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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美 테러 애도의 날’

    정부는 13일 미국 테러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사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14일을‘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이에따라 14일 모든 관공서,학교,재외공관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오전 10시에는 1분간 사이렌 소리와 함께 테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하게 된다. 최광숙기자
  • 美테러 대참사/ 청와대·정부 후속조치

    미 동시다발 테러 사흘째인 13일 정부는 당초 흥분과 경악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현지 교민의 피해 상황과 실종자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특히 정부는 미국이 보복조치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 관련,아프가니스탄과파키스탄 국경 근처의 교민들에 대한 대피를 긴급 지시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오전 상견례를 겸한 첫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이상주(李相周) 비서실장의 제의로 미국 테러 참사 희상자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김 대통령은 “실종상태인 교민들의 안위 파악 등 현지공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이어 “세계 최고의 방위력을 가진 나라가 민간 여객기의 자폭전술 앞에 당했다”면서 “세계에 안전한 나라가 없고 전후방이 따로 없게 된 만큼 우리도 휴전선만 바라보던 안보태세에서 벗어나 전방위적인 안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책반은 이날까지 주뉴욕 총영사관과 한인회 등을 통해 실종자들에 대한 확인작업을 계속 벌였다.대책반장인 임성준(任晟準) 차관보는 이날 “실종자 수가 줄어들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추가 생존자 파악에 분주했다. 또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주변에서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교민들의 재산피해 상황을 접수하고,복구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외교부는 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미국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공관에 전문을 보내 교민들이 불필요한 여행을 자제토록 유도하고 출타시 반드시 해당 공관에 신고하도록 당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정부의 한 당국자는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다만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인접한 파키스탄 거주 교민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피신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공군은 이날 오후 동해안 상공에서 C-130 수송기,KF-16 전투기 등이 참가해 테러범에 의한 민항기 공중납치 상황을 가상한 피랍 항공기 대응훈련을 실시했다. 이날 훈련은 공군 작전사령부 전구항공통제본부(TACC)에서 정상항로를 이탈한 민항기 1대에 대해 각종 정황판단을통해 공중납치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고,곧바로초계비행 중인 전투기 2대에 추적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인근 전투비행단에서 무장한 전투기 4대가 발진해최후 상황에 대비한 요격을 준비한 뒤 피랍기를 가까운 공항으로 유도했다. 공군은 민항기를 공군 비행장에 강제 착륙시키고 대기하던 헌병 기동타격대가 테러범들을 진압하는 것으로 훈련을끝냈다. 한편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은 이날 국방부에서 말레이시아 출장을 마치고 복귀한 토머스 슈워츠 한미연합사령관의 예방을 받고 테러참사에 대한 한국군의 위로를 전했다. 슈워츠 사령관은 “오늘 오전 10시를 기해 부시 대통령의지시에 따라 대테러 방어태세인 ‘스레트콘 D’를 한 등급낮은 ‘C’로 바꿨다”고 밝혔다. 오풍연 박찬구 기자 poongynn@
  • “사죄조차 않는 日정부 저주 고의폭파 의혹 꼭 밝혀져야”

    “일본의 만행으로 억울하게 수장된 원혼들의 한을 꼭 풀어드리겠습니다.저승에서나마 편히 쉬소서….”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24일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군사시설에서 강제 노역을 끝내고 일본 해군 소속 수송선 우키시마마루호(浮島丸)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다 배가 침몰해 숨진 희생자들의 위령제가 24일 오후 생존자 4명과 유가족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남산동 한국영화감독협회시사회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浮島丸事件犧牲英靈 神位’(우키시마호 희생자영령 신위)라 쓰인 위패와 제상을 정성스럽게 마련하고 묵념과 추혼,추도사,헌화,살풀이 춤 순으로 원혼을 달랬다. 지난 93년 일본측에 손해배상 소송을 낸 지 8년만에 23일자로 교토(京都)지방법원으로부터 희생자 15명에게 300만엔씩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전재진(田在鎭·44)회장은 “교토 법원의 판결은 일본이 처음으로 우키시마 사건을 공식 시인한 것이지만 고의 폭파의혹을 밝히지않은데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도 빠진 것으로 용납할 수없다”며 분노했다.그는 “일본이 모든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배상하고 머리 숙여 사죄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유가족 임서운씨(60·여)은 “최근에야 아버지가 징용을 끝내고 돌아오다 숨졌고,위폐가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전범들과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어린시절 아버지없이 홀로 자란 고통을 생각하면 사죄조차 하지않는 일본 정부가 저주스럽다”고 울먹였다. 당시 상황을 증언한 생존자 지홍섭씨(84·충남 천안)는 “고통스런 강제 노역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배가 가라앉아동료들이 모두 죽었다”면서 “수많은 조선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일본이 사죄하지 않는 것은죽은 사람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한편배가 침몰했던 일본 마이즈루(舞鶴)항에서도 이날 우키시마마루 순난자(殉難者)추도회 소속 회원들과 재일동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가 열렸다. 조현석기자 hyun68@
  • 한·일 대학생 8·15 어깨동무

