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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토끼와 사자 어느날 토끼가 산길을 걷고 있었다아이가.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끄등. 토끼가 놀라가 도망갈라꼬 해뜨만, 고마 호랑이한테 잡히뿟는기라./ci0018 토끼:“야 이 자슥아! 함만 살리도….” 호랑이:“이 토깽이 자슥아. 요 와 바라!” 토끼:“잠만(잠깐만)!” 호랑이:“다이다이 함 뜨까?(일대일로 싸워볼래?)” 토끼:“내 친구 중에 쌈 잘하는 아 있따아이가. 갸랑 함 뜨라!” 토끼는 자신만만했다 아이가. 토끼 칭구가 사자그등. 토끼:“마∼친구야! 어떤 개밥찌끄레기 같은 놈이 지가 짱이라고 우긴다아이가. 가서 살짝 만지주고 오이라. 알긋째?” 사자:“글마 그거 어딨노?” 토끼:“밖에 있다아이가.” /ci0000 사자가 열채가(화가 나서) 밖으로 겁나게 뛰어나갔지. 근데 일마가 호랑이를 보드만 냅다 도망가는기라. 토끼는 어이가 음쓰가 얼떨결에 같이 도망가끄등./ci0018 토끼:“야, 와 도망가는데?” 사자:“헥헥. 와∼그 자슥 몸에 문신봤나?”/ci0000
  • 오치균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전… 새달 6~16일 현대갤러리

    오치균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전… 새달 6~16일 현대갤러리

    어두컴컴한 조명이 내리쬐는 화랑 지하에서 갑자기 작가는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등과 가슴, 팔뚝에서 커다란 나비 문신이 나타났다. 오치균(51)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화가다. 충남 대덕군 반석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의대 진학에 실패한 뒤, 서울대 미대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한때 시골 출신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작가는 미국 브루클린대에 유학, 뉴욕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1990년부터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붓은 서명할 때 외에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캔버스를 만들고 스케치를 한 뒤 안료와 아크릴 물감을 손으로 개서 층층이 입혀가는 것이 오치균의 작업이다. 두터운 질감을 표현하는 데는 붓보다 손가락이 오히려 편하다는 게 그의 말.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꼭 로션을 바른 탓인지 그의 손가락은 곱고 섬세하다. 9월6∼26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전에서는 강원도 사북면과 뉴욕, 그리고 진달래 풍경을 그린 신작 40점을 선보인다. 그는 어느날 우연히 사북을 지나가다 “여기는 왜 이렇게 까만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그 초현실적인 풍경에 매료됐다. 지금은 강원랜드와 숱한 모텔들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든 상태. 하지만 작가가 사북에서 옛 고향의 풍경을 읽어내면서 그림의 단골 소재가 됐다. 86년 이후 10년은 뉴욕에서,95년부터 2년간은 산타페에서 살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전업작가로 살아 온 오치균. 그는 최근 경매를 중심으로 그림값이 뛰면서 블루칩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경매는 나와는 별개로 돌아가는 분야지만, 가격이 오르면 작품성이 인정받는 듯해서 기분은 좋습니다.” 4년여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 역시 주목을 받고 있지만, 화랑은 해외 전시 준비 등의 이유로 작품 판매는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신 갤러리 현대가 운영하는 현대백화점의 갤러리H에서 올 연말쯤 갖게 될 파스텔화 전시회의 작품은 판매할 예정이다. 그가 그리는 풍경화는 쓸쓸하다. 화폭에 선뜻 담으려 들지 않는 뒷골목,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장독대 등을 그린다. 두껍게 발린 물감은 가까이서 보면 그저 어지러운 색의 향연이지만, 몇 발짝 떨어져 보면 한국인만이 사랑하고 공감하는 묘한 정조를 그려낸다. 작가가 영화 ‘빠삐용’을 보고 난 뒤 이태원에 가서 충동적으로 새긴 문신은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 둘 늘어갔다. 변태(變態)하는 나비 문신은 나이가 들어도 자유롭고 싶어 하는 작가와 썩 잘 어울린다. 오치균은 지금 인사동 작업실을 매일 출퇴근하며 365일 공장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할리우드 스타들 ‘코리아 CF 드림’

    할리우드 스타들 ‘코리아 CF 드림’

    광고는 그 시대의 거울이다. 따라서 광고의 스토리나 등장하는 배우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사회의 이슈나 가장 트렌디한 스타가 누구인지 알수 있다. 한때 ‘김지호의 시대’가 있었고 ‘신은경의 시대’가 있었다. 9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들은 동시에 5~6개의 CF에 출연하며 ‘CF퀸’의 자리를 차지했었고. 최근에는 이효리와 전지현. 김태희 등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스타들이 CF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할리우드 스타들이 국내 CF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국내 스타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나섰다. ◇황금시장을 찾아 나선 할리우드 스타들 ‘할리우드 신세대 아이콘’ 제시카 알바는 영화 ‘씬시티’. ‘판타스틱4’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여배우로 한국에도 두꺼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젊은 스타다. 알바는 최근 이효리와 함께 화장품 광고를 찍고 CF를 통해 국내 팬들을 만나고 있다. 미국 폭스 TV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로 출연해 ‘석호필’로 더 유명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 역시 국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한국의 의류와 음료 광고에 출연했다. 또 할리우드의 소문난 파티걸 패리스 힐턴도 휠라코리아와 1년 전속 계약을 맺고 멋진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이에 앞서 다니엘 헤니와 함께 국내 의류 브랜드에 등장한 할리우드 스타 기네스 팰트로와 영화 ‘미녀 삼총사’. ‘웨딩 싱어’ 등에 출연했던 배리모어(아이스 크림). 캐서린 제타존스(카드). 브래드 피트(맥주). 샤론 스톤(화장품) 등도 국내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쩐의 전쟁 할리우드 스타들의 적극적인 국내 광고시장 진출은 국내 연예인의 CF 몸값 폭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국내 광고시장의 활성화는 스타들의 몸값 상승을 불러왔고 이에 국내 톱스타들은 출연료로 보통 편당 7억~10억원 정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광고주들은 여러 CF에 등장하는 국내 스타들을 고용해 편당 10억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기보다는 비슷한 몸값의 세계적인 스타들을 원하고 있다. 할리우드 최고 스타인 알바와 기네스 팰트로가 1년 계약에 받는 돈은 대략 10억원으로 국내 모델과 별차이가 없다. 또 드류 배리모어는 약 5억원으로 국내 톱스타들에 비해 훨씬 저렴하게 광고에 등장했다. 이에 비해 전지현. 이효리 등은 편당 최고 10억원의 출연료를 받는다. 특히 고현정의 경우 연예계로 복귀한 뒤 한 건설업체와 연간 15억원에 전속 모델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 스타들의 CF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앞으로 할리우드 배우들의 한국 광고 진출은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미의 전쟁 이효리와 화장품 광고에 등장해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한 알바를 비롯. 국내 CF에 등장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은 유독 화장품 광고에 집중된다. 원조 화장품 모델은 소피 마르소. 1989년 23세의 그는 한국의 ‘드봉 화장품’ 모델로 눈부신 미모를 선보였고. 드봉 화장품은 당시 여성들의 ‘MUST HAVE’됐다. 또한 ‘귀여운 미’의 맥 라이언과 ‘섹시한 미’의 샤론 스톤이 화장품 모델로 국내 여배우들과 아름다움을 놓고 진검승부를 펼쳤고 이들이 출연한 제품은 할리우드 스타의 미를 동경하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높은 판매를 보였다. 여배우만이 화장품 광고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섹시미의 대명사 브래드 피트 역시 국내 화장품 광고에 등장해 국내 스타인 이병헌과 남성의 아름다움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미지 전쟁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이미지 역시 국내 CF에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휠라코리아는 할리우드의 소문난 파티걸 패리스 힐턴을 내세워 패션 브랜드로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섹시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바탕으로 ‘패리스 라인’을 새롭게 출시해 가수. 영화배우.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패션 아이콘 힐턴의 강점을 브랜드와 접목시켰다. 또한 ‘석호필’ 웬트워스 밀러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천재 건축가 이미지와 다재다능한 모습은 국내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돼 그의 대표적인 매력인 타투(문신)를 청바지 등 다양한 아이템에 접목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반면 CF의 제품만 바꿔 놓으면 똑같다고 할 만큼 비슷한 이미지로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국내 배우들은 시청자들의 혼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청자들은 비슷한 이미지로 여러 제품에 출연하는 모델들의 이미지만 기억할 뿐 그들이 어떤 제품에 출연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 이상주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Seoul In] 무료행사정보 문자로 받는다

