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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도동 막내 ‘무대’ 손 떨며 오열… 동교동계 한화갑 “참 아쉽다”

    상도동 막내 ‘무대’ 손 떨며 오열… 동교동계 한화갑 “참 아쉽다”

    22일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정치인과 각계 인사의 조문 행렬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김 전 대통령의 측근 그룹인 ‘상도동계’ 인사들은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전·현직 청와대 인사들과 주요 여야 정치인 등 3200여명(오후 10시 30분 현재)이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었다. 비보를 접하고 가장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온 사람은 김 전 대통령과 정치 역정을 함께한 상도동계 인사들이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마지막 국회의장을 지내고 현재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 전 의장은 오전 2시 30분쯤 처음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상도동계 막내였던 김 대표도 이날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날이 밝자마자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 손이 떨렸는지 불붙인 향을 바닥에 떨어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며 “그는 최초의 문민정부를 연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이들은 뒤이어 장례식장을 찾은 서 최고위원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등 상주와 마찬가지로 조문객을 맞았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 박찬종 전 의원은 “직정경행(直情徑行·생각한 것을 꾸밈없이 행동으로 나타냄)의 신념의 지도자, 안식하소서”라고 명복을 빌었다. 상도동계와 정치적 협력 관계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에서는 한화갑 전 의원이 참석했다. 그는 “오늘같이 사회가 복잡하고 대립하면서 과거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필요할 때 이런 분을 잃게 돼 참 아쉽다”고 밝혔다.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포함한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23일 함께 조문할 계획이다. 권 고문은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항상 약속 장소에 15분 먼저 와 계셨다. 집에 온 손님에게는 손수 커피나 차를 끓여 대접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정부’ 인사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 김효재 전 정무수석, 이동관 전 홍보수석,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 ‘친이(친이명박)계’는 이 전 대통령이 오전 11시쯤 장례식장 입구에 도착하자 동행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간 이 전 대통령은 빈소에 15분가량 머물렀다. 이 전 대통령은 문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재인 대표 등 새정치연합 지도부와 조우했지만 악수만 나눈 뒤 바로 헤어졌다. 문 대표는 빈소를 방문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중·고교 선배이시고 (제가) 동향 후배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좀 더 비통하다”고 말했다. 그는 트위터에 “민주화의 큰 산이었고 문민정부를 통해 민주정부로 가는 길을 연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오후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과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 장의(葬儀) 위원장으로 결정된 황 총리는 방명록에 ‘민주화를 이루시고 국가 개혁을 이끄신 발자취를 우리 모두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20분간 유족과 장례 절차를 상의했다. 청와대에서는 이병기 비서실장과 현기환 정무수석이 빈소를 찾았다. 주요 여야 정치인도 빈소로 몰려들었다. 새누리당에서는 원유철 원내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인제 최고위원 등이 모습을 보였고 새정치연합에서는 정세균 의원을 시작으로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전 의원, 안철수 의원, 손학규 전 상임고문 등이 고인을 기렸다.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국회에 입성한 손 전 고문은 칩거 중인 전남 강진 토담집에서 서울로 상경해 “현대 민주주의 역사라고 하면 김영삼 정부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으로 생각된다”며 명복을 빌었다. 안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씀처럼 통합과 화합을 위한 정치로 국민으로부터 다시 신뢰받는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당초 24일 문 대표가 제안한 문·안·박(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 이후로 미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부가 영결식을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하기로 하면서 국회 본회의도 오전 10시로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본회의는 통상 오후 2시에 열리지만 시간이 겹치면서 여야가 모처럼 의견을 같이한 셈이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이건희 첫 사면·복권… 정주영과는 ‘사후 화해’

    이건희 첫 사면·복권… 정주영과는 ‘사후 화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 재계 총수들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재계 총수로는 단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꼽힌다. 이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첫 번째 사면·복권을 받은 재계 인사다. 1996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노 전 대통령에게 직무와 관련해 4회에 걸쳐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서 서울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회장은 항소하지 않아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이 회장에게는 첫 번째 사면·복권이었다. 반면 이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 설화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건은 그가 1995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현지 특파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정부를 일갈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문민정부 정권 실세와 관료들까지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에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재계 인사로 회자된다.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초기 당시 현대그룹이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 명예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선 당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어 대선 패배 직후인 1993년 1월 정 명예회장은 출국 금지를 당한 데 이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직후 그는 의원직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당시 재계에서는 일종의 보복 수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복권됐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정 명예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면한다”고 통보한 일 이외에는 별도 회동을 하지 않는 등 불편한 심기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빈소를 직접 찾아가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우리나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인데, 그런 족적을 남긴 분이 가시니 아쉽다”고 조문하며 ‘사후 화해’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재계 “경제 선진화·부패 척결 일조… 경제 발전에 매진하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재계도 일제히 추모의 뜻을 내비쳤다. 경제단체들은 22일 잇달아 논평을 내고 김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공직자 재산 공개 등 우리나라가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기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경제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 유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뜻을 표한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OECD 가입을 추진해 한국 경제의 위상을 높였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도록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재계는 김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투명하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도록 노력하신 생전의 업적을 기리며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논평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면서 “금융, 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해 경제개혁을 이끌었고 하나회 척결과 고위 공직자 재산 등록 의무화를 통해 사회 부정부패 척결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인이 오랜 기간 민주화를 위한 열정과 헌신을 통해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며 “경제 선진화 기틀을 마련한 고인의 업적을 기린다. 국민 모두 슬픔을 이겨 내고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김 전 대통령이 “1990년대 확대된 경제 규모와 고도화된 산업구조에 걸맞은 규제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시장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초래되면서 국민에게 지우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남긴 것은 아쉬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지만 이는 경제 선진화를 위한 체질 개선의 계기였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중앙회도 “김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청 개청, 벤처기업법 제정 등 중기·벤처 지원의 틀을 새로 마련하는 등 중소기업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며 “특히 (고인은) 일류 정보기술(IT) 강국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악연’ 전두환 “좋은 곳 가셨을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22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권 인사들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보도자료를 통해 “근래 언론 보도를 통해 병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며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분이니까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직접 문상을 하지 못한 노태우 전 대통령도 측근들에게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전직 대통령은 문민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이 ‘과거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추진했을 당시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된 ‘악연’이 있다. 