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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CO 첫날 ‘안보’ 이슈로

    SCO 첫날 ‘안보’ 이슈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동양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의 발전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15일 상하이에서 열려 푸둥(浦東)의 국제회의센터에서 개막했다. 정상들은 이날 전체 회의를 갖고 정보·기술을 악용한 테러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정보 보안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테러, 분리주의, 극단주의에 대한 공동대응 등 모두 10건의 문서에 서명했으며 교육협력,SCO 실업가위원회 설립,SCO 은행 컨소시엄을 위한 행동강령 등에도 합의했다. 특히 안보 문제가 집중 논의된 이번 정상회의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SCO를 영향력 있는 경제·정치·무역기구로 변모시켜 주요 현안에서 우월적인 강대국들의 위협과 공격적인 간섭을 저지해야 한다.”면서 ‘공고한 지역 블록화’를 제의했다. 동시에 “에너지 개발과 수송 등에서 협력강화를 위한 에너지장관회의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란의 핵 개발과 관련,“유럽 등이 우라늄 농축 중단 대가로 제시한 인센티브를 이란이 논의하길 원한다.”고 말했으나,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이에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상하이시는 회의장에 이르는 지하철 2개 노선의 운행을 중단했으며 버스와 황푸(黃浦)강을 건너는 배편 스케줄을 변경하고 지하터널도 폐쇄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학교와 국영기업들은 14∼16일 3일간 휴교 및 휴업, 주말까지 실질적으로 5일간의 연휴를 실시할 만큼 회원국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썼다. 참가국들은 이날도 SCO가 지역내 경제협력체일 뿐임을 강조했지만, 지난해 역내국가에서 미군기지 철수 요구 등이 터져 나오면서 여전히 군사블록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SCO는 설립 이후 회원국간 포괄적 동반자 관계 구축을 위한 공동성명 등을 이끌어냈고 내년 러시아에서 대테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날로 공고화해 가는 양상이다. 2001년 창설 5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회의에는 중국·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6개 회원국 정상과 옵서버로 있는 이란·파키스탄·몽골의 정상 및 인도의 석유천연가스장관 등이 참석했다. 아울러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독립국가연합(CIS) 대표, 동남아국가연합(ASEAN) 대표 등도 특별 초청됐다. jj@seoul.co.kr
  • 급부상하는 中내륙 허난성을 가다

