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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작지만 당당하게 강한 나라’의 역설/김진석 인하대 철학 교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주장은 매우 유치하고 불쾌한 사건이지만, 졸지에 우리를 동아시아의 현실 속으로 홱 던져놓았다. 이 와중에서 평화를 강조하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한번 근본적인 고민을 해보자.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 있을까? 되도록이면 그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평화적인 방향으로 가자.’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평화는 그 자체로 신성한 목적일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일컫는 상태는 실제로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과 분쟁의 연속이다.‘문명충돌론’은 다양한 문화관계를 단순화하니 피하도록 하자. 그러나 문화가 세련될수록 폭력적 차이와 차별이 깨끗하게 없어지기는커녕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픈 역설이다. 교육‘전쟁’도 단순히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학벌과시 때문에 생긴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근본적으로는 과거처럼 초월적 권위나 전쟁을 통해 진정되거나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갈등과 차이들이 오히려 문화 안으로 깊이 내면화되고 더구나 정신적으로 심화되면서 생기는 역사적 현상일 것이다. 또 사회구성원들에게 점점 더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해야 하는 복지국가는 크고 작은 무역‘전쟁’에 내맡겨진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공격성을 피할 수 있을까? 국가 관계를 그저 힘을 통한 억지력이나 공포의 균형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구시대적 냉전 모델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무조건적인 평화를 절대목표로 삼으면서 마치 갈등과 분쟁이 전혀 일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도 강박적 근본주의일 듯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극단 쪽으로 치닫는다. 사실 이 두 극단은 서로 대립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서로 끈끈한 동반자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 잡는 일은 힘들어진다. 탈현대 시대에 들어와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이론이 생긴 데에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민족주의가 배타적 혹은 제국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이 와중에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저항적’ 민족주의를 바람직한 모델로 삼았다. 거기엔 지킬 만큼 지키면서도 팽창은 절제하는 미덕이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정당한 민족주의조차 ‘마약’이나 ‘아편’으로 폄하하는 관념적 탈민족주의 경향이 심한 상황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단순히 평화나 저항으로 자족하면서 어떤 ‘공격적’ 태도도 무조건 두려워해야 할까? 침략에는 결연히 반대하되, 저항과 공격이 깨끗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경우 절대적으로 평화적 혹은 저항적 민족주의에 그쳐야 한다는 말은 소심함이거나 위장된 강박이 아닐까. 실제로 현재 한국이 국제적 혹은 세계적으로 자부심을 갖는 영역은, 바둑에서 정보산업에 이르기까지, 많건 적건, 그리고 좋건 나쁘건, 공격적 태도나 경영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 한·중·일의 민족주의는 모두 상승곡선을 그린다. 긍정적이면서도 위험한 국면이다. 일본의 팽창주의야 벌써 오래된 것이지만, 중국은 19세기 이후 오랜만에 다시, 그리고 한국은 어쩌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건국 이래 처음일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가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큰 동력도 이 자부심에서 왔다. 이제까지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갈라졌던 좌파와 우파들도 갑자기 밀려온 이 당당한 ‘대한민국주의’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러나 이 자부심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엄청난 긴장과 도전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이제 미·중·일에 대해 단순히 소극적 저항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기꺼이 미·중·일 모두에 한 번 맞장 떠보자고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최소한 이들 나라 사이에서 더 이상 쫀쫀하게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 균형잡기야말로 힘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미국보다도 미국박사를 많이 따오고 엄청나게 조기유학을 가는 한심한 나라에서 그런 당당함도 없다면, 사회에 자긍심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 교수
  • 국공합작 ‘하나의 중국’으로 가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양안 분단 56년 만에 ‘국공(國共) 정상회담’이 성사될 전망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31일 롄잔(連戰) 타이완 국민당 주석의 중국 방문을 공식 초청,‘제3차 국공합작’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중국 자칭린(賈慶林)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주석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장빙쿤(江丙坤) 부주석을 단장으로 한 국민당 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대리해 롄잔 주석을 초청했다. ●“하나의중국 인정땐 어느 정당이든 환영” 자 주석은 “우리는 롄잔 주석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대륙을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한다면 민진당 주석을 포함, 타이완의 어떤 정당이라도 대륙 방문을 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들이 과거에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상관없이 양안관계 발전과 통일 문제를 놓고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타이완과 홍콩 언론들은 롄잔 주석이 빠르면 오는 5월 베이징을 방문, 양안 분단 후 처음으로 ‘국공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국공 정상회담이 실현될 경우 북방군벌 타도를 위한 1차(1924∼27년)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위한 2차(1937∼45년) 합작에 이어 60년 만에 3차 국공합작이 이뤄지는 것이다. 타이완 언론들은 “3차 국공합작은 중국의 반국가분열법 제정으로 경색된 양안 관계를 회복하고 타이완 독립을 주창하고 있는 민진당에 대한 견제가 주요 목표”라고 분석했다. 민진당에 정권을 내주고 제1야당으로 밀려난 국민당은 ‘국공 정상회담’ 카드로 연말 지방선거와 2008년 총통선거의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 당국 역시 국민당과 손잡고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을 견제하는 동시에 양안 경색의 돌파구를 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타이완 집권 민진당 내분 조짐 3차 국공합작의 물꼬를 튼 국민당 대표단은 양안 모두로부터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원(孫文) 카드’를 활용했다. 올해 쑨원 서거 80주년을 맞아 묘지 참배와 양안 경제·무역 증진을 명분으로 내걸고 광저우,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북상길을 밟았다. 이같은 움직임에 따라 타이완 집권 민진당의 내부 분열 조짐도 보인다.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은 국민당 대표단의 방중을 거세게 비난했지만 민진당 주석 출신인 셰창팅(謝長廷) 행정원장(총리)은 협력 확대 차원에서 지지를 표시했다. 또 석유화학 및 전자 재벌인 치메이그룹의 쉬원룽(許文龍) 전 회장과 최대 PC 제조업체인 에이서의 창립자인 스탠 시 전 회장이 천 총통에게 등을 돌렸다. oilman@seoul.co.kr
  • 日 ‘전방위 외교전쟁’ 왜?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이 패전 60주년을 맞아 한국과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주변국은 물론 미국과 EU(유럽연합) 등 주요국들과 ‘전방위 외교마찰’을 빚고 있다. 사안마다 심각한 내용이다. 따라서 무차별적인 외교갈등이 지속되면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왜 이처럼 ‘고립외교’를 각오하면서 강력한 힘의 외교, 실력외교를 밀어붙이는 것일까. 패전 후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았다.”는 국민정서가 깔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대중국 무기금수 해제 EU와도 대립 고이즈미 총리는 27일 중국에 무기수출을 재개하려는 EU 움직임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일본을 방문 중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의 회담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다. 시라크 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지일파여서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미국과는 미국산 쇠고기수입의 재개 여부로 미국의 무역보복설이 심상찮다. 주일미군 재배치를 둘러싼 일본측의 언론플레이도 미측을 자극하고 있다고 도쿄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일본 정부고위관계자가 미국의 각종 이전협상 제안내용을 언론에 흘려, 해당 지자체나 시민단체가 반발하도록 유도해 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양국 정상의 상호방문이 3년반 동안 중단된데다 동중국해 가스전과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영유권 등을 둘러싼 분쟁이 한창이다. 최근에는 중국의 반일감정이 격해지면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서명운동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러시아와는 북방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ㆍ러시아명 쿠릴열도)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일본방문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북한과는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씨 유골의 가짜 논란 등으로 관계가 지극히 냉각된 상태다. ●2차대전 전의 옛 영광을 꿈꾸는가 고위 외교소식통은 일본의 이같은 전방위적 ‘외교전쟁’에 대해 “2차대전 패전 후 미국의 필요에 의해 일왕제를 존속시킨 것이 뿌리”라면서 “일왕을 중심으로 단결,2차대전 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패전 60주년을 맞아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시대변화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일본사회의 주역은 전후세대다. 전쟁의 참상과 책임을 모르는 이들은 “다른 나라처럼 할 말도 하고, 군대 보유도 하면서 보통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경제대국에 맞는 대접을 원한다. 아베 신조 자민단 간사장 대리가 대표적 인물이다. 또 90년대 초반부터 경제거품이 꺼지면서 자존심이 구겨지자 ‘외교갈등을 감내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올인하는’ 전략을 택했다는 분석도 있다. 언론들도 이러한 갈등 국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일본 정부편을 드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28일자에서 한국 중학교의 국사교과서가 독도관련 기술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도쿄신문은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비판 담화에 대해 “사실 오인도 있다.”고 주장했다. taein@seoul.co.kr
  • [중앙PSAT연구소 실전풀이]

    ■ 문제 다음 글이 나타내고자 하는 관리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중앙부서의 어느 국장이 자신의 자리를 팔겠다고 신문지상에 경매광고를 내었다면 아마 한국사회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 벌어졌다. 다만 100년쯤 전의 일이다. 250년쯤 전에는 프랑스의 위대한 개혁주의 정치철학자였던 몽테스키외가 관직을 돈이 많은 사람에게 매매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지지했으며, 비슷한 주장을 영국에서 벤담도 하고 있었다.17,18세기에는 실제로 관직매매가 성행하였다. 관직을 매매한 이유도 다양하다. 국왕이 전쟁을 하거나 외국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을 강화하면서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관직을 팔았던 것이 시발점이 되었고, 이를 사들인 사람이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기도 하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려울 때는 다른 사람에게 관직을 팔아서 노후생활을 하기도 한다. 연금인 셈이다. 과거 봉건시대에 국왕에게 공이 있는 자를 영주로 임명하고 봉납을 받거나, 봉건영주가 기사에게 토지를 배분하고 충성과 일정한 봉납을 받는 것과 관직매매가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관직매매가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을 행정부패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복자나 정복자의 후손이 국왕이 되어 정복된 영토내의 국민이나 국가를 소유하기 때문에 관직이 모두 국왕의 개인 소유물이었다. 이러한 가산국가에서는 관직을 어떻게 처분해도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국왕이 변덕을 부려서 전혀 능력과 성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나, 아첨 잘하는 탐욕스러운 귀족을 관료로 임명하는 것보다는 돈 많은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돈을 벌면 농민도 관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관직을 농민에게 매매하는 것은 농업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검소하고 열심히 돈 버는 중산층이 관료로 임명될 가능성 때문에 벤담도 관직매매가 개혁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 극히 부패한 행정행위가 극히 개혁적 행위이던 때가 있었다.-(행정학의 새로운 이해), 정정길-중에서 (1)염결(廉潔)이란 목민관의 본무(本務)이며 모든 선(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2)군자가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는 무거운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3)무릇 조정의 권귀(權貴)가 사사로이 글을 보내어 간절하게 청탁을 하더라도 이를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4)절(節)이란 한도로 제약하는 것이다. (5)가난한 친구나 곤궁한 친척은 힘을 헤아려서 구제해야 한다. ■ 풀이 및 정답 윗글은 시대에 따른 행정부패개념의 변화를 나타낸 글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때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때가 있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했다는 점이다. 