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문서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9월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리나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눈물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445
  • 「공기업 ‘內實경영’ 이렇게」李啓徹 한국통신사장

    3∼4년 전만해도 공기업의 폐해를 이야기하면 한국통신이 거론됐다.거대한몸집과 힘을 갖고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해 간 공룡처럼….그러나 지금 한국통신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기는 어렵다.발탁인사,연봉제,세대교체,팀별 책임경영,슬림화 등은 한국통신에선 아주 흔해진 표현이다.지난해 말국내 단일기업으로 최대규모인 1만 5,000명의 인력감축 계획을 발표,정부와다른 공기업,국민들마저 놀라게 했던 李啓徹한국통신사장을 15일 대한매일金柄憲 경제과학팀차장이 서울 광화문 사옥에서 만나봤다. ▒다른 공기업보다 경영혁신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는 데 어떻습니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전인 3∼4년전부터 일찌감치 사업의 수익성 제고와 조직의 슬림화에 중점을 두고 내부 혁신에 주력해왔습니다.1단계를 마무리를 짓고 2단계 계획이 진행 중입니다.2002년이면 세계적인 통신사업자로 우뚝서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1단계가 사장과 실·본부장간의 경영계약제 도입,부장급 이상 연봉제 및 전직원의 성과급제 도입 등을 통한 선진기업형 틀갖추기 였다면 2단계는 본격적인 운용계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2단계는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과 연계해 진행 중인데 내년까지 1만5,000명을 감축,내년까지 전국 260개 전화국을88개 광역전화국 체제로 재편하는 것 등 보다 혁신적입니다. ▒그렇다면 올해 경영목표도 과거와는 다를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올해는 고객만족 원년의 해로 정했습니다.값싼 서비스와 상품개발은 물론이고 요금제도도 선택요금제,종량요금제같은 고객 지향적인 방향으로 개편할 방침입니다.사업구조도 재편,데이터통신 인터넷 전자상거래 무선사업과 같이 미래지향적이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릴 계획입니다. ▒무선 사업분야의 육성을 무척 강조하시는데. 현재 서비스 중인 무선사업은 CT-2,선박무선,공항무선 등 비수익성·공익성 사업과 자회사를 통한 PCS(한국통신프리텔) TRS(한국TRS) 등을 서비스하고있으나,모두가 초기 단계입니다.서비스 시작 1년여 만에 이동통신업계 2위로 도약한한국통신 프리텔의 PCS사업은 전략적 제휴 및 외자유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육성해 나갈 계획입니다.차세대이동통신인 IMT-2000사업은 독자적인 기술로 시험시스템을 온벽하게 개발해놓은 상태로 정부의 정책방향이 가시화되는 대로 추진계획을 강구할 생각입니다. ▒한국통신의 민영화와 전략적 제휴에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데요. 민영화에 필요한 경영여건이 마련됐고 정보통신시장도 완전경쟁 상황에 돌입한 만큼 경쟁력 향상과 경영효율성 측면에서도 소유구조의 민영화가 가장시급합니다.우선 정부가 보유한 71.2%의 지분 중 13%를 해외 DR(주식예탁증서)발행을 통해서,그리고 15%는 유수한 외국사업자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서 매각할 계획입니다.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Y2K 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총 1,730억원을 투자해 올 상반기에 문제해결을 끝내고 하반기에는 문제가해결된 시스템으로 서비스에 들어갈 계획입니다.2차례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많은 종류의 시스템을 대상으로 확인 작업을 한 결과 약 30%정도가 문제발생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파악돼 지난해 5월부터 문제해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Y2K에 대비하기 위해 금융시장 관계자들로 구성된 단체인 G2K (Global2000 Co-ordinating Group)의 대비상황 평가에서 Amber(양호)등급 가운데서도 최상위인 Green(우수)으로 가고 있다는 Up-Green 판정을 받았습니다. ▒기간통신사업자로서 정부로부터 정보대국 건설을 위한 정보화과제가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 원활한 통신망과 플랫폼 등 선진 통신인프라를 구축,인터넷 정보제공등 관련 사업자들이 별도의 네트워크 구축없이 서비스를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특히 올해 통신망구축 투자비 중 약 33%인 6,900억원을 데이터통신 분야에 집중 투자해 전국 3만여 주요 공공기관에 초고속서비스를 제공하고 250만 인터넷 이용자 및 450만 PC통신 가입자 등 일반 국민들도 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습니다. [대담 金柄憲 경제과학팀 차장]- 한국통신 경영혁신 '문서 98% 전자결재' 서류철을 들고 상사의 결재를 받으러다니는 직원을 한국통신에서 찾아보기는 극히 힘들다.문서의 97.8%를 전자결재로 해결하기 때문이다.문서 특성상전자결재가 불가능한 것들을 빼면 사실상 100%.국내기업 가운데최고수준이다. 전국 650여개 사업장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전산망으로 연결,결재에 걸리는평균시간이 이전의 9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었다.연간 문서우송료 4억5,000만원,복사지 3억8,000만원,컴퓨터 디스켓 1억4,000만원 등 돈으로만 10억원이넘게 절약되지만,여기서 생긴 일의 능률을 돈으로 따져보면 1,700억원이 넘는다. 한국통신이 숨가쁘게 밟아온 변화와 혁신의 단면이다.경영혁신의 바람은 조직·인력 축소와 사업구조 합리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선 업무현장까지 바꾸고 있다.지난 1월 한국신용평가와 한국신용정보로부터 받은 최고의 신용등급 ‘AAA’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한국통신은 곧 전국 176개 전화국장실을 영업창구로 옮긴다.고객의 눈높이와 맞추는 수요자 중심의 서비스를 위해서다.또 공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사업실명제’를 도입했다.현재 시행 중이거나 시행예정인 모든 서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업책임자를 명확히 지정해 관리하는 제도다.사업추진 과정을 상세히 기록,경영과 고객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는 데 활용하게 된다. 독특한 사원포상제도인 ‘마케팅 레인보우카드제’도 도입했다.심사제도를없애고,실적이 뛰어난 직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아낌없이 칭찬하는 제도.포상 결재 등의 과정이 필요없어 높은 동기유발 효과를 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다.최근 들어서는 114 안내전화를 중심으로 여성과 장애자들을 고용,재택근무제를 활성화함으로써 인력활용에도 효율성을 기하고 있다. [金泰均]
  • 獨외무“EU 군사기구 창설 하자”

    ┑엘트빌(독일)DPA 연합 ┑독일은 13일 유럽연합(EU)이 미국과는 별개로 상설참모진과 군사정세 센터 및 위성정보능력을 갖춘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출것을 제의했다.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이날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 제출한 문서에서“유럽이 위기 관리를 위해 군사력을 포함한 적절한 능력과 구조를 갖추도록 우리가 주된 노력을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독자적인 군사기구의설립을 제의했다. 피셔장관은 이에 따라 EU는 전략기획과 상황 분석 능력 및 독자적인 정보원등을 위한 상설 군사기구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는 이 문서에서 독자적인 군사기구 설립의 목적은 ‘공동외교안보정책’(CSFP)을 강화하는 데 있다면서 “이는 신뢰할만한 군사적 능력과 적절한 의사결정 기관에 의해 지원받는 행동능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독일은 상설 참모본부를 브뤼셀에 설치할 것과 정세분석센터 및 위성정보센터를 설립할 것을 제의하면서 EU회원국들은 위기 상황에서 독자적인 배치에적합한 군사력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문서는 이어 앞으로의 EU 군작전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과의 협조 아래,또는 협조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질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축협 비자금 조성 확인

    농·축협 비리를 수사중인 대검 중앙수사부는 12일 전국 농협직원 12명이 공문서를 위조하고 부당대출을 하거나 공사대금을 지급하면서 리베이트를 수술한 혐의 등으로 입건돼 이 가운데 9명이 구속됐다고 밝혔다. 검찰관계자는 “광범위한 계좌추적을 통해 구속된 농협직원들의 비자금을 조성,중앙회 간부들에 전달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검찰은 축협중앙회 고위간부들이 직영공장 운영과정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잡고 수사중이다. 검찰은 이에따라 축협 직영 유가공공장,부천 공판장,부산 특수사료공장 등의 계약서와 입찰서류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아 정밀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이들 직영공장이 입찰과 계약과정에서 특혜를 주는 대가로 금품을받아 이 가운데 일부를 중앙회에 건넨 것으로 보고 있다. 任炳先
  • 외규장각 도서‘望鄕의 恨’언제 풀리나

