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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이트와 담배/3.3인치의 유혹 담배

    스물네 살부터 담배를 피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여든네 살로 죽기 전까지 줄담배를 피웠다.그 때문에 말년에 구강암으로 서른 번의 수술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담배를 결코 놓지 않았다.이름만 들어도 시가를 연상케 하는 인물은 단연 처칠.위스키를 즐겼고 재치가 넘쳤으며 전쟁영웅에다 지성인,게다가 아흔 살이 넘도록 살았으니 흡연가들의 우상이 아닐 수 없다.독처럼 쓰리면서 선지자의 침처럼 달콤한 ‘쾌락과 위험의 결합물'.담배는 만병통치의 신성한 풀이자 악마의 선물이다.인간은 왜 내면의 무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듯이 담배를 버릴 수 없는가.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필립 그랭베르가 쓴 ‘프로이트와 담배'(김용기 옮김,뿌리와이파리 펴냄)와 아이리시 타임스 기자인 코너 굿맨의 ‘3.3인치의 유혹,담배'(김현후 옮김,나무와숲 펴냄)는 각각 담배에 관한 인문적 지식과 실용적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다. 한국의 흡연인구는 1300만명,성인 남자의 흡연율은 68%로 세계 최상위 담배소비국 가운데 하나다.30대 흡연율은 75%를 넘어,4명중 3명은 담배를 피우는 셈이다.이처럼 많은 흡연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의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을까.담배 정신분석학 책이라고 할 만한 ‘프로이트와 담배'는 흡연 행위를 일종의 자기애적인 행위로 간주한다.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보호막 혹은 나르시스적 고리 같은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담배를 매개로 한 프로이트 전기로도 읽힌다.저자가 밝히는 한 토막의 전기적 사실은 ‘담배연기 없이 프로이트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빈에 거주하는 젊은 프로이트는 베를린의 동료의사 빌헬름 플리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1887년부터 1904년까지 무려 300여통의 서신이 오갔는데,프로이트가 고민을 털어놓고 플리스가 답하는 일이 많았다.고민은 담배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결단.프로이트는 치료제로 복용하던 코카인에는 중독되지 않았지만 담배에는 깊이 빠져들었다.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대가이면서도 금단현상으로 울증(鬱症)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저자는 이들의 편지를 추적하며 프로이트의 담배에 대한 집착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한다. ‘꿈의 해석'을 시작으로 정신분석이론을 세워가던 프로이트에게 담배는 생명의 자양분인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의 자양분'이었다.프로이트의 삶과 학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배와 밀착돼 있었으며 담배는 정신분석 이론의 ‘산파'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소설·희곡·동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정신분석서 답지 않게 재미있게 읽힌다.1만 3000원. ‘3.3인치의 유혹,담배'는 저자가 금연을 시도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쓴 ‘담배 잡학사전'.담배를 피우면서도 늘 담배에 관해 궁금해하던 점들,.예컨대 담배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씨병에 걸릴 확률을 떨어뜨리는지,담배를 끊으면 정말로 신경질적이 되는지,담배로 병을 고친다는 민간요법이 사실인지 등을 비롯해 담배에 관한 시시콜콜한 기록까지 담았다. 담배를 피우다가 끝내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유명인 이야기도 부록으로 엮었다.하루 여섯 갑의 담배를 피운 영화배우 존 웨인,‘말버러맨' 모델로 잘 알려진 웨인 맥라렌,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파이프를 입에 문 영국군인 월터 롤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6800원. 김종면기자 jmkim@
  • [Look!아시아] 1부 新장보고 루트르포 (3)쇼와 붐,일본

    |도쿄 황성기특파원|‘잃어버린 10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 일본 역사상 가장 활력이 넘쳤다는 쇼와(昭和)시절에 대한 향수로 상처받은 마음들을 달래고 있다.당시를 테마로 한 서적,영화,패션,심지어 과자점까지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인다.그러나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와 좌절감에서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는 ‘일본어 붐’ 등 일본적인 것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되며 민족주의의 재발현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요코하마(橫濱) 시내 미나토미라이 21지구.이곳에 들어선 ‘하이카라 요코초’에는 쇼와시대(1926∼1989년)를 재현한 약방,과자점,사진관 등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언제나 붐빈다.연인들,혹은 가족끼리 놀러 온 사람들은 연신 “이때가 좋았네.”,“그리워,이때로 돌아갈 수 없나.”라는 탄성을 터뜨린다. 2001년 4월 문을 연 당시에는 호기심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입소문이 퍼져 그들의 부모세대나 할머니,할아버지 세대들도 찾는다.3대가 함께 이곳을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이카라 요코초의 운영회사인 ‘젠토’의 니시무라는 “테마를 쇼와 30년대(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로 잡은 것은 그때가 일본에 가장 힘이 넘쳤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일본인들이 이 시대를 그리워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치유받는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인다. 오메(靑梅)시의 ‘쇼와 레토로 박물관’은 전후 부흥시대인 쇼와 30년대를 컨셉트로 과자점,문구,영화간판 등을 전시하고 있다.이 박물관은 당초 지방에서 불고 있는 심각한 불황으로 빈 가게들이 늘면서 상가 부흥을 위해 고안됐으나 예상 외의 성황을 누리고 있다. 도쿄 긴자에도 메이지 제과가 쇼와 초기를 재현한 카레 전문점을 오픈했고 오다이바에도 쇼와 상점가가 명물로 등장해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린다.서점에는 ‘쇼와 천황’ 같은 쇼와 시대를 테마로 한 서적들이 즐비하다. 쇼와 시대의 신문소설을 드라마화한 ‘진주부인’이 지난해 공전의 시청률을 올렸는가 하면 ‘황갈색 머리소녀’,‘낡은 시계’ 등 쇼와 시대의 노래가 리바이벌돼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젊은 세대에게 전쟁 중 일본 국민의 고생을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1999년 개관한 ‘쇼와관’에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15만명이 찾기도 했다. “회고 붐이다.옛날로 돌아가자기보다 시간 감각이 어긋나 있는 현상이다.젊은 세대는 과거의 것이 흡사 새로운 것처럼 보이고 나이든 세대는 그리움이다.시간이 텅 비어 있다.”(사회평론가 미야자키 데쓰야) 일본어붐은 이런 쇼와붐과 함께 찾아왔다. ‘소리를 내 읽고 싶은 일본어’가 140만부라는 히트를 친 뒤 ‘아름다운 일본어’‘상식으로서 알아두고 싶은 일본어’등 일본어를 주제로 한 책들이 물결을 이뤘다. 일본어붐의 배경에는 구구한 설이 있다.붐에 불을 댕긴 ‘소리를…’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메이지대 교수)의 말대로 “신체학의 발로”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의 회복”(시인 다와라 마치)이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일본인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80년대 나카소네 총리의 전후 총결산 때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찾기의 흐름에 일본어 붐은 놓여 있다.”(이종원 릿쿄대 법학부 교수) 쇼와붐,일본어붐이 자기 정체성 찾기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지금 왜 이런 문화적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미야자키는 “9·11테러,월드컵 16강 진출,북한의 일본인 납치 등 일본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국내외 사건이 잇달았다.”고 설명한다.이런 한덩어리가 되는 위험은 무엇인가.“쇼와붐이든 일본어붐이든 그 공통 키워드는 ‘일본’이다.일본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좇다 보면 합리적 사고를 넘어 불합리하고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이종원 교수) 민방 아사히 TV는 새해 벽두 5시간짜리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로 ‘전후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을 택했다.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일본,일본인들이 거품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사키 다케시 도쿄대 총장의 ‘경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일본에는 좌절감이 있다.좌절감은 내셔널리즘같은 것으로 흐르기 쉽다.일본의 정치가 공동화되고 있다.무슨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들다.”붕괴의 10년이 시작된 지금,일본에서 무엇이 일어날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됐다. marry01@kdaily.com ◆‘쇼와 30년대'란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쇼와 30년대’(1955∼1964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이 그 시절을 이토록 그리워하는가.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그들은 도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하고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다.1956년 유엔에 가입한 일본은 1957년 일본원자력연구소의 원자로가 임계(臨界)에 성공하고 도쿄 인구는 850만명으로 세계 인구 1위의 도시로 올라선다. 1958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층이라는 도쿄타워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 건설되고 이듬해 아키히토(明仁·현 일왕) 왕세자가 결혼했으며 사상 첫 일본인 미스 유니버스가 탄생한다.2년 뒤 60년에는 컬러 TV방송이 시작됐으며 61년에는 도쿄가 인구 1000만 도시로 부상한다.이어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서 쇼와 30년대를 특징짓는 힘과 번성의 시대는 절정에 이른다. 이런 쇼와 30년대에는 일본의 공업사회가 완성단계에 들어선다.수도 도쿄로의 집중,규격 대량생산형 사회의 틀이 잡힌 것이다.이 시기에 이른바 ‘연공서열’,‘종신고용’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본식 경영 스타일이 정착되면서 근무처나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회사인간’이라는 말도 탄생한다. 이러한 일본식 경영에 맞춰 촌락을 비롯한 지역사회 중심의 대가족사회에서 핵가족 사회로 바뀌고 지연·혈연사회에서 직장을 중심으로 한 직연(職緣)사회로 변화한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연호인 쇼와(昭和)는 시대 전체로 볼 때 침략,식민지배,전쟁과 패전과 부흥을 겪었으며 군사대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변신한 다종다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 정신과 의사가 진단하는 '쇼와 붐' |도쿄 황성기특파원|“경제가 좋지 않아 일본인은 지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믿을 수 있고 변함 없었던 대기업,전통기업,은행들의 도산은 물론 교사의 비리,의사의 의료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아무 것도 신용할 수 없게 됐다.” 정신과 의사 가야마 리카가 보는 현대 일본인이다.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일본인에게 희망과 성장이 있던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당연하다는 진단이다. ●쇼와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밝은 앞날을 찾을 수 없을 때에 과거 일본이 좋았던 시대,일본인이 열심히 뛴 전후 부흥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물질적,경제적,과학적 발전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등식이 있었던 태평스러운 시대였다.당시를 겪었던 윗 세대나 겪지 못한 젊은 세대는 쇼와시대에서 일종의 파워,세계적으로 일류가 되고자 했던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일본어붐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일본에는 전쟁의 싫은 기억 때문에 강제로 한덩어리가 되는 데 대해 엄청난 알레르기가 있었다.젊은 세대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월드컵에서의 일본 붐과 일본어 붐을 전혀 저항없이 받아들여 너무 놀랐다.그들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단지 축구가 좋을 뿐”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좋다고 하면 무의식중에 다른 나라는 싫다는 정반대의 의미도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도. ●그것이 일본의 젊은 세대의 문제점인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딱 잘라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본인의 미덕이었다.결단력이 없다든가 우유부단하다고 비난받는 그런 것들이다.그러나 요즘 젊은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정신장애자를 사회와 격리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있으면 그들은 “격리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미국식으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어디로 가는가. 하나의 흐름이 있으면 반대의 흐름이 일어나는 힘이 아직 있다.그러나 경제악화로 반작용이 쉽지 않다.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릴 가능성이 있다.그래서 걱정이다.젊은 세대는 무력감이라든지 상상력 결여로 지금은 그런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이시하라 신당의 움직임이 나왔을 때에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리는 밑바탕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이시하라 신당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그들이 이시하라의 정치이념을알고 지지한다기보다 그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고 낯익은 얼굴이기 때문에 지지하곤 한다.정치가는 다 똑같다는 체념 속에서 친근하고 쉬운 말을 힘있게 하는 이시하라에게 쏠리는 것이다.우경화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그렇지만 젊은 사람 중에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지식인 중에서도 과거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그것은 위험하다. ●납치 일본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도 그런 맥락인가, 일본은 세계 속에서 북한을 바꿀 수 있다는 중요한 입장에 있는데도 넓은 시야나 장기적으로 뭔가를 생각할 수 없게 됐다.대단히 근시안적으로 되고 있다.납치도 내 가족의 문제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고 만다. ■가야마 리카는 43세.도쿄의대 졸업.신문,잡지,TV에서 사회·문화비평을 비롯,현대 일본인의 ‘마음의 병’을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는 젊은 정신과 전문의.월드컵에서 나타난 일본 젊은이들의 민족주의 성향을 분석한 ‘소 내셔널리즘 증후군’을 비롯,다수의 저서가 있다.
  • [노무현시대의 개혁-재벌] ②뿌리깊은 대물림이 문제

