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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인생 선배들이 말하는 ‘나잇값’ 잘하는 방법은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인생 선배들이 말하는 ‘나잇값’ 잘하는 방법은

    팍팍한 세상입니다. 아픈 청춘이 많습니다. 청춘들이 기꺼이 지갑을 꺼내 책을 삽니다.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일 겁니다. 인생 멘토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아픈 청춘을 위로하겠다며 감성 가득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가 판치는 이유입니다.최근 두 권의 신간이 눈에 띕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 이야기’(열림원)와 김욱 번역가의 ‘취미로 직업을 삼다’(책읽는 고양이)입니다. 저자 나이부터 압도적입니다. 김 명예교수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으로 100세입니다. 지난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등장해 기자들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죠. 김 명예교수는 책에서 사랑, 우정, 진리 등을 설명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철학자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냅니다. 사랑이나 우정 같은 눈에 잡히지 않는 개념도 쉽게 풀었습니다. 100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인생의 진리가 손에 잡히는 듯합니다. 김 번역가는 85세입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책은 김 번역가가 신문사에서 은퇴한 뒤 보증을 잘못 선 탓에 재산을 모두 날리고 무일푼이 된 이후 이야기를 주로 다룹니다. 묘막에 얹혀살며 남의 집 무덤 관리를 했다는 이야기며, 나이가 들면서 굳어 버린 육체 피로에 관해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한때는 죽을 생각마저 하며 인생의 절벽에 다가갔지만, 의지를 되살려 도전했고, 여전히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일흔이 넘은 뒤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저자는 지금까지 무려 200여권을 번역했습니다. 지금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8시간을 일하고, 앞으로 10년 더 일할 계획이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모습이 참 멋집니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이들의 에세이를 읽다 보니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그런 에세이 책들이 점령한 서점에서 진짜 인생 선배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gjkim@seoul.co.kr
  • 익산 쌍릉서 문자 없는 1m 묘표석 2점 발굴

    익산 쌍릉서 문자 없는 1m 묘표석 2점 발굴

    백제 선화공주, 사택덕적 딸 등 주인을 둘러싼 이견이 분분한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소왕릉에서 길이 1m가 넘는 묘표석(墓表石) 두 점이 발굴됐다. 모양새가 전혀 다른 두 묘표석은 명문(금석에 새긴 글자)이 없는 무자비(無字碑)로, 소왕릉 피장자를 추정할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19일 전북 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따르면 두 묘표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과 유사한 석비(石碑) 형태와 원뿔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석주(石柱) 형태다. 석비형 묘표석은 길이 125㎝, 너비 77㎝로 석실 입구에서 1m 지점에서 비스듬하게 선 채로 드러났다. 둥근 석주형 묘표석은 봉토에서 누운 채로 출토됐다. 길이 110㎝, 너비 56㎝다. 최완규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국내 왕릉급 고분에서 무자비 묘표석 두 점이 발견된 첫 사례”라며 “정밀히 조사했으나 글자는 없었다. 무덤을 축조한 석재들과 재질이 비슷하고 일부러 거대한 돌을 무덤 안에 넣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백제시대 묘표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조사 전부터 관심을 끈 피장자 추정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대왕릉 조사에서는 관대 위 나무상자 안 인골이 620∼659년에 사망한 60대 남성의 뼈라는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 무덤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렸다. 소왕릉은 대왕릉과 180m 떨어져 있어 무왕의 비인 선화공주가 묻혔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차 정릉천 따라’ 편이 추석 다음날인 지난 14일 성북구 정릉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추석 연휴 주말을 북한산의 맑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정릉천에서 보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 집결, 경국사에 들어가 고찰의 향기를 즐겼다. 주말이라 문을 열지 않는 명원민속관(한규설 가옥)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릉천변은 1950~1970년대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하며 살던 ‘문예촌’이었다. 화가 이중섭·박고석·한묵·박세원·김병기, 소설가 박경리·박화성·박연희·박계주·최정희·계용묵, 시인 고은·조영암·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작곡가 금수현·김대현, 극작가 차범석, 시사만화가 김성환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린 주부 참가자들에게 피로를 씻어 주는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정릉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 가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고, 담벼락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과 책 표지가 길손을 안내한다. 그러나 ‘보국문로 29가길 11’이라는 도로명주소판이 붙은 집엔 서글프게도 ‘박경리’ 문패가 아니라 ‘서울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낯선 대안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서울시가 예산 부족으로 매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가자들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을 자꾸 서성거렸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속 댄스장이자 고급 요정이었고, 한때 신혼여행지였던 옛 청수장을 개조해 사용하는 북한산탐방안내소에 들어가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북한산 정릉골은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된 뒤 2007년 내부순환도로 국민대입구 램프가 추가 개통되기 전까지도 백악산~보현봉 자락이 장벽처럼 막아서서 개발의 손길을 거부하는 청정의 숲이었다. 청수장으로 대표되는 정릉유원지는 추억과 안식의 공간이었다. 정릉천을 따라 청수장으로 가노라면 경국사가 나타난다. ‘경국사적기’에 따르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봉 아래에 있다고 해서 청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릉의 옛 지명이 ‘살을 에듯 추운’ 사을한리이고, 정릉천이 청수라고 불리고, 청수장이 정릉유원지의 랜드마크가 된 배경에는 모두 청봉이라는 자연 지명의 힘이 작용했다. 청암사는 1546년(명종 1년) 문정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라고 개명했다. 1669년(현종 10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흥천사, 봉국사와 함께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지정돼 부흥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정릉이라는 능이 사라졌다가 26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능을 지키는 3개 원찰의 이름이 모두 바뀌는 변고를 겪었다. 봉국사는 본래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사였지만 현종 때 ‘나라를 받든다’는 봉국사로 개명해 명맥을 이었다. 또 1409년 정릉이 정동을 떠나 정릉동으로 이장됐을 때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신흥사로 개창, 원찰로 삼았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이름을 바꿨다.조계종 본산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처음 묻혔던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17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태조가 죽은 지 9년 만에 능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고, 1510년 유생들이 이단을 없애 버린다며 불을 질러 폐사의 비운을 맞았다.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종 이방원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만 모시고, 계모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의 앙갚음에 정릉동 정릉은 황폐화했다. 172년이 흐른 1581년(선조 14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받고자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 정릉의 위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았다. 1669년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종묘에 배향되고, 능의 위상을 되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소낙비가 내려 정릉골을 흠뻑 적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준 ‘세원우’라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사실상 첫 왕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흥천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흥천사는 조선 첫 왕비와 마지막 왕비가 동시에 깃든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정릉의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박고석이었다. 1955년 정릉에 자리잡은 박고석을 따라 부산 피난 시절 삼총사를 이뤘던 이중섭, 한묵이 가세했고, 청수장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이중섭이 죽자 유골은 삼등분됐는데 일부는 일본의 부인(이남덕)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시인 구상에 의해 망우리 묘지로 갔다.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뿌려졌다. 북한산행의 기점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되다가 1945년 해방 뒤 민간인이 인수해 사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엔 특수부대 훈련 숙소로 사용됐다. 그 후 고급 요정 ‘청수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댄스홀로 등장한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 4월 2일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에 편입됐다. 개축 공사를 거쳐 2001년부터 북한산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유럽풍 카페를 연상케 하던 청수장 본관만 남겨 두고 등산로와 맞닿아 있던 담과 부속 건물은 허물어 아담한 정원으로 꾸몄다.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 살던 박경리(1926~2008)는 1965년부터 2002년까지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서 1969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원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삶의 터전이었다. 이웃사촌 박고석이 삽화를 그린 ‘노을진 들녘’은 1961년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총 250여회를 이어 나갔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한 뒤 대표작 토지 1부 집필에 들어갔다. 정릉은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고통도 담긴 곳이다.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정릉 집은 차라리 유배지였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선생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수수께끼는/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뼈가 으스러지게/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아 참, 그 얘기는/저승에나 가서 풀어놔야지/그 끔찍한 사실들을/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정릉시대의 쓰라린 편린이다.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 2017년 간)에 실린 김형국의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문학’에 따르면 “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 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 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썼다. 실제 통영 박경리기념관 선생의 묘소에는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2차 서울의 문학3(윤극영의 반달)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21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1500년 압독국 여인은 어떤 모습일까…경산시 얼굴형 복원