    급부상하는 中내륙 허난성을 가다

    최근 한국 정부는 중국의 대형 개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중부 굴기(中部起)’에 대한 투자 타당성 정도를 조사해 그 결과를 내놓기로 했다. 동부 연안에 위치한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중·서부로의 진출을 희망하는 사례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임금 상승 등 동부 연안지역에서의 생산활동 환경이 나빠진 데 따른 현상이다. 중부 굴기의 중심을 도모하는 허난성(河南省)을 찾았다. |정저우시·뤄양시·덩펑시(허난성) 이지운특파원|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 소림사 방문차 허난성을 찾았을 때, 리청위(李成玉) 성장으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들었다.“허난성의 역사를 알면 중국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리 성장은 앙소(仰韶)문명의 본고장이며 중국의 숱한 성씨(姓氏)와 활자가 비롯되는 등 허난성이 중국 문명의 산실이라는 점을 자랑한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다른 지역의 중국인은 ‘허난성’에서 ‘빈곤, 낙후, 농민공, 소매치기, 사기 상술’ 등 부정적인 단어들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외국인에게는 여기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까지 겹쳐진다. 그런 허난성이 지금 새로운 비약을 준비하고 있다. 당 중앙이 지난 3월 전인대에서 최종 확정한 ‘중부굴기’를 그 날개로 삼았다. ●외자기업에 특정세금 최대 60% 반환 초여름 따가운 햇살 속에 허난성 성두(省都) 정저우(鄭州)시는 천지개벽 중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철거와 재개발이 한창인 반면, 다른 한편에는 마천루가 세워지고 있었다. 정저우의 상징이자, 허난성의 심벌로 기획된 ‘정둥신(鄭東新)구’는 이미 도시로서의 그 위용을 갖춰가고 있었다. 구(舊)공항을 옮기고 2003년부터 건설을 시작한 곳이다.150만㎢의 면적에 150만명이 생활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둥신구는 호반을 중심으로 유통·물류타운에 대규모 과학·기술단지, 대학타운, 최첨단 비즈니스 센터가 밀집한 꿈의 도시가 될 것으로 허난성은 꿈꾸고 있다. 그 중심에 위치한 ‘국제전람회의센터’는 도시의 상징물이었다.‘기둥 없는’ 건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데 관계자들의 자부심이 작지 않았다. 정저우시 정부는 타이완·일본과 상하이(上海)를 비롯해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상인들의 자금이 들어오고 있다고 자랑했다. 시의 한 관계자는 “같은 중부권으로 정저우보다 늘 앞서 있던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을 최근 국내총생산(GDP) 등 몇가지 경제지수에서 앞질렀다.”며 흥분했다. ●정저우시에만 외국투자기업 2800곳 웨쩡푸(岳增浦) 시 상무국장은 “2000년만 해도 800곳이던 외국 투자기업이 2800여개로 늘었다.”면서 “자본유입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근처 뤄양(洛陽)시의 한 공장은 수천년 고도(古都), 중국의 ‘단골 수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퉈(一拖) 국제경제무역주식회사는 중국 최고(最古), 제1의 트랙터 공장답게 쉴새 없이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 92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북한과 남한에도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외자기업에 대해서 25%에서 상황에 따라 특정 항목 세금의 최대 60%까지를 반환해 주는 등 개발을 위한 뤄양의 노력은 눈물겹다. 정주∼뤄양 중간에 위치한 덩펑(登封)시 역시 도시 정비와 도로 확충으로 중국 5악(岳)의 하나인 숭산(嵩山)과 소림사, 뤄양 용문석굴(龍門石窟) 등을 잇는 관광자원 확충에 집중하고 있었다. ●AIDS만연·빈곤·낙후 상당부분 치유 허난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 구조적 측면에서 비롯된 점이 많다. 허난성의 인구는 1억에 육박해 중국의 전체 성(省)중에서 가장 많다. 또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1차산업에 종사, 낙후성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개혁·개방 이후 다른 성과의 격차는 커져갔고, 많은 유민(流民)들이 양산됐다. 허난성이 AIDS 촌(村)으로 알려진 것도, 피를 팔아 생활을 연명해야 할 만큼 가난한 촌락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청위 성장은 “38개 현에서 1만 9000명이 발병,4000여명이 숨졌으나 AIDS 사태를 야기한 혈액 채취소는 이미 모두 폐쇄됐다.”면서 “성을 뒤덮은 가난의 상흔이 치유돼 왔다.”고 강조했다. 리 성장은 “베이징∼정저우 구간과 정저우∼우한 구간 고속도로 신설 등 고속도로가 4020㎞까지 연장되면, 정저우를 중심으로 사통팔달 연결된 철도망과 함께 성 발전의 대동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jj@seoul.co.kr ■ 균형발전 바로미터 ‘중부굴기’ 성공할까 |정저우시·뤄양시(허난성) 이지운특파원|중국 보시라이(薄熙來) 상무부장은 지난달 말 통상 교섭차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중부굴기’를 잊지 않았다. 요즘 한국의 주요 인사를 만나는 자리면 “중부굴기에 투자해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하는 그다. 그는 중부굴기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다. 강력한 차세대 영도자급 주자의 하나로 꼽히는 그로서는 반드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는 1992년부터 10년간 다롄(大連)시장 재직 중 연 10% 이상의 고속 성장 속에서도 다롄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냈다. 이후 랴오닝(遼寧) 성장을 지내며 오늘날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중부굴기는 우선 중국의 각종 대개발 공정의 1차적 마침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2000년 무렵 시작된 ‘서부대개발’과 2003년 본격 가동된 ‘동북진흥’에 바로 뒤이은 또 하나의 역사(役事)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 4세대 지도부가 이 프로젝트를 주시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장 중시하는 ‘균형 발전’의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발전의 바로미터,‘중원(中原)’ 중국의 중부 지역에는 중국 인구의 28.1%인 3억 6100만명이 산다. 이 가운데 농업인구는 2억 4400만명으로 70%에 이른다.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게다가 개발 공정의 시작도 상대적으로 늦다 보니 서부와 동부지역보다 뒤떨어진 측면이 많다. 2001∼2003년 중부 6개성의 경제성장률은 동부와 서부지역보다 각각 1.8%포인트와 0.4%포인트 낮았다. 총생산 격차도 갈수록 벌어졌다. 당 중앙이 공들이는 ‘신농촌 건설’과 ‘균형’이 가장 부합되는 지역은 어찌보면 중부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추동력이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부굴기가 서부대개발이나 동북진흥과 같은 추동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부대개발은 천연가스와 수력전기 등 자원이 풍부하고, 청두(成都)나 시안(西安) 같은 거점 도시가 공정의 주요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동북진흥은 과거 중국의 최대 중화학 공업 기지요 중공업 단지로, 다소의 구조조정과 현대화 작업만으로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중부지역은 산업적 측면에서 이같은 특징이 크게 부족하다.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망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선정된 개발 공정”이라는 분석까지 내놓는다. 균형발전이란 명목을 위한 전형적인 ‘끼워넣기식’ 국가 개발사업이라는 얘기다. jj@seoul.co.kr ■ 내수생산의 중심지부상 가능성 |정저우시·뤄양시·덩펑시(허난성) 이지운특파원|중부굴기 프로젝트에는 아직 구체적인 시간표나 청사진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서부대개발이나 동북진흥이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산하에 별도의 판공실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직 전문적인 추진 기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만큼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전문가들은 공정의 대상이 되는 산시(山西)·허난(河南)·후베이(湖北)·후난(湖南)·안후이(安徽)·장시(江西)성 등 중부 6개성 일대가 대대적인 수출 전략기지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는다. 창(長)강이나 주(珠)강 삼각주 경제지역에서처럼 중심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채, 성마다 독자적 경제권을 형성하는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특히 서부와 같은 재정·금융·투자환경 분야의 관련 우대정책을 제정한다는 문서도 없는 상황은 이같은 전망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 지역이 11·5규획 목표에 따라 ‘내수 생산’의 중심지로 가꿔질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중국의 중·소 및 중견 제조업체들의 진출이 적합해 보이는 대목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현지 언론들은 상하이, 홍콩 등에서 임금 인상 가속화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기업들이 내륙지방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후광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시절 정·관계를 장악했던 ‘상하이방(上海幇)’에 이어 후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안후이방(安徽幇)’이 부상하고 있다는 홍콩 언론들의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편 중부지역은 아세안-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른 내수와 물류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돼, 동남아 시장을 겨냥하는 한국 기업에는 전초기지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정부는 일단 한국 중소기업들이 합작 대상으로 삼는 이 지역 중국 기업들의 신용조사를 정부 재원으로 하는 것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 또한 이미 서부지역에서 실시해 효과를 보고 있는 ‘지역별 물류 센터’를 확장, 중부쪽에도 세울 것을 고려하고 있다. jj@seoul.co.kr
  • [열린세상] 논술고사 제도 바꾸자/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청소년들에게 창의적인 교육과 폭넓은 독서를 진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논술고사 제도가 과연 제대로 기능하고 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논술고사의 비중은 높아가건만, 정작 이 제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는 별로 없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에는 실제로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그런 생각을 굳혔다. 지문의 내용이 언어와 의사소통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회과학 전공자인 필자에게도 어려운 지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언론에 보도된 학생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예상외로 쉬운 문제가 나왔고, 어려움 없이 잘 썼다는 이야기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서희의 담판’을 예로 인용하며, 그야말로 해괴한 동문서답을 써낸 경우도 30,40%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타 대학 동료 교수들의 전언도 대동소이하다. 논술고사의 효능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악영향도 만만찮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모두 삼단논법으로 서술하고, 암기한 몇 개의 예제를 집어넣고 마감한다고 한다. 그래서 점수차도 별로 나지 않게 채점한다고 한다. 논술고사 시험을 보면서 과거 동구권 사회에서 회자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그들은 봉급을 지불하는 척한다.” 교수들은 논술 문제를 내는 척하고, 학생들은 시험을 보는 척하며, 채점위원들은 채점하는 척한다. 모두 현행 제도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되묻기를 애써 피하고 있다. 학생들은 폭넓은 독서는커녕, 창의적 글쓰기를 말살하는 논술과외 교재 암기에 몰두하는데 말이다. 현행 논술고사 제도의 문제점은 대체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에게 독서 유인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독서량은 과거 1960∼70년대 동년배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 논술은 교양도서 읽기와는 거리가 먼, 과외선생이나 학원에서 배우는 일종의 논리기술로 이해되고 있다. 학교나 사회는 책읽기를 독려하지만 현행 논술제도는 책을 아니 읽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지시한다. 콘텐츠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논술고사는 훌륭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없는, 앙상한 삼단논법을 배우는 사설 과외시장만 불려 놓았고,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독서와 글쓰기를 외려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명문 대학의 논술고사 문제는 사회과학도인 필자가 보아도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다. 물론 기출문제를 피해야 하고, 또 다른 대학과도 다른 변별력이 있는 문제를 내야 하는 고민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너무 난해한 지문을 내어 학생들과 채점위원마저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 제도는 과연 누굴 위한 제도인지 한번쯤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개선책은 없을까? 논술과외 시장도 없애고 공교육에서 논술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간단한 개선책 같은 것 말이다. 필자의 경험에는 1970년대 초 과열된 중·고교 입시경쟁을 해체하면서 교육부가 만들었던 ‘자유교양경시대회’가 언뜻 머리에 떠오른다. 각급 학년별로 난이도를 조정한 교양도서목록을 지정하여 싸게 출판하여 공급했고, 매년 학교별, 시도별, 전국 대회를 열었다. 그 덕에 필자 세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동서양의 고전도서 수십권을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후 독서와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논술고사 시험도 이제 고전을 중심으로 한 지정도서 범위 내로 제한하여 테스트하기로 하자. 최소한 학생들이 이 교양도서들을 반복하여 읽을 것이고, 그야말로 교양교육의 기초를 쌓을 수 있게 되리라.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유럽순방 韓총리 기자간담

    |소피아 장세훈특파원| 유럽 4개국을 순방 중인 한명숙 국무총리는 12일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 열린우리당과 협의해 정책 방향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불가리아의 수도 리스본에서 가진 수행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총리 취임 이후 지방선거 때문에 행보가 제한적이었고, 선거 이후 정황도 충격적으로 다가와 당정협의를 하지 못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어 한 총리는 “정책 결정은 당과 정부가 같이 하는 것”이라면서 “정책의 근간 자체를 흔들 수는 없지만, 고위당정협의나 지도부와의 간담회 등을 통해 당과 조정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번 5·31 지방선거 결과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한 총리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불가리아 총리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국제연합(UN) 사무총장 선출에 대해 우회적 지지 의사를 표명한 사실도 공개했다. 시라크 대통령의 경우 한 총리 예방 당시 함께 배석해 있던 보좌관을 직접 가리키며 ‘한국에 다녀온 뒤 반 장관의 팬이 됐다.(보좌관은) 한번 생각한 것은 잘 바꾸지 않는다.’고 얘기했다는 것. 앞서 한 총리는 이날 스타니셰프 총리와의 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반 장관에 대한 긍정적인 약속을 해주셨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한 총리는 외규장각 문서와 관련, 프랑스가 ‘9월 전시회 개최’에 대한 추가적인 조건을 제시할 경우 전시회 자체를 철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총리는 “외규장각 문서에 대한 반환이 빨리 이뤄지도록 강하게 촉구했으며, 프랑스가 문화부 장관을 우리나라에 보내 조건을 붙인다면 반환과 전시는 별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이라면서 “조건이 안 맞으면 (전시회를)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특히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파리에 오면 특별한 느낌이 든다. 우리 문화와 역사가 남의 땅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를 잊지 않고 있다.”고 인사말을 건냈다고 덧붙였다. shjang@seoul.co.kr
  • 독성 없는 담배는 없다

