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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쪽 복원’ 경주 월정교 새달 공개 논란

    ‘반쪽 복원’ 경주 월정교 새달 공개 논란

    경북 경주시가 ‘반쪽 복원’에 불과한 월정교(조감도·사적 제457호)를 일반에 공개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월정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석교 위에 목조 회랑(回廊)으로 연결한 누교(橋) 형태로 통일신라 최전성기인 경덕왕 19년(서기 760년)에 축조됐다.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최소 520년 이상 존속된 다리다. 시는 26일 최근 4년여에 걸친 월정교 복원 1단계(교대와 교각, 교량 상부)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다음 달부터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는 현재 거푸집을 철거하고 있다. 1단계 공사는 총 332억원(국비 232억원 등)이 투입돼 길이 66m, 폭9m, 높이 8m 규모의 다리를 복원한 것. 시는 또 이 일대에 경관 조명을 설치해 관광객 등이 야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하지만 당초 예정됐던 다리 양쪽 교대 위의 문루(門樓) 복원이 안 돼 ‘졸속 행정’이란 비난이 일고 있다. 시는 80억원을 들여 문루를 복원할 계획이었지만, 문화재위원회의 고증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지금까지 실시설계조차 못 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로 시는 급기야 문화재청에 문루를 추정해 건립하자는 의견까지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시가 충분한 사전 고증 없이 월정교 복원에 나섰다가 난항을 겪자 ‘문루 건립 분위기 조성용’으로 1단계 공사 현장을 서둘러 공개하려는 것”이라며 “문루가 건립되지 않을 경우 월정교 복원 공사는 당초 사업 계획보다 크게 볼품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월정교 복원 1단계 공사 준공으로 일반에 공개하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9) 충남 아산온천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9) 충남 아산온천로

    충남 아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온천 도시다. 온천문화의 중심지로서 1960~70년대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시대 변화와 전국적인 온천 개발로 2000년대 들어 한때 추억의 온천관광지로 전락했다. 현재의 아산은 1995년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돼 탄생했다. 아산에는 천년 역사를 간직한 온양온천과 도고온천을 비롯해 최근 개발된 아산온천과 충무온천이 있다. 2008년 12월 15일 수도권전철이 연장 운행되면서 아산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 ‘추억의 명소’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아산온천로는 아산시 음봉면 음봉사거리에서 영인면 아산리삼거리를 잇는 2㎞ 구간이다. 아산온천로 가운데쯤에 아산온천이 자리 잡고 있다. ●알칼리성 아산온천… 신경통·고혈압 효과 인정 온양온천역에서 20분 거리인 아산온천(아산온천로 217-7)은 ‘테마온천’을 내세워 아산이 온천의 도시라는 명성을 찾는 데 선봉에 섰다. 1987년 온천이 발견됐고, 91년 관광지로 지정된 후 개발이 한창이다. 아산온천은 알칼리성 온천으로 인체에 유익한 20여종의 성분을 함유해 혈액순환 및 세포재생 촉진, 신경통·관절염·고혈압 등에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주변은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쌓여 산림욕까지 겸할 수 있는 다용도 온천을 자랑한다.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온천욕장과 국내 최대 규모의 테마온천인 스파비스가 2001년 개장됐다. 스파비스는 총면적이 2만㎡ 규모로 56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종합온천탕이다. 4계절 물놀이가 가능한 테마파크와 국내 최초로 온천수를 이용한 수치료 등을 통한 건강 증진이라는 신개념을 접목해 젊은층과 온천을 연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모완 아산시 공보팀장은 “온양·도고온천에는 중·장년,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은 반면 아산온천에는 젊은층이 상대적으로 많아 차별화된다.”면서 “수도권에서 접근성이 좋다는 점에서 발전가능성이 높다.”고 소개했다. ●온천욕 끝내고 출출할 땐 ‘토종닭’ 음봉사거리에서 아산온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푸른초원농원(아산온천로 341-59)이 눈에 들어온다. 7개 사육동에서 토종닭 2만여마리를 방사해 키우는데 농원의 단점인 냄새가 나지 않는데다, 파리를 찾아볼 수 없다. 조류독감도 피해갔다. 비결은 국내 최초로 개발해 특허까지 받은 순수한약재로 만든 사료에 있다. 농원 주인인 박준호(72)씨는 어릴 적 먹던 토종닭의 맛을 재현하겠다는 뜻을 품고 사료 연구에 매진했다. 어릴 적 자녀들이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에게 인삼분을 먹여 살린 경험을 토대로 갖은 시행착오 끝에 2002년 한약재를 사용한 닭 사료 제조방법 등을 특허 등록했다. 축산연구소의 육질분석을 통해 효능을 인정받고 입소문도 퍼졌지만 시중가보다 비싸 판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계란을 대형마트에 납품할 수 있게 됐다. 박씨는 “토종닭의 맛을 지키고 싶다.”면서 “돈을 벌기 위해 사육방법을 바꿀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농원과 인접해 있는 유기농 토마토단지는 아산온천의 유명세와 함께 성장했다. 초기 2가구가 미생물 농법으로 친환경 토마토를 생산, 길가에서 판매했는데 현재는 생산농가가 30여가구로 늘었다. 완전히 익은 토마토를 따서 팔기에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무르지 않아 오랫동안 보관해 먹을 수 있다. ●돌아가기전 숨겨진 아산 역사 둘러보는 재미 아산리삼거리 인근에 있는 영인산자연휴양림(아산온천로 16-26)은 1997년 개장했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바다와 아산시가지,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주민들만 아는 명소다. 휴양림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2.4㎞)에는 산림박물관, 수목원 등이 조성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휴양림 가는 길과 백제 초기 석성인 영인산성 오르는 길을 나무 데크와 나무 계단으로 조성한 것도 이채롭다. 아이들의 자연학습장이자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영인초등학교 정문에는 범상치 않은 누각이 세워져 있다. 여민루(慮民樓)는 아산현 관아 입구에 세워졌던 문루로 명칭은 정이오가 지은 누기(記)의 ‘취위민지의’(取爲民之意·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에서 따왔다. 여민루 가까운 곳에 충남도 기념물 제13-1호인 김옥균 선생 유허(遺墟)가 있다. 원래 고향은 공주이나 일본 도쿄의 청산외인묘지에 있던 것을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했다. 음봉면사무소 삼거리 어라산에는 있는 이 충무공 묘소(사적 112호)는 조선시대 고관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충무공의 묘가 현충사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싶다. 아산 금성산에 있던 것을 사후 16년 후인 광해 6년(1614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부인 상주 방씨와 합장했다. 묘소 우측에는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 진입로부터 잘 가꿔진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글 사진 아산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20회는 인천 배다리길을 소개합니다.
  •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우리나라 최초의 누교(橋)형 다리로 통일신라 최전성기인 경덕왕 19년(서기 760년)에 축조된 경북 경주시 인왕동 월정교(조감도·사적 제457호) 복원공사가 문루(門樓) 고증이 지연되면서 차질을 빚고 있다. 3일 경주시에 따르면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하나로 지난 2008년 4월부터 월정교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국비 232억원 등 총 332억원을 들여 길이 66m, 폭 9m, 높이 8m 규모인 월정교를 복원하는 것. 월정교는 신라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공정률은 70%이지만 월정교 양쪽 교대 위의 문루에 대한 문화재위원회의 고증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복원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이는 월정교 형태(구조)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다. 이런 가운데 시는 문루 복원 공사를 위해 올해 말까지 문화재위의 고증작업과 복원심사를 통과하고 내년 초 설계 등을 거쳐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80억~100억원의 관련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게 과제다. 시 관계자는 “고증 작업이 지연되면서 월정교 복원 공사가 빨라야 2014년쯤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산·물·바람이 머무는 곳…충북 제천 옥순봉