    1500년 전 압독국(押督國) 귀족 여인은 어떤 모습일까? 경북 경산시는 1500여년 전 고대 압독국 귀족 여인의 얼굴형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18일 밝혔다. 압독국은 경산지역에 기반을 둔 고대 소왕국의 하나로 전해진다. 이번에 복원한 압독국 여인 얼굴은 1982년 경산시 임당동에서 발굴한 압독국 지배자급 무덤(5세기경 축조)에서 출토된 유골을 토대로 했다. 영남대 박물관 주도로 서울 가톨릭대 의과대학 김이석 교수팀이 CT 촬영을 통해 3차원 머리 뼈 모델을 완성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이원준 박사가 근육과 피부를 복원했다. 미술가 윤아영 작가가 그래픽 채색과 사실화 작업으로 마무리했다. 복원된 얼굴형은 26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영남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을 되살린다’ 특별전에서 공개한다. 경산시는 앞으로 성인 남성과 어린이 인골,순장 계층별 인골도 차례로 복원할 계획이다. 또 고분에서 함께 발견된 상어 뼈, 조개껍데기, 꿩 등 조류와 포유류 유존체를 이용해 고대의 제사 음식 종류와 유통 경로도 연구할 예정이다. 경산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월드피플+] 월남전서 꽃 핀 베트남 여성과 미군의 사랑…50년 만 감동 재회

    [월드피플+] 월남전서 꽃 핀 베트남 여성과 미군의 사랑…50년 만 감동 재회

    월남전에서 만난 미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이 50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한 사연이 알려져 감동을 주고 있다. 14일 베트남 현지 언론인 또이째(Tuổi Trẻ)는 전직 미국 군인 켄 리싱(Ken Reesing, 73)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전했다. 지난 1968년 월남전 당시 22살의 켄은 베트남 남부 도시 비엔호아에 있는 미군 기지의 물류서비스 센터에 파병됐다. 그는 주말이면 기지 내 클럽을 찾곤 했는데, 그곳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베트남 여성 투이란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부 뜨 빈이나 ‘투이란’이라는 가명을 썼다. 당시 16살에 불과했던 그녀는 청순하고 앳된 미모에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켄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피부, 매력적인 미소의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그녀 또한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1969년 9월 켄이 미국으로의 복귀 명령을 받으면서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켄은 그녀에게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청했지만, 그녀는 가족을 떠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는 떠나기 전날 그녀에게 편지 봉투 50장을 건넸다. 봉투에는 1번~5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그는 “50번째 편지 봉투를 받기 전에 반드시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녀와의 재회의 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터였다. 빈은 날마다 미국에 있는 켄에게 편지를 부쳤고, 50장의 편지 봉투는 채 두 달도 안 돼 바닥이 났다. 이후에도 빈과 켄의 편지 왕래는 수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1975년 월남전이 끝났고, 켄의 가족들은 그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의견을 완강히 말렸다. 빈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한 켄은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와의 연락이 서서히 끊겼고, 세월은 흘렀다. 하지만 켄의 마음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빈에 관한 소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녀의 이름을 ‘투이란’으로 알고 있던 그는 그녀의 본명과 집주소조차 알 수 없었다. 과거 그녀와 만났던 비엔호아의 클럽에 편지를 수차례 보냈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서 클럽 역시 폐쇄됐던 것이다. 몇 십 년간 그녀를 찾아 헤맨 켄의 노력이 결실을 보일 듯한 시기가 다가왔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터넷을 통해 정보 공유가 원활해졌고, 그는 국제 탐정 에이전시까지 고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그녀가 전쟁 중에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그녀의 무덤에라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지극정성이 통했던 것일까? 호치민에 사는 한 베트남계 미국인 로버트가 그의 소식을 듣고는 돕겠다고 나섰다. 로버트는 소셜네트워크의 도움으로 드디어 지난 6월 빈의 소식을 찾아냈다. 로버트는 직접 그녀의 집이 있는 비엔호아를 방문해 켄의 과거 사진을 보여 주었다. 빈은 50년 전 연인의 이름과 모습을 기억했다. 50년간 찾아 헤맸던 첫사랑의 연인을 드디어 찾아낸 켄은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후로 매일 되뇌어 왔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을 베트남어로 전했다. 50년 동안 가슴속에 묵혀 두었던 말이었다.드디어 이달 12일 켄이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호치민 떤선녓 공항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공항에 나와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 멀리 켄이 장미 꽃다발을 든 모습이 보였다. 50년 만의 재회지만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천천히 다가가 뜨겁게 포옹했다. 한마디 말조차 없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빈은 켄의 얼굴을 자꾸 어루만졌고, 켄은 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현재 빈은 이혼 후 딸과 살고 있으며, 켄 역시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다. 켄은 비엔호아 동나이에 있는 빈의 자택에서 2주간 머물 예정이다. 빈의 딸과 가족들은 모두 이 특별한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 켄과 빈은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길 것”이라고 전했다. 국경과 시간을 초월한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베트남 전역에 알려지면서 응원의 메시지가 쇄도하고 있다. 이종실 호치민(베트남)통신원 jongsil74@naver.com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고대 이집트인들도 즐겼던 맥주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고대 이집트인들도 즐겼던 맥주

    맥주는 이제 한국인들에게도 일상적인 음료가 된 것 같다. 한국에서의 연간 1인당 맥주 소비량이 2018년에는 53리터에 이르렀다는 통계도 있다. 소비량이 100리터가 넘는 체코나 독일, 폴란드 같은 세계 최대 맥주 소비 국가들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는 양이지만, 한국에서는 소주나 전통주 막걸리 등이 계속해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소비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는 이 음료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들 가운데 하나다. 이집트에서는 선왕조 시대(기원전 4000~3100년경)부터 히에라콘폴리스 등지에서 양조의 흔적이 확인된다. 양조 작업에 사용됐던 것으로 여겨지는 원뿔 모양의 용기들이 발견됐고, 용기 내부에 양조에 쓰인 곡물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맥주는 고대 이집트어로 ‘헨케트’라고 하는데, 이 맥주라는 단어가 문자 기록으로 처음 확인되는 것은 고왕국 5왕조 시대(기원전 2494~2345년경)다. 이후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1650년경)가 되면 양조 작업을 묘사한 나무 모형이 부장품으로 사용되거나, 비슷한 주제의 무덤 벽화가 그려지게 된다. 맥주는 이집트에서 빵과 더불어 주식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집트의 맥주는 제빵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맥주는 보리나 에머밀을 반죽해 살짝 구운 뒤 갈아서 물을 부어 자연 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아마 현대의 맥주와는 달리 탁한 빛깔을 띤 걸쭉한 상태였을 것이다. 필수적인 음식으로 여겨졌던 만큼 맥주는 급여로 제공되기도 했다.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경)에 파라오의 무덤을 만들던 장인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 유적인 데이르엘메디나에서는 관련 기록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왕국 시대의 서사문학인 ‘시누헤 이야기’에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이집트로 귀환한 시누헤를 환영하기 위해 맥주가 준비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맥주는 축제나 연회 같은 특별한 이벤트에서는 다량으로 소비됐던 것 같다. 신왕국 시대 무덤 벽화 속의 연회 장면에는 연회 참석자들이 지나친 음주 끝에 토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아니의 격언’에도 “맥주 마시는 것을 너무 탐닉하지 말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그만큼 맥주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일상적이면서도 큰 즐거움을 주는 음료였다. 맥주는 살아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필요한 식품으로 여겨졌다. 널리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망자를 위한 주문에서도 맥주는 필수적인 제물로 등장하는데 주문은 이렇다. “제두의 주인이자 위대한 신, 아비도스의 주인인 오시리스에게 왕이 드리는 봉헌물. 그가 드리는 음성 봉헌. 빵과 맥주, 소와 가금류, 알라바스터와 아마포, 그리고 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훌륭하고 순수한 모든 것들.”현대의 이집트는 이슬람교도들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나라에서는 의외로 꽤 괜찮은 맥주가 생산된다.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맥주를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 이집트가 오래도록 서구 사회와 교류를 해 왔고, 매년 수백만명의 여행객이 방문하는 관광 대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이집트의 맥주는 ‘룩소르’나 ‘사카라’ 같은 유적지들의 지명이 이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스텔라’다. 이 맥주는 벨기에인들이 19세기 말 이집트에 세운 양조 회사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천년 전에 이집트 땅에서 탄생한 맥주가 세계를 돌고 돌아서 100여년 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셈이다. 이후 이 맥주 회사는 국영화됐다가 현재는 네덜란드계의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이 소유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집트산 맥주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브랜드가 무엇이 됐건 오늘 저녁에는 다소 시원해진 저녁 바람과 함께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겨 보는 것이 어떨지. 우리들과 같이 맥주 한잔의 여유에 무척이나 즐거워했을 수천년 전의 고대 이집트인들을 추억하며.
  •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포기한 책들의 성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포기한 책들의 성

