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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경복궁 감싼 삼청동·백운동 물길, 한양 방어의 핵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경복궁 감싼 삼청동·백운동 물길, 한양 방어의 핵심

    해자(垓子)는 자연 하천을 장애물로 활용하거나 땅을 파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시설이다.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인 경주 월성을 보면 남쪽은 남천을 자연 해자로 활용하고, 이 밖의 방향에는 해자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백제의 도읍인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역시 해자를 방어시설로 썼다. 평양의 고구려 안학궁도 해자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들판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외적과 대치하는 이른바 청야입보(淸野立保) 전략을 쓰면서 산성을 중요시했다. 산성의 해자는 지형 특성상 물을 채우지 않고 내부에 장애물을 시설하기도 했는데 옛 역사서들은 지호(地壕)나 황지(隍池)라고도 적었다. ●왜구 침입 빈번했던 해안 읍성, 해자는 필수 조선은 읍성 중심의 방어전략을 수립했다. 산성 대신 견고하게 읍성을 쌓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였다. 세종은 읍성에 옹성과 치성, 해자를 시설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따르면 당시 전국 330곳의 행정구역 가운데 160곳에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개의 읍성을 가진 지역도 있어서 전체 읍성은 190곳에 이르렀고, 179곳은 석축성이었다. 모든 읍성이 해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평지 읍성은 해자를 팠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삼남(三南)의 해안 읍성은 대부분 해자를 두었다. 충남 서해안의 당진 덕산 해미 결성 보령 한산 서천, 전라도 서남해안의 무장 고창 남원 낙안 광양, 경상도 남해안의 고현 김해 웅천 하동 언양 동래 등의 읍성에는 해자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해미와 낙안 읍성은 이미 상당 부분 해자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강진의 전라병영성과 무장·남원 읍성은 현재 해자를 발굴하거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역대 왕조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의 해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뚜렷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니 조선이 왕조를 개창하고 도읍과 왕궁의 입지를 새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외침에 대비한 방어시설로 해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은 도읍과 왕궁의 입지를 정하면서 세 차례 대대적인 논쟁을 벌인다. 개성의 왕도를 유지할 것인가, 옮길 것인가 하는 논쟁이 첫 번째다. 처음엔 지금의 충남 계룡시 3군사령부 터를 점찍고 궁궐공사를 벌이다 곧 한강과 북악산 일대로 위치를 바꾼다. 계룡산은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주변에 강이 없어 세곡 수송에 어려움이 있고 용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북악산 아래 한양(漢陽)과 신촌과 서강 일대 모악(母岳)을 놓고 벌인 논쟁이 두 번째다. 이후 태조의 왕사(王師) 격인 무학대사 자초와 태조의 총신(寵臣)인 정도전 사이에 한양에 들어설 왕궁의 위치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 세 번째다. 무학대사는 정궁(正宮)을 인왕산 아래 동향으로 앉혀야 왕조가 무궁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북악산 아래 남향으로 궁궐을 짓는 것이 중국의 역대 왕조가 그렇듯 정도라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런데 20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은 피난을 떠나고 궁궐은 불타버리는 치욕을 겪자 무학대사의 안목이 옳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야사(野史)로 치부되는 오산 차천로(1556∼1610)의 수필집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차천로는 글 말미에 ‘정도전이 무학의 말이 옮음을 알지 못함은 아니었지만 다른 마음이 있어 듣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다. 차천로는 정도전을 역심(逆心)이 가득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시각이나 개인적 원한을 배제하면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북악산 아래가 옳았던 것은 궁궐 동쪽의 삼청동천과 서쪽의 백운동천이라는 자연 해자의 존재 때문이다. 오늘날 중학천으로 불리는 삼청동천은 삼청계곡에서 발원해 경복궁 담장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뒷길을 따라 흐르다 청계천에 합류한다. 백운동천은 자하문터널 쪽에서 시작되어 자하문로와 세종문화회관 뒷길을 지나 역시 청계천과 합쳐진다. ●정도전, 북악산과 자연 해자 감싼 요새에 궁 설계 정도전을 비롯해 한양도성을 설계한 사람들은 궁궐의 효율적인 방어가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 결과 북쪽은 북악산이 가로막고, 동쪽과 서쪽은 깊이가 상당한 하천이 남쪽에서 합류해 자연 해자 역할을 하는 자리에 경복궁을 앉혔다. 궁궐 남쪽으로는 육조거리를 조성했다. 해자의 보호를 받는 곳에 국가의 중추기관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런 상징성이 있는 ‘경복궁 자연 해자’를 일제강점기도 아닌 20세기 후반 우리 손으로 복개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삼청동길과 자하문로 아래로는 지금도 삼청동천과 백운동천이 흐른다. 복개가 이루어지기 전 삼청동천 사진을 보면 바닥은 깊고, 호안은 다듬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 궁궐을 방어하는 시설이라는 인식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강과 북악산 일대로 옮기겠다는 한 구상 자체가 효율적인 방어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도성은 북서쪽으로는 임진강, 남동쪽으로는 한강이 거대한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한다. 한양파(派)가 모악파를 누른 것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외적 방어에 이로운 한양의 지형적 특성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북악산파가 인왕산파를 누른 것은 자연 해자로서 삼청동천과 백운동천의 역할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새로운 도읍 및 궁궐의 입지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풍수지리적 견해차가 이유는 아니었다. 세 차례 논쟁에서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쪽이 언제나 승리했다는 것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사라지니 살아나는 곳

    사라지니 살아나는 곳

    옛 절터는 따사롭다. 봄으로 가는 길목, 잔설이 있어도 생채기 난 돌탑 위로 어느새 훈풍이 스친다. 그래서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나는 독특한 경험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3월에 가볼 만한 옛 절터를 추천했다. ●고려 왕의 스승이 머문 자리-강원 원주 흥법·거돈·법천사지 원주엔 폐사지가 많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신라 시대 창건해 임진왜란 때 사라진 폐사지가 여럿이다. 특히 이 세 절집은 고려 시대 왕의 스승인 국사가 머물며 이름을 떨친 사찰이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탑과 탑비 등이 남아 옛 사찰의 규모와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거돈사터는 이른바 ‘폐허의 미’가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곳이다. 신라 후기인 9세기께 조성된 뒤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명맥이 이어졌던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너른 터와 석탑만 남아 당시 모습을 일러 주고 있다. 흥법사지는 다소 휑한 편. 법천사지는 여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폐사지를 돌아본 뒤에는 흥원창에서 갈무리한다. 강과 산을 물들이는 일몰이 아름답다. 원주시 관광안내소 (033)733-1330. ●조선 최대 왕실 사찰로의 시간 여행-경기 양주시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중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 절터다. 관련 기록이나 여느 사찰 건축과 다른 궁궐 건축양식, 출토 유물 등으로 미뤄볼 때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회암사는 오랫동안 왕실의 후원 아래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를 회암사 주지로 보낸 뒤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회암사에 머물며 수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암사지 뒤 산길을 조금 오르면 중요한 문화재 여러 점을 만난다. 회암사와 인연이 깊은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양주관아지와 조명박물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흥아트파크, 청암민속박물관 등을 연계하면 좋다. 양주시 문화관광과 (031)8082-5664. ●고려 마의태자 전설 품은 절집-충북 충주 수안보면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처럼 이름 뒤에 ‘원’자가 붙은 곳은 대개 여행자가 숙식을 해결하던 곳, 즉 역원의 역할을 담당하던 절집이다. 조선시대엔 국가가 역원을 운영했지만 고려 때는 절에서 담당했다. 이런 절집엔 보통 ‘기골이 장대한’ 불상이 서 있기 마련인데, 미륵대원지에도 10.6m에 달하는 미륵불(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이 세워져 있다. 한데 대개의 불상이 남쪽을 바라보는 것에 견줘 충주 미륵불은 북쪽을 보고 있다. 미륵불을 세운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학계에선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려는 고려의 북진사상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하늘재 아래 자리잡았다. 걷다 보면 백두대간 산봉우리가 물결친다. 충주시 관광과. (043)850-6723. ●황매산 기암절벽 아래 신비의 절터-경남 합천 영암사지 합천 황매산 자락의 모산재 기암절벽 아래 영암사지가 있다. 여느 절터처럼 석탑과 석등 같은 문화유산이 올곧이 남았지만, 절집의 내력은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쌍사자 석등이 꼽힌다. 영암사지에서 황매산이 지척이다. 황매산 정상 언저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합천 읍내로 가는 길에는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자리잡았다. 근대의 역사를 담은 세트장으로, 실제라 착각할 만큼 사실적인 모양새가 일품이다. 합천은 가야국 연맹체인 다라국의 고장이다. 합천박물관에는 다라국 지배층의 고분군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뒤쪽에 사적으로 지정된 옥전 고분군이 있다. 가야산이 품은 해인사와 대장경테마파크, 두 곳을 잇는 해인사 소리길도 합천의 명소다. 합천군 관광진흥과 (055)930-4666. ●춘향이도 시기할 사랑 이야기 담은 터-전북 남원 만복사지 남원은 춘향과 판소리로 유명하다. ‘사랑의 도시’라 불릴 만큼 춘향전은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단단히 자리잡았다. 한데 춘향전에 버금가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바로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다.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만난 여인의 영혼과 사랑을 나누고 부부의 연을 맺은 이야기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만복사는 승려 수백 명이 머물렀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절집도 소실됐다. 전각은 모두 불타고 지금은 오층석탑(보물 30호), 석조대좌(보물 31호), 당간지주(보물 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43호) 등만 남았다. 만복사지에서 시작한 여행은 춘향테마파크, 국악의 성지, 남원추어탕거리를 거치며 차츰 흥겹고 맛깔나게 무르익는다. 남원시 문화관광과 (063)620-6161. ●허물어진 절터에 남은 천년의 온기-충남 보령 성주사지 보령 성주사지는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성주산 자락에 둥지를 튼 폐사지에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흔적이 골고루 묻어난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 등 귀한 유물이 허물어진 절터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화상)가 크게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선종의 큰절인 ‘구산선문’ 중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다.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는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으며,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등이 절터에 있다. 성주산의 남쪽 주봉인 옥마봉 전망대에 오르면 보령 시내와 대천해수욕장 등 서해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성주산자연휴양림, 개화예술공원, 보령석탄박물관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보령시 관광과 (041)930-4542.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국내여행 | 금빛 따라 서산 아리랑 타고 정선