    외규장각 도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프랑스가 최근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을 전담할 권위자로 자크 살로와(58)를 선정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언제쯤 돌려받을 수 있을지에 다시 관심이모아지고 있다.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은 6년 넘게 끌어 온 한국과 프랑스간의 현안으로 지난 9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서 교환 기본원칙이 합의됐다.프랑스가 도서를 영구 임대형식으로 돌려주고우리나라는 그에 상응하는 고문서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이른바 등가(等價)의 문화재 교환방식이다.그러나 추후 실무자들간의 협상에서 교환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도서반환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답보상태를 거듭해온 도서반환 문제는 지난해 4월 새로운 해법이 제시됐다.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양국 역사 문화 전문가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최근 자크 살로와의 선임 사실을 통보하고 우리측에 전문가를 선정해줄 것을 요청해왔다.자크 살로와는 감사원 최고감사위원이지만 박물관 협회 회장(89∼93년),문화부 박물관장(90∼94년)을 지내 문화계,학계에서도 폭넓은 교분과 지명도를 갖고 있다.지난해 9월에는 피에르 족스 감사원장을 수행,방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통상부는 현재 교육부,문화관광부의 협조를 받아 전문가 선정작업을 벌이고 있다.지난달 말에는 교육부와 문화부에서 추천한 10명의 명단을 놓고관계 부처 협의를 가졌다.전문가는 추천인물에 대한 검토작업을 거쳐 이달말 쯤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외교부는 가능하면 정치외교적 감각과 문화적 식견이 있으면서도 국민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인물이 뽑히기를 기대한다.문화재 반환이라는 좁은 시각보다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양국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전문가 선임은 도서반환 협상의 첫 단추를 연 것이지만 섣부른 예단은 갖지 말 것을 주문한다.서로 반환협상에 부담을 느끼는 탓이다.외교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한 파리 특파원발 기사에서 주불대사가 “등가의 문화재 교환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양국 문화교류 확대,유물 보전기술전수 등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개인의견이 확대 해석된 것으로 현재로선 완전한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외교부는 전문가가 선임되면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해준 뒤 준비과정을 거쳐 프랑스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갈 계획이다.그러나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심각한 견해차이를 보여 협상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일례로 프랑스는 당시 책을 가져간 것은 서고가 불에 탔기 때문이며 책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말한다.또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 국내법상 공공재산으로 등록돼 있는 국가재산이라며 미리 못을 박는다. 영국,프랑스 등 문화선진국들은 2차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전시문화재 보호를 위한 헤이그협약(1954년),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이전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1970년) 등 문화재 반환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하지도 않았다.더욱이 외규장각 도서의 해외 유출사건은 19세기 후반에 발생,전시문화재에 대한 국제협약의 적용을 받지도 않는다.문화재 반환의 선례가 될 것이라는 점도 부담이다.미국과 영국 등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관계 전문가들은 경제협력 등 정치적 해결보다는 학술,학문적으로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즉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법,판례,문화인류학적입장 등을 토대로 반환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들은 역사적 진실 앞에서는 어느 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같이 주장한다.이들은 한 나라의 왕실재산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국가재산인 만큼 프랑스가 외규장각도서를 자국의 공공재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한다.또 문화선진국들은 문화재 보존기술이 낙후돼 있는 후진국들에게는 귀중한 문화재를 맡길 수 없다며 반환을 거부하고 있으나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75년 발견당시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이러한 주장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또 덴마크가 아이슬랜드의 중세문학 필사본을 250년이 지난 뒤 반환한 데에서 보듯 불법으로 빼내간 문화재는 원소유국으로 반환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라고 말한다.한마디로 정치적 타결보다는 각종 관련 국제법에 의한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의 일지]▒1886년 외규장각 도서 피탈▒1975년 박병선씨 외규장각 도서 발견▒1991년 10월 서울대 외무부 통해 반환요청▒1993년 9월 한불 정상회담에서 합의로 해결하기로 합의▒1994∼97년 한불간 협의 난항▒1998년 4월 한불 정상회담에서 전문가 협의로 해결하기로 합의▒1999년 1월 프랑스,전문가 자크 살로와 선정- 외규장각 도서란 외규장각 도서는 세자 및 왕비의 책봉행사와 결혼,국장(國葬) 논의 및 준비과정,의식절차 및 경비,행사 유공자들의 포상 등을 규정한 왕실 의전 궤범이다.보통 4권으로 만들어져 4대 서고에 보관된다.이 가운데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도서는 왕이 보던 어람(御覽)용으로 원본인 셈이다.관청 등에서 이를 복사,보관해왔기 때문이다.게다가 국내 보관본의 3분의1 정도는소실된 상태라 프랑스 보유 문서의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외규장각 도서는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가 빼앗아 갔다.현재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지난 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씨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창고에서 처음 발견,세상에 알려졌다.파손 도서는 이후수리 복원됐으며 현재는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다.고서 반환은 91년 10월 서울대총장이 외무부에 추진을 의뢰,이듬해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5)경제개발 5개년계획(下)/金立三씨

    1961년 봄은 張勉정부에게 마냥 장밋빛이었다.새해 들어 실업률은 줄고 세수(稅收)와 외환·금 보유고는 늘어나는 추세였다.4월혁명후 ‘부정축재 처리’에 걸려 전전긍긍하던 민간 경제계는 1월10일 ‘경제협의회’를 구성해 경제개발에 적극 동참할 태세를 갖추었다.게다가 각종 시위도 60년 말부터 눈에 띄게 잦아들어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張勉정부는 ‘경제제일주의’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3월1일에는 전국적으로 국토건설사업이 막을 올렸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확정 단계에들어섰다. 그 3월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점검하고자 미국에서 찰스 울프박사 일행이 내한한다.세계적인 사회과학 연구기관인 랜드(RAND)연구소 소속의 울프박사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장기계획의 타당성을 조사하러 온 것이다. 당시 5개년계획 작성을 맡은 산업개발위원회에는 朱源위원장(훗날 건설부장관 역임)을 비롯한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었다.런던정경대학원(LSE)에서 재정학과 경제발전론을 배운 金立三은 개발계획 가운데 재정·조세 부문을담당했고 한국은행에서 파견된 李經植(부총리 역임)은 거시경제 부문을 맡았다.崔珏圭(부총리 역임)도 그때 재무부 수습행정관으로 파견나와 있었다. 울프박사에 대한 브리핑을 金立三이 하게 됐다.그는 5개년계획에서 전력·석탄·비료·시멘트·화학섬유·정유·철강·농업을 중점 육성산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또 연간 목표성장률을 6.1%로 잡았는데,이처럼 목표치를 높인근거로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가 확고하며▒한국의 교육열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력을 양성했음을 들었다. 金立三은 “울프박사가 우리의 계획에 전반적으로 찬성했다”면서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져 성장 잠재력이 높다고 평가해 모두들 만족했다”고 회상했다. 張勉정부와 미국은 울프박사의 평가를 토대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함께 노력한다.양국의 이같은 자세는 최근 발굴한 미 국무부 문서 여러곳에서도 확인된다. 61년 4월11일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장기경제계획에 대한 원조를 발표하자張勉정부가 이를 무척 반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또 한국정부가 미국 고문단(울프박사 일행을 의미)과 상의하여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 4월13일 이임(離任)인사차 張勉총리를 만난 매카나기 주한미대사는 “張총리가 울프박사의 건설적인 충고를 받아들이겠으며,경제개발5개년계획이미래의 열쇠이므로 전력을 다해 실시하리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국무부에보고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61년 4월 그 내용이 일부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張勉정부는 정식발표를 미루고 있었다.그해 7월 張총리가 미국을 방문,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원조를 확실하게 약속받으려고했기 때문이다. 5월 들어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 등 실무진이 먼저 미국에 건너가 정상회담에 앞선 교섭을 하던 중 5·16쿠데타가 터지는 바람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국민 앞에 선보이지조차 못한 채 역사의 그늘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쿠데타 세력은 5월27일 장면정부의 부흥부를 ‘건설부’로 이름을 바꿨으며7월22일에는 ‘건설부’를 폐지하고 다시 경제기획원을 신설하는 등 일련의조치를 취한다.그리고 이날 ‘종합경제재건5개년계획’(1962∼1966년)을 발표한다. 5·16후 두달엿새만에 공개된 이 5개년계획이 순전히 쿠데타세력의 작품일수 있을까.그동안 숱하게 쏟아져 나온 5·16주체들의 증언·회고록과 그들이 집권한 기간에 나온 공식문서들은 한결같이 “張勉정부에게는 참고할 만한경제정책이 없어 모든 걸 백지에서 시작했다”는 투로 주장한다. 그러나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을 비롯해 張勉정부의 5개년계획에 간여한 이들은 “기존의 계획을 검토하는 데만도 1년은 걸릴 것”이라면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한다.계획 수립의 실무 핵심이었던 金立三은 “그들은 張勉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가져갔다.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항목까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뿐”이라고 증언했다. 金立三이 이처럼 자신있게 말하는 까닭은 ‘물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물증’이란 그가 지난 40년 가까이 소중하게 보관한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이란 책자이다. 모두 717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등사본으로 제작한 이 책자는 표지에 ‘단기 4294년(1961년)5월 건설부’가 발간한 것으로 돼 있다.이 때의 ‘건설부’란 쿠데타 후인 61년 5월27일부터 7월21일까지만 존재한 부서 명칭이어서 이 책자가 5월 27∼31일 사이에 배포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張勉정부 출범 18일만에 쿠데타 모의를 시작한 세력은 ‘거사’에 성공한 지 10여일만에 앞선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는,또한차례의 ‘조급증’을 보인 것이다. 金立三은 “책 내용 가운데 바뀐 부분은 표지와 총론(總論)일부”라고 지적하고,張勉정부가 자유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데 비해 쿠데타 세력은 “한국경제체제는 자유기업제도와 정부에 의한 경제정책의 병존이며 이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총론에 못박았다”고 밝혔다. 1961년 5월은 張勉정부가 겨우 집권 8개월째에 접어든 때였다.4월혁명에 뒤따른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이제 막 경제발전의 날개를 펴려던 민주정부는 느닷없는 총칼에 유린당했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張勉정부가 기울인 경제개발의 노력,그리고그후의 경제성장에 실질적인 토대를 닦은 사실은 이제 역사의 공정한 평가를받을 시점에 와 있다. - 5개년계획 핵심 역할 金立三 전경련고문 金立三 전경련고문(77)은 미국 미네소타대와 영국 런던정경대학원을 마치고1959년 6월 귀국해 산업개발위원회에 보좌위원으로 들어갔다.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작성에 핵심 역할을 한 그는 62년 5월 정부기관을 떠나 그뒤로민간경제 부문에서 일해왔다. 金고문은 ‘朴正熙시대의 경제성장 신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먼저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군사정권의 그것은 외형상 비슷하지만 그 이념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張勉정부가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반면 쿠데타세력은 처음부터 ‘지도받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워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통로를 열어놓았다는 설명이다. 이어 재계가 61년 1월 경제협의회를 구성하면서 張勉정부의 ‘경제제일주의’에 화답하는 ‘윤리제일주의’를 채택했지만 이같은 정신이 빛을 볼 겨를도 없이 쿠데타를 맞았고 이후 정경유착의 악습에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경제면에서 張勉정부의 치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는 金고문은 “특히 군사정권 초기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는 정치와 달리 인과응보 법칙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는데 군사정권은 장기개발 계획의 필수전제 요소인 경제안정 개념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군사정권의 무모한 개발 추진에 외화는 고갈되고 인플레까지 겹쳐 결과적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고 단정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도약의 호기를 맞았는데 군사정권이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성장이 3∼4년 늦어졌다”고 비판한 金고문은 “오늘날 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고 강조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이는 ‘朴正熙 향수’에 대해서는 “실상을 정확히 몰라서인데다 일부 인사들이 부추겨 일어난 현상”이라고 잘라말하면서 “지금 (朴正熙)거품이 잔뜩 끼었는데 사그라진 뒤 국민에게 남을 공허감은 어떻게메우겠는가”라고 우려했다. 金고문은 ‘한강의 기적’의 원류는 張勉정부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張勉정부가 만든 여러 계획을 보면 평가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 전남도 전자결재 1월부터 시행…이용률 4.6% 불과