    산·물·바람이 머무는 곳…충북 제천 옥순봉

    옹골차다. 속이 꽉차서 건실하다는 뜻입니다. 충북 제천의 옥순봉에 서면 이런 비유가 대단히 적절하다는 느낌을 단박에 갖게 됩니다. 금수산과 가은산 등 충북의 명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쳤고, 그 사이로 연둣빛 남한강이 유장하게 흘러갑니다. 어디 하나 덧대고 뺄 것 없는, 그야말로 옹골찬 풍경입니다. 높아야 빼어난 전망대는 아닐 겁니다. 얼마나 다양하게 풍경의 정수를 수렴하고 있느냐가 보다 중요한 거겠지요. 286m 낮은 키의 옥순봉이지만 청풍호(충주호) 최고의 전망대란 헌사를 붙일 수 있겠다는 확신은 그래서 생겼습니다. 높다고 빼어난 전망대일까…낮지만 옹골찬 봉우리 제천과 단양 지역 주민들에게 ‘충주호’는 없다. ‘청풍호’만 있을 뿐이다. 이기석 단양군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하는 사연은 이렇다. 충주댐이 조성되기 전, 강원 정선에서 흘러온 남한강물이 도담(삼봉)과 구담 등을 거쳐 현 청풍문화재단지 앞에서 큰 호수를 이뤘다. 당시 호수의 이름도 청풍호였다는 것. 이는 호수 인근의 옛 지명이 청풍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청풍에서 좀 더 하류 쪽, 그러니까 현재의 충주 지역에 댐이 생기면서 호수의 이름도 충주호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댐 조성으로 생긴 담수호라서 단순하게 충주호라 부르기보다는 옛 이름을 살리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람이 정한 이름이 무엇이든, 호수에 산과 물 그리고 바람이 잘 어울려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상류 쪽의 옥순봉과 구담봉 일대는 청풍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경승지로 꼽힌다. 옥순봉은 주로 눈요기의 대상이다. 대부분 유람선을 타고 가며 아래서 완상하길 즐긴다는 뜻이다. 이름의 연원만 봐도 그렇다. 퇴계 이황(1501~1570)이 ‘비온 뒤 솟아나는 옥빛(玉)의 대나무 순(荀)을 닮았다.’고 한 이래 여태 ‘옥순봉’이라고 불린다. 즉 아래서 올려다본 천길단애가 옥순봉이란 얘기다. 그런데 아마도 퇴계는 옥순봉 위에까지 오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가 옥순봉 정상에서 사방을 굽어보았다면 다른 이름을 지었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옥순봉은 청풍호의 첫손 꼽히는 볼거리이면서, 최고의 전망대 노릇까지 겸하고 있다. 옥순봉과 구담봉은 이웃하고 있다. 떨어져 있되 한 몸이나 다름없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옥순봉은 제천, 구담봉(330m)은 단양에 속해 있다. 각각 등산하자면 옥순봉은 2시간 남짓, 구담봉은 3시간이 족히 걸린다. 대개는 둘을 묶어 돌아본다. 난이도는 구담봉 코스가 훨씬 높다. 따라서 구담봉을 먼저 본 뒤 옥순봉 나들이에 나서는 게 좋다. 들머리는 계란재다. 36번 국도변 국립공원탐방지원센터가 있는 곳이다. 농장터~갈림길(공원지킴터)~옥순봉~갈림길~구담봉~지원센터까지 되돌아오는 데 6.3㎞쯤 된다. 전체적인 난이도가 낮다고 알려져 있으나 얕보다간 큰코다친다. 산행시간도 5~6시간은 족히 걸린다. 단양 8경 적시는 퇴계와 기생 두향의 사랑이야기 옥순봉과 구담봉은 저 유명한 ‘단양 8경’의 4경과 3경이다. 그런데 제천에 속한 옥순봉이 단양8경의 하나가 된 사연이 재밌다. 그 과정에 퇴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퇴계는 48세 때인 명종 3년(1548년)에 단양군수를 자원해 내려온다. 단양의 풍수를 아낀 퇴계는 도담삼봉, 사인암 등 단양의 명소들에 이름을 지어 주다 옥순봉에 이르게 된다. 그가 단박에 옥순봉의 자태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런데 아쉽게도 옥순봉이 속한 곳은 청풍이었다. 퇴계는 곧바로 청풍부사를 찾아가 옥순봉이 있는 괴곡리를 단양에 양보해 달라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빈손으로 돌아오던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고 새겨 넣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풀자면 ‘신선으로 통하는 문’<서울신문 2005년 2월 15일 자 ‘유림’ 참조>이란 뜻이다. 훗날 청풍부사가 이를 보고는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 마침내 ‘단양8경’이 완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녹록지 않은 산길을 이러구러 돌아 구담봉에 선다. 멀리 장회나루 맞은편 산자락 아래는 강선대다. 갈수기 때에만 드러나는 바위로, 퇴계와 두향의 절절한 로맨스가 전해오는 바위다. 서울신문에 2004년 1월 5일~2006년 12월 30일 연재됐던 최인호 작가의 역사소설 ‘유림’ 가운데 이들의 로맨스를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요약하면 이렇다.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발령난 퇴계가 두향과 보내는 마지막 밤, 두향은 퇴계에게 은장도를 주며 자신의 젖꼭지 하나를 베어 달라 청한다. 이는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동종에 얽힌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고향을 떠나 오대산 상원사로 향하던 동종이 죽령 고개에 이르러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자, 운반 책임자가 동종의 핵심 울림 도구인 36개 젖꼭지(뉴·?) 가운데 하나를 잘라 안동 도호부 남문루에 묻어 줬고, 그제서야 동종이 미련을 버리고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결국 두향의 ‘발칙한’ 제의는 자신의 젖꼭지 하나를 정표로 잘라 줘야 퇴계를 보내주겠다는 앙탈이자 간청이었던 셈이다. 차마 젖꼭지를 잘라낼 수 없었던 퇴계는 두향의 저고리 깃을 잘라 이별의 정표로 준다. ‘할급휴서’(割給休書)다. 잘라낸 세모꼴의 옷섶이 나비를 닮았다 해서 ‘나비’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당시 서민사회에선 일종의 이혼증서로 쓰여졌다고. 두 사람에겐 연분을 끊는 이연장(離緣狀)이었을 터다. 나비를 받아든 두향은 퇴계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채고는, 자신이 죽은 뒤 옷섶을 둘의 추억이 깃든 강선대에 함께 묻겠다는 말과 함께 이별을 받아들인다. 훗날 퇴계의 요청으로 기적(妓籍)에서 지워진 두향은 멀리서 퇴계를 받들며 수절했다. 그러다 퇴계가 죽자 자신도 강선대에 투신, 임의 뒤를 따르고 만다. 강선대에서 수십m 떨어진 산자락에 지금도 두향의 묘지가 있다. 원래 더 아래쪽에 있었으나 충주댐 조성 당시 수몰될 뻔한 것을 현재의 장소로 이장했다. 두향의 묘는 남한강을 격하고 보더라도 제법 번듯하게 정비돼 있다. 이기석 해설사는 “원래 두향의 성은 안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며 “안씨 문중에선 그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돌보지 않았는데, 퇴계의 학문을 잇는 영남학파 사람들이 해마다 두향제를 지내는 등 관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너럭바위 너머 금수산·남한강이 그려낸 수채화 구담봉에서 옥순봉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온 길을 되짚어 가거나 천길단애를 내려간 뒤 강변을 따라 걷다 옥순봉에 오른다. 산꾼들은 대체로 후자를 택하지만 고되고 험하다. 전문 가이드가 없거나 가족 단위 등반객이라면 온 길을 되짚어 가길 권한다. 공원지킴터에서 옥순봉까지는 급한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이어진다. 예서 정상까지는 30~40분이면 충분하다. 옥순봉 정상에서 만나는 풍경이 실로 장하다. 너럭바위 너머 금수산과 남한강 물줄기가 멋들어지게 펼쳐져 있다. 금수산의 옛 이름은 백암산이다. 흰색(白)의 거대한 바위(岩)들이 절경을 펼쳐 내는 산이란 뜻이다. 훗날 퇴계가 비단(錦) 위에 수(繡)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며 금수산이라고 개칭했다. 옥순봉 정상 아래 있는 너럭바위의 자태도 여간 빼어나지 않다.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에서 인상적인 엔딩 장면을 선보였던 너럭바위로, 폭은 좁되 아래로 길게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제천시에 속한 땅. 먼 옛날 퇴계와 청풍부사가 그랬듯, 오늘날 제천시장과 단양군수 간에도 ‘통 큰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옥에 티 하나. 옥순봉 정상 표지석엔 높이가 286m라고 표기돼 있다. 하지만 등산안내도 등은 283m라고 적고 있다. 서둘러 산의 높이를 통일하는 게 좋겠다. 옥순봉에서 바라본 청풍호 전경. 옥빛 호수와 우람한 산들, 그리고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일품이다. 남성의 ‘알통’처럼 불퉁 솟은 왼쪽의 암봉은 단양의 진산 금수산이다. 글 사진 제천·단양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43)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북단양 나들목→5번 국도 충주방향→북하삼거리에서 36번 국도→장회나루. 단양 관광안내소 422-1146. ▶맛집:얼음골맛집(422-6315)은 매운탕과 묵밥이 유명하다. 장회나루에서 단양 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장다리식당(423-3960)은 마늘솥밥을 잘한다. 쌈밥정식을 내는 돌집식당(422-2842), 더덕주물럭을 내는 자연식당(422-1806), 올갱이국의 경주식당(423-0504)도 입소문 난 집들이다. ▶잘 곳:가족이나 친구끼리 여행길에 나섰다면 대명리조트 단양이 제격이다. 객실과 아쿠아월드(2명)로 구성된 ‘아쿠아월드2’ 패키지를 5월 31일까지 판매한다. 패밀리타입은 주중 11만 2000원(토요일 15만 7000원)이다. 1588-4888. 단양읍 별곡리 리버텔(421-5600), 단성면 팔경모텔(421-2900) 등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들이다.
  • 숭례문 화재 4년… 12월 제 모습 찾을 듯

