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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 ‘왕릉 옆 아파트 신축 승인‘ 인천 서구청 압수수색

    경찰 ‘왕릉 옆 아파트 신축 승인‘ 인천 서구청 압수수색

    조선 왕릉 인근 문화재 보존지역에서 문화재위원회 사전 심의 없이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들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이 19일 인천 서구청 등에서 압수수색을 벌였다. 인천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경찰은 이날 서구청 주택과·건축과·문화관광체육과, 인천시 종합건설본부, 관할 주민센터 등에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경찰은 압수수색에서 아파트 건설과 관련한 각종 서류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지난 9월 6일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에서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 3곳을 경찰에 고발하자 수사를 벌여왔다. 경찰은 자료 분석이 끝나는 대로 조만간 건설사 3곳의 관계자들을 피고발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예정이다. 앞서 서구는 지난 2019년 검단신도시 문화재 보존지역 내에서 문화재위원회 심의 없이 건설사의 아파트 사업을 승인했다. 문화재청은 이들 건설사가 문화재 반경 500m 안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높이 20m 이상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아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들 건설사의 아파트 대상지는 경기도 김포시 장릉 인근이다.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으로 사적 20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 왕릉에 포함돼 있다.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역사, 막 시작되다/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역사, 막 시작되다/이집트 고고학자

    초기 왕조 시대의 내적 분열을 통합한 카세켐위에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은 조세르(재위 BC 2667~2548년)라는 이름의 파라오였다. 이 조세르의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로 이때부터를 이전 시대와 구분해 ‘고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다만 카세켐위에서 조세르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심지어 카세켐위의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조세르가 아니라 다른 파라오였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을 정도로 이 시대의 연대기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세르를 고왕국의 첫 파라오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널리 쓰이고 있는 조세르라는 이름은 후대의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이고 조세르 당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파라오의 실제 이름은 ‘신성한 몸’이라는 뜻을 가진 ‘네체르케트’였고, 조세르가 남긴 여러 기념물들에는 모두 다 이 이름이 쓰여져 있다. 오늘날에 더 널리 쓰이는 조세르라는 이름이 ‘고결한 자’라는 뜻인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네체르케트를 부르던 일종의 별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조세르는 다양한 업적을 남긴 파라오였다. 그는 이집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을뿐더러 이집트의 남쪽 경계를 제1급류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꽤나 많은 그의 업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나 이집트 역사에서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세르의 피라미드는 더 널리 알려진 4왕조 시대의 피라미드와는 다르게 계단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분명히 최초의 피라미드다. 이때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임호테프다. 고대 이집트를 소재로 해 만들어진 영화 ‘미이라’에서는 이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어쩐지 복수심에 불타는 탐욕적인 악당으로 그려졌지만, 그는 실제로는 존경받는 대신관이자 유능한 총리였고, 조세르 피라미드의 설계자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현자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이 인물은 결국 후대에 가서는 신격화해 숭배의 대상이 됐다. 임호테프를 묘사한 자그마한 조상들은 현재도 상당히 많은 숫자가 남겨져 있어 여러 박물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말기 시대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일종의 부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조세르가 갑자기 피라미드를 무덤으로 짓기 시작한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다. 그저 높게 쌓여져 있는 피라미드가 갖고 있는 형태적 특성과 죽은 왕을 하늘에 있는 별이나 태양 등과 연관 지어서 이야기한 후대의 문헌들을 근거로 하늘로 오르고자 하는 파라오의 욕망이 물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사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처음부터 피라미드로 설계되지도 않았다. 피라미드 내부를 조사한 학자들은, 적어도 5차례 정도의 증축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 볼 수 있는 6단 피라미드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애초에는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기 이전 초기 왕조 시대 동안에 왕묘로 사용되던 무덤의 형식인 마스타바로 설계돼 지어지기 시작한 무덤이 초창기 단계에서 측면부가 먼저 확장됐고, 그러다가 마스타바를 몇 층으로 쌓아올린 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변화했다가, 다시 그 규모가 커져 결국에는 6단의 피라미드로 완성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과정에서 파라오를 둘러싼 궁정 내에서 아주 다이내믹한 토론과 논쟁, 그리고 단호한 이데올로기적 선택과 건축적 결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최초의 피라미드는 ‘세계 최초의 석재 건축물’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이전 시대에도 건축물의 일부에 석재가 사용된 예는 있지만 건축물 전체가, 그것도 상당히 거대한 규모로 오로지 석재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은 이 피라미드가 최초다. 이집트의 석공들은 이 시점에서부터 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술력이 이후 고왕국 시대 동안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들이 지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배경이 됐던 것은 물론이다. 바야흐로 피라미드 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손흥민 선제골에도 함락하지 못한 아자디 스타디움

    손흥민 선제골에도 함락하지 못한 아자디 스타디움

    벤투호가 ‘캡틴’ 손흥민(토트넘)의 선제골에도 아자디 스타디움을 함락하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골대의 지원을 받으며 ‘원정팀의 무덤’에서 소중한 승점 1점을 확보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12일 밤(한국시간) 이란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4차전에서 이란과 1-1로 비겼다. 한국은 2승2무(승점 8점)를 기록하며 3승1무의 이란(10점)에 이어 조 2위를 유지했다. 한국으로서는 비록 승리를 따내지 못했지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가장 큰 고비를 넘겼다. 한국은 이란을 상대로 2011년 1월 아시안컵 8강 승리 이후 최근 3경기 연속 무승부를 포함해 7경기 연속 무승(3무4패)를 지속했다. 또 1974년 아자디 스타디움 원정을 시작한 이래 8경기 연속 무승(3무5패) 징크스에서 맴돌았다. 역대 전적에서는 9승10무13패를 기록했다. 이날 벤투 감독은 지난 7일 시리아와 3차전 홈 경기에서의 라인업을 거의 그대로 가동했다. 예상대로 손흥민, 황의조(보르도), 황희찬(울버햄프턴) 삼각편대가 선봉에 섰다. 시리아전에서 중앙에 섰던 손흥민은 왼쪽으로 이동했고, 황희찬은 오른쪽 측면을 맡아 다소 변화를 주기도 했다. 경기 중에는 손흥민과 황희찬이 이따금 자리를 바꿨다. 시리아전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송민규(전북) 대신 이재성(마인츠)이 선발로 나온 점만 달랐다. 황인범(루빈 카잔)과 정우영(알 사드)이 중원, 홍철(울산)-김영권(감바 오사카)-김민재(페네르바체)-이용(전북)으로 이어지는 포백 라인은 그대로 였다. 김승규(가시와 레이솔)가 또 장갑을 꼈다. 이란 역시 예상대로 메흐디 타레미(FC포르투)와 알리레자 자한바흐쉬(페예노르트), 사르다르 아즈문(제니트) 등 유럽파 삼총사를 동원해 진검승부를 벌였다. 이란은 홈 경기였지만 조심스럽게 템포를 유지했다. 한국이 점유율에서 55대 45로 근소하게 앞서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손흥민, 황인범 등은 공간이 나면 주저 없이 슈팅을 때렸다. 그러나 수비에 막히거나 영점 조정이 되지 않았다. 전반 슈팅 8개에 유효 슈팅은 0개. 간간이 패스 실수로 이란에 기회를 주기도 했다. 서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다가 전반 막판 아즈문의 중거리슛에 이어 테라미의 오버헤드킥, 자한바흐시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잇따라 이어졌는데 김승규가 거푸 쳐내며 한국은 위기를 모면했다. 위기 뒤 곧바로 기회가 왔다. ‘캡틴’ 손흥민이었다. 후반 3분 이재성이 하프라인 부근에서 찔러준 전진 패스를 받아 뒷공간을 파고 든 손흥민이 한박자 빠른 오른발 인프런트킥으로 이란 골키퍼를 무력화시키며 공을 골대 오른쪽 구석에 꽂아 넣었다. 시리아전 극장 결승골에 이어 A매치 2경기 연속골이자 29호골. 손흥민은 1977년 11월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예선 당시 이영무(멀티골), 2009년 2월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당시 박지성에 이어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골을 넣은 세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한국은 실점 후 실수를 연발하며 흔들리는 이란 문전을 계속 위협했으나 추가골을 넣지 못했고 이란은 전열을 정비해 후반 중반 파상 공세를 펼쳤다. 체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거듭 위기를 맞던 한국은 후반 22분 실점이나 다름 없는 순간을 허용했다. 사이드 에자톨라히(바일레)가 날린 오른발 슛이 골대를 때렸다. 한국은 홍철(울산) 대신 김진수(전북)를 투입해 수비를 강화했지만 후반 31분 끝내 동점골을 허용했다. 패스 실수가 빌미가 됐다. 아즈문이 골 라인 가까이서 올린 크로스를 자한바흐시가 헤더로 한국 골망을 흔들었다. 2분 뒤에는 타레미의 중거리슛이 또 골대를 때렸다. 한국은 후반 막판 나상호(서울)와 이동경(울산)을 투입했지만 다시 리드를 잡지 못했다.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의 패스를 받은 나상호의 오른발 슛이 상대 골키퍼 선방에 막혀 아쉬움을 남겼다. 벤투호의 국내파와 J리거는 경기 직후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 카타르 도하 환승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나머지 유럽파는 항공편 일정에 맞춰 각자 소속팀으로 복귀한다. 벤투호는 다음달 11일 아랍에미리트(UAE)와 5차전 홈, 16일 이라크와 6차전 원정 2연전에 맞춰 재소집돼 최종예선의 반환점을 돌게 된다.
  • 고 박원순 부인 측 “인권위 결정으로 ‘성범죄자’ 낙인”