    전남도가 올 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전자결재제도가 이용률이 매우 낮아 유명무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도에 따르면 각 실·과별 전자결재 처리실적을 조사한 결과 이용률이4.6%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민방위대책과,여성정책과,축정과,산업자원과 등 4개 과만 전자결재 이용률이 20%를 넘고 있을 뿐 나머지 과는 대부분 1∼3%에 머물고 있다.더구나 청내 48개 과 가운데 18개 과는 전자결재를 단 한건도 하지 않았다. 이같이 전자결재 이용실적이 낮은 것은 대부분의 결재권자들이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지 못해 종이문서를 보면서 기안자의 설명을 듣는 대면결재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도청 공무원 1,663명 가운데 PC를 가지고 있는 공무원이 57%인 944명에지나지 않는 것도 전자결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첨부물이 많고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업무의 경우 전자결재가 오히려불편한 것도 이용률이 낮은 요인이다.
  • [외언내언] 영국여왕의 방한

    지난 92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 40년을 맞았을 때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기념문서들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킨 군주로서 그는 1,000년 역사를 지닌 영국 왕의 자리에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대영제국을 영연방으로 순탄하게 변화시키는 외교적 역할을 발휘했다’고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유럽의 다른 나라 왕실들이 공산주의의 물결에 밀려 붕괴한 데 비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의 왕위와 위엄을 굳건하게 지켜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그는 연합왕국의 왕인 동시에 자치령 각국의 왕이며 다시 구(舊)제국에 속해있던 독립국 결합체인 코먼웰스의 수장으로서 ‘군림은 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전통을 지켜 실제의 정치에는 관여하지않고 있다. 그러나 1년에 두 번으로 제한된 국빈 방문으로 국제 친선에 기여하고 있다.지난 86년,베이징(北京) 방문 때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여왕으로서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고 94년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빈간의 잇단 불화와 추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방문하여 꿋꿋한 왕실의 체모를 과시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영 국교 재수립 50주년 기념으로 4월 1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우리나라에 온다.엘리자베스 여왕의 해외방문엔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 언론의 열띤 취재보도가 따를 것이다.이번 여왕의 한국 방문에는 영국 왕실출입기자 50여명과 세계 각국의 기자 100여명이 동행할 예정이어서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TV화면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방한 스케줄은 이른바 작은 문화답사의 형태로 국립묘지 참배와 金大中대통령 면담후 서울 미동초등학교에 가서 태권도 시범을 관람하고 이화여대와 인사동 거리,남대문시장을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국악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에도 찾아가 ‘서양음악사가 짧은 한국에서 어떻게 가르치기에 그처럼뛰어난 음악가가 많이 나오는지’도 확인하고 싶어한다.그리고 사흘째인 21일에는 73세 생일을 맞아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담연재(澹然齋)에서 전통한식으로 차려진 생일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한국의 양반 마을에서 신사의나라에서 온 영국 여왕의 생일맞이는 동양과 유럽의 조화를 새삼 실감시킬지도 모른다. 물론 영국 여왕의 한국 방문은 한국으로선 전세계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과연 인사동과 남대문시장,안동의 하회마을에서 동양적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우리에겐 보여줄 것이 적다는 게문제인 것 같다. 이세기 논설실장
  • 안양LG 최용수, 英웨스트햄 이적 무산/원인

    국내 최고의 스트라이커 최용수(26·안양 LG)의 영국 프레미어리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이적이 사실상 무산됐다. LG의 한웅수부단장은 이날 “그동안 웨스트햄측과 첩촉해온 에이전트가 오늘(10일)까지는 최종 답변을 주겠다는 뜻을 전해와 기다려왔으나 구단 예산문제로 스폰서 확보에 필요한 이틀간의 여유를 더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며 “웨스트햄측과의 협상이 사실상 무산된 것으로 보고 유럽의 다른 팀과 새로운 협상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한 부단장은 이와 관련,“이미 물밑협상이 진행돼온 프랑스의 생테티엔 구단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2개 구단 등과본격 협상을 할 계획”이라며 “생테티엔에서는 12일 부사장 일행이 서울을방문,이적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전했다. 한 부단장은 “최용수를 해외에 이적 시킨다는게 구단의 입장”이라며 “이제 협상 채널을 다변화하는 만큼 가급적 빠른 시간내에 최상의 조건을 제시하는 팀과 이적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생테티엔 구단은 지난 1920년 창단된 팀으로 올시즌을 포함,프랑스 2부 리그에서만 10차례 우승했으며 다음 시즌부터 1부리그로 승격 예정이다. 곽영완- 안양LG 최용수 英웨스트햄 왜 무산됐나 국내 축구 사상 최고액인 400만달러 짜리 트레이드로 관심을 모았던 최용수의 웨스트햄 이적이 사실상 무산되자 그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해외에 대한 정보마저 제대로 없었던 LG측이 이적 추진을지나치게 은밀하게 진행하면서 ‘주먹구구식’ 협상으로 일관한데 있다.최용수의 해외 진출은 상무 제대(2월22일)전인 지난 1월 중순부터 추진됐다.이적 국가로는 트레이드머니가 높은 영국과 이탈리아 등으로 좁혀졌고 결국 영국의 웨스트햄이 유력한 구단으로 떠올랐다.축구선수 트레이드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공인하는 에이전트가 반드시 개입돼야 하기 때문에 양측은 각각의 에이전트를 내세워 협상을 진행시켜 왔다.LG측은 테딕 베키(벨기에)를,웨스트햄은 해리슨-매케이(영국)를 내세웠다.여기에 중간에 미첼 폴(벨기에)이라는 또 다른 에이전트가 끼어들어 양측의 협상을 조율했다.그러나 이는 최용수가 테스트를 받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간 지난달 23일 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더구나 LG측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망신을 자초했다.이후에도 LG측은 당초 최종 계약 시한을 5일에서 10일로 연기했다가 웨스트햄 구단측으로부터는 한마디 응답을 듣지못했으면서도 2∼3일 더 기다려 달라는 에이전트들의 요구에 다시 시한을 미루는 등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에이전트들의 이같은 시간 벌기는 최용수의 이적 성사보다는 자신들의 커미션 액수를 올려놓기 위한 것이었다.웨스트햄측 에이전트만 해도 최소한 50만달러의 커미션을 요구,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실제 웨스트햄이 지불해야 하는 액수는 500만달러를 넘어서게 된 것. LG측은 복잡한 국제 관행과 거대한 트레이드머니에 따른 불가피한 지연이라 변명하고 있다.그러나 드레이트와 관련,웨스트햄의 공식 문서 조차 확보하지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졸속 협상이다.또 협상 과정에서는 선수몸값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여러 구단과 동시에 접촉할 필요가 있었으나 웨스트햄으로 국한하는 바람에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팀과의 협상에서는 보다 명확한 자세를 취하되 다양한 협상카드를 준비,상황에따라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곽영완
  • [제2공화국과 張勉](4)경제개발 5개년 계획(中)/아이젠하워