빈소를 직접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완전한 한 축이 떠났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계실 때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때 꼭 완쾌해서 전직 대통령끼리 자주 뵙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고 회고한 뒤 “오늘 퇴원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 나라의 마지막 남은 민주화의 상징이 떠나셨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 국민들은 김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양김’으로 불리는 두 전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의 동지이자 영원한 정치적 경쟁자였던 점에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은 남편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고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도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과 문민정부 출범을 통해 민주주의의 길을 넓힌 지도자로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에도 영향을 끼친 분”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독일을 공식 방문 중인 정의화 국회의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의 최선봉장이었던 이 시대의 영웅을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비견하리오”라며 깊이 애도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사설] ‘민주화의 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며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어제 새벽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88세의 일기로 영면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아호인 거산(巨山)처럼 현대사의 굽이마다 뚜렷한 족적과 공과를 남겼다. 우리는 헌정사의 거목(巨木)을 잃은 상실감이 적지 않을 온 국민과 함께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 아울러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이제 고인이 생전에 열망했던 민주화의 완성이나 신(新)한국의 건설은 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에는 우리 현대사의 부침과 영욕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무이한 나라다. 이 같은 기적을 거론하면서 그 눈부신 성취의 양대 축인 민주화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 엄혹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의원직 제명과 가택 연금, 그리고 목숨을 건 23일간 단식 등 고인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탄압과 그의 응전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가는 가시밭길 같은 역사 그 자체였다. ‘정치인 YS’에 대해서는 호오(好惡)와 포폄(褒貶)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의 신념처럼 이 땅에 ‘민주 헌정’을 뿌리내리게 한 공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걸어온 역정(歷程)을 되돌아보자. 그를 슬픔 속에서 떠나보내는 이 순간 고인의 과보다 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고인은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협력과 경쟁을 통해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화를 일궈 냈다는, 세계적 평가는 많은 부분 고인과 DJ의 영전에 받쳐야 할 헌사일 수 있다. ●민주화, 군정 종식의 기수 YS 양김(兩金)이 펼친 유신 반대나 대통령 직선제 관철 투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의 4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대장정이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결합해 1987년 5년 단임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이끌어 내면서다. 그래서 YS의 14대 대통령 당선은 고인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지만, 헌정사에서 군 출신 대통령의 집권을 끝내고 문민 시대를 다시 열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이겨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고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치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척결 등으로 군부에 힘이 실린, 32년간의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공적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솔선한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부패 척결을 제도화한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고인이 광주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5공 신군부에 유혈 진압의 죄를 묻는 등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던 시도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물론 고인의 이런 정치 역정에 대해 여전히 명암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어찌 보면 그가 이끈 문민정부의 공과는 훗날 사가(史家)들로부터 엄정한 재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도 없지 않을 게다. 특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단행한 ‘3당 합당’이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행보가 그렇다. 전자는 집권을 위해 비판의 대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손잡았다는 점에서, 후자는 몇몇 악재와 비리로 문민정부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이를 덮으려 자의적으로 단행한 것처럼 비치면서 벌써 국민적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더구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정치적 책임과 흠결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어받아야 할 신(新)한국 건설의 꿈 DJ에 이어 YS의 서거로 소위 ‘3김(金) 정치’ 시대도 저물어 가고 있다. 다만 3김 정치의 한 꼭짓점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직 생존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3김 정치식(式) 정치 행태와 강고한 지역주의로부터 우리 정치가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게다. 당장 아직도 우리 정치권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지역주의의 망령부터 배격해야 한다. YS의 상도동계니 DJ의 동교동계니 하는, 소위 가신 정치의 폐해를 상기해 보라. 차제에 정치권이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면서도 지역 갈등을 등에 업고 정치 생명을 연장했던 3김의 정치 행태와는 영원히 절연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양김의 퇴장은 3김 정치가 드리운 부정적 그늘을 확실히 걷어 낼 적기다. 더욱이 1987년 5년 직선제 개헌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가는 시점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국가 정책에마저 흑백 논리로 접근해 발목을 잡던 것을 당연시하던 양김 시대의 이분법과도 결별할 때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 선진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맴돌고 있다. 무릇 시민의 자유와 공공성의 조화로운 추구가 민주공화정 운영의 핵심 원리다.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선 제 몫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높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움직임은 미약하다.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이른바 4대 개혁은 여전히 난항이다. 이는 어쩌면 김 전 대통령의 생전에 치유하려 했던 신(新)한국병이 더 위중하다는 증좌인지도 모르겠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가 이루려 했던 신한국 건설은 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 됐다. 다만 그나 그가 속했던 3김 정치의 긍정적 유산은 물려받되 부정적 측면은 소거하는 일은 여야 정치권에 주어진 엄숙한 소명이다. 그중에서도 합리적 토론과 소통으로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완성해 정치가 더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안 되게 하는 게 으뜸가는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은 상도동계가 핵심이다. YS는 특유의 ‘인물 발탁’으로 한국 정치사에 수많은 ‘정치적 자손’을 남겼다. 이 중엔 YS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여의도를 호령하는 인물들도 있다. ●‘정치인 양성 사관학교’ 상도동계 1세대인 ‘좌(左)동영 우(右)형우’를 비롯해 서석재·김덕룡 전 의원,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4선 정병국·이병석 의원 등은 모두 YS와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거나 YS가 발탁한 인사들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가 발탁했다. 진보 진영의 야권 인사들도 YS가 제도권 정치로 흡수했다. ●김무성 1987년 막내로 입문 김 대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거쳐 1987년 상도동계 막내로 입문한 뒤 김영삼 정권 초대 민정수석비서관, 최연소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서 최고위원은 YS의 야당 총재 시절 비서실장, 문민정부 정무장관을 역임했다. 최형우 전 의원은 고 김동영 의원과 함께 민주화 운동 시절 YS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정치적 동지다. 