    “재벌이 없으면 우리경제가 어떻게 버티겠나.규제 일변도로 가서는 안된다.출자총액 제한같은 제도는 없애는 게 좋다.그러나 한가지는 용납 안된다.자녀들에게 나쁜 방법으로 재산을 물려주려는 행태다.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재벌들은 영원히 ‘개혁대상’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경제부처 고위관료) 재벌의 공과(功過)를 따질 때,‘부(富)의 대물림’은 부정적인 항목의 첫머리에 항상 오른다.재벌시스템에 우호적인 사람들조차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히 제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재벌들이 보이는 잘못된 행태에 대한 반증이다. ●재벌들의 편법상속 실태 재벌들의 재산상속은 늘 논란을 불러일으켜왔다.‘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은’절세 방법을 이용한 것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회계사와 변호사 등 전문가를 동원해 법의 허점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과거에는 주식 저가매각 같은 단순한 기법이 많이 이용됐지만 1990년대 말부터는 신주인수권부사채(BW·채권자에게 일정기간이 지난뒤 특정가격에 신주 인수 권리를 부여한 사채) 같은 신종채권이 자주 등장한다.비상장회사와 상장회사를 합병하면서 비상장회사의 보유지분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수법도 심심찮게 쓰인다.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자녀들인 이재용(李在鎔)씨 등은 99년 삼성SDS로부터 초저가에 BW를 매입한 뒤 지난해 2월 신주인수권을 행사,수천억원대의 평가차익을 냈다.LG는 99년 계열사를 통해 구본무(具本茂) 회장 일가에게 주식을 싸게 팔아넘기는 수법을 썼다가 당국에 적발됐다. 현대자동차의 경우,지난해 현대모비스와 본텍(옛 기아전자)의 합병을 통해 정몽구(鄭夢九)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鄭義宣) 부사장의 지분을 확대하려다 여론의 집중 포화와 함께 주가가 급락하면서 이 계획을 백지화했다. 두산도 99년 발행한 BW와 관련,편법상속 의혹을 받고 있다.동부는 최대주주인 김준기(金俊起) 회장이 지난해 10월 보유 지분의 일부를 동부문화재단에 출연,2대주주인 김남호(14.6%)씨를 최대 주주로 올려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경영권을 넘겨줬다. 다양하게 ‘사전상속’ 성격의 증여가 이뤄지다보니 오너들의 사망후 상속세 납부액은 크지 않다.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이나 SK 최종현(崔鍾賢) 회장이 사망한 후에도 ‘정당한 상속' 에 대한 시비가 불거졌다. ●조세제도와 금융시스템 선진화가 해법 현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정부는 상속·증여세의 과세 그물망을 촘촘하게 엮는 ‘완전포괄주의’ 도입을 강력히 추진중이다.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14가지의 의제(擬制) 사례를 예시하고 여기에 들어맞거나 유사한 경우에만 세금을 물리고 있어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그러나 조세법률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어 최종 입법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편법을 이용해 부당한 방법으로 이득을 챙긴 데 대한 책임과 비난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참여연대 세제개혁팀 윤종훈(尹鍾薰·회계사) 위원은 “재벌 일가가 편법으로 거액의 부를 얻는 것은 계열사로 들어갈 돈을 오너의 호주머니로 낚아채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해당 회사의 채권자나 소액주주들은 물론,회사이익 감소로 법인세수가 줄어들어 나라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세금 문제로만 다뤄서는 불로소득에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는 지적이다.이와 관련,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부당하게 증식한 재산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거래였을 때의 가치로 환산해 세금을 매기는 ‘부당행위 계산의 부인(否認)’ 규정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스템의 선진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다.조세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일정액수 이상은 모두 실명으로 거래하고 통보하게 돼 있는 금융실명제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차명계좌 등을 활용한 편법 상속·증여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진단한 뒤 “금융실명제법은 물론 자금세탁방지법 등 금융투명성의 확보가 세제개선에 버금가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균 전광삼기자 windsea@kdaily.com ◆富 대물림 심리 최근 들어 재벌세습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는 목소리가 새삼 높아지고 있다.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홈페이지에는 “노무현개혁의 성패는 족벌개혁에 있다.”-정책위원,“모그룹 셋째딸 대학생이 870억원 재산상속했다.”-재벌개혁,“재벌개혁의 창에 찔린 타워팰리스”-김태환 등 14일 하루동안만 해도 재벌의 부세습에 대한 수백편의 글이 쏟아졌다.노 당선자는 “한 두사람의 독단에 의해 엄청난 규모의 기업이 움직이는 재벌세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의 세습은 왜 이루어지나 우리나라에는 ‘복(福)신앙’이 있다.기독교신자나 불교도들은 교회나 절에 가서 천당이나 극락세계에 가게 해달라기보다 복을 많이 줘 우리집,가족이 잘되기를 빈다.부가 아들,손자에게로 이어지는 것은 이러한 심리구조와 연관이 있다.나에게 복을 많이 달라는 것은 주위,나아가 사회전체로 시각을 넓히는 것을 제약한다.재산의 사회환원,기증 등의 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신경정신과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유한한 삶을 돈을 통해 영속시키려는 본능과 자식에게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유전적 무의식’ 때문에 부의 세습이 생겨나고 있다.”며 심리적 요인을 꼽았다. 또 다른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유독 부의 세습이 많은 것은 ▲곡간에 곡식을 잔뜩 채워야 마음이 놓이는 농경문화적 요인과 ▲일제시대와 6·25전쟁,군사정권 등을 거치면서 수탈을 많이 당해 반사적으로 생겨난 ‘정신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도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다.권영준 경희대교수(경실련정책협의회의장)는 “우리나라의 경우 과세방법이 법률적 편의주의적이다보니 신상품과 파생되는 금융상품 등으로 생겨나는 탈법·불법적인 부(富)를 차단하지 못하면서 부의 세습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만우 사회학박사(국회도서관연구원)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신분세습을 유지하려는 구조적 측면과 지나친 온정주의(Paternalism) 등에서도 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 외국의 경우는 미국의 대기업총수들은 기업경영을 자식에게 결코 물려주지 않는다.이들은 부자란 ‘사회적 재산의 관리인’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일본의 경우도 2차대전 직후의 재벌해체를 통해 부의 세습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일거에 해결했다.가족의 기업지배가 일부 남아 있는 유럽의 경우도 소유 지배와 경영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전문가들은 재벌은 영문자로도 ‘Chaebol’일 정도로 한국에만 존재하는 기업형태로 단정짓고 있다. 김문기자 km@
  • 한국인 아시아 최초 ‘시고니賞’ 수상/조두영 서울대 명예교수

    조두영(趙斗英·사진·66) 서울대 명예교수가 정신분석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시고니상’(The Sigourney Award) 2002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대병원은 6일 조 명예교수가 우리나라 정신의학계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해 왕성한 연구 및 교육활동을 펼쳐온 점을 인정받아 시고니상 최종 수상자로 뽑혔다고 밝혔다. 시고니상은 국제정신분석학회가 매년 정신분석 연구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주는 상으로,미국의 정신과 분야 여류 사회사업가인 메리 시고니(Mary Sigourney)가 유언으로 남긴 기금을 바탕으로 1990년 제정됐다. 그동안 매년 정신분석학 연구가 활발한 북미·남미·유럽에서 각 한 사람씩 3명을 뽑아 시상해 왔으며,그 이외의 지역 학자로는 조 명예교수가 첫 수상자다.24일 뉴욕 맨해튼의 ‘에섹스 하우스’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조교수는 3만 5000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국내 대표적 프로이트학파 의학자로 꼽히는 조 교수는 1985년 국내 처음으로 정신과학과 행동의학을 연계한 저서 ‘임상행동과학’을 저술하는 등 우리나라 정신의학계에 정신분석 이론을 조직적으로 소개하고,자체적인 연수시스템을 만들어 교육에 힘써왔다. 특히 1975년 박사학위 논문 ‘공자에 있어서의 효의 정신분석학적 연구’에서 공자가 강조한 효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라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분석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조 명예교수는 지난해 8월 서울대의대에서 정년퇴임해 서울 반포에서 신경정신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성혁