    독자들이 절대 만날 수 없는 책이 있다. 모든 원고는 편집자의 손을 거치는데, 이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통과 못하는 원고들이 생겨난다. 내용과 수준 미달의 글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수준급인 데다 주제가 기존 책들과 겹치지 않으며, 어떤 이들이 간절히 원해 왔을 법한 책들을 말한다. 100여년 전 프랑스의 고고학자 P는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등에 업긴 했지만 아시아 고고 발굴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냈고, 그의 업적은 지금도 기릴 만하다. 한 성실한 학자가 그의 책을 번역해 투고했고, 우리는 그 책을 진지하게 검토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최소한의 독자를 확보하는 데 자신이 없어서였다. 일본 학계의 한 거두는 에도시대 사람들이 독서에 유난히 몰두했던 걸 주제 삼아 흥미로운 책을 펴냈다. 일본어 고어를 옮기기 까다로웠을 텐데 번역은 좋았고, ‘스스로 배우는 독자’의 탄생은 되짚어 볼 만한 주제였다. 그러나 한 실력 있는 소장학자가 옮긴 이 원고는 안타깝게도 편집자의 결단에서 비껴났다. 에도의 독자들이 열성적으로 읽었던 건 유학 경전인데, 이걸로 지금 우리 독자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이 외에도 최근 두어 달 사이에 제안받은 원고 중 아일랜드 역사를 다룬 것은 한국 현실이랑 너무 멀어서, 박물관 관련 원고는 전문적이어서, 프랑스 이론가 책은 이론이 점점 죽어 가는 독서 시장과 동떨어져서 과감히 배제됐다. 그 훌륭한 책들이 어쩌면 나오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편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 판단 오류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자아냈다. 출간되지 못한 책은 누구 탓이 클까. 저자와 번역자는 편집자를 설득하려 하고, 편집자는 독자의 심기와 상태를 살핀다. 그러면 최종 책임은 독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왜 독자들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변덕까지 심해 편집자가 양질의 책을 포기하게 만드는 걸까. 하지만 독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이 질문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생업과의 사투 속에서 책 읽을 시간을 어렵게 마련하는 존재이고, 책 읽는 습관도 스스로 길러야 할 만큼 큰 임무를 자기에게 부과하고 있으니 말이다. 편집자가 중간 역할을 잘 못하는 것인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 그들이 때로 눈앞의 이익에 함몰되는 것은 사실이다. 겉으론 뚝심 있을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영향력 있는 방송에 매달리고, 대중추수주의자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편집자 ‘이’와 ‘고’만 봐도 웬만한 잔바람에는 옷깃도 여미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이 이뤄 내는 일들은 빛나진 않더라도 지난 세월 한국 사회가 대충 가려 놓고 지나쳤던 구멍들을 성실히 메우고 있다. 종합하자면 들뜨고 휙휙 바뀌는 시장, 좋은 책은 안 팔린다는 편집자들의 내재화된 체념, 두텁지 않은 독자층이 양서들의 탄생을 가로막는다. 그러면 성처럼 쌓인 외면된 글들은 무얼 말하는가. 어쩌면 이론을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공부의 얕음을, 먼 타자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코즈모폴리턴의 사고감각을 놓칠 우려를, 세부 학문에서 쌓아 온 역사에 관심 갖지 않음으로써 디테일에 대한 감각의 결여를, 비인기 작가에게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많은 작가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더 깊이 몰입하고 추구할 생각이 없다면 소비와 향락의 차원에서 독서를 해도 괜찮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 문제이고 탓할 수 없다. 하지만 편집자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독자는 표면적 욕구 말고, 깊은 욕구를 캐내 주길 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들은 어차피 편집자가 내놓은 책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좀더 과감해져도 된다. 어렵다고 집어 들길 그만두는 독자들은 아마 삶에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잠재 욕구를 읽어 달라는 독자를 향해 한 번도 교양으로 완전히 무장된 국가에서 살아 보지 못했으니 좋은 책을 많이 내달라는 독자에게도 자주 시선을 던지는 건 어떨까.
  • 홍릉 없는 홍릉길… 숲내음과 연구단지가 공존하다

    홍릉 없는 홍릉길… 숲내음과 연구단지가 공존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0회 홍릉숲길 산책’ 편이 지난 7일 동대문구 청량리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한반도를 강타한 제13호 태풍 ‘링링’의 북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려대역에 집결했다. 이날 코스는 정릉천~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홍릉수목원(국립산림과학원)~KAIST 경영대학~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세종대왕기념관 순이었다. 그러나 역대 태풍 중 최대 순간 풍속 5위를 기록한 링링의 맹렬한 기세 앞에 홍릉수목원은 폐장됐고, 정릉천 입장도 통제됐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작 KIST 본관과 옛 농촌경제연구원 건물은 공사 중이어서 직접 볼 수 없었다. 전북 나주로 이전한 옛 농촌경제연구원 건물은 서울바이오허브로 변신하기 위해 마무리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참석자들은 홍릉수목원 해설을 위해 특별 초빙한 임혜란 숲 전문가에게서 듣는 숲과 생태 이야기로 아쉬움을 달랬다.1922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제1세대 수목원 홍릉수목원이 자리한 동대문구 청량리는 조선시대 흥인지문(동대문) 밖 청량리계에서 기원한다. 신라 말에 창건된 고찰 청량사에서 이름을 땄다.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 등 옛 문헌에 따르면 청량사는 삼각산 아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홍릉수목원과 영휘원 일대가 옛 절터였다. 명성황후가 묻혔던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비켜났다.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조선시대 흥인지문과 혜화문, 광희문에서 중랑천까지 10리를 동교라고 불렀다. 이 중 성북천과 정릉천, 석관천을 낀 청량리에는 왕실소유의 논(적전)을 두고 왕이 농사를 짓는 선농단과 국립 구휼기관이자 공용숙소였던 보제원을 뒀다. 용두동, 제기동, 전농동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청량리는 제례의 공간이었다.청량리는 능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선왕의 무덤을 찾아가는 능행은 ‘조선 최대의 정치쇼’였다. 왕은 능행을 통해 선왕의 권위를 물려받기를 원했으며, 백성들은 능행에서 왕의 존엄을 실감했다. 청량리는 왕실 최대의 묘역 동구릉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행차 구경 기회가 많았다. 능행길은 대개 창덕궁~흥인문~우장현(장위동 고개)~안락현(봉화산 뒷길 화랑로)~동구릉으로 이어졌다. 통상 3000명에서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됐으니 동시대인에게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다. 그 장관과 화려함은 청계천변 광교와 삼일교 사이에 조성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청량리는 명성황후의 홍릉과 더불어 유명세를 떨쳤다.명성황후가 비명에 간 지 2년째 되던 1897년 11월 21일에야 국장이 거행됐다. 이날 새벽 4시 100개의 황등롱과 2600개의 홍등롱, 40개의 대철촉롱 불이 밝혀진 상태에서 상여는 경운궁(덕수궁)을 출발했다. 상여는 청계천 신교~혜정교~이석교~초석교를 차례로 지나 흥인문을 통과한 뒤 동관왕묘(동묘)~보제원(안암동 로터리)~한천교(중랑천 다리)를 거쳐 청량리 홍릉에 도착했다. 1907년 10월 7일 순종의 능행기록에는 오전 8시에 경운궁 대한문을 나서 종로~흥인문~안감천(성북천)~용두리~청량리를 거쳐 홍릉에 도착했으며 오후 6시에 환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9년 고종 국장 때 명성황후의 능이 남양주 금곡 홍유릉으로 이장돼 합장될 때까지 22년간 능행 때마다 청량리 일대는 인파로 북적였다. 홍릉의 신화는 짧았지만 강렬했다.청량리의 장소성은 전차의 등장과 함께 변모했다. 1899년 개설된 청량리선 전차는 1911년 경원선, 1939년 경춘선 및 중앙선 철도 개통과 함께 청량리의 장소성을 서울 동부지역 교통요충지로 바꿨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또 한 번의 변신이었다.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연결하는 8.1㎞ 구간의 청량리선 전차는 고종의 능행 편의와 능행 비용을 줄이려고 부설한 것이었다. 정작 고종은 전차가 상여를 닮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꺼렸다. 실제로 고종이 전차를 타고 홍릉에 행차한 기록이 거의 없다. ‘독립신문’ 1899년 10월 17일 자에 “금번 능행하실 때 전차를 타신다는 말이 있다더라”는 기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1994년에 발간한 ‘동대문구지’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질 무렵 혜화동 주민 홍태윤이 자비를 들여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길의 양편에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이 가로수는 성 안팎을 통해 유수한 가로수길로 손꼽혔다고 한다. 아쉽게도 1933년 도로를 넓히면서 모두 베어 버렸다. 1917년 ‘신문계’ 제5권 제2호에 발표된 ‘경성유람기’라는 글에 함경남도 금성에 사는 이승지가 평양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내린 뒤 전차 편으로 종로까지 가는 행로가 그려져 있다.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가 쓴 ‘홈즈의 동방나들이’에도 옛 청량리 전차풍경이 일부 묘사돼 있다. 정류장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 사고가 빈발했다고 한다. ‘홍릉시대’는 옛말이 됐다. 동대문~신설동 로터리~경동시장~청량리 로터리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이름은 홍릉로가 아니다. 1966년 시내 35개 주요 가로의 이름을 정하면서 1908년 13도에서 모인 항일의병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한 의병장 허위의 호를 따 왕산로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던 홍릉은 축소됐다. 지금의 흥릉길은 왕산로와 청량리 로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하면 나타나는 500m의 샛길에 불과하다. 명성황후가 떠난 홍릉에는 임업시험장, 영휘원(순헌황귀비 엄씨의 능)과 숭인원(영친왕의 맏아들 진의 능)이 스며들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1966년), 세종대왕기념관(197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1978년), 한국국방연구원(1979년), 카이스트 경영대학원(1996년), 한국콘텐츠진흥원(2009년) 등 각종 기관단체가 속속 들어서면서 교육과학안보연구단지로 변모했다. 문학작품 속의 청량리는 어떤 모습일까. ‘벙어리 삼룡’의 작가 나도향은 1924년 ‘개벽’에 실린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에서 “오늘은 동대문서 청량리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 시골 나무장사와 소몰이꾼들의 ‘어디여, 이놈의 소’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탑골승방 영도사 또는 청량사 들어가는 어구는 웬일인지 전보다 더욱 쓸쓸해 보인다”고 1920년대 어느 전차 차장의 시선을 통해 한적한 시골동네 청량리를 묘사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도 1935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성 간의 우정론’이라는 글에서 “… 날도 따뜻합니다. 우리 청량리로 산보나 가십세다. … 맑고 푸르고 높은 늦은 봄날 오후에 청량리 공기는 시원하였다”라고 청량리를 예술가들의 인기 산책코스로 소개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은 1932년 ‘동광’에 실린 ‘청량리의 가을’에서 “청량리를 나가서 지금 경기도 임업시험장이 된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 내가 이곳을 처음 간 것이 작년 가을인데 미상불 서울 근교에서 하루의 산책지! 더욱이 가을날로는 매우 좋은 곳인 줄 여겼습니다”고 청량리의 가을을 예찬했다. 1960년 ‘사상계’에 연재된 황순원의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는 “… 청량리 밖 떡전거리에다 양계장을 꾸며 놓은 것은 지난해 이른 봄이었다. … 후생주택을 비롯해 인가들이 들어서서 한 해 동안에 일대가 아주 변모해 버렸다. … 양계장에서 가깝대야 회기동 파출소 앞까지 한참 나가야만 다방이 있는 것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50년대 후반 공공주택의 공급과 함께 양계장에서 주거지로 조성되기 시작하는 청량리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1차 정릉천 따라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14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서경대)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
  • 가야유적 잇단 ‘국가사적’ 지정… 잠든 1600년 역사가 깨어난다

