 제목이 정해졌다. 그는 1960년대 범죄 소굴에서 빠져나온 것이 기적이었다고 돌아봤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트레호는 10대 시절 이미 마약에 쩔어 지냈다. 무장강도 등 여러 혐의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샌 ?틴 에서 가장 유명한 죄수였으며 복싱 챔피언이기도 했다. 영화는 2주 동안 샌 퀜틴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문제적 다큐멘터리 감독인 루이 서룩스(Louis Theroux)가 만들었는데 트레호가 동료 죄수가 등을 흉기에 찔리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동기부여 강사로 활약하기로 마음 먹는 과정 등을 그려낸다. 트레호는 솔레다드와 폴섬 교도소에서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고통스러웠다”면서 “소년원에 입소하며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거기선 대개들 그런다. 하지만 난 혼잣말로 ‘아냐 기다려봐. 끝나지 않았어.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되뇌었다”고 말했다.곤경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약물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했다. 약물 카운셀링을 했고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들이 따라 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이렇게 하다 1980년대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분 좋으려고 매일 최선을 다했다. 제 유명세로 나이 어린 팬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시작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끝내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웠으면 해요.” 수감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여러 교도소를 찾는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데 그는 갈 때마다 “두렵고 걱정됐다”며 “거길 다녀오면 교도소에 계속 있는 꿈을 꾸곤 한다. 소스라쳐 일어나 절대 선을 벗어나면 안된다고 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트레호는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진다며 몇년 전 애덤 샌들러의 영화 ‘리디큘러스 6’에 출연했을 때 누군가가 언제 은퇴할 거냐고 물었다며 “당시 난 카우보이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금방 은퇴할 것 같지 않았다. 난 지금 너무 재미있는데 라고 답했다”고 들려줬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금요칼럼] 휘항을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휘항을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연전에 본 영화 ‘사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비운의 사도세자를 아버지 영조가 불렀다. 세자는 부왕의 질책이 두려워, 그때가 한여름이었건마는 세손(정조)의 휘항(揮項)을 찾아서 머리에 얹었다. 사랑하는 세손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부왕이 차마 심한 꾸지람은 하지 않으리란 바람이었다. 하지만 세자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휘항은 머리에 쓰는 방한 용구이다. 겉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안에는 털가죽을 붙였다. 18세기의 문인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제3권)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고려 때부터 한겨울에는 남녀가 모두 이엄(耳掩ㆍ귀마개)을 썼는데, 나중에는 휘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휘항은 17세기 후반 출현했다. 처음에는 서울의 부유한 역관 두어 명이 착용했다. 장안의 갑부요 장희빈의 당숙인 장현도 그중 하나였다. 문신 유척기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족제비 털가죽으로 휘항을 만들었다. 워낙 귀중품이라 권문세가의 자제와 장수들의 사위나 소유할 수 있었다. 그다음 세기가 되면 지방관도 휘항을 애용했다. 숙종 32년(1706)경 전라도 임피 현령 이만직이 멋들어진 휘항을 쓰고 서울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부러워했단다. 영조 때가 되면 훨씬 더 사치스러운 휘항이 등장했다. 담비 가죽으로 만든 거였는데 최상품은 가격이 100냥을 넘었다. 그 돈이면 논 2000평을 살 수 있었다. 또 휘항을 개량한 만선이란 모자도 등장했다. 가장자리에 초피를 두른 것이 그것인데, 투구 속에 쓰기가 좋았다. 애초에는 대궐을 지키는 군인이 주로 착용했다. 뒤에는 민간에도 널리 퍼져 18세기 말이 되면 신분이 낮은 종들도 가질 만큼 일상적인 상품이 됐다. 담비와 족제비 털가죽의 수요가 폭발하자 상인들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밀수입했다. 국부 유출을 우려한 정조는 수입금지령을 내렸다. 왕은 휘항의 크기도 줄여서 지출을 줄이려 했다. 또 담비 꼬리는 아예 사용을 못 하게 했다. 대신 사용하는 족제비 털가죽도 국내산으로 한정했다. 그때 북부 지방에서는 다수의 족제비가 포획됐다. 쉽게 말해 정조는 고가의 수입품 털가죽을 국내산으로 대체하고, 백방으로 사치 풍조를 억압한 셈이었다. 성대중과 같은 지식인들은 정조의 무역 규제를 환영하며 “국가와 백성을 위해 무척 다행스럽다”고 호평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17~18세기는 ‘모피의 시대’였다. 기후변화로 겨울철 수은주가 떨어진 탓도 있었겠으나 무역과 상공업으로 성장한 신흥부자들의 과시 욕구도 한몫했다. 담비와 비버 털가죽으로 만든 최상품 모자가 유럽 중산층의 인기를 끌었다. 검은 여우 모피로 만든 외투와 목도리는 상류층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모피 열풍으로 북미대륙의 개발이 촉진돼 상업 도시 뉴욕이 부상했다. 그때 러시아는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모피를 좇다 보니 그들은 알래스카까지 차지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때 조선에도 휘항과 만선이라는 신상품이 나타나 시장경제의 발달을 자극했다. 수요가 폭발하자 담비와 족제비 털가죽이 외국에서 밀수입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깜짝 놀란 정조가 수입 중단을 엄명했으나 과연 왕의 뜻대로 됐을지는 의문이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명군 정조나 일급지식인 성대중도 경제활동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역거래를 막고 사치풍조를 뿌리뽑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들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소수 특권층과 부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 규모가 팽창했다. 정녕 이 나라가 잘되려면 역사의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 [월드피플+] 부실수사로 억울한 옥살이하고도 백인경찰 목숨 구한 흑인청년

    [월드피플+] 부실수사로 억울한 옥살이하고도 백인경찰 목숨 구한 흑인청년

    경찰 부실수사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흑인 청년이 위험에 빠진 백인 경찰의 목숨을 살렸다. 23일(현지시간) AP통신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발생한 충돌사고로 순찰차에 갇혔던 백인 경찰이 한 흑인 청년의 도움으로 구조됐다고 보도했다. 21일 저녁, 펜실베이니아 주 유니온타운의 아버지댁을 방문한 데이런 맥리(31)는 집 밖에서 화염에 휩싸인 경찰차를 목격했다. 차 안에는 백인 경찰 제이 헨리가 갇혀 있었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지만, 차문이 찌그러져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본 맥리는 앞뒤 고민없이 곧장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해 차문을 뜯어내고 경찰을 구출했다. 구조된 경찰은 다리 부상으로 병원 치료 중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유니온타운경찰서장은 현지언론에 “데이런이 현장에서 ‘그를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더라.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백인 경찰 과잉진압으로 흑인 용의자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이후 미전역으로 항의 시위가 번진 상황에서 전해진 소식이라 동료 경찰들의 심경은 더욱 복잡했다. 한 동료 경찰은 “전국적인 시위로 힘든 상황이다. 나와 동료 경찰 모두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해한다”면서 “경찰이라는 신분에 앞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민 맥리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특히 과거 맥리가 경찰 때문에 고초를 겪었음에도 도움을 건넨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맥리는 2016년 경찰의 거짓진술과 부실수사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AP통신은 당시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다는 여동생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맥리가 경찰에게 총을 겨눴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현장 CCTV를 분석한 결과, 맥리는 주차장에 총을 든 채 서 있던 남성을 제압하고 총기를 빼앗아 내던진 뒤 현장을 빠져나갔을 뿐 경찰에게 총을 겨눈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누명을 벗었다. 오히려 경찰 측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맥리를 향해 총격을 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누명은 벗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1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그는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 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억울한 경험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몇 달 전에도 맥리는 총을 빼들고 접근한 사복 경찰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경찰 신분도 밝히지 않고 다가온 사복 경찰은 체포에 저항하는 맥리의 얼굴을 걷어차기도 했다. 그러나 맥리는 위험에 처한 경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경찰이든 누가됐든,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든간에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누군가 불에 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목과 팔의 문신 때문에 자신이 더 위협적으로 보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는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기에 경찰을 미워할 수 없다”면서 “이번 일로 내가 경찰을 용서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 “영웅보다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일년간 옥살이 시킨 순찰대 차에 불 났는데 백인 경관 구조