과거 관료들이 국민 위에서 군림하던 수탈 행정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현대의 관리는 국민(고객)에게 봉사(service)하는 자리로 바뀌어야 한다. 즉 현대의 공직자는 최우선적으로 모범적 윤리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청렴한 공직자의 자세를 표현한 예시 (1)이 답이 된다. ■ 보충설명 공직자의 자세(예시 (1):목민심서 율기 6조)에 대해 더 알아보자. -염결(廉潔)이란 목민관의 본무(本務)이며 모든 선(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염결하지 않고서 능히 목민을 할 수 있었던 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염결이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염결한 것이니, 사람이 염결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무릇 지혜가 깊은 자는 염결로써 교훈을 삼고 탐욕으로써 경계를 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목민관이 염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을 지목하여 마을을 지날 때 더러운 욕설이 비등할 것이므로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뇌물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누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랴만 한밤중에 한 일이 아침이면 드러난다. 보내는 물건이 비록 사소하다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이미 맺어졌으니 사사로움이 이미 오고간 것이다.(중략)청탁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염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한 소리가 사방에 이르고 아름다운 이름이 날로 빛나면 또한 인생 일세의 지극한 영광인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호남의 길지 호남엔 여느 도 못지않게 길지가 많다며, 성질 급한 독자들은 내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런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정감록’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모태로 삼는 까닭에 그 두 산부터 설명을 시작해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대시킨 것뿐이다. ‘남격암’에 가장 먼저 언급된 호남의 길지는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이다. 덕유산 아래서도 무풍(舞豊) 북쪽에 있는 동굴 옆 음지가 으뜸이라 했다. 그곳은 어떠한 환난도 피할 수 있는 명당이라 한다.‘피장처’에선 약간 다른 곳을 지적해, 덕유산 남쪽의 원학동이야말로 숨어 살기 적당하다 했다. ●덕유산 부자마을 한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덕유산의 성격을 흙산이라 보았다. 지리산과 성질이 같은 것으로 본 것인데 남격암과 마찬가지로 산의 북쪽에 있는 무풍에 주목한다. 이중환은 바로 그 옆의 설천(雪川)도 길지로 간주한다. 그는 남사고가 무풍을 복지(福地)로 파악했던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덕유산의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무풍의 바깥쪽은 온 산이 비옥해 부자 마을이 많다. 이는 속리산 이북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사고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도 덕유산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과연 그렇다네. 실로 덕이 넉넉한 산이 덕유산이요, 풍요로움을 기꺼워하다 못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곳이 무풍이라네. 우리나라 12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덕유산. 그 주산은 향적봉(香積峰·1614m)이요, 산세의 흐름이 유장해 무풍의 삼봉산(1254m)에서 흘러내린 용맥이 수령봉(933m), 대봉(1300m), 덕유평전 (1480m), 중봉(1594m), 무룡산(1492m) 삿갓봉(1410m), 남덕유(1508m)까지 무려 100리를 굽이쳐 흐르며 영호남을 갈랐다네. 충청, 경상, 전라 3도를 굽어보는 향적봉에 한번 올라보게. 가까이는 북으로 적상산을 발치에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을 바라보네. 서쪽을 둘러보게나. 운장산, 대둔산이 버티고 서있어. 남쪽은 어떠한가. 남덕유를 코앞에 걸어두었네. 지리산 반야봉도 가물거리네. 동쪽을 어찌 빠뜨릴쏜가. 저 멀리 가야산과 금오산이 보이지 않나? 향적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옥 같은 샘물줄기가 한참을 흐르다가 구천동 33비경을 만들어 놓았도다. 요즘은 북사면에 무주 리조트가 있다지. 서남쪽의 칠연계곡도 큰 장관일세. 봄의 덕유산은 칠십 리 깊은 계곡에 붉은 철쭉꽃이 불타오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온 산을 적시네.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꼬까옷을 입히지. 겨울이면 설화를 피운 고목이 고요한 은세계를 더욱 빛낸다네. 참 아름다운 곳이야! 길지란 대부분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하며 은근히 풍요로운 곳에 있기 마련이네.” 덕유산에 대한 남사고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나는 이쯤에서 줄이기로 했다. ‘남격암’은 호남의 명산 내장산(內臧山)도 길지로 손꼽는다. 이른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라는 내장산은 가을 단풍 하나로만 전국에 유명하다. 이 산의 단풍은 30여종의 나무들이 토해낸 붉고 노란 빛깔이 어우러진 전원 교향악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풍에만 혹할 뿐이나 실은 난세를 피할 길지로서 이만한 곳이 무척 드물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던 왕조실록이 내장산에 옮겨져 잠시 화를 피했다. 그 때 만일 내장산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왕조실록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장산은 과연 길지로다.‘피장처’는 내장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담양 추월산도 숨을 만한 곳이라 추천한다. 추월산은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사이에 걸쳐 있는데, 구한말 호남의병운동의 한 거점이었다. ●길지 변산에 웬 도둑 떼가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호남 굴지의 길지는 부안의 변산(邊山)이야.” 남사고는 그렇게 주장한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만일 제주도가 다른 나라 땅이 되고 말면 일은 그릇된다고 했어. 이는 왜 그런가? 제주에서 배를 타고 북상하면 전남 강진, 영광, 또는 전북 부안에 곧장 뱃길이 닿을 테니 위험할 수밖에. 어쨌거나 내 생각은 그래. 기왕 변산을 찾았다면 그 동쪽 계곡까지 들어가라. 하지만 그 산을 빠져나가지는 말라! 언제는 속리산 이북으로 가지 말랬다가 이젠 또 변산 동쪽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니, 자네들이 좀 헷갈리겠군. 내 말의 뜻은 그만큼 속리산 이남이 길하고 변산이 좋다는 말이야.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참 이상한 노릇이지만 좀 조사해본 결과 문학속의 변산은 도둑의 소굴이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주인공 허생이 변산의 도둑 떼를 인솔해 무인도로 떠나간 걸로 돼 있다.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난(戊申亂·1728년)’ 무렵 변산의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도 불리는 무신난의 주체는 남인(南人)·소론(少論)·소북(少北)의 연합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집권층인 노론(老論)을 몰아내려고 난을 일으켰고 거기에 전국 각지의 도둑들·서얼·상민·천민들이 상당수가 가담했다. 호남 여러 고을의 빈농들과 변산의 도적들도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빈농은 자칫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히 도적 무리에 포섭되었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산의 도둑 떼는 허생의 영도 아래 각자 배우자와 소 한 마리씩을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 곳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 외국과 무역에 종사 하는 등 유족한 삶을 누린다. 변산 도둑들의 입장에서 볼 때 허생은 다름 아닌 ‘진인’이었다. 혹자는 허생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이상향으로 도둑들을 이끌고 숨었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현실에 순응하며 합법적인 개혁을 꿈꾸던 연암 박지원에게서 허생 이상의 주인공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닐까? 그야 어쨌거나 허생전에 변산이 도둑의 소굴로 설정된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변산은 골짜기가 깊고 사방으로 뻗어 있어 은신에 적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산이 길지로 손꼽혔다. 하지만 도둑 떼들이 이러한 자연 조건을 적극 이용한 결과, 조선 후기엔 그들의 요새로 둔갑하기도 했다. 남사고는 말하기를,“변산이 중요한 까닭은 그 산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좀더 깊은 연유가 있었지.”라며 매우 의미심장하게 운을 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기회를 마련해 경청하기로 한다 ●조계산의 ‘십팔공’ ‘남격암’은 전라도의 또 다른 길지로 조계산(曺溪山·887m)을 예로 든다. 전남 승주군에 있는 이 산엔 고찰(古刹) 송광사(松廣寺)가 있어, 산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절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를 올라가면 천자암(天子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이 암자의 오른편에 곱향나무 두 그루(천연기념물 제88호)가 우뚝하다. 높이가 12.5m, 가슴높이쯤에서 둘레가 3∼4m나 되는 거목인데, 나무에 얽힌 유래가 특이하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 이 절에 머물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중국에 건너가 황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다음 그 인연으로 왕자 하나를 제자삼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천자암에 오른 그들은 나란히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차츰 거목으로 자랐단다. 보조국사 일행의 도력도 만만치 않지만, 조계산의 지력도 여간 왕성하지 않은 모양이다. 워낙 명산에 자리잡은 까닭에 송광사의 “松”자는 길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 글자를 해체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돼,18명의 국사가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조국사를 비롯해 모두 16명의 국사가 나왔다 한다. 앞으로 2명이 더 나오게 돼 있는데 그때가 되면 모든 중생에게 불법이 바로 전해져 용화세계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유추되듯, 조계산은 최고수준의 길지라 미륵세상의 도래를 약속하는 곳이 된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곧게 뻗어 내린 용맥이 서해바다를 눈앞에 두고 멈춰선 곳에 한 길지가 있다.‘남격암’이 말한 월출산(月出山)이 그곳이다.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불쑥 솟아오른 월출산은 단순히 많은 큰 산의 하나가 아니다. 산 이름 그대로 달맞이하는 산이라서, 이 산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달 신앙의 대명사로 우뚝 솟았다. ●왜적도 못 들어온 팔령산 월출산에서 좀더 남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남단의 길지 팔령산(八靈山)이 웅자를 드러낸다.‘남격암’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나라의 지세를 논할 때 섬이 바라보이는 남쪽은 절대적으로 피할 일이다. 다만 한 예외가 있어 팔령산이 바로 좋은 산이다.” 남사고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소백산 줄기가 고흥반도 동쪽까지 내려오다 끝맺음을 한 것이 바로 이 팔령산이야. 정상의 봉우리가 모두 8개인 산이지. 팔영산(八影山)이라고도 부른다네. 예전엔 팔전산(八顚山), 팔형산(八兄山), 팔봉산(八峰山)으로도 불렸어.‘택리지’에서 이중환은 이 산이 마치 섬처럼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고 했어. 일찍이 내가 복이 있는 땅이라고 기술했다고도 썼어. 기특한 내 후배 이중환은 늘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말을 곧잘 인용한단 말이야! 아는 대로 임진왜란 때는 왜선이 고흥반도를 타고 침입하려고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어. 이게 다 팔령산의 지기(地氣)에 힘입은 거야. 고흥의 옛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팔령산의 넷째 봉우리인 사자봉이 대단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치닫는 형상이라고 할까. 사자봉의 혈(穴)은 국왕의 옥쇄인데 마지막 봉우리에서 그만 미완성으로 끝나 여간 아쉽지 않아. 일제시기 그 놈들이 조선의 맥을 끊어버리려고 팔봉에다 큰 쇠막대를 깊이 박았어. 그 놈들은 한국 사람들을 미신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뒤가 켕겼는지 갖은 못된 짓을 다했어. 이제 와선 멀쩡한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하지를 않나. 가소롭기 짝이 없어! 한데 말이야, 당시 그 놈들이 혈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바람에 그 뒤 고흥선 진짜 장군이 나왔다고들 하지.” 팔령산이 명산이란 소문은 진작 전국에 널리 퍼졌다. 각지의 무당이 몰려와 무속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난리가 닥치면 산 속 깊이 은신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삼십년 전엔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가 이 산에 본거지를 두고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기도의 길지 “나는 주로 속리산 이남인 하3도(충청, 경상, 전라)에서 길지를 찾았지. 속리산 이북인 중부지방엔 별다른 길지가 없다고 보는 편이야. 영산인 태백산에 가까운 강원도 남부지역에 한두 군데 있을까 말까. 그 외엔 사실 주목되는 곳이 하나도 없는 셈이야. 정감록에서도 말했을 걸. 오대산 이북은 몹시 흉하다고 말이야.” 그러나 ‘피장처’와 ‘두사총비결’엔 중부지방의 피난지가 다수 언급돼 있다. 우선 ‘피장처’에 따르면 양주 산내촌에서 북쪽으로 80리를 들어가면 길지가 있다 했다. 또한 양근 소설촌의 북쪽 40리쯤에서 좀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은 길지가 있다고도 했다. 요새 설곡리(雪谷里)라 불리는 곳 말인데 고려 말 임제종(臨濟宗)을 개창한 명승 보우(普愚)가 설곡리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여주의 사전촌에선 장수와 정승이 나온다고 했고, 광주 율평 동쪽에 있는 동굴은 난리 때 여덟 성씨가 함께 숨어 살 곳이며 장차 56대 동안 장수와 정승이 출생할 곳이라고 했으니 굉장한 명당이다. 