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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달 7일 中·美 정상회담 위안화 양보 매파 달랠듯

    위안화 추가절상, 북한 핵개발 대응방안, 타이완 독립 움직임 등 미묘한 현안을 놓고 중국과 미국의 정상이 다시 머리를 맞댄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다음달 7일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이 24일 밝혔다. 후진타오는 주석 취임 후 첫 미국 방문이다. 후 주석은 부주석이던 2002년 5월 워싱턴을 방문했었다. 현재의 미·중 관계는 갈수록 심화되는 대미 무역 역조와 미·일 동맹 강화,‘중국 위협론’의 확산 등 갈등 요소가 많지만 한편으론 양국간 협력강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부시 행정부 1기 때엔 스파이 정찰기 사건, 타이완 문제 등으로 긴장이 높았으나 미국의 국제적인 반테러 활동을 계기로 해빙 국면에 접어들면서 양국 관계는 점차 개선되는 양상이다. 미국 입장에선 북핵 문제,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의 매끄러운 종결, 유엔 개혁 등에서 중국의 협조가 아쉬운 상황이다. 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미국의 ‘따뜻한 눈길’이 무엇보다 필요한 중국이다. 하지만 악화되는 미국의 경제상황이 걸림돌이다.3310억달러란 사상 최대의 재정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은 중국측에 위안화 추가절상 등 무역역조 시정이 발등의 불이다. 지난 1월 중국산 섬유 수입쿼터제 폐지 이후 의회와 노동계에선 “중국산 섬유류 수입이 58%나 급증, 미국내 일자리를 잡아먹고 있다.”면서 지적재산권 위반 단속강화 요구 등 반중(反中)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따라서 후진타오는 일부 경제문제는 양보하면서 미국내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한 중국 견제기류를 희석시키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위안화 추가절상과 섬유협상 양보 등 ‘선물’도 예상된다. 다음주 베이징에서 속개될 섬유협상에선 중국산 섬유류의 수입을 실질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포괄적 수입제한 방안이 협의될 전망이다. 미 기업계의 반중 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행보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8일 중국의 4개 항공사는 보잉사와 신형 중형항공기(보잉-787) ‘드림라이너’ 42대 구매계약을 맺었다.50억 4000만달러 규모다. 남방항공·하이난항공 등도 보잉-787기 18대 구매 계약을 올해 안에 끝낼 계획이다.6자회담 주최국인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의 역할을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면서 다른 문제에서 미국의 양보와 협조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평가다. 양국 정상이 이번 만남에서 북핵을 둘러싸고 어떤 식의 ‘주고받기’를 할 것인지 주목된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일본을 다시본다] (18) 일본인이 그리는 일본의 미래

    [일본을 다시본다] (18) 일본인이 그리는 일본의 미래

    |도쿄 특별취재팀|일본인 특유의 엄살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일본인들이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이대로 가다간 일본은 안된다.”고 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미래에의 비관은 엘리트층일수록 더 심하다. 미국의 케네디스쿨에서 유학 중인 아키(42·전 중소기업 이사)는 “미국에서 보면 영락없이 일본은 미국의 여자친구다. 남자친구가 하자는 대로 한다. 이렇게 해도 정말 괜찮은지 걱정이 든다.”고 꼬집는다. 그의 지적은 일본의 종속적인 대미관계를 비판한 것이지만, 외교를 비롯해 일본의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2류국가로의 추락은 시간문제라는 사고를 갖고 있는 일본인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창당 50주년을 맞는 올 가을쯤 싱크탱크를 출범시킨다. 웬만한 대기업, 은행에 하나쯤 있는 게 싱크탱크인데 뭐 대단하냐고 하지만 관료집단에 정책을 의존해 온 일본 정치 풍토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시도이다. 경쟁이라도 하듯 제1야당 민주당도 비슷한 시기에 싱크탱크를 띄운다. 입법이나 정치활동에 자기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것이 정당 본래의 임무인데도, 패전후 일본을 이끌어온 자민당 정치는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관료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만큼 관료의존이 심각했다는 진단은 일본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다. 관료의 정보와 정책에 목을 매는 한심한 처지를 호소하는 일본 정치인의 자조인 셈이다. 스즈키 다카히로는 “가스미가세키(霞が關·중앙관청가)가 최대의 적”이라고 말한다. 스즈키는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대리의 특명을 받고 지난해부터 싱크탱크 출범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오사카대학 교수 출신의 그는 도쿄재단을 만든 수완을 인정받은 일본의 싱크탱크 1인자이기도 하다. “정치가 행정을 컨트롤해야 하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는 그는 정당과 싱크탱크, 행정이 합체화되어 있는 미국이 이상적인 모델이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행정과 민간,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 수 없는 일본 시스템을 이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게 그의 소망이다. 차기내각의 재무상으로 꼽히는 시오자키 야스히사 의원도 자민당 싱크탱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일본을 이렇게 진단한다.“자본주의라고 하면서도 관료통제의 사회주의 경제를 해왔다.” 미국 유학파(하버드대학)인 그가 싱크탱크에 거는 기대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10∼20년 뒤의 동아시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큰 그림이 없다면 곤란하다.”면서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가, 일본 내 미군기지의 재편 같은 문제들은 미래의 밑그림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의 핵무장에는 동의하진 않지만, 헌법 개정에는 찬성한다.70년대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돈·물건이 어떤 장애없이 오갈 수 있는 시스템은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유엔에 내는 분담금이 가맹국 중 2위인 일본이 국제정치에서의 영향력은 30위라는 불균형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일본의 추락을 걱정하기는 40대의 소장파인 고바야시 유타카 참의원 의원(자민당)도 마찬가지다.“일본이 선진국 중 가장 하위로 떨어지고, 중국이나 인도에도 추월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그는 강한 경제의 재구축이라는 기대를 미래 일본에 걸고 있다. 민주당에서 브레인으로 꼽히는 마쓰다 고지 의원(참의원)의 진단은 보다 가혹하다. 그는 “일본이란 나라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면서 재정악화, 소자화(少子化)·고령화, 교육, 역사의 순으로 ‘위기의 일본’이 타개해야 할 문제로 꼽았다. 일본이 떠안고 있는 780조엔의 국채 및 지방채는 경기악화가 지속될 경우, 하이퍼 인플레의 뇌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외교방식과 역사인식에도 통렬한 일침을 놓는다.“미국에는 3분의2 정도를, 나머지는 한국이나 아세안과 손잡아야 하는데, 고이즈미는 양다리를 모두 미국에만 걸치고 있어 너무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고이즈미는 역사인식 문제만 나오면 이상한 발언을 하는데, 개인적인 신조와 일국의 총리된 입장은 달라야 한다.”고 꼬집는다. 우정민영화 법안이 부결돼 지난 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함에 따라 9월11일 치러질 총선은 패전 60년 이후 일본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가늠자이다. 색깔이 비슷한 자민·민주당의 정권교체의 가능성보다는 전쟁을 모르는 전후 세대, 특히 30∼40대의 주류화 여부는 큰 관심거리다. 청년시절 80년대 거품경제의 단맛과 90년대 장기불황의 쓴맛을 두루 경험한 그들이 일본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잡는다면 그들 선배가 이룩한 ‘재팬 넘버1’의 신화를 어떻게 재창조하려 들지가 최대 관전포인트이다. ■외무성 출신 하라다 다케오 |도쿄 특별취재팀| 지난 3월 외무성에서 잘 나가던 젊은 관료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1971년생, 도쿄대 법대 출신. 고시출신인 그는 출세가 보장되는 코스인 북한반장을 끝으로 관직을 접는다. 대북 외교의 최일선을 떠나 민간인이 된 그는 ‘북한 외교의 진실’이란 책을 펴내 일본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책의 저자 하라다 다케오는 “동아시아가 ‘세련된 제국주의’의 격전장이 되고 있으나 일본은 그런 데 전혀 눈치조차 못채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련된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정의는 이렇다.100년 전에는 군대를 보내 상대를 제압해 이익을 취했다면, 지금의 제국주의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세련된 방법으로 이익을 챙긴다는 것이다. 북핵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냉전구조가 무너진 뒤 동아시아, 북동아시아가 같은 큰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면서 “겉으로는 북핵문제를 떠들고 있으나 미국은 부(富)가 어디에 있는지 눈을 돌려 군사·외교·문화 정책을 전개하고 있으나 일본만 뒤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련된 제국주의를 인식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다른 나라의 기업에 빼앗겨서 일본은 점차 하락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따라서 일본은 새롭게 부(富)를 챙기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자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논리는 그의 책에서 북한의 희소광물에 주목해야 한다는 섬뜩한 주장으로 연결된다. 그는 “북한은 어디까지나 ‘사례연구’일 뿐”이라고 하지만 ‘세련된 제국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한반도 경제침략론으로 읽히는 그의 논리전개는 당돌하고, 우리로선 입맛이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고도경제성장의 단물을 누린 70년대생인 그는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옛 세대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좋았다. 단독주택에 살고 아이 낳고, 그런 꿈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수한 사람은 해외로 나가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제가 안 좋아지고 정치의 수준도 떨어진다.‘내일 뭘 하지.’라는 그런 논의밖에 하지 않는 정치가 되어버렸다. 그런 악순환에 빠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같은 70년대생들이 일본을 바꿀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다.‘70년대생의 힘’, 그 실체는 있는가.“절대적으로 사람 숫자가 많다. 노동자도 많고, 시장에서 볼 때 소비자도 많다.”일본의 전후를 일궜던 베이붐세대(단카이세대)에 이은 제2의 베이붐 세대가 일본의 재약진을 이루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일본의 향후 10년은 어떤 모습일지를 묻자 그는 또 ‘세련된 제국주의’를 꺼낸다.“뺏을까 뺏길까 하는 상황에서, 지금까지는 뺏는 주체였으나, 다른 나라에 빼앗기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발상의 전환, 대담한 정책 즉 외교, 교육문제에 눈을 돌려야 하며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지금 방향전환, 그 분기점에 와 있다.” marry04@seoul.co.kr ■취재 후기 2020년의 세계정세를 전망한 ‘지구의 미래를 그린다’는 지난 1월의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 중국의 국민총생산(GNP)이 일본을 웃돌고 “21세기는 중국·인도가 이끄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중국의 위협을 경고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노화하는 대국’으로 정의,“중국에 대항하느냐, 영합하느냐의 선택에 몰릴 것”이라며 일본의 분발을 우회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3개월 뒤, 일본 정부의 경제재정자문회의는 2030년의 미래상을 담은 ‘일본 21세기 비전’을 발표한다. 소자(少子)·고령화가 진행되어도 구조개혁에 힘쓰면 몇살이 되더라도 일이나 사회에 참가하는 ‘건강수명 80세 시대’의 실현할 수 있다는 낙관적 목표를 설정해 두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대조류의 변화에 둔감한 채 있으면 되돌릴 수 없는 사태에 이른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이 덥혀지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러 비극을 맞게 된다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는 20년쯤 뒤 일본의 자화상이다. 일본에서 만난 차세대 정치인, 교수, 언론인들, 그들의 상당수는 지금의 일본에 답답해 하는 듯 보였다. 패전 이후 일궈온 제2의 경제대국, 그러나 세계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배척받는 나라.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은 이미 사죄했으니 더 거론하지 말라는 신경질적인 반응. 공룡이 되어가는 중국의 압박과 유일한 동맹국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 그들은 패전 직후 전쟁 포기를 명문화한 헌법을 개정하는데서 질식할 듯한 일본의 상황을 돌파하는 열쇠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헌법을 지키겠다는 좌파세력이 몰락한 토양에서 이윽고 시동이 걸린 개헌론. 개헌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일본호의 향후 10년간은 우리가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엄중한 압력이 아닐 수 없다. marry04@seoul.co.kr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 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 황장석(정치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marry04@seoul.co.kr
  • [열린세상]중미 한인의 봉제산업/이성형 이화여대 정치학 교수

