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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

    여기, 베트남에서 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의 이름은 응우옌티탄(58)입니다. 베트남 중부 꽝남성(‘성’은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의 퐁니 마을이 그의 고향입니다. 다른 한 분의 이름도 응우옌티탄(61)입니다. 꽝남성의 하미 마을에서 왔습니다. 퐁니 마을과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지난 19일 어렵게 한국 국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한국군은 여성과 어린아이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 어째서 집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시신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인가요.”두 사람은 이름도 같지만 동시에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 생존자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 철군하기 전까지 32만 5000여명 규모의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1964년 8월~1975년 4월)에 파병했습니다. 장병 5000여명이 전사했고, 1만 2000여명이 지금까지도 고엽제로 인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군은 베트남에 주둔하는 동안 전투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학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의 가옥, 무덤,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불도저로 시신을 훼손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일어난 국가범죄이자, 전쟁 중에도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규범을 위반한 전쟁범죄입니다.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 12일에 발생한 ‘퐁니·퐁넛 사건’의 피해 생존자입니다. 퐁넛 마을은 퐁니 마을 바로 옆에 있는 마을입니다. 당시 한국군의 해병 제2여단(이른바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이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해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74명이 살해됐고 17명이 다쳤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을 잃었습니다. 자신도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저는 배에 총상을 입었고, 오빠는 엉덩이가 다 날아갈 정도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죽은 남동생은 한국군이 쏜 총에 입이 다 날아갔습니다. 남동생이 울컥울컥 핏물을 토해낼 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배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를 부여안고 어머니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어 그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는 그날의 잔인한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고 호소했습니다.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도 1968년 2월 22일에 벌어진 ‘하미 사건’으로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사촌 동생 2명을 잃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11살이었습니다. 자신도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허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 때 입은 상해로 현재까지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날 해병 청룡부대 예하 5대대 26중대 소속 군인들은 하미 마을에 진입해 마을 사람들을 네 곳으로 모았습니다. 이후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트렸습니다. 총검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다음 날 불도저를 동원해 전날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매장한 시신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훼손했습니다. 이 학살로 135명이 사망했습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하미 사건의 충격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안개가 끼거나 사람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학살 현장의 끔찍한 공포가 떠올랐습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남동생의 유해를 지금까지 찾지 못해 가슴이 아픕니다”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역대 대통령들의 발언은 ‘과거에 양국 간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유감이다’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4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두 응우옌티탄은 국회 정론관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어째서 한국군은, 한국 정부는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사실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이번 방한이 두 번째입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2015년 4월 생애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단체들의 반발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당시 응우옌티탄은 또 다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떤런(67)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경기 광주 나눔의집 역사관 방문을 시작으로 국회 기자회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참석, 지역 순회 간담회 등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참전군인 단체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임재성 변호사는 “누군가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없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직접 겪어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정작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는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라면서 “한국에 온 두 분은 두려운 마음으로 ‘제가 증거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오빠와 주변 이웃들이 자신의 방한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곳에 어떻게 가느냐’, ‘가서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거길 갈 수가 있느냐’는 반응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조카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가 반대할 때 제게 한국에 가라고 이야기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제 조카입니다. 조카는 저의 방한이 ‘그 날 죽은 135명의 영령들을 위한 일이 아니냐’면서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한국에 와서 증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두 응우옌티탄은 “우리는 앞으로도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이 자리도 많이 떨립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5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의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난날 있었던 어둡고 고통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오는 21~22일 ‘시민평화법정’(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립니다. 오래 전부터 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시민사회가 어렵게 마련한 자리입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이 진행됩니다. 학살의 진실이 망각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몫입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북한 학계, 15년 논쟁 끝은 ‘낙랑군=요동설’… 그 중심엔 리지린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북한 학계, 15년 논쟁 끝은 ‘낙랑군=요동설’… 그 중심엔 리지린

    북한은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의 위치 문제 등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논쟁은 주로 문헌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됐다. 문헌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 문헌사료를 근거로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요하(遼河) 서쪽까지 걸쳐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맞서 과학원 산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소장이었던 고고학자 도유호는 1960년 4월 ‘고고학상으로 본 고조선에 대한 과학 토론회’에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은 오늘날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이며 그 북계를 이룬 패수는 청천강이다”라고 달리 주장했다. 문헌사학자들이 고조선이 요하 서쪽까지 차지한 제국이었다고 본 반면 도유호는 평안남도에 국한된 작은 소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러나 모든 고고학자가 도유호의 견해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 토론회 때 중앙역사박물관 관장 황욱은 “고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요하(遼河) 일대도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고고학 연구실 소속의 전주농, 정찬영 등은 도유호의 견해를 지지했지만 중앙역사박물관의 황욱, 백연행 등은 문헌사학자들의 학설을 지지했다. 이 문제를 두고 북한 고고학계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7차례 걸친 치열한 ‘고조선 토론회’ 고조선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과학원 역사연구소는 1961년 6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3개월간 7차례나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과학원 원사 백남운과 과학원 고전연구실장 리상호, 언어문화연구소 교수 정렬모, 중앙당학교 조선사 강좌장 림건상, 김석형 등의 문헌사학자들은 대부분 ‘고조선의 중심지=요동설’을 지지했다. 중국 고대 문헌사료에 고조선과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기사가 다수 나오는 상황에서 요동설이 당연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자 도유호는 유물사관에 기대어 평양설을 주장했다. 그는 ‘문화유산’ 1962년 3호의 ‘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고조선을 논하는 마당에 먼저 문제로 되는 고고학적 자료는 바로 고조선 유물이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조선 유물이 다수 출토된 평양이 유물사관에 따라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주장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물이 전연 보이지 않는 고장에서 중국 갈래의 유물을 들고서 여기가 고조선 자리라고 하여서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하면서 “누가 아무리 무어라고 하던 간에 낙랑군 치지(治地:다스리던 곳)는 처음부터 평양에 있었다”고 다시 한번 ‘고조선의 중심지=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다. 그 시점까지의 고고학 연구 성과로 본다면 도유호의 주장이 아주 그르다고 볼 수는 없었다. 북한이 중국과 ‘조·중고고발굴대’를 조직한 것은 1963년이고, 이듬해 요동반도 남단 여대(旅大:여순과 대련)시에서 고조선 무덤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중국의 요령성은 물론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까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등이 다수 쏟아질 줄 알았다면 도유호도 일찌감치 손을 들었을 것이다.●반박하던 ‘지도교수’ 구제강도 결국 수긍 북한에서 고조선의 강역과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베이징대 대학원으로 유학 간 리지린은 고사변학파의 구제강(顧剛)을 지도교수로 박사논문에 여념이 없었다. 1957년쯤부터 베이징을 오가던 리지린은 1960년 12월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위한 구두시험을 치렀다. 구제강은 자신의 일기(구제강 일기·顧剛日記:8권)에서 “리지린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한사군의 위치를 우리나라의 동북쪽으로 보고 패수(浿水)를 요수(遼水)로 보았다”고 썼다. 구제강은 1961년 9월 29일자 일기에는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리지린은 단순히 ‘민족적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문헌사료를 가지고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북한이 아니라 고대 요동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견해를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 자신이 일기에서 “조선의 유학생을 위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4사(史)의 동이전을 세밀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고, 이렇게 발견한 문제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리지린를 제자로 받고 나서야 문제의식을 갖고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4사란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의 4개 역사서를 뜻한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대학 당국에 제출했는데, 먼저 리지린이 고대 조선족이 현재 중국 영토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그 중심을 요서와 요동 일대라고 서술했다고 정리했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논문이 “문장이 번잡하고 중첩돼 견해 파악이 어려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의적이고 견강부회적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객관적 연구를 표방했으나 민족주의적 속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구제강의 비판은 대부분 총론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비판으로는 예를 들면 “기자(箕子)와 그 후예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기(箕)를 왕(王)을 의미하는 조선어 ‘검’과 관련되었다고 본다”는 것 등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구제강은 리지린이 고조선 관련 현존 자료의 95%를 읽었다고 시인한 것처럼 고대 4사는 물론 ‘관자’(管子), ‘산해경’, ‘전국책’, ‘진서’, ‘구당서’, ‘수경주’ 등 수많은 중국 사료를 인용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논증한 것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4사·수많은 中 사료 인용해 논증 리지린은 어떤 측면에서는 북한 학계가 ‘낙랑군=평양설’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한 일종의 비밀병기였다. 중국의 수많은 문헌사료에 나오는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베이징대 박사논문으로 재확인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리지린은 1961년 8~9월에 열린 ‘고조선의 생산력과 국가형성’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해 그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이미 베이징대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의 참석은 큰 관심을 끌었다. 이 토론회에서 리지린은 그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고, 과학원 원사 백남운은 “고조선은 압록강 이북과 요서, 요동지방에서 찾아야 하며 점차 동쪽으로 옮겨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리지린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남한 학계는 토론 없이 정설로 받아들여 이 토론회를 기점으로 1963년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연구’가 출간되면서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에 대한 정리는 일단락됐다.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리지린의 핵심 논리는 서기전 5~4세기쯤까지는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河)부터 압록강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가 서기전 3세기쯤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천~2천리의 강역을 빼앗긴 후 요령성 대릉하(大陵河)까지로 축소됐다는 것이다. ‘고조선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 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방대한 문헌사료는 물론 중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고학 사료들을 가지고 고조선의 강역이 때로는 중국 하북성까지 걸쳐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평양 부근의 일부 고고학 유물들,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했던 고고학 유물들만 가지고 ‘낙랑군=평양설’을 더이상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북한 학계는 거의 15년 이상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낙랑군=요동설’을 확립시키면서 ‘낙랑군=평양설’을 무너뜨렸다. 남한 학계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논쟁다운 논쟁 한번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확립시킨 ‘낙랑군=평양설’을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고 우겨 온 것에 비춰 보면 전체주의라고 비판받던 북한 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채롭다. ■리지린 ‘고조선연구’ 논문 現중국 요서·요동지역 고고학 발굴까지 논증 리지린은 ‘고조선연구’ 8장에서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 문화의 분포”라는 제목으로 현재의 중국 요서·요동지역의 고고학 발굴 결과까지 언급했다. 리지린은 한반도와 중국 요령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을 가지고 고조선 강역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한 예로 요령성 서쪽의 조양(朝陽)시에서 서기전 5세기쯤의 동검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조양에서 발굴된 청동검의 사용자는 고대 조선인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방대한 문헌사료는 물론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기원전 3세기 초까지 고조선의 영역은 현 난하(하북성) 부근 영평부 지역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는데, 평양 일대의 한정된 고고학 자료만을 근거로 삼는 도유호 등의 논리는 더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 [자치단체장 25시] 50년 숙원 옥정호 관광도로 첫발… 300만 관광임실 연다