    국내여행 | 금빛 따라 서산 아리랑 타고 정선

    보이는 것은 일렁이는 금빛물결이었고 들리는 것은 구슬픈 아리랑 노랫가락이었다. 기차를 타고 서산과 정선을 오고 가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넉넉했다. ●서산에 다시 가야 할 이유 서해금빛열차 G-트레인 금빛물결이 일렁이는 서해안을 따라 기차를 타고 훑어 내려갔다. 단언컨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가장 뜨끈뜨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차가 G-트레인이다. 따뜻한 온돌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사색에 잠기자니 혼자 온 것이 외롭다. 1량 전체가 온돌마루실로 구성된 G-트레인에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삼삼오오 모인 이들로 그득했다. 혼자 온 것을 다시금 후회하며 조용히 족욕기에 발을 담근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노곤해진다. 차창을 마주보고 앉아 있으니 휙휙 재빨리 지나가는 모든 것들처럼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G-트레인은 아산, 예산, 홍성, 보령, 서천, 군산, 익산 등 서해안의 보석 같은 도시 7곳에 정차한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충북 서산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아쉽게도 서산에는 기차역이 없다. 홍성역에서 내려 서산까지 30여 분을 차로 달려야만 하지만 여기는 충청도가 아니던가. 안으로 길게 포구가 나 있는 내포지방에 속하는 서산은 높은 산이 없고 넓은 들이 있어서 큰 자연재해가 거의 없단다. 속설에는 1년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는데 거기에 바다까지 끼고 있으니 여유롭고 풍요롭다. 그러니 가는 길마저 푸근하고 느긋하기만 하다. 서산에 도착해 가장 먼저 간월암에 간 것을 후회했다. 볼 간看, 달 월月. 간월담은 의미 그대로 석양이 비추고 달이 떠오를 때 가장 아름다운 바위섬이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을 보고 득도했다는 유래가 있을 정도니 대낮에 방문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좋은 것도 있었다. 간월도 옆에 떨어져 자리한 작은 바위섬인 간월암. 썰물 시간에 맞춰 간 덕에 간월암으로 향하는 짧은 길이 열리고 간월사에 닿을 수 있었다. ‘고즈넉하다’라는 말을 진정으로 쓸 수 있는 작은 사찰이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인해 암자는 완전 폐쇄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절은 1941년 만공스님이 중창하신 것이다. 본디 바닷가 근처에 있는 사찰들은 용왕전만 두고 산신전은 없는 것이 특징. 하지만 이곳은 금북정맥의 끝자락에서 그 기운을 받았다고 하여 산신전도 함께 두고 있다. 절을 중심으로 360도 바다를 조망할 수 있으니 가장 너른 바다를 품고 있는 절이다. 절 마당 가운데는 250년의 세월을 보낸 사철나무가 오롯이 서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탱자나무가 오가는 이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서산의 여유로운 시간에 갇혀 잠시 넋을 놓았더니 밀물이 드리워지고 말았다. 간월암만큼 아쉬운 곳은 또 있었다. 마음을 열고 가는 절 ‘개심사’다. 마음은 열었는데 꽃길은 열리지 않았다. 개심사에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흐드러지게 핀 왕벚꽃과 산매화가 산길을 수놓는단다. 더군다나 개심사는 전국에서 가장 벚꽃이 늦게 피는 곳(4월 말~5월 초)으로 벚꽃놀이를 놓친 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이곳을 너무 일찍 찾은 아쉬움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청벚꽃 때문이다. 어떤 이는 새하얀 꽃잎에 은은한 연둣빛이 물든 청벚꽃이 탐스럽게 피어나면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점점 다가오는 봄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설레었다. 조만간 서산을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must go 교황님도 다녀가신 해미읍성 서산의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은 세 개의 읍성 중 하나로 성의 높이는 5m, 둘레 1,800m에 넓이만 약 2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 박해가 한반도를 휩쓸 때 약 1,000여 명의 신도들을 모아 해미읍성 안의 회화나무에 줄줄이 메어 놓고 고초를 가해 날마다 곡소리로 가득 찼다고.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먼저 옥사한 신도 두 명을 시복했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041-660-2540 바닷내음 듬뿍 서산동부시장 비린내가 반가운 곳, 서산 최대의 수산시장 서산동부시장이다. 날마다 싱싱한 각종 해산물로 가득한데 젓갈이나 밑반찬 등을 판매하는 곳도 여럿이다. 아직도 옛 건물의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도 눈에 띈다. 크고 높은 천장 대신 판자로 지붕을 가리고 있는데 1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고장이 난 물건을 뚝딱뚝딱 고쳐 주는 만물상 아저씨도, 둔한 날을 갈아 주는 칼잡이 할아버지도 그리고 마른 감태에 참기름을 발라 구워 주는 할머니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인심도 후하고 가격도 착한 시장의 간식거리를 맛보는 재미도 반드시 누릴 것. 충청남도 서산시 시장3길 5-6 041-665-5478 ●이야기는 깊은 산골에 울려 퍼져 정선아리랑열차 A-트레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애절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600여 년 전 고려가 망할 당시 충절을 다짐했던 충신들의 비통한 심정과 여인네의 한이 묻어 있는 ‘정선 아리랑’이다. 기차에서 아리랑이라니 귀를 의심하면서도 정선으로 가는 길에 이만하면 센스 넘치는 배경음악이라며 내심 흡족했다. 그러나 사실 정선 아리랑은 낯설었다. 귀에 익은 아리랑 후렴구 몇 소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생소했는데 정선 아리랑의 노랫말이 자그마치 8,000여 수나 된다는 사실에 위로가 됐다. 지역적인 특수성도 한몫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정선. 우뚝 솟은 태백산맥이 너무 높아 외부와의 단절이 심했기 때문에 구전 민요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절만이 어렴풋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전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역, 해발 약 660m에 위치한 자미원역이다. 하나, 두울, 세엣… 이 역에서부터 정확히 일곱 개의 터널을 지나니 왼쪽 차창 너머로 대머리 민둥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이면 황금빛 억새의 향연이 펼쳐지는 민둥산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입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굽이굽이 어깨를 포개고 있는 산골짜기가 아찔하게 펼쳐져 있다. 그만큼 높은 지대를 달리고 있다는 의미다. 그 경관을 좀 더 느긋하게 담으라는 듯 열차는 서행하기 시작한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 볼까 창문을 열었다. 아직은 다소 차가운 기운에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공기는 확실히 달고 맑다. 청량한 강원의 바람을 가득 실은 열차는 어느새 정선에 닿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정선에서 중요한 숫자는 2와 7이다. 정선은 아직도 5일장이 열리는 곳으로 정선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 ‘정선장터’는 매달 2와 7이 들어간 날, 장이 선다. 평소에는 한산하던 장터가 5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각종 산나물과 생필품을 들고 나온 노점상들이 복닥복닥 800m 가량 길게 늘어서 있다. 서리를 맞은 콩 ‘서리태’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는 ‘황기’, 향긋한 도라지 등 고랭지 정선에서 자란 건강한 농작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부터 논이 적은 정선에서 가난한 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 준 것은 곡식보다는 나물이었다. 그중에서도 곤드레 나물이 으뜸이었다. 한 번 씨를 뿌리면 한 번 뜯어 먹을 수 있는 곤드레 나물이 정선에서만큼은 세 번의 풍요를 베풀었단다. 정선이 품고 있는 건강한 땅의 기운을 받고 자란 곤드레 나물은 1m까지 자라는 만큼 영양분을 골고루 담고 있다. 특히 면역력을 증진시키고 항암 효과에 탁월하다는 사포닌 성분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나물이지만 약초의 역할을 한다고. 곤드레 나물 대신 쌉싸름한 흙내음을 품은 더덕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장 한 켠 좁은 공간에서 커다란 고무대야에 한가득 쌓은 더덕을 다듬는 아지매로부터 더덕 몇 뿌리 더 얻는 것으로 가격 흥정을 대신했다. must go 아리랑의 현대판 아리랑극 <메나리> 연극 <메나리>는 정선 아리랑을 토대로 전통과 역사 그리고 동화 같은 장면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꼭꼭 담았다. 정선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아리랑의 메아리를 마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지만 메나리 아리랑극에서 듣는 노래의 색은 다채롭다. 장면장면에 따라 때로는 구슬프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표현해 내는 전통극의 현대판 뮤지컬이다. 참고로 메나리는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일부 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로 대표적인 메나리토리로는 ‘아라리’, ‘산유화가’, ‘어산요’ 등이 있다.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67 033-560-2567 www.jeongseon.go.kr 정선아리랑 상품권 5,000원 신비한 다섯 가지 이야기 화암동굴 화암동굴은 크게 다섯 개의 테마로 나뉘어 있다.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약 22년간 강원도 지역의 생계를 책임졌던 천포광산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역사의 장을 지나면 365개의 계단을 따라 수직으로 90m를 내려간다. 다리가 꽤나 후들거리지만 동양 최대의 유석폭포와 석순, 석주가 가득한 천연 종유굴을 마주하면 켜켜이 쌓인 세월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금광 캐는 도깨비들이 안내하는 동화의 나라와 금의 역사와 종류, 제련 과정 등 금에 대한 모든 것을 모은 전시도 만나 볼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화암동굴길 12-8 033-562-7062 www.jsimc.or.kr 성인 5,000원 청소년 3,500원, 어린이 2,000원 ●철길 따라 달라진 여행지도 2013년 중부내륙관광열차 O·V-트레인을 시작으로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 평화열차 DMZ 트레인 그리고 지난 1, 2월에는 정선아리랑열차 A-트레인과 서해금빛열차 G-트레인이 차례대로 개통했다. 마침내 코레일이 야심차게 준비한 ‘대한민국 5대 철도관광벨트’가 완성된 것. 이제 달라진 관광지도를 펼쳐 볼 시간이다. 평화열차 DMZ-트레인 서울에서 원산元山까지 223.7km를 잇던 경원선은 분단과 함께 허리가 끊겼다. 이후 용산에서 신탄리역까지만 운행하다가 2012년 11월에 백마고지역이 신설됐고 지난 2014년 백마고지역에서 평강까지 31km가량 운행 구간이 조금 더 늘어났다. 분단 역사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 열차 DMZ-트레인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화합과 평화를 싣고 달린다. 총 3량의 열차에는 철도와 전쟁·생태 사진을 전시한 갤러리도 있고 카페에서는 군용건빵과 주먹밥 등을 판매한다. 1일 1회 왕복 운행 중이다. DMZ-트레인 Pass 서울역-도라산역(경의선) 1만6,000원, 서울역-백마고지역(경원선) 2만3,000원(성인 기준) 서해금빛열차 G-트레인 지난 2월5일, 서해금빛열차 G-트레인이 운행을 시작했다. 용산을 출발한 열차는 예산·홍성·보령·서천·군산·익산 등 서해의 주요 7개 도시를 거치며 1일 1회 왕복 운행한다. 열차 내에는 3~6명 수용 가능한 온돌마루실 9개가 마련되어 있으며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신인 개그맨들이 출동해 신나는 공연도 펼친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따뜻한 족욕을 즐길 수 있는 족욕 카페도 매력적. 취향에 따라 습식·건식 족욕을 선택할 수 있다. 용산 출발 예산 1만5,900원, 홍성 1만7,900원, 군산 2만5,300원, 익산 2만7,400원(성인 기준)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 S-트레인의 ‘S’는 ‘South’의 약자로 남도해양관광열차임을 짐작케 한다. 그밖에도 바다Sea, 느림Slow 그리고 구불구불한 경전선과 남해안을 상징한다. 코스는 크게 두 가지다. 1코스는 부산에서 진영·마산·하동·순천·벌교·보성 등을 잇고 2코스는 서울역을 출발해 서대전·전주·남원·곡성·순천·여수EXPO를 1일 1회 왕복 운행한다. 열차는 힐링실, 가족실, 카페실 등 각종 테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전통 차를 ‘좌식’으로 즐길 수 있는 다례실도 마련해 즐거움을 더했다. 서울 출발 전주 2만5,200원, 여수EXPO 2만9,300원, 부산 출발 순천 1만9,500원, 보성 2만3,600원 (성인 기준) 정선아리랑열차 A-트레인 우리나라 열차 가운데 지역 명칭을 사용한 것은 정선아리랑열차가 최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민둥산·정선·아우라지역을 1일 1회 왕복 운행한다. 매주 화·수요일은 운휴지만 정선 5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특별운행하고 있으니 참고할 것. A-트레인은 넓은 전망창을 설치해 깨끗하고 맑은 강원의 청정자연을 감상할 수 있으며 창문을 여닫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레일바이크 코스와 정선 5일장 코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엮은 1박2일 코스 등 다양한 연계 여행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청량리 출발 민둥산 2만4,000원, 정선 2만6,100원, 아우라지 2만7,600원 A-트레인 Pass 4만8,000원(성인 기준) 중부내륙관광열차 O·V-트레인 코레일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철도관광벨트 중 가장 먼저 탄생한 열차다. O-트레인은 중부 내륙 3도인 강원·충북·경북 257.2km를 동그랗게 잇는 순환열차.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제천역에서 시계 방향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나뉘어 1일 4회 순환 운행 중이다. 총 4량으로 구성된 열차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담은 인테리어로 장식했다. V-트레인은 영동선 분천·비동·양원·승부·철암역 27.7km를 V자로 잇고 1일 3회 왕복 운행한다. O-트레인과 V-트레인이 개통되면서 작은 시골역에 불과했던 경북 봉화의 분천역 근처에는 식당가와 마을 장터가 생겨나고 산타마을까지 조성되는 등 조용했던 간이역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O-트레인 Pass 1일권 5만4,700원, 2일권 6만6,100원, 3일권 7만7,500원 V-트레인 분천-철암 8,400원, 영주-철암 1만1,700원(성인 기준) 글·사진 손고은 기자 취재협조 코레일 www.korail.com
  • [新국토기행] 충남 서천군