    월마트,K마트,J.C. 페니, 시어즈, 색스 핍스 애비뉴, 캐빈 클라인, 크리스티앙 디오르, 빅토리아즈 시크릿, 스피겔, 리즈 클레어본, 더 리미팃, 더 갭.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의 의류 체인점들이다. 이들은 시즌에 맞는 의류를 디자인하고 이를 하청업체에 발주한다. 하청공정을 담당한 중미의 기업들은 대체로 한인 기업이 아니면 타이완 기업이다. 현지인 업체나 미국인 업체도 물론 있지만, 아시아 기업인들의 비중이 훨씬 크다. 의류 한 점의 소매가격이 50달러라면 하청업체의 납품단가는 대체로 5∼8달러 수준이다. 하청 기업인들은 ‘3% 마진을 둘러싼 전쟁’을 치른다. 발주 수량이 많다면 박리다매로 돈을 벌지만, 주문량이 줄어들면 그야말로 악전고투이다. “의류산업은 화전경작 비즈니스랍니다. 고정 투자비가 별로 들어가지 않으니 사실 야반도주해도 별로 손해 볼 것도 없지요.” 국내 굴지의 의류업체를 일군 한 노(老)기업가가 현지에서 한 촌평이다. 이 분의 말씀에 따르면 근로자의 임금이 월 300달러가 넘어가면 수지를 맞추기가 어렵단다. 이미 과테말라도 300달러가 넘는 상대적 고임금 국가가 되었으니, 고가의 의류 생산업체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100달러 수준의 중국과 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의 추격도 맹렬하고,200달러 수준의 인접국 온두라스·니카라과·엘살바도르와의 경쟁도 치열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가끔 한인 기업주가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하고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어글리 코리언’이란 나쁜 이미지를 남겨 두고. 얼마 전에 중미 봉제업체들을 다녀왔다. 여기저기 땀 흘리면서 열심히 뛰고 있는 한인 기업인들과 관리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곳곳에 진출한 한인사회의 역동성도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에어컨 설비에 현대적 부대시설을 갖춰 국내 대기업의 작업장과 다를 바 없었다. 소음, 먼지, 좁은 공간, 과로 등과 같이 과거 봉제공장 작업과정을 특징짓는 단어들은 박물관에 들어간 듯싶었다. 의류산업이야말로 감시의 눈초리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산업이 아닌가. 미국의 소비자 인권단체인 퍼블릭 시티즌, 인권 워치, 노조인 AFL-CIO가 의류업체들을 엄격하게 감시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를 툭하면 정치적 쟁점으로 몰고 간다. 민주당 의원들을 동원하여 부당노동행위를 이유로 청문회를 열고, 심지어 현지 대사관에 압력을 가해 ‘아시아 기업 때리기’도 일삼는다. 7월23일 미국의 노조지도자 찰스 커나건은 시민들이 75달러에 사는 NBA·NFL 운동복의 경우 온두라스의 한인 기업이 근로자에게 개당 19센트를 지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작업반장은 근로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도 통제하고 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의류산업을 아는 사람이라면 75달러의 대부분을 누가 가져가는지 잘 안다. 때마침 미국과 중미의 자유무역협정(CAFTA)을 둘러싼 하원의 표결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도 우연히 현장에 있었다. 해당 기업의 화장실은 너무 깨끗했고, 근로자들은 작업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이동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응했던 근로자 몇몇은 자국의 근로기준법 기준보다 높은 작업환경에 만족감을 표했다. 커나건의 더티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중미자유무역협정은 통과되었다. 중미자유무역협정으로 현지 의류업체들은 약간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하지만 봉제업체의 노사관계는 이미 정치화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내 소비자 단체, 노조와 인권단체들이 보내는 감시의 눈초리는 더욱 엄중해질 것이다. 임금과 근로기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니카라과·엘살바도르 등지로 한인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건이 터지기 전에 막아내는 예방조치의 지혜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학 교수
  • [광복60-한·일 국력 현주소] 日 GDP 7배·수출입 4배…선박·IT는 韓國 우위

    [광복60-한·일 국력 현주소] 日 GDP 7배·수출입 4배…선박·IT는 韓國 우위

    ■1. 경제력은‘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이지만 세계 무대에서의 평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실제 나타난 경제지표나 사회지표들도 그렇다. 한국이 일본을 앞선 부분은 선박과 정보기술(IT) 분야뿐이다. 인구 수는 우리나라가 4829만명으로 1억 2764만명인 일본의 절반을 밑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2004년 기준 4조 6734억달러로 한국(6801억달러)의 7배에 가깝다.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한국이 1만 2720달러로 일본(3만 4192달러)의 3분의1 수준이다. 외환보유액도 일본은 8435억 3700만달러로 우리나라(2049억 8600만달러)보다 4배 가까이 많다. 우리나라의 수출·수입이 크게 늘고 있지만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일본에 뒤진다.2004년 우리나라의 수출·수입액은 각각 2538억 4500만달러,2244억 6300만달러로 세계 12위,13위다. 반면 일본은 수출·수입액 규모가 모두 세계 4위다. 세계경제포럼(WEF)과 스위스국제경영대학원(IMD)이 평가한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29위.IMD 평가에서는 일본(21)에 근접해 있으나 WEF 평가로는 일본(9)에 한참 뒤져 있다. 이는 국가신용등급에도 나타난다.S&P는 일본 신용등급을 위에서 4번째 등급인 AA-로 평가한 반면 우리는 이보다 2단계 더 낮은 A다. 그나마 최근 한 단계 올린 결과다. 무디스는 일본의 신용등급을 가장 높은 Aaa로 평가했고, 한국은 6단계나 낮은 A3다. 피치는 일본의 신용등급은 AA, 한국은 3단계 낮은 A로 평가했다. 산업별로도 여전히 주요 기간산업은 일본에 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자동차 생산량은 346만 9000대로 일본(1051만 2000대)의 3분의1 수준이다. 철강생산량(조강 기준)도 우리나라는 4750t으로 일본(1억 1270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선박 건조량은 지난 2002년 일본을 추월한 뒤 계속 1위를 지키고 있다.2004년 선박 건조량은 831만 9000CG/T으로 전년보다 14.5% 증가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17.1% 늘어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인구 100명당 인터넷 이용자 수나 이동전화가입자 수 등은 우리가 훨씬 앞선다. 삶의 질은 일본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인당 보건지출액의 경우 한국은 577달러인 반면 일본은 2476달러로 한국의 4배 이상이다. 유엔이 평균수명, 교육수준 등 주요통계를 통해 인간개발성취 정도를 평가하는 인간개발지수는 한국이 28위, 일본이 9위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2. 군사력은광복 이후 한·일 양국은 군사력 측면에서 지속적인 신장세를 보여왔다. 1945년 패전(敗戰)으로 인해 군사력 측면에서 사실상 ‘잿더미’를 경험한 일본은 이미 군사 대국화(大國化)의 길로 들어섰다. 동족간 전쟁에 분단까지 겪은 한국도 군사력에서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남북한이 군사적 대치 상황을 오랜 기간 지속해온 탓에 나름대로 군사력은 크게 확충됐다. 패전 이후 일본은 군은 물론 타국에 파괴적 피해를 주는 무기도 보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왔다.‘군대 아닌 군대’로도 불리는 자위대(自衛隊)의 이름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자위대의 활동 영역은 이미 전 세계로 확대됐고, 보유 전력도 중국 러시아 남북한 등 주변국 어느 나라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육상·해상·공중으로 나뉘어진 자위대의 병력은 지난해 말 현재 23만 9000명. 중국이나 러시아 한국 등 주변국보다 적다. 하지만 보유 장비 등 전력을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해상 자위대는 한국이 단 한 척도 없는 이지스함을 4척이나 보유하고 있다. 이지스함은 건조 비용만 해도 1조 2000억원에 달하는 최신예 함정. 또 잠수함 16척 이외에 구축함과 순양함, 호위함 50여척을 갖고 있다. 항공 자위대 역시 공중전에 강한 최첨단의 F-15J 전투기는 200대가 넘는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일제시대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 등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당시 ‘국방사령부’로 출범했으며,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정식 발족했다. 정부 수립 당시 5개 여단 5만여명에 불과하던 남한의 병력은 현재 13개 군단,49개 사단에 68만여명으로 늘었다. 물론 북한의 경우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한보다 훨씬 많은 117만명의 정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재래식 무기이긴 하지만 야포 8700여문, 전차 3700여대 등 만만찮은 육상 전력과 남한보다 우위로 평가받고 있는 해상 전력도 보유하고 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15일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되찾은 지 1갑자(甲子)가 되는 제60주년 광복절이다.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나 당시 독립을 쟁취한 한국은 이후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일 양국간 국력 변화의 추이를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조명해 본다. ■ 민족문제硏 조문기이사장의 ‘광복60년 直言’ 1945년 7월24일. 거물 친일파 박춘금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던 그다. 해방 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려 하자 여기에 반대해 삼각산(현 북한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폭탄을 터뜨리려 했던 이른바 ‘인민청년군 사건’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떠돌던 그는 한때 광복회 경기지부장을 맡았지만 90년대 초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미련없이 이 자리를 내던졌다.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동지들은 빠짐없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렸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은 끝내 올리지 않았다. 보다 못해 딸과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 이런 그였기에 약속 장소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아가는 발길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8·15를 앞두고 몇 마디 얻어 들을 양으로 찾아가 ‘아이고∼, 그러세요∼.’라고 맞장구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엔 우리 같은 후대의 역할이 너무 부끄럽고 자괴스러워서다. 예전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몸이 많이 축나 보였다. 그래도 힘주어 말할 때마다 눈빛이 형형하게 되살아 난다. 건강을 묻자 최근 다리에 이상이 와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급해?” 그런다. 숨 좀 돌리자는 뜻이다. 옆에 있던 기념사업회 차영조 상임이사와 셋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광복절 행사 때문에 청와대 등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참석 안할 거냐고 물었더니 노한 목청의 대답이 돌아온다.“해방은 무슨 해방, 해방된 건 친일파 놈들이지. 일본 사람들 눈치나 보던 친일파나 일본 사람들한테서 해방된 거지. 해방이란 게 나라를 몽땅 들어다 친일파한테 바친 거요.” 예상대로다.“친일파들이 득세했다는 거,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반공’과 ‘친미’ 기치 아래에서 기생해 왔다는 것도 다 알아. 그런데 이들이 후계자를 양성해서 각계 요직에 다 앉혀 놨어. 그러니 어쩔 수가 없어. 지하에 계신 선열들이 대로하실 일이지.”손자뻘 되는 기자가 8·15의 의미에 대해 묻자 카랑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8·15라는 게, 그것 때문에 남북이 분단됐잖아요. 그런데 무얼 기념하고 무얼 경축해. 차라리 분단의 날로 정하고 그 날의 의미를 되살리고 각오를 다지도록 해야지.” 그가 광복절만 되면 차고 넘치는 태극기와 ‘경축’‘기념’ 따위의 문구를 피해 산사나 절에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비판 대상이다.“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더 어쭙잖아. 대통령이 불러주면 밥 한 끼 먹고 그걸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게 말이 돼? 친일파 청산과 분단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민족국가’를 꿈꿨던 독립운동가일 수가 있느냐고?” 매섭게 내려치는 말투, 그러나 이내 누그러든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전부 어림잡아 200만명, 만주나 이런 곳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최소한 70만명 정도야. 그런데 우리가 이제껏 유공자로 인정했다는 사람이 고작 1만명 정도야. 나머지는 다 잃어버린 거지. 이게 광복하고, 해방된 나라냐고.” 사무실을 빠져나올 때쯤 기온이 다소 내려앉았다. 시원할 만도 한데 등줄기로 땀이 더 흐른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만은 아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문기씨가 걸어온 길 ▲1926년 경기도 화성 출생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주도(42년) ▲부민관 폭파사건 주도(45년) ▲단정반대 시위로 투옥(48년) ▲이승만 암살 조작 사건으로 투옥(59년) ▲광복회 경기지부장(85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상(90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 취임(99년)
  • [일본을 다시본다] (15)지적 재산권 지켜라