또한 ‘피장처’엔 이천 북면의 광복동, 가평의 대아, 도성 등도 피난할 만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인천의 영종도 역시 복지라 했다. 오늘날은 국제비행장이 들어선 영종도는 고려 말부터 단 한번도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무사했다는 것이다. ●중국 지관 두사총이 손꼽은 길지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중국에서 왔다는 지관(地官) 두사총이 쓴 비결로 알려진 ‘두사총비결’에도 경기도의 길지가 두어 군데 언급된다. 그 중 하나는 화약산이다. 가평에서 36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산이 바로 그 산인데 부근엔 집다리골 휴양림도 있어 쉬어 갈 만하다. 그밖에 포천의 도성산도 길지로 말해진다. 도성산은 길가에 가까워 산세가 얕다는 평을 듣지만 전쟁의 기운이 미치지 않고 간사한 기운도 침범하지 못한다고 믿어진다. 고려가 망했을 때 어느 선비는 도성산 밑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충절을 맹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선비가 지조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도성산의 지기 덕분이라 한다. ‘두사총’은 강화의 마니산(467m)도 길지라 일컫는다. 인천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에 있는 이 산은 강화섬에서 가장 높다. 마니산은 한반도 남쪽의 한라산, 북쪽의 백두산까지 거리가 똑같아 주목된다. 마니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머리를 뜻한다.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이름이 그렇게 됐다. 마니산이 길지로서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 때문이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높이 5m의 자연석을 포개어 만든 이 단의 기단부는 원형이며 그 상단은 네모꼴이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란 고대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 단이 축조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고려 때부터 국가가 제관을 파견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황해도의 길지 북부지방엔 길지가 없다는 게 ‘정감록’의 근본 주장이다. 이와 달리 ‘피장처.’는 황해도 곡산의 명미촌을 길지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명미촌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해 희령과 잇닿은 경계 지점에 숨으면 어떤 난리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격암’은 “수양산(首陽山·899m)은 백미(白眉)의 난을 당하면 물 마른 개울의 물고기처럼 되느니라.”라고 했다. 수양산이 좋긴 해도 눈썹 흰 사람이 난리를 일으키면 도리어 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수양산은 황해남도 벽성군(碧城郡)과 해주시(海州市)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격암이 거론한 서북지방의 유일한 길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아, 우리가 즐겨써 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 조차도 큐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지난 10일. 일본 시마네현의회 총무위원회가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안을 가결시켰다. 대통령과 한국 외무부가 아무리 ‘내 마누라론’을 주장하고, 침묵으로 묵살하고, 소극으로 일관해도 일은 끝내 벌어진 것이다. 사실 흥분할 것도 없다. 사태는 예정된 수순을 따랐을 뿐이므로. 주한 일본대사의 당당한 영유권 주장, 아사히신문 경비행기의 독도 진입작전, 게다가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한 국내 극우인사들의 맞불작전까지, 돌이켜 보면 우연은 하나도 없다. 영토분쟁을 표면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가기 위한 일본 지도부의 야욕이 마각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19세기 에도막부, 홋카이도 식민화 ‘다케시마’ 주장은 망언이 아니며, 망언은 실제로 없으니 망언이란 말을 써서도 안된다. 체계적이며, 장기지속적인 심대한 해양정책에서 비롯된 국가의지의 또다른 표현일 뿐 결코 돌출발언은 아니다. 일본의 노골적인 행태는 가히 고삐 풀린 망아지 수준이되, 관·민 합동으로 질서정연하게 치고 빠지면서 주연·조연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등 화려한 연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시네마현의 조례 제정을 일본 정부가 만류했다고 하나 전혀 믿을 게 못된다. 양동작전일 뿐이다.‘식민지근대화론’의 미몽에 취해 선전·선동을 일삼던 지식인들을 비롯, 차제에 지난 수백년간 일본이 아시아 바다에 남긴 족적을 단계적으로 살펴 감고계금(鑑古戒今)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19세기에 에도(江戶) 막부는 ‘숲속의 사람들’ 아이누족의 영토였던 북해도, 즉 홋카이도를 식민화한다. 일단의 식민경영 세력이 ‘숲의 섬’을 치고 들어갔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 보호구역에 갇힌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아이누들은 박제화되어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2만여명의 혼혈아로 잔존할 따름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에 이어 사할린으로 손길을 뻗친다.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반환문제로 시끌벅적하지만, 사실 러시아도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없는 나라다. 차르 시절,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동진을 거듭해 사하·축치·에벤키·캄챠달 등이 살던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들 아닌가. 일본은 이어 남쪽의 류쿠(우리측 사료에는 유구로 기록됨)를 병합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붙인 이름이고 본래는 류쿠국이었다. 독립 왕국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과도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며 조공·중계무역에 힘써 문화가 크게 번성한 나라였다. 무역선 활동 범주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등 서남아시아까지 뻗친 해상국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 성립 6년째 되던 1609년 규슈 남부의 번주인 사쓰마한(薩摩藩)은 3000군사로 류쿠를 점령한다. 단, 정략적 입장을 취해 국제무역에서 엄청난 차익을 남기는 사탕수수 같은 경제적 수탈은 감행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수준에서 방관·조절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류쿠는 일면 일본에 수탈당하면서도 중국에 조공의 예를 갖추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다. 사실 사스마한의 점령 이전에도 류쿠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 왔으니, 류쿠와 일본의 악연은 해묵은 것이다. 그러던 일본은 1879년 드디어 ‘류쿠 처분’을 단행한다. 이로써 독립왕국 류쿠는 오키나와현으로 강등되어 일본에 병합된 이래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일본의 해양식민화 정책은 전략적 포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집요하게 기다리며 정확히 잡아먹을 시기를 노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日정부, 남양군도 침략행위 전면 부정 1874년 청·일전쟁의 전후 보상으로 타이완을 챙긴 것은 교과서에 나온 상식.‘대륙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긴 셈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길 자격이 있는지도 되물어야 한다. 타이완에는 푸젠(福建) 등 남부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도 많았지만 이른바 타이완 원주민인 토착 타이완족이 살고 있었다. 일본의 타이완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들의 운명 역시 아이누처럼 박제화되고 만다. 타이완총독부에서 갈고 닦은 식민경영의 노하우가 이후 고스란히 조선총독부로 전수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해양식민화가 홋카이도, 사할린, 류쿠, 타이완 같은 섬 정도에 그친 것은 아니다.1919년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본은 사이판, 괌 등이 속한 이른바 남양군도를 자치령으로 분배받는다. 세계열강의 태평양 분할정책에서 그 지분을 챙긴 것. 남양군도는 서태평양 적도 이북의 작은 섬인 미크로네시아의 동쪽 끝 카리바시와 서쪽의 괌을 제외한 엄청나게 드넓은 바다.19세기말 이래로 독일이 지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령이 되었고,1947∼1986년에는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은 미국의 태평양 신탁통치제도가 되었으니, 태평양은 태평과는 무관한 격동의 바다였다. 일본인들은 남양군도로 들어가 설탕, 술, 수산가공품 같은 사업을 펼쳤으며 한때 사이판의 일본인이 10만을 헤아리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패전 후 최초로 오는 6월 극우인사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대동하고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전몰자들을 추모할 계획이다. 남양군도에 대한 침략행위의 전면 부정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일왕이 선 격이다. 당연히 대표적 극우언론인 산케이는 일왕의 사이판 방문 소식에 ‘감격해 하며’ 이를 전면에 도배하는 충성을 과시했다.‘위령의 여행’으로 묘사하면서 ‘남양군도’를 지배하던 향수를 노골적으로 되살려 낸 것이다. 팔라우의 수도인 코로(Koror) 외곽으로 빠지다 보면 코발트빛 바다 위에 ‘아이고 브리지’가 떠있다. 머나먼 팔라우까지 징용왔던 한국인들이 기아와 고통 속에 ‘아이고’를 연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오죽하면 ‘아이고다리’로 명명되었겠는가. 정신대로 끌려온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하루에 수십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피를 토하고 죽어간 남양군도로 ‘신의 아들’이 ‘위령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한 즉,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격을 높여 다시 대양으로 진출하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이른바 태평양전쟁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듯 세계대전의 본질은 해양패권의 각축이다. 일본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사이판과 괌은 물론 필리핀, 팔라우, 티니안, 얍, 뉴기니 같은 섬, 그리고 서진을 거듭하여 인도네시와, 말레이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식탐을 과시했다. 우리의 인식은 대륙 지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해양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영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기다리다 덮치기… 집요한 日 해양정책 일본은 세계열강의 해양 재편성에 기초한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는 국제해양법 신질서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기왕에 문제가 되어온 조어도, 일명 센카쿠열도 문제로 중국과 심각한 해양분쟁을 일으킨지 오래다. 미래의 해양자원을 염두에 넣는다면 일본이 조어도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너무도 확실하다. 남쪽으로 눈을 돌려 손톱만 한 바위에 불과한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로 명명하고 자기 영토에 포함시켰다. 해양과학자들까지 동원해 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침대만 한 섬 하나에 290억엔을 퍼부었다. 이로써 자신의 영토(38만㎢)보다도 넓은 40만㎢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하게 된 것. 나아가서 태평양 복판에 떠있는 미나미도리까지 영토로 선포했다. 이렇듯 일본은 해양 영토에 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독도가 어찌 그들의 눈독에서 빠질 수 있었으랴. 이런 만행이 대중국 포위전략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가능할까. 미국 역시 ‘해양제국’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하는 단서가 마련되지만, 기실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해 섬 국가인 필리핀과 반도국가인 한반도를 ‘빅딜’하는 국제적 공모에 가담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태평양의 섬은 거의 없다. 태평양은 공해가 분명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대주주’행세를 하고 있다. 오키노도리시마와 미나미도리는 남양군도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일본이 만들어낸 ‘바다 땅따먹기’의 야심작이 아니겠는가. 근래 일본 정부는 해양권 확보에 노골적이다. 경제산업성, 외무성, 국토교통성 등이 주동이 된 연락회의가 공개적으로 열린다. 숨길 게 없다는 식이다. 독도 영유권까지 인정받는다면 일본은 전체적으로 405만㎢의 배타적 경제수역, 즉 일본 영토의 10배를 뛰어넘는 방대한 해양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제주도 한경면에는 일본군이 옥쇄를 대비해 만든 거미줄처럼 얽힌 가마오름땅굴이 있다. 버려졌던 이 땅굴은 한 개인의 희생적 노력으로 현재 평화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곳 이영근 관장은 “현재 공개된 굴은 극히 일부로, 모두 바다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땅굴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와 일본군 알트르비행장을 벗어난 송악산 해변에도 미군기를 겨냥했던 동굴들이 줄지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구체적인 해안진지가 한반도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평화’라도 韓·日 인식 달라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을 감행했던 규슈 남쪽 가고시마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란(指宿) 바닷가에도 같은 이름의 ‘평화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소년병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모정을 빙자한 최루성 역사 회고만 존재할 뿐 전쟁 자체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평화’를 거론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는 상상을 초월한다.‘제국의 바다’를 잊지 못하는 일본의 추억만들기가 계속되는 한 ‘현해탄’의 파고도 계속 높아질 것이다. 아, 우리가 즐겨 써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조차도 규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해방 60주년, 일본은 20세기형 제국의 바다를 21세기에 다시 ‘신장개업’했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우선 청와대와 외무부의 공식 입장 및 향후 일정부터 듣고 싶다. 또 ‘내 마누라타령’으로 일관하면서 질질 끌려다니다 끝내 국제사법재판소 법정마당까지 끌려가 내 영토를 약취당하고 말 것인가.
