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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윤창중 넘어 세금 낭비에도 눈길 돌려야/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열린세상] 윤창중 넘어 세금 낭비에도 눈길 돌려야/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며칠 전부터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이 주요 일간지를 뒤덮고 있다. 그 정도가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고위공무원의 비행에 대한 공분(公憤)도 들어 있을 것이다.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국민적 분노 말이다. 일반인이라고 해서 성추행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위공무원의 경우에는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우리 정서법이고 그것이 맞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피해자가 더 많아서 사실 이보다 더 국민들이 공분을 가질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고위공무원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우리가 낸 세금이 낭비되는 상황이다. 고위공무원은 단순히 정해진 사무를 처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책적인 판단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에서 기업의 임원과 같다. 임원의 판단은 기업의 운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기업의 장래를 좌우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그 의사결정에 따라 사용처가 달라지는 기업자금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중앙행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고위공무원도 같은 처지에 있다. 물론 국회나 지방의회와 같이 그 권한을 견제하는 기관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정책 결정이나 예산 집행은 고위공무원의 영향력이 결정적이다. 이들이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공익적 고려 이외의 다른 사적인 요인으로 판단하게 되면, 이는 곧 우리가 낸 세금이 낭비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책적 판단이 잘못돼 세금이 낭비된 사례는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어렵다. 당장 용인 경전철이나 한강의 새빛둥둥섬, 지방자치단체의 호화청사나 텅 빈 박물관 등 최근 언론에서 문제가 된 것들이 대표적이다. 직접적이지는 않겠지만 용산개발사업만 해도 그 뒤처리에 세금이 얼마나 소요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정책과제를 선정해 지원하는 것이나 창업 같은 분야에 지원하는 것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지원금이 눈먼 돈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필요한 위원회를 운영하거나 전시행정을 펼쳐 헛돈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이 돈 모두가 우리가 낸 세금이기 때문이다. 복지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정책적 판단은 모두 미사여구로 포장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물론 정말로 공익을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공익으로 포장한 것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흔히 하는 말로 “제 돈이면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세금이 지출되는 판단의 적절성을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법적 기준은 사실 이보다 더 엄격하다. 그러나 어차피 구체적인 판단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정도의 기준만 잘 지키더라도 불필요한 세금 낭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렇다고 실패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돈으로 해도 사업이 망할 수 있듯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불운이 닥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당연히 결과가 아니라 의사결정 당시의 사정을 고려한 적절성만 따질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고위공무원의 신중한 판단을 유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책임의식의 함양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다소 억지스럽지만 기업에서 쓰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정책적 판단이 경솔했다면 그 의사결정의 책임이 있는 고위공무원에게 개인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복지부동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반론도 있겠지만 두고 볼 일이다. 세금 낭비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더 높이는 것도 유력한 해결책이다. 세금 낭비는 그 피해가 분산되거나 연기돼 느끼지 못할 뿐 피해가 작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분의 대상으로서 최근 성추행 사건 같은 것보다 더 높은 관심과 보도가 이뤄지는 것이 옳다. 정책 결정자가 누구였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다른 사적인 요인은 없었는지, 결과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지 등의 정보는 만진 부위가 허리인지 엉덩이인지, 누가 귀국을 종용하였는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민의 이익과 관련된다.
  • 朴대통령 “윤창중,그런 인물이었나”

    朴대통령 “윤창중,그런 인물이었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윤창중 성추행 의혹 사태’로 받은 심적 충격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전격 기용 배경이나 성추행 파문에 대한 보고 시점 등도 비교적 소상하게 공개했다. 15일 청와대에서 개최한 언론사 정치부장 초청 만찬에서다. 박 대통령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행한 모두 발언 연설의 중간 부분에 스스로 ‘윤창중 사건’을 언급하면서 “윤 전 대변인이 사실 그렇게 성추행에 연루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을 것”이라며 “불행하고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인사 1호로 윤창중 전 대변인을 전격 기용한 것에 대해 “전문성을 보고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인물이 한번 맡으면 어떻겠느냐 해서 그렇게 절차를 밟았는데도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그럴 때는 참 저도 굉장히 실망스럽고 ‘그런 인물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안타까운 심정도 내비쳤다.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첫 보고 시점에 대해 “이때 받았다, 저때 받았다 하는데 정확한 것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는 날(현지시간 9일) 아침 9시에서 9시 반 사이”라고 못을 박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8일(현지시간) 오후 3시에 워싱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보고를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따라서 피해 여성 인턴이 이 사건을 미국 경찰에 신고한 것이 8일 오전 8시께인 만큼 25시간이 지난 뒤 보고를 받은 셈이다.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땅끝마을서도 예술의전당 공연 즐길 수 있게”

    “땅끝마을서도 예술의전당 공연 즐길 수 있게”

    “땅끝마을 초등학생도 예술의전당 공연을 볼 수 있게 하겠습니다.” 취임 2개월을 맞은 고학찬(66) 예술의전당 신임 사장은 14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향후 추진 사업을 소개했다. 고 사장이 가장 으뜸으로 꼽은 사업은 ‘콘텐츠 영상화 사업’(SAC on Screen)이다. 미국 뉴욕의 메트오페라가 공연 실황을 영상으로 만들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처럼 예술의전당 공연도 녹화해 전국 공연장과 영화관, 학교 등에서 보여주고 이를 통해 지역·계층 간 문화향유 수준의 격차를 줄인다는 복안이다. 고 사장은 “국립발레단, 국립현대무용단 등 상주 단체와 공연 콘텐츠 계약과 저작관 문제를 협의 중”이라면서 “오는 8월부터 8개 작품을 영상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만 70세 이상의 관객들에게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노블 회원제’, 관객이 직접 공연·전시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를 함께 제작하는 ‘관객주도형 기획’ 등도 시행한다. 올해 9월부터 내년 8월까지 진행하는 공연, 전시 가운데 우수 작품을 선정해 수상하는 ‘예술의전당 예술대상’도 새로 만들 계획이다. 추진 사업에 대한 예산 확보는 아직은 숙제로 남았다. 고 사장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계획들에) 찬성했으니 내년 예산에는 반영될 수 있을 것 같다”며 “만약 계획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내년 기자간담회에서 꾸짖어 달라”고 각오를 밝혔다. 취임 당시 불거졌던 ‘코드 인사’ 비판에 대해서는 “열심히 일해 염려를 불식시키겠다”면서 “전임 사장들 중에 작은 소극장이라도 운영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만큼 실무형 사장(윤당아트홀 관장)을 지냈던 장점을 살리겠다”고 답했다.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엉거주춤 끝난 전쟁 이후…추억이 된 기억으로의 여행

