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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협정차관 “정부 계산착오 3억弗 날렸다”

    한일협정차관 “정부 계산착오 3억弗 날렸다”

    지난 17일 공개된 한일협정 회담 자료와 관련된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당시 이병철 삼성회장이 우리 정부의 대일 청구권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밝혀져 주목받고 있다. 이 회장의 고언은 상업차관을 6억달러로 늘릴 수 있었지만 우리 정부가 1억달러에 ‘만족’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일회담 당시의 정황은 이 회장이 1985년 펴낸 회고록 ‘호암자전’ 152∼157쪽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민간인이었던 이 회장이 정부간 협상에 ‘간여’하게 된 것은 김동조 당시 주일대사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한비공장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 도쿄에 머물던 64년 당시 김동조 주일 대사가 찾아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로 추진되고 있는 대일청구권을 무상 6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 1억달러로 늘리면 어떻겠느냐.”고 상의해 와 “무상·유상 차관은 어렵겠지만 일본 수출입은행이 관장하는 상업차관은 증액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이에 김 대사는 상업차관을 늘리는 쪽으로 힘을 써 달라고 했고 이 회장은 친분이 있던 우시바 신타로(牛場信彦) 외무성 외무심의관과 회동을 갖게 된다. 이 회장, 우시바 심의관, 김봉은 당시 한국은행 도쿄지점장, 김 대사가 골프를 마친 뒤 도쿄의 유명한 복요리집인 ‘후쿠겐(鰒源)’에서 식사를 하며 우시바 심의관에게 상업차관을 6억 달러로 늘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미온적이었던 우시바 심의관은 이 회장이 인도, 파키스탄에 제공된 일본의 상업차관액을 근거로 조목조목 따지자 증액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은 상업차관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다. 이 회장은 이후 김 대사를 만났더니 “본국에서 상업차관 증액보다는 유상자금 2억달러의 이자를 인하하고 상환기한을 15년에서 25년으로 늘리는 편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려 상업차관 증액은 추진않기로 했다.”고 털어놔 크게 실망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출 때 생기는 수천만 달러의 작은 이익 때문에 국가 백년의 큰 이익을 놓친다. 외자를 도입해 공장을 세우고 빚을 갚아 나가면서 한국경제를 키워 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 상업차관을 늘리거나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방법중 하나를 택하라는 일본측의 답변을 얻어냈지만 결국 대일청구권은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쪽으로 결정됐다. 호암자전은 상업차관이 1억달러였다고 밝혔지만 최근 공개된 한일회담 문서에는 ‘3억달러 이상’으로 조정된 것으로 명시돼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증액 가능성이 높았던 6억달러에 비해서는 3억달러가 모자라는 액수다. 이 회장은 “당시 6억달러는 오늘날(85년) 6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만약 상업차관이 늘어났다면 한국경제의 성장은 한결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한일회담이 성사된 뒤 우시바 심의관을 만날 때마다 “상업차관을 6억달러로 늘려주지 않아 한국경제 발전이 늦어졌다.”며 타박을 주자 “일본 같으면 경제인 말에 귀를 기울였겠지만 한국은 모든 일이 관리들 말대로 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오히려 ‘역공’을 당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것보다 상업차관 증액이 절실하다는 이 회장의 주장은 당시 한비공장 설립 자금 등이 중요했던 이 회장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한일협정 직후인 66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1주일간이나 일본에 머물면서 50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도입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 이후 외자도입에 애를 먹은 것에 비춰 보면 그 타당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정일영 당시 외교부 차관은 24일 “실제 그런 논의가 있었고 당시 정부도 (상업차관을)3억달러까지 제안했었다.”면서 “국내에서도 ‘금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우리는 임금이 낮으니 벌어서 갚자.’는 주장이 워낙 팽팽했지만 지금의 눈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밝혔다. 정 전 차관은 한일협상이 한창이던 63년 겨울, 보리밭에 뿌릴 비료 500만달러어치를 일본에서 외상으로 들여오기도 힘들 정도로 당시 ‘외자’가 절실했다는 점에는 동감을 표시했다. 이지운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여야 외교문서 공개 신경전