    고 박원순 부인 측 “인권위 결정으로 ‘성범죄자’ 낙인”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 측이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 때문에 박 전 시장이 성범죄자로 낙인찍혔다며 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구했다.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 측 소송대리인 정철승 변호사는 1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부장 이종환) 심리로 열린 ‘권고결정 취소’ 청구 소송의 첫 변론기일에 이같이 주장했다. 정 변호사는 “형사사법 기관이 아닌 인권위가 (박 전 시장이) 성범죄자라고 결정하고 발표해버린 것은 월권”이라며 “이미 망인이 돼 유리한 진술을 할 기회조차 없는 피조사자(박 전시장)를 파렴치한 성범죄자로 낙인찍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피조사자의 무덤을 누군가 파헤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무덤을 판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성범죄를 저지르고 편안히 누워 있는 박 전 시장이 너무 미워서 그랬다’고 했다”면서 “인권위 결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1일 오후 11시 52분쯤 경남 창녕의 박 전 시장 묘소를 파헤친 혐의(분묘발굴)로 A(29)씨가 현행범 체포됐다. A씨는 스스로 경찰에 전화를 걸어 묘소 훼손 사실을 밝혔고, 체포된 뒤 “성추행범으로 나쁜 사람인데 편안하게 누워있는 게 싫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정 변호사는 또 “증거자료를 전부 공개해 인권위가 제대로 판단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인권위 측 소송대리인은 서울시와 여성가족부 등 기관들에 반복된 성희롱과 2차 피해에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에 관해 직권조사한 끝에 대책 마련을 권고했을 뿐 박 전 시장이 권고 대상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인권위 결정으로 피조사자의 배우자인 원고(강씨)의 법익이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면서 “원고는 완전한 제3자인 만큼 적법한 소송이라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법적으로 제3자인 원고의 인격권이 인권위의 처분에 대해 다툴 요건인 ‘법률상 이익’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라면서 “그 부분을 먼저 심리한 다음 실체적인 부분을 심리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7월 피해자의 폭로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이후 인권위는 직권조사에 나섰다. 인권위는 올해 초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한 성적 언동 일부가 사실이며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를 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서울시에 ▲피해자 보호와 2차 피해 예방 ▲성역할 고정관념에 따른 비서실 운영 관행 개선과 성평등 직무 가이드라인 마련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절차 점검과 2차 피해 관련 교육 강화를 권고했다. 그러자 강씨는 올해 4월 인권위의 결정이 피해자의 주장만을 받아들였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 1분 남기고 극장골… 벤투호 구한 ‘캡틴 손’

    1분 남기고 극장골… 벤투호 구한 ‘캡틴 손’

    시리아전 후반 막판 역전골로 2-1 승손흥민, 2년 만에 A매치 필드골 성공“마지막 기회, 집중해 골대로 보냈다” 12일 ‘원정 무덤’ 이란전 부담감 덜어벤투호가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캡틴’ 손흥민(토트넘)의 ‘극장골’에 힘입어 2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은 7일 경기도 안산 와~스타디움에서 열린 A조 조별리그 3차전 시리아와의 홈 경기에서 황인범(루빈 카잔)의 선제골과 후반 막판 터진 손흥민의 결승골을 앞세워 2-1로 이겼다. 1무 뒤 2연승을 달린 한국은 최종예선의 가장 큰 고비인 이란 원정을 향한 발걸음이 다소 가벼워지게 됐다. 시리아는 1무2패. 한국은 시리아와 역대 전적에서 5승3무1패가 됐다. 장거리 이동에 시차 적응까지 해야 했던 해외파 컨디션은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벤투 감독은 손흥민과 황의조(보르도)를 중앙에 뒀는데 그러자 좌우에서 황희찬(울버햄프턴)과 송민규(전북)에 공간이 자주 열렸다. 송민규의 움직임과 활동량이 특히 좋았다. 전반 10분 홍철(울산)의 오른쪽 코너킥을 송민규가 헤더로 연결했으나 크로스바를 때린 게 아쉬웠다. 시리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라인을 끌어올려 압박하며 역습을 자주 시도했다. 전반 17분 오마르 알 소마가 날린 슛을 김승규가 몸을 날려 쳐내기도 했다. 점유율 70% 안팎을 유지하는 가운데 황의조, 황희찬, 황인범, 손흥민 등의 슈팅이 이어지며 영점을 잡아가던 한국은 후반 3분 선제골을 낚았다. 전반에 뒷공간을 노리는 결정적인 전진 패스를 수 차례 번뜩였던 ‘벤투호 황태자’ 황인범이 해결사로 나섰다. 황인범은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황희찬의 패스를 받아 벼락 같은 왼발 중거리슛을 날려 골망을 갈랐다. 황인범은 A매치 26경기 출전에 4골째. 황희찬은 2경기 연속 도움을 기록했다. 한국은 추가 골을 넣을 기회를 꾸준히 잡았으나 번번이 날렸다. 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이따금 시리아 공격수를 놓쳐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교체를 아끼던 한국은 결국 후반 39분 시리아의 오마르 크리빈에게 동점골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나 5분 뒤 손흥민이 벤투호를 구해냈다. 프리킥 상황에서 김민재(페네르바체)가 머리로 떨궈준 공을 손흥민이 왼발로 가볍게 골대 안으로 차 넣었다. 손흥민은 지난 6월 레바논과의 2차예선 경기에서 페널티킥 득점을 올리기는 했으나 필드골을 넣은 것은 2019년 10월 스리랑카와의 2차 예선 경기 이후 2년 만이다. A매치 93경기 28골째다. 손흥민은 경기 뒤 “많은 선수들이 고생해준 덕분에 찬스가 왔는데 마지막 기회라 여겨 어떤 상황보다 집중해서 골대로 보낸다는 생각으로 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란 원정은 특히나 어려운 원정이지만 좋은 경기를 치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벤투호는 하루 회복 훈련을 거쳐 9일 이란으로 향한다. 한국은 아자디 스타디움 원정 사상 첫 승, 2011년 1월 이후 이란 10년 9개월 만의 승리를 노린다. 원정팀의 무덤인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승점을 따내면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가능성을 더 부풀리게 된다.
  • 벤투호 최대 고비, 닥공으로 넘어라