    엉거주춤 끝난 전쟁 이후…추억이 된 기억으로의 여행

    학교 역사 시간에 귀동냥으로 배운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사이다나 한 병 마시며 쉬다가 땀을 닦고 다음 행선지로 걸어가던 경주 관광.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첨성대에서는 쌓아 놓은 돌탑에 반 이상 기어올라 가서 사진을 찍었고 불국사 앞의 석가탑에서는 2층 기단부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삼층탑의 맨 상단까지 올라가려고 기를 썼다. 흑백사진이었다. 첨성대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검은 교복 차림으로 60~70명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누렇게 빛바랜 사진. 지금은 상상도 못할 사진이었는데, 마종기(74) 시인은 그때의 추억을 불러왔다.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달 펴냄)에서다. 한국전쟁이 엉거주춤 끝나고 어수선한 1950년대 중반에 그는 고등학생이 됐고, 그해 여름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왕복 기차비와 며칠간의 체류비를 챙겼다고는 했지만, 그 시절에 많지 않은 돈이었을 테니 무전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 역사 시간에 귀동냥으로 배운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사이다나 한 병 마시며 쉬다가 땀을 닦고 다음 행선지로 걸어가던 경주 관광.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첨성대에서는 쌓아 놓은 돌탑에 반 이상 기어올라 가서 사진을 찍었고 불국사 앞의 석가탑에서는 2층 기단부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삼층탑의 맨 상단까지 올라가려고 기를 썼다.’(42쪽)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발원해 지은 불국사 옆에 세운 1200여년 된 석가탑을 17살 마종기는 친구와 함께 ‘공략’하고 있었다. 당시의 행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고적을 어떻게 감상하고 보존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는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면서 서울로 돌아갈 기차표 값마저 다 써버려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고 한탄했다. 아버지에게는 카메라를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카메라는 두 번 다시 찾지 못했다. 경주까지의 왕복 기찻삯이 비쌌고, 개학을 맞아 공부에 쫓기고 의대에 진학하다 보니 그곳에 갈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갔던 친구는 어찌 됐을까.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해 그 대학의 교수가 됐고 대학장을 지냈다. 또한 쇠약했던 조선시대 말기에 우리의 귀중한 고서와 유물을 훔쳐간 유럽 국가들로부터 되찾아 오기 위해 국제모임을 주선하고 우리의 권리를 열변했다. 1950년대 중반 경주에서 저질렀던 부끄러움을 면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시인은 생각했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작고한 백충현 서울대 대학원장이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현대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 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의사 겸 시인으로 지낸 마종기 교수가 이끄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1966년부터는 미국에서 수련의가 되고 재미교포 의사로 살았다. 전쟁으로 피란을 떠났던 마산에서의 기억이나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추억들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살림을 돌봐 주던 24살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던 10살 즈음의 철부지 시인에게 결혼해서 떠나던 그 누나는 “나를 잊지 말아 달라”며 울었다고 했다. 과거는 왜 이리 아름답게 윤색되는 것인지.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윤창중 파문] 尹, 女인턴 찾아가 사건 무마 시도… 경찰 출동하자 호텔 떠나

    [윤창중 파문] 尹, 女인턴 찾아가 사건 무마 시도… 경찰 출동하자 호텔 떠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방미 중이던 지난 8일 오전(현지시간) 자신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한 여성 인턴 직원 A씨에게 찾아가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13일 “윤 전 대변인이 8일 오전 6∼7시쯤 숙소인 워싱턴 페어팩스호텔에 묵고 있던 피해자의 방으로 사과하러 찾아갔으나 피해자가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이번 사건을 처음 폭로한 미주 한인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미시 USA’에는 12일 윤 전 대변인과 최병구 워싱턴 한국문화원 원장이 피해자를 찾아가 대화를 시도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피해자인 A씨의 지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에 따르면 경찰에 성추행 혐의를 신고한 사람은 피해자와 한 방을 쓴 문화원 여직원 C씨이며 피해자는 C씨의 소개로 이번 방미 행사에 인턴으로 참여하게 됐다. C씨는 성추행을 당한 뒤 울고 있는 A씨를 발견하고 상황실의 서기관에게 보고했지만 “행사장에 늦고 여러 차례 행사에 문제를 일으킨 아이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넘어가라”는 식으로 답변하자 화가 난 C씨가 수십분 뒤 사표를 제출하고 피해자와 함께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그 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최 문화원장이 윤 전 대변인을 대동하고 피해자의 방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고 윤 전 대변인은 조찬 행사에 참석했다. 그 시간 경찰이 호텔에 들이닥쳐 조사를 시작했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윤 전 대변인은 호텔로 복귀하지 못하고 짐을 남겨둔 채 덜레스공항으로 달아났다고 글은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 문화원장은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8일 오전 7시 30분쯤 문화원 여직원(C씨)으로부터 (성추행 혐의를) 들은 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바로 청와대 선임행정관과 함께 피해자 방에 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면서 “윤 전 대변인과 함께 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여직원(C씨)이 7시 30분 사건을 보고할 때 ‘경찰에 신고하겠다. 앞으로 문화원에 안 나오겠다’고 말했다”면서 “신고하겠다고 한 이상 다시 (피해자 측과) 접촉하면 안 될 것 같아 더 이상 접촉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한편 윤 전 대변인은 성추행 당일 A씨에게 “오늘 내 생일인데 아무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며 술자리 합석을 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다문화 사회’의 뿌리는 교육] 학교에선 놀림 받고 놀이터선 ‘왕따’… 학원 가는 건 꿈도 못 꿔

    [‘다문화 사회’의 뿌리는 교육] 학교에선 놀림 받고 놀이터선 ‘왕따’… 학원 가는 건 꿈도 못 꿔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던 우리나라의 다문화 문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문화적 갈등에다 언어 소통 부족 등에 따른 다문화가정의 자녀 문제는 정부가 챙겨야 할 중요 현안이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에 정체성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다문화가정 자녀의 하루 일과를 통해 다문화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려 본다. 서울시교육청과 다문화 청소년들의 국내 정착을 지원하는 비영리 재단법인 무지개청소년센터의 도움을 받아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한국에서 겪는 일들을 꽌 떰의 하루 일과로 재구성했다. 꽌 떰은 베트남어로 ‘관심’이라는 뜻이다.    ‘씬짜오’(베트남어로 안녕이라는 뜻).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인 꽌 떰이라고 해. 나는 3살에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어. 베트남에 아빠도 있었지만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어. 대신에 지금은 한국인 새아빠가 계셔. 엄마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안 하지만 나는 나랑 피부색도 다르고 엄마도 다른 동생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난 신경 안 써.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이제는 한두 번 듣는 얘기도 아닌데 뭐. 엄마는 나한테 버릇처럼 말씀하셔.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런데 나는 모르겠어. 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이렇게 해서 내가 진짜 위인들처럼 될 수 있을까. 내 하루 일과를 볼래?  AM 8:00 눈을 떠 보면 8시야. 엄마, 아빠는 두 분 다 벌써 공장으로 가셨지. 혼자 밥 먹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 3학년 때까지는 나도 동생처럼 ‘아침 돌봄 교실’이란 데를 갔어. 나처럼 부모님이 이른 시간에 일을 나가셔서 일찍 학교에 온 아이들이 선생님이랑 간식도 먹고 책도 읽고 하는 곳이야. 거기서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있는 거지.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 못 가. 난 벌써 6학년이니까. 거긴 저학년들만 가는 곳이거든.  AM 9:00 학교에 가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밥은 어떻게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서 좋아. 귀찮은 게 있다면 반 친구 녀석들이야. 1학년 때부터 봐서 익숙할 것도 같은데 얘들은 아직 날 놀려. 조금 어두운 피부색, 다른 생김새, 어눌한 말투로 놀리는 것도 아니야. 애들은 그냥 날 “야 다문화”, 이런 식으로 놀려.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말이야. 나도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상관 안 해. 아는 다문화 형들 중에는 이런 게 싫어서 다문화 형·누나들만 모이는 기술학교로 전학을 간 형들도 있어. 난 그러지는 않을 거야.  PM 3:00 학교가 끝나고 나면 사실 나도 좀 우울해져. 다른 아이들은 이때가 가장 좋대. 방과후 특기 적성 교육이라고 해서 바이올린도 배우고, 승마도 배우고 그러거든. 우리 부모님 형편을 보건대 그런 건 어림도 없지. 어릴 때는 나도 가끔 엄마랑 구청 다문화센터 같은 데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갔었어. 그런데 엄마가 일을 나가시면서 거기도 못 가게 됐지. 어린 초등학생 혼자서는 갈 수 없거든. 대신 나는 ‘오후 돌봄 교실’로 가. 오후에는 방과후 교육을 받는다고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6학년이지만 돌봄 교실에 갈 수가 있거든. 여기서 학교 숙제도 하고 선생님이랑 책도 읽고 그러지. 안 지겹냐고? 어쩔 수 없잖아.  PM 5:00 이때는 나도 힘이 완전히 빠져. 아무도 날 돌봐줄 사람이 없거든. 저학년 때는 밤 9시까지 ‘저녁 돌봄 교실’이란 데를 갔어. 거기서 저녁도 먹고 책도 읽고 그랬지. 그런데 이제 나도 6학년이니까 거기 가기는 힘들어. 다른 친구들은 학원 가기에 바쁠 때잖아. 사실 나도 컴퓨터도 배우고 싶고 한국인답게 태권도도 하고 싶어. 그렇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잖아. 그냥 난 집으로 가. 놀이터에 가도 아이들도 없고 어차피 피부색이 다른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거든. 엄마가 중국에서 온 애들은 그걸 꼭꼭 숨기고 같이 놀기도 한다더라고. 어차피 다 들통 날 텐데 말이야. 다른 다문화 형들은 딴 친구들 학원 다닐 때 끼리끼리 어울려서 괜히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해. 나는 그러기는 싫어. 엄마도 그랬어. 그러다가는 한국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고. 그럴 바에는 집에 가는 게 나아. 이제 책이나 봐야지, 엄마가 오실 때까지 말이야.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향토기업 특선] 이상업 회장 “경기불황 돌파구 美洲진출 추진”