    [자치단체장 25시] 50년 숙원 옥정호 관광도로 첫발… 300만 관광임실 연다

    심민 전북 임실군수는 요즈음 ‘관광 임실’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300만 관광시대’를 실현해 ‘모두가 행복한 스마트 강소도시’를 만드는 게 목표다. 특히 지역의 반세기 숙원인 ‘옥정호 수변 관광도로 개설사업’이 올해부터 첫발을 내딛게 돼 이에 맞는 관광종합개발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13일 군수실에서 만난 심 군수는 “우리 임실 발전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천혜의 관광자원을 상품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8년은 관광 임실로 발돋움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하는 그의 얼굴에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다. 올해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인재 양성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다. 심 군수는 “그동안 임실은 낙후되고 소외된 변두리로 치부됐으나 지난 3~4년 동안 자존감과 자긍심이 되살아나 지역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며 “임실이 보유한 모든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재선 도전 의지도 감추지 않았다. 다음은 심 군수와 일문일답이다.→임실군정의 추진 방향과 역점 사업은. -올해는 미래 임실 건설을 위한 새로운 성장 기반을 재설계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희망농업, 맞춤복지, 지역경제 등 7대 중점 시책과 10대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할 방침이다. 역점 사업은 임실읍 도시경쟁력 강화, 옥정호 관광개발, 임실N치즈축제 차별화 등이다.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된 사업은. -문화와 복지, 농업 및 생태환경 등 분야별로 필요한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문화분야는 해피문화복지센터와 청소년 문화의 집 건립공사를 착공했다. 복지사업으로는 노인들을 위한 종합시설을 갖춘 복지관을 신축한다. 치매환자 조기발견 등을 위해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치매안심센터도 건립된다. 식품안전과 운영의 효율성을 반영한 과일가공공장 건립사업도 한창이어서 농가소득 증대가 기대된다.→300만 관광종합개발계획의 청사진은. -지난해 45만명의 관광객이 찾은 임실N치즈축제의 성공에 힘입어 올해를 기점으로 300만 관광시대의 물꼬를 트겠다. 우선 올해부터 2027년까지 10년간 임실 관광산업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핵심 전략을 수립해 국책사업 발굴의 토대를 마련할 계획이다. 지역의 핵심 자원인 옥정호, 성수산, 임실N치즈를 활용한 글로벌 관광명소 거점을 구축하고 융복합 관광자원을 개발하겠다. 임실의 10년 관광정책 기본 계획을 내실 있게 수립하는 게 과제다.→옥정호 종합관광개발은 어떻게 추진되나. -상수원 보호구역이 해제되면서 옥정호가 임실 관광을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됐다. 섬진강변 관광자원을 활용해 수상과 산림, 문화를 아우르는 섬진강 에코종합관광특구를 조성하겠다. 에코뮤지엄 조성사업은 한창 진행 중이다. 붕어섬 에코가든과 관광경관도로 조성사업은 연초 계약을 맺어 착공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물문화 둘레길 조성사업도 실시설계 용역을 진행 중이어서 하반기에 발주가 가능하다. 옥정호는 체류형, 친환경 관광거점으로 급부상할 것이다.→옥정호 개발을 둘러싸고 정읍시와 갈등을 빚고 있다. -옥정호 수상레포츠단지는 친환경·친수적으로 개발된다. 2016년 11월 전북도, 정읍시, 임실군, 순창군이 맺은 상생협력 합의서에 입각해 옥정호 수변 및 수면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정읍시의 식수원인 옥정호 수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읍시의 반발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이유다. 정읍시가 진정 시민들의 식수 오염이 걱정된다면 정읍시 지역에 있는 칠보취수구 상류에 산재된 축사 등 각종 오염원과 수변 관리 대책을 수립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오수의견 설화를 활용한 관광개발 방안은. -1000만 반려동물 시대와 문재인 정부의 반려동물 정책에 맞춰 전국 최초로 조성된 오수의견 관광지를 적극 활성화하겠다. 오수의견은 고려시대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기록돼 있는 데 술에 취한 주인을 화마로부터 구해낸 개 얘기다. 오수개는 진돗개, 풍산개, 삽살개 등과 함께 토종개로 꼽힌다. 오수개는 ‘주인을 구한 충견’으로도 유명하다. 반려동물의 입양, 놀이, 미용, 장례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테마공원을 조성하겠다. →성수산 관광지 개발계획은. -고려와 조선의 건국 설화를 담고 있는 성수산을 종합 힐링타운으로 만들겠다. 뛰어난 역사적 가치를 살려 국민생태관광지로 가꾸겠다. 왕의 숲, 생태관광지, 태조 희망의 숲을 조성한다. 성수산을 군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 →지역인재 양성을 위해 개원한 봉황인재학당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크다. -농촌지역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인구유출의 원인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지역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우수한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올해 첫 신입생을 맞은 봉황인재학당은 주민들의 기대와 호응 속에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과 후 중학생을 대상으로 서울과 인근 도시에서 유명 강사를 초빙해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을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학생 안전을 위해 버스·택시를 이용한 통학서비스와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급식이 지원된다. 봉황인재학당이 많은 인재를 배출해 임실군민의 자부심이 되도록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육성하겠다.→지난해 임실N치즈축제가 대박을 터뜨렸다. 발전 방안은. -지난해 세 번째로 열린 임실N치즈축제는 45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대성공을 거두었다. 400억원에 이르는 지역경제 파급 효과도 거뒀다. 청정 임실 이미지의 확산 효과도 기대 이상이다.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가을에만 개최했던 임실N치즈축제를 봄과 가을에 두 번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 이를 위해 임실치즈테마파크 일원에 사계절 장미원을 조성 중이다. 봄에는 장미, 가을에는 국화와 함께하는 치즈축제를 개최하겠다. 지난해 미흡한 점으로 지적된 주차, 교통관리, 먹거리 문제를 대폭 보완하겠다. →재선 도전 계획은. -임실은 민선 5기까지 모든 민선군수가 중도에 낙마한 아픔을 안고 있다. 앞으로 남은 임기를 무사히 마쳐 임실이 ‘군수들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걷어 내겠다. 지난 4년간 오직 군민들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이제 어느 정도 지역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으니 미래 100년을 책임질 탄탄한 기틀을 다져야 한다. 군민들의 선택에 앞날을 맡기겠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 고용희 20세 때의 꽃다운 미모 희귀 사진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 고용희 20세 때의 꽃다운 미모 희귀 사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高容姬·1953~2004)의 20세때의 사진이 나왔다. 고용희는 한때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북한에 있는 그의 무덤 비석에는 ‘고용희 동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의 이름을 고용희로 바로잡았다.15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가 1973년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로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의 매우 드문 사진을 공개했다. 그는 1953년 오사카생이니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꽃다운’ 20세가 된다. 1962년 부모를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이주했다. 고용희는 1970년대 중후반 김정일 위원장과 결혼해 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영부인 역할을 수행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당중앙위 제1부부장의 친모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3000년 전에도 ‘미투’?…파피루스 문서에서 성범죄 기록 발견