    일년간 옥살이 시킨 순찰대 차에 불 났는데 백인 경관 구조

    쾅! 폭발음이 들리고 집이 흔들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남쪽으로 72㎞ 정도 떨어진 유니언타운의 아파트에 사는 데일런 맥리(31)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저녁 작은 지진이 일어났나 싶었다. 일분쯤 지났을까, 친척 한 명이 집안에 뛰어 들어와 집 앞 길가에 세워둔 교통 순찰차에 불이 붙었다고 일러줬다. 여느 사람이라도 총알처럼 튀어 나갔을 상황이었다. 맥리도 달려나가 엔진에서 시작된 화염이 운전석 쪽으로 옮겨붙기 직전 문을 강제로 뜯고 백인 경찰 제인 핸리를 밖으로 끄집어 냈다. 경찰들과 이웃들은 맥리가 핸리의 목숨을 구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맥리의 선행을 칭찬하기 전에 떠올린 일이 있었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바로 2018년 말 펜실베이니아주 순찰대 소속 경관 넷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일이었다. 맥리는 2016년 3월 한 바에서 순찰대로부터 엉뚱하게 범인으로 몰려 일년을 교도소에서 ‘썩은’ 일이 있었다. 바로 그 순찰대 차량이었으니 앙심을 충분히 품을 만했다. 더욱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백인 경관을 바라보는 흑인 사회의 공분을 감안하면 맥리의 행위는 더욱 칭찬받을 만했다. 그러나 맥리는 다음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차 문을 강제로 뜯고 그를 끄집어내 안전하게 피신시켰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니타운 경찰서의 토머스 콜레닉은 현지 방송 인터뷰를 통해 “데일런이 말하더군요. ‘그를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고요. 아시겠지만 뭐라 제가 표현할 말이 없더군요”라고 털어놓았다. 핸리의 친척 몇몇은 사고 당일과 다음날 소셜미디어에 맥리에 감사를 표하는 글을 연신 올렸고, 그가 심각한 다리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는 중이라고 알렸다. 맥리는 핸리의 여동생이 전화를 걸어와 직접 고맙다고 인사하더라며 쑥스러워했다. 친구들이 핸리를 구하기 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고 전하자 그는 “아니다. 모든 인간의 목숨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모두 신의 자녀들이며 난 누구라도 불에 타는 모습을 바라만 보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이나 다른 경관들이 내게 어떤 일을 했건 ‘이 남자는 안전하게 귀가해 가족과 지낼 자격이 있다’는 것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맥리가 당한 일년 반 전 당한 어처구니없는 일을 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동생으로부터 술집에 싸움이 일어났으니 날 좀 데려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도착했더니 정말 한 남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해서 주차장에서 그를 붙잡아 총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그 순간 순찰대 경관이 그를 향해 총을 쐈다. 그 경관은 맥리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보안 동영상에도 분명히 맥리는 남성의 총을 빼앗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경관이 총을 쏘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심원단은 목과 팔에 문신이 잔뜩 있는 흑인 남성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일년 뒤 재심 배심원단이 동영상을 본 뒤 무죄를 평결해 풀려났다. 그 사이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맥리는 몇달 전에도 경찰과 맞닥뜨린 일이 있었다. 사복으로 위장한 경찰관들이 총을 겨누고 접근하자 달아났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머리 뒤쪽에 손을 깍지 낄 때까지 경찰은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경찰은 체포에 응하지 않고 저항하려 했다고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맥리는 오히려 경관들이 얼굴에 발길질을 했으며 입술을 찢는 시늉을 했다고 했다. 이 때의 상황도 보안 카메라 영상으로 담겨 있어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감정과 전체 경찰을 바라보는 눈은 달라야 한다고 맥리는 말했다. 13세 아들 애비안에게도 피부색 갖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 그의 말이다. “난 영웅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그저 똑바른 사람으로만 알려지고 싶을 따름이다. 어디서 뭘하든 똑바른 사람 말이다. 바라건대 (순찰대가) 이걸 알았으면 좋겠고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시장·패션·노동운동… 산업화의 미소와 눈물 ‘공존의 공간’

    시장·패션·노동운동… 산업화의 미소와 눈물 ‘공존의 공간’