    “광복절이든 패전일이든 올해 8월15일은 유난히 뜻깊은날이 될 겁니다.” 광복절을 5일 앞둔 지난 10일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에서는 한국 성공회대 학생 15명과 일본의 릿쿄(入敎)대학생 11명이 폭염에도 아랑곳 않고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었다.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등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일본 대학생들이 몸으로 한국을 배우겠다며자원한 일이다. ‘한·일 대학생 여름캠프’는 성공회대에 근무하다 올초부터 릿쿄대 교목으로 활동중인 유시경(柳時京·38) 신부와 릿쿄대 가야마 히로토(香山 洋人·39) 교목이 아이디어를 제시,올해 처음 실시됐다. 학생들은 낮에는 콩밭매기,포도따기,복숭아 과수원 제초작업 등 난생처음 해보는 농사일에 구슬땀을 흘리고 밤이면 지역활동가,교수 등을 초청,한일관계에 대한 강연을 듣고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지난 7일 버스를 타고 강화도로 올 때만 해도 한국학생,일본학생으로 나뉘어 서먹했던 분위기는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금방 친숙하게 바뀌었다. 버섯 재배가 끝난 농가에서 폐목화솜을 치우던 학생들은 “더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기하고 재미있다”며 활짝 웃었다.폐솜이 풍기는 악취가 실내에 가득했지만 학생들은 모기에 뜯겨 상처투성이인 팔다리를 내보이며 마냥즐거워했다. 고추장을 듬뿍 넣은 국수로 점심을 해결한 뒤 족구를 하며 친목을 다졌다.한국 남학생이 넘어져 다치자 일본 여학생이 서툰 한국말로 “오빠,갠얀아(괜찮아)?”하며 약을발라준다. 유 신부는 “일본 학부모들 중 일부는 ‘양국 관계가 이처럼 악화됐는데 한국에 아이들을 보내도 되겠느냐’며 걱정하기도 했다”면서 “양국간의 해묵은 숙제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만나 대화하면서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할 때 조금씩 해결된다”고 말했다. 가야마 신부도 “일본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국가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외국”이라면서 “한국에 관심이 없다보니 일본정부와 우익들이 역사를 굴절해도 아무런 대꾸도 못한다”고 전했다.그는 “젊은 세대가 서로 만나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 잘못된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힘도 생긴다”고 역설했다.일본 학생들은 처음 들어본 정신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그처럼 나쁜 짓을 했다면 왜 사과하지 않는거지”라는 의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오하시 히토미(大橋 ひとみ·21·여)는 “일본에서는 매년 8월15일 아침에 묵념을 하면서‘조상들이 전쟁 때문에 희생을 당했구나’하는 생각만 했었다”면서 “이곳에 와서야 한국인들이 일제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게 된 만큼 한국에서 맞는 이번 8·15는 특별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경남 마산인 재일교포 3세 야마다 이쿠오(山田 育男·한국명 이윤철·20)는 “일본의 역사 인식은 오로지 미래만 생각하자는 식”이라면서 “과거를 무시하는 한 일본은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12일 서울로 돌아온 학생들은 그룹별로 서대문 형무소,남산 안중근 기념관 등을 둘러본 뒤 15일 연세대에서 열리는8·15 통일대축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강화도 류길상기자 ukelvin@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롯데, “감독님 영전에 승리를 바칩니다”

    롯데가 심장마비로 타계한 김명성 감독의 영전에 승리를바쳤다. 롯데는 24일 사직에서 벌어진 프로야구에서 손민한의 호투와 장단 13안타로 해태를 7-4로 누르고 2연패를 끊었다.해태는 4연패.선발 손민한은 7이닝동안 삼진 5개를 곁들이며8안타 4실점으로 10승 고지에 올라 신윤호(LG)와 다승 공동선두에 나섰다. 우용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은 롯데는 4-4로 팽팽히 맞선 7회 무사 1루에서 박정태의 적시 2루타로1점을 앞선 뒤 호세의 고의 볼넷과 보내기번트로 맞은 1사2·3루에서 김주찬의 2타점 적시타로 승기를 잡았다. 두산은 잠실에서 조계현의 호투로 SK를 5-3으로 꺾고 SK전4연승을 달렸다. 조계현은 5이닝을 6안타 2실점으로 막아 4월12일 수원 현대전 이후 3개월 12일만에 2승째를 챙겼다.8회 구원 등판한 진필중은 이틀 연속 세이브로 통산 150세이브포인트(역대 7번째)를 달성했다. 현대는 수원에서 퀸란의 3점포 등 장단 12안타로 LG를 9-6으로 물리쳤고 삼성도 대전에서 한화를 3-2로 따돌려 나란히 3연승했다. 한편 김명성 감독이 별세한 이날 8개 구단은 소란스런 응원을 자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사직 등 경기가 벌어진 4개 구장에서는 선수들이 유니폼에검은 리본을 달고 출장했고 관중들은 경기 시작전 묵념으로고인에게 조의를 표했다. 응원단들도 치어리더없이 앰프 사용을 자제했다. 김민수기자
  • 대한매일 초청 모범용사 광주 5·18묘지 참배