    정부의 잇단 현대사 관련 외교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여야 신경전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한·일 외교협정 문서에 이어 20일 ‘박정희 저격시도 사건’ 파일이 열리자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옥죄기’라고 판단, 비판에 나섰고 열린우리당은 과거사 청산임을 강조하면서도 박 대표와 연관돼 있는 점을 감안해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임채정 의장은 21일 “어느 정파나 개인을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뜨리자는 취지가 아니다.”면서 “역사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특정 정파를 염두에 둔 작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가 하려는 것은 역사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이지 좁고 낮은 차원에서 옹졸하게 접근하는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행정자치위 열린우리당 간사 박기춘 의원도 “특정인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접근하지 않고 진정한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이날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역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면 성공도 못하고 용서받을 수 없다.”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 김 원내대표는 ‘정치적 악용’을 경계하는 원론 차원의 비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임시국회를 앞두고 과거사기본법 협상을 여당에 유리하게 조성하려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고, 일본과 수교협상을 하는 북한에 유리한 입장을 제공해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고 직접 화법으로 공격했다. 여야의 신경전은 2월 임시국회에서 다룰 ‘과거사 기본법’과 맞물려 파장이 커질 전망이다. 여야는 지난해 말 주요 쟁점에 대해 거의 합의했으나 조사 범위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따라서 조사 범위에 최근 공개된 사건을 포함할지를 놓고 여야가 마찰을 빚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열린우리당은 과거사기본법에 ‘한·일 외교협정’은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겠다는 태세지만 ‘박정희 저격시도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박 의원은 “한나라당에 충분하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 한·일협정이 조사 범위에 들어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행자위 한나라당 간사인 이인기 의원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사례를 조사한다는 과거사기본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 사안이어서 다루기 힘들 것”이라면서도 “역사에 노출된 사안이라 피할 수는 없기에 상임위에서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밝혔다. 이종수 박준석기자 vielee@seoul.co.kr
  • “한·일협정 재협상해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신경하)와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의장 스즈키 레이코)가 최근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된 것과 관련해 21일 공동성명을 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청산과 정립이야말로 이후 한국과 일본의 정상적인 관계발전과 현재 북한과 일본 사이에 교착된 북·일 수교문제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한국정부는 한·일협정의 재협상을 추진하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재정의 잘못된 지출에 대해 보상책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민족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립을 위해 친일관계법등 과거사 청산에 관한 법을 조속히 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촉구했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진정한 과거 청산과 한·일협정의 재협상을 받아들일 것과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동북아시아 전체의 공생이라는 큰 차원에서 역사 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DJ납치사건과 거래 가능성?

    20일 공개된 ‘문세광 사건’ 외교문서에 따르면 조총련과 북한의 개입 혹은 배후조종 여부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견해 차이가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측은 사건의 배후에 조총련과 북한이 있다고 밝혔고, 일본측은 문세광의 단독 범행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 특별수사본부는 1972년 9월5일께 조총련에 포섭돼 반정부 활동을 시작한 문세광이 1974년 5월5일 북한의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대통령 저격’ 지령을 받고 범행했다고 밝혔다. 반면 일본측은 문세광이 1973년 9월께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박 대통령 암살을 결심한 뒤 범행했다는 것이다. 양국의 입장 차이는 범행 동기를 비롯해 준비 및 실행과정을 보는 데서도 확인된다. 한국측은 문세광이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 서(西)지부의 김호룡 정치부장을 만나 공산 사상에 빠져든 뒤 김호룡의 선동으로 대통령 저격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반면 문세광이 순전히 개인적으로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는 게 일본측 결론이다. 또 한국은 김호룡이 73년 1월과 74년 7월 각각 50만엔,80만엔의 자금을 문세광에게 건넸다고 보지만 일본은 문세광이 스스로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측의 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김호룡에 대해 강제수사를 하지 않았고 다른 공범으로 지목된 요시이 미키코도 여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가 보석으로 풀어줬다. 양국은 한국의 김호룡 신병인도 요구를 놓고도 마찰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실무 부처인 외무부 동북아 1과는 김호룡의 신병인도 요구가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계될 수 있음을 고심한 것으로 밝혀 졌다. 양국간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아 특정인에 대한 법적·외교적 신병 인도가 불가능하고 신병 인도를 고집할 경우 일본이 1973년 8월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신병인도를 요구할 경우 난감하다고 판단한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공개 문서와는 다른 시각도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정부가 이듬해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자 박 정권이 문세광의 공범으로 김호룡을 지목하면서 ‘맞불작전’에 나섰다는 추측이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292캐럿 다이아 목걸이는…

