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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필라델피아(미국)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국회의원 수를 89명으로 줄인다면/김상연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국회의원 수를 89명으로 줄인다면/김상연 정치부 차장

    지난해 몇 년 만에 국회 출입기자로 돌아온 이후 확연히 다르게 느끼는 점이 있다. 국회의원들을 의원회관 집무실에서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과거 국회를 취재할 때는 의원들이 평소 적어도 3분의2 이상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의원부터 야심에 찬 차기 대선 주자, 패기만만한 초선 의원,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대통령 아들까지…. 그 ‘따끈따끈한’ 취재원들로부터 차를 얻어 마시며 들은 기삿거리를 떨리는 가슴으로 데스크에 보고하곤 했던 추억이 달큼하다. 반면 지금은 300개에 가까운 의원 방을 돌아다녀 봐도 자리에 있는 의원은 10명 중 1명꼴밖에 안 되는 것 같다. 20여년간 국회 밥을 먹은 보좌관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솔직히 다들 어디서 뭐하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한 의원이 국회 상임위가 열리고 있던 대낮에 모텔방에 있었다는 ‘사건’이 세상을(정확하게는 국민의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의심병이 도진 터에 그런 뉴스를 접하니 불신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증폭된다. 의원회관에서 보이지 않는 의원들이 실상은 죄다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은 무죄라서 무섭다. 직속상관이 없고 고정된 근무처도 없는 국회의원의 근태(勤怠)는 이 땅 모든 직장인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국회에서 안 보이면 지역구에 있다고 하고 지역구에서 안 보이면 국회에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 밑의 보좌관이나 비서에게 행적을 알려줄 의무도 없다. 장차관급 예우를 받는 헌법기관의 근무 동선이 이렇게 견제가 안 되는 것은 삼권분립의 숨은 허점이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국회의원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의원이 너무 많으니 그중 한 명이 대낮에 모텔을 들락거려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의원 몇 명쯤 딴전을 피워도 국회는 그냥저냥 돌아간다. 일찌감치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고희(古稀)의 중진 의원으로부터 며칠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사실 제대로 일하는 의원은 300명 중 10명도 안 될 거야.” 우리가 비교하기 좋아하는 미국의 연방의원 수는 535명(상원 100명+하원 435명)이다. 인구 3억명의 0.000178%다. 미국의 기준을 대입한다면 인구 5000만명인 우리나라의 의원 수는 300명이 아니라 89명이 돼야 한다. 더욱이 미국 의원은 지역구가 우리보다 방대하고 국내 문제뿐 아니라 전(全) 지구적 이슈를 다룬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국회의원보다 업무 난도가 훨씬 높다. 89명도 많은 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의원 수를 늘리자는 얘기가 안 나온다. 미국은 하원의원 수를 인구에 비례해 배정토록 하고 있다. 그런데 영토 확장과 인구 증가로 의원 수가 계속 늘자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하원의원 수를 435명으로 제한하는 법(Reapportionment Act)을 만든 게 1929년이다. 그후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영토가 확장되고 인구도 급증했지만 지금도 의원 수는 그대로다. 반면 얼마 전 어떤 당의 원내대표가 그랬듯이 우리의 국회의원들은 의원 수를 늘리려 호시탐탐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들은 의원 수 인플레이션으로 ‘모텔 의원’이 양산되건 말건 단 한 명도 줄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 글은 쓰나 마나 한 허문(虛文)이 돼 버렸다. carlos@seoul.co.kr
  •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가 처음부터 한국에 가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진홍 교수와 함께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언더우드가 한국행을 결심한 그 회심의 자리인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 필라델피아(미국) 글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고국 밥상 전달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고국 밥상 전달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무한도전 하시마섬’ ‘무한도전’ 멤버 하하가 하시마섬에서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 위치에 분노했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배달의 무도’ 편에서는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시마 섬은 일본 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옥섬’이라고도 불린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일본은 사람들한테 본인들이 한 것에 비해서 너무 아름다운 것만 기억에 남게 하려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을 찾아갔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제작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거의 찾기힘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하는 “이걸 어떻게 찾아”라며 분노를 드러냈고 서경덕 교수와 함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다시 공양탑을 찾았다. 