    [향토기업 특선] 이상업 회장 “경기불황 돌파구 美洲진출 추진”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경기불황 등 예상치 못한 악재가 많아요. 어려울수록 기술 경쟁력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상업(71) 일진에너지 회장은 12일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쌓은 기술이 기업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회사를 창업한 지 23년 만에 기계장치 분야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 회장은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 없이는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면서 “직원들의 전문성을 높이려고 다양한 연구개발과 교육을 하고, 인재영입과 기업연구소 설립 등에 아낌없이 투자한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으로 일진에너지는 현재 13개의 특허와 12개의 실용신안, 2개의 품질인증서를 획득, 국내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일진에너지가 화공기기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출발해 원자력사업과 발전소 경상정비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우리 회사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차세대 에너지로 뜨는 셰일가스의 장치 제작 분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 원자로 등 에너지사업뿐 아니라 원전과 발전소 등 국가 장치산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의 여파로 상당수 중소·중견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울러 그는 “회사가 울산을 기반으로 성장해 향토기업의 책무도 있다”면서 “우리 회사가 지역경제의 동반 성장과 지역의 인재를 우선 채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품질’과 ‘납기’를 생명처럼 여긴다. 그는 “이를 지키지 못하면 고객사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술력은 한국형 원자로인 스마트 원자로 연구개발 사업 참여로 입증되기도 했다. 이 회장의 연구개발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기업 부설연구소 설립에 이어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소 부지 확보에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 회장은 경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주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미주지역 대형 EPC업체(설계·구매·시공업체)에 신규 벤더로 등록하는 등 준비작업도 마쳤다”고 밝혔다. 그는 “울산시와 지역사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진에너지도 없었다”며 “지역사회 환원사업도 꾸준히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어제와 오늘, 한국과 일본… 열린 마당에서 경계 허물다

    어제와 오늘, 한국과 일본… 열린 마당에서 경계 허물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 신국립극장 중극장.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건 한국의 것인가, 일본의 것인가, 자꾸 정체성의 잣대를 들이대려 했다. 하지만 극이 흐를수록 그런 재단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배우의 입에서 어떤 언어가 튀어나오든, 어떤 유형의 몸짓을 보여주든, 결국 모든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 예술의전당과 신국립극장이 함께 제작한 연극 ‘아시아 온천’은 큰 틀에서 보면 마당놀이에 가깝다. 무대는 열려 있다. 무대 안쪽에 사탕수수 몇 그루가 서있고, 그 뒤에 조명탑이 놓였다. 안쪽 벽에는 바다와 맞닿은 하늘이 있다. 무대 좌우에는 배우들이 대기하는 의자, 의상이 빼곡히 걸린 옷걸이, 연주 공간이 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없다. 배우들은 극중 이야기를 하면서도 중간중간 관객에게 눈을 맞추며 농담을 던지고 바나나와 견과류 등 음식물을 나누어 준다.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의 희곡에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의 묘를 넣은 ‘아시아 온천’에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시도가 녹아 있다. 일단 시대적 배경과 국가가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어제도’라는 섬이 상징이다. ‘어제’라면 과거의 얘기인가 싶은데, 인물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은/ 호랑이가 담배통으로 담배를 핀 어제의 얘기냐/ 호랑이가 전철로 회사로 간 내일의 얘기냐/ 에누에누야 에야누야누 오교차/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아시아 어딘가에 놓인 이 섬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면서 극이 시작된다. 높은 천장에서부터 드리워 놓은 하얀 천 줄기들을 중심으로 음식을 차리고 절을 올리고 있다. “조상께 올리는 음식이 이렇게 초라하냐”면서 역정을 내는 ‘대지’에게 노년의 여인 ‘후유’, 섬에 온천을 개발하고 리조트를 지으려는 형제 ‘가케루’와 ‘아유무’가 찾아온다. 가문 대대로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면서 “내 조상의 피와 땀과 영혼이 가득한 이 땅”에 살아온 대지에게 이들의 존재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대지와 가케루가 대립하는 가운데 대지의 딸 ‘종달이’와 아유무가 사랑에 빠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아유무를 협박하려고 부른 자리에서 실수로 아유무가 죽고, 종달이도 자결한다. 대지는 종달이를 먼저 보낸 죄책감에, 가케루는 동생을 잃은 분노에, 마을을 지키려는 책임감과 이 와중에도 한몫 잡으려는 욕심에, 사람들은 싸우고 상처받는다. 그러나 어떤 갈등이라도 해소의 방법은 있다.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는 거다. 정의신 작가가 ‘야끼니꾸 드래곤’, ‘나에게 불의 전차를’ 등 전작에서 한국과 일본의 아픈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냈던 터라 이 역시 양국의 이야기인가 하며 빗대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연극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연극은 사이사이에 동물 가면을 쓴 무도회가 열리기도 하고, 일본의 만담이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천도재를 올리기도 한다. 대사도 한국말과 일본말이 뒤섞인다. “열린 연극”을 강조한 손 감독은 이 부분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관객의 국적, 개인적 경험 등에 따라 자유롭게 읽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국립극장의 미야타 게이코 연극 부문 예술감독은 이번 작업에 대해 “다름을 발견하고, 차이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소 무리하게 양국의 색을 입힌 듯한 모습도 있다. 온천을 발견해 돈을 벌려는 꿈에 부풀어 삽질을 해대는 ‘우시조’, ‘우마조’, ‘도조’의 만담이나 리어카를 끌고 이야기를 관망하는 ‘병아리’와 ‘원숭이’의 대화가 그렇다. 비장미가 흐르는 이야기에 웃음을 이끌어내는 장면이지만 완전히 녹아들지 못해 흐름을 뚝뚝 끊는다. 800여석을 메운 관객들 반응은 흥미로웠다.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배우들을 따라 박수를 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사실주의 연극에 익숙한 일본 관객들에게 파격적인 ‘열린 연극’ 무대는 낯설어 보였다. ‘아시아 온천’은 26일까지 신국립극장 중극장에서 개관 15주년 기념 ‘위드’(WITH) 시리즈로 공연한 뒤 새달 10~1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관객을 만난다. 김진태, 서상원, 정태화, 가쓰무라 마사노부, 성하, 우메자와 마사요 등 한·일 배우들이 양국에서 모두 출연한다. 도쿄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기자회견 전문