    [新국토기행]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은 바다와 산, 갯벌과 백사장 등 관광자원이 다채롭다. 철새들의 낙원 금강하굿둑,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지 신성리 갈대밭, 서해안에서 손꼽히는 노을을 볼 수 있는 비인면 선도리 등 자연관광지와 농산어촌이 어우러진 체험관광지가 많다. 근대 산업화의 상징 장항제련소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 비옥한 들과 바다가 뒷받침하는 생태관광지로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풍부한 물산 덕에 먹거리 여행도 즐겁다. 충절로에 있는 서천특화시장에는 인근 홍원·마량·장항항에서 갓 올라온 갖가지 해산물이 모인다. 철마다 꽃게와 새조개 등이 넘쳐난다. 축제도 하는 주꾸미와 광어도 흔하다. 장항읍 장서로 장항음식특화거리는 싱싱한 원료로 끓이는 해물탕이 주특기다. 금강하굿둑 옆 놀이공원 음식촌은 해물칼국수의 명소다. 칼국수집이 집성촌을 이룬다. 놀이기구, 자동차 전용극장, 잔디밭 광장도 있어 가족 나들이 겸 외식 장소로 제격이다. 맛이 좋은 ‘항만’ 박대, 겨울철의 별미 물메기도 서천이 내세우는 먹거리다. [볼거리] ●마량리 동백숲과 마량포구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은 서천에서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이다. 둥근 모양의 동백나무 80여 그루가 들어서 있다. 300년 전쯤 수군 첨사가 꿈을 꾼 대로 바다에 나갔더니 정말 꽃이 떠 있어 이를 건져 심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닷가 낮은 언덕에 있고, 정상 부분에 ‘동백정’이란 아담한 정자가 있다.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있고 전설과 풍어제를 간직한 가치 때문에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됐다. 이곳 동백나무는 춘백(春栢)으로 잎이 두껍고 진한 녹색의 광택을 띠는 데다 빽빽하게 돋아나 눈길이 간다. 인근 마량포구는 해돋이·해넘이 명소로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황금색으로 물들며 잠기는 낙조와 서서히 바다를 물들이며 떠오르는 은근한 일출은 자연이 매일 만들어 내는 예술품이다. 만과 곶이 발달한 마량포구는 경관도 좋지만 뛰어난 품질과 맛을 자랑하는 어민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경매하는 어판장도 있다. 주변에 전어축제로 유명한 홍원항과 춘장대해수욕장 등이 있어 서천 관광의 묘미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문헌서원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과 가정 이곡의 학문적 업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기산면 영모리에 세운 서원이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69년 문중과 지방 유림이 복원했다. 정부와 서천군이 2007년부터 5년여간 재정비에 들어가 2013년에 전통 한옥으로 새로 탄생했다. 경내에 효정사, 진수당, 목은 영당, 장판각, 목은 신도비 등이 있다. 입구에 ‘서원으로 들어서려면 말에서 내려라’라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가까운 기린산에 이색과 셋째 아들 양경공의 묘가 있다. 이색의 묘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가 정했다고 전한다. 기린이 풀을 뜯어 먹는 명당으로 알려져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서원에서 이색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지혜로운 삶과 진취적인 창의력을 전파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아늑한 기린산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서원을 거닐며 고결한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금강하굿둑 철새도래지 매년 겨울이면 40여종 50만 마리의 철새가 장관을 이룬다. 400여리를 달려온 금강의 끝 부분이 서해를 만나면서 풍부한 먹잇감을 풀어 놓기 때문이다. 큰고니, 가창오리, 청둥오리, 개리 등 월동하는 물새들의 낙원이다. 광활한 하굿둑부터 펼쳐진 갈대숲은 철새들이 머물면서 먹이를 찾을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철새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탐조의 최적지여서 호기심을 한껏 채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성리 갈대밭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뿐 아니라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추노’ 등을 촬영한 명품 터다. 폭 200m에 길이 1.5㎞의 광활한 갈대밭은 푸른 하늘, 햇빛이 흩날리는 금강 물결과 신비한 조화를 이룬다. 우리나라 4대 갈대밭 중 하나다.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최적의 자연학습장이고, 예비 부부에게는 최고의 웨딩사진 촬영지다. 인근에 한산모시 마을에다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생가와 기념관이 있어 오가는 길에 둘러볼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 국내 유일의 천연해송림으로 알려진 곳이다. 종천면에 있는 산 전체를 해송들이 뒤덮어 사계절 내내 푸름을 뽐낸다. 휴양림은 초입의 저수지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치를 자아낸다. ‘숲속의 집’에서는 갖가지 해송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절로 힐링이 될 듯하다. 이 밖에 야생화 관찰 등도 가능해 청소년 자연교육장으로도 좋다. 희리산 정상 문수봉(해발 329m)에서 바라보는 서해 풍경은 일품이다. 카라반 등 캠핑카로 휴양림을 찾으면 야영도 즐길 수 있어 가족단위 쉼터로 제격이다.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둘 다 장군국가산업단지 사업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서천을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국립생태원은 99만 8000㎡의 부지에 3400억원을 들여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어졌다. 동물 240종 8000마리와 식물 4865종 110만 그루를 기른다. 핵심 시설은 ‘작은 지구’로 불리는 에코리움이다. 열대·사막·지중해·온대·극지 등 5개 관으로 꾸며 지구의 기후대별 생태계를 재현하고 있다. 영상관의 최첨단 4D 영상은 에코리움 탐방의 즐거움을 더한다. 세계 각 기후대의 자생 식물이 가득한 재배온실단지, 한반도 숲, 고산생태원, 습지생태원, 금구리못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온실의 창틀 난방 시스템, 자연친화 하수처리 시스템, 천장 복사패널 등 첨단 환경시설도 살펴볼 수 있다. 다음달 정식 개관하는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은 1279억원을 들여 33만㎡ 부지에 지어졌다. 실내생태관과 해양생물연구동 등으로 꾸며진다. 5200여종의 우리나라 바다생물 표본이 전시된다. 해양생물의 다양성을 전문적으로 연구, 해양생물에 대한 국가주권 기반을 다지고 21세기 해양생물산업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곳이다. 생태원과 해양생물자원관은 각각 마서면과 장항읍에 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5㎞ 안팎에 불과하다. 한편 서천군은 코레일과 손잡고 지난달 5일부터 ‘서해금빛 관광열차’ 운행에 들어갔다. 서울 용산역에서 장항선을 이용해 충남 아산, 홍성 등을 거쳐 내려오는 열차로 이를 타고 와 서천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볼 수도 있다. 한산모시관, 금강하굿둑, 생태원과 해양생물자원관, 서천특화시장, 솔바람길, 문헌서원 등이 주요 투어코스다. [먹거리] ●한산모시식품 한산모시로 유명한 ‘입는 모시’에서 ‘먹는 모시’로 발상을 획기적으로 바꾼 상품이다. 줄기로만 모시옷을 짜고 버려지던 모시잎을 활용해 먹거리를 만든 것이다. 2009년 모시잎차를 시작으로 모시송편, 모시막걸리, 모시젓갈, 모시칼국수 등이 줄줄이 개발됐다. 매년 6~11월 모시잎을 따 삶고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식품을 제조할 때 넣는 방식이다. 모시잎에 칼슘, 마그네슘, 식이섬유 등이 풍부해 건강식으로 인기를 끈다. 당뇨와 골다공증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서천 지역 28개 업체가 이들 식품을 제조하고 있다. 주로 주문 판매를 하고, 일부 백화점 등에 납품돼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송편 등 한산모시송떡은 인기가 대단히 높다. 모시재배 농가 소득과 모시산업 활성화를 위해 군이 발벗고 지원하고 있다. ●아귀 요리 갓 잡아 주로 홍원항으로 들어오는 아귀를 원료로 써 싱싱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미나리를 얹어 끊이는 탕과 찜 요리가 주종을 이루지만 씨알이 굵은 아귀를 사용해 푸짐하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살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나 식감이 배가된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요리지만 봄에 아귀가 많이 잡혀 조금 있으면 제철 맞은 아귀 요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유명 음식점은 장항읍에 몰려 있다. 3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할매온정집을 비롯해 우리식당, 유정식당, 대영식당 등 아귀 요리 전문 음식점이 여럿 있다. ●서천김 생산량이 충남의 95%, 전국의 15%를 차지하는 김 주산지다. 금강의 민물이 서해 바닷물과 섞이면서 김 양식에 천혜의 조건을 제공했다. 민물 덕에 비타민 등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좋아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갯벌이 펼쳐진 것도 영양 함유량을 높이는 요인이다. 인근 보령 등에서 이곳 김으로 조미 김을 제조할 정도다. 서천에서는 200여 가구가 물에 그물을 띄워 기르는 부류식으로 김을 양식하고 70여개 업체에서 김밥용 등 주로 마른 김을 만들고 있다. 국내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 등에서 팔린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 10여개 나라에 김을 수출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27일부터 3일간 서천읍 봄의마을 광장에서 첫 서천김 축제가 열렸다. ●한산소곡주 1500년간 이어져 온 전통 술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왕족과 유민이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셨다고 한다. 달콤함과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일어나기 전까진 취한지 모른다고 해서 ‘앉은뱅이술’로 불린다. 조선시대 들어 더 유명해져 ‘동국세시기’ 등에 제조법이 실렸을 정도다. 일반 전통주가 물과 쌀을 1.6대1로 섞는 데 비해 이 술은 0.6대1로 물을 적게 쓴다. 원재료의 풍미와 영양을 살리기 위해서란다. 도수는 18도로 꽤 높다. 일반 발효주는 20∼30일 걸려 완성되지만 말린 민들레 등을 넣어 빚는 한산소곡주는 100일간 발효 과정을 거친다. 이 때문에 ‘백일주’로도 불리면서 고급술로 인정받고 있다. 한산면 일대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1997년 우희열(75·여)씨가 충남도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돼 시판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씨의 아들 나장연(48) ‘한산소곡주’ 대표가 계승자로 지정받아 술을 생산하고 있다. 서천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新국토기행’은 이번주부터 목요일로 옮겨 게재됩니다.
  • [씨줄날줄] 양(羊)/서동철 논설위원