    벤투호 최대 고비, 닥공으로 넘어라

    벤투호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가장 큰 고빗길에 선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7일 오후 8시 안산 와~스타디움에서 ‘난적’ 시리아와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조별리그 A조 3차전을 치른다. 이어 이란 테헤란으로 날아가 12일 오후 10시 30분 ‘원정팀의 무덤’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강적’ 이란과 4차전을 벌인다. 1승1무의 한국은 2승의 이란에 뒤져 조 2위를 달리고 있다. 안방 2연전이던 1, 2차전과 달리 이번엔 장거리 이동이 끼어 있다. 벤투호 주력인 해외파는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이란으로 가는 등 시차를 두 차례나 극복해야 하는 혹독한 일정이다. 1, 2차전에서 단 한 골의 답답한 경기력을 보였던 벤투호로서는 해외파의 체력 안배와 컨디션 관리가 더욱 중요해졌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손흥민(토트넘), 황의조(보르도), 황희찬(울버햄프턴)이 각자 소속팀에서 절정의 감각을 뽐내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대목이다. 시리아를 확실하게 잡아야 이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나마 가벼울 수 있다. 시리아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81위로 A조 6개 팀 중 5번째다. 한국(36위)과도 격차가 크다. 역대 전적에서도 한국이 4승3무1패로 우위에 있기는 한데 1골 차 신승이 많았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췄다. 지난달 이란에 0-1로 패하고 아랍에미리트(UAE)와 1-1로 비겼는데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다. 사우디 리그 득점왕 출신으로 부상에서 복귀한 오마르 알 소마, UAE 리그에서 올 시즌 3골 2도움을 기록 중인 오마르 크리빈 등이 경계 대상이다. 벤투호는 시리아전이 끝나면 하루 회복 훈련 뒤 9일 전세기편으로 원정길에 오른다. 한국은 조 1, 2위를 다투는 이란과 역대 전적에서 9승9무13패로 밀린다. 특히 아자디 스타디움에선 2무5패를 기록하며 50년 가까이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2011년 1월 아시안컵 8강전 승리 이후 10년 넘도록 6경기 연속 무승(2무4패)에 그쳤다. 최대 10만 명이 입장하는 아자디 스타디움은 무관중 경기가 열리다 한국전부터 유관중 전환한다. 코로나19로 1만명 입장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벤투 감독은 6일 “손흥민을 선발로 내는 등 보다 많은 공격 기회를 창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며 “최선의 해법으로 승점 3점이라는 최선의 결과를 내겠다”고 말했다. 황인범(루빈 카잔)도 “공격진에 컨디션이 좋은 선수가 많은데 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전진 패스로 좋은 공을 공급하고 공간을 열어주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김포 왕릉 아파트 철거’ 청원 동의 20만명…문화재청장 “원칙대로”

    ‘김포 왕릉 아파트 철거’ 청원 동의 20만명…문화재청장 “원칙대로”

    왕릉 조망권 구역에 아파트 건설이 진행돼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해당 아파트 건설을 중단하고 철거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따르면 지난달 17일 ‘김포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은 이날 오전 10시 40분 현재 20만 44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30일 안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 또는 정부 관련 부처 책임자로부터 답변을 받을 수 있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달 6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에서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 3곳을 경찰에 고발했다.문화재청은 이들 건설사가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포함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아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들 건설사의 아파트 대상지 인근에 있는 김포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으로 사적 202호로 지정돼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 왕릉에 포함된다. 인조의 무덤인 파주 장릉에서 김포 장릉, 그리고 김포 장릉 인근의 계양산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도록 왕릉이 조성됐는데, 김포 장릉과 계양산 사이에 문제의 아파트들이 건설 중인 것이다. 앞서 문화재청장은 2017년 1월 김포 장릉 반경 500m 안에 짓는 높이 20m 이상 건축물은 개별 심의한다고 고시했으나, 이들 건설사는 고층 아파트를 지으면서도 심의를 받지 않았다. 문제는 이미 아파트 꼭대기층(20~25층)까지 골조 공사가 끝났다는 점이다. 3개 건설사 모두 내부 마감 작업 공사 중이며 입주는 내년 6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지난달 29일 서울행정법원은 건설사 3곳이 각각 공사 중지 명령의 집행을 정지해달라며 제기한 가처분 신청 중 2건을 기각하고 1건만 인용했다. 이에 따라 2개 아파트단지(1900세대) 23개 동 중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12개 동의 공사가 지난달 30일부터 중단됐다. 나머지 11개 동은 문화재 보존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이번 결정과 상관없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김포 장릉 아파트 건설 문제가 거론됐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김포 장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탈락하면 다른 조선왕릉도 일괄적으로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확인했다. 김 청장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처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고 밝혔다.
  • [핵잼 사이언스] 지구최강 생명체 곰벌레, 1600만년 전 호박에서 발견