    영등포구(구청장 김형수) 문화행사에 대한 정보를 이메일과 동시에 개인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발송해주는 ‘영등포 문화 마니아’ 서비스를 실시한다. 서비스는 온라인·방문신청의 회원가입에 한해 제공되며, 구가 주최하는 무료공연이나 영화, 행사, 전시 등에 관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 유료기획공연 예매 때에는 최대 50%까지 할인혜택도 받는다. 구민이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며 구청 홈페이지에서 회원 신청을 할 수 있다. 영등포문화원, 영등포구민체육센터, 각 동사무소에서도 접수받는다. 문화예술팀 670-3143,4.
  • [내 책을 말한다] ‘항몽전쟁’

    기자생활 30년을 마치고 소설가로 등단한 뒤 역사문제, 특히 고향 강화도(江華島)와 관련된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등단작도 병자호란의 강화도 전투를 다룬 ‘나문재’였다. 그 후 고려 중기의 무인정변을 다룬 ‘무인천하’(5권)와 칭기즈칸의 생애를 엮은 ‘세계의 정복자 대칭기스칸’(4권)에 이어, 이번에 몽골의 고려 침공을 다룬 ‘항몽전쟁’(3권)을 냈고, 곧 ‘불멸의 민족혼 삼별초’(3권)가 출판된다. 세계 최대·최강의 제국이 되어 세계패권을 휘어잡은 제국 몽골을 상대로 고려는 40년간 처절한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을 소재로 한 ‘항몽전쟁’은 다음 세 가지 점을 중시했다. 첫째는 전쟁과 전투의 전개 상황이다. 몽골의 침략에 대해 저항하는 고려인의 끈질긴 모습과 전란 중에 발생한 내부 반란의 진압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둘째는 권력투쟁과정이다. 몽골에서는 황권을 놓고 황족들이 피를 흘렸고, 고려에서는 무인과 무인, 임금과 무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이동을 자주 겪었다. 나는 역사를 만드는 힘은 정치권력이라고 믿는다. 이런 권력사관(權力史觀)의 관점에서 국제패권을 쟁취하려는 국가 간의 전쟁과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국내 권력자간의 투쟁을 전반적으로 소상히 다뤘다. 셋째는 중요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3개의 논쟁과정이다. 처음 논쟁은 몽골사신 방문이 약속한 회수를 넘는 데 대한 대책이었다. 사신을 모두 받아들이자는 ‘온건론’과 입국을 거부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맞섰으나, 임금 고종과 무인정권 집권자 최우가 주장하는 강경론이 이겨 고려의 정책은 항몽노선으로 결정됐다. 다음은 파천논쟁이다. 몽골의 내정간섭과 인질·공물의 요구가 계속되자, 항몽파 최우는 ‘강화파천’을 결정하고 조정의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문신 정습명이 나와 ‘개경고수’를 주장하며 파천을 반대했다. 결국 파천론이 이겨 최우의 뜻대로 강화천도가 결정됐다. 마지막은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를 놓고 벌인 ‘주전론’과 ‘주화론’의 논쟁이다. 전쟁의 장기화로 고려국의 피폐와 백성들의 희생이 증대되고 무인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주화론이 승리했다. 항전노선은 평화노선으로 바뀌고, 고려 세자 왕전(뒤의 원종)이 몽골에 가서 강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삼별초 중심의 군부 강경파 주전세력이 협정을 거부하여 전쟁은 3년간 더 계속됐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품이 되었다. 흔들리고 있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우선 땅에 떨어진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추된 권위, 동요하는 민심 인조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무신 김응창(金應昌)과 임박(任)을 처형했다. 당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괄이 입성했을 때 각각 좌우변 순장(巡將)이 되어 이괄을 경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문신들 가운데도 이괄의 난을 맞아 심각하게 동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이안눌(李安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 공조참의 김덕함(金德)과 함께 가도( 島)에 파견되어 있었다. 김덕함이 모문룡에게 원군을 청해다가 이괄을 토벌하자고 했을 때 이안눌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인조가 저자도(楮子島)로 피난 가고 이괄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이안눌은 거침없이 인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자전(慈殿-인목대비를 지칭)을 모셨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아들일 것이다.’,‘저자도에서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등등 인조는 이미 끝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안눌은 그 밖에도 ‘반정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공신들의 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동요했던 것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현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도성 문을 닫아걸어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이괄이 입성했을 때 도성 백성 대부분이 이괄에게 붙었기 때문에 법으로 논하면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은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다. 그는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는 조정에 문제가 있어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때에는 한 가지 잘못만 있어도 원망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당시를,‘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고 했다. 정경세(鄭經世)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반정 직후부터 조정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심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된 지 한달 여가 지난 1624년 3월 중순,“장차 큰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지는 와중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밤에 여염을 돌아다니며 피란하라고 소리치며 선동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정이 민심 수습을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이괄 치하에서 부역(附逆)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좀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 안보´에 올인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우선 인조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1624년 3월, 비변사(備邊司)는 ‘숙위(宿衛)하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며 외방의 출신들 가운데 재주 있고 용맹한 자들을 뽑아 경호 병력의 숫자를 늘리자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반정공신 네 사람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의 숫자를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군관의 수를 늘리면 정권의 안보가 확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료를 국고에서 지급 받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사병(私兵)이었다. 언필칭 ‘인조 호위’를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공신들의 집안 일을 건사하는 집사였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도 공신 집안을 호위하고 재물을 운반하는 등 사사로이 부려졌다. 실제로 반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대가를 호위했던 군관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또 군관을 거느리고 있던 신경진은, 나아가서 적을 막으라는 인조의 명령도 무시했다. 이제 그런 군관의 숫자를 더 늘리자고 하는 판이었다. 이괄의 반란으로 혼쭐이 난 인조는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더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령을 어긴 신경진을 불문에 부치고, 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반정공신들의 권세는 더 높아졌고, 이런 저런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연히 ‘광해군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겠다.’는 구호는 힘을 잃어 갔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과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재생청(裁省廳)이란 기구를 설치하고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정권 안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조정권의 실세였던 김류와 이귀가 박승종 부자의 저택을 불하(拂下)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1625년(인조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반란의 대외적 여파 이괄의 반란은 나라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압박해오자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보고를 접한 뒤, 유격(游擊) 왕보(王輔)에게 선사포(宣沙浦)에서 군사를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왕보는 자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진격한다.’고 큰소리쳤다. 조정은 다급한 마음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였던 윤의립(尹毅立)은 신중했다. 그는 모문룡의 군대가 육지로 나온 이후의 상황을 우려했다. 왕보의 말대로 1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올 경우, 그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윤의립은 왕보를 만나 ‘이 적은 얼마 안 가서 주벌될 것이니 천병(天兵)을 역적 토벌에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원병 요청을 취소했다. 결과적으로 윤의립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란이 곧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의 병력이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 대한 접대와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을 것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후금을 군사적으로 자극하여 또 다른 사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반란 종식 이후 모문룡과 그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행태를 보면 윤의립의 ‘결단‘이 얼마나 빛나는 ‘혜안’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란의 여파는 후금에도 미쳤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던 것이다. 한윤은, 당시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姜弘立)을 만나 “강씨 일족이 다 죽었다.”고 무고했다. 강홍립은 격앙되었다.‘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정보도 후금 측으로 건네졌다. 한윤의 투항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괄의 반란을 계기로 조선은 명과 후금의 대결 구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문화플러스] 15일 조각가 문신 ‘보석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1923∼1995)의 조각을 보석으로 만든 작품 90점을 전시하는 ‘문신조각 보석전’이 15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02)566-5974.
  • [박기철의 플레이볼] 마이너리그 이벤트 배워라