    양은 평화와 순종의 아이콘이지만, 일단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격도 감추고 있다고 한다. 한자의 양(羊)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의 상형문자다. 이 글자가 맛있을 미(味), 아름다울 미(美), 상서로울 상(祥), 착할 선(善), 옳을 의(義)로 변주가 이루어졌으니 양의 품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양과 염소를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 양의 해에 태어난 사람을 양띠라고도 하고, 염소띠라고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산양(goat)와 면양(sheep)을 명확하게 구분해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도 산양과 면양은 다른 속(屬)으로 염색체 수도 다르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옛 기록에는 그저 양(羊)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많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다산필담’에서 ‘산양, 즉 염소를 양이라고 잘못 부른 사례가 많아 분간하기 어렵다’고 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우리는 산양을 염소라 하고, 고(?) 또는 하양(夏羊)이라고 면양과 구별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수염 염(髥)자를 쓴 염소(髥牛)라는 이름에서는 외모의 특징이 드러난다. 고(?)는 고트(goat)를 음차했을 것이다. 야생 면양의 가축화는 아시아의 서부 고원지대와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란고원의 유적에서 발견된 면양의 뼈는 BC 7000년 것으로 측정됐다. 산양의 가축화를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는 BC 6500년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의 제리코 유적에서 나왔다. BC 6000년 안팎 카스피해 유적에서도 출토됐으니 역시 이란 북부 지역이다. 고대 한반도에서 양의 존재는 미미하다. 1세기 유적인 김해 패총에서는 멧돼지와 사향노루, 사슴, 소, 말의 뼈가 대거 출토됐지만 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후한시대(25~219) 사전인 ‘석명’(釋名)에서는 삼한에는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으며, 육포를 만들어 먹는다고 적었다. 한반도 산양 사육의 기원을 짐작하게 해 주는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양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책인 ‘서기’에는 599년 낙타 1두와 노새 1두, 양 2두, 흰꿩 1쌍을 백제로부터 받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일본은 이것을 양 사육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예종 11년(1116) 거란족의 요나라 유민이 양 수백 마리를 몰고 투항했는데, 이것이 면양의 한반도 최초 유입 기록이다. 이후 양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대접받았다. 특히 양꿈은 길몽으로, 이성계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가 초야에 묻혀 있던 시절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곧 왕위에 오르리라고 해몽했다. 양(羊)에서 뿔과 꼬리를 떼니 곧 왕(王)이 된다는 것이었다. 을미년 양띠해가 밝았다. 우리 국민 모두 양꿈 꾸고 소원 성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양꿈 꾸고 나서 임금 되고…영물로 여겨 악 쫓는 상징

    양꿈 꾸고 나서 임금 되고…영물로 여겨 악 쫓는 상징

    태조 이성계는 양 꿈을 꾸고 임금이 되었다. 이성계는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 양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나가 깜짝 놀라서 꿈을 깼다.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얘기를 했더니 곧 임금이 될 것이라고 해몽했다. 한자 ‘羊’(양)에서 양의 뿔에 해당하는 ‘??’획과 양의 꼬리에 해당하는 ‘ㅣ’획을 떼고 나면 ‘王’자만 남게 돼 곧 임금이 된다는 것이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양 꿈은 길몽으로 해석됐다. 양은 옛날 제왕의 꿈이었다. 양과 연관된 한자들도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과 닿아 있다. 큰 양을 뜻하는 대양(大羊) 두 글자가 붙어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자가 되고, 나(我)와 만나면 옳을 의(義)자가 된다. 선함(善), 상서로움(祥) 등 양과 어우러진 한자는 대부분 좋은 뜻을 담고 있다. 양은 십이지의 여덟 번째 동물이다. 시간으로는 오후 1~3시, 달로는 6월에 해당하는 시간신이다. 방향으로는 남남서를 지키는 방위신이다. 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박하고 어질고 인내심 많은 동물로 통한다. 성질이 온순해 무리를 지어 살면서도 우위 다툼을 하지 않고 암컷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순한 눈망울은 평화를 연상케 한다. 반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정직성도 있다. 무릎을 꿇고 젖을 먹고 늙은 아비 양에게 젖을 빨리며 봉양해 은혜를 알고 효심을 일깨우는 동물이기도 하다. 다만 일단 성이 나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적인 면도 있다. 속담, 설화 등에 등장하는 양도 이런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아무리 못된 시어머니라도 양띠 해엔 딸을 낳아도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는다’는 속설은 양이 지닌 효의 이미지에서 비롯됐다. ‘양띠는 부자가 못 된다’는 속담은 양띠 사람은 양처럼 너무 정직하고 정의로워 부정을 참지 못하는 맑은 성품에 근거한다. 낙랑·삼국·고려·조선 등 옛 출토유물과 조각, 그림 등에서 만나는 양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석암리 낙랑 고분에서 출토된 양 모양의 패옥(佩玉)과 청동제 꽂이장식, 법천리 백제 무덤에서 발굴된 양 모양 청자, 수락암동 고려 고분의 양 벽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2양’(二羊) 등은 모두 벽사와 길상을 상징하고, 위기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하는 평화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조선시대 그림 중에는 단원 김홍도 등이 그린 ‘금화편양도’(金華鞭羊圖)가 백미다. 어질고 착한 소년 황초평이 신선이 돼 금화산에서 양을 친다는 내용의 ‘황초평전’(黃初平傳)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채찍을 들고 있는 소년 ‘황초평’ 뒤로 흰 양들이 따르고 있다. 신선이 된 황초평은 기독교 성화에 나타난 양 치는 선한 목자 예수 이미지와 흡사하다. 사람이 양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으로 알려졌다.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유목민들에 의해 가축으로 길들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은 유목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지만 농경민족인 우리와는 큰 인연이 없다. 옛 사람들은 양띠를 생김새가 비슷한 염소띠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양과 관련된 옛 기록은 비교적 적다. 삼한시대에 양을 식용으로 썼다거나 고려 정종 때 개성 근처에서 왕실의 식용으로 양을 길렀으나 사료가 많이 들어 섬으로 귀양 보냈다는 얘기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서양도 양을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고자 태어난 동물로서 높은 경지의 도덕성과 생생한 진실을 상징한다고 봤다. 그래서 선량한 사람이나 성직자에 비유되기도 했다. 기독교 문명의 뿌리인 성경에는 양 이야기가 500번 이상이나 인용된다. 속죄양(贖罪羊)이라는 말이 있다. 양이 일찍부터 영험한 동물로 여겨져 제물로 사용된 데서 유래됐다. 동양에서 양은 소·돼지와 함께 제물로 쓰였고, 시대에 따라선 성수(聖獸)로까지 떠받들어졌다. 양 뼈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영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양의 가죽 옷은 제후나 대부 등 높은 신분의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다. 서양에선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양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가 없어졌다. 천성이 착하고 제물로 희생되는 양의 속성이 우리 민족에 비견되기도 했다. 구한말 지사 김종학 선생은 ‘흰빛을 좋아하는 우리 선조는 심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산양떼를 빼닮아 오직 인내와 순종으로 주어진 운명에 거역할 줄 모르니…, 슬프다 양떼들이여!’라고 통탄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양은 희생, 재물, 종교인, 선량한 사람 등을 의미한다”며 “예부터 양띠 해는 그해의 수호신이라 할 양의 성격을 닮아 평온하고 평화로운 한해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新국토기행] 강원 원주시