    張勉정부는 집권 직후인 1960년 9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곧바로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것이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Aide Memoire on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이다. 25쪽 분량인 이 문서는 구성상 통상적인 외교문서와는 큰 차이가 있다.張勉정부는 단순히 원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실정과 이에 따른 경제개발 필요성,5개년계획의 윤곽,그리고 張勉정부의 개혁의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한국은 지금 ▒노동가능 인구 940만명 가운데 130만명이 실업자이고 ▒농촌인구의 65%는 가난과 저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3년간(1957∼1959년) 무역적자는 연평균 3억4,800만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기적인 경제개발이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원조를 해준다면장면정부도 국군 5만명 감축,일본과의 국교정상화,환율 정상화 등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말하자면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개혁을 해나갈 터이니 대신경제 지원을 해달라’는 식이었다. 실무자로서 비망록을 작성한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은 “외교문서에 공무원 봉급을 현실화해 공직사회 부패를 없애겠다는 다짐까지 했으니 자주독립 정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린 문서였다”고 회고했다.그는 張총리에게 결재받으러 갔더니 힘없이 그러나 인자한 표정으로 몇마디 묻고는 사인하더라면서 “張총리가 그 내용에 공감했다기보다는 金永善재무장관을 믿고 결재하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굴욕적이기까지 한 ‘경제개혁 비망록’이 꼭 필요했을까.그 무렵은 국가재정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상태였고 게다가 李承晩정권의 실정(失政)으로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60년 8월6일 許政과도정부가 발표한 李정권의 ‘외화 낭비’규모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낭비액’은 미화 3억3,000만달러,영국돈 286만4,000파운드,일화 1억4,600만엔 등이었다. 이 비망록은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金永善장관과 車均禧부흥부 사무차관은 미국을 방문,10월4일 비망록을 허터 국무장관에게 수교한다.이 문서는 국제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유력한 경제지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윌슨 편집국장이 직접 한국에와 金永善장관과 李起鴻국장·李漢彬재무부 예산국장 등을 인터뷰해 그 내용을 10월27일자 커버스토리로 싣는다. ‘도약을 위한 한국의 탄원’이란 이 기사에서 윌슨은 “일단의 젊은 관료들이 체면불구하고 미국에 매달려 경제적 도약을 하겠다고 공개 탄원했다”고 보도했다.아울러 한국의 사회상이 한심스럽지만 희망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지켜볼 만하다고 기대를 걸었다. 나라의 체면마저 저버린,그래서 도리어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더욱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비망록은 1983년 11월에야 외교문서로 정부에 정식등록된다.부흥부에서 작성해 총리의 결재를 받고 재무장관이 미국에 전달할 때까지 외무부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만큼 파격적인 외교문서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지원에 관한 張勉정부와 미 행정부간의 협의는 순조롭게,그리고 바삐돌아간다.60년 10월1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경제회담에서 한국은 4억2,100만달러를 61∼65년에 걸쳐 원조해 달라고 미국에 정식 요청한다.이 액수는‘경제개혁 비망록’에서 한국이 밝힌 5개년계획의 미국측 지원규모 그대로다. 이 회담에서는 또 환과 미국의 달러화 환율을 61년부터 1,000대1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한다.11월26일에는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張총리를 방문,비망록에서 밝힌 요청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허터 미 국무장관의 공한을 전달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는 친한파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관심에도 크게 힘입었다는 사실이 최근 발굴된 미국 외교문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별도기사 참조] 張勉정부는 미국의 경제지원을 얻느라 부단히 애쓰는 한편 국내에서도 기업인과 국민에게 장기 경제개발의 당위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대표적인 예가 60년 12월5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종합경제회의’다. 정부가 경제정책에 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자 마련한 이 회의에는 경제·기술·언론·학계 인사들과 각 지방 독농가까지,당대의 오피니언리더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張총리는 “4월혁명의 진정한 과업은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한줄기찬 경제발전 없이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강조하고 “새해부터는 실업과 민생문제에 적극 대응해 나갈테니 온국민이 자조자립의 정신으로 동참할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金永善장관의 발언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金장관은 한국이 경제면에서 북한보다 3∼5년 뒤져 있음을 산업별 수치를들어 솔직히 밝히고 “북한과의 경제전쟁에서 뒤떨어진 현실을 극복하려면땀과 피,희생과 인내,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불과 몇달 전까지 ‘반공’을 국시로 내건 李承晩정권 하에서 언제라도 ‘북진통일’이 가능하다고 믿던 국민에게는 이보다 더한 충격이 없었을 것이다.이와 함께 ‘金永善 발언’은 ‘국민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화를 통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張勉정부의 기본방침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종합경제회의에서 간사로 일한 金立三(77·전경련 고문)은 지금도 “張勉정부는 경제발전에 관한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그점에서는 張勉정부가 자유당정권은 물론 5·16 군사정부보다도 월등히 앞섰다”고 평가했다. 1961년으로 해가 바뀌면 민간 경제계도 한국경제협의회를발족하는 등 경제개발에 동참할 채비를 갖춘다.아울러 산업개발위원회가 준비하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 안이 완성 단계에 이른다. 李容遠 ywyi@ - 아이젠하워 한국경제 큰 관심… 개발 적극 독려 1960년 9월은 張勉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공표하고 ‘경제개혁 비망록’을준비하는 등 숨가쁘게 돌아가던 때다.이 무렵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일시 귀국한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한국문제,특히 경제개발에 관해깊이 상의한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 정부문서간행처(USGPO)가 발행한 FRUS 18권 691쪽에 수록된 자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의록’(A)에서 확인할 수 있다.아이젠하워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52년 12월과 두번째 임기중인 60년 6월 등 두 차례 방한한 친한(親韓)인사다. 9월14일오전 9시 아이젠하워를 만난 매카나기는 “한국에서 많은 진전이있었고,張勉정부는 잘 해나가고 있다”고 보고한다.또 “파벌싸움이 있기는하지만 이는 동양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이어 본인이 이번 방문에서 확실하게 추가원조를 얻어올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기대한다고도 보고한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 스스로 경제 단계를 끌어올리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이 듣기 싫어하겠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는 한 주권국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한국의경제발전이 시급함을 재차 강조했다. 그 무렵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960년 8월12일 파슨스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가 매카나기에게 보낸 편지(B)에 잘 나타나 있다. 파슨스는 “한국사회와 경제를 자유롭고 안정되게 유지한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은 적어도 공산주의자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크게는 한국에서 사회정의와 경제발전을 실현함으로써 아시아에 자유세계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사회에 늘 존재하는 불화와 반목,광범위한 혁명적잔재의 위협을 극복하고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가 제시한 ‘도약단계’로 전환하도록 지도와 격려,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우리의 공산주의 경쟁자들에게 그들의 방식을 시도할 기회를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파슨스의 관점에서도 엿보이듯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기조는 냉전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나 張勉정부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까닭은 ‘李承晩독재’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張勉정부야말로 미국이 자유세계의 모범생으로서 키울 만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상숙(梨大강사·정치학박사)
  • [이제는 신기술로 승부건다](2)허약한 저변