앞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고향 쌀밥과 고깃국을 먹는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하하는 쌀밥과 고깃국을 챙겨 공양탑에 놓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사진=MBC 무한도전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역대 정권 “개혁” 구호만 요란… 각 軍 밥그릇 싸움에 국익 뒷전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역대 정권 “개혁” 구호만 요란… 각 軍 밥그릇 싸움에 국익 뒷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국방부는 ‘자주국방’과 육해공군 균형 발전을 기치로 내세우며 당시 67만여명이던 상비 병력 규모를 50만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국방개혁 2020)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2009년 국방부는 이를 51만 7000명 수준으로 수정했고 다시 ‘국방개혁 기본계획 12-30’(2012년)을 통해 당시 65만명 수준인 상비 병력을 2022년까지 52만 2000명 수준으로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합참의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육군의 패권을 강화하는 것 아니냐는 해·공군 예비역 등의 반대에 부딪혔고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해 좌초됐다. 국방부는 지난해 ‘국방개혁 기본계획 14-30’을 내세워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보류하되 병력 감축 기조를 이어 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올해 4월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현재 63만명 수준인 병력 규모를 (2022년이 아닌) 2030년까지 50여만명 수준으로 감축하겠다고 목표 연도를 연기했다. 군 당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란한 구호를 내세우며 대대적 구조 개혁을 천명했지만 막상 제대로 이뤄진 것은 없다는 평가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정부는 모두 육군의 1·3야전군 사령부를 통합할 것을 예고했지만 현 정부에서도 통합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권 초기에 계획을 작성하는 데 1~2년을 소비하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채 다시 정권이 바뀌면 뜯어고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애초에 재원을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계획, 각 군 이해관계에 따른 밥그릇 싸움과 북한 위협에 대한 달라진 평가 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예비역 장성은 13일 “역대 군 수뇌부가 재임 시에는 군 병력 감축, 상부지휘구조 개편 등 문제에 이상이 없다면서 예산을 받아 썼지만 나중에는 결국 준비가 덜 됐다고 발뺌하며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예산 증가율에 대한 현실성 결여… 개혁 목표 연도는 연기 중국은 군 구조 개혁을 과감하고 일관성 있게 진행하고 있다. 중국군은 1980년대 기존 11개 군구(軍區)를 7개로 축소시키는 개혁을 단행했고 이를 다시 4개 정도로 통폐합할 계획이다. 현재 233만명 수준인 병력도 200만명 수준으로 감축할 방침이다.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육해공군 합성사령부인 군구를 통폐합한다는 것은 지역에 뿌리내린 군의 기득권 축소를 의미한다. 반면 우리 군은 애초 예산에 대한 현실적 고민 없이 개혁 구호를 남발해 공수표만 날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무현 정부는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2020년까지 사용할 국방예산을 621조원, 이명박 정부는 599조원으로 산정했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621조원의 예산은 국방예산 증가율이 꾸준히 9.8%를 유지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만든 것”이라며 “실제 예산 증가율이 3~7%를 왔다 갔다 하는 현실 속에서 2020년은 희망 사항이고 2030년으로 목표가 바뀔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질타했다. 노무현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보장하기 위해 기술 집약형 군 구조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육·해·공 3군의 균형 발전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연기한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육군 병력 감축계획을 수정하고 육군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국방부 21세기 개혁위원회에 참여했던 심동보 예비역 해군 준장은 “해군이 경항공모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송함인 독도함을 구입하려 할 때 육군과 공군은 자기 역할을 뺏긴다고 반대했다”면서 “육군의 대군 중심주의가 병력 감축과 개혁을 가로막는 셈”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태우 정부 시절 8·18 계획(국방개혁)에 참여했던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육해공군 균형 발전을 위해 육군이 담당하던 방공 분야를 공군으로 넘겼지만 해·공군에서는 육군이 독주한다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며 각 군의 알력이 심각함을 시사했다. ●각 군 파워 게임에 상부지휘구조 개편 허사 무엇보다 우리 군의 상부지휘구조는 주요 작전부대에 대한 지휘권(군령)은 합참의장이 갖고 인사·군수 등(군정)은 각 군 참모총장이 쥐고 있는 형태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육해공군이 손발이 맞지 않았다는 지적에 따라 이명박 정부는 군령권자인 합참의장에게도 제한된 군정권을 부여하는 상부지휘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 당시 육군 병력 감축 위주의 개혁안에 육군이 반발했듯이 이명박 정부 들어 합참의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상부지휘구조 개편이 해·공군 출신들에게는 육군의 패권을 강화하는 음모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방부 개혁실장을 맡았던 홍규덕 숙명여대 정외과 교수는 “상부지휘구조를 통합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실제로 전투하는 부대에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할 수 있다고 내다봤지만 해·공군참모총장의 독립적 권한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홍 교수는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 통과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의원들을 