    [핵잼 사이언스] 지구최강 생명체 곰벌레, 1600만년 전 호박에서 발견

    지구 최강의 생명체로 불리는 곰벌레가 ‘영원한 무덤’이라는 호박 속에 ‘봉인’된 채 발견됐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CNN 등 해외언론은 극히 희귀한 곰벌레 화석이 약 1600만년 된 도미니카의 호박 속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적어도 5억 년 이상 지구상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곰벌레는 ‘물곰’(Water Bear)으로도 불리며 행동이 굼뜨고 느릿한 완보(緩步)동물이다. 몸크기는 50㎛(1㎛는 1m의 100만분의 1)~1.7㎜ 정도로 놀라운 것은 영하 273도, 영상 151도, 치명적인 농도의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곰벌레는 음식과 물 없이도 30년을 살 수 있는 사실상 불사에 가까운 존재다.  곰벌레는 이렇게 인류보다 오랜 시간 지구상에 존재해왔지만, 그 화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3번째일 정도로 '귀하신 몸'이다. 마치 타임머신처럼 곰벌레를 가둔 호박(琥珀)은 나무의 송진 등이 땅 속에 파묻혀서 수소, 탄소 등과 결합해 만들어진 광물을 말한다. 호박이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영화 ‘쥬라기 공원’ 덕으로 오래 전 멸종한 고대 동물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이번에 호박 속에 갇혀 발견된 곰벌레 화석은 0.5㎜의 크기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아 자신 만의 새로운 속(屬)과 학명(Paradoryphoribius chronocaribbeus)을 얻었다. 연구를 이끈 미국 하버드 대학 박사후보생 마크 마팔로는 "곰벌레 화석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한세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라면서 "고대 호박에서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곰벌레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이번 화석은 내장도 조사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곰벌레 화석 중에서 내부 구조를 시각화 할 수 있는 첫번째 화석"이라고 평가했다.
  • [서울광장] ‘허풍 없는 영웅’ 이정암을 다시 보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허풍 없는 영웅’ 이정암을 다시 보다/서동철 논설위원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던 시절 “언제든 갈 수 있는데…” 하며 게으름을 피웠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임진왜란 기록을 읽으며 금강산보다 황해도 연안이 먼저 가 보고 싶어졌다. 1592년 8~9월 이정암(1541~1600)이 이끈 의병이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 왜군의 나흘 밤낮 공격을 격퇴한 연성대첩(延城大捷) 현장이다. 한때는 경기도였다는 연안이 어디쯤인지 찾아보니 임진각에서 지척이다. 인터넷 위성사진을 보니 연안 시가지 북쪽의 고구려 시대 봉세산성은 그런대로 윤곽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연안성이 자리잡았을 그 남쪽 평지에는 20세기 이후 지어졌을 시멘트색 건물만 빽빽할 뿐 고지도에 직사각형으로 나타난 읍성은 흔적이 없다. 연안의 관심은 이정암이라는 인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류재 이정암은 그저 문약(文弱)한 인물이었다. 1587년 동래부사에 임명됐을 때는 스스로 서생(書生)이어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익히지 않았다며 사양하기도 했다. 1572년 연안부사로 부임하며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재임한 4년 동안 쌓인 신뢰가 훗날 수성전(守城戰)의 리더로 주민들이 그를 떠올리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사류재는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참패하자 선조는 임진강을 건넜는데, 이조참의였던 사류재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는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갔다.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만큼 일종의 직위해제가 되어 한동안 개성에 머물렀던 듯하다. 관군이 임진강에서도 패하자 그는 가족과 다시 연안으로 피신했고, 왜군이 출몰하자 해주 산사로 숨는다. 이런 사실은 사류재가 남긴 ‘서정일기’(西征日記)에 적혀 있다. 난리를 만나 어쩔 줄 몰라하던 이정암이니 의병장에 오르는 과정도 싱겁다. 해주에 머무는 동안 황해도 평산에 이어 연안과 배천에서도 의병 움직임이 일었지만 믿고 따를 장수가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뒤끝에 이정암에게 의병장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 전해졌다. 하지만 당사자는 “어머니를 받들어 고향에 살아 돌아가려는 일념뿐”이라고 거절한다. 이후 수없는 설득을 받고서야 거병(擧兵)을 알리는 통문(通文)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분조(分朝)를 이끌던 광해군은 이정암을 황해도 초토사에 임명했다. 황해도 지역 관군 지휘관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사류재는 “내 본뜻은 주변 지역의 의병을 모아 작은 적이나 막자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중임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했다. 그러니 싸움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이정암이 피난민과 지역민이 뒤섞인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1000명 남짓한 군사로 4000명에 이른 왜군을 방어한 것은 불가사의다.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의 행적은 더욱 인상적이다. 비변사는 이순신의 한산대첩 예에 따라 이정암에게 상을 내릴 것을 선조에게 주청했다. 광해군은 “고구려의 안시성주(安市城主) 외에는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연성전투를 ‘조선의 안시성 싸움’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정암의 장계에는 “단지 어느 날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 풀고 떠났다고만 했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조정에서도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시대의 대세와 철저하게 엇나간 이정암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전라도관찰사 시절인 1594년 5월의 상소다. 누구나 입만 열면 복수를 말하던 시기 “왜국에 포구를 열어 주고 무역을 허락하자”는 상소의 파장은 적지 않았다. 선조가 “필시 실성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하지만 전라도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났을 당시 “3년 동안 전쟁으로 부모와 처자를 보존할 방도가 없자 그만 양심을 상실한 것에 불과하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그다. 상소의 목적 역시 민생 회복과 국체 보전에 있었다. 선조 41년(1608) 연안성에 세운 연성대첩비는 북한에서 국가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사류재의 무덤은 황해도 개풍군에 있다는데 확인하기는 어렵다. 남쪽에는 고양시 사리현동 벽제초등학교 앞에 ‘사류재사우’가 남아 있다. 다른 임진왜란의 영웅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과장과는 거리가 먼 사류재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소박한 사당이다. 이정암의 삶을 살피고 나니 후세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더라도 부디 사류재의 본성을 닮은 듯 조촐한 사우를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짓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 40세=20홈런+20도루… 나이가 대수냐, 신수가 훤하다

    40세=20홈런+20도루… 나이가 대수냐, 신수가 훤하다

    LG전 2점포… 만 39세 2개월 22일양준혁의 38세 4개월 9일 기록 깨져추 “팀 위해서 하다 보면 나오는 것”불혹의 나이가 무색한 추신수(SSG 랜더스)가 한국 무대 첫해에 프로야구 역대 최고령 20홈런 20도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추신수는 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전에서 1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4회초 쐐기 2점 홈런을 터뜨렸다. 3-0으로 앞선 4회초 2사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추신수는 LG 선발 이민호가 던진 초구 시속 시속 142.4㎞의 직구를 잡아당겨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비거리 126.2m짜리 대포를 쏘아 올렸다. 시즌 20호. 지난 1일 20도루를 달성한 추신수는 이 홈런으로 만 39세 2개월 22일의 나이에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 현역 시절인 2007년 10월 5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만 38세 4개월 9일의 나이에 세운 역대 최고령 20-20 기록의 주인공이 추신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만 39세 이상 나이에 20홈런을 달성한 선수는 훌리오 프랑코(삼성 라이온즈), 펠릭스 호세(롯데 자이언츠), 이승엽(삼성), 이호준(NC 다이노스)에 이어 추신수가 5번째다. 20-20은 리그 역대 54번째 기록으로 SSG 소속으로는 2012~2013년 최정이 달성한 바 있다. 추신수 개인적으로는 메이저리그에서 2009년, 2010년, 2013년 총 3차례 20-20클럽에 가입한 적이 있다.추신수는 지난해까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며 빅리그 통산 1652경기에서 타율 0.275(6087타수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를 기록했다. 올해 한국 나이 40세에 한국에 데뷔한 추신수는 타율은 0.258로 기대에 못 미치고 있지만 탁월한 주루센스와 장타력으로 녹슬지 않은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김원형 SSG 감독도 “자기관리와 노력이 없다면 최고령 20-20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고 칭찬했다. 추신수는 “기록이라는 게 그걸 생각해서 이루기보다는 팀을 위해서 하다 보면 쌓여서 나오는 것”이라고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려고 왔다”면서 “20-20보다 더 큰 목표가 있다. 좋은 기록을 달성한 것은 좋지만 그런 기록에 들뜨고 좋아할 것은 아니다”라고 큰 형님의 책임감을 드러냈다. SSG는 추신수의 홈런포를 앞세워 최근 4경기에서 2무2패로 승이 없던 불운을 끊고 5강 경쟁을 이어갔다. 이날 키움 히어로즈가 에릭 요키시의 7이닝 1실점 호투에 힙입어 삼성을 8-2로 꺾었고 한화 이글스도 두산 베어스에 4-3 승리를 거두며 탈꼴찌 희망을 이어갔다. 롯데는 KIA 타이거즈를 13-3으로 제압했고 kt 위즈와 NC는 4-4로 승부를 내지 못했다.
  • [씨줄날줄] 무속과 주술/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무속과 주술/서동철 논설위원