    [新국토기행] 강원 원주시

    ■ 볼거리 치악산 아래 역사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원 원주는 현대와 고대가 공존하고 문학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강원감영에서부터 문학의 향이 듬뿍 묻어 있는 박경리문학공원까지 다양한 볼거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한지 등을 테마로 한 체험관도 있어 교육의 고장임을 실감 나게 한다. [강원감영]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머물며 직무를 보던 관청으로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된다. 1395년 조선 건국과 함께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권과 원주를 중심으로 한 영서권을 합해 강원도가 만들어졌고 이곳 강원도의 행정, 군사, 경제 등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 원주에 감영이 세워졌다. 이후 1895년 춘천으로 도청 소재지가 옮겨 갈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강원감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포정루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등 주요 건물들이 잘 보존돼 있어 국내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구룡사] 치악산 기슭에 자리한 구룡사는 688년 의상대사가 아홉 마리 용을 물리치고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도선국사, 무학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이 수도하며 명성을 날렸다. 사찰 안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보광루와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이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매표소에서 구룡사로 오르는 1㎞ 길은 명품 소나무 숲길로 유명한 산책로다. 길 양쪽으로 아름드리 금강송과 투명한 계곡물이 어우러져 숲의 그윽한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박경리문학공원] 박경리 선생은 ‘토지’ 3부를 마친 뒤 1980년 원주 단구동으로 거취를 옮겼다. 이후 1997년 토지문학관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4부와 5부를 집필했다. 선생의 옛집에는 실제로 사용하던 주방과 집필 공간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손수 가꾸던 텃밭과 나무 등도 있어 생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주변 공원은 소설에 등장하는 평사리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 등으로 꾸몄고 공원 내에 북카페를 둬 각종 서적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배치했다. 2층에는 토지의 주요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특별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한지테마파크] 지금도 원주 호저면과 부론면 일대에서는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원주 한지는 700년 동안 보관이 가능할 만큼 품질이 뛰어나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 같은 중요 책자에 사용돼 왔다. 강원도를 500년 동안 관할하던 강원감영 관청에 한지를 공급하면서 한지문화와 한지인쇄문화도 자연스레 발전했다. 이렇듯 높은 원주 한지의 명성을 지키면서 전통 한지의 우수성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원주한지테마파크가 조성됐다. 이곳에서는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하게 듣고 한지로 만든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어린이·청소년·군인은 1000원이다. [한솔뮤지엄] 자연 속에 조성된 오솔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문화,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뮤지엄이다. 외부에는 강원도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잘 살리면서 특별한 주제로 장식한 세계의 정원이 있다. 이름도 플라워가든, 워터가든, 스톤가든으로 붙여 놓았다. 그 속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아름다운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전시관에는 국보, 보물급의 문화재를 포함한 페이퍼 갤러리와 판화공방이 있고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이쾌대, 백남준을 비롯한 국내 근현대 작가의 회화와 조각품이 다수 전시돼 있다. [고판화 박물관] 신림면 황둔리에 있는, 국내 하나밖에 없는 옛 판화를 전시하는 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중국, 일본, 몽골,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의 세계 고판화와 함께 한국의 궁중판화, 사찰판화, 문중판화 등 희귀 판화들을 직접 볼 수 있다. 총 25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뿐 아니라 뮤지엄 스테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목판화를 직접 새겨 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간현관광지] 원주천과 삼산천이 합류하는 간현협곡에 자리 잡은 원주 대표 유원지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될 만큼 천혜의 절경을 자랑한다. 조선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희수가 주변 산세의 아름다움에 반해 잠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장관이고 수심이 얕은 맑은 강을 따라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가족 단위로 편안한 휴가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인근에 소금강과 함께 간현봉, 구룡산 같은 명산이 있어 산행도 즐길 수 있다.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야영장, 화장실, 급수대, 샤워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원주에는 이 밖에 1000여종의 식물들이 자라는 허브팜, 일제강점기 벌목 운송을 위해 만들었다 지금은 갤러리로 탈바꿈한 반곡역, 근현대에 이르는 희귀 책자 1500여권을 전시하는 옛책고을박물관, 옻칠기와 한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옻칠기·한지공예관이 있으며 숲 체험, 황둔찐빵 만들기 체험이 가능한 치악산관광농원(황둔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이만희 부시장은 “빠르게 변모하는 현대의 질주 속에서도 손때 묻은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장이 원주”라면서 “예부터 배타적이지 않은 원주 특유의 포용력 덕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원주를 찾으면 고금을 넘나들며 즐길거리, 볼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주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먹거리 청정 자연에서 나는 뽕잎을 따 만든 ‘뽕잎황태밥’과 비타민이 풍부한 복숭아즙으로 재운 ‘치악산 복숭아불고기’ 등이 원주 지역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원주가 깊숙한 내륙 지역이다 보니 요리 재료가 귀했던 탓에 그동안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울 음식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웰빙 바람을 타고 이런 음식들이 인기를 끌며 자연스레 지역 특산 먹을거리로 뜨고 있다. [뽕잎 황태밥] 자연 속에서 자란 뽕잎과 강원 지역 특산품인 황태로 지은 뽕잎황태밥은 미네랄과 아미노산,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구수한 감칠맛이 일품인 건강 나물밥이다. 2200여년 전 중국 후한 시대부터 약재로 쓰기 시작한 뽕잎은 각기병과 몸이 붓는 증세, 식은땀, 풍 등에 좋다고 알려졌다. 해열, 진해, 이뇨 등의 효능은 물론 변비와 중금속 배출에도 좋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동의보감 등에 암과 난치병에 좋다고 기록된 황태까지 더해 만든 웰빙식품으로,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운채와 청정고을명가, 미향, 장수숯불갈비, 섬강한우촌, 우리소 등이 유명하다. 김은주 우리소 종업원은 “양념간장과 된장을 곁들여 먹는 뽕잎황태밥은 은은한 뽕잎 향과 부드러운 황태살이 밥과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고 말했다. [치악산 복숭아 불고기] 우리나라 전통 고기구이는 중국 동북부 지방에 살던 맥족(고구려)이 먹던 숯불구이 고기 맥적에서 유래됐다. 맥적은 소고기를 썬 뒤 두드려 연하게 하고 대꼬챙이에 끼워 소금과 양념해 직화로 숯불에 구웠다. 석쇠가 나온 뒤에는 꼬챙이에 끼울 필요가 없어져 지금의 불고기가 됐다고 한다. 치악산 복숭아불고기는 치악산에서 나는 복숭아즙으로 한우를 재우고 참숯에 구워 기존 불고기와는 차별화된 색다른 맛으로 인기를 끈다. 복숭아는 비타민이 풍부하고 피로해소, 피부 미백,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 장군화로구이, 장수숯불갈비, 돈벌수다, 섬강한우촌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원주 추어탕] 쌀쌀해진 겨울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추어탕이다. 사계절 보양식으로도 인기지만 겨울로 접어들 때 추어탕 한 그릇 뚝딱 비우면 추위는 저만치 물러난다. 추어탕은 장어 못지않게 영양가가 높은 반면 가격은 저렴해 서민 보양식으로 인기 있다. 강장, 해독 작용이 뛰어나고 빈혈, 당뇨병 개선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조는 개운동 골목 원주의료원 뒤에서 2대째 운영 중인 ‘추어탕’을 꼽는다. 20대 중반부터 추어탕을 끊인 주인 이복순(75) 할머니는 재료 선별부터 상차림에까지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 지금도 자연산이 나는 시기에는 양식을 들여놓지 않는다. 고유한 맛을 내기 위해 된장을 직접 담가 4년을 묵혔다 쓴다. 그래야 비린내가 없다고 한다. 원주 지역 추어탕은 된장을 풀어서 쓰는 경상도, 전라도와 달리 고추장을 사용한다. 지금도 음식을 직접 끓이는 이 할머니는 10년 먹을 고추장을 확보해 놨다. 치악산 자락의 집 옥상에는 고추장독이 150여개에 이른다. 장맛 때문에 추어탕에 마늘, 고추 외에 다른 조미료나 첨가물을 넣지 않아도 제맛이 난다. ‘음식 맛은 장맛’이란 옛말대로다. 인원수에 맞게 얇은 쇠솥뚝배기에다 추어탕을 바글바글 끓인 뒤 손님상에 낸다. 먹는 동안 식지 않아 좋고, 훈훈하면서도 개운한 뒷맛이 일품이다. 미꾸라지숙회와 미꾸라지튀김도 있다. 이 할머니는 “집에서 해 먹던 맛 그대로 40년 넘게 추어탕을 끓여 내니 서울 손님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원주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충남 서천으로 떠나는 명품 가을 여행