    ‘초대형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어디로 갔을까. 20일 공개된 ‘문세광 사건’ 관련 문서에는 두 가지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육영수 여사 빈소에 접수된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행방과 함께 문세광이 국내에서 보여준 ‘통 큰’ 씀씀이다.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 광복절 행사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운명하자 정부는 국민장으로 치르며 당시 외무부를 통해 재외공관에도 일제히 빈소를 설치하고 조문객을 맞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라 홍콩 등 각국 영사관에 빈소가 마련됐다. 그런데 8월27일 주홍콩 총영사는 ‘재홍콩 교포인 우영순 여인’으로부터 ‘가로 3㎝, 세로 4㎝’ 크기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1개가 조의용으로 접수됐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는 시중에서 거의 유통되지 않는 292캐럿 정도의 엄청난 크기로서 현 시가로 수백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와 함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대통령 비서실로 발송하면서 ‘감사 서한과 함께 반환 조치하시기 바랍니다.’고 요청했다. 이를 대통령 비서실장은 다시 ‘물품을 반환코자 하오니 당해 지역 주재 영사로 하여금 본인에게 반환토록 하고 그 결과를 회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그 뒤 ‘주홍콩 총영사는 동 물품을 수령했으며 우영순이 현재 서울에 체류 중이므로 홍콩에 귀환하면 전달 조치 예정임을 보고하여 왔으므로 알려드립니다.’라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이렇게 ‘홍콩→서울→홍콩→우 여인(?)’을 거쳤다. 제일감정원의 한 보석감정사에 따르면 “이 정도 다이아몬드라면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이라며 실존 자체를 의심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이 목걸이를 우영순에게 최종 전달했다는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아 그 여부와 이후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문세광이 그 해 8월6일 대한항공편으로 일본에서 입국, 조선호텔에서 투숙하며 15일까지 체류하는 열흘 동안 보여준 막대한 씀씀이는 소설 속의 한 대목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확인됐다. 문세광은 당시 광복절 행사장으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대형 포드 차량 운전기사인 황모씨에게 당시 돈으로 1만원을 팁으로 주는 등 서울 유흥가와 청평을 돌며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 행사를 하며 돈을 물 쓰듯 쓴 것으로 드러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韓日 한달간의 외교 냉전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韓日 한달간의 외교 냉전

    ‘문세광 사건’은 한·일 관계를 단교 직전 상황까지 내몰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일본의 미온적인 수사협조 등 ‘성의 부족’에 분개했다.8월29일자 외무부 정보보고는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이 ‘과실 살인’인데도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로 무리한 법 적용을 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日, 對韓접촉 중단 게다가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감정으로 양국관계가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들도 대(對) 한국 상담(商談)을 유보했다. 외무부는 “일본의 지원없이 한국경제가 지탱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오만한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외교부는 “외교 최우선 과제로서 (주재국에) 일본을 압박해줄 것을 요청하라.”고 재외공관에 전문을 보낸다. 앞서 주일 한국대사는 8월24일 다나카 총리를 찾아가 일본의 적극적 수사협조 등을 촉구하는 김종필 국무총리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부는 다나카 총리의 답신에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와 조총련에 대한 철저한 수사 등의 언급이 포함될 것을 기대했다. ●韓, 美에 압력행사 요구 그러나 주한 일본대사는 9월8일 외교부 장관을 예방,“특사를 보내면 사죄 사절이란 인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9월9일 김종필 총리에게는 “사죄특사의 파견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친서에 다른 현안을 언급하는 것이 어떠냐.”고 ‘황당한’ 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9월4일 함병춘 주미대사가 미 국무부 하비브 차관보를 비밀리에 만난 데 이어 김동조 외교부장관도 5일 에릭슨 주한미국 대사대리를 만나, 일본에 영향력 행사를 부탁한다. 한국 정부의 태도가 강경하자 미측은 우려를 표시했다. 하비브 차관보는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한국정부 입장을 브리핑하겠다.”면서도 “미국은 모두 우방인 두 나라가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조용히 일본측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조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9월10일 유정회 소속 최영철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일본정부로부터 11일까지 아무 회답이 없으면 12일에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최후 경고를 일본에 발한 뒤 주일대사와 외무장관의 사표를 받든가 하는 조치를 하고, 다음에 단교조치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 “단교땐 한국 안보 위험” 이에 주미대사관 박근 공사는 12일 하비브 차관보를 만나 거듭 같은 요청을 하지만, 하비브는 격앙된 어조로 “미국은 할 만큼 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박 공사는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정부는 다시 하비브에게 전화를 걸어 “몇시간 내에 요구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예정된 코스’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한국의 방위는 일본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만큼 한·일 관계가 깨지면 한국 방위도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가 돌아왔다. 하비브는 한국의 조총련 규제요구는 비합리적이라며 일본의 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결국 한·일협정의 주역이었던 시나 특사 일행이 방한해 답신을 전달하면서 한달 가까이 지속된 한·일 외교갈등이 봉합된다. 역시 이 과정에도 한·일협정의 배후에 있었던 미국의 중재가 있었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與 “과거사규명 의미” 野 “정치적악용 경계”

    ‘문세광 사건’ 공개와 관련, 정치권은 바람직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 정치적 해석을 자제했다. 한나라당은 정치적 이용을 경계했다. 열린우리당은 공식논평을 내지 않는 등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많은 의원들이 ‘공개’ 자체에만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며 ‘단교’까지 언급한 데 대해 “유신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면서 냉혹하게 평가했다. 유선호 의원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됐다.”며 “올바른 과거사 정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과거 자료들이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재건 의원도 “공개문서에 대한 의미 해석은 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며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쟁의 수단 삼으면 안돼” 일부 강성 의원들은 유신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가했다. 정봉주 의원은 “그동안 북한의 사주로만 알려졌는데 이번 공개로 단독 범행의 가능성도 알려졌다.”면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장영달 의원도 “문세광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면서도 “당시 정부로서는 북한 세력이 준동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유신정권 강화에 유익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한·일협정 문서 공개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특히 박 대표의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해 신중하게 접근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문서공개는 국민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로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준과 원칙 아래 반성하고 개선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 해석이나 의도에 대해 여야 모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적 의혹·불신 씻어야” 6·3동지회 회장 이재오 의원은 “국민이 알 것은 알고 넘어가야 한다.”면서도 “특정 세력의 의도에 따라 선별적으로, 일부만 공개하는 것은 국민적 의혹과 불신만을 사게 되는 만큼 동일한 기준하에서 과거사 관련 문서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내 보수성향의 의원모임인 자유포럼 회장인 이방호 의원도 정치적 악용을 경계하면서 “과거 역사의 진실을 조명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박준석 박지연기자 pjs@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문세광사건’ 후폭풍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문세광사건’ 후폭풍

