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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하는 청년들이여! 멘토 7인의 조언

    우리 사회에서 20대는 무엇인가.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고민을 떠안아야 하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즐거움과 낭만 속에서 또 다른 고민을 동시에 떠안아야 한다. 분명 인생의 출발점에 있으면서도 방황이란 두 글자의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직장도 구해야 하고 인생의 미래도 설계해야 한다. 부모와 떨어져 살 생각을 해야 하고 어떤 연인을 만나 가정을 꾸려야 할지 등도 고민해야 한다. 김난도 교수는 이런 20대를 가리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까지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까지 20대의 청춘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도는 충분했을까. 또 여러 가지 노력이 있었다면 과연 효과적인 처방전이 됐을까. 신간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한홍구·홍세화·김규항·강신주·김현정·간호섭·오강남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는 대학 진학을 고민하는 청춘과 대학에 진학한 청춘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와 함께 제대로 된 청년 세대의 담론을 활성화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다. 서열화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청춘은 2등부터 누구나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과 시스템에 프로그램화된 채 자신과 사회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상태로 살고 있다.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화두와 함께 이 책은 프로그램화된 채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지 말고 하루 빨리 ‘나’라는 존재를 찾아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가 많은 까닭은 각 분야에서 청년들의 멘토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공부, 학벌, 정치, 외모, 성, 패션, 종교 등 7가지 주제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들의 지혜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인터뷰는 20대 청춘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학생 기자들이 맡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책에서는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것엔 비용을 치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한홍구), ‘학벌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형성의 자유에 대한 화두를 기억하라’(홍세화), ‘이젠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진짜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김규항), ‘외모와 패션에 있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라’(강신주, 간호섭) 등을 조언한다. 또한 서로가 만족하는 성을 위해 ‘섹스에도 대화가 필요하다’(김현정), ‘종교와 관련해서는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오강남)고 조언한다. 1만 3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러나, 그래도/한분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러나, 그래도/한분순

    그러나, 그래도/한분순 꽃시름 흐드러진 서울, 은유의 영지 매캐한 추파로 피멍든 태양 아래 야들한 봄바람에도 풀잎은 빛을 잃는다. 서울, 한밤 점멸하는 무지개 빌딩에 매달린 얼굴과 마주한다 그래도 살아지는가? 시간을 유배시킨 반칙의 그대. 하루 내 신 없는 만찬의 검은 휘장 카페인 마시는 동안 연소되는 목숨 한 모금 가슴을 덮는 그늘에 시드는 나를 빈다, 재생.
  • 삼성, 로스쿨 출신 일반직 대거 채용 왜?

    삼성그룹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대리급 일반 직원으로 채용한다. 법률적 지식을 일반 사무에 활용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포석이지만, 로스쿨 출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변호사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20일 삼성에 따르면 현재 삼성전자 등 그룹 내 10개 계열사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경력직 채용을 진행하고 있다. 올 2월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을 대상으로 27일까지 지원을 받는다. 채용인원은 40~50명 선이지만 지원자의 자질 등에 따라 100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그룹차원에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정식 직원으로 뽑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이한 점은 이번에 선발하는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에게 법무 관련 업무 대신 마케팅, 기획, 구매, 인사, 총무, 대외협력, 컨설팅, 기획조사, 외주관리 등 일반 업무를 맡길 것이라는 점이다. 일선 부서에 법무지식을 갖춘 변호사들이 배치되면 분쟁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효과가 클 것이라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삼성그룹은 이번 경력채용 합격자들을 대리급으로 대우하기로 했다. 과거 사법시험 합격자 출신의 30대 초반 변호사를 영입, 임원에 준하는 처우를 해주기로 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이번에 채용되는 직원들은 일반 대리들과 같은 급여를 받는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2012 베스트브랜드 대상] 남양유업 ‘프렌치카페카페믹스’

    [2012 베스트브랜드 대상] 남양유업 ‘프렌치카페카페믹스’

    남양유업은 2년여의 소비자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크림에 들어있는 합성첨가물원료인 카세인나트륨을 빼고 무지방 우유를 넣었다. 이렇게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프렌치카페카페믹스’의 돌풍은 거셌다. 선보인 지 6개월 만에 대형마트 판매 점유율 2위에 올랐고 올해 대형마트 판매 점유율에서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최근에는 원두커피믹스제품인 ‘루카’를 새롭게 출시하는 한편, 편의점 파우치 아이스커피 시장과 고급 컵 커피 시장에도 연이어 진출하고 있다. 남양유업은 1800억원을 들여 전남 나주시 금천면에 커피 전용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 [옴부즈맨 칼럼] 외교 현안 지나친 자국 중심적 보도/심영섭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옴부즈맨 칼럼] 외교 현안 지나친 자국 중심적 보도/심영섭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민족은 혈연관계와 언어·종교적으로 같은 기원을 갖고 있는 집단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대에 특정 지역을 연고로 형성된 문화적 연대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피부색과 유전인자를 가진 집단이 잦은 지역 이동과 결혼으로 사실상 지구상에 단일한 혈연집단은 없고, 언어적으로도 새로 유입되는 집단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다. 그래서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토이다. 영토는 특정지역에 모여 사는 집단의 배타적인 동질성의 기초이며, 국제분쟁에서 영토는 역사적 근거자료보다는 실효적 지배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민족에 대한 언론보도는 자연히 영토를 중심으로 자국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독도 보도가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8월 10일)과 일왕에 대한 사과 요구(8월 14일) 이후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변했다. 일본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제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지금은 정부차원의 대일외교는 물론, 한·일의원 간의 친선외교, 민간 차원의 교류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대통령이 일본총리와 만나 양국 간의 감정적인 대립을 피할 것을 제안한 것은 필요한 조치였다. 하지만 총선을 앞둔 일본은 내부사정이 매우 복잡한 듯하다. 차기총리 후보의 한 사람이 전범의 위패를 보관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독도 영유권을 총선공약으로 이용할 태세이다. 한·일 양국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외교경쟁과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신문은 연일 한·일 외교분쟁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보도의 대부분은 일본의 도발행위에 대한 내용이다. 거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일본의 뻔뻔한 주장도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일본 우익인사가 위안부 평화비 소녀상을 비롯해 여러 곳에 말뚝을 설치하고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가도 속수무책인 치안당국과 아무런 실효도 없는 전격적 독도 방문으로 한·일 갈등을 증폭시켰지만 문제해결을 위한 정부의 외교적 대응도 미숙해 보인다. 그러나 서울신문 어디에도 이러한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 간의 영토분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마치 한·중 간의 외교공조로 ‘공공의 적’을 이기길 바라는 듯하다. 그러나 일·중 갈등은 그들의 문제이고 한·일 갈등은 우리 문제일 뿐이다. 등거리외교는 정부가 할 일이지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중, 센카쿠 인근서 섬 탈환 훈련(8월 28일)’, ‘중, 국유화 맞불→ 무력대치 가능성(9월 13일)’과 같이 현재의 언론보도를 보면 ‘제2의 청일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보도는 좀 더 차분할 필요가 있고, 영토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한 국제사례를 소개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더 유익할 것이다. 영토분쟁이 결국 천연자원의 선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천연자원 북극탐사(9월 10일)에 대한 분석기사는 시의적절했다. 국제적으로 영토는 제한된 자원으로, 인류가 천연자원을 모두 사용하면 오염된 황무지만 남는다. 그래서 각국은 끝없는 새로운 자원지 확보 경쟁을 벌인다. 북극은 아직까지 개발하지 않은 자원지가 많은 보고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남극 개발과 북극 진출, 영토 수호가 어떠한 맥락에서 관련 있는지를 짚어 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외교 갈등이나 국제분쟁 보도는 자국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사회라는 상수원을 무시하고 우리의 우물물만 지킬 수는 없다. 때로는 왜 우물물이 맑지 못한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쓴소리는 듣기는 싫어도 미래를 위한 진보를 가져다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교갈등과 국제분쟁에 대한 서울신문의 보도가 좀 더 냉철해지고 비판적인 분석이 뒤따르길 기대한다.
  •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인도-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Ladakh)