    숭례문 화재 4년… 12월 제 모습 찾을 듯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문루(門樓)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지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다. 연초에 품셈(노임)을 둘러싼 건설사와 목수들 간의 갈등으로 숭례문 복구 목공사가 한동안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오는 12월 13일 완공을 향해 목수들과 석수들의 손길이 더 바빠지고 있다. 목공사는 올 4월 중에 끝나야 하는데 최근 변수가 생겼다. 영하 17도까지 떨어진 강추위가 복병이다. 재료들을 조립해야 하는데 이런 추위에는 사고 위험 등으로 엄두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6일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숭례문 현장에 못 나가고 최근 2주 동안 목재 다듬기밖에 못했다.”면서 “목공사는 5월이나 되어야 끝날 듯하다.”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기와 올리기는 목공사가 끝난 뒤에 하겠지만, 단청은 목공사와 병행해도 큰 무리가 없으니 12월 완공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와가 올라가야 숭례문은 형태상으로 화재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앞으로 남은 작업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손으로 빚은 전통 기와와 숯불로 뽑아내는 전통 철물, 손으로 가공한 석재, 천연 안료를 이용한 전통 단청 등이다. 숭례문 복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통재료와 전통방식으로 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후] 숭례문복원 목공사 한 달여 만에 재개

    문화재청은 9일 목수들 노임 문제로 한 달째 중단된 숭례문 복원 목공사를 10일부터 재개한다고 밝혔다. 시공사인 명헌건설㈜과 실제 복원을 맡은 신응수 대목장이 기존 계약대로 공사를 재개하기로한데 따른 것이다. 신 대목장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목공사 노임이 명헌건설과 애초 계약했던 3억 8500만원보다 이미 지난해 12월 초에 1억원 이상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4월까지 공사할 경우 더 늘어날 텐데 추가되는 노임을 받지 않더라도 일을 진행하겠다.”면서 “숭례문 목공사 전체를 기부하겠다고 서울신문에 밝힌 마당에 더 이상 목수들의 노임을 가지고 계속 갈등한다면 서로 상처만 입게 돼 이 같은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다만 이후에 들어오는 나무들은 통나무가 아니라 제재목으로 들어오는 방향으로 명헌건설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8일 오후 3~6시 3시간 동안 최종덕 문화재청 문화재보존국장과 면담하고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최 국장도 “공정이 한 달여간 중단된 상태였지만 문화재청과 공사 관계자들은 국민의 관심사인 숭례문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숭례문 복구 목공사가 당초 예정한 대로 4월 말 완료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숭례문 복구는 크게 성곽 복원과 문루 복구공사로 구성되며 이 중 문루 복구는 목공사, 기와공사, 단청공사로 진행된다. 현재 목공사는 1층 조립과 2층 목재 가공을 70%가량 완료한 상황에서 지난달 8일 이후 중단된 상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숭례문 복구 한달째 중단…시공사·목수간 임금 마찰

    숭례문 복구 한달째 중단…시공사·목수간 임금 마찰

    숭례문 복구공사가 지난해 12월 초부터 중단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준공 일정에 차질이 우려된다. 공사 중단은 목공사 비용 인상을 요구하는 목수와 더 올려 줄 수 없다는 시공사 간 다툼에서 비롯됐으나 관리·감독을 해야 할 문화재청이 이를 한 달 가까이 방치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시공사 측에 공문을 두 차례 보내는 데 그치는 등 형식적인 조치만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이날 “지난달 8일부터 목수들의 임금 단가 문제로 숭례문 복구공사 가운데 목공사가 중단됐다.”면서 “그러나 협의를 통해 이달 중에 목공사가 재개되면 당초 계획대로 4월까지 목공사를 끝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늦춰진 공사가 이달 안으로 재개되더라도 4월 목공사 완료, 12월 준공이라는 복구 일정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화재청과 숭례문 복구공사 시공사인 명헌건설㈜ 간에 계약된 총 복구비용은 167억 8500만원이다. 목공사 비용은 15억 7800만원이 책정됐으며 명헌건설은 신응수 대목장 측과 13억 2300만원에 목공사를 계약해 공사를 진행해 왔다. 신 대목장 측은 애초 명헌건설과 계약한 공사비용에서 25~33% 정도를 추가로 더 책정해 달라는 입장이라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최종덕 문화재보존국장은 “이번에 제기된 목공사 임금 단가 문제는 최근 20여 년 동안 장인들이 공공연하게 써온 전동 공구를 못 쓰게 하고, 대패 등 낯선 전통도구를 사용한 전통기법으로 숭례문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인건비 등이 많이 늘어나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숭례문 복구공사는 성곽 복원과 문루 복구공사로 나뉜다. 문루 복구는 목공사가 끝난 뒤 기와공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단청을 입히게 된다. 문화재청이 밝힌 복구 공사의 공정률은 70%다. 최 국장은 “목수들이 전통기법을 쓰겠다고 각서까지 작성했지만, 막상 복구공사에 들어가자 자귀질(자귀로 나무를 깎는 일)과 같은 전통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목수가 한 사람밖에 없어 서로 배워 가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품도 많이 들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명헌건설과 목공사를 총괄하는 신응수 대목장 사이에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율을 시도하고 있으나 돈 문제가 개입돼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 중요무형 문화재 홍창원 단청장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 중요무형 문화재 홍창원 단청장