    대한매일이 초대한 국군 모범용사 60명과 배우자 등 119명은 일정 4일째인 21일 광주 5·18묘지와 전남 여수산업단지,광양제철소 등을 둘러봤다. 이들은 이날 오전 9시쯤 5·18묘지에 도착,분향·묵념하고광주시 관계자로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상황과 묘지조성 경위 등을 전해 들었다. 모범용사 대표로 분향한 육군 이석형(李碩炯·55)원사는 “말로만 듣던 이곳에 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며 “다시는 이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이곳을 처음 방문했다는 육군 문숙희(文淑姬·41·여)상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이 분들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다”며 “우리도 이들의 희생에 보답하기위해서라도 국방임무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5·18묘지를 참배한 이들 일행은 여수산단 남해화학 등 발전된 산업현장을 둘러본 뒤 주승용(朱昇鎔)여수시장이 마련한 오찬에 참석했다.이어 오동도를 관광하고 광양제철소를 방문했다. 이들은 광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2일 오전 울산으로 출발한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사설] ‘현충일 골프’ 징계해야

    사정당국은 이번 현충일 골프치기에 나섰던 고위 공직자 40여명의 명단을 확인해 해당 부처의 장(長)에게 통보했다고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접대성 골프를 쳤거나 상습 출입자는 상당한 강도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명단 통보 대상자들은 중앙부처 국장급의 고위직에서 영관급 장교,국립대학 교수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골프도 스포츠고 휴일에 내돈 내고 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여느 때 같으면 누가 뭐라겠나. 그러나 현충일이 어떤 날인가.국난에 온몸으로 맞서다 스러져간 호국영령들의 높은 뜻을 깊이 되새기며 나라사랑의 마음을 추스르자는 날이 아니던가.바로 그날 골프장에 나간장교들은 오전 10시 묵념의 시간을 어떻게 맞았는지 궁금해진다.혹시나 하여 국방부 장관의 엄명까지 있었다는 후문이고 보면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 기강을 바로 잡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공직자들 또한 국민에게 큰 실망을 던져주었다.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전국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이즈음이다.그것도현충일에,명단이 통보된 공직자 이외에도 자그마치 600여명이 전국의 골프장을 누볐다는 소식이고 보면 기가 막힌다.가뭄난리를 겪는 농민들이 안타까워 물 한바가지 제대로쓰지 못하겠다는 판에 그 정도 양식도 없어서야 되겠는가. 골프 유혹조차 제대로 뿌리치지 못하는 공직자라면 다른 꼬임인들 버텨낼 수 있겠는가.차제에 공직을 떠나기를 기대해본다. 평소 애국을 설파하고 양식을 말하던 사회 지도층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뒤돌아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현충일을전후해 사정당국이 감찰에 나설 것을 눈치채고 현충일만을피했거나 교묘하게 가명으로 ‘적발’을 모면한 이들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약삭빠른 행태가 아직도 버젓이 통용되는 사회인 것 같아 안타깝다.주위에서 인정해주는 만큼 양식있고 분별있는 언행으로 보답하길 촉구한다.
  • [사설] 현충일과 ‘민족정기’ 모임

    마흔 여섯번째 맞는 현충일 아침이다.조국의 광복과 국권수호를 위해,민족 안보를 위해,민주사회 실현을 위해 삶을바친 분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 뜻을 이어받고자 결의를 다지는 날이다.집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전국에 사이렌이 울려퍼지면 경건한 자세로 묵념을 올리는 일은 국민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다.주변의 국가유공자 유족에게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위로를 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50년이훌쩍 넘었건만 국토는 여전히 남북으로 갈리고 겨레는 이산의 아픔에 울고 있다.또 여태껏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우리사회는 갖가지 후유증을 앓는 중이다.그런 의미에서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창립식을 가진 ‘민족정기를 세우는의원모임’에 큰 기대를 갖게 된다. ‘민족정기 의원모임’은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목표로 내걸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23명이 모여 결성했다.1948년 특별법에 바탕해 ‘반민특위’가 구성됐으나 친일세력의 폭거로 무산된 이래 국회에서 ‘친일 청산’을 목표로 한 의원단체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는 세대를 뛰어넘은 ‘민족정기’의 계승체라 할만하다. 우리는 우선 이 모임에 여야를 망라하여 뜻있는 의원들이참여했고 그 구성이 평소 개혁 성향을 보여준 초·재선 의원 중심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또 이 의원들이 입법활동을통해 친일파 재산 처리,친일 인물이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국립묘지 안장 등 각종 수혜의 환수 등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격려를 보낸다.안중근의사를 비롯한 독립지사들의 초상을 화폐에 삽입하는 등의 독립지사 현창 사업에도 찬성한다. 최근 일본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에서 보듯이 일본은 우경화로 치닫고,북한과 미국의 알력,남북대화의 소강상태 등 동북아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그야말로 민족정기 앙양이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우리 국민도 ‘민족정기 의원모임’의 활동을 적극 성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 현충일 추념행사 전국서 오전 10시 1분간 묵념