    3000년 전에도 ‘미투’?…파피루스 문서에서 성범죄 기록 발견

    전 세계에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바람이 여전히 거센 가운데,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에서 3000년 전 성범죄를 기록한 내용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쿼츠(QUARTZ) 아프리카판의 1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브룩클린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인 카를리 실버는 영국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유물인 ‘파피루스 솔트 124’의 내용을 재분석했다. 파피루스 솔트 124는 제20왕조이자 람세스 2세의 손자인 세티2세 때부터의 기록이 적힌 파피루스로, 당시 이집트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내용에는 고대 이집트 낭리강 상류에 자리잡은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던 테베(Thebes)에 살았던 남성의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 실버 박사는 “파피루스에는 기원전 1200년 당시 권력이 매우 강했던 남성이 여성 여러 명을 성폭행했으며, 이 일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면서 “이 놀라운 법적 기록은 남성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여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매우 오래전부터 이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파피루스에 기록된, 처벌을 받은 남성은 당시 왕들의 계곡에 피라미드를 짓는 공사를 총감독했던 무덤 건축가 파네브였다. 파라오는 이 일이 폭로된 뒤 그를 간통 혐의로 처벌한 것으로 파피루스에 기록돼 있다. 파네브의 ‘비행’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29년 체코의 이집트 학자가 파피루스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파네브가 대규모 유산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 뇌물을 제공했다는 내용이나 그와 음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의 이름을 발견한 바 있다. 당시에는 이 여성들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실버 박사는 여러 사료와 해당 파피루스 속 문맥을 해석해 그가 당시 유부녀를 강간하고 폭행했다는 내용 등을 확인했다. 영국 리버풀대학교 이집트학과 교수인 로랜드 엔마치는 인디펜던트와 한 인터뷰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간통죄를 도덕적으로 비난 받기 쉬운 것으로 간주했다”면서 “결혼한 여성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통을 원하는 남성들은 매우 노골적이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여성들을 강제로 추행할수록 더욱 악화됐다”고 말했다. 실버 박사는 “이번 자료는 매우 많은 여성들로부터 성적 비행을 제기당한 당사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례일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 3000년 이상 된 이러한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사찰을 두고 흔히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에서 말한 ‘잘 늙은 절 한 채’의 변주(變奏)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절은 완주 화암사(花巖寺)다. 절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다. 시인이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고 한 그대로다. 그렇게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나타나는 절이 화암사다. 그런데 ‘화암사 중창비’의 분위기도 안 시인의 묘사와 닮아 있다. ‘바위 벼랑의 허리에 한 자 폭 좁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서면 이 절에 이른다.…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다’ 비문은 1441년(세종 23) 지은 것이다.●‘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 국보 지정 화암사라면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1년 해체 수리하면서 찾은 기록으로 1605년(선조 38)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극락전은 이른바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한마디로 지붕을 높여 맵시 있게 보이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면 크게 망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건물의 겉모습만으로 알아차리기란 전문가도 쉽지 않다. 하앙식 구조가 아니더라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지붕이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극(極)·락(樂)·전(殿) 세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따로 내건 편액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편액을 이렇게 만든 것도 하앙식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화암사를 말할 때 강당에 해당하는 우화루도 빼놓으면 안 된다.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이 절의 인상은 아마도 우화루에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극락전과 우화루, 여기에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당을 감싸며 이른바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이 완성됐다. 화암사가 아름다운 것도 각각의 전각도 전각이지만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극락전도, 우화루도 아닌 화암사에서 가장 작은 철영재(英齋)로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극락전 동쪽에 자리잡은 철영재는 불과 한 칸짜리 사당이다. 뜻밖에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절집에 무신의 사당이라니….●철영재 현판 글씨는 문인 자하 신위가 써 철영재 현판 글씨는 자하 신위(1769~1845)가 썼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되곤 하는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하는 금강경을 필사하고 감상을 적은 ‘서금강경후’(書金剛經後)를 남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물이 사당의 현판 글씨를 썼다니 성달생과 화암사, 나아가 성달생과 불교의 인연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암사는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창비는 전한다. 원효와 의상도 수도했다고 적었다. 1425년(세종 7)부터 1440년(세종 22)까지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大)시주가 성달생이다. 그는 1417년(태종 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화암사와 인연을 맺은 듯하다. 그런데 인연은 중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불경(佛經) 간행의 역사에서 화암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 성달생과의 인연이 있다. 성달생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성석용의 아들이다. 유후는 조선의 창건 수도인 개성을 다스리는 벼슬이었다. 태종실록에 있는 성석용의 졸기(卒記)에는 ‘글씨를 잘 썼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글씨라면 그의 아들 삼형제 달생·개·허도 일가견이 있었다.●법화경 등 판각한 조선 불경 간행 중심지 성달생과 성개가 필사한 안심사판 묘법연화경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완주 안심사는 화암사에서 멀지 않다. 화암사와 더불어 불경 판각이 활발했던 안심사에는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등 조선시대 한글 경판도 다수 전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1443년(세종 25)부터 쏟아져 나온다. 법화경, 능엄경, 중수경, 부모은중경, 지장경, 육경합부, 시왕경 등 모두 12종에 이른다. 육경합부(六經合部)는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아미타경, 관세음보살예문, 법화경의 한 대목씩을 엮은 것이다. 성달생의 아들과 손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성승(?~1456)과 성삼문(1418~1456)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성달생이 필사한 화암사판 법화경에는 성승과 성삼문도 발원자로 참여했다. 화암사판 법화경은 이후 복각본만 24종이 나왔다. 조선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를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철영재 현판을 쓴 자하 역시 ‘성달생 법화경’을 읽으며서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 갔을 것이다. 그러니 화암사는 성달생의 존재로 ‘조선시대 불경 간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절 경내, 그것도 큰 법당 곁에 이런 인물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화암사에 남은 성달생의 흔적은 철영재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창비는 높이 130㎝, 폭 52㎝, 두께 11㎝이니 그야말로 아담하다. 비문은 15세기 중엽 지었다지만 비석을 세운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중창비에는 비문을 누가 짓고, 글씨를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매우 이례적이다. 그 주인공으로 성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문을 지었다는 1441년은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성달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승의 아비에 대하여 연좌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파주 무덤의 석물(石物)을 모두 없앤 것이다. 성승과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1691년(숙종 17)이다. 중창비를 세운 시기 그들은 여전히 ‘대역죄인’이었다. 성달승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달생은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전라도관찰사에서 내직인 내금위삼번절제사로 옮긴 1418년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직책상 칼을 찼다. 세종이 즉위한 해다. 그런데 상왕, 즉 태종 앞에서 칼을 찼다는 이유로 세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등 칼로 일어선 태종 이방원이 적지 않게 놀랐던 때문일 듯하다. ●유감동 ‘섹스 스캔들’에 연루돼 물의도 성달생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명나라 황제의 친척’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공녀(貢女)의 악습을 원나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408년(명나라 영락 6)부터 1433년(명나라 선덕 8)까지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 소녀를 징발한다. 성달생의 열일곱 살난 딸도 여기에 포함됐다. 공조판서 시절이었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공녀의 부친으로는 가장 벼슬이 높았다. 성달생은 유감동의 간부(奸夫)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딸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으로 세종시대 40명 남짓한 조정의 전·현직 관리와 스캔들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는데, 성달생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충청도 초수로 안질을 치료하러 간 세종을 호종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경기도 100만 도시 용인 ‘내집마련 적기’

    경기도 100만 도시 용인 ‘내집마련 적기’