    가야유적 잇단 ‘국가사적’ 지정… 잠든 1600년 역사가 깨어난다

    경남 곳곳에 1600년 동안 묻혀 있던 가야유적이 경남도와 해당 시군, 연구기관 등의 적극적인 발굴·연구 조사에 힘입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잇따라 지정되고 있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발굴·복원·관리비 70%가 국비로 지원돼 안정적으로 복원·관리할 수 있다. 현재 경남지역 가야유적 544곳 가운데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창녕군 계성 고분군 등 모두 29곳이다. 특히 국가사적 고분 가운데 가치가 높은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고분군 등 5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한다. 도는 합천군 삼가 고분군과 성산 토성을 비롯해 김해시 원지리 고분군, 함안 남문외 고분군, 창녕 영산 고분군도 국가사적 지정을 추진한다.●함안 가야리 유적 국가사적 지정 예고 경남도와 함안군은 함안군 가야읍의 ‘함안 가야리 유적’이 지난달 26일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했다고 9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30일간 예고를 거쳐 의견을 수렴한 뒤 다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해 사적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발굴조사, 가야시대 지배층 생활유적으로 확인됐다. 남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신음천과 광정천이 합류하는 일대 해발 45~54m 구릉에 있다. 그동안 5차례 지표조사로 토성 범위만 대략 확인됐다가 지난해 4월 경작지 조성 과정에서 토성벽 일부가 우연히 발견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했다. 조사 결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한 토성과 목책(울타리), 14동의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건물지 안에서 쇠화살촉과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 등이 나와 군사 성격 시설임이 밝혀졌다. 구릉 북쪽 가장자리에서 토성과 고상건물(바닥을 땅 위나 물 위에 높게 지은 건물), 망루 등도 확인됐다. 아라가야 전성기인 5세기에 조성돼 6세기 멸망 때까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가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판축토성(판자를 양쪽에 대고 흙을 다져 성을 쌓는 건축방식) 구조물이 확인돼 우리나라 고대토성 축조수법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전문가들은 토성의 상태가 좋고 주변 가야 유적과 연계 경관도 잘 보존돼 아라가야 중심 왕도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이 유적은 조선시대 함안지리지인 함주지(1587년 편찬) 등 각종 고문헌에 ‘가야국의 옛 도읍터’ 또는 ‘옛 나라의 터’ 등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도 주변에 남문외, 대문천 등 왕성이나 왕궁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어 아라가야 왕궁지로 전해 내려온 곳이다. 토성 주변에 아라가야 최대 고분군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과 남문외 고분군(도 기념물 제226호), 가야 최대 규모 굴립주건물(기둥을 세워 만든 건물)인 ‘당산유적’ 등 주요 가야유적들이 있어 가야읍 일대가 아라가야 왕도였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토성 구간은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과 군사시설 일부다. 도와 군은 앞으로 발굴조사와 심화연구를 더 진행해 아라가야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가야사 복원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창녕 계성 고총 고분군 국가사적 지정 앞서 문화재청은 창녕군 계성면에 있는 계성 고분군을 지난 2월 국가사적 제547호로 지정했다. 계성 고분군은 영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사면부에 형성된 대규모 고총 고분군이다. 서북쪽으로 계성천이 흐르는 낮은 구릉에 봉분 261기가 분포해 있다. 이 고분군 축조집단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을 조성한 세력 이전 시기인 비화가야 초기 중심세력으로 확인됐다. 무덤 구조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이다. 돌덧널 상부 덮개는 나무로 만들어 덧널무덤 단계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변해 가는 양상을 잘 보여 준다. 고분군에서 창녕양식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 통모양그릇받침 등의 토기류, 금동관편, 금제 귀걸이와 은제 허리띠장식 등 장신구류, 말띠드리개(행엽) 및 발걸이(등자), 말안장 꾸미개(안교) 등 마구류, 무기류 등이 많이 출토됐다. 학계에 따르면 계성 고분군은 5~7세기에 걸쳐 장기간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5세기에 집중적으로 대형 고총 고분이 축조돼 창녕 비화가야 성립과 가야에서 신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합천 삼가 고분군·성산토성 국가사적 신청 도는 합천군 삼가면에 있는 도 기념물인 삼가 고분군과 합천군 쌍책면 성산토성도 지난 4월과 8월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신청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 현지조사한 뒤 조사 및 자료 보완을 요청했다. 도와 합천군은 내년 2월쯤 추가 발굴 조사와 학술대회를 한 뒤 보완 자료를 제출할 예정이다. 삼가 고분군은 발굴 조사 결과 1~6세기 소가야권 가야집단이 조성한 고분군으로 대형 봉분 328기가 확인됐다. 아라가야 양식 철기류 등이 출토돼 당시 남강을 통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보여 준다. 무덤은 목관묘에서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로 구조 변화가 확인된다. 24-1호분 안에서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짧은목항아리 등 토기류와 각종 말갖춤새(마구), 쇠창과 쇠도끼를 비롯한 무기류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쌍책면 성산리에 있는 성산토성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에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왕성으로, 옥전고분군을 조성한 최고 지배층의 5~6세기 취락유적 중심지로 조사됐다. 토성과 석성으로 이뤄진 성곽과 건물지, 제사유구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됐다. 유적 훼손이 적어 가야왕성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국가사적 지정 심의를 위해 다음달 현지조사한다. 박정혜 경남도 가야사복원 주무관은 “함안 남문외 고분군은 빠르면 올해 안에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하고 김해 원지리 고분군과 창녕 영산 고분군 등 2개 도지정문화재는 내년 하반기에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함안 남문외 고분군은 말이산 고분군과 가야리 유적 사이에 위치한 아라가야 최고지배층 고분군으로 43기의 봉분 분포가 확인됐다. 길이 7m 대형 석실묘가 발굴되고 가야·신라·백제 계통 유물도 출토됐다. 도와 함안군은 사적 신청에 앞서 오는 11월까지 중소형 석곽묘 10기 등을 추가 발굴조사할 예정이다.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고분군은 후기 가야 김해지역 최대 고총 고분군으로 조사됐다.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 고총 고분군으로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김해지역 최대 길이(7.3m) 가야석실묘와 각종 유물 265점이 발굴됐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증명하는 자라모양 토기병 2점이 나왔다. 도와 시는 이달부터 M5호분 발굴조사를 할 계획이다.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고분군은 비화가야에서 신라로 넘어가는 사회상을 보여 주는 대표 유적으로 꼽힌다. 연말까지 발굴 조사한 뒤 내년 11월 국가사적 신청을 할 계획이다. 도는 학술 가치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묻힌 가야유적이 국가문화재로 승격될 수 있도록 발굴·조사·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류명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발굴 조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도내 가야유적이 발굴 조사와 연구를 통해 국가사적으로 승격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남재우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가야 각국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으로 편중됐던 발굴 조사가 평면적으로 확대돼야 하고 훼손이 심한 유적은 학술·발굴을 통해 성격을 규명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2000년 전 흉노족 여인 유골 발견…스마트폰처럼 생긴 벨트 차