    정부는 6일 제46회 현충일을 맞아 조국 수호를 위해 헌신·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명복을 기원하는 추념행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한다고 4일 밝혔다. 6일 오전 10시 정각에 전국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1분간 묵념을 올리도록 할 예정이다.추념행사는 묵념에이어 헌화 및 분향,추념사,헌시낭송,현충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행자부는 경보사이렌과 민방공 대피사이렌 소리를 혼동하지 말고 사이렌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경건한 마음으로묵념을 함께해주길 당부했다. 최여경기자 kid@
  • [현장] ‘오열속 장학금’…숙연해진 장례식

    24일 오전 11시 경기도 광주시 예지학원 화재참사 희생자합동영결식이 거행된 광주시청 광장에는 유족과 친지,학원동료,기관 단체장 등 600여명이 참석해 거대한 울음바다를이루었다. 이날 영결식은 고인들에 대한 묵념과 약력 소개,영결사,유족 대표 최병수씨(崔炳洙)의 조사,묵도,헌화 및 분향 등의순서로 진행됐지만 시종일관 유족과 동료 학원생들의 오열 속에 진행됐다. 최씨는 조사에서 “공부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이곳으로너희를 보낸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지난 어버이날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전화한 게엊그제 같은데…”라며 울먹였다. 장의위원장인 박종진(朴鍾振)시장은 영결사를 통해 “저희들은 님들의 고귀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이와 같은 사고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온 신명을 바칠것을 약속드립니다”고 애도했다. 분향이 있자 유족들의 통곡은 극에 달했고 숨진 학생들의친구인 이모씨(21·여) 등은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해 동료들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영결식을 마친 희생자 운구행렬은 영결식장에서 약 3㎞떨어진 예지학원 앞에서 노제를 지낸 뒤 성남시립화장장 등지로 떠났다. 앞서 숨진 김경록군(18) 유족들은 23일 고향인 경남 창원시 명소성당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대형 화재사고로서는 이례적으로 빨리 사망자 1인당 1억8,000만원의 보상 합의가 타결돼 영결식이 거행될 수 있었던데는 유족과 시의 성의 있는 자세가 큰 도움이 된 것으로알려졌다. 유족 대표인 최씨는 “밤낮으로 따뜻한 정을 베풀어준 광주시와 시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말도 잊지않았다. 한편 김경록군의 아버지 김영수씨(50)와 유족 대표 최병수씨(51·숨진 최나영양의 아버지) 등 희생자 가족 2∼3명은유족보상금을 희생자들이 다녔던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증할뜻을 밝혀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윤상돈 전국팀기자 yoonsang@
  • 타계한 경제거목 왕회장 정주영씨/ 체육계 남긴 발자취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핵심적인 역할을했으며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에서도 커다란족적을 남겼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정회장의 추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지난 81년 1월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일본 나고야 유치단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당시는 전두환정권 초기로 정국이 불안한데다 나고야 유치단의활동이 워낙 활발해 국민들은 유치에 회의적이었다.그러나정회장은 현대그룹 독일지사 직원들을 총동원,다양한 유치전을 펼쳤고 올림픽 위원들의 숙소에 한국인의 올림픽 유치염원을 담은 생화를 줄기차게 배달하는 등 정성을 쏟았다. 이 때문에 일본을 지지한 위원들이 한국쪽으로 하나 둘씩돌아섰고 결국 9월30일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제24회 올림픽 서울 개최”를 선언했다.정 회장특유의 ‘밀어붙이기’가 국민들에게 엄청난 감격을 안겨준순간이었다. 올림픽 유치의 공로를 인정받아 82년 7월 대한체육회장에피선된 정 회장은 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을 면밀히살폈다.또 저명인사를 초청하고 현대 해외지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올림픽을 홍보하는 한편 84년에는 북한에 단일팀 협의를 제안하는 등 앞선 자세로 올림픽 성공을 일궈냈다.정회장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기업의 경영 기법을 체육계에 도입하기도 했다.현대 관계자들은 이후 축구 농구 양궁 씨름 등 많은 종목의 회장직을맡으며 스포츠 육성에 앞장 섰다. 특히 어린시절 강원도 통천에서 씨름을 즐겨한 정회장의씨름 사랑은 유별났다.현대그룹 사원연수와 체육대회에서는직접 샅바를 잡고 겨루기도 했다.또 여자농구에도 애정이커최근까지만 해도 직접 경기장을 찾기도 했다. 정회장의 체육에 대한 관심은 아들 정몽준씨에게도 이어져몽준씨는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 유치의 일등공신이 됐다. 한편 김운용 회장 등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 회장단은 22일 청운동 빈소를 찾아 조문했으며 프로야구 현대는 이날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의 시범경기에서 고인에 대한 조의를 표했다.현대선수단 전원은 왼쪽 어깨에검은 리본을 단 채 경기에 나섰고 경기시작 전 LG선수단과 함께 짧은 묵념을 했다. 김민수기자 kimms@
  • 김대통령 소방관분향소 조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5일 오전 국무회의를 마친 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들의 합동분향소가차려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을 방문,조의를 표했다. 김 대통령은 분향소 앞에서 흰 장갑을 끼고 국화를 헌화한뒤 순직 소방관 6명의 영정 앞에 차례로 서 묵념을 했다.이어 유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순직 소방관들의 가족사항과 결혼 여부를 묻는 등 관심을 나타냈다.특히 숨진 박준우 소방사의 아버지가 “오는 10일쯤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죽어버렸다”고 울먹이자 손을 잡고 위로했다.또 순직한 장석찬 소방사의 동생에게는 “유족을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형수에게도 잘 얘기해 달라”고당부했다.일부 유족들은 김 대통령에게 “앞으로 생계가 걱정된다”고 각별한 배려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 대통령은 “정부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할 수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국무회의에서도소방관이 사고를 당했을 때를 비롯해 제도를 개선하라고 말한 만큼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살신성인 소방관 넋 위로 추모비 세운다