    [일본을 다시본다] (15)지적 재산권 지켜라

    |도쿄 특별취재팀|지난해 5월19일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열린 제11회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이 ‘신산업창조전략’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나카가와 리포트’라고도 불리는 이 보고서는 앞서 2003년 11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의장을 맡고 있는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 일본 산업의 비전을 수립하자고 결의한 지 꼭 반년 만에 탄생했다. 경제산업성 산업구조과 공무원들은 이를 위해 북으로 훗카이도에서 남으로 오키나와까지 300여개 기업의 공장과 연구소 등을 누비며 700여명을 면담, 일본 산업의 강점과 과제에 대해 들었다. 그 결과 불과 1장에 불과하던 초안은 콘텐츠·바이오·로봇 등 미래를 이끌 신산업군과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 등을 담은 156페이지짜리 최종보고서로 거듭났다. 일본이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신화의 재현을 꿈꾸고 있다. 장기불황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굴 필요성을 인식,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유망 신산업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일본 정부는 특히 2000년대 들어 주류를 이룬 첨단산업의 중심에 있는 디지털콘텐츠 산업을 지키기 위해 복제품 형사처벌 등의 보호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짝퉁’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대표적이다. 흔히 콘텐츠는 ‘저장·전달될 수 있는 인류의 모든 표현 및 지식’으로 정의한다. 이를 전자적으로 창조, 변환해 저장·전달의 효율성을 높인 것이 디지털 콘텐츠로 게임, 온라인포털, 영상, 모바일 콘텐츠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일본은 탄탄한 통신 인프라를 바탕으로 디지털 콘텐츠 분야에서 단일국가로는 미국 다음으로 안정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 3월 발간된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의 ‘2004 해외 디지털콘텐츠 시장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디지털 콘텐츠 시장 규모는 169억 8200만달러로 추정되며, 오는 2008년에는 276억 7100만달러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디지털 콘텐츠산업 육성을 위해 2000년 IT기본법을 제정한 데 이어 2003년에는 콘텐츠전문위원회를 발족했다. 지난해 5월에는 콘텐츠촉진법을 제정, 인재육성과 기본첨단기술 개발, 자금조달제도 등에 대한 지원방법을 명시하고 있다. 경제산업성 상무정보정책국 문화정보관련산업과 와쿠다 하지메 과장보좌는 “모든 산업에서 생산자의 이윤보다는 소비자의 만족도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일본산만 고집하기보다 한국산 드라마나 게임이라도 소비자가 만족하면 수입을 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재 교류나 작품 공동제작 등을 지원해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을 돕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일본의 신산업 발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짝퉁’이다.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각국은 넓은 시장을 확보했지만, 그만큼 거대한 ‘가짜 생산력’의 위협에 시달리게 됐다. 일본디지털콘텐츠협회 이와타 요이치 기획추진본부장은 “중국의 음반 시장 규모가 980억엔 정도인데, 이 가운데 90%가 모조품”이라면서 “복제기술도 나날이 좋아져 점점 더 가려내기가 힘들고,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영업기밀 누설과 모조품 제작에 대해 형사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또한 ‘재판외 분쟁처리제도(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를 도입, 지적 재산권 분쟁을 변호사뿐 아니라 변리사까지 다룰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또 외교적 차원의 대응을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베이징과 상하이에 콘텐츠 전문가를 파견, 기업과의 상담 등을 통해 지적재산권 침해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이러한 보호 방안은 중국산 유사품 등에 심한 타격을 입은 기업들의 요청에 의해 구체화됐다. 정부는 강력한 법안을 마련해 기업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각 기업이 영업비밀이 새어 나갈 우려가 있는 중국에 공장을 두기보다는 인건비가 비싸더라도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국내에서 공장을 운영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낮은 등급의 기술이 필요한 산업은 중국에, 하이테크 기술이 필요한 산업은 일본 내에 공장을 운영하는 이원화 체제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wisepen@seoul.co.kr경제산업성 지적재산정책실 나쓰오 후토시 과장보좌는 “현재 기업들은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 법안을 시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법률명은 나라마다 다르더라도 집행은 EU처럼 전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모방품, 해적판 방지 조약을 만들어 아시아 각국에 제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산업본산 ‘도카쓰 테크노플라자’ |지바 특별취재팀|일본 지바현 외곽에 위치한 도쿄대 가시와캠퍼스 옆에는 면적 2200평,7층 규모의 ‘도카쓰 테크노플라자’가 들어서 있다.98년 11월 문을 연 이 곳에는 현내 10개의 대학 및 고등전문학교와 40여개 기업이 바이오테크놀로지(BT)와 나노테크놀로지(NT) 등 신산업 분야를 공동연구·개발하는 ‘대학연구교류 오피스’가 설치돼 있다. 테크노플라자는 제조업이 중심을 이루는 지바현의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지자체, 대학이 힘을 합쳐 독특한 클러스터를 형성한 곳이다. 지바현 내의 제조 기업은 15만곳, 사업소만 20만개에 이른다. 하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 40% 이상을 차지하다 보니 지자체와 기업 사이에서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양보다 질적인 면의 성장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현은 94년 정부 산하 ‘신산업비전 협의회’에 산학협력 연구소 건립을 제안, 허가를 받아냈다. 현과 정부는 플라자 건립 당시 토지매입 비용 등 100억엔을 투자했고, 지금도 연간 2억 2700만엔을 지원하고 있다. 때마침 테크노플라자 건립 이듬해인 99년 생명과학, 물성연구소, 우주선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도쿄대 가시와캠퍼스가 지바현으로 이전을 시작, 결과적으로 지자체·대학·기업이 함께 성장의 기반을 닦는 ‘윈·윈게임’이 됐다. 플라자에 입주한 기업은 입주기간은 5∼7년이며 그 기간동안 플라자 내의 연구실과 기계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현재 플라자에는 100여개의 첨단기기가 마련돼 있으며, 일본 내에 몇 개 없는 마이크로 애널라이저(X선을 통해 물체의 원자구조를 파악하는 기계) 등 수억엔을 호가하는 고가의 장비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wisepen@seoul.co.kr ■‘포켓몬’ 경제 효과는 |도쿄 특별취재팀|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일본의 ‘아니메’를 떠올릴 정도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니메의 작은 캐릭터 하나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창출하는 경제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01년 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아카데미상을 석권하면서 국내에서만 304억엔을 벌어들였으며,2004년 작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200억엔의 수입을 올렸다. 경제산업성은 현재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의 60%가 일본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캐릭터가 한번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다양한 분야에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애니메이션 ‘포켓 몬스터’의 경우 텔레비전 방영 외에도 게임과 DVD, 영화, 책 등으로 제작된 것은 물론이고 장난감, 이름을 딴 식품, 옷 등 여러 아이템으로 만들어져 모두 2조 3000억엔의 수익을 냈다. 영화의 경우 극장개봉을 통해 얻는 수익 말고도 부수적인 관광효과를 낼 수 있다. 이와이 지 감독의 99년 작 ‘러브레터’의 무대가 되는 오타루는 98년 1136명의 관광객이 찾아온 데 비해 개봉연도인 99년에는 4232명이 찾아왔고,2000년에는 6614명,2001년에는 1만 1827명이 방문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소수 거장들이 시장을 주도, 이들이 은퇴하면 일본 애니메이션계가 통째로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일본디지털콘텐츠협회 기획추진본부 기획조사부 국제실 나미코시 노리코 과장대리는 “왕성하게 활동중인 일부 중견작가들에게 의존하는 구도를 개선하기 위해 매년 신인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콘텐츠공모전을 여는 등 신예 발굴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wisepen@seoul.co.kr 협찬 : POSCO
  • [시론] 저출산대책, 공염불 되지 말아야/박은태 인구문제연구소 이사장

    [시론] 저출산대책, 공염불 되지 말아야/박은태 인구문제연구소 이사장

    인구성장의 단계를 보면 1965년 농경사회의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으로 인한 증가로 합계 출산율은 6에 달해 인구성장은 2.8%를 넘었다. 1980년대 개발경제를 거쳐 산업사회에 진입한 우리의 인구환경은 변화하기 시작, 출산율은 3으로 줄었고 선진국에서 100여년 동안 경험한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인구구조에서 소산소사로 전환하는 변천기를 맞게 됐다. 오늘날 후기산업사회의 디지털시대를 맞은 우리의 출산율은 OECD 회원 국가 평균출산율 1.5보다 낮은 1.19의 최하위권 출산율을 나타내고,2005년 통계는 1.15를 밑돌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급격한 저출산은 고령화로 진행되어 인구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망되고 있다. 한국의 인구성장은 2019년에 정점에 이른 뒤 하강국면으로 돌아서서 인구성장은 감소추세로 반전돼 노인인구는 현재의 9.1%에서 20%를 상회해 고령사회로 진입함으로써 생산성의 저하로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것이 우려된다. 현재의 출산율이 지속되면 2019년의 인구는 약 5000만명에 도달한 후에 인구성장은 정지 내지 하락추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인구통계는 2050년에 4100만명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50년 주기로 인구의 20%가 감소해 400년 내에 멸종위기에 처할 것이란 예상이다. 저출산대책은 프랑스와 같이 경제주체인 기업, 노동자, 소비자와 정부가 만장일치의 합의하에 중·장기의 출산장려 5개년계획을 수립해 2020년까지 출산율을 현재의 1.19에서 대치출산율 2.1로 높이는 특단의 정책실천이 수행돼야 한다. 출산·양육·교육의 종합정책 예산은 향후 15년간 약 750조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현재의 국방비 지출보다 많은 GDP의 약 5%에 달하기 때문에 민·관협조체제의 지원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우리의 고령화 진도는 서구에서 100여년간 형성된 과정이 불과 30여년 만에 진전돼 서구처럼 제도화된 노인복지의 준비기간을 갖지 못했다. 이에 따라 우리사회는 속수무책의 난감한 처지에 있고, 설상가상으로 IMF 사태후 청년실업과 조기 명퇴의 영향으로 노인문제는 사회인식의 열외대상으로 전락했다. 현재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418만명으로 경로연금 수혜자는 15%에 불과하다. 급격한 고령화 현상은 저출산과 연계되어 이미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특히 호남·충북과 경북 등 산업시설이 열악한 농경지역에는 노인인구가 14%를 상회하여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돼 고령화 문제에 대한 종합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고용문제를 장기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산업인구정책으로 고용유발효과가 큰 산업체제로 개량이 필요하다. 경제대국인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 등은 무역의존도가 GDP의 30% 미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73%로 고용과 해외경제에 민감하여 경제안보에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외수의존형 경제에서 선진국형으로 전환, 인구흡수력이 큰 산업육성이 필요하다. 출산기피는 자녀의 양육과 교육, 고용 불안 때문으로 산업인구의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저출산, 고령화대책을 실효성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가족법을 참작하여 법을 제정하고 인구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가족법 성공요인은 지속성에 있다. 지금이라도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준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박은태 인구문제연구소 이사장
  • “후임대사, 폭탄주 빼고는 나와 닮은꼴”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표현하면 ‘협력’이라는 두 글자가 딱 어울립니다. 서로 발전하고 공동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2001년 9월 부임해 4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음 달 19일 이임하는 리빈(李濱·50) 주한 중국대사는 21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인의 정열, 특히 저에 대한 많은 사랑과 지원으로 편하게 일했고, 많은 결실을 보았다.”며 소회를 밝혔다.●“양국 허심탄회해야 문제해결”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유학한 덕분에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그는 부임 이후 양국간 교역규모 증가 수치를 일일이 거론하면서 “지난 4∼5년간 한·중관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고 자평했다. 물론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역사전쟁’으로 불렸던 지난해의 고구려사 논쟁을 곤혹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2001년의 무역마찰, 이듬해 탈북자 문제에 이어 역사문제로 어려운 고비가 있었지만 양국이 지혜를 모아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주지 않아 너무 다행이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 양국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을 것이다.”●“후임대사 `격´보다 능력 따지길” 그는 후임으로 내정된 닝푸쿠이(寧賦魁) 북핵전담 대사에 대해서도 김일성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기동창이라며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주한 국장급으로 임명되는 중국대사의 ‘격’이 너무 낮은 것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그는 “직급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나라 사정을 얼마나 잘 알고 관계를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며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도 젊다며 언론에서 우려했지만 결과적으로 한·중관계는 엄청 발전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경우는 중국과의 특수관계 때문에 차관급이 나가 있는 것”이라고 양해를 구했다.●“만만디? 때론 한국인보다 더 급해져” 폭탄주를 좋아하는 등 애주가로 정평이 난 그는 “닝 대사는 폭탄주를 몇잔 못하니 강요하지는 말아달라.”며 애교스러운 농담도 던졌다.‘만만디’로 통칭되는 중국인들의 ‘천천히’ 습성이 한국 생활동안 많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어떨 때는 한국사람보다 더 급하다. 골프 때 공을 치기 전에 한두어번 연습 스윙도 안하고 그냥 치게 되더라.”고 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한류붐은 대단하다.”며 “40여개 채널이 있는 베이징에서 황금시간대의 절반 이상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 가수가 오면 젊은이들은 공항에서부터 난리에다가 공연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는 등 ‘미친’ 정도”라고 전했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 외교부 아주사 수석부사장(수석부국장)이자 북핵전담대사로 일하게 된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新황화론/육철수 논설위원

    오늘날 중국경제의 초고속 성장에 주춧돌을 놓은 이는 누가 뭐래도 덩샤오핑(鄧小平)이다.50∼100년이란 먼 앞날을 내다보고 설계한 그의 ‘3단계 발전론’은 지금 한창 꽃봉오리를 맺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원바오(溫飽·1979∼1999년), 생활의 여유를 즐기게 한다는 샤오캉(小康·2000∼2020년), 선진복지국가 건설에 나서는 다퉁(大同·2020년 이후)이 바로 덩샤오핑이 제시한 3단계 국가경영 대계(大計)다. 이런 국가비전을 착실하게 수행 중인 중국은 1999년 1인당 국민소득 800달러를 넘겨 1단계인 원바오를 거뜬히 달성했다. 연평균 8∼9%라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률을 이어가는 중국에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2020년이면 중국이 구매력에서 미국을 앞서고 2040년에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예측이 나오는 판이니 미국으로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마침 중국기업의 미국기업 인수를 둘러싸고 미국 정계와 경제계에는 황화론(黃禍論)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이다.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진주만 공격,1980년대 일본자본의 미국 부동산 싹쓸이에 이어 제3의 황화론이 거론되는 셈이다. 중국 최대의 컴퓨터업체인 렌샹은 지난해말 IBM PC부분을 어렵게 인수했다. 이어 올 들어 CNOOC(크눅)가 미국의 자존심격인 석유회사 유노칼을 노리고 있고, 하이얼은 미 가전업체 메이텍 인수를 추진 중이다.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와 7110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2위의 외환보유고를 앞세운 중국의 파상공세에 미국은 국가안보까지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미국이 케케묵은 황화론을 들고 나오는 걸 보면 다급하긴 다급한 것 같다. 황색인종에 의한 백색인종의 피해의식을 일컫는 황화론의 원조는 13세기 몽고의 유럽 진출이다. 이후 청일전쟁 때인 1895년 독일황제 빌헬름 2세가 황색인종을 억압해야 한다고 들먹인 게 공식화된 황화론이다. 정치·군사·인종적 의미가 강하지만 지금은 경제적 의미가 덧붙여져 ‘신(新)황화론’으로 불린다. 카오스 이론처럼 ‘베이징의 나비’가 뉴욕에서 허리케인을 불게 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사설] 반인류 테러 우리도 철저 대비를

    그저께 영국 런던에서 자행된 연쇄 폭탄테러는 세계인들을 또다시 공포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알카에다 유럽지하드’라는 단체는 이 테러가 자신들의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영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개입에 대한 보복이라고 밝혔다. 어떤 이유로든 테러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력은 전세계인이 힘을 모아 막아야 하고, 응징해야 한다. 더이상 지구촌을 불안과 공포로 뒤덮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의 현실은 심각하다.4년전 미국 뉴욕 무역센터를 강타한 9·11테러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의 열차 폭탄테러가 발생했고, 런던의 테러 시점에는 바그다드 주재 이집트 대사가 테러단체에 의해 피살됐다. 미국과 영국 등 세계각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오래됐지만 테러가 줄기는커녕 늘어나는 지경이다. 국제적 테러대비 공조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전쟁과 갈등을 줄여 지구촌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인류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테러조직들에는 테러로는 어떤 목적이나 주장도 관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도 테러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점은 수차례 경고된 바 있다. 최근의 테러는 이라크전에 참전한 나라들을 공격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으며, 불특정 테러단체로부터 여러차례 테러위협을 받은 바도 있다. 이제 테러는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지 모른다. 테러에 대비한 국제공조는 물론, 국내시설 보호나, 여행객들의 안전, 국제행사가 열리는 시기나 행사장 주변에 대한 경계업무도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테러가 사라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 [월드 이슈] 가난·빈곤·분쟁…눈물의 아프리카