    2000년 전 흉노족 여인 유골 발견…스마트폰처럼 생긴 벨트 차

    러시아 시베리아 투바 공화국의 알라타이 저수지에서 스마트폰처럼 생긴 벨트를 찬 유골이 발견됐다. 시베리아타임즈와 러시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 중 한 곳으로도 유명한 투바공화국에서 약 21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됐다고 전했다. 발굴 지역은 러시아 최대 수력발전소인 사야노-슈셴스카야댐 상류에 위치한 알라테이 저수지로, 이 인공저수지의 배수작업을 벌이던 중 고대 무덤이 드러났다.무덤의 주인은 약 2100년 전 흉노족 여성으로, 11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묻혀있었다. 고고학자들은 특히 유골의 허리춤에 있던 특이한 모양의 벨트에 주목하고 있다. 파벨 레우스 박사는 “가로 18㎝, 세로 9㎝로 현대의 스마트폰이 연상되는 검은색 옥원석 재질의 벨트가 허리춤에 있었다”면서 “중국의 옛 동전인 ‘오수전’ 장식으로 유골이 묻힌 시기를 추정했다”고 설명했다. 벨트에 장식으로 사용된 중국 동전은 약 2137년 전 주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레우스 박사는 또 “유골은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흉노족 여성의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투바 공화국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흉노족이 지배했으며 6세기 돌궐족, 8세기 위구르족, 13세기 몽골족, 18세기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1912년 청 왕조가 붕괴되면서 독립이냐 몽골 편입이냐, 러시아 편입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결국 1914년부터 러시아의 보호를 받게 됐다. 이에 대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사문화연구소의 마리나 킬루노프스카야 소장은 “투바는 고대부터 우랄계, 알타이계, 튀르크계, 몽골계, 사모에드계, 케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아온 곳”이라고 설명했다. 또 “부유한 흉노족 유목민의 무덤은 강도에 의해 파헤쳐지기 일쑤”라면서 “이 때문에 흉노족 유적이 이처럼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쓸쓸한 마지막에 불안한 독거노인… 무덤까지 책임지는 공영장례 생각할 때”

    “쓸쓸한 마지막에 불안한 독거노인… 무덤까지 책임지는 공영장례 생각할 때”

    “삶의 존엄한 마무리할 기회를 주는 것”“홀로 죽게 되더라도 사회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면 삶의 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장례를 돕는 비영리 단체 ‘나눔과 나눔’ 사무실에는 ‘2019년에도 기억해야 할 이름들’ 375개가 적혀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13명을 제외하곤 모두 지난해 시신 인수가 되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다. 죽어서도 외로운 이들의 장례를 치르는 ‘나눔과 나눔’의 박진옥 상임이사는 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독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아쉽다”면서 “공영장례는 죽음까지도 외로웠던 이들의 삶을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나눔과 나눔’은 201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선희 할머니의 장례를 시작으로 무연고자와 기초생활수급자 등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 왔다. 올해부터는 민간이 아닌 공영장례 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이 단체의 의견을 서울시가 받아들여, 정식으로 업무협약을 맺고 공영장례지원상담센터도 함께 운영한다. 죽음 뒤 장례는 오롯이 가족의 몫이다. 혼자 살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 구청은 연고자를 찾아 “시신을 인수하겠느냐”고 묻는다. 인수를 포기할 경우 한 장짜리 시신포기 각서에 짧게 이유를 적는다.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관계 단절 때문이다. 박 상임이사는 “70대 노모가 50대 아들의 시신을 포기하면서 ‘노령이라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적었다”면서 “죽은 자식의 시신을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박 상임이사는 “삶의 존엄한 마무리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식이나 형제와 연락을 끊었고 죽어서 그들에게 내 죽음을 맡기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걱정과 불안이 섞인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한다.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마지막이 외롭게 끝날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그는 “공영장례는 ‘혼자인 내가 죽어도 사회가 나를 버리지는 않는구나, 최소한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기회를 주는구나’ 하는 인식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인식을 주는 것은 곧 곧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에만 375명의 장례를 치렀다. 하루 한 명꼴이다. 올해도 비슷하다. 박 상임이사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곧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서 “돌아가신 뒤에야 무연고자 분들의 고된 삶을 만나지만, 이 역시 새로운 만남이라는 생각으로 그분들의 존엄한 생의 마무리를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소련 비밀 품은 2000㎞ 러시아판 ‘카타콤’