    ‘21세기 경쟁력은 신기술에서 나온다’ 지구촌 국가들이 지식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지식기반산업 신기술 육성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구조조정 이후의 국가경영시스템 구축과 관련,지식경영·지식산업·지식경제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는 등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2003년까지 119조6,000억원을 투입,정보통신서비스와 영상·음반,디자인 등 27개 제조·서비스업종을 신기술 업종으로 지정,육성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같은 기간 이 분야의 신규 고용창출 인원은 69만6,000여명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의 신기술 육성이 고용창출과 실업극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지식기반산업은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됐다.우리나라에서 첫 논의된 것은 지난해 하반기.통일된 기준이 없어 각 나라마다신기술에 포함되는 산업이나 업종이 들쑥날쑥이다. 따라서 미국이나 영국 등이 경제의 축을 일찍이 지식기반산업으로 옮겨 성공한 케이스라면 일본은이제 첫걸음을,우리는 밑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는셈이다. 특히 OECD 회원국들이 GDP의 35%를 지식기반산업에서 얻는데 비해 우리의경우 8.2%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구 1만명당 특허출원 건수나 논문발표 건수는 16.3건과 1.3건으로 미국(37.1건,10.6건) 일본(39건,4.8건) 등에 비해 턱없이 적어 지식기반산업 기반이 취약한 상태이다. 정부의 지원체계에도 문제가 있다.신기술 육성과 관련된 정부부처는 재정경제부를 비롯,산업자원부 과학기술부 노동부 교육부 중소기업청 등이다.범정부적 지원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그동안의 행태를 볼 때 일관되고 지속적인지원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재계의 움직임도 주목된다.이미 빅딜 과정에서 보았듯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인프라 확충없이 과잉 및 중복투자할 우려도 높다. 따라서 신기술 육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창의성 개발 위주의 교육개혁과다양성과 전문성을 존중하고 높게 평가하는 의식구조 쇄신 등 사회구조의 변혁이 시급하다김명승 올해 초 정부는 자동차 철강 섬유 등 기존 주력산업은 지식 및기술집약화를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전환하고 정보통신,영상·음반,관광,인터넷등 27개 제조·서비스 업종은 ‘지식기반 신산업 업종’으로 지정,육성한다는 발전대책을 마련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올해부터 2003년까지 지식기반 산업 재정자금 56조원을포함해 120조원 규모의 자금을 집중 투자,2003년에는 전체 예상수출액 1,750억달러의 22.7%인 397억달러를 지식기반 산업의 수출로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또 80만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GDP성장률은 매년 약 0.64%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소프트웨어]미래 지식산업의 선두주자로 꼽힌다.컴퓨터 관련 서비스,데이터베이스,인터넷 관련 소프트웨어,패키지 소프트웨어 등 정보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가 포함돼 있다. 최근의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20%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며 앞으로 10년간은 30% 이상 높은 성장률이 예상돼 2003년까지 약 4만5,000개의 일자리가 추가로 창출될 전망이다. 정부는 소프트웨어 제반 기술 개발에 올해 3,000억원을 투자하고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의 마케팅 활성화를 위해 50억원을 지원키로 했다.하지만 소프트웨어 산업육성을 위해서는 창업을 가로막는 규제를 과감히 없애야 한다. [정보통신]전년도에 비해 매출액이 16% 증가한 90조2,00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차지하는 비중이 10%에 달했다. 정보통신서비스 시장은 97년보다 24% 증가한 14조5,000억원으로 전자상거래,인터넷폰,콜백서비스 등 통신사업이 가세하면 2003년까지 20조원의 시장을형성할 것으로 보인다.또 컴퓨터,휴대전화,무선호출기 등 관련 정보통신 기기도 매년 13%씩 성장,2003년에는 130조원에 달할 전망이며 정보의 디지털화 등이 진전되면서 이 산업은 국가성장 주도산업이 될 전망이다.정보통신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는 인프라 구축을 위한 초고속망 구축에 1조원,무선통신공용기지국 확충에 5,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복안이다. [인터넷 서비스]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국내에도 300만명의 이용자가 있으며 2002년에는 1,000만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쇼핑몰과 인터넷 서점 등 지난해 국내 전자상거래 규모는 150억원에 달했으며 기업간 전자문서교환 서비스를 포함하면 216억원을 기록했다.전자상거래는 전세계적으로 매년 100%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또 PC통신은 현재 550여개의 사업자와 5,100여개의 정보제공업체(IP)가 있으며 이용자는 420만명에 달한다.전자상거래 도입을 위한 인터넷 기반구축에 따른 인터넷 서비스제공업,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시스템 통합,인터넷 검색프로그램,보안프로그램 등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영상·관광]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지난해 국내에서 개봉된 영국 영화 ‘풀몬티’는 35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3억달러를 벌어들여 사상 최고의 수익률을기록하기도 했다. 영화의 국내 시장규모는 2,300억원,애니메이션 540억원,방송 3조6,400억원,멀티미디어 1,600억원 등 모두 6조7,000억원 정도다.특히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분야는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관광 산업은 산업 잠재력이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다.아직까지 국내 관광산업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낙후된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본격적인 관광산업을 육성한다면 막대한 외화획득은 물론 고용창출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정부는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허브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20억∼30억달러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2003년까지 관광수입을 110억달러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조현석 - 정부추진 신기술 육성방안 정부가 마련한 ‘직업교육훈련 기본계획안’은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신기술 인력을 집중 육성하고 21세기의 사회변화에 맞는 직업재교육훈련을 계속적으로 추진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본계획안을 간추린다. ▒지식기반중심의 직업훈련기관 양성 우선 문화산업분야의 전문인력은 전문대학원 설립 등을 통해 양성하되 게임산업 등과 관련된 새로운 전략분야는민간교육기관에 ‘위탁교육과정’을 개설해 운영한다. 기능대학과 직업전문학교는 제조업의 숙련공과 테크니션을 양성하는 곳과비숙련공의 단기간 훈련기관으로 각각 역할을 구분한다. 실업계고교는 체제개편을 통해 통합형고교로 바꾸고 공고는 특성화학교로,상업고는 정보화고교나 산업디자인고교로 전환한다. ▒평생직업시대에 대비한 직업교육훈련 실업계 고교와 전문대학 또는 기능대학(2+2),대학(2+2+2)과의 연계교육을 확대해 학교급간 직업교육연계체제를구축한다. 전문대에 일정비율의 주민선발제도를 도입하고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또 수형자 직업훈련에 외부기업체의 지원을 유도하고 출소한 뒤에는 우량기업체가 이들을 일정비율 취업시키는 ‘취업쿼터제’도입을 추진한다. ▒자격인정제 활성화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라 다양한 자격인정제가 도입돼개인의 능력개발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한다.이에 따라 정부는 신뢰할 수있는 민간단체가 발부하는 다양한 자격을 공인해 주기로 했다.게임산업과 관련한 게임프로그래밍·게임그래픽 등과 무대기술사,박물관·미술관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큐레이터,국제회의 등을 기획하는 회의기획가,여행기획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자격제도에 면허제도가 가미되는 ‘개인면허 업종제도’를 도입해 자격증만으로도 개인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예를 들어 관광통역안내원이나국내여행안내원 등 신규로 도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신규자격제도는 관광진흥법에 ‘개인영업업’을 신설해 개인이 자격증만 갖고 있어도 영업을 할 수있게 한다. 또 전통문화와 예술 등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부터 전수 또는 학습한 문하생에게 학습내용에 상응하는 학력을 인정해 주는 ‘문하생학력인증제’도적극 추진한다. ▒산학연계 고등교육단계에서 인턴휴학제도,인턴엔지니어제도 등 다양한 형태의 현장경험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주문식교육과 고유향토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거점 전문·산업대학을 육성한다. 특히 사내대학의 기술대학 전환을 적극 유도한다. 주병철
  • [김삼웅칼럼]화해와 용서의 미학

    어느날 자공(子貢)이 “종평생(終平生)할 수 있는 준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떤 말이 있습니까?”묻자 공자는‘기여호(其如乎)하라’고 가르쳤다. “용서하라”는 말이다.기독교의 정신도 ‘사랑과 용서’다. 불교를 비롯해모든 종교의 정신이 표현의 차이일 뿐 ‘사랑과 용서’를 본질로 한다. 3월1일 5·18민중항쟁 부상자와 유족 220여명이 광주항쟁 당시 진압부대인제3공수특전여단을 방문해 ‘화해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이 부대는 광주항쟁때 도청 최종진압을 맡았던 부대다.그때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이 학살됐는지는 잠시 접어두자. 같은 날 전남·경북대생 220명이 상대편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기 위해 입교했다.이번 교류 학생들은 1년간 동일한 학칙을 적용받게 되고 기숙사 무료제공과 등록금 전액 면제혜택을 받게 된다.두 대학 학생들은 “영호남 화합디딤돌 될래요”라고 합창했다. 얼만전 영호남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모여 화합과 친선의 자매결연을 하고 언론사에 TK·PK·MK 등 지역갈등을 조장하는용어를 삼갈 것을 요청했다. 지난달 25일金大中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신안군 하의도 생가를 방문한 대구와 충북·강원지역 노인복지대학 노인들이 金대통령의 생가를 복원할 수 있도록 성금모금의 뜻을 밝혔다.노인들은 “하의도를 방문했으나 金대통령의 생가가 복원되지 않아 볼거리가 전혀 없어 실망스러웠다”며 관광객들이 섬을 찾았을 때 생가라도 보고 갈 수 있도록 복원을 위한 작은 정성을 모으기로 했다고 한다. 오는 6월에는 임진왜란 당시 한·일 양국 장군들의 후손 20여명이 서울에서 ‘화해의 만남’을 갖는다.이 행사에는 우리측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5대 후손과 서애(西涯) 유성룡의 14대 후손,일본측에서는 왜군 총지휘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어(宇喜多秀家)의 15대 후손과 경남 사천성 전투의 왜장 시마쓰 요시히로(島津修久)의 14대손 등이 참석한다.일본은 지난해 10월8일 金大中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처음으로 문서를 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金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통해 포용론과 화해정책을 펴고 있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판문점으로 ‘소떼’가 올라갔다.17명의 장기수도석방됐다.玄勝鍾전국무총리가 “나는 일본군 장교였다”는 부끄러운 과거를고백하면서 용서를 빌었다.李會昌한나라당 총재는 ‘상생(相生)의 정치’를제창했다. 화해와 공존의 정치를 의미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국가적으로나 국민에게 겪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다.망국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과정에서 숱한 죽임과 억압,대결과 갈등을 빚었다.이념싸움과 노선투쟁·지역대결과 내부갈등이 그치지 않았다.이런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찢기고 갈라지면서 원(怨)과 한(恨)을 남겼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친일파 문제를 비롯해 독재청산,의문사와 각종 의혹사건 등 청산하고 밝히고 정리해야 할 ‘역사의 빚’이산적해 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원수는 잊기 어렵지만은혜는 쉽게 잊는다는 말이겠다. 원도 많고 한도 많은 민족이기에 최제우 선생은 일찍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제창했던 것이다.20세기 원한의 매듭을 모두 풀고 새 천년을 맞았으면 한다.더구나 지금은민족의 대시련기다.민족적 시련과 대결을 화해와 용서로 풀고 남북과 동서가 공생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햇볕정책을 통해 북을 포용하고 지역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동서가 화합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새 세기,새 천년의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나갔으면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들,기득권자들이 참회할 것은 참회하고 용서받을 일은 용서받아야 한다.또한 정치인들이 적대의식과 지역감정에서 해방돼 화해와 용서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국민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네루)라고 하지 않던가.전직 위정자들을 포함,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에게 위해를 가한 인사들은 이 기회에 참회하면서 국난극복에 동참했으면한다. 물론 인간적 동정이나 용서와 역사적·사회적 평가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또 원칙없는 온정주의로 쉽게 잊고 용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그렇지만 화해와 용서는 인간의 환치할 수 없는 불변의 가치이고 삶의 미학이 아닐까. 주필 kimsu@
  • 아파트 시설보수-청소-도색등 싸고 횡령-뇌물수수 의혹