    경기도 수원과 용인, 고양시는 다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거주지 외 타지역 통근 취업자가 20만명을 훌쩍 넘는 수준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작년 8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상반기 지역별고용조사’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 거주지외 타지역 통근 취업자는 수원시가 25만7000명, 용인시가 24만4700명으로 1, 2위였다. 이들 지역은 또한 인구 100만 도시라는 공통점도 있다. 수원이 120만2310명, 고양시 104만2065명, 용인시 100만2619명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들 지역은 서울 및 수도권 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좋고, 주택가격 부담이 덜해 서울 등 타 시·도 출퇴근자들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수도권 내 내집마련을 고려하고 있다면 서울과의 교통편의는 물론 인구 100만 도시에 걸맞는 생활편의를 갖추고 있는 용인시를 주목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실제로 KB부동산 시세자료에 따르면 가장 최근 서울시의 3.3㎡당 시세는 매매가 2247 만원, 전세가 1370 만원인 반면 용인은 매매가는 1036 만원, 전세가는 851 만원 수준이다. 용인의 매매가가 서울 전세가 보다도 300만원 넘게 저렴한 것. 여기에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미분양 아파트를 찾아보면 실속 있는 내집마련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때 ‘미분양의 무덤’으로 불리던 용인은 현재 미분양을 급속히 해소하며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상승을 견인하고 있다. 특히 용인시의 경우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월 연속 미분양이 급속히 줄며 전국에서 가장 높은 미분양 해소율을 기록하고 있다.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에 위치한 용인행정타운 두산위브의 경우 지난해의 부진을 완전히 씻어낸 대표적인 미분양 아파트다. 전용면적 84~153㎡의 1293세대 중대형 대단지로 구성된 용인행정타운 두산위브는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이고 용인경전철 역세권, 행정타운 도보권의 생활조건을 갖췄지만 미분양 기조에 눌려 지난해 초까지도 미분양이 1000여 세대에 달했다. 하지만 용인의 인구가 증가하고, 경전철, 고속도로, GTX 등 다양한 교통호재, 부동산비규제지역, 중대형 평형대 인기 급상승 등으로 인해 미분양 단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 건설사가 회사 보유분에 대해 특별할인, 계약금 1000만원, 취득세 전액지원, 잔금유예 2년 무이자 등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현재 미분양 물량은 90% 가량이 해소됐다. 용인시처인구의 부동산 관계자는 “용인은 인구 100만이 넘고 주변에 각종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배후수요가 풍부해졌다”며“이에 따라 용인행정타운 두산위브 등의 단지들은 향후 가격 상승 등을 기대해볼 수 있는 아파트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용인 행정타운 두산위브는 입주아파트로 입주아파트로 방문예약을 통해 세대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여기는 중국] 황제 뺨치는 ‘초호화 불법 무덤’ 中서 무더기 적발

    [여기는 중국] 황제 뺨치는 ‘초호화 불법 무덤’ 中서 무더기 적발

    중국 정부가 한 지역에서 불법으로 만들어진 무덤 수 만기를 철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철거되는 무덤의 규모는 무려 7만 기에 달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9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안후이성 퉁청시 야산 일대에서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불법으로 증축한 무덤 수 만기가 발견됐다. 주민들은 아직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망했을 때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채 무덤을 지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는 해당 지역의 관례처럼 여겨져 왔지만, 지방 당국이 농촌 지역뿐만 아니라 공공 공원 내에까지 ‘미래의 무덤’을 미리 짓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속을 시작했다. 불법 무덤에 대한 단속은 지난해 7월 시작됐으며, 현재까지 7만 기 가량의 무덤이 철거됐다. 철거된 무덤 일부는 중국이나 이집트의 고대 황제 무덤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구조를 갖춘 것도 있었다. 유명한 사업가로 알려진 일부 사람들은 무덤 안과 밖에 수영장과 정원, 대리석 계단 등 호화로운 구조물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지방정부 관계자는 “삶의 질이 향상되고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버젓이 살아있는 아들과 손자를 위해 무덤을 짓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면서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주거 공간까지 없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무덤의 확산은 제한된 토지 자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국은 철거된 무덤 7만 기가 있었던 공간은 앞으로 70년 동안 매장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규모라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우주와 교신하려고” 남의 무덤 파헤친 60대 구속

    “우주와 교신하려고” 남의 무덤 파헤친 60대 구속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훼손한 6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경기 이천경찰서는 분묘발굴 및 사체손괴 혐의로 박모(60)씨를 구속했다고 8일 밝혔다. 박씨는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 야산에서 새벽을 틈타 무덤 4곳을 삽으로 파헤친 뒤 유골을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현장에 남은 담배꽁초를 수거해 DNA 검사를 한 끝에 박씨를 붙잡았다. 조사에 따르면 박씨는 11년 전인 2007년 2월 장호원읍에서 한 차례 동종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1년 가랑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의 땀이 묻은 수건 1장 외에는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 범인의 DNA를 보관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공소시효가 끝나 미제로 남았다. 그러나 경찰은 지난해 12월 현장에서 수거한 담배꽁초에서 나온 DNA가 2007년 사건 범인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박씨를 검거했다. 박씨의 집에서는 “팠던 묘지, 땅이 얼어 포기했던 묘지, 또 판다” 등이 적힌 메모지도 발견됐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우주의 신이 보내는 텔레파시를 듣기 위해 유골이 필요했다”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진술을 했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는 조현병 환자로, 특별한 직업도 없고 피해자들과의 연관관계도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라며 “(박씨는)현재 11년 전 범행과 일부 범행에 대해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기묘년인 1519년(중종 14년) 12월 20일 능주에는 밤새 내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목욕을 마친 뒤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마지막 소회를 담담히 써 내려 갔다.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였고 愛君如愛父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憂國若憂家 밝은 해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白日臨下土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추는구나 昭昭照丹衷 -정암집 부록 권1 죽음을 앞두고 지은 시-#자신만의 길을 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김일손이 사초(史草)에다 기록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화의 빌미가 됐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이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는 훈구세력의 참소를 믿었다. 무덤에 묻힌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의 문집도 불태워졌다. 김종직 제자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김굉필과 정여창은 먼 지방으로 유배됐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던 무오사화다. 사화를 겪은 뒤로 사림의 기세가 꺾이고, 자기를 수양하는 공부보다는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힘쓰는 풍조가 만연했다. 무오사화가 있던 그해, 17세 소년 정암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 김굉필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김종직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화를 당하는 무서운 세상에 김종직 수제자인 김굉필을 찾아가 배운다는 것은 웬만한 선비도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약관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이미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는 선비의 지조를 지녔던 셈이다.#공론(公論)을 세우다 정암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데다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일찌감치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재주와 학식을 가진 그를 하늘은 초야에 묻어두지 않았다. 1515년(중종 10년) 6월 34세 정암은 성균관의 천거로 6품직에 올랐다. 정암은 벼슬에 오른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 명성만 드러나는 것을 나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반드시 벼슬길에 나가야 한다면 차라리 과거를 통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과거 시험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정암이 사간원 정언(正言)일 때, 사림 출신 신진 관료인 김정과 박상이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했다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됐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직후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에 의해 폐위된 중종의 원비였다. 정암은 언관으로서 글을 올려 사림의 공론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흥망과 가장 관계돼, 통하면 다스려지고 평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합니다.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과 백관으로부터 아래로 마을과 시장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정암집 권2 사간원에서 양사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 이 계사 덕분에 김정과 박상을 탄핵했던 모든 사람이 파직됐으며, 정암은 중종의 신임을 받게 됐다. 정암은 연산군의 독재를 겪으면서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려면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열린 언론을 통해 이뤄진 사림의 공론에 의한 정치가 바로 유교의 왕도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묵은 폐단을 개혁하다 중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정암은 벼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홍문관 실무 책임자인 부제학에 올랐다. 사림을 선도하고 임금을 도와 유교의 교화를 펼치는 자리를 맡은 그는 묵은 폐단을 개혁하는 조치로써 소격서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풀지 못하고 하늘에는 믿음을 받지 못하면서 도리어 아주 어둡고 근거 없는 곳에다 헛된 보답과 영원한 천명을 기원하니 매우 식견이 모자란 것입니다.”(정암집 권2 홍문관에서 소격서의 혁파를 청하는 상소) 소격서는 도교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다. 사교(邪敎)를 통해 복을 비는 것은 합리주의와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교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중종은 소격서가 선대부터 대대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폐지할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폐단을 개혁해 순수한 유교 국가를 실현하려는 정암의 굳은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임금과 신하가 꼬박 한 달 동안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소격서가 마침내 혁파됐다.#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다 정암은 바름과 부정함,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격했다. 임금에게 인의를 실천하는 바른 군자와 사욕을 추구하는 부정한 소인을 밝게 분별해 달라고 요구했다. “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비록 바름으로 부정함을 억제하더라도 부정함이 바름을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목을 가지고 보더라도, 잡초와 잡목을 비록 호미로 열심히 제거해도 여전히 무성합니다만, 지초와 난초 같은 아름다운 화초는 날마다 북돋아 줘도 도리어 시들고 맙니다. 부정함이 쉽게 이기고 바름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초목에 비유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규명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셔야 할 것입니다.”(정암집 권4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계사) 그는 국가가 병든 근원에 사리사욕만을 좇는 훈구세력이 있다고 봤다. 부정함을 바로잡는 일단의 조치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을 개정할 것을 청했다. 정국공신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였다. 훈구세력들이 자기 친인척 중에 공이 없는 사람도 마구 끼워 넣어 공신이 무려 117명에 이르렀다. 훈구세력의 탐욕과 부정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국공신을 개정하자 공신에서 삭제된 자가 76명이나 됐다. 이전부터 정암이 추진하던 개혁에 불만이 쌓였던 훈구세력은 이를 계기로 정암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519년 11월 15일 야밤을 틈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경복궁 신무문으로 은밀히 입궐해 중종에게 밀계를 올렸다. 조광조 등을 위시한 사림들이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종도 정암의 급진적인 개혁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민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던 터였다. 그날로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암은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사형에서 감형돼 사흘 만에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는 한 달 뒤에 사약을 받았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기묘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부른다.#왕도정치 실현 꿈꾼 선구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정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학문에만 전념하려던 꿈을 접고 벼슬길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맞이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나의 백성을 요순의 백성처럼 만들도록 온 힘을 다한 것뿐이었다. 정암은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대해 주던 임금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만은 밝은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정암은 뛰어난 학문적인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유려한 문장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고 그에 대한 선비들의 존경심은 매우 깊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유교의 최고 목표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선조 때 윤근수가 경연(經筵)에서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을 향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조광조가 쏟은 공력의 결과입니다”라고 한 말은 후세에 끼친 정암의 영향력을 잘 보여 준다. 정암은 비록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조선이 완전한 유교 국가로 정립되는 초석이 됐던 것이다. 양기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 ■정암집 해제 정암 시신 수습한 학포 후손 주도…조선시대 세 차례 간행 정암집은 조광조의 시문집이다. 조선 시대에 세 차례 간행됐다. 처음 간행은 1681년 남원에서, 두 번째 간행은 1685년 대구에서, 세 번째 간행은 1892년 능주에서 진행됐다. 특히 세 번째 간행된 문집은 정암의 동지였던 학포(學圃) 양팽손의 후손들이 주도해 간행한 것이다. 정암이 유배됐던 능주는 학포의 고향이었다. 정암이 세상을 떠나자 학포가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학포 후손들의 정암에 대한 존경심과 학포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정암집 간행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한국문집총간에는 능주 간행본 정암집이 수록됐다. 정암집에 수록된 글 가운데 정암이 손수 지은 것은 많지 않다. 생애가 길지 않았고 사화에 희생돼 유고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록문자로는 이황이 지은 행장, 이이가 지은 묘지명, 노수신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됐다.
  • 한국전통 창작무용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시즌 첫 공연 시작