    먼저 제가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국민 여러분과 박근혜 대통령님께 거듭 용서를 빌며 머리 숙여 깊은 사죄드린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해명을 지체한 이유는 대통령의 방미가 계속됐고 일단 민정수석실에 조사를 받는 등 적법한 절차를 밟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부터 오직 진실만을 밝히고 법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 먼저 여자 가이드와 함께 한 배경을 말씀드리겠다. 5월6일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유엔 본부 환담을 마치고 환담 내용을 비행기 안에서 황급히 정리해 그 내용을 정리하고 저는 대통령 일행과 한국 참전용사 기념비 헌화일정을 마치고 부리나케 영빈관에 도착, 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프레스센터로 직행해야 하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에서 저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영빈관 앞에서 40여분을 기다린 끝에 제게 제공되는 차와 여자 가이드와 만나게 됐다. 그래서 제가 여자 가이드에게 단호하게 질책을 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프레스센터로 직행해서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고 곧바로 워싱턴 동포 간담회에 참석하려면 시간이 촉박한데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제가 단호하게 질책을 했다. 그래서 영빈관에 도착해서도 제가 어디에 앉을 자리, 제가 앉을 자리도 알지 못하고 너무나 매끄럽지 못하게 저를 가이드했고, 다음날에도 일정에 대해서 저보다도 모르고 일정에 제대로 출발시간과 차량을 대기시키지 못하는 잘못을 여러 차례 할 때마다 제가 단호하게 꾸짖었다. 도대체 누가 가이드냐고 제가 여러 차례 질책을 했다. 그런데 일정을 마치고 정상회담 일정을 마친 뒤에 제가 백악관에서 나왔는데도 또 차가 보이지 않아 또 질책을 했다. 그러다가 저녁에 한미 동맹 6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해서 9시10분쯤 나왔는데 또 가이드와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도대체 누가 가이드란 말이냐 라고 혼을 낸 다음에 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제가 많은 생각을 했다. ‘교포 학생인데 또 나이도 제 딸과 같은 제 딸 정도 나이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가 너무 교포를 상대로 심하게 꾸짖었는가’라는 자책이 들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욕설을 하거나 심한 표현을 사용한 적은 저는 없다. 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차 안에서 기사와 가이드, 앞에 기사가 있고 그 옆에 가이드가 앉는데 그 두 사람을 향해 제가 “여기서 프레스센터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라면서 중간에 가서 “우리가 워싱턴에서 마지막이니 내가 위로하는 뜻에서 술 한 잔을 사겠다” 그랬더니 장소를 놓고 말하니까 가이드가 워싱턴 호텔 맨 꼭대기에 좋은 바가 있다고 해서 그러면 거기 가는데 잠깐 있어야 한다. 순간 드는 생각이 ‘여성 가이드이기에 운전기사를 동석시켜야겠다’고 생각해서 기사 데리고 가이드와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메뉴판 보니 가격이 너무 비싸서 여기는 안되겠다고 해서 지하 1층 허름한 바에 도착해서 거기서 30분 동안 아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제가 거기서 어떤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제가 여기 앉았고 이 테이블이 상당히 길었다. 그 맞은편에 그 가이드가 앉았고 제 오른편에 운전기사가 앉았다. 제가 어떻게 그 여성을 성추행 할 수 있겠느냐. 운전기사가 있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성추행 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 앞에서 폭언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다가 30여분간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야말로 한국인과 교포 또 운전기사도 교포였다. 좋은 시간 보내다가 나오면서 제가 여자가이드의 허리를 툭 한차례 치면서 툭 한차례 치면서 “앞으로 잘해. 미국에서 열심히 살고 성공해” 이렇게 말을 하고 나온 게 전부였다. 돌이켜보건대 제가 미국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생각에 저는 깊이 반성하고 있다. 그 가이드에게 이 자리에서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겠다. 저는 그게 격려하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그런 자리를 가졌고, 또한 그 여성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 잘해 미국에서 잘해서 성공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제스처였는데 그것을 달리 받아들였다면 깊이 반성하고 위로를 보낸다. 저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처음부터 저는 그 가이드에 대해서 어떤 성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성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저는 윤창중 이름 세 자를 걸고 맹세하는 바다. 다음에 제가 가이드를 제 방으로 불렀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는데,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제 확인도 하지 않고, 이랬다더라, 또 제 가이드의 직접적인 말을 듣지 않고 인터넷 상에 나온 것을 언론에서 무차별하게 보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깊은 유감을 표하고 법적 대응을 강구하겠다. 제가 가이드를 방으로 불렀다는 것은 기자들이 78명이 있고 청와대 실무 수행원들이 있고 워싱턴 주재 한국 문화원 직원들이 있는 그 호텔에 머물고 있는 제가 가이드를 제 방으로 불렀을 리가 있겠느냐. 어떤 경우가 있었냐면 첫날 아침을 먹는데 그 식당에 도착해보니 아침 식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 가이드에게 “식권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제 방에 있는 봉투에 식권이 있다는 거다. 저는 또한 바로 일정에 들어가야 하기에 제가 “그러면 빨리 가서 가져와라”라면서 그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식권을 가져왔는데, 다시 식당 직원 얘기가 “식권이 필요없다”고 해서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식사하는데 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춘추관 여직원들이 있었고 기자 3명도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 나왔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워싱턴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제가 제 숙소에 돌아올 때 내일 일정이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내일 일정은 한국 경제인 수행단과의 조찬이었다. 너무 너무 중요하니까 아침에 모닝콜을 잊지 말고 넣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저는 약간 일찍 일어나서 제가 이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노크소리 듣고 순간 ‘아, 이게 무슨 긴급하게 브리핑을 해야 하는 자료를 갖다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 제 가이드가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면서 황급히 제가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왜 그랬냐면 전날에 정상회담을 아침 7시에 브리핑하는데도 청와대 직원이 그 브리핑 자료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왜 나를 깨우지 않았느냐. 그것을 내가 1초라고 빨리 받아서 그걸 다시 정리하고 보충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누구세요” 하면서 동시에 문을 열었더니 가이드였다. 그래서 “여기 왜 왔어? 빨리 가”하면서 닫았다. 제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 들어왔다는 어떤 주장을 계속 언론이 보도하면서 저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너무도 억측기사가 많이 나가서 저는 정말 억울하다. 그리고 제가 제 방으로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욕설을 퍼부었다는 보도가 이는데 저는 정말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할 인간도 아니고 제가 감히 상습적으로 제 방으로 그 여자를 불러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제 상식과 도덕성으로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명백히 말한다. CCTV로 확인 가능한 내용임을 말한다. 제가 야반도주하듯이 워싱턴을 빠져나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날 제가 대통령 일정에 참여해서 따라가면서 가야하기에 가방이 두 개였다. 하나는 좀 큰 핸드캐리어, 하나는 들고 다니는 것인데 두개를 방에 놓고 청와대 행정직원이 조금 큰 핸드캐리어는 대통령 전용기에 제가 없는 사이 집어넣고 다른 것은 다른 직원이 들고 대통령 전용기 가서 전달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가방을 챙기지도 않고 도망나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가 어떻게 해서 워싱턴에서 출발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제가 경제인 조찬 행사를 마치고 수행원 차량을 타고 오는데 이남기 홍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남기 홍보수석이 제게 “할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제가 이남기 수석을 영빈관에서 만났더니 “재수가 없게 됐다. 성 희롱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봐야 납득이 되지 않으니 빨리 워싱턴을 떠나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남기 수석에게 “제가 잘못이 없는데, 왜 제가 일정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해명을 해도 이 자리에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잠시 후 이남기 수석이 제게 “1시 반 비행기를 예약해놨으니 핸드캐리어 짐을 찾아서 내가 머물고 있는 윌러드 호텔에서 가방을 받아서 나가라”했다. 이남기 홍보수석은 저에게 직책상으로 상관이다. 그래서 저는 지시를 받고, 달라스 공항에 도착해서 제 카드로 비행기 좌석표를 제가 사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던 것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제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향하던 중 민정수석실로부터 전화가 와서 조사를 받아야겠다고 해서 지금 말씀드린 내용 전체를 제가 진술을 했다. 그리고 뉴욕발 기사에서 제가 뉴욕에 있던 가이드에게도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이것 또한 완전히 사실무근이다. 뉴욕에서 1박을 했고,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청와대 출입기자 78명, 청와대 수행요원, 실무수행요원, 뉴욕주재 한국 문화원 직원이 있는 곳에서 제가 여자 가이드에게 술을 하자고 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다음날 행사가 있기에 제가 일찍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잠이 들었다. 깨보니까 시차가 있어서 1시 좀 넘었다. 제가 뒤척이다가 ‘안되겠다, 어디 바 같은 곳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올라오면 술로 시차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해서 2층에 있는 프레스센터 어슬렁거리는데 뉴욕 주재 문화원 직원에게 “여기 혹시 바가 있느냐” 했더니 닫혔다고 그래서 “술 같은 게 없느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오는 기자들이 혹시 밤에 그런 잠이 안 올 경우에 대비해서 술을 요청할지 모르니 술을 준비했다” 그래서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비닐팩 소주와 과자 부스러기를 줬다. 그래서 이걸 들고 가서 먹을까 하다가 거기에 청와대 홍보실이라는 회의실이 있었다. 거기서 찬물에 나중에 물어보니까 진저에일이 있다고 해서 그걸 희석시키고 마시고 올라와서 잔 게 전부다. 그런데 이것이 제가 여자 인턴에게 뉴욕에서 술을 하자고 했다 마치 상습범인 것처럼 저를 마녀사냥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는 법적 대응을 취하도록 하겠다. 경위야 어찌됐든 저의 물의에 대해 상심하고 계시거나 마음 상해하시는 국민 여러분께 거듭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에 누를 끼친 것, 깊이 사죄드린다. 앞으로 저는 제 양심과 도덕상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갖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 감사하다. 정리 온라인뉴스팀 iseoul@seoul.co.kr
  • [책꽂이]