    한양도성 대문 중 두 번째 문인 흥인문은 정동(正東) 쪽에 있어 동대문이라 불린다. 첫 번째 문인 숭례문(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이며 흥인문은 인(仁)을 흥하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동대문 주변은 시장과 음식점, 약국 등이 밀집한 상업 중심지다. 동대문 근처에 있어서 동대문역, 동대문종합시장, 동대문패션타운 등 동대문이란 명칭이 붙어 있지만 행정구역으로는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와 중구에 속한다.동대문에서 북쪽으로 도로 건너편에 있었던 이화여대 의대 부속병원이 옮겨 간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돼 한양도성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자리는 조선 4부 학당의 하나인 동학이 있어 마을 이름을 동학동이라 했다. 동학골 서쪽에 있던 마을은 선비들을 길러냈다는 뜻에서 양삿골, 양사동(養士洞), 양인사동(養人舍洞)으로 불렀다. 이곳에서 복원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낙산공원이 나온다. 종로는 조선시대에 이미 동대문까지 뚫려 있었다. 조선 정종 원년에 종루를 중심으로 800여칸의 행랑을 조성하고 시전(市廛)을 배치해 종로는 조선 초기부터 서울의 상업 중심지역으로 성장했다. 종로는 세종로와 더불어 서울의 핵심 간선도로로 세종대로 사거리(광화문 사거리)에서 동대문을 지나 종로구 숭인동 신설동역으로 이어지는 약 4.2㎞의 거리다. 행정적으로는 6번 국도이면서 동시에 51번 서울시도로 돼 있다. 다만 일상적인 지명이나 법정동으로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동대문까지를 종로라고 부른다. 청계천 북쪽,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과 동대문역 사이가 종로의 동쪽 끝인 종로5·6가동이다. 그 서쪽은 행정구역상 종로1·2·3·4가동이다. 동대문 인근에는 동대문종합시장, 전태일 분신 장소, 평화시장, 청계천 헌책방거리, 동대문패션타운, 동대문신발종합상가, 동대문생선구이골목, 광장주식회사(광장시장), 보령약국 등 9곳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구한말 한성전기회사는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로 연결되는 서울 중심 도로에 전차 선로를 가설했고, 1899년 5월 20일 최초의 노면 전차가 개통돼 종로와 동대문을 지나다니게 됐다.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바로 안쪽에 발전소와 기계창을 뒀는데 그곳에서 영화(활동사진)를 상영했다. 영화 상영의 목적은 전차 승객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가로등 3개를 점등했는데 이날은 ‘전기의 날’로 지정됐다. 동대문은 국내 전기의 발상지인 동시에 국내 최초의 영화관 소재지인 셈이다. 조선 후기에 종로5가역 서남쪽 종로4가에 이현(梨峴·배오개)시장이 있었다. 종로시전, 남대문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시장으로 꼽히던 시장으로 주로 해산물과 채소를 팔았다. 보부상 출신인 박승직은 1896년 이현시장에 현 두산그룹의 뿌리가 되는 포목점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종로5가에서 3가 쪽으로 걷다 보면 ‘두산그룹 발상지’라고 적힌 터를 만날 수 있다. 박승직은 1905년에는 김종한 등 상인들을 규합해 이현시장 자리에 삼일장, 오일장 등 며칠에 한 번씩 시장이 열리던 당시 국내 최초의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을 설립했다.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남대문시장 경영권이 장악당하자 민족 경제권을 지키기 위해 발족한 것이다. 화물을 쉽게 수송할 수 있는 전차 개통과 광장시장 개장으로 동대문 주변은 빠른 속도로 상업 중심지역으로 발전했다. 광장시장의 ‘광장’은 광교와 장교 사이라는 뜻이다. 포목, 한복, 침구류, 양복 원단, 의류 부자재 등을 도매로 판매하지만 손가락김밥(일명 마약김밥), 빈대떡, 생선회, 족발 등 다양한 먹거리로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종로5가의 북쪽 편, 광장시장 맞은편에 1957년 개업한 보령약국이 있다. 최초로 약국의 대형화를 시도한 보령약국이 이곳에 자리잡은 뒤 종로5가 일대는 약국밀집거리가 됐다. 보령약국 창업자 김승호 회장은 ‘개방식 진열장’과 ‘전표제’를 도입해 큰돈을 벌어 1964년에 용각산, 겔포스 등의 약품으로 잘 알려진 보령제약을 설립했다. 특히 진해거담제 용각산은 유명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로 보령제약의 간판 상품으로 자리잡았다.종로와 청계천 사이 종로5가에는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도 멀리서 찾아오는 음식점 거리가 있다. ‘종로5가 곱창골목’에는 ‘우리곱창’, ‘할머니곱창’ 등 곱창 전문음식점이 즐비하다. 종로6가 쪽으로 좁은 거리를 걸어가면 ‘진옥화할매원조닭한마리’ 등 닭곰탕 전문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동대문닭한마리골목’에 들어선다. 점심이나 저녁 때면 닭곰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닭한마리골목 바로 옆에는 1979년쯤에 형성됐다는 서울 유일의 생선구이 골목으로 서울미래유산인 ‘동대문생선구이골목’이 있다. 연탄 화덕에 구운 고등어, 삼치, 조기 등의 생선과 몇 가지 맛깔스러운 반찬을 곁들인 백반집은 한번 가보면 꼭 다시 찾게 되는 곳이다. 원래는 평화시장 등의 봉제공이나 시장상인들이 주로 찾았다. 연기 자욱한 골목에는 식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종로의 남쪽에 있는 청계천은 인왕산 옥류동천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는 10.84㎞의 하천이다. 1967년부터 1976년까지 청계천을 시멘트로 덮고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해 복개됐다. 2003년 7월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돼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상판을 걷어내 생태 하천으로 바꾸는 공사가 2005년 마무리됐다. 중구 관할인 청계천 남쪽의 옛 동대문운동장은 재개발돼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재탄생했다. 두산타워를 중심으로 평화시장과 인접한 지역은 대한민국 패션의 메카로 불릴 만큼 많은 대형 의류상가들이 모여 있다.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이 한 번쯤은 찾는 관광과 쇼핑 명소다. 청계천 남쪽 천변에는 평화시장과 전태일 분신장소, 청계천 헌책방거리 등 3개의 서울미래유산이 있다. 한때 전국 최대의 의류도매상가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평화시장의 역사는 광복 이후 청계천변에 있던 무허가 노점시장에서 시작한다. 6·25전쟁 이후 월남한 북한 실향민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졌다. 시장 이름은 평화를 염원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1958년 큰불이 나 판자촌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1962년 2월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로 시장 건물을 지었다. 점포 수만 2000여개에 이르고 3500여명이 의류 생산과 판매에 종사하고 있다. 산업화의 상징임과 동시에 봉제공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965년부터 청계천 평화시장 의류회사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전태일(1948~1970)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대로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을 해서 끝내 숨졌다. 전태일 열사 사망 30주년이던 2000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을 설치했고 2005년에는 전태일 거리를 조성했으며 청계천 버들다리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워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버들다리는 전태일 다리로 명명했으며 2010년에는 표석을 철거하고 평화시장 앞 전태일 분신 장소에 기념동판을 설치했다.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고 1989년부터 매년 전태일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민주화,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다.평화시장 1층에는 헌책방거리가 있다. 1960년대 헌책 노점상들이 이곳에 모여 장사를 하다가 복개공사로 갈 곳이 없어지자 평화시장 쪽으로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중고교 참고서, 영어 원서는 물론 만화, 외국서적, 희귀 서적을 찾는 학생과 어른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곳이다. 헌책방은 1960~70년대에는 100개가 넘었지만 인터넷에 고객을 빼앗겨 하나둘 폐업했고 지금은 30여곳밖에 남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작은 헌책방들은 어른 키보다 높이 쌓아 올린 책으로 가득 찼고 가게가 좁아 길가에 쌓아 놓고 팔았다. 글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한발 떨어져 찾는 ‘은밀한 일상’ 한발 앞서 찾아온 ‘따뜻한 위로’

    한발 떨어져 찾는 ‘은밀한 일상’ 한발 앞서 찾아온 ‘따뜻한 위로’