    미국의 마이너리그는 메이저리그와 선수 계약 협정을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만, 아무래도 관중을 모으는 경쟁력에서는 메이저리그보다 열악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강점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하기가 불가능하거나 껄끄러운 마케팅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너리그에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손님 끌기 작전을 소개한다. 플로리다의 포트마이어스 미러클 구단은 지난 6월28일 10주년 기념 프로모션을 펼쳤다. 그런데 10주년 기념의 대상이 1997년 6월28일 복서 마이크 타이슨이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에반더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은 사건이다. 경기장은 커다란 귀로 장식했고 선착순 1000명에게 가짜 귀를 선물했다. 원하는 관중에게는 타이슨 문신도 서비스했다. 인터내셔널 리그의 루이빌 배트 구단은 누가 가장 털북숭이인가에 대한 지역사회의 계속된 논란을 잠재운다. 구장에서 루이빌 최고 털북숭이 선발대회를 연다. 우승자에게는 털을 없애주는 서비스가 제공된다. 싱글A 소속인 피오리아 치프도 10주년 행사를 연다. 컵스가 학수고대하는 기대주 마크 그레이스가 10년 전 피오리아 소속으로 뛴 것을 기념한다. 그해 그레이스는 .342의 타율,15개의 홈런과 95타점을 올리며 피오리아 팬들을 기쁘게 했었다. 선착순 1500명에게 그레이스의 복제 유니폼을 선물한다. 캐롤라이나 리그의 프레드릭 키스는 경기 전 대형 젖소 우유 짜기 대회를 연다. 싱글A 소속의 어번 더블데이스는 요리대회를 연다. 우리나라에서는 요리대회가 참신하겠지만 워낙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는 미국에서 요리 대회만으로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번에 열리는 요리대회에는 홈구장 매점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만 요리를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에게는 신선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래도 점잖다. 관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이들의 아이디어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찰스턴 구단은 공식 관중 0명에 도전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공식 경기가 성립되는 5회까지 관중 출입을 봉쇄했다. 대신 구장 밖에서는 맥주와 핫도그를 할인가격에 제공했다.5회 이후에 입장한 관중은 무려 7800명. 찰스턴 구단의 또 다른 이벤트는 ‘고요한 밤’이다.5회까지 모든 관중은 입에 테이프를 붙여야 한다. 대신 야유와 응원, 그리고 맥주 판매원을 부를 때를 위해 플래카드가 제공된다. 경기장의 안내원은 도서관 사서와 ‘조용히 해주세요.’의 간판은 들고 다니는 골프 진행 요원으로 교체됐다. 세인트 폴 세인츠 구단은 한 타석 참여권을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올렸다.5600달러에 권리를 따낸 팬이 플라이 아웃되자 감독은 서비스로 다음날 경기에 선발 출장시켰다. 안타는 없었지만 이 팬은 무려 네 타석이나 더 프로 경기를 경험했다. 우리나라의 정서에서 이런 이벤트는 무리일까? 하지만 정신은 배워야 한다. ‘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cobb76@gmail.com
  • 공포영화 ‘해부학 교실’ 새달 12일 개봉

    공포영화 ‘해부학 교실’ 새달 12일 개봉

    공포영화를 보면 무서운가. 얼핏 두려움으로 싸여진 공포영화의 포장지를 한꺼풀 벗겨내면 슬픔의 속살이 드러난다.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등장인물들이 끔찍한 모습의 변사체로 나타나게 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사연이 밝혀지게 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서글픔이다. 요즘 한국공포영화의 경향은 두려움의 뿌리로 인물들의 불우한 경험과 상황을 설정한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새달 12일 개봉하는 공포영화 ‘해부학교실’도 그렇다. 올들어 한국공포영화가 소재의 다양화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가운데 ‘해부학교실’ 또한 ‘카데바’라 불리는 해부용시체를 소재로 삼아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 그 안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지점에 서있는 의사, 추상적인 죽음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환기시켜주는 카데바 등을 공포의 재료로 삼은 것은 어쩌면 반쯤 먹고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의대 본과 1학년에 재학중인 여섯 명의 동기들, 선화(한지민), 은주(소이), 중석(온주완), 기범(오태경), 경민(문원주), 지영(채윤서). 이들은 한 팀이 되어 해부학실습에 들어간다. 이들에게 배정된 젊고 아름다운 카데바. 가슴 부위의 장미꽃 문신이 묘한 기운을 자아내는 이 카데바를 접하고 난 뒤 이들은 똑같이 환영과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선화의 룸메이트로 모범생 은주가 야밤에 홀로 해부학 실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처음으로 죽음을 맞고 연적 관계에 있던 지영 또한 은주처럼 심장이 도려내진 채로 발견된다. 실습 도중 간식까지 챙겨먹을 정도로 비위가 좋던 경민까지 정신을 놓자 선화, 중석, 기범은 카데바에 얽힌 사연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담당교수 지우(조민기)가 카데바로 쓰인 여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된다. ‘카데바’라는 이색 소재를 삼았을 뿐 영화는 공포장르의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공포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관객이라면 등장인물의 행동과 상황을 통해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인지 ‘두부에 못박기’식으로 눈치챌 수 있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인물들을 돌아가며 의심스럽게 비추거나 중간중간 복선을 깔아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얽혀 놓는 바람에 집중력을 떨어뜨려 감독이 의도한 복선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연출은 단편 ‘필통낙하시험’을 만들고 봉준호 감독과 ‘플란다스의 개’의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집필했던 손태웅 감독이 맡았다. 첫 장편 데뷔작으로 공포영화를 택한 감독은 새로운 볼거리로 색다른 공포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금속성의 문이 차가운 빛을 발하는 시체 냉장고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그 앞으로 수 십개의 실습대가 도열한 해부학 실습실은 음산하고 축축한 기운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1구당 4000만원의 돈을 들여 2개월 동안 만들어낸 사실적인 시체 ‘더미’들은 공포의 체감을 높여주는 장치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다.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겹쳐지는 판타지 기법으로 카데바가 된 여성의 사연과 아울러 선화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밝혀지는 부분은 단연 돋보인다.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분산되다보니 중반에 다소 늘어지긴 했지만 종반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잘 유지시킨다. 그래서인지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허무해지지 않는다. 사체와 메스가 나오지만 사지절단 등 신체훼손의 수위가 높은 요즘 영화에 비해 잔혹성은 덜한 편.15세 관람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문신, 멋 내려다 피부 망쳐요

    문신이 유행이다. 다양한 색상에 예전의 영구적인 문신에 반영구적인 문신도 더해졌으며, 미용 목적의 문신이 있는가 하면 패션 소품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문신 때문에 피부 트러블을 일으켜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부염 문신이란 피부층에 인공적으로 색소를 주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에는 주로 눈썹 등 신체의 특정 부위에 제한적으로 문신을 했으나 최근에는 반영구 문신이나 스티커까지 더해져 전신형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후유증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인 혐오감은 물론 피부염이나 흉터, 육아종 등이 잘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문신이나 보디페인팅에 산업용 물감을 사용할 경우 피부에 유해한 화학성분 때문에 문제가 된다. 천연염료라는 헤나물감에서 피부염이나 호흡 장애, 실명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성분이 검출된 것이 한 사례이다. 문제는 이렇게 새긴 문신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 지금처럼 문신을 제거하는 시술법이 없었던 과거에는 문신을 지우기 위해 문신 위에 피부색과 흡사한 문신을 다시 새기는 치료를 하거나 아예 문신 부위에 화상이나 상처를 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민감한 피부 문신은 금물 문신이나 보디페인팅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을 막으려면 아예 문신을 하지 않는 게 좋다. 특히 영구 문신은 지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꼭 문신을 하고 싶다면, 반영구 문신을 하되 바른 관리 요령을 알아둬야 한다. 우선, 문신은 유사 의료행위이므로 반드시 피부 전문가의 시술이 필요하며, 시술 후 일주일 정도는 금주하고, 찜질방, 목욕탕을 가지 않는 게 부작용을 막는 길이다. 또 아토피나 건선 등 예민한 피부를 가진 사람은 보디페인팅을 피해야 한다. 특히 얼굴 페인팅은 기초 화장 위에 무독성 전용물감으로 그려야 하며, 물감이 피부 호흡을 막지 않도록 클렌징 제품을 이용해 가능한 빨리 지우는 게 좋다. ●문신을 지우려면 요즘에는 레이저로 흉터없이 문신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속눈썹 문신을 지울 때는 자칫 레이저가 안구를 해칠 수 있으므로 숙련된 전문가의 시술이 필요하다. 레이저로 문신을 치료할 경우 문신의 재료나 깊이에 따라 치료 횟수가 달라진다. 보통은 피부 회복상태를 봐가며 4∼8주 간격으로 치료하는데, 문신이 옅다면 1회로도 없앨 수 있지만 넓고, 깊게 새겨진 경우라면 4∼6회 정도 시술해야 한다. 레이저치료 후에는 7∼30일 정도의 간격을 두고 점차 문신이 사라져 보통 2∼3개월 후면 문신 전의 피부를 되찾게 된다. 초이스피부과 최광호 원장은 “최근들어 문신을 지우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종이안경 구멍뚫고 “알몸 보입니다”