    마지막 샹그릴라 라다크 Ladakh 신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절경을 한곳에 모두 모아놓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추위와 폭설, 분쟁 등의 이유로 긴 세월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고 지금도 일 년에 고작 3개월 정도만 여행자들의 자유로운 방황이 허락되는 곳.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는 수식어를 겸허히 인정하게 되는 그곳,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김수진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인도정부관광청 www.incredibleindia.co.kr 1 카르길-스리나가르 이동 구간에는 유목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드넓은 자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그들은 소박하지만 실로 위대하다 2 레-카르길 이동 구간에는 웅장한 사막, 협곡, 바위산의 절경이 이어진다 3 꼬마아이부터 10대, 80대까지, 라다크 여행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승려들을 만나게 된다 4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촉’이 무미건조한 라다크 지역에 화려한 색감을 더해 준다 5 라마유르 곰파 축제를 찾은 라다키 할머니들. 잠시 졸기도 하지만 정성을 다해 불교 의식을 참관하고 있다 인도지만 인도가 아닌, 라다크 뉴델리공항에 도착해 새벽녘 몇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낸 후, 인도 국내선을 타고 라다크로 향하는 길. 비행기 안에서 눈을 붙이고 피곤함을 달랠 계획이었다. 하지만 라다크의 레Leh 공항까지 창밖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풍경에 잠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 만년설로 뒤덮인 황홀한 산맥들이 손에 닿을 듯 발바닥을 간질이는가 하면, 벌거벗은 모래산, 바위산이 자신만만하게 요염한 자태를 드러낸다. 게다가 도무지 생명체라고는 존재할 수 없을 듯한 메마른 땅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미지의 초록세상. 이제껏 그 어느 비행기 안에서 봤던 영화보다 한층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거짓말 같은 풍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즈음, 산 위를 배회하던 비행기는 3,500m 높이의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진부하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인 듯하다)과 코를 감치고 드는 알싸한 바람이 반갑게 맞이한다. 인도어를 모르는 가이드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는 중국, 티베트,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여행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74년경에야 외부에 개방됐다. 그나마도 1년 중 라다크 여행이 가능한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 정도. 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인한 도로 통제 때문에 일반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길어야 고작 3~4달 정도가 전부다. 라다크는 인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하나, 단지 행정구역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라다크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인도와는 내적, 외적으로 참 다른 모습을 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라다크는 아주 오래 전에는 티베트의 일부였으며 10세기경에는 9백년 정도 독립된 왕국을 유지했다. 그러다 19세기 무렵 힌두 도그라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라다크는 인도 라다크라기보다 그냥 라다크다. 역사적이니 행정적이니 하는 복잡한 내용보다는 직접적으로 라다크의 상황을 깨닫게 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게 낫겠다. 우리 팀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라다키(라다크 사람)였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신나는 인도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하도 흥겨워서 “이거 무슨 내용이에요” 하고 물으니 “인도 가수가 인도어로 노래하는 거라 저도 모르겠어요” 한다. 공식적으로 인도에는 14개의 공용어가 있고 영어가 상용어이며 수백 개에 달하는 지역 언어가 있다. 인도어는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주에 속해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갔을 때도 라다크 사람인 가이드가 그들과 언어가 전혀 달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가이드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이방인인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인도 사람들끼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한국인이 그들의 소통을 도와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언어뿐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인도는 힌두교도가 80%가 넘고 이슬람교도가 13% 정도에 달하며 불교도는 1% 정도다. 최근에는 불교도가 기독교도보다도 숫자가 적어진 상황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는 다르다. 카르길Kargil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라다키들이 티베트 불교도이며, 곳곳에 ‘곰파’라고 불리는 불교사원이 가득하다. 1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의 손.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이어가는 라다키들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2 고지대에 위치한 곰파들은 하늘과 맞닿아 더욱 신성하게 느껴진다 3 곰파를 방문하면 마니차(겉에는 만트라가, 안에는 경문이 들어 있는 통으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를 돌리는 경험은 필수. 꼭 곰파만이 아니라 라다크 곳곳에서 마니차를 만나게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라다크의 ‘조용한 곳’ 곰파에 가다 라다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곰파를 둘러보는 것. 해발 약 3,500m 높이에 위치한 레는 라다크의 수도로 예전에는 히말라야 설산을 지나는 대상들이 머물렀던 실크로드 요충지이자 인도에서 불교가 전파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시대 혜초 스님과 <대당서역기>를 남긴 중국 당나라 현장 스님 역시 인도로 가던 길에 이 지역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반증하듯 라다크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곰파가 많다. 그래서 라다크에서 곰파 탐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여행 코스.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이 지역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스폿들이기 때문이다. 곰파는 티베트어로 ‘조용한 곳’을 뜻하는데, 그에 걸맞게 다소 외떨어진 산 위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라다크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헤미스 곰파Hemis Gompa에 이르는 길 역시 만만치 않다. 헤미스 곰파는 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멀리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거의 입구까지 가야지만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사원으로의 접근이 어려울수록 참된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다. 헤미스 곰파는 1630년 남걀 왕조 때 건립됐으며 매년 6월 열리는 ‘헤미스 축제’가 유명하다. 특히 12년에 한 번씩 원숭이 해마다 특별한 ‘탕카(티베트 탱화)’가 공개되는데, 이때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레에서 남쪽으로 17km 떨어진 틱세 곰파Tiksey Gompa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엽서 같은 풍경이 멀리서 봐도 눈에 띈다. 라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파로 손꼽히는데,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그리스 산토리니 같은 분위기도 얼핏 풍긴다. 언덕에 펼쳐진 곰파 자체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내다보는 전망 또한 기가 막히다. 잠시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히말라야 산맥의 운치를 즐겨 봐도 좋다. 라다크에서 가장 큰 20m 높이의 미륵불이 모셔진 전각도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곰파 중에 드물게 평지에 위치한 알치 곰파Alchi Gompa도 인상적이다.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곰파 중 하나로 카슈미르 양식이 티베트 양식과 결합된 유일한 사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독특한 건축 양식은 물론, 내부의 프레스코화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내부는 어둡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벽화와 불상들은 입장객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특히 독특한 3층 건물로 이뤄진 숨첵Sumtsek 전은 꼭 들러 보자. 관세음보살상과 1,000여 개에 달하는 소형 좌불상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스리나가르 고속도로 인근에 위치한 라마유루 곰파Lamayuru Gompa를 찾았을 때는 운이 좋게도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라마유루 승려들이 모두 모여 가면춤을 추는 축제로 어떻게 알고들 모였는지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부터, 동네 꼬맹이들과 할머니들까지,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건하고도 흥겨운 축제 한판이 벌어진다. 승무복의 화려한 빛깔은 색이 바랬어도 공들인 손짓 몸짓 하나하나는 눈부시기 그지없다. 하늘과 가까워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 아래서, 그들의 정성 어린 춤사위를 바라보면서 라다키들에게 종교와 곰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에 만나는 그림은 또 다르다. 이제껏 라다크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푸르른 초원이 등장하며 곳곳에는 꽃까지 피어 있고 멀리로는 만년설의 모자를 쓴 산들이 덤덤하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라다크로 가는 3개의 관문 곰파 여행과 함께 라다크 여행의 핵심은 레-스리나가르Srinagar 이동 구간이다. 