    빼앗긴 봄에도 꽃은 피듯이 코로나19 시대에도 여름은 왔다. 6월 초,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가자 베를리너들은 성급히 옷을 벗고 공원에 드러누웠다. 꽁꽁 싸맸던 마음을 꺼내 햇빛에 널고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에 멍든 몸을 뜨거운 햇살에 지졌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여자들은 비키니 차림이었다.7월의 수영장이나 해변이 아닌, 5월부터(!) 공원에서 저러고들 있으니 계절의 경계가 무색했다. 절로 눈길이 갔지만 동네이웃처럼 자주 보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됐다. 하루는 나도 비키니를 챙겨 입고 태닝족에 합류했다. 반듯이 누워 배와 등을 태웠다. 두 시간 남짓 누워 있었는데 벌겋게 살이 익었다. 베를린에선 이미 여름이 시작된 느낌이다.베를린에서 가장 좋은 계절을 꼽으라면 역시 여름이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유럽 도시 전체가 여름에 활기를 띤다. 오전 5시가 되기도 전에 날이 밝고(서머타임 때문에), 해는 밤 9시가 넘어야 진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하늘은 그제서야 짙은 푸른 색으로 어두워지고 석양의 끝을 지운다. 유럽으로 출장을 올 때마다 놀라던 초여름의 늦은 일몰, 잊고 있던 유럽의 긴 해가 매일 떠오르는 요즘이다. 여름에만 할 수 있는 일도 하나둘 늘어난다. 늦은 밤에 보는 오픈에어 시네마도 며칠 전부터 시작했다. 베를린에 있는 35곳의 야외 영화관이 문을 연 것이다. 야외 영화관은 여름 한철 반짝 문을 열고 9월 초면 문을 닫는다. 오픈에어 시네마가 문을 닫는 건 베를린의 여름이 끝났다는 신호다.●‘한여름 밤의 꿈’ 같은 오픈에어 시네마 지난해 여름엔 거의 매주 야외 영화관에 갔다. 이 좋은 걸 베를린 다닌 지 12년 만에, 남자친구가 생겨서 처음 해봤다. 야외 영화관은 동네마다 몇 군데씩 있다. 큰 공원 안에 있기도 하고 슈프레 강변의 바 안에 있기도 하고 클럽 옆에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크로이츠베르크의 마리아난 플라츠에 있는 프라이루프트 키노다. 영화관 뒤로는 1800년대에 지어진 멋진 문화공간이 있고, 사방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시골 숲속이나 인적 드문 공원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자연적이고 평온한 바람이 분다. 오픈에어 시네마의 자리는 일찍 온 순서대로 앉는다. 맨 앞자리 몇 줄은 천으로 된 비치의자를 놓을 수 있다. 자리를 사수하려면 한 시간 정도 일찍 가는 것이 좋다. 줄을 서 있다가 30분 전에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비치의자를 들고 좋은 자리를 찾는다. 영화관 안에는 생맥주와 팝콘, 커리 부어스트(소시지) 등을 먹을 수 있는 야외 매점도 (당연히) 있다. 매점의 불빛이 서커스장 조명처럼 발랄하다. 야외 영화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시작한다. 싱그러운 나무의 냄새를 맡고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건 여름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계절엔 아예 즐길 수 없으니까. 커다란 스크린이 야외에 있으니 코로나19의 일상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심이 된다. 앉는 사람들 간의 거리는 조정을 하겠지만, 춤도 출 수 없고 디제이도 없이 문을 여는 베를린의 클럽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다. 베를린에서 야외 영화관을 고를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독일어로 더빙된 영화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일이다. 독일에선 극장뿐 아니라 TV에서 보여 주는 모든 해외 영화에 더빙이 돼 있다. 자막이 익숙한 우리에겐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오디오 북을 듣고 자는 독일인들에게 더빙은 친숙하고 일상적인 문화다. 더빙 문화의 역사도 길어서,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의 목소리는 보통 정해져 있는 성우가 있다. 예를 들어 브루스 윌리스는 30년 넘게 한 목소리다. 야외 영화관을 고를 때는 원어에 영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해도 못 하는 독일어를 두 시간 내내 듣게 될 수도 있다. ●베를린의 편의점 ‘슈페티’ 앞에서 맥주 한 잔 베를린의 여름이 뜨거워지는 건 슈페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수로 알 수 있다. 슈페티는 베를린의 편의점 같은 곳. 동네마다 있고 대부분 24시간 문을 연다.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우리나라의 편의점과는 달리 간단한 식료품과 과자, 음료, 담배류, 술을 주로 판다. 종류마다 다 있는 건 역시 맥주. 밤 10시면 슈퍼마켓까지 다 닫는 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술을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밤마다 슈페티 앞으로 모이는 건 당연하다. 술을 사서 가게 앞 인도나 벤치, 길가에 아무렇게나 앉아 마신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슈페티 앞에는 늘 사람들이 맥주병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여름엔 그 열기의 농도 자체가 달라진다. 가게 앞의 긴 테이블과 의자를 가득 메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바이브가 짜릿하게 전해진달까. “여긴 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하고 쳐다보면 힙한 바가 아니라 슈페티 앞일 때도 많다. 베를린의 슈페티는 술 취한 아저씨나 돈 없는 어린애들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힙스터들,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 클럽 가기 전에 취하러 온 젊은 애들, 집 앞에 한 잔 하려고 나온 동네 주민까지 한데 어울려 같이 마시고 같이 취한다. 동네 사랑방이자 여름엔 펍보다 붐비는 ‘가맥집’이다.그 도시에서 꼭 가 봐야 하는 바 순위가 있는 것처럼 베를린에는 유명한 슈페티 명소가 있을 정도다. 미테의 로젠탈러플라츠 역 바로 앞 슈페티가 그렇다. 밤새도록 사람들이 앉아 술을 마시는 다국적 만남의 장소다. 이곳은 워낙 유명해서 슈페티답지 않게 안에 어엿한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서울의 ‘편맥’처럼 베를린에는 ‘슈맥’이 있다. 슈페티 앞에 사람이 꽉 차 있는 밤을 만나면 베를린의 여름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다.●히피들의 은신처, 크룽커크라니히 옥상 바 날이 좋으면 더 각광받는 곳, 바로 루프톱 바다. 베를린에도 내로라하는 야외 옥상 바가 많다. 대부분은 호텔 꼭대기에 있다. 25아워스 호텔 꼭대기에 있는 몽키바는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베를린 동물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때문에 유독 사랑받는다. 베를린을 놀러 오는 여행자들의 인기 리스트에 항상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미테의 아마노 호텔 꼭대기에도, 베를린에서 가장 핫한 부티크 호텔, 소호에도 루프톱 바가 있다. 모두 세련되고 힙한 분위기가 넘친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호텔 바를 가지는 않듯이, 여기서도 그렇다. 호텔 바보다는 오래돼 보여도 자연적이고 자유가 넘치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옥상 바가 한 군데 있다. 히피들의 아지트처럼 대접받는 크룽커크라니히 바다. 노이쾰른의 쇼핑몰 꼭대기에 숨어 있는 이곳에는 삐걱대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제멋대로 놓여 있다. 사람들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사서 아무 데나 털썩 앉는다. 유일하게 이들이 신경을 쓰는 건 아름다운 노을. 그것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쳐다본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베를린의 도시 풍경 또한 최고다. 시야를 막는 고층빌딩 하나 없이 고만고만하게 낮고 많은 지붕 너머로 베를린의 상징인 TV타워가 내다보인다. 이 낮은 지평선 도시와 석양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 노이쾰른의 아카덴 쇼핑몰 꼭대기로, 한 번에 찾기는 힘든 길을 헤매면서 올라간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아 관광객의 레이더에서는 여전히 조금 벗어나 있다. ●야외 사우나서 꿈꾸는 ‘이열치열’ 베를린의 여름이 매일 뜨겁고 쨍쨍한 것만은 아니다. 30도까지 치솟다가도 갑자기 13도로 뚝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7월 말이어도 조용히 가죽재킷을 꺼내 입어야 한다. 전기장판만큼은 켜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이렇게 으스스한 날엔 목욕가운을 챙겨 바발리로 향한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는 스파 단지처럼 넓은 정원과 실내외 수영장, 마사지실, 레스토랑 그리고 사우나가 13개나 있는 곳이다. 카운터에서 밴드를 차고 들어가고, 나올 때 쓴 비용을 결제한다. 바발리 안에서는 모두 가운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다 사우나에 들어갈 때는 고이 가운을 걸어두고 알몸으로 들어간다. 사우나 안에 남자 여자가 ‘깨벗고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독일의 사우나는 혼욕 문화다. 안에 들어가면 계단식 나무의자에 줄줄이 발가벗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매 시간마다 열리는 사우나 프로그램에 맞춰 온 사람들이다. 처음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쳐다보고 일부러 자연스러운 척도 한다. 하지만 알몸이라는 부끄러움도 잠시, 모두가 똑같이 알몸인 그곳에서 뭔가 원초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구 하나 똑같은 체형 없이, 늘어진 배와 제각각으로 생긴 허벅지, 어깨, 가슴, 성기까지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냥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바발리의 사우나에는 특별한 점이 또 있다. 필링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 팬티만 걸친 전문 마스터가 들어와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커다란 부채질을 한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뒤쪽 끝까지 골고루 뜨거운 바람을 보내 주는 것이다. 종교 의식을 치르듯 강하고 경건하게 부채질을 하는 마스터의 몸놀림 또한 이곳 사우나의 관전 포인트다. 야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2층 벽난로 앞에서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바발리는 베를린에서 단연 최고의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코로나19 상황으로 현재 사우나는 이용이 중단된 상태다. 그래도 야외 수영장에서 나체로 수영하고 정원에 누워 마사지를 받거나 휴식을 취하는 건 여전히 가능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바발리는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쫙 뺀 후 뻥 뚫린 샤워실에서 샤워하며 이열치열 여름을 나고 싶다. ●공원처럼 산책하는 베를린만의 ‘묘지피서 ’ 베를린에서 공원만큼 산책하기 좋은 곳이 묘지다. 동네마다 크고 작은 묘지가 있다. 제각각 다른 크기의 비석과 그 앞에 놓인 꽃들,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 평화롭다. 대부분 숲처럼 나무가 많아서 공원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나중에 묘지인 걸 안 적도 많다. 아주 춥고 우중충한 날씨가 아니라면 음산한 기분도 들지 않는다. 햇볕 좋은 여름이라면? 18세기의 멋진 비석도 구경하고 책 읽고 빈둥거리기 좋다. 베를린 사람들은 묘지에서도 공원처럼 산책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풀어놓고 놀게 한다. 누군가의 묘지가 이토록 가깝고 친근하게 있다면 추모하는 일도 서글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찾아와 마음을 나누다 갈 듯하다.베를린에 사는 친구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묘지가 있었다. 그 묘지 안에는 장례식을 치르던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나중에 카페로 오픈을 했다. 카페 스트라우스. 내부는 아치형의 천장이 그대로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장례식 홀로 쓰이던 공간이 나온다. 반투명 유리로 돼 있는 지붕과 빈티지한 카키색의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유리, 그 안으로 따사롭게 들어오던 햇살에 낮은 탄성이 나올 정도다. 누군가의 죽음이 거쳐 갔고 누군가의 눈물이 흘렀던 공간이라고 하기엔 더없이 평온하고 조용하다. 어느 해 8월, 이 묘지 교회의 작은 정원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오전 내내 책을 읽던 아침이 생각난다. 베를린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작년 여름엔 남자친구와 함께 노트북을 싸 들고 자주 묘지로 갔다. 프란즐러베르크의 오래된 묘지 안에 있는 라이제파크에 가기 위해서다. 검은 비석과 잡풀, 큰 나무들이 울창한 묘지 안쪽으로 죽 걸어 들어가면 공원이 나온다. ‘볼륨을 줄인’,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나즈막한 목소리’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라이제파크는 이름처럼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다. 공원에는 짧은 풀들이 잔디처럼 자라 있고 그 뒤로 무릎까지 오는 잡풀이, 그 뒤로 중간 키의 나무들이, 그 뒤로 가장 큰 나무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풀숲이 무성해 바로 앞까지 와서야 인기척이 느껴진다. 풀밭에 누워 있으면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푹푹 찌는 한여름, 살갗이 타 들어갈 것처럼 덥다가도 이 공원 나무 아래에만 누우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에어컨 있는 집이 거의 없고 지하철에도 에어컨이 없는 베를린에서 호수로 피신을 못 갈 땐 이 공원이 제일 만만하면서도 은밀한 피서지다.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대구지법, 군대 안 가려고 온몸에 문신 20대 1년형 집행유예