    1.기형도 시의 가상성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 작품속 죽음 의미찾아 이 비평문은, 그러니까 기형도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이어보고 만져보면서 이 가상적 구성물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재구성(‘시인'의 세계관이나 무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하여 다시 텍스트를 짜내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우선 기형도 시의 ‘가상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이는 기형도 자신도 원하는 것일 게다. 그의 친구인 원재길은, 별로 주목된 바 없는 글이라 생각되는 10여 년 전의 글에서, “창작자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심리주의 비평의 어떤 그릇된 접근 방식은 시인 자신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하고 있다.”(대화적 울음과 극적 울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비평가들이 조야한 심리주의 비평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와 기형도의 의식의 동형관계에서 벗어나 시를 문학적 텍스트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원재길은 이미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기형도의 여러 시편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 인물과 간단한 사건과 시간에 순연하는 구성이 있는 극적인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가 하나의 독특한 가상적인 구성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깊게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지적이 논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대개의 평문들에선 기형도 시의 등장 인물들-낯선 ‘그'로 자주 등장하는-은 대상화된 ‘나'로 취급되어 기형도의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 버리곤 한다. 즉 기형도 시가 ‘극적 구조', 하나의 가상적 구성물임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부분 2)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부분 1)에 등장하는 서기나 ‘김'을 대상화된 기형도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편으론 옳고 한편으론 그르다. 옳다는 점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라고 발언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허구적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시 같은 서정적 장르에서는 그 분신의 농도가 더 짙으리라. 하지만 그 등장 인물이 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악은 그르다. 시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등장 인물은 시 텍스트의 공간 내에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나'는 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텍스트 속의 ‘나'이다.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나'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서정시인일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서기는 시인의 대리일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의미에서의 서기,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일에 탕진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형식의 상징으로서의 서기이다. 유리창은 그 서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서기를 갈라놓는다. 이 유리창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서기에게 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다. 하지만 유리창 덕분으로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게 하는 칸막이면서도 또한 ‘혼자' 각각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게 한다. ‘나'와 ‘그'를 동일시하여 각자 홀로 있는 ‘나'와 ‘그'의 어긋나 있는 대위 구조를 보지 않는다면 이 시가 뿜어내고 있는 의미를 붙잡기 힘들다. 원재길의 ‘극적 구조'를 넓게 본다면 이 장면 역시 그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침묵의 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1)의 서기의 울음을 조명하여 해명해주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2) 역시, 독백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와 ‘김'은 동일 인물의 분신들이다. 1)에서 시적 화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가 담론 배후에 있고 시 표면에 등장한 ‘나'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김'의 중얼거림이 나타나 있다. 홀로 있는 ‘김' 옆에서 ‘김'을 ‘바라보는' ‘그'는 사물화된 김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김이라 할 수 있는데, 성으로만 표시되어 개성을 잃어버렸음을 표시하는 ‘김'보다 더 몰개성적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와 김, 그리고 흐물흐물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나', 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극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1)에서 서기의 울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홀로 있음의 순간, 침묵의 순간이었다. 침묵이 깨지면, 이 순간은 깨지고 말 것이다. 세계를 토막내는 언어의 세계가 침묵할 때 순수한 존재 자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두 시', 삶이 무의미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순간을 깨달을 때의 침묵의 시간, 그 직후터뜨리는 울음의 순간에 배치되는 사물과 인간을 이 시들은 포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극적 구성은 플롯을 시에 도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배치된 장면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이 일상을 갑자기 전복시키는 시간이 정지된 순간은 기형도 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된다. 그는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 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 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 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 기형도의 가상적 구성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 순간은 시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어떤 연속선상을 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텅 빈 그 순간, 침묵의 순간을 말하기 위해선 우회로를 빙빙 돌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가상적 공간, 더 나아가 환상적 공간을 구성하여 그 순간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그 순간을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 저녁엔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 순간이 온다. 이 환상적인 순간은 어떤 예감을 통해 감지하게 된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것은 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을 숨기고 있는가/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움직임이 홀연히 정지”한 상태, 이 상태는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의 묘사로는 이 상태를 그려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볼 수 없는, 예감으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예감했다고 알아차린 순간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시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순간은 그러니까 현실 묘사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은 의미의 블랙 홀과 같은 상태다. “보이지 않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의미는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진다. 시인은 또 “이 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역시 순간일 뿐이다. ‘검은 외투'-죽음의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딱딱하고 무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다”고 시인은 말한다.(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보는 사람이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블랙 홀과 같은 어떤 순간을 느낀 순간,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악마는 말을 걸어온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를 모두 무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그 악마는 속삭인다.다시 말해 모든 것이 무의미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예감할 때 그 악마는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 아마도 죽음으로 가는 삶의 법칙을 가만히 상기시킨다. 기형도 자신이 말한 ‘가능성'과 ‘불안'은 그 ‘순간'이 이 악마적인 것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마적인 것이 죽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시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주며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 지경에 다다른 이때 투명하고 푸른 공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감추어진 ‘둥글고 빈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악마적인 ‘그'가 말한 숨겨져 있는 ‘법칙'은 다만 죽음의 법칙만이 아니라 환상 속의 다른 통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형도 시의 환상은 양면적이다.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그의 환상은 우리의 삶을 무화시키는 블랙 홀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신비롭게감추어진 희망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의 탄생과 그 탄생이 가져오는 양면성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2.기형도 시의 이중성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때 아름다움의 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일상의 권태로운 세계를 무화시킨다. 인간은 권태의 세월보다 죽음을 무릅쓴 아름다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유혹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죽음의 세계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일상적 삶이 도리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삶을 희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파우스트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늙은 파우스트가 아름다움의 순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부터이다. 물론 그는 끊임없는 생성을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고 만약 자신이 말한다면 자신을 지옥에 데려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매립제에건설한 도시(악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를 바라보며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죽음의 말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즉 파우스트가 산 젊음은 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외침에 도착함으로써 끝난다. 그의 젊음과 행위는 결국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란 착지에서 그의 젊음과 힘은 지옥으로 넘겨진다./기형도 시가 포착하려던 그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는 ‘순간'의 이중성도 아름다움에 대한 《파우스트》적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형도의 시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순간이 가져오는 이 이중성에 대해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써 이끌려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시작 노트와 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주 낯선 것들'이면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라는, 순간들의 이중성에 대한 긴장을 시인은 계속 놓치지 않는다. 아니 순간들의 이중성의 포착은 이 대상에 대한 긴장에 찬 예민성의 끈을 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주 낯선 것들로의 ‘둥글고 빈 통로'를 마련하는 어떤 순간은 우리가 언제나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어떤 순간이다. 그래서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그 순간이 벌려내는 환상은 우리 삶의 현장인 일상의 삶을 무화시키면서도 어떤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다른 삶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이 이중적인 통로의 발견을 기록하는 데서 기형도의 시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통로의 이중성은 ‘둥글고 빈'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둥근 것'은 아날로지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아날로지는 모든 개체가 전체를 비추고 전체가 개체들을 끌어안는 조화의 세계 아닌가./그 세계는 둥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비어 있다는 진술에서 ‘둥근 것'의 아날로지 세계는 아이러니의 상태로 변화된다./‘둥글고 빈' 통로는 아름다움에로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無에로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둥글고 텅 빈 통로를 통과하여 다다른 어떤 다른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기 방울의 세계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神들의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성 안은 “아름답고/신비”한 세계이다. ‘시작 메모'에서 말한 ‘위대한 순간'이 형상화된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해당된다. ‘존재'가 차안의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세계는 신들과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는 이 성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어느 하나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 세계이다. 즉 아날로지의 세계다.시인도 ‘역시' 작은 당나귀들도 평화로운 그 성에 농부들과 살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공기와 같은 세계라서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지고 세계가 낯설어지며 감각이 착란될 때의 순간이 열어놓는 어떤 ‘푸른 저녁'같을 때, 사람들이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갈 수 있었다. 이 ‘순간'에만 바로 ‘둥글고 텅 빈' 통로를 따라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 안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공기 방울, 구름이 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이 공기 방울의 세계는 차안의 공간에 있진 않지만, 차안과 동떨어진 피안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차안의 공기 안에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언뜻 벌려진 공기와 공기 사이의 블랙 홀을 공기가 되어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세계이다.그러니까 이 성 안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옆-앞에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들어가려는 골동품 상인-아마 차안의 세계의 속성인, 살해를 자행하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이라 할-이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가 보았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골동품 상인은 차안의 세계 뒤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는 숲만 자르면 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삼차원적 세계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가 차안에서 아무리 폭력과 파괴를 행한다 해도 이 숲으로 된 성벽 안은 의연히 평화로운 마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만큼 불안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도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화되는 길밖에 없다. 통로가 ‘빈' 통로여서 들어가려는 이는 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공기 세계는 어떤 무게 있는 물질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공중에 투사된 영상처럼 흩어졌다 모여지는 그런 세계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라치면 그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 아날로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망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은 품을 수 있으나 어느전도와 착란의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차안에선 이루어낼 수 없을 세계이다. 기형도가 희망에 대해 ‘어둡고 텅' 비어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숲으로 된 성벽' 자체가 비어 있고, 그 비어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도 빈 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 (植木祭) 중에서 기형도 시에서의 ‘죽음'은 시인의 우울한 세계관이나 유년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와 선택을 통해 ‘각오'한 것이다./ 이 죽음의 각오는 ‘둥글고 빈 통로'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통로에 들어간다는 일은 다른 삶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본 바 있었다. 통로 저 편에 있을 숲으로 된 성벽에 갈 수있으리란 희망은 절망으로 전화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고 빈 통로를 걸어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란 빈 희망이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숲으로 된 성벽이 아름답다고 외친 순간 그 아름다움의 덧없음이 부각되면서 죽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그 성벽은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란과 환상을 통해 대기에 구멍이 나는 순간을 파악하려는 기형도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때의 죽음으로 가는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가 점차 탁해지면서 ‘안개'로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안개) 중에서 푸른 대기 속의 둥글고 빈 통로는 ‘안개의 빈 구멍'으로 전화한다. 다른 삶으로 가는 ‘순간의 통로'가 안개에 의해 막혀버리고 순간이 가지는 죽음의 성질만이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안개로 뒤덮인 환상적인 마을을 구성함으로써 나타나고, 그 죽음의 성질은 다시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죽은 상태와 같은가를 간접적으로 포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네거티브 필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네거티브 필름 같은 가상적 세계는, 흐리멍덩한 색깔인 안개의 색깔로 대상의 윤곽만 드러내면서, 생명 없고 답답한 무엇으로 현상한다. 이 시를 더 읽어보자. 죽음의 공기인 ‘안개'의 빈 구멍은 사람들을 빨아들여 그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읍' 사람들의 삶은 ‘쓸쓸한 가축들'처럼 무리지어 있지만, 안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 읍은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데, 그것은 “한 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기도 하고, “방죽 위에 醉客 하나가 얼어 죽”지만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같은 시에서)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겁탈당한 여직공과 얼어죽은 취객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읍 안 사람들에겐 파괴당한 삶을 흐릿하게 바라보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여보게 하는 사건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들 눈앞에서 타인들은 안개 속으로 ‘지워지고' 그들은 제각기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안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 없게 만드는 세계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변화 없는 지속이 기억의 지속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반대이다. 이 읍에선,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이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지속의 시간성은 텅 빈 시간성이다. 기억이 없이 사는 것은 텅 빈 삶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적인 울림이 없는 시간이고, 그래서 미래조차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되어야만 미래가 있을 수 있어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는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다. 죽은 존재인 안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은 존재이다. 안개는 독과 같다. 그러나 그 읍 사람들은 안개를 마약처럼 마신다. 안개를 편하게 느낀다./ 안개가 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내보여야만 해서 “방죽 위의 얼굴들은 모두 낯설”어지고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읍은 ‘안개의 聖域'이 된다. 안개 속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 반어적 표현에는, 안개가 ‘무럭무럭' 키우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들 모두 검은 굴뚝과 폐수와 겁탈의 위험이 있는 공장으로 쓸쓸히 끌려가는 가축과 같은 삶임을 암시한다. 3.작품속 죽음의 포착 (안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를 선택했을 때 기형도 시가 발 딛고 있던 ‘순간'은 무서운 죽음의 세계-안개로 뒤덮인 읍과 같은-를 입벌려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지옥에서의 형벌-는 ‘느릿느릿 새어나'와 계속 ‘미친 듯이 흘러다'((안개)중에서)녀야 한다. 앞에서 본 (식목제)의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형벌은 정착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기억도 없이, 미래도, 삶도 없이 흘러다녀야 한다. 오직 흘러다님의 지속만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의 읍내 사람들은 명계(冥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삶을 잃어버린 이 유령의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일군의 기형도 시의 한 주제를 이룬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러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 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기형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현실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안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하게 안개에 중독된 유령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희망을 억눌러야 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쓰려고 한다. 불안이 죽음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을 머물게 한다는 말은 죽음들의 예감을 머물게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들이 방문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죽음이 그 길을 통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길이 흘러드는 정거장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육체 자체가 걸어다녀야 한다. 길이 걸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이 흘러 온다는 말은 자신이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길을 흡수한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길을 흡수하고 흡수한 길을 통해 불안-유령을 만나고 그 유령의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으로 시가 구성되게 된다. 이 유령과의 대면을 보여주는 대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白夜)에선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팡팡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속에서 “무슨 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문닫힌 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그의 등에 “軍用 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말이다. 담배 살 돈이 없을 이 사내는 아마 어린 아들과 함께 길에 쓰러져 쓸쓸히 얼어죽을 것이다. (가는 비 온다)에서는, 어느 가는 비 오는 날,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지 않는다는 시적 화자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전개하는 여러 상념들을 보여준다. 그 상념들은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나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와 같은 죽음의 여러 모습이다. 주검을 직접 보여주는 시도 있다. 가령,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죽은 구름))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검은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서늘하게 즉물화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우울하게 가고 있는 거리엔 주검들과 죽음에 대한 상념을 유인하는 ‘낡은 간판'들이 널려 있으며 기후마저도 그러한 상념을 피워 올리게 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좀 있으면 죽을 운명이거나 죽어버린 이다.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유령들이다. 이들은 회한과 외로움에 말라죽어 가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플랫폼에서 본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고((鳥致院)), 어느 카페에서 본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를 파내”면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라고 새겨 넣는다. 삶을 박탈당한 유령들의 포착은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포착하는 대상의 대부분인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시적 화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시적 화자의 내면 독백은 떠도는 자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 (진눈깨비) 중에서 진눈깨비 뿌리던 날, 시적 화자는 그날도 역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도 본다. 그리고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다.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적 화자가 주체가 되어 추억들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저 진눈깨비와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기억들을 불러온다. 그 기억은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오”시기에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걱정) 중에서)의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어 빈방에 혼자 훌쩍거린 기억을 감추고 있을 사람들이며, 역시 집에 들어가면(집이 있다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들일 게다. 죽어가는 이 유령들은 그런 기억을 깊이 품고 살아갈 것이며, 이는 다시 역으로 시적 화자 자신도 그 기억을 품고 쓸쓸히 죽어 가는 유령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을 발견하는 ‘흘러 다니기'는 점점 시적 화자 자신 안의 죽음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 되어버리게 된다. 시적 화자는 “곧 무너질 것만 그리워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한다. 무너지는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증언하는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과 같이 떠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자신의 다리를 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중에서)라고 울부짖는 여행자와 같은, 떠돎을 그만둘 수 없는 유령이다. 환상적 공간의 열린 순간을 통해드러난 죽음의 세계, 그리고 그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적 삶의 포착은, 이렇게 자신도 유령이라고 인식하는, 안개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안개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점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의 등장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은 더욱 전일화되고 가공할 것으로 드러낸다. 유령의 세계를 증언하는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경악의 순간은, 바로 메두사가 페루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형도의 시는 바로 그 경악의 순간을 포착한 카르파치오의 (메두사)란 ‘그림'과 같은 것일 터, 시 텍스트는 그 경악의 순간 자체, 또는 그 순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악의 순간을 구성하여 현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예술 텍스트가 구성되기 이전엔 그 경악의 순간을 우리는 ‘맞서게 되지' 못한다. 환상을 사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시-예술이 그 경악의 얼굴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경악의 순간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가 경악하는 순간을 객관화하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 진술과 사건들이 현실의 어떤 대응물을 지시한다고 본다면 곧바로 해석의 난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기사, 장례식, 망자의 혀, 없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 검은 잎,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 등,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 텍스트 안에 배치되었을 땐 이 단어들은 그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극적 공간 속으로 이 존재들은 새로 의미를 얻으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공포의 분위기에 맞추어진다. 어떤 가공할 권력에 의해 살육된 자들이라 상상할 수 있는 ‘무더기'의 실종된 자들-망자들-의 말하지 못하는 혀-잘린 혀일까?-는 유령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유령들은 벌써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린 사람들 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혀들은 이제 ‘거리에 흘러넘'친다. 장례식은 살육당한 자들 중 한 명의 장례식일까? 그 죽은 이의 잘린 혀 역시 거리에 흘러 다닌다. 물론 그 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잘린 혀들이 내는어떤 철버덕거리는 소리, 성대가 잘려나간 채 바람만 빠지는 쇳소리를 내는, 꿈틀대는 소리들을, 원한들을, 슬픔들을, 저주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청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혀가 ‘천천히 굳어'감을 자각한다. 그것은 시신을 실은 ‘백색의 차량 가득' 나부끼는 검은 잎 때문이다. 살육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유령이 검은 잎일까? 그 유령들-검은 잎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 혀는 굳어져오며, 이윽고 죽은 자의 혀가 된다. 그리하여 시는 죽은 자의 혀로 쓰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무당처럼 대신 말해주는 이가 된다. 정리하자면, 시적 화자가 온통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와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인 운전기사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가서 이 유령들이 시적 화자의 혀를 통해 죽음의 이 세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시적 화자에게 내리는 신들림을, 언제 살육될지 몰라 두려워하는(‘그 일이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의 음산한 어조로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공포의 순간/을 객관화시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동반한 순간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기형도의 시가 도달한 한 극점은 바로 여기다. 앞에서 보아온, 환상적 공간이 뚫어 놓은 순간의 구멍을 통해 나타나, 죽음을 퍼뜨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떠도는 유령들이, 이 시에선 하나의 전율케 하는 장면으로 종합되어 갑작스레,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경악의 세계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고 현실 세계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세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향유 대상으로서의 단순한 가상과는 달리, 시어가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뿜어내는(메두사를 본 메두사), 자기 파열이 가져오는 전율을 우리에게 이 가상 세계는 던져주는데, 그 객관화된 전율과 맞서는 독자는 충격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며 일상적 시간의 지속이 파열되는 ‘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적 순간의 충격 속에서 일상적 시간 안에 감추어진 안개와같은 죽음의 습기를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포의 세계는 기형도 시가 열어 놓은 ‘순간의 통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 속의 검은 잎)의 세계는 그 반대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순 없을까. ‘순간의 통로'는 다시 저 유토피아적인 미의 세계로, 숲으로 된 아날로지의 세계, 공기 방울 같은 환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날로지의 세계가 급전하여 유령들의 세계, 경악의 세계가 현현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경악의 세계가 급전하여 다시 저 아날로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두 극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경악의 세계는 다시 희미하게 ‘숲으로 된 성벽'으로 가는 길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적 세계는 부정성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빛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면 기형도의 시는 일상적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세계와의 화해의 열망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세계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 작업은 상당한 분석과 해석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도 비평적 재구성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니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기형도 시 텍스트는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몸을 벌리고 있다. (끝) ◆당선소감 영광이다.기쁘다.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과연 좋은 글을 내가 계속 써나갈 수 있을지,두렵기조차 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좋은 비평을 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큰일이다. 지금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문학이 다시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서,그리고 더욱 정치성이 짙은 비평에 대해서. 선거 행위만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윤리의 문제로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윤리가 단순한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면 삶에서의 권력과 활력 문제로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권력 망을 드러내고,비판하며 그것에서 삶이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고,삶의 활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문학의 윤리-정치성은 더욱 증폭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 그리고 비평이 정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인간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나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도,빈 말이 아닌 ‘고맙습니다.’란 말을 전하고 싶다. 이성혁 ●약력 67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동 대학원(국문학), 외대강사, 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심사평 김용하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과 정치적인 것의 윤리성’,오홍진의 ‘관념으로 빚은 소설의 성채’,이성혁의 ‘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은식의 ‘사물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여정’,장사흠의 ‘풍경의 미학과 권력의 탐색’이 주목을 받았다. ‘미적인 것…’은 미학적 범주들과 시적 언어 사이의 조응 양상을꼼꼼히 살핀 글이지만,미적 개념들을 상호 연관시켜 긴밀한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관념으로…’는 짐승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 사이에서 요동하는 정찬 소설의 권력의 역학을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스스로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사물과…’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갈아타며 정현종의 시적 여정을 차분히 밟아간 글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풍경의 미학…’과 ‘경악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풍경의…’는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개진된 권력의 내면화와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과정을,핵심 의미체들을 길어내며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글이고,‘경악의…’는 시인의 심리학에 치중한 종래의 평문들을 단김에 뛰어넘어 극적 구성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 글이다. 그러나‘풍경의…’는 기계적인 구성과 엉뚱한 결말이 글쓴이의 설익은 문학관을 엿보게 하였으며,‘경악의…’는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리멸렬해지더니 급기야 막다른 길로 뛰어들고 말아,심사자들을 경악케 하였다.하지만 패기만만한 도전과 그 패기가 창안해 낸 새로운 해석 세계는 썩 강렬한 인상을 남겨 마지막 선택의 근거가 되었다.이성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끈기 있게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정과리 김인환
  • 아들과 ‘행복한 책읽기’펴낸 주부 이문순씨/아이가 읽는 책 부모도 읽어라