    무속(巫俗)이 곧 미신(迷信)이라고 생각한다. 오해이자 착각이다. 무속의 대표적 의례인 굿을 보자. 별신굿은 마을 수호와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공동체 의례다. 안동 하회와 부여 은산의 별신굿이 농촌의 대동굿이라면 부산의 동해안 별신굿과 통영의 남해안 별신굿은 어촌의 공동체 의례다. 동서양 어떤 종교의례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다. 무당은 의례 집전이 전문인 무속의 사제다. 무당은 굿이라는 의례 과정에서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뜻을 탐지해 다시 인간에게 계시하는 존재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무당은 고대부터 신과의 교섭 능력을 공동체 이익에 활용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정치지도자와 동의어였다. 고조선을 창업한 단군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만든 용어라는 주술(呪術)은 미신보다 더욱 부정적 이미지다. 그럼에도 주술은 오래전부터 우리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대보름날 새벽 피부병이 생기지 말라고 부럼을 깨물거나 동짓날 붉은색 팥죽을 집안에 뿌려 역귀를 물리치고, 절이나 왕궁 지붕에 용 얼굴을 조각한 기와를 덮어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풍습도 주술의 일종이다. 무속, 미신, 주술에 모두 부정적 인식을 가졌다고 한들 이미 민속으로 정착된 주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야당 대선 후보가 TV토론회에 나설 때마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적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난을 받고 있다. “미신을 믿는 후보”라거나 “부적 선거를 포기하기 바란다”는 공격을 받는다. 해당 후보는 비판하는 상대 후보에게 “당신의 지금 이름은 역술인이 바꾸라고 지어 준 것 아니냐”고 역공을 가했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시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역대 대선 후보들은 조상 무덤의 이장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장의 역사적 교훈은 차고도 넘치니 후보들의 당락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는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았는데, 묏자리를 탐낸 무리들에 의해 두 차례나 크게 훼손됐다. 그러니 명당이 아니다. 흥선대원군은 아버지의 무덤을 ‘2대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라는 지관(地官)의 말에 따라 예산 가야산 중턱으로 옮겼다. 집안에서 고종과 순종을 배출했다. 하지만 2대 천자를 배출하기는 했으되 두 황제를 끝으로 조선이 망했으니 흥선대원군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대선 후보들도 전통 신앙의 본질이 개인의 발복(發福)이 아닌 공동체의 행복에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 “남자도 총리될 수 있나요” 질문 낳은 메르켈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김정화의 WWW]

    “남자도 총리될 수 있나요” 질문 낳은 메르켈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김정화의 WWW]

    “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사회 참여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에 관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8일(현지시간) 퇴임을 코앞에 둔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2005년 첫 여성 총리로 취임 후 16년간 ‘독일의 얼굴’이었던 메르켈이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치 아디치에 등 여성계 인사가 참여한 이 토론회 자리에서 그는 “과거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때 훨씬 소극적이었다”며 “이제는 내 생각을 더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4연임 끝에 드디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 메르켈은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여성 권력’의 상징이었다. 남성 일색의 각국 정상회담 때면 유일한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를 빛냈고, 그 희귀한 존재 자체가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뚜렷한 메시지가 됐다.최초, 최초, 또 최초…메르켈이 쓴 독일의 새 역사메르켈에겐 각종 ‘최초’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동독 출신의 첫 통일독일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 역대 최연소 장관 및 총리에 이어 헬무트 콜 전 총리와 함께 최장수 총리로 기록을 세웠다. 2017년까지 세 차례 선거에서 승리하며 네 차례 연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위기 대응 능력이다. 재임 기간 조지아와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지정학적 도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따른 유로존 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유럽 난민 사태,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각종 위기를 안정적으로 봉합시켰다는 평을 받는다.16년간 국외로는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 각 4명, 영국 총리 5명을 상대했고, 국내로는 좌우 이념 구분없이 포용적인 정치를 펼치며 임기 말까지도 6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했다. 태어난 이래 ‘메르켈 시대’밖에 겪지 못한 독일 어린이들 사이에선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다. “메르켈의 지도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맞서는 것부터 100만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을 독일로 들어오게 하는 것까지 냉철함으로 대변된다”는 설명이다.그럼에도 사실 여성계에선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여성 한 명이었지만 정작 여성 인권 문제에선 무덤덤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2017년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20개국 정상회의 당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페미니즘의 역사는 나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며 “내게 없는 타이틀로 스스로를 꾸미고 싶지 않다”고 얼버무린 게 대표적이다. 최장수 여성 총리지만 보수계 눈치로 ‘소신’ 대신 ‘침묵’이 때문에 메르켈에겐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자국 내 여성 지위 향상엔 기여하지 못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연방하원의 2017년 여성 비율이 과거보다 5% 포인트 이상 감소해 약 31%에 그친 게 한 예다. 역대 최장기 집권을 이뤄낸 여성 총리 시절에 오히려 여성의 정치 참여는 줄었다는 것이다. 정계뿐 아니라 재계는 더하다. 독일과 스웨덴에 본사를 둔 올브라이트재단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160개 상장 기업 중 110개 이사회에는 여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 회원 697명 중 56명만 여성이었다.일각에선 메르켈이 여성 문제를 주요 의제로 가져가지 않은 게 보수적인 독일 정치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분석한다. 프랑스24는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교회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정당”이라며 “이들은 기혼 부부를 위한 세제 개편 방안조차 거부해왔다”고 전했다. 메르켈이 내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메르켈은 여성 정체성을 무시함으로써 정치적 성격을 정확히 구축했다”며 “1990년대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기민당에 들어갈 때부터 메르켈은 여성 문제를 추구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성별을 초월한 브랜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에 메르켈의 임기 말 페미니스트 선언에 대해 이미 늦었다는 비난도 컸다. 베를린에 있는 군다 베르너 연구소의 이네스 카퍼트 대표는 “메르켈의 커리어는 존경할 만하다”면서도 “그에겐 독일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고 상황을 개선할 시간이 16년이나 있었다”고 비판했다. 여성 직업 한계 극복…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하지만 많은 이들은 메르켈이 공개적으로 ‘소신 발언’만 하지 않았을 뿐 그의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이었다고 평가한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수많은 이의 귀감이 됐다. 미 여성주의 잡지 미즈는 “메르켈은 공직 생활 전 물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자로 일하며 ‘일반적인 여성 직업’의 한계를 벗어났다”며 “여성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실천했다”고 봤다. 메르켈 본인도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독일의 ‘여성 총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연방 총리”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나는 여성으로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재임 기간 아동 센터를 위한 정부 기금 확대 등 여성·가족 중심 정책을 시행했고, 지난해 기업 이사회의 여성 할당 의무제도 도입했다. 2015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여성, 소녀들을 위한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2018년 11월 독일 여성 참정권 100주년 기념행사에선 “인구의 50%가 실종됐다. 여성은 가정뿐 아니라 정치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며 사회 참여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같은 정치인인데도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이나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했다. 메르켈은 과거 인터뷰에서 “남자가 100일 연속 짙은 청색 정장을 입는 건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내가 2주 동안 같은 옷을 4번 입으면 편지가 쏟아진다”고 언급했다.NYT는 “메르켈이 성별 언급을 피한 건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며 “의식적이든 아니든 메르켈은 전세계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었고, 오늘날 여성이 오를 수 있는 높이를 입증해왔다”고 봤다.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인 알리체 슈바르처는 “메르켈은 전세계 여성에게 존경받고 있고, 이것이 그의 유산이다”라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고, 위엄과 결단력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앙겔라 메르켈은 누구 · Angela Dorothea Merkel1954 서독 함부르크 출생 후 동독에서 성장1973 라이프치히대 입학1978~1990 동베를린 물리화학연구소 연구원1986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1990 독일 연방 하원의원1991~1994 여성청소년부 장관1994~1998 환경부 장관1998 기민당 사무총장2000 기민당 당수2005 독일 첫 여성 총리 취임2021 16년간 최장기 집권 후 퇴임
  • “형제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이라도 알게 해주시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형제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이라도 알게 해주시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 5월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편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사망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족들의 호소 박명호(66·가명)씨의 아버지는 형제복지원에서 사망했다. 1977년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부고를 전해준 아버지의 친구는 “형제복지원에서 돌아가셔서 시신도 못 찾을 것”이라고 했다. 짧은 휴가를 받고 나온 스물 둘 군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향으로 가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무덤도, 제삿날도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 박씨는 형제복지원으로 찾아가 “아버지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제삿날이라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경비는 부산 시립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사망 날짜를 확인했다. 이제 제사는 지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가 형제원에서 겪은 일을 다 알지 못하는 아들은 여전히 마음에 돌덩이가 얹혀있다. 어린 시절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수용생활을 했던 고 김성진(가명)씨는 스물 한 살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84년 9세 소년이었던 김씨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놀다가 형제원으로 납치됐다. 어머니 이옥순(가명)씨는 “우리 큰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면서 백방으로 아들의 행방을 찾았다. 아버지는 폐인이 돼 갔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아이가 형제원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왜 그곳에 가게 된 것인지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간신히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게 됐지만, 형제원에서의 경험은 아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김씨의 방황은 길어졌고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그래도 중장비 기술을 배워 밥벌이를 잘하는가 싶더니, 어느 날 훌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잃은 박명호씨와 아들을 잃은 이옥순씨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족으로서 최근 국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에 참여했다. 피해자 본인이 사망한 데다 입·퇴소를 증명할 기록을 찾는 것도 쉽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싸움이다.그동안 유족들에게 형제복지원은 묻고 싶은 기억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형제복지원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아픈 가족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냈다. 고통으로 얼룩진 세월을 치유받고 싶다. 형제원에서 죽어간 아버지, 무덤도 제삿날도 없었다 다음은 박한길씨의 아들 박명호씨의 진술서 전문.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유가족) 진술서 진술 내용: 아버님께선 부산에 살고 계셨습니다. 1977년 제가 군 복무를 하고 있던 중에 경산에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군 휴가를 신청해 1977년 8월 휴가를 나와 확인해보니, 아버님 친구로부터 작은아버지께 “형제복지원에서 돌아가셔서 시체를 못 찾을 것이다”라는 연락만 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더 알아볼 시간도 없고 해서 고향인 경상북도 XX군 OO면 면사무소에 찾아갔습니다. 현재는 OO면 △△리 5XX번지에 아무도 안 살고 있지만 아버님이 객지에 다니시다가 형제복지원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듣고 와서 아무런 사망서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군복 입은 군인이라서 그런지, 아들로서 호적 정리를 하려고 왔다고 하니, OO면 △△동 5XX번지에서 사망했다고 호적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그후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아버님이 형제복지원에서 돌아가셨으면 거기에 가서 제삿날이라도 알아보자고 해서 부산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 정문 경비실에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경비실 아저씨가 그 당시 연산동에 있는 시립병원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그 길로 연산동 시립병원에 찾아가서 확인해 보니 3월 30일 사망이라는 사망서류와 사진만 확인했습니다. 저는 아버님 제삿날만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소송을 하려고 하고, 과거사법도 생기고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련 서류를 챙겨 두는 건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과거사법이 통과되고 나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생존자들의 활동에 시체도 찾지 못하고 아버님 산소도 없는 한 아들로서 생존자들과 아픔을 같이하기 위해 확실한 증거 서류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저의 아버님에 대한 거짓 없는 진술서를 올리오니 잘 판단해 주시고 확인할 수 있으면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조사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9살 때 형제원 끌려갔다 온 아들, 트라우마 못 견디고 삶 놓았다 다음은 김성진씨의 이모 이옥희씨의 진술서 전문. ※소송에 참여한 어머니 이옥순씨 대신 이모가 진술서 대필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유가족) 진술서 진술 내용: 피해자 김성진은 이옥순의 장남으로서 1975년 출생했습니다. 1983년 5월 불의의 사고로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후 아버지 김OO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세월을 보냈고, 언니는 형부를 대신해 가정을 꾸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가정의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성진이는 동네 형들과 어울리기 시작해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놀기 시작했고, 이것이 더 큰 가정불화를 불러왔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984년 아이가 행방불명 됐다는 언니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고, 형부는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잘못될까 두려워 극심하게 폐인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운대 초등학교로부터 연락이 와서 가보니 성진이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된 것인지는 전혀 설명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습니다. 아이가 그래도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따름이었습니다. 이후에 둘째 언니가 형제복지원으로 찾아가서 아이를 면회했습니다. “여기 못 있겠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를 하루빨리 데려오려고 노력했습니다.우여곡절 끝에 형제복지원에서 퇴소한 아이가 다시 형부와 갈등을 빚게 될까봐 염려한 우리 자매들은 성진이를 한동안 우리 집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당시 단칸방에서 조카와 언니, 나 3명이 같이 살았는데 아이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꿈을 꾸며 깨곤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매를 너무 많이 맞았다는 것,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 힘든 노동에 시달린 얘기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성진이는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야 할 모진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너무나 소름끼치고 끔찍한 사건입니다. 해운대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가 당시 경찰에 붙잡혀 갔습니다. 언니는 1년 이상 수용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해운대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상에는 1984년 당시 아이의 결석일수가 119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후 아이는 학교 생활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중학교 진학 후에도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지만 끝내 제적을 당했습니다. 이모들의 권유로 검정고시도 준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중장비 기술자격시험에 통과해 공항에 취업할 기회가 있었지만, 학력미달 문제로 또 좌절을 겪었습니다. 중장비 기술자로서 건설 현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안정이 되어가는 듯했지만 결국 1996년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진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너무나 억울하고 불쌍한 제 조카의 짧은 생. 한 아이의 인생이, 가정과 가족이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가족은 형제복지원 뉴스만 나와도 채널을 돌려버리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과거사법이 통과된 후 이제 그만 가슴 깊숙이 숨겨둔 아픈 사연을 용기내 세상에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에 피해자 단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해자들의 고통이 하루 빨리 어루만져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고, 제 조카의 짧고 억울한 인생과 언니의 피눈물을 대한민국이 보상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이어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왕릉 옆에 제멋대로 신축중인 인천 검단 아파트 2곳 ‘공사 중지’