  • “중국 택배시장을 잡아라”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택배·화물운송이 크게 늘고 있는 중국을 겨냥, 세계적 배송업체들의 경쟁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9일 보도했다. 가장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는 업체는 미국의 UPS. 이 회사는 최근 몇달 동안 6억달러를 중국에 투자, 배송망을 정비하고 중국측 파트너인 시노트랜스와 합작회사를 설립할 준비를 마쳤다. 올해 말 중국이 배송분야에서 외국기업 진출을 전면 허용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다. 또 2년 안에 중국 내 배송기지를 현재 40개에서 60개로 늘리기로 했다. 지난해 UPS는 국제배송 부문에서 전년보다 23% 성장했는데, 중국에서는 2배 이상 늘어났다. 그동안 주력 부문이었던 미국 내 배송은 6.6% 성장에 그쳤다. 데이비드 애브니 UPS 인터내셔널 회장은 “중국 시장 개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DHL과 페덱스(FedEx) 등 경쟁사들도 각자의 장점을 살려 중국시장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다.DHL은 외국회사로서는 지난 1986년 최초로 중국에 진출했으며, 유일하게 중국 국내에서 배송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에 따라 이 독점권은 머잖아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중국 국내 배송의 37%를 장악하고 있어 다른 업체들이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페덱스는 89년 항공사 플라잉타이거를 인수, 항공 배송에 강점이 있다. 회사측은 “미국 도시들과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3개 도시를 직접 잇는 화물운송기를 운행하는 회사는 페덱스밖에 없다.”고 자랑한다. 페덱스는 중국에 1주일에 23대의 화물전용기를 운행,UPS보다 5대 많고 상하이∼프랑크푸르트 직항노선도 운항하고 있다. 신문은 “배송업체들간 전쟁은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이제 업체들은 중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세계적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이태원 봄, 쇼핑객 넘친다

    이태원 봄, 쇼핑객 넘친다

    ■ 이태원의 봄… 쇼핑객 다시 붐벼 ‘외인촌’으로 불리는 서울 이태원에 봄이 완연하다.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데다, 소비 심리가 회복 조짐을 보이며 보세 상품을 선호하는 쇼핑객들이 크게 몰려들어 붐비기 시작했다. 특히 이태원 입구에서 한남2동까지 1.4㎞ 구간에 자리잡은 이태원의 심장부격인 관광특구는 의류·구두와 가방 등을 판매하는 쇼핑가와 각종 음식점, 유흥·오락시설, 무역상, 여행사, 관광호텔 등 2000여개의 외국인 대상 점포가 밀집해 있어 쇼핑의 즐거움은 물론, 아르헨티나·쿠웨이트 등 외국 대사관저 등도 ‘늠름하게’ 들어서 있어 ‘이국정취’에 흠뻑 빠져 들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글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보세품 가게·음식점등 즐비 세계인의 거리로 명성 높아 ‘외인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은 이름부터 외색(外色)이 짙게 밴 동네다. ‘이태원(梨泰院)’은 배밭이 많아 불렸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귀화해 살던 곳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왜군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살던 보육원인 ‘이태원(異態園)’이 있던 장소라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공존한다. 여하튼 이태원은 관리와 여행자를 위해 제공되는 ‘원’으로 원래 위치는 용산중·고등학교에 있던 숙박시설이었다. 이태원 마을은 현재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일대였으나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의 축이 해밀턴 호텔쪽으로 이동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용산에 미군기지가 자리를 틀면서 인접지인 이태원은 위락지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해방촌’과 외국공단, 군인아파트 등이 건설되면서 본격적인 도시화를 이뤘다. 하지만 1950∼60년대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위주의 상가들이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1970년대 초 부평에서 121후송병원이 미8군 영내로 옮기면서 1만여명의 미군과 관련 종사자가 유입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 섬유산업이 호황을 맞자 이태원은 보세물품의 쇼핑가를 형성했다.1980년대 각종 국제회의와 두 차례의 국제 경기가 열리면서 쇼핑명소로 두각을 드러냈다.90년대에는 미군과 일본 관광객뿐만 아니라 홍콩,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중동지역 등 다양한 국가에서 관광객이 쏟아지면서 세계인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1997년 서울시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돼 현재 하루 7000여명 연간 240여만명이 이곳에 발자국을 새겨, 연간 12억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현재 이태원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태원관광특구는 이태원 입구에서 한남 2동까지 1.4㎞의 구간,11만여평을 말한다. 구두와 의류, 가방 등을 취급하는 쇼핑가를 비롯해 각종 음식점, 유흥·오락시설, 무역상, 여행사, 관광호텔 등 2000여개의 점포가 밀집해 있다. 관광특구의 면모 외에도 이태원은 하얏트 호텔에 이어 형성된 고급주거지역으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와 쿠웨이트 대사관을 비롯, 각국 대사관과 관저 등 담이 높은 고급주택과 빌라가 많다. 또 다른 한 편인 용산2가동과 닿은 곳은 월남민의 주거지역인 ‘해방촌’이 마을의 또 다른 성격을 규정한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특별기고] 3·1정신과 국민통합/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어쩌다 우리 국운이 이토록 비색하여 그 같은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는고. 강토를 빼앗더니, 농사지은 식량도 다 빼앗고, 학병으로 조선의 자식도 다 빼앗고, 이제는 설까지 일본 설을 쇠라하니 정신의 골수를 뽑겠다는 수작 아닌가.” 소설 ‘혼불’의 일부다. 일본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잃고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정기를 끊기 위해 온갖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 질곡의 세월을 헤치고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30년을 한 세대로 친다면,2세대가 지나 제3세대를 맞는 시점이다. 이러한 역사의 길고 긴 여정 속에서 3월이 오면, 연록의 봄바람은 시공을 넘고 불어와 우리들 가슴 속에 선열들이 외쳤던 독립만세 함성의 애국혼을 불어넣어 준다.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천명한 선열들의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은 우리 민족의 민족혼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죽음보다 참기 어려운 민족적 굴욕감과 생명보다 소중한 자유에의 열망으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자주, 자유, 평화정신은 불변의 가치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은 미래의 수확을 가져오는 씨앗”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난 역사는 오늘을 사는 거울이 되며,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된다 하겠다. 우리는 3·1정신을 통해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고 선진 한국으로 가는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자유와 평화를 거저 얻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올해는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해다. 8·15광복을 맞았던 을유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해이자, 을사늑약 100년이 되는 해이며, 한·일 국교정상화로부터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6·25전쟁이 일어난 지 55년이 되는 해로, 선열들이 고군분투한 근현대사의 역사는 교훈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자산이 되고 있다. 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찾은 조국, 우리는 광복 이후 지난 60여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민주화의 노력을 통해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화해와 북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계층, 세대간의 혼돈을 넘어 분열에서 화해로, 갈등에서 통합을 이루어 동북아시대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이룩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애국심’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이고, 조국 번영에 가장 중요한 초석이 되기에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 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아 나아가야 하겠다. 정부에서는 광복 6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을 위해 사료발굴단을 운영하여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특히 이번 3·1절을 기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게 됨으로써 민족 화합의 장을 열게 되었다 하겠다. 또한 올해를 보훈선양 활성화 원년으로 삼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거나 공헌하신 분들에 대해 사회적 예우풍토 조성과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확산하여 국가 발전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86주년 3·1절을 맞아 올해야말로 3·1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각오로 온 국민이 화합 단결하여 국운융성과 함께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고 사명 의식을 다져 보는 3월이 되었으면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월드이슈-삐걱거리는 미-러 관계] 양국 주요이슈 뭔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러 관계의 현안을 점검해 본다. ●러시아의 민주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뒤 주지사 직선제 폐지, 언론에 대한 통제 강화, 에너지산업 국유화 등 중앙집권 강화 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은 이를 민주주의의 후퇴로 규정,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 상원의원들은 러시아의 G8(선진 7개국+러시아) 회원국 자격 정지를 요구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법치 확립에 힘써야 한다.”고 비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주의에 도전함으로써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한다.”면서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의 문제에서는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에너지 안보 강화 지난해 ‘유코스 사태’는 에너지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푸틴 대통령은 최대 석유기업인 유코스의 회장을 구속하고 핵심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즈를 결국 국영회사가 인수토록 했다. 러시아는 또 석유·천연가스·금·구리 등 핵심 천연자원에 대한 탐사개발은 러시아측 지분이 51%를 넘는 회사들에만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러시아의 유코스 처리방식에 실망하고 있다.”,“해외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등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은 중동 국가들에 대한 석유 수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늘리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석유를 자원무기화할 경우 유가 폭등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러시아 유전·광산 개발에 참여하려 했던 미국 기업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 문제 부시 2기 행정부는 이란과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하고 나날이 이들 국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움직임은 미국과는 정반대다. 이란과 핵 연료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란 방문 계획을 밝혔다. 또 러시아는 시리아에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판매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러시아가 중동 지역을 통해 미국을 견제하고 세력 확장을 추구한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양국이 이 부분에 대해 합의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옛소련 국가들과의 관계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 대선을 놓고 양국은 정면충돌 양상을 보였다. 미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미·러 두 정상의 세계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부시는 이른바 ‘자유의 확산’에는 지역적 한계가 없다고 생각한 반면 푸틴은 옛소련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접근에 분개하면서도 이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상원 청문회에서 옛소련 국가였던 벨로루시를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했다. 키르기스스탄·몰도바 등에서도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다. 카네기재단 모스크바 센터의 앤드루 쿠친스는 “옛소련 국가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미·러 관계의 화약고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시론] ‘韓·日 우정의 해’ 유감/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 교수

    [시론] ‘韓·日 우정의 해’ 유감/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 교수

    작년 한해 일본에서는 ‘한류’(韓流)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덕택에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한·일 관계의 오래된 비유는 이제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이며 ‘한·일 우정의 해’다. 문화·예술·관광·스포츠 등 다채로운 분야의 한·일교류 행사가 1년 내내 풍성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경제·외교 면에서의 협력 또한 순조롭다. 이미 김포와 하네다 간의 도심 직항편도 생겼고 자유무역협정(FTA)도 추진 중이며 입국비자 문제도 순탄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국교수립 40년 만에 한·일 관계는 신기원(新紀元)을 맞고 있는가? 그러나 2005년은 한·일관계를 축제와 친선의 무드로만 보내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해다. 이상하게도 한·일국교수립 40주년만 강조되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시해서 기념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우선 올해가 광복 60주년이며,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사적으로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포츠머스조약 100주년이며, 청·일전쟁의 승전을 마무리한 시모노세키조약 110주년이면서, 동시에 국제연합 창설 60주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난 세기에 있었던 전쟁의 상처를 되새기고 평화의 가치를 음미하는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줄을 이을 전망이다. 우선 유엔총회는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올해 5월8일과 9일을 ‘기억과 화해의 시간’으로 지정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러시아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행사는 같은 5월 러시아 국내에서 열리는 ‘반 나치스독일 승리 60주년 기념식’과 함께 2차대전 승리에 기여한 러시아의 역할이 강조될 전망이다. 중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蘆溝橋)에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국제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 11월21일자 북경일보에 따르면 “항일전쟁의 위대한 과정을 전면적으로 반영하고, 일본군국주의에 의한 인민학살, 식민통치 등의 범죄를 뿌리째 폭로함으로써 지난 전쟁에서 행한 중국의 중요한 역할과 큰 희생을 충분히 알리기”위해서다. 중국과 러시아는 ‘2005년’이라는 역사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승전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과시하면서 일본을 압박하는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광복 60주년, 국권찬탈 100주년이라는 귀중한 역사자원을 ‘한·일 우정의 해’로 소비하고 국내용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낭비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 선조는 세계사상 유례없는 잔악한 식민 지배 하에서 가혹한 억압을 감내하면서 반인류적 침략세력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는 민족의 긍지라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정신적 자산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올해를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파시즘을 대표하는 진영의 핵심적인 일원임을 확실히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우정’에 잠시 취해있는 동안에도 일본은 할 일 다 하고 할 말도 다 하고 있다.22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위한 조례안이 제출되었다. 또 23일에는 주한일본대사가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독도는 명백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독도문제를 쟁점화하여 외교현안으로 끄집어내려는 의도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외교적으로는 정답인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우정’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허튼 수작을 거는 그 씀씀이가 고약하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허튼 장난을 길게 끌면 ‘한·일 우정의 해’도 재고해볼 일이다. 올해는 200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된 지 11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김무곤 동국대 교수 신문방송학