    충남 서천으로 떠나는 명품 가을 여행

    바람이 분다. 갈대가 운다. ‘사르락’대는 소리 듣자니 계절의 끝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이맘때라면 충남 서천을 찾아야 한다. 솜털 같은 갈대꽃이 바람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쳐내는 장면과 마주할 수 있다. 겨울나기 위해 찾아든 수만 마리 철새와 만나는 것도 이즈음이다. 뜻밖의 볼거리들도 많다. 여태 근대의 기억이 머물고 있는 마을이며, 국립생태원 등의 품 너른 전시관도 있다. 이만하면 명품 가을 여행지라 부를 만하지 싶다. 서천에는 나라에서 세운 전시관이 두 곳 있다.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다. 금강이 휘돌아가는 언저리에 터를 잡은 국립생태원은 규모가 약 100만㎡(약 30만평)에 이른다. 축구장 90여 개 정도의 크기다. 생태원은 금구리구역, 하다람구역, 에코리움구역, 고대륙구역, 그리고 연구교육구역 등으로 나뉜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에코리움이지만 너른 야외공간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그만이다. 에코리움은 면적만 2만 1932㎡에 달하는 국립생태원의 중심 시설이다. 열대, 온대, 지중대, 극지, 사막 등 세계 기후별 생태계에 따라 전시관을 구성했다. 그래서 별칭도 ‘작은 지구’다. 섭씨 35도를 유지하는 열대관엔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멕시코산 도롱뇽 우파루파, 이구아나 등이 전시됐다. 사막관에서는 다양한 선인장과 목도리도마뱀 등을, 지중해관에서는 바오밥나무와 덤피 개구리 등을, 극지관에선 애교 넘치는 펭귄들과 마주할 수 있다. 에코리움 밖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하다람 놀이터가 조성돼 있다. 나무 미끄럼틀, 개구리 혀 미끄럼틀, 무당벌레, 버섯 그늘 등 다양한 동물 모양의 놀이시설들이 아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우리나라의 식생을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숲’, 습지 식생을 재현해 놓은 습지생태원, 사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사슴생태원(고대륙구역) 등도 둘러볼 만하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은 차원이 다른 해양생물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국내 해양생물자원의 종합적 관리와 생물주권 확립을 위해 조성됐다. 내년 정식 개장을 앞두고 지난 5월 말 임시 개관했다. 해양생물자원관 중앙에는 원통형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자원관의 건물 높이와 맞먹는 거대한 규모다. 구조물 안에는 물고기 등의 표본이 담긴 사각형의 상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게 바로 핵심 전시물 중 하나인 ‘씨드 뱅크’다. 5200여 종에 달하는 우리나라 바다생물들의 표본을 모아 놓았다. 보존을 위해 출입은 제한됐지만, 외부의 터치스크린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전시실은 모두 네 개다. 각기 다른 주제의 전시물을 선보이고 있다. 해양생명홀, 해양정보홀 등에서도 차원 높은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고래, 쥐가오리 등 거대 해양동물들의 실제 뼈와 바다사자, 북극곰 박제 등 정교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한국관광공사의 윤재진 대전충남협력지사장은 “국립생태원을 중심으로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등 서천의 생태자원을 중부권의 대표적인 생태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한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며 “올해 개원한 국립생태원의 9월 누계 관람객이 77만 명에 달할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천의 가을을 대표하는 건 신성리 갈대밭이다. 너비 200m에 달하는 갈대밭이 금강을 따라 1.5㎞ 정도 펼쳐져 있다. 이병헌, 소지섭, 장혁, 오지호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간지남’들이 이 갈대숲에서 ‘JSA 공동경비구역’ ‘추노’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의 영화, 드라마를 찍었다. 갈대는 이맘때 가장 볼만하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꽃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춤사위를 펼친다. 바람이 가는 길을 따라 누웠다가 일어서고, 그러다 다시 눕는다. 그때마다 ‘사르락~’대며 노래도 부른다. 갈대는 고마운 식물이다. 기수역에서 살며 이런저런 오염물질을 분해하고 땅을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온 탓에 면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오는 억새도 문제다. 육지화되어 간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주객이 전도될 판이다. 서천군에서 소금을 뿌리는 등 갈대의 생장을 위해 힘을 쓰고는 있지만, 별무신통인 듯하다. 제때, 제자리에서 갈대의 노래를 들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나날이 짧아지고 있다. 낡은 근대의 풍경을 찾아가는 여정도 흥미롭다. 첫걸음은 판교면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 등의 촬영지였던 사진관과 100년 넘은 양조장, 정미소 등 적산가옥들이 여태 남아있다. 장항읍의 낡은 풍경도 볼만하다. 특히 장항제련소의 음울한 풍경은 정말 압권이다. 바닷가 거대한 갯바위 위로 높이 솟은 공장 굴뚝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담긴 오벨리스크처럼 보인다. 안정심 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비철금속 제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장항제련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금강 하구에 조성됐다. 백제 시대 때 외국 군대의 출입이 빈번했던 기벌포가 있던 자리다. 제련의 불꽃이 꺼진 지는 오래지만 여태 일본 자본이 주식 등 공장 소유권의 일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열강과의 기벌포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서천엔 이른바 ‘명당’이 몇 곳 있다. 안정심 해설사에 따르면 토정 이지함이 조선 최고의 명당 가운데 하나로 현 종천면 일대를 꼽았다고 한다. ‘부내복종’(府內伏鍾)터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여태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목은 이색의 묘도 무학대사가 알려준 명당이라고 한다. 기린산 중턱에 터를 잡았다. 인접한 문헌서원과 함께 둘러볼 만하다. 마량포구는 가을날의 일몰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지형적으로 바다 쪽으로 돌출돼 있어 서해안인데도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글 사진 서천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국립생태원(950-5300)은 서해안고속도로 서천나들목으로 나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 4번 국도로 갈아탄 뒤 곧장 가면 된다. 금강하굿둑과 인접해 있다. 입장료는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이다. 장항역 쪽에도 출입문이 있다. 코레일과 다양한 연계할인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950-0600)은 임시개관 중이다. 2015년 정식개장 전까지는 화, 목, 토에만 운영된다. 국립생태원에서 나와 4번국도를 따라 가다 막다른 삼거리(원수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장항제련소도 인근에 있다. →맛집 요즘 전어가 제철이다. 한데 어획량이 좋지 않아 가격은 다소 높은 편이다. 전어축제가 열리는 홍원항, 마량포구 등에 맛집들이 많다. 서천수산물특화시장은 각종 해산물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서천읍내에 있던 여러 재래시장을 한곳에 모았다. 서천읍내 외곽에 있다. 한산 소곡주(sogokju.co.kr)는 서천의 대표 명주다. 1300년 전 백제왕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알려져 있다. 최고급 찹쌀로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든다. 한산면 지현리 한산모시전수관 맞은편에 소곡주 제조과정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951-0290. →잘 곳 국립생태원에서 방과 거실이 딸린 숙박시설을 대관하고 있다. 문헌서원(953-5895)에서도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서천비치텔(952-9566)은 마량포구 가장 높은 곳에 터를 잡아 전망이 좋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북한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등 5개 나라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 무렵 한성백제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토성을 쌓으면서 비롯됐다. 132년 백제 개루왕이 산성을 쌓아 북진의 기치를 높이 올렸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하여 남진의 발판으로 삼았고, 551년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여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1387년 고려 우왕이 중흥산성을 쌓았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 우리 전쟁사이다. 한반도의 목구멍(咽喉)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각축의 역사를 웅변하는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순수’(巡狩)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이며 순행(巡行)이란 용어가 일반적이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진흥왕은 가야 병합, 한강 유역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왕성한 대외정복사업을 기념하고자 4곳의 비석을 세웠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3번지 북한산 비봉 정상이 순수비가 서 있던 자리이다. 큰 비석이 있다고 해서 비봉(碑峰)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순수비는 함경남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경상남도 창녕비와 더불어 진흥왕 재위 말인 568년부터 576년 사이에 세워졌다. 1972년 옮겨질 때까지 최소 1400년 동안 한강과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풍상을 겪었다. 이 비석의 정체는 건립 1200여 년 후인 1816년에야 밝혀졌다.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로 서예가, 화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개조(開祖)였다. 실용학문을 연구하라는 스승 박제가와 박지원의 가르침을 좇아 금석학과 문자학, 음운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두루 연구했다. 그때까지 이 비석은 ‘고려 태조 비’ ‘도선국사 비’ ‘무학대사 비’ 등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의 비문을 고증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서 추사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 경도(한양)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154cm)이고 너비는 3척(71cm)이며 두께는 7촌(16cm )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 행 몇 자씩을 분별할 수 없다.…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그래서 마침내 이 비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의 비(無學之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라고 적었다. 북한산비는 1200년 만에 주인을 찾았다. 추사는 비석 왼쪽 측면에 ‘두 번 와서 비의 글을 읽었다’라는 내용의 글을 손수 새겼다. 순수비는 1934년 국보 제3호로 지정됐다. 1400년 역사에다 추사의 글씨까지 더해지니 ‘국보 중의 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국보 1호가 아니라 3호로 정한 일제의 간사함에 치가 떨린다. 문화적 열등감의 발호였으리라. 숭례문이 2008년 소실되고서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이 일 때마다 ‘국보의 번호는 관리번호일 뿐 가치의 순서와는 무관하다’고 변명하는 우리 문화재 당국의 순진함도 못마땅하기는 매한가지다. 추사는 비석을 발견했을 때 덮개돌이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고 적었지만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총알 세례를 받아 탄흔이 선연하다. 언제인지 모르게 몸돌 위쪽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잘렸고, 오른쪽 아래 귀퉁이는 뭉텅 떨어져 나갔다. 1972년 일단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 보존하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06년 10월 그 자리에 복제비를 세웠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 그리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이 서울을 지키는 대표적인 성곽이다. 우리나라에는 3000개에 이르는 산성이 있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대 도시 서울주변엔 숱한 성곽의 유허가 존재하지만, 규모나 형태면에서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성곽이 서울을 제대로 지켰나’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북한산성은 왜 쌓았을까. 한양도성의 북쪽 외곽 방어막인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단 한번도 서울을 사수하지 못했다. 서울을 남쪽에서 보호하는 남한산성이나 강화성과 달리 외적의 침입 때마다 무용지물이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추풍낙엽으로 무너졌고, 두 번의 반정(중종과 인조) 과 이괄의 난 때도 맥없이 뚫렸다. 한국전쟁 때 창동~미아리 전선을 형성했지만 서울사수의 최후 방어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자는 북쪽 외곽 방어선 축조에 집착했다. 고려의 영향이 컸다.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태조 왕건의 관을 옮겨둔 오래된 피란처였고, 1232년 몽골 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최영 장군의 전공이 있다는 점에서 경복궁의 뒤를 지키는 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성을 지키려면 곡성(曲城)과 돈대(墩臺) 그리고 해자(垓子)가 필요하다. 한양도성은 방어용 성이 아니었다. 임진, 병자 양란에서 경험하였듯이 군사적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개축한다면 몰라도 수축만 하게 한다면 나을 것이 없을 듯하다”라는 숙종의 고변이 비변사등록에 남아있다. 조선 왕들에게 성곽은 국가 권위와 통치의 표상이었다. 외적을 방어하는 국력의 표현이기에 앞서 내부의 적대세력을 물리치는 대내용이었다. 숙종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에서 구역을 나눠 성을 쌓게 했다. 축조공사는 불과 6개월 만에 끝났다. 북한산성의 넓이는 49만㎡로 한양도성의 14만㎡보다 3배 이상 넓다. 왕이 집무를 볼 수 있도록 1만㎡에 124칸의 행궁을 지었다. 2만 6000섬의 군량미를 확보하고, 저수지 26개와 우물 99개를 팠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나한봉~용혈봉~미륵봉(의상봉)~원효봉~영취봉 같은 험한 봉우리를 이어 구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숙종은 몸소 시단봉 동장대에 올라 9.73km에 이르는 산성의 위용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때 지은 성곽과 행궁은 1915년 대홍수 때 대부분 떠내려갔다.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 경기편에서 도성과 산성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했다. “비록 산세를 따라 성을 쌓은 것이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하다. 또 성 위에 작은 담을 쌓지 않았고, 해자도 파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난리 때 모두 지켜내지 못했다”라고 한양도성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북한산성에 대해서도 “숙종 때 조정에서 도성을 고쳐 쌓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동쪽이 너무 낮아서 만약에 강을 막아 그 물을 성에다 댄다면 성 안 백성은 모두 물고기 신세’라는 말이 있어 그 논의는 중지되고 말았다”라고 언급했다. 숙종 재위 기간 내내 이어진 산성 축조 논쟁을 지적한 말이다. 북한산성 축조가 처음 논의된 1675년부터 완공된 1711년까지 무려 36년을 끈 북한산성 축조논쟁을 비꼰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북한산성으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전략인가” “북한산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북한산성은 험준하여 지키기는 좋지만 도성민을 수용하기는 좁지 않은가”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니 강화성이나 남한산성 둘 중 하나는 포기하는 게 옳다” 등의 온갖 논의가 난무했다. 찬반의 논리는 단순했다. 찬성론자들은 유사시 왕이 피할 곳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고, 반대론자들은 병자호란 때 청과 맺은 정축조약의 ‘성곽을 수축할 수 없다’라는 조항을 위배해선 안 된다면서 맞섰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1710년 청으로부터 날라온 한 장의 외교문서가 결정적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니 연해 지방의 방어에 유의하라’는 문서가 성곽수축 금지조항을 해제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반대논리를 잃자 축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청화자 이중환은 비판적이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사현(무악재)이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녹번현이 있다. 당나라 장수가 여기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겠다’하였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벽제령인데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한 곳이다. 고개 두 곳과 벽제령은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 …천연적인 험한 곳을 버리는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벽제령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임진나루터이다.…아주 험하게 되어 있으니 참으로 지킬 만한 곳이다”라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소용도 없는 도성과 산성을 짓는다고 백성을 달달 볶거나 세금을 축내지 말고 지킬 만한 곳을 찾아서 지키라는 주장이었다.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길섶에서] 무학대사/문소영 논설위원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도움을 주고 한양 천도를 이끌었다는 무학대사는 왕의 권위에 비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두고 “눈앞에 돼지가 보인다”고 조롱하자, 그는 태연하게 “내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면서 “돼지 눈에는 돼지가,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고 일갈한 일화는 유명하다. 40일 넘게 단식해 팔·다리가 미라처럼 바짝 말라버린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를 향해 야비한 사생활 공격이 시작됐다. 이혼 후 양육비 지급을 거절했다, 전문 데모꾼인 금속노조 출신이다, 단식은 보상을 더 받으려는 꼼수다 등등. 도덕성을 상처 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44일째 장기 단식을 무효화하는 의도다. 그래서 김씨는 딸들과 나눴던 다정한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밝혔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양육비, 휴대전화비, 보험료 등을 보낸 내역도 공개했다. 살아있는 둘째 딸은 “다정하다”며 언론에 아버지를 변호해야 했다. 46살에야 정규직이 돼 자동으로 노조원이 된 47살 가장의 가난한 사생활을 공개하도록 강요한 야만에 분노한다. 비열한 작태다. 무학대사의 “돼지의 눈엔 돼지”를 곱씹어보는 나날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씨줄날줄] 토박이 사라진 도시 유권자/정기홍 논설위원