    자녀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하면서 자녀에게만 ‘왜 책을 안 읽느냐.’고 야단을 치는 건 아닌지.최근 고교 1학년 아들과 함께 ‘진성이와 엄마의 행복한 책읽기’(인간과 자연사)를 펴낸 주부 이문순(45)씨의 자녀 독서지도법은 부모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하다. 경기도 부천시 도당고교에 재학중인 노진성(17)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가 주최한 독서왕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이듬해 ‘독서새물결추진위원회’ 주최의 독서대회 금상,문화관광부 장관상 등 교내외 각종 독서관련 상을 휩쓴 ‘책벌레’이다.글자를 깨우친 뒤 지금까지 읽은 책은 대략 3000여권.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통독한 이문열의 ‘삼국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읽었다. 진성이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된 데는 이씨의 남다른 열정과 노력이 숨어 있다.“백일 때부터 무릎에 앉혀 놓고 그림책을 읽어줬어요.알아듣지는 못해도 무의식중에 책과 친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죠.조금 커서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잘 살아있는 창작동화를 주로 읽어줬습니다.”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30분씩 책을 읽어주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힘들 때도 있었지만 하루중 엄마가 책 읽어주는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한글을 깨우치면서부터 진성이는 엄마도 못 말릴 만큼 책에 몰두했다.이때부터 이씨는 책을 읽은 뒤에 꼭 감상을 남기도록 했다.그림이든 글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게 한 것.“책읽기는 좋아해도 독후감 쓰기는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써라,저렇게 써라 주문이 많으면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독후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남기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책은 항상 진성이와 함께 서점에서 골랐다.도서단체나 신문 서평에서 권하는 책이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는 걸 원칙으로 했다.내용 뿐만 아니라 삽화,글자크기,제본 상태까지 꼼꼼히 따져서 책을 고른다.이씨는 아들이 편독하지 않도록 다양한 책을권하는 데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초등학교 때 과학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성이를 위해 이씨는 먼저 과학관련책을 읽은 뒤 재미있게 내용을 설명해 스스로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씨의 독서지도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포인트는 책에 대한 토론.이씨는 아들이 읽는 책을 항상 함께 읽는다.그래야 책을 읽은 뒤에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책을 매개로 한 가족간 토론은 자녀의 표현력과 사고력 향상에 영향을 줄 뿐더러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씨 가족 모두 독서에 관한 한 ‘도사’들이다.결혼 전 책과 거리가 멀었던 남편 노재일(49·인천 상수도사업본부)씨는 아내 대신 가끔 진성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글쓰기에 취미를 들여 얼마전 공무원 문예대전에서 수필 부문 행정자치부 장관상을 받는 기량을 뽐내기도 했다.역곡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혜성(10)군의 독서량도 벌써 1000권을 돌파했다.저녁식사를 끝낸 후 TV를 보는 대신 다같이 모여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이들 가족의 오래된 일상이다. “책 한권을 사면 가족 모두가 돌려가며 읽으니까 본전을 톡톡히 뽑는 셈이지요.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이 3000권 정도인데 책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갈 엄두를 못내요.”이 씨는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20평 남짓 되는 연립주택 1층 집은 방마다 책들로 가득하다.거실로도 모자라 지하에 8평 규모의 책방을 따로 만들었다. 진성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좀더 체계적인 독서지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딴 이씨는 요즘 이곳을 동네 도서실로 개방했다.두 아들을 키우면서 쌓은 독서지도 경험을 지역주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폭넓은 독서덕에 진성이는 지금껏 별다른 과외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국어와 사회탐구 과목은 선생님들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자랑한다.요즘도 하루에 한권 꼴로 책을 읽는다는 진성이.대학입시를 준비하려면 앞으로책 읽는 시간을 좀 줄여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이씨가 명쾌한 답변을 들려준다. “책을 읽는 목적은 책속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는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이런 과정이 진성이의 인생에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순녀기자 coral@ ◆이문순씨의 독서지도 노하우 이문순씨가 권하는 효과적인 자녀 독서지도 노하우 다섯가지를 소개한다. ◆책읽는 재미를 유발시켜라. 부모의 기준으로 책을 골라주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로봇이나 게임,스포츠 등 자녀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의 책부터 시작한다.일단 책읽는 재미를 들이면 저절로 책에 손이 간다. ◆하루에 30분씩 책 읽는 여유를 갖게 하라. 방과후 여러 곳의 학원을 쳇바퀴처럼 오가다보면 책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학교에서 돌아오면 일단 30분씩 꼭 책을 읽도록 한다.독서는 습관이다.어릴 때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성장해서도 책을 멀리하게 된다. ◆독후감은 반드시 쓰게 하되,원하는 대로. 스스로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마음껏 표현하게 한다.그림을 그리든,글을 쓰든 간섭하지 않는다.아이가 표현한 내용중에서 독특한 부분을 찾아내 칭찬해주면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 ◆자녀가 읽을 책은 부모도 함께 읽어라. 모범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고,책을 읽은 뒤에 자녀와 책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좋다. ◆책의 배경이 국내라면 그곳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라 예를 들어 박경리의 ‘토지’를 읽은 뒤에는 평사리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자녀들에게 이보다 좋은 체험학습이 없다.
  • 올바른 수면자세는 “잘못 자다가 관절 망가질라”