  • [월드이슈-삐걱거리는 미-러 관계] 부시, 러 에너지정책도 불만… 실리외교 주도권 다툼

    [월드이슈-삐걱거리는 미-러 관계] 부시, 러 에너지정책도 불만… 실리외교 주도권 다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1년 11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사저인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을 방문한 뒤 미·러는 ‘적대적 관계’에서 ‘동반자적 관계’로 바뀌었다. 미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협정(ABM)을 일방적으로 폐기했음에도 대테러전을 계기로 가까워진 부시와 푸틴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4일(현지시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은 이란과 시리아 등 중동정책과 러시아내 인권 등의 문제로 충돌하는 양상이다. ●화해냐 반목이냐 대부분의 정상회담은 실무진이 각종 현안에 대한 합의점을 미리 도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테러조직에 ‘견착식 지대공 미사일’의 밀매를 막는 협정 이외에는 이렇다 할 결과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상호 신뢰관계를 해칠 만한 ‘입씨름’만 치열하게 오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슬로바키아로 가기에 앞서 “푸틴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했으나 “러시아는 법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푸틴이 민주주의를 실천한다고 말할 때에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슬로바키아 언론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러시아의 현실과 역사에 부합해야 하며 러시아는 14년 전 국가와 국민을 위해 그같은 민주주의를 채택했다.”고 맞받아쳤다. 왜 미국이 러시아의 내정에 간섭하느냐는 항변이다. 2001년 6월 슬로베니아에서 열렸던 미·러 정상회담 당시 서로를 치켜세우던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그러나 우회적인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양측은 대테러 공조라는 기존의 틀을 재확인하면서 일부 이견을 표출하는 정도에서 회담을 마칠 것으로 예상된다. ●실리외교 공방전 푸틴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면서도 틈틈이 미국의 독주를 견제했다. 바그다드 침공 이전에 러시아는 이라크와 400억달러 규모의 5개년 경제협력 협정을 추진했고 이란과는 2년 전에 핵시설 협력을 위한 10개년 계획에 합의했다. 미국이 추구하는 ‘힘의 외교’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중동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과 경제적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이란에 대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라는 부시의 ‘경고’에 푸틴이 “이란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반박한 것도 ‘실속외교’의 전형이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이란과 북한의 핵 개발 중단이나 대테러 전쟁의 지속을 위해 여전히 러시아의 ‘강력한’ 도움이 필요하다. 오랜 우방인 프랑스·독일과 관계개선을 꾀하더라도 러시아가 보였던 만큼의 지지를 단시일 내에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미국이 러시아의 미사일 시스템 수출이나 푸틴의 일당 독재체제로의 ‘회귀’ 움직임 등에 마냥 침묵할 처지도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2기 취임사에서 ‘자유의 확산’을 강조했다. 러시아가 유전·가스개발에 외국업체 참여를 배제한 것은 국제 자유무역의 질서를 흔든 것이며 우크라이나 선거에 개입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게 미국의 시각이다. 물론 미 석유업체의 불만이 부시에게 쏟아졌고 그 화살이 다시 러시아로 향한 측면이 강하지만 그동안 러시아에 빼앗겼던 실리외교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기고] 지금이 벨 에포크인가/이균 홍익대 무역학과 교수·한국무역포럼회장

    경제란 용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절약이다. 절약을 해야 할 이 시기에 정부는 마치 이 시기가 ‘벨 에포크’인 것처럼 생각하고 국민들에게 소비를 충동하고 있다. 현재 사람들의 호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어 소비에 매몰될 그럴 시기가 아닌데도 말이다. 가계가 빠듯하여 살림을 꾸려가기가 너무나 힘든데, 설상가상으로 직장을 잃어 수입이 전혀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카드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기업의 경영실적이 좋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그런 회사에 근무하는 것으로 정부는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가계나 기업이나 나라나 그 경제주체가 무엇이든 간에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보면 ‘벨 에포크’는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국민소득은 소비+투자+(수출-수입)이다. 소득은 물론 소비하거나, 저축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저축은 투자로 이어져 미래의 소비가 된다. 미래의 소비를 위해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어 소비를 억제하여 저축을 해야 한다. 어려운 살림일수록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투자와 수출을 확대해야만 나라든 기업이든 가정이든 호주머니가 두둑해져 경제가 튼튼해질 것 아닌가. 1880년부터 1914년까지의 서구사회를 흔히 벨 에포크(belle epoque), 즉 ‘좋았던 시절’이라 부른다. 그만큼 사회·문화·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화려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할 대로 발전하여 제국주의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치달았고, 다양한 문화와 과학기술이 일상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좋았던 시절이란 당대인들보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증유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사람들은 “지금과 달리 그 좋았던 시절에는…했었는데.”라며 회고하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니 마치 ‘원래부터 좋은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되어버렸다.‘벨 에포크’를 슈테펜 케른 교수는 그의 저서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의 증가는 국내소비와 수출의 증가로 이어진다. 우리의 경제는 국내소비보다 수출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국내외 경제여건이 좋지 못하였지만 2542억달러의 수출이 바로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새해 들어 1월의 수출입 실적도 양호한 편이다. 전년 동월대비 수출은 18.7%, 수입은 19.2% 증가했고 무역수지는 32억 3100만달러 흑자로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다. 수입은 원자재와 중간재(자본재)와 최종소비재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여 원자재수입은 불가피하다. 수입을 줄여야 할 것은 중간재밖에 없다. 수입 가운데 자본재수입이 20.8% 증가했고, 특히 기계류와 전기전자제품수입의 증가율(40.5%)이 높다는 것은 국내투자가 뒷받침되면 좋은 현상이다. 왜냐하면 자원이 부족한 우리의 입장에서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원자재수입은 불가피하며, 소비재수입은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수출상대국으로부터 일정량 소비재를 수입하지 않으면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역은 기브 앤드 테이크이다. 수입을 줄여야 할 것은 중간재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자본재 수입비율이 20.8%인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자동차판매나 백화점매출의 증가 등 국내소비의 증가를 경제의 수장(경제부총리)이 낙관적으로 보고 “경제는 호전될 것”이라고 미소짓는 표정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특히 고유가, 원화절상, 제조업공동화와 높은 실업률이 잠복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경제상황을 먼 훗날 ‘벨 에포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균 홍익대 무역학과 교수·한국무역포럼회장
  • [열린세상] 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새달력을 벽에 걸고 새해를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설이 지났다. 일년 열두달 가운데 한달 반이 가버린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를 의식하면 할수록,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빠른 사회변동 속에서 미래담론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이, 우리는 시간의 진행 방향에 대한 착시 현상 속에서 살게 되었다. 미래가 현재로 다가와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지나가는 길가의 나무와 풍경의 방향일 뿐, 실제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은 정반대이다. 과거에서 현재가 유래되고, 현재에서 미래가 조형될 뿐이다. 시간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초경험적 실체로 간주하는 ‘실재설(實在說)’이나, 시간을 인위적인 가설로 파악하는 ‘구성설(構成說)’에 있어서나 시간의 내용적 흐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갈 뿐이다. 돌아보면,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가 겪어온 급속하고도 단절된 사회변동은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시간관을 뒤틀어놓기에 충분하였다. 외세에 의한 개항과 국권 상실, 강요된 분단과 전쟁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실감케 하였다. 대부분의 미래, 혹은 탐색적인 고민은 밖으로부터의 수입으로 대치해왔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와 인식, 이념을 선도하는 부문을 학문활동이라 할 때, 특히 학문연구의 영역에서 이러한 문제가 극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이론의 신속한 수입이 창의성으로 간주되고, 외국이론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이론의 보편성 추구를 위한 노력의 전부로 오인되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역사성과 상황성이 배제된 수많은 이론의 전시장이 되고 말았다. 좀 더 가혹한 비판론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사회 자체가 학문적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연구자의 역할이라는 것이 지식의 오퍼상 역할에 머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연적으로 역사성과 상황성을 도외시한 이론은 사회문화적 적실성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고, 이론의 적용과정에서 혼란과 비용을 초래할 뿐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해 어떤 합의를 이루는 것을 근원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최근 다행히 우리학문의 식민성 극복과 토착화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단히 바람직하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단순히 학문적 주체성의 회복을 위해 기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停滯)와 혼란이 지금까지 우리가 수용해온 미래관이나 발전모델에 내포된 한계에서 초래되는 문제라 생각하면, 우리 학문이 안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단절 그리고 ‘밖’에 대한 일방적 의존을 바로잡는 것은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국수주의적 태도이다. 국학과 양학을 분리하여 대립시키고, 외국적인 것을 배척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옹호하려는 태도이다. 그런 국수주의는 우리가 그토록 원망스러워하는 매국적 개방주의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비극을 결과시킬 뿐이다.GNP상의 무역의존도가 60%를 넘는 나라에서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는 자살행위일 뿐이다. 우선은, 언필칭 식민성으로 비판되는 그 무엇에 대항할 우리 학문을 축적시키고,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는 문제 자체에 철저하게 충실한 정책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을 확산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삶과 학문에 있어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주관과 객관은 상호 수렴하지 않을 수 없다. 국학과 양학의 지나친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현재 국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집결되어 있는 다양다기한 연구의 소재와 성과물들도 각 해당 분과학문의 책임과 몫으로 분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학과 각 학문분과와의 대화야말로 바람직한 학문의 주체성 확보를 위해 첫번째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보는 균형된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삼성물산의 역사는 삼성그룹의 역사입니다.”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인 삼성물산의 지난해 매출은 9조 6963억원으로 주력인 삼성전자 57조 6324억원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를 비롯해 삼성석유화학, 삼성정밀화학, 삼성카드, 삼성SDS, 제일기획 등 숱한 관계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식 1.38%를 보유하고 있고 등기임원(회장)으로 직접 챙기고 있는 데서도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활동하는 삼성 계열사는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물산, 제일모직, 호텔신라, 삼성에버랜드뿐이다. 국내 종합상사 1호인 삼성물산은 84년 3위,1998∼2000년,2002년에 2위를 기록했던 것을 제외하면 종합상사의 매출기준이 달라진 2003년까지 줄곧 매출 1위 기업 자리를 지켜왔다. ●‘그룹의 역사’ 삼성물산과 인재들 고 이병철 회장이 28세였던 1938년 3월1일 대구시 서문시장 인근 수동(현 인교동)에서 250여평 규모로 출발한 삼성상회가 삼성물산의 전신이다. 이 회장은 이에앞서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부동산 투자’에서 다 날리고 자본금 3만원으로 상회를 시작했다. 삼성(三星)의 삼은 우리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로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첫 사업은 대구일대에서 생산되는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라면부터 미사일까지’ 취급한다는 종합상사의 70년전 버전인 셈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의 대표기업답게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초창기 삼성상회의 지배인으로 영입된 이순근씨는 이병철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그는 정계에 투신했다 월북, 농림상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거의 모든 경영을 이순근씨에게 맡겼는데 오늘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찌감치 시험한 것이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만인 1948년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 2층건물에 삼성물산공사로 간판을 걸 당시에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전무를, 김생기씨가 상무를 맡았다.1949년 11월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홍콩으로 떠난 조홍제씨가 교포무역상과 챤넬양행으로부터 오징어를 담보로 각각 면사 50근을 외상매입한 것이 국내 최초의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거래로 꼽힌다. 조홍제 회장은 62년 효성물산, 한국타이어를 갖고 삼성을 떠난다. 김생기씨도 삼성에서 독립, 영진물산·영진식품·혜성개발 등을 일궈냈다. 삼성물산 창립멤버로 60∼61년 사장을 역임한 고 허정구씨도 눈에 띈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사돈인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허씨는 이후 삼양통상을 설립했다.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허동수 GS칼텍스정유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아버지다. 70년에 대표이사를 지낸 정상희 사장은 3·5대 국회의원과 삼호무역 회장을 역임했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남편인 정재은 명예회장의 아버지다. 이병철 회장과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을 이어준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86년 이병철 회장의 요청으로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됐다. 홍 회장의 공백을 메우며 이건희 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은 91년까지 물산 회장과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필곤 전 부회장도 삼성물산 대표이사를 두차례(85∼93년,95∼97년)나 지낸 대표적인 ‘물산맨’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진두지휘하다 사업진출 차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국으로 물러난 뒤 삼성을 떠났다. 서울시 부시장을 거쳐 현재 알티전자 회장과 삼성 CEO 출신들의 모임인 ‘성대회’ 회장을 맡고 있다.93∼95년 사장을 역임한 신세길씨는 현재 서울반도체 회장이다. 현명관 부회장은 아직도 물산의 비상근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은 2001∼2004년 배종렬 사장을 끝으로 공동대표체제가 굳혀졌다. 건설부문의 이상대(58) 사장은 충남 서천생으로 경복고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73년 제일합섬으로 입사한 뒤 대부분 삼성건설에서 일했다. 건설이 삼성물산에 합병되면서 97년 삼성물산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했고 2000년부터 주택부문 대표를 맡았다. 