    한국전통 창작무용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시즌 첫 공연 시작

    춤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 오는 4월 14일과 15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에서 시즌 첫 공연의 막을 올린다. 제작기간 3년, 제작비 총10억 원, 참여인원 80명이 투입됐으며 예술총감독에 김사라, 안무연출에 김나영, 기획 및 제작은 아리예술단이 맡았다. 춤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은 2016년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전통예술지역브랜드 상설공연 공모사업에 최우수작품으로 선정이 됐으며, 2017년 안동유교랜드 원형극장과 안동예술의 전당에서 13회 공연을 펼친 바 있다. 이 공연은 세월 속에 묻혀 있던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부활시켜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한국전통 창작무용극이다. 물질주의와 기계주의, 이기주의, 무도덕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에게 짓밟힌 무력한 현대인들의 감성과 영혼에 울림을 주는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숭고함을 심미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해당 극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지난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 고성 이씨 댁 자손 이응태의 무덤을 이장하던 중 무덤 속에서 썩지 않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응태의 아내 ‘원이엄마’가 쓴 사별한 남편을 향한 절절하고도 애틋한 사랑의 편지와 머리칼을 잘라 삼과 함께 꼬아 만든 미투리 등 유물이 450여년 동안 썩지 않은 채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극은 ‘원이엄마’의 편지글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래서 ‘미투리’와 ‘머리카락’을 불멸의 사랑의 ‘심미적 상징’으로 형상화하고, 편지의 내용을 가사에 붙여 율동적인 무용극으로 구성했다. 공연 관계자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은 생명의 신과 죽음의 신이 쌍둥이로서 원래는 하나라는 동양철학의 일원론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사랑과 생명에 대한 신념이 두 신을 화해시킨다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더욱 자세한 공연 정보는 티켓링크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가수 이효리가 시로 전달한 제주4·3의 ‘아픔’

    가수 이효리가 시로 전달한 제주4·3의 ‘아픔’

    제주에 이주한 가수 이효리는 3일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 중간중간 작곡가 김형석의 피아노 연주와 함께 ‘바람의 집’(이종형), ‘생은 아물지 않는다’(이산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김수열) 등의 추모 시를 낭독했다.앞서 이효리가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섭외됐다는 소식은 지난 2월 ‘김제동의 토크콘서트 노브레이크 시즌8’에서 알려졌다. 이에 일부 팬의 반대에도 이효리는 “제주에서 뭔가 할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게 됐다”며 행사에 참석했다. 시인 이종형의 ‘바람의 집’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섬, 4월의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다만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섬, 4월의 바람은/ 당신의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당신의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로부터 시작되는 당신의/ 바람의 집이었던 것” 시인 이산하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쫓기듯/ 늘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김수열의 시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천둥 번개에 놀라 이리 휘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에 쓸려 저리 휘어진/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나이테마다 그날의 상처를 촘촘히 새긴/ 나무 한 그루 여기 심고 싶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불벼락을 뒤집어쓰고도/ 모질게 살아 여린 생명 키워내는 선흘리 불칸낭/ 한때 소와 말과 사람이 살았던,/ 지금은 대숲 사이로 스산한 바람만 지나는/ 동광리 무등이왓 초입에 서서/ 등에 지고 가슴에 안고 어깨에 올려/ 푸르른 것들을 어르고 달래는 팽나무 같은/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허리에 박혀 살점이 되어버린 총탄마저 보듬어 안고/ 대창에 찔려 옹이가 되어버린 상처마저 혀로 핥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바람을 부추기고/ 바람이 거칠면 바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 틔워 뭇새들 부르고/ 여름이면 늙수그레한 어른들에게 서늘한 그늘이 되는/ 그런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푸르고 푸른/ 일흔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내일의 바람을 열려 맞는 항쟁의 마을 어귀에/ 아득한 별의 마음을 노래하는/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 이효리는 시를 낭독하면서 제주의 아픔을 진하게 전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무왕·선화공주 무덤일까… 익산 쌍릉서 인골 나무상자 발견

    무왕·선화공주 무덤일까… 익산 쌍릉서 인골 나무상자 발견

    전북 익산에 위치한 백제 고분인 쌍릉(雙陵·사적 제87호) 대왕릉 내부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 상자가 나왔다. 쌍릉은 향가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과 그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대왕릉과 소왕릉이 나란히 조성돼 있는데 각각 무왕과 선화공주의 것으로 알려졌다.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부터 발굴 중인 쌍릉 대왕릉의 현실(시신을 넣은 관이 안치된 방)에서 인골이 있는 상자가 발견됐다. 이 상자는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조사했을 당시 발견된 피장자의 인골을 수습해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직경 약 25m, 높이 5m 내외의 대왕릉은 백제 사비도읍기의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으로, 입구가 중앙에 있으며 현실 모양은 육각형으로 나타났다. 현실 크기는 길이 378㎝, 너비 176㎝, 높이 225㎝로, 이는 백제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현실이 가장 큰 무덤인 동하총보다 큰 것이다. 현실 조성 과정에서 대형 화강암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사용하고 사비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 중에는 처음으로 흙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판축 기법을 이용해 봉분을 만든 점도 밝혀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대왕릉은 그 규모나 구조 면에서 왕릉급 무덤이 확실하다”면서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인골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낙랑=요동설 vs 낙랑=평양설… 北·中 국가대항전으로 번지다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낙랑=요동설 vs 낙랑=평양설… 北·中 국가대항전으로 번지다