    마흔, 고전에게 인생을 묻다(이경주·우경임 지음, 글담 펴냄) 기자로 바쁜 삶을 꾸리다 훌쩍 해외 연수를 떠난 부부가 있다. 마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성찰의 결과물은 의외로 단순하다. 마흔 즈음의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은 고전 스물네 편을 엄선했다. 삶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건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한 마음의 중심찾기라고 고백한다. 고전을 통해 삶의 본질과 마주할 용기를 얻었고, 고전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문구들은 삶의 훌륭한 길잡이가 됐다고 말한다. 1만 3800원. 모든 순간의 인문학(한귀은 지음, 한빛비즈 펴냄) 경상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가 ‘여인의 향기’ ‘홍당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등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인문학적 감성을 길어올려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인 사랑, 이별, 관계, 상처 등 소소하고 사적이지만 중요한 삶의 순간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1만 4000원. 빌딩블로그(제프 마노 지음, 김아연·이혜인·허대영 옮김, 나무도시 펴냄) 미국 인기 온라인 사이트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건물’ 자체보다 ‘짓기’에 주목한다. 사람은 늘 무언가 만들고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축적 상상, 지하 세계, 날씨와 기후 등 다양한 분야를 넘다든다. 그래서 건물뿐 아니라 심지어 가상의 온라인 세계에 지어지는 모든 곳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2만 2000원.
  • “서민들은 카드론이 빚인지도 잘 몰라”

    “서민들은 카드론이 빚인지도 잘 몰라”

    “돈 많은 고객과 돈 없는 고객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의심이 많다’는 겁니다” 지난 9일 오후 5시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 전직 지점장 6명이 모였다. 이들은 서울·경기 지역 희망금융플라자에서 서민금융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지점장 시절 극소수 상류층 고객(VVIP)만 상대했던 이들은 지금은 다중채무자나 저신용자들의 ‘부채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 여러 저축은행에서 받은 신용대출 2900만원, 카드론 700만원, 현금서비스 1000만원, 주택담보대출 8700만원 등 총 1억 16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A씨만 해도 그렇다. A씨는 매달 이자만 70만원(연 34~39%)씩 내고 있었다. 상담을 통해 바꿔드림론과 햇살론으로 ‘갈아탈’ 수 있게 도와줬다. 이자가 월 20만원대(연 7.45~10.5%)로 줄었다. 상담사들은 자신이 겪은 사례 등을 이야기하면서 상담 노하우 등을 나눴다. 서울 신설동지점의 장기목 상담사는 “부자들은 ‘거액을 맡겨도 되나’ 하고 불안해하고, 서민들은 ‘빚 이야기를 해도 되나. 진짜 도움을 주려나’ 하고 주저한다”며 ‘같지만 다른 의심’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또 “서민들 대다수가 자기가 빌린 돈이 얼마인지, 이자는 얼마인지, 일시납인지 분할납인지 등 기본적인 것을 너무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앞의 A씨만 해도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가 빚에 포함되는지 몰랐다”고 한다. 용산지점에서 일하는 조철민 상담사는 “온라인에 상담 신청이 들어와 있어 전화를 걸면 아무도 받지 않는다. 빚 갚으라는 독촉 전화로 오해하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소득 증빙이 안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햇살론 등을 이용하려면 최소 3개월 이상 된 소득증빙서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영등포2가 지점의 허은숙 상담사는 “일용직뿐만 아니라 일부 학원 강사 등 생각보다 소득증빙서류를 떼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 많아 놀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을 향한 ‘제안’도 나왔다. 자꾸 뭔가 새로운 서민 금융 상품을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나와 있는 상품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다. 국민행복기금도 신청자격이 까다로워 혜택을 보는 서민이 적다고 아쉬워했다. 신설동지점의 이무홍 상담사는 “대부분의 채무자가 현금서비스로 맨 처음 빚을 지게 되는데 현금서비스는 바꿔드림론이나 햇살론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면서 이런 사각지대를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무턱대고 대출 중개인(브로커)을 믿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용산지점 조병혁 상담사는 “서민 연체채무자의 대부분은 브로커를 통해 빚을 얻은 경우”라면서 “일단 고금리 대출을 쓰고 3개월 뒤에 햇살론으로 바꾸면 된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더 큰 빚을 떠안은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연체 기록 등으로 전환대출 대상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설명이다. 조 상담사는 “한 푼이 아쉬운 서민들이 중개 수수료(5~10%)까지 떼이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5060세대인 상담사들은 한평생 익힌 노하우를 금융 소외자들을 위해 쓸 수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장기목 상담사는 “아직도 은행 문턱이 높다고 느끼는 저신용자들을 위해 (이런 서비스를)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윤창중 한국행 24시간 숨겼다

