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대는 실물경제] “한푼이라도 더”… 가정·기업 新자린고비
최대한 더 타고 덜 쓰자.미국발 금융쇼크와 글로벌 경기 둔화 불길이 국내 소비 행태를 180도 바꾸고 있다.소비자들이 갈수록 호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질 것으로 보고 너도나도 지갑을 닫으며 ‘짠돌이’가 되고 있다.가계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나 가구 교체 계획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기업도 마른 수건을 쥐어 짜면서 경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 자전거 출근으로 교통비 줄이기
예전 같으면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차를 참고 더 타는가 하면 교통비를 아끼기 위한 ‘자출족(자전거 출근족)’이 늘고 있다.한 번에 대량 구입하던 생필품도 낱개로 나누어 사고 환율이 낮아질 때까지 국내여행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2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 붙으면서 폐차가 줄어 들고 있다.신차 구매가 급감하면서 자동차 보유대수 증가세도 둔화되고 있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폐차와 도난,수출 등을 포함한 자진 폐차 대수는 지난 7월 9만 43대였다.하지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8월 이후 폐차 대수는 월평균 8만대 밑으로 뚝 떨어졌다.8월 7만 7922대,9월 7만 3056대,지난달 7만 8134대 등으로 집계됐다.
유모씨는 “주행거리 22만㎞의 산타모 LPG 차량을 폐차하기로 하고 신차 구매 상담까지 마쳤으나 휘발유나 경유차로 바꿀 경우 연료비가 1.5배 더 들 것이 부담돼 그냥 돌아왔다.”면서 “가족과 상의해 한해 더 타는 대신 끊기로 했던 딸 학습지는 계속 구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자영업자 김모(39·경기도 김포시)씨도 “지난달 10년 넘은 대우 타우너 승합차를 폐차하고 새 트럭을 구입할 예정이었으나 매출이 뚝 떨어지면서 할부금 마련 걱정에 당분간 더 타기로 했다.”고 말했다.
기름값과 차비를 절약하기 위해 운전대를 놓거나 대중교통까지 포기하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다.삼천리자전거의 올 매출은 지난 9월까지 633억원을 기록해 지난 한 해 매출액 639억원에 육박했다.홈플러스도 올 10월까지 36억여원의 매출을 올려 지난해 전체 매출액을 뛰어넘었다.
인터파크 관계자는 “올들어 지난달까지 자전거 판매량이 1년 전보다 65%,자전거 용품 판매량은 230% 급증했다.”고 밝혔다.올해 1월과 2월만 해도 웰빙 바람이 거셌던 지난해에 비해 자전거 판매량은 각각 36%,25% 감소했었다.그러나 경기침체가 가시화된 7월과 8월에는 각각 110%,9월 103%,지난달에도 91% 판매가 급증했다.
‘소용량 바람’도 거세지고 있다.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낱개로 사거나 기존 제품보다 용량을 줄인 제품을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주부 김모(34·강서구 방화동)씨는 “대형마트 등에서 ‘묶음 제품’을 주로 샀으나 최근엔 가까운 재래시장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필요한 만큼만 낱개로 산다.”고 말했다.이같은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최근 대형마트 등에서는 신선ㆍ가공 식품을 1~2개씩 나누어 파는 ‘소용량 코너’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아파트 분양시장에도 소형 중심으로 청약이 쏠리고 있다.부동산업계 관계자는 “불황 여파로 관리비 등 주택 유지비가 뛰면서 소형 아파트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행 패턴도 변했다.경기악화에 환율 급등까지 겹치면서 가급적 여행 횟수를 줄이고 해외가 아닌 국내 여행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항공권을 판매하는 여행업체 93곳의 집계에 따르면 9월 항공권을 구입한 관광객은 43만 619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감소했다.금액은 3387억 6319만 9000원으로 4% 증가하는데 그쳤다. 한국일반여행업협회 관계자는 “9월 해외관광 지출은 8억 4000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0% 줄었다.”고 밝혔다.
이영표 홍희경기자 tomcat@seoul.co.kr
■ 임금 반납… 휴무… 기업 ‘몸부림’
‘지사 축소,급여삭감,해외연수 대신 국내연수,주말 휴일을 이용한 출장,선박의 경제속도 유지,관리직을 현장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실물경제 위기가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기업들이 저마다 ‘짠물 경영’에 돌입했다.