    담배의 역사는 속임수의 역사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담배회사의 속임수를 경고하고 나섰다. WHO는 2006 세계금연의 날을 맞아 “담배회사들이 마일드, 라이트, 저타르 담배를 신제품으로 내놓고 보다 안전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 흡연을 유도하고 있지만, 이는 모두 담배회사의 속임수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금연의 날 구호도 ‘담배는 어떤 형태든, 어떻게 위장하든 치명적이다.(Tobacco:deadly in any form or disguise)’로 정했다. WHO에 따르면,1950년대 폐암 사망의 90%가 흡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자 등장한 담배가 필터 담배다. 당시 필터는 독성물질을 걸러 주는 장치로 광고됐지만, 필터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건 필터담배가 전체 담배 시장을 장악한 후였다.또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저타르, 라이트, 마일드 담배 역시 ‘안전한 담배’로 포장돼 담배 시장 점유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지만, 치명적인 독성은 일반 담배와 마찬가지다. WHO는 “담배회사에서는 끊임없이 라이트 제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지만, 새로운 담배가 기존 담배와 다른 점이 없다는 건 담배회사 내부 문건이 증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세계적 담배회사 브라운앤드윌리엄슨은 30년 전 내부 문서에서 ‘필터 담배 흡연자는 일반 담배 흡연자와 동일한 수준의 니코틴과 타르를 흡수하지만, 건강에 덜 해롭다는 말 때문에 담배를 바꾼다.’고 했고,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BAT)의 10년 전 문건도 ‘건강에 대한 관심을 주목하면서 라이트 제품을 개발해왔지만, 우리는 이 제품이 더 안전하다고 광고할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WHO는 ▲라이트, 마일드 등의 담배는 보통 담배의 위장 제품으로 타르와 니코틴 수준은 같고 ▲라이트 담배로 바꾼다고 질병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며 ▲담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금연이라고 강조했다.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하)日 독도침탈 공격외교와 한국 대응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하)日 독도침탈 공격외교와 한국 대응

    1. 독도영유권 논쟁 개시 때의 일본의 무권리 상태 대한민국 정부는 동해의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통치 평화선)을 발표했다. 열흘 뒤인 28일 일본 정부는 평화선 안에 포함된 독도(일본 호칭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독도영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내면서 한·일 독도영유권 논쟁은 시작됐다. 논쟁 시작 당시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는 배타적 독도영유권 실체를 완벽하게 가져 국제사회에 공인 받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독도영유 ‘주장’만 갖고 있었다. 독도영유권을 100이라 가정하면 한국은 독도영유권 100을 가진 반면, 일본은 0을 가진 것과 같았다. 그 후 일본 정부는 1953년 6월27일,6월28일,7월1일,7월28일 일본 순시선에 관리와 청년들을 태워 독도에 침입하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해양경찰대를 파견, 독도에 접근한 일본 선박들에 영해 불법 침입을 경고하고 경고 발사까지 하면서 쫓아버렸다. 울릉도 주민들도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독도를 지켰다. 일본정부는 다수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는 일본 고문헌자료의 조사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고문헌 증거자료는 단 1건도 나오지 않았다. 2.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위임 제의와 한국 정부의 거부 일본은 1954년 9월25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최종 결정을 위임하자고 제의했다. 국제사법재판은 상대국가가 위임에 동의해야만 안건이 성립하며, 동의하지 않으면 안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은 1954년 10월28일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소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일본측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획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분쟁’을 제출하자는 제안은 잘못된 주장을 법률적 위장으로 꾸미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독도에 대해 처음부터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국제법정에서 그 영유권 증명을 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영토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유사영토분쟁’을 꾸며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독도문제를 국제재판소에 제출하자고 제안함으로써, 일본의 입지를 소위 독도영토분쟁과 관련해 일시적으로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두려고 일본은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협의 여지없이 완전하고 분쟁의 여지없는 한국의 독도영유권에 대하여 일본은 ‘유사 청구권’을 설정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1954년 10월28일 한국정부 구술서) 한국정부의 이 외교문서와 입장을 정립한 책임자는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이었다. 앞으로도 국제사법재판소에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위임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외교문서 논쟁이 계속되다가,1965년 박정희 정권 때 한·일 기본조약이 맺어지고, 평화선이 취소됐다. 동시에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되어 양국은 영해에서만 배타적 어업을 하고 그 밖의 동해는 공해(公海)가 되어 자유어업을 하게 되었다. 3. 한국과 일본의 EEZ 기점 문제 유엔 신 해양법이 1994년 발효되고, 한국과 일본이 1996년 1월부터 신해양법을 채택하자, 자기영토에서 기점(base point)을 채택하여 반지름 200해리까지를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전관할 수 있게 되고,400해리가 안 되는 바다에서는 접촉국끼리 협상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96년 재빨리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 전제하면서, 독도를 동해쪽 일본 EEZ 기점으로 채택하고, 독도와 울릉도 중간선을 EEZ 경계선으로 제안해 왔다. 이때 한국 정부가 즉각 일본의 독도기점 채택을 부정 비판하고, 한국 독도와 일본 오키섬 사이 중간선을 한·일 EEZ 경계선으로 제안했었다면 한국 독도영유권 훼손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외무부는 자문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1년 후인 1997년 뜻밖에도 독도기점을 버리고 울릉도를 한국 EEZ기점으로 채택, 한국 울릉도와 일본 오키섬 사이 중간선을 한·일 EEZ 경계선으로 제안했다. 그 이유는 독도는 사람이 자립적 경제생활을 할 수 없는 무인 암석이기 때문이고, 울릉도 기점을 취해도 독도가 한국 EEZ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설명이 성립하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일본도 독도 기점을 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1년 전에 한국보다 먼저 독도를 일본 EEZ 기점으로 택했기 때문에 첫째 조건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 세계 석학도 독도는 EEZ 기점으로 취하고도 남는 작은 ‘섬’임을 밝혔다. 당시 독도에 한국 어부 김성도씨 1가구가 살고 있었다. 일본은 1996년에 30㎝의 바위인 오키노 도리(沖ノ島)에 철근 콘크리트로 독도보다 훨씬 작은 인공 섬을 만들어 EEZ 기점으로 공포했었다. 둘째, 일본이 한국측 울릉도와 오키섬 사이 경계선 제안에 동의해야 독도가 한국 EEZ 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측 제안을 거부했다.EEZ 기점은 자기 영토에서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도리어 국제사회에서 독도는 일본 EEZ 기점으로, 울릉도는 한국 EEZ 기점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한·일간 1996∼2000년 사이 5년간 4차례 EEZ 경계협정회담이 있었는데, 일본은 계속 ‘다케시마’(독도)를 일본 EEZ 기점으로, 한국은 ‘울릉도’를 한국 기점으로 제안했다. 독도는 일본 땅이고, 한국 정부는 영토 양도의 요건인 ‘묵인’을 행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국제사회의 오해를 사고 있다. 한국의 EEZ 독도 기점 채택과 선언이 꼭 필요한 이유다. 4. 신(新)한·일어업협정과 독도영유권 1999년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한국은 독도와 그 12해리 영해 주위에 ‘중간수역’(한·일공동관리수역, 잠정수역)을 설정하자는 일본 제의에 합의해줌으로써 한국 독도영유권을 또 훼손했다.(지도 참고) 한국 외무부는 당시 신어업협정에서 한국은 울릉도를 기점으로, 일본은 오키섬을 기점으로 각각 35해리를 ‘중간수역’의 동·서 양변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약 47해리이므로 35해리를 하면, 독도 영해 12해리와 접속되어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한국 EEZ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일본측은 오키섬에서는 35해리를 적용했으나, 또 함정을 파서 울릉도로부터는 33해리를 주장하여 결국 한국측 합의를 얻어 내었다. 그 결과 첫째 신어업협정에서 일본 EEZ 독도기점이 소멸되지 못하고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지나가는 경계선의 수정선을 중간수역의 좌변선으로 남겨놓게 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은 지금도 일본 EEZ 독도기점이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는 신어업협정에서 울릉도는 한국 EEZ에 넣고 독도는 질적으로 다른 ‘중간수역’안에 포위되어 들어가 울릉도로부터 독도가 수역상 분리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울릉도’명칭만 있고 ‘독도’명칭이 누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은 지금까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울릉도 영유국가가 당연히 독도 영유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반박해 왔다. 국제사회와 국제법도 한국측 해석을 지지했었다. 신어업협정은 일본의 교묘한 함정에 빠져 독도가 울릉도에서 수역상 분리되어 한국측 해석과 주장을 훼손시킨 것이다. 어업협정의 수정이나 재협상이 한국의 독도영유권 수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5. 한국의 독도정책 방향 일본 정부는 일본 EEZ 독도 기점 선언 10년째인 올해 상반기 국제사회에서 독도에 일본 영유권 설정 응고의 큰 계획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 하나는 4월14일부터 6월30일까지 해양탐사를 한·일 EEZ 경계의 일본 제안선인 울릉도와 독도 중간선까지 실행하면서 국제수로기구(IHO)에 일본 EEZ 해양탐사라고 사전·사후에 보고하여 국제공인을 축적하는 것이다.(지도 참고) 다른 하나는 한·일 EEZ 경계획정회담을 상반기(6월 12·13일 예정)에 재개, 일본이 EEZ 독도 기점을, 한국이 EEZ 울릉도 기점을 들고 나오도록 하려 했다. 합의가 되지 않아도 양국 EEZ 기점 제안 자체로 국제사회에서 독도는 일본땅이란 사실을 응고시키려 한 것이다. 일본의 EEZ 해양탐사를 통한 독도 침탈작전은 한국정부의 강경한 저지정책과 대통령의 정곡을 찌른 당당한 담화문으로 일단 중지되었다. 요미우리신문은 2006년 5월23일자 특종보도에서 이 작전은 일본 정부가 지난해 12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추진된 작전임이 밝혀졌다. 한국 외교부가 이 작전을 묵인해 줄 것으로 예측했다가 한국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놀라, 한국측 독도 부근 해저지명의 국제수로기구 등록신청 연기를 조건으로 일단 중지했다. 문제의 해결은 12일 도쿄 EEZ 경계 본협정 회담에서 한국측이 선명하게 독도를 기점으로 함을 세계에 선언하면서 한국 독도와 일본 오키섬 사이 중간선을 제안하는 것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공인된 대한민국의 배타적 영토이다. 한국이 당당하게 세계에 선언만 하면 일본의 독도 기점은 상쇄된다. 그리고 한국은 EEZ 장기협상을 준비하면 된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서강대, 사회봉사인증제 도입