    윤창중 대변인의 경질 과정에서 국정 보고시스템에 문제점이 드러났다. 윤 대변인 파문이 박 대통령에게 신속하게 보고돼야 함에도 대통령 주변 참모들의 안이한 판단 착오로 그러지 못했다. 윤 대변인은 8일 오전 8시(현지시간) 수행 경제인 조찬간담회에 참석 후 오후 1시 35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한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자신의 직속상관인 이남기 홍보수석에게 귀국 사실을 알린 것은 오전 10시 전후로 보인다. 미 국무부 측이 최영진 주미대사에게 성추행 범죄 사실을 알린 것은 8일 오후 3시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출발하기 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홍보수석은 9일 오전 10시 LA에서 열린 창조경제리더 간담회 직전 박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즉각 윤 대변인의 경질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윤 대변인이 한국으로 비밀리에 귀국함으로써 사태가 더욱 꼬이게 됐다는 것이다. 윤 대변인의 법적 처리가 한·미 양국 간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통령 전용기에는 침묵이 흘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서울공항에 도착한 13시간 동안 방미 결과 브리핑이나 대통령과의 간담회 등 행사가 일절 없었다. 청와대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춘추관에 남은 기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각 수석들이 번갈아 춘추관을 찾았지만 이날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민정수석실은 전날 오후 나 홀로 귀국한 윤 대변인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무식하단 소리 싫었다”… ‘주훈야독(晝訓夜讀)’ 신화

    “무식하단 소리 싫었다”… ‘주훈야독(晝訓夜讀)’ 신화

    “운동선수라 무식하다는 말이 너무 싫었어요. 수업 시간에 잔다고 욕먹는 것도요. 오기가 생겨 맨 앞자리에 앉아 공부했죠. 유도와 학업 둘 다 잡고 싶어요.” 10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학교에서 만난 ‘공부하는 유도 선수’ 신재용(19·서울대 체육교육과)이 야무지게 입을 열었다. 신군은 전날 강원 양구에서 열린 제18회 전국청소년유도선수권 남자 55㎏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오는 10월 슬로베니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티켓도 손에 넣었다. 그는 “대회 전날이 생일이었는데 스스로에게 가장 기쁜 선물을 준 것 같아요. 체중 감량을 하느라 미역국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요”라며 빙긋 웃었다. 고교 3년 동안 모든 국내 대회를 휩쓸었지만, 대회 전엔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학업과 병행하며 나홀로 운동을 하는 신군이 하루 서너 차례 지독하게 훈련하는 라이벌들과 경쟁이 되겠느냐는 것. 하지만 신군은 보란 듯이 시상대 맨 위에 올랐다. “지난해 전국체전 이후 7개월 만이었어요. 주위에선 체력이 되겠느냐고 수군거렸는데, 전 지고는 못 사니까 꼭 1등할 거라고 이를 악물었죠.” 일반 수시전형으로 지난 3월 서울대에 입학한 후 홀로서기의 연속이었다. 신군은 서울대 유도 동아리에서 기량을 가다듬고 있다. 아마추어들이라 기술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지만, 중량급들과 부대끼며 체력을 길렀다. 월·화·금요일은 수업을 오전으로 몰아넣고 동아리에서 힘을 키웠고, 수·목요일은 강의 빈 시간을 넉넉하게 만들어 수원의 경기체고와 금천구의 문일고를 오가며 훈련했다. 새벽마다 기숙사 운동장을 달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아침 6시 운동장에 가면 아무도 없거든요. 혼자 조깅하고 계단 뛰고 축구 골대에 고무줄 매달아 놓고, 당기고 배밀기하고 땀 흘렸죠. 1등 하려면 체력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신군은 “운동에서 1등한다고 해도 꿈이 엘리트 선수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쩌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선수생명이 끝나는데 그때는 뭐 해 먹고 살아요. 공부 안 하면 취업도 못 하잖아요”라고 했다. 부상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또 금메달을 따도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 스포츠의 현실을 꿰뚫은 것이다.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한 데는 여동생 신유용(18)도 영향을 끼쳤다. 유도대표팀 52㎏급 상비군이었던 동생은 지난해 십자인대가 파열돼 재활 중이라고. 서울대 합격 소식이 전해진 뒤에는 선수들의 문의가 잇따랐다. “모르는 사람들한테 온라인 쪽지가 정말 많이 왔어요. ‘저 어디 학교 누군데요, 성적은 이렇고, 대표경력은 이런데 서울대 갈 수 있을까요?’란 내용요. 이런 선수들이 앞으로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학과 동기 중에는 이정호(야구), 양준혁(수영), 손정화(스노보드) 등 대표급 선수가 수두룩하다. 모두 운동할 시간, 잠잘 시간을 쪼개서 책상 앞에 앉았던 독종들. 신군은 “얘들이랑 서로 자극을 주는 존재 같아요. 정호는 프로선수를 꿈꾸고 준혁이는 아시안게임을 노리고요. 저도 더 열심히 해야죠”라고 했다. 욕심 많은 청년은 당당하게 청사진을 밝혔다.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키우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아직 1학년이라 뭘 몰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요. 당장 목표는 ‘에이뿔’ 받는 거랑 10월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1등 하는 거고요.”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서울광장 사용요금 구역마다 달리낸다

    서울광장 사용요금 구역마다 달리낸다

    집회나 행사 때문에 서울광장을 사용할 때는 구역마다 요금을 달리 내야 한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조례·규칙 심의회를 열어 사용 구역과 시간대별로 요금을 달리 받고 질서·청결을 의무로 규정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 시행규칙 전부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고 10일 밝혔다. 서울광장 사용료는 그동안 ㎡당 한 시간에 10원으로만 규정돼 있었지만 개정안에는 광장 동편·서편·잔디광장·전체 등으로 구역을 나눠 사용료를 달리 책정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두 시간을 기준으로 광장 동편(500∼2000㎡)은 1만∼4만원, 광장 서편(500∼1200㎡)은 1만∼2만 4000원, 잔디광장(500∼6449㎡)은 1만∼12만 8000원, 전체(1만 3207㎡)는 26만 4000원이다. 기본 사용시간은 두 시간이며, 이를 넘으면 한 시간 단위로 사용료를 부과한다. 야간 사용료(오후 6시∼다음 날 오전 6시)는 기본 사용료에 30%를 더하고 시설물의 설치·철거시간도 사용시간에 포함했다. 서울광장 사용자가 지켜야 할 의무도 자세히 명시했다. 개정안은 질서·청결 유지, 영리를 목적으로 한 광고·판매 금지, 안전사고 예방 조치, 음향 사용 기준 준수, 시민 통행을 방해하거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 금지 등을 담고 있다. 또 광장사용신고서를 제출할 때 방문 외에 우편과 이메일로도 할 수 있게 했으며, 접수 부서는 사용 신고를 받고 나서 즉시 열린광장 홈페이지에 신고처리 현황을 공개하도록 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자연과 예술의 땅, 노르웨이