    [월드 이슈] 가난·빈곤·분쟁…눈물의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있다.8일 폐막되는 G8 정상회담에서 지난달 G7 재무장관회의에서 확인됐던 수준 이상의 빚 탕감이나 극적인 원조 증액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외원조만 4500억달러(450조원)가 제공됐지만 대륙의 실상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를 한숨 짓게 하는 빈곤과 기아, 에이즈, 내전과 분쟁을 돌아보고 바람직한 원조 방법을 모색해본다. 하루 60센트(630원). 아프리카 인구의 약 절반인 3억 3000만명이 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돈이다. 사하라 이남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 1인당 한해 국민총소득(GNI)이 765달러를 밑돈다. 에티오피아와 브룬디 국민들은 90달러(9만 4500원)로 1년을 버텨내고 있다. 유엔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만 하는 세계 최빈 48개국 중 이 대륙에만 32개 나라가 포함돼 있다. 80년대 이후 이들 나라의 1인당 소득은 13%나 줄어들었고 극빈층 숫자는 곱절로 늘었다. 세계은행은 1990년대 10년 동안 잠비아에서 1인당 GDP가 2% 하락하는 사이 극빈 인구도 똑같은 비율로 늘어나고 우간다의 GDP가 3.7% 증가하자 빈곤층 숫자도 같은 비율로 줄어든 것에 주목한다. 원조나 지원보다는 국가의 경제성장 자체가 빈곤 해결에 더욱 결정적이라는 분석이다. 대학살과 인종청소, 내전으로 인한 식량난도 심각해 한해 50만명 이상이 기아로 숨진다. 그리고 오염된 물을 마셔 숨지는 사람은 1년에 70만여명에 이른다. 이렇게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데는 무능하고 부패한 절대권력에 지원금을 통제할 권한을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스와질란드 국민과 달리 국왕 일족은 벤츠승용차 구입에 88만달러 이상을 썼고 미국의 콩고민주공화국 지원금은 제트기와 궁전 건축에 전용됐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한해 아프리카에서 비밀계좌로 빼돌려지는 금액은 26억 5000만달러”라고 주장했다. 역내 국가들이 지금까지 상환한 대외원조만 5500억달러에 이른다. 아직도 상환해야 할 2950억달러가 대륙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옥스팜과 같은 구호기관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광범위한 수탈, 그리고 아프리카의 농광업 자원 수출을 가로막는 부국들의 무역보호와 농업부문 보조금이 빈곤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자립기반 마련이 우선 “구걸로 아프리카의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지난 5일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 개막연설 중 한 대목이다. 과거 식민지배와 수탈에 대해 책임이 있는 G8 국가들을 상대로 추가적인 부채 탕감이나 원조 증액을 호소하는 다른 정상들을 공박한 것이다. 이번 G8 정상회담에서 15개 아프리카 국가를 포함,18개국의 부채 400억달러를 탕감해주는 방안이 승인되겠지만 아프리카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들 나라의 전체 부채 2950억달러의 13%에 불과하고 부패한 관료들의 배만 불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합의를 주도한 영국조차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일이 많았다. 다른 프로그램에 쓰이는 예산을 슬쩍 돌려 새로 제공하는 것처럼 꾸미는 수법이 자주 등장했다. ●현물원조 부패관료 배만 불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2년 전 에이즈 치료 명목으로 150억달러를 약속했으나 의회에 예산 요청을 할 땐 지원액을 줄여버렸다. 케냐의 경제전문가 제임스 시그와티는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원조는 이익보다 해만 끼친다.”며 “제발 원조를 중단해달라.”고 주장했다. 케냐에 원조가 끊길 경우 우간다나 탄자니아와 식량 교역을 하고 이를 위해 내부 기반시설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취지다. 앤드루 낫시오스 미 국제개발처(USAID) 처장 역시 “(선진국의) 원조가 부패를 키워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동조했다. ●농산물 보조금·관세 철폐해야 파이낸셜타임스는 자그디시 바그와티 컬럼비아대 교수가 현지인 기술 교육과 아프리카에서 일할 자원봉사대의 운영에 비중을 두는 방식으로 원조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강조했다. 또 설탕과 면화 등 아프리카의 대표 상품들에 대해 선진국들이 보조금과 관세를 철폐하는 것도 당장 돈 몇푼 지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했다. 카다피 원수도 역내 국가들의 교역 증진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식민지배도 혼란의 원인 아프리카에는 왜 내전이 끊이지 않는가? BBC 인터넷판은 시에라리온 내전에 참전했던 용병을 통해 아프리카의 눈으로 바라 본 아프리카 문제를 진단했다. 코버스 클라센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군대에서 복무하다 사설 군대 회사로 옮겨 1995년부터 시에라리온 내전에 참전했다. “사람들이 산 채로 집과 함께 태워지고, 소녀들이 성당에서 강간당한 뒤 목이 잘려지는 등 아프리카에서 들려 오는 끔찍한 이야기는 실제로 모두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아무 할 일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이들이 쉽게 전쟁에 빠진다고 클라센스는 말했다. 수입이 두 배가 되면 내전이 일어날 확률이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아이러니도 있다. 전쟁을 할 만한 일이 생기면, 돈은 오히려 전쟁을 진행시키는 재원이 된다. 시에라리온 장관인 오케르 아담스는 “다이아몬드가 발견됐을 때 농업은 사실상 중단됐고, 광산 지역에선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며 해외에서도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캐려 몰려들었다.”고 설명했다. 앙골라의 반란군 지도자였던 요나스 사빔비가 살해됐을 때 그가 광물 자원으로 쌓은 부는 40억달러에 달했다. 식민통치가 끝난 뒤 발생하는 혼란도 아프리카 내전의 주요 원인이다. 앙골라 내전은 종족 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식민통치는 종족의 터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국경을 일방적으로 나눴다. 아프리카 내전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성공적인 해결 사례를 통해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서 일어난 비극은 피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아공의 케이스는 독보적이다. 만델라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서 흑인들은 과거를 용서했고, 백인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을 배웠기 때문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보츠와나 에이즈전쟁 성공 티없는 순백의 정장을 입은 올해의 미스 유니버스 나탈리 글레보바는 지난 5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 요하네스버그의 병원에서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그녀의 명성으로 남아공의 다른 젊은 여성도 똑같은 일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남아공에서는 500만명 이상이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다. 에이즈 공포도 심각해 감염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거나 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2000년 남아공 사망 통계에 따르면 사망 원인의 3분의1이 에이즈였다. 스와질란드는 성인의 40%가 에이즈에 감염돼 있다. 현재 2500만명의 아프리카인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20년 후에는 그 숫자가 90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유엔이 최근 경고했다. 에이즈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20년 후에는 아프리카 대륙 인구의 10%가 에이즈 환자가 되는 셈이다. 현재 전세계 에이즈 환자의 64%가 아프리카인이다. 보츠와나는 정부의 적극적 노력으로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이란 멍에를 스와질란드에 넘겨줬다. 보츠와나 정부는 모든 에이즈 환자들에게 무료로 약을 제공했다.2만명 이상의 보츠와나 에이즈 환자는 3∼4가지 치료제를 섞어먹는 칵테일 요법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들은 정기적으로 혈압을 측정하는 것처럼 에이즈 감염 검사를 받는다. 보츠와나의 에이즈 치료법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진일보한 것이다. 보츠와나의 경우는 바다에 물 한방울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귀감이 될 만하다. 보츠와나의 성공 사례를 목격한 이들은 정부의 적극적 의지와 노력이 에이즈 치료의 중요한 열쇠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8·끝) 아틀란티스에서 해도출병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8·끝) 아틀란티스에서 해도출병까지