    대구지법, 군대 안 가려고 온몸에 문신 20대 1년형 집행유예

    대구지법 형사6단독 류영재 판사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온몸에 문신한 혐의(병역법 위반)로 기소된 A(26)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과 120시간 사회봉사를 명했다고 14일 밝혔다. A씨는 201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등 부분에 호랑이와 도깨비 문신 시술을 받아 병역판정검사에서 3등급을 받았다. 이후에도 팔과 다리, 배 등 온몸에 문신을 새겼고 2020년 현역병으로 입영했다가 문신 때문에 귀가 조처됐다. 그는 귀가자 상대 병역판정검사에서 4급 사회복무요원소집 대상 처분을 받았지만,병 역의무를 피하려고 신체를 손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재판에서 “병역 기피가 아니라 전신 문신을 완성하려고 문신을 하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 판사는 “전신 문신을 완성해 현역 복무를 피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를 해야 하는 점 등을 종합했다”고 밝혔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적막한 그늘 아래, 번민을 내려놓다

    적막한 그늘 아래, 번민을 내려놓다

    경북 안동에 들면 과장 좀 보태 한 집 건너 문화재다. 고택이며 정자 등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수도를 자임하는 도시답다. 날이 더워지면 숲속 정자만큼 편한 쉼터가 없다. 한데 코로나19가 함정이다. ‘집합’, ‘밀집’ 등의 단어에 민감하다 보니 외려 유명한 곳을 기피하는 희한한 추세도 생겨났다. 그래서 찾아봤다. 이름은 덜 알려졌으되 문화재급의 단아한 자태를 가진 정자들 말이다.“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왔던 이 대사, 기억하시는지.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고애신(김태리 분)에게 건넨 말이다. 이 대사 뒤 둘은 악수를 나눴다. 이 유명한 대사와 장면이 촬영된 곳이 만휴정이다. 많은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던 이 장면 때문에 만휴정이 깃들인 ‘조용한 계곡’ 묵계(默溪)가 난데없는 인파로 북적였다고 한다. 지금도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연인들이 꾸준히 찾고는 있지만 열기는 다소 수그러든 듯하다.●보물처럼 빛나는 연인의 명승지 ‘만휴정’… 명당의 풍경 ‘백운정’ 드라마에 등장한 다리는 통나무를 깔고 시멘트로 윗면을 마감한 형태다. 다리 자체는 그리 볼품이 없다. 한데 명승(제82호, 만휴정 원림)으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주변 풍경 덕에 그마저도 곱게 느껴진다. 다리 위아래는 묵계계곡이다. 암반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이 다리를 지나 송암폭포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그동안 비가 적었던지 계곡수가 말랐다. 청량한 폭포 소리도 없다. 그래도 묵계(默溪) 아닌가. 소리 대신 적막이 흐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하다. 만휴정은 다리 건너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1431∼1517)이 지은 정자다. 한자로는 ‘晩休亭’이다. ‘늦은 나이에 쉼을 얻은 정자’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김계행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 같은 이름을 지은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대과에 급제한 건 마흔아홉 늦은 나이였다. 실제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도 쉰이 넘어서였고, 벼슬을 내려놓고 안동으로 낙향한 것도 일흔한 살 때였다.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을 맺었던 셈이다. 만년에야 겨우 쉼을 얻은 그가 정자 이름에 ‘늦을 만(晩)’과 ‘쉴 휴(休)’를 새겨넣은 건 아마 이 때문이지 싶다. 만휴정은 정자라기보다 여염집에 가까워 보인다. 집 전면에 누마루가 있고 양옆으로 구들방을 뒀다. 만휴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문화재’라는 이유로 엉덩이 한쪽 걸칠 수 없게 한 여느 정자들과 다르다. 누마루에 앉으면 주변 풍경이 내게로 수렴된다. 이른바 차경(借景)의 효과다. 주변 풍경을 잠깐이라도 빌려 쓸 수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풍경의 주인이 바로 나다. 만휴정에서 돌계단을 내려오면 너른 바위가 있다. 다소곳하게 앉은 아낙네의 한복 치마를 닮은 바위 위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란 글씨가 암각돼 있다.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란 의미다. 어디 청백뿐일까. 후대의 눈엔 정자와 주변 풍경 모두가 보물로 보인다. 임하 보조댐 바로 위엔 백운정이 있다. 하늘빛 반변천 위에 터를 잡은 정자다. 정자에 앉으면 반변천과 강변의 솔숲, 그 너머의 내앞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중환이 ‘택리지’에 썼다는 ‘완사명월형국’(浣紗明月形局), 그러니까 ‘말간 비단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치는 형국’이라는 뜻의 명당 풍경이 바로 이 모습이다. 전서체의 현판도 독특하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모양새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의 라이벌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이 말년인 90세 가까이에 쓴 글씨로 추정된다. 반변천 너머로는 초승달처럼 굽은 솔숲이 펼쳐져 있다. 내앞마을의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된 비보림이다. 솔숲과 백운정 등은 명승(제26호)으로 지정돼 있다.체화정은 1761년 만포 이민적이 세운 정자다. 독특한 형태의 창호 등 18세기 조선 목조건축의 수준을 잘 드러내고 있고, 연못과 인공섬을 꾸미는 등 조경사적 가치도 높아 지난해 말 보물 제2051호로 지정됐다. 체화정 앞 연못은 사각형(방형)이다. 그 안에 원형 섬을 세 개 조성했다. 이는 옛 별서정원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선사상과 음양설, 천원지방설 등이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8월쯤 정자 앞 배롱나무에 붉은 꽃이 피면 한결 빼어난 자태를 선사할 듯하다.●둘이 또 같이 ‘광풍정·제월대’… 독립의 결기 품은 ‘임청각’ 서후면 금계마을에는 광풍정이 있다. 정자 주변으로 농가들이 들어차 옛 풍경을 가늠할 수 없는 게 다소 아쉽다. 광풍정은 바로 뒤편의 암반에 지은 제월대와 ‘한 세트’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비 온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일컫는다. 저 유명한 전남 담양 소쇄원의 광풍각, 제월당과 같은 공간 구성이다. 하지만 화려하게 느껴질 만큼 잘 보존된 소쇄원에 견줘 광풍정은 어딘가 안쓰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찾아가기도, 접근하기도 쉽지 않고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사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집합’을 꺼리는 세태에 걸맞은 장소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겠다. 여정의 끝은 안동댐 초입의 임청각이다. 뙤약볕을 피할 공간은 부족하지만 선조들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동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에 무장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석주 이상룡(1858~1932)의 본가다. 이 집에서 항일 독립투사 9명이 배출됐다. 일제는 임청각의 정기를 꺾기 위해 집을 관통하는 철로를 놓았다. 이 탓에 임청각은 원형을 잃고 지금까지 반 토막 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했다. 안타까운 문화재는 또 있다. 임청각 옆의 법흥사칠층전탑(국보 제16호)이다. 통일신라 때 지어진 벽돌탑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전탑이지만 바로 옆으로 철도가 지나면서 계속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다. 임청각 복원 계획이 완료되는 시점까지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게 문화재 당국의 판단일 테지만 장삼이사의 눈엔 이러다 ‘피사의 사탑’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여기서 귀띔 하나. 임청각 인근에 비밀의 숲이 있다. 낙강물길공원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인증샷을 찍고 돌아서는 월영교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 나온다. 그리 넓지는 않아도 메타세쿼이아와 연못, 작은 분수대 등이 어우러져 잘 조경된 정원을 보는 듯하다. 낙강물길공원은 안동 시민들의 숨겨진 쉼터다. 나무 사이로 평상을 놓아 누구나 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게 했다.글 사진 안동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백운정은 임하 보조댐 위로 난 길을 건너야 갈 수 있다. 통행제한 구역이지만 관광객에 한해 문을 열어 준다. →한우물회비빔밥은 소고기 육회를 물회처럼 먹는 독특한 먹거리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해 여름에 먹기 좋다. 안동 시내 뭉치중앙점에서 맛볼 수 있다. 안동댐 인근엔 안동 명물인 간고등어, 헛제삿밥 등을 차려 내는 집들이 많다.
  • 스웨덴 검찰, 34년 전 팔메 총리 암살범 지목했는데…