    자연과 예술의 땅, 노르웨이

    호수를 연상시키는 코발트빛 바닷물 위로 우뚝 솟은 ‘피오르’(fjord)의 행렬을 보셨습니까. 1만년간 빙하의 침식을 받아 이뤄진 골짜기에 생긴 좁고 긴 만으로 ‘U’자 모양을 이룹니다. 전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절벽, 기암괴석의 머리에 면사포같이 살포시 덮인 피오르의 하얀 빙하는 죽기 전 꼭 봐야 할, 아니 살아 있기에 마주해야 할 가슴 벅찬 풍광입니다. 북위 60도,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쪽 자락에 자리한 노르웨이는 1967년 북해 유전 발굴 전까지 유럽의 최빈국에 가까웠습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차례로 받고 1905년 가까스로 독립한 뒤 척박한 자연환경과 같은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매장량 세계 5위의 북해 유전은 노르웨이를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 달러를 웃도는 ‘유럽의 사우디’로 바꿔 놓았습니다. 변변찮은 공장 하나 없던 험상궂은 풍광은 그대로 귀중한 관광 자원이 됐답니다.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얼굴이 하얗고 키가 180㎝를 훌쩍 넘는 노르웨이인들은 과연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지만 길을 걷는 시민들 얼굴에선 근심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에드바르 뭉크(1863~1944)나 에드바르 그리그(1843~1907) 같은 걸출한 예술가 덕분이겠죠. 아름다운 피오르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가들은 몽환적인 자연과 함께 여행객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치유합니다. 한순간 당황했다. 잠시라도 호젓한 여유를 즐기려 일행과 떨어져 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게 화근이었다. 오슬로 중앙역에서 탄 34번 버스가 예정된 ‘하겐비’에 정차한 뒤 호기롭게 뒤를 돌아봤으나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뭉크의 ‘절규’의 배경이 된 이케베르그 다리로 향하던 터였다. ‘절규’할 무렵 휴대전화에 ‘+82’로 시작하는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버스 뒷자리에 앉았던 일행이 뒤늦게 현지인 이야기를 듣고는 다급하게 두 정거장 앞에서 하차했다는 설명이다. 역설적이지만 동네 주민 대부분은 이케베르그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짧은 영어로 물어 찾아간 이케베르그 다리. 다리라기보다 언덕배기에 꼭꼭 숨은 구비길에 난간 몇 개 설치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오슬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따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다. 그의 초상화가 1000크로네 지폐에 들어 있을 정도다. 노르웨이 국민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예술가로, 탄생 150주년을 맞아 오슬로 시내 곳곳에 관련 전시회와 음악회 등을 알리는 현수막이 넘쳐났다. 진짜 뭉크는 국립미술관에서 만났다. 국립미술관에 특별전시된 ‘절규’ ‘마돈나’ ‘병든 아이’ ‘병실에서의 죽음’ 등은 불우했던 그의 삶을 통째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소름 끼치던 그의 작품들이 말년으로 갈수록 아이들 동화처럼 포근함을 띤다. 촬영이 금지된 터라 한 시간 넘게 작품 주변만 서성이며 마음속에 담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실 노르웨이의 첫인상은 꺼림칙했다. 10시간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핀란드 헬싱키. 다시 오슬로행 비행기로 갈아탔으나 창가의 내 좌석은 60대 후반 할머니의 차지가 됐다. 자리를 빼앗은 험상궂은 노르웨이인 노파는 한 시간 넘는 비행 시간 내내 앞 좌석 일행과 독일 방언 같은 노르웨이어를 뱉어냈다. 그런데 도착 20여분 전 갑자기 다정하게 영어로 말을 걸어 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2년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부터 방문지가 어디인지, 또 좋은 여행 되길 바란다는 인사까지 아끼지 않는다. 아뿔싸, 그들은 바이킹의 후손이었다. 산 만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인상이지만 속내만은 따스했다. 순간 창가 너머로 활처럼 휜 피오르 위에 세워진 중세 도시, 오슬로의 위엄이 눈에 들어왔다. 오슬로의 번화가는 중앙역에서 왕궁에 이르는 칼 요한 거리다. 불과 1.5㎞ 남짓 거리에 의사당, 대성당, 오슬로대학 등이 몰려 있다. 풍성한 녹지가 부러울 따름이다. 이곳 시청에선 매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다른 시상식은 모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지만 평화상만은 예외란다. 노벨이 당시 스웨덴의 척박한 속국이던 노르웨이에 혜택을 준 것인데, 오늘날 역전된 양국의 처지를 본다면 뭐라 말할지 궁금하다. 밤 10시. 대낮처럼 환한 백야다. 오슬로항에 도열한 요트들을 뒤로하고 해변가 레스토랑에 자리 잡았다. 노르웨이 하면 연어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구나 청어를 즐긴다. 짜디짠 대구 스테이크에 수프와 빵, 맥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영수증에 1인당 500크로네(10만원)가 찍혔다. 일행 누군가가 “뭉크의 ‘절규’는 4월 말에도 초겨울에 버금가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살인적인 물가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피오르 없는 노르웨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창처럼 깊고 날카롭게 해안 깊숙이 파고든 피오르는 이맘때면 산정의 눈 녹은 물이 떨어지면서 만든 크고 작은 폭포들로 장관을 이룬다. 오슬로에서 ‘피오르의 수도’ 베르겐까지는 버스로 5시간가량 걸린다. 베르겐은 1048년까지 노르웨이의 수도였다. 노르웨이 최초의 국립극장, 세계 최초의 교향악단이 자리한다. 중세풍 목조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 브뤼겐이 중심이다. 당시 북유럽 상권을 장악했던 독일 무역상들은 한자(Hansa) 동맹에 따라 이곳에 상관을 짓고 무역을 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보도와 집들로 채워진 어두컴컴한 골목은 현재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이용된다. 브뤼겐 맞은편 어시장, 플뢰위엔 산 전망대로 향하는 열차인 플뢰이바넨을 둘러보고 호젓한 교외로 향했다. 오로지 ‘아이를 많이 낳는 것’과 ‘조국의 독립’이 소원이라던 작곡가 그리그의 사택인 ‘트롤헤우겐’까지는 베르겐 시내에서 차로 10여분 남짓 걸린다. 트롤헤우겐은 북유럽 신화 속 요정 트롤이 사는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그가 1885년부터 22년간 살던 집이다. 그리그는 지금도 아내 니나와 함께 피오르를 바라보는 절벽 중간의 납골묘에 묻혀 오후의 햇살을 만끽 중이다. 피오르를 턱밑에 둔 작업실은 생전에 쓰던 피아노 의자와 책상으로 꽉 차 있다. 현지 가이드는 “키가 150㎝에 불과했던 그리그가 두꺼운 베토벤의 교향곡 악보들을 방석 삼아 작업하곤 했다”고 말했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생가는 손때 묻은 악보부터 편지, 초상화 등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초상화나 사진 속 그리그 부부는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두살배기 외동딸 크리스티나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한다. 피오르는 인구 500명의 소도시 플롬에 이르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산악 열차인 ‘플롬스바나’를 타고 베르겐에서 뮈르달을 거쳐 굽이굽이 20㎞의 산길을 돌자 일순 폭설에 휩싸였다. 해발 800m 안팎의 산간 마을과 잔잔한 하천, 만년설로 흰 모자를 쓴 설산, 거기서 떨어지는 폭포가 번갈아 나타났다. 기차는 기울기가 30도를 넘는 협곡을 따라 20여개의 터널을 지난다. 종착지인 플롬은 해발 1300m에 자리한 송네피오르의 내륙 관광 허브다. 송네피오르는 노르웨이 최장 피오르로 204㎞의 길이와 최고 1300여m의 수심을 자랑한다. 하늘을 향해 첨탑처럼 치솟은 고산준봉, 깊고 장대한 계곡에 들어 앉은 노랗고 빨간 지붕의 통나무집이 매력적이다. 고속도로가 없는 노르웨이에서 국도를 따라 다시 울렌스방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나 내려 카메라 렌즈만 들이대면 한폭의 그림이 됐다. 잠시 머무르는 관광객도 영감과 치유를 얻기에 충분한 ‘힐링로드’인 셈이다. 오슬로·베르겐·플롬·울렌스방·스타방에르 글 사진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도시·농촌 아동방임 실태와 해결방안은