문민정부 2인자로 내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1997년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고문과 여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한 4선 김동영 전 의원은 1991년 55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북고 동기로 민정당 출신인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은 당시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공을 세운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으로 불렸다. 164㎝ 단신으로 별명이 ‘작은 거인’이었던 그는 조직의 귀재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설을 제기한 뒤 총무처 장관직에서 8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2012년 대선후보 놓고 갈려 상도동계는 2012년 대선 때 지지 후보를 놓고 갈렸다. 전북 익산 출신으로 상도동계의 드문 호남 인맥인 김덕룡 전 의원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하며 다른 길을 걸었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며 YS와 갈라서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깜짝 발탁됐다. 세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YS 정부 최연소 노동부 장관 출신인 이인제 최고위원도 YS가 발굴했다. 특히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정권에서 감사원장·총리로 중용되는 등 YS가 직접 대권 가도를 놓아줬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서강대 교수 시절 광명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 1996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민중당 소속 운동권 정치가였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총재였던 YS가 영입했다. 15대 총선 때는 ‘YS 키즈’가 대거 배출됐다. 정의화 국회의장,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경남도지사, ‘박종철 검사’ 안상수 창원시장, 이완구 전 국무총리 모두 신한국당 초선 동기다. ‘YS의 영원한 입’ 박종웅 전 의원, 홍인길 전 총무수석도 YS 직계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상도동 가신그룹] ‘킹메이커’ 김윤환에 좌는 김동영 우는 최형우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 계보는 상도동 가신 그룹이 핵심이다.  상도동계 핵심은 최형우·서석재·김덕룡·김윤환 전 의원, 김동영 전 장관, 서청원·김무성 의원 등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YS 집권을 전후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사이 정치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인 김윤환 전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정무수석을 역임한 그는 문민정부 출범 때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호 허주(虛舟)로 더 유명한 그는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대권을 노렸으나 이회창 후보에게 투항하면서 꿈을 접었다. 이 후보의 대선 패배 뒤에는 “권력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발언을 남겼고, 2000년 한나라당 공천 탈락 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지만 낙선, 2003년 말 신장암으로 별세했다.  상도동의 ‘좌동영 우형우’ 가운데 한 명인 최형우 전 의원은 일찍 세상을 뜬 김동영 전 장관과 함께 YS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1971년 야당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 첫 배지를 달며 YS와 인연을 맺은 그는 YS 당선 이후 민자당 사무총장으로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주도하는 등 변화와 개혁의 선봉에 섰지만 1994년 부천세무서 탈세 사건으로 경질됐다. 1996년 15대 총선에 당선돼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1997년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이었다. 164㎝의 단신인 탓에 ‘작은 거인’이란 별명으로 불린 그는 조직의 귀재였다. 1992년 대선 당시 나라사랑실천본부란 사조직을 이끌며 YS 당선에 일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총무처 장관에 발탁했으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설을 주장해 8개월 여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덕룡 전 의원은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지지를 선택하며 상도동계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앞서 2007년 대선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지지 핵심멤버인 6인회 멤버로 박근혜 당시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1970년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정계 입문해 5선을 지낸 관록의 정치인이다.  반면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낙천, 총선 공천헌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정치적 암흑기를 겪다 최근 복권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부활했고, 10·30 재보선을 통해 원내 복귀에도 성공했다. 기자 출신으로 민한당 국회의원 시절이던 1981년 YS와 처음 만난 그는 1989년 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1996년 신한국당 원내총무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2002년 한나라당 불법대선자금 사건을 책임지고 탈당, 실형 선고를 받는 등 부침을 겪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연을 맺고 친박(친박근혜)계 원조 좌장 역할을 해 왔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현재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4·24 재보선으로 복귀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상도동계의 막내다. 1992년 대선에서 정책보좌역을 맡으며 YS와 첫 인연을 맺었다.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명도 보스 정치의 한복판이었던 상도동에서 정치 역정을 겪으며 얻게 됐다.  YS의 가신이자 대변인격으로 불렸던 박종웅 전 의원은 현재 대한석유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는 YS 퇴임 이후에도 대립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연대21이라는 조직을 주도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원했지만 18대 총선 때 부산 사하구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천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한때 건강이 악화됐지만 최근에는 기력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대선 때도 고인과 함께 투표소에 나와 한 표를 행사했다. ‘YS 황태자’로 불렸던 차남 현철씨(전 여의도연구소장)는 지난해 총선 공천 때 경남 거제에서 낙천한 뒤 탈당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시절 ‘소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권부의 핵심에 있었지만 집권 말기 조세포탈 혐의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YS 서거]금융실명제 ·하나회 해체 성과, 외환위기 초래 뼈아픈 실정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첫번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가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현재 은행 예금에서 본인 명의로만 계좌 개설이 가능한 것이 이 제도 때문이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사기사건이 발생하면서 논의가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대통령의 ‘긴급명령’ 형식으로 시행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 법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금융거래에서 부정부패·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 돈’을 걷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으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 대부분이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한지 10여일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며 군부 척결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42개의 ‘별’이 물갈이 됐고, 하나회는 해체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인정부 이후 처음으로 ‘문민 정부’를 표방하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공직 후보자의 재산공개 의무화,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최대 과오로 꼽힌다. 재벌들의 지나친 문어발 확장 묵인과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실이 원인이 됐다. 1997년 11월 21일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국가는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원·달러 환율은 2000원대까지 치솟았고,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졌다. 김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임기초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임기 초반 90%를 웃돌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들 현철씨 비리와 외환위기 등으로 임기 종반 10%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와 관련,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가입국이 된 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선진국 진입’에만 도취 돼 ‘세계화’라는 명분 하에 해외 기업과 자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 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는 또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거래를 강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고, 이에 중소기업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문제만 생기면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을 내려 개혁적 이미지는 한층 부각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효성에서 적잖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문민정부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 등은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평등과 복지 확대에 있어서 소홀했던 것은 과거 정권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1927 경남 거제 출생  -1950 학도의용군 입대,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요원  -1951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졸업   