    종이안경 구멍뚫고 “알몸 보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설적 오락기구등 각종 잡구(雜具)의 과대 광고가 판을 치는 요즈음 『어떤옷을 입어도 당신의 앞에선 여성의 알몸을 환히 들여다 볼수있다』는 내용의 광고문을 실어 엉터리 투시안경을 팔아먹던 사기한이 쇠고랑을 찼다. 안경알 대신 종이를 끼워 옷입어도 알몸 보인다고 지난23일 서울종로경찰서 수사과에 사기혐의로 구속된 양기석(梁起碩·24·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198)은 『한밑천 잡아보려던 것이 그만…』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멋적게 웃었다. 피의자 조서를 받는 양앞에 놓인 문제의 「X-레이」안경을 찬찬히 뜯어보던 다른 형사들도 안경을 얼굴에 갖다댄 다음 주위를 둘러보다 『야 이게 무슨 투시안경이냐? 알몸커녕 사람모습도 제대로 안뵌다』며 『엉터리같은 친구』라고 눈을 흘겼다. 싸구려 안경테에 두꺼운 종이를 안경알대신 끼우고 콩알크기만한 구멍에 새털을 붙여 놓은게 투시안경의 정체였다. 이 엉터리안경을 만든 것은 양의 창안은 아니었다. 이미 7년전 미국 「뉴요크」시 「하니톤」회사에서 만들기 시작, 3류오락잡지인 「리얼맨」 「어드벤쳐」등에 어머어마한 문구로 소개하며 단돈 1「달러」에 팔아대던 것. 돈벌이 궁리를 해오던 양은 지난여름 은행에서 바꿔온 1「달러」와 반송료를 동봉, 미국잡지에 적힌 주소로 띄웠으나 한달후에 받아본 미제 「X-레이」안경도 별 신통한게 없었다는 말이다. 햇빛이 비치는 야외나 전등 불밑에서 안경을 쓰고 보면 촘촘히 늘어선 새털사이로 들어오는 광선(光線)이 굴절되어 「프리즘」역할을 하기때문에 물체가 무지개색을 띠워 어른거리며 가늘게 보이는 정도였다는 것. 양은 엄청난 문구와 그림을 그려놓은 미국잡지의 선전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실물을 보고 속았다는 생각에 허탈한 웃을을 지었지만 그런대로 남을 엿본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세기의 경이(驚異) X레이 안경” 유령회사로 엉터리 광고 원물(原物)을 조심스럽게 분해해가며 1주일동안을 밤낮없이 방구석에 박혀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제조과정을 연구해낸 양은 안경점에서 1개 50원하는 싸구려 안경테를 구입했다. 인쇄소에서 두꺼운 종이에 영자(英字)로 인쇄한 안경알을 만들고 동그란 구멍에 끼우는 새털을 남대문양계시장 쓰레기통에서 주워모았다. 지난 9월17일부터 문신·잡지에 양이 싣기 시작한 이 가짜투시안경의 광고내용은 절시증(竊視症)환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놀라지 마시오, 세기의 경이(驚異)를 이룩한 이 「X-레이」안경을 쓴 당신은 「미니」건 「팬털룬」이건 어떤 옷을 입었든지 관계없이 여자 옷속의 모든것을 볼수 있읍니다. …단돈 6백50원으로 옷속을 보며 즐길수 있는 미제 「X-레이」안경. 상공부특허국에 발명특허출원중…, 서울 청량리우체국사서함 136호』 그 위에는 광고내용의 안경을 쓴 호색적인 모습의 남자가 옷속에 비친 여자의 나체를 보며 입을 딱 벌리고 즐거운듯 웃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한미상사라는 유령회사까지 차린 양앞에 처음 며칠동안은 1,2통의 의문섞인 편지가 날아들었으나 양은 자세한 사용법이 적힌 설명서를 보내 이들의 의혹을 씻어주었다. 질문해오는 사람들의 성별로보면 10명가운데 4명은 여자. 약 1주일동안의 선전시간이 지나자 매일 30~40명의 구입신청자가 사서함을 통해 소액환을 보내오기 시작, 양은 혼자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방구석에 앉아 간단하고 힘들이지 않는 이 엉터리 안경제조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사기행각은 결코 오래 계속되진 않았다. 지난 10월초 잡지에 실린 이 안경판매광고가 처음으로 꼬리를 잡힌 곳은 문화공보부장관실. 매일 구입신청 30~40명씩 모 종합병원에서도 신청 문공부당국은 광고내용이 사실일 경우 미풍양속을 해쳐 수사해줄 것을 내무부에 의뢰했다. 내무부로부터 수사를 하명받은 종로경찰서 김모형사(32)등 수사진들도 처음엔 호기심까지 곁들여 바짝 긴장, 양의 집을 급습, 양을 검거한 뒤 문제의 안경을 쓰고 동료들의 옷을 뚫어보려 했으나 모두들 허탕을 쳤다. 그동안 양이 팔아온 가짜 안경은 4백여개. 구입자중에는 「X-레이」안경이라는 광고를 보고 환자 진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사갔다가 『투시 현상이 전혀 없는 엉터리 안경이다』라는 항의문을 보낸 XX종합병원, 『소포로 우송되는 도중 안경이 부서졌는지 잘안보이니 포장을 잘해서 하나 더 보내달라』는 광고맹신(盲信)파…등등. 약 한달동안 26만원을 벌었다는 양은 한창 돈벌이 될때 재수없이 잡혔다고 투덜대다가 담당형사들에게 한마디 쏘아 붙였다. 『엉터리를 만들어 파는 나도 나쁘지만 남의 옷속을 보겠다고 염치없이 사려드는 사람들은 뭐가 나을게 있읍니까?』 <우홍제(禹弘濟)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11월 1일호 제3권 44호 통권 제 109호]
  • “문신의 자유를 許하라”

    “문신의 자유를 許하라”