    서울 홍제동 화재 붕괴 사고로 순직한 소방관들을 기리는추모비가 곧 건립된다.컴퓨터 통신 대화방에는 애도의 글이봇물을 이뤘다.각계의 성금도 잇따르고 있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대(공동대표 宋梓 崔秉烈)는 5일 공복(公僕)의 사명감과 사회 전반에 걸친 안전의식을 고취시키기위해 ‘화재사고 영령 위로의 탑’을 세우기로 했다.시민연대는 이날 회의를 열어 범국민 모금 운동과 유자녀 장학회설립 등 인명구조 작업 중 숨진 소방관들의 넋을 추모하고유족들을 돕는 방안을 논의했다. 소방관으로 재직중이거나 졸업한 동문이 많은 방송통신대도 총동창회장인 ‘활빈단’ 홍정식(洪貞植·50)단장을 중심으로 유가족 돕기에 나섰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시민은 이날 서부소방서를 찾아 “소방관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보고 공무원에게 선입견을 가졌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성금이 든 봉투를 내놓고 돌아갔다. 행자부와 하이텔,천리안 등 컴퓨터 통신 대화방에는 500여명이 애도를 표하는 글을 올렸다. 은평구 주민이라는 한 네티즌은 서부소방서홈페이지(www.fire.seoul.kr/∼seobu)에 띄운 글에서 “여러분의 희생은 이웃들에게 큰 충격이지만 희생이 결코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로했다.소방관의 딸이라고 밝힌 한 여성은 “아버지도 비슷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며소방관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1,500만 네티즌이 도울테니 서부소방서장님은 계좌번호를 게시판에 올려달라”는 등 범국민적 모금 운동 제안도 쏟아졌다. 하이텔의 한 동호인은 “아들이 커서 소방관이 되겠다고 하는데,순직 보상금이라고 해봐야 웬만한 기업체의 퇴직금에도 못미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고귀한 목숨을 언제 뺏길지 알 수 없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건(高建) 서울시장은 봉급의 10%를 조의금으로 내겠다고밝혔으며 심완구(沈完求) 울산시장을 비롯한 시청 실국장단과 울산시 소방본부 직원, 등은 850여만원을 전달했다.대구시와 경북도 직원들은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각각 1,300만원과 1,800만원의 조의금을 전달했다. 행정자치부도 9일까지를 순직 소방관 애도기간으로 정해 매일 1차례 묵념의 시간을 갖기로 하는 한편 직원들이 모은 600만원의 성금을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 韓·日 프로야구팀, 이수현 추모경기 갖는다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챔피언팀이 고 이수현씨(李秀賢·27) 추모 경기를 갖는다. 지난해 한국과 일본시리즈에서 각각 정상에 오른 현대 유니콘스와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새달 11일 오후 5시 일본 도쿄돔에서 ‘고 이수현씨 추모경기’를 갖기로 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추모 경기는 두 팀이 지난달 합의한 두 차례의 연습경기 가운데 1차전을 한·일 두 나라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이수현씨 추모 경기로 승격시키자는 현대측의 제안으로 전격 성사됐다.이에따라두 구단은 이날 경기에 이수현씨 유족을 초청하고 관중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성금을 모금해 유족에게 전달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 경기에 앞서 이수현씨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갖는 등 추모 경기의 뜻을 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추후 논의키로했다. 특히 두 팀은 이번 추모경기에 스타급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팬들의관심을 높이기로 했다. 따라서 현대의 간판투수 김수경·임선동과 요미우리의 슈퍼스타 마쓰이 히데키(28)의 정면대결 등 풍성한 볼거리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현재 요미우리 1군캠프에서 훈련중인 전 현대소속 정민태와 조성민도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김민수기자 kimms@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4)항일운동 총본거지 上海·嘉興