라다크 여행은 주로 스리나가르나 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육로가 아닌 항공으로 라다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스리나가르 공항이나 레 공항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라다크가 속해 있는 잠무카슈미르 주의 주도이며, 레는 라다크의 수도이다. 잠무카슈미르 주는 라다크 지역, 잠무 지역, 카슈미르 지역으로 이뤄지는데, 3개 지역 모두 문화와 언어, 생활방식이 다르다. 레와 스리나가르만 방문하더라도 그 차이는 확연하다. 고산지대에 형성된 레는 라다크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돌로 지어진 9층짜리 레 왕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박한 시내에는 작은 상점들과 시장이 들어서 있다. 시장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잊게 해주는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가득하고 불교 관련 용품과 히말라야 지역의 특산품들이 많이 보인다. 또한 티베트 망명자 시장과 네팔 시장 등 소규모 특색 있는 시장들은 라다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황량하고 험준한 땅에 삶의 터전을 꾸려낸 이들이라 그런지 레에서 만나는 라다키들은 당차고도 위대해 보인다. 레와 스리나가르를 잇는 도로는 총 434km 정도로 오가는 데 이틀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레에서 출발하든 스리나가르에서 출발하든 보통 하룻밤은 카르길Kargil 마을에서 묵게 된다. 카르길은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라다크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구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시간이 된다면 카르길 시장에 가보길 권한다. 레의 시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승복을 입은 라마승이나 라다크 전통 복장을 한 여성들 대신 히잡을 쓴 여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곰파와 타르촉(불교 경전 등을 적어 놓은 갖가지 색의 깃발), 라마승들이 가득하던 라다크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한편, 카슈미르 지역 해발고도 1,585m에 위치한 스리나가르는 풍경, 언어, 풍습, 종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라다크와 완전히 다르다. 고도가 레와는 약 2,000m 정도 차이가 나니 풍경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도로 티베트 불교문화가 전반에 깔려 있는 레와는 생활 문화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라다크가 회색빛 천지라면 스리나가르는 초록이 반기는 곳이다. 어둠이 깔릴 무렵 스리나가르에 도착했을 때, 달 호수Dal Lake는 풍선을 든 아이들, 노천카페, 야시장 등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막 라다크를 떠나온 사람이라면 물이 풍성한 호수의 풍경도, 여름밤 호수 주변으로 펼쳐지는 유원지 같은 풍경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고산병 방지를 위한 고도 적응 측면으로 본다면 스리나가르로 들어가 레로 이동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으나 기후, 문화 적응 측면에서 본다면 레로 들어가 스리나가르를 거쳐 델리로 가는 게 나을 듯하다. 레에서 바로 델리나 서울로 간다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몸은 힘들고, 번잡한 도시 풍경에 마음은 답답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는 레보다는 덥고 델리나 서울보다 시원한 기후에, 레보다는 번잡하지만 델리나 서울보다는 한가로와 어찌 보면 도시인의 라다크 여행에 완충지 같은 역할을 해준다. 1 스리나가르는 라다크와 인접해 있지만 종교도 사는 모습도 아주 다르다. 라다크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인상적이다. 이른 아침, 노를 저어 어디론가 향하는 여자들의 자태가 한 폭의 그림 같다 2 달 호수에서 노를 저어 가는 노인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3 카르길 시장의 이발소 풍경 4 시장의 과일 가게. 푸근한 주인아저씨의 미소가 넉넉하다 ▶travie info 스리나가르 여행의 백미, 하우스보트와 시카라 스리나가르에는 달 호수 등 3개의 유명한 호수가 있어, 물 위에서 즐길거리 또한 다양하다. 그중 하우스보트 체험은 꼭 한번 해봐야 한다. 하우스보트는 이름처럼 배를 집으로 사용하는 공간. 과거 식민지 시대에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물 위에서 배를 집 삼아 살았던 것인데, 지금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많다. 일반 호텔처럼 모던하고 깔끔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고택에 머무는 기분을 낼 수 있다. 물 위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갖가지 보트 상점들을 만나게 된다. 음료수와 과자 등을 실은 매점 같은 작은 배부터, 기념품, 꽃 등을 파는 배들이 오가는 풍경이 정겹기 그지없다. 또, ‘시카라’라고 불리는 작지만 화려한 배를 타고 달 호수를 떠다니는 경험도 멋지다. 1 높은 낭떠러지 길을 지나는 양떼들.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데 양들은 의외로 여유로워 보인다. 양치기 아저씨에 업혀 가는 녀석은 말썽을 핀 걸까, 아픈 걸까? 2 카르길-스리나가르 구간에서는 양떼, 산양떼, 말떼 등 다양한 가축들의 이동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3 도로 양 옆으로 높이 쌓여 있는 만년설이 위용을 뽐낸다 길에서 만나는 최고의 여행 Every Moment, Best Memory 세계적인 명산인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을 끼고 위치한 라다크는 어찌 보면 여행 목적지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고로 목적지를 향한 이동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다. 어디를 향해 가든 여정의 모든 순간이 최고의 여행이 된다. 장시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나도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에서 레로 여행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는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이동했다. 하루는 레에서 카르길까지 234km를, 또 하루는 카르길에서 스리나가르까지 204km를 이동했다. 이따금씩 쭉 뻗은 도로를 달리기도 했으나 주로 좁고 험한 길을 내처 달렸다. 울퉁불퉁, 덜컹덜컹, 꼬불꼬불, 아슬아슬 달리는 길, 어질어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고지대에서 일어나는 고산병이나 아찔한 질주로 인한 불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지칠 줄 모르고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는 절경이 어지럼증을 배가시킨다. 레에서 카르길로 향하는 첫째 날, 고산지대 사막과 오아시스, 바위산, 협곡 등 거칠고도 웅장한 풍경이 이어졌다. 어느 하나 놓치기 아쉽지만, 특히 포투 라Fotu La(스리나가르-레 고속도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산길로 해발 4,108m)와 나미카 라Namika La(해발 3,700m 높이의 산길)에서는 반드시 차를 세우고 대자연과 교감해야 한다. 그곳에 서면 누구나 마음 속 잡념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자연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튿날, 가르길에서 스리나가르로 향했다. 초원을 지나 얼마를 달리다 보면 거짓말처럼 빙하가 코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추운 지역, 드라스Drass’라는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길의 클라이맥스는 조지 라Zoji La. 산을 따라 꼬불꼬불 나 있는 이 도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산길이 해발 약 3,528m까지 이어진다. 차창으로 아래를 쳐다보면 끝없는 낭떠러지다. 물론, 안전 펜스 같은 것도 없다. 육로로 스리나가르와 레를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설사 다른 길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여행자들이 이 길을 택할 만큼 이 길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길 위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웅장한 자태와 멀리서 바라보는 조지 라 패스, 그 길의 신비로운 그림은 일생에 한번 마주할까말까 한 위대한 순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 마음은 수백 번 요동쳤다. ‘바그다드 카페’가 홀홀히 나타날 듯한 풍요롭고(사막은 보통 황량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라다크의 사막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단단한 사막을 만나는 순간, 철퍼덕 주저앉아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곡인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콜링 유Calling You’를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봤음 직한 층층이 쌓인 단층과 위용 있는 바위산과 절벽을 불쑥 마주했을 때는 그대로 그 자리에 몇 시간이고 서서 마냥 바라보고 싶었으며, 설산을 배경으로 꽃향기 가득한 푸른 초원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마구 들판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어디 그뿐이랴. 산악빙하를 만지는 순간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버릴 정도로 감동에 벅찼다. 사막, 바위산, 협곡, 초원, 빙하를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접하면서, 눈에 와 닿는 시각적인 풍경에 더해,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 경이로운 질감 때문에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1 카르길 마을에서 만난 행복한 여인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머리에 인 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맨발의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 2 카르길 시장 치킨집 앞에서 만난 그녀는 델리대학교에 재학 중이란다. ‘이 집 닭이 정말 맛있다’며 꼭 먹어 보라고 추천한다 3 라다크에서 차들은 모두 과격하게 달린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해맑은 표정의 순수한 사람들 4 라다크로 가족여행 온 시크교 아이들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아찔할 정도로 찬란한 풍광만으로도 감흥은 충분했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여행의 순간을 감동으로 만들었다.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슴에 계속 새겼던 말은 ‘동정금물’. 현대문명사회의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행복을 감히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질 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나 자신이 물질이라는 잣대로 그들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실수를 범할까 두려웠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덜 가졌다고 해서, 덜 행복하다 그 누가 얘기할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곳 중에 세계에서 시베리아 툰드라 다음으로 춥다는 라다크 지역에서 유목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을 때, 가슴이 울컥했다. 