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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파 실버 인형극단 12인 “너무 바빠 늙을 틈도 없다”

    송파 실버 인형극단 12인 “너무 바빠 늙을 틈도 없다”

    “내가 제일 예쁘니까 심청이 할게!” “무슨 소리~ 내가 먼저 찍었어!” 지난 7일 송파구 가락복지관 어린이집에서 70대 어르신들의 실랑이가 한창이다. 대단히 화려한 무대가 아닌 커다란 천 하나로 가린 소박한 무대 뒤에서 어르신들은 직접 만든 옷을 입힌 손인형을 든 채 주인공 자리를 놓고 귀엽게 옥신각신하고 있다. 인형극이 펼쳐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자같은 꼬마들 앞에서 익살 연기도 마다않는다. 10월 노인의 달을 맞아 곳곳에서 지역 어르신을 위한 행사가 풍성하다. 이런 가운데 송파구에서는 어르신일자리사업, 문화센터 강좌 등으로 기량을 익힌 어르신들이 당당한 문화의 주역으로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다. ●창단 2년째… 막내 환갑·맏형 85세 16일 송파구에 따르면 창단 2년째를 맞은 실버인형극단은 어린이집마다 모시기 경쟁이 일어날 정도로 지역내 문화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전직 교사 출신 할머니 3명과 공무원 출신 할아버지 1명 등 12명으로 구성된 실버극단은 최연소 김순옥(61) 할머니부터 최고령 김하균(85) 할아버지까지 세트 운반, 인형 의상 작업, 연기 등을 모두 알아서 해내는 ‘멀티플레이어’들이다. 모시기 경쟁 덕에 하루에 장소를 옮겨가며 2회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음달까지 지역내 방과후교실,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유치원, 지역 내 각종 이용시설을 찾는 공연이 줄줄이 이어진다. 레퍼토리도 다양해 ‘황금알을 낳는 닭’ ‘심청전’ 등 어린이극과 어른들을 위한 ‘이수일과 심순애, 그 후’도 준비했다. ●상담원·컴퓨터 강연… 낮엔 일하는 실버 어르신 배우 각자 상담봉사, 컴퓨터 보조강사, 구연동화, 양로원 봉사 등 다른 활동도 병행해 정기연습도 일주일에 한번밖에 못할 정도로 바쁘지만 모두들 이 무보수 자원봉사에 푹 빠져 있다. 공연이 끝나면 인형을 만져보려는 아이들이 줄을 서고, 아이들과 손가락 인형을 만드는 즐거운 시간이 이어진다. 교사 출신인 이순희(81) 할머니는 “대사 외우는 게 제일 힘들고 자면서도 대사 생각하면 잠이 안 올 정도”라면서도 “너무 바쁘고 재미있어 늙을 틈도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하는 실버들의 유형도 다양하다. 교사 출신이라는 장점을 살려 5년째 어린이집 구연동화강사 활동하고 있는 백영기(75) 할머니는 매주 월·수요일 거여·은하수어린이집을 찾는다.“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백 할머니는 도서관을 찾아 소재를 발굴하고 직접 인형과 교구를 만들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아파트 주민들이 내다버린 인형과 헌옷가지를 이용해 만든 교구가 지금까지 5~6박스에 달할 정도이지만 아직 부족하다. 최근 뮤지컬 ‘명성왕후’를 보고 지금은 명성왕후 인형을 만드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40여명 유적해설사·학교지킴이 등 활동 송파구에서 활동하는 어르신 강사는 25명. 문화유적해설사 활동을 펼치는 어르신도 40여명이 있다. 한 달 수입 20만원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노인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참여하면서 용돈 벌이, 여유 시간 활용, 건강 관리 등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 지하철을 이용해 간단한 물건을 배달하는 ‘송파시니어퀵’은 일하는 만큼 벌어 가장 수입이 짭짤하다. 이 밖에 납치범죄 예방을 위해 초등학생 귀갓길을 지키는 ‘학교지킴이’를 비롯해 맞벌이 엄마를 대신하는 학교급식지도사, 어린이집지킴이, 실버벽화단, 실버교통안전봉사단, 문화재보호 등 활동 폭이 한층 넓어졌다. 김영순 구청장은 “내년에 준공하는 노인요양원을 비롯해 송파구에는 어르신들이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를 마련하고 있다.”면서 “이를 충분히 활용하며 지역에서 기량을 마음껏 펼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기고] 지방 의정비 인상 다른 면도 봐야/유태철 서울 동작구의회 의원

    [기고] 지방 의정비 인상 다른 면도 봐야/유태철 서울 동작구의회 의원

    우리 지방자치가 1991년 6월 부활된 후 17년이 지났다. 기초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가 지방자치 발전·정착을 위해 법을 개정,2006년 1월부터 유급제를 시행하고 있다. 지방의원 유급제 도입 취지는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을 의정에 많이 참여시켜 자치의회를 활성화하고, 지역사회의 발전과 주민의 복리증진에 기여토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2006년 5월31일 실시된 지방선거는 종전의 소선거구제에서 2∼6개 동을 하나로 묶는 중선구제로 치러져 의원들의 관할지역과 업무량이 2∼3배 늘어났다. 지방의원의 경우 시의원은 부시장, 구의원은 부구청장에 해당하는 예우를 해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의정비는 7급 공무원의 연봉보다 낮은 3000만원 안팎이었다. 이는 유급제 입법 취지와 맞지 않는다. 금년에 인상된 의정비가 과도하다는 비난이 많다. 하지만 의정비는 2006년 애초에 너무 낮게 책정됐다. 몇 퍼센트 인상을 따질 계제가 아닌 것이다. 의정비 심의위원들은 이런 점을 고려해서 유급제 취지에 맞게 현실화하고, 지방자치 발전을 앞당기려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안전부는 기초의원들의 사기 진작과 지방의회 활성화를 뒷전으로 돌리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의 비난을 의식해 의정비를 내리지 않는 지자체엔 교부금 등 재정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법으로 보장된 지자체의 자율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 원칙없는 애매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정해 기초의원들의 의정비에 과도한 칼날을 들이대고 있어 심히 유감이다. 지방의원들도 가정이 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2006년 한국노총이 발표한 4인 가구 표준생계비는 연 5064만원이라고 한다. 표준생계비에 턱없이 부족한 의정비를 받으면서 의정활동에만 전념토록 한다면, 어떤 유능한 전문 인재들이 보장된 직장과 사업을 버리고 지방의회에 진출하려 하겠는가. 이권개입 근절과 청렴성·정직성이 과연 보장될 수 있겠는가 염려된다. 행안부 기준대로라면 인구와 재정자립도가 높은 지자체와 그렇지 못한 지자체 의원들 간에 의정비 차이가 많아 양극화의 병폐도 생길 것이다. 원칙없는 기준으로 가이드라인을 정해서 과도하게 의정비를 삭감하여 지방의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게 지방자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방공무원법과 지방자치법이 다른데도 근무일수와 시간을 지방의원의 회기일수와 근무시간으로 환산하여 공무원법을 적용시킨 점은 잘못된 것이다.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된다. 퇴직금과 주5일 근무 외에, 비상근무시 특근수당과 시간외 수당 등 보상을 폭넓게 해준다. 그러나 지방의원은 정년없는 4년 기간의 한시적 ‘목숨’이다. 지방의회는 주민의 대표기관으로 조례제정권, 예산심의권, 행정기관의 감시·비판·견제기능 등 폭넓은 권한과 의무를 갖고 있다. 또한 지방의원들은 생활정치인이기 때문에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속에서 수많은 민원을 처리하고, 민의를 정책에 반영하는 등 주민들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 주어야 한다. 근무일수와 근무시간이 따로 없고 365일 공휴일도 없이 매일 24시간 긴장 속에서 시달리는 고된 직업이다. 이런 현실을 좀 알아주었으면 한다. 의정비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선거구제다. 현행 중선거구를 소선거구로 환원하고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을 과감하게 지방정부에 이양해야 한다. 지방의원들이 지역특성에 맞게 소신껏 맞춤형 의정을 펼칠 수 있도록 하루속히 완전한 분권을 실행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초석인 지방자치가 건강하게 뿌리를 내려 활짝 꽃피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유태철 서울 동작구의회 의원
  • [한국의 미래-위기를 희망으로] 생태혁명 산실 도시계획硏 ‘이푸키’

    [한국의 미래-위기를 희망으로] 생태혁명 산실 도시계획硏 ‘이푸키’