    ‘문세광 사건’은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 변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제 외교가에서 궁지에 몰렸던 상황을 반전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 측면이 강했다.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은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 국회 내무위원장에게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15년 남짓 누려온 ‘대통령 오른팔’ 지위도 함께 내줬다.‘DJ 납치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뒤를 이어 등장한 신직수 중정부장 역시 이 사건으로 문책 경질당했고 그 후임으로 바로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의 주역 김재규가 중정부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박종규를 대체한 차지철 경호실장은 별도의 사설 정보라인을 가동하며 중정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청와대와 김재규 중정부장의 보고 체계를 무력화시키며 그를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내며 ‘10·26’의 불씨를 모락모락 지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이들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년 뒤 자신과 정권의 몰락을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당시 수사 맡은 김기춘의원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당시 수사 맡은 김기춘의원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혐의로 1974년 8월15일 낮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문세광은 다음날 오후까지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중정 요원들은 여권에 적힌 일본인 이름 말고는 문세광의 인적사항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이때 중정부장의 법률보좌관으로 파견 중이던 서른 다섯살 ‘김기춘 검사’가 투입됐다. 신직수 중정부장의 명이었다. 김 검사는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던 문세광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을 읽어 봤는가.” 하루 종일 묵비권만 행사하던 문세광이 그제서야 눈을 번쩍 뜨더니 “네. 혹시 센세(선생님)도 읽어 보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김 검사는 빙그레 웃으며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고 답한 뒤 “혁명을 하기 위해 왔다면서 이렇게 비겁하게 입을 다물면 되겠는가. 당당하게 밝힐 것은 밝히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문세광은 입을 열어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검찰총장·법무부장관을 지낸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20일 기자들과 만나 설명한 문세광 수사 뒷얘기다. 그는 “‘자칼의 날’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을 담은 추리소설로 사건 보름 전쯤 대천 해수욕장에 휴가차 내려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 수사에 응용해 봤다.”고 전했다. 또 “문세광은 38구경 권총을 분해한 뒤 라디오에 넣어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소설 주인공도 장총의 총구를 라디오에 숨겨 들여왔다. 암살자에겐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문세광은 나중에 육 여사가 숨졌다는 말을 듣고 ‘정말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참회했다.”면서 “젊은 나이에 포섭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것은 살인 사건일 뿐 정치적으로 악용할 소지는 없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한편 당시 서울지검 공판부장으로 수사 실무책임자이던 정치근 변호사는 “문은 처음에는 ‘빨리 죽여 달라.’는 말만 하다가 나중에 ‘한국군에 입대하겠으니 살려만 달라.’며 삶의 집착 같은 것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여의도in] 박근혜 “박정희 딸 잊어주세요”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주십시오. 공당의 대표로서 대처하겠습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일 당 상임위원회에서 최근 한·일협정 외교문서, 문세광 사건 등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과거사’ 문건이 잇따라 공개된 것에 대해 소회를 털어놓았다. 박 대표는 이날 이규택 최고위원이 “과거 문건이 계속 공개되는데 우리 당도 당당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지적하자 “맞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를 잊어 달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도 잊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여옥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표는 특히 “문서 공개에 대해서는 공당으로서, 공당의 대표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대표인 제게 부담을 갖거나 저를 염두에 두지 말아 달라.”고 거듭 당 지도부에 설명했다. 또 “저는 ‘박정희의 딸’이 아닌 야당의 대표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덧붙여 ‘독립’의 자신감도 내비쳤다. 이날 발언은 ‘대통령의 딸’이라는 특수한 입장 때문에 당이 과거사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일부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됐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사할린동포 귀국 적극 나서야”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사할린동포 귀국 적극 나서야”