손명순 여사와 결혼  -1952년 장택상 국무총리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  -1954 만 26세 최연소로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5·6·7·8·9·10·13·14대 국회의원(9선)  -1954 자유당 탈당  -1963 군정 연장 반대 데모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1965 야당 원내총무 5선  -1969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다 초산테러 당함  -1972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 반유신투쟁 전개  -1974 신민당 총재로 선출  -1979 ‘YH사건’ 등으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뉴욕탐임스 회견을 빌미로 국회의원직 제명  -1980 1차 가택연금  -1981 민주산악회 발족  -1982 2차 가택연금  -1983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  -1984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공동의장  -1985 신한민주당 창당, 2·12 총선에서 선거혁명  -1987 통일민주당 창당, 총재 취임 이후 6월항쟁 주도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출마해 낙선  -1989 한국 정치인 최초로 소련 방문  -1990 민주·민정·공화 3당 통합 선언,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2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92 제14대 대통령에 당선  -1993 문민정부 출범  -1993~1998 금융실명제 도입,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군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1998 대통령 퇴임 이후 상도동 자택에 머물며 정치활동  -2013년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한국교육은 왜 권위주의적 자율화로 귀결됐나

    한국교육은 왜 권위주의적 자율화로 귀결됐나

    교육 관련 정책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히려 조변석개에 가까웠다. 입시정책은 수없이 바뀌었고, 여러 형태의 교육개혁안이 제시되고 명멸돼왔다. 그러나 이는 최근 20년만 놓고 큰 틀에서 보자면 모두 1995년 발표된 ‘5·31 교육개혁’의 우산 아래에서 이뤄진 것들이었다. ‘5·31 교육개혁’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공급자 중심의 교육체제를 학습자 중심의 교육체제로 바꿨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당초의 의도와 달리 자율이라는 명분하에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경쟁과 효율의 가치를 교육 현장에서 부추긴 정책으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엄존하고 있는 상태다. 20주년을 맞아 평가 및 대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가 정책적 관점과 함께 학자로서 객관적 분석과 평가를 함께 담은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다산출판사)을 펴냈다. 그는 하연섭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와 함께 30여 명의 교육 관련 학자 및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교육개혁안 발표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MB정부에 이르기까지 ‘5·31 교육개혁’이 어떻게 승계, 변용, 발전했는지 분석한다. 안 명예교수는 김영삼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도 교육부총리로서 행정의 영역에서 교육 정책을 총괄했다. 그는 “5·31 교육개혁의 여러 가지 성과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자율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율화, 분권화, 열린 교육을 위한 제도적 전제 조건의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면서 각계 관계자들이 참가하는 교육정책에 관한 사회적 대타협기구로서 ‘미래한국교육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 “도대체 왜?”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 “도대체 왜?”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 “도대체 왜?” ‘린다김 신정아’ 무기 로비 사건으로 구설에 휘말렸던 로비스트 린다김(본명 김귀옥)이 신정아와 비교하는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린다김은 자신과 비슷한 권력형 스캔들의 중심에 선 신정아와 비교하는 언론 보도에 발끈했다. 린다김은 학력 위조 사건의 주역인 신정아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부적절한 관계’가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나면서 언론에 다시금 거론돼 관심을 끌었다. 복수의 매체는 10일 “린다김이 측근들에게 ‘일부 언론에서 나와 신정아가 비슷하다고 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린다김은 “나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각국 고위 인사를 상대로 일하는 로비스트”라면서 “그러나 신씨는 개인의 이익을 좇아 학위를 위조해 사른 사람을 속이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기꾼이다. 나와 신정아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린다김은 1996년 문민정부 당시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1995년 무기 중개업체인 PTT사를 설립했다가 IMCL로 사명을 바꾸기도 했으며 미국의 E-시스템사와 이스라엘 IAI사의 로비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하며 “비교대상 아냐”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하며 “비교대상 아냐”

    린다김 신정아와 비교하자 발끈하며 “비교대상 아냐” ‘린다김 신정아’ 무기 로비 사건으로 구설에 휘말렸던 로비스트 린다김(본명 김귀옥)이 신정아와 비교하는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린다김은 자신과 비슷한 권력형 스캔들의 중심에 선 신정아와 비교하는 언론 보도에 발끈했다. 린다김은 학력 위조 사건의 주역인 신정아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부적절한 관계’가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나면서 언론에 다시금 거론돼 관심을 끌었다. 복수의 매체는 “린다김이 측근들에게 ‘일부 언론에서 나와 신정아가 비슷하다고 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린다김은 “나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각국 고위 인사를 상대로 일하는 로비스트”라면서 “그러나 신씨는 개인의 이익을 좇아 학위를 위조해 사른 사람을 속이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사기꾼이다. 나와 신정아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린다김은 1996년 문민정부 당시 백두사업 응찰업체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1995년 무기 중개업체인 PTT사를 설립했다가 IMCL로 사명을 바꾸기도 했으며 미국의 E-시스템사와 이스라엘 IAI사의 로비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글로벌 시대] 시진핑의 중국 대개조/민재홍 덕성여대 중문학과 교수

    [글로벌 시대] 시진핑의 중국 대개조/민재홍 덕성여대 중문학과 교수

    중국 시진핑은 신년 회견에서 2015년 춘제(春節) 메시지로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거해 나라를 통치)을 제시했다.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주요2개국(G2)의 반열에까지 올라 세계 경제를 호령하는 중국이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국민들의 문화 의식 낙후, 준법 의식 결여, 부정 부패, 극심한 빈부 격차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들로 인해 명실상부한 선진사회 진입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춘제 메시지는 관시(關係)가 아닌 법과 시스템에 따른 원칙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시진핑의 강력한 의지다. 국제 비정부기구(NGO) 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2014년 세계부패지수에서 중국은 175개 국가 중 100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패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다. 저우융캉(周永康)으로 대표되는 고위 관료들의 부패와 축첩, 관언 유착, 지방 하급 관리들의 부정 축재들이 사회 깊숙이 만연해 있다. 최근 거액의 뇌물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 부패 관료의 뇌물 수수액은 무려 63억원에 달하고, 중국의 최하위급 관리인 촌관(村官)들도 국가보조금 횡령, 강제철거 주택 빼돌리기 등으로 거액의 불법 자금을 만들 정도다. 이러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시진핑은 부패와의 전쟁, 호화 사치 금지령을 선포했다. 공무원들의 회식 제한, 유흥업소 출입 금지 등으로 술 매출이 줄고, 고가의 선물 금지로 백화점과 슈퍼마켓의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 고급 의류, 가방과 같은 명품 소비가 줄고 카지노와 골프장이 된서리를 맞고 있으며, 5성급 호텔도 도산하는 등 사회 정풍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인의 시민의식과 도덕의식에 대한 시진핑의 강력한 중국 대개조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문민정부는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공무원 골프금지 등 개혁적인 조치와 이전 군사정권하에 만연하던 권력 부패와 비리 척결을 통해 신한국 건설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당명도 신한국당이라고 바꿀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재 시진핑의 중국도 대대적인 사정과 뇌물 수수 금지, 권언(權言) 유착 금지 등을 통해 신중국을 건설하고 있다. 정치적·역사적 관점에서 1949년 10월 1일 출범한 중국 대륙의 공산당 정부를 신중국이라고 칭하는데, 2015년 시진핑 중국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문화적·의식적 수준의 신중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전 후진타오(胡錦濤)로부터 모든 힘과 권력을 물려받아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고, 시진핑이 모든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시진핑에 대해 궁지에 몰린 부패 관료들의 역습이 있기도 하다. 저우융캉은 시진핑 암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탐관오리들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왕치산(王岐山) 중국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역시 여러 번 암살 시도를 당했고 청산가리가 담긴 연하장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는 이미 공고해졌고, 개혁과 여유가 함께 뒤따르고 있다. 올 초 시진핑이 신년 인사를 할 공산 원로 100인의 명단에는 정적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자신의 정치 철학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안전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국가 대개조를 주창했다. 현재 진행되는 중국의 대개조는 부패 척결과 사회 정풍을 통해 중국인의 의식과 수준을 대개조하는 차원이다. 중국이 이를 통해 경제 발전 속도에 걸맞은 국민 의식과 문화 수준을 갖춘 명실상부한 선진 중국으로 도약할지 기대된다.