    올 여름 졸업하는 S대 법학과 최모(25·여)씨는 취업에 큰 이점으로 작용하는 사회봉사 경력 인증을 위해 2003년 활동했던 한 봉사단체를 찾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1주일에 3∼4시간씩 1년간 이어졌던 최씨의 봉사활동에 대한 확인서 발급을 거부했다. 사무실 정리과정에서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곳 직원은 “굳이 확인서를 받아야겠다면 학생이 직접 증거를 찾아오라.”고 했다.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가 이 정도라니, 최씨는 혀를 끌끌 찼지만 이미 3년이 지난 터라 당시 담당자들을 찾기는 어려운 상황. 결국 봉사활동 인증을 포기해야만 했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통과하는 데 사회봉사 활동 경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지만 최씨처럼 해당기관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서강대가 이달부터 ‘사회봉사 인증제’를 도입, 학생들의 봉사기록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이유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취업·유학 등에 보탬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개인의 봉사활동 내역을 아예 학사정보의 하나로 관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봉사활동 기관·단체에서 확인서를 받아 학교에 내면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서 조회하고 문서로 뽑을 수 있다. 바쁜 취업준비 기간에 과거에 활동했던 곳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확인서를 받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또 ‘서강대 총장’ 명의로 인증서가 발급되기 때문에 공신력도 높아진다는 게 학교측 설명이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1. 연합국의 독도 한국영토 판정과 독도 반환 1943년 11월 미국·중국·영국 등 3대 연합국 수뇌들은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전 후 연합국정책을 담은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빼앗은 타이완과 팽호도,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모든 다른 지역에서 일본을 축출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서 연합국은 1945년 7월26일 포츠담에서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의 이행과,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임을 공약했다. 일본은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9월2일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일본정부와 그 승계자가 성실히 수행할 것을 확약했다. 이에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과 일본 항복문서를 통해 일본에 구속력을 갖게 됐다. 연합국은 1945년 9월2일 국제법상의 기관으로서 연합국최고사령부(SCAP)를 설치, 구 일본제국이 1894년 1월1일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합국은 한반도를 일본에서 제외해 반환시키고,1946년 1월29일에는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제3항에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 주한 미군정에 이관시켰다. 한국이 독립하면 즉각 인계인수하도록 한 것이다(지도 (1) 참고).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SCAPIN 제1033호를 발표,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일본 어부들의 접근을 막으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명백히 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 총회는 당시의 영토(독도 포함)와 주권을 승인했다. 독도도 다른 영토와 함께 대한민국 주권에 속한 영토로 공인받은 것이다. 2.‘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독도는 한국 영토 연합국은 일본을 1952년 독립시키기로 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키로 했다.1950년에는 강화조약의 ‘준비작업’으로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 합의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본문 해석이 모호하거나, 차이가 발생할 경우 지침(조약법에 대한 빈협정)이 되므로 매우 중요한 합의였다. ‘연합국의…합의서’는 제3조에서 “연합국은 대한민국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한국 섬들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했으며, 그 섬에는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했다(지도 (2) 참조). 만일 강화조약 본문에 모호한 점이 생기면 준비작업인 이 합의서가 해석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조약초안 작성 때의 일본의 독도 침탈을 위한 로비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은 처음 미국이 작성했는데,1∼5차 미국 초안까지는 합의서에 따라 독도를 명백하게 한국 영토로 명기했다. 그러나 제5차 미국 초안을 본 일본 임시정부가 미국인 고문 시볼드를 내세워 맹렬한 로비에 들어갔다. 로비의 미끼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넣어주면 독도를 미국 공군의 기상관측소와 레이더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독도는 원래 무주지였고 한국에는 독도에 대한 명칭조차 없으며,1905년 한국정부와 국민의 항의를 전혀 받음이 없이 새로 편입된 일본영토라고 거짓 근거를 붙였다. 이에 미국측은 일본측의 로비를 받아들여 제6차 미국 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 영토에 포함시켜서 연합국에 회람시켰다. 영국·호주·뉴질랜드 등은 제6차 미국 초안에 반대했다. 한 나라의 국가이익을 위해 연합국의 합의를 위반해서 독도의 소속을 옮기면 동아시아에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었다. 미국측 내에서도 전문가들은 독도가 한국영토이므로 한국 영토로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난처해진 미국은 7·8·9차 초안에서는 아예 독도 명칭 자체를 한국과 일본의 영토에서 모두 누락시켜 버렸다. 조약 초안에 ‘독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국측은 이에 반발, 독자적으로 1·2·3차 초안을 작성하고,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당황한 미국측은 영·미 합동 초안을 작성하자고 영국측에 제의하여, 결국 수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영·미 합동 초안이 단일안으로 작성됐다. 여기선 ‘독도’ 명칭 자체를 누락시키고 애매모호하게 처리해 본회의에 상정해 채택시켰다.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본문에서 ‘독도’ 명칭이 누락된 배경이다. 4.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 명칭 누락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은 연합국의 대 일본강화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기술했다. 독도는 그 밖의 모든 섬과 함께 기술되지 않았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 일본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영토 조항 안에 명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강화조약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귀속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1952년 5월 ‘대(對)일본평화조약’상의 지도를 발간했는데 독도(죽도)를 일본에서 제외된 조선영토로 표시했다(지도 (3) 참조). 그러다가 1952년 4월28일 일본 재독립을 전후해 일 외무성은 강화조약 2조에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제주·거문·울릉도만 기술되고 독도가 빠진 것은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묵인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통치 평화선 선포)을 발표하자, 일 정부는 열흘 후 평화선 안에 있는 독도(이른바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이렇게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은 시작됐다. 5.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 일본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섬 이름에 독도가 누락돼 있어 독도는 일본이 포기하지 않은 일본영토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주장은 광범위한 반론과 비판을 받았다. 한국정부의 공식적 비판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독도영유는 모도(母島)인 울릉도 영유국가의 영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주변에 거의 3000개 가까운 섬들이 있는데, 이를 모두 조약문에 쓸 수 없으므로 일본 방향의 대표적 섬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만 든 것이었다. 제주도의 일본 방향에 우도(牛島)가 있는데 조약문에 제주도만 기술돼 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의 국제법상 ‘부속도서론’에 입각한 해석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해석했다. 신어업협정 이전까지 대부분의 세계 지도들에서 ‘Dokdo’로 표시했다. 일본은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 아님을 세계에 내보이려는 노력에 집중하게 되었다. 6.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한국영토 연합국의 독도에 대한 판정과 정책은 1945년 1월29일부터 1952년 4월28일까지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하나의 일관된 합의에 의거한 것이었다.1894년 1월1일을 기준으로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영토 야욕으로 침탈 또는 편입한 모든 땅은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여 원주인에게 반환된 것이 연합국의 합의와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일제가 영토탐욕으로 1905년 1월28일 한국에서 침탈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수립되어 연합국(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인계인수한 그날부터 독도의 영유국가는 대한민국이고, 이 사실은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공인받았다. 연합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호도한 것으로는 이미 1948년에 확립된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합국이 1951년에 ‘독도는 일본영토’로 강화조약 본문에 기술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경우 독도는 이미 연합국의 판정에 의해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대한민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토이며,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한 국가가 아닌 제3국이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독도는 이미 국제법상 1948년부터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승인과 동의가 없이는 독도는커녕 독도의 돌멩이 하나도 일본은 물론이요 연합국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같이 독도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표현했을 경우에는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해석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억지인 것이다. 그것도 진실을 추구해서가 아니고 거짓 근거로 미끼를 만들어 로비를 해서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한 것으로는 기존의 한국 독도영유권이 부정될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의 ‘부속섬론’에 의거한 반박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독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문에서 명칭 누락과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국제법상으로 명명백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외규장각문서 9월 서울서 전시회