    단청(丹靑)이 없는 목조건물을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궁이나 고즈넉한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건축물 안팎에 그려진 단청 문양이다. 건물의 벽면이나 천장 등에도 어김없이 곱고 화려한 단청 문양으로 장식돼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단청은 삼국시대 벽화고분에서 나타나듯 우리나라 회화 미술사의 2000여년 궤적을 오롯이 그려오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만봉(1910~2006) 스님이 1972년에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되면서 그 연구와 명맥을 이었다. 스님은 생전 “단청이라 함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오방색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만들어 궁전, 불전 등에 다양한 문양과 인물, 산수, 화조, 산수 등으로 장엄하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연말이면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료된다. 현재 성곽복원이 마무리됐으며 봄부터는 문루 복원과 기와 잇기가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건축물의 화룡점정이자 마지막 화장단계인 단청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단청작업에는 내로라하는 단청 기술자 30여명이 참여한다. 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을 가리켜 단청화사(丹靑?師)라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홍창원(57) 단청장은 바로 숭례문 단청복원의 화사(?師)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명 화승인 예운스님의 맥을 이은 만봉스님의 수제자로 그동안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등 4대 궁궐은 물론이고 봉정사 극락전·대웅전 등 전국 각 지역의 고찰과 문화재 건축물의 단청작업을 해오고 있다. ●고려 단청은 화려… 조선은 검소한 문양 지난 3일 오후 경기도 퇴촌에 위치한 한국단청연구소를 찾았다. 때마침 함박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어서 그런지 그가 평소 그렸던 각종 단청 작품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났다. 연구소 벽에 걸린 대형 ‘경복궁 근정전 천장 용그림’이 금빛 찬란하게 눈부시도록 다가온다. 용그림에 대해 궁금해하자 “1998년에 모사했으며 이런 모사 작품들을 모아 벽연회라는 이름으로 제자들과 함께 2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2009년 12월 ‘숭례문 단청문양 모사전’을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 가졌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 때는 숭례문 화재 직후이기도 했지만 1800년대 후반의 숭례문 단청을 비롯해 1954년, 1963년, 1973년, 1988년 등 변화된 단청 모습을 연도별로 상세히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숭례문은 원래 중층의 다포(多包)건물로 아래·위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공포조작(拱包造作)에 있어서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기록으로 볼 때 1890년대 이후 광복 이전까지 재단청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한국 전쟁 이후 피해 상태를 조사하고 수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1961~1963년 숭례문 문루 전체의 해체복원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973년과 1988년에 재단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듯 숭례문 단청은 19세기 말 이후 여섯 차례 단청공사가 진행되면서 각기 다른 양식의 단청으로 시공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단청을 다르게 시공할 수밖에 없었던 세부적인 상황과 내용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숭례문 단청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문양 형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19세기의 단청과 1954년의 단청은 조선 후기 단청의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1963년의 단청은 조선 초기 단청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1973년부터 1988년까지의 단청의 경우 문양 형식은 조선 초기 양식이지만 수법이나 색상은 조선 중·후기의 단청 양식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숭례문 복원 조선초기 양식으로 재현해낼 것” 그는 이번 숭례문 복원공사 때 1963년의 단청, 그러니까 숭례문이 세워진 조선초기의 양식을 복원하겠다고 역설했다. 하여 조선 초기 단청이 남아 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예산 수덕사 내부단청, 안동 봉정사 대웅전, 창경궁 명정전, 그리고 1937년 임천 선생이 조사한 수덕사 단청조사 보고서에 수록된 여러 자료 등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 당시의 단청자료에 대한 샘플링 작업을 모두 마무리했으며 오는 5월부터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복원작업에 들어간다. 작업기간은 5~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화학안료를 쓰면 기간이 짧아지지만 숭례문의 경우 화학안료 대신 천연안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천연안료는 돌가루를 정제해 색깔을 낸 것으로 고운 심성으로 정성껏 입혀야 색깔이 아름답고 오래도록 남는다고 말했다. “고려시대의 단청은 화려한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청색과 녹색 위주의 검소한 문양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1966년의 ‘남대문 수리보고서’에 수록된 복원 모사도의 컬러도판은 옛 안료색상인 삼복, 이청, 대청 등의 색상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모두 참고해 되도록 조선 초기 원래의 단청을 재현해 낼 생각입니다.” ●건물 장식뿐 아니라 목재수명 연장 기능 지녀 국보 1호 복구작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는 데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숭례문 단청을 멋지게 입히기 위해 틈틈이 숭례문 복원현장을 찾아 나름대로 단청의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또 숭례문 복구작업과 관련해 장인들 회의가 있을 때에도 매번 참석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어떻게 해야 단청을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우선 소질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 불굴의 인내력이 뒤따라야 하고 뭐니뭐니 해도 심성이 고와야 한다.”고 웃는다. 그러면서 최소 1년에서 3년 정도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단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음양오행설이다. 단청에 사용된 반복 문양은 화재와 잡귀를 막아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건물을 장식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풍화나 뒤틀림을 방지하는 등 목재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역할도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신촌에서 태어난 그는 불심이 깊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15살 때 중학진학을 포기하고 단청에 입문했다. 당시 집과 가까운 봉원사에서 만봉스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처음에는 만봉스님이 그리는 단청을 지켜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러다가 취미가 붙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단청을 공부하면서 점점 실력을 쌓았다. 이런 모습을 본 만봉스님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기꺼이 제자로 삼았다. 이후 서울 보문사 일주문 단청을 시작으로 만봉스님과 함께 전국을 돌며 일했다. 1981년 만봉스님의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데 이어 일취월장해 1986년에는 이수자가 됐다. 이때부터 창경궁 문정전, 경복궁 경회루·강녕전·교태전, 덕수궁 중화전, 경복궁 근정전 등을 도맡아 일을 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2009년 2월 만봉스님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됐다. 그는 30여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부인과 딸도 여기에 속해 있다. 특히 딸 홍보라씨는 아버지의 전수장학생으로 숭례문 복원 단청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수천년 이어온 겨레의 얼과 예술 명맥 이어야지” 1990년부터 한국단청연구소를 운영 중인 그는 숭례문 복구작업이 끝나면 전통 단청 보전과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계획이다. 42년 동안 단청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단청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그는 일본에서 가끔 초청을 받기도 하는데 이때마다 우리의 단청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열정을 보인다. 연구소 안에는 경복궁 근정문 적심(1850년 이전), 창덕궁 희정당 연목(1906년), 봉정사 대웅전 보머리(1604년) 등 각종 단청문양이 그려진 400여점의 고목들이 진열돼 있어 그가 평소에 얼마만큼 자료수집에 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나중에 ‘단청 박물관’을 지어 전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올해 말에는 ‘경회루 단청 문양 모사전’을 가질 계획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리 겨레의 삶과 예술의 혼이 담겨 있는 단청은 수천년 이전부터 사물에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를 붓끝에 담아 이어 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단청장이었던 만봉스님의 화맥을 끊임없이 전수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홍창원 단청장은… 1955년 서울 신촌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48호(단청) 만봉스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1970년 동대문 탑골승방 일주문과 세검정 창의문 단청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부여 무량사(1971), 신촌 봉원사 대웅전(1972), 영화사 삼성각(1973), 부산 동래산성(1974년), 강릉 경포대(1978) 등의 단청에 참여했다. 1981년에는 만봉스님 전수장학생에 선정됐고 문화재수리 단청기술자로 등록한 데 이어 1986년 만봉스님 이수자로 선정됐다. 이후 광희문(1990), 창덕궁 구선원전(1992), 경복궁 강녕전·교태전·경성전·연생전(1994) 단청을 비롯해 덕수궁(2001), 창덕궁(2002), 경복궁 근정전(2003) 등의 단청 작업을 했다. 일본 나카지마 육각당과 일본 쇼고 무량수사 등의 단청 작업에도 참여했다. 2009년 만봉스님의 뒤를 이어 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됐다. 이 밖에 동방불교대학 불교미술과 교수(1991~2005), 전통건축미술학교 단청강사(1991~1999), 불교방송국 단청강사(1997~2001) 등을 맡기도 했다. 현대미술대전 현대미술상(1993) 등 다수의 수상경력과 제1회 벽연회 단청소품전(1998) 등 10여 차례 초대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 경기 김포 문수산 트레킹