그들은 안락한 보호막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강인하고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초원을 배경으로 한 유목민들의 삶의 모습은 이방인의 ‘철없는’ 시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론 초원을 벗어나자마자 찾아오는 빙하 지역의 풍경은 그들의 혹독한 겨울을 상기시켜 주었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혹독한 겨울을 반증하듯 볼이 발그스레하게 튼 꼬맹이 승려부터 연륜이 느껴지는 노승까지…. 자줏빛의 승복 하나로 고귀해 보이던 라마승들.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던 라다키들의 순순한 눈망울. 라다키 전통 복장을 입고 총총히 걸어가던 할머니들. 카르길에서 아기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맨발로 지나던 한 무리의 여성들. 그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보기엔 물질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척박하고 혹독한 터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모두들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라다크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 서울 거리의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들. 그 순간, 라다크를 세계에 남은 ‘마지막 샹그릴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travie info 라다크 스타일 운전에 익숙해지기 경적을 울려주세요! 처음 라다크에서 차를 타면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트럭이나 버스의 후면에는 ‘Horn Please’, ‘Horn OK Please’, ‘Blow Horn’ 등의 글자가 붙어 있다. ‘please’라는 단어까지 붙여 가며 경적을 울려 달라고 하는 이유는 좁은 길 때문에 아예 왼쪽 사이드미러를 닫고 다니는 차들을 많기 때문이다. 연신 이어지는 경적소리와 추월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다니면서 사고가 발생하거나 시비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Speed thrills but kills 라다크 산길을 달리다 보면 기발한 교통 표지판이 눈에 띈다. ‘스피드는 짜릿하지만, 목숨을 앗아갑니다Speed thrills but kills.’, ‘인생은 짧습니다. 워낙에도 짧은 인생을 더 짧게 만들지 마세요Life is short. Don’t make it shorter.’,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하지만 당신의 목숨은 단 하나A cat has nine lives. But you have one only.’, ‘서두르지 않으면 걱정도 없습니다.No hurry, no worry.’ 등 재치 넘치는 문구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다크 가는 길에 델리 서울에서 라다크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델리Delhi에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인도를 바라보다 인디아 게이트 뉴델리의 중심도로인 라즈파트Raj Path를 따라 한쪽으로는 대통령관저가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 전쟁기념물인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가 자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인도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로,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9만명에 달하는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아픔과 환희를 품고 있는 곳 붉은성 붉은 사암으로 지은 높은 벽 때문에 ‘붉은 성Red Fort’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무굴 제국의 샤 자한 황제가 아그라 성에서의 천도를 목적으로 공들여 지었던 건축물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치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군에 의해 크게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초대 총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곳도 여기다. 시장과 어우러지는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 델리 최대의 이슬람 사원. 사원 주변으로 ‘찬드니 초크Chandni Chowk’라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돼 있는데, 번잡한 시장과 성스러운 모스크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건축 형태로,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역사 꾸뜹 미나르 델리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높이 5층 규모(72.5m)의 웅장한 탑이다. 인도 최초 이슬람 왕조의 술탄이었던 꾸뜹우드딘 에이백이 세운 승전탑이라 꾸뜹 미나르Qutb Minar(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의미 있는 유적지. 승전탑 외에도 모스크 등 여러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흔적만 남았다. 흔적만 남은 유적군을 돌아보더라도 이슬람 왕조의 번성기를 상상할 수 있다. 원래는 탑 꼭대기 전망대까지 입장이 가능했으나 1970년대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내부 관람은 금지된 상태다. 델리에서 만나는 타지마할 후마윤 무덤 후마윤 무덤을 보면 누구나 타지마할을 떠올린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제로 타지마할은 후마윤 무덤Humayun’s Tomb을 모델로 지은 건축물이다. 무굴 제국 왕비 하지 베굼이 남편이자 2대 황제였던 후마윤을 기리기 위해 건설한 묘 건축물로, 페르시아 양식이 곁들여진 무굴 제국 건축물의 초기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된 건물에 흰색 대리석 돔이 어우러진 풍경이 세련미가 넘친다. 건물 안에는 후마윤 무덤 외 150여 명의 무덤이 함께 안치돼 있다. 델리 시민들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정원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건물 안은 대리석으로 된 묘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경건하면서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인도 라다크 여행자를 위한 ★★★★★ Travie writer 김수진의 ‘주관적인’ 여행 정보 Ladakh 1 레의 따뜻한 인심이 느껴지는 휴식처 라피카 호텔Hotel Rafica ★★★☆ 단아하고 정겨운 표정이 레와 잘 어울린다. 작은 정원까지 있어 마치 집 같은 느낌이다. 사장을 비롯해 직원들도 친절하고 정감 있다. 여행 중 궁금하거나 필요한 사항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면 정성껏 응대해 준다. 틀에 박힌 도시 호텔의 서비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이 넘쳐난다. 레의 주요 시장 거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여서, 걸어서 시내를 둘러보기도 좋다. 주소 Fort Road Leh-Ladakh 문의 +91 1982 252258 www.hotelraficaluh.com Ladakh 2 소박한 식당, 화려한 전망 니란자나 호텔 레스토랑Hotel Niranjana Restaurant ★★★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 이름은 호텔이지만 게스트하우스 같은 느낌이다. 간소한 스타일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 라마유르 곰파를 방문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인도 음식과 티베트 음식 등을 판매하며, 점심은 뷔페식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소박한 가게지만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예술이다. 위치 라마유르 곰파 바로 옆 문의 +91 1982 224555 가격대 1인 기준, Rs.70 정도 Delhi 럭셔리한 궁전에서의 하룻밤 릴라 호텔The Leela Palace New Delhi ★★★★ 40도를 넘는 델리의 한여름 폭염을 피해 릴라 팰리스 호텔에 들어서자 딴 세상이 펼쳐진다. 폭염을 잊게 해주는 시원한 환경과 델리 도심의 소음을 잊게 해주는 고즈넉한 분위기. 인테리어에서 인도 정통 양식을 살린 품격 있는 모던함이 묻어난다. 고급스럽고도 시크한 레스토랑과 바도 유명하다. 인도풍 정원과 전망 좋은 야외 인피니티 풀은 보너스. 주소 Chanakyapuri, Diplomatic Enclave New Delhi 문의 +91 (11) 3933 1234 www.theleela.com Srinagar 호수 위에 떠 있는 특별한 호텔 빌루 하우스보트Habib-Ullah Billoo & Sons ★★★☆ 스리나가르 달 호수에는 꽤나 많은 하우스보트들이 모여 있는데, 여러 업체들이 운영하고 있어 저마다 이름도 다르고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다. 이곳은 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하우스보트로, 내부에서 그 역사를 느껴 볼 수 있다. 달 호수 선착장에서 시카라를 타고 들어가게 되며 보트 안에서 아침,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보트 안에 주방이 따로 마련돼 있어 직원이 즉석에서 식사를 만들어 내놓는다. 하우스보트 특성상 습하고 다소 꿉꿉한 느낌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이므로 놓치지 말자. 주소 Nehru Park, Dal Lake, Srinagar 문의 +91 9858070475 라다크 가는 길 라다크로 들어가는 방법은 항공과 육로 중 선택해야 한다. 델리에서 레로 가는 항공편은 매일 이용이 가능하며 에어인디아, 제트에어웨이즈, 킹피셔에어라인이 운항된다. 스리나가르-레 항공편도 일주일에 1~2회 운항 중이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마날리로 들어가 버스나 지프로 레까지 이동한다. 단,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버스는 6월에서 9월 정도까지만 운행되는데 그나마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전에 확인하고 이용해야 한다. 24시간 정도 소요. 고산병 라다크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여행 전 고산병에 대비해야 한다. 항공편으로 레에 도착하면 첫날은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면서 고도에 적응하는 것이 좋다. 여행시에도 뛰거나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는 행동은 금물. 항상 여유를 갖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고산병 예방약이나 1회용 산소를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주의사항 라다크는 오지이기 때문에 전기, 수도 사정이 좋지 않다. 호텔에서도 가끔 정전이 되거나 수압이 약할 때가 있다. 인도 정부 관광청 Indiatourism 주소 Tokyo Isei Building,7~8Fl.1-8-17,Ginza,Chuo-ku,Tokyo,Japan 문의 +81-3-3561-0651/52 www.incredibleindia.org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보시라이 떨어뜨린 왕리쥔 반역도주 등 혐의 재판 시작