    한사군의 중심군현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한국의 고대사학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2017년경에는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들이 여럿 나서서 이런 주장을 되풀이했는데, 한 보수 언론은 이들에게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나아가 이들은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질문에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한국일보’, 2017년 6월 5일)”라고 말했다.●南학계는 일제 학자 주장 비판 없이 수용 이들의 말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00년 전 조선총독부에서 ‘낙랑군=평양’이라고 못 박은 이후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논쟁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라고 한·중 사료에 숱하게 나오는 고려·조선의 북방강역을 함경남도 함흥평야로 조작한 이케우치 히로시의 설을 지금껏 추종하는 것처럼 일체의 논쟁 없이 추종한다는 뜻이다. ‘낙랑군=평양’설에 대한 비판은 숱하게 있었다. ‘후한서’(後漢書)의 ‘광무제본기’ 주석에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在遼東)”라고 말한 것을 비롯해서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가 숱하기 때문이다.●北 고조선 노예제와 왕험·낙랑 규명 논쟁 그럼 북한 학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북한 학계도 남한처럼 ‘낙랑군=평양’설이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난 문제라고 생각할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남한과 다른 것은 북한 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 논쟁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고조선의 사회 성격에 대한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 즉 왕험성의 위치와 낙랑군의 소재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고조선의 사회 성격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역사 발전 5단계설 중에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가의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의 생산 관계를 토대로 ‘①원시 공동체 사회→②고대 노예제 사회→③중세 봉건제 사회→④근대 자본주의 사회→⑤공산주의 사회’의 다섯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중 고조선의 사회 성격이 노예제 사회인지 봉건제 사회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사회경제사학자 김광진(金洸鎭)은 ‘력사과학’ 1955년 8~9호에 발표한 ‘조선에 있어서 봉건 제도의 발생 과정’에서 조선 역사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1935년 철학박사 학위를 딴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가 ‘력사과학’ 1956년 3호에 ‘조선 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사회가 없었는가’를 발표해 김광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노예제 사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김광진이 재반박하면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10여 차례의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이 논쟁은 경성제대 출신의 김석형이 ‘력사과학’ 1961년 3호에 ‘조선 고대사 연구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리론상의 문제’를 발표함으로써 정리돼 갔다. 노예제 사회였던 고조선이 봉건제 사회인 고구려·백제·신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었다. 이 이론이 북한 학자들의 지지를 얻어가면서 고조선은 노예제 사회로, 삼국은 봉건제 사회로 견해가 정리됐다. 고조선이 노예제 사회라는 것은 나중에 요동반도의 강상 무덤과 누상 무덤에서 대규모 순장(殉葬) 유골이 발굴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낙랑=평양설 北서 中사료 근거로 비판 고조선의 수도인 왕험성과 낙랑군의 위치 문제도 숱한 논쟁을 거쳤다. 도유호를 비롯한 고고학자들도 처음에는 고조선의 도읍과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보았다. 그러자 문헌 사학자들이 중국 사료를 근거로 평양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와중인 1958년 북한은 리지린이란 학자를 북경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보내 고조선사를 연구하게 했다. 와세다대 출신의 리지린은 해방 후 과학원 력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서 근무했고, 1959년 ‘력사과학’ 5호에 ‘광개토왕비 발견 경위에 대하여’를 발표했지만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유학생으로 선발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북경대 지도교수가 고사변(古史辨) 학파의 중심이었던 구제강(顧剛·1893~1980)이란 사실은 범상한 대목이 아니었다.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고사변 학파는 중국인들이 그간 사실로 받아들였던 숱한 역사적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옛것을 의심해서 가짜를 판별한다”(疑古辨僞)라는 말로 상징되는 고사변 학파는 구제강과 첸쉬안퉁(錢玄同·1887~1939), 북경대 총장을 역임한 후스(胡適·1891~1962) 등이 중심이었다. 이중 첸쉬안퉁은 한자(漢字)를 폐지하고 로마자 식의 병음자모로 바꿔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고사변 학파는 중국 고대사의 숱한 문적들은 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심지어 공자가 쓴 ‘춘추’(春秋)도 공자가 아닌 노(魯)나라 사관들이 집단으로 쓴 것이라고 보았다. 구제강은 ‘첸쉬안퉁 선생과 고대 사서(史書)를 논하다’(與錢玄同先生論古史書)라는 논문 등에서 중국 고대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시대가 뒤로 갈수록 전설 속 고대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이다. 주(周)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된 전설상의 인물은 우(禹)였는데, 공자 때에는 요순(堯舜)으로 끌어올려졌고, 전국(戰國)시대에는 다시 황제(黃帝)·신농(神農)씨로 끌어올려지고, 진(秦)나라 때 삼황(三皇)이 나오고, 한(漢)나라 이후 반고(盤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시대가 뒤로 갈수록 전설상 중심인물에 대한 내용이 확대된다”는 것이다. 공자 때의 순(舜)임금은 ‘다스리지 않고도 다스려지는(無爲而治)의 성군(聖君)’이었지만 맹자(孟子) 때에는 효자의 모범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1926년 ‘고사변’ 제1권을 출간한 이래 1941년의 7권까지 3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사마천 이래 이른바 ‘중국을 위해 치욕의 역사는 감춘다’는 ‘위한휘치’(爲漢諱恥)의 춘추필법으로 중국의 사가들이 왜곡했던 이(夷)의 역사, 즉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밝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유학사관 비판 구제강, 중화사관 못 벗어 그러나 고사변 학파의 중심인물인 구제강 자신은 끝내 ‘위한휘치’의 춘추필법을 벗어나지 못한 중화주의 역사가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고, 만주와 몽골을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제창하고, ‘중국본토론’을 내세우자 구제강은 1936년 ‘변강연구회’(邊疆硏究會)를 창립해 이에 맞섰다. 일제의 ‘중국본토론’은 만주·몽골과 조선 등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니 중국은 본토에 대해서만 통치권을 가진다는 이론이었다. 곧 일제가 만주·몽골을 차지하겠다는 것인데 구제강은 이에 맞서 만주·몽골 등은 중국사의 강역이란 논리로 맞섰다. 구제강은 1939년 2월 자신이 주간을 맡고 있는 ‘변강주간’(邊疆周刊)에 ‘중화민족은 하나’라는 글을 게재해 여러 민족의 혼합으로 중화민족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이 하나의 ‘중화민족’이란 논리로 소수민족의 강역을 중국 영토라고 우기는 국가 이념의 토대가 됐다. 그는 또 운남(雲南)에서 발행하던 ‘익세보’(益世報)에 “‘중국본부’라는 한 이름은 빨리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평론에서 중국인들이 중화와 이민족을 나누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했다. ‘중국본부’라는 용어를 쓰면 일제가 만주와 몽골을 낚아채 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고사변 학파를 주도할 때는 유학사관이 왜곡한 고대사를 의심하자던 구제강은 막상 한중 고대사에 이르자 중화 사관으로 돌아섰다. 좋게 말하면 애국적 중화 사가(史家)가 된 것이었다. 그는 위만조선의 도읍이 대동강 남쪽에 있었고, 따라서 낙랑군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북한에서 온 유학생 리지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리지린은 중국 고대사서에 ‘낙랑=요동’설이 숱하게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구제강의 학문 지도를 받기 위해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학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지도교수인 구제강과 제자 리지린 사이에 일종의 국가대항전이 전개되는 셈이었다. <계속> 北·中 공동 고고유물 발굴 1964년 강상·누상무덤서 ‘요동도 고조선 강역’ 고증 북한은 중국과 1963년 조·중 고고발굴대를 조직해서 만주 지역의 고고유물 발굴에 나섰다. 1964년 요동(遼東)반도 끝자락 여대시(旅大市·여순과 대련)의 감정자구(甘井子區) 후목성역(後牧城驛)에서 강상(崗上) 무덤과 누상(樓上) 무덤이 발굴되면서 고조선의 강역이 평남에 국한되었다는 조선총독부의 주장과 달리 만주까지 걸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서기전 8~7세기쯤의 무덤인 강상 무덤에서는 140명의 순장(殉葬) 무덤이 발견됐고, 누상 무덤에서도 주인을 따라서 죽인 50여명의 순장 무덤이 발견됐다. 고조선이 노예를 순장했던 노예제 사회였다는 사실이 유적·유물로 드러난 것이었다.
  • 경남 김해 주택가서 청동기 고인돌과 조선 성곽 등 유적 다수 발굴

    경남 김해 주택가서 청동기 고인돌과 조선 성곽 등 유적 다수 발굴

    경남 김해시는 2일 시내 대성동과 동상동 일원 구도심 주택가 밑에서 청동기시대 고인돌 여러 기와 조선시대 성곽 일부인 치(雉) 등의 유적이 발굴됐다고 밝혔다. 유적이 발굴된 곳은 옛 김해읍성 북문지 근처로, 발굴된 유적은 모두 도심 내 기존 노후 주택을 뜯고 새로 단독주택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고인돌 유적은 재단법인 강산문화연구원이 시로부터 대성동 주택가 발굴조사를 의뢰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인돌 6기와 돌널무덤 1기, 김해읍성의 해자 일부 등을 발굴했다. 고인돌 내부에서는 간돌칼과 간화살촉, 붉은 간토기(홍도·紅陶) 등이 출토됐다.강산문화연구원은 대성동 고인돌이 발굴된 곳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서상동고인돌(경상남도 도기념물 제4호)이 있고,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도 고인돌 6기가 그려져 있어 이 일대에 고인돌이 많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원은 이번에 발굴된 고인돌 등 유적은 금관가야 이전의 구간(九干)사회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평가했다.조선시대 성곽 유적은 재단법인 해동문화재연구원이 국비지원을 받아 동상동 단독주택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굴됐다. 치(雉)는 성곽 시설 가운데 하나로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막는 시설물이다. 김해읍성 치성은 고지도에 그려져 있어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910년대 부터 일제 읍성 철거정책에 따라 김해읍성도 파괴됐다.김해읍성 치성 기단석 발굴은 이번이 처음으로, 기단 위 성벽부분은 파괴돼 남아 있지 않지만 기단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치성 기단석은 2~4단이며 평면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다.해동문화재연구원측은 김해읍성 연구 및 복원·정비사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시는 이번 조사에서 좁은 면적에 가치있는 매장문화재가 많이 발굴된 사실로 볼때 시내 지하 곳곳에 가야왕도 김해 명성에 어울리는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돼 유적 보호에 만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부활절 날짜가 매년 달라지는 이유는?