중소기업이나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기업들이 사용하던 내핍경영이 삼성전자나 현대건설,한전,SK텔레콤 등 업종 선도 기업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일등 기업이라고 무게 잡을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는 다음달 24일부터 내년 1월4일까지 열흘 이상 장기휴무에 들어가기로 했다.교대근무제인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생산 현장 근로자를 뺀 다른 사업장 근로자는 모두 해당된다.현대건설은 사장의 해외 출장 길에 그동안 대동했던 비서실장을 제외시켰다.대신 실무 임직원만 동행한다.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다.더불어 직원들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출장을 모아서 가도록 했다.주말과 휴일을 이용한 출장도 권장하고 있다.근무시간내 업무 집중처리제를 도입,일과시간 후 근무를 최소화하도록 했다.
GS건설은 다음달부터 관리직의 20%인 300여명을 현장에 전진배치하기로 했다.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해마다 10여명을 1년짜리 해외연수를 보냈으나 내년부터는 국내 MBA로 돌렸다.급여삭감도 늘어나고 있다.1982년 공사 전환 이후 사상 처음으로 올해 1조원이 훌쩍 넘는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은 10개 발전자회사를 포함해 과장급 이상 1만 1300여명의 임금을 평균 200만원가량 깎기로 했다.과장급은 평균 170만원,팀장급은 200만원,부처장급은 230만원,처장급은 250만원의 임금을 각각 반납하기로 했다.이런 식으로 절약하게 될 금액이 220억원에 이른다.
매장 축소나 예산 절감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SK텔레콤은 내년도 예산을 20% 줄였다.출장비용이나 사무용품 등 소모성 경비를 줄이기로 했다.이미 올해 남은 예산도 30%를 줄였고,업무용 신용카드의 결제한도도 축소했다.
KT는 다음달 내년 2월까지 현재 267개인 KT플라자를 56개로 단계적으로 줄인다.
KT와 KTF쇼 매장의 동시업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KT 관계자는 “KT 플라자 업무의 대부분인 요금 납부,서비스 가입 등은 KT고객센터와 전국 2000여개의 쇼 매장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고객 불편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KT 플라자로 활용되던 공간은 임대나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운항 중인 200여척의 선박에 규정 속도인 20노트를 준수하도록 했다.속도가 빨라질수록 기름이 많이 먹히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항구별 기름값을 파악,값싼 항구에서 기름을 넣도록 했다.
한 건설업체는 회식이나 공식적인 행사 이후 부서 비용으로 대리운전비를 지원해줬으나 27일부터는 경비절감 차원에서 이를 중단했다.
김성곤 김성수 김효섭기자 sunggone@seoul.co.kr
■ 생활정보지 이용해 수수료 절감
부동산 중개업소 대신 생활정보지로,변호사 선임 대신 상담으로….
경기침체가 계속 이어지고,내년 전망마저 비관적이자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소비심리가 얼어 붙으면서 관련 업계는 저가·공짜 마케팅을 이어가고,기존 시장이 붕괴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부동산 거래가 끊기면서 중개업소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거래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게 첫번째이고,아예 중개업소를 찾는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게 두번째이다.잠재적인 주택 구매 대상자들은 중개업소 대신 공짜인 생활정보지 등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하지만 생활정보지에 내놓는 매물 역시 줄어들어 생활정보지 업체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업계 관계자가 27일 귀띔했다.
전문 서비스업도 위축되고 있다.사법연수원에서 해마다 1000명의 법조인이 배출되면서 2001년 41.7건에서 지난해 31.5건으로 줄어들던 연 평균 수임건수가 올해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급감했다.
7년 전 서울 서초동에서 개업해 현재는 혼자 사무실을 꾸리는 한 변호사는 “사건에 대해 상담만 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늘어났다.”면서 “특히 최근 변호사들이 사건 수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문이 돌자,터무니없는 선임료를 부르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최근에는 병원도 잘 안 된다고 하니,앞으로 얼마나 더 상황이 악화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불황의 여파는 이번 겨울부터 구직 활동에 나서는 사법연수생들에게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사법연수원이 지난 25일부터 사흘 동안 개최한 취업박람회에 참여한 기업과 로펌,국가기관은 26곳으로 지난해 31곳에 비해 줄었다.실제로 중소 로펌의 경우 신규채용을 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전언도 들린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