    스웨덴 검찰, 34년 전 팔메 총리 암살범 지목했는데…

    스웨덴 검찰이 지난 1986년 스톡홀름의 길거리에서 올로프 팔메 당시 총리를 암살한 진범으로 2000년 극단을 선택한 스티그 엥스트롬을 지목했다. 크리스테르 페테르손 검찰총장은 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수십년 동안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었던 이 사건의 범인은 엥스트롬이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다면서 이로써 앞으로는 더 이상 진범 논란이나 음모론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팔메는 당시 총리로서 두 번째 임기를 막 시작하던 상황이었는데도 경호원을 배치해야 한다는 주변의 요구를 뿌리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그 해 2월 28일 금요일 밤,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자며 부인 리스벳, 아들 마르텐과 그의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스톡홀름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스베아바겐 거리를 걸어가던 중 괴한이 등에다 총을 쏘는 바람에 즉사했다. 주변에는 수십명이 있었지만 목격자들은 키가 크고 다부졌다는 인상 착의만 기억할 뿐 누구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경찰이 심문한 사람만 몇천 명에 이르렀지만 진범은 오리무중이었다. ‘스칸디아 남자’란 별명으로 통했던 엥스트롬은 사건이 일어난 날 저녁에 스칸디아 보험사 본사에서늦게까지 일하고 있었다. 사건 현장이 바로 근처였고, 그는 저격 순간을 목격한 20여명의 목격자 중 한 명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리고 2000년 극단을 선택하고 말았다. 용의자로 그를 처음 지목한 사람은 언론인 토마스 페테르손이었다. 검찰은 엥스트롬이 세상을 떠난 지 18년이 지나서야 그에 대한 수사에 본격 착수했는데 이날 그가 팔메 총리의 좌경 노선에 분개해 암살을 결행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가 사건 뒤 모든 순간들을 거짓으로 진술했고, 총기 훈련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그의 전 부인은 2018년 일간 엑스프레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일년 전에 형사들로부터 심문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남편이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남편은 이만저만한 겁쟁이가 아니다. 그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앞서 1998년에 잡범이며 현 검찰총장과 동명이인인 크리스테르 페테르손을 검거했는데 리스벳이 진범 같다고 해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해 무죄로 뒤집어졌다. 동기도 없고 총기도 회수되지 않아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 역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을 이끈 카리스마 넘치는 팔메 전 총리는 여러 국제문제에 이념이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날선 비판을 자주 해 적을 많이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편들어 기업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핵무력을 사용하고 비축하는 일에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1968년 옛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미국의 베트남 북폭,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의 암살은 스웨덴 경찰을 수십년 동안 조롱 거리로 전락시켰다. 용 문신을 한 소녀를 쓴 스티에그 라르손 같은 작가는 몇년 동안 이 사건을 파헤쳤다. 팔메가 암살된 이유로는 숱한 음모론이 제기됐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했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자금 지원을 한 것이 먼저 꼽혀 스웨덴 경찰이 이런 주장에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1996년 남아공을 찾을 정도였다. 둘째로는 스웨덴 무기업체 보포르스가 인도의 무기 구매 계약을 맺는 과정에 뇌물을 쓴 것을 팔메가 알았기 때문에 암살됐다는 주장도 있었다. 셋째로는 쿠르드족 무장조직 PKK 그룹을 테러리스트로 지정하는 바람에 타깃이 됐다는 주장이다. 리스벳은 결국 남편을 누가 암살했는지 알지 못한 채 2018년 남편 곁으로 떠났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코로나19가 낳은 이색 풍경…美 드라이브 스루 ‘보톡스 시술’ 화제

    코로나19가 낳은 이색 풍경…美 드라이브 스루 ‘보톡스 시술’ 화제

    코로나19로 인해 변한 일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소개됐다. 최근 로이터 통신 등 외신은 미국 플로리다 주의 유명 성형외과 의사인 마이클 살츠하우어가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보톡스 시술로 화제가 되고있다고 보도했다. 현지에서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닥터 마이애미'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그는 최근 마이애미 발 하버 지역의 고급 빌딩 차고에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보톡스 시술 장소를 마련했다. 그가 특별한 시술 공간을 마련한 것은 물론 코로나19 때문이다.지난달 4일 플로리다 주 정부가 부분적인 완화 조치에 들어가면서 성형수술을 포함한 일부 의료를 재개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성형외과를 찾는 고객들에게는 병원 문을 두드리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드라이브 스루 시술. 살츠하우어 박사는 "예전에 드라이브 스루 코로나19 검사를 받기위해 차량에 대기하던 중 이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서 "보톡스를 주사하는 부위는 얼굴 윗부분이기 때문에 마스크로 가려지지 않아 이상적"이라고 자랑했다.다만 살츠하우어 박사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과거와 다른 방식을 도입했다. 먼저 과거에는 직접 병원을 방문해 이루어졌던 서류 작성과 진료비 수납 등 모든 절차는 온라인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예약 절차가 끝나면 살츠하우어 박사는 마스크와 페이스쉴드, 장갑, 수술 가운 등으로 무장하고 주차장에서 대기하다가 고객에게 보톡스를 놓는다. 시술 전에 고객들이 미리 체온을 재고 주사 부위에 얼음 팩을 하는 것은 기본. 로이터 통신은 "고객들이 드라이브 스루 시술 방식을 매우 창의적이고 편하다고 느낀다"면서 "다만 플로리다 주의 타투이스트들은 피부에 문신을 하는 것과 비슷한 보톡스 시술은 허용하면서 문신 가게는 불허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4년 미궁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규명될까 2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4년 미궁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규명될까 2