    “캔버스가 아닌 몸이란 점만 다를 뿐 문신도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문화연대 주최로 열린 ‘나는 문신할 권리를 갖는다’는 행사에서 타투이스트(문신예술가) 이랑(32)씨의 문신 시술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최근 의료법 개정안에서 유사 의료행위로 제한받던 수지침 등을 양성화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문신에 대한 ‘봉인’은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는 데 대한 항의의 의미였다. 오후 1시10분쯤 이랑씨는 변규두(27·요리사)씨의 목 아랫부분에 타투머신으로 ‘Revolution(혁명)’이라는 작품을 새기기 시작했다. 미리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이랑씨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그러나 10여분 뒤 서울 혜화경찰서 소속 경찰이 행사장에 들이닥쳤다. 경찰은 “의료법 위반이다. 임의동행을 거부하고 시술을 계속한다면 체포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이랑씨는 시술이 거의 끝난 상태였고 법적으로도 자신이 있다는 판단 아래 경찰의 임의동행 요구에 응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랑씨를 의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랑씨는 “문신을 규제하려 들 게 아니라 양성화시켜 국가기관이 위생감독을 하면 될 것 아닌가.”라면서 “1000여명의 타투이스트들이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불합리한 이유로 이들을 불법행위자로 모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내 문신 인구는 이미 5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의료법 제25조에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불법의 멍에를 쓰고 있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는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타투이스트 김모(32·여)씨가 낸 헌법소원을 기각하면서도 “문신 시술을 위생적으로 한다면 의료행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법원에서 재량으로 판단할 부분”이라는 요지의 결정을 내렸다. 이후 문신이 의료행위인지 예술행위인지에 대한 논란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자리를 함께한 미술평론가 김준기 경희대 미대 교수는 “한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도 문신 시술을 규제하지 않는다.”면서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식의 뿌리 깊은 유교 의식과 깡패들이나 하는 것이란 식의 문화적 터부, 의료인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문신이 규제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다산인권센터의 박진 활동가는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쥐고 흔들려는 것이 문제”라면서 “내가 원하고 모두에게 해가 없는 행위를 못하게 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고 꼬집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1623년(광해군 15) 3월13일 새벽,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반정군(反正軍)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안국방(安國坊)의 여염으로 숨어들었다. 궁궐 담을 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광해군’이 되었고,‘폐주(廢主)’,‘혼군(昏君)’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쫓겨난 임금’,‘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이다. ‘폐주’는 몸을 숨긴 지 하루도 못되어 체포되었다. 이윽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졌다. 유배지 제주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19년. 광해군이 ‘인생무상’,‘권력무상‘을 곱씹어야 했던 그 시간,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도 요동쳤다. ●인조반정, 성공하다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1623년의 쿠데타를 보통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반정’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發亂世反諸正)’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모의는 16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서(李曙), 신경진(申景 ), 구굉(具宏) 등 무신들이 먼저 발의하고 김류(金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면서 급진전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모두 능양군(綾陽君·인조)의 인척들이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광해군대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西人)의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정변을 기도했을까?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정의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1613년 ‘은상(銀商) 살해 사건’에서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고, 곧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던 것이 결정적이었다.‘폐모논의’는, 그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不孝)의 극치’이자 패륜으로 인식되어 광해군 정권에 치명타가 되었고, 반정 주도 세력에는 ‘거사’를 정당화하는 절호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거사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고변(告變) 때문에 거사 계획이 몇 차례나 누설되었지만 용케도 토벌을 피했다.1622년 가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이귀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광해군의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겨우 무마되었다. 1623년 3월의 거사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12일, 북인(北人) 김신국(金藎國)은 자신이 입수한 서인들의 거사 계획을 정승 박승종(朴承宗)에게 알렸다.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국청이 설치될 무렵,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려던 참이라 재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정 주도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이윽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반정군은 3경 무렵 창의문(彰義門)을 깨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광해군, 폐위되다 인조반정의 거사를 이끌었던 반정군의 전력(戰力)은 사실 보잘것없었다. 병력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가 이끄는 7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그들이 기율이 있을 리 만무했다.‘일사기문(逸史記聞)’의 저자는,“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반정군이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기율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장 이괄(李适)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려던 직전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귀가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대장을 맡긴 것이었다. 이서 등 몇몇을 빼면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했던 반정군 지휘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군이, 광해군에 대한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정예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거의 무혈입성(無血入城)했고, 광해군은 반역세력에 대한 진압 한번 시도하지 못한 채 궁궐의 담을 넘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항상 내부로부터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즉위 말년의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정치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대북파의 핵심인 이이첨은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南人)을 모두 축출한 이후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광해군 또한 권간(權奸)이 되어버린 그를 불신하고 견제했다.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 6년 동안 자신의 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을 11차례나 교체했다. 평균 1년에 두 차례나 바꾼 것이다. 제대로 믿을 만한 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불신감의 표출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거사가 일어날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은 반정군에게 포섭되었다. 광해군을 배신한 이흥립은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난입하는 것을 방관했다. 광해군은 또한 말년에 김개똥(金介屎)이란 상궁을 총애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 반정 주도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이귀가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 때문이었다. 말년의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분명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폐위의 명분이 된 외교정책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부활했다. 인조는 반정 성공 직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그녀를 찾아뵙고 반정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인조에게 옥새를 넘기고 그의 즉위를 선언했다. 그로써 인조는 선조(宣祖)의 왕통을 잇는 계승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윽고 광해군이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에 대한 그녀의 원한은 처절했다. 인목대비는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라며 광해군의 목을 베려고 시도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폐출된 임금이지만 신하들이 그에게 형륙(刑戮)을 가할 수는 없다.’고 결사적으로 방어했다.3월14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제시하고 그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반포했다. 당연히 ‘폐모살제(廢母殺弟)’가 먼저 언급되었다.‘궁궐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선왕조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쫓아낸 것’,‘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암(昏暗)한 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 것’ 등의 ‘악행’들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인목대비는 이어 ‘외교 문제’를 언급했다.‘선조는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명나라가 위치한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역 때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한마디로 ‘재조지은을 배신했기 때문에’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광해군 시절의 대북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거사가 성공한 당일, 인조가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서쪽 관방(關防)인 의주와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및 후금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처형한 것은, 향후 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이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였다. 바야흐로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서울 4色탐험 밤 스케치] (9)한강의 야경

    [서울 4色탐험 밤 스케치] (9)한강의 야경

    서울 한강은 불야성이다. 황금빛 가로등이 빼곡한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초록·파랑·빨강으로 치장한 한강다리들, 밤새도록 빛을 내뿜는 키다리 빌딩들….‘서울4色탐험’은 한강의 밤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무료 여행지 두 곳을 다녀 왔다. 광진구 구의동 테크노마트 9층 야외정원인 ‘하늘공원’과 동작구 흑석1동 효사정(孝思亭)이 그곳이다. ●하늘공원에서 감상하는 두개의 한강 테크노마트는 콘크리트 빌딩 9층에 나무와 잔디를 심고 조각으로 장식해 1000평 크기의 전망공원을 만들었다. 어둠이 내려 앉으면 초록빛 나무가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 입고, 금계와 앵무새가 도심의 밤을 반갑게 노래한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에서는 큐피드가 ‘소망의 동전함’을 들고 유혹한다. 소망과 사랑이 동시에 이뤄지길 기원하며 동전을 던지라는 것. 동전은 불우이웃돕기에 쓰여진다. 공원 전망대로 올라서자 두 개의 한강이 펼쳐진다. 하나는 강변북로 저 너머에서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고, 다른 하나는 테크노마트 빌딩의 대형 유리창에 비친 한강 그림자이다. 잔잔한 물결이 넘실대는 한강 위로는 올림픽대교와 잠실철교, 잠실대교가 곧게 뻗어 있다. 송파·강동·강남구 등 서울 남부지역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병풍처럼 시야를 가린 한강변 고층아파트가 아쉬울 뿐이다. 연인, 친구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힘들었던 하루를 도란도란 얘기한다. 아름다운 풍경에 흐려진 눈을 씻어내고, 산들산들 불어 오는 강바람에 오늘의 시름을 털어 버린다. ●효사정은 최고의 한강 조망지 이제 서울 북부지역을 감상하러 강서쪽으로 달려 가자. 동작대교를 건너 현충원로를 가다 보면 흑석1동 효사정에 도착한다. 한강변에서 조망이 가장 좋은 정자(亭子)이다. 지하철 9호선 공사가 한창인 현충원로를 벗어나자 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사람 2명이 간신히 오갈 만한 계단을 5분쯤 오르면 정자가 보인다. 효사정은 조선초 문신 노한(1376∼1443)의 정자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은 모친상을 당해 선영인 이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지냈다. 그런데도 서러움이 밀려와 이 언덕에 별장을 짓고 일생을 이곳에 살며 어머니를 추모했다. 이에 후세들이 효도의 상징이라며 별장 이름을 ‘효사정’이라 지었다. 정자는 93년에 신축했다. 정자에 올라 서면 서울 북부지역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깎아지는 절벽이 올림픽대로와 맞닿고 그 위로 동작대교와 남산,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야경은 이곳이 훨씬 다채롭다. 강남에는 노랑뿐이었지만, 강북에는 파랑·빨강·초록 등이 어우러진다. 우뚝 솟은 남산 N서울타워도 시시각각 옷을 갈아 입는다. 서울의 밤이 화려하게 깊어갔다. 효사정은 꼭꼭 숨어 있는 터라 초행이라면 헤매기 십상이다. 시내버스 360번,361번을 타면 편리하다. 자동차로 이동한다면 중앙대 입구 맞은편에 자리한 흑석체육센터를 찾아가면 된다. 동작대교에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다 보면 체육센터가 오른쪽에 있다. 규모가 작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체육센터 옆쪽 언덕을 올라가면 효사정 입구가 보인다. 밤 12시 이전에 효사정에서 내려 오는 것이 좋다. 자정이 되면 오솔길과 정자를 비추던 조명이 일제히 꺼지기 때문이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31) 광화문 센트럴빌딩 ‘비상’

    [거리 미술관 속으로] (31) 광화문 센트럴빌딩 ‘비상’