    부활절의 날짜가 매년 달라지는 이유가 뭘까. 특히 올해는 부활절 날짜가 만우절과 겹치며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한 날짜는 1월 17일이다. 지금의 개신교는 이 날에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춘분을 기준으로 계산한 날에 부활절을 지킨다. 만월은 보름달이 되는 날로 음력 15일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주일은 제1회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춘분 후의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주일로 정한다. 대부분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의 기간 중의 한 날로 정해지며, 올해는 1일이 해당 날이 됐다. 부활 주일에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달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절마다 나누며 기념하는 달걀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한 새로운 삶을 상징한다. 달걀 겉면을 장식하는 전통은 사순절(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동안 달걀 섭취가 금지된 13세기부터 시작됐다. 금지된 시간 동안 사람들은 금식과 고행을 상징하기 위해 달걀을 칠하고 장식했고, 부활절 당일 축하의 형태로 달걀을 먹은 것이 이어져 왔다. 기독교인들은 지난달 26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31일까지는 ‘고난주간’으로 명하며 기념했다. 고난주간에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도들은 언제부터, 왜 계란을 주고 받았을까. 가장 많이 알려진 설은 고대 유럽 십자군 전쟁 당시부터 시작됐다. 당시 남편을 전쟁터에 내 보낸 한 부인이 피난을 가 산골마을에 살게 되었고, 그 마을 주민들의 친절함에 보답하는 의미로 부활절에 음식과 함께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나눠준 것이 그 시작이라고 알려졌다. 그 부인은 항상 계란에 집안의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이라는 글을 적어줬다. 그러던 어느해 부활절, 그 부인은 한 소년에게 같은 계란을 건넸고, 그 소년은 길에서 병든 군인을 만나게 된다. 군인은 계란에 적힌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글을 보고 너무 놀라 소년에게 어디서 받았는지 물어 부인과 다시 만날수 있게 되었다. 부인은 그 후에도 해마다 부활절이면 자신의 남편을 찾아준 색 달걀을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의 부활절 계란으로 이어지고 있다.병아리가 계란 껍질을 깨고 태어나는 것을 부활에 연관시켰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초대교회부터 고난주간과 사순절 기간동안 성도들은 고난을 생각하며 금식하고 먹는 것을 절제했는데 부활절에 계란을 먹어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란 이야기도 전해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특파원 생생 리포트] 납골함·무덤까지 나눠 공유하는 日

    [특파원 생생 리포트] 납골함·무덤까지 나눠 공유하는 日

    고령화와 소자화(핵가족) 물결 속에서, 일본의 장례 및 장묘 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장례를 가족 친지들만 모여서 치르는 가족장이 도시에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는 등 장례의 간소화가 빠르게 확산하고, 여러 형태의 장묘 형태도 선보인다.가족도 아니고,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과도 죽어서 유골을 함께 섞어 같은 분묘, 같은 납골함에 안치하는 ‘납골함 셰어링’(나눠 쓰기), ‘무덤 공유’까지 등장했다. NHK는 최근 도쿄 아라카와구에 있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사찰인 마치야고묘지(町屋光明寺)가 납골함 셰어링을 한다고 전했다.●도쿄 사찰에 납골당 빌딩 생겨… 최대 6명 함께 안치 지난해 11월 사찰 경내에 세워진 5층짜리 납골당 빌딩에 1500구획으로 나눠진 유골 수납공간이 마련됐다. 친구들 묘지란 뜻의 ‘도모바카’(友墓)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도 최대 6명까지 같은 납골함·납골묘에 안치된다. 따로 장례를 치른 유골을 한데 보관하는 합장 형태다. 사찰 측은 유골관리와 함께 제사도 대행한다. NHK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진짜로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같은 납골함, 납골 분묘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전했다. 남편과 같이 안치되길 원하지 않는다며 진저리치는 부인네들도 있고, 가족과 같은 공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가족 거부파’들도 이용하고 있다. 연고가 없는 ‘무연고파’도 있다. 핵가족화 확산 속에서 가족관계가 소원해지고 나 홀로 살아가는 ‘일인 가족’도 크게 늘면서,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살아생전 가깝게 지내고 정을 나눠 오던 사람들이 죽어서도 함께 한 공간 속에서 안식을 취하겠다며 이 납골함 셰어링을 선택하고 있다. “결혼은 안 했지만, 죽어서는 혼자 무덤에 들어가기 싫다. 그렇다고 남성은 싫고, 분묘에 마음 맞는 여자 친구들끼리 함께 들어가고 싶다”는 한 미혼 여성의 말이 이 사찰의 납골 셰어링의 발단이 됐다. ●밤샘 없는 1일장·고별식 없이 화장만 하는 ‘직장’ 오호라 주지는 동호인 모임에서 친목을 다져온 이들이나 성적소수자 등의 수요도 있다고 봤다. 그는 NHK에 “현대사회는 집이나 가족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늘고, 안장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장묘 형태도 취미 등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한편 장례 관련 사이트를 운영하는 가마쿠라 신서는 고령화, 소자화 진전 속에서 장례를 치를 사람도, 무덤을 돌볼 사람도 줄고, 여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장례 비용절감과 간소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밝혔다. 2017년 기준으로 가족장이 38%까지 늘었고, 도쿄 등 대도시에서는 절반을 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내놓았다. 가족장은 일반 장례에 비해 경비가 30% 이상 적게 들어 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선호가 는다는 분석이다. 밤샘 없는 1일장도 전체 장례의 4.4%, 고별식 없이 화장만 하는 직장(直葬)도 4.9% 등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장례 형태들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핵잼 사이언스] 병약한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 전장 누빈 당당한 전사!

    [핵잼 사이언스] 병약한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 전장 누빈 당당한 전사!