    경기 김포 문수산 트레킹

    내 나라 안에 명산은 많습니다. 꽃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조각 같은 암봉을 자랑하거나, 저마다 특징 하나쯤은 갖고 있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강과 바다가 만나고, 뭍과 섬이 만나는 데 더해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까지 한눈에 똑똑히 굽어볼 수 있는 산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경기 김포의 문수산이 그렇습니다. 전문 산꾼들에게야 간식거리도 못 될 산이지만,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광만큼은 여느 산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독특합니다. 게다가 오르기도 어렵지 않아 반나절 산행지로는 제격입니다. ●오후부터 걸어야 해넘이 장관 품는다 수도권 도시들을 아우르며 달리던 한남정맥이 김포 인근에 이르러 산 하나를 토해 낸다. 문수산(376m)이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김포가 평야 지대여서 사방에 높이를 견줄 산이 없다. 맑은 날엔 인천 월미도 앞바다와 서울의 남산, 개성 송악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문수산은 발을 두 물에 담그고 있다. 북쪽의 한강과 서쪽의 염하(鹽河)다. 염하는 강화도와 김포 사이 강화해협을 일컫는다. 육산이라 오르기 수월한 데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빼어나 근교 산행지로 이만한 곳을 찾기 쉽지 않다. 강화대교 바로 앞 성동검문소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성동리 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염하를 따라 이어진 길이다. 5분쯤 가면 문수산 산림욕장 팻말이 보인다. 산행의 들머리다. 산행은 4코스로 나뉜다. 제1코스는 산림욕장에서 출발해 남문능선을 돌아온다. 3.8㎞로 2시간 30분쯤 소요된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제2코스다. 역시 산림욕장에서 출발해 경치 좋은 산성길을 따라 중봉쉼터, 문수사를 거쳐 북문으로 내려온다. 4.6㎞로 3시간쯤 걸린다. 고막리 야영장에서 출발하는 3코스는 4㎞, 가장 긴 6.5㎞짜리 4코스는 김포국제조각공원을 출발해 경기도 학생야영장 쪽으로 내려온다. 일반적인 산행은 오전에 시작된다. 하지만 문수산의 경우 오후에 시작하는 게 낫다. 오전 내내 산림욕장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쉬는 맛이 각별한 데다 전망대에서 마주하는 해넘이 풍경이 여간 장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뻘겋게 달궈진 해가 강화도와 황해도 개풍군,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한강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데, 그야말로 아이맥스 영화를 보는 듯하다. 주차장 오른쪽 들머리에서 산사면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산성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화도 입구를 지키기 위해 숙종 20년(1694)에 축조된 산성이다. 총연장은 6123m. 산행은 대부분 이 성벽을 따른다. 성벽은 자체가 역사다. 청나라와 몽골은 물론 프랑스와 미국 등 우리 땅을 넘보던 열강의 침략 역사가 새겨져 있다. 수차례의 전란을 통해 문루 등 시설물은 거개가 사라지고, 성벽 4640m만 흔적으로 남았다. 안내판은 유실된 1483m 구간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라 적고 있다. 산길 초입의 된비알을 지나면 비로소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너른 김포평야와 유장하게 흐르는 염하, 그리고 강화대교 너머 강화의 들녘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산길은 능선을 타고 뻗은 성벽을 따라 이어진다. 길은 더없이 평탄하다. 오르막 내리막은 있지만, 힘들다기보다 운율을 탄다는 느낌이다. 풍경 또한 고도를 높일 때마다 점입가경을 반복한다. 이렇게 경치를 즐기며 한 시간 남짓 오르면 전망대다. ●염하와 북녘 땅까지 하나로 만드는 붉은 물결 전망대 경치는 압권이다. 왼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염하와 그 너머 강화도, 그리고 초록 일색의 김포평야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해 국토의 허리를 관통하며 달려온 한강이 서해와 합류되기 전 마지막 숨결을 토해 낸다. 한강이 적시고 있는 개펄은 드넓고, 북녘 땅 개풍군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맑은 날엔 개성 송악산도 보인다고 했다. 우리에게 기적을 선물한 한강이지만, 이곳에서 보면 처연한 면도 없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쉼 없이 달려 왔지만 철조망에 갇힌 강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단절과 그로 인한 상실감이 강물 위로 넘실거린다. 전망대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800m쯤 된다. 전망은 기대만큼 좋지는 않은 편. 해넘이 풍경과 마주하려면 막걸리 파는 할아버지에게 잔술(2000원) 한 잔 사서 마신 뒤 서둘러 내려가는 게 좋다. 전망대 팔각정 의자에 기대 해넘이를 보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저 멀리 노을이 내리는 바다로 한강이, 그리고 염하가 스러져 간다. 하늘은 붉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1~2분 남짓 피처럼 붉은 빛을 토해 냈기 때문이다. 기필코 붉은 무리를 제압하겠다는 강화 제적봉(制赤峰) 위로, 또 멀리 개풍군 등 북녘의 산하 위로 붉은 기운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쏟아져 내린다. ●한강·임진강 품고 예성강까지 보듬는 넉넉함 기왕 예까지 왔으면 강화 연미정(燕尾亭)까지는 돌아보는 게 좋다. 문수산 전망대에서 보자면 바로 발 아래, 그러니까 염하가 제비꼬리 형태로 돌아가는 곶부리에 돋을새김처럼 세워져 있다. 연미정이 처음 세워진 연대는 불분명하다. 다만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또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청나라)이 형이 되고, 조선은 아우가 된다는 ‘정묘조약’의 치욕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미정 앞을 흐르는 강을 현지인들은 조강(祖江), 즉 할아버지 강이라 부른다. 한강과 임진강을 품고, 예성강까지 보듬은 너른 강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강의 넉넉한 품 덕에 남북은 아무런 간섭 없이 서로의 속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북한까지의 거리는 2.3㎞.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북녘의 뭇 마을들이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김포·강화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2) ▲가는 길 48번 국도 타고 강화대교 바로 앞 삼거리(성동검문소)에서 우회전해 곧장 가면 문수산 산림욕장 주차장이다. 김포 도심이 혼잡할 경우 자유로를 타고 가다 일산대교 건너 우회전, 제방도로를 따라 가는 방법도 있다. 연미정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새로 난 제방도로를 따라 가면 된다. ▲맛집 털래기추어탕은 김포의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다. 갖은 양념 털어 넣고 끓인 추어탕이란 뜻이다. 고추장 양념에 소면 넣어 끓여 내는데, 어죽과 비슷하다. 월곶면 갈산리 지혜식당(987-0986)이 유명하다. 강화도의 해산물 가운데 새우젓은 예부터 임금님께 진상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 새우젓으로 만든 향토 음식이 젓국갈비다. 돼지갈비에 두부, 호박, 청양고추 등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 전혀 비리지 않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일억조갈비(933-4224), 신아리랑집(933-2025) 등 젓국갈비 전문집들이 용흥궁 인근에 몰려 있다.
  • [사설] 불에 탄 국보1호, 폭우에 훼손된 보물1호

    우리 문화재가 악마의 발톱에 노출된 채 몸살을 앓고 있다. 불과 3년 전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잿더미가 되는 참사를 겪고도 문화재 관리는 여전히 부실한 상태다. 이번엔 보물 1호인 서울 흥인지문(동대문) 문루의 지붕 일부가 폭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104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라고 그렇게 아우성을 쳤으면 당연히 그에 대비하는 ‘보물지키기’ 작전이라도 펼쳤어야 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문화재 보호의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관할 종로구청은 사고가 언제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시민의 신고를 접수하고도 나흘이나 지나서야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한번 망가진 문화재는 원형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선제적인 보호대책은 고사하고 ‘응급환자’처럼 다뤄야 할 문화재 훼손 사건을 며칠씩이나 방치하다니 나사가 빠져도 한참 빠졌다. 엄중히 문책해 다시는 이 같은 문화재 수난사태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번에 훼손된 것은 용마루와 연결되는 내림마루 부분으로, 용마루의 삼화토가 제대로 배합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실공사라는 것이다. 또 폭우가 내리면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보수작업에 앞서 정밀진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문화재 보호·관리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는 일이 중요하다. 전국적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문화재는 한둘이 아니다. 선사시대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46년째 침수로 날로 훼손돼 가고 있다. 2015년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본목록에 등재하겠다고 큰소리 칠 때가 아니다. 보다 내실 있는 문화재 대책이 아쉽다. 문화재는 문화재청 전문가나 담당 구청 공무원이 대신 지켜주는 게 아니다. 이번 흥인지문 훼손 사실이 시민의 제보로 드러났듯 진정한 문화재지킴이는 바로 깨어 있는 국민 각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 3년전 10일 불 탄 ‘숭례문’… 복원 어디까지 됐나