    서울 광화문 우체국 옆 센트럴 빌딩에는 나비가 한 마리 앉아 있다.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고(故) 문신 작가의 청동상 ‘비상´(410×80×260㎝)이다. 비상은 1979년 단단한 흑단 나무로 태어났다. 원과 선으로 그렸던 그림을 작가가 입체 조각으로 제작한 것이다. 제목은 날아오르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였다. 김중원 전 한일그룹 회장이 이 작품에 반했고,1986년 작가를 찾아왔다. 그는 종로에 고층빌딩을 세우는데 비상을 청동상으로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작가는 김 전 회장의 부친 김한수 회장과도 가까이 지냈던 터라 기꺼이 작품을 다시 제작하기로 했다. 비상에는 작가의 독특한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하학적 곡선·원·반원 등 추상적 형태가 그렇고, 대칭성이 그렇다. 추상이면서도 곤충이나 새, 꽃 등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신미술관 나진희 큐레이터는 “작가는 미술이란 생명을 창조하는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좌우대칭 구도도 자연의 특징이기에 작가가 선호했다. 그러나 완벽한 대칭은 거부했다. “사람의 얼굴을 보라. 좌우가 분명 대칭구조를 이루지만, 미세한 불균형, 비대칭성이 꿈틀거린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본질”이라면서 작가는 이를 ‘자연스런 좌우대칭’이라 불렀다. 작품 비상을 꼼꼼히 살펴보면 불균형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날개 크기도, 몸통 두께도 조금씩 다르다. 바닥으로 뻗은 다리도 각도가 같지 않다. 바로 이러한 비대칭이 청동이란 무생물을 생명력 넘치는 나비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면 그것으로 끝일까.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길 소망했다. 그는 “다른 양쪽이 서로를 닮아가며 하나를 이루는 화합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는지 모른다.1995년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 뒤 비상은 목걸이, 반지 등 아트상품으로 제작됐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며 이 작품을 선물했다. 본시 사랑이란 다름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과정이 아닌가.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문화마당] 꽃이 져야 열매가… /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교정에 만발했던 철쭉조차 어느새 져버렸다. 이래저래 꽃 진 자리를 남기고 계절은 신록으로 무르익겠지만 꽃이 져야 결실의 시절이 다가오므로 분분하게 날리는 이 봄의 낙화가 늦가을을 휘몰아가는 낙엽처럼 쓸쓸하지만은 않다. 천체의 운행은 만고(萬古)에 변함이 없어, 때가 되면 풍화설월(風花雪月)을 어김없이 흩날려 변함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옛 시에 “산중에 달력이 없어도 꽃과 잎이 봄 가을을 알린다.”고 했던가. 그리하여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요,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사의 질서조차 우주의 맥박에 실려 있음을 깨우치는 일이다. 낙화(落花)는 동백이나 능소화처럼 망울째 툭툭 꺾어져 버리는 것도 있지만, 목련이나 철쭉처럼 어질러진 꽃잎자리가 너저분해지는 경우도 많다. 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므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에게 무수한 찬탄을 받아왔다.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은 청초·결백·냉담·애상 등의 속성을 지닌 ‘배꽃’을 제재로 봄밤의 애상을 사무치게 노래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라고 시작되는 그의 시조는 고독과 애련의 심리가 배꽃의 흰색에 표백되어 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인의 심경을 그림이듯 환하게 펼쳐 보인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 한 구절도 떠오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작품은 지는 꽃의 숙명을 노래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섭리로도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이별은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낙화조차 여기서는 분별하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심미적 영상으로 아름답게 되비춘다. 꽃은 져야 하므로, 지기로서니 어찌 바람을 탓하랴. 꽃이 저렇듯 사람 사는 이치도 그러하리라. 대체 인품이란 놓인 위치에 따라 평가의 기준과 판단이 달라지겠지만, 그것도 겪어보아야 아는 것이라면, 그가 남긴 뒷자리로 그 됨됨이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비운 자리가 깨끗하고 넓을수록 그는 인격이 남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도량이 큰 그릇이었으리라. 그릇은 텅 비어야 수확물들을 다시 갈무리할 수 있다. 높은 공직을 살았거나 거나하게 한재산 모은 사람이라도 뒤가 너저분하다면, 그가 누린 평생은 오물(汚物)로 뒤덮였을 것이다. 꽃이 져야 비로소 열매가 맺힌다. 꽃이 열매를 갈무리하려 드는 모순을 본 적이 있느냐. 누려야 할 시절을 제대로 누린 뒤에 깨끗이 꽃자리를 비워줄 때, 비로소 나무는 튼실한 열매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이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낙화가 없는 삶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억지로 꽃 시절을 이어가려 한다면 결국 살아온 일생의 뒷자리마저 넝마로 만들 뿐이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어느새 대선의 파장이 시정(市井)에까지 소용돌이치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전·현직 대통령들까지 저마다의 정략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려고 혈안들이다. 국민은 안다. 사욕과 책략으로 얼룩진 정치가 나라를 안락하게 이끈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말로써는 누굴 위한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형편없는 궁리로 제 잇속을 차리거나, 언젠가는 탄로날 복심을 감춘 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는 오합지중들이 자칭 지도자라며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맺지 않아도 좋다. 한번 옹골차게 국민을 감동시키고 흔쾌히 물러나 앉는 배꽃 같은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인가. 열매를 거두는 것은 꽃의 몫이 아니라 그 열매를 추수하는 농부, 곧 국민의 몫이다. 떠난 자리조차 오래 향기로운 나라의 사표(師表)가 진정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0)마재인(馬才人)과 마상재(馬上才)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0)마재인(馬才人)과 마상재(馬上才)