  • [2015 경제정책 방향] 9월 신학기제 도입 뜨거운 논란 예고

    정부가 9월에 새 학년의 첫 학기를 시작하는 ‘9월 신학기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22일 밝히면서 교육계에는 뜨거운 논란이 예고된다. 교육부는 관련 연구단을 꾸려 초안을 만들고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 설문조사 등의 방식으로 공론화를 거쳐 도입 여부와 시기, 방법 등을 결정할 계획이다. 2016년까지 9월 신학기제 도입 여부를 결정할 계획으로, 이르면 2017학년도부터 부분적으로 9월 신학기제가 시행될 가능성도 나온다. 하지만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은 만큼 공론화 과정에서 찬반 논란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차원에서 9월 신학기제 도입 주장이 나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현재의 3월 학기제는 1961년 정착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외국 대학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문민정부는 1997년 교육국제화 방안으로 제4차 교육개혁안에서 9월 학기제 전환을 제안했다. 또 2006년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가 9월 학기제를 2011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정부회계연도와 교육회계연도가 다르다는 문제 등으로 역시 무산됐다. 2012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9월 학기제 도입을 검토했다고 밝힌 적은 있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계속되는 도입 주장에는 이유가 있다. 교원과 학생 등의 국제적 교류가 활발한 추세에 부응하고 국내 학령기 인구가 감소하는 것에 대응하는 차원이라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2006년에 9월 신학기제를 연구, 발표했던 윤종혁 한국교육개발원 당시 연구위원은 ▲여름방학을 이용한 교원인사·연수·입시업무의 효율화와 학생들의 자발적 야외 활동 유도 ▲1학기와 2학기 수업내용 간 연계성을 높여 학습의 집중도 제고 ▲국가 간 학생·교원 교류 활성화 등의 장점을 들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다. 취학·교육과정 조정에 따른 학교, 학생, 학부모 혼란이 불가피하다. 특정연도의 졸업자가 2배로 늘면서 대입 및 기업 신입사원 채용 시 경쟁률 급상승 등의 문제도 있다. 교육과정 재구성 및 교원 증원·교육시설 증축 등에 천문학적인 비용 발생, 국가와 학교회계연도와의 불일치 확대, 일부 유학생을 위해 학기제까지 변경하는 데 대한 반발 등도 우려스러운 점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과거 두 차례 9월 신학기제로의 전환을 추진하다 무산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 충분한 논의와 함께 3월 학기제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에서는 외국 대학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환영하면서도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유기환(한국외국어대 입학처장) 전국입학처장협의회장은 “졸업을 하고 유학을 가려거나 반대로 외국의 유학생이 한국에 들어올 때 학기가 서로 달라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서도 “다만 수능 체제 등 대입의 틀도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정보 경찰 그들은 누구인가] 청와대 올라가는 A급 보고서 쓰면 진급한다?