    충분한 잠은 신체의 피로와 면역력을 회복시키는 최대의 휴식이요,보약이다.그러나 잘못된 수면 습관은 오히려 피로를 누적시키는 것은 물론 척추 관절에도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관절 전문병원인 서울나우병원 성정남 원장은 “수면습관은 한번 굳어지면고치기 힘든데다가 무의식상태에서 한가지 자세를 오랜 시간 유지하게 되어척추 관절에 많은 변화를 준다.”고 말한다.특히 목과 허리 부위에 부담을초래해 경추통이나 디스크가 올 수 있고,평소 관절질환이 있는 사람은 병을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밤이 긴 겨울철엔 수면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성 원장으로부터 척추 관절을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수면자세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딱딱한 바닥에 가볍게 요를 깔고 자는 습관이 중요하다.바닥 강도가약할 수록 정상적인 척추 곡선이 틀어지게돼 오래 잠을 자도 온몸이 뻐근하면서 관절에 통증이 유발된다. 요는 접촉면이 눌려 아프지 않을 정도,약 5㎝ 두께면 적당하다.침대를 사용한다면,누웠을 때 척추의 곡선을 받쳐주고 어깨,엉덩이 등에 접촉되는 매트리스 면의 압력이 고루 퍼질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침대는 프레임에 직접 매트리스를 끼워넣은 것 보다는 프레임 위에 갈빗살이나 마루판이 들어간 상품이 좋다.이는 매트리스가 패널을 통해 보조적인힘을 받아 신체에 압력을 고루 분산시킬수 있기 때문이다.매트리스 탄성력은 움직이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에게 흔들림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 좋다. 눕는 자세는 천장을 보고 바로 눕는게 신체 접촉면이 가장 넓어 근육이나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척추 곡선을 바르게 한다.이 자세에서 무릎 밑에 30㎝ 높이의 베개를 받치며 척추 굴곡근의 수축을 감소시켜 더욱 편안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 옆으로 누워 자는 습관이 있는 경우 신체 접촉면이 적어 너무 딱딱한 바닥은 엉덩이와 어깨에 부담을 준다.바닥이 너무 부드러우면 척추의 정상 곡선을 유지시켜주지 못한다.따라서 매트리스를 눌렀을 때 자국이 남지 않는 고밀도 매트리스를 선택해야 한다.또 무릎 사이에 10㎝ 높이의 베개를 받쳐주고,무릎을 구부린 채 자면 골반과척추가 비틀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엎드려 자는 자세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엎드려 자면 목을 한쪽으로 돌린 상태가 유지돼 척추가 등쪽으로 젖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목과 허리 등 척추 관절에 압력을 주고,관련 근육에도 무리가온다. 임창용기자
  • ‘불교와 서양의 만남’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 가장 의미심장한사건”이라고 단정했다.최근 들어 서양에서 불교는 일부 지식층의 지적 호기심 차원을 넘어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얻고 있다.평화로운 붓다의 미소가 고난에 찬 예수의 얼굴을 대신할 날이 올 것인가. ‘비트족의 우상’ 잭 케루악을 비롯해 톨스토이·보르헤스·헉슬리 등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한 작가는 수없이 많다.작가들뿐만 아니다.철학자 쇼펜하우어 또한 유럽이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으며,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는 불교를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이다.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리틀 붓다’,장 자크 아노의 ‘티베트에서의 7년’,마틴 스콜세지의 ‘쿤둔’ 등 거장들은 앞다퉈 티베트 불교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만들었다.서양 사람들이 왜 이토록 불교에 관심을 보일까.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의 칼럼니스트인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쓴 ‘불교와 서양의 만남’(양영란 옮김·세종서적 펴냄)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현대의 ‘불교적 인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서양의 만남이 어떤역사적 장면과 일화를 남겼는가를 살핀 책이다.서양문화에 얽힌 불교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고대 서양인들은 불교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다.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따라나선 이들이 불교 승려를 만나고,인도의 아소카왕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제자들이 생겨난 정도다.동양의 신비한 종교에 대해 어렴풋한 이미지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중세에는 14세기 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나옴으로써 불교 승려들과 붓다의 삶에 관해 더욱 많이 알게 됐다.그러나 불교에매료된 서구인들은 그것을 종교적 논쟁의 도구로 이용하는가 하면,기독교적으로 각색한 붓다 일대기를 지어내기도 했다.도미니크 수도사는 정적에게 일격을 가하려고 불교를 이용했으며,디드로·볼테르 등 백과전서파는 이 새로운 동양 종교를 이용해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임을 자임하는 가톨릭 교회를굴복시키고자 했다. 이 책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 중에서도 특히 쇼펜하우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톨스토이가 “가장 천재적인인간”이라고 부른 쇼펜하우어는 30세 되던 해인 1818년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냈다.여기서 그는 불교 철학과 매우 비슷한 사상을 전개한다.‘고통이 모든 삶의 근본’이라는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쇼펜하우어 철학은 불교 사상과 많은 부분에서 맥이 통한다.삶과 고통을 동일시하고 고통의 원인을 욕망으로 보는 점,자아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하는 점 등이 똑같다. 문제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니체 등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유럽 지식인과 동시대 사람들이 불교와 쇼펜하우어 사상을 자주 혼동했다는 사실이다.젊은 시절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제자로 불교에 심취했으며,불교를 기독교보다 많은 장점을 지닌 종교로 이해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불교를 염세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여겼으며,유럽이 불교로 개종하게 될까염려했다.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불교에 대한 서양의 몇몇 편견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말 불교가 서양인 마음을 사로잡게 된 데는 비교주의(秘敎主義)의역할이 컸다.무엇보다 서양의 비교주의와 불교를 접목시키려 한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가 한몫 했다.1875년 헨리 스틸 올코트 대령과 러시아출신 여성 헬레나 블라바츠키가 뉴욕에서 만든 신지학회는 당시의 조류인 유물론과 교조주의적 종교들을 비판하며 세를 불려갔다.그러나 신지학회는 불교를 중심 교리로 삼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왜곡했다.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개인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붓다의 가르침이,유신론과개인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둔갑한 것이 그 한 예다.양차 세계대전 사이 점차 늘어난 불교 신자는 대부분 신지학을 통해 불교를 접했다.신지학은 서양 철학과 신학을 불교개념에 입각해 재해석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다. 이 책은 1989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시기를 ‘불교적 인본주의’라는 범주로 묶는다.1989년은 서양과 불교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상징적인 해다.프랑스를 비롯한 구미 지역에 널리 불교를 전한 칼루 린포체가 이해에 입적했고,서양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반교황’ 또는 ‘현대판 교황’으로 새겨져 있는 달라이 라마가 노벨상을 받은 것도 이 때다.특히 전통 티베트 불교를 계승한 최후의 큰스님 칼루 린포체의 입적은 서양 불교사상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된다.그의 입적 후 서양에서의 불교 전파는 새 장을 열게 된다.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은 1989년 20세기 최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층 고조됐다.아울러 불교가 지닌‘현대성’도 새삼 조명받고 있다.불교는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현대과학과 양립 가능한 유일한 종교”다.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현실에서 불교는서양인들에게 ‘실용적인’ 정신적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스스로 고갈돼가는 서양의 정신에 깨달음의 빛을 던져 준 불교는 바야흐로 구미사회에서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할리우드 간 소복입은 일본귀신 “역시 무섭군”