    경찰은 최근 관리비 착복 등 아파트 관리를 둘러싼 비리가 자주 발생함에따라 전국 아파트 관리실태에 대한 특별단속에 나섰다. 경찰청은 7일부터 오는 4월30일까지 55일동안을 아파트 비리 일제 단속기간으로 설정,아파트 관리 비리를 뿌리뽑도록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대형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관리소측과 주민대표들이 공모,관리비를 횡령하는 등 각종 비위가 은밀히 행해지고 있다는 주민들의 진정이 늘어나 이를 강력히 단속키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전기 정화조 등 시설보수비,청소 소독용역비,승강기 보수점검비,오물수거비 등 관리비 횡령 ◆아파트 가스공사,건물도색 등 공사입찰 관련금품수수 ◆주택 화재보험가입 등 보험가입 비위 등을 중점 단속한다. 단속에서 적발된 비리 관련자들은 관리비 등 착복·횡령의 경우 횡령 및 사문서 위조죄 등으로,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경우는 배임수재죄 등으로 처벌할 방침이다. 金炅弘 honk@
  • 2차 정부조직 개편안-주요내용(I)

    기획예산위원회가 7일 발표한 ‘정부운영 및 조직개편 시안’ 가운데 일선정부조직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될 ‘운영시스템 혁신’과 ‘주요 기능별 개편방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안 ●2안 ●3안 등으로 돼 있는 것은 경영진단조정위원회의 제시안으로 앞으로 공청회를 거쳐 정부안은 이달 안에단일안으로 결정된다.●공통은 제시안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적용되는 내용이다. ■운영시스템 혁신◆개방형 임용제도 확대●실·국장급 정원의 30%를 개방형 임용으로 전환,민간전문가와 공무원의 공개경쟁을 통해 뽑는다.전문성·중요성·민주성의 3대 원칙에 따라 계약직으로 선발한다.1년 단위로 업무실적을 평가하며 계약기간은 통상 3년으로 한다.단계적으로 과장급까지 확대한다. ●1안으로 올해 안에 모든 대상 직원을 2∼3차례에 걸쳐 뽑거나 2안으로 향후 2년간 공석이나 결원 발생시 충원한다. ◆공무원 채용제도 개선●5급 이하중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서 특별채용제도를 활성화한다. ●외무·행정고시를 통합,외무공무원을 통상 등 전문가로 육성하고 외교직공무원을 일반직에 통합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각 부처 의견을 반영해 고시 시험과목을 현실적으로 조정한다.6급 이하 공무원 채용시험 실시권 및 시험과목 결정권을 각 부처 장관에게 부여하는 등중앙집중식 채용제도를 분산형으로 전환한다. ◆부패방지제도 강화●정부기능 및 정부사업을 최대한 민간으로 이양하고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며 원스톱 서비스체제를 구축한다.또 민원업무의 전산처리 범위를 확대,공무원 재량권을 축소하고 행정정보 및 예산집행 공개,정책실명제 실시 등으로 국민에게 충실한 행정정보 공개청구권을 부여한다. ●뇌물의 실체,대가성 기준,선물과의 구분 등 뇌물의 개념을 구체화해 명확한 처벌 기준을 만들고 뇌물수수로 면직된 공무원은 일정기간 공직 진출이나 기업 취업 등을 제한한다. ●내부고발자 포상 등 인센티브를 강화한다.시민 감사청구제도를 활성화하고 시민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부정·비리 신고센터를 운영한다.몰수·추징금 일부를 장려금으로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성과관리제도 도입●가칭 ‘정부 성과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성과관리를 법제화한다. 전략계획서,성과계획서,성과보고서의 작성과 제출을 의무화하고 예산관련 규정 적용을 일부 면제,성과배당을 지급하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한다.성과주의 감사제도를 도입,감사를 규정 위주에서 성과 중심으로 전환한다. ●예산집행 성과를 국민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공시,국민세금에 대한 책임성을 확보하고 가치경영을 내실화한다.이를 위한 시범사업을 2000년부터 실시,단계적으로 도입한다. ◆복식부기제도 도입●경영성과 및 재무상태 파악을 위해 장기적·미래지향적 재정관리 기반을조성한다.공공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회계정보를 제공하고 정부 재정활동의 효율성·투명성·책임성을 높인다. ●중앙정부는 ‘정부회계제도 개선추진협의회’를 구성·운영한다.올해 안에 회계기준을 세워 내년중 특별회계에 적용하고 2002년 ‘예산회계법’을 개정한다.2003년부터 일반회계에까지 복식부기 적용을 확대한다. ●지자체는 올해 안에 광역·기초단체별로 시범실시하고 2001년에 ‘지방재정법’을 개정,2002년 모든 지자체로 확대 추진한다. ◆정보기술(IT)활용 제고●인터넷,CD­ROM 등을 통한 정보공개를 확대하고 조세·교육·공공입찰 등핵심 대민행정을 조기 전산화한다.전자결재를 의무화하고 2000년부터 부처간 전자문서를 교환한다.50인 이상 모든 공공기관은 2000년 말까지 웹 사이트를 개설하고 정보공개목록을 여기에 공개한다. ●부처별로 지식정보관리관을 지정, 지식정보 자원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활용 계획을 수립한다.부처별 업무연계,정보공유를 위한 시스템 구축을 단행한다.올해 안에 ‘정보자원관리법’ 제정을 추진해 정보공유 의무화,정보 공개,지식관리자 지정 등을 규정한다. ◆고객헌장제도 확대●공공기관의 서비스 기준·내용·제공절차 등을 공표하고 실현을 약속해 행정서비스의 품질을 보증한다.현재 시범시행중인 10개 분야의 고객헌장제도를 확대한다. ●행정서비스 제공방식을 공급 중심에서 수요 중심으로 전환하고 공직자의서비스마인드와 국민의 권리의식을 함양한다.검찰청,병무청,조달청,국립병원 등 대민서비스 기관은 고객헌장을 시행한다. ◆국민권리구제절차 개선●행정심판 및 조정·중재 기능 담당기관은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인사·예산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전문인력 육성,위원·상위직의 전원 개방직화를 추진한다. ●고충처리위원회와 법률구조공단은 조사·시정권고,법률상담·소송대리 등고유기능을 강화하고 부처로부터의 인사·예산상의 독립성을 보장한다.특히고충처리위는 자체 조사인력 확대,지원인력 감축,개방직 대폭 확대 등으로인력을 재배치하고 전문성을 강화한다.두 기관의 상담·안내기능 및 권리구제기능과의 연계 강화로 정부내 종합상담 및 안내센터 역할을 수행한다. ●지자체는 자체 고충처리위 설치를 추진하고,권리구제 기능을 수행하는 시민·사회단체를 정부의 권리구제 기능 연계 및 예산·세제상 지원 등을 통해 보호·육성한다.
  • 서울도봉구 직원 ‘불평불만 전시회’