    “사할린 동포와 그 유가족들의 영주귀국이나 이중징용자 가족의 생사확인, 손해배상 문제 등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합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안산시 ‘고향마을’ 노인회 고창남(70) 회장은 20일 “사할린 거주 동포 가운데 3000여명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고 회장은 또 이날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재사할린동포 귀환 교섭’ 비밀문서와 관련,“1974년 당시 사할린 동포 귀환 문제가 소련측의 거부로 무산된 것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이제는 일본에만 의존하지 말고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 귀환문제를 일본정부가 먼저 제의했고 보상문제 등이 거론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강제징용돼 평생을 국적 없는 민족으로 살아왔는데 고국마저 외면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며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사할린 동포는 지난 89년 한국과 일본간 재 사할린 한국인 지원 공동사업체 구성에 합의한 이후, 일본측 부담으로 90년부터 지금까지 1600여명이 영주귀국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안산 ‘고향마을’에 408가구 816명이 일시에 영주귀국한 이후 2001년 178명,2002년 15명으로 계속 줄어드는 등 영주귀국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고 회장은 “일본측이 재정난을 이유로 사할린 동포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중단, 현지 동포들이 반발하고 있다.”며 “이는 강제징용 한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으로 양국 적십자사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펼쳐온 사업인 만큼 결코 중단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안산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육여사, 문세광 총에 안맞았다? ‘미스터리’

    육여사, 문세광 총에 안맞았다? ‘미스터리’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한국과 일본간 외교관계가 수교 10년 만에 단절 일보직전에까지 치달았던 당시 상황이,20일 공개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외교문서에서 확인됐다. 이는 사건 공동정범에 대한 일본측의 수사 부진과 조총련에 대한 조치 문제가 첨예한 갈등요인으로 작용한 때문이며, 한국 정부는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중재에 나선 미국은 “한·일 관계가 깨지면 한국 방위도 어렵다.”고 경고, 한국이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30년간 ‘문세광 사건’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은 이날 공개된 총 15권 3030쪽짜리 관련 외교문서에서도 밝혀지지 않아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흉탄 미스터리 ●경호원 오발설등 의혹 여전 모든 암살사건이 음모설을 동반하듯 ‘박정희 대통령 저격시도’에도 몇가지 의문점이 사건 당시부터 제기돼 왔다. 핵심 의혹은 ‘수사당국의 발표대로 정말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숨진 게 맞나.’란 점이다. 20일 공개된 관련 기록에도 이런 의혹을 일거에 해소시켜줄 만한 확실한 내용이 따로 없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의혹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사건 직후 현장검증을 하고 수사본부 요원으로 참여한 실무자가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99년 작고)씨는 89년 월간지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육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 총탄에 죽지 않았으며, 사건이 숱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수사발표에 따르면, 현장에 울린 총성은 모두 7발. 문세광은 5발이 장착되는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을 사용했고 범행 후 1발이 권총에 남아 있어 총 4발을 쏜 것으로 결론났다. ●육여사 쓰러진 자세도 논란 견해차는 문세광이 쏜 탄착지점에 있다. 수사발표는 ‘1탄→실수로 자신의 허벅지 관통,2탄→연단 좌측,3탄→불발,4탄→육 여사,5탄→연단 뒷면의 태극기’다. 반면 이씨의 주장은 ‘1탄→오발,2탄→연단,3탄→태극기,4탄→천장’이다. 수사당국은 경호원의 총탄 중 2발이 천장과 합창단원 장봉화양을 맞혔다고 발표했으나, 이씨는 장양뿐 아니라 육 여사도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호원의 오발 또는 ‘제3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씨는 특히 “현장검증도 하기 전에 청와대 경호실에서 핵심 증거물인 탄두를 수거해 갔다. 육 여사를 숨지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나 밝힐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육 여사가 쓰러진 자세도 의혹을 더하는 부분이다. 육 여사는 관객석에서 봤을 때 연단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문세광이 행사장 좌측 뒤에서 앞으로 뛰어가며 쐈기 때문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의 머리는 우측으로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저격 후 육 여사의 머리는 좌측으로 젖혀져 있었다. 문세광이 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도 김포공항을 통해 무난히 입국할 수 있었던 점, 출입비표도 없이 권총까지 소지하고 경호가 삼엄한 행사장에 버젓이 입장한 것도 의혹을 남긴다. 행사 당일 청와대 경호과장이 이례적으로 검문 완화 지시를 내렸고, 행사장 로비에서 문세광이 경호계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미확인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단교 직전까지 ●美 “한일관계 깨지면 안돼” 중재 한국은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의해 문세광을 포섭한 조총련의 조직적 범행’으로 발표했지만 일본은 ‘문세광과 조총련의 직접적인 관련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다.’고 최종 판단, 양국은 서로 다른 수사결과를 내놓았다. 아울러 이번 문건의 사실관계는 검찰수사결과를 토대로 하고 있어 단독범행 여부부터 제3의 저격설, 김대중 납치사건과의 관련설 등 사건에 대한 여러 의혹을 규명하는 데도 별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만 문세광 사형집행 이후 일본이 문세광 수사본부를 해체한 데 대해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자, 일본은 김대중 사건 수사본부 해체를 언급해 두 사건 수습과정이 전혀 무관치는 않다는 추론을 가능케 했다. ●서승 형제 간첩사건 문서등도 공개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9월19일 특사로 파견된 시이나 에쓰사부로 당시 자민당 부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과연 일본 정부가 우리를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일본이 끝내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우리는 일본을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지 않느냐.”며 격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는 이밖에도 육영수 여사 장례식 관련 2건, 재일본한국인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사건, 재사할린 동포 귀환교섭, 포드 미국 대통령의 방한, 재일교민 북한송환 등 총 27건,11만여쪽에 달한다. 이지운 구혜영기자 jj@seoul.co.kr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아직도 고통… 고문 없었다니”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아직도 고통… 고문 없었다니”