    소련 비밀 품은 2000㎞ 러시아판 ‘카타콤’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지하 무덤 ‘카타콤베’의 구간 길이는 각각 300㎞, 500㎞에 달한다. 서울과 부산 시청 사이의 직선거리가 약 325㎞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오데사엔 러시아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품은 2000㎞ 규모의 지하도시가 있다. 5일(현지시간) CNN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오데사의 지하 미로를 조명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하도시는 출입구만 1000개에 달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관광지이면서도 ‘자격이 있는 가이드의 동행 없이는 입장하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있다. 이 러시아판 카타콤이 로마와 파리의 카타콤베와 가장 다른 점은 죽은 사람을 묻는 데에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지하도시는 18세기말 오데사가 생길 당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세 개 층에 걸쳐 확산됐다. 시작은 채석장이었다. 오데사가 1819년~1859년 거대한 성장을 경험하며 지상엔 높고 훌륭한 저택이나 궁전의 수요가 늘어났다. 훌륭한 건물을 짓기 위해선 훌륭한 석재가 필요했고, 오데사는 땅을 파 나가기 시작했다. 궁전의 수만큼 많은 채석장이 지하에 생겨났다. 석재 때문에 파기 시작한 땅굴은 이후 러시아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도시가 되고 방공호가 되기도 했다. 지하 도시를 체험한 CNN 취재진은 내부 온도가 13도에 불과해 추웠으며 냉전시대 핵 벙커, 대피소 등이 처음 눈에 들어왔다고 썼다. 벙커 안 공기는 퀴퀴했으며, 녹슨 소련 시대의 장비과 전선 조각, 엔진실 등이 있었다고 밝혔다. 채석장 지역엔 벽면에 석탄 그림이 새겨져 있고 비문이나 상징, 그림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 벽엔 그림을 설명하는 날짜, 방향, 욕설 등이 있었다. 오데사 카타콤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상자로 추정되는 부패한 시신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동료와 함께 시신을 발견한 뎀비츠키는 유골을 가방에 넣어 경찰에 가져갔다. 하지만 경찰은 발견 지역이 2차 세계대전 박물관의 관할구역이라는 이유로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뎀비츠키에 따르면, 박물관 역시 시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그는 “카프카적인 방식으로 가이드가 시신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시내를 돌아다닌 끝에 검찰이 인수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이야기는 소련 비밀 경찰 기관인 NKVD에 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소련)에 속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NKVD 요원 32명은 1941년 오데사를 점령하고 있던 나치의 루마니아 동맹을 무너뜨리라는 지령을 받고 이 카타콤에 투입됐다. 수년 동안 국가기록 보관소에 잠자고 있다가 최근 대중에게 공개된 바에 따르면 이들 중 바깥에 나와 햇빛을 본 요원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각각 오데사와 모스크바 출신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경쟁적인 이들 그룹 사이의 긴장감은 끝내 연쇄적인 배신과 총격으로 이어졌다. 많은 구성원들이 처형됐으며, 나머지는 병으로 죽었다. 결국 1943년엔 각 그룹 지도자들만 남았는데, 오데사 그룹의 지도자가 모스크바 지도자에게 치명적인 총격을 가한 뒤 9개월 동안 혼자 땅굴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는 땅 위로 올라왔다 1944년 다시 땅굴로 보내졌고 수류탄 폭발로 숨졌다. CNN에 따르면 아직도 지하 도시의 많은 구간들이 미개척 상태로 남아있다. 공개 일정이 끝날 때쯤 뎀비츠키는 투어가 전체 구간의 1%도 안 되는 약 3㎞만을 지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공개된 지역에선 채석장 시절부터 러시아제국, 소련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고 보도는 전했다. 이 카타콤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며 50년 이상 연구한 리오니드 애슐렌코는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구국 영웅들의 빛바랜 흔적… 근현대사 야외박물관 산책

    구국 영웅들의 빛바랜 흔적… 근현대사 야외박물관 산책

    서울신문이 서울시,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9회 망우리’ 편이 지난달 31일 중랑구 망우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무더위와 장마를 피해 저녁 시간대에 진행한 5차례의 혹서기 야간투어 프로그램이 끝나고 오전 10시 평상 투어로 돌아온 날이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집결지 망우역을 출발, 지역 명물 동부고려제과와 우림시장을 둘러봤다. 우림시장 앞에서 165번 시내버스를 타고 동부제일병원 정류장에서 내려 망우리 공원으로 향했다. 망국의 한이 서린 13도 창의군 탑을 지나 이태원 묘지 무연고자 합장묘역의 유관순 열사 추정묘에서 묵념을 올렸다. 열사에게 띄우는 편지를 써서 기억의 나무에 매다는 추도 이벤트도 가졌다. 이어 유상규, 방정환, 한용운 선생 묘를 차례로 순례했다. 망우리에 묻힌 49위의 독립지사와 문인·예술가의 자취를 둘러보기에 2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특히 유관순 열사 추정묘는 드높은 이름에 비해 열악한 참배길과 무너진 봉분, 조악한 가짜 꽃이 엄숙함을 흐리게 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동부고려제과와 망우리 공원 2곳이었다. 해설을 맡은 이지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13도 창의군 탑 앞에서 충과 효의 갈림길에 선 지도자의 선택과 독립지사들이 남긴 구국의 목소리를 조곤조곤 들려줬다. 8월의 마지막 날 서울의 동쪽 끝자락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되돌아본 뜻깊은 시간이었다.망우리는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망우리 묘지인지, 망우리 공원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공동묘지에서 공원으로 바뀐 지 반세기가 흘렀건만 아직 정체성을 찾지 못한 탓이다. 행정지명은 중랑구 망우동 산57-1이지만,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라는 ‘고리짝’ 지명이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망우리는 공원으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공동묘지인 것이다. 망우리라는 지명이 망우산이라는 자연지명을 잡아먹었다. 망우리 공동묘지라는 섬뜩하고 부정적인 죽음의 공간에서 벗어나서 망우산이라는 멋진 산 이름을 활용, ‘망우산역사문화공원’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해발 282m의 망우산은 중랑구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 구리시에 걸터앉은 나지막한 산이다. 서울의 동쪽 경계인 용마산과 봉화산, 아차산과 첩첩이 겹쳤다. 망우산은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안쪽 경계 ‘내사산’과 함께 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동쪽 바깥경계 ‘외사산’의 일부를 형성한다. ‘망우’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는 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했다고 해서 붙었다.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조선 역대 왕과 왕비 등 9기 17위가 모셔진 구리시 동구릉에서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진 곳이다. 동구릉 가는 길목에 자리한 망우산에 오르면 한강 이북의 도봉산과 수락산, 불암산이 줄줄이 펼쳐지고 한강 이남 검단산과 예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조선시대 서울에 사는 백성이 죽으면 서소문 밖 애오개(아현), 광희문 밖 신당, 남산 바깥 이태원, 동소문 바깥 미아리에 각각 묻혔다. 멀리 서쪽 은평구 이말산과 북쪽 도봉구 초안산은 양반이나 궁녀, 내관, 중인층의 묘역으로 쓰였다. 잘나가는 서울양반은 고향 선산까지 내려가거나 경기·충청 일대에 묻혔다. 특히 남산 밖 이태원 부근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는 서울 최대의 공동묘지였다. 1905년 일본군이 이 땅을 군사기지로 수용할 때 무려 117만여기의 무덤자리를 확인한 바 있다. 일제강점 후 경성 부립 공동묘지가 사대문 밖에 조성됐는데 경성이 점차 확장되면서 1933년 양주군 망우리에 83만2800㎡ 규모의 공동묘지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용산구 이태원 일대와 마포구 노고산 등지에 있던 공동묘지를 옮겨왔다. 이후 1973년까지 40년 동안 서울시민 전용 묘지 구실을 했다. 이 시기 서울에서 사망한 사람의 운구는 잘났거나 못났거나 대개 망우리로 향했다. 1963년 서울의 면적을 두 배 이상 확대하는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기도 지역 12개 면 90개 리가 서울에 편입됐을 때 서울 동북부의 변방 망우리도 서울특별시가 됐다.망우리에는 한때 5만기 가까운 묘역이 조성됐고 폐장되기 전까지 해방과 한국전쟁, 4·19혁명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묘 터가 부족해지자 경기도 벽제리, 용미리, 언주리(양재) 등에 공동묘지를 조성해 화장과 이장 등이 이뤄졌다. 묘지 사용이 중단됐어도 한식, 추석 때면 조문행렬로 들썩거렸다. 무덤이 빠져나간 터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지금처럼 숲이 우거진 것은 20년이 채 안 된다. 이전에는 봉분만 가득한 민둥산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4.7㎞의 망우리 순환로를 ‘사색의 길’로 정비했고 길가에 연보비를 세워 묘역의 주인을 알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죽음의 공간이 삶의 공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은 7360기가 남아 있다. 유관순, 한용운, 오세창, 방정환, 지석영, 박인환, 이중섭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독립유공자와 저명한 예술가, 문인재사 46명이 영면해 있다. 안창호, 송진우, 나운규, 김영랑도 한때 이곳에 묻혔다. 18세 소녀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9월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망우리로 옮길 때 2만 8000여명의 이름 모를 유해와 함께 화장돼 합장됐다. 잇따른 투옥과 순국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열사의 묘지를 망실한 때문이다. 열사의 묘는 지금껏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속 한 명으로 기억되다가 지난해 9월 기념사업회 등에서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를 마련,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딱한 일이다. 중국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전 “고국에 묻어 달라”고 간절한 유언을 남겼으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사례와 닮은꼴이다.망우리 공원 초입 13도 창의군 탑은 항일의병의 구국 혼을 기리는 기념비적 조형물이다. 망우산 고개는 경기 동북부에서 양주를 거쳐 서울 동대문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1908년 수도를 탈환하겠다며 전국 13도에서 모인 창의군의 진격로이기도 했다.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총대장 이인영을 위시한 1만 의병이 들고일어난 조선말 대사건이다. 군사장 왕산 허위는 3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망우리까지 진공했으나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사기를 잃은 병력이 흩어지는 바람에 일본군의 공격에 패퇴했다. 이후 길을 잃은 의병항쟁은 국외로 무대를 옮겨야 했다. 게릴라전을 벌이던 허위는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로 처형됐다. 동대문~신설동~청량리 구간 간선도로에 허위의 호를 딴 왕산로라는 도로명이 남아 서울진공작전 실패의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망우산은 사연 많은 산이다. 그 산에 깃든 망우리 공원은 단순히 과거의 공동묘지이거나 현재의 공원이 아니다. 마치 살아 있는 야외 역사박물관처럼 느껴진다. 명멸한 숱한 인물을 통해 근현대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2012년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데 이어 2015년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한 까닭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0차 홍릉숲길 산책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7일(토) 오전10시, 고려대역 3번 출구(개찰구 안)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 (www.suci.kr)
  • [백종우의 마음의 의학]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