    |파리 장세훈특파원|프랑스가 병인양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문서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이 문서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140년만이다. 여기에는 한국에 필사본조차 없는 ‘유일권’ 63권의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될 전망이다. 또 한국과 프랑스 양국은 외규장각 문서반환 협상과는 별도로 문서내용을 디지털화해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기로 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8일(현지시간) 프랑스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와 총리 관저인 마티뇽궁에서 회담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 한 총리는 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외규장각 문서에 대한 전시회를 오는 9월에 한국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면서 “앞으로 전시회가 체계화, 정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드빌팽 총리도 “바브르 문화부장관을 한국에 보내 전시회 문제를 협의할 것”이라면서 “또 신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방식을 통해 한국이 정기적으로 외규장각 문서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외규장각 문서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것으로, 우리 정부는 1991년 처음 프랑스에 반환을 요구했다.1993년 한국을 방문한 당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 한권을 ‘영구임대’방식으로 우리 정부에 전달했지만, 이후 반환문제는 진척이 없었다. 앞서 한 총리는 7일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와 회견에서 식민통치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 역사를 정당화한 일본 교과서 및 종군 위안부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 한 총리는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식민통치를 정당화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한국 정부는 독도문제에서 양보할 의사가 없다.”면서 “일본을 상대로 조용한 정책은 이제 끝내겠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과 프랑스는 영사분야 협력을 위한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형사사법 분야에서 협력체제를 갖춘 최초의 유럽국가가 됐다. 우리나라는 프랑스를 포함, 미국과 중국 등 24개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shjang@seoul.co.kr
  • 美CIA가 나치전범과 한통속?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소재는 물론, 그가 사용하는 가명(假名)까지 파악했으면서도 옛 소련과 대적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CIA는 또 친위대 장교였던 하인츠 펠페를 독일 정보부에 근무하게 해 국익에 따라 전범들을 이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미 국립 문서보관소가 6일(현지시간) 기밀 해제한 2만 7000쪽 분량의 문서에 따르면 CIA는 1958년 3월 옛 서독 정보 관리들로부터 아이히만이 ‘클레멘스’라는 가명으로 1년 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거주해 왔다는 메모를 전달받았다. 그러나 CIA는 그를 체포할 경우 서독에서 미국을 도와 반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던 한스 글로브케 총리실장의 나치 전력이 드러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측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상)독도영유권-역사가 말한다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상)독도영유권-역사가 말한다