설득시키기도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실에서 근무했던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는 “과도한 육군 위주 사고에서 탈피하자는 노무현 정부의 구상과 육군 위주로 합동성을 강화하자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 모두 일리가 있다”면서 “문제는 북한 위협과 우리 군사기술 진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합동성에 대한 충분한 설득 작업 없이 개혁을 시도해 육해공군의 밥그릇 싸움 양상으로 퇴색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개혁의 방향에 따라 무기 구입 등 각 군에 배정되는 예산과 장성 숫자의 향방이 결정되기에 국가 이익보다 각 군 이익이 중시되는 구조가 심화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문제는 지금까지 제시된 국방개혁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다는 점”이라며 “정책을 남발해도 실패한 계획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가 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16살에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허탈한 표정에 시청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16살에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허탈한 표정에 시청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16살에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허탈한 표정에 시청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무한도전’에서 한국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한 곳인 하시마섬을 방문해 눈길을 끈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섬으로 한국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한 곳이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을 찾아갔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제작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거의 찾기힘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분노와 허탈함을 참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사진=MBC 무한도전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백문이불여일행] 미술 문외한의 눈으로 본 앤디 워홀

    [백문이불여일행] 미술 문외한의 눈으로 본 앤디 워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느낀다. 언제부턴가 예술작품을 보고 느낄 때, 배경지식이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의처럼 여겨졌다. 색으로만 채워진 커다란 캔버스화. ‘이런 식(색면화)이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 지나치게 심플하고, 그래서 더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을 가진 그림이었다. 슬픔과 절망의 세상을 숭고한 추상으로 물들인다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 「로스코는 유명한 색면화가다. 현대의 추상 미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정식 미술수업을 거의 받지 않은 로스코는 신화 이야기, 렘브란트, 모짜르트, 니체에 영향을 받았다. 1970년 뉴욕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나니 감상평은 풍성해진다. ‘이런 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첫 느낌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꼬깃하게 접어두었다. 나의 감상은 대체로 모든 이의 감상이다. 生눈으로 본 앤디 워홀 라이브 알록달록 색감이 예쁘다. 톡톡 튀는 색이 한데 모여있는데 촌스럽다는 생각이 안드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형광, 야광색의 컬러가 채도를 달리해 쓰인다. 주변에서 보이는 것들이 그림의 소재다. 바나나, 통조림, 코카콜라병, 입술, 달러 표시…. 같은 그림에 색만 달리한 작품이 연속적으로 모여 있다. 이 소재의 어떤 점에 꽂혀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걸까. 그는 스스로를 보여주고 싶으면서 동시에 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을 그린 그림과 사진이 유독 많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삐죽삐죽 은색 가발, 주근깨가 빼곡하게 박혀있는 창백한 피부, 무슨 옷을 걸쳐도 헐렁할 것 같은 깡그리 마른 몸매에 무심하게 걸친 선글라스와 검은 상의. 마릴린 먼로 그림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위에서 찍은 독사진과 카모플라주로 칠해진 그림을 보며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상해본다. 그림은 화려하고 영화는 단순하다. 평범한 사물을 화려하게 칠했으며, 섹스와 파티를 별다른 연출없이 평범하게 찍었다. 양면적인 부분이 늘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명인들을 더 유명하게 만든 초상화도 그렇다. 하나쯤 벽에 걸려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위트가 묻어있다. 워홀의 손을 거치면 누가 보아도 마릴린 먼로지만, 아무도 본 적 없는 먼로가 된다. 워홀이 그린 유명인 초상화들의 공통점이다. 미술, 음악, 영화, 패션 등 다양한 예술활동을 한 것은 알았지만, 요리책과 어린이책(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좋게 속지를 빳빳한 재질로 만들만큼 세심하게)까지 만들었다. 동물보호문제와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답은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를 그릴 뿐이다.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저 표면만 보면 된다” ① 워홀은 왜, 통조림을 그렸을까 1960년대 워홀은 소비자로서 일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코카콜라병이나 달러 지폐, 그 유명한 캠벨 수프캔 시리즈를 그린 것도 이 때부터다. “지루한 것을 좋아한다. 똑같은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좋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내가 돈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다.” 