이 사장의 경복고 2년 선배인 상사부문 정우택(60)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을 거쳐 77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휴스턴 지점장, 카자흐스탄 법인장 등 줄곧 상사부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병철의 세번째 회사 제일모직 1954년 9월 설립된 제일모직은 삼성상회, 제일제당(53년)에 이은 삼성의 세번째 회사다.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구조본 차장,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총괄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 안복현 삼성BP화학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등이 제일모직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난해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부임한 제진훈(58) 사장은 경남 산청생으로 진주고와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일모직에 입사한 ‘모직맨’이다. 제일모직에는 올초 상무보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의 차녀 서현씨와 남편 김재열 상무가 같이 일하고 있다. ●‘봄날’을 기다리는 화학·중공업 80년 유공 인수 실패,90년대 중반 자동차 사업의 좌절 등으로 자동차·중공업∼정유·석유화학·화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중화학그룹’을 도모했던 삼성의 꿈은 사실상 좌절됐다.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업종은 전자와 금융이다. 하지만 화학·중공업 계열사들의 ‘절치부심’이 예사롭지 않다. 화학·중공업 계열사 CEO가운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CEO는 허태학(61)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경남 고성생으로 진주농림고와 경상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69년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허 사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마저도 조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정도로 보수적인 농촌출신으로 한때 덴마크의 달라스나 그룬트비히 같은 농촌 계몽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호텔신라 총지배인, 삼성에버랜드 사장,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2003년 삼성석화에 자리를 잡았다. 에버랜드 사장시절에는 ‘캐리비안베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 리조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93∼2002년 삼성에버랜드는 이재용 상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로 부상하면서 구설수도 따랐다. 허 사장은 96년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이 상무에게 저가로 발행한 것과 관련, 최근 징역 5년을 구형 받았지만 지금도 공공연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건희 회장을 꼽을 정도로 삼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삼성 CEO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자기 PR’에도 열심이다. 삼성과 고 이병철 회장에게 큰 상처를 줬던 삼성정밀화학(옛 한국비료)은 제일합섬,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종합화학, 삼성중공업, 삼성카드, 삼성자동차 등 가장 많은 회사를 옮겨 다닌 것으로 유명한 이용순(59) 사장이 2003년부터 맡고 있다.64년 8월 27일 설립된 ‘한비’는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을 계기로 67년 10월 삼성이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한 회사다. 한비는 이후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공사형태로 운영됐지만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를 맞자 94년 다시 삼성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홍식(58) 삼성토탈 사장은 삼성 사장단 가운데 몇 안되는 호남 출신으로 광주일고와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유난히 영남출신 CEO가 많은 삼성에서는 전주 출신의 배정충(60) 삼성생명 사장, 전남 구례생인 양인모(65)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과 고 사장이 호남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기계공학과 1년 선배다. 72년 삼성에 입사한 고 사장은 줄곧 제일합섬에서 일하다 92년 비서실 경영팀장,93년 신경영실천위원회 팀장 등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일을 익히기 시작했다.95년 삼성종합화학 소속으로 화학소그룹 전략기획실장을 맡으며 화학계열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2001년부터 삼성종합화학 CEO를 맡으며 97년 당시 부채비율 800%로 ‘회생불능’이었던 삼성종합화학을 프랑스 토탈과의 합작과 고효율 경영으로 지난해 매출 2조 8000억원, 영업이익 5700억원(이익률 21%)이라는 ‘알짜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순차입금 비율은 20%로 뚝 떨어졌다. 스스로 “화학이 곧 내 인생”이라는 고 사장은 2010년 이익 1조원 돌파를 목표로 삼성그룹 내에서 비교적 위상이 처지는 화학 사업의 ‘중흥’을 노리고 있다. 2006년 세계 1위 조선업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중공업은 ‘현장경영’,‘극한원가’,‘질적인 1위’를 부르짖는 김징완(59) 사장의 지휘하에 부활을 꿈꾸고 있다. 경북 달성생인 김 사장은 현풍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마치고 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중공업과는 88년부터 인연을 맺어 2001년 대표이사로 부임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산성 높은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던 이병철 회장은 일본 IHI사와의 합작을 통해 경남 통영시 안정리에 150만평 규모의 조선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의 여파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썩 내키지 않던 거제의 우진조선을 인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또 하나의 ‘초일류’, 삼성 서비스 삼성에버랜드가 언론에 크게 부각될 때는 대부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돼 있다. 그도 그럴것이 에버랜드는 이건희 회장(3.72%)은 물론, 이재용 상무 25.10%,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이윤형씨 등 세딸이 나란히 8.37%의 지분을 갖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4녀인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0.48%),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장도 0.08%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내 최대, 세계 6위권의 테마파크와 골프장, 빌딩관리 등 자산관리, 단체급식 등 유통, 조경 등 환경사업을 영위하며 지난해 매출 1조원 1600억원, 순이익 800억원대를 거둘 정도로 탄탄한 경영을 자랑한다. 박노빈(59) 사장은 보성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마치고 74년 제일제당으로 입사,91년 삼성중공업을 거쳐 93년부터 에버랜드에 발을 담갔다. 사업 구상이후 무려 7년이 지난 79년 개관한 호텔신라는 초기 경기하락과 오일쇼크까지 겹쳐 적자에 허덕였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홍진기 회장의 총 지휘하에 손영희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장녀 인희가 고문이 돼 음식조리 등 안살림을 챙기고나서부터야 경영이 호전됐다.”고 회고했다. 경복고와 서울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삼성물산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한 이만수(55) 사장이 2003년부터 경영을 맡고 있다.2001년 호텔신라로 들어와 지난해 상무보 승진에 이어 올초 상무로 승진한 이부진씨도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삼성의 서비스 사업 가운데 가장 독특한 영역인 보안업체 에스원은 2002년부터 이우희(58) 사장이 맡고 있다.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 출신으로 삼성내 거의 유일한 이건희 회장의 친척이다. 이 사장은 부산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마치고 제일제당에 입사했다.94년부터 계속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일해왔다. 국내 최대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배동만(61) 사장은 보성고와 고려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73년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제일제당, 호텔신라를 거쳐 비서실 홍보팀장, 에스원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2001년 제일기획 사장으로 부임했다. 지난해부터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초창기 사업동지 이병철·조홍제 세간에는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효성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성을 공동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생인 이 회장은 서당을 다니다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의령군 중곡면 중교리지만 진주시 지수면과는 인접해있다. 지수에는 이 회장의 둘째누이 분시씨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그해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고 25∼29년에는 중동학교를 다녔다. 1906년생으로 이 회장의 형인 병각씨와 동갑인 조 회장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상경,1922년 중동학교 초등과 1,2,3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협성실업학교 초등과 4,5,6학년 과정을 마쳤다. 효성 관계자는 “언제부터인지 선대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LG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지수보통학교 동문으로 소개됐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29년 도일,30년 와세다(早稻田)대 전문학부 정경과로 입학했고 조 회장은 27년 와세다대 공업전문학부에 입학했지만 29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에 다시 입학한다. 둘의 동업관계에 대한 회고도 조금씩 다르다. 이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은 48년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울 당시 전무가 조홍제 회장, 상무가 김생기 전 영진약품 회장이었으며 설립자본금의 75%는 이 회장이, 나머지 25%는 조 회장, 김 회장,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씨가 분담했다고 밝혔다. 반면 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48년 말 평소 안면이 있던 이 회장이 명륜동 조 회장의 집을 찾아와 사업얘기를 하던 차에 조 회장이 사업자금 800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나온다.2개월 뒤쯤 조 회장은 200만원을 더 투자해 1000만원을 채웠다. 이 회장이 이미 투자한 돈은 700만원이었다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헤어졌던 둘은 51년 이 회장이 당시 가족이 피난가 있던 마산에 들렀다가 조 회장을 만나 부산에 새로 차린 삼성물산에 와서 일하기를 권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조 회장 역시 이와 비슷하게 기억했다. 호암자전은 또 조 회장과의 결별에 대한 별도 언급없이 63년 3월 2일 효성물산과 한국타이어, 한일나일론을 양도했다고만 명시했다. 나의 회고는 60년 3월초 일본 도쿄에서 골프를 치던 도중 이 회장이 결별 의사를 밝혔다고 소개한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의 지분에 대해 언쟁을 가졌다. 둘의 재산분배는 62년 8월 이 회장의 자택에서 다시 논의된다. 조 회장은 “내 지분이 삼성 전체의 3분의 1쯤 되니 제일제당을 떼어달라.”고 제의하고 이 회장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갈등이 점점 커지다 64년에야 결론이 난다. 조 회장은 자신이 분배받은 재산(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삼성 지분 50%, 효성물산)은 3억원 정도로 자기 몫의 10분의 1도 안됐다고 밝혔다. 분가하면서의 불화는 한동안 재계 인사들에게 회자됐었다. 그러나 지난 8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조 회장의 빈소를 이 회장이 찾아와 한참동안 머물며 ‘앙금’이 없었음을 내외에 알렸다.3년뒤인 87년 이 회장도 영면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물산 역대 대표이사 1938년 이병철 회장 1960년 허정구 사장(LG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사돈 허만정씨의 장남, 삼양통상 창업주) 1961년 박도언 사장 1963년 김선필 사장 1966년 안동선 사장 1967년 김진하 전무 1967년 박태암 사장 1967년 성상영 사장 1968년 정수창 사장(전 두산그룹 회장) 1970년 정상희 사장(이명희 신세계 회장 시아버지) 1971년 김정렬 사장 1974년 이은택 사장 1977년 손상모 사장(전 동부그룹 부회장) 1978년 송세창 사장(전 나산그룹 부회장) 1981년 경주현 사장(전 삼성종합화학 회장) 1984년 배상욱 사장 1985년 이필곤 사장 1993년 신세길 사장(현 서울반도체 회장) 1995년 이필곤 부회장(현 알티전자 회장) 1997년 현명관 부회장(현 전경련 부회장) 2000년 이상대 사장(현 건설부문) 2001년 배종렬 사장 2004년 정우택 사장(현 상사부문)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열린세상] 2005년,한국의 대외전략 지침/홍현익 美 듀크대 초빙교수·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을 맞았다. 강대국의 호의에 의존, 부국강병을 소홀히 하면 주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길 시점이다. 당시 열강들이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세력 경쟁을 벌였듯이 현재도 주변강국들이 군사적·경제적 국익 추구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북핵 6자회담은 열강들의 영향력 발휘에 정당성을 실어주고 있다. 한·미관계가 동맹이라는 것은 당시와 다르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미국의 ‘선처’를 기대했던 것이 허망했던 것처럼 광복 이후 미국은 우리와 별 상의없이 주한미군을 5차례 이상 감축해 왔다. 당시처럼 미국은 한·미동맹보다 미·일동맹을 훨씬 더 중요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자위대의 군사력 강화와 역할 확대를 종용하고 있다. 북핵 등 한반도 문제는 중국·일본과의 역학관계를 골자로 한 동북아 전략과 반테러전쟁의 구도 속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어리석다. 그렇다고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위험하다. 현 시대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은 ‘제국’의 지위를 넘보고 있고, 국익을 위해서는 명분이 희박해도 군사공격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미국의 독선적인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강대국들도 미국과의 우호관계만은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현안 해결이나 국가전략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정치·군사·경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미 외교에서 돌파구는 명분의 영역에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타협을 통해 평화와 공영의 질서를 회복하여 중장기적으로 자유와 인권의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 자유의 확대를 위한 강압보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임을 구체적 방안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한·미동맹보다 남북관계를 더 중시하지 않느냐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북한의 전략목표가 남북협력보다 미국과의 담판이고 한·미관계의 단절이라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대북정책이 한반도 국제정치라는 큰 틀에서 작성된 대외전략 속에서 잘 조율된다면 미국의 대북 강경책은 대북정책에 선용될 수도 있다. 단지 인도주의적 사업들은 지속 추진하고 남북 경협은 경제 논리에 입각, 보다 적극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류 열풍 속에 한·일 관계가 개선된 것은 고무적이다. 이 기회를 일본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협력하도록 선용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은 침략적 과거에 대한 명확한 반성없이 지역 패권을 추구하므로 미·일동맹이 일본의 재무장을 억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유도하고 일본이 궁극적인 남북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도모해야 한다.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하면서 우리에게 막대한 무역 흑자를 제공하고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군사·경제면에서 미국과 견주려면 15년은 더 있어야 하고, 경제발전을 미국 등 서방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국제적 영향력 행사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장차 중국이 지역 패권자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따라서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중국이 북한을 타협의 장으로 인도하도록 도모하되, 한·중 외교 연대는 한·미동맹 관계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율되어야 한다. 역으로 한·미간의 미사일방어(MD) 협력이나 지역 방위로의 동맹역할 확대 등 민감한 사안에서는 중국의 기본적인 안보이익을 신중히 배려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핵문제에서는 여전히 초강대국인 러시아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시베리아·극동과 동북아 정세를 안정시키고 지역간 경제협력을 진흥하고자 한다. 또한 6자회담을 발전시켜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체제를 출범시키려 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후원하고자 한다. 따라서 한·러 경제협력을 보다 적극화하여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동맹을 축으로 하여 주변 열강과의 양자·다자적 협력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함으로써 외교 현안들을 해결하고 북한을 관리하여 ‘평화와 번영’을 향한 국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홍현익 美 듀크대 초빙교수·세종연구소 연구위원