    ‘계(係)제도를 폐지하고 팀제를 도입했으면 계장자리를 없애고 6급 담당주사도 고유업무를 갖고 팀원과 나란히 앉아야 하며 호칭도 ‘계장’ 대신 ‘주사’로 써야 한다’‘중요부서에 여성 배치를 늘리고 여성 휴식공간을 마련해달라’‘구내 매점이 시중가보다 더 비싸다’‘똥배를 제거하기 위해 부서별로 1년에 한번씩 체육대회를 열고 체력단련실을 만들어 달라’‘직원 정례조례 때 청장님의 일방적인 연설보다는 직원들의 질문을 받게 해달라’… 서울 도봉구(구청장 林翼根)가 직원 상하간의 언로를 확보해 활기찬 직장분위기를 만들고 많은 직원들이 공감하는 사항을 구정에 적극 반영하기 위해지난달 22일부터 5일까지 1,032명의 구 직원들을 대상으로 접수받은 불평불만들이다.구는 접수된 불평불만 전시회를 8일부터 13일까지 구청 본관 지하구내식당에서 갖는다. 접수된 불평불만 116건 중 복지후생 관련이 39건으로 가장 많았고 조직개편이나 구조조정 관련도 24건이나 접수됐다.접수된 내용은 단순한 문서 뿐 아니라 콩트,만화,소설 등 다양한 형식이많아 눈길을 끈다. 접수된 불만중에는 감사실이 남자직원들의 전유물이냐는 항변도 있었다.남자 7급은 ‘주임님’이라 부르는데 여자 7급은 그렇지 않다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꼬집은 의견도 접수됐다.IMF체제 전에 시행됐던 토요전일근무제를 다시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건의도 접수됐다. ‘7급직원을 승진시켜주지 않고 6급자리에 앉히는 것은 불만이다’‘숙직실이 너무 추워 동태가 됐다’‘구내식당 선반이 낮아 머리를 자주 다친다’‘직원이 구청장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을 수 있게 핫라인을 개설해 달라’는내용도 있었다. 朴鍾龍 기획예산과장은 “마음속에 묻어놓았던 불만을 털어놓고 일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이 제도를 시행했다”면서 “직원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아 정기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 (3) 경제개발 5개년계획(上)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단군 이래 첫 종합국토개발계획이었고 5·16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이 사업은 더욱 큰프로젝트의 서막일 뿐이었다.‘경제 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의 청사진은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년)에 집약돼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면 흔히 朴正熙정권의 전유물처럼 여긴다.그 전에는 우리 사회에 경제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거나 있다손치더라도 경제관료들이 이를 구상하고 기획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들 믿는다.이는 쿠데타세력이 5·16 직후 일관되게 이같은 주장을 편 데다 박정희시대 18년 동안 모든공식적인 문서를 저들 뜻대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때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장면정부는 ‘완성된’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갖고 있었다.다만 발표 직전 쿠데타를 당해 국민에게알릴 기회를 놓쳤을 따름이다. 장면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일부 수치만 바뀐 채 골격이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고,군사정권은 이를 자신의 작품인 양발표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따라서 60년대 경제성장의 밑그림은 장면정부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이 처음 등장한 때는 자유당정권 말기였다.李承晩정권의 강압정치에 실망한 미국은 1957년 중반 金顯哲 부흥부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아야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통보했다.마침 국내의 일부 젊은 경제관료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구미에서 경제·행정 부문 선진이론을 배우고 귀국해 행정부의 실무책임자로서 국가 발전에정열을 불태우던 그룹이다. 劉彰順(미 헤이스팅스대) 李漢彬(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車均禧(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丁渽錫(미 밴더빌트대 경제학과) 崔昌洛(〃대학원 경제학과) 鄭韶永(미 워싱턴주립대 경제학박사) 등이 대표적인 이들로 모두 훗날경제부서 장관을 역임한다. 李起鴻(77·전 월간 ‘코리아 비지니스 월드’발행인)은 당시 부흥부 기획과장이었다.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석사인 그는 세계적인 석학 넉시 교수에게서 경제개발 이론을 배웠다.넉시는 ‘경제개발’ ‘개발도상국’ 같은 개념을 처음 도입한 학자이다. 미국이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요구하자 이기홍은 밤샘을 거듭하며 그 개요를 만든다.그러나 이때의 경제개발안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묵살된다.57년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함께 경무대로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필요성을설명하자 이승만은 “그것은 스탈린 사고방식 같은데….불구대천의 원수인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한다.(이기홍 회고) 이후 宋仁相이 부흥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은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추진된다.宋장관은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세계은행 부설 경제개발연구소(EDI)에서 연수를 받은 터라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회고록에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경제발전 목표를 설정하고,그 달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宋장관과 이기홍과장은 미 대외원조처(USOM) 간부들과 협의해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할 조직인 산업개발위원회(EDC)를설립했다.세계적으로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통용되는 기구지만 국내에서는 ‘경제개발’이란 개념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산업개발로 이름붙였다. 산업개발위원회(산개위)는 58년 4월1일 부흥부장관 자문기관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송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다.위원은 22명이었지만 고문과 보좌요원을 두도록 해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을 두루 끌어들였다.비용은 전액 미국에서 제공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예컨대 부흥부의 연간 운영예산이 9,600만환인 데 견줘 산개위는 6,000만환이었다.봉급도 높아 연구원 평균 월급이국무위원(4만2,000환)보다 많은 5만환 정도였다. 산개위는 59년 봄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년)을 국무회의에 내놓는다.그러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던 이승만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심의조차 하지 않다가 60년 4월15일에야 승인한다.마산에서 金朱烈군의 시신이 발견돼 2차시위가 일어난 지 나흘 뒤,4·19혁명이 일어나기 나흘 전이었다.아마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내세운 듯하다.자유당정권이 이처럼 경제개발에 늑장을 부린 데 대해 이한빈은 그의 논저에서 “한국 사회를위하여 커다란 불행이었고 한 토막의 역사의 풍자”라고 비판했다. 4·19혁명∼許政과도정부∼장면정부 출범이라는 격변 속에서도 산개위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하는 본연의 임무를 꿋꿋이 수행했다.장면정부는 출범한 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60년 9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부시책으로 채택한다고 공표했다.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자유당정권의 ‘3개년계획’을 토대로 하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닌 별개의 것이었다.산개위에서 ‘3개년계획’과 ‘5개년계획’을 작성하는 데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金立三전경련고문(77)의설명은 다음과 같다. “거시적인 면에서 3개년계획은 산업 각 부문을 고루 발전시킨다는 ‘균형성장이론’에 토대를 둔 반면 5개년계획은 특정 부문에 투자를 집중해 전체적인 성장을 이끌어가는 ‘전략 부문 중점투자’이론을 채택했다.작성 방법도 전혀 달라 5개년계획은 노동력은 풍부하면서 자본이 부족한 나라에 적합한 새 모델을 적용했다.” 자유당정권의 계획과 장면정부의 계획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를 金고문은 “선진이론을 꾸준히 연구해 우리 실정에 맞게끔 다듬어 나간 데다 정부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개위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새로 만드는 동안 장면정부는 경제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60년 9월 장면총리 명의로 크리스천 허터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에이드 메모아르(일명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는 당시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개발 계획 당시 부흥부 기획국장 李起鴻씨 李起鴻씨는 1956년 12월 부흥부 기획과장으로 출발해 장면정부에서는 부흥부 기획국장을 역임했으며 63년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공직을 마감했다.그 7년동안 경제개발 계획의 큰 틀을 짜고 방향을 제시하는 주역 노릇을 했다. 61년 5월 기획국장인 그는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金泳祿 재무부 이재국장과 함께 워싱턴에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미 정부에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다가 5·16쿠데타 발생 소식을 들었다. 李전차관보는 “그해7월 張勉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돼 있었다”면서 회담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미국측 의사를 확인해 보려고 실무교섭단으로 미리 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관리들이 우리가 가져간 제1차 5개년계획 시안을 보고 ‘구매품목 표’라고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상당한 호의를 갖고 격려해 주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귀띔을해줘 다시 한번 장면정부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李전차관보는 “5개년계획이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집행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아직 없다”고 개탄하면서 朴正熙정권의 왜곡사례를 들었다. 60년대 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미 하버드대의 콜 박사와 합작으로 한국경제발전사를 기술했는데 5개년계획의 작성 배경이나 장면정부의 경제시책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62년 1월 군정이 선포한 5개년계획의 구성과 방향만을 논했다는 것이다. 그 후 80년대에 콜 박사를 자주 만나게 돼 “장면정부의 5개년계획을 포함하지 않고서 어찌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그러자 콜 박사가 “5개년계획이 장면정부에서 상당히 진척된 것은 알지만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꾸로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공격하더라는 것이다. 李전차관보는 “국가연구기관인 KDI가 집권층인 군 출신들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테지만 학문적 양심을 저버린 것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5개년계획을 박정희정권 때 시작한 것으로 아는 데는 나처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이크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李전차관보는 경제개발계획,국토건설사업 등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자세한 소개도 곁들인 회고록 원고를 최근 마무리지었다.그 내용은 ‘경제 근대화의 숨은 이야기’(보이스 간)라는 제목으로 이달 안에 출판될 예정이다.李容遠
  • [이제는 신기술로 승부건다](1)-’사이버코리아21’ 구상

    南宮晳정보통신부장관이 2일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한‘사이버 코리아 21’은 실업문제까지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한국판 정보화 뉴딜정책이다. 실제로 현재 실태와 4년뒤 예상할 수 있는 정보화 기반 정도를 보면 신지식산업 분야에서만 100만명의 새로운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는 전망은 충분히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96년부터 정보화촉진 기본계획을 수립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으나 국가·사회 정보화 수준은 미국과 일본은 물론싱가포르와 대만 등에 크게 뒤지고 있다. 정책이 제대로만 이뤄진다면 정보화의 척도로 볼 수 있는 전자상거래만도지난해 550억원에서 2002년에는 60배가 넘는 3조8,000억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인터넷 이용자 수는 300만명에서 1,000만명으로 증가해 고객들이 그만큼 많아지는 셈이다. 특히 신지식산업의 신경조직이 될 인터넷 망의 속도가 지금보다 무려 100배 가량 빨라진다는 것은 4년뒤 급변한 사회의 일단을 미리 점쳐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전체적으로는 현재 22위에 머물고 있는우리나라의 정보화 수준을 2002년에는 10위권으로 올리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2002년부터 정부의 모든 문서를 전자결재하겠다는 계획은 정부가 정보화에앞장서겠다는 의도다.지금은 51개 행정기관중 45개 기관이 전자문서시스템을 도입했으나 전자결재 시행률은 미미한 수준이다. 정보화를 통해 국가전반의 생산성 향상에다 실업난까지 해결하겠다는 목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그러나 정부는 기반조성을 위한 자금조성이문제지 미국이라는 확실한 선례가 있는 만큼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90년 초부터 지식 정보화시대 도래에 대비해 정보고속도로 구축과 작고 효율적인 전자정부 실현 등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그 결과 미국은지난 6년 동안 사회의 발전적 변화와 함께 1,700만개의 새 일자리를 만들고28년 만에 최저실업률(4.4%)을 달성했다. - 육성 필요성 ‘지식기반산업 신기술 육성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식기반산업의 정의와 특징에 잘 나타난다. 지식기반산업이란 부가가치 창출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의 활용도가 높은 산업을 말한다.특징은 공해가 거의 없으며 고도의 전문성과 창의성에 바탕을둔다는 점이다. 정부가 실업대책의 무게추를 지식기반산업 신기술 육성에 두는 것은 우리산업구조의 낙후성이 지금의 실업사태를 불러온 원인중 큰 몫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경제는 60년대 정부와 대기업 주도형 성장전략으로 급속한 양적 성장에 성공했다.그러나 80년대 말 노동력 위주의 경공업이 후발개도국의 추격으로 경쟁력을 잃은 데다 중화학공업은 과잉투자와 가격하락으로 경영악화를 겪기 시작했다.90년대 들어 지식과 정보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쳤지만 적응에 실패하면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정부는 지식기반 고부가가치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21세기 국제분업화 경쟁에서 우리경제의 생명줄인 수출을 늘리고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이루기 위해서다. 산업인력 수급을 살펴봐도 그동안 경제성장의 원천이던 ‘노동과 자본’이‘기술과 지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88년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2.5%였으나 97년에 25.7%로,고용비중 역시 27.8%에서 21.3%로 하락했다. 반면 85∼95년 지식기반산업의 부가가치는 연평균 22.5% 늘었다.또 같은기간 고용증가율은 7.1%로 기타산업 증가율(2.4%)보다 훨씬 높았고,전체고용의 9.1%를 차지했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21세기를 대비한 산업구조 개편’이란 보고서에서 지식기반산업이 성공적으로 발전하면 실업률은 해마다 0.32%포인트 낮아지고 GDP성장률은 해마다 0.64%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어떤 것일까.최근 작가 宋友惠씨는 한 월간지 기고를 통해 “그동안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알려져온 ‘대한독립선언서’(사진)는 사실은 대한독립의군부가 1919년 3월 중순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한것”이라며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선언서가이보다 앞선 최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宋씨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선포일자인 ‘단군기원 4252년 2월’은 음력을사용한 것으로 그 시기는 양력으로는 3월 중순 이후”라고 주장했다.宋씨는증거자료로 ‘독립신문’의 기자가 대한독립선언의 현장인 지린을 찾아가 당시 독립선언에 참가했던 朴贊翼씨 등을 만나 취재한 기사를 공개했다.宋씨가 공개한 1919년 10월 7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대한독립선언은 박찬익 등이 1919년 3월 중순 발기하여 선포한 것으로 나와있다. 한편 그동안 ‘대한독립선언서’를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주장해온 趙恒來평택대 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일자를 음력으로 본 것은 공문서 등에서 양력을 이미 사용하던 당시의 추세와 맞지 않다”며 “박찬익의 자서전에도 대한독립선언서가 2·8,3·1독립선언서보다 앞선다고 나와있어 宋씨의주장은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鄭雲鉉
  • 3·1운동-臨政 수립 80돌/총독부,해외 3.1행사까지 탄압