    3년전 10일 불 탄 ‘숭례문’… 복원 어디까지 됐나

    2008년 2월 10일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됐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아예 더 충실하게 복원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덕분에 247억원을 들여 4년간의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공정률 40%를 보이고 있는 복원 공사는 얼마나 어떻게 진행됐을까. ☞ [포토] 숭례문 화재 3주년 복원 현장 보러가기 ●터 다지기 막바지… 공정률 40%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 3년이 되는 10일 복원 공사 현장에서 최광식 신임 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연다. 현재 터 다지기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다. 성곽과 문루 등 구조물을 세우는 작업은 올 하반기쯤 시작된다. 기초공사에서는 일제시대 흔적을 걷어냈다. 일제가 훼손한 성벽을 모두 65m 정도 복구한다. 지반은 30~50㎝ 정도 더 내려간다. 일제시대 때 복토된 부분만 거둬내고, 조선 전기때 지반은 유리판을 통해 일부 노출시킨다. 복원 공사도 중요무형문화재인 석장 이의상·이재순, 대목장 신응수, 단청장 홍창원, 번와장 이근복, 제와장 한형준 등 장인들을 동원해 최대한 옛 방식에 따른다. 현장에 목공소와 대장간을 만들어 필요한 전통작업도구를 아예 새로 만들어 쓰고 있다. 옛 제작방식에 따라 나타나는 재료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다. 돌은 재질이나 색상이 비슷한 경기 포천석을 쓴다. 현판은 원형 보존에 이상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2009년 5월 복구작업을 마무리한 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이다. 복구 공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내건다. ●조선 전기때 지반 ‘유리판 전시’ 아울러 크게 신경 쓰는 분야는 방재다. 화재로 크게 혼이 났기 때문에 복구 작업 때 폐쇄회로 TV는 물론, 열적외선 감지시설 등 첨단 방재시설을 함께 설치한다. 국제문화재보존복구연구센터와 업무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9일 체결했다. 올해부터 2월 10일을 아예 ‘문화재 방재의 날’로 정한데 이어, 경각심 환기 차원에서 타고 남은 숭례문 잔해를 전시하는 공간도 마련할 방침이다. 이날 문화재청 주최로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2011 문화유산 방재 국제심포지엄’도 열렸다. 조반니 보칼디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아시아·환태평양 담당관은 “전통 기술을 전수한 장인들이 전통방식에 따라 숭례문을 복원하는 것은 유형문화유산과 무형문화유산이 결합한 새로운 시도로서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광화문 현판 논란 확산 “균열은 자연 현상” “건조 제대로 안돼”

    광화문 현판 논란 확산 “균열은 자연 현상” “건조 제대로 안돼”

    광화문 현판 균열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청은 4일 오후 긴급 현장실사를 갖고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한 신응수 대목장, 현판에 글씨를 새긴 오옥진 각자장, 양용호 단청장, 고건축 전문가인 김동현 전 문화재연구소장과 윤홍로 문화재위원 등 회의 참석자들은 균열 원인이 자연 현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육송의 특성상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특히 가을철 건조한 날씨에는 건조 수축으로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란 설명이다. 실제 현판 뿐 아니라 문루와 정문, 기둥 등 광화문 곳곳에서 균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신응수 대목장은 “소나무는 아무리 잘 건조했더라도 나무가 강하면 자르는 순간 균열이 일어나기도 한다.”면서 3개월 만에 균열이 일어난 사례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날 일부 언론에 “건조가 덜 됐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오옥진 각자장은 “나무가 덜 말랐다면 칼도 대지 않았을 것”이라며 나무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무 문화재’의 권위자인 박상진(전 문화재위원) 경북대 명예교수는 “복원 과정에서 과학적인 검토가 미흡했고, 건조마저 제대로 안 돼 금이 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톱밥과 아교를 활용한 임시처방은 또다른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만큼 내년 봄까지 보수를 하지 않고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김원기 궁능문화재과장은 “구조적인 문제는 없지만 보다 과학적인 분석을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처리 전문가와 목재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조사를 벌인 뒤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8·15 광복절에 맞춰 복원이 완료된 광화문 현판은 석달도 안 돼 벌써 10여군데에 금이 간 것으로 확인돼 부실공사 논란이 일고 있다. 앞서 광화문 복원은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시론] 광화문, 이제 광장으로 역할하게 하라/김홍식 명지대 교수·한국건축문화연구소장

    [시론] 광화문, 이제 광장으로 역할하게 하라/김홍식 명지대 교수·한국건축문화연구소장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3궐(闕)의 석축 홍예문을 가진 중층 누마루 집이 서울의 복판에 복원되었다. 그 규모는 중국의 천안문보다 조금 작지만 백악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일제의 길에 맞춰 틀어 두었던 건물을 굳이 헐어내고 제자리를 찾아 복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의 상징물로서,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가 버티고 서 있는 것보다는 훨씬 우아하지 않은가? 광화문이란 무슨 뜻인가? 제갈량이 선조의 남긴 덕을 빛낸다는 말에서 나온(光以先帝之遺德) 바 훌륭한 말이다.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데, 그에 앞서 광복절에 광화문을 공개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비록 나무가 덜 말라서 단청을 다시 해야 하는 하자가 발생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비용이 조금 더 추가될 따름이다. 고종 때도 1867년 5월17일에 착공하여 9월18일에는 문루의 입주(立柱)를 하고, 같은 해 10월11일에는 상루(上樓)하여 완공했다고 하니, 무서운 속도가 아닌가? 일제도 총독부 앞에 눈엣가시 같은 조선의 상징물을 철거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기는 데 2년 이상을 소요하면서, 우리의 기록과 비교해 보고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는 2007년 5월에 기존 건물을 철거해서, 비록 발굴조사를 한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2009년 11월27일에는 상량식을 했으며 이후 9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비지정문화재이므로 3개월 정도 앞당겨도 별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만 좀 늘렸을 뿐 야간작업도 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또 다른 상징물인 숭례문(남대문)이 수리공사를 하고 있는데, 지정문화재 국보 1호이고 보물 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다. 만일 비지정문화재에 등록번호가 주어진다면 1호는 틀림없이 광화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육축(석축) 이상은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복원도 콘크리트로 외형만 본떴기 때문에 지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지정이 되지 않아서 문화재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따름이다. 한편, 광화문 앞에 설치되어 있던 월대(기단 아래 있는 축대)를 복원하지 못한 점이 광화문을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다른 원인일 것이다. 교통의 흐름을 막는다는 이유로 복원하지 못했는데, 원래는 길이가 52m이고 그 앞 35m 지점에 해태상이 있었다. 이를 길이 10m로 줄이고 그 끝에 해태 상을 놓겠다니,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보일 수밖에…. 더구나 월대의 높이는 원래 75㎝ 정도였는데 지금은 광화문 광장 높이가 이것보다 높게 되었다. 얼마 전 광화문 광장을 발굴해 봤는데 조선 초기 지반은 지금보다 2.5m 정도 아래 있었고 매년 조금씩 토사가 쌓여서 고종 때 지반은 대략 80㎝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시각상 광화문을 받쳐주고 있던 육조거리, 곧 광화문광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 광장을 만든다고 차선을 과감히 줄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조경설계사를 부르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는데도 결론은 겨우 이 정도다. 광장(마당)이란 무엇인가? 정말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 있음으로 해서 필요하다면 무엇이라도 담는 마당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의 심장부를 거닐어 보기도 하고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대중 집회를 열기도 하며, 어떤 때는 최익현 같은 분이 도끼를 베고 앉아 나라님께 직소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울리던 곳이지 않던가? 촛불집회를 하면 무엇이 두려운가? 어울리지도 않은 세종대왕도 앉아 계시고 이순신장군도 노려보고 있으며, 분수·화분 등 너저분한 것이 많아서 진정한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시민들은 넓지도 않은 시청 앞 광장을 개방해 달라고 안달을 할까?
  • [8·15 광복 65주년] “일제 잔재 걷어내 감개무량… 자부심 가져야”