  • 부시 취임 “자유 향해 행진”…2기임기 시작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식을 갖고 4년 동안의 2기 임기에 들어갔다. 미국의 43대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은 이날 낮 12시 의사당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서 50만명의 축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에게 취임선서를 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미국이 구가하는 자유의 존립은 갈수록 다른 지역의 자유에 의존돼가고 있다.”면서 “세계의 평화는 전세계에 민주화를 확산시킴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며 ‘자유를 향한 행진’을 제창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우리는 미국이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목표를 향해 이상과 용기를 갖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했다. 이어 “자유야말로 미국을 단합시키고 세계인에 희망을 주는 대의명분”이라면서 “미국은 이러한 명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천명한 세계의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다음달 2일 열리는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제시할 계획이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입장도 이날 연설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취임식은 55차례의 역대 대통령 취임식 가운데 가장 많은 경찰과 군이 배치된 가운데 삼엄한 지상 및 공중·지하 경비 속에 진행됐다. 또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도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여명의 시위자가 도심 곳곳에서 부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부시 대통령은 역대 재임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50%의 지지율을 기록 중이며, 이라크 전쟁 완수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 중동 평화협상 추진, 재정 및 무역적자 해소, 사회보장 개혁, 세금제도 개편 등의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알베르토 곤잘레스 법무장관 지명자의 상원 인준이 당초 계획보다 늦어지는 등 2기 행정부 구성부터 의회의 전폭적인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daw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 정도령은 누구인가

    ●정도령과 진인 ‘정감록’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계룡산 밑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는 ‘정도령’이다. 달리 ‘진인(眞人)’이라고도 한다. 누구나 빤히 아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만 따져들면 실체가 애매한 것이 바로 그 진인이고 정도령이다. 실체를 잘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정도령에게 제법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여러 해 전 일이었다. 대기업 총수 정모씨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는데 당시 칠순 노인이던 그를 가리켜 ‘정도령이 나왔다.’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도령치곤 참 늙은 도령이었다. 맨손으로 일어나 굴지의 대기업을 키운 사람이었던 만큼 그 뚝심이면 못 할 일이 없다고들 봤던 것일까. 하여간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그 뒤에도 정도령 감은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정도령이란 칭호는 ‘정감록’에 안 보인다. 고작 ‘정성(鄭姓)’ 또는 ‘진인(眞人)’이 언급되는 정도다. 때론 그 정씨와 진인이 같은 인물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내가 조사해 보니 민중들이 쉬쉬하며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됐고, 한참 뒤 그 진인이 정씨라는 예언이 등장했다.18세기 후반 들어 ‘왕조실록’에 ‘정성진인’이란 단어가 보인다. 물론 체통 있는 양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정감록’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에 섞인 단어다. 그런데 정진인이 난데없이 웬 도령인가? 알다시피 도령은 양반집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도령은 정진인에 대한 일종의 애칭이다. 도령이란 호칭을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진인이 초능력자라 해도 정식으로 민중 앞에 나서기 전엔 아직 검증이 안 된 인물이다. 시쳇말로 딱지를 못 뗀 일종의 미성년이다. 진인으로 검증을 받을 때까진 정도령, 검증이 끝난 한참 뒤에는 성스러운 임금이다. 진인이 정씨라는 수사의 논리는 무엇인가? 정감록에 그 답이 있다. 이 예언서는 이성계의 조상인 이심, 이연 형제와 정몽주의 선조 정감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돼 있으나 3인이 두 집안의 실제 조상은 아니었다. 상상속의 인물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민중은 유독 정감을 더 사랑했다. 엄밀한 의미에선 책 제목을 3인의 대담집이라 해야 옳을 테고 실제로 ‘정이문답(鄭李問答)’이라 한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매우 드문 경우고 대개는 ‘정감의 기록’이란 뜻에서 ‘정감록’이라 불렀다. 그 제목엔 역사의 승리자는 조선왕조의 적대자들, 즉 정씨 성을 가진 진인과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그런데 새 왕은 왜 하필 정씨여야 하는가? 정씨는 ‘정감록’의 맥락에서 볼 때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다.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정씨로 대표된다는 뜻이다. 이 주장의 배후엔 민중들의 집단적 기억이 배경에 깔려 있다. 민중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죽은 정몽주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으나 태종에게 제거된 정도전, 선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여립, 영조 때 일어난 반란 사건에 연루된 정희량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다. 정씨는 조선왕조와 상극(相剋)이므로, 새 나라는 반드시 정씨가 왕이 돼야 한다는 민중의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김씨, 이씨, 박씨 등 다른 성씨 중에도 역모에 휘말려 죽은 사람은 수두룩했다. 그런 점에서 정씨 자손이 다음 세상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논법은 너무 순박하다. 진인이 반드시 정씨 집안에서 출생해야 될 이유는 없었다.20세기 전반 어느 종교 운동가는 ‘정(鄭)도령’은 ‘정(正)도령’이라고 했다. 정씨 진인설의 핵심을 찔렀다고 본다. 정도령은 성씨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민중이 믿고 따를 만큼 도덕적인 사람인가가 최고 검증요건이었다. ●진인이란? 조선시대엔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고, 그에 따르면 ‘도덕군자’가 제일이었다. 그 군자를 제쳐 두고 갑자기 왜 진인이란 생소한 존재가 나타나 왕조를 뒤엎는가? 그 이유를 나는 민중의 숨은 뜻에서 찾는다. 새 시대는 군자 되기를 외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민중의 노여움이 느껴진다. 성리학을 아주 폐기처분하지는 못할망정, 민중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뜻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진인(眞人)의 사전적 정의는 참된 도(道)를 깨달은 사람, 또는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진인이란 표현은 본래 도교 용어다. 영어로 된 도교전문 서적을 뒤적여 봤더니 ‘완벽한 인간 존재(perfect human-being)’라고 한다.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신선과 비슷한 존재가 도교의 진인이다. 불교 쪽은 어떤가 싶어서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현대의 임제선에선 진인을 핵심개념으로 삼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신문 기자가 서옹 스님(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에게 진인의 개념을 물었다. 그때 서옹의 답은 이러했다. “거짓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지. 거짓이 없으면 양심에 부끄러울 게 없고, 양심이 깨끗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있는 거야. 정치인, 경제인, 관리들 정말 거짓말 너무 많이 하더군.” 서옹 덕분에 현대 불교의 진인 개념이 명료해졌다. 진인은 절대자유인이라 불릴 만한 참사람, 수행의 최고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조선후기 민중은 그런 진인이 나와서 세상을 확 뒤집어 놓기를 바랐다. 정감록에 함께 실린 예언서 ‘동차결(東車訣)’에는 진인왕이 건국한 뒤엔 불교신자가 대접받는다고도 되어 있다. 불교적 진인관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이 글을 쓰다 말고 잠시 나는 호남지방에 퍼져 있는 진묵 대사 설화를 떠올렸다. 진묵은 석가모니의 현신이었다는 전설도 있긴 한데, 그는 발달된 기계기술 문명을 가져다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잠시 서역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육신은 절간에 두고 진묵의 영혼만 잠시 떠났던 것인데, 속된 유학자 김봉국이 그 육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그만 개화의 꿈이 허망하게 무너졌다고 한다. 사실 진묵은 17세기 인물이었고 문명개화와는 무관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민중은 유교가 못 이룬 개화의 꿈을 진묵이라면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민중이 기다리던 진인은 도덕적으로 특출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도덕성을 통치자의 필수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각은 양반들의 정치관을 닮았다. 유교의 성현(聖賢)이 진인으로 대체되고 만 느낌이다. 민중은 기존질서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제도가 아니라 인물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교적 사유의 틀에 갇혀 버렸다. 그런 한계를 인정해도 민중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대안을 궁리하였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민중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진인은 구원자라는 점에서 미륵불 또는 기독교의 재림 예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에 앞서 벌어질 아마게돈에서의 선악의 일대결전이나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진인의 출현과 무관하다. 진인이 세상에 나올 때 전쟁과 환난이 예정되어 있긴 해도 그것으로 역사가 완결되지는 않는다. 예수는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도 불러다 영생을 준다지만 진인은 산 사람들을 좀더 살기 좋은 사회로 이끌 따름이다. 진인은 미륵불처럼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성불시키지도 못한다. 진인의 문제해결은 한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진인은 예수나 미륵불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때가 이르면 환상의 섬에서 나올 진인 현대의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조선후기 민중은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고 보았다. 깊은 산골짜기의 신비한 동굴도, 오랜 암자도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 이상향으로 상정된 섬이 있고, 거기서 때가 되면 진인이 출현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상향을 말하다 보니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로 시작되는 제주의 이어도 타령이 생각난다. 그 노래에는 이어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이어도는 파랑도라고도 하는데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馬羅島)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수중섬(水中島)이다. 엄밀히 말하면 암초(暗礁)다. 해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어 파도가 몹시 심할 때만 모습이 잠깐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어도는 예부터 이상향으로 자리매김돼 왔다. 서양에서도 미지의 섬을 이상향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1535)는 1516년 정치 공상소설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는 나라란 뜻)’를 발표했다. 모어는 히스로디라는 뱃사람에게 어떤 신기한 섬나라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유토피아’인데 실제로는 당시 영국사회를 호되게 비판하고 저자가 동경하던 이상세계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 섬은 공화국이고, 모든 시민은 하루 6시간만 노동하면 된다고 했다. 거기선 남녀 모두 교육 혜택을 받아 교양이 풍부하다. 전쟁이나 다툼도 전혀 없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평등하다. 누구나 이상향에 가보고 싶겠지만 그곳을 찾아가긴 불가능하다. 토머스 모어는 자기가 속한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자고 했다. 조선시대 민중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민중이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사상적 통제력은 그 시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 그래서였을 테지만 민중은 이상향에서 구원자를 불러오고자 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엔 법과 제도가 구원을 보장해 주었다. 그곳엔 구원자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이상향은 그 반대였다. 사람이 문제를 푸는 열쇠였다. 민중은 진인이란 구원자를 통해 현실 문제를 풀려 했다.17세기 후반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난 해도진인(海島眞人)이 그것이다. 섬에 희망을 걸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나? 바다는 신화시대로부터 생명이 숨쉬는 희망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민중은 대부분 뭍에 살며 농사에 종사했다. 그런 판국인데 진인이 낯선 섬에서 나온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로 씨름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이런 짐작을 해봤다. 진인을 하필 섬에서 찾는 이유는 민중을 괴롭혀온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공백 지대는 음모와 꿈이 무르익을 수 있다. 게다가 17세기부터 먼 바다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낯선 서양 선박(황당선, 이양선)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의외의 사건소식을 접한 민중은 바다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해도진인설로 굳어졌다고 본다. 서양 선박에 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그때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조선 배보다 수백 배나 큰 거함을 타고 대서양·인도양을 가로질러, 대만을 지나 제주 남쪽 해상을 통과하여 일본을 오갔다.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큰 서양 선박들이 가끔 서남해에 나타났다. 그 소식을 듣고 실학자 박제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배 안에는 생김새, 언어, 습관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서양 선박은 조선 해안에 표류하기도 했다. 박연, 하멜 등이 그들인데 훗날 하멜은 도망에 성공,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그는 ‘하멜표류기’를 통해 유럽각국에 한국을 알리기도 했다. 조선후기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서양 사람은 외계인이었다. 얼마나 먼지 거리조차 짐작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큰 대포를 장착한, 초대형 선박을 타고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양 선박의 출현은 민중의 공포심과 신비감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까지 아직 서양 함대가 조선을 침략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 못지않게 신비스러움이 컸다. 이양선이 출몰하는 서남해는 경이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바다에 서양 선박이 나타난 것이 전혀 뜻밖이었듯, 언제 또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지 호기심 많은 민중으로선 귀추가 주목되었다. 동해나 서해에도 이상향이 있다는 소문이 가끔 떠돌았지만 남해설은 좀더 유력했다. 어느덧 서남해는 진인의 고향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물론 서양배의 출현만 가지고 해도진인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조선후기엔 무인도가 이주지로 각광을 받게 됐다는 점도 언급돼야 한다. 당시는 육지의 개발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가난한 민중은 삶의 터전을 섬에서 일구기 시작했다. 한번 민중의 눈길이 바다 쪽으로 쏠리자 수십의 무인도가 유인도로 바뀌었고, 율도·무석국 등 상상의 섬들이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 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둘 때 ‘진인(眞人)이 남해에서 계룡(산)으로 나오면 (새 왕조의) 창업을 알 수 있다.’는 예언의 의미가 충분히 살아난다. 서남해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고, 무인도가 개척되는 가운데 민중은 해도진인의 출현을 동경했던 것이다. 육지로 나온 진인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진인의 정체를 밝히려는 나의 탐구는 다음 호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신흥대국 BRICs 4~8% 성장”