    지난 4월 ‘독도 대치’를 계기로 한국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동해 배타적경제수역(EEZ)경계획정 협상에 임한다. 오는 12·13일 도쿄에서 6년 만에 개최되는 5차 한일 EEZ협상은 독도 영유권을 기저에 깐 한판 외교전쟁이 될 전망이다. 신용하 독도협회회장으로부터 우리땅일 수밖에 없는, 독도를 기점으로 EEZ협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논거들을 세 차례에 걸쳐 듣는다. 독도는 역사적 권원(權原)에서 누구의 영토인가? 1. 한국의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원 독도영유권 문제에서 맨 먼저 고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누구의 땅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국제법에서도 마찬가지다.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권원(historical title)을 밝혀야 영유권의 최초의 국제법적 근거가 밝혀진다. 한국은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동해의 해상 소왕국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문헌상 명료하게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우산국이 울릉도만으로 구성된 소왕국이 아니라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다 포함한 해상 소왕국이었다는 사실의 확인이 필요한데,‘세종실록지리지’(1432년 편찬),‘동국여지승람’(1481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만기요람’군정편(1808년),‘증보문헌비고’(1908년) 등에 비교적 명료하게 기록돼 있다. 이때 조선왕조는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호칭했다. 일본은 18세기에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로, 독도(우산도)를 ‘송도’(마쓰시마)라고 불렀다.‘만기요람’군정편에서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길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皆) 옛 우산국 땅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기록했다. 이 고문헌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모두’ 옛 우산국 땅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우산도(독도)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도’의 명칭 자체도 ‘우산국’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일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2. 일본 고문헌도 “독도는 한국영토” 일본 정부는 일찍이 일본에서 최초로 독도(송도) 명칭을 든 일본고문헌으로 1667년 편찬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를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정작 이 보고서를 보니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국경은 은기도(隱岐島·오키섬)를 한계로 한다는 내용이다. 일본 최초의 독도관련 고문헌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1905년 2월까지 일본의 모든 고문헌과 고지도들은 모두가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한 것은 단 1건도 없다. 지난 2006년 5월12일 일본 고이즈미 정부 내각회의는 1954년 이후 한국의 독도 영유는 ‘불법점거’이며, 일본은 늦어도 17세기 중반 ‘독도영유권을 확립’했고,1905년 내각회의가 독도영유권을 ‘재확인’의결했다는 결정서를 국회답변 형식으로 의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억지이고 거짓이다. 시마네현에 사는 어부 2명이 조선 울릉도와 독도에 월경하여 고기잡이할 허가장을 신청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1618년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1656년 “송도(독도)도해면허”를 내준 일이 있다.‘도해면허’(渡海免許)는 외국에 월경하여 건너갈 때 내어주는 허가장으로 요즈음의 ‘여권’과 비슷하다. 일본 영토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가는 다른 나라인 조선영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 일본 도쿠가와 막부도 1696년 독도는 한국영토로 재확인 뿐만 아니라 1696년 1월28일 도쿠가와 막부 정부는 대마도주의 울릉도 독도 논쟁에 대한 조선의 항의를 받고 조사한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의 울릉도 독도 출어를 금지했다. 일본측은 이같은 내용의 외교문서를 조선정부에 보내왔었다.(사진1) 사실상 울릉도 독도 영유권 문제는 이때 종결된 것이다. 4. 일본의 명치유신 정부도 울릉도·독도를 조선영토로 재확인 1868년 1월 수립된 명치유신 정부도 마찬가지다. 명치정부 태정관(총리대신부)과 외무대신은 조선과의 신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1869년 12월 조선 부산에 외무성 고위관리를 파견할 때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부속(朝鮮附屬)이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 조사하도록 훈령했다. 그 조사보고서가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제목으로 ‘일본외교문서’제3책에 수록돼 있다.(사진 2) 이 일본 관찬 공문서는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과 외무대신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령이었음을 잘 인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더욱 결정적인 일본정부 공문서 자료가 있다.1876년 일본 내무성은 근대적 전국 지적도 작성을 위해 각 현에 자기현의 지도를 작성해 올리라고 훈령했다. 이 때 시마네현 지사가 동해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그 외의 1도 독도(송도)를 시마네현에 넣어 그릴까 빼고 그릴까, 영토의 넣고 뺌은 중대 안건이어서 현지사가 결정할 수 없으니 내무대신이 결정해 달라고 품의했다. 내무성은 약 5개월간 조사한 후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조선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문제는 극히 중대 안건이므로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게 최종 결정을 품의했다. 당시 일본 국가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 우대신(총리대신에 해당) 이와쿠라 도모미(岩倉見視·명치유신의 최고 지도자)는 1877년 3월20일 “울릉도(죽도)와 그 외 1도 독도(송도)는 조선영토로서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이니 그렇게 심득하라.”는 요지의 결정서 훈령을 3월29일 내무성에 보냈다. 태정관의 이 훈령은 4월9일자로 시마네현 지사에게 하달됐다.(사진 3) 이것은 결정적인 자료다. 일본의 근대정부도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이 면밀한 조사 검토 끝에 독도·울릉도는 일본영토가 아님을 공문서 훈령으로 명확히 결정해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관청에까지 훈령을 내린 것이다. 이 밖에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 지도, 수로지 등에도 증거는 다수 있다. 5. 일본의 1905년 독도침탈의 불법성과 무효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러시아 군함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일본 해군 망루를 독도에 1개, 울릉도에 2개 세우기로 했다. 마침 이 무렵 일본 시마네현 어업가 나카이(中井)란 자가 독도 부근 수역에 풍부한 강치(물개의 일종)잡이 독점이권을 한국정부로부터 얻기 위해 독도 대부신청서를 작성, 일본 중앙정부에 대행을 신청했다. 이는 ‘나카이 사업경영개요’(1910) 등에 잘 기록돼 있다. 이에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 기회에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고 억지 전제하고 일본에 ‘영토편입’해 침탈하려는 야욕을 갖게 됐다. 내무성은 그 섬이 ‘무주지’가 아니라 ‘우산도’란 이름의 조선영토라는 의견을 냈으나 해군성과 외무성은 러·일전쟁 수행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처음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키고 이름도 ‘다케시마’(죽도)로 호칭한다고 결정했다.1903년 나카이가 이 섬에 고기잡이 나간 일이 있으므로 이것을 선점(先占)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당시 국제법은 영토 편입의 전제로 (1) 무주지와 (2)무주지인 경우에도 그 주변 관련국에의 조회와 국제적 고시를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은 완전 불법이었고 무효였다. 왜냐하면 1903년 당시나 1905년 이전에 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독도의 소위 ‘영토 편입’을 한국 정부에 조회(照會)하지도 못하고 ‘국제고시(告示)’도 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0년 칙령 제41호로 지방관제 개정을 하면서 울릉도를 종래 강원도 울진군 소속에서 독립시켜 ‘울도군’을 신설했다. 또 울도군수를 임명해 행정구역을 울릉도와 독도(석도)로 발표하고 중앙 관보를 통해 각국 공사관에 보내 국제고시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거의 1개월간 고심 끝에 꾀를 내어 중앙 관보고시는 못하고 한국과 각국 공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시마네현의 현 ‘관내고시’(管內告示)를 하도록 했다. 고시일자가 1905년 2월22일인데, 이것이 현재 일본이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고시가 아니기 때문에 무효다. 일제는 러·일 전쟁을 1905년 9월5일 승리로 종결하자마자 같은 해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1월에는 대한제국 외무부를 폐지하고 내정도 지배했다. 일제가 독도침탈 사실을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알게 한 것은 외교권을 완전히 강탈해 간 다음인 1906년 3월28일. 울도군수는 놀라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에 영토편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즉각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중앙정부 참정대신과 내부대신은 일본의 독도침탈에 항의하고 부정하는 훈령을 내렸으나 외무부가 없어 일본정부에 외교문서로 전달하지 못하고, 현재 규장각에 고문서로 보존되어 있다. 독도는 1910년 한반도를 침탈한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5년 먼저 강점한 한국 땅이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날이 오면 한반도와 함께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한국의 고유 영토였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파리7대학 ‘한국정원’ 조성지원

    |파리 장세훈특파원|프랑스를 방문하고 있는 한명숙 국무총리는 7일(현지시간) 파리7대학이 추진하고 있는 ‘한국정원’ 조성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오전 파리7대학의 한국정원 후보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정원 조성은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는 50만유로(6억원) 규모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총리실은 전했다. 앞서 프랑스 한국학 연구의 본산인 파리7대학은 최근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면서 한국의 전통정원을 캠퍼스에 조성해 한국을 알리는 계획을 세우고 우리 정부의 지원을 요청해 왔다. 한 총리는 이어 파리 시내에 있는 옛 상하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건물을 찾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을 추념했다. 한 총리는 이 자리에서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로부터 프랑스의 독립운동 사료를 모은 ‘한국독립운동 자료집’ 제1권을 전달받았다. 한 총리는 이어 오후에는 툴루즈로 이동, 세계 최대의 민간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를 시찰하고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국내 관련업계와 협력증진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한 총리는 프랑스 방문 사흘째인 8일에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와 회담한 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예방, 두 나라의 동반자 관계 확대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문서의 반환을 공식 요청할 예정이다. 한 총리는 이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 shjang@seoul.co.kr
  • [오늘의 눈] 앞뒤 다른 환경 정보공개/박은호 공공정책부 기자