    여름이 되면 누구나 바다로, 섬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누구나 ‘그 섬에 가고 싶다.’거나 ‘아무도 없는 섬에서 단 며칠이라도 쉬고 싶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원형질로 되돌아 가고 싶은 소망이다. 확실히 섬에는 뭔가 있을 것만 같다. 섬의 무엇이 우리를 부르는 것일까. 아득한 바다에는 오로지 수평선뿐이다. 먼 바다에는 새도 날지 않는다. 창공을 나는 새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육지나 섬이 가깝다는 증거이다. 망망대해를 거쳐온 이들이 모처럼 안식을 갖는 섬은 분명 ‘생명의 땅’이다. 그러나 ‘생명의 땅’이기는 해도 모든 섬이 풍족하고 윤택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섬 주변에는 파도와의 오랜 싸움 끝에 날카롭고 강렬한 흔적이 남아 있다. 파도 바람 식량난 식수 표류 도망 무역 침략 등등의 단어들이 섬을 표상한다. 섬이 ‘파라다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육지의 탐학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파라다이스’는 섬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산림으로 도망가서 무리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 숲 역시 육지의 일부분일 뿐이다. 섬은 뭔가 다르다. 가까운 섬은 분명히 육지의 연장선상에 있고, 도서민의 삶 역시 육지에 복속되기 마련이지만, 그렇더라도 섬의 실체가 바다 위에 존재함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척에 있는 섬이라도 틀림없이 섬은 섬일 뿐이다. 누구든 썰물 때가 아니면 지척의 그곳을 걸어서 갈 수 없다.‘어떤 섬도 걸어서 갈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섬의 존재 이유는 육지와 다르다. 문화적 원형질로 볼 때, 섬의 탄생 자체가 신화적이다. 신화적이라 함은 섬을 매개로 무수한 은유, 끝없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탄생이 바다라는 ‘미궁의 자궁’을 통해서 가능했다면, 섬은 그 ‘미궁의 자궁’에서 조건지워진 숙명의 땅이다. 서양인들은 미지의 섬 아틀란티스를 믿어왔다. 이상향인 아틀란티스는 플라톤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의 탐구 대상이었다. 아틀란티스를 찾는 수많은 모험가들이 생겨났으며,‘아틀란티스학(學)´까지 탄생하였다. 우리의 제주 민중들도 나름의 아틀란티스를 갖고 있었다.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이어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그들 이상향적인 섬은 하나의 분명한 대망체계로 등장하고 있었다. 양대 전란을 겪으면서 민중들의 현실적인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공황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조선 후기 민중들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간단없는 노력을 쏟았다. 온갖 저항운동이 이를 증명한다. 그 대표격으로 이상향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민란의 기도나 민란의 배경인 진인의 해도로부터의 출래가 그것이다. 이미 숙종 연간의 갑술환국 당시에도 서인 측에서는 해도의 정진인을 거론하며 사노의 준동을 경계하기도 했다. 빈한하고 미천한 자들을 위하여 무신 망명 역적인 황진기가 장군이 되어 정진인을 모시고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울릉도 월변의 섬에서 나오고 있으니, 청주와 문의가 먼저 함락되고 이어서 서울이 함락될 것이며, 이씨를 대신하여 정씨가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새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점이 괘서와 투서로 퍼져 당시 경기·충청도의 백성들을 동요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왕조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동해에 있다는 삼봉도였다. 삼봉도는 이미 15세기 말 성종 연간에 운위된다. 도부배국(逃賦背國)의 무리 1000여명이 삼봉도에 살고 있었으니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우며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가 셋이 있어 삼봉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위치는 경흥에서 청명한 날에 바라보이며, 회령으로부터 동쪽으로 7주야를 가면 도달한다고 했다. 조정에서는 몇 차례나 이 섬을 수색, 도부배국의 무리를 뿌리뽑으려 했으나 뱃길이 험하고,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다. 이 곳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 자유의 땅으로 회자되므로 이런 백성들의 희망을 근절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을 사실무근인 말을 퍼뜨린 죄로 극형에 처했고, 그 시체를 일도에 돌려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논의까지 제기된다. 섬에서 민중의 해방을 이끌 진인이 출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민중들의 심중에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해도출병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순조 4년(1804)에 장연 등곡천 주위를 중심으로 이달우 등이 일대 변란을 꾸몄다가 모의자들이 체포된 장연작변(長淵作變)이 있었다.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해 봉기할 것을 결의했다. 여기서도 섬이 등장한다. 백령도와 울릉도에 병영을 마련하여 군량미 1000여섬을 저장하고 병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1813년 2월, 성주 출신 향반 백동원은 ‘북적(관서 농민전쟁)이 나왔으니, 남적 또한 반드시 나올 때가 되었다.’고 하였다.1813년 12월에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양제해가 홍경래의 기병에 용기를 얻어 변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 역시 해도출병설과 유관하다. 철종 2년(1851) 황해도를 중심으로 해서고변(海西告變)이 터진다. 주모자들은 대청도, 초도 등지에 병기를 저장하고 군사를 조련시켜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인 4000여명을 동원하려 했다가 실패로 돌아간다. 철종 4년(1853) 12월 봉화에서는 역모를 도모하는 흉서가 나붙는다. 흉서 내용 중 ‘울릉도의 말’이 등장하고,‘선동’‘흉모’ 등의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반역거병(反逆擧兵)을 도모했던 사실이 틀림없다. 이 흉서 때문에 삼남지방에 범인 체포령이 내려지는데 특히 호남의 뱃사람들에 대한 일대 수색령까지 내려졌다. 19세기 초반부터 요란스럽게 당대를 풍미했던 해도출병설은 100여년이 흐른 1898년에도 남학당(南學黨)과 방성칠난(房星七亂)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제주도의 독립국가 건설 방안을 제시한 바 있는 방성칠은 정감록류의 각종 비기에 바탕을 둔 민간 예언사상에 따라 민란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도 진인이 섬에서 나옴을 명시한다. 해도출병설의 전형적인 전모는 일찍이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으니, 이미 19세기 초반에는 해도출병설이 사회변혁 이론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홍경래동란기(洪景來動亂記),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 등 여러 격문에 비슷하게 나타나는 내용을 살펴보면,‘다행히 제세(濟世)의 성인이 청북(淸北) 선천(宣川)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의 가야동 홍의도(紅衣島)에서 탄생하였으니, 나면서부터 신령하였고 다섯살에 신승(神僧)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장성하여서는 강계(江界) 사군지(四郡地) 여연(閭延)에 은거하기 5년에 황명(皇命)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鐵騎) 10만으로 동국을 숙청할 뜻을 가졌다.’고 했다.. 격문 중의 홍의도는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이 말하는 바, 진인의 군사가 있는 해도를 의미하는 구체적인 섬의 명칭이다. 따라서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이 환상적인 예언이 아닌 현실적 사실로 되고 있고, 그 구체적 증거로서 홍의도의 존재를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16세기 정여립 변혁사건의 대미를 장식하였던 역사의 현장도 바로 죽도다. 죽도는 섬은 아니다. 금강 상류가 굽이치는 가운데 동그란 지형이 형성되어 섬을 방불케 한다. 풍수상으로는 물줄기가 감아 돌아가는 회회지지(回回之地)인 바, 상류에서는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이 보이되, 입구에서는 상류 쪽이 보이지 않는다. 난세의 피난처로 요긴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니 오해를 살 법도 했다. 아틀란티스는 지구상에 없는 섬일 수도 있다. 이어도 삼봉도 홍의도도 모두 없는 섬일 수 있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 섬의 진실을 믿었다. 여름만 되면 섬에 가고 싶어 하고, 왠지 그 섬들에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착각, 미지의 섬을 찾아나서는 심리 속에는 전 세계 인류가 공통적으로 간직해온 ‘아틀란티스’적인 그 무엇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섬은 무지랭이 백성들이 모여 사는 단절된 곳일까. 섬은 당대의 선진지식으로 무장한 세력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귀양으로 쫓겨간 ‘유형지’였다. 수많은 인재들이 섬으로 귀양 갔으니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인 곳이 또한 섬이었다. 그리하여 시대를 예언하는 묵시록이 파도를 타고 뭍으로 뭍으로 전해졌다. 이제 섬은 육지로 떠난 사람들 덕분에 텅 비고 말았다. 강진 바닷가에서 18년 귀양살이를 한 정다산은 경세유표에서 ‘해도경영론’을 부르짖었으니, 섬들을 잘 챙기면 보물들이 수풀처럼 바다에서 일어나리라고 하였다. 그의 화두는 21세기에도 유효하다. 21세기의 새로운 이상향은 무엇일까. 아틀란티스는 여전히 ‘미궁의 바다’에 머물고 있다. 꿈과 약속을 이뤄주던 이상향은 1000년을 뛰어 넘는 하나의 기호로 각인되어 유전인자로 전승되고 있으니 섬은 그 자체로 자원이자, 금전이자, 희망이고, 또 이상향이지 않겠는가. ■ 대항해의 닻을 내리며 바다는 역시나 멀고 험했다. 바다는 크고 유장하여 동서고금의 야광주 같은 이야기가 많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절대적 지식이 요구되는 지구 유일무이의 미지의 공간임을 연재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출사표를 쓰고 대항해에 나선 지 꼭 1년. 다행히 심한 배멀미는 없었다. 다시 출행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지난 1년의 항해가 새로운 출항을 위한 안받침이 되리라 믿는다. 서울신문과 함께한 이 기나긴 바다여행에 인내심을 갖고 같이 떠나주신 점,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게 있다면, 인간의 능력으로 바다의 그 깊고 심오한 뜻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탓이리라.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이름 모를 어민들, 그밖에 일일이 명단을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당신, 이야기(베트콩 습격으로 한진직원 5명 사망) 들었소? 내 두말도 안하겠소! 우리 운전수들 군인 출신이오. 방어용으로만 할 테니 M16을 지급해 주시오.”(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너 미쳤냐? 어떻게 민간인에게 군대 소총을 나눠주라는 거야.”(찰스 마이어 꾸이년지구 사령관) “돈 벌러 와서 죽을 수는 없지, 우리도 방어는 해야 할 거 아냐.”(조 전 부회장) “미스터 조, 이건 사이공 사령부도 모르는 일이오. 당신과 나만 아는 일이오, 알겠소?그리고 절대 먼저 쏘지 마시오.”(마이어 사령관)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이 대화는 한진이 사지인 베트남 정글에서 어떻게 달러를 벌었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해방둥이’ 한진이 ‘수송보국’의 길을 걸은 지 60년. 이런 피와 땀들이 모여 오늘날 육·해·공을 아우르는 ‘세상의 길’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라잡이’에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서있었다. 길이 있는 곳에 ‘한(韓)민족의 전진(進)’, 한진이 있다며 전장으로, 바다로, 하늘로, 수송 외길을 걸어온 고 조 회장. 이 때문에 한진그룹의 23개 계열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5대양 6대주에서 한민족의 영토를 세계로 넓히고 있다. ●전장에서 성장한 한진 “형님이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갈 때입니다. 돈 될 만한 사업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중훈 형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베트남 꾸이년지역의 풍경에서 바로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냈습니다. 항만을 보니, 화물이 꽉 찬 배가 50척이 몰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만 본 것이 아니라 배들이 짐을 실은 채 마냥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형님은 갑자기 창문에서 휙 돌아앉아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고 합디다. 다른 사장들이 쳐다볼까 싶어 큰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조 전 부회장은 한진의 베트남사업 첫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의 화물수송사업은 전후방이 없었던 베트남에서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빗발치는 전장을 오가며, 뚝심과 오기로 밀어붙였다. 베트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직원들이 공포에 떨 때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런 고생끝에 주어진 과실은 너무나 달콤했다. 한진이 1966년부터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무려 1억 5000만달러.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가용외화가 5000만달러 남짓이었으니, 한진이 베트남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진은 베트남 특수로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고 조 회장은 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했고,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5억 7000만원에 인수했다. 또 68년 2월에는 한국공항,8월에는 건설회사인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을 세웠다. 이어 인하대학교도 인수했다. ●부실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 고 조 회장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기이자 도전을 맞이한다. 다름아닌 항공사업이었다. “청와대로부터 호출이 왔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가는 내용이었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만년 적자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독촉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형한테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도 불안해서 저도 형님과 같이 청와대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라는데 형님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조 전 부회장) 고 조 회장은 결국 69년 ‘말 많고 탈 많았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보유했지만, 전체 좌석수는 점보기 1대보다 적었다. 또 27억원의 부채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원들은 ‘베트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부실 항공사에 모두 쏟아붓게 됐다.’며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국제선 개척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36년 후 대한항공은 화물수송 세계 1위, 보유 항공기 113대, 매출 7조 2000억원(지난해)이라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주에겐 은퇴란 없다” 트럭 한 대로 국내 최대의 운수그룹을 일군 고 조 회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지 않고, 현장을 챙길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정열적인 경영자였다. 그가 모언론 인터뷰에서 “창업주에게 은퇴란 없다.”고 한 말은 그의 성격과 일 욕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 조 회장은 또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문어발식’ 확장도 자제했다.‘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사업을 하기보다 수송 전문화에 더 집중했다. 주변에서 ‘돈 버는’ 무역회사를 만들자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고 조 회장은 그때마다 “우리가 무역회사를 하면 많은 무역회사들이 우리의 경쟁자가 될 텐데 그들이 우리 비행기를 타고 우리에게 화물을 맡기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 부친 조명희옹과 모친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뚝딱거리고 어질러 놓기를 좋아했던 둘째아들에게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고 조 회장은 45년 광복 직후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설립, 수송 외길의 첫발을 내디뎠다. 고만 고만하던 한진상사가 두각을 낸 것은 56년 미군부대 화물 수송을 맡으면서다. 이때 맺은 미군과의 인연은 한진 성장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찰리 조, 보따리 좀 싸봐” 조중건(영어명 찰리) 전 부회장은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의 동생이라기보다 사업 동반자이자, 유능한 참모였다. 조 전 부회장은 통역과 포병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수송학을 전공했다. 59년에 귀국한 그는 바로 한진에 합류했다. 조 전 부회장의 본격적인 활약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휘됐다. 고 조 회장이 1965년 베트남을 시찰한 뒤, 조 전 부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니가 가서 보따리 좀 싸봐.”이 말은 한번 기획을 잘 해서 사업으로 만들어 보라는 ‘조 브러더스(중훈·중건 형제)’의 은어였다. 조 전 부회장은 미군 인맥을 활용해 중장비 조달 등의 악조건을 뚫고 베트남 꾸이년항의 미군 용역과 수송작업을 따냈다. 계약금액은 790만달러. 조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베트남 수송사업을 돌아볼 때 그것은 참으로 100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사업이었다.” 조 전 부회장은 또 고 조 회장을 도와 70∼80년대 대한항공의 성장사를 주도했다. 국제노선 개척을 위해 당시 소련과 중국 등 적국까지 넘나들며, 대한민국의 하늘을 넓혀 놓았다. 항공노선과 관련된 에피소드 한토막.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선수단 수송을 위한 부정기 항공 노선을 뚫기 위해 혈혈단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구소련 국영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사장과 항공청 장관, 체육부 장관을 만나 설득에 들어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조 전 부회장을 한 궁전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사우나탕과 보드카로 조 전 부회장의 진을 빼기 시작했다. 수십번 반복된 행동으로 조 전 부회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력으로 계속 버티며, 협상을 주도해 나갔다. 동이 틀 무렵 조 전 부회장은 그들의 수장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고 조 회장의 막내동생인 조중식(70) 전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 부회장은 미국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한진에 입사했다. 당시 새로운 건축공법인 H-빔 공법으로 서울 소공동 KAL빌딩 설계 및 시공을 했으며, 중동 특수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많은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조씨가, 명망가로 사통팔달 한진 조씨가의 혼맥은 명망가 집안이 두루 포함돼 있다. 관·재·학·법조계 등으로 폭넓게 뻗어있다. 또 연애 결혼보다 유난히 중매 결혼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은 1944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82) 여사와 결혼했지만, 그의 동생들과 자녀들은 당대의 유력 인사의 자녀를 배필로 맞았다. 고 조 회장과 김 여사는 슬하에 4남 1녀(현숙·양호·남호·수호·정호)를 뒀다. 장녀인 조현숙(60)씨는 68년 숙부인 조 전 부회장의 중매로 당시 엘리트 법조인인 이태희(65·현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 변호사는 흥아타이어 감사를 지냈던 이상묵씨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이다.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은 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인 명희(56)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 고 조 회장과 이 전 차관이 한 모임에서 아들·딸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가 인연이 돼 사돈간이 됐다. 조 회장 얘기다.“양가에서 혼담이 오가던 중에 장모님이 예비 사위 얼굴을 보기 위해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사진을 보고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군제대 후에 바로 결혼하게 됐습니다.” 당시 양가의 통혼은 운수기업과 주무부처인 교통부의 고위층 집안이 맺어졌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조 회장의 장인인 이 전 차관은 76년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인하대와 국민대, 중앙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 인사로 활약했다. 조남호(54) 한진중공업 회장은 김원규 전 교육감의 차녀인 영혜(54)씨와 우연히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조양호 회장은 “다른 형제는 해외에서 공부하다 보니 집안에서 혼사를 챙겼지만 둘째는 국내에서 대학을 나오다 보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애를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수호(51) 한진해운 회장은 조씨가가 국내 재벌가와 혈연으로 얽혀지는 첫번째 다리를 놨다. 조 회장의 처가가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집안이기 때문이다. 부인인 최은영(43)씨의 모친이 신 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 여사다. 신 여사의 남편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이다.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은 87년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인 명진(41)씨와 혼인했다. 이 결혼으로 한진 조씨가는 재계 혼맥의 주류로 편입된다. 장인인 구 회장이 LG 구씨가이기 때문이다. 또 삼성 이씨가와도 바로 연결된다. 구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 여사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차녀다. ●방계 혼맥도 장관 사돈 많아 고 조 회장의 형제자매 혼맥도 전직 장관 가문부터 평범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상실 전 상공은행장의 3녀인 영학(68)씨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장남인 진호(43)씨는 이종남 전 감사원장의 장녀인 경아(35)씨와 인연을 맺었다. 장녀인 윤정(41)씨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장남 정훈(44)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쌍둥이인 주은(38)씨는 미혼, 주연(38)씨는 김태효(38) 성균관대 교수와 결혼했다. 조씨 가문의 장자인 고 조중렬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최학희(80) 여사와 결혼,2남 1녀를 뒀다. 장손인 조지호(57) 한양대 교수는 이병호 전 상공부 장관의 장녀 숙희(56)씨와 혼례를 올렸다. 차남 건호(53)씨는 재미동포인 윤주덕 내과의사의 딸 영태(51)씨를 아내로 맞았으며, 장녀인 인숙(59)씨는 문영호(66) 전 동부제일병원 내과과장과 혼인했다. 영호씨의 부친은 제일은행 이사를 지낸 문재관씨다. 고 조 회장의 첫째 여동생인 조정옥(82) 여사는 전윤진(89) 전 동양화재 감사와 인연을 맺었으며, 둘째 여동생 조정원(80) 여사는 박두진(78)씨와 혼례를 치렀다. 셋째인 조도원(77) 여사는 박태원(79) 전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과 결혼했으며, 막내인 조경숙(75) 여사는 재미교포 외과의사인 박소회(78)씨에게 시집갔다. 고 조 회장의 막내 남동생인 조중식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교육자 집안 출신인 김복수(68)씨를 아내로 맞았다. golders@seoul.co.kr ■ “떠날때는 ‘쿨’ 하게” ‘2인자’ 조중건, 조카 경영권승계 앞두고 야인으로 역사적으로 2인자의 삶은 불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1인자를 향한 욕심이 화(禍)를 불러들인 탓이었다. 반면 드물게 성공한 2인자는 맺고 끊음이 명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런 점에서 성공한 2인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1996년 조카들의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될 시점에 미련없이 대한항공을 나와 야인으로 돌아갔다. 오너가(家)의 일원이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행동했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것이다. 1인자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까. 조 전 부회장이 한때 하와이에 머무는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형제간의 ‘힘겨루기’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또 조 전 부회장이 일정 기간 대한항공의 ‘수장’을 맡다가 장조카인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현 회장)에게 물려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받을 것으로 판단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세간의 예측과 달리 조 전 부회장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하와이로 떠났다. 조 전 부회장은 훗날 이같이 전했다.“형제간이라도 언젠가 헤어질 거면 기분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조카들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보기가 안 좋았다. 또 한국에 있으면 언론 인터뷰를 하게 되고,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형(고 조중훈 회장)에게 누를 끼칠까봐 신경이 쓰였다.”시쳇말로 어차피 헤어질 거면 ‘쿨하게’ 떠나고 싶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96년 초 작은아버지께서 물러나시기를 원하셨다.”면서 “선친도 그동안 숙부께서 고생하셨던 것을 잘 아셨던 만큼 섭섭지 않게 해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럼 조 전 부회장이 생각한 2인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형이 대한항공의 ‘선장’이었다면, 나는 ‘일등항해사’였다. 선장은 모름지기 새로운 곳을 향한 모험심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일등항해사다.2인자는 항상 해결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성공확률은 거의 50% 이하였다.” 그는 그렇다고 무조건 ‘예스맨’이 2인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조 전 부회장은 고 조 회장이 정부로부터 부실기업을 인수할 때마다 형에게 수없이 대들었다.“형, 하지 마시오. 밑빠진 독에 물붓기요.”그러나 조 전 부회장도 끝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최단 기간에 부실 기업을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고 조 회장이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 전 부회장의 몫이었다. 그는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전면에 나선 총수가 그저 ‘이러 저러하니, 알아서 만들어봐.’라고 화두만 획 던질 뿐일 경우가 많다. 물론 1인자에게는 1인자의 고뇌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입장에서는 작은 일 하나 때문에 며칠을 헤매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는 그럼에도 2인자의 삶이 만족스러웠다고 회고했다.“2인자들은 1인자가 꾸는 꿈에 덩달아 취해 열정을 다해 일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은 육·해·공의 종합물류 기업이라는 꿈을 내게 보여줬다.” golders@seoul.co.kr ■ 역대 정권과의 인연 1999년 4월2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민간기업에 대한 청와대의 이같은 조치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빌미를 제공한 것은 대한항공. 대한항공기의 잇단 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더구나 국적항공사의 항공 사고는 국가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 조씨가(家)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정권과의 갈등이었다. 한진 조씨가와 역대 정권과의 인연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에서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가 우호적 관계였다면, 김대중 정권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 조 회장은 국적항공사 대표라는 신분과 특유의 사교성, 부지런함 덕분에 역대 정권의 핵심 인사와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이 때문에 사업상 ‘손해본 장사’도 많았다. 고 조 회장은 리스크를 떠안으면서도 정권이 요청한 부실기업을 잇따라 인수했다.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비롯해 대한선주(현 한진해운과 합병),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떠안았다. 동시에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 인맥을 활용, 민간 차원의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 30여년간 한진그룹의 ‘2인자’였던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도 과거 군경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그렇다고 인맥을 활용해 특혜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목이다. “1953년부터 2년간 미국 포병학교 교관 생활로 400여명의 기간 장교들과 많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중략)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친근한 관계였고 나를 친아우처럼 아껴주셨고, 가끔 당시 혁명 주체들이 내 형(조중훈 회장) 집에서 모여 회의를 했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이권과 청탁으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나 형은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은 신기루와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98년 DJ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씨가는 서서히 ‘쓴맛’을 보기 시작한다. 대통령 전세기의 경쟁 입찰제 도입은 그 신호탄이었다. 이어 국세청 조사인력 240여명이 동원된 3개월간의 한진그룹 세무조사는 조씨가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이처럼 DJ정권이 대한항공에 대해 강하게 ‘칼자루’를 휘두른 이유는 뭘까.1차적으로 DJ정권 출범 이후 크고 작은 대한항공측의 사고 탓이었다. 대한항공의 문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 훼손이라는 것이 정부의 시각이었다. 여기에 과거 조씨가가 보인 ‘반DJ 행보’도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세무조사 이후 대한항공은 노선권 배분 차별 등 정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법보다 감정을 앞세운 정부의 무리수도 적지 않았다. 사법부는 대한항공이 잇따라 제기한 노선 배분 소송에서 정부 결정을 뒤엎는 판결을 속속 내렸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씨줄날줄] 십자동맹/이목희 논설위원