    브라질 수도 상파울루에서 남서쪽으로 400여㎞, 대서양 연안 900여m 고원지대에 위치한 쿠리치바는 1990년대 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면서 가히 열풍에 가까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10년.‘생태환경의 모범’으로 추앙받던 쿠리치바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때 고위 공무원, 자치단체장, 시민운동가 등 수백명의 한국인 방문객이 매년 줄을 잇던 이곳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 생태환경적 삶의 표본을 제시한다. 교통정책의 환경적 편익은 이미 세계에너지효율상 수상으로 입증됐고, 도시관리 철학은 창조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3층 콘크리트 건물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철제대문 옆의 큼지막한 초록색 소나무 문양은 이곳이 ‘이푸키’(도시계획연구소·IPPUC)임을 알려줬다. 정원 속 수백년된 고목과 현대식 연구소의 조화. 남미의 ‘외딴섬’ 쿠리치바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시립硏 주도 성공… 남미서 유일 공보담당인 루이스 하야카와(56)는 “이곳에선 전체적인 도시설계 외에 쓰레기 재처리까지 세세한 계획을 조율한다. 시립연구소가 도시개혁을 주도해 성공한 사례로선 남미에서 유일하다.”고 소개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의 충격이 남미 외곽도시 쿠리치바로 몰려왔을 때 사람들은 지속가능한 도시계획을 생태혁명에서 찾았다.1965년 도시계획 자문위원회(APPUC)가 바뀌어 출범한 이푸키는 이때부터 변화의 산파역을 담당한다. 학생, 전문가, 공무원이 합심해 전통적인 종합계획 방법론에 의지했던 연구소는 시민들에게 적극적 실행을 주문하기 시작했다.1960년대 말 연구소장을 역임한 뒤 시장과 주지사로 변신한 도시학자 자이메 레르네르는 “만약 환경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면 단 두 가지만 하면 된다. 자가용을 덜 타고, 쓰레기를 분리배출하면 된다.”고 주창했다. ●공기순환까지 감안 도시계획 이는 곧바로 통합교통망의 건설, 환경우선의 도시설계로 이어졌다. 방사형의 도시성장 패턴의 다변화와 ▲고립을 벗어난 선형 교통축의 도입 ▲도시 중심부와 주변부의 건물 용적률 차별화 ▲역사중심지 보존과 하부구조 개선 등이 그것이다.200개가 넘는 중소공원과 자전거·보행자도로 확충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는 도시성장과 경제발전이라는 보답으로 찾아왔다. 리카드로 빈도(58) 설계담당관은 “쿠리치바에선 도시 중심의 고층건물이 주변부로 갈수록 낮아진다.”면서 “중심부 12층 건물이 주변부에선 4층으로 제한받는데 도시미관과 함께 공기순환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계방식을 소개했다. 건물 사이에 건물 높이의 최소 6분의1 공간을 확보하도록 한 2000년 개정 건축법도 이푸키가 입안했다고 귀띔했다. 도시건설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이푸키는 과연 어떤 집단일까. 외양처럼 사무실 풍경도 고즈넉할 것이란 상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운치있게 원목으로 장식한 사무실 내부는 쉴새 없이 움직이는 직원들로 붐볐다. 이들은 삼삼오오 토론을 즐기거나 책상을 오가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편에선 의자를 젖혀 놓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연구소의 특징은 자율성과 독창성이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는 학생, 전문가, 공무원이 모두 함께 참여한다.120여명의 직원 가운데 기술자와 디자이너, 경제분석가 등 전문가그룹은 6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일반 사무직인데 자원봉사자와 대학생인턴이 각각 8명과 5명을 차지한다.24년간 이푸키에서 일해온 빈도 담당관은 “자원봉사자도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에 ‘실천´ 강력 주문 전문직의 경우 다국적 기업에서 평균 5년가량 경력을 쌓은 뒤 평균 300대1의 경쟁을 거쳐 입사하는데 보수는 2000∼3000헤알(130만∼195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자원봉사자와 인턴은 무보수 명예직이다. 시 관계자는 “이들을 이끄는 힘은 오직 시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자부심”이라고 소개했다. 시립연구소가 홀대받고 고액 연봉의 민간연구소가 대우받는 국내 사정과는 판이한 셈이다. 2000년 입사한 테레사 토레스(48·여)는 “하루 8시간을 일하는데 주로 ‘자원재활용’과 관련된 일을 한다.”면서 “내 손끝에서 새로운 변화가 이뤄진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sdoh@seoul.co.kr ■’온난화’ 막는 쿠리치바市 폐기물 철저관리… 공교육도 ‘환경’ 우선 |쿠리치바 오상도특파원|파라나주의 주도인 쿠리치바는 1693년 독일 상인들이 개발했다.195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18만명의 소도시였지만 2008년 인구 180만명, 주변 13개 위성도시까지 합해 300만명을 웃도는 광역도시로 성장했다. 급속한 인구증가는 필연적으로 환경문제를 불러왔다. 교통체증과 도시 주변부의 무허가 정착지(파벨라)는 오염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70년대 군사정권이 끌어온 해외자본은 연간 6∼7%의 도시성장률을 이끌며 도시오염을 가속화시켰다. 도시환경을 개선하려는 쿠리치바의 노력은 폐기물 관리정책에서 시작됐다. 이푸키는 시민 1명이 하루 동안 배출하는 쓰레기를 분석, 식품·농산물 등 유기물(30%)과 금속·플라스틱 등 재활용품(35%) 등으로 분류했다.1984년 리파테르라는 민간회사와 수거계약을 맺은 데 이어 최근에는 다시 카보라는 회사로 거래선을 바꾸는 등 외주 경쟁체제도 도입했다. 카보는 현재 7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해 100여개 수거구역을 돌며 매주 3회씩 쓰레기를 분리 수거한다. 도시환경국 관계자는 “폐기물 관리정책은 90년대 말 매립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됐던 40여㏊의 카슘바매립장을 내년 말까지 문제 없이 쓸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 매립장은 숲으로 둘러싸인 채 침출수를 자연정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우수환경재생상을 수상한 데는 ‘쓰레기구매프로그램’도 한몫했다. 도시환경국 빅토르 부르코는 “주변 파벨라는 수거직원들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곳이 많다.”면서 “이런 곳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모아오도록 해 쓰레기 1㎏당 버스표 1장이나 5㎏당 쌀·콩·우유 등이 든 봉투로 교환해줬다.”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극빈층 중 쓰레기를 직접 모아 와 팔거나 캄포마르고의 분리수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70년대 쿠리치바시는 남부지역 40여㎢에 친환경공업단지 조성도 시도했다. 이푸키가 주축이 된 ‘공원이자 정원인 공단’프로젝트로 한때 500개 중소업체가 입주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1인당 100㎡를 웃도는 녹지도 온실가스로부터 쿠리치바를 자유롭게 만드는 요소다. 채탄장을 공원으로 복원한 탕구아공원에는 1500석 규모의 오페라하우스인 ‘오페라 데 아르메’가 들어섰고, 투로패로스공원, 바리귀공원, 카이우아공원 등 100여개의 크고 작은 공원들이 명소로 자리잡았다. 쿠리치바의 토지법은 외곽지역 건물은 의무적으로 5m씩 도로로부터 식재공간을 확보하도록 했고, 만약 시민이 허가 없이 나무를 벨 경우 2배 이상의 나무를 심도록 규정했다. 무엇보다 쿠리치바는 환경교육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과는 아예 담을 쌓도록 했다. 공교육은 환경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산림보존·생태복원·수질감시 등을 정규 과목으로 삼았다. 저소득층 청소년은 공원 등에서 매달 돈까지 받아가며 생태환경을 몸소 체험한다. 쿠리치바 시교육청은 수학, 과학 등의 시험지문도 환경과 관련된 것을 주로 채택한다. 지난 92년 설립된 환경개방대학은 자니넬리 공원 안에 위치한 통나무 건물로 택시운전사, 교사 등 실질적 여론주도층을 대상으로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 sdoh@seoul.co.kr
  • [깔깔깔]

    /ci0008●군대가기와 시집가기의 다른점1. 거의 남자만 간다/여자만 간다.2. 들어가면 나온다/가면 뼈 묻어야 한다.(예외가 늘고 있다.)3. 일단 갔다 오면 그래도 어깨가 펴진다/갔다 다시 오면 어깨가 더 움츠러든다.4. 약간의 보수는 받는다/무보수의 중노동이다.5. 사회적으로 진짜 남자가 된다/사회적으로 여자로서 생명이 끝난다.6. 연애가 낙이다/연애가 낙인 남자와 산다./ci0000●기특한 아이? 영철이와 호정이는 가난한 부부지만 단칸방에서 아들 상호와 행복하게 살았다. 이들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상호가 다섯살이 되면서 신경이 쓰여 제대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결혼기념일이 되자 영철이와 호정이는 상호 몰래 뜨거운 밤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마침내 밤이 되자 상호가 먼저 말했다. “아빠, 엄마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니까. 나는 장롱에서 잘게요.”
  • 지방의원 의정비 멋대로 못올린다