    조선 왕릉 인근 문화재 보존지역에서 문화재청 허가 없이 신축 중인 2개 아파트 단지의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2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은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에서 아파트를 짓고 있는 건설사 3곳이 각각 공사 중지 명령의 집행을 정지해 달라며 제기한 가처분 신청 가운데 2건을 기각하고, 1건은 인용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900가구 규모의 아파트단지 23개 동 중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12개 동의 공사가 30일부터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1개 동은 문화재 보존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이번 결정과 상관없이 공사를 계속할 수 있다. 앞서 문화재청은 이들 건설사가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포함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아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며 경찰 고발과 함께 아파트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문화재청은 2017년 1월 김포 장릉 반경 500m 안에 짓는 높이 20m 이상 건축물은 개별 심의한다고 고시했으나, 이들 건설사는 고층 아파트를 지으면서 심의를 받지 않았다. 건설사들은 지난 7월 문화재청이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자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인용되자 공사를 진행해왔다. 이후 문화재청은 기존 명령을 직권 취소한 뒤 다시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고, 건설사들은 법원에 재차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이들 건설사의 아파트 대상지는 경기 김포시 장릉 인근인 인천 서구 검단에 있다.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에 포함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17일 ‘김포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 글이 게시됐고 이날 현재 14만3000여명의 동의를 받았다. 문화재청은 이달 10일까지 아파트와 관련한 개선 대책을 내라고 통보했으나 건설사들의 요청에 따라 제출 시기를 다음 달 11일까지 연장한 상태다.
  • [안도현의 꽃차례] 내성천을 때리지 말아 주세요/시인