    미국 총영사관 진입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통해 최고 지도부 물망에 오르내리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 일가를 일거에 몰락시킨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의 재판이 17일 시작됐다. AP통신은 쓰촨성 청두(成都)시 중급인민법원이 이날 오전 비공개로 왕 전 국장에 대한 공판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왕 전 국장의 변호인 왕윈차이는 이날 공판이 국가 기밀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비공개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검찰은 지난 5일 왕 전 국장을 기소하면서 반역도주, 직권남용, 수뢰 등의 죄목을 적용했다. 충칭시 공안국장 신분으로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살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은폐했고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해 청두시의 미국 총영사관으로 도주했다는 것이 왕 전 국장의 주요 혐의다. 왕 전 국장은 또한 공안국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면서 불법적으로 수사 기구를 활용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챙긴 혐의도 받고 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보수·중도·진보 14개 싱크탱크 결집… 각 캠프에 ‘정책 훈수’

    보수·중도·진보 14개 싱크탱크 결집… 각 캠프에 ‘정책 훈수’

    정치권에서 대표적인 ‘선거전략가’로 꼽히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 노무현 정부의 정책좌장으로 불리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손을 잡았다. 이들은 진보·중도·보수를 아우르는 14개 민간 싱크탱크 전략가들과 함께 대선 정책을 발굴, 11월 6~7일 국회에서 정책 설명회인 ‘2012 대한민국 정책컨벤션’을 열고 이틀간의 토론을 통해 나온 제반 정책을 토대로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각 정당과 대선 캠프에 제안할 계획이다. 정치 중앙무대에서 한발 비켜 서 있던 전략통과 정책통들이 대선을 앞두고 목소리를 낼 공간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다. 윤 전 장관은 한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제갈량’ 역할을 했고, 김병준 전 실장은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의 싱크탱크인 ‘무지개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현재 지원할 후보가 없어진 이들이 민간 싱크탱크들과 손잡고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모색할지 주목된다. 정책컨벤션 조직위원회에는 두 사람 말고도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윤종남 거버넌스21클럽 공동대표 등이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책컨벤션을 준비하고 있는 14개 민간 싱크탱크의 면면도 다양하다. 중도보수 신당 ‘국민생각’을 창당했던 박세일 전 대표의 한반도선진화 재단,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이끄는 자유경제원,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희망제작소가 대표적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싱크탱크들은 각각 정책을 만들어 정책컨벤션이 끝난 뒤 이를 정책 백서 형식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보수는 진보의 정책을, 진보는 보수의 정책을 참고하고 상호 검증하며 경쟁할 수 있도록 정책 백화점을 만든다는 것이다. 거버넌스 21클럽 상임이사인 이형용 집행위원장은 “이번 대선에서도 정책 중심으로 가지 않는다면 누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고민이 있었다.”면서 “정책이 논의되는 판을 형성하기 위해 정책컨벤션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책컨벤션이 끝난 뒤 보수·중도·진보 성향의 참여 인사들이 중도 성향인 안 원장의 외곽 전략가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정책컨벤션 조직위원회 측은 “특정 후보의 정책 지원을 목표로 한 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정책컨벤션은 지난해 11월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와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 등이 참여한 토론회에서 처음 제안됐다.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지난 3월이며, 지난달 30일 조직위원회 형태로 전환됐다. 이현정기자 hjlee@seoul.co.kr
  • [기고] 정년 후 재고용에 대한 마음가짐/심경우 중앙노동위원회 사무처장

    [기고] 정년 후 재고용에 대한 마음가짐/심경우 중앙노동위원회 사무처장

    최근 우리 사회에는 청년 일자리와 함께 장년세대의 일자리 보장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경쟁 심화와 기술발전으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어느 계층이건 일자리를 얻고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부당해고나 비정규직 차별시정 등을 주업무로 담당하는 노동위원회에서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면서 산업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있다. 판례와 관련 사례가 축적돼 있는 징계나 정리해고 사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7년 이후에는 새로운 유형의 부당해고나 차별 사건들이 생겨나고 있다. 특히 정년을 전후한 장년 근로자들의 일자리 문제, 그중에서도 장년 근로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업장에서 나타나는 혼선과 갈등으로 인해 접수되는 사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사례를 보면 먼저, 노동조합이 회사와 합의해 퇴직자를 계약직으로 재고용했지만 이들 근로자가 정규직에 비해 임금과 근로조건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물론 노조 위원장이 재고용을 위한 노조의 노력을 설명하면서 해당 근로자들을 설득하는 모습도 있었다. 또 공기업에서 정년을 마친 뒤 단순노무 업무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장년 근로자가 회사 내 갈등으로 인해 해고된 일도 있다. 관리직으로 일했던 근로자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사의 지시에 불응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무수행에 대한 회사의 평가와 이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지 못하는 근로자도 있었다. 새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으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받게 된 데 대한 상실감을 명예훼손으로 생각하는 장년 근로자의 케이스다. 정년 후 재고용 근로자들이 제기하는 해고나 차별 문제를 접하면서 작금의 고용불안 시대에 장년근로자들이 보다 명예롭고 오래 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선 장년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있고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일 자체에서 보람을 찾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껏 경제적 이유에 중점을 두었다면, 정년 후에는 일 자체를 중시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합리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부당한 처우가 있을 때에는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겠지만, 충분한 보수를 받던 안정된 시절과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일해야 할 상황이라면 다소 불만족스럽더라도 상하 직원 및 동료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거의 직위와 신분을 벗어나 새 회사와 조화를 이루려는 자세이다. 탈권위주의와 수평화로 특징지워지는 지금의 사회에서 의사소통과 화합은 어느 근로자에게도 필요한 소양이라고 할 것이다. 일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과거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자세 등이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 나간다면 새로 맡은 일의 성과도 높이고 일자리를 더 오래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년 후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에서도 사려 깊은 배려가 요구된다. 가능한 한 근로자의 경험과 능력에 적합한 업무를 부여하고,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여 나갈 필요가 있다. 업무지시와 협의 시에도 인격적인 고려를 하고, 상하동료 직원 간 소통에도 회사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취업자의 곤궁을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해서는 안되며, 관련 법령에서 인정되는 합리적인 차이 이외에 어떠한 차별적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정년 후 재취업 근로자에 대한 부당처우, 차별 사례들은 증가할 전망이다. 그러나 노사가 그간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책임 있게 대처해 나간다면 회사와 근로자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정년 후 재취업 성공사례들이 많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장년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속 성장을 위한 중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노와 사 모두의 올바른 인식과 대응이 절실하다.
  • 경찰 등 노인 인권교육 18일 동대문구청 강당

    서울 동대문구는 18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구청 2층 다목적강당에서 노인복지관련 공무원, 경찰관 및 복지시설 종사자 등 250명을 대상으로 ‘2012년도 노인인권보호를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매년 늘어나는 노인학대행위 예방과 노인 보호를 위해 ‘노인인권 향상과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실천방안’을 주제로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한국노인인권센터 김대심 실장의 강연으로 이뤄진다. 이번 교육은 특히 딱딱하고 지루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인형극도 공연한다.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소속 어르신 11명으로 구성된 무지개인형극단은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황혼의 언덕’이라는 인형극을 통해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을 높인다. 유덕열 구청장은 “동대문구는 노인인권을 위해 별도의 예산을 편성하는 등 어르신들의 인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어르신들이 안전한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31兆 용산개발 또 표류