    한국판과 일본 원판 ‘링’이 개봉된 지 3년만에 할리우드판 ‘링’(The Ring·내년 1월10일 개봉)이 도착했다.검고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소복의 귀신,우물에 빠져 죽은 원한 맺힌 영혼….다분히 동양적인 정서를 할리우드에서는 어떻게 그려냈을까.할리우드판과 일본판의 비교를 통해,동·서양이담아낸 서로 다른 공포의 우물 속을 휘저어 본다. ◆귀신 이야기 vs 죽음의 이미지 할리우드판은 일본판의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빌려왔다.한 여기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조카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산장에서 소문의 비디오를 보게 되고,7일간 비밀을 캐러다니다 억울하게 우물에 빠져 죽은 소녀를 발견한다는 뼈대는 같다.하지만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방식 때문.우선 일본판에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여고생 사이의 귀신 소문을 이야기 전개의 매개로 활용한다.특히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하면안 죽는대.”라는 대사는 익숙하다.비밀을 푸는 열쇠로 활용되는 희미한 소리와 비디오 화면의 떠다니는 글자 역시 일본판의특색이다. 반면 할리우드판은 7일간 각각 찾아오는 죽음의 징조에 초점을 맞췄다.마치 ‘세븐 사인’처럼 성서적 종말의 코드로 공포를 부르는 것.비밀을 푸는 열쇠 역시 글이나 소리보다는 이미지다.비디오 내용도 더욱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넘실댄다.무의식적으로 사진의 얼굴을 볼펜으로 마구 긋는 장면,마치 ‘식스 센스’처럼 죽음을 예감하듯 그림을 그리는 아들의 모습,영화 전반에흐르는 강렬한 색채 등은 원판의 무채색 공포와 달리,마치 살아 꿈틀대는 생물 같은 공포를 영상화한다. ◆동양적 직관 vs 서양적 추리 비밀을 풀어가는 방식도 다르다.일본판은 신통력에 의존하는 반면,할리우드판은 논리적 추론이 압도적이다.비디오 속 영상을 하나하나 추적하면서 서서히 비밀의 장소에 다가서다 보니 러닝타임이 일본판보다 20여분 길어졌다.집요하게 추적하는 할리우드식 스릴러의 재미를 가미한 것.주인공인 여기자 모습에도 다른 세계관을 반영한다.일본의 레이코는 겁에 질린 채 떨면서 전남편의 도움을 받는 약한 존재이지만,죽은 시체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모성을가진 여성으로 표현된다.하지만 할리우드의 레이첼은 독립심이 강하고 주도적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여전사 타입. ◆할리우드판만이 가진 매력 그밖에도 할리우드의 ‘링’은 색다른 매력으로 가득차 있다.특히 산장주인,정신병원 직원의 감초연기는 극도의 긴장을 반복적으로 이완시켜 영화적 재미를 살렸다.갑자기 바람이 불어 깊은 우물에 빠지는 등 액션 어드벤처의 느낌도 담았다.일본판의 열렬한 팬이라면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더 가슴 졸이며 감상할 수 있을 듯.미국에서는 역대공포영화 가운데 흥행 성적 8위를 기록했다.‘멕시칸’의 고어 버빈스키 감독,나오미 왓츠·마틴 헨더슨 주연. 김소연기자 purple@
  •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책을 한권 쓰고 일곱 달 머문 사람은 글을한편 쓰지만,인도에 7년동안 거주한 사람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인도란 그렇게,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역설의 나라’다.때문에 인도의 이미지는 흔히 보는 이의 ‘전지전능한’시선에 의해 박제되고 복제되고 또 무의식적으로 수용된다.‘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옥순지음,푸른역사 펴냄)은 바로 이러한 무분별한 ‘인도신화 만들기’에 일침을 가하는 책이다. 인도 근대사 전공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먼저 류시화·강석경·송기원 등 내로라하는 ‘인도전문’작가들의 산문집과 소설을 텍스트로 택해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베스트셀러 작가 류시화는 최근 출간된 산문집 ‘지구별 여행자’에서 인도에 관한 가장 ‘흔한’접근법을 보여줬다.신비와 명상,깨달음의 나라로서의인도.“…생은 어디에나 있었다.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열매처럼 익어갔다.…” 또 그 뜬구름 잡는깨달음 이야기인가.인도는 왜언제나 삶의 교훈과 각성을 안겨주는 곳이어야 하는가.‘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류시화의 시선은 인도를 지배한 식민주의자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그의 순수한 ‘인도 보기’ 역시 인도를 대상으로 여기고 ‘나와 다른’ 인도를 강조하며,10억 인구를 가진 광대한 인도의 다양한 층과 켜와 색채를 무시한 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를테면 정신주의적인 측면만 골라 본다는 것이다.그런 점에서 류시화는 19세기에 득세한 수많은 ‘키플링 아류’와 같은 배를 탄 셈이다.저자에 따르면 류시화는 후진적인 인도와 일정한 사회적·심리적 거리를 두며 인도를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강석경이나 송기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많은 소설가들에게 인도는 그저 추상으로 존재한다.‘실존하지 않는 그 무엇’이니까 그만큼 ‘무책임하게’ 그린다.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구원을 얻으려고 갑자기 인도로 떠난다.송기원 소설의 한 주인공은 이혼하고 잡지사를 그만둔 뒤 술을 마시고 여관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인도로가자!”고 외친다.그런가 하면 강석경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의 “허위적인 결혼생활을 탈피”하려고 인도로 간다.은희경의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의강선배도 갑자기 직장을 내버리고 캘커타로 떠난다.주인공들은 무력한 순간에 홀연히 인도로 향한다.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인도가 거기에 있으니까 하는 식이다.그야말로 모호하고 무력한 글쓰기의 전형이다. 강석경과 송기원의 소설에 나오는 인도는 더러움과 가난만 가득할 뿐,즐거운 일이나 사람다운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강석경은 ‘문명 이전의본능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송기원은 ‘굶주린 아귀’로 인도 사람을그렸다.“인도인은 동물적인 기능만 한다.…개나 코끼리,원숭이보다 낫지 않다.”고 한 200년전 헤이스팅스 인도 총독의 말과 어쩌면 그리 닮은 꼴인가.저자는 이러한 묘사는 20세기 초 “난 그들을 언제나 일종의 동물 같다고 여기지요.우스꽝스러운 염소나 예쁜 사슴 같다구요.절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냉철한’시선을 연상케 한다고 말한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한때 인도를 돌아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그는 인도를 가난하고 지저분한,구제불가능의 나라로 그릴 참이었다.그러나 글을 쓰기 전에 다시 돌아본 인도는 전혀 다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트웨인이붓을 꺾은 것은 불문가지다.‘인도’를 들먹이기 좋아하는 작가라면 한번쯤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구잡이식’인도묘사는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작가들이 생산하는 텍스트들은 대부분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담고 있다.저자는 이를 입증하고자 19세기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상대로 만들어낸 ‘박제 오리엔탈리즘’의 뿌리를 파고든다.영국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인도의 이미지를 역사가 없고 야만적이며 비합리적이고 나약하고 열등한 것으로 왜곡했다.그 고착된 이미지 탓에 인도는 숱한 세월 박제 상태였다.그리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이미지를내면화하고 있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이러한 시선이 200년의시차를 건너뛰어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소비된다는 사실이다.‘지독하게 가난하고 더럽고 혼란스러운 인도,그래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애처럼 행복을 잃지 않는다.’이런 종류의 이미지야말로 영국 식민주의가 낳은 ‘오염된’ 지식인데,우리는 무심코 이를 복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저자는 문학이나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이같은 이미지를 ‘이중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서양이 구성한 동양이 아닌 ‘동양이 구성한 동양’이라는 중층적인 구조를 띠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안의 또 다른 파시즘이다.”라는 말로 끝을맺는다.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이념적 도구인 파시즘은 반공이나 전체주의 같은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남을 나와 다르게 보고 그것을 그대로 틀 안에 가둬버리는 것,그러한 시선이야말로 파시즘의 출발점이다.이 책에는 우리의 의식 속에 강력하게 자리잡은 닫힌 의식체계 즉,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98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이런책 어때요/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外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무용가.61세로 삶을 마감한 니진스키는 천재 예술가로서는 비교적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정작 그가 무대에서 활동한 시간은 짧았다.스물아홉 이후로 정신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면서 그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니진스키의 전기작가 리처드 버클은 그의 일생을 “10년은 자라고,10년은 배우고,10년은 춤추고,그리고 나머지 30년은 암묵 속에 가려진60평생”이라고 표현했다.이 책은 20세기초 유럽 문화계의 판도를 바꾼 아방가르드의 주요 인물인 니진스키가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오가며 써내려간 영혼의 자서전이다.2만원. ●군중과 권력 군중현상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유럽 사상계의 고전.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저자는 20세기의 가장 ‘르네상스적인 지성’의 한 명으로 꼽힌다.1910년 핼리 혜성 출현에 따른 종말론적 패닉 현상,1911년 타이태닉 호 침몰 소식을 듣고 거리로뛰쳐나와 비통해하던 인파,나치의 유태인 학살 등 그가 살았던 20세기 전반기만큼 군중현상이 폭발한 시기도 없었다.군중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 책은 군중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파시즘에 대한 한 보고서’다.2만 8000원.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전세계에 230개의 지국을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뉴스 에이전시인 로이터통신의 팔레스타인 보고서.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은 한 때 서로를존중하며 공존했던 역사도 갖고 있다.‘바빌론의 탈무드’를 보면 기근이 났을 때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 교도들에게 구휼을 허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1492년 스페인에서 유태인들이 쫓겨날 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이들에게 생존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그러나 두 민족간의 분쟁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평행선을 달린다.이 책은 두 민족의 ‘이유있는’ 적대감에 초점을 맞췄다.1만5000원. ●나를 변화시킨 것들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벼락맞은 대추나무에 도장을 새겨 쓰면 행운이 오거나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사악한 기운과 액운을 막아준다는 얘기가 있다.서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새의 깃털이 이와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다.깃털은 샤먼과 사제를 표시하는 정신적인 상징이었으며 왕과 지도자의 특권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고대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아시아와 켈트족의 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치료나 신비한 힘의 상징으로도 쓰였다.적잖은 문화권에서 깃털은 하느님에게 기도를 전달해주는 전령사다.이 책엔 깃털에 얽힌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화들이 담겼다.9500원. ●미술사의 역사 고대에서 오늘날까지 미술사학이 전개되어온 역사를 22장으로 나눠 적었다.고대의 플라톤과 크세노크라테스의 활약,르네상스 시대 ‘미술사의 아버지’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의 탄생,그 영향을 받아 나온 카렐 반 만데르와 요아힘 폰 잔트라르트 등의 저작을 소개한다.‘시장 마이어의 성모’라는 그림의 진품 여부를 둘러싸고 일어난 ‘홀바인 논쟁’의 미술사학적인의의도 밝힌다.또한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 의해 촉발된 ‘라오콘 논쟁’을 상세히 소개,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시대적 한계를 탈피하지못함을 보여준다.2만 5000원. ●영혼의 새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한반도 신석기 모계사회를 다룬 고고학 소설.주인공인 고고학도 클라라가 한국에 유학중 자신의 정체성과 인류문화의 시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액자소설 양식으로 그렸다.무당굿에서 접신 체험을 한 클라라는 영혼의 새로 변신해 8000년 전 신석기 시대로 날아간다.클라라는 일처다부제 모계사회인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삶과 문화를 재구성함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저자는 유물을 통해 인류의 성과 권력의 관계를 탐구하는 ‘젠더 고고학자’로 강원도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을 세계고고학사전에 올린 인물이다.9000원.
  • 문학평론가 오창은씨 비판“친일문인문학상 문학사 왜곡”