    연암 박지원이 ‘우상전’에서 소개한 통신사 수행원의 열댓가지 기예 가운데 하나가 마상재(馬上才)이다. 마상재란 말 위에서 하는 재주를 말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총쏘기, 달리는 말의 좌우로 등을 넘기, 말 위에 누워 달리기, 말 다리 밑으로 몸을 감추기 등의 여덟가지 무예이다.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의 신행각년례(信行各年例)에서는 “양마인(養馬人), 잡예기능(雜藝技能), 그림을 잘 그리는 자, 글씨를 잘 쓰는 자, 이름난 의원, 말타기 재주가 있는 자(馬才人)들을 거느리고 온다.”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에 꼭 데리고 갈 전문가로 화원, 사자관(寫字官), 의원, 마상재를 꼽은 것이다. ●훈련도감에서 훈련시키고 임금이 직접 시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예를 조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가 영의정 유성룡에게 “조선이 아직도 미약한데 적이 영토 안에 있으니,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급하다. 명나라 군사가 철수하기 전에 무예를 학습시키면 몇년 사이에 정예가 될 수 있으며, 왜병을 방어할 수 있다.”는 제안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곤봉, 장창, 쌍수도 등의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해 차츰 종류가 늘었다. 나중에 마상쌍검,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 등의 마술들이 추가됐다. 이를 토대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는데, 말 타고 하는 여러 가지 무예가 그림으로 자세하게 소개됐다. 마상재는 기마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무예로, 역대 임금들이 친히 시험하였다. 정조가 1784년 9월23일에 창경궁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문신(抄啓文臣)들에게 친시(親試)를 행하고, 별군직(別軍職)에게 자원에 따라 마상재를 시험 보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모두 회피하자 두령이었던 신응주를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하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활 쏘고 말 타는 재주 때문에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데, 오늘같이 내가 나와서 시험보는 날에도 서로 미루면서 어명에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말 달리거나 칼 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구나. 약간의 무예를 지니고도 핑계를 대고 회피한 구순은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삭직하라.” 숙종, 영조, 정조가 춘당대에서 자주 마상재를 시험 보였으며, 조선의 마상재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자 일본에서는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마상재를 꼭 보내달라고 청했다. ●쓰시마의 외교능력 등 떠보려 초청 인조 12년(1634) 12월10일에 동래부사 이흥망이 아뢰었다. 일본 쇼군이 유희를 좋아해 조선의 마상재를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12월14일 절충안을 내었다. 임진왜란에 끌려간 포로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마상재를 보내면서 우리 백성을 돌려달라고 청하자고 했다. 이듬해(1635년)에 역관 홍희남이 돌아와 그 내막을 아뢰었다. 쇼군이 쓰시마 도주를 시켜 마상재를 청한 까닭은 우리나라 교린정책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떠보고, 한편으로는 쓰시마 도주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복원을 주선한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정탐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쓰시마에서 국서(國書)를 위조한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 때문에 쓰시마의 외교력과 그 진심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와의 상황이 불안했으므로 후방이라도 안정을 확실히 하기 위해 1636년 제4회 통신사와 함께 마상재를 보냈다. 마상재가 단순 구경거리를 넘어 외교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문예보다 우대받았던 무예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마다 마상재를 시범보였다.1748년 통신사의 종사관인 조명채(1700∼1764)가 기록한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 가장 자세히 기록되었다. 쓰시마에 도착하자 도주가 환영잔치인 하선연(下船宴)을 베푼다고 3월7일에 알리면서 마상재, 사자관, 화원의 기예를 보려고 청하였다. 조명채는 “전례가 그러하였다.”고 기록했다. 말타기, 글씨, 그림의 기예는 에도에 가서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지만, 일본측에서는 오가는 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했다. 조선에서는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아낌없이 재주를 자랑했다. 이날도 “사자관과 화원 및 역관들이 들어가서 재배를 하자 도주가 일어나 손을 들어 답례하고, 그가 청하는 대로 각각 제 재능을 다해 보이자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돌아와서 “태수의 집뜰 바닥에는 모두 달걀 같은 자갈을 깔았는데 밟으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며, 마루 위에 오르면 바퀴 같은 물건이 마루 밑에서 굴러 윙윙 울리는 소리가 났다.”고 이야기했다. 조명채는 “아마도 도둑을 막는 방법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조선 사대부의 집 구조와 다른 점을 기록했다. 15일에는 태수가 마상재에게 은자 두닢을, 사자관과 화원에게는 각각 한닢을 보냈다. 일본돈 한닢이 조선 화폐로는 넉냥 두돈이라고 했다. 문예를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글씨나 그림을 더 높이 쳤지만, 무예를 숭상하는 일본에서는 마상재를 두배나 높이 쳤다. 에도에 도착하자 5월30일부터 마상재 연습이 시작됐다. 비장(裨將)과 역관들이 마상재를 하는 마재인(馬才人)을 데리고 쓰시마 도주의 에도 저택에 가서 연습했다. 대문 안에 새로 판잣집을 만들어 놓고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마상재를 한 차례 시범했는데, 마장(馬場)이 짧아서 재주를 다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쓰시마 도주가 마상재가 입을 쾌자 한 벌씩을 만들어 보냈는데, 모두 큰 무늬를 놓은 비단이었다. 이 또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6월3일에 비장과 역관들이 마재인을 데리고 쇼군의 궁에 들어갔다가 오후 네시쯤에야 돌아왔는데, 조명채는 마재인의 보고를 그대로 기록했다. “쇼군의 후원은 홍엽산(紅葉山) 아래에 있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어울려 푸르고 대(臺)나 연못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주렴과 비단 휘장을 드리운 누각이 있었는데, 쇼군이 앉은 곳인듯했습니다. 누각 아래에 여러 관원들이 다담(茶)을 땅에 깔고 꿇어 앉았으며, 호위병들이 조총과 창칼을 메고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말이 나가거나 멈추는 곳에는 쓰시마 봉행(奉行)의 간검(看檢)이 있어, 말이 나갈 때에는 봉행이 쇼군의 누각 아래에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길은 펀펀하고 넓었지만 간간이 수렁이 있어 말발굽이 빠졌는데, 섰다가 도로 앉아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면했습니다. 말이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려 곧 일어서자, 궁중에서 구경하던 자들이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수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시험한 것인데, 잘 달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편한 길로 달리게 했습니다. 온갖 재주를 다 보여준 뒤에 끝났습니다.” ●달리는 말 타고 130보 거리 과녁 적중 구경꾼 가운데에는 그 전 사행의 마상재를 구경한 자도 있었는데, 이번 마상재가 그때보다 훨씬 잘했다고 칭찬했다.10일에는 쇼군궁에서 마상재 이세번과 인문조 외에 활쏘는 군관까지 8명을 초청했다.130보 과녁을 거리에서 쏘았는데, 이주국이나 이백령 같은 군관들은 5발을 모두 맞혔지만 마상재가 전문인 인문조는 3발, 이세번은 2발을 맞혔다. 그 다음에는 말을 타고 추인(人)을 쏘았는데, 역시 군관들은 5발을 다 맞히고 마상재는 3발을 맞혔다. 군관 이일제가 첫번째 추인을 맞힌 뒤에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고 달리면서 나머지 화살을 다 맞히자 구경꾼들이 모두 감탄했다. 일본인들은 말을 잘 타지 못했기 때문에 날쌔게 달리는 것만 보아도 장하게 여기는데, 백발백중의 솜씨를 보이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에도에서 일정을 다 마치고 떠나게 되자,6월12일 마상재가 타던 말 2마리를 쓰시마 도주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것 또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 이튿날 쇼군이 마상재를 포함한 사원(射員)과 화원, 사자관에게 은자 60매를 상으로 보냈다. 조선에서는 문예보다 천대받던 무예, 특히 마상재가 사무라이를 높이던 일본에서는 존중받고, 국위를 선양한 모습까지 볼 수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당신의 심장이 정말 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아포칼립토>를 봐라. 심장 뛰는 소리가 탐탐북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이다. 마야 문명이 태어난 원시림 속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생존의 혈투는, 생명력 넘치는 야성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는 일은 예사롭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잔혹함이,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기로 값싼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잠시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무서운 속도의 질주와 싱싱한 에너지가 화면에 가득 차 있는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호주에서 건너가 어느새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에서 이제는 문제적 감독으로까지 성장한 멜 깁슨의 연출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아포칼립토>는 배우 출신 명감독 반열에 우뚝 올라선 멜 깁슨의 야심과,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화면을 압도하는, 의심할 바 없는 올해의 수작 필름이다. 멜 깁슨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브레이브 하트>가 아카데미를 휩쓸 때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 앞은 탄탄대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연출 작품으로 예수의 삶을 소재로 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선택했다. 멜 깁슨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성서에 적힌 그대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문제는 유대인의 반발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 집단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은 할리우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제작 당시부터 처음 투자를 약속했던 투자자들이 유대인들의 압력을 받고 투자를 철회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사람들에 의해 이 작품이 유대인을 비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멜 깁슨은 주장한다. 예수를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성서에 의하면,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이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을 서로 피하기 위해 회피하다가 결국 군중들에게 묻는다. 진짜 살인범으로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한 사람을 풀어줄 텐데 너희들은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군중들은 차라리 흉악한 사형수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친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 최후를 맞았다. 그 군중들이 유대인이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결국 멜 깁슨 감독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제작을 해야만 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멜 깁슨에 대한 할리우드의 시선은 싸늘하다. 비록 그 영화가 엄청난 상업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사재로 충당한 멜 깁슨에게 결과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지만, 멜 깁슨에 대한 미국 영화계의 우호적 시선은 사라졌다. 멜 깁슨 감독이 만든 다음 작품 <아포칼립토>는 시선을 15세기 마야 문명이 꽃피고 있던 원시의 밀림으로 돌린다. <아포칼립토>를 지배하는 것은, 원시림 속에서 거의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마야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고,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는 살인과 복수의 잔혹함도 아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속도다. 숲 속에서 거의 알몸으로 살아가는 마야의 전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서 그리고 숲을 파멸시키고 부족의 부녀자를 살해하며 힘센 남자들은 노예로 끌고 가려는 홀캐인 부족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복수를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어떤 때는 그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잡아내기도 한다. 멜 깁슨 감독은 마야 최후의 전사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직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할리우드 경력이 거의 없는 배우들은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실제로 마야 전사가 화면으로 등장한 것 같은 놀라운 충격을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원시의 숲 속에서 맹수를 사냥하며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마야 부족의 리얼리티는 새 얼굴로 구성된 배우들과 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감독의 용별술에 의해 싱싱한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부족장인 부싯돌 하늘과 그의 아들 표범발(루디 영블러드 분)을 중심으로 원시림 속에서 맹수들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마야 부족. 그러나 잔인한 홀캐인 부족이 마을을 습격한다. 쇠로 만든 날카로운 단검과 돌도끼와 돌몽둥이 등 선진무기로 무장한 홀캐인의 침략 앞에 마야 부족의 전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홀캐인족의 마을 습격 장면은 놀라운 핏빛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문명인들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계산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게서는 화면에 묘사된 잔혹함 그 자체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의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장면은 그 뒤로 이어지는 추격신이다. 생포된 남편의 눈앞에서 강간을 당하고 잔혹하게 죽어가는 여인, 아들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아버지. 홀캐인에게 생포된 남자들과 여자들은 숲 속에 건설 중인 거대한 사원 앞으로 끌려간다. 여자들은 인신매매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남자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예로 이용된다. 허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탈출의 기회를 잡은 표범발은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으로 도망친다. 그를 뒤쫓는 홀캐인 부족장들과 무리들. 생존을 위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신은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도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다. 멜 깁슨 감독은 능숙한 조련사의 솜씨로 소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긴장의 지속과 이완의 짧은 순간으로 전체 내러티브의 완급을 조절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 준다. 영화의 백미인 표범발의 탈출신은 그를 쫓는 홀캐인 부족의 파괴력 있는 추격으로 더욱 빛난다. 머리 속까지 잠기는 늪, 나무 위로 도망쳤지만 거기에서 마주치는 표범, 그리고 독사의 공격까지 피하며 표범발은, 수직으로 만들어진 마른 우물 속에 숨겨 놓은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러나 홀캐인의 추격자들 또한 용맹스럽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의 열대우림 정글 지역인 라정글라에서 파나비전의 고감도 디지털 지네시스 시스템으로 촬영된 필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전사들의 미세한 동작까지 포착하고 있다. 또 국부만 겨우 가린 원시전사들이지만 각각 개성적인 헤어스타일과 이마까지 덮는 화려한 문신, 코와 입 등 얼굴 부위에 부착하는 장신구, 목과 허리 등에 걸치는 소품들이 어우러지면서 실제 마야 전사들을 보는 것같은 놀라움을 전해주는 <아포칼립토> 미술팀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부족의 전사들이 끌려간 마야 제국. 제사장은 살아 있는 노예들을 신에게 바치면서 돌칼로 가슴을 자르고 뜨거운 심장을 한 손에 움켜쥐며 꺼낸다. 그리고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계단 아래로 굴러뜨린다. <아포칼립토>의 이런 잔혹한 영상은 선정성으로 관객들을 유혹하는가 아니면 주제의 드러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가 우리가 갈등할 필요는 없다.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는 외투만 다르게 걸친 채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고 멜 깁슨 감독은 고대 마야를 배경으로 싱싱한 에너지가 넘치는 폭력적 세계의 모습을 창조해 냈다. 그가 타협하는 유일한 것은, 가족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할리우드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표범발의 질주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이유다.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3 구독문의:02-319-3791
  • 패션·보석으로 부활하는 조각가 문신