    도시·농촌 아동방임 실태와 해결방안은

    지난 1월 한 어두컴컴한 지하방에서 아사 직전 극적으로 발견된 ‘고양시 세 자매’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KBS 1TV ‘KBS 파노라마’는 가정의 달을 맞아 열악한 환경에 방치된 아동들을 심층 취재한 ‘보이지 않는 아이들’ 2부작을 9일과 16일 밤 10시에 방영한다. 여성가족부의 2010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방임 아동은 약 210만명에 달한다. 제작진은 전국 각지를 돌며 위기에 처해 있는 50여 가구의 아이들을 직접 만났다. 1부에서는 지속된 경제 위기에 방임된 도시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서울역 광장에는 어머니와 함께 노숙하는 4살, 5살 난 아이들이 있다. 주변에는 술병이 널브러져 있고 노숙인들이 유리조각으로 자해하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이지만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 중 아무도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방안에 빈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벽에 곰팡이가 잔뜩 핀 집에는 세 아이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일이 끊겨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아이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의 ‘2011 전국아동학대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아동을 방임하는 행위자의 24.3%가 ‘사회·경제적 스트레스와 고립’ 때문이라고 답했다. 경제위기와 가정의 빈곤, 어른들의 고립감이 아동 방임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여러모로 분석한다. 2부에서는 시골의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을 다룬다. 도시보다 더 많은 아이가 굶는 시골에서 빈곤 아동에게 하루 끼니는 학교 급식이 전부다. 제작진이 만난 한 아이는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우는 동안 지저분한 밥그릇으로 초고추장과 김가루를 반찬 삼아 밥을 먹는다. 시골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방치한 사이 폭력과 성에 무분별하게 노출되기도 한다. 전남 무안의 한 마을에는 아이가 있는 집이 마을의 50가구 중 단 한 가구뿐이다. 이 집의 아이들은 바지를 벗고 동네를 뛰어다니며, 성인방송에서 본 행위를 따라하기도 한다. 부모와 이웃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다. 제작진이 아이들을 상담센터로 데려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아이들은 인지능력이 또래보다 떨어졌고 자존감, 정서, 대인관계 등 여러 영역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애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늘 혼자였던 아이들의 상처는 장애로 나타났다. 제작진은 고립된 시골에서 빈곤의 악순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낼 방안을 모색한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우리금융 회장에 이덕훈·이종휘·이순우 ‘3파전’

    우리금융 회장에 이덕훈·이종휘·이순우 ‘3파전’

    우리금융지주 차기 회장에 총 13명이 도전했다. 유력 후보로 꼽히던 경제관료 출신들이 지원하지 않아 공모는 우리금융 내부 출신의 ‘3파전’으로 압축되는 양상이다. 우리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는 6일 후보 접수를 마감한 결과 이덕훈 키스톤프라이빗에쿼티(PE) 대표, 이종휘 신용회복위원장, 이순우 우리은행장 등 13명이 지원했다고 밝혔다. 세 사람이 가장 앞서 가는 후보군이다. 이 대표와 이 위원장은 우리은행장을 지냈고, 이 행장은 현직 행장이다. 전·현 행장 간의 싸움이 된 셈이다. 우리금융의 전·현 임원들도 가세했다. 김준호 우리금융 부사장과 윤상구 전 우리금융 전무가 출사표를 던졌다. 김은상 전 SC은행 부행장, 류시왕 전 한화투자증권 고문 등 금융권 인사와 조동성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국찬표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등 학계 인사들도 가세했다. 임종룡 전 국무총리실장과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경제관료 출신들은 지원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임 전 실장은 금융위원회가 강력히 밀었으나 이명박 정부 말기 ‘4대강 방어’에 나선 점이 청와대의 거부감을 야기했다는 분석이 있다. KB금융 회장을 노리고 있는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은 우리금융 회장 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공모는 막판까지 치열한 ‘눈치작전’ 속에 진행됐다. 전날까지 아무도 지원하지 않다가 마감 시간인 5시를 한두 시간 앞두고 몰렸다. 우리금융 회추위는 서류심사 후 면접을 거쳐 이달 중순까지 회장 후보를 추천할 예정이다. 예금보험공사가 최대 주주(지분율 57%)여서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10일쯤 청와대, 금융당국 등과 ‘조율’한 뒤 차기 회장을 내정할 것으로 보인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여고생 단체로 외설적 엉덩이 춤췄다가…

    여고생 단체로 외설적 엉덩이 춤췄다가…

    미국에서 수십 명의 고교생이 ‘트월킹’(twerking)이라 불리는 선정적인 엉덩이춤을 추는 자신들의 모습을 인터넷상에 공개했다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외신들은 2일(현지시간) “샌디에이고의 한 고교에 재학 중인 수십 명의 학생이 외설적인 ‘트월킹’ 댄스 영상을 제작해 정학을 받았다.”고 지역지 ‘U-T 샌디에이고’(기존 명칭: 샌디에이고 유니온-트리뷴)를 인용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학생은 지역 명문 공립학교인 스크립스랜치고등학교(SRHS)에 재학 중이며, 이번 사건으로 졸업식과 졸업파티에 참석할 수 없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고교 교육위원회 위원 케빈 바이저는 “학생 31명(여 28명, 남 3명)이 정학을 받았다고 들었다.”면서 “다른 보고로는 이번 주 그 동영상을 촬영한 남학생을 포함해 총 33명의 학생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말했다. 해당 영상은 학교의 한 부지에서 촬영·편집됐다. 공개된 영상에는 엉덩이를 흔드는 춤인 ‘트월킹’ 댄스를 추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레스턴 믹니어(17)라는 이름의 학생은 그 영상의 아이디어를 내놨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했다. 그는 “그 영상은 이미 제작된 지 수개월이 지났으며 그동안 아무도 불쾌해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세상에 희망을, 마음에 행복을’

    불기(佛紀) 2557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가 오는 11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올해 봉축행사의 주제 표어는 ‘세상에 희망을, 마음에 행복을’. 지난달 23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 봉축등 점등에 이어 11일 오후 4시 30분부터 동국대에서 연등행렬과 어울림마당이 일제히 펼쳐진다. 어울림마당에서는 연희단과 율동단의 발표회와 관불, 연등법회가 진행된다. 행렬을 마친 오후 9시 30분쯤 종각사거리에서는 회향한마당이 진행된다. 동대문~종로~조계사 구간 연등행렬에서는 한지로 만든 전승 전통등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행렬에는 외국인 3만 명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튿날인 12일 낮 12시 조계사 앞길에서는 전통문화마당이 열리고 오후 7시부터는 인사동~조계사 앞길에서 연등놀이가 진행된다. 전통문화마당에서는 네팔, 스리랑카, 태국, 타이완, 미얀마, 인도, 몽골 등 10개국 부스가 마련된 ‘국제불교마당’과 피리만들기, 향·연꽃초 만들기, 천연염색 등 체험행사, 사찰음식과 친환경음식 등 ‘먹거리마당’ 등이 펼쳐진다. 한지연꽃 만들기, 탑모형만들기, 선무도, 바라춤 등을 체험하는 ‘나눔마당’, 빈그릇운동, 장애체험 등을 할 수 있는 ‘NGO살거리마당’도 열린다. 한편 10∼19일 조계사·청계천·봉은사에서는 전통등 전시회가 열린다. 봉축법요식은 부처님오신날인 17일 오전 10시 조계사와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봉행된다. 봉축위는 연등회 프로그램 안내서와 봉축행사 준비자료집, 디자인집, 연등회DVD, 음악CD, 부처님오신날·연등회 포스터 등을 각 사찰에 보급하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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