    지방의원 의정비 멋대로 못올린다

    이르면 올해부터 지방의회 의원들이 의정비를 과다 인상하지 못하도록 ‘가이드 라인’이 마련된다. 또 지방의원들의 겸직금지 범위가 확대되고 영리행위 제한도 강화된다. 행정안전부는 4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지방의회 제도개선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초 무보수 명예직이었던 지방의원들은 2006년 의정비가 급여 개념으로 유급화됐고, 지난해에는 지방의회들이 조례 개정을 통해 의정비를 대폭 인상하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행안부는 광역·기초의회 44곳에 의정비 인하를 권고하기도 했지만, 강제력이 없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따라 행안부는 지자체의 재정 상황 등을 감안해 몇 개의 집단으로 분류한 뒤 의정비 상한액이나 기준액 등을 제시하고, 이를 기준으로 각 지방의회가 의정비를 책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이드 라인에는 의정비 인상 기준 외에 의정비심의위원회 구성, 의견수렴 방식 등 절차에 대한 기준도 포함될 전망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의정비 결정방식 개선’을 위한 용역을 진행 중이며, 다음달 초 지방자치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라면서 “가이드 라인을 따르지 않는 지자체나 지방의회에는 교부세 감액 등 불이익을 줄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행안부는 또 지방의원들의 의정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겸직금지 대상에 국회의원 보좌관·비서관, 국회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 새마을금고·신협 상근 임직원 등을 추가할 예정이다. 대학교수가 지방의원을 겸직할 경우 휴직해야 하고, 지방의원이 다른 직무를 겸할 때는 해당 의회에 서면으로 신고해야 한다. 행안부 관계자는 “겸직금지 확대 및 영리행위 제한을 담은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올 정기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무엇이 연약한 여인의 마음을 이토록 ‘단디’ 묶었을까. 지난 55년 동안 오로지 ‘독도’라는 두 단어로 다부지게 살아왔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든 정신과 생각, 추억이 여전히 ‘독도’로 모아진다. 박영희(74) 여사. 학창시절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열아홉 나이에 당시 울릉도에 사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만나 결혼하면서 독도지킴이로 나섰다.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 등으로 이어지는 3대째 독도지킴이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그야말로 ‘독도는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1953년 4월 남편이 동료 33명 등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자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담당하는 후방 병참대원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애국심이 투철한 ‘여전사’로 변했다. 뿐만 아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故) 홍 전 대장의 조카와 딸 등이 독도연구원과 독도지킴이로 활동하고 있으니 4대째 그 집안내력을 잇고 있다. 독도에 대한 박 여사의 내조와 정신무장이 어떠한지 새삼 짐작이 간다. 지난주 경북 울릉군청으로 전화를 걸었다.“아, 예 홍 대장의 미망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박 여사의 연락처를 아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울러 홍 전 대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 10여명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전해들었다. 경기도 구리시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박 여사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까지 우렁찼다. 소파 뒤쪽 벽에 걸린 ‘독도사랑 대한의 얼’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폈더니 ‘고 홍순칠 선생님의 독도사랑을 기리며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뜻에 따라 이천육년봄 아무개 삼가씀’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였다. 그는 “2년 전 손 지사가 직접 들고 왔다.”고 귀띔했다. 독도 사진도 바로 옆에 있었다. 남편이 생전에 쓴 육필원고와 독도의용수비대 사진집을 펼친다.20여년 전 남편을 여의고 비록 혼자 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50년 전부터 우리가 정부에 수차례 건의했던 내용들을 이제 와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거 아닙니까.”하면서 볼멘소리를 높인다.1969년 당시 청와대에 건의했던 독도개발계획서를 직접 보여준다.‘어민 20가구 거주, 동도∼서도 매립, 어항구축, 냉동 및 제빙시설 등을 갖추게 해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면서 “시할아버지는 평소 ‘천지신명이시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나갑니다. 오늘도 30여명의 우리 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대를 이어 독도지킴이로 평생을 살게 했던 철학으로 가슴에 새겼다. ▶가족들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제가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 연숙이는 사이버 독도해양청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독도가족협의회를 발족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카는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독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지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 고향은 대구입니다. 학교선생이 되려고 안동사범학교에 다닐 때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살이었지요.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독도에 들어가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됐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운명이려니 하고 남편일을 열심히 도와야지요.” 결혼할 때 4살 연상인 남편과 독도에 일생을 바치자는 언약도 했단다. 이후 남편은 독도수비대장으로 대원을 이끌면서 일본 순시선과 전투에 가담했고 박 여사는 한달에 한번씩 어선을 통해 옷과 식량보급 등을 담당하느라 달콤한 신혼사랑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일본 순시선과 전투를 치렀느냐는 질문에 1954년부터 독도에 본격적으로 상주하면서 50여차례 조우를 했다고 대답했다. 또한 1954년 11월에는 일본 함정 3척을 물리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독도대첩’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독도수비대는 어떻게 해서 조직하게 됐습니까. -“제가 결혼해서 울릉도에 갔더니 대원들 일부가 모여들고 있었어요. 아마 그때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들러 죽도(竹島·다케시마)라는 간판을 세웠나봐요. 울릉도에 사는 한 어부가 그걸 들고와 울릉군청 앞마당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독도수비대를 조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요.”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요. -“할아버지가 울릉도를 개척하면서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걸 베어서 독도에 막사를 짓고 일부는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지요. 기관총 등 무기는 주로 부산에서 구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 가운데 2000만원을 털었으며 처음에는 기후나 물공급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전마선 2척을 만들어 여러 차례 독도에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독도의용수비대는 국가가 시키기 전에 무보수로 민간인 스스로가 독도를 지켰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바로 한민족의 정기가 아니냐.”고 강조했다.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적도 있다던데. -“한·일협상 무렵 방송에 나가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우물을 파고 나무도 심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방송에서 홍 아무개가 독도를 지키는 훌륭한 일을 했다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지요. 고문도 당하고 그후 몸이 많이 허약해졌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뭐, 식당운영도 했고…. 남편이 몸이 안좋게 되자 울릉도에서 서울로 나와 병원엘 다녔지요. 그때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인 1985년도인가 그래요. 처음에 송파쪽에 살았는데 1997년 구리에 우연히 들렀다가 지금까지 살게 됐습니다. 생활비는 자식들한테 얻어 쓰고 그럭저럭….” ▶그동안 나라에서 받은 혜택 같은 것은 없었나요. -“박정희 정권 때 여러 차례 건의를 했더니 대원 11명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주더군요.1996년 딸이 대통령에게 청원을 해서 33명 전원이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국가유공자가 됐지요. 남편은 대원과 가족에게 죄책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돌아가시면서 대원들이 꼭 국가 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유언했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팔순 다 된 나이에 뭘 하겠느냐.”며 남편이 남긴 것 중 책 한권 분량의 독도 관련 원고가 있어 이를 출간할 생각이라고 했다. 아울러 “정부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독도수비대원들의 활동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대구 출생 ▲51년 안동사범학교 강서과 1년 수료(준교사 자격증) ▲52년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과 결혼, 울릉도 거주 ▲53년 독도의용수비대 후방지원대 역할을 맡아 56년 12월까지 병참지원 활동 ▲61년 울릉도 사동초등학교 교사 ▲68년 울릉도에서 음식점경영 ▲69년 독도개발계획 등을 정부에 여러차례 건의 ▲85년 서울로 이사 ▲86년 남편 홍순칠 대장 작고 ▲97년∼현재 경기도 구리 거주 # 특이사항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조카와 딸 등으로 이어지는 4대째 독도지킴이 활동에 앞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독도는 ‘돌섬’이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고도 한다. 원래 울릉도와 독도에는 경상도보다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돌섬’의 의미인 ‘독도’라 불렀다. 하여, 이곳에는 풀이나 자랄 수 있을 뿐이지, 대나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자꾸 생떼를 부리는지 원…. 이참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홍순칠,1929년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한테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6·25 참전 직후 1953년 4월 45명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그해 7월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쫓아내는 등 독도에 근접하는 일본 함정과 항공기를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그것도 6·25 때 쓰다 버린 소총과 박격포 등으로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의 야욕을 미리 짐작한 그는 독도의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크게 새겨 넣어 대한민국 영토임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그러던 1956년 12월, 무기와 독도수비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가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작고했다. ●노래 인연으로 의용수비대장과 운명적 만남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3년 7월25일.‘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해진 가수 정광태(53)를 울릉도에 초청했다. 평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그는 정씨를 무척 좋아했다. 둘은 ‘독도’라는 공통점으로 운명처럼 뜨겁게 만났다. “이런 훌륭한 노래를 불러줘서 너무 고맙소. 당신 같은 사람이 독도군수를 맡아야 해요.” 그러면서 홍순칠은 마지막 독도의용수비대장 자격으로 감사패와 함께 정씨를 명예군수로 임명했다. 이후 정씨는 25년째 무보수 군수로 장기 집권(?)하게 된다. 뗏목탐사와 수영종단 등 울릉도와 독도를 수십차례 다녀오면서 나름대로 명예군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뗏목탐사·수영종단 등 수십차례 독도 방문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과목 지침서인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를 감행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에 대한 재침략이 시작된 것”이라고 분노하며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등과 함께 경찰청 소속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했다.4일 뒤인 18일 오후에는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롯데 전에서 LG의 초청을 받아 시구자로 나섰고 5회말 종료 후 응원석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소리 높여 불렀다.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정씨를 만났다. 그에게 ‘군수님’이라고 호칭하자 “무슨 말씀,1984년 독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예포를 발사하는 등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군수가 아닌 대통령인 셈이다.”며 웃는다. 이어 “우리나라 대통령이 아직까지 독도에 한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우리나라 영토인데 한번쯤 방문해서 주민이나 근무자들에게 격려하고 그러면 얼마나 모양이 좋겠느냐.”고 했다. 그는 또 8년 전쯤 금강산에 갔을 때 북한 안내원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여자 안내원이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가 아니냐.”고 먼저 알아보자 옆에 있던 남자 안내원은 “그 노래 부른 지 얼마나 됐습네까. 노래만 불러서 독도를 찾갔시요.”라고 하더라는 것.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선수 정대세도 최근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자주 부른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기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본의 만행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를 들어 부인이랑 함께 즐겁게 나들이를 하는데 일본사람이 대뜸 ‘내 아내’라고 주장하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본의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며 ‘무대응’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려면 얼마나 노력하고 궁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다니요. 이번 일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재침략하려는 술수를 드러낸 첫 단계입니다.” ●역사 등 근거 정부차원 장기 대응책 마련을 ▶그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일본은 역사학자를 정부차원에서 지원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일본이 떠들면 반짝 언론을 통해서 요란을 떨다가 금방 사그라집니다.1954년 무렵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은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총칼로 물리쳤고 당시 외무장관은 전투기로 공격하겠다고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일본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도에는 왜 못 갑니까. 앞으로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수학여행을 권장해 독도를 꼭 가슴에 두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 비자를 요청했을 때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12년째 일본 입국비자 거부자로 살고 있습니다.1996년 일본 고위 관료의 망언으로 독도 영유권 논쟁이 촉발된 뒤 SBS와 함께 독도 관련 추석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키로 했지요. 한국인과 일본인의 독도에 관한 인식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를 맡았는데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비자 발급에 결격 사유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참다 못해 저는 대사관으로 찾아가 욕이란 욕을 다 퍼부으며 비자관련 서류를 돌려받아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렸지요.” ▶‘독도는 우리 땅’ 노래는 어떻게 해서 부르게 됐습니까. “그 노래는 1982년도에 발표가 됐지요. 당시에 ‘유머 1번지’라는 개그 프로에서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포졸복을 입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코믹하게 불렀어요.TV 방영 직후 레코드 제작자가 우리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우리 넷이 약속장소에 갔는데 제작자가 너무 늦게 나왔어요.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는 너무 바빠 먼저 자리를 떴지요. 나중에 제작자가 오더니 기다리던 저를 보고는 ‘혼자라도 취입하자.’고 했어요. 얼마후 ‘젊음의 행진’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담당 PD의 주문으로 큰칼 옆에 차고 이순신장군 복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5공화국 땐 ‘독도는 우리땅´ 금지곡 아픔도 ▶방송금지된 적도 있었지요. “5공화국 때였습니다. 왜 금지시켰냐고 따질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당시 실세였던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하루는 저를 부르더군요. 녹차 한 잔을 주면서 자기는 독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애로사항이 뭐냐고 하더라고요. 노래가 금지돼 방송에서 안 틀어준다고 했지요. 다음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게 좋은 노래를 누가 금지를 시켰냐고 오히려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독도는 언제 처음 갔나요. “1984년에 해양경찰청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접안 시설이 없어서 1987년 돌아가신 독도 최초의 주민 최종덕 할아버지가 마중나온 작은 배에 뛰어내려서 독도에 들어갈 수 있었죠. 최 할아버지의 아들, 딸, 그리고 어부들이 7∼8명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미역 등 해산물 선물을 많이 주셨지요. 또 독도 경비대에도 갔는데 예포를 발사하며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현재 뮤직라이프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있으면서 가끔씩 방송출연도 한다. 요즘에는 독도 관련내용이 많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 서울 YMCA에서 열린 ‘만우절 거짓말 대회’에 출전,1등을 차지하는 등의 경력을 쌓으며 개그맨으로 출발했다. 그가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방송국을 경영하는 친구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으며 6년 후 귀국한 뒤 본격적인 독도사랑에 나섰다.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며 ‘기러기 아빠’로 경기도 탄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를 두고 개그맨 전유성씨는 “너는 항상 그 자리에서 독도처럼 사는구나.”라고 표현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서울 출생. 본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 ▲74년 서라벌고 졸업.KBS-TV ‘젊음의 행진’ 데뷔 ▲75년 TBC-TV ‘살짜기 웃어예’ 등 출연 ▲78년 수도경비사 병장 전역 ▲81년 명지대 무역학과 졸업 ▲83년 KBS 남자가수 신인상 수상(독도는 우리땅) ▲84년 독도 첫방문.KBS 가사대상 동상수상(도요새의 비밀) ▲85년 김치주제가 발표 ▲90년 미국이민. 샌프란시스코 한미라디오 ‘오후의 희망가요’ 5년 진행 ▲2000년 8월 독도수호대와 울릉도∼독도 뗏목탐사 ▲04년 8월 45명의 애국인사와 울릉도∼독도 수영종단 ▲07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이사 ▲08년 현재 동협회 부회장, 독도명예군수. 독도홍보대사. ●주요 히트곡 독도는 우리땅, 도요새의 비밀, 힘내라 힘, 김치 주제가, 화랑관창, 의병대장 곽재우,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 “머플러 디자인이 패션쇼보다 힘들어”