    [안도현의 꽃차례] 내성천을 때리지 말아 주세요/시인

    작년 여름에 나는 가까운 내성천으로 세 번 멱을 감으러 나갔다. 어릴 적에는 매일 헤엄을 치고 놀던 강이었다. 강의 초입부터 갈대와 달뿌리풀 줄기가 모래를 끈질기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은 위력을 과시하며 내가 강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들을 헤치고 나서야 좁다란 모래밭과 여울을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 여름에는 강물에 한 번도 몸을 적시지 못했다. 강변의 식물들이 스크럼을 짜고 내게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과 일 년 만에 나는 모래밭을 잠식한 풀과 나무들에게 차단당하는 신세가 됐다. 버드나무와 왕버들이 빠르게 성장해 숲을 이룬 강.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나와 강 사이의 인연은 더이상 이어지기 힘들 것 같다. 얕고 긴 여울에 몸을 담그거나 가는 모래톱에 발바닥이 닿던 그 신비로운 경험은 기억의 무덤에 갇히게 될 것이다. 내성천은 이미 천천히 흐르기를 포기한 듯하다. 깊고 빠른 유속의 물길이 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이 모든 것의 원인은 영주댐 때문이다. 2016년 준공된 영주댐은 낙동강의 수질 개선을 위한 물 공급을 명분으로 세워졌다. 좋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댐을 세운다는 설명은 어린아이도 코웃음 칠 일이다. 내성천은 낙동강 수계에서 가장 많은 모래와 맑은 물을 공급하는 하천이다. 낙동강의 어머니, 모천이라고 할 만하다. 영주댐이 물을 가두고 나서 녹조가 대량으로 번졌고 그때부터 내성천 모래톱은 급속하게 육지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벌써 내성천 가운데 쌓인 퇴적물은 어른 키로 한 길을 훨씬 넘는다. 어릴 적에 귀에 와닿던 어른들의 대화 속에는 항상 내성천 모래가 있었다. 어떤 군수가 어떤 업자와 결탁해 내성천 모래를 엄청나게 팔아먹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70년대부터 강모래를 채취해 돈으로 바꾸는 데 능한 자들이 있었던 거다. 해변이나 사막의 모래는 시멘트와 섞어 콘크리트를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염분이 없고 각이 진 입자로 된 강모래가 콘크리트 원료로는 최고라는 것. 그 귀하다는 모래를 만들기 위해 강은 얼마나 오래 뒤척였던 것일까. 강에 모래톱이 발달하려면 강물이 흐르는 속도가 적절해야 한다. 무엇보다 얕고 긴 여울이 필수적이다. 가장 넓은 내성천의 폭은 700미터에 이른다. 이만한 규모의 강에 은모래가 반짝이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우리 국토 어디에도 이런 모래로 된 강이 없다. 하천생태학자들은 내성천 모래톱이 세계적 자연유산으로 손색이 없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 내성천 여울에 사는 흰수마자라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췄다. 영주댐이 시험 담수를 2년에 걸쳐 하는 동안 생긴 불상사다. 세계에서 유일한 한국 특산종 흰수마자가 절멸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영주댐에 물을 가두는 일이 토종 물고기의 생존보다 중요한 일일까? 생태사진가 박용훈씨의 말에 의하면 가을에 내성천을 찾는 귀한 손님인 먹황새는 영주댐 건설 이후 최근 수년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멸종위기 종 흰목물떼새 둥지가 가장 많이 확인된 댐 상류의 모래톱은 시험 담수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영주댐 해체나 철거가 어렵다면 댐에 가두어 놓은 물을 빼내면 된다. 고심해서 결정할 사안도 아니다. 환경부는 2020년 9월까지 시험 담수를 한 이후에 물을 전량 방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국수자원공사는 2018년 초에 녹조 문제로 영주댐 물을 모두 방류한 적이 있고, 2019년 9월에 발전 설비 점검을 내세워 물을 가두면서 점검이 끝나는 대로 다시 방류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으나 정부에 속았다. 환경부가 영주댐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성천의 자연성 회복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속임수다. 그것은 폭력배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제발 아프지 마라. 내가 빨리 병원 데려갈게”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내성천의 치료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댐이라는 괴물을 이용해 내성천을 때리지 말아 달라는 거다. 그대로 놔두라는 거다. 내성천을 죽이고 낙동강을 살릴 수는 없다. 우선 내성천의 숨통부터 틔워야 한다.
  • [여기는 남미] 엘도라도 전설의 종족이 남긴 금과 에메랄드 유물 발견

    [여기는 남미] 엘도라도 전설의 종족이 남긴 금과 에메랄드 유물 발견

    금과 에메랄드 등이 가득한 유물이 남미 콜롬비아에서 발견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콜롬비아 유물발굴단은 산탄데르주 남부의 자동차도로 공사현장에서 신전과 묘지 등 유적을 발견했다. 공사를 멈추고 진행된 발굴조사에선 세공품으로 가득 한 토기 6점이 출토됐다. 세공품은 에메랄드나 금으로 제작한 것으로 사람, 뱀 등의 형상이었다. 학계에 따르면 발견된 유물이 약 600년 전 무이스카 종족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과 묘지에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던 점에 부장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지금의 콜롬비아 땅에 거주하던 무이스카 종족은 뛰어난 금세공술로 널리 알려진 종족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엘도라도(스페인어로 금가루를 칠한 사람)의 전설이 무이스카 종족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있을 정도다. 발굴단은 "엘도라도의 원조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번에 발견된 세공품도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것들"이라며 "무이스카 종족의 뛰어난 세공기술이 재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세공품이 소중하게 담긴 토기가 신전과 묘지에서 나온 걸 보면 당시의 장례문화가 어땠는지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고학자 프란시스코 코레아는 "선조들에게 일종의 예물을 바치는 것처럼 부장품을 무덤에 넣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며 "무이스카 종족이 숭배 차원으로 조상을 모셨다는 설까지 학계에선 나오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콜롬비아에 살던 무이스카 종족이 스페인의 공격을 받은 건 1537~1540년 사이로 추정된다. 무이스카 종족을 굴복시키고 정복한 스페인은 무이스카 종족의 뛰어난 금은 세공술에 깜짝 놀랐다. 뛰어난 금은세공술을 가진 종족이 남미에 살고 있다는 스페인의 식민지 정복 기록이 남아 있다. 엘도라도의 전설도 무이스카 종족에서 시작됐다는 보는 학자들이 많다. 코레아는 "기록을 보면 무이스카 종족은 일련의 의식을 거행할 때 지도자가 금가루를 몸에 칠하고 참석했다"며 "엘도라도 전설의 기원이 된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한편 당시 최고의 금세공술을 가진 무이스카 종족이었지만 이 종족에겐 금광이 없었다. 학계는 "무이스카 종족이 금을 무역으로 얻었다는 뜻"이라며 당시 남미에서 종족 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 [이현주의 박물관 보따리] 아이들이 춤을 추는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

    [이현주의 박물관 보따리] 아이들이 춤을 추는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경력관

    가만히 앉아 영상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뛰어나간다. 흥에 겨운 몸짓으로 춤을 춘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하다. 같이 온 엄마와 아빠는 놀라 아이들에게 손짓을 한다. 어서 자리로 돌아와. 영상을 보던 아이들이 춤을 추는 그 공간은 디지털 실감영상관이다. 폭 60m, 높이 5m의 초대형 파노라마 영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바닥에도 실감영상이 나온다. 아이는 실감영상관에서 수백 명이 등장하는 ‘왕의 행차, 백성과 함께하다’를 보고, 금강산의 사계절을 볼 수 있는 ‘금강산에 오르다’ 등을 보며 그 속에 빠져든다. 10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우리의 핏속에 살아 있는 ‘흥’(興)이라는 전통의 DNA를 움직인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영상 속의 주인공이 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 아이가 행복한 순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곳 말고도 디지털 실감영상관과 가상현실(VR) 체험관이 더 있다. 상설전시관 2층에 설치된 디지털 실감영상관2에서는 8m의 벽면을 가득 채운 ‘태평성시도’로 게임을 할 수 있고, ‘김홍도 화첩’을 자세하게 보며 직접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1년에 3개월 정도 밖에 전시할 수 없는 회화 유물들인 2점을 1년 내내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와 함께 평상시에는 들어갈 수 없는 보존과학실과 수장고를 VR로 체험할 수 있다. 예약은 필수다. 이 VR체험관은 엄마들이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온라인상에 공유하기도 한다. 1층 고구려실에 있는 디지털 실감영상관3에서는 고구려 벽화무덤을 볼 수 있다. 3개의 벽과 천장에 프로젝트 영상을 투사해 직접 무덤에 걸어 들어가서 보는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동안 발견됐던 107기의 고구려 벽화무덤 중 고구려인들의 삶의 모습과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세 곳의 벽화무덤을 골랐다. 안악3호 무덤과 덕흥리 벽화무덤이다. 디지털 실감영상실과 VR체험관은 2020년 ‘실감’나는 박물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민 곳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공간이다. 박물관에서 문화재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에게 먼저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도 중요하다. 영상 앞으로 갑자기 뛰어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놀라는 부모도 있지만 나는 그 순간을 즐긴다. 은근히 기다린다. 멋지지 않은가? 아이들이 춤을 추는 박물관이라니.
  • 여성 직업 한계 극복…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