    <1편에서 이어짐> 경찰이 찾아내지 못한 총탄을 행인이 찾아줬다. 암살범은 .357 구경의 매그넘 권총을 쓴 것으로 확인됐다. 본데손 박사는 “팔메 총리가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더라도 숨을 거뒀을 것이다. 정말 죽이고 싶어했던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우연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고 단언했다. 첫 수사 책임자는 쿠르드족 무장조직 PKK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터키에 저항하던 이들을 팔메 정부는 테러리스트 단체로 선언한 지 얼마 안됐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해서 1987년 그 조직의 본거지로 알려진 서점을 급습했다가 살인과 관련된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해 불명예 퇴진했다. 이듬해 경찰은 1970년 스톡홀름 길거리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남성을 총검으로 살해한 범죄자 크라이스터 페테르손을 체포했다. 그는 팔메 총리가 살해된 날 밤, 영화관 근처에서 수상쩍게 행동했다는 사람의 인상착의에 들어맞았다. 부인 리스벳이 여러 범죄자 사이에 크라이스터를 세웠을 때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1989년 그는 유죄 판결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변호인은 즉각 항소했고, 법원은 살해 무기도 없고, 동기도 없다며 3개월 실형을 산 그를 석방하고 손해 배상으로 5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는 2004년 자유로운 몸으로 저세상으로 갔다. 이러는 사이 ‘팔메 앓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스웨덴 인들의 궁금증은 커져갔고 각종 음모론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남아공의 한 전직 경찰 간부는 1996년에 팔메 총리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대와 ANC에 자금을 지원한 것 때문에 암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스웨덴 수사 팀이 남아공을 찾았지만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누군가가 용의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책 ‘용 문신을 한 소녀(Girl with the Dragon Tattoo)’를 쓴 스티에그 라르손이 이런 시각에서 살해 사건을 연구하고 이론을 진척시켰으나 2004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본데손 박사는 인도와의 무기 거래 계약이 암살 음모에 깔려 있다고 믿고 있다. 스웨덴 무기 회사 보포르스(Bofors)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인도에 중화기를 수출해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인도의 거간꾼 여럿에게 뇌물을 먹인 사실이 들통 나 곤욕을 치렀다.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가 연루돼 이름을 더럽혔다. 그는 “팔메가 살해된 날에야 비로소 보포르스 회사가 부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힌 뒤 “보포르스 계약에 관련된 거간꾼이 살해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경찰은 늘 그럴 가능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실마리 하나는 살해 현장 근처에 본사가 있는 스칸디아 보험 회사 직원이었으며 살해 순간을 목격한 20명의 목격자 가운데 한 명인 스티그 엥스트롬이다. 그는 2000년 극단을 선택했다. 경찰은 2018년 엥스트롬 수사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도됐다. 스웨덴 기자로 12년 동안 탐사해온 토마스 페테르손은 그가 무기 훈련을 받았으며 총기 수집광이었으며 매그넘 리볼버 애호가였던 남자와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며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는 나아가 범행 현장에 자신이 머물렀던 시간을 거짓으로 얘기했고, 하지도 않은 소생술을 시도했다고 꾸며대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본데손 박사는 “많은 스웨덴 인들은 엥스트롬이 희생양으로 이용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땅딸막하고 하찮은 인물처럼 보였다. 살인자는 키도 크고 다부졌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누구라도 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10일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도 건질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 생각에 별 볼 일 없이(damp squib) 끝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는지 보자.” 순드스트롬 총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대할 것이 없다. 명료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 어떻게든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 중요하다. 답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을 필요는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했나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했나

    예전 의복 쓰임새는 바람과 추위를 막아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옷의 색깔과 문채(文彩)로 신분의 귀천을 나타냈다. 따라서 나라와 문화에 따라 복색의 이미지가 달랐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한나라 때 관리들은 검정 옷을 입고 급사나 관청에서 심부름하는 천한 사람은 흰옷을 입었는데, 조선은 온 나라 안이 모두 흰옷을 입으니 중국 사람들이 이를 조소한다”고 했다. 명나라 사람들은 검정 옷을 숭상했고 일본은 청색을 숭상해 남색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푸른 옷을 뜻하는 청의, 청포는 오히려 신분이 낮거나 빈한하거나 무력한 사람을 의미했다. 해진 옷을 뜻하는 ‘남루’도 “누더기가 된 푸른 옷”에서 나온 것으로, 죄수들의 청색 수의도 여기서 비롯됐다. 서양에서도 여성의 생리일을 블루데이라 하고, 휴일 다음 월요일을 블루먼데이라 하여 청색은 부정적인 의미를 뜻했다. 우리 민족의 흰옷 사랑은 남달랐다. 1894년 3월 초 서울을 방문한 파란 눈의 여인 영국 이저벨라 비숍은 남산에 올라 “흰 눈더미처럼 보이던 그것은 하얀 두루마기의 물결이었다”고 1898년 출간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회고했다. 우리의 백의 습속은 역사가 아주 깊다. 기원전 1세기경 쓴 진수의 ‘삼국지’에도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상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는다”고 하였다. 중국의 ‘수서’나 ‘당서’에서도 “신라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한다”고 했다. 흰옷 숭상은 고려 때에도 이어졌다. 안정복(1712∼1791)도 ‘동사강목’에서 “고려의 사녀(士女)들은 흰옷을 숭상하였다”고 했고 문신 서거정(1420∼1488)도 ‘필원잡기’에서 “고려 사람들은 흰옷을 좋아했다”고 했다. 송나라 때 서긍은 “고려왕은 평상시 쉴 때 흰 모시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 ‘도려도경’에 기록했다. 조선시대에도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흰옷은 여전히 사랑받고 즐겨 입었다.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흰색이 갖는 포용과 상징성 때문이다. 본색·본연 그대로인 흰색은 가장 자연과 합일되는 순색으로 지고함과 진실, 지조와 기개, 순결, 장수를 상징하며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시초를 의미한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흰색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요, 현실을 넘어선 지고의 아름다움을 담은 완벽한 색으로 성과 속, 죽음을 넘나드는 원초적인 색인 동시에 성스럽고 세속적인 색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흰색에 대해 “우리나라 풍속은 갓과 흰 베로 만든 도포를 가장 존귀한 의복으로 삼아 길사나 흉사에 모두 통용하였다”고 했다. 둘째, 흰옷을 즐겨 입게 된 것은 염색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흰옷은 그 어느 색보다 더러움을 잘 타 비경제적이다. 육당 최남선은 때가 타지 않는 무색옷을 입어야 함에도 흰옷을 입는 것은 시대를 맞출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일이라며 흰옷의 폐단을 지적했다. 흰옷은 염색이 필요 없다. 성호 이익은 옷 한 벌을 염색하는 데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양식이 들어가며, 한 필 염색하는 데 한 필 값이 들어간다고 했다. 오히려 언제라도 빨기만 하면 깨끗하고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흰옷이 훨씬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다 보니 자연히 흰옷을 즐겨 입게 된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백의 습속에는 왕과 왕비의 국상도 커다란 몫을 했다. 실학자 이수광은 1565년 이후 여러 번 국상을 치르며 계속해서 흰옷을 입다 보니 마침내 하나의 국속이 되었다고 했다, 거기에 흰색이 상징하는 절제와 검소, 결백의 미덕과 잘 부합됐던 조선시대 국시인 성리학적 이념도 백의 습속을 지속시키는 토양이 됐다. 우리의 백의민족은 단순히 흰옷을 숭상해서가 아니라 이런 요인들로 흰옷을 즐겨 입은 데서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
  • 운동부 코치에 3년간 1천만원 뜯긴 학생…택배 상하차까지 뛰었다