    15일 오전 10시40분 공식행사인 개문식(開門式)이 끝나고 광화문이 드디어 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3년 8개월만에 웅장한 자태가 드러났다. 역사적 순간을 직접 보기 위해 광화문 앞에 모여있던 관람객들은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연신 광화문과 궁궐을 사진찍었다. 문을 열자마다 물밀듯 몰려들었던 관람객들은 곧이어 문루에 올라가기 위해 줄을 서는 등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노인들은 감개무량한 듯 새로 단장한 문루와 단청에 새겨진 문양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문루는 하늘을 향해 멋스럽게 뻗었고, 화강암 석축은 견고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대호(71)씨는 “일제 잔재를 걷어내고 옛모습을 되찾은 것을 보니 정말 감개무량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만난 백선기(68)씨는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도 광화문을 지나가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잘 단장한 모습을 보니 너무 즐겁다.”면서 “우리나라가 대단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 젊은 사람들도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국인들도 찌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궁 안을 거닐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 내부와 ‘경회루’가 이날 공개돼 외국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본 관광객 시노하라 쿄코(35·여)씨는 “중국 자금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궁궐을 잘 보존하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일부 청소년들은 문화해설사와 단체관람을 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노트에 빼곡히 기록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김성현(14)군은 “광화문 앞에서 공사를 계속하고 있어 답답했는데 새로 깨끗하게 단장한 궁궐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8·15 65주년] ‘빛의 문’ 공사 4년만에 위용… 미래를 비춘다

    [8·15 65주년] ‘빛의 문’ 공사 4년만에 위용… 미래를 비춘다

    광화문(光化門)이 다시 열린다. 광복절인 15일 현판 제막식과 함께 145년 전 고종 중건(重建) 당시의 모습을 되찾아 우리 곁에 돌아온다. 1395년 조선 왕조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 경복궁의 정문으로 우뚝 선 이래 600년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온몸으로 견뎌냈던 광화문. 이제 그 문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빛을 만방에 퍼트릴 채비를 마쳤다. 복원되는 광화문은 육축 240㎡에 문루가 들어서는 형태다. 중층인 문루는 아래층 174.1㎡, 위층 110.7㎡ 규모로 정면 3칸, 측면 2칸 형식이다. 처마를 받치는 장식 구조가 기둥 윗부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 있는 다포식 공포에, 옆에서 보면 경사가 완만한 사다리꼴 모양의 우진각 지붕을 갖췄다. 겹처마이며 금모로 단청을 입혔다. 박정희 정권이 1968년 복원하면서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던 문루는 금강송 목재로 바뀌었다. 복원공사를 총지휘한 신응수 대목장이 “(좋은 나무 찾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했던 그 금강송이다.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춰 비뚤어졌던 중심축과 위치도 바로잡았다. 고종 중건 당시 경복궁 중심축에 맞췄던 원래 위치를 찾아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이동하고, 시계 방향으로 3.75도 각도를 틀었다. 광화문 정문 앞의 월대(月臺·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8m 길이로 복원했다. 원래는 53m이지만 교통 혼란을 고려했다. 해치상 2기도 제자리에 갖다 놨다. 광화문 외에 용성문, 협생문, 동·서수문장청, 영군직소 등 부속 건물 5동을 함께 복원했다. 광화문 양 옆의 궁장(宮墻·궁궐 담장) 330m와 광화문에서 흥례문으로 연결되는 어도(御道) 100m도 되살렸다. 2006년 12월4일 ‘광화문 제모습 찾기사업’ 선포식과 함께 본격적인 광화문 철거에 들어갔다. 이듬해 9월 철거 이후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에서 원래 광화문 위치가 파악됐다. 광화문이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 직선 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7m 높이의 기단부 석축 공사는 고종 때와 같이 화강석을 사용했다. 당시 썼던 인왕산 돌과 석질이 가장 유사한 경기 포천산 돌을 공수했다. 석축공사는 2009년에 마무리됐고, 이어 목조 누각 공사가 시작됐다. 2009년 초 강원 삼척 등지에서 벌채한 금강송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었다. 같은 해 11월26일 여기에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식이 진행됐다. 올 들어 추녀와 서까래를 설치하고 지붕 기와를 잇는 작업과 단청 등이 이어졌다. 지난 7월부터 광화문 현판 각자(刻字)와 단청 작업에 들어가는 등 마무리를 해 왔다. 아직 복원이 끝나지 않은 동십자각 주변의 궁장 설치와 하수암거 이설 등은 연말까지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주말기획] “공사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금강송 찾는 일”

    [주말기획] “공사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금강송 찾는 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광복절인 오는 15일 일반에 공개된다.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에 따라 2006년 12월부터 추진해온 원형 복원 작업을 끝내고, 고종 중건(1865년) 당시의 위용을 드러낸다. 광화문 복원은 장장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의 대역사를 마무리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각별하다. 광화문 현판식을 누구보다 감개무량하게 지켜볼 이가 있다. 신응수 대목장이다. 지난달 26일 칠순을 맞은 그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을 대표하는 장인이자 유일한 궁궐 도편수로서 광화문 복원은 물론 경복궁 복원 전체를 총지휘한 책임자다.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고, 곧이어 6월에 경복궁 복원 정비사업의 도편수를 맡아 20년간 매일 경복궁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으니 그 감회는 더욱 남다를 터다. 신 대목장을 지난 3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전통건축’이란 간판이 걸린 사무실은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 맞은 편 길에 있다. 사무실 없이 경복궁 안에서 일을 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져 1년 전 이곳에 따로 사무실을 얻었다고 한다. “감격스러운 거야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지금도 20년 전 기공식하던 날 가슴 벅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나이가 50이었는 데 목수로서 너무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가장 활발하게 일할 때 나라의 큰 일을 맡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데 행운을 타고 난 것이지요.” ●문화재 공사는 온 국민이 감독자 돼야 1968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했던 광화문 문루는 신 대목장의 손끝에서 145년 전 목조 구조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경복궁 중심축에서 벗어나있던 위치도 바로 잡았다. “서까래 지름을 15㎝에서 21㎝로 두껍게 한 덕분에 처마 선이 더욱 뚜렷하고 아름다워졌다.”고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 자부심이 한껏 배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 제기한 공사 기간 단축에 따른 부실공사 논란에 대해선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광화문 공개는 원래 12월 예정에서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 맞춰 9월로, 그리고 다시 광복절로 두 차례 앞당겨졌다. “공사 기간을 줄이느라 일처리를 제대로 안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급하다고 목수가 대패질도 안 하고 나무를 뚝뚝 자를 수 있겠어요? 공사는 이미 끝났고, 뒷정리만 남은 상태에서 이왕이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인 만큼 광복절날에 공개를 하면 몇 배 더 감격스럽지않겠나 판단한 겁니다. ” 그는 “문화재 공사는 온 국민이 감독자가 되는 게 맞다. 한번 잘못하면 돌이키기 힘들기 때문에 잘못은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하지만 일리에 맞게 지적해야지 무조건 헐뜯는 식이어선 곤란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흥례문 복원 때도 나무를 수입송으로 썼다느니 나무가 터지고 추녀가 너무 높다느니 말들이 많아서 감사원 감사까지 받았다. 그때의 억울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신응수 대목장의 호는 성재(誠齋)다. ‘정성스럽게 집을 잘 지으라’는 의미로 서예를 하는 지인이 15년 전쯤 지어줬다. 열일곱 살 때 사촌형을 따라 처음 목수 일을 시작한 이래 반세기 넘게 전통 목재 건축 일에만 매진해온 그의 외곬 인생을 군더더기 없이 단순명료하게 대변하는 이름이다. 밥벌이로 시작했던 목수 일은 스승 이광규 대목장을 만나면서 천직으로 바뀌었다. 스승이 데려간 1962년 숭례문 중수 공사 현장에서 처음으로 “목수가 참 대단하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100건 넘는 고건축 문화재 복원·신축 “남들보다 실력이 뛰어났다기보다 성실했던 것 같아요. 나이는 어렸지만 최고 선생님 밑에서 배운다는 자부심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스승을 따른 덕에 1970년 불국사 복원 공사 때는 부편수가 됐고, 5년 뒤 수원성 복원 공사 때는 도편수로 올라섰다. 이후 경주 안압지, 창경궁, 청와대 대통령 관저 등 100건이 넘는 고건축 문화재 복원과 신축 작업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20년을 함께 한 경복궁 복원 사업은 50년 목수 인생 중 최대 역작이다. 침전, 동궁, 흥례문, 태원전, 건청궁 등 90여동의 건물이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근정전을 해체하고 복원한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5대궁 가운데 최고의 건물이 근정전이에요. 조선 장인의 솜씨가 얼마나 정교한지 정말 놀랐습니다. ” 그는 “전통 건축은 정성 그 자체다. 대충대충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성이 생명이라고 했다. “딸린 식구(제자)가 40명쯤 되는 데 한 명이 잘못하면 전부 불러다 야단을 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건 못봐요. 똑같이 일하면 발전이 없어요.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도록 가르칩니다.” 목수에게 나무는 평생의 동반자다. 좋은 나무가 없으면 좋은 건물이 나올 수 없다. 광화문 복원 중 가장 어려웠던 것도 금강송을 찾는 일이었다고 한다. “초창기만 해도 큰 나무가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찾기가 쉽지 않아요. 속이 붉고 나이테가 촘촘한 적송은 구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에 그는 후대를 위해 강릉에 50만평 임야를 사들여 소나무를 키우고 있다. 사무실 한 켠엔 숭례문 처마 모형이 놓여 있다. 화재가 나기 수년 전 조사 차원에서 실측했던 자료와 불탄 흔적들을 찾아서 만든 모형의 일부다. 숭례문 복원 공사는 다음 달부터 시작된다. “예전에 선생님이 했던 공사를 맡게 돼 어깨가 더 무거워요. 선생님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옛 기억을 살려 철저히 해내야겠지요.” 정교한 작업 못지 않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기록이다.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소용없어요.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장인들도 볼 수 있게 책으로 남겨야 우리나라 건축이 발전하지 않겠어요?” ●숭례문 복원과정 책으로 남길 것 경복궁 근정전 보수 전(全)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그의 책 ‘경복궁 근정전’은 한국 목조 건축의 교과서로 꼽힌다. 그는 숭례문 복원 과정도 책으로 남길 계획이다. 남은 꿈은 전통건축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상설전시관, 체험관, 목수 학교 등을 갖춘 공간을 계획 중이다. 10년째 터를 못 구해 차일피일 미뤄왔는데 아쉬운 대로 가회동에 한옥을 매입해 자료박물관이라도 먼저 시작할 생각이다. 목수로서 꼭 이뤄보고 싶은 바람도 있다. “전설 속에 묻힌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을 살아 생전 내 손으로 복원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신응수 대목장은 ▲1941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출생 ▲1958년 충남 천안 병천중 졸업 ▲1960년 대목 이광규 문하생으로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 ▲1962년 숭례문 중수 공사(도편수 조원재, 부편수 이광규) ▲1970년 불국사 복원(도편수 이광규, 부편수 신응수) ▲1975년 수원 성곽 복원(도편수 신응수) ▲1979년 경주 안압지 복원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대통령 표창 ▲1991년 6월~ 경복궁 복원 공사 ▲2002년 옥관문화훈장 ▲2010년 9월 숭례문 복원 공사 시작
  • 문경 고모산성 옛 모습 재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인 고모(姑母)산성 일대가 새롭게 단장됐다. 문경시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11년간에 걸쳐 총 110억원을 들여 고모산성(둘레 1300m)과 주변 유적을 정비했다고 22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허물어져 가던 성벽을 최대한 옛 돌을 살려 복원했고,고모산성의 익성(翼城)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관성인 석현성도 학술조사를 통해 원형을 확인한 뒤 문루와 성곽 복원을 끝냈다 또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길 중 가장 험한 구간인 인근의 토끼비리(명승 제31호)도 말끔히 보수했다. 목조 난간이 너무 낡아 위험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목조 난간과 석축을 설치하고 전망대와 안내판, 벤치 등을 보완해 안전성을 높였다. 고모산성 바로 앞에 있는 6~7세기 신라 고분으로 추정되는 신현리 고분군도 발굴 조사가 끝나 정비됐다. 석현성 안에는 길손의 휴식처인 주막거리를 옛 모습대로 재현해 놓았다. 마을 주민이 지금도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은 석현성 옛길 옆에 그대로 남겨놓았다. 고모산성과 토끼비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진남교와 국도 3호선 일대의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숭례문 땅속의 1.6m 찾았다