    우아한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게 더 쉬울까, 한 조각 머플러(마후라)를 디자인하는 게 더 수월할까. 유명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3일 후자가 더 고민스러웠다고 토로했다. 서울 신길동 공군회관에서 열린 ‘조종사의 날’ 선포식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난 그는 자신이 무보수로 직접 디자인해 공군에 헌정한 ‘명품 빨간 마후라’가 남몰래 혼신의 힘을 쏟은 역작임을 소개했다. “패션쇼보다 작업은 단조로웠지만 생각한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빨간 마후라에 실린 ‘애국’의 무게가 이 세계적 디자이너에게 만만찮은 부담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그는 ‘패션 디자인의 달인’답지 않게 “좀더 잘했어야 하는 데 하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씨가 설명한 ‘명품 빨간 마후라’의 디자인적 의미는 이렇다.“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왕실 문양을 미래지향적으로 재창조했다. 헌신적인 조종사의 열정과 희생정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의미에서 빨간색과 오렌지색을 채택했다.” 공군으로부터 디자인 부탁을 받고 고민스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빨간 마후라의 이미지가 전 국민에게 워낙 오래전부터 각인돼 있어 더 고민이 됐다.”면서 “조종사의 헌신적 정신을 강렬하면서도 멋스럽게 디자인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어 “심플하고 단아하면서도 뜻깊은 한국의 정신을 미래지향적 정신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고 ‘앙드레 김식 수사(修辭)’를 한껏 덧붙였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앙드레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앙드레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유명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명품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영공을 지키게 된다. 공군은 2일 올해부터 매년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정했다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앙드레 김이 손수 디자인해 헌정한 빨간 마후라를 공군의 모든 조종사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군이 조종사 사기진작을 위한 차원에서 앙드레 김에게 디자인을 부탁하자, 앙드레 김이 흔쾌히 무보수로 디자인을 해주겠다고 응했다고 한다. 앙드레 김의 마후라는 가로 35㎝, 세로 146㎝ 크기로 앞면은 진한 빨간색이고 뒷면은 진한 주황색이다. 앙드레 김의 작품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독특한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실크 소재여서 빛의 방향에 따라 다양한 빨간색을 나타내면서 기존의 빨간 마후라(오른쪽)보다 화려한 느낌을 준다. 앙드레 김은 3일 서울 신길동 공군회관에서 열리는 조종사의 날 선포식에 참석, 지난해 ‘탑건’(최우수 조종사)인 이우범(30·공사 49기) 대위와 KF-16 첫 여성조종사 하정미(29·공사 50기) 대위의 목에 자신이 디자인한 빨간 마후라를 직접 둘러줄 예정이다. 공군이 조종사의 날로 제정한 7월3일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10명의 국군 조종사들이 일본 이다쓰케 미군 기지로부터 F-51 무스탕 전폭기 10대를 인수해와 적진을 향해 첫 출격한 역사적인 날이다. 공군은 “건군 60주년을 맞아 선배들의 투혼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조종사의 날을 제정했다.”면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빨간 마후라와 부대에서 평소에 매는 빨간 마후라를 번갈아 가면서 착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빨간 마후라는 6·25 당시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던 제1전투비행단에서 처음 착용한 이래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만의 독특한 상징이 됐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주말탐방] 미술관을 움직이는 ‘그녀’들…오해와 진실