    나치 독일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던 지정학(地政學)의 골치아픈 이론들을 접어두고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면 미래 국제정치의 모습이 대충은 그려진다.21세기 초강대국은 미국이고, 그를 따라갈 잠재력을 가진 나라는 중국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커가는 중국을 미국이 견제하는 것도 역학구도상 자연스럽다. 미국 지도자가 되어 중국 포위정책을 생각해보자. 중국의 동서남북으로 일본, 인도, 아세안, 러시아가 위치해 있다. 이들 4개축과 경제협력 및 군사동맹을 확실히 한다면 중국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한반도와 타이완, 옛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CIS국가들, 그리고 중동까지 미국의 영향력에 있다면 중국으로서는 숨통이 막힐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방위력 강화 지지에 이어 지난달 말 사이가 별로였던 인도와 군사협력조약을 맺은 배경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중국이 아니다. 지난 4월 앙숙이던 인도와 화해를 선언, 친디아(Chindia) 구상을 과시했다. 어제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 독주에 제동을 걸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중국은 또 아세안 10개국과 자유무역협정(ACFTA)을 발효시킴으로써 18억을 남북으로 묶는, 최대 인구의 경제권 추진에 시동을 걸었다. 인도가 군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 인도를 연결하는 가로축에 중국과 러시아의 세로축이 대항하는 모양새로 21세기 국제관계가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지리적으로 볼 때 십자동맹으로 부를 수 있겠다. 신라의 3국통일 직전 한반도가 전형적인 십자동맹의 시대였다. 신라와 당나라 가로연합이 고구려·백제의 세로연합을 패망시켰다.2차대전 이후 냉전시대 한반도도 십자동맹과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한·미·일 등 해양세력과 북한·중국·소련 등 대륙세력이 수직으로 대립해왔다. 지금 한반도는 변화의 용틀임을 하고 있다. 남북한 사이가 좋아지고, 한·중, 한·러 관계도 우호협력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한반도의 소(小)십자동맹은 깨지고 있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대(大)십자동맹이 태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잘 지켜보고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中 ‘美석유기업 유노콜 사냥’ 외교전쟁 비화