    일제하 조선총독부는 해외 독립진영에서 개최한 3·1절 기념행사를 극비에감시,탄압한 사실이 총독부 문서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본사 취재팀이 최근 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 단독입수한 ‘국외(國外)에서소위 독립선언 기념일의 상황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문건에 따르면,일제는조선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3·1의거 기념행사를 치밀하게감시,탄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정(大正)14년(1925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명의로 작성된 이문건(高警 제1090호)은 총 20페이지로 구성돼 있으며 당시 일제가 중국·만주·노령(露領.러시아령)·미국 등지에서 열린 3·1의거 기념행사를 철저히감시,분석한 것으로 나와있다.총독부는 문건에서 “재외 불령선인(不逞鮮人. 독립운동가)들은 매년 3월 1일을 소위 독립기념일로 하여 축하연 또는 기념식 명칭으로 집회를 가져왔다”면서 “금년에도 지나(支那.중국) 각지에서행사를 가졌는데 그 규모는 점차 감퇴하고 있다”고 밝혔다.또 문건에는 각지역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의 행사일정·참가자 인원·주요 발언내용 등 세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인이나 한국인 밀정을 동원했던 사실도언급돼 있다. 3·1의거 6주년을 맞아 상하이임시정부와 의정원은 이날 오전 10시 상하이시내 포석로(蒲石路) 신민리(新民里) 제14호에서 朴殷植국무총리,崔昌植의정원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가졌다.청년동맹회는 별도로 정오부터 망지로(望志路) 소재 사무실에 모여 기념식을 갖고는 “애국선열의 뒤를 따라 맹진(猛進)하자”고 서약하였다.또 상하이교민단은 오후 3시 민국로(民國路) 침례교회 예배당에서 500여명이 모여 별도의 집회를 가졌다.참석자들에게는 청년동맹회가 제작한 ‘3월 1일’이라는 ‘불온유인물’을 나눠주어 독립의식을 일깨웠다.이날 일경측은 참석자들이 행사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던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중국인 밀정 정자향(程子鄕)을 행사장에 침투시켜 애국인사를 체포하는 장소로 악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같은 날 난징(南京)에서는 조선인 70여명이 동명(東明)학원에 모여 기념식을 가졌는데,鮮于爀은 연설을 통해 “분투 7년이지나도록 독립을 쟁취하지못한 것은 유감”이라며 “향후로는 (일제)파괴사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베이징(北京)에서는 한교(韓僑)동지회와 고려학생회 공동주최로 북경대학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서도 ‘말썽’이 생겼다.서울출신 왕동춘(王桐春.본명은 徐昌鉉 또는 徐浩錫)이 일제의 밀정혐의를 받고 행사도중에퇴장당한 것. 또 간도(間島)지역에서는 이날 독립진영에서 대규모 시위와 함께 일본영사관 습격과 일본인 요인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돼 일·중 양국경찰이 대거 동원돼 삼엄한 경계를 편 사실도 나와 있다.중국지역에서는 이밖에 텐진(天津)·지진(吉林)등에서도 행사가 열렸다.천진에서는 당일 오전9시 교민단장 金政·李壇海·申聖文등 3명이 태극기로 장식한 자동차를 타고 미리 준비한 인쇄물 3천 매를 영·불·독 등 각국 조계(租界)지역에 살포하였다.미국 하와이에서는 당일이 일요일이어서 하루 미뤄 3월 2일 교민단 등에서 기념행사를 가진 것으로 나와있다. 한편 총독부는 이 문서를 일본 내각 각부서와 해외 공사관,법원·경찰부서,각 도지사 등에게 발송하였다.이는 총독부가 해외 독립진영과 교민들의 3·1절 기념식을 특별히 감시,탄압하기 위해 일제 공권력 기관을 총동원했음을보여주고 있다. 韓詩俊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일제가 해외에서 열린 3·1의거 기념행사를 감시,탄압한 것은 이를 계기로 조선인들이 또다른 ‘거사’를 할 가능성을 우려한 때문”이라며 “3·1정신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투쟁의 정신적지주였다”고 평가했다.그러나 이 문건에는 행사당일 특별히 독립진영과 일경측이 충돌한 사례는 언급돼 있지 않다.이는 대부분의 기념행사가 옥내에서 치러진데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 대규모 집회나 시위는 불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鄭雲鉉 jwh59@
  • 대한매일을 읽고-국한문 병용 여론조사 결과 간과 말아야

    24일자 1,6면에 국한문 병용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가 실렸다.대한매일이 (주)유니온조사연구소에 의뢰,지난 21일과 22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를 통해 실시한 조사 결과 62%가 국한문 병용을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국한문 병용방법으로는 한글을 쓰고 괄호안에 한자를 쓰는 병용방식을 대다수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지금 정부가 추진중인 공문서나 도로표지판의 한자 병용방안을 한글전용단체 등에서는 정부 어느 부처나 한글·한자 병용을 추구하는 단체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다. 국한문 병용에 따른 국민 전체의 실익과 효용성 및 국제성을 따져보아야 할 것이며 21세기를 맞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비록 20세이상을 대상으로 한 조사이지만 ‘국한문 병용에 찬성’이라는 62%의 의견을결코 간과해선 안된다고 본다. 정경내 [모니터·지방공무원]▒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반론이나 주장 또는 사진·만화 등을 보내주십시오. ▒주소:우100-745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25 대한매일 특집기획팀▒전화:(02)721-5252▒팩스:(02)721-5269 ▒PC통신ID: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공통 go sel▒E­mail:opinion@daehanmaeil.co.kr@
  • 3·1절에 보는 베델의 한국사랑

    1904년 창간된 순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裵說)과 신채호등 항일언론인들이 펼친 구국운동이 TV영상을 통해 조명된다.3·1절 80주년을 맞아 KBS 1TV ‘역사스페셜’(토 오후 8시10분)은 ‘3일간의 재판-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를 특집으로 내보낸다.재판은 AP통신에서 특파원을 보낼정도로 국제적 화제를 모았다.이 프로는 90여년 전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3일동안 계속된 공판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시작된다.‘국내 최초의국제재판’이었던 당시 재판의 피고는 베델이었고 죄목은 ‘한국민 선동죄’였다. 이에 앞서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20일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직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리자 같은달 27일 이를 영문으로 번역,호외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소리를 대변했다.당시 1만 3,256부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영문판까지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여론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베델은 영국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신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베델이 한국에 온 것은 1904년 2월.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자격이었다.‘경운궁의 화재’를 특종보도했던 그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등 지사적 언론인들과 자주 접촉하다 스스로도 항일 정신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베델의 흔적을 추적한 결과확인됐다.자료들은 베델의 ‘처리’를 놓고 영·일 간에 빚어진 외교적 마찰과 베델의 한국 밖 추방결정 과정 등을 알려준다. 담당연출자 김형석PD는 취재과정에서 베델의 한국사랑과 선각자들의 활동에 “감탄했다”면서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프로제작 때 가장 신경을 기울인 부분은 법정의 재현 장면.법정에서 시작해 법정에서 끝나기 때문에 자칫 ‘재미’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이를 위해 버츄얼 스튜디오(가상공간)에서 진행자가 3자적 관점으로 재판을지켜보는 연극적 방식을 채택,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피고석의베델은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연기자 대신 확대한 사진을 활용했다. 베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도 공개된다.1909년 베델이 서울에서 숨지자 한국인들이 보낸 조문편지 묶음 등이 그 것.편지에는 유림과 농부,동경유학생 등 각계각층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있다. 취재 뒷이야기도 많다.베델의 며느리 도로시여사(82)는 시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도로시여사는 당초 ‘촬영 절대불가’를 조건으로 취재에응했다. 이에 따라 김PD는 카메라 뚜껑도 열지 못했으나 이튿날 도로시여사의 자녀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많이 알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도로시여사를 설득해 비로소 촬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PD는 “베델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표현외에 달리 형언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許南周yukyung@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