    단군 이래 최대 사업(31조원)으로 불리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1·2대 주주 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표류하고 있다. 토지주인 코레일이 사업을 이끌고 있는 롯데관광개발에 2010년 약정에 따라 지분을 모두 내놓고 사업경영에서 사실상 손을 떼라고 통보했고, 롯데관광개발은 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용산역세권 개발 출자사 모임이자 시행사인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PFV·드림허브)에 따르면 코레일 측 이사진 3명은 17일 이사회를 열어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정상화를 위한 구조개편안’을 논의하겠다며 30여 개 전 출자사에 소집을 통보했다. 코레일은 이사회에서 롯데관광개발이 2010년 삼성물산으로부터 인수한 용산역세권개발(용산AMC) 지분 45.1%를 다시 넘겨받을 계획이다. 현재 시행사인 드림허브는 코레일이 25%로 1대 주주, 롯데관광개발이 15.1%로 2대 주주로 있으며, 드림허브가 설립한 용산AMC는 롯데관광개발이 70.1%를, 코레일이 나머지 29.9%를 소유하고 있다. 당초 지분이 25%에 불과했던 롯데관광개발은 2010년 10월 삼성물산이 내놓은 지분 45.1%를 인수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업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다. 당시 코레일과 롯데관광개발은 ‘자산관리위탁지분 관련 합의서’에서 ‘향후 제3의 투자자(외부투자자)가 선정될 때까지 대상주식(삼성물산이 내놓은 주식)의 소유권을(롯데관광개발이) 잠정적으로 취득한다.’는 내용에 다른 주주 몰래 합의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롯데관광개발이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증자에 반대하는 등 대주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는 만큼 합의서에 따라 믿을 만한 기업이 나올 때까지 주식을 환수해 한시적으로 AMC 경영을 주도하겠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롯데관광개발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17일 이사회에서도 격론이 예상된다. 이에 따라 5년여 동안 개발을 기다려온 서부이촌동 등 지역주민의 어려움만 가중될 전망이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약발 안 듣는 ‘稅감면’… 수도권 매매가 0.01%↓

    약발 안 듣는 ‘稅감면’… 수도권 매매가 0.01%↓

    정부가 취득세 50% 감면을 골자로 하는 9·10대책을 내놨지만 아직 시장은 반응을 하고 있지 않는 모습이다. 부동산 경기가 장기 침체인 상황에서 취득세 몇백만원을 깎아 준다고 거래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이다. 지난주 서울의 아파트값은 약보합세를 보였다. 하지만 신도시와 수도권은 0.01%씩 하락했다. 송파구의 재건축 단지는 지난주에도 하락세가 계속됐다. 가락동 가락시영2차 55㎡는 전주보다 250만원 내린 6억 850만~6억 2250만원에 매물이 나와 있다. 잠실동 리센츠 109㎡는 1500만원 하락한 8억 6500만~9억 8000만원을 기록했다. 서초구도 매수세가 전혀 없었다. 반포동 주공1단지 105㎡는 2500만원 내린 15억 1000만~16억 9000만원에 매물이 나왔지만 매수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원동 한신8차 155㎡도 12억~15억원으로 2000만원이나 가격이 떨어졌다. 성북구 종암동 삼성래미안 101㎡는 500만원 내린 3억 6500만~4억 1000만원선에 가격이 형성됐다. 전세는 조금씩 오르는 추세다. 부동산 업계에선 거래도 차츰 늘고 있다고 말한다. 송파구 송파동 래미안 송파 파인탑 111㎡는 1000만원 오른 4억 6000만~5억 4000만원에 전세가격이 형성됐다. 잠실동 리센츠 79㎡도 1000만원 오른 4억~4억 3000만원에 전셋집을 찾을 수 있다. 구로구와 금천구는 전세 물건이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구로동 태영타운 126㎡는 1500만원 오른 3억 3000만~3억 5000만원선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금천구 시흥동 무지개 93㎡는 500만원 올라 1억 2500만~1억 4000만원이면 전세를 얻을 수 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시론] 전기요금체계 개편이 절실하다/김용권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시론] 전기요금체계 개편이 절실하다/김용권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2011년 9월 대규모 정전 위기를 겪으면서 전력에 관한 국민의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 전기를 값싸게 쓰는 것도 좋지만 안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전기요금을 적절히 올려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전기요금 체계는 전반적으로 이상하다. 가정용 요금이 산업용보다 비싼 꼴이고, 또 살인적인 누진제를 가정용에 부과하고 있다. 가정에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죄악시되고 있다.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전기·전자업체들이 삼성에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일본에 비해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 산업용 전기가 싸도 너무 싸다는 얘기이다. 한국전력은 가정용 요금 체계를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6단계인 누진 단계를 3단계로 줄이고 최대 11배에 이르는 누진율을 3배 정도로 줄여서 다른 나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행 시기가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우리 전력 소비 행태도 특이해서 난방으로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소비전력 피크를 걱정할 정도인데, 누진제 개편 시행시기는 아직 언제인지 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시쳇말로 ‘3대 거짓말’이 있다. 노처녀가 결혼 안 하겠다, 노인이 죽어야겠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를 ‘3대 참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통계를 보면 정말로 결혼을 안 하겠다는 노처녀들이 꽤 되는 것 같고, 자살하는 노인도 상당수 된다고 한다. 한전도 전기를 밑지고 팔고 있으니 3대 거짓말이 이제는 모두 참말이라고 해야 하겠다. 전기를 100원에 사서 90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고 있다는 게 한전의 주장이고, 실제 그렇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요금체계인데, 한전 마음대로 요금을 올려 받지도 못하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이 산업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에너지 복지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론에 밀려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저가의 전기요금은 에너지 사용을 왜곡시키고 있다.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공정한 평가와 보수체계가 있어야 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잘 교육하려면 공정한 시험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간 경유, 등유, 도시가스 등 전기를 제외한 다른 에너지 가격이 2.5배 또는 1.7배 정도 올랐는데 전기요금은 1.2배 정도 오르는 데 그쳤다. 이러니 겨울에 난방을 할 때 기름보다 더 귀중한 전기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용하기도 편하고 가격도 저렴하니 당연한 얘기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차원에 보면 영 이상한 얘기이다. 석탄이나 기름을 사용하여 비싸게 생산한 전기를 늘 유지·관리해야 하는 송·배전 시설을 이용, 수송해서 이를 난방에 사용하고 있다. 벤츠를 타고 우유 배달하는 꼴이고, 몸에 좋은 약수로 빨래하는 꼴이다. 저가의 전기요금 체계는 우리나라 전기산업 진흥에도 방해가 되고 있다. 전기산업계에서 에너지를 절약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전기 절약 제품이 잘 팔리는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전기요금이 싼데 굳이 에너지를 절감하는 전기제품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초기 구입비용이 싸지 않으면 굳이 전기를 아끼는 제품을 비교해서 살 이유가 없다. 이것은 가솔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나니 소비자가 자동차 연비를 따지기 시작했고, 연비가 좋은 차나 하이브리드카 등을 구입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재는 저가의 전기요금, 가정용 전기의 과다한 누진제 및 상대적으로 저렴한 산업용 전기요금제 때문에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소비자가 이득을 보고 일반 가정이 징벌적인 누진 전기요금을 내고 있다. 전기를 사용하는 소비자가 적절한 가격을 지불하는 제도가 시급하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8)광주 북구 민주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8)광주 북구 민주로