    ‘동인문학상’을 비롯해 친일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 제도에 준열한 비판이 제기됐다. 문학평론가 오창은(32)씨는 최근 발간된 계간 실천문학 겨울호에 게재한 ‘문학사의 뒤안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친일문인 문학상’이라는 기고에서 “친일문인을 앞세운 문학상 제도는 친일문인의 문단권력과 언론권력이 공생해 문학사적 평가에 개입하려는 음모”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동인문학상을 친일문인을 앞세운 문학상 제도의 ‘원죄’로 꼽은 그는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은 1955년 ‘동인 문학상’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그리고 82년에는 ‘조연현 문학상’,85년에는 ‘육당 시조문학상’,89년에는 ‘소천 비평문학상’90년에는 ‘팔봉 비평문학상’이 제정됐으며 지난 2000년과 2001년에는 다시 ‘이무영 문학상’과 ‘미당 문학상’이 새로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오씨는 “특정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제도’는 바로 문학사적 평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라며 “음모는 문학상 제도를 통해 다수의 영향력 있는 문인들을 끌어들이는 ‘인적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관철된다.”고 지적했다.“때로는 심사위원이라는 자격으로,때로는 수상자로 친일 문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무의식 중에 친일 행적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서’에 도장을찍는 형국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오씨는 일부 친일문인 문학상이 큰 상금으로 문인들을 꾀고 있다는 아픈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지난해 제정된 ‘미당문학상’의 경우 “시 한편에 3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는 파격적인 지원을 제시해 문인들을 갈등하게 만들었다.”며 “국내 최초로 종신 심사위원을 위촉하고 상금을 5000만원으로인상한 동인문학상도 문단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비꼬았다. 그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수상을 흔쾌히 수락한 것과는 대조적인 거부사례도 소개했다.팔봉비평문학상을 받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모순된 태도’와는 달리 지난 98년 이 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최원식의 경우 “친일문학이 본격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연구자”임을 자처해 거부했으며,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을 기리는 ‘심산상’을 받은 백낙청도 “심산상을받은 사람으로서 친일문인의 상을 다시 받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소개했다.또 작가 황석영·공선옥이 2000년과 2001년 동인문학상 심사 대상에 오른 것을 거부한 사례를 거론하며,황석영이 당시 “‘언론권력이 한국문단에줄세우기 식의 힘을 행사하려 한다.’고 한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씨줄날줄] 위인의 아버지

    브리태니카 등 백과사전이 자세히 다룰 만큼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를 ‘한’사람 가운데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들이 많다고 한다.브리태니카에 전기의 깊이로 소개된 600명 중 3분의1이 15세 이전에 부모를 잃었다.영국 역대총리 49명의 35%,미국 대통령 40명의 34%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나 어머니없이 살아야 했다.근대의학이 대중화되기 전 15세 이전 부모 상실 평균치는 17%였다.지금은 이 평균치가 8%로 낮아진 가운데 특히 옛날이나 가까운 지난 세기나 비범한 인사 중 아버지를 일찍 잃은 경우가 많다. 히틀러 스탈린 나폴레옹 워싱턴,뉴턴 다윈,마돈나 레넌 매카트니,바이런 키츠 워즈워드 브론테 자매 몰리에르 스탕달 졸라 톨스토이 등이 열다섯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세계의 역사를 바꾼 독재자와 정치가가 해당되고,문인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쓴 영국의 올리버 제임스에 따르면 기업가군도 이 부분에서 일반보다 훨씬 높아 무려 30%가 15세 전 조실부모 내력이다.‘가족 생활에서 살아남기’란 책 제목이 시사하듯 저자는 굉장히 풍자적이고 반어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이런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즉 일반이 생각하듯 부모를 일찍 잃는 것은 핸디캡이기는커녕 오히려 창의력과 권력쟁취의 생산적인 수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역사와 통계는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상식파괴적이고 전복적인 시선으로 통계 수치를 다시 본 뒤 반어적 결론을 한번 ‘장난삼아’ 내려보자.아들을 역사적인 수준까지 출세시키고 싶은 아버지여,일찍 죽어라. 저자 제임스는 물론 제임스의 연구 대상 인물은 모두 서양인이다.칭기즈칸,공자 등 동양에도 조실부모한 비범한 인물이 숱하지만,‘아버지’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하나의 명백한 지표가 될 수 있다.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부모,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것 자체를 자식의 부덕,죄 탓으로 돌렸다.그런데 서양인과 서양을 읽는 최고로 정밀한 자의 하나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이다.아버지와의 영원한 경쟁,무의식적 죽임의 과정을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극복 프로세스를 담고 있다.아버지를 일찍 여읜 서양의 위인이 많다는 사실과 이 ‘아버지 극복’관념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김재영 논설위원 kjykjy@
  •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내한 ‘러시안 햄릿’ 등 3편 선보여

    보리스 에이프만(56)은 오늘날 가장 성공한 러시아 안무가로 꼽힌다.그런 그를 ‘틈새’전략으로 성공한 안무가라고 부르면 실례가 될까? 에이프만은,‘지젤’과 ‘백조의 호수' 등 세계 정상인 볼쇼이나 키로프 발레단의 고전 레퍼토리와의 경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창작적 실험을 거듭하며 러시아 현대발레의 기수로 우뚝선 인물이다. 활동 초기 옛 소비에트정부로부터 사회주의적 예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차례 경고를 받았음에도 그는 발레에서 ‘모험’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4년이 흐른 1995년,정부로부터 ‘러시아의 국민적 예술가’란 최고의 찬사를 받아냈다.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국내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에이프만은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키로프 발레 학교,말리 오페라 발레 극장 등에서 안무가로 경력을 쌓았다. 지난 75년 키로프 발레단에서 ‘불새’를 안무하면서 일약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7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을 만들어 87년부터 뉴욕, 파리, 런던 등 문화 중심지에서 해마다 공연하고 있다. 에이프만이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네번째 방한하여 새달 3일부터 전국을 순회한다.이번엔 ‘러시안 햄릿’‘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돈키호테’를 선보인다.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서울공연에서는 3편을 전막공연한다. 러시안 햄릿’(1999)은 18세기 중엽의 러시아가 무대.유럽 황실들의 세력에 맞서 정치적 강국으로 키우고,문화와 경제를 부흥시킨 예카테리나 여제는 방탕한 황제인 남편 표트르 3세를 암살하고 권좌에 올랐다.살해 장면을 목격한아들 파벨 1세는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내내 불안한 인생을 살아 일명‘러시안 햄릿’으로 불리웠다.에이프만은 이를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냈다.3∼5일 오후8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995)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작이다.아버지 표도르와 삼형제의 이야기로 인간에 관한 심오한 철학과 종교, 장대한 스케일을 에이프만이 두 시간짜리 무용으로 압축했다.6일 오후8시,7일 오후4시. ‘돈키호테’(1994)는 세르반데스 원작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정신병동에 수용된 기이하고 가련한 환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스페인 기사인 ‘돈 키호테’라 믿는 몽상가가 있다.그의 무의식과 환상을 정신병동의 고독과 처절한 현실에 대비시켰다.8일 오후 3시·7시. 에이프만 발레단의 내한은 지방의 발레애호가들에게 특히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다.일정은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이 9일 ‘러시안…’과 10일 ‘카라마조프…’,울산 현대예술관이 11일 ‘돈키호테’,대전 대덕과학문화센터가 12일 ‘러시안…’,춘천 문화예술회관이 14일 ‘러시안…’과 15일 ‘까라마조프…’,의정부 예술의전당이 17일 ‘까라마조프…’를 무대에 올린다.LG아트센터 주최, (02)2005-1426. 주현진기자 jhj@ ■에이프만 발레 왜 인기있나 보리스 에이프만이 안무한 작품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발레 스타일로 꼽힌다.이유는 간단하다.무슨 얘기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데다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무용평론가 문애령씨는 “에이프만의 발레는 인간을 자극할 수 있는 무용의 다양한방식을 혼합해 대중적인 교감을 끌어낸다.”면서 “관객의 취향에 맞춰 볼거리 중심의 발레를 만들기 때문에 개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고 평했다. 에이프만의 작품에는 고전 발레가 갖는 확실한 줄거리와 무대 효과를 십분활용하는 스펙터클한 장치들이 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교육으로 다진 무용가들의 기교를 100% 활용한 테크닉도 돋보인다.현대발레처럼 인간의 몸 이외에 기구를 사용한 표현력도 강조한다.볼거리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감성,그리고 기교가 어우러져 관객들이 지루해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러시안 햄릿’은 줄거리를 미리 알지 못해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작품.예카테리나 여제의 치세를 나타내는 거대한 황금빛 태양 등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장치부터가 압도적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무용수들의 몸 동작에서 눈을 뗄 틈이 없으며,‘돈키호테’는 화려한 풍경,무대연출,의상,테크닉 등 관객으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게 하는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평가다. 주현진기자
  • 생각하는대로 기계가 움직인다

    생각만으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기기가 개발됐다. 대전대학교 전자공학과 김응수(金應洙·48) 교수팀은 사람의 뇌파를 이용,제어가 가능한 기기 개발에 성공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기기는 사람의 머리 부위에서 측정되는 안면근(Facial Muscle) 신호를 통해 생각을 읽고 그대로 움직이도록 고안됐다. 이를 활용하면 목 아래가 마비돼 타인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전동 휠체어를 이동시킬 수 있다.또 언어능력이 없는 장애인이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글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될 전망이다. 장애인들이 이 기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안면근 신호를 읽을 수 있는 머리띠 형태의 측정장치만 머리에 두르면 된다.안면근 신호를 발생시키는 훈련은 10여분이면 충분하다. 이 기기는 산업현장의 로봇 제어나 어린이 장난감류 등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김 교수는 “외국에서 눈동자의 움직임을 이용해 문자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기도 했으나 눈의 움직임은 무의식적으로도 많이 일어난다.”며 “안면근 신호는 의지에 의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훨씬 정확하게 작동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추가 연구를 통해 이번에 개발된 기기가 실생활에 적용되면 중증 장애인의 생활여건을 개선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오피니언 중계석/ 석학 대니얼 데넷 ‘의식의 과학적 탐구’ 강연 - ‘두뇌의 의식체계’ 풀어낼수 있다