대량생산되는 대상에 호감을 느끼고, 기계화 과정과 유사한 테크닉을 사용해 만화와 광고에 기반한 팝 회화를 그렸다. “그저 일상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것들을 그릴 때 특별하게 그리려고 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그리려 할 뿐이다.” 유명세를 타게 된 워홀은 이후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영화배우 초상화 시리즈에 착수했다. ② 세즈윅은 아니지만, 스크린테스트 약 500여편 정도 되는 워홀의 영화 ‘스크린테스트’. 흑백필름에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초상화처럼 기록돼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카메라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앤디 워홀 라이브展 기념품숍 한 켠, 검은색 커튼을 걷으면 스크린테스트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체험공간이 마련돼있다. 오래된 카메라 앞에 앉아 흑백 필름이 타다닥 돌아가는 4분의 시간을 기다린다. 에디 세즈윅처럼 예쁘지는 않겠지만, 카메라가 담은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메일주소로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갈 곳을 잃어가는 눈동자와 무표정의 얼굴이 재미있다. ③ 어른들만 볼 수 있는, 19금 워홀 작업실 팩토리에서 배우들이 관계를 가지는 장면, 그의 동성연인이 자는 모습, 미국 남창, 드라큘라, 카우‘보이’들이 나누는 사랑,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은 누드…. “세상에는 본인이 직접 참여해야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섹스와 파티.” 1950년대부터 누드와 남성 성기를 그리기 시작한 워홀은 트루먼 카포티처럼 동성애자 예술가 문화를 선망했다. 동성애자, 남창, 성전환자, 복장 도착자, 구강 성교, 집단 성행위 등이 영화와 드로잉, 사진 안에 빼곡히 담겨있다. 상업 미술로 시작해 비즈니스 미술가로 마감하고 싶었다는 워홀, 그의 바람은 사후에도 충실하게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대량으로 소비하고, 열광한다.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 유명인사와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에 집착했던 사람. 미디어가 곧 예술이라고 믿는 워홀.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정답은 없어보인다. 솔직하고 허례허식 없는 그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니 문득,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사고 싶어진다. “그림을 어떻게 보면 될까요? 그러면 난 대답한다. 제 경우에는 내 방에 걸고 싶은가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 어떤 그림 좋아하세요? 어느 불량 큐레이터의 고백 中 백문이불여일행(百聞不如一行) 백번 듣고 보는 것보다 한번이라도 실제로 해보는 것, 느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 ‘보고 듣는 것’ 말고 ‘해 보고’ 쓰고 싶어서 시작된 글. 일주일이란 시간동안 무엇을 해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누고 이야기하고 싶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님아, 혼자 가지마오”...20년 함께한 암컷 죽자 바로 따라간 남편 곰

    “님아, 혼자 가지마오”...20년 함께한 암컷 죽자 바로 따라간 남편 곰

    20년 간 같은 동물원에서 동고동락해 온 암컷 곰이 질병으로 죽자 이를 견디지 못한 수컷 곰도 바로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고 미 현지 언론들이 12일(이하 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州)에 있는 카프론 동물원은 지난 3일 25살 된 '아미'라는 이름의 암컷 곰을 안락사시켰다. 몇 주 전부터 음식을 잘 먹지 않던 아미는 검사 결과 치명적인 간 질환을 앓고 있었고 약물도 치료 효과가 없어 안락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동물원 측은 밝혔다. 하지만 아미가 죽자 이 동물원에서 20년 가까이 함께 동고동락해 온 27살의 수컷 곰인 '구프'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 구프도 간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동물원 측은 아미가 죽자 스트레스를 받은 구프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물원 측은 결국, 아미가 죽은 지 3일 만에 구프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해 구프도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동물원 측은 이들 곰 커플이 이 동물원에서 약 20년 넘게 동고동락하며 3명의 새끼를 낳았다고 전했다. 동물원의 한 관계자는 "어쩔 수 없이 둘을 안락사시키기는 했지만, 이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동물원 직원 모두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었다"며 당시 심경을 말했다. 그는 또 "이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생을 살았다"며 "우리는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밝혔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ol.com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증언 들어보니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증언 들어보니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4번째 이야기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일본 하시마 섬을 찾았다. 이날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의 인터뷰도 공개됐다. 할아버지는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옹벽 바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옹벽 바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4번째 이야기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일본 하시마 섬을 찾았다. 이날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의 인터뷰도 공개됐다. 할아버지는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증언, “아우성치는 소리가..”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증언, “아우성치는 소리가..” 울컥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4번째 이야기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일본 하시마 섬을 찾았다. 이날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의 인터뷰도 공개됐다. 할아버지는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공양탑 찾아간 하하 “이걸 어떻게 찾아” 울분 토해