    “큰 기대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971년 3월 서울대 유학중 간첩활동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됐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던 서승(60·일본 릿쓰메이칸대 법학부) 교수. 그는 30여년 전 당시 살인적인 고문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20일 전화 인터뷰에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이날 한국 정부에 의해 공개된 19쪽짜리 ‘재일본 한국인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사건’ 문서에는 서 교수 형제에 대한 당국의 수사기록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 교수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4월18일 저녁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로 연행당해 ▲서울대에 지하조직을 만들어 군사훈련 반대와 박정희 3선 반대운동을 배후조종했고 ▲김상현 의원을 통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불순한 (북한의) 자금을 전달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고 한다. 서 교수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살아서는 도저히 고문을 이길 수 없어 감시병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의 석유를 온몸에 뿌리고 불을 붙여 자살을 시도했다. 심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아직도 분단의 생채기로 남아 있다. 이날 공개된 문서는 ‘혼다 겐기치’ 오사카시립대 명예교수 등 ‘서승 형제를 구하는 회’ 대표단 등이 고문 중단과 사면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우리 정부에 항의문을 보낸 것에 대해 수사당국이 “두 형제에게 고문 또는 학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책임질 일이 없다.”는 내용을 전달했다는 내용만 담겨 있다. 따라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4월 대선을 한 달 앞둔 점에서 발생했고 범죄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 엄청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고 알려진 이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료였다. 서 교수는 기자가 보내준 문서를 읽고 난 뒤 “어차피 대선을 위해 써먹기로 한 사건인데 밀실 고문의 현장이 문서에 드러날 리가 있겠냐.”면서 “당시 정부가 군사독재를 위해 인권침해를 자행했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일 두 나라의 소장파 법학자들과 함께 학문적 교류를 벌이고 있는 서 교수는 오는 27일 학술연구 활동을 위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현대 한국 민주화와 법정치 연구를 위한 활동이 목적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21일 TV 하이라이트]