    [주말탐방] 미술관을 움직이는 ‘그녀’들…오해와 진실

    대한민국에서 ‘오해’와 ‘진실’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직업 하나를 꼽아보자. 힌트. 누가 뭐래도 그들은 ‘미술관의 꽃’이다. 어지간히 눈치없는 사람도 이쯤하면 무릎을 치겠다. 그들의 이름인 즉 큐레이터(curator)이다. 큐레이터가 전시장의 마스코트라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까만 정장 차림으로 우아하게 눈인사를 보내오는 그들의 자태는 오가는 관람객들에겐 더러 ‘로망’으로 꽂힌다. 덮어놓고 환상부터 불러일으키는 주체란 대목에서 많은 이들에게 ‘미술’과 ‘큐레이터’는 동의어로 다가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해가 많다. 무엇보다 그들 세계의 실상은 화려한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사실! 여차하면 (미술관)벽에 못질까지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밥먹듯 밤샘… 기획력 못지않게 체력도 갖춰야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박윤정씨. 지난 17일 ‘프랑스 디자인의 오늘’전을 개막하기까지 근 열흘동안 그는 거의 초주검 상태로 살았다. 전시가 개막되고서도 며칠동안은 연일 야근을 했으니 제시간에 끼니를 챙겨먹는 건 사치. 이번 전시를 오픈하기까지는 첫 기획에서부터 꼬박 1년이 걸렸다. 전시에 참여한 프랑스 대표 디자이너 4인을 섭외하고 그들의 어떤 작품을 들여와야 하는지 선정하는 등의 업무가 모두 그의 책임 아래 진행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전시가 임박하면 밥먹듯 밤샘작업을 해야 하고, 급할 땐 벽에 못도 박아야 한다는 말이 빈소리가 아니다.”는 그는 “큐레이터가 기획력 못지 않게 갖춰야 할 덕목이 체력”이라고 말했다. 소소하게 오프닝 손님맞이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까지 그의 몫일 때가 많다. 작품의 위치를 일일이 정하는 건 물론이고 작품 손상을 막기 위해 전시장의 조명과 온도, 습도까지도 신경써야 한다. 말 그대로 1인 10역.“백조 가면을 쓴 ‘노가다’”라는 우스갯말이 나올 만도 하다. 큐레이터란 미술관과 박물관의 소장품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는 물론, 전시를 기획하는 전문인력을 일컫는다. 국공립미술관에서 이들은 ‘학예사’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반적인 오류. 작품판매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상업화랑에는 큐레이터가 없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화랑에서 작품 및 전시를 관리하는 이들은 엄밀히 ‘갤러리스트’라고 구분해서 불러야 맞다. 지금의 국내 상황에서 큐레이터에게 주어진 업무는 딱히 선을 긋기가 어려울 만큼 잡다하다. 전시의 전체 얼개를 잡는 기획업무는 기본. 도록 만들기, 작가 섭외, 작품 선정, 작품을 어디에 어떻게 거는지 전시장 세팅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떠맡아야 한다. ●미술관에는 큐레이터만 산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의 열에 아홉이 갖고 있는 ‘중대한’ 편견. 미술관에 큐레이터 말고 또 다른 명함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미술이 소수계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보통사람들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온 최근 몇년새 미술관 사람들의 업무영역도 발빠르게 다양화, 세분화하고 있는 추세”라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말이다. 전시장을 움직이는 손은 알고보면 여럿이다. 우선, 에듀케이터. 전시의 교육적 기능을 전담하는, 미술관의 빼놓을 수 없는 전문인력이다. 전시의 전체 컨셉트를 잡아 기획하는 일이 큐레이터 몫이라면, 관람객들에게 전시 작품에 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짜는 역할몫은 에듀케이터에게 있다. 미술관을 움직이는 손은 또 있다. 관람객 편에서 보자면 누구보다 살뜰히 피부에 와닿는 도움을 주는 현장가이드.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동행하며 작품정보를 자세히 들려주는 주인공은 큐레이터가 아닌, 이름하여 ‘미술품 전문해설사’다. 이들이 국내 미술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박선민 사무장은 “기존의 ‘도슨트’가 무보수 자원봉사 개념이어서 전문성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립미술관들이 이들을 채용키로 했다.”면서 “일반 관람객들이 거부감없이 미술관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결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칭 미술팬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자리이기도 하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사업의 하나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제도라는 사실.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하진 않으므로 은퇴 교사나 예술학을 전공한 미술애호가라면 미술관 채용정보를 꼬박꼬박 챙겨볼 필요가 있다. ●왜 ‘그녀’들만? 까만 정장이 유니폼? 그래도 물음표가 찍히는 몇가지. 미술관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째서 열에 아홉은 여자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홍익대 예술학과,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대구 가톨릭대 예술학과 등 큐레이터의 주요 산실들에 남자 예술학도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큐레이터 하면 떠오르는 빼놓을 수 없는 이미지가 또 까만 정장이다. 정장, 그것도 검은 색을 챙겨입어야 하는 규칙은 물론 없다.“전시를 ‘문화 서비스’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데다 무엇보다 전시장의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려면 근무자의 복장이 튀지 않아야 하는 데 암묵적 동의가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세상을 통째로 미술에 감염시켜라” ‘갤러리 앤 더 시티’ 도시를 통째로 ‘미술관 블랙홀’ 속으로 풍덩 빠뜨리는 게 일상의 목표인 사람들.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는 세상을 미술에 감염(?)시키는 즐거움으로 사는 여자 넷이 날마다 뭉친다.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인 황정인 수석 큐레이터와 우선미 큐레이터, 미술품 전문해설사 조영은씨. 그리고 한살아래인 에듀케이터 윤희은씨다. “전시 시작하기 보름 전쯤이면 몸이 열이라도 모자라요. 전시 인쇄물을 만들고, 편집 디자인도 최종 점검하고, 또 디스플레이할 작품도 들여와야 하거든요.” 황 큐레이터가 홍익대 예술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지금의 미술관에 들어온 건 2003년.‘큐레이터 밥’을 먹은 지는 햇수로 5년째다. 서울시립미술관 교양강의를 나갈 정도로 야무진 그는 “조금씩 변화하는 작가들의 세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는 즐거움, 잠재력 큰 무명작가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큐레이터라는 직업의 최고 매력”이라며 웃는다. 미술관의 자체 전시를 기획하는 그와 호흡을 맞추는 건 동갑내기인 우선미 큐레이터. 미술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한 우씨는 외부 기관과 연계하는 공동전시 기획을 맡는다. 이처럼 사비나미술관은 국·공립 못지 않게 체계적 인력을 구성하고 있는 곳으로 몇손가락 안에 든다. 지난해 11월 국내 사립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미술품 전문 해설사를 채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전문해설사 1호가 된 조영은씨. 영국 버밍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디자인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디자인 역사를 더 공부했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로 몇달 일하면서 일반 관람객들의 미술 궁금증을 현장에서 풀어주는 작업이 기대 이상으로 매력있었다.”는 그는 자원봉사 개념의 도슨트가 꾸준히 재교육되는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 내심 안타까웠다. 그런 차에 문제를 보완한 전문해설사를 뽑는다는 공고에 반색하며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현장의 그녀들 눈에 미술관으로 걸음한 관객들은 다 고울까. 솔직히 꼴불견도 있다. 국사 선생님이 되려 박물관 강좌를 듣다 미술관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는 에듀케이터 윤희은씨.“미술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방식으로 끌어내기 위해 영어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전시장을 그저 영어학원쯤으로 인식하는 젊은 엄마들은 보기 딱하다.”고 털어놓는다. 예술의 향취를 발견하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미술관을 아이의 체험학습장 삼는 부모들의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는 데 모두가 입을 모은다. 업무 영역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희망사항은 신기하게도 닮은꼴이다. 예산부족으로 지금의 미술관들이 엄두도 못내는 작업들을 10년쯤 뒤에는 꼭 해보는 거다.“지금으로선 큐레이터들에겐 전시 목록 말고는 남는 게 없어요. 땀흘려 기획한 전시를 국내용으로 그치지 않고 해외 교류전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또 국내 작가들과 작품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연구소도 운영했으면 좋겠고….” 황 큐레이터의 욕심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無錢 감옥’… 생계형 노역자 급증

    ‘無錢 감옥’… 생계형 노역자 급증

    17일 굳게 닫혔던 영등포교도소 철문이 열리자 학교를 연상케 하는 교정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 2층 작업장에서는 소액 벌금을 내지 못해 철창 신세를 지고 있는 ‘생계형 노역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종이봉투 접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깨 한 번 밀쳤다고 감옥생활이라니… 작업장에서 만난 이모(36)씨는 지난해 6월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지하철역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이씨는 잠을 깨우는 역무원과 말다툼을 하다가 어깨를 밀친 것이 화근이 돼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노동일용직에 종사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에 급전을 마련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벌금 미납자로 지명수배된 이씨는 경찰에 체포돼 55일간(하루 5만원씩 공제·재판과정에서 5일은 미리 공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됐다. 이씨와 같은 노역장 유치자들은 봉투접기 등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 하루 일당 600∼700원을 받는다. 한 달에 20일을 작업하면 1만 2000∼1만 4000원의 월급을 받는 셈이다. 이씨는 “공무원 한 번 밀쳤다고 교도소 생활을 하려니까 너무 억울하다.”면서 “돈만 있다면 벌금을 내고 싶지만 형편이 안되는 걸 어떡하냐.”고 말했다. ●돈 없어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 늘지만 대체수단 없어 이씨처럼 소액의 벌금을 납부할 능력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법무부 교정국에 따르면, 벌금 미납으로 인한 노역장 유치자는 2004년 2만 8193명에서 2006년에는 3만 4019명으로 늘어났다. 그 중에서 300만원 이하 벌금미납으로 인한 노역장 유치자는 2004년 2만 6586명에서 2006년에는 3만 2148명으로 늘어났다.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징역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벌금형이 생계형 노역자들에게는 더 가혹한 징역형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법무부는 지난해 9월 사회봉사명령이라는 대체수단을 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벌금미납자의 사회봉사 집행에 관한 특례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특례법안은 지난해 11월 14일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으나, 형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법안심사소위로 넘겨졌다.17대 마지막 임시국회가 지난달 24일로 종료되면서 법안은 자동폐기됐다. ●노역장 유치자들 사회봉사 원해 법무연수원 김명곤 교수(영등포교도소 작업훈련과장)가 최근 노역장 유치자 2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역수형자 처우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벌금형 대신 다른 대체형을 부과한다면 어떤 것이 좋겠는가라는 질문에 사회봉사(무보수 공익적 노동 등)가 133명(64.9%)으로 가장 많았고, 사회보장시설 위탁이 22명(10.7%)으로 그 다음이었다. 수용생활 중 가장 큰 애로사항은 거실생활의 답답함이 116명(27.6%), 출소 후 생활에 대한 걱정이 70명(16.7%) 순이었다. 법무부 교정국 관계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신체를 구속하는 것보다는 이들에게 사회봉사나 재활훈련기회를 주는 등 대체수단 강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장유식 민변 공익소송위원장 인터뷰

    장유식 민변 공익소송위원장 인터뷰

    장유식 민변 공익소송위원장은 “공익소송은 변호사 사익이 아닌 사회 전체의 공익을 염두에 둔 활동”이라면서 “공익소송은 변호사로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중요한 활동이지만 그렇다고 공익소송 만능에 빠지지 않는 신중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공익소송이 중요하나. -공익소송은 개인의 권리 차원을 넘어서 사회집단적인, 일반 분쟁해결로는 소외되기 쉬운 권리를 발굴하고 기획해서 찾아내 집단적인 이익으로 전환하는 소송이다. 작은 권리 찾기이자 민생을 위한 과정이다. ▶리니지 소송이나 옥션 소송 등과 어떻게 다르나. -뿔뿔이 흩어진 권리를 찾고 사회적 파급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리니지 소송이나 옥션 소송 등은 기본적으로 변호사들의 영리활동의 성격이 크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고 나쁘게 볼 것도 아니다. 공익소송은 참여하는 변호사들이 무보수로 일하거나 실비만 받고 수행하며 시민단체들과 함께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 이익이 발생해도 공적기금으로 조성한다. ▶쇠고기협상 무효를 위한 국민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민변 소속 변호사 주도로 추진 중이다. 청구인단은 당초 지난 2일 오후 4시까지 모집할 예정이었으나 참여의사가 폭주,3일 낮 12시까지로 연장했다. 마감결과, 신청자가 10만명이 넘었다. 청구인단은 5000∼1만원씩 자발적으로 참가비를 냈다. 이 돈은 국민소송 진행비용, 촛불문화제로 수사대상이 되었거나 형사상 소추대상인 참가자에 대한 변론사건 소요비용 등으로 활용한다. ▶공익 소송 취지는 좋지만 모든 사회문제를 법으로 만 해결하려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그런 지적에 동의한다. 법 위에 정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 분쟁으로 가면 문제가 더 어려워지거나 불필요한 분쟁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사회운동 방식으로 하거나 정치적 해결을 충분히 검토한 뒤, 공익소송 여부를 신중히 정해야 한다. 공익소송은 꼭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다. ▶민변 공익소송위원회를 소개해 달라. -1990년대 후반 민변 활동을 인권변론에서 공익소송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결의에 따라 만들었다.30여명의 위원들이 있다. 현재 중소기업 하도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팀이 활동 중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공익소송 사회를 바꾸지만 걸림돌 만만찮아