    필자가 상해를 찾기는 이번이 네번째이다.홍교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향해 달리는 동안 눈길을 끈 것은 30∼40층짜리 신축빌딩들이었다.거의 수직으로 치솟고 있는 중국경제를 상징하는듯 했다.이도시에 숱하게 많은 우리의 항일유적들이 또 몇개 사라졌겠구나 생각하며 곧장 옛 프랑스 조계(租界)인 회해중로(淮海中路)를 향해 달렸다.우리의 항일운동 유적들이 그 거리와 근방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상해는 국제교통의 요충지이며 각 국의 조계가 설정돼 국제정세 파악이 쉬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항일투사들은 최우선의 활동근거지로 삼았다.취재팀은 마당로(馬當路) 보경리(寶慶里)의 임정청사부터 찾아갔다.전체면적 16평.공간은 비좁지만 당시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다.주중(駐中) 한국대사관 인터넷 홈페이지 ‘중국내 독립운동사적 안내’를 보면 98년 한해동안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무려 8만여명이라고 한다.대부분 이곳이 첫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고독립운동의 성지(聖地)처럼 여기는 듯하다.그러나 이곳은 임정이 여덟번째로 자리잡아,1926년부터 1932년까지 머문 장소이다. 임정청사에서 5분쯤 걸어 옛 흥륭다원(興隆茶園)을 찾아갔다.윤봉길 의사가 김구 주석과 의거를 밀의한 장소였다.건물은 그대로인 듯하고 ‘상청(常靑)식품’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헐리지 않고 70년이지나도록 남아 있는 게 고마워 취재팀은 그 집에서 생수를 사 마셨다. 차를 타고 윤봉길 의사의 열혈이 서린 홍구공원(현재의 노신공원)을 항해 달렸다.임정은 1919년 4월 13일 조직된 이후 모든 항일세력을결집하지 못했다.김구 주석은 임정의 침체를 극복하고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암살과 폭파 전문의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이 조직의 첫 성공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사쿠라다몬(瓔田門) 의거였다.일왕의 마차에 폭탄이 미치지 못해 근위병들만 죽고 말았지만 적에게준 충격은 컸다. 다음 의거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였다.고향의 아내에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한 윤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일제가 전승기념행사겸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의거를 결심하였다.1932년 4월 29일 11시40분,행사장의 전원 묵도시간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해 점령 일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등 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했다. 1개 군단이 한달동안 저항하고도 상해를 일본군에 빼앗겨 치욕감에빠져있던 중국인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고 극찬했다.중국인들은 때로 일제의 눈치를 보며 비협조적이었고 만보산사건 이후 한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 때부터 한인 애국지사들을 동지의 정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정은 침체국면을벗어나 강력한 투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통체증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 뒤에 노신공원에 도착했다.윤 의사의 의거현장에는 중국 근대사상가인 노신의 동상이 드넓은 잔디광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기록을 보면 동상자리가 단상,그리고 그 앞잔디밭이 시작되는 곳이 윤 의사가 물병폭탄을 던진 곳이다.의거현장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윤 의사의 충혼을 기려 1994년에 세운 ‘매정(梅亭)’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묵념하고 있는 한국관광객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경남 창원에서 온 교사들이었다.진영고교 성정수 교사(40)는 “자랑스런 항일전쟁의 역사가 잊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며화단에 핀 상사화(想思花)를 바라보았다.윤의사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걸까.석양을 받아 상사화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윤의사의거 이후 악에 바친 일제는 광란하듯 임정인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은채 아슬아슬하게 피신했고,임정은 이후 여러 곳을 이동해야 했다. 취재팀은 상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김구 선생의 피신처였던 가흥으로 향했다.중국이 독일 폭스바겐사(社)와 합작생산한 산타나 승용차는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풍처럼 내달렸다.장강(長江)으로 통하는 운하의 수로가 띠를 두르듯 뻗어있고 이따금 물소들이보이는 비옥한 평야가 스쳐 지나갔다.가흥이 호수를 낀 조용한 농촌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6차선이 넘는 큰길이 뻗어가고 깨끗한 신축건물이 임립하고 있었다. 김 주석은 전 강소성장(江蘇省長) 저보성의 목숨을 건 비호 아래 그의 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이 반 양식으로 지은 호반별장에 은신했다. 낮에는 뒷문으로 나가 여자 뱃사공 주애보(周愛寶)가 젓는 거룻배를타고 남호(南湖)로 나가 거미줄같은 운하망을 타고 오르내리며 피해다녔고 밤이면 별장에 빨래가 널린 안전신호를 보고 들어가 잠을 잤다.배를 타고 남경까지 간 적도 있었다.김 주석이 은신했던 매만가(梅灣街) 76호 별장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남호를 동남쪽에 등지고 앉았는데 호수 쪽으로 큰 들창이 나있고 뒷문이 만들어져 있다. 차를 돌려 남호 선착장 유원지로 가보았다.1935년 10월,15명의 임정 지도자들이 유람선을 타고 비밀의정원 회의를 열었던 남호는 그리깨끗하지는 않았지만 풍광은 아름다웠다.바람에 밀려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캔맥주를 사 마시는데 ‘중국혁명의 요람’이라 쓴 안내판이 보였다.1921년 모택동이상해에서 공산당 창당대회를 열려다가 정보가 새 나가자 이곳 남호에서 유람선을 빌어 대회를 마쳤다는 기록이다. 상해로 돌아온 취재팀은 황포탄(黃浦灘) 의거현장을 찾아갔다.황포탄은 수천리를 흘러온 양자강이 황해로 빠져나가는 하류로 바다나 다름이 없다.1922년 3월,의열단원들은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였다.필리핀에서 오는 기선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렸다.명사수인 오성륜(吳成崙)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그 자가 갑자기몸을 숙이는 바람에 뒤따라 내리던 영국인 여자가 맞았다.이어 김익상(金益相)이 또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이종암(李鐘岩)도 폭탄을던졌지만 다나카는 마차를 타고 피신했다.이종암은 현장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당했다.김익상은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의 주인공.의거에 성공하고 수십 개의 포위망을 뚫어 중국으로 탈출해온지 반 년만에 다시 나섰으나 이번엔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20년을 복역했다. 의열단원들이 수천 명의 일본군과 인파들 속을 달리며 용맹을 떨친의거현장은 지금의외탄(外灘)공원의 북단이다.상해에서 황포탄 풍광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중국이 자랑하는 포동(浦洞)개발지구가 건너다보인다.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육삼정(六三亭) 의거현장으로 갔다.무정부주의 계열의 비밀결사 남화(南華) 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규창 등은 여기서 아리요시(有吉)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하려다가 사전 누설되어 모두 옥에 갇혔다.당시 유명했던 육삼정은 헐리고 그 자리에 방향(芳香)·영안(永安)·부옹(富翁)등주점들이 들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상해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첫날 이모저모