    그날 이후 광주(光州)는 울분과 참담함의 도시였다. 대인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광장 앞에 틀어놓은 치직거리는 흑백 TV 비디오 화면 앞에 모여든 누군가는 “오메, 저거를 어째야스까잉~.”하며 혀를 끌끌 찼고, 누군가는 그 끔찍한 광경에 눈시울을 찍어 내며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도,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몸서리쳤다. 대학생 형이나 삼촌이 있는, 일찌감치 머리가 굵은 중·고등학생들은 모여서 그 비디오테이프를 쉬쉬하며 봤고, 불끈거리는 가슴 속 혈기를 어쩌지 못해 종주먹만 연신 휘둘렀다. 그날 이후에도 광주는 평온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통곡조차 허락되지 않아 숨죽여 흐느꼈고, 술로 푸념하는 방향 없는 증오가 충장로 밤거리에서 흔들거렸고, 휴가 나온 얼룩덜룩 군복의 군인은 봉변당할까 무서워 얼른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학살은 끝났고, 광주는 평온해 보였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해마다 5월이면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지나다녔던 질척질척했던 길은 번듯한 4차선 도로가 됐고, 볼품없는 풀두덩에 비석 하나씩 서 있던 망월동 묘지는 웅장한 국립묘지가 됐다. 희미해진 기억은 다시 복원된다. 2012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이하 5·18민주묘지) 앞길 민주로를 찾았다. 길 위에서는 더 이상 그날 이후의 울분과 참담함을 찾기 어려웠다. 광주에서 담양군으로 넘어가는 동문대로를 시·군 경계선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민주로다. 4.7㎞ 길이의 길에 도로명주소는 1~459번까지 붙여졌다. 5·18민주묘지는 ‘민주로 200’이니 중간 약간 못 미친 곳 오른편에 있는 셈이다. 민주로에서 5·18민주묘지 앞으로 518번 버스가 지나갔다. 의미심장하다. 광주 도심과 시 외곽인 망월동, 운정동 등을 잇는 시내버스다. 노선번호가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런데 단순히 번호만 그렇게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노선표를 죽 살펴보니 상무지구 5·18자유공원에서 시작해 5·18기념문화센터를 지나 금남로를 따라 옛 전남도청~옛 상무관-~대인시장~전남대 정문 등 1980년 5월 그날 광주의 흔적을 샅샅이 더듬어 보도록 설계됐음을 눈치챌 수 있다. 20분에 한 대씩이니 제법 뜸하다. 설, 추석 같은 명절이나 5월에는 민주로가 일방통행으로 바뀌며, 5·18민주묘지까지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5·18민주묘지 들머리인 ‘민주의 문’을 넘어서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민주주의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진혼의 공간이다. 민주광장, 추념문, 참배광장을 지나 산기슭 즈음부터 묘역이다. 맨 앞줄에 5월 27일 새벽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을 지키면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시민군 대장 윤상원이 누워 있다. 왼쪽 세 번째 줄에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은 최미애는 당시 꽃 같은 스물여섯의 새색시였음을 보여주듯 흰색 웨딩드레스 사진이 영정으로 놓여 있어 보는 이를 더욱 처연케 한다. 언론인의 사표이자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인 송건호 선생 등이 묻힌 5·18민주묘지를 둘러보고,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흔히 망월동 구묘지라고 말하는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있다. 1980년 당시 셀 수 없이 쌓여 가는 시신들을 치우기 위해 신군부가 급하게 만든 묘역이다. 안장 절차도 없이 손수레와 트럭에 실어 버리다시피 묻어버린 곳이다. 국립민주묘지가 조성된 뒤 신묘역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이들이 망월동 땅밑으로 찾아들어와 민주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김세진, 이한열을 비롯해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으며 1991년 5월 항쟁을 촉발시켰던 강경대 등이 안장돼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광주시민, 중·고등학생 등 한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에 5·18의 속살과 진실을 처음으로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자리도 예정돼 있다. 2004년부터 “죽게 되면 꼭 광주 망월동에 묻히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알렸던 힌츠페터는 지금 독일에서 심장병으로 투병 중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던 광주시 측도 사실상 허용 입장을 밝혔다. 이쯤 되면 5·18이 왜 더 이상 1980년 5월에 머무르지 않는지, 왜 광주라는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망월동 묘지 앞에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2002년 7월 망월동묘지는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됐고, 죽은 이들과 다친 이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도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영화화 작업도 숱하게 이뤄졌다. 또한 5·18 관련 기록물은 지난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더 이상 ‘1980년 5월, 광주’라는 시공에 머무르지 않음을 선언적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듯한 ‘민주’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길 위에서 망월(望月)의 간절함은 빛이 바랜 듯하다. 하지만 매년 5월 민주로 위를 걷는 시민들은 여전히 수런거린다. 광주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광주 정신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이다. 실제 아직껏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두둥실 달이 떠올라 어두운 역사의 밤길을 비춰 주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여전하다. 글 사진 광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19회는 충남 아산시 아산온천로입니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민주로 옆 주먹밥카페 ‘오월’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민주로 옆 주먹밥카페 ‘오월’

    1980년 5월의 광주 정신은 ‘주먹밥’으로 상징된다. 계엄군의 총에 맞서는 시민군들을 보다 못한 몸뻬 아줌마들이 나와서 거리에 큰 솥단지를 내걸고 주먹밥을 지어 시민군들을 먹였다. 길거리에서 몽짜 부리기 일쑤던 왈패들도, 배운 것 없는 불학무식의 무지렁이들도 총을 들었고, 황금동에서 몸 파는 여인네들은 피를 뽑아 시민군들에게 급히 수혈했다. 당시 신문과 방송은 광주를 ‘폭도들의 무법천지’로 연일 보도했다. 하지만 시민군이 도심을 장악했던 일주일 동안 은행이 털리지도 않았고, 살인사건도, 도난 사건도 없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광주를 혁명 공동체인 ‘코뮌’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대동세상’으로 칭하기도 했다. 지난 7월 민주로 곁에 만들어진 찻집 ‘오월’(민주로 110)이 더욱 각별한 이유다. ‘주먹밥 카페’를 표방한 이곳은 마을기업이다. 말 그대로 주먹밥을 팔고 커피, 음료 등을 판다. 찻집 내부를 보니 탁자 예닐곱개가 놓여 있고, 32년 전 당시의 사진 두어장이 걸려 있다. 겨우 한 달 남짓 됐음을 감안해도 약간 휑하다. 이현옥 대표는 “사실 1980년 광주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래도 우리 마을에 망월동묘지가 있고, 거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카페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 싶어 일단 마을 사람들 6명이서 뜻을 모아 만들었어요.”라며 수줍어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현재 우리 마을은 농사일 등에 치여 자원봉사자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이 주먹밥 카페가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사랑방이 됐으면 좋겠고, 잘돼서 수익이라도 나면 경로당과 마을 아이들을 위해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엄숙하게 혹은 핏대 세우며 광주를 부르짖지 않은 채 이처럼 광주의 공동체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해 내기도 쉽지 않을 성싶다. 송광운 북구청장은 “사회적 기업으로서 ‘오월’의 취지에 공감하고 있는 만큼 북구 차원의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라면서 “5·18민주묘지를 찾는 분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과 또 다른 차원에서 광주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민주로로 들어서는 초입에 있는 식당인 축협한우프라자(민주로 64)도 근처 한우 축산농가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다. 경쟁보다는 존중과 배려를, 개인의 생존보다는 민주의 가치를 먼저 여겼던 광주 정신의 맹아가 이렇듯 밥 한 덩이, 고기 한 점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 사진 광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누드 브리핑] “시장님, 자치구에도 눈길 좀 주세요”

    “서울특별시를 한마디로 줄이면 ‘25개 기초자치단체의 총합’ 아니겠어요.” 민주당 A구청장은 10일 볼멘소리를 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책상 박원순 서울시장과 협조해야 할 게 많은 데도 도무지 만날 수 없다면서 이같이 덧붙였다. 올해 신년교례회 이후 한 차례도 면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민단체를 자주 만날 지는 모르지만~.”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행정의 큰 축을 맡은 자치구와는 ‘불통’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시청에서 열리는 구청장협의회에 나와 목소리를 들으면 적잖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했다. 지방자치 취지를 따지자면 한 치 예외도 없이 시민들 삶의 질을 높이는 데서 출발하는 갖가지 시책을 놓고 실무진끼리 성실하게 협의를 거치겠지만 해당 단체장의 밑그림을 알면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무진 사이에서는 규정의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을 발휘해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구청장협의회 전체든, 특정 지역과 얽혔든 광역·기초단체 수장(首長)끼리 만나 정책적으로 판단해야 할 일이 많은 탓이다. B구청장은 이를 ‘우선순위를 가리는 데 필요한 만남’이라고 풀이했다. 역시 ‘구민=시민’이라는 말이다. C구청장 또한 “시장에게 구석구석 보살피길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서운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열린세상] 도시를 위한 시나리오/김정후 런던대학 UCL 지리학과 박사