    무한도전 하시마섬, 공양탑 찾아간 하하 “이걸 어떻게 찾아” 울분 토해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배달의 무도’ 편에서는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을 찾아갔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제작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거의 찾기힘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하는 “이걸 어떻게 찾아”라며 분노를 드러냈고 서경덕 교수와 함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10대때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생생한 증언에 시청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10대때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생생한 증언에 시청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10대때 끌려간 할아버지 “자원해서 갔다고?” 생생한 증언에 시청자 눈물 ‘무한도전 하시마섬’ ‘무한도전’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한국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한 곳인 하시마섬을 방문했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4번째 이야기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일본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섬으로 한국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한 곳이다. 이날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혀있다는 다사키사 공양탑을 찾기 위해 다카시마로 향했다. 하지만 공양탑을 찾기란 쉽지 않았고,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산 속에 초라하게 방치돼 있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공양탑 위치에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분노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의 인터뷰도 공개됐다. 할아버지는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사진=MBC 무한도전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 “자원했다고?” 역사왜곡에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 “자원했다고?” 역사왜곡에 울컥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 “창살없는 감옥에서 살았다”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 “창살없는 감옥에서 살았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어떤 일 겪었나 들어보니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어떤 일 겪었나 들어보니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4번째 이야기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일본 하시마 섬을 찾았다. 이날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의 인터뷰도 공개됐다. 할아버지는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할아버지, “농사지은 쌀로 밥 먹고 싶었다” 울컥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피해자 할아버지, “농사지은 쌀로 밥 먹고 싶었다” 울컥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인터뷰 보니..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인터뷰 보니..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무한도전 제작진이 일본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섬에?”라고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공양탑 방문한 하하 ‘서경덕 교수와 분노한 이유는?’

    무한도전 하시마섬, 공양탑 방문한 하하 ‘서경덕 교수와 분노한 이유는?’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배달의 무도’ 편에서는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을 찾아갔다.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거의 찾기힘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하는 “이걸 어떻게 찾아”라며 분노를 드러냈고 서경덕 교수와 함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아우성 치는 소리 났다”

    무한도전 하시마섬 강제징용 할아버지 “아우성 치는 소리 났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배달의 무도’ 편으로 꾸며진 가운데, 멤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찾았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당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무한도전’과의 인터뷰에서 “16살때 끌려왔다. 나이가 어릴 수록 좋다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할아버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며 “하시마섬에서 한 일은 굴을 뚫어 나아가는 일이다. 옹벽 바닥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증언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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