    여성 직업 한계 극복…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

    여성인권 애매모호한 입장 비판받아“공개 발언 안 했을 뿐 女할당 등 노력”“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사회 참여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에 관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여성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밝힌 이 말은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메르켈은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여성 권력’의 상징이었다. 남성 일색의 각국 정상회담 때면 유일한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를 빛냈고, 그 존재 자체가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뚜렷한 메시지가 됐다. 그럼에도 여성계에선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었지만 여성 인권 문제에선 무덤덤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2017년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20개국 정상회의 당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페미니즘의 역사는 나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며 “내게 없는 타이틀로 스스로를 꾸미고 싶지 않다”고 얼버무린 게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메르켈에겐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자국 내 여성 지위 향상엔 기여하지 못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연방하원의 2017년 여성 비율이 과거보다 5% 포인트 이상 감소해 약 31%에 그친 게 한 예다. 역대 최장기 집권을 이뤄낸 여성 총리 시절에 오히려 여성의 정치 참여는 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메르켈이 공개적으로 ‘소신 발언’만 하지 않았을 뿐 그의 삶 자체가 페미니스트의 표본이었다고 평가한다. 미국 여성주의 잡지 미즈는 “메르켈은 공직 생활 전 물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자로 일하며 ‘일반적인 여성 직업’의 한계를 벗어났다”며 “여성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실천했다”고 봤다. 메르켈은 재임 기간 아동 센터를 위한 정부 기금 확대 등 여성·가족 중심 정책을 시행했고, 지난해 기업 이사회의 여성 할당 의무제도 도입했다. 2015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여성을 위한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018년 11월 독일 여성 참정권 100주년 기념행사에선 “여성은 가정뿐 아니라 정치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며 사회 참여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 2000년 전 황금보물에 수배령 내린 탈레반… 박트리아 유물의 비극

    2000년 전 황금보물에 수배령 내린 탈레반… 박트리아 유물의 비극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시대의 보물인 ‘박트리아 황금보물’ 수배령을 내렸다고 워싱턴이그재미너가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이 유물은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뒤 사라졌다.아프간 북부 박트리아 지역의 여성 무덤 5기와 남성 무덤 1기에서 1978년에 소련 고고학자들이 출토한 부장품 유물들은 정교한 금 공예품들과 상아, 조각, 유리병 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2만 1145 조각의 금공예품이 출토 됐는데 이 중 높이 13㎝, 길이 45㎝의 금관은 삼국시대 신라 금관과 비슷한 형태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이 금관은 분해가 가능한 조립식이며, 신라 금관보다 400~500년 전 앞서서 제작됐다는 차이가 있다. 또 다른 공예품들은 그리스, 이집트의 공예품들과 형태적 유사성을 띄기도 했다. 고대 문화의 융합판인 듯한 유물이 박트리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고대 동서교역의 길목이었던 덕이 크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여파로 박트리아에 그리스 왕국이 세워졌는데, 이 시절의 공예품들이 매장되었다. 박트리아 보물은 발견 되자마자 수난을 겪었다. 발굴 이듬해인 1979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고 혼란이 이어졌다. 결국 박물관 관계자들은 1989년 보물들을 카불의 대통령궁의 지하 3층 금고로 몰래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바위로 만든 금고 앞에 7개의 자물쇠가 달린 철문을 세우고 콘크리트로 밀봉한 뒤, 열쇠를 나눠가진 7명의 열쇠지기가 보물을 지켰다.이렇게 감추지 않았다면 박트리아 보물은 이미 파괴됐을 수도 있다. 아프간 유물 중 수만점이 1996~2001년 탈레반의 1차 아프간 집권기에 파괴됐다. 탈레반은 동물과 사람 형상 유물을 파괴해 정신을 정화하는 것이란 명분을 내세웠는데, 심지어 2001년엔 고대 아프간 불교 미술을 상징하는 세계적 유산인 바미안 석불마저 폭파해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탈레반은 박트리아 보물이 있는 금고 근처까지 진입했지만, 열쇠지기 중 한 명이 그 안에 도자기들이 들어있다고 탈레반을 속였다. 일부 자물쇠는 꽂은 열쇠를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망가뜨려 버렸다. 대통령궁 지하 금고에서 20년 넘게 잠자고 있던 박트리아 보물은 미국의 아프간 전쟁 이후 탈레반 정권이 축출된 다음인 2004년 다시 세상에 나왔다. 유물은 카불 박물관을 집으로 삼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아프간의 정세를 피해 전 세계 순회전시에 나섰다. 2016년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에서도 박트리아 보물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지난 2월부터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 직전까지 박트리아 보물은 카불 대통령궁에서 전시되고 있었지만, 현재는 실종됐다. 탈레반은 다시 보물을 찾겠다고 공개선언하며 아프간 바깥으로의 반출, 아프간 내에서의 이동 모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인류는 박트리아 보물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페루 반군 ‘빛나는 길’ 창설자 구스만 “법 고쳐 화장”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페루 반군 ‘빛나는 길’ 창설자 구스만 “법 고쳐 화장”

    페루 정부가 수감 중 숨진 반군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창설자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화장하기로 했다. 페루 검찰은 23일(이하 현지시간) “테러리스트 두목” 아비마엘 구스만의 시신을 24시간 안에 화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골분은 공개되지 않은 모처에 뿌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1일 페루 카야오의 교도소에서 86세 나이로 자연사한 구스만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최근 페루에서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검찰은 당초 이틀 정도면 시신 처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결정이 내리기 어려웠다. 결국 법을 뜯어 고쳐 특별한 예외 규정을 만들어 시신 처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1960년대 악명 높은 ’빛나는 길‘을 만들고 지휘했던 구스만은 철학 교수를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의 반군 조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 주의를 표방해 체제 전복을 꿈꾸며 1980∼1990년대 반정부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 무자비한 학살도 서슴치 않아 7만명 가량이 숨지거나 실종되게 했다. 구스만은 1992년 수도 리마에서 체포돼 테러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복역해 왔다. 규정대로라면 사망한 수감자의 시신은 유족에게 인계돼야 하지만, 유일한 유족인 ‘빛나는 길’ 2인자로 마찬가지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010년 옥중 결혼한 부인 엘레나 이파라귀레도 다른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부인은 자신이 위임한 베르타 동지란 인물에게 남편의 시신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안장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끔찍한 집단학살을 저지른 인물에게 지지자들의 추모 공간이 될지도 모르는 무덤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높았다. 어떤 흔적도 남지 않도록 화장해 태평양에 골분을 뿌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구스만의 시신 처리를 위해 페루 국회는 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국회는 지난 16일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중 사망한 인물은 “안보와 공공질서에 해를 끼칠 가능성에 대비해” 법원과 검찰이 시신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구스만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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