    [백종우의 마음의 의학]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더 자주 경험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는 성폭력, 성희롱, 강력범죄, 재난 등의 다양한 폭력과 사고 피해자가 적지 않게 찾아온다. 이분들이 겪은 것을 함께 보며 듣는 일은 때로 치료자에게도 매우 고통스럽다. 세상은 안전한지, 사람을 믿어도 될지 기본적인 모든 믿음이 부정된다.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게 바로 ‘트라우마’다. 때로 이들은 진료실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지나친 과각성의 결과이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기억이 자극되면 폭발적인 감정반응을 드러낸다. 이들의 기억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다면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다. 깨진 기억의 조각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비수처럼 생살을 찌르는 것이 트라우마의 고통이다. 이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무릎에 자해해 몇 년간 치마를 한 번도 입지 못했다는 재난생존자도 있었다. 수사관으로서는 ‘저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기억 못하지’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조각조각 깨진 기억은 트라우마의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치료자는 첫 면담에서 환자에게 동의를 얻어 가며 한 걸음씩 트라우마에 다가가야 한다. 맹장염을 진단하는 의사가 맹장이 있는 우측하복부부터 만져서는 통증에 굳어버린 복부를 진찰하기 어렵다. 좌측상복부부터 천천히 세심하게 진찰해야 가장 아픈 곳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아직 우리 사회는 지뢰투성이다. 2, 3차 가해가 빈발한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치의 사람이 기계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중립적으로 대해 상처를 준다. 용서를 못 하는 피해자를 죄인으로 만든다. 정당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피해자를 한몫 잡으려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 이상한 사람, 조직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며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치유를 위해 정의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치료자는 더 적극적으로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참혹한 현실에서 행복을 위한 차선을 선택할 때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치유를 위해서는 트라우마의 기억을 ‘노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마저 때론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는 방법을 배운 사람을 보면서 치료자도 배우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주변의 따뜻한 공감의 시선이다. 미국 등에서는 최근 트라우마 기반 케어(trauma informed care)를 의료와 공공기관의 모든 서비스에 도입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관료화되기 쉬운 거대조직이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트라우마에서 회복된 동료상담가가 다른 아픈 사람에게 누구보다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성장의 시대 속도에 밀려 뒷전이 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되찾아 우리 사회가 좀더 살맛나는 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 군포시, 2019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경기도 군포시민 150명이 2019년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에 참여한다. 시는 10월 5일부터 이틀간 개최되는 ‘2019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사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 행사는 군포시와 경기도, 수원시 등 6개 시도가 공동 주최한다. 군포시는 6일 일정 중 엘에스로 구간(옛 유한양행 터 일원) 재현생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 50여명이 체험용 의상을 갖추고 기수와 유생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 100여명은 행진 행렬에 참여한다. 시는 18세 이상 시민을 대상으로 총 150여명을 오는 9일까지 선착순 모집한다. 이번 능행차 재현과 관련해 시는 별도로 자체 행사 두 가지를 기획·추진한다. 우선 10월 2일에는 시청 대회의실에서 역사 특강을 진행한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의 저자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를 강사로 초빙한다. 능행차 행렬이 군포지역을 지나는 6일에는 행진 구간 인근의 노인을 초청, 옛 양로연을 재현한다. 효행을 권장하는 능행차 행사의 의미를 더욱 살릴 예정이다. 한편 이번 행사는 조선 22대 왕 정조가 1795년 어머니 헌경왕후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묘가 있는 화성까지 시행한 행차를 재현한다. 서울의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 융릉(장조와 헌경왕후 합장 무덤)까지 59.2㎞를 행진한다. 한대희 군포시장은 “이번 행사는 시민에게 다양한 문화행사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도시의 역사를 자세히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시민 화합과 공동체 문화 확산을 위한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금요칼럼] 고궁박물관,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려면/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고궁박물관,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려면/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충남 예산의 가야산에는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잘 알려진 남연군의 무덤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기 연천에 있던 아버지, 곧 훗날 고종의 할아버지가 되는 남연군의 무덤을 1844년(헌종 10년) 백제사찰 가야사 터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보덕사가 있다. 비구니 수도 도량답게 깔끔한 보덕사에서 인상적인 것은 극락전 앞 대방(大房)의 존재다. ‘원스톱 불공’이 가능하도록 수행 공간과 생활공간 등 다양한 쓰임새를 부여한 전각이 대방이다. 보덕사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 무덤의 수호사찰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방을 두고 흔히 조선 후기 유행한 염불 수행을 위한 복합 법당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서울 돈암동 흥천사와 경기도의 고양 흥국사와 남양주 흥국사 등 왕실 원찰에 대방이 집중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염불수행은 염불수행이지만 한마디로 극락왕생과 현세발복을 비는 왕실 여인들의 기도공간이었다. 파주 보광사 만세루나 화성 용주사의 쌍둥이 전각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다루어야 영역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다 뜬금없이 보덕사와 대방의 존재를 떠올리게 됐다. 경복궁 내부에 자리잡은 고궁박물관은 최근 주목받는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열리는 ‘문예군주를 꿈꾼 효명’ 특별전은 2007년 개관 이후 가장 성공적으로 젊은 세대의 눈길을 사로잡는 기획이 아닐까 싶다. 효명세자는 2016년 방영된 TV드라마에서 배우 박보검이 연기해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역시 조선왕실의 안태(安胎)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호평을 받았다. 지난 3·1절에는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이라는 작은 전시를 가졌다. 오는 10월에는 ‘18세기 화장문화’를 주제로 흥미로운 국제학술대회도 연다고 한다. 그럴수록 너무 권력의 한복판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도 하게 된다. 고종시대 왕실사무를 담당한 궁내부에는 일반적인 행정기관 말고도 음악을 다루는 장악원, 의약을 맡아보는 내의원,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 의복과 일용품 등 공급하는 상의원, 마필과 목장을 관리하는 태복시, 이전에는 내명부라고 불린 명부사, 내시와 관련된 일을 맡은 내시사, 전각을 관리하는 전각사 등이 있었다. 생활 및 의례를 담당하는 모든 기능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고궁박물관의 탐구 대상은 아직 왕과 왕비의 공간에 머물고 있다. 그러니 대방만 해도 불교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 불암산과 북한산, 관악산 자락 등에 남아 있는 궁녀들의 무덤인 마애부도 역시 다르지 않다. 서울 창동과 월계동에 걸쳐 있는 초안산의 내시 무덤군(群)도 조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있다. 왕실용 그릇을 굽던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가마터 수백 곳 역시 왕실 문화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팔당호 수변 분원은 사옹원 분원이라는 기관 이름이 그대로 땅이름이 된 것 아닌가. 분원은 또 기관 운영을 위해 한강을 지나는 모든 뗏목에서 세금을 징수했으니, 도성 장작값 인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고궁박물관이 복원해야 할 삶의 모습은 왕과 왕비에 그치지 않고 상궁과 내시는 물론 도공과 마부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같은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이전 계획으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고궁박물관도 언젠가 좁은 궁궐 내부에서 벗어나 넓은 바깥으로 나서야 한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고궁박물관이 작은 특수 박물관으로 역할을 가두지 말고 왕실 문화, 나아가 왕조 문화 전반을 다루는 국가대표급 박물관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 좋겠다. 그렇게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경쟁할 때 우리 박물관 문화도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정조 행궁’ 역사공간 재현 문화·관광 허브 조성