    [정보 경찰 그들은 누구인가] 청와대 올라가는 A급 보고서 쓰면 진급한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물론 최근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에 연루됐던 대기업 정보팀까지 정보를 다루는 곳은 많다. 하지만 경찰만큼 밑바닥 정보를 훑는 곳은 없다. 경찰 정보력의 근원은 타 기관을 압도하는 인원에서 비롯된다. 경찰 정보인력은 지난 9월 현재 3377명, 전체 경찰의 3.2%에 이른다. 정보관(IO)과 정보분실 등 ‘정보 경찰’의 존재는 문건 유출 사건으로 단편을 드러냈다. 경찰 정보관의 ‘진실 혹은 거짓’에 대해 알아봤다. 1 정보관은 수사권이 없다? 맞다. 수사권은 ‘수사 경과(警科·일선서 형사·수사·지능·과학수사·여성청소년·교통에 해당)’만 갖고 있다. 정보 등이 속한 일반 경과는 수사권이 없다. 대신 정보관들은 기업과 언론, 시민·농민·노동·종교단체, 대학, 병원은 물론 국회와 정부 부처, 심지어 유흥가에서도 정보를 수집한다. 아침에 출근해 전날 건진 쓸 만한 정보들을 보고서로 작성해 올린 뒤 점심 무렵부터 사람들을 만난다. 매달 민심·동향과 관련된 일반 견문(見聞) 보고서 17건, 정부시책에 대한 정책 견문 2건, 범죄 견문 1건 등 총 20건을 의무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전국 경찰들이 매달 쏟아내는 5만여건의 보고서는 일차적으로 지방청으로 올라간다. 9개 지방청 정보부에서 보고서를 열람·평가하고 선별·취합해 종합보고서를 만든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청와대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각각의 보고서에는 ‘상보’(15~20점) ‘중보’(15점 미만) ‘통보’(5점) ‘기록’(2점) 등 4단계의 점수가 부여된다. 청와대까지 올라가는 보고서는 상보 중에서도 ‘A급’으로 불린다. 2 경찰들은 ‘정보’를 선호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경찰 가운데 정보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특히 형사·수사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책상머리에서 일하는 경찰’ ‘시신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경찰’이라며 무시하기도 한다. 과거 ‘정보관’이 인기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시위가 일상적이던 시절에는 주최 측 동향 등 ‘상황 정보’를 챙기는 정보관이 우대받았다. 승진과 경력 관리에 목말라 있는 경위·경감급이 선호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시들해졌다. 서울의 한 베테랑 정보 경찰은 “올해 정보과 지원자가 한 명도 없어 TO(정원)를 채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털어놨다. 일선서의 한 정보관은 “호불호보다는 적성의 문제”라며 “요즘 젊은 경찰들은 진급을 염두에 두고 정보관을 하지는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범죄 현장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유의미한 정보를 만들어 내는 데 재미를 느끼는 친구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3 정보에도 윗목, 아랫목이 있다? 사실이다. 전통적인 ‘아랫목’은 상황 정보로 분류되는 집회·시위 수요가 많은 영등포·종로·남대문경찰서다. 정보과 인원이 30명 이상 대규모인 곳은 서울시내 31개 경찰서 가운데 이들 3곳뿐이다. 정보 경찰들은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일감이 몰리는 곳”이라고 말한다. 특히 국회를 중심으로 주요 정보가 오가는 영등포경찰서의 인기가 높다. 국회의원 보좌진은 물론, 기업 대관업무 담당자나 타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류도 활발하다. 집회의 메카인 서울광장이 있는 남대문경찰서와 청와대 및 정부종합청사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도 비슷하다. 근래 들어 법조타운과 국정원, 대기업 본사들이 있는 서초·송파·수서경찰서도 선호도가 높다. ‘B급’은 강남·중부·서대문·용산경찰서 등이다. 4 정보 경력 길어야 정보분실 간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정보 경찰들은 “‘정보’는 사람 장사”라고 입을 모은다. 베테랑일수록 순도 높은 보고서를 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통상 경력 5년 이상, 10년 안팎의 고참들이 정보분실에 포진한다. 한번 분실에 들어가면 웬만해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선 서에 비해 분실의 외근 정보관들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지방경찰청 정보분실은 일선 서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정보통’들이 모인 곳이다. 박관천 경정은 특수수사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고, 정보 분야 경력이 거의 없었지만 정보1분실장을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 윗선이 원하는 정보, 시대 따라 다르다? 맞다. 경찰이 수집한 ‘정보’의 사용자는 정권이다. 시대에 따라 관심사는 조금씩 바뀐다. 청와대에 올라가는 ‘A급’ 보고서는 고과에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보관들의 일차 관심사는 국정과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특정 인물의 동향 정보 수집에 힘을 기울였던 것도 같은 까닭이다. 한 일선서의 정보관들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로 더이상 누군가의 뒷조사를 주문하는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찰’로 의심받을 만한 활동이 전혀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드러내놓고 하지 않을 뿐이다. 시대 흐름과 관련없이 ‘A급’으로 꼽히는 정보는 고위공직자나 재벌가 연루 첩보,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정보 등이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유감/ 정기연 (전 영암신북초등학교 교장)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유감/ 정기연 (전 영암신북초등학교 교장)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유감/ 정기연 (전 영암신북초등학교 교장)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국을 외쳤던 것이 3.1 독립선언문이었다면 국가 경제를 재건하고 교육을 바로 하여 자주독립국의 자주 독립국민이 되자는 선언문이 국민교육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에 선포되었으며 교육현장에서 국가적 행사를 할 때마다 식순에 넣어 국민교육헌장낭독을 했었고, 대부분 학교에서는 교정에 국민교육헌장 탑을 조형물로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 국민교육헌장이 군사정부 유물이라 하여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교육현장에서도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져 교육이 국가백년대계라는 면에서 아쉽기만 하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1조 달러 수출입국가로 세계 8강의 무역대국의 선진국이 된 것의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다. 교육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평생교육 차원에서 그 중요성은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을 어떻게 어떤 정신으로 할 것인가를 명시한 것이 국민교육헌장 정신이라고 본다. 국민교육헌장의 서문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교육의 지표를 명시하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해야 할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지시해주고 있는데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의 개척정신과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개척정신 협동과 봉사를 하는 국민정신이 명시되어 있다. ‘반공 민주정신의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끝을 맺고 있는데 협동정신 창조정신 개척정신이 명시되어 있고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 앞날을 위한 사명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는 교육하는 교사 입장이나 배우는 학생들이 어떤 정신으로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의 중심이 되는 방향과 정신을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전국 17개 시·도교육감선거에서 13개 시·도교육감이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어 교육하고 있으며 존경받는 교직으로서 스승이 교육하는 교육의 현장에 노조가 형성되어 교육 본연의 사도 정신이 희석되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현 정부는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인 국민교육헌장을 재음미하고 국민교육헌장이 군사정부 유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하고 국민이 국가의 번영을 위한 교육의 근본정신으로 받아들여 교육이 바른 방향으로 잘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근시안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먼 앞날을 내다보며 보다 비전 있는 교육정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2월 5일은 이제 역사로 배우는 국민교육 헌장 선포 일이 되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살펴보고 현실을 직시하여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보다 현실이 중요하며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한 번 새겨보고 교육의 나아 갈 바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며 가정 학교 사회교육의 비전 있는 바른 길잡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자정고 발언대’는 필자들이 보내 온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글의 내용은 서울신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에 대한 권한 및 책임은 서울신문이 아닌, 필자 개인에게 있습니다. 필자의 직업, 학력 등은 서울신문에서 별도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보내온 그대로 싣습니다.