    ●금쪽같은 내새끼(KBS1 오후 8시25분) 영화를 본 덕배는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상념에 젖는다. 집에 돌아온 진국을 가만히 안아준 덕배는 희수에게 친정에 맡긴 아기들을 데려오게 한다. 진국은 지혜가 출연하는 작품 계획을 세우지만, 인터넷에 지혜의 불임과 아기 출생에 관한 비밀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진다. ●오픈 스튜디오(SBS 오후 4시10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주부들의 한숨과 고민은 늘어만 간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단돈 몇 백원, 몇 천원을 아껴가며 더욱 알뜰한 살림솜씨를 발휘하는 주부들. 전기, 수도, 재활용 등 물 샐 틈 없는 오순옥 주부의 알뜰살림 노하우, 신세대 김선미 주부의 절약·저축 노하우를 배워보자. ●언론과의 대화(YTN 오후 3시15분) 지난 17일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한·일 수교협상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경제개발에 쓰겠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개인보상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일 수교협정 문서 공개를 둘러싼 파장을 전문가들과 함께 짚어본다. ●문화센터-창의성 중심의 생동감 넘치는 음악동화 학습을 통해 음악적 상상력을 키워보자(EBS 오전 11시) 집에서 부모가 아이와 함께 꾸밀 수 있는 동화음악 이야기를 소개한다. 직접 육성을 들려줌으로써 부모와 자녀간의 벽을 허물고, 동화를 꾸미거나 음악을 듣는 활동을 통해 온 몸으로 표현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배워본다. ●김약국의 딸들(MBC 오전 9시) 김 여사와 몰래 점심약속을 한 용빈에게 전화가 오고, 홍섭은 이를 강극과의 약속인줄 알고 오해한다. 약속 장소로 나간 용빈은 김 여사로부터 과부 언니 용숙과 바람둥이 동생 용란 때문에 용빈은 홍섭과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담해 한다. 한편, 한돌은 심한 감기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윤도현의 러브레터(KBS2 밤 12시15분) 오랜만에 들어보는 김현철의 히트곡(춘천가는 기차),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노래 ‘슬픈 연가’로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조은의 무대를 꾸민다.‘김제동의 리플해 주세요’에서는 ‘짝사랑 하고 있는 여인에게 멋지게 깜짝 공연을 해주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 [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한·일협정 문서공개를 계기로 또 한번 과거사가 우리들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왔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반갑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에도 냄비처럼 한바탕 들끓다 잦아들어버리는 역사의식을 보여주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과거사를 소화하는 방식 중 베트남의 방식은 독특하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과감하게 미국과 화해하였다. 도이모이 정책에 따라 한국과도 과거사 집착보다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국제사회에서 무시의 대상이기는커녕 경의의 대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전쟁에서 물리치는 용기와 끈기를 보여준 데다 내적으로도 자신들의 기억을 단속하여 분발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곳곳에 있는 월남전 피해 증오비, 위령비 등이 그것을 말한다. 한국인의 과거사 소화방식은 어떤가. 한 역사교육 문제 토론회에서 한 고교 교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왜곡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하였다. 우리 국민은 중국이나 일본이 역사 망언을 해주어야만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지피므로 우리 국민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망언이 자꾸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가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이 타율적이라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체의 주체적 결단 없이,‘때리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팽이’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자극 없이도 스스로 역사의식에서 깨어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학교를 통해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게 우선 시급하다. 이 부분은 역사망언이 나올 때마다 제기됐지만 한때 논의로 끝났을 뿐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회교육을 통한 끊임없는 기억과 실천이다. 학교교육을 넘어 생활속에 역사의식을 체질화하여 판단과 행동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 돕는 곳은 각종 박물관이나 기념관이다. 가까운 곳에 역사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 있다면 주체적 역사의식은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추진하고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은 의미가 있다. 십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강제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노릇을 하고도 위안부 피해의 역사는 사죄와 보상은커녕 우리 사회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갈 뻔했다.1990년 정대협의 발족과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의 잇단 증언으로 일본의 만행은 국제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됐지만 국내엔 아직도 이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만한 공간이 없다. 정대협은 박물관 건립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실천행위란 판단 아래 국민적 모금을 추진하고 있지만 진척이 여의치 않다. 오히려 피해 할머니들이 “다시는 우리가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정부에서 나온 생활안정자금을 쪼개 눈물어린 기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그 할머니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제 우리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는 것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같은 기억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 가나 수없이 볼 수 있는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처럼 작고 많을수록 좋다. 우리보다 뒤늦게 위안부 박물관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타이베이의 경우 시가 건물을 기증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해국가인 일본마저도 시민운동가인 마쓰이 야요리의 유산을 토대로 박물관 건립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의 해다. 가장 많은 위안부피해자를 냈던 한국의 역사기억 작업이 올해는 추진력을 갖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정부는 물론 서울시 등 지자체의 자각도 긴요하다.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박근혜 대표 “민생 살리는 無정쟁의 해로”

    박근혜 대표 “민생 살리는 無정쟁의 해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19일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연두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를 ‘민생을 살리는 무정쟁(無政爭)의 해’로 만들 것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이어 “국정방향의 일대전환과 정쟁없는 정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대통령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경제 우선의 국정 운영 기조와 일치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혀 그동안 ‘무한 정쟁’으로 일관해온 여야 관계가 ‘상생 정치를 위한 파트너십’으로 전환될지 주목된다. ●여야 해빙 가능할까? 박 대표는 이날 회견에서 “지금 상황은 ‘민생파탄의 비상사태’이며 이대로 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정치권이 각성해야 한다.”며 “정치권은 어려운 서민의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정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2월 임시국회는 ‘비상민생국회’가 돼야 하며 지난해처럼 정쟁 법안으로 싸우기만 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권에 ‘무정쟁 선언’을 제의했다. 박 대표의 ‘무정쟁 선언’은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이 날로 고조되는 데 따른 위기감과 지난해 ‘4대 입법’ 협상과정에서 박 대표가 보여준 강경기조에 대한 당내 일각의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오는 4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열리는 다음달 국회에서 여당내 강경파가 지난 연말 무산된 국보법 폐지 등 4대 입법 처리를 강행하려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도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된다. ●“정권이 역사 재단해선 안돼” 박 대표는 이어 열린우리당 임채정 의원이 전날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힌 ‘선진사회협약체결’ 제의에 대해 “지난해 10월 정기국회 대표연설에서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여야와 노사 그리고 국민들이 참여하는 ‘국민대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한 데 대해 임채정 의장이 받아들인 것 같다.”면서 “기꺼이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한·일 협정 외교문서’ 공개와 관련해서는 “협정 당시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어려워 그 돈(청구권 자금)을 경제발전을 위해 썼으며 그 분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고 우리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라며 “이제는 정부가 그분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해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는 일본과의 외교문제뿐만 아니라 현재 제1야당 대표이자 유력한 대권주자인 박근혜 대표의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책임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간주돼 왔다. 박 대표는 이어 한·일협정 논란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특위 구성에 대해서는 “여야가 논의해 볼 수 있다.”며 사실관계의 객관적 규명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들에게 맡겨 놓아야 하며, 어떤 경우든 정권이 역사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정치적 악용은 반드시 차단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해 말 한나라당은 국보법 7조(찬양고무)까지 양보했는데 여당이 끝내 폐지를 고집하는 바람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며 “여당의 입장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이명박 “JP는 386, 日오히라 노회”