    ‘정조 행궁’ 역사공간 재현 문화·관광 허브 조성

    정조대왕 능행차 행사 등과 연계 개발 2022년 완공… 용봉정 가족공원 재탄생용양봉저정(龍鳳亭) 관광명소화 사업은 용양봉저정 역사문화공간을 재현하고 용봉정 가족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한강 노들섬에서부터 용양봉저정, 효사정, 사육신공원, 노량진 수산시장 등 일대의 자산을 하나로 연계하는 문화·관광 허브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용양봉저정은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화성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한강에 배로 만든 다리를 놓고 건너가 잠시 쉬어 가던 행궁이었다. 정조는 북쪽의 우뚝한 산과 한강이 흘러드는 풍광이 마치 ‘용이 뛰놀고 봉황이 나는 것 같다’고 해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구는 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6호인 정자 일대(본동 10-30)를 2022년 역사문화공간으로 선보인다. 올해 본동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철거하는 작업과 함께 시굴·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다. 내년에는 착공에 들어가 주변의 유구를 복원하고 광장을 들여보내 정조대왕 능행차 행사 등과 연계한 관광 자원으로 개발한다. 용봉정 근린공원은 용봉정 가족공원으로 재탄생한다. 이달 기본·실시설계 용역이 끝나면 조만간 공사에 들어가 생물 서식 공간, 산책로, 데크로드, 놀이·체험·편의시설 등을 새롭게 꾸민다. 한강과 남산을 탁 트인 시야로 조망할 수 있어 시민들의 발길을 끌 전망대는 2022년 설치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길섶에서] 변두리, 시골이라는 말/이지운 논설위원

    언제부턴가 ‘시골’이라는 표현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서울 아니면 시골’이라는 이분법이 문제였다. 서울서 나고 자란 선민의식에서 왔을까? 일찍이 ‘지방’이라는 단어를 익혔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울 이외의 지역’이니 딱 맞는 표현이었는데. 아무튼. 시골이라 하면, 시골 출신들은 대개 그러려니, 무덤덤했더랬다. 표정에 변화가 생긴다면, 영락없이 ‘지방의 도시’ 출신들이었다. 예컨대 부산, 인천, 대전, 대구, 광주 사람들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끌끌 혀를 차는 이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반발’하는 이도 있었다. 지역의 명문고를 나왔다면 더 그랬던 것 같다. “서울 변두리도 서울이랄 수 있나!” 한 친구는 내게 이렇게 일갈했다. 내가 ‘변두리’서 자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전생으로 그곳 명문고 출신. “우리 때만해도 서울 변두리는 대전 중심만 못했지!” 시골사람 정체성을 강요당했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음주 총량이 평소를 웃돌 수밖에 없는 자리가 되곤 했다. 이제라도 두루 혜량(惠諒)하여 주시길. 기실 ‘시골’은 내게 늘 설렘의 대상이었는데, 명절이고 방학 때만 갈 수 있던 곳이었는데…. 이제 찾아갈 시골이 없으니, 공연히 심통을 부렸던 것은 아닌지. 아무튼. jj@seoul.co.kr
  • ‘악플의 밤’ 장수원 “젝스키스 시절, 사실 실력 없었다”

    ‘악플의 밤’ 장수원 “젝스키스 시절, 사실 실력 없었다”

    ‘악플의 밤’에 장수원, 존박이 출연해 찜통 더위를 날릴 재미를 선사한다. 악플을 양지로 꺼내 공론화시키는 과감한 시도로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JTBC2 ‘악플의 밤’은 스타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플과 직접 대면해보고, 이에 대해 솔직한 속내를 밝히는 토크쇼다. 오는 16일 방송될 9회에는 ‘전설의 아이돌’ 젝스키스의 장수원과 ‘엄친아’와 ‘어리바리’를 오가는 매력부자 존박이 출연한다. 이 가운데 장수원, 존박이 자신을 향한 악플들을 시원시원하게 인정, 숨겨왔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전해져 기대가 증폭된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장수원은 본인의 실력을 평가절하하는 악플에 대해 “사실 실력이 없었던 건 맞다”고 인정하며 ‘악플의 밤’ 포문을 화통하게 열어젖혔다. 뿐만 아니라 장수원은 악플 앞에서도 ‘로봇’의 면모를 잃지 않아 웃음을 자아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젝스키스 데뷔곡에 내 개인파트가 한 소절도 없다”며 씁쓸한 과거를 밝히는가 하면, 악플의 논리적 허점을 정확하게 짚으며 기계적인(?) 분석력을 뽐낸 것. 이처럼 강력한 악플의 공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장수원의 ‘로봇 멘탈’에 설리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 존박 역시 장수원 못지 않은 쿨한 대처로 관심을 집중시켰다. 존박의 어리바리 캐릭터가 설정이라는 악플러를 향해 “티 나라고 한 것”이라며 통쾌한 역공을 펼친 것. 심지어 존박은 “바보 연기를 배웠다”면서 눈빛, 몸짓, 발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퍼포먼스였음을 밝혀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특히 존박은 즉석에서 연기 시범까지 보였는데 디테일까지 완벽한 바보 연기로 되려 ‘노스웨스턴대 출신 수재’임을 증명했다고. 한편, JTBC2 ‘악플의 밤’은 16일 오후 8시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여야 4당, 일제히 ‘일본 규탄’…한국당 “위기의 대한민국”

    여야 4당, 일제히 ‘일본 규탄’…한국당 “위기의 대한민국”

    제74주년 광복절인 15일 여야 4당은 일제히 논평을 내고 일본 규탄과 경제보복 극복 의지를 강조했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경제 파탄과 안보 불안으로 나라가 ‘위기의 대한민국’으로 전락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은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문재인 정부와 함께 ‘제2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개척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우리는 침략과 굴종의 역사를 호혜와 평화의 역사로 바꿔내는 세기적 전환을 지향하고 있다”며 “그러나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은커녕 과거사를 빌미로 경제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시작된 일본 경제침략에 맞서야 한다”며 “‘독립운동은 못 했으나 불매운동은 한다’는 시민적 저항에 힘입어 결연한 의지로 일본 아베 정부의 반역사적, 반경제적 조치를 분쇄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어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뉴라이트 인사들의 ‘1948년 건국절’ 주장을 옹호했다”며 “이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선열들의 무덤에 침을 뱉는 행위이며,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까지 신분 탈색하려는 쿠데타와 다름없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이 대변인은 “제1야당 대표가 몰지각한 역사 인식으로 헛된 이념 논쟁을 불러오는 것에 대해 심히 유감을 표한다”며 “과거 친일을 미화하고 아베 정권의 야욕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면 헌법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통합의 길로 이끄는 공당의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해 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박주현 민주평화당 수석대변인도 논평에서 “선조들이 74년 전 각고의 노력과 희생으로 광복을 이루었듯 우리는 일본의 경제 도발을 물리치고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일본의 부당한 조치를 물리치기 위해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기업은 산업 경쟁력 강화를, 국민은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통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일본의 경제 도발을 극복하고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오현주 정의당 대변인은 “역사를 잊고 경제 도발을 감행한 일본 아베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오 대변인은 “일본이 강제동원 등 식민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고 경제 도발을 감행한 것은 제2의 침략에 다름 아니다”라며“오늘은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단 스무명만 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진정한 광복을 찾아가는 날이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전쟁의 과오를 되새기고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최도자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도 논평에서 “일본은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최도자 수석대변인은 “위안부 문제와 전범 기업의 강제징용은 개인의 삶과 인권을 파괴한 흉악한 전쟁범죄였다”며 “일본 정부는 경제보복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추가 도발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청와대와 여당도 지금처럼 반일감정을 자극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최 대변인은 “한국과 일본은 아픈 과거에도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국가로서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할 분야가 매우 많다”며 “양국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의 발전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행동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국가유공자분들의 헌신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바른미래당이 앞장서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기적의 대한민국이 정부 실책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경제 파탄과 안보 불안이라는 위기의 대한민국으로 전락했다”며 정부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김명연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일관계는 역대 최악이고, 북한의 계속되는 무력 도발과 도를 넘은 막말로 남북관계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대한민국은 35년간의 암흑과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자유를 찾았으며 해방을 맞아 선조들의 눈물과 피, 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일어섰고 성장했다”며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던 그 날처럼 오늘을 변곡점으로 대한민국은 새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변인은 “자유, 민주, 공정이라는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되살리고, 대한민국 안보 수호와 성장을 위해 국정 방향부터 새롭게 수정돼야 한다”며 “특히 애국선열들께서 피로 지킨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촉구했다. 김 대변인은 “한국당은 대한민국의 제1야당으로서,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역사를 가슴에 깊이 새기겠다”며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미래 세대와 함께 지키고 이어나가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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