  • 野 “정윤회게이트” 정국 블랙홀 조짐

    野 “정윤회게이트” 정국 블랙홀 조짐

    정윤회(59)씨를 비롯한 현 정권 공식·비선라인의 국정 개입 의혹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살아 있는 숨은 권력’의 국정 농단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메가톤급 후폭풍이 온 나라를 뒤흔들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새정치민주연합은 ‘정윤회 게이트’로 명명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여권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단 1일부터 시작될 검찰 수사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비롯해 문건에 등장하는 인사들의 명예훼손 고소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들의 국정 개입 및 권력 암투 사실관계 등도 자연스럽게 ‘진실규명 리스트’에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수사의뢰한 문건의 유출 경위 등도 명백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문건 작성 및 유출자로 지목된 박모(48) 경정은 30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문건에 (내) 이름도 없는데 왜 자꾸 물어보느냐. 청와대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면 될 것 아니냐”며 전면 부인하는 등 진실게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일단 공은 검찰로 넘어갔지만 수사 결과와는 무관하게 앞으로 상당기간 이 문제는 뜨거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새정치연합의 한정애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정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 등 이른바 십상시의 국정개입 농단에 대해 박 대통령은 내일(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분명한 입장과 엄정한 처벌 대책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은 “진실 규명의 열쇠는 이제 사법당국에 맡겨지게 됐다”면서 “야당은 정치적인 공세에서 벗어나 인내심을 갖고 수사 결과를 기다려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미 박범계 의원을 단장으로 ‘비선실세 국정농단 조사단’을 출범시킨 새정치연합은 조만간 국정조사 실시 및 특별검사 도입 등을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 내 권력지형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제기된다. 새누리당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청와대의 공직기강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비선라인의 국정농단 의혹에 휩싸인 박 대통령과 여권의 선택도 주목된다. 지난해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소문에 이어 ‘활화산’ 같은 문건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무작정 부인만 하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문민정부 시절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 DJ 정부 시절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참여정부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형 건평씨와 핵심 측근 인사들, MB 정부 시절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영포회’ 등의 국정농단 의혹이 결국 사실로 드러나면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바 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신흥기업 (8)서울반도체] 특허소송때 담배 끊고 1년여 머리도 안자른 ‘집념의 승부사’

    [재계 인맥 대해부 신흥기업 (8)서울반도체] 특허소송때 담배 끊고 1년여 머리도 안자른 ‘집념의 승부사’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이정훈(61) 서울반도체 대표가 대학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주 듣던 말이다. 이 대표의 부모는 그가 학업에 소홀하다 싶으면 “공부를 그렇게 허투루하다가 사회에 나오면 세상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오로지 등산 동아리에만 심취해 했던 이 대표가 발광다이오드(LED) 업계의 거물로 성장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자세한 가정사 등을 일절 공개한 바 없는 이 대표의 가맥과 인맥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1953년 경기 광명에서 나고 자란 그는 광명에서 알아주는 만석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어머니 고 박순여씨는 그를 끔찍이 아꼈는데, 서울반도체 인수 당시 “조그마한 구멍가게 인수해서 뭐하러 고생하느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이 대표의 어머니는 2001년 5월 암으로 작고했다. 이 대표는 고려대 물리학과 71학번이다. 1975년부터 2년간 ROTC로 복무한 뒤 1979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땄다. 1981년 제일정밀공업 과장으로 입사해 회사 경험을 쌓다 1983년 오클라호마대 MBA 대학원에 진학했다. 1985년에는 둘째 형인 이정인(65)씨가 운영했던 삼신전기 임원으로 합류한다. 당시 삼신전기는 자동차부품업체를 생산했던 중소기업으로 액정식 계기판과 히터컨트롤박스 오염방지 장치 등을 생산했다. 이 대표는 삼신전기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영업부터 기술 연구 부문까지 전 영역에서 경영 감각을 키웠다. 정인씨는 1987년 회사 경영권을 현 삼신이노텍 김석기씨에게 넘겼고, 1991년까지 부사장으로 있던 이 대표는 1992년 눈여겨보던 서울반도체를 인수했다. 3남 2녀 가운데 막내인 이 대표의 첫째 누나 이정자(76)씨는 노창희(76) 전경련 고문과 결혼했다. 노 고문은 전 유엔대사를 지낸 인물로 이 인연은 농심가까지 연결된다. 노 고문은 노홍희 신명전기 전 사장의 아들로 신격호 회장의 둘째 남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과도 혼맥으로 이어져 있다. 신춘호 회장의 3남 동익씨(농심유통계열사 메가마트 부회장)가 바로 노재경씨와 결혼했는데 재경씨는 노 고문의 조카다. 정자씨와 노 고문 사이에는 노재령(51·여) 국립현대미술관후원회 상임이사, 노재호(48)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가 있다. 첫째 형인 이정환(67)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은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내 대표적인 농업경제학계의 학자가 됐다. 1946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홋카이도대학원에서 농업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농촌 경제연구원에서 연구 활동했다. 2005년 연구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정환씨는 민간 연구기관인 GS&J 인스티튜트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농업 통상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한·미FTA 자원위원회 위원, 농업농촌 특별 대책 위원회 통상협의회 의장을 맡는 등 대외활동도 왕성하다. 둘째 누나인 고 이정신은 수필 문학가로, 전 감리교 전국여선교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3월 작고한 정신씨의 남편 천광남씨는 고층 비상탈출 장치로 1984년 제네바 국제 발명 신기술 전시회에 참가할 정도로 주목받았던 엔지니어다. 컨베텍 기술 고문을 지냈다. 경기 안성에서 중앙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천승희씨가 장남, ‘언플러그드 보이’ 등 독특한 화법으로 신선한 돌풍을 불러일으켰던 만화가 천계영(45·여)씨가 정신씨의 차녀다. 이 대표는 카리스마 넘치는 화법과 치밀한 경영 스타일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지금도 영업 전방에서 왕성하게 뛰고 있다. 호방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리더라는 평이 많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기술개발과 경영을 두루 섭렵한 그는 한번 마음먹은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기업설명회(IR) 등에서 다양한 국가의 LED 산업에 관한 질문에도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 일벌레로도 유명한데 명절에도 회사에 나와 근무를 하는 등 일년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다. 