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건축 이야기] (27) 한남동 이슬람 중앙 사원
서울 한남대교에서 남산 터널 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왼쪽 이태원 언덕의 도드라진 이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1976년 세워진 뒤 31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한국 이슬람 총본산 역할을 해온 이슬람교 중앙 사원(모스크·용산구 한남동 732~21)이다. 전국 10개의 이슬람 사원과 선교원,40여개의 이슬람교 예배소를 총괄하는 한국 이슬람의 핵. 많은 이들에겐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만 3만 5000여명의 한국 무슬림(이슬람 신도)과 10만여 외국인 무슬림들에겐 절실한 신앙공간이다.
이태원 소방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광초등학교 삼거리 왼쪽 길을 택해 오르면 허름한 주택들이 줄지어 선 골목 양쪽에 아랍어 간판을 단 집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이슬람 성서인 코란을 비롯해 아랍 과자·음료수를 파는 가게며 서점, 터키 전통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골목 끝에 서면 푸른색의 아치형 문이 길을 막는다.‘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하마드는 그분의 사도입니다.’ 이슬람 교리를 가장 극명하게 압축한 문구를 보며 회랑처럼 생긴 오르막길을 올라 너른 마당에 서면 큼지막한 아랍어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라 쓴 중앙 사원이 눈에 든다.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5차례의 이슬람 예배가 어김없이 열리는 곳. 한국은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한국에 온 무슬림들의 신앙이 이어지는 이색지대이다.
멀찌감치선 우람하게 비쳐지는 것과는 달리 막상 사원 앞에 서면 아주 단촐한 인상을 받는다. 모스크를 상징하는 지붕 중앙의 돔(쿱바)과 앞쪽 두 개의 높은 첨탑(미나렛), 그리고 돔과 첨탑을 호위하듯 선 자그마한 첨탑들이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모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을 잘 불러모을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모스크를 세운 것처럼 한국의 무슬림들도 중앙 사원을 이태원 꼭대기 높은 언덕에 세워놓았다.
사원이 세워진 것은 1976년.6·25전쟁 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軍) 이맘(이슬람교 예배 인도자),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 오울루의 전도로 1955년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 한국 최초의 무슬림이 탄생한 지 21년 만의 일이었다. 중동 붐을 타고 이슬람 국가와의 친교가 긴요했던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초동 쓰레기 매립장 10만평과 지금의 사원 자리 등 두 군데 중 한 곳을 사원 터로 무상 제공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한국 이슬람교가 지금의 부지를 택한 것은 당시 주변에 아랍 상인들과 이슬람 신도들이 모여 살았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태원에 살던 영향력 있는 한국인 신도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선 신도층이 두텁지 못해 사원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전 세계 이슬람 나라들에 손을 벌려야 했다.1970년 부지가 확보된 뒤 한국의 무슬림들이 모금 사절단을 구성, 이슬람 각국을 돌아 미화 40만달러를 모았다.1974년 10월 첫 삽을 뜬 지 1년 7개월 만인 1976년 5월 마침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 건축물을 세워놓은 것이다. 당시 개원행사엔 17개 이슬람 국가의 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붕 위의 첨탑인 미나렛은 이슬람의 가장 대표적인 순례지인 사우디아라비아 하람성원의 것을 그대로 본떴다. 미나렛은 무앗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올라가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외치는 첨탑. 이슬람 전통을 따르자면 매 예배 때마다 무앗진이 이곳에 올라 예배시간을 알려야 하지만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신하고 있다. 사무실과 회의실이 들어선 1층에서 계단으로 오르게 되는 2층 예배공간에선 교회나 성당에 흔한 성상이나 초상, 상징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코란 구절만이 빙 둘러 새겨져 있을 뿐이다.
6개의 둔중한 기둥이 떠받치는 중앙 돔과, 양측 벽 위쪽의 아치형 창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이 바닥의 붉은색 양탄자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배공간의 중심은 아랍어로 ‘너희들이 어디에 있건 하람성원을 향할 지니.’라 쓰여진 미흐랍. 전 세계의 이슬람 신도들이 예배 때 마음과 몸을 둔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만든 예배 방향 표시이다. 그 오른쪽,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올라서서 설교하는 계단인 민바르도 독특하다.2층이 남자 신도들의 예배공간이라면 3층은 여 신도들의 공간.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가 이곳에도 살아 있다.3층 여 신도 공간 앞쪽엔 가리개를 쳐 남자 신도나 예배 인도자조차 여 신도들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여 신도들은 이맘의 목소리만 듣고 예배드릴 뿐이다.
평일 5차례씩 열리는 예배 참석자는 매회 40명 정도. 대부분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평일과는 달리 금요일 오후 1시 특별 예배엔 전국에서 500여명이 몰리며 한국인 신도도 40∼5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예배는 한국인 이맘 2명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들어온 선교사 2명이 번갈아 인도한다. 라마단이 끝나는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과 이슬람 성천(聖遷)일인 이슬람력 12월10일의 축제일엔 3000명이 모여 신앙을 넘어선 거대한 만남의 장을 일군다.
“서구인들이 이슬람교를 왜곡하기 위해 지어낸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말 그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이슬람교와 교도들을 호전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이슬람 중앙 사원의 이행래(70) 이맘. 그는 “순종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들의 본 모습을 가감없이 볼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kimus@seoul.co.kr
●한반도와 이슬람교
서기 610년경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하마드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이슬람교. 유일신 ‘알라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코란’을 따르며,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천국에 임할 수 있음을 기초교리로 삼는 일신교다. 신성에 관한 한 어떠한 복수(複數)적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은채 ‘가장 훌륭한 일신교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이슬람 신도, 즉 무슬림은 전세계 13억명. 이 땅에선 1955년 첫 한국인 무슬림이 탄생하면서 신앙이 태동했지만 한반도와 이슬람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기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상품이나 이슬람 세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이 흔히 사용된 기록으로 미루어 9세기 중엽부터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한 삼국사기 기록은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을 낳기도 했다.11세기 초 고려기엔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아랍 상인들이 고려조정과 교역을 자주 시도했다. 고려사에 ‘1024년,1025년,1040년에 아랍 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기인 13∼14세기 무렵. 당시 원(元)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조정에는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로 수도 개성에 이슬람 성원까지 세웠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 때엔 궁중 행사에 무슬림 대표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도 했으며, 그때 이슬람 역법이나 도자기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 유교사상으로 인해 이 땅의 이슬람은 15세기 중엽 이후 썰물처럼 빠졌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소련치하 소수민족인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망명해와 학교며 이슬람 성원을 건립하기도 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한국이슬람교 중앙회측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