    올해 세계경제는 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신흥시장 대국인 ‘브릭스(BRICs)’의 영향력이 높아질 전망이다. 또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는 20% 증가한 7400억달러에 달하고, 정보기술(IT)이 생활 곳곳에 침투, 인터넷 전화와 홈네트워크 등이 본격 도입된다. ●美·日 경제중심 성장 둔화 예상 삼성경제연구소는 12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올해 해외 10대 트렌드’를 선정했다. 연구소가 꼽은 해외 트렌드는 ▲세계경제 성장 감속▲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복원 노력▲브릭스의 영향력 증대▲달러화 약세·금리 상승▲직접투자 회복▲부동산버블 해소 전환▲IT의 생활혁명▲고령화와 연금개혁▲고원자재 가격과 자원확보 경쟁▲재해대응과 환경 경영 등이다. 미국과 일본 경제의 과열 양상이 진정되는 등 세계경제는 3.7%의 성장률을 기록한다. 미국은 이라크 정치 일정이 일단락되거나 이라크 정부가 요청할 때 이라크를 떠날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는 독일, 프랑스 등과 마찰을 일으키며 추진한 테러전쟁을 수정하고 화해와 협력을 도모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 재정적자는 GDP대비 3% 수준에 달해 달러화 약세가 지속된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이른바 ‘브릭스’는 올해 4∼8%의 고성장을 지속한다. 중국과 인도는 각각 제조업과 IT분야에서 거점국가로 성장한다. 중국, 인도, 브라질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유럽연합(EU) 등과 체결에 적극 나선다. 정책금리 인상과 경제성장 둔화 등의 영향으로 부동산 경기 과열이 진정된다. 부동산 자금이 이탈해 주식시장을 거쳐 채권시장으로 이동한다. 올해 말 2000달러대의 40인치급 LCD·PDP TV 출현이 예상되고 발신과 수신이 모두 가능한 인터넷전화와 화상통화가 가능한 3세대 휴대전화가 본격 도입된다. ●IT분야 생활혁명 본격화 국제유가는 두바이유를 기준으로 배럴당 32∼33달러의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만 세계경기 둔화, 중국경제 연착륙 등으로 석유 수요 증가속도가 다소 둔화될 전망이다. 이라크 사태와 유전에 대한 테러위협, 중국발 원자재난 가능성 등으로 원유, 철광석 등에 대한 자원확보 경쟁이 격화된다. 세계적으로 이상 고온과 폭우, 가뭄, 지진, 해일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피해 규모도 커질 전망이다. 교토의정서 발효로 온실가스 감축기술 등을 선점하려는 선진기업들간 경쟁이 본격화한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1945년 8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그러나 미처 봄날을 음미할 새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진출해 38선을 그었다. 그 때 어느 유명한 신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포했다.“미소의 두 힘이 서로 상대하여 버티나 태양이 중천에 오르면 밝은 세계가 되리라.” 태양은 누굴까? 중천에 오른다 함은? 전후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 선언에 신도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메시지만은 분명했다. 미국과 소련이 이 땅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은 잠깐이고, 곧 민족의 구세주가 등장하여 외세를 물리치게 된다는 것! 누가 구세주일까? 김구, 여운형, 조만식, 이승만, 박헌영…. 아니면 김일성? 세상 사람들은 거물 정치가들을 놓고 누가 믿을 만한 민족지도자인지를 점쳤다. 극좌파, 중도파, 극우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각자 선택의 폭은 넓었으나 민심의 합일점은 없었다. 지난한 시기였다. 그 때 정감록의 신봉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국난을 뚫고 나갈 진인은 어디 있는가.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는 진인, 지리산에서 뛰쳐나온 진인, 주역에 능통한 진인, 부처, 예수, 공자의 영이 내린 진인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고대해 마지않던 진인은 나오지 않았다. 해방정국은 갈수록 꼬이더니 남북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정감록’에 보이는 6·25전쟁 제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질서에 편입되었다. 양측의 긴장이 팽팽해지더니 1950년 마침내 6·25전쟁이 터졌다. 한국이 안고 있던 내부 문제가 곪아 터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미소 양측의 대리전쟁이라는 설도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전쟁이 장기화될 때 괴로운 건 민중이다. 그들은 난리가 언제 끝날지, 살아갈 방도는 무언지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정감록 신봉자들은 가족을 이끌고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 난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땅)를 찾아 숨는 사람도 생겼다. 정감록 예언에 따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삼풍리로 숨었던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긴데, 전쟁 내내 인민군은 커녕 국군도 본 적이 없었단다. 그들은 정감록의 영험을 믿는 듯했지만 그곳은 어느 편 군대도 진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지독한 오지였다. 꼼꼼히 정감록을 살피던 민중의 눈엔 요거다 싶은 예언 몇 구절이 눈에 띄었다.‘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 같이 대치하리라.’ 우연히도 전쟁이 터진 1950년은 호랑이해인 경인년이었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구절도 있어 강원도 북부에 있는 금강산과 오대산을 경계로 남북이 무력 대치한다는 예언으로 볼 수 있었다. 다만 12란 숫자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남북의 대치기간이 글자 그대로 12년인가, 또는 갑자, 을축 이런 식으로 12지를 10간과 조합한 1갑자 60년인가? 총성이 멎은 지 벌써 52년째, 글자 그대로의 12년은 이미 지났고 60년 한 갑자가 되려면 8년이 남았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을 상징한다는 대목도 회자(膾炙)되었다.‘인천과 부평 사이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한다.’고 했다. 수도권에 ‘시체 더미’가 쌓인다고도 했다. 맥아더 장군이 수많은 전함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했고 서울을 탈환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 구절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 또는 청일전쟁이 남긴 집단적 기억이 재현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연재 제1회 참고). ‘정감록’의 또 다른 구절도 민중의 눈길을 끌었다.‘두 서쪽 땅 곧 황해도와 평안도는 3년간 천 리 안에 사람과 불 때는 연기가 없을 것이요, 또한 동쪽 골짜기, 즉 강원도는 심히 꺼릴 땅이라.’ 사람들은 이 구절을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된 까닭으로 봤고, 뺏고 뺏기는 육박전이 벌어진 장소가 강원도였다는 예언으로 해석했다. 중공군의 개입,1·4후퇴도 예언되어 있었다.‘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오랑캐라,1950년 한겨울 급작스레 대거 투입된 중공군으로 해석됐다. 중공군은 물밀듯 남하를 계속, 평안도 황해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인해전술이란 말은 정감록에 안 보였지만 그 신봉자들에겐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던 사정이 이해될 듯 했다. ●미국대통령을 ‘정도령’으로 착각? 그런데 ‘정감록’ 예언에 대한 기발한 풀이는 따로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국의 원수(元首) 트루먼! 트루(true)는 참 진(眞), 먼(man)은 사람 인(人)!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眞人)은 다름 아닌 트루먼이라는 해석이다. 트루먼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의회의 자문도 받지 않고 미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아니었으면 공산군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 후반,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민중의 살림살이는 참 고단했다.1945년의 해방도 반쪽짜리였고 민중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터지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미국은 각종 구호물자를 한반도에 대량으로 투입하였다. 수만의 병력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하여 전쟁도 수행했다. 사람들은 새삼 미국의 위력을 실감했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구차히 살 바에야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바랐다. 국회로 보내주기만 하면 미국에 가 달러를 더 많이 동냥해 오겠다며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런 판국이라 미국 대통령을 진인, 정 도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1953년 미국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로 바뀌자 그가 진짜 정 도령이란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주고받은 민중도 많았다.“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그리고 일본은 일어난다!” 미국-믿다, 소련-속다, 일본-일어나다.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말투지만 미소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인식이 확산된 결과 생긴 민중의 구호였다. 비록 패전국이긴 해도 일본을 조심해야 한다는 다짐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민중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강대국들을 경원시했다.1894년 동학농민군이 내건 4대 구호 중에 ‘축멸양왜(逐滅洋倭, 서양놈들과 왜놈을 내쫓는다)’란 구절이 있어 그런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그러다가 일제 말기 조상 전래의 성, 말까지 빼앗기자 민중은 주변국가인 중국과 소련에 다소 기대를 걸었다.‘조지로 목친다.’ 이 말이 민간에 퍼졌다. 조지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남부지방 사투리다. 그것으로 어떻게 목을 자를까? 조(조선), 지(지나, 중국), 로(로서아, 소련)가 힘을 합해 목(목인,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벤다는 예언이었다. 민중의 소망을 담았지만 꽤나 섬뜩한 내용이다.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절대 잊을 수 없게,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눈치 챌 수 없게 은어에 담았다. ●‘황해도서 난리 발생’ ‘삼국분기설’ 들먹 ‘정감록’으로 6·25전쟁의 참혹함과 미국의 개입을 읽었다니 얼핏 이해가 잘 안될 수 있다. 예언서에 보이는 오랑캐는 만주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 때는 북쪽으로부터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의 침입이 잇따르고 홍건적의 난도 있었다. 조선 초에는 여진족의 침입이 만만치 않았다. 인조 때는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서북지역은 이민족의 침입로가 되다시피 했고, 그 지역 민중은 외침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기도 했다. 외침의 기억은 민중들에게 잊지 못할 일이 되었고, 이것이 ‘정감록’에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고’ 라는 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오랑캐의 말울음 소리는 현대에 와서 중공군의 남하로 이해되었다. 이런 변화는 ‘정감록’을 처음 전파시킨 조선시대 술사(術士)들로서는 전혀 예측 못할 일이었다. ‘정감록’에는 외침과 무관하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생할 난리가 예고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이 무척 심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컸다. 순조 연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여러 고을을 휩쓸었고, 그 와중에 많은 인명이 살상됐다. 사실 서북지방은 18세기 이후 과거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럼에도 푸대접을 받았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감록’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도 서북지방이었다. 대다수 서북지방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종말을 마다할 일이 없었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북쪽에서 반란이 재발해 남북에 두 나라가 대치한다는 남북분국설이 정감록에 기록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기왕 분국설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몇 마디 보태보겠다.‘정감록’에는 삼국 분기설도 나온다. 나라가 세 동강 난다는 예언인데, 이런 말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행했다. 우리 역사에 삼국시대도 있었고 후삼국시대도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고려 때도 이의민은 신라를 부흥시킨다는 구실로 경주일대를 소란케 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이 있어서겠지만, 민중은 나라가 혼란에 빠질 때면 3국 분기설을 들먹였다. 그런데 3이란 숫자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미륵이 하생할 장소도 산이나 물이 셋으로 나뉘는 곳이었고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길지(吉地) 중에도 3도봉 같은 곳이 포함된다. 지금까지 알아 본 역사적 배경은 아랑곳없이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정감록’에 보이는 서북지역의 혼란상을 국토분단,6·25전쟁의 참상, 또는 1·4후퇴를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민중의 예언 해석에는 시대적 맥락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그 구절을 뭐라 해석했든, 나는 내 시대의 문제를 푸는 새 해석을 좇겠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에서 예언 문화엔 층위랄까 나이테가 보태졌다. 현대의 민중이 미 대통령 트루먼을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으로 본 것은 어떤가. 진인이란 새 왕조를 열 국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나타나 계룡산 아래 도읍을 정한다고 보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 우리 역사에서 진인의 도래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7세기였다. 그 때부터 오랫동안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는 예언)이 인기를 끌었다. 역모를 꿈꾼 사람들은 늘 진인의 출현을 주장했을 정도다. 어쨌거나 진인은 기존질서에 대항해 싸울 영웅이었다. 그런 진인이 1950년대에는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지도자, 기존질서의 사령관인 트루먼으로 둔갑했다. 합리적·체계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 신봉자들의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시의에 맞기만 하면 민중은 꽤 엉뚱한 해석에도 환호한다. 수백 년 동안 ‘정감록’이 생명을 이어온 까닭은 그것이 시대상황에 맞게 새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다. ●예언서는 민중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 해방 이후 미국의 중요성은 국가 차원에서든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든 날로 커졌다. 민중은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구절을 찾느라 열심이었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던 아득한 시절에 만들어진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기록을 찾는다?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지만 필요는 때로 발명이나 발견을 낳는다. ‘정감록’에서 꺼낸 트루먼 진인설과 인천상륙작전설은 억지스러운 발견이었다.1970년대 이후 민중은 미국에 대한 그 이상의 예언을 요구했던지 새 예언서가 등장했다.‘격암유록’,‘율곡비기’,‘송하비결’ 등이 새로 나온 예언서다. 그 중 어떤 것은 특정 종교단체가 배후 조종하여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도 예언서를 빌려 지도자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한 흔적이 있다. 새 예언서에는 한·미관계가 자주 나온다. 어느 책에는 9·11사태(2001년 9월11일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도 언급되어 있다. 더욱 경악할 내용도 있다. 미국은 2004년 북한을 폭격하기 시작해,2005년까지 공격을 계속한다. 그리고 2004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는 재선에 실패하고 이슬람교도의 저격으로 사망한다는 등등의 예언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은 북한을 폭격하지 않고 있으며, 부시는 보란 듯 재선에 성공해서 백악관에 건재하다.2004년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 관심사는 한국 민중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빗나간 예언에도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의 중요 이슈로 등장했는데 민중의 다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지배질서에 반감을 품고 있다. 민중은 부시의 대북 강경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부시의 낙선과 암살을 예언한 것이다. 민중은 부시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부시의 북한 폭격설까지 예언으로 등장한 것이다.50년 전엔 현직 미 대통령을 진인이라 일컫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민중이 직접 예언서를 저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중은 예언의 내용을 결정한다. 노스트라다무스든 ‘정감록’이든 사정은 똑같다. 민중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한 예언서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그 생명도 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예언서는 곧장 버림을 받는다. 민중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정감록’을 해석해왔다. 시대가 바뀌면 그 해석은 늘 달라졌다. 한 시대의 해석은 다른 시대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내가 정감록을 바라보는 관점은 통시대적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지식의 계보학에 가까운 입장이다. 푸코의 말처럼 시공간이 바뀌면 지식과 기억은 변화된다. 요컨대 변화된 사물의 의미를 계보로 정리하는 것이 지식 계보학이다. 나의 정감록 산책도 그렇다. 정감록에 담긴 의미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것, 이것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를 읽는 새 방법일 것이다. 백승종(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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