    현대과학의 마지막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흔히 ‘인간의 의식’이 꼽힌다.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의식의 세계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란 이야기다.그러나 인지과학과 심리철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대니얼 데넷(60)은 의식 현상은 전혀 신비롭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탐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철학자다.미국 터프츠대학 교수인 그가 한국학술협의회 초청으로 방한,8일과 9일 ‘의식의 과학적 탐구-철학적 장애를 넘어서서’란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주요 내용을 간추린다. 의식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다.의식은 물리적·생물학적 현상으로 매우 놀랄 만큼 교묘하게 작용하기는 하지만,그렇다고 기적적이거나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마술쇼가 진짜 마술이 아닌 것과 같다.놀랍고 신비해 보이던 마술쇼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더이상 신비롭게 보이지 않는다.마찬가지로 의식의 ‘마술’도 두뇌가 어떻게 의식을 일으키는지를 이해하고 나면,결코 불가사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신비롭게 생각하는 기시감(旣視感)을 보자.어떤 이들은 때때로 저승,다른 천체,다른 차원에서 전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경험한다고 한다.그러나 기시감은,재닛이 반세기 전에 제시한 가설에 따르면 지각과정의 어떤 이상으로 인해 하나의 지각경험이 과거와 현재의 경험으로 둘로 쪼개짐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일 수 있다.즉 실제로 과거 어느 시점에 경험한 것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재닛의 가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뇌의 이중채널 모델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즉 시각(視覺)체계가 A와 B라는 두 채널을 갖고있고,두 채널은 유입되는 모든 신호를 새로운 것과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신호로 분류하는 ‘친숙함탐지기(familiarity detector)’란 일종의 관문을 통해 신호를 보낸다고 하자.(실제 뇌의 해마가 이 기능을 갖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그리고 B채널을 통한 신호전달이 지각과정의 이상으로 지연돼,A채널로부터 신호가 전달되고 나서 1000분의 몇초 정도 이후에 친숙함탐지기에 전달되었다고 하자.이럴 경우 A채널 신호는 이미 친숙함탐지기에 새로운 경험으로 등록되기 때문에 B채널 신호가 도착하면 친숙함탐지기는 ‘이미 이것을 본적이 있다.’란 판정을 내리게 된다. 즉 단지 1000분의 몇초 전에 등록된 것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방금 기시감을 겪었다.’‘전에 본 적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또 모종의 교란(뉴런의 죽음,신경조절 기능 이상,피로 등)이 친숙함탐지기에 잘못된 판단을 야기해,기시감과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의식을 위해 등장하는 ‘데카르트 극장(Cartesian theater)’은해체되어야 한다.데카르트 극장 속에서 상상된,소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일은 두뇌에 있는 다양한 하위기관들에 배분되어야 한다.주체는 해체되어야 하고,각자의 임무를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마음이 없는 기관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의식에 관한 올바른 이론은 의식을,기계들이 윙윙 돌아가지만 그것을 감독하거나 즐기거나또는 목격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버려진 공장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이론이다. 물론 이런 견해를 혐오하는,즉 데카르트 극장을 해체함으로써 예견되는 ‘자아의 상실’에 관해 불안해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예컨대 제리 포더는 “만일 나의 머릿속에 컴퓨터들의 공동체가 살고 있다면,누군가 이들을 통합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그것은 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식의 ‘마술’은 무대마술과 마찬가지로,우리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설명되지 않을 뿐이다.두뇌가 ‘두뇌 사용자의 환상’을 일으키는 비(非)신비적인 방식들을 잘 음미한다면,물리적 두뇌가 어떻게 의식을 창조하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임창용기자 sdragon@
  • 空士 첫 여성 전대장

    공군사관학교 사상 처음으로 여성 전대장이 탄생했다. 공사는 지난달 28일 훈육관 회의를 통해 생도대표인 전대장에 박민경(21·51기) 생도를 선출,9일 오전 대운동장에서 ‘성무의식’을 통해 생도지휘권 이양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8일 밝혔다. 박 생도는 내년 2월까지 4개월간 2개 대대,8개 중대 800여명의 전체 사관생도를 통솔하며 대대장 및 참모 생도들의 업무지도,일반 생도들의 각종 행사와 내무생활을 감독하게 된다. 전대장은 학업성적이 상위 30%이내에 있고 통솔력이 있는 4학년 생도 중에서 선발하고 있으며,임기는 4개월이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러 진압가스 마취제 판명

    (파리·모스크바 AFP 연합) 유리 쉐브첸코 러시아 보건장관은 30일 러시아특수부대가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진압작전 때 사용한 정체불명의 가스는 마취제의 일종인 ‘펜타닐’과 ‘할로세인’의 혼합물이라고 밝혔다. 이 마취제는 수술시 단독 사용되거나 또는 복잡한 심장병 수술시 때때로 함께 투여되기도 한다.그러나 이 마취제를 과도하게 흡입하면 간 손상,폐 발작,구토,무기력증 그리고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이번 인질 구출작전은 펜타닐과 할로세인을 결합하면 강력한 효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즉 펜타닐이 먼저 인질과 인질범의 뇌를 정지시키면 할로세인이 이들을 무의식 상태에 빠지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펜타닐과 할로세인은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이 치안 및 폭동 진압을 위해 허용한 비살상 화학물질에 포함돼 있다. 모르핀보다 수백배 이상 효능이 우수한 마약성 진통제 일종인 펜타닐은 1968년 정맥 마취제로 병원에 도입됐으며 심장병 등 어려운 수술시 자주 사용된다.
  • [열린세상] 미래를 생각하는 유권자

    요즘은 대선 정국이어서 정치판이 혼란스럽지만,그와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국민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마음이 설레는 것 같다.그것은 변화에 대한 꿈 때문일 것이다.과거에 비해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할 사람은 드물며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환경 등 각 분야마다 쉽게 눈에 띠는 불합리한 소지가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이렇게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큰 만큼 정치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고,다들 이번 선거를 벼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여망에 부응하자면 정치인들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 분명하다.하지만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큰 만큼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도 정치인들 못지 않게 달라져야 할 것이다.소수의 정치 지도자에 기대야 어떤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계몽기를 통과하지 못한 시대에나 나오는 발상이다.특히 아직도 혈연,지연,학연의 끈이 사회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에서는 집권자가 달라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가끔 우리나라가 전근대적 무의식의중력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첨단전자제품을 팔아 큰 이윤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랄 때가 있다.이런 놀라움은 중국이 전자제품을 수출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완화되기는 했지만,그래도 여전히 불가해하다는 느낌이다.다만 남의 나라를 상대로 이윤을 남기는 것만큼 윤리적 측면에서도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덧붙여 세계화가 가속화될수록 윤리적 우위가 상업적 경쟁력의 중요한 조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앞으로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보다 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 도덕적 진보인지 모른다.지금과 같은 방식과 속도로 삶의 환경이 바뀌어간다면 점점 더 전인적 인격과 자질을 함양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사실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테크놀로지 문명이 심화된다는 것은 그 만큼 다종다양한 사람,물건,장소들이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묶일 뿐 아니라 이들간의 교류가 활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인터넷 혁명과 세계화의 물결이 처음 닥칠 때 이미 예감할 수 있는 것처럼,이런 상황에서는어제의 척도가 오늘의 척도이리라는 법은 없다.오늘의 위계질서가 내일도 유지되리라는 보장도 없다.개체가 네트워크에 관계하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창의적으로 고안될 여지가 커질수록 그 네트워크는 매순간 형태를 달리하는 가변체로 변한다. 이런 상황은 인간에게 커다란 불안과 동시에 커다란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먼저 불안은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데 있다.보통 개인의 정체성은 한 번 정해지면 쉽게 변하지 않고 안정성을 띠리라 생각되어 왔지만,앞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네트워크에 새롭게 접속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만들어나가야 할 과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한편 희망은 개인이 언제나 창의적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에서 온다.불안의 뿌리에서 희망이,희망의 뿌리에서 불안이 싹틀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 문화는 점점 더 정착성을 잃어 가는 대신 강한 유목성을 띠게 될 것이다.여기서는 이미 정해진 규칙을 습득하고 따르는 능력보다는 아직 없는 규칙을 고안하는 능력이 요구될 것이다.이런 점을 생각하면 혈연,지연,학연 등과 같이 농경사회의 유산을 자연스러운 것인 양 간직하고 있는 현실이 퇴행적으로 보인다.우리는 아직도 어떤 정착성 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첨단 기술상품을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선진국에 버금가는 문화를 꿈꾸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꿈이다.정치인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는데,그런 말들을 듣다 보면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가 정치인들에서 비롯된다는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하지만 올 겨울에 선택하고 심판해야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라기보다 유권자인 우리 자신인지 모른다.이번 선거가 과거의 정치적 감각을 버리고 미래의 현실에 부합하는 정치적 감각을 익히는 기회가 돼야 하는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 철학
  • 오피니언 중계석/ 이종영·김재인씨 ‘들뢰즈 논쟁’-들뢰즈와 파시즘 그 진실은

    ‘20세기 형이상학의 완성자’‘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불리는 들뢰즈.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프랑스 철학의 현장에 국외자로 서 있었고”(장 자크르세클) “큰 사상의 주변에서 기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드니 유이스망)는 평가도 받아왔다.이같은 상반된 평가는,무엇보다 독창적인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이 매우 난삽해 읽어내기 힘들다는 데 기인한다.이런 맥락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그동안 여러 사조와 유행에 묻혀 자의적으로 해석돼 왔다. 최근 우리 지성계 일각을 달구는 ‘들뢰즈 논쟁’또한 그 연장선 위에 놓인다.‘진보평론’편집위원인 이종영씨가 계간지 ‘문학과 사회’58호에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라는 글을 올리자 그 다음 호에 김재인(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강사)씨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폈다.논쟁의 핵심을 짚어본다. 이씨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반(反)파시스트로서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또 반대로 반 파시즘을 겉으로 내세우면서 은밀히 파시즘을 실천하는지도 모른다고 본다. 스피노자가 신의 이름으로 신을 부정했듯이,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는 두 저작을 통해 그들의 파시즘을 드러내 보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흔히 들뢰즈 철학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적’ 파시즘은 그들의 프로이트 비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비판의 핵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천 개의 고원’에서 프로이트를‘의식과잉의 백치’라고 규정한 그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실재를 부정한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프로이트의 ‘괴테적 고전의 교양’이 창작해낸 허구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앙티 오이디푸스’에서는 태도를 바꿔,오이디푸스는 존재하지만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그들의 비판은 이론적 비판과 실천적 비판 사이에서 사뭇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김씨는 ‘문학과 사회’ 편집진이 급진적인 반(反)들뢰즈의 ‘표상’으로서 이씨의 글을 실은 의도에 동의한다.그렇지만 이씨가 초보적인 문헌작업마저 무시한 채 억측과 선입견만으로 논지를 전개한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철학은 개념의 정확성을 생명으로 한다.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다.그러나 정작 들뢰즈에게는 개념을 마구잡이로,정의없이 사용한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에 대해 김씨는 들뢰즈는 언제나 개념을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사용하는 철학자라고 응수한다.들뢰즈의 서술이 집약적이고 생략이 많아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김씨에 따르면 파시즘 논의는 인간주의의 틀에 갇히면 출발조차 하기 어렵다.그런데 이씨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非)인간주의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다고 비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핵심 논점은 ‘주체성을 결여한,맹목적으로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출’로,이씨에 의하면 이것은 결국 파시즘을 의미한다.그러나 김씨는 이같은 내적 논리로는 그들의 파시즘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파시즘 문제는 정치(精緻)하면서도 정치(政治)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이라는 표현은 원래 물질적 생산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욕망과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사상을 종합하고자 생겨난 개념이다. 한편 이씨는,김씨의 글에 재반론하는 성격의 글을 최근 인터넷에 올렸다.자신의 입장을 단편적으로 밝힌 이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의 ‘이론적 우상숭배’는 상징적 질서의 구멍을 섣불리 메우려는 욕망에 근거해 성립한다고 지적한다. “공자·주자를 숭배하던 전통은 이제는 들뢰즈라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문제는 논증적 질서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학계의 풍토다.”라고 질타한다. 정리 김종면기자 j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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