    이명박 서울시장은 19일 한·일협정 문서 공개와 관련, 협상 타결의 막후 주역이던 김종필(JP)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을 ‘386’과 ‘노회한 사람’으로 비교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시장은 한·일협정 반대 데모에 참여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모임인 6·3동지회가 이날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모임에 회원 자격으로 참석해 “JP는 당시 30대 중반 아니냐. 요즘 말로 하면 386이지. 똑똑하다고 앞장서서 한 팀이 (일본으로) 간 거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렇지만 오히라 외상은 노회한 사람인데…. 그런 걸 보더라도 일본에서 JP를 좋아한다.”며 JP가 오히라 외상의 노회함에 당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한·일협정 재협상 주장과 관련해 “40년이 지난 일을 재협상하자고 하면 국민 정서가 완전히 운동권 정서로 가버린다.”고 반대한 뒤 협정문서 공개에 대해서는 정치적 이용 의혹을 제기했다.
  • 검사학부모에 소송 도움 받았다

    검사 아들인 제자의 시험답안을 대리작성한 서울 B고 오모(42) 교사가 개인적인 소송과 관련해 검사 학부모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오 교사는 19일 “누나와 공동소유하고 있는 인천의 한 건물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지난해 1월로 계약이 만료된 노래방 주인에게 나가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협박을 해 지난 4월 소송에 이르렀다.”면서 “학적부를 보고 아버지가 공무원임을 알게 돼 어머니에게 연락해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오 교사는 이어 “정군의 어머니로부터 변호사를 선임하고 전화 내용을 녹음하라는 등의 조언을 받았고 다음달 승소했다.”면서 “정군의 어머니와 2∼3차례 통화만 했을 뿐 정군의 아버지는 만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화도 한 적 없다.”고 해명했다.2학기 기말고사 이전 시험에 대해 대필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한편 교육인적자원부는 오 교사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을 통해 해당 사립고에 파면 등 중징계를 요구하기로 했다. 또 앞으로 시험부정행위와 관련한 민원은 즉시 사실 여부를 확인,7일 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김영식 차관은 “사실로 판명되면 교단에서 완전히 배제시켜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생길 때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날 오 교사에 대해 사문서 위·변조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서울동부지검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김재천 나길회기자 patrick@seoul.co.kr
  • 韓·日협정 공개 대책 논의 민관공동위원회 구성 착수

    정부는 19일 한·일협정 관련문서 공개에 따른 종합대책을 논의할 ‘민·관 공동위원회’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발족시키기로 하고 인선에 착수했다. 이해찬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대책 민·관 공동위원회’는 재경부·외교부 등 관계부처 장관과 법률전문가·사학자·사회지도급 인사 20명 안팎이 참여, 피해자 보상 여부를 포함한 후속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경주 옥산서원서 희귀 고문서 무더기 발굴

    경주 옥산서원서 희귀 고문서 무더기 발굴

    국내 유일본으로 추정되는 동래선생상절 사서류 등 희귀 고서 및 고문서들이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18일 문화재청이 발간한 ‘일반 동산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남송의 학자 여조겸이 중국 역사서를 알기 쉽게 풀이한 동래선생상절(東萊先生相節) 사서류(史書類)인 ‘당서’(唐書),‘동한’(東漢),‘서한’(西漢) 등 9종 60책이 옥산서원에서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발견됐다. 발견된 책 본문은 성종때 만들어진 동활자인 갑진자(甲辰字)로 인쇄되었고, 서문 등 일부는 세종때 만들어진 초주 갑인자(甲寅字)가 혼용 인쇄돼 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서원에선 또 중종 13년 소학을 쉽게 번역하여 을해자(乙亥字)로 인쇄한 책을 다시 목판으로 번각하여 간행한 ‘번역소학’(飜譯小學)도 발견됐다. 이중 권3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옥산서원의 고문서엔 이밖에도 16세기 유학자인 이언적에게 임금이 하사한 책 ‘비아’(雅), 그리고 그때그때 작성된 다량의 고문서와 필사 원본들이 포함돼 있다. 이번 보고서는 문화재청이 문화재 보존관리 대책 마련 차원에서 전국의 서원과 향교, 문중에 소장된 동산문화재를 조사해 작성한 1차연도(2004) 사업결과로, 경북 7개 시·군에 있는 서원·향교·문중 등 30곳에 소장된 문화재들이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유재은 연구관은 “이번 조사결과 고서·고문서·미술품 등 1만6000여점의 문화재가 포함돼 있고 그중 국가 지정으로 검토할 중요문화재로 판단되는 것도 20여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유 연구관은 특히 옥산서원의 필사본과 고문서는 조선시대 서원운영과 향촌사회의 구체적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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