    [유엔본부 외신종합]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첫날인 6일(현지시간) 각국 정상 58명이 기조연설을 통해 유엔의 위상강화와 중동평화 협상 등 국제현안을 논의했다.정상들은 대부분 제한시간 5분을 넘겨 오전과 오후 회의가 1시간씩 늦게 끝나는 등 회의 일정은 차질을 빚었다.뉴욕시경은 유엔본부 앞 도로를 차단하는 등 삼엄함 경비를 펼쳤다. ◆오전회의에서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원수와 독일 등 28개국 정상이 연설했다.오후에는 뉴질랜드를포함한 30개국 정상 또는 정부대표가 기조연설을 마쳤다.정상들은 연설을 마친 뒤 각국 정상들과의 개별 회담을 위해 곧바로 회의장을 떠나 회의 끝무렵에는 빈자리가 훨씬 많았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개막연설에 앞서 서(西)티모르에서 발생한 유엔요원 3명의 피살 사건을 설명하며 1분간 묵념을 제안했다. 아난 총장은 연설에서 “현재 당면한 문제들은 전 지구적인 문제”라며 각 정상들이 유엔의 역할 강화를 권고한 보고서를 신중히 검토해줄 것을 촉구했다. ◆주최국의 수반으로 첫번째 연설을 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대결보다 타협을 선택할 것을 촉구하면서 국제사회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의 성공을 위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클린턴 대통령은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및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자치기구 행정수반과 개별접촉을 가졌으나 중동평화 협상의 돌파구는 마련하지 못했다고 백악관이 발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주 공간이 ‘전쟁지대’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 미사일방위(NMD) 체제에 반대입장을 거듭 천명했다.그는 “군축의 시대인 21세기에 우주 공간을 군사화하려는 계획이 존재하고 있다”고 미국을 겨냥한 뒤 “러시아는 내년 봄 우주 공간에서의 군축과 비핵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푸틴 대통령은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72년 맺어진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군축의 기초로 한다는 ‘전략적 안정 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8시간을 쉬지 않고 연설하기로유명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연설시간 5분을 의식,등단하자 마자 흰 손수건으로 제한시간을 알리는 경고등을 덮어 회의장으로부터 폭소를 자아냈다.그는이같은 제스쳐와 달리 5분내에 연설을 끝냈다.카스트로는 “세계 인구 60억 가운데 80%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는 미국을 비롯한 30여개국이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유엔본부 앞에는 미국을 방문중인 한국 전공의 4명이 피켓을 들고침묵시위를 벌였다.의약분업 사태로 구성된 ‘전공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이라고 밝힌 추교용(32)씨 등 4명은 뉴욕에서 활동중인 의사2명과 함께 오전 10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국내 의료법 개혁을 요구했다.중국의 파룬궁 회원 2,000여명도 중국 대표부 앞에서 유엔본부까지 가두행진을 벌이며 중국 당국의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이번 정상회의에는 모두 147개국의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참석,사상 최대의 정상회동으로 기록됐다.95년 유엔창설 50주년 기념총회 당시의 100명 안팎보다 훨씬 많아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으로보인다.국가 원수급은 189개 회원국 중 98개국과 비회원국인 스위스등 99명이다.정부 수반 참여국은 영국 캐나다 등 48개국이다.교황청의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총리급)과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까지 합치면 149명으로 늘어난다.회원국 중 북한 피지유고슬라비아 등 3개국은 1명의 대표도 파견하지 않았다.
  • 경실련, 북한군묘지 참배