    공익소송 사회를 바꾸지만 걸림돌 만만찮아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방침에 반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이 추진 중인 ‘협상무효 고시무효를 위한 국민소송’은 공익소송이다.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 효력정지가처분 소송에 동의한 청구인단은 10만명을 넘었다. 민변은 5일 예정대로 헌법소원을 하기로 했다. 정부에서 미국에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출 중단을 요청했으나 중대한 사정변경 사항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은 고시연기로 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는 공익소송을 살펴본다. 공익소송이란 청소년이나 여성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불평등 해소와 인권보호 등 공익적 목적을 위한 소송이다. 같은 사건의 다른 피해자나 유사한 사건에 그대로 적용되며 정부 정책을 바꾸는 효과도 있다. 2000년 결성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등이 위헌소송 제기 등 공익소송을 통해 2005년 5월 민법 개정으로 호주제가 폐지되고 2008년부터는 호적등본제도가 가족등록부로 대치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민변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기 위해 추진 중인 위헌소송도 그 결과에 따라 커다란 파장이 예상된다. 공익소송은 시민단체와 전문가가 결합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강신하 변호사는 “공익소송은 법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단체 주도로, 제도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변호사와 전문가 등이 결합한 형태로 제기된다.”고 말했다. 공익소송은 민변과 공익로펌인 공감이 주로 맡고 있다. 시민단체로는 참여연대,YMCA,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시민모임, 녹색소비자연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어려움 많아…“집단소송제 도입해야” 공익소송 활성화에 장애요인도 적지않다. 전문가들은 소송을 위한 원천정보 확보, 대규모 소송인단 모집과 정리, 재정확보와 소송기간 등을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지적한다. 최영동 변호사(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대구에서 소음피해와 관련한 공익소송을 하려 했지만 소음 정도를 측정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소송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면서 “환경침해나 소비자피해의 경우 피해를 입었다는 건 알아도 구체적인 입증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원은 국가나 기업이 가진 정보에 시민들이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 원고들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년씩 걸리는 소송기간과 그에 따른 비용문제는 고질적인 어려움이다. 추선희 서울YMCA 간사는 “2001년 중·고등학교 교복 가격 담합에 대한 공익소송 당시 원고로 참여한 피해자 3525명의 개인별 데이터를 작성하는 데만 2개월이 걸려 이 기간동안 업무마비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는 소송비용에 대해 “참가인단에게는 인지대 정도만 받고 변호사들의 무보수 자원봉사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헌신에 의존한다.”면서 “공익소송 참여변호사들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하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일부 피해자들이 공익소송에서 승소하면 다른 피해자들은 소장을 그대로 복사해 소송 걸면 승소하는 구조”라면서 “현재로선 앞장서서 공익소송에 나서기 어렵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익소송 활성화 대안으로 집단소송제 도입을 꼽았다. 최 변호사는 이와 관련,“피해자를 일일이 모집하지 않아도 승소판결의 효력이 피해자 전원에 미쳐 공익소송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 간사는 “공익소송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면 기업도 소비자를 더 염두에 두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공익소송 활성화를 위해 원고적격 확대를 주문했다. 그는 “환경소송의 경우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원고 적격을 오염으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은 자로 한정하는데, 이 경우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자는 구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면서 “소송비용을 마련하기 힘든 소액·다수 피해자들의 피해를 구제하려면 소비자단체나 환경단체에게 직접 원고적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가 일률적으로 원고적격 확대에 반대하는건 아니다.”면서 “현재 관련 학자들에게 집단소송제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인데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검토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공익로펌 활성화도 대안으로 강조했다. 그는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면 미국처럼 환경, 에너지 등 전문분야별 공익로펌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 공익로펌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유일하다. ●“법 만능 태도 경계” 공익소송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선 “모든 사회공익활동을 소송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적 공론화를 시킨 다음에 공익소송을 내면 승소 여부와 상관없이 쟁점화가 가능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소송부터 제기했다가 패소하면 운동 자체가 지지부진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9) 대장간의 추억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9) 대장간의 추억

    김홍도의 그림 ‘대장간’이다. 대장간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장간에서 만들어 내던 물건이 사용되는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장간에서 만들었던 물건들은 대개 농업사회에서 쓰던 물건들이다. 호미, 낫, 괭이 등의 농기구가 그렇지 않은가. ●인간적 친밀감 짙게 배어 있는 수공업 대장간은 이따금 티브이 방송에 사라지는 ‘풍물’쯤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 프로그램에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수공업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 수공업이 갖는 인간적인 친밀감이 짙게 배어 있다. 대장간 그림은 이 그림 말고 김득신의 ‘대장간’이 남아 있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본으로 삼은 것일 터이다. 아마 김득신 쪽이 뒤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솜씨로 보자면 나는 역시 김홍도 쪽에 한 표를 던지겠다. 김홍도의 ‘대장간’을 보자. 먼저 그림의 위쪽을 보면, 흙으로 쌓아 올린 화로가 있다. 높이가 어른 키보다 높은 것이 흥미로운데, 요즘은 이런 화로를 볼 수가 없다. 지금의 대장간에서도 이런 방식의 화로는 없을 것이다. 화로의 앞쪽에 화구가 있다. 그 속에 쇳덩이를 넣어 온도를 높인 뒤 꺼내어 두드리는 것이다. 화로 뒤에 고깔을 쓴 소년이 막대기를 잡고 있는데, 풀무질을 하고 있다. 풀무는 바람을 불어 넣어 불을 지피는 데 사용하는 도구다. 손으로 밀고 당기고 하는 손풀무가 있고, 발로 밟는 발풀무가 있다. 이건 손풀무다. 소년이 막대를 아래로 당겼다 놓으면 그때 바람이 화로로 들어간다. 풀무질을 계속해 주어야 화로 속의 온도가 쇠를 달굴 정도로 높아진다. 한 사람이 집게로 달군 쇳덩이를 잡고 있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메질을 한다. 이렇게 치는 도구를 쇠메, 치는 동작을 메질이라 한다.‘메’라고 하면 못 알아들을 사람도 있는데, 찰떡을 만들 때 안반에다 찹쌀밥을 해 놓고 커다란 나무 몽둥이로 내리친다. 그 나무 몽둥이를 떡메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대장간에서는 쇠로 만든 쇠메를 사용한다. 다시 그림을 보면 쇠메 하나는 벌건 쇳덩이를 막 내려치고 있고, 다른 쇠메는 다시 힘껏 치기 위해 먼 곳에서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앉아 있는 대장장이는 집게로 벌건 쇳덩이를 꽉 집고 있다. 벌건 쇳덩이를 손으로 집을 수 없으니, 이 집게 역시 대장간의 필수품이다. 쇳덩이는 쇠메를 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요령껏 돌려야 한다. 사내 앞에는 긴 쇠자루가 있는데, 앞이 꼬부라진 것으로 보아 화로에 재를 긁어내는 물건일 것이다. 불에 불린 쇳덩이가 놓인 곳은 모루다. 쇳덩이를 메질해야 하니 모루 역시 쇠로 만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렇게 해서 메질을 한 뒤 다시 물에 집어넣어 급격히 식히는 담금질을 한다. 담금질과 메질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물건의 형태가 잡히는 것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한 젊은이가 숫돌에 낫을 갈고 있다. 지게가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농사꾼이 분명하다. 대장간은 연장을 새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이처럼 날이 무뎌진 연장을 벼려주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관청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장장이 이 그림은 대장장이가 메질과 담금질을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정작 쇠를 만드는 곳은 아니다. 쇠를 만드는 곳을 야장(冶場)이라 하는데,‘경국대전’ 공전(工典)의 철장조(鐵場條)를 보면, 여러 고을의 철이 나는 곳에는 야장(冶場)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장부를 만들어 공조와 해당 도(道)와 고을에 비치한 뒤, 농한기에 쇠를 만들어 상납하도록 하였다. 국가에서 필요한 쇠를 농민을 동원하여 만들어 바치게 한 것이다. 물론 모든 농민이 쇠를 만드는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쇠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다. 이 사람이 수철장(水鐵匠)이다. 수철은 무쇠다. 처음 야장에서 얻은 쇳덩이를 판장쇠라 하는데, 이 판장쇠를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다양한 물건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쇠는 강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 의하면, 쇠를 처음 불려 광물을 버리고 부어서 기물을 만드는 것을 생철(生鐵), 곧 수철(水鐵)이라고 했다. 수철은 무쇠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경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때리면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녹여서 틀에다 부어 물건을 만든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곧 ‘주물’로 만드는 것이다. 수철을 불리면, 곧 불에 달구어 탄소를 제거하면 숙철(熟鐵·시우쇠)이 된다. 이규경은 불린 쇠를 모두 숙철이나 시우쇠로 말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탄소함량이 0.035∼1.7%인 것은 강철,0.035% 이하인 것은 연철(시우쇠, 순철, 단철)이라고 한다. 연철은 너무 물러 사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가 아는 호미와 괭이 등의 농기구, 칼 창 따위의 무기는 모두 강철로 만든다. 이 그림에서 지금 막 달구어 두드리는 것은 강철이다. 대장장이는 청동기를 사용하면서부터 생겼을 것이다. 청동기를 이어 나온 철기는 인류의 문명을 크게 바꾸어 놓았으니, 대장장이는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예컨대 대장장이 출신의 석탈해가 신라의 네 번째 왕이 되기도 했으니, 대장장이의 위세를 알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조선시대로 오면, 대장장이는 천한 신세가 된다. 그들은 대개 기생이나 무당과 같은 부류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들은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하게 여겨졌다. 지배층은 그들의 기능과 노동을 남김없이 짜냈다. 조선시대의 수공업자로서 일정한 일수를 의무적으로 국가를 위해 노동을 해야 했고, 일을 하지 않는 날은 대신 세금을 바쳤다. 예컨대 대장장이는 서울에서는 공조, 상의원, 군기서, 교서관, 선공감, 내수사, 귀후서 등에, 지방에서는 관찰사영, 병마절도사영, 수군절도사영, 그리고 기타 지방관청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는 무보수로 일을 해야 하였다. 관청에서 일을 하지 않는 날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높은 세금을 내어야만 했으니, 대장장이의 삶이란 고달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후반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즉 대장장이를 비롯한 수공업자들은 관청에 모두 이름을 등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수공업자들로부터 받는 세금 역시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로 대장장이는 국가와 관청의 속박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관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대장장이의 삶이 전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벼락부자가 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장장이의 힘찬 메질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필자가 어릴 때 대장장이는 드물지 않았다. 나는 대장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풍로의 세찬 바람에 괄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쇳덩이를 집어내어 꽝꽝 하고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넋이 빠져라 쳐다보곤 했다. 그 쇳덩이는 이내 칼이 되고 호미가 되었다. 단단한 쇳덩이를 맘대로 주무르는 대장장이가 정말이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도시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군 소재지, 읍 소재지에서 무슨 공작소니 철공소니 하는 이름에서 겨우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대장장이의 힘찬 메질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대장간에서 만들었던 칼과 호미가 기계로 매끈하게 뽑아낸 칼과 호미로 바뀐 것처럼, 사람 역시 그렇게 제품화되지 않았을까. 김광규 시인의 ‘대장간의 유혹’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정말 그렇다. 나는 이미 규격화된 상품이 된 것이다. 다시 대장간을 찾아가 다시 단 한 사람의 나로 단련되고 싶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英베아트리스 공주, 백화점서 ‘알바’ 화제