    운동부 코치에 3년간 1천만원 뜯긴 학생…택배 상하차까지 뛰었다

    학교 운동부 제자를 겁박해 3년간 1000만원 넘는 돈을 뜯어낸 코치가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제자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야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전지법 형사4단독 이헌숙 판사는 공갈 혐의로 기소된 A(35)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A씨는 대전의 한 중·고교 운동부 코치로 있던 2014년 6월쯤 중학교 2학년인 운동부 학생을 상대로 겁을 줘 2만원을 받아낸 것을 포함해 피해 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인 2018년 2월까지 200여차례에 걸쳐 1000만원 상당을 빼앗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 학생은 야간에 택배 상하차 일까지 하며 A씨에게 건넬 돈을 마련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7년에는 A씨가 피해 학생에게 식당 일자리를 소개해주고선 ‘월급은 언제 받는 거냐’는 취지로 따져 묻는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피해 학생은 돈을 계속 갈취당한 배경에 대해 “(A씨) 몸에 문신이 있는 걸 보고 겁이 났다”며 검찰에 진술했다. 이헌숙 판사는 “피고인이 피해자로부터 200회 넘게 정기적으로 금품을 빼앗았는데, 그 금액이 1000만원을 넘는다”면서 “그러면서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피해 복구도 전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청소년인 피해자의 올바른 인격적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피해자에게 상당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야기한 점도 양형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A씨는 이런 판결 결과에 불복해 항소장을 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NCT 재현 팬들, 싱가포르 대표 신문 공격한 까닭은

    NCT 재현 팬들, 싱가포르 대표 신문 공격한 까닭은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신문인 스트레이츠 타임즈가 한국 SM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 NCT 재현의 팬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재현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창인 가운데 서울 이태원의 식당과 바에서 모임을 가졌다가 자필 사과문을 3일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지난 18일 재현을 비롯해 방탄소년단의 정국, 아스트로의 차은우, 세븐틴 민규가 지난달 25일 이태원 음식점 등에서 모임을 가진 사실이 알려졌다. 이들은 연예계 1997년생 모임인 ‘97모임’의 멤버들로 알려졌다. 재현은 이태원에서 모였던 스타들 가운데 처음으로 1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직접 손으로 쓴 사과문을 올렸다. 싱가포르의 스트레이츠 타임즈는 같은 날 “NCT의 보컬리스트 재현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어긴데 대해 사과했다”는 제목의 기사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스트레이츠 타임즈의 기사는 즉각적으로 재현 팬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스트레이츠타임즈이즈오버파티(StaritsTimesIsOverParty)’란 해쉬태그가 재빨리 싱가포르 소셜미디어에서 퍼져나갔고 이러한 현상은 20일까지 이어졌다. 재현의 팬들은 기사에 사용된 사진에 특히 분노했는데 스트레이츠 타임즈가 부정적인 인상을 낳기 위해 재현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문신 사진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스트레이츠 타임즈가 쓴 사진은 재현이 앞목에 커다란 괴수 형상의 문신을 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재현은 이 문신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성난 팬들은 재현의 기사를 쓴 기자가 19살의 인턴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여러 네티즌들은 재현의 팬들이 과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스트레이츠 타임즈의 기사가 재현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의 사과문에 대해서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또 재현 팬의 분노는 스트레이츠 타임즈가 아니라 재현 등이 이태원에 간 사실을 최초로 보도한 한국의 디스패치를 향해야만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스트레이츠타임즈 대신 한국 언론을 비판하는 ‘#디스패치캔슬드(dispatchcancelled)’란 해쉬태그도 사용됐다. 한편 이태원 클럽에서는 22일까지 7만 7000여명을 검사한 결과 207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한국 보건당국은 대구 신천지와 같은 ‘대규모 확산’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16일부터 가구수·출생년도 상관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

    경기도는 16일부터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현장 신청 시 가구 수와 출생년도 관계없이 신청 가능하다고 밝혔다. 도는 지난 20일부터 31개 시군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와 농협 및 지역농축협 지점에서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선불카드 신청 접수를 받고 있다. 기존에는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 가구 수와 방문신청자의 출생년도에 따라 신청 시기를 구분했지만, 16일부터 신청이 최종 마감되는 7월 31일까지는 이런 구분 없이 미신청자는 누구나 선불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주말인 16일과 17일은 행정복지센터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신청받으며 농협지점에서는 신청 불가하다. 18일 이후는 행정복지센터와 농협 모두 평일 정규 근무시간에만 신청할 수 있다. 행정복지센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농협지점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신청 시 신분증을 갖고 가야하며, 별도의 위임장 없이 가족구성원 중 한 명이 나머지 구성원의 위임을 받아 대리 수령 가능하다. 카드 신청일로부터 5일 이내 사용승인 문자를 받으면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문자 수신일부터 3개월 이내 사용해야 하며 사용 마감일은 8월 31일이다. 3개월이 지나면 선불카드는 사용 중지되고 미사용 금액은 자동 회수된다. 한편, 14일 0시 기준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신청인원은 1206만4978명으로 신청률 90.9%를 기록했다. 시군 재난기본소득을 포함하면 지급금액은 1조8886억원 이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제19회 문신미술상 본상 수상자 임형준 교수 선정

    제19회 문신미술상 본상 수상자 임형준 교수 선정

    경남 창원시는 올해 제19회 문신미술상 본상 수상자로 임형준 경남대 미술교육과 교수가 선정됐다고 11일 밝혔다. 청년작가상 수상자로는 창원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재신 작가가 선정됐다.창원시가 주관하는 문신미술상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1923~1995)의 예술 정신과 창작 활동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문신미술상운영위원회는 심사위원 6명이 본상 후보자 7명과 청년작가상 후보자 6명을 대상으로 작품성과 활동사항 등을 공정하게 검토하고 토론을 한 뒤 무기명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주로 악기, 신체 또는 악기와 신체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개성 있는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나팔을 소재로 한 조각작품을 많이 창작해 나팔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조재신 작가는 주로 탱화 기법과 설치미술 기법으로 창작하며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생명의 기본 질서 발견과 깨달음에 근거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문신미술상 수상자에게는 본상은 상금 2000만원, 청년작가상은 1000만원을 준다. 시상식은 오는 27일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열린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뚱보 출입금지” 블랙수면방 ‘찜방’의 실체

    “뚱보 출입금지” 블랙수면방 ‘찜방’의 실체

    이태원 클럽 관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진자 수가 10일 현재 47명으로 늘어났다. 서울·경기·인천·충북·부산에 이어 제주에서도 확진자가 추가됐다. 이태원발 감염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태원 클럽 관련 경기 안양·양평 확진자가 지난 4일부터 5일까지 동성애자 사우나로 알려진 서울 신논현역 3번 출구 인근 ‘블랙수면방’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지역감염 확산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블랙수면방은 ‘찜방’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남성 동성연애자들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장소로 알려졌다. 야간에 더욱 활성되며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수의 인원이 사용할 수 있는 방부터 여러명이 입장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까지 존재하고 있고, 어두 컴컴한 방안에서 성행위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손 소독제 사용이나 마스크 착용 등 기본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블랙수면방’은 익명의 남성과 성행위를 벌이는 공간이어서 입장객들은 개인정보가 드러날 수 있는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된 블랙수면방의 운영 원칙을 보면 ‘뚱뚱하신분(출입금지)’ ‘45세이상(출입금지)’ ‘복도에서 라이터를 켜시는 분(퇴실조치)’ ‘여러사람이 모여 떠들고 끼를 부리시는 분(퇴실)’ ‘금지약물을 복용하거나 하신분, 술에 취하신 분(출입금지)’ ‘피부병이 있거나 전염병이 있으신 분(절대 출입금지)’ ‘타인을 촬영하거나 촬영목적으로 출입하신 분(퇴실)’ ‘폭력적이거나 타인에게 시비를 거시는 분(퇴실조치)’ ‘과도한 문신으로 타인에게 공포감을 주시는 분(퇴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시는 매너없으신 분(퇴실)’ 등 10가지 출입 등의 조건들이 담겨있다.강남구는 “블랙수면방을 방문한 타지역 방문자의 동선도 공개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방문 이력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 ‘깜깜이 전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편 중앙방역대책본부는 10일 0시 기준 코로나19 확진자가 전날 0시보다 34명 늘어 총 1만874명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신규 확진자 34명 중 26명은 지역사회 감염 사례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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