    경실련 통일협회(이사장 韓完相 전 통일부총리) 간부와 회원 등 20명은 16일 민족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는 차원에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 북한군 묘지(일명 적군묘지)를 참배했다. 이들은 오후 2시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의 북한군 전사자 묘지에서묵념을 올렸다. 군 당국은 6·25전쟁 당시 전사자와 68년 1·21사태(청와대 습격사건) 때침투한 무장공비,98년 12월 반잠수함을 타고 침투하다 사망한 공작원 등 북한이 인수를 거절한 110명의 시체를 모아 관리하고 있으며,일반인의 방문은이번이 처음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 金대통령 조문외교 이모저모

    [도쿄 양승현특파원]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일본 총리의 장례식 참석차 8일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활발한 한·미·일 ‘3각 조문외교’를 펼쳤다. 특히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한 다른 6개국 정상과의 회담 제의를일체 받아들이지 않고 김 대통령과만 만나 전통적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한·미 정상회담/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후 5시15분부터 30분 동안 오쿠라호텔 프레지던트슈트에서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동북아지역의 정세 변화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이번 회담이 이뤄진 데는 미·일이 일관되게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는 남북한이라는 입장을 견지한 덕분”이라고 감사의 뜻을 표시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김 대통령이야말로 북한이 발전하는데 설득하고 도와줄 가장 적절한 분”이라고 화답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9월 유엔총회에서 얼굴이라도 봤으면 한다”는 김 대통령의 요청에 “아·태경제협력체(APEC)에서 보게 될 것”이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11월 브루나이 APEC에 나오게 하면 큰 기사거리가 될 것”이라고말해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결과를 듣기를 바란다”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조그마한 역할이라고 하더라도 영광으로 생각하겠다”고 전폭적 지원와 지지를 약속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고마움을 표시한 뒤 “재임 중 미국 역사에 남을 많은 업적을 남긴 만큼 퇴임 후에도 많은 업적과 유익한 일을 하기를 평생 친구로서기원한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회담/ 김 대통령은 예정보다 빠른 오전 11시20분부터 27분 동안영빈관에서 모리 일본 총리와 회담했다.모리 총리는 김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에 대해 “일본 정부와 국민,유가족을 대신해 감사한다”고 말했다.김 대통령은 “오부치 전 총리에 대한 존경심과 서거에 대한 애석함이 컸기 때문에 참석키로 했다”고 화답했다. 두나라 정상은 서울대와 도쿄대간 학문교류를 화제로 올렸으며,특히 김 대통령은 “신문 보도를 보고 그 내용을 알았다”면서 “진작했어야 했는데 늦은 감이 있다.시작했으니 빨리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부치 전 총리 장례식/ 도쿄 부도칸에서 오후 2시부터 4시30분까지 열린오부치 전 총리 장례식에는 각국 조문사절과 유엔 등 3개 국제기관 대표가참석했는데,김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맨 앞줄 중앙 자리에 앉고,두번째로 헌화·묵념하는 각별한 예우를 받았다. 일본 정부는 공항 영접때도 다른 국가 조문사절의 경우 주재국 대사를 내보냈으나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만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을 보내영접하는 등 극진히 예우했다.
  • 日 오부치 前총리 장례식 175개국 조문 행렬

    [도쿄 외신종합] 8일 거행된 오부치 게이로 전총리의 장례식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대통령등 7개국 정상을 포함한 175개국 조문사절과 일본 황실관계자,6,000여명의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고인을 애도했다. ■화장된 오부치 전총리의 유골은 상주인 치즈코(千鶴子)여사등 유족과 함께 도쿄도내의 자택을 출발한 뒤 국회,총리관저,자민당 본부를 거쳐 식장에 도착했다.장례식은 생전에 고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나카무라 히로코의 연주와 묵념에 이어 고인의 국회의원 첫당선부터 총리 재임시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상영되는 순서로 진행됐으며 모리총리와 중참 양원의원장등의 추도사,헌화등의 순서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도쿄시내 장례식장에는 장례시작 수시간 전부터 많은 조문객이 몰려들었으며 초청장을 받지 못한 일부 시민들까지 방명록에 서명을 하겠다고 몰려들어 한때 큰 혼잡을 빚기도.모리 총리는 장례식이 끝난 뒤 각국 참석자들을 영빈관으로 초청,리셉션을 베풀며 사의를 표했다. ■이날 조문대표로 온 각국 원수들간에는 즉석 회담이 다각도로 이루어져 장례식장과 리셉션장은 정상회담장을 방불.모리총리는 오전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압두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대통령,존 하워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등과 연쇄회담을 갖는등 종일 각국 정상들과회담을 가졌다. ■모리 총리와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장례식 시작 전 별도 정상회담을 갖고남북한 정상회담등 공동관심사를 논의했다.와히드 인도네시아대통령은 모리총리에게 최근 수마트라에서 일어난 지진복구에 일본이 지원해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모리 총리는 이번 주중 모두 15건의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고 고노 요헤이외상은 16건의 회담을 갖도록 돼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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