    영국왕실 서열 5위의 베아트리스(Beatrice)공주가 백화점 아르바이트에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 및 주요 언론은 “베아트리스 공주가 런던에 위치한 명품 백화점인 셀프리지스(Selfridges)에서 일하게 됐다.”면서 그녀의 ‘업무’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지난 7일부터 근무를 시작한 베아트리스는 주로 VIP 고객들의 문의전화를 받는 상담센터의 업무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매장에서 고객들이 물건을 고르는 것을 돕거나 구매상품을 배송하는 업무도 겸하고 있다. 베아트리스는 올 가을 대학에 입학하기 전 남는 시간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경험을 쌓기 위해 백화점에 취직했다. 특히 그녀가 ‘무보수’로 일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변을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 그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며 근무시간에는 유니폼과 굽이 없는 구두를 착용하는 등 일반 사원들과 똑같이 일한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명품 청바지와 구두를 신은 채 백화점 곳곳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그녀는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첫 출근했다.”면서 “매우 즐겁고 편안한 모습으로 무사히 첫날 임무를 마쳤다.”고 전했다. 한편 최근 베아트리스는 ‘일반인’ 미국 남자친구와 함께 캐리비안에서 함께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朴 전 대통령 생가에 관리전담팀

    경북 구미시가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관리 전담팀을 이달 말부터 상주시키기로 했다. 23일 구미시에 따르면 고 김재학 생가보존회장이 박 전 대통령 생가 인근에 살면서 20여년간 무보수로 생가 관리를 맡아왔다. 그러나 지난달 김 회장이 피살된 뒤 마땅한 관리인이 없어 구미시는 임시로 일용직과 공익근무요원을 파견해 관리해 왔다. 박 전 대통령의 생가 소유권은 장조카인 박재홍씨가 갖고 있었으나 1996년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로 이전됐다 2003년 2월20일 시로 넘어왔다. 시는 박 전 대통령의 생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이달 말부터 이곳에 문화예술담당관 산하 박대통령기념사업담당 직원 2명과 공익근무요원 2명을 배치하기로 했다. 시는 주간에는 이들 직원이 고 김 회장이 사용하던 사무실에서 경비나 안내·관리 업무를 맡고, 야간에는 기존처럼 무인경비시스템을 가동해 관리한다고 밝혔다. 시는 휴일이나 야간에는 관리가 취약해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초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어 보완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구미시 황필섭 문화예술담당관은 “그동안 박 전 대통령 서거일인 10월26일과 생일인 11월14일에 추모제와 숭모제가 고 김 회장 주관으로 열렸으나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며 “관련 단체가 많아 논의를 통해 주관 단체를 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생가는 1993년 경북도기념물 86호로 지정됐으며 2672㎡ 부지에 사랑채와 분향소, 관리사, 주차장 등이 있다.구미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방송영화 대결] 김정우 감독 VS 장항준 감독

    [방송영화 대결] 김정우 감독 VS 장항준 감독

    충무로 감독들의 방송행이 활발하다. 장진 감독은 4부작 단편영화 ‘유턴(U-turn)´을 지난 1일부터 케이블채널 OCN에서 발표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은 배우 이병헌과 SBS에서 내년 상반기 방영할 20부작 첩보 드라마 ‘아이리스’를 만든다. ‘인어공주´의 박흥식 감독은 6월 SBS에서 ‘나의 달콤한 도시´를 16부작 미니시리즈로 선보인다. 이번에는 감독 둘이 방송에서 자웅을 겨룬다. 주인공은 ‘라이터를 켜라´ ‘불어라 봄바람´의 장항준(39)감독과 ‘최강로맨스´의 김정우(35) 감독. 격전지는 극장과 TV다. 1차는 17일 전국 롯데시네마 20개관에서,2차는 25일 케이블 영화채널 OCN에서 이뤄진다. 장 감독의 무기는 ‘전투의 매너´ ‘음란한 사회´, 김 감독의 무기는 ‘색다른 동거´ ‘성 발렌타인´이다. 승패의 관건은 얼마나 더 많은 관객·시청자를 끌어들이느냐다. 그러나 사실 두 감독 모두 ‘대결´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나선 이유는 뭘까.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1. 배틀에 나선 이유는 “제작사 대표가 술먹다 제안했는데 술 먹고 하기로 했다가 술깨고 나서 못하겠다고….”(웃음) 장 감독은 농부터 던졌지만 5년간의 공백을 깨는 만큼 제대로 준비해 작품을 내놓을 심산이었다. 방송에서는 열악한 제작비나 짧은 제작기간이 충분히 예측됐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침대’‘쉬리’등 대박영화의 조감독을 맡아온 김감독도 쭈뼛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경쟁을 한다기에 아,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누구 하나 지면 어떡하나. 쪽팔린 거예요. 그래도 한 편이라도 더 만들어보고, 방송의 고화질(HD) 영화 시스템을 배우고 싶어 참여해봤어요.”(김) 2. 마지막 승자는 누가 될까 ‘흥행 부담’에 시달렸던 김 감독은 이미 일가친척에게 엄포를 놓았다.‘일당 100’이라고. 그러나 벌칙만은 소박했다.“제가 이기면 선배가 제 영화에 출연해주셔야 돼요. 물론 무보수로요.”(웃음) 장 감독은 두 손부터 들었다.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 개봉 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맞부딪혔던 그는 이후 ‘경쟁’에는 마음을 비웠단다.“우리 둘이 싸워서 1등,2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저는 관객수가 한 영화의 바로미터라는 것이 늘 딜레마고 불만인 사람이었거든요.” 3. 방송 환경에 맞닥뜨려보니 제작비는 2억 5000만원. 충무로에서는 엄청난 저예산이지만 방송에서는 블록버스터급이다.3개월간 같은 제작진을 공유해가며 네 편의 영화를 번갈아 촬영했으니 제작기간도 턱없이 짧았다. 각각 9∼11회차로 영화를 완성했다. 충무로 제작진들이 들으면 “거짓말!”하고 경악할 횟수. 두 감독은 돈 100만원에 머릿 속에서 상상했던 장면을 지울 때가 제일 안타까웠다고 털어놨다. “이별 장면에서 아련하게 눈이 내렸으면 했어요. 특수효과팀 형한테 ‘눈 준비됐지?’하니까 ‘대여료 100만원 내야 되는데’하더라고요. 몇분 생각하다 접었어요.”(김) 준비 중이던 영화 ‘메이드인홍콩’에서 자동차 추격신 3분에 11억원을 쓸 생각이던 장 감독은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컸다.“차를 50대 파괴하고 200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작업을 하다가 여기 와서 경찰차 한대를 못 빌리고 엑스트라 10명도 못 쓴다니 아, 이게 뭔가 싶었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인드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이었어요.” 4. 충무로의 과거 돌아보다 감독들은 충무로의 과거를 다시 반성하게 됐다고 했다. 투자가 끊기고, 신인들의 입봉이 끊긴 요즘 충무로는 아직도 겨울이다. “다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영화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죠. 누가 캐스팅됐다면 대본도 안 보고 50억원씩 배팅하고, 작가는 골방에 쳐박아놓고 만날 시나리오값은 깎으려 하고요. 이제 관객들이 대본이 중요하다는 걸 먼저 가르쳐 주고 있어요. 요새 투자자들은 대본만 본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부터는 우리 몫이에요.”(김) “앞으로 2∼3년은 이 상황이 지속될 거예요. 일본 핑크영화 전성기 때 극도의 침체기에 접어드니 훌륭한 기성 감독들도 생활고 때문에 벗기는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기존 제작자도 뛰어들고 참신한 신인들도 데뷔하고 영화가 예술성을 갖춰 장르화됐죠. 그래서 불황을 끝낼 시점에는 감독들이 제도권 안으로 다시 진입했어요. 영화 인력이 없다보면 다시는 복구가 안 돼요. 우리도 방송이든 어디로든 일단 살아남아 영화 궤도를 제자리로 돌려놔야죠.”(장)
  • [단독]“지방의원 의정비 상한 추진”

    [단독]“지방의원 의정비 상한 추진”