세계 5개 법인, 40개 대리점을 챙기느라 분주한 그는 직원과 소통하는 데도 열심이다. 분기별로 임직원과의 토크쇼를 열고, 패밀리 데이 등 직원들의 가족까지 살뜰히 챙기는 따뜻한 리더다. 한번은 임직원 수십 명에게 자비로 주식을 사서 나눠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 대표의 영업성공률은 80~90%로 비즈니스 영업의 귀재”라면서 “비즈니스 정도와 예절에 능숙하다. 매우 세련됐다”고 평했다. 또 “일에서만큼은 엄격하고 직원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데도 탁월하다”면서 “한번 본 사람은 이 대표의 열정과 씀씀이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에서도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임원들이 부진하다 싶으면 특단의 조치도 내린다. 아예 회의를 시작부터 끝까지 서서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집도 세다. 실적이 부진했던 2007년에는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 이 대표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이발소를 찾지 않았다. 이때가 바로 세계 1위 LED 기업인 일본 니치아화학공업으로부터 특허 관련 소송을 당했을 때다. 애연가였던 이 대표가 담배를 끊었던 때도 이쯤이다. 건강해야 잘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대표는 결국 골리앗이었던 니치아화학공업을 이겼다. 호시탐탐 LED 연구인력을 빼가려는 대기업과 맞선 것도 이 대표의 뚝심이 컸다. 연매출 1000억원 때부터 그는 대기업들과 ‘부정경쟁방지법’을 근거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 대표는 스스로 “인맥은 거의 없지 않나”라고 말하지만 그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이채욱 CJ그룹 부회장 등 거물급 인사와 친분이 남다르다. 이 중 한 전 총리는 서울반도체 사외이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데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각각 장관 자리에 올라 정·관계 영향력이 크다. 때문에 이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한 전 총리를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국무총리 시절 녹색성장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고효율 친환경 LED 사업을 추진하는 서울반도체와 통한다. 이채욱 부회장은 GE코리아 사장과 GE아태지역 헬스케어사업을 총괄하는 GE아시아성장시장 총괄 사장,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 부회장도 과거 서울반도체 사외이사를 지냈다. 제일기획 대표이사, 삼성물산 사장 등을 거쳐 야후 코리아 경영고문을 지낸 신세길 서울반도체 회장도 이 대표가 어려울 때마다 조언을 얻는 최측근이다. 신 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2002년 서울반도체 회장으로 부임했다. 이 대표는 알아주는 등산광이다. 부인 김재진(60)씨도 대학교 등산 동아리 활동을 통해 만났다. 슬하에는 아들 민호(34)씨와 딸 민규(27)씨가 있다. 그는 엄격한 자식 교육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인생은 드로잉’이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가르친다고 한다. ‘인생은 다시 지우고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려간다’는 말로 신중하게 첫 단추를 잘 끼우고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말이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글로벌 시대] 한국과 타이완의 닮은꼴 정치/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글로벌 시대] 한국과 타이완의 닮은꼴 정치/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쌍십절(雙十節)로 불리는 10월 10일은 타이완의 건국 기념일이다. 1949년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타이완으로 쫓겨와 철권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타이완은 건국 출발부터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정치사를 전개해 가고 있다. 비슷한 시기 한국과 타이완에 자유민주체제와 반공이라는 국시(國是)를 가진 보수 우파 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하와이 망명 때까지, 장제스 총통은 1975년 사망 때까지, 두 지도자는 건국 초기 국부(國父)의 호칭을 받으며 절대적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한국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부 정치를 이어갔고, 타이완은 장제스의 사망 이후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을 물려받아 장씨 일가의 세습 통치 체제를 만들어 간다. 이 시기 양국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발전과는 거리가 있었던 통제적 권위적 리더십이라는 유사성을 보인다. 1980년대 한국과 타이완은 각각 군사정권과 장씨 일당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1986년 타이완 최초의 정치적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이 설립되었고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며, 한국에서도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첫발을 내딛게 된다. 민주화 결과 타이완의 1990년 리덩후이(李登輝) 정부와 한국의 1992년 김영삼(YS) 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민당과 민자당이라는 여당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리덩후이는 대륙에서 온 장씨 일가와는 달리 중도 성향의 타이완 토박이 출신이었고, YS는 야당 총재로 민주화를 상징하던 지도자였다.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의 군사정부가 무너지고 개혁적인 문민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어 두 나라는 50년 만에 야당으로의 첫 역사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도 똑같은 모습이다. 1997년 한국은 김대중(DJ) 정부에 의해 50년 보수 정당 체제가 깨지고 최초의 야당 정부가 탄생하였다. 이회창 후보는 강력한 여당주자였으나, 당시 개혁적 신인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신당 창당으로 여권표가 분산되면서 DJ가 승리한 것이다. 2000년 타이완 선거에서도 국민당의 롄잔(連戰) 후보를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누르고 타이완 최초로 여야 정권 교체에 성공하는데, 이때도 국민당 쑹추위(宋楚瑜)가 탈당하여 여권 분열이 일어난다. 양국에서는 진보정권이 연임에 성공하는데, 이회창 후보를 극복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롄잔 후보를 누른 2004년 천수이볜 총통이 진보의 두 번째 정부를 이어간다. 연패당한 이회창 후보와 롄잔 후보는 양국에서 불운의 보수 정객으로 기억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 시장, 천수이볜 총통은 타이베이 시장 선거 패배를 극복하고 당선되었다. 진보 세력의 확장, 다원화 세상의 개척, 참여 정치의 실현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많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과 보수의 저항, 천수이볜 총통은 임기 말 부패와 비리에 연루되어 각각 수사 중 자살과 19년 구형이라는 안타까움으로 마감되었다. 2007년과 2008년 양국은 경제회복을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과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보수정권의 재탈환을 이루었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과 마잉주 총통의 연임으로 연속 보수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건국과 군사정부, 문민정부와 민주화, 평화적 정권교체와 진보정권, 보수정권의 재탈환으로 대별되는 타이완과 한국은 2016년 총통선거와 201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과연 이번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일지 2016년 타이완 선거를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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