    지난해 기초행정구역인 읍·면·동을 넘어 주민등록을 옮긴 사람은 741만명에 달한다. 전체 인구의 14.7%다.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이동의 통계치다. 2010년에 실시한 인구 총조사(5년마다 실시)에선 1~2인 가구가 전체의 48.2%에 이르렀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주택이 아닌 오피스텔, 고시원 등에 사는 1인 가구가 9.6%, 2인 가구는 2.5%였다. 2000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했다. 1~2인 가구가 늘고 있다는 것은 ‘철새 인구’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지방선거가 바짝 다가섰지만 후보자의 면면을 제대로 몰라 ‘까막눈 투표’가 될 우려가 커졌다. 특히 이사가 잦은 도시 유권자들의 선거 무관심이 더하다. 가장 많은 후보자가 출마한 기초의회의 경우 1034곳의 선거구에서 2898명을 뽑지만 선별하기가 무척 힘들어 애를 먹고 있다.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의 본질이 무색하다. 선거 무관심에서 벗어날 방안은 없을까. 지역에 얽힌 사연을 아는 것도 후보자를 고르는 빠른 길이 아닐까. 지역의 숨은 이야기는 가지가지다. 서울의 명칭이 ‘눈 설(雪)+울타리’의 줄임말에서 유래됐다는 것은 흥미롭다. 조선의 건국을 도운 무학대사가 명당을 찾으러 한양땅에 왔다가 다른 곳과 달리 한곳만 눈이 쌓이지 않아 ‘온기 있는 땅’이라 하여 이곳을 도읍지로 정했다고 한다. 서울이 ‘눈으로 울타리가 처진 곳’이란 뜻이다. 서울 왕십리의 명칭도 무학대사가 만난 노인이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고 말해 지금의 경복궁에 터를 잡았다는 데서 나왔다. 왕십리와 경복궁이 10리 거리이니 그 근거가 와 닿는다. 구로(九老)는 아홉 노인들이 한가로이 살았다 해서, 동작(銅雀)은 구리가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중랑(中浪)은 본래 ‘양’(梁)자를 썼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복모음인 ‘양’자 발음을 못 해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은 경기 안성시 일죽면은 본래 죽일면이었지만 어감이 좋지 않아 이름을 바꾼 경우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우리의 행정 지명은 150여만개에 이른다. 한국땅이름학회의 배우리씨가 했던 ‘남한 토박이 땅이름’ 조사(1989년)에서는 한자 행정 지명의 경우 용산(50곳)이 가장 많았고 신흥(48곳), 신촌(43곳), 금곡(42곳)이 뒤를 이었다. 말(馬)과 관련한 지명이 전국에 744곳이라는 조사도 있다. 지명은 지역민의 삶과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 2 선거구니 ‘1-가·나’라는 행정 용어가 헷갈리는 지방선거다. 사는 곳의 유래를 찾다 보면 지역에 대한 애정도 많아지고 후보자의 면면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총 9141억원이 투입된 이번 선거에서 한 표의 소중함을 내 고장의 작은 역사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는 크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조선시대 도성 축조에 얽힌 두 가지 설화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얼개인 도성을 짓는 축조도감을 1395년 설치했다. 삼봉 정도전이 성 쌓을 자리를 정했는데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고, 두 번째는 성리학과 풍수학의 정면 대결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 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雪)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얘기다.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인 서울의 유래는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정설로 돼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에서 보듯 서울을 ‘으뜸가는 선’인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풀이다. 입으로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는 희극적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은 여전히 경기도 경성부였다. 미 군정청은 1946년 ‘서울은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 자유독립시가 된다’라고 발표했다. 영어 원문에는 ‘Seoul established Independent City’(서울독립시의 설치)라고 기록됐다. 하지만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 한국인 직원이 서울독립시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서울특별시’라고 고쳐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의 한판 대결이다. 두 사람은 경복궁 명당이 앉을 자리를 정해 줄 주산(主山)을 백악(북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에서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수용하지 않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는 설화를 전했다. 무학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200년 후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뜻한다.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면서 주산은 백악으로 결정됐다. 무학은 굴하지 않고 도성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선바위를 왕성 안에 집어넣어 불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또다시 삼봉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났다. 2전 2패를 당한 무학은 “불교가 망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얄궂은 운명인지 스님의 형상을 닮은 선바위 옆에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느라 쫓겨난 국사당이 자리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500년이 지나고 나서 한자리에서 해후한 셈이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이 한양도성 건설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은 물론 관아와 시장의 터를 잡았고 도성 성곽의 윤곽도 결정했다. 서울을 5부(동·서·남·북·중부), 52개 방으로 나누고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하는 일도 모두 그의 생각대로 였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교 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신라 천 년과 고려 오백 년을 풍미한 불교와 풍수도참설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양도성’ 명명 4년… 안내판에 ‘서울성곽’ 한양도성이란 무엇인가.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한성부, 한성, 한양, 서울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한양도성이 곧 조선이었다. 더불어 수도, 수선, 도읍, 도성, 왕성, 황성, 궁성, 경조(京兆), 경도, 장안, 사대문 안의 통칭이기도 하다. 서울을 나타내는 모든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이고 권위 있는 명칭이었다.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영국 런던이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했다. 규모로 보아도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서울을 둘러싼 성곽이 가장 크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우리는 ‘한양도성=서울을 에워싼 18.672㎞의 성곽’이라고 범위를 좁혀 해석하고 있다. 내용물은 다 빼고 도성을 둘러싼 성곽만 내세우는 축소지향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 내내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부 전체를 지칭하는 당당한 국가권력의 표상이었다. 도성 밖 10리를 나타내는 성저십리(城底十里)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사대문 안과 같은 권역을 나타내지만, 의미는 훨씬 공식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성곽은 유일무이의 대도시인 한양도성 안을 관리, 운영할 목적에서 세워진 상징 벽이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인 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의문(서소문)~돈의문~창의문(자하문)~숙정문~혜화문은 한양도성의 관문이었다. 상경(上京)과 낙향(落鄕)이 구분되는 시대의 경계선이었다. 궁궐을 에워싼 백악~낙타산(낙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도성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상징이었다. 외적의 침입과 방비, 농성을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탕춘대성 등 산성을 따로 외곽에 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울성곽이라는 용어를 쓰려면 ‘서울성곽=조선시대의 옛 서울인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개발연대 몰지각한 권력자와 도시행정가들이 한양도성에서 성곽만 따로 떼 ‘서울성곽’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도성 안 문화재와 유물은 마구잡이로 깔아뭉개면서 일제가 조선 정체성 지우기의 하나로 헐어버린 성곽은 잇는다는 앞뒤 맞지 않은 복원계획이 화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구자춘 서울시장이 1975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계획’을 세웠고,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한양도성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성곽이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박한 역사인식과 자가당착이 빚은 비극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문화재위원회가 2011년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의 명칭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눈이 어두워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 성곽’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고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어정쩡하게 명명하는 과욕을 부려 또 다른 오해와 시비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서울성곽이라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도성을 둘러싼 성곽과 8개의 대·소문이 한 몸이란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국보 1호, 보물 1호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들 문이 한양도성의 출입문이라는 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곽을 상실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왔고, 출입이 통제된 숙정문과 차량통행에 방해된다며 철거해 버린 돈의문을 아예 보지 못한 탓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고 정식 등재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송인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유산가치와 진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성곽의 영어표기가 ‘Seoul Fortress’인데 반해 한양도성은 문화유산 등재 때 ‘Seoul City Wall’이라고 표기됐다”면서 “Fortress가 방어 요새로서의 역할만을 제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City Wall은 역사도시의 도시성곽으로서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양도성을 둘러싼 전반적인 용어와 개념 정리를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이라고 명칭을 바꾼 지 4년째를 맞지만 성곽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여전히 서울성곽이라고 표기돼 있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용어나 명칭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식민시기 서울의 조상 산인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엉뚱하게 이름 붙임으로써 정체성이 훼손된 것처럼 용어의 변질은 의미의 변질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을 헛갈리고 있다. 묵은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안내판부터 제때 바꿨어야 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자치구는 서울성곽이라고 우기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한국풍수인물사’ 펴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저자와의 차 한잔] ‘한국풍수인물사’ 펴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흔히 풍수는 좋은 땅을 골라서 덕을 보자는 발복의 방편쯤으로 여겨진다. 신라 말엽 중국으로부터 유입됐다는 이른바 ‘술법 풍수’며 ‘음택(陰宅·무덤)풍수’가 그것이다. 실제로 거개의 풍수가는 이 중국 풍수에 매몰돼 있고 일반인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흐름과는 달리 한국에는 발복의 차원을 넘는 상생의 자생적인 풍수가 있었다는 사실에 천착해 사는 풍수 전문가가 있다. 최창조(63)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한국 자생풍수를 알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살리자는 차원의 책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그가 한국 자생풍수의 계보를 엮은 ‘한국풍수인물사’(민음사)를 펴내 화제다. “언제부터인가 풍수에는 좋지 않은 눈길이 쏟아지고 있어요. 덕을 보자는 욕심과 이기주의의 편식 탓이지요. 우리 자생의 풍수는 사실 그런 측면과는 멀고 오히려 더불어 같이 살자는 조화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 말마따나 책은 중국에서 풍수가 들어오기 훨씬 전 이미 이 땅에서 활동했던 이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살았던 상생의 풍수 흔적을 촘촘히 추적해 보여준다. 신라의 석탈해가 초승달 모양의 집터를 빼앗았다는 기록이며 선덕여왕이 여근곡(女根谷)에 백제 군사가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기록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그 흔적들은 한 틀로 꿰어진다. 모자라는 것을 도와서 채운다는 ‘비보’(裨褓)와 ‘개벽’이다. “도선국사는 1100개의 사찰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본 그 사찰들은 한결같이 빼어난 길지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물이 차고 사람 살기에 불편한 땅들이 더 많았어요. 흠결 있는 땅을 찾아 좋은 곳으로 만들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결국 자생 풍수는 이 세상에 완전한 땅이란 없다는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건 땅이건 결함 없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일부러 결함을 택해 그것을 고치려 든 게 자생풍수를 집대성한 도선 풍수의 근본인 셈이지요.” 철저하게 비보에 바탕을 둔 자생 풍수가들의 흔적은 전방위로 뻗쳐 있다고 최 교수는 거듭 말한다. 이를테면 고려 묘청이 천명했던 개벽사상이며 조선 건국 시 무학대사가 폈던 현실정치, 조선말 홍경래와 전봉준의 동학사상이 그 풍수의 부인할 수 없는 궤적이란다. “우리 자생의 풍수는 조상 묏자리 잘 쓰자는 음택보다는 조화로운 생활을 중요시하는 양택(陽宅·살아 있는 사람의 집터) 풍수였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의 지리학’이지요.” 자생 풍수를 외치며 풍수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최 교수는 그 명망과는 달리 학계와 풍수가들로부터 외면당해 사는 학자다. 1992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 돌출된 사건이라고 한다. “어떻게 풍수에서 일률적인 계량화를 요구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학계에서는 풍수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쉽지 않지요. 대개의 풍수가들 역시 제가 말하는 비보의 풍수는 귀담아듣지 않는 실정이지요.” 최 교수는 인터뷰 내내 ‘명당은 따로 없다’는 말을 줄곧 입에 올렸다. “명당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풍수에서도 가장 중시할 것은 사람의 삶이 아닌가요. 자연과 사람이 친화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는 게 진정한 풍수의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자생 풍수의 흔적들을 찾아 떠난다는 최 교수. ‘명당이란 없다’는 자신의 말에 거품을 무는 풍수가들, 과학적으로 설명하라는 학계의 채근에도 그의 자생 풍수 고집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땅 못지않게 그 땅에 몸담고 의지해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배우가 무대 탓을 하고,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면 추해 보이지요. 결국 땅도 사람이 하기에 좋고 나쁨이 결정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바로 명당이지요.”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책꽂이]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청소기 (메이어 살레브 지음, 정영문 옮김, 시공사 펴냄) 이스라엘 초기 정착민 얘기다. 맨손으로 조국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가 양키 자본주의 아래 성공한 작은할아버지가 보내준 전기청소기를 냉대해버린 사연을 담았다. 닉슨과 흐루시초프 간 ‘키친 디베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인데, 가족의 기억을 익살스럽게 재구성한 저자의 입담이 좋다. 1만 2000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문학수 지음, 돌베개 펴냄) 책 제목은 꾹꾹 한 음씩 눌러가며 천천히 연주하라는 뜻.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서,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서 맛난 칼럼을 꾸준히 써온 저자의 클래식 즐기기 비결이다. 클래식을 끊임없이 접해오면서 저자가 만났던 작곡가, 연주자, 지휘자 얘기를 인물 중심으로 버무려뒀다. 인물, 음반, 책 내용에다 취재 뒷얘기가 재미있다. 1만 8000원.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펴냄) 자신의 시를 “세상에 바치는 찬사” 혹은 “작은 할렐루야”라 부르는 미국 시인의 독특한 시집이다. 시집이면 시만 있을 것 같은데 산문이 죽 나열되다 간혹 가다 한 편씩 시가 나오는 방식이다. 수필집, 명상집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유다. 가장 평범한 순간들이 가장 완벽한 날들임을 끊임없이 속삭여준다. 1만원. 일본 온천 료칸 여행 (이형준 글, 즐거운상상 펴냄) 여행 작가로서 추천할만한 일본 온천 30여곳을 골라뒀다. 온천은 그냥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체험이기에 온천의 물 뿐 아니라 그 주변의 즐길거리들도 함께 소개해뒀다. 추천지가 일본 전역에 걸쳐있기 때문에 자기가 여행가려는 부근 온천을 찾아볼 수 있다. 1만 5000원. 새로운 천년의 터 (모성학 지음, 관음출판사 펴냄) 신라말 도선국사, 조선 초 무학대사에 이어 3세대 풍수가라 자임하는 저자가 풍수에 대한 얘기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2만 3000원.
  • 성동 ‘왕좌봉 터 조성’ 열매