    참여정부는 유별나다고 할 만큼 정책홍보에 매달린다. 정부부처가 홍보시스템을 구축해 국민들과 직접 의사소통을 한 지 오래이고, 공무원에게는 인터넷 댓글 달기를 주문한다. 국정홍보전략회의에 불참한 고위공직자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리는가 하면,‘버블 세븐론(論)’이란 히트 홍보작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듯 전방위로 전개되는 참여정부의 홍보정책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기자는 “아니오.”라고 결론지었다. 이 정부 홍보정책의 또다른 주요 수단인 ‘정보공개 제도’의 맥빠진 실상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달 11일 환경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올 들어 4월까지 환경부가 생산한 4만 5783건의 문서목록을 일일이 읽느라 며칠이 걸렸다. 그런 뒤 환경부가 ‘공개’로 분류한 140건을 골라 “구체적 내용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회신 내용은 뜻밖이었다.62건은 공개,29건은 비공개 결정이라는 통지였다. 애초 공개대상으로 분류해 놓았지만, 막상 청구가 들어오자 비공개로 둔갑한 것이다. 나머지 49건에 대한 처리는 더 실망스러웠다.‘미군기지 환경오염조사 결과’ ‘수돗물의 미생물·바이러스 검사 결과’ 같은 문서인데, 이 역시 당초 공개대상으로 분류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정보공개 청구일로부터 26일을 넘긴 6일 현재까지 공개를 할 수 있다, 없다는 통보조차 없는 상태다. 이런 데도 정부가 운영하는 정보공개 사이트(www.open.go.kr)엔 ‘5월29일 통지완료’로 기록돼 있으니 해괴할 따름이다. 기자가 취재 방편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택한 것은 통상적인 취재방식으로는 정보 접근이 거부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마지막 수단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이마저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일반 국민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에 일방통행식 홍보정책이 정말 걱정스럽다. 박은호 공공정책부 기자 unopark@seoul.co.kr
  • 두 서울시장 정책개발 숨은 공로자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서울시 직무인수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최열 환경재단대표와 함께 이름을 올린 제타룡(67) 위원장은 누구일까. 서울도시철도공사 사장 출신인 그는 공무원사회에서 학구파이자 아이디어맨으로 통한다. 그는 책을 좋아한다.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다. 경제학 등 전문서적도 원본을 구해 읽는 수준이다. 그는 창의력과 아이디어의 원천이 ‘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공무원사회선 “책읽는 아이디어맨” 제 위원장은 지난해 도시철도공사 사장직을 물러나기 직전,“퇴임후 무슨 일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배밭을 일구며 살겠다.”면서 자신의 이름을 풀이했다.타룡(他龍)은 ‘다른 사람을 용으로 만드는 이름’이라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당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명박 시장의 대권가도에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오세훈 당선자 공약 개발 일등공신 그런 그가 오세훈 당선자 인수위의 공동위원장에 이름을 올렸다. 이를 두고 서울시에서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서 오 당선자가 다른 후보에 비해 완성된 정책공약을 선보인 것을 제 위원장의 공로로 해석했다. 실제 그는 오 당선자의 정책개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정책개발에도 깊이 관여했다. 청계천 복원에 대한 기술적인 검토도 그의 손을 거쳤다.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다. 하나는 1997년 4월 간부회의에서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상해 주위를 놀라게 한 일. 그는 당시 미국 대학의 통신강의를 들으며 살아있는 자료를 꾸준히 탐독하고 있었다.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고 있는 사실을 관련자료를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겸손해 했다.●청계천등 이명박시장 정책도 관여 이명박 시장의 성과물인 버스 준공영제도 그의 손을 거쳤다. 중앙차선제는 교통국장 시절 도입한 정책이다. 제 위원장은 이름에 걸맞게 이 시장에 이어 오세훈 호를 출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게 “부시장으로 오느냐.”고 묻자 “후배들이 있고, 할 만큼 했다.”면서 “발을 들여 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의 제타룡 위원장이 ‘용’을 만들어 낼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강동형기자 yunbin@seoul.co.kr
  • 이자율제한 사채업 음성화 우려

    법무부가 4일 발표한 서민법제 개선안은 채무자·세입자·농민 등 약자들의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회사 경영진에 대한 법적 의무 강화와 회사 설립 및 재무관리의 유연성 확보를 큰 줄기로 삼은 상법 개정안에는 최저자본금제 폐지 등 굵직한 사안들이 포함됐다.●모든 고리 사채에 법적 책임 물어 개정안이 법제화되기 위해서는 관련 부처 협의와 공청회 등 많은 고비가 남아 있다. 이자제한법 부활을 놓고 재경부는 “연 66% 이자율도 지켜지지 않는데, 더 낮추면 사채업이 다시 음성화될 것”이라면서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라고 혹평했다. 시장 원리로 정해지는 이자율을 법으로 규제하려는 발상 자체에 대한 경제부처의 거부감이 표현된 것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 김재훈 검사는 “이자제한법 폐지 이후 고리 사채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지금이 고리 사채를 근절할 기회”라면서 “개인들끼리 거래할 때 이자율의 가이드라인을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지금까지는 연 66% 이상 고리로 돈을 빌려준 대부업자가 재판에서 “대부업이 아닌 개인적으로 빌려준 돈”이라고 하면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이자제한법이 부활되면 이런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부업자가 아닌 모든 개인들끼리의 거래에서 채무자에게는 법정 이자율을 넘은 채무를 변제할 법적 책임이 없고, 고리를 받은 채권자는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관계부처·시장과 조화 어떻게? 이자제한법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법무부안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지적은 곳곳에서 나온다. 일부 개정안은 있어도 시행이 잘 되지 않았던 제도들이라 제도개편으로 얼마나 실효성이 생길지 의문시된다. 일례로 밭떼기 서면계약제는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에 이미 규정돼 있었지만, 현재 거래의 70% 이상이 주먹구구식 구두계약으로 체결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제 정비 외에 농민과 상인간 구두계약 관행을 없앨 방안이 필요하다. 전세보증 보험료를 신설하는 방안 역시, 집주인이 전세보증 보험료를 세입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 적정한 보험료 산정을 위해 보험사와의 협상도 넘어야 할 과제다.●기업집단에 상법 개정안 이해시켜야 상법 개정안은 대부분의 조항이 선택조항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획기적인 개선책도 눈에 띈다. 회사의 이익을 희생해 개인이득을 챙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이사의 자기거래 승인대상은 이사의 직계존비속과 배우자, 그들의 개인회사까지 확대된다.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한 조치다. 집행임원제도는 회사의 선택 사안으로 대기업군에서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발행되는 주식 종류가 다양해지지만 그 때마다 이사회 승인을 받도록 했다. 금전적인 출자보다 인적 공헌의 비중이 높은 투자펀드·벤처기업·컨설팅업 등 전문서비스 직종의 창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유한책임조합(LP) 등의 대책을 세웠지만, 이 회사들이 상장까지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준규 법무실장은 “제도 시행책이나 유인책은 관계 부처들의 논의를 거쳐 하위법에서 정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中50대 문맹 희대 사기극 軍문건 위조 100억원 대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문맹(文盲)인 중국의 중년 남성이 국가 군사위원회(軍事委院會)의 문건을 위조,100억여원대 사기 사건을 저질렀다가 붙잡혀 재판에 회부됐다고 중국 언론들이 1일 보도했다. 51세의 리우수린(劉樹林)은 초등학교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한 문맹.2004년 ‘군대 퇴역물자(退役物資)’를 다루는 책임자라는 내용의 문서를 위조해 ‘상하이 푸둥 발전은행’ 베이징지점으로부터 8200만위안(약 100억원)의 대출을 받아냈다. 이 가운데 아파트 구입과 각종 헤픈 소비 등으로 6600만여위안(약 80억원)을 뿌렸다. 리우는 문맹이었으나 다변(多辯)이며 화술(口才)이 뛰어나 은행을 속일 수 있었으며, 법정에서도 자신의 재주를 발휘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jj@seoul.co.kr
  • ‘약탈 국보’ 민간교류로 환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史庫本)의 반환은 지난해 10월 돌아온 북관대첩비와 더불어 한·일 민간차원의 협상을 통해 이끌어낸 문화재 반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휘준(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위원장은 “이번 실록 반환을 계기로 민간 교류를 통한 문화재 환수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도쿄대 서고에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올해 초. 그때부터 오대산 월정사를 비롯한 불교계와 시민단체, 정치권 등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지난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실록 환수를 위해 도쿄대와 수차례 협상을 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참여했다. 환수위측은 불법으로 유출된 문화재 반환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환수가 이뤄지지 않으면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환수위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쿄대는 최근까지도 “문부과학성, 문화재청, 외무성 등 관계당국과의 협의에 상당한 시일이 요구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도쿄대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한국측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일본 내 우익세력이 반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도쿄대의 이같은 고민은 서울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양국의 대표적 국립대간 학술교류협력 차원에서 고문서를 기증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다.‘약탈문화재 반환’의 의미보다 학술교류를 강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대와 도쿄대 총장이 최근 적극적인 학술 교류를 약속하면서 반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2004년 도쿄대가 법인화되면서 학교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김기배 문화팀장은 “그동안 서울대보다 환수위가 협상에 적극적이었지만 향후 실록 보관 및 활용 등을 고려할 때 일본측이 서울대 규장각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실록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온 환수위측은 조선왕조 시절 오대산 월정사가 실록 사고 관리를 맡아 왔다는 점을 근거로 ”반환되는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이 아니라 월정사가 소장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환수위 실무자들이 30일 3차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상태에서 일본측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다. 환수위 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도쿄대의 결정은 협상주체인 우리 환수위를 무시하는 처사”라면서 “일본측이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경 김기용기자 chaplin7@seoul.co.kr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에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한 것들을 실록이라 하며 이런 실록을 총칭해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한다. 조선 왕은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해야 하지만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은 제외한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는데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목활자로 인쇄된 실록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주 사고(史庫)만이 살아남은 교훈을 거름삼아 깊숙한 산중으로 옮겨져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에 보관된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번에 반환되는 것은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다.
  • 美, 한국전때 피란민 총격 명령