    조각가 문신은 1995년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2000여점의 드로잉은 옷, 스카프, 넥타이, 보석 등으로 재탄생했다. 회화와 조각 작업을 주로 해온 문신이 남긴 드로잉은 개미, 사마귀, 나비의 날개 등과 한국적인 문양이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텍스월드에서 문신의 문양으로 만든 패션작품은 지난달 세계 최고상을 수상했다. 한복업체 칸과 신소재 섬유업체 닥센은 문신의 문양으로 길이 10m의 스카프 등 섬유·패션작품 100여점을 제작했다. 특히 영국 최대 의류업체인 막스&스펜서사가 문신 패션작품을 소장품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자연 속의 식물, 곤충, 혹은 새를 닮은 듯한 좌우대칭의 생명체를 표현한 그의 조각은 보석 작품으로도 거듭난다. 문신의 조각에 보석을 붙여 최고가가 7억원이 넘는 작품들이 다음달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된다. 문신의 여러 조각작품 가운데는 서울 올림픽공원의 묵주알을 연상시키는 25m의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올림픽의 단합’이 유명하다. 파리에서 전시해 큰 호평을 받은 ‘조각가 문신-패션으로의 부활전’은 이달 31일까지 숙명여대 문신 박물관에서 열린다.(02)710-9280.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18세기 일본에서 쇼군(將軍)이 정권을 세습하면서 가장 먼저 조선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박지원은 역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 첫머리에서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저축을 늘리고 건물을 수리했으며, 선박을 손질하고 속국의 여러 섬들을 깎아서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기재(奇才)·검객(劍客)·궤기(詭技·술수꾼)·음교(淫巧·기교꾼)·서화(書畵)·문학 같은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에도(江戶)로 모아들여 훈련시키고 계획을 갖추었다. 그런지 몇년 뒤에야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치 상국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손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도 문신으로 삼사(三使)를 선발한 뒤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을 수행원으로 발탁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기록했다.“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으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범인 목격…외교문제로 비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과 일본 두나라가 국력을 기울여서 온갖 전문기예자를 총동원해 맞섰다. 일종의 국제문화박람회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이름난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군관이다. 이들은 사행단을 호위하며 무예를 과시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했다.1763년 사행 때에 486명 일행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선장 유진원은 배 밑창 곳간에 떨어져 죽고, 소동(小童) 김한중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격군 이광하는 미친 증세가 일어나 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러나 경상도 무관(장교)이었던 도훈도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게 찔려 죽었기에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는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에서 200년 동안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진 통신사 조엄(1719∼1777) 일행이 에도에서 외교적인 의전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764년 4월7일 오사카(大阪)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도훈도 최천종이 피살됐다. 이 절에는 500명을 재울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조엄이 새벽에 보고를 듣고 의관과 군관을 급히 보냈더니, 곧이어 한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최천종이 피가 흥건하게 흘러 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닭이 운 뒤에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자는데, 가슴이 답답해 깨어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에 걸터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급히 소리 지르면서 칼날을 뽑고 일어나 잡으려 하자, 범인은 재빨리 달아났소. 이웃방 불빛에 보니 왜인이었소. 나는 어떤 왜인과도 다투거나 원한 맺을 꼬투리가 없으니, 나를 찔러 죽이려 한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죽게 되니 너무 원통하오.” 첩약을 붙이고 약을 달여 마시게 했지만, 최천종은 해가 뜨자 운명했다. 자루가 짧은 창과 ‘어영(魚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이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왜인의 것이었다. 범인이 달아나다 격군 강우문의 발을 밟아 그가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여러명이 목격했다. 조엄은 “범인을 색출해 목숨으로 변상하라.”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밤늦게야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행차를 호위하는 쓰시마 수행원과 살해사건이 일어난 오사카의 법관, 그리고 조선의 역관들이 함께 입회해 검시(檢屍)했다. 최천종은 조엄이 대구 감영에 있을 때부터 신임하던 장교였으므로 정성껏 장례준비를 했다. 14일에 주변 인물들을 신문하던 과정에서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하는 편지를 보내고 달아났다. 일본측에서 목격자 진술에 의해 인상서(人相書)를 만들어 배포했다. 범인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 나이 26세, 쓰시마 역관, 얼굴색이 희고 키는 5척3촌이라고 자세하게 밝혔다. 수백명의 수사력이 동원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범인 “거울 도둑으로 몰며 때려 살해했다.” 17일부터 군사 2000명과 배 600척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서,18일 다른 지방에서 체포했으며,19일부터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신문했다. 최천종이 6일 거울을 잃어버렸는데, 스즈키 덴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밤늦게 찾아와 살해했다는 동기까지 밝혀졌다. 그러나 과연 거울 하나 때문에 국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범인을 처형하니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참관해 달라는 통고가 29일에 왔으며,5월2일 삼헌옥(三軒屋)에서 집행했다. 조엄은 김광호를 시켜 최천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게 했다. ‘명화잡기(明和雜記)’나 ‘사실문편(事實文編)’을 비롯한 일본측 기록들은 대부분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달라는 독촉 때문에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몇달 걸리는 국제여행 경비를 조정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인삼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수행원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른 물건으로 사왔다. 사대부들은 정량을 지켰지만, 역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남몰래 더 가지고 갔다. 몇차례 단속에 발각되면 인삼도 빼앗기고 엄한 처벌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밀무역은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 역관들이 에도까지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과정에서 인삼을 팔아주었으니,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났을 가능성이 많다. 밀무역 죄를 감추기 위해 거울을 잃어버려 말다툼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양에서 따라온 조선 역관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낮았으므로, 저간의 숨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부풀었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피살된 사건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종이 살해된 사건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고 한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된다. 박찬기 교수는 이들 수십종의 작품을 이국인(異國人) 살해, 통역관 살해, 혼혈아의 원수 갚기, 인삼 밀거래에 의한 보복 살해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국인 살해와 통역관 살해 유형은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로 상연되었다. 박찬기 교수가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오사카와 교토의 여러 극장에서 1767년부터 1883년까지 42회, 에도에서 5회 상연됐다. ●막부 압력으로 연극 줄거리 바뀌기도 가장 먼저 1767년 2월17일 아라시히나스케 극장에서 상연된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 )’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허구화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글자는 다르지만 제목에 ‘스즈키’라는 음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최천종 살해사건을 다루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열흘도 못 되어 같은 작가가 다른 제목으로 바꿔 같은 극장에서 또 상연했다. 가부키 연표에는 “첫날 둘째 날은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상연 중지”라고 기록되었는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염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 줄거리가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나카야마 라이스케(中山來助)와 지카마츠 도쿠조(近松德三)가 지은 ‘겐마와시사토노다이츠(拳揮廓大通)’이다.1802년에 초연을 시작해 1883년 5월까지 33회나 상연됐다. 이 작품에는 이국인을 살해하는 장면 묘사가 없고, 역관 고사이덴조(香齋傳藏)를 살해하는 유형으로 바뀌었다. 덴조(傳藏)라는 쓰시마 역관의 이름 정도만 남고, 이국인의 복장이나 언어 같은 이국적 정취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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