    성동 ‘왕좌봉 터 조성’ 열매

    성동구가 지역 정체성 찾기 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왕좌봉(王坐峰) 터 조성 사업’이 열매를 맺었다. 5일 구에 따르면 마장동 주민자치위원회는 지난달 29일 동명초등학교에서 폭 95㎝, 높이 50㎝ 크기의 왕좌봉 안내표지판 제막식을 했다. 주민 3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1981년에 발간한 ‘동명연혁고 성동구 편’에 따르면 왕좌봉은 동명초등학교 내에 있었던 야산 봉우리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 앉아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서울의 지형을 살펴봤다고 한다. 또 태조가 이 봉우리에 올라 말 기르는 것을 관찰했다고도 전해진다. 김돈형 주민자치위원장은 “왕좌봉 안내표지판 설치로 마장동의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 매우 자랑스럽다.”면서 “주민들의 자부심과 애향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득 구청장은 “지역 정체성 찾기 사업은 주민들이 직접 잊혀진 지역의 역사를 찾는 일”이라며 “앞으로도 사업이 주민들의 관심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중랑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아시나요[동영상]

    중랑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아시나요[동영상]

    들불처럼 다시 일렁인 3·1절 만세함성 소리가 채 가시지 않았다. 때마침 애국의 물결이 중랑구에 출렁댄다. 중랑구는 애국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5.2㎞)’을 5일 소개했다. 서울과 경기 구리시를 잇는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빼어난 자연경관을 뽐내고 있다. ●서울시설공단 선정 산책 명소로 묘지들로 들어차 혐오감을 느끼게 했던 이곳이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등산객들로 붐빌 만큼 훌륭한 휴식공간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은행나무 길’, 노을에 물든 청계천 물억새와 함께 서울시설공단 선정 산책명소 3곳에 뽑혔다. 공원 내 용마천·망우천·송림천·보현정사·동산 약수터는 서울시 선정 ‘물맛 가장 좋은 10곳’에 뽑히기도 했다. 공원 입구에서 진입로를 따라 15분 걸어 올라가면 사색의 길 출발점이 나온다. 두 갈래 어느 쪽에서 걸어도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또 동쪽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과 남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경기 남양주시까지 조망할 수 있어 차라리 전망대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중랑구는 1997~1998년 순환도로 5.2㎞를 정비해 도시 환경림과 아스콘 포장도, 자연관찰로 등을 조성했다. 시민들이 산책을 하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으로 만들고 청소년들에게는 역사 교육장으로 삼도록 했다. 1933년부터 분묘 2만 8500여기(基)가 들어섰던 공원엔 꾸준한 이장지원 사업으로 9900여기만 남아 있다. 대신 소설가 계용묵·김말봉, 작곡가 채동선, 대중가수 차중락, 화가 이중섭, 아동운동가 방정환, 독립지사 오세창·한용운·장덕수·조봉암, 의학교육과 한글 보급에 앞장선 지석영 선생 등 역사적 인물들의 연보기록비를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넓이 134만 8400㎡에 이른다. ●새단장 후 등산객들로 북적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한 뒤 선왕들의 능지를 결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하면서 생겼다. 태조가 무학대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정하고 환궁하다가 고개 위에서 발길을 멈춰 “아아, 이것으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노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항일의병 ‘13도 창의군탑’도 들어섰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망우리공원 이렇게 가세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201번, 262번, 270번, 2227번, 2234번, 3번, 8번, 8-2번, 30번, 51번, 52번, 65번, 88번, 165번, 166-1번, 167번, 202번, 330-1번, 765번, 1330번, 1330-1, 1330-3번, 1330-5번, 1330-44번 8004번, 8005번 버스를 타고 망우리 고개 입구 동부제일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중앙선 양원역 2번 출구로 나와 10분쯤 걸어 가면 나타난다. 지하철 7호선을 타면 상봉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다. 자가 운전자는 망우리 고개 중간에 위치한 저류조공원 주변이나 망우산 중턱의 서울시설공단 묘지사무소(434-3337) 옆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 언론서 ‘FTA반대’ 판사 페북 글 비난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글을 올렸던 창원지법 이정렬(42·연수원 23기)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꼼수면’, ‘가카새끼 짬뽕’ 등으로 표현된 패러디물에 대해 올린 답글이 또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부장판사는 지난 18일 “트위트에서 본 신종라면 2가지랍니다.”라며 ‘시커먼 땟국물 꼼수면’, ‘가카새끼 짬뽕’이라고 쓰인 라면봉지 사진 2장을 올렸다. 이는 라면 이름에 팟캐스트 방송 ‘나꼼수’ 등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조합해 만든 패러디물이다. 이 부장판사는 20일 해당 글에 대한 비판 보도가 나오자 “저 신문 나왔네요. 특히 ‘시정잡배’라는 말씀 마음에 듭니다. 그동안 ‘고고한 사람’인 척하면서 재판하지 않았나 고민이었는데 ‘시정잡배’의 눈높이에서 재판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며 응수하는 글을 또 게재했다. 앞서 한 언론매체는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의 말을 인용, “판사가 대법원장의 거듭된 당부를 무시한 채 판사답지 못한 시정잡배의 언어로 대통령까지 조롱하는 것은 문제”라고 보도했다. 서기호(41·연수원 29기) 서울북부지법 판사도 이날 트위터에 “옛날 무학대사가 이성계로부터 ‘당신은 돼지 같소’라는 말을 듣자 ‘전하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는 법이죠’라고 했다.”면서 “21세기 무학대사는 이렇게 말한다. ‘시정잡배의 눈에는 모두가 시정잡배로 보이거든요’”라며 해당 보도를 비꼬았다. 한편 대법원과 창원지법은 이 같은 논란에 “현재로서는 이 부장판사에 대해 어떠한 조처를 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사람의 탐욕과 유좌지기/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열린세상] 사람의 탐욕과 유좌지기/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사람의 탐욕은 마음속에서 하고자 또는 얻고자 하는 욕심을 인내해야 하는 한계선을 넘어설 때 나타난다. 이것이 지나치면 사람으로서 본래의 품성을 잃고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탐욕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각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목적 달성을 위해서 태생적으로 욕심이라는 근원적 기운을 갖고 있다. 욕심의 실체는 우주 만물의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이자 마음 의지로서 삶을 주관하는 기운이다. 욕심은 이상적 마음 의지와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가면서 다스려 나갈 수밖에 없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탐욕으로 전이된다. 우리의 태양계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풀벌레조차 자기 몫이 있고 이런 무수히 많은 역할이 모여 세상의 균형을 이루며 다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역할이 바로 각각의 그릇이요 능력의 크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욕심이 그릇에 채워지고 넘친다면 이미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며 자기의 소관 범위를 벗어난 타인의 몫이다. 만일 누군가 더 많은 욕심을 내려면, 기존의 자기 그릇을 깨고 다시 그릇을 키운 다음 또 채우기를 거듭해야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임금이 된 후 스승인 무학대사로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사주팔자에 따라 행로가 사실상 결정된다는 설명을 듣고 자기와 똑같은 사주팔자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찾아오라고 지시한다. 이윽고 이성계와 사주팔자가 같은 한 사람을 찾았고, 이성계는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소와 돼지를 잡는 백정이란다. 어이가 없어 무학대사에게 물으니 “두분의 팔자가 칼로써 다스리는 기운은 같지만 한분은 지혜의 칼로 사람을 다스리는 능력의 그릇이고 다른 한분은 무쇠의 칼로 짐승을 다스리는 능력의 그릇이니 다스림의 목적은 같지만 능력이 달라 가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각자의 그릇 크기 안에서 욕심이 어떻게 다르게 완성돼 나타나는지를 시사하는 얘기다. 유좌지기(宥坐之器)란 순자의 유좌편에 나오는 말로, 노나라 환공이 항상 오른쪽에 두고 마음의 거울처럼 보았던 그릇이다.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고 가득 차면 엎어지며 알맞게 채우면 똑바로 서 있기 때문에 환공 스스로 항상 욕심이 자기 능력에 비추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곁에 두고 평상심을 다스릴 때마다 보았던 의기(儀器)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이었던 임상옥도 자신의 재물에 대한 무한의 욕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아무리 술을 채워도 넘치지 아니하는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을 곁에 두고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돈 버는 욕심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라는 점을 알고 능력이 만들어 주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상인으로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고심할 때마다 보았던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국민들이 그룹이나 대기업을 쳐다보는 시각이 따뜻하지 않다.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 놓고도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 새로운 동력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재투자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이 축적한 재화는 이미 천문학적인 수치에 이르며 갖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속도까지 붙어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한없이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있다. 조세라는 수단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배분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말은 무색해졌다. 장사꾼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좇지만, 사업가는 회사라는 법인을 경영하는 기업가로 적어도 윤리적 규범 안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있어 두 개념은 구별된다. 여기서 사업가에게 부여된 윤리라는 덕목은 승자의 독식이 아니라 나눔의 미덕을 말한다. 독식은 이미 그릇을 채우고 넘친 상태로, 다른 자의 몫까지 움켜쥐고도 배고픔을 호소하는 탐욕이기 때문에 허무한 신기루와 같다. 거창하게 기부금을 내어 재단법인을 만든다고 시끄럽지만 그것은 나눔의 양보가 아니라 그들만의 새로운 울타리가 하나 더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함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늦었지만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작은 나눔부터라도 시작하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왔다.
  • 합천 황매산 철쭉 축제 새달 8일부터 22일까지

    합천 황매산 철쭉 축제 새달 8일부터 22일까지

    전국 최대 철쭉 군락지인 경남 합천군 황매산 산상에서 새달 8~22일 화려한 철쭉 향연이 펼쳐진다. 합천군은 28일 황매산철쭉제전위원회 주관으로 황매산 철쭉군락지 일대에서 5월 8일부터 보름 동안 제15회 합천황매산철축제가 열린다고 밝혔다. 황매산 철쭉은 5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해 중순이면 절정을 이룬다. 특히 황매산 북서쪽 능선 정상부에 펼쳐진 수만평의 황매평전은 5월이면 붉게 핀 철쭉으로 산상 화원의 장관을 연출한다. 축제는 철쭉제례를 시작으로 사진촬영대회, 산상음악회, 가훈 써주기, 소원성취 연날리기, 보물찾기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행사가 마련된다. 축제 기간 하루 최대 5만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발 1108m의 황매산은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으로 고려시대 호국선사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 곳으로 전해진다. 산 곳곳에 기암괴석과 소나무, 철쭉 등이 수석 전시장처럼 어우러져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린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합천호와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화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높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드라마 ‘주몽’, ‘태왕사신기’, ‘선덕여왕’ 등을 통해서도 소개됐다.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활’도 황매산이 배경이다. 합천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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