    “만약 피란민들이 미군 방어선의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경고사격을 하라. 그들이 (남하를) 지속한다면 사살될 것이다.” AP 통신이 29일 공개한 한국전쟁 당시 존 J 무초 주한 미국대사의 서한이다. 미 국무부 앞으로 보내진 이 서한은 한국전쟁에서 모든 미군 부대에 전달된 방침, 즉 피란민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는 명령(shoot to kill)이 시달된 것임을 밝혀 주는 증거라고 전했다. 딘 러스크 미 국부부 차관보에게 전달된 ‘무초 서한’은 1950년 7월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서 미군이 수백명의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한 바로 그 날 작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민간인 학살이 미국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 회의에서 결정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노근리 학살 하루 전인 7월25일 밤 무초 대사를 대리해 참석한 해롤드 노블 1등서기관, 미 8사단 고위 참모, 한국 관리 등은 회의에서 사살 방침을 정했다. 회의에서는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면 사살한다는 유인물의 공중 살포도 결정됐다. 이후 미군 사령부는 피란민에 대한 총격 명령을 반복해서 지시했다. 무초 대사는 러스크 차관보(훗날 국무장관)에게 “(이 전술이) 미국 내에서도 반격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1982년 비밀 문서에서 해제된 무초 서한의 사본은 전 하버드 역사학자인 샤흐르 콘웨이 란츠를 통해 AP 통신이 입수한 것이다. 이 통신은 학살 행위의 정황을 보여 주는 비밀해제 문서를 19건이나 찾아냈다고 전했다. 미 국방부는 그동안 노근리 학살을 피란민 사이에 적이 숨어 있는 것을 두려워 한 병사들이 명령없이 발포한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공식 입장은 ‘비계획적 살상’이라는 것이다. 목격자들은 당시 학살 사망자가 여성과 어린이 등 400여명이라고 증언했다. 한편 노근리 학살 피해단체들은 이날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이 유엔(UN)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1950∼1953년 일어난 모든 학살 행위를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AP 통신이 전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씨줄날줄] 최악의 배신자/이목희 논설위원

    “자프(일본인을 멸시해 부르는 표현)는 최악의 배신자”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세계 외교를 주물렀던 1970년대 초에 했던 말이 비밀문서 공개로 뒤늦게 알려졌다. 키신저의 이같은 언급은 미국·일본 대 중국·러시아 간의 블록 대립으로만 동북아 미래를 예단하면 안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키신저의 지적 대부(代父)는 한스 모겐소이다. 현실주의자 모겐소는 국제정치를 권력투쟁이론으로 설명했다. 당연히 도덕·이념보다는 국가이익과 힘을 앞세웠다. 배신을 마다않는 비밀외교도 용인했다. 키신저는 모겐소의 이론, 미국 국력, 특유의 협상력을 바탕으로 1960,70년대 국제질서를 바꾸었다.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 체결로 데탕트(긴장완화) 시대를 열었다. 베트남 평화협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중동전 종결협상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스포츠 교류를 국제교섭에 활용하는 ‘핑퐁외교’, 왕복 방문으로 애로를 타개하는 ‘셔틀외교’가 키신저로부터 일상화했다. 키신저 외교의 정점은 미·중 수교. 외톨이 중국을 국제외교무대로 끌어내는 작업이었다. 키신저의 물밑 노력 끝에 1972년 초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중국을 상종 못할 적대국으로 보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닉슨 쇼크’는 청천벽력이었다. 타이완은 물론 한국·일본에게 미국은 ‘최악의 배신자’였던 것이다. 그때 일본 지도자는 다나카 총리였다. 그 역시 도덕·이념과는 거리가 먼 현실주의자였다. 다나카는 미국이 중국과 수교협상을 끝내기 전에 서둘러 중국을 찾아 중·일 국교정상화를 이끌어냈다. 키신저가 어렵게 닦아놓은 길을 새치기한 형국이었다. 평소 일본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키신저가 ‘최악의 배신자’라고 흥분하는 배경이 된다. 30년도 더 지난 일에서 한국 외교는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부시 미 행정부가 민주주의 확산을 내걸고 있지만 결국 키신저식 힘의 팽창외교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중·일 사이에서 영원한 협력은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동북아정책의 근본은 세력균형이다. 지금은 중국이 급속도로 커가니 일본을 통해 견제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본격화하면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길섶에서] 책나눔/오풍연 논설위원

    언론사에 있다 보니 이런저런 우편물을 많이 받는다. 즉시 받을 때도 있지만,6개월∼1년이 지나 받아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 일에 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보물로 판단해 개봉도 하지 않고 버리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정작 중요한 문서까지 휴지통에 넣었다가 쩔쩔매는 모습도 종종 연출된다. 모두 자기 탓인 걸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여러가지 일들을 봐온 터라 우편물을 받으면 반드시 뜯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최근 누런 봉투로 싼 조그만 소포를 받았다. 보낸이의 이름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리학박사 이민규씨가 지은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는 책이었다. 또 맨 첫장 속지에는 “‘끌리는’ ○○○님께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마침 일독을 권유할 만한 책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더없이 기뻤다. 그러나 아직도 보낸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명함이라도 동봉했으면 좋으련만…. 따지고 보면 책만큼 값어치 있는 선물도 없는 것 같다. 꼭 보고 싶은 책을 받았을 때 기쁨은 배가된다. 책 나눔운동을 함께 펴나가자.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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