    지방의회 의원들이 의정비를 과다 인상하지 못하도록 ‘상한선’을 두는 방안이 추진된다. 또 이르면 내년부터 상가와 오피스텔 등 비주거용 건물에 대한 재산세에 ‘시가’가 반영된다.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은 3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자체별 의정비 편차가 확대될 경우 지역간 불균형, 위화감 조성 등이 우려된다.”면서 “의정비 기준 상한선을 제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원 장관은 그러나 “다만 상한선 내에서는 지역여건에 맞춰 합리적인 수준으로 의정비를 자율 결정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의원들은 당초 무보수 명예직으로 회의수당 등만을 받았으나 2006년 의정비가 급여 개념으로 유급화됐으며, 지난해 지방의회들이 의정비를 대폭 인상하면서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이에 행안부는 광역·기초의회 44곳에 의정비 인하를 권고하기도 했지만, 강제력이 없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 장관은 이어 “비주거용 건물 재산세에 시가를 반영하기 위한 연구용역에 착수했으며, 오는 10월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장세훈 강주리기자 shjang@seoul.co.kr
  • 사립 미술관에 전문해설사가 떴다

    전국의 사립 미술관에 ‘미술품 전문해설사’가 등장했다. 최근 사단법인 한국사립미술관협회(회장 노준의 토탈미술관 관장)는 전국 30개 사립미술관을 대상으로 관람객들에게 전시작품을 설명해 주는 미술품 전문해설사를 새로 배치했다. 각 미술관에 한 명씩 배치되는 미술품 전문해설사는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개발하는 작업에 참여한다. 전시현장을 돌며 관람객들에게 육성 해설을 들려주는 등 작품이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큐레이터, 에듀케이터에 이어 미술관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전문인력인 셈.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박선민 사무장은 “사립미술관은 대부분 현대미술을 전시 주제로 다루는데, 정작 미술에 관심이 있어도 웬만한 관객들은 이해 자체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면서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지속적 흥미를 갖도록 해 미술 인구를 늘려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사업의 일환으로 노동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미술품 전문해설사는 무보수 자원봉사 개념의 ‘도슨트’(docent)와는 구분된다. 무보수여서 전문성과 책임감이 떨어지는 도슨트와 달리 이들은 1년 계약 단위로 급여(주 40시간 근무, 월 77만원)를 받고 미술관에 상근한다. “미술계 고학력 미취업자를 비롯해 은퇴 교사, 장기 실업자 등 취업취약 계층을 우대해 뽑았다.”는 게 협회측 귀띔이다. 미술품 전문해설사는 이후 국·공·사립 박물관 등에도 배치될 예정이어서 미술계 전문인력으로 빠르게 뿌리내릴 전망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뉴요크 한복판서 백만장자(百萬長者)의 꿈을

    뉴요크 한복판서 백만장자(百萬長者)의 꿈을

    <뉴요크=김경식(金景植)특파원> 말이 쉬워 1천2백만「달러」지 돈 많은 나라 미국에서도 이 정도의 매상이면 백만장자축에 낀다. 이런 미국에서 10년전 단돈 50「달러」를 가지고 건너온 한 한국청년이 이 기적을 이루어 놓았다. 바로 가발 수출업체인 다나무역의 안인모(安仁模)사장(37). 흑발 전문의 가발업자로 이미 미국선 널리 알려져 「뉴요크」시 한복판 「웨스트」32번가. 밀림처럼 들어선 「빌딩」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앉은 다나무역 「뉴요크」사무소는 흑발(黑髮) 전문의 가발수출업자로 이미 미국안에선 널리 이름나 있다. 「웨스트」32번가 하면 미국 가발시장의 핵심. 미국안에서 소비되는 가발의 50%가 한국산이니 32번가 한복판에 안사장의 사무실이 들어앉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서 흔히 자수성가라고 일컫는 재력(財力)에의 욕망을 미국선 「밀리어네어」(백만장자)의 꿈으로 부른다. 재력이 그 사회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독 큰 미국인지라 백만장자가 되려는 꿈은 청년이면 누구나 한두번쯤 품어보는 꿈. 숱한 세계의 젊은이들이 백만장자의 꿈을 안고 「뉴요크」를 찾아오지만 정작 이 자수성가의 꿈을 이룩한 사람은 미국 전인구의 0.5%도 채 못된다. 더우기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에겐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고작해야 백인의 그늘에서 먹고 살만한 처지가 되면 다행이다. 이런 하늘의 별따기를 안사장은 투지와 「아이디어」로 이루어 놓았다. 안사장이 「뉴요크」에 꿈을 둔 것은 10년전인 1960년. 그해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안사장은 거친 사회에의 첫발을 소위 취직시험이란 관문을 거쳐 내디뎠다. 안사장이 처음 이력서를 내민 직장은 자동차판매를 주로하는 어느 외국인상사. 취직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2,3년 선배를 포함, 모두 1백명에 가까왔다. 그중에서 시험을 거쳐 최종합격된 사람은 단 두명뿐. 물론 안사장도 그 두사람중의 하나였다. 50대1의 험난한 관문을 뚫고 취직은 되었으나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너무도 초라했다. 일을 했으면 당연히 받아야 할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월급밀리기 석달째. 안사장은 회의에 잠겼다. 도미후 먹고 살기도 바빠 아예 공부할 생각은 포기 『이런 취직을 왜 해야하나?』 험한 경쟁을 뚫고 입사했을 때의 꿈은 월급 3개월 체불로 말끔히 사라졌다. 생각끝에 사표를 내기로 했다. 『미국에 가 다시 더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고 사표를 써 집어내던진 것이 취직 6개월째. 그러나 마음먹은 미국가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미국시장에 진출하려는 무역회사가 있어 이회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도미후 무보수로 이 회사의 일을 거들어 준다는 조건으로 도미수속에 필요한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받게 된 것. 60년 겨울. 「트렁크」 한개와 1백「달러」를 가지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주위에서 얼마 돈을 더 보태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1백「달러」이상을 갖고나가는 것은 불법이며 또 귀한 외화를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거절했다. 오직 믿는 구석이 있다면 「뉴요크」 「자마이카」 병원에 석달 먼저 와 「인턴」으로 지내고 있는 아내뿐. 「뉴요크」에 도착, 아내와 만났을땐 호주머니속엔 겨우 50「달러」가 남아 있었다. 공부를 계속할 생각으로 여러 대학에 「스칼라십」을 얻기 위해 편지를 내어보왔다. 그러나 주급 70「달러」인 아내의 월급으론 대학공부는 커녕 먹고 살기도 바빴다. 그래 어느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3백여 사원중 황색인종은 안씨 단 하나뿐. 제법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주위의 질시로 이 직장도 끝. 다음 들어간 것이 어느 한국수출업계의 한 회사. 그러나 결국 「샐러리맨」으로선 아무런 승부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립의 길을 찾았다. 안사장은 밤이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한국에서 원료를 많이 구할 수 있고 또 인건비가 싼 한국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런 안사장 머리에 가발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세계 가발시장은 「유럽」제품이 지배하고 있었고, 일본제품이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할 무렵. 안사장은 우선 일본제품을 사들여 미국시장에 팔아 보았다. 제법 잘 팔려나갔다. 63년 안사장은 「체이스·맨해턴」은행으로 부터 3천「달러」를 융자받아 기술자와 약품을 들고 서울로 돌아와 공장을 차렸다. 첫 제품은 아무래도 「유럽」제품보다는 못했다. 흑인여성에게 알맞은 검은 가발에 착상 그러나 장사는 판로가 제일 큰 문제. 안사장은 이미 「유럽」제품에 정들어 있는 백인여성들 대신 흑인여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성이라면 흑백을 불문하고 아름다와지려는 욕망은 마찬가지. 이런 점에 착안한 안사장은 검은 「세일즈맨」을 써 한국산 검은 가발을 검은 여성들에게 팔았다. 이 판매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첫 해에 벌써 물건이 달려 못 팔 지경. 자신을 얻은 안사장은 서울공장을 신갈로 옮겨 확장했다. 해마다 매상은 3배에서 10배까지 뛰어올랐다. 그간 안사장이 가발 수출한 실적을 살펴보자. 66년엔 6만7천「달러」, 67년엔 67만「달러」, 68년엔 1백만「달러」, 69년엔 4백80만「달러」, 올해는 11월말 현재 1천55만「달러」를 수출했다. 이렇게 보면 한해 수출액의 증가율은 2배에서 10배. 다나무역의 성장율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성장율 뒤에는 『질좋은 상품, 새로운 「디자인」, 그리고 신용만 지키면 가발시장은 튼튼하다』는 안사장의 철학이 숨어 있다. 안사장은 또 『돈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란 신조를 갖고 있다. 외대(外大)재학시절부터 불우아동을 돕는 「등대회」「멤버」이던 안사장은 해마다 시립아동병원의 어린이들에게 구호의 손을 뻗친다. 내년부터는 모교인 외대에 장학기금도 마련할 생각. 1천2백명의 여공을 갖고있는 신갈공장에선 매달 한번씩 YWCA와 공동주최로 교양강좌를 연다. 단순히 봉급받고 일하는 직장이 아니라 다나의 가족을 만드는 것이 노사협조를 위한 지름길이라 믿고 있기 때문. 그래서 여공들의 기숙사는 마치「호텔」과도 같다. 지난 11월30일 제7회 수출의 날에 철탑산업훈장을 탄 안씨의 구호는 『「달러」를 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①간접비의 절약 ②과감한 수출행정의 간소화 ③국내업자끼리의 과당경쟁 지양등이 우선 이루어져야겠다고. 이제 안사장의 꿈은 포화상태인 미국시장을 떠나 「유럽」시장을 꼭 제패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안사장의 포부. 2남1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하다. [선데이서울 71년 신년특대호 제4권 1호 통권 제 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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