    [열린세상] 도시를 위한 시나리오/김정후 런던대학 UCL 지리학과 박사

    영화의 각본을 일컫는 ‘시나리오’는 글로 배우의 연기와 대사를 상세히 묘사하는 것으로서 영화 제작의 핵심이다. 얼마나 탄탄한 시나리오를 갖추었는지가 영화의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고,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시나리오에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고 최고의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도 관객에게 단순한 눈요기를 넘어 진한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허술한 시나리오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시나리오는 영화와 관객이 얼마나 깊이 있게 소통하는가를 결정짓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시나리오는 영화를 넘어 여러 분야에서 통용된다. 사업가는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운동선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경찰관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학생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각각 나름의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얼마나 깊고 구체적인 고민을 통해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했는지가 시나리오의 성공을 결정하는 열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도시야말로 가장 정교하고, 창조적인 시나리오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도시의 시나리오는 곧 시민의 즐거움, 안전, 행복, 번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향하여’라는 표현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도시의 발전을 위해 보다 나은 시나리오를 제안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도시의 시나리오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도시의 본질을 다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까지 서울을 필두로 그야말로 광풍을 일으킨 공공디자인이 이제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위상이 곤두박질쳤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사실은 문제의 핵심이 공공디자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디자인을 이끌 탄탄한 시나리오를 준비하지 않은 채 어설프게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용산을 포함해 전국의 대도시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초고층 건물은 또 어떠한가? 초고층 건물에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는 것은 오로지 규모와 높이 때문이 아니다. 도시 구조와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초고층 건물이 그에 상응하는 정교한 시나리오에 기반하지 않은 채 깜짝 이벤트처럼 마구 계획되고 건립되기 때문이다. 우연한 성공을 기대하는지 모르겠으나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고도 흥행에 실패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무엇을 의미할까? 빈약한 시나리오에 대중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위대한 거리’를 쓴 도시학자 알란 제이콥스는 ‘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훌륭한 도시를 형성하는 데 공헌한 거리를 설명한다. 그가 언급하는 마술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시나리오다. 정치인·도시계획가·건축가를 포함해 도시에 관여하는 모든 전문가들의 노력이 스며든 도시는 풍요로운 시나리오를 갖고, 시민들은 그것을 한껏 누린다. 졸속으로 복원한 광화문 광장에 무슨 시나리오가 존재하겠나?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을 불러모아 진행 중인 용산 국제업무지구는 어떤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나? 관람객 800만을 내세워 성공이라 자화자찬하는 여수 엑스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시나리오인가? 21세기의 도시는 창조와 이를 토대로 한 무한경쟁을 필요로 한다. 부강한 도시, 아름다운 도시, 매력적인 도시, 안전한 도시, 편안한 도시 등 개별 도시가 추구하는 목표는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시나리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도시는 시민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고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어렵다. 개발만을 능사로 여기고, 전통을 멸시하고, 최고·최대를 좇고, 눈에 띄는 실적을 드러내고, 관심을 끌기 위한 대규모 행사에 혈안이 된 도시에 사는 것은 피곤함을 넘어 불행하기까지 하다.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도시에 살기를 원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도시의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시나리오 작가가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워 쓰고 또 쓰기를 반복하듯 도시의 시나리오를 고민하자. 그러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 [생명의 窓] 무얼 먹고 사나요?/손흥도 원불교 교무

    [생명의 窓] 무얼 먹고 사나요?/손흥도 원불교 교무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다.’는 이 동요. 부지런하고 영특한 토끼의 귀여운 모습이 연상되어 속으로 웃게 된다. 깊은 산속의 생수 한 모금을 기분 좋게 마시고, 그 물 한 모금에 건강이 금방이라도 좋아지는 듯 기분까지 상쾌해진 경험을 가진 적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먹거리가 여유로워지면서 우리 주위에는 건강을 생각하며 음식을 찾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잘 먹는 문제에 관심이 높아져 간다. 근래 들어 체질에 대한 궁금증까지 겹쳐지면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그것이 곡물이든 채소이든지 간에 인체에 꼭 필요한 중요 영양소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 주식으로 먹는 쌀은 물론 콩·감자·고구마와 각종 채소 등은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영양 공급원이다. 약과 음식은 그 근원이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먹는 음식은 오랜 세월 검증되어진 무해무독한 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먹는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며, 질병을 예방하고 더 나아가 질병을 치유해 준다. 한의학에서는 약과 음식을 건강관리를 위해 같은 반열에 두고 생각하며, 섭생에 있어서 맛과 색을 중시한다. 그 맛과 색에는 오장육부와 상응하는 기운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맛은 오미(五味)라 하여 신맛·쓴맛·단맛·매운맛·짠맛을 말하는데, 이 오미는 각각 인체의 기본 장부인 오장에 상응하는 기운이 있고, 적절히 섭취하면 장부의 기능을 보양한다. 일상의 섭생에서 오미의 조화로운 섭취는 건강관리에 무엇보다 우선한다. 신맛은 간장에, 쓴맛은 심장에, 단맛은 췌장에, 매운맛은 폐에, 짠맛은 신장에 들어가 해당 장기의 쇠약을 보양한다. 그리하여 간이 약한 사람은 신맛을 찾고, 심장이 약한 사람은 쓴맛을, 췌장이 약한 사람은 단맛을, 폐가 약한 사람은 매운맛을, 신장이 약한 사람은 짠맛을 즐기게 되는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오미가 지나치면 도리어 병이 된다는 것이다. 자연의 색인 오색(五色)은 청색·적색·황색·백색·흑색을 말한다. 이러한 오색도 인체의 오장에 상응하는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서 적절히 섭취하면 장부의 기능을 보양한다. 음식이나 약재의 색 또한 오행 속성에 따라 청색은 간장, 적색은 심장, 황색은 췌장, 백색은 폐장, 흑색은 신장의 기능에 관여한다. 김밥은 주재료에 오미가 가장 잘 조화된 우리의 전통 음식이다. 푸른 시금치와 오이, 당근과 게맛살, 노란 단무지, 흰밥 그리고 검정색의 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가. 건강이란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통한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을 아우른다. 몸은 마음의 나타난 바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몸인 것이니, 몸 건강은 마음 건강에서 비롯되고, 마음 건강은 몸 건강을 통해 확인되어진다. 몸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을 먹느냐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마음 건강에서도 어떤 마음을 먹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이기 때문이다. 무얼 먹고 사는가? 우리는 쉽게 사용하는 말 중에 ‘마음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마음속으로 다짐과 각오를 하며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먹는다는 말은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 말이기에, 마음의 각오와 다짐의 무게만큼 그 행동은 그 마음먹은 대로 나타난다. 내가 먹은 한마음은 나의 일생을 결정한다. 진정으로 나의 의식을 키워가는 것은 내가 무슨 마음을 먹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먹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한 마음을 먹으면 악한 행동이 나온다. 어진 마음을 먹으면 어진 행동이 나오고, 참는 마음을 먹으면 그만큼의 참는 힘이 생겨 큰 정력을 이룬다. 순간순간 원망의 마음을 먹으면 원망의 호르몬이 생기고, 감사의 마음을 먹으면 감사의 호르몬이 생겨 감사한 마음에 심신이 진급되고 은혜롭다. 나는 오늘도 무슨 마음을 먹었는가. 원망의 마음을 먹고 살았는가. 감사의 마음을 먹고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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