    中 ‘美석유기업 유노콜 사냥’ 외교전쟁 비화

    중국의 미국‘기업인수·합병(M&A)’ 불똥이 중·미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중국해양석유공사(CNOOC)의 미국 석유업체 유노콜의 인수 추진에 미국 의회가 국가안보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행정부의 인수 저지 조치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어떤 정치적 개입도 없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반면 미국 의회는 석유같은 전략 산업을 중국에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돈과 정보력 등 정부의 뒷받침속에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중국의 해외기업 사들이기가 국제적인 외교마찰과 ‘평지풍파’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 의회의 제동 공화당 등 미국 상·하원의원 40여명은 23일 CNOOC의 유노콜 인수 시도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면서 제동을 걸었다.“유노콜이 넘어가도록 방치할 경우 국가 안보는 물론 경제전반에도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 의회는 “에너지 같은 전략 부문을 중국에 넘기면 앞으로 미국안보에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CNOOC는 중국정부 직속의 국영기업이어서 유사시 미국에 천연가스와 유류 공급을 끊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앞서 CNOOC가 처음 인수 의향을 밝혔을 때도 부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견제를 촉구했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 자국 석유회사를 중국 국영기업에 넘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민감한 외국투자나 기업 인수합병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는다. 국무·국방·국토안보부 및 백악관 관계자들로 구성된 ‘외국투자위원회’를 열어 승인 여부를 검토하고 대통령이 이를 토대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경제계의 불안 미 의회의 이같은 반응은 경제계 등 미국사회 전반의 중국에 대한 우려와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해마다 8%이상의 경제성장을 보이며 약진하고 있는 중국이 최근들어 6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앞세워 미국기업 인수에 전례없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조만간 중국에 따라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들 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경제계는 중국이 M&A를 통해 핵심기술에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경계하는 분위기다. 기업을 사들여 미국과의 기술력 격차를 쉽게 따라 잡겠다는 전략으로 풀이하고 있다. ●중국의 끼어들기 미국인들은 CNOOC의 끼어들기에 더욱 불쾌한 표정이다. 기존 매수 희망자이자 매수 가계약자인 셰브론 텍사코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유노콜에 ‘러브 콜’을 보내며 중간에 끼어들기를 했기 때문이다.CNOOC는 지난 23일 현금지급 조건으로 185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2위 석유회사 셰브론 텍사코가 지난 4월 주식교환과 현금지급의 혼합방식으로 합의한 166억 5000만달러보다 많다. 또 셰브론에 대한 위약금 5억달러와 유노콜 부채 16억달러를 떠안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중국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는 중국 국영기업들이 자국 기업을 밀쳐내고 또다른 자국 기업을 사가려하는 것을 보고 편치않음을 표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유노콜의 향방 당사자 유노콜은 자국 기업인 셰브론텍사코와 중국의 CNOOC, 두 ‘구애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유노콜측은 29일 오는 8월10일 주주총회를 열어 두 회사의 인수 제안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유노콜측은 몸값을 최고로 치러주는 기업이면 국적에 관계없이 몸을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과는 또 다르다.AFP통신은 “유노콜 주주 입장에서는 단연코 CNOOC 조건에 호감이 갈 것”이라며 “주주들은 CNOOC가 미 당국을 어떻게 설득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기다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월가에선 외형적인 조건은 CNOOC가 좋지만 미국내 반중 분위기와 중국 국영기업의 불투명성 등을 감안 할때 셰브론으로 대세가 기울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도 미국의 대외 석유의존 심화란 요소를 고려할 때 정치적 변수가 경제적 손익계산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신용평가기관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도 지난 23일 중국 정부가 71%의 지분을 가진 CNOOC가 유노콜을 인수할 경우 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했다. ●거부권 행사? 유노콜이 CNOOC를 선택할 경우 부시 대통령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올 5월 중국 거대 전자업체인 레노보가 미국 IBM의 PC사업 부문을 인수했을 때의 사례에 미뤄보면 ‘외국투자위원회’ 개최는 거의 확실하다. 존 스노 미 재무장관도 지난 23일 의회 청문회에 출석, 유노콜과 관련된 질문받고 “유노콜과 CNOOC간에 인수·합병이 합의될 경우 당국이 승인 여부를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과정은 대개 두달 이상이 걸린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中글로벌전략 ‘세계가 긴장’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발 (M&A)태풍이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외자유치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이 세계경제의 심장부 미국을 향해 ‘바이 아메리카(미국 기업 사들이기)’를 선언했다. 막대한 달러 보유고를 지렛대로 중국은 미국 이외에도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등의 ‘알짜기업 사냥’에 착수,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미국기업 사냥’ 분야는 IT와 에너지 등 국가 안보에 민감한 분야에 집중돼 있다. 중국의 간판급 가전 업체인 하이얼(海爾)지난 21일 미국 5위의 가전업체 메이택을 인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제시 인수 금액은 12억 8000만달러. 하이얼의 최종 인수 여부는 실사가 끝나는 6∼8주 이후에 결정된다. 하이얼은 메이택 인수를 계기로 미국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경쟁국인 한국과 타이완·인도 등에 상대적으로 뒤진 첨단 기술력을 만회하겠다는 복안이다. 중국의 미국기업 사냥은 에너지 부분으로 확대 중이다.CNOOC의 유노콜의 인수 의사도 이런 분위기속에서 이뤄졌다. ●공격적인 기업 사냥 중국은 지난해 중국 PC 업체인 레노보가 미국 IBM의 PC 사업 부문을 17억 5000만달러에 인수, 첫 ‘미국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인수를 계기로 본사를 베이징(北京)에서 뉴욕으로 옮긴 레노보는 델,HP에 이어 세계 3대 PC 메이커로 부상했다. 중국 국영 자동차업체인 치루이는 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자동차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이외에도 중국의 전자업체인 TCL은 지난해 7월 프랑스 톰슨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세계 최대의 TV 메이커로 떠올랐다. 지난해 10월 상하이 자동차그룹(SAIC)이 한국의 쌍용차를 인수했다. 중국 제2의 석유업체인 중국석유화공(中國石油化工·시노펙)도 캐나다 석유업체 인수를 추진 중이며, 중신(中信)그룹 산하의 중신자원(中信資源)도 태국 기업 인수에 뛰어들었다. ●속도높이는 글로벌화 전략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이른바 ‘저우추취(走出去)’로 불리는 중국당국의 해외 투자전략에 따른 것이다. 상무부 국제무역 경제연구소 허마오춘(何茂春) 박사는 “중국의 해외진출은 중국 경제의 ‘글로벌화’와 국제경쟁력 강화가 주요 목표”라고 지적했다. 중국 해외투자는 종전에는 기업별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단계다. 최근 중앙·지방 정부가 주도적으로 중국기업의 해외진출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적으로 외환보유고를 적절하게 분산, 인민폐 평가절상 압력을 완화하는 동시에 신시장 개척과 신기술을 도입하겠다는 전략이다. 신흥 민영 기업들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불안정성을 감안,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꾀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해외 투자가 당분간 ‘봇물’을 이룰 수밖에 없는 정치·경제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종일 코트라 베이징관장은 “시장과 기술을 바꾼다는 것이 중국의 외자유치 전략”이라며 “중국은 이제 최고의 기술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외에 투자할 의지와 여력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말 현재 중국 대외투자 누적 총액은 370억달러로 160개국에 걸쳐 829개 기업에 달한다. 올해 추진되고 있는 인수합병이 성공리에 끝날 경우 중국의 해외투자는 500억달러가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 91년 3억 7000만달러의 해외투자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oilma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너무 가까우면 상대를 깊게 알 수도 있지만 뜻밖에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대마도(‘쓰시마’라는 현지 표기 대신 용어의 역사성을 고려해 대마도로 쓴다.)와 한국의 관계가 그렇다. 누구나 아침 6시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8시40분에 부산역에 내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대마도행 페리를 탈 수 있다. 불과 1시간30분이면 하타가쓰항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서울에서 흑산도 가는 것보다도 빠르다. 날씨만 맑으면 당연히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며, 반대로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한국의 남해안이 지척에 보인다. 거리만 가까운 것일까?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대마도는 우리와 ‘하나’가 아닐까. ●부산서 1시간30분… 너무도 가까운 섬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는 알지만 이키(壹岐)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이키는 한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가는 징검다리였으며, 일본 입장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섬들임에도 두 섬의 정체성이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대마도가 한반도에 밀착되어 있다면 이키는 보다 일본적인 곳이다. 대마도 스스로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모두 걸친 속국, 혹은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사적으로 대마도가 비일본적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정체성이 한반도에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한반도 문화를 모두 걸러낸다면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대마도가 오늘처럼 확고하게 일본 본토에 속하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대한(對韓)외교권을 중앙 정부로 가져가 이를 일본 정부에 편입시킨 결과일 뿐이다. 대마도는 국제법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일본 땅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우리와 더욱 가깝다. 대마도 서쪽 해안은 가히 한국 쓰레기들의 종합 전시장이다. 우리나라의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가 이곳 서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은 옛적 표류민 표착의 단서가 된다. 한반도 동남부에서 표류를 해도 자연스럽게 대마도에 닿곤 했으니 신라인 박제상이 이곳에서 죽은 것도 실은 이같은 교류사의 내역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나 신라식 산성이 존재함은 대마도의 선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에서는 대마도가 우리 주권 하에 복속된 섬은 아닐지라도 조선 영토의 일부로 보기도 했다. 지방에 내려보내는 경차관을 대마도에 파견했는가 하면 대마도 사람들이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의 벼슬과 녹봉도 받았다. 일찍이 고려 조정은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 즉 변방과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책임진 관직을 내렸다. ●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 본토인들 입장에서는 대마도가 한반도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 거북스러움을 느낄 터이지만, 정작 역사시대의 일본인들 스스로가 대마도를 별종의 섬으로 간주하여 본토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보았다. 오늘날도 대마도는 ‘국경의 섬’식으로 인식돼 대륙에 맞서는 자위대 기지가 곳곳에 위치하는 전략적 가치만 인정받을 뿐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사키현에 붙어서 소외받을 바에는 차라리 부산시 영도구에 붙어서 잘 살아보자는 농담도 나온다. 그 농담이 농담으로만 여겨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이키 관광상품을 개척한 범주항공의 신우진 차장은 “이키에는 주로 후쿠오카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대마도는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들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통계 수치까지 제시한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어 기본 단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이는 근래의 일이 아니다. 대마도 역사자료관에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본격 한국어 교재가 있다. 한국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학습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증거다. 대마도는 남북이 81㎞에 이른다. 작은 섬이라고 여기는 일반의 인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미국 밑에 쿠바가 있듯이 한반도 코밑에 거대한 섬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일간 절묘한 곳에 자리잡은 대마도에 왜구가 득실거리기라도 할라치면 한반도는 밤잠을 못이루었던 것이다.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왜구들 극성 대마도는 한마디로 ‘먹고살기 힘든 섬’이다. 북쪽 히타카쓰항에서 남쪽 이즈하라까지 근 2시간여 거리를 달려 보지만 보이는 것은 산뿐이다. 섬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다에 산들이 떠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배고픈 사람들이라 눈 앞에 건너다 보이는 조선을 바라보며 해적질을 꿈꾸었던 게 무리는 아니다. 대마도의 이름난 사찰마다 조선에서 얻어온, 정확하게 말해 약탈해 온 불상이나 범종들이 한두 개씩은 놓여 있다. 이키의 안국사에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팔만대장경 초판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약탈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고립된 조건 속에서 고귀한 문화유산들이 멸실되지 않고 남아 전하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일정한 식량을 공급하고, 무역을 허락하며, 왜관을 열어 회유함으로써 왜구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대마도는 부족한 식량을 조선을 통해 해결하는 반면 일본 본토와 조선 사이에서 조정능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대마도는 에도 바쿠후를 대리하여 대한 외교를 수행했다.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막중한 권한을 가지고 바쿠후와 한반도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중재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일종의 생존전략인바, 그들은 양자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이윤을 냈으며, 그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이런 탓에 임진왜란 이후에 일시적으로 한·일간 국교가 단절되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들도 대마도민들이었다. 현재 나가사키현에 속한 대마도와 이키는 히라도(平戶)와 더불어 왜구의 본거지였다. 태종 때 대마도정벌에 나선 이종무 장군의 아소만 소탕작전도 왜구를 청소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소만을 바라보니 왜 이 장군이 한달여 동안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왜구를 소탕하지 못했던가가 자명해진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다. 섬들이 은하수의 별처럼 흩어져 있어 섬 사이로 신출귀몰한다면 강력한 대군도 왜구 몇을 감당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이키와 히라도에서 출발한 왜구들은 이곳 대마도 왜구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며 끊임없이 한반도의 해안을 침탈해 댔으니 고려와 명나라가 왜구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절반은 진실에 가깝다. ●전쟁과 평화 교차하는 ‘국경의 섬´ 그런데 일본의 후소샤판 교과서에는 ‘왜구란 조선반도 및 중국 대륙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집단을 뜻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왜구는 대마도, 이키제도와 히라도 등을 포함해 세토나이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해적 및 악당들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최근 들어 왜구의 구성을 국적이나 민족을 넘어선 차원의 인간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당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가공된 역사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왜구 근거지는 북규슈 지역의 도서 연안이고, 발생 원인도 일본 내의 정치적 혼란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왜구의 시대에 이어 이번에는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가 등장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번 전란의 꼬투리는 대마도주 소오(宗義智)의 수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의 딸 마리아가 바로 이 소오의 아내였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된 고니시의 출병에는 조선말을 잘하는 대마도 사람 8000여명이 동원된다. 웬만한 남자들은 전부 동원됐다.‘전쟁이 끝나자 남자는 없고 과부들만 들끓어 대를 이을 수 없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이키도 대규모 병사를 내어 한반도에 출병했다. 과거의 왜구들이 왜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통신사 맞이하는 기착지… 친선의 가교로 전쟁이 끝나고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재개되자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는 한반도에서 오는 귀한 문화사절단을 맞이하는 기착지로 변신한다. 수백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는 그 자체가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전하는 통로였다. 조선정부는 성심성의껏 사신을 조직하였으며, 대마도와 이키 등지의 번주들도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맞았다. 대마도와 이키는 조선통신사를 통한 친선과 교류의 장이었지만 때로는 왜구의 본거지로 역사의 굴절을 계속했다. 이키의 아름다운 ‘원숭이바위’가 있는 곳에는 2차대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대마도에도 거대한 지하포대가 있다.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아소만 일대에 군함을 잠복시켜 놓고 반세키(万關)운하를 통해 러시아함대를 기습·괴멸시켰다. 근래 대마도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곳곳에 러일 친선을 기원하는 전승비를 세웠다. 명분은 친선이겠지만 본래 목적은 딴 곳에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니 이처럼 일본은 대마도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마도를 자국 본토와는 달리 오로지 ‘국경의 섬’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대마도와 이키는 한·일 간의 친선을 돋우는 징검다리도, 침략의 가교도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최익현 선생이 단식 끝에 절명했을 때, 대마도 사람들은 선생의 유해를 지극정성으로 이즈하라의 슈젠지(修善寺)에 모셨다. 이키에는 해방되던 해, 꿈에 그리던 조국을 향해 귀환선에 몸을 실었다가 집단 수장된 우리 동포 160명을 애도하는 비가 한국쪽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또 와니우라 포구의 팔각정 형태의 한국 전망대에는 1703년 무려 112명의 역관사들이 조난당해 생을 마친 사실을 기록한 비석도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바다가 국제교류의 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진실된 한일교류의 징검다리되어야 17세기 대(代)의 외교관으로 한국말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효슈의 말처럼 대마도와 이키는 진정한 ‘친선교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고, 문화재가 불타 버렸지만, 강제 동원되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했던 대마도나 이키의 백성들도 운명은 비슷했다. 조선통신사가 오고 갔듯이 이제 한·일간의 해양 네트워크는 더이상 침탈의 역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러일전쟁 100주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국을 꺾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분을 지금껏 향유하려고 드는 한 국제사회에서 그들이 ‘소인배’라는 비난과 지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1년 전인 1984년.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대마도와 이키의 역사·고고·미술·민속·언어·물질문화 등을 망라한 보고서를 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바다를 통해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목적의 대마도·이키 답사가 21년 만에 다시 서울신문 지면에서 재현된 셈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 기념의 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친선의 바다인가, 침탈의 바다인가.’ 그 난해한 화두를 대마도와 이키에서 다시 곱씹어 본다.
  • 美·베트남 상흔씻고 ‘워싱턴 포옹’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처절한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베트남이 과거를 접고 미래를 향한 본격적인 협력관계에 들어갔다. 미국을 방문 중인 베트남의 판 반 카이 총리는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역사적’ 회담을 가졌다. 베트남의 정상급 인사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75년 베트남전이 끝난 뒤 30년만에 처음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바 있다. 베트남과 미국은 다음달 11일 관계정상화 10주년을 맞는다. 이날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카이 총리에게 베트남의 오랜 숙원이었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원하겠다고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다. 또 부시 대통령은 내년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고 베트남전 당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의 유해발굴 작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준 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이에 대해 카이 총리는 “두 나라는 잠재력을 가진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면서 양국간에 존재하는 문화ㆍ역사적 차이를 극복하고 관계 증진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부시 대통령과 합의했다고 말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과 카이 총리가 인권 개선과 종교 자유 확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며, 베트남 정부가 이들 분야에서 취해온 조치들을 환영하지만 아직은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카이 총리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만났다. 두 나라는 최근 미 군함이 베트남 항구에 정기적으로 정박하고 미군이 베트남군 장교들에게 교육훈련을 실시키로 하는 등 군사 협력관계를 급속히 발전시키고 있다. 양국의 군사안보 분야 협력은 중국을 겨냥한 측면이 강하다. 미국은 베트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봉쇄’하는 데 한몫해주기 바라며, 역사적으로 중국과 잦은 분쟁을 빚어왔던 베트남도 중국 견제 심리가 강하다는 것이다. 카이 총리는 이날 베트남항공의 보잉787 여객기 4대 구매계약 서명식에 참석했다.24일에는 뉴욕의 증권거래소를 방문, 개장을 알리는 종을 울리는 등 미국과 경제협력 및 경제개방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계획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과 카이 총리가 회담을 하는 시간 백악관 부근에서는 베트남인 200여명이 옛 월남기를 흔들며 “베트콩은 물러가라.”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여 베트남 전의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나타냈다.dawn@seoul.co.kr
  • 마치무라 日외상 서면 인터뷰