    황금가면의 주인이자 소년 파라오로 알려진 투탕카멘이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병약하기만 한 어린 파라오는 아니었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투탕카멘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재위 BC 1361∼1352) 파라오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사망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영국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은 지난 2014년 투탕카멘이 생전 ‘내반족’이라는 발 기형에 뻐드렁니를 가졌으며, 근친상간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신체에 여러 장애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당시 연구진은 투탕카멘의 조기 사망 역시 이러한 병약한 신체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최근 영국 노샘프턴대학 연구진은 RTI(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라는 촬영 기법을 통해 3000년 전 죽은 소년 파라오의 유물을 재분석했다. RTI는 인공조명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음각된 글자의 모양을 촬영한 뒤 이미지 처리를 거쳐 선명도를 높여 판독을 용이하게 하는 ‘디지털 탁본’이다. 연구진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가죽 소재의 갑옷을 정밀 분석한 결과 갑옷의 가죽 부분 모서리에서 닳거나 긁힌 흔적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를 이끈 루시 스키너 박사는 “갑옷에 있는 흔적은 투탕카멘이 이를 입고 전쟁에 나간 ‘전사’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투탕카멘은 더이상 병약하고 여린 소년왕이 아닌 다른 이미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연구진은 투탕카멘 가죽 갑옷의 비밀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갑옷이 세상에 다시 나온 지 약 100년이 흘렀지만, 전문가들은 갑옷에 사용된 가죽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스키너 박사는 “일반적으로 가죽은 수분과 만나면 쉽게 손상되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연구하기가 매우 어렵다”면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가죽을 만드는 데 사용된 고대의 방법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탕카멘은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1922년 11월 나일강 서쪽 ‘왕가의 계곡’에서 황금 가면를 쓴 그의 미라와 수많은 부장품이 보존된 그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유명해졌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흰 눈 위로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집니다. 피는 얼음 결정을 따라 빠르게 번져 갑니다. 그 모습이 모가지 꺾어 떨어진 동백꽃을 닮았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흰 눈 위에 떨어진 피에서 혹독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길어 올렸습니다. 동백꽃은 그렇게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지요. 한 설문조사에서 4·3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3분의1, 관심 없다는 이는 절반을 넘었다고 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더욱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 4·3 사건입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사과할 건 사과하고 청산할 건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사악하고 검은 아가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 여정은 4·3 사건을 따라가는 것으로 꾸렸습니다.모처럼 제주까지 갔는데 상처의 흔적만 보듬고 오라는 말이냐고 힐난할 수 있겠습니다. 한데 앞서 결론을 밝히자면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습니다. 단언컨대 처음 제주를 방문한 이라도 그렇습니다. 4·3의 무대는 아름다운 제주의 또 다른 면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심했을 뿐 명소라 알려진 곳에, 혹은 그 주변에 없는 듯 있었습니다. 제주의 4월을 두고 흔히 ‘침묵의 봄’이라고 합니다. 북촌리 ‘아이고 사건’에서 보듯 눈물마저 죄가 된 시절엔 누구나 말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피 끓는 포한과 바닥 모를 체념의 끝은 침묵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니 입은 있으되 말하지 못했고, 기억은 선연하되 한사코 떨어내려고만 했겠지요. 제주엔 진작 제비가 왔습니다. 반팔 옷차림으로 훌훌 싸돌아다닐 만큼 기온도 포근해졌습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시립니다. 물론 스스로 삭이겠지요. 그래도 주변의 위로가 더해지면 생각보다 빠르게 녹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본 한 장의 지도였다. 제주 전체를 행정 구역에 따라 나눈 뒤 색을 입혔다. 공통적인 건 붉은빛 일색이라는 것. 구역에 따라 빨강과 분홍 등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가 붉었다. 이는 ‘제주 4·3 사건’ 당시의 피해 정도를 표시한 지도다. 붉은빛일수록 더 많은 주민이 희생됐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4·3의 광풍에서 온전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게 지도에 담긴 의미다.●섬뜩한 진실과 마주한 ‘4·3 평화기념관’ 4·3 여정의 첫걸음은 제주 4·3 평화기념관이다. 4·3 사건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제주 사람들은 ‘4·3 사건’이란 이름 자체에 불만이다. 지나치게 ‘사실’(史實)에만 충실해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의미와 가치가 담긴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의 관람 동선 첫 코너에 ‘백비’(白碑)를 뉘어 놓은 건 그 때문이지 싶다. 백비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비석이다. 제주 사람들의 뜻은 간명하다. 언젠가 4·3 사건이 가치와 의미에 부합하는 이름을 얻게 될 때 이 비석에 새겨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기념관 안엔 4·3 사건과 관련된 각종 기록과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육지부’에서 ‘관광차’ 온 이들이라면 담기 버거울 정도의 섬뜩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기념관 밖은 평화공원이다. ‘비설’(飛雪)이란 이름의 모녀상과 제단, 1만 4000여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등이 조성돼 있다. 공원 가장 위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은 꼭 찾길 권한다. 4·3 희생자 중 행방불명인 3800여명의 이름을 새겨 표석으로 세웠다. ‘육지부’의 형무소로 끌려가 못 돌아온 이도 있고, 바다에 수장됐거나 여태 제주 땅 어딘가에 묻혀 있는 이도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살아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지는 못했지만, 이름이나마 한라산 아래 산담(무덤을 둘러친 돌담)에 안겼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이념으로 시작해 희생으로 끝난 섬의 눈물 이쯤에서 4·3 사건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살피자.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내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집회였다.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였다. 한데 기마경찰은 무심히 지나갔고, 이를 본 군중이 돌을 던지며 경찰을 쫓았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 군정에서 사태파악에 나섰다. 미 군정의 조사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적었다. 제주가 ‘레드 아일랜드’(빨갱이의 섬)라 규정되는 순간이다. 이어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서북청년회와 공권력의 탄압이 자행됐다. 이에 맞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에 나섰다. 이후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됐다. 물론 4·3 사건의 성격을 두고 여태 논란은 있다. 중요한 건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1에 달하는 희생자다. 최대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 가운데 목숨을 걸 만큼 정치적 신념을 가졌던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희생자 가운데 33%는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였다. 충돌의 배경은 이념이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었던 셈이다. 제주 4·3 사건을 이념보다 인권과 인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 여정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단어는 ‘예비검속’이다. 일종의 블랙리스트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이들의 목록을 작성한 뒤 전쟁 등 유사시에 잡아들이거나 상황에 따라 즉결처형했다.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인근의 섯알오름이 대표적이다. 1950년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이다. 군이 출입을 통제한 탓에 1956년에야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32구의 시신은 인근의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됐다. 묘역의 이름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백여명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날한시에 올려 한 자손이 된다는 뜻이다.●아이의 작은 묘탑에 놓인 애달픈 장난감 북촌리 너븐숭이를 찾으면 코끝이 찡해진다. 어린아이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작다. 면적도 작고, 봉분을 둘러싼 산담도 작다. 봉분은 모두 20여기 정도 되는데, 그중 최소 8기는 4·3 때 목숨을 잃은 아이의 묘라고 한다. 묘지 앞엔 검은 돌로 만든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돌과 돌 사이엔 동백꽃 등을 꽂아 뒀다. 미니어처 자동차도 눈에 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요 버스’다. 4·3 당시 비운의 별이 된 아이가 타요 버스를 알 리 없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일 것이다. 늦은 밤이면 봉분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꽂아 둔 사탕을 먹고 장난감도 갖고 놀 것 같다.●비행기 소리로 덮인 최대 학살터 ‘정뜨르’ 북촌은 이른바 ‘아이고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1954년 1월, 너븐숭이 주민 가운데 일부가 4·3 사건을 추모하며 설움에 북받쳐 울다가 경찰에 치도곤을 당했다. 이게 ‘아이고 사건’이다. 당시엔 이처럼 울음마저 죄가 됐다. 정뜨르는 어딜까. 4·3 당시 최대 학살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4·3 지도에도 틀림없이 나와 있다. 한데 도두항 주변을 오가는 주민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고개를 외로 꼬기 일쑤다. 정뜨르는 지금의 제주공항이다.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던 거다. 손바닥 선인장 군락(천연기념물 429호)으로 이름난 월령리엔 고 진아영 할머니 집이 있다. 진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4·3 당시 총탄에 턱을 다쳐 평생 무명천으로 턱 주변을 두르고 살았다. 작은 단칸방 한 켠에 진 할머니의 영정이 남아 있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4) →가는길:4·3 사건 70주기를 앞두고 제주 곳곳에서 동백 배지달기 등 다양한 추념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이번만은 올레길에서 벗어나 4·3길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6~7㎞에 이르는 코스를 2시간 정도 걸으며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추천한 코스는 모두 4개다. 제주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미리 신청하면 ‘4·3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걸을 수 있다. 4·3 콘텐츠 관련 내용은 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www.visitjeju.net)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4·3 길을 걷다’란 지도도 꼭 챙기는 게 좋다. 길잡이로 큰 도움이 된다.→맛집 : 도두 해녀의 집(743-1500)은 전복미역국 등을 잘한다. 주방의 손길보다 신선한 재료가 맛을 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음식에 별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정뜨르(제주공항) 인근에 있다. 커피 한 잔 마시겠다면 쉴만한 물가(796-3808)가 괜찮다.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집 앞에 있다. 커피 맛은 옅은 편이어도 업소 앞 풍경은 매우 짙다. 명진전복(782-9944)은 전복돌솥밥 등으로 소문난 집이다.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명소 반열에 올랐지만 맛은 여전히 예전처럼 좋은 편이다. 다랑쉬 오름과 가깝다.
  • 남원 유곡·두락리 고분군 호남 가야유적 중 첫 사적

    호남 가야유적 중 첫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나왔다. 정부가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를 국정과제로 선정한 이후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와 두락리 일원에 있는 봉토분 40여기를 묶은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호남 지역에 분포한 가야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첫 사례다. 그간 정부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해 사실상 방치돼 있었던 호남 가야 유적에 대한 이번 조치를 계기로 조사·연구도 활발해질 것으로 학계는 기대한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지리산의 한 줄기인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언덕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가야와 백제 무덤으로 이 중엔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무덤도 12기 포함돼 있다. 1989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함께 확인됐다. 특히 32호분으로 명명된 타원형 무덤에서는 길이 7.3m, 너비 1.3m, 깊이 1.8m 크기의 대형 수혈식 석곽묘가 발견됐는데 과거 백제 왕릉급 무덤에서 나오는 청동 거울과 금동신발 조각 등 최고급 유물이 출토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봉분을 견고히 하기 위해 흙을 얇은 판 모양으로 번갈아 가며 켜켜이 다져 올리는 판축기법으로 쌓고, 석곽을 축조할 때 나무기둥을 이용하는 등 당시 무덤 축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드러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5~6세기 전북 동부 지역의 고대사와 고대문화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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