    숭례문 땅속의 1.6m 찾았다

    최소 3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숭례문의 속살이 드러났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30일 서울 남대문로 4가 숭례문 발굴 현장에서 설명회를 갖고 “지난 4월부터 성 문루를 떠받치는 석축 기단인 육축(陸築)의 인접 지역 800㎡를 발굴조사한 결과 현재의 지표보다 160㎝ 아래에서 조선 태조 때 숭례문을 처음 쌓을 당시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육축의 기초 지대석과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모양의 문)의 문지도리석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숭례문 육축 석재 1~2단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숭례문 육축의 원래 높이도 현재 6.4m가 아닌 8m임이 확인됐다. 또 15~16세기 조선전기 도로는 현재 지표 160~170㎝ 아래, 17~20세기 중·후기 도로면은 지표 30~50㎝ 아래 지점에서 각각 확인돼 임진왜란 뒤 숭례문 일대 지표면이 1m 이상 상승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조선 전기 도로는 지금의 아스팔트 도로를 닦는 방식과 흡사하게 잡석과 자갈, 흙 등을 다진 다음 회색 모래를 깔아 만들어졌으며, 중·후기 도로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수원 화성 팔달문 216년만에 수술

    수원 화성 팔달문 216년만에 수술

    경기 수원 화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팔달문(보물 402호)이 축조 216년 만에 수술대에 오른다. 수원시는 21일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정밀안전진단 결과 팔달문의 목부재 중 서까래가 탈락되고 보가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원형 보존을 위해 해체·보수작업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작업은 2층 문루 110㎡로 기와 등 지붕을 해체한 다음 서까래 등 목조 부위의 변형상태를 확인해 이상 부분을 교체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옹성 내·외부 전돌의 백화를 제거하고 부식되지 않도록 경화 처리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시는 최근 해체·보수를 맡길 업체를 선정했으며, 24억원을 들여 내년 12월 완료를 목표로 다음달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 남대문처럼 가설덧집을 씌우게 돼 내년 말까지는 팔달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 준공된 팔달문은 화려하고 웅장한 누각과 옹성을 자랑하는 대형 목조문화재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고도 원형을 유지해 1964년 보물 402호로 지정됐다. 팔달문은 그동안 부분적인 보수작업은 있었지만 지붕을 완전히 해체한 뒤 복원하는 것은 처음이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도시와 길] 가족과 걷다보니 수원8경 즐기고… 보물 만나고…

    [도시와 길] 가족과 걷다보니 수원8경 즐기고… 보물 만나고…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수원에는 ‘화성 성곽순례길’가 있다. 화성 성곽순례는 걷는 재미와 함께 200년전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성곽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녀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다. 성곽순례는 경기도청 후문앞 팔달산 진입로에서 시작해 서남암문(화양루)~서장대~화서문(서문)~장안문(북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창룡문(동문)~봉돈~동남각루까지 5.4㎞ 이어진다. 성을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제주 올레길 1개 코스의 절반 가량인 2~3시간 정도. 길이 험하지 않아 노약자들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성곽 가운데 팔달산(143m)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군사지휘소로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이다.정조대왕이 능행차시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화서문(보물 403호)을 만난다. 문 옆에는 공격하는 적들을 삼면에서 저격할 수 있도록 지은 서북공심돈이 자리하고 있다. 장안공원을 지나면 화성의 북쪽 대문인 장안문을 만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문루의 높이가 13.5m, 너비가 9m에 달한다.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보다도 크다. 이어 일곱개의 아치형 수문을 거느린 화홍문이 나타난다. 화홍문은 7칸의 홍예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문루를 세웠다. 옆에 있는 방화수류정 주변은 경치가 아름다워 수원8경 중 하나로 선정됐다. 화홍문을 지나면 연무대가 나타난다. 동장대로도 불리는 이곳은 당시 군사들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군사 훈련장이다. 현재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국궁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어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봉돈을 지나 계속 걷다보면 동남각루에 이른다. 여기서 팔달문 사이는 성곽이 한국전쟁 때 파괴돼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보물 402호인 팔달문은 사통팔달로 통한다는 의미로 지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문루의 네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김민서(47·주부·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씨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곽이 도심 한복판에 보존돼 있다는 게 놀랍다. 구불구불한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조선시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등 제주 올레길 못지 않은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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