    마치무라 日외상 서면 인터뷰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일본 외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과 관련,“신사측은 남북간에 반환처에 관한 공식적인 합의를 하고 일본 정부에 외교채널을 통해 요청하면 반환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남북의 정부당국이 조속히 조정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북관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온 임진왜란 승전비로, 정부가 반환협의를 위해 북측에 문화재회담을 제의해 놓은 상태다. 마치무라 외상은 한·일정상회담을 앞둔 16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현재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해서는 “한국측이 현 상황인 채로 관세협상을 개시하는 데 신중한 자세”라면서 한국측의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한·일관계 ▶한·일 우정의 해인 올해 초 독도문제가 발생했다. 독도문제로 양국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는가. -2005년은 아직 반환점에 오지 않았다. 양국간의 교류를 이어감으로써 우정의 해를 보낸 양국민이 올해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대단히 의미가 깊은 한해였다.”고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한이 예정돼 있다. 한·일 관계개선에 좋은 복안이라도 있는가. -올해 전반부는 양국관계가 곤란을 겪었다. 양국이 이런 곤란을 뛰어넘어,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공동성명에 있는 것처럼 ‘동북아시대를 향한 한·일협력’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양국간에 더한층 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관계를 한때의 긴장상태에서 평정한 상황으로, 나아가 양국의 우호협력을 한층 확고하게 하는 좋은 기회다. 지난달 도쿄에서 ‘한반도 출신 옛 군인·군속 및 민간징용자 등의 유골문제에 관한 한·일협의’를 여는 등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 착실히 대응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항구적인 무비자 전환 같은 성과를 기대해도 좋은가. -일본 각지에서 ‘가깝고 가까운 나라’로부터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의 비자면제(아이치 만국박람회 기간 중 시한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항구적 면제에 대해 검토하겠다. ▶한·일 FTA에 대해 일본 정부는 어떤 로드맵을 갖고 있나. -협상 재개에는 서로 유연성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두 정상간에 확인된 연내 실질합의를 향해 계속해서 한국과 협력해 갈 생각이다. #역사문제 ▶(주변국 침략과 관련해)일본은 독일보다 사과를 더 했다고 발언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인가. -일본은 전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기본조약 등에 따라 국가간 배상 등의 문제를 일괄처리했으나, 독일은 동서로 분단돼 있어 우리같은 국가간 배상문제 등을 일괄처리할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상황인 일본과 독일의 대응을 단순히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어떻게 보는가. -총리 본인이 설명한 대로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참배 때마다 ‘부전(不戰·전쟁을 하지 않는다)’을 맹세하고 있다. 군국주의의 미화나 A급 전범을 위한 참배는 아니다. #국제관계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양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일은 국제사회,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일본과 여러 가지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이해와 지지를 해주도록 부탁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시아 균형자론’을 밝혔는데, 한국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의 실제 외교정책 운영에 있어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북한의 핵문제 같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관한 중요한 과제에 대처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 한국 및 미국의 긴밀한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 정부 스스로가 ‘균형자론은 어디까지나 한·미동맹을 기축으로 한 것’임을 밝힌 점에 유의하고 있다. #북한 문제 ▶북핵문제가 악화될 경우 미국이 무력행사를 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은 미국의 무력행사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관계국이 6자회담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중시해 왔다.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위해 한·미·일을 포함한 모든 관계국이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북핵문제의 악화를 상정해 관계국의 구체적인 대응에 대해 예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북·일 수교협상의 재개 전망이 불투명하다. 오히려 대북 제재의 목소리가 일본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대북 협상의 조건은 무엇인가. -납치문제와 관련해 북한으로부터 성실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한 납치피해자와 관련해 생존자의 즉시 귀국 및 진상규명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과의 대화에 응하도록 촉구해 가겠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정부 “우리땅… 거론땐 단호대처” 한·일 양국이 20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제 선정 작업에서부터 진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의 시각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도 문제의 경우 정부는 지리적·역사적·국제법적으로 분명한 우리나라 영토인 만큼 의제로 논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경한 입장이다. 반면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주요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지난 14일 열린우리당의 인터넷방송에 출연,“이번 정상회담 의제는 첫째 야스쿠니 문제, 다음에 역사왜곡, 세번째 독도문제”라면서 “특히 독도문제는 명백하게 우리 영토가 분명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고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해 시비를 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 장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가 먼저 독도 문제를 얘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본측이 문제를 제기하면 단호하게 받아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교과서 역사왜곡과 관련, 정부는 이번에 정식의제로 올려 일본의 무성의를 분명히 따지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일본은 가능하면 의제에서 제외했으면 하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도 우리 정부는 중요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 장관은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인터넷방송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 검토를 약속한 대로 제3의 추도시설 문제를 검토하도록 정상회담에서 강력히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상연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마치무라 외상 ‘왜곡 교과서’ 검정때 문부상 역임 마치무라 노부타카(60) 외상은 중의원 7선의 집권 자민당 내 중진이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 통상산업성에 들어가 13년간 공직생활을 했다.1983년 정계에 입문해 중의원에 첫 당선된 뒤 우리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해당되는 문부상을 두 차례 지냈으며, 외무성 정무차관과 자민당 간사장 대리도 역임했다. 2001년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 때 문부과학상이었다. 지난해 9월 개각의 외교·안보팀 개편 때 외상으로 발탁됐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과제를 떠안고 있으나 역사왜곡 교과서 파동, 독도, 야스쿠니 참배 문제 등이 겹쳐 유엔에서의 영향력이 큰 중국, 한국의 반발로 벽에 부딪힌 상태다. 역사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국회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했던 지난 4월 “한국인에게 대단한 아픔을 드린 데 반성한다.”고 밝히고 5월 뉴욕의 유엔개혁회의에서는 “일본은 역사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지만 독일보다 훨씬 여러 번, 더 많이 사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4월 일본 NHK에 출연해 “한국과 중국의 역사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다니 이런 바보같은 일도 없다.”고 말해, 외교통상부가 “매우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강력 항의하는 공식논평을 낸 바 있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최근 한일분쟁 일지 ▲2월22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다케시마의 날’ 조례안 상정. ▲2월25일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 “독도는 일본 영토” 발언. ▲4월5일 일본 문부성, 왜곡 교과서 검정. ▲5월11일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한국과 북핵 정보 공유 불가” 발언. ▲6월1일 신풍호 한·일 경비정 대치 사건. ▲6월11일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상,“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원래 없었다.”발언.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열린세상] 세계경제 불균형, 어떻게 대처할까/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최근 세계경제의 불균형이 확대되면서 지난달 G7회의에서는 세계 불균형 시정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세계경제 불균형 문제의 진원지는 미국과 중국이다. 미국경제는 2004년도에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5.7%, 재정적자는 3.5%에 달하여 대외신인도가 흔들리고 있다. 불균형의 또 다른 축인 중국은 2000∼2004년 5년간 총 2544억달러의 외국인 직접투자를 국내로 끌여들였고, 수출의 급성장에 힘입어 동 기간중 1358억달러의 누적 무역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세계의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부상하였다. 특히 금년부터 섬유쿼터가 폐지되면서 중국의 대미 면바지 수출물량이 16배나 증가하는 등 중국 전체 섬유수출이 1∼4월중 전년동기 대비 32.9%나 증가하여 미국과 EU의 수입규제를 불러오고 있다. 한편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의 급등은 세계경제 불균형을 증폭시키고 있다. 국제유가는 2002년 초에 비해 2배 이상 상승하면서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선·후진국의 경상수지를 악화시키는 동시에 세계경제 성장을 둔화시키고 있다. 원래 유가의 등락은 세계경기 동향과 연동되어 왔으나,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이 원유 수요 증가분의 약 40%를 흡수하면서 이러한 연동 트렌드도 깨어져 버렸다. 원유, 철강 등 원자재 가격은 향후 중국경제가 고성장을 지속하는 한 상승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상된다. 바로 ‘China Impact’가 본격화되면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중국정부는 올해 1월 ‘중국 현대화보고 2005’ 보고서에서 2050년까지 중국경제를 세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세계경제의 불균형이 확대되면서 보호주의 망령이 되살아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경상적자 축소를 위해 달러화 하락을 유도하면서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약 25%를 야기하고 있는 중국에 ‘불균형 해소’를 위해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달러화 하락으로 받게 될 고통을 분담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달러화 하락이 환율전쟁과 보호무역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수출의 성장기여율이 지난해의 85.4%에서 금년 1·4분기에는 147.4%로 더욱 높아진 가운데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리나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G7회의에서 촉구된 바와 같이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미국과 일본의 재정 건전화,EU의 구조조정 등이 본격화되면 이들 지역에 대한 우리의 수출환경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세계경제 불균형의 심화로 인해 지역경제통합이 확산되면서 지역경제통합에서 뒤처진 우리나라가 ‘수입규제가 아닌 수입규제’를 점점 더 크게 받게 될 것이다. 세계경제의 불균형 확산 문제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에는 지금부터라도 단편적인 대책을 서두르기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기본에 충실한 경제운영이 우선되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중 한 사람인 자하(子夏)가 고을의 태수로 임명되어 가면서 공자에게 앞으로 어떻게 마을을 다스려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공자는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 즉 ‘일을 서둘러 공적을 올리려고 하다가는 도리어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우선 대내적으로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거시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과 적극적인 추진이 필요하다. 기업들의 투자도 절실하다.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글로벌경쟁에서 우리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 기술, 신산업 등 미래의 경쟁력 원천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BRICs, 동유럽 등 선진국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신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FTA 추진을 통해 시장을 확보하고 국내적으로는 경쟁을 가로막는 규제를 완화하는 노력을 일층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1534년 8월25일,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괴선박이 바람에 떠밀리듯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네가시마(種字島)의 가도쿠라곶(門倉串)으로 다가왔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규슈의 최남단에 딸린 작은 섬. 난파선이 분명했다. 이 배는 중국인 오봉(五峯)의 배였다. 오봉은 왜구 왕직(王直)을 말한다. 이 ‘중국 왜구’의 배에서 남만인(南蠻人)이 무려 110여명이나 내렸다. 이들은 인근의 유서깊은 시온지(慈遠寺)로 안내받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시온지는 예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학승, 상인들이 머무는 숙방(宿房)이 있던 절. 배를 수리하고 다시 출항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파선 주인 오봉은 중국인 왜구 왕직 섬의 도주가 긴 쇠막대기를 보고서 “무슨 물건이냐.”고 묻자 남만국 사내는 그 물건을 곧추세웠다. 남만인은 막대기에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한 조개가 단박에 산산조각이 났다.‘꽝’소리가 나면서 도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놀라 자빠졌다. 직감적으로 무기임을 간파한 도주는 직접 실험을 하고 싶어 했다. 도주 자신이 막대기에 검은 화약가루와 쇠구슬을 넣고는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총이었다. 위력이 대단했다. 이런 무기는 듣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이었다. 도주에게는 그들이 남만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드디어 총이란 물건이 일본에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2정을 사들였다. 도주는 즉시 명을 내린다.“즉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라.”고. 이 이야기는 총이 일본에 전래된 순간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의 총이 포르투갈에서 모두 수입된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앞의 2정을 모델로 똑같은 복제품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낸다. 총을 만들라는 도주의 명령을 무모하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네가시마 모래에서는 사철이 생산되고 있었고, 덩달아 대장간 수공업이 대단히 발달해 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대장간에서 만드는 가위는 일본 최고의 명품으로 친다. ●조총 기술 배우려 대장장이 딸 국제결혼시켜 도키타카의 명을 받은 철장(鐵匠) 야이타 긴베이(八板金兵衛)는 밤잠도 못 자고 움직였다. 형태는 대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물건이라도 한번 보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감탄할 만한 재주를 지닌 유능한 대장장이였지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총열 안쪽의 복잡한 나사홈을 깎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절에 머물고 있는 남만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대가를 요구했다. 기술을 넘겨주는 대신 대장장이의 딸 와카사를 부인으로 넘겨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딸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망설이던 끝에 스스로 결단했다.16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하여 이 낯선 이국인과의 혼인을 자청한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총이 완성된다. 이로써 일본의 ‘국제결혼 제1호’와 ‘총 제1호’가 동시에 탄생했다. 바야흐로 일본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총을 들고 나타난 남만인들은 아시아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과 에스파냐인이었으며, 이후에 들어온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고모(洪毛)’라고 불렸다. 남만인들이 가도쿠라곶에 당도한 1534년보다 24년이나 앞선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해 동방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다.1511년에는 말레이시아반도 남단의 요충지 말라카해협, 그리고 1517년에는 중국 남부의 마카오까지 진출한다. 고아와 말라카해협을 점령함으로써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한 포르투칼은 이내 중국 남부를 오가면서 아시아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해 들였다. 이들이 규슈 남단에 출현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16세기 초,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쓰긴 했지만 남부 광저우(廣州)는 이미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30여개 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해상교역이 번성했다. 물론 이러한 교역은 명나라로부터 통제받는 국가주도형 무역이었다. 해금책은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해양 침략자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개인들이 비밀리에 행하는 사상(私商) 무역까지 금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금이 강한 만큼 장사 이윤도 보장된다는 논리인 바, 돈벌이 욕구를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정부가 왕직 회유 뒤 처형 그런데 정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만인과 같이 타고 온 중국인들의 정체다. 왜 남만인들은 중국인 오봉의 배를 타고 왔을까. 오봉은 당시 고토(五島) 열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대두목 왕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왕직은 누구일까.2005년 2월5일 아사히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실었다.16세기 명나라 정부에 의해 처형된 중국인 출신 왜구 두목 왕직의 묘에 세워진 기념비를 훼손한 사건이 그것이다. 안후이(安徵)성 황산(黃山)시에 소재한 왕직의 묘비 가운데 인명 등 일부 내용이 2005년 1월31일 밤 난징(南京)의 한 대학 교수와 그의 친구에 의해 지워진다. 그는 “민족 배신자의 묘를 일본인이 정비하고 비석을 세운 것은 중국인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는 훼손 동기를 언론에 밝혔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논쟁이 불붙었다.‘후련하다.’는 찬성론부터,‘왕직의 해상 무역이 명나라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측면을 무시한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반대론이 치열하게 맞섰다. 왕직은 일본 나가사키현 후쿠에(福江)항을 근거로 생사, 유황 등을 밀무역하면서 왜구를 이끌고 포르투갈과도 결탁하여 약탈도 하고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명나라 정부는 “투항하면 공식 무역 허가를 내주겠다.”고 회유하여 그를 귀국시킨 뒤에 끝내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처형한다. 말하자면 그는 ‘중국인 왜구’였던 셈이다. 그동안 왜구는 일본인들만의 조직이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사실이다. ●다네가시마 사람들 총을 종교처럼 신성시 철포 전래의 흔적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총의 위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 마쯔리’를 열어 매년 6월말에 포르투갈 배의 도착을 기린다.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래도 이 ‘철포 마쯔리’는 계속될 것 같다. 다네가시마 사람들에게 총은 무기 이전에 일종의 ‘종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총을 ‘종교’로 믿는 사람들, 그렇게 불러도 그들은 허락할 것 같다.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이 머나먼 다네가시마의 총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이 총이 한반도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서양 총이 일본에 퍼지면서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불나방 행위를 일컫는 ‘무데뽀’란 일본말이 한국인에게까지 전달되어 있다. 그 뜻인 즉 무철포(無鐵砲)인 바,‘총도 없이 덤비는 놈’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결에 전쟁은 칼·활·창으로만 하던 시절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 없이는 그야말로 ‘무데뽀’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포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 철포는 즉각 실전에 활용된다. 전국의 봉건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철포를 입수하기에 혈안이 된다. 철포 전래 10년도 채 안되어 일본 열도에 확산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하통일의 판세를 가르는 전투에서 철포대를 들이밀어 승리를 거둔다. 철포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까지 이어진다. 생고쿠(戰國)시절, 피비린내 나는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은 조총부대를 앞장세워 파죽지세로 조선을 치고 올라갔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창과 활을 병용한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임란 초기에 이러한 화기 전술에 연패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왜군 전원이 조총을 소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총은 대단히 비싼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이라는 신무기를 통하여 기대 이상의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평양까지 짓쳐 올라가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을 가야 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하여 한마디로 조선군은 ‘총에 녹았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병의 보급로를 차단, 끝내는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내내 조총은 조선군을 고통스럽게 했다. 총을 들고 한반도를 침략한 왜병의 침략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의 평화를 깨는 중대한 ‘전쟁범죄’였다. 그러나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단 두정의 총을 받아들여 이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최선을 다하여 복제하고 대량 생산에 돌입하는 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를 십분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생활에 응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수십명이 표류한 하멜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그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않고, 얻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지 않는가. 바다를 통한 문명교류의 파장을 체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간 해양 부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감고계훈의 역사를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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