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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부실공사/강한섭(굄돌)

    라디오에서 성수대교 붕괴사건의 일보를 전하던 그 시각.필자도 출근길이었다.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무덤덤했다.대형사고에 익숙해져 있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의연함」은 뻔뻔한 이기심의 발로였다.성수대교는 필자의 출퇴근 코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저지르고 있는 「날림」 「졸속」 「적당주의」 그리고 「무관심」을 생각해 본다.도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능력이 허용하지 않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너무 많이 강의하고 잘 모르는 것도 전문가인양 쓰고 있고 「뭔가 보여 줄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 방송에 나가 주접을 떨고 있다.게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슨 심사위원과 자문위원이라는 허명을 몇개씩이나 달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강의날이 휴일과 겹치면 학생들 보다도 더 좋아하는가 하면 강의시간도 다 채우지 않고 앞과 뒤로 적당히 잘라먹고도 끄떡없게 되었다.어디 그뿐이랴. 학교에 전임자리를 얻고부터는 본업인 영화평론은 부업이 되어버렸다.그래서 제대로 된 평론은 쓸 생각도 못하면서도 평론가라는 직함을 고수하고 있다.평론은 점점 잡문이 되고 있고 논문은 교육부가 정한 의무편수만 간신히 채우고 있다.한마디로 말해 「한심한」인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웬 불만과 욕심은 그리도 많은지 입에서 나오는 말과 쓰는 글의 논조는 항상 지고한 문명비평가를 방불케 한다.자신이 한국 영화교육과 영화문화의 걸림돌과 짐이 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기관을 헐뜯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그러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고 묘한 쾌락까지도 즐기고 있다. 성수대교는 이제 수리되고 있지만 과부하와 허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는 필자 자신의 보수 작업은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이런 반성문이 전기가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내일 또다시 「양이 질을 결정한다」는 자기 위안의 구호를 은밀히 내걸지나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아랍서 지중해까지:21)

    ◎묘비 색­모양 제각각… “아름다운 공원”/모파상 등 문호 잠든 곳… 사르트르­보부아르는 합장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일이라고 헤밍웨이는 표현했다. 보고 느끼기에 따라서 삶의 폭죽이 매순간 터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지 모른다.능력 여하에 따라 다양함 속으로 얼마든지 헤엄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노인들도 짙은 화장 그러나 그런만큼 그 축제스러움 뒤에 가려진 부분이 더욱 음영 짙게 느껴진다.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을 흔히 거리에서 만난다.아직도 삶을 즐기는 듯한 노신사와 노숙녀를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노인들의 어깻죽지가 몹시 외로워 보인다. 슈퍼마켓 같은데서 캔에 든 개밥을 단 한통만 사가는 노인들을 볼 수 있다.그들은 몸을 되도록 움직이기 위해,또 남아 나는 많은 시간을 쓰기위해 물건을 하나씩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화장을 하고 투피스를 단정히 입고 귀고리까지 한 노인들을 볼 때마다 끝까지 여성을 잃지 않으려하는 안간힘이 예뻐보이면서도 서양의 할머니에게는 돌아갈 상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이를테면 우리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노인의 상이 있다고 평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늙어갈수록 일을 많이하여 생명력이 붙는 머리를 쪽진 시골 할머니의 모습으로. 주리에트 그레코가 TV에 나온 모습이 아직 그대로이더라고 일행이 말했을때 나도 한번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는데 어떻게 살아서 어떤 모습을 간직했는가 하는 진정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흘러간 배우들의 모습과 생활을 잡지 같은데서 대할 수 있다.어떤 식으로든 살아낸다는 것은 다 장하다고 이 나이가 되니 느껴지기도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프랑스에서는 뒤라스나 사강같은 작가가 내게 어떤 등불이 되어준다. 뒤라스는 70이 넘었는데도 연하의 남자와 새로이 삶을 시작하였고 사강은 목숨을 건 모험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이 목숨을 건 삶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삶과 아마도 확실히 구분되는 것일 것이다.프랑스의 대학 입학시험 문제에 아프리카에서 사고로 죽은 어느 모험가를 예로 들어 젊은 날의 모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이러한 모험을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강행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견을 말하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대학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오다니 하는 경이와 함께 내가 그 시험을 치른다면 어떻게 답을 써야할지 막막하지만,목숨을 걸 수 있다는 그 정신 자체를 우선 선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사회보장제도 잘돼 보부아르는 「노년」이라는 책에서 내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노인들의 삶의 힘듦을 말하고 그것이 서양문명의 실패라고 지적했다.노동자 착취,사회의 원자화,소수에 국한된 문화의 빈곤,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이런 지적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프랑스 지성의 믿음직스런 면을 보는 것 같으나 그러나 노인의 생활수준이나 비인간화의 정도가 우리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 같다. 이 나라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어 분배의 평등,실명제,실업자 수당,의료비 무료등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알고 있다.실제로 실업자 수당이 1인당 한달에 4천 프랑(60만원)이라고 한다.이런 모든 것이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할당되는데 개인은 가난하고 국가는 부자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오는가 보다. 노인들을 대할때마다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이 번지던 마음이 묘지에 가서는 오히려 편안해진다.몽파르나스 묘지에는 보들레르,모파상,생상스,사르트르등의 묘가 있었다.간간이 바깥거리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뿐,공원처럼 아늑하고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었다.묘비의 재료와 색깔과 모양이 각양각색으로 무슨 아트같다.펌프에서 물뿌리개에 물을 받고있는 노인에게 사르트르의 묘를 물으니 가르쳐준다. 그곳에 보부아르도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나는 그때까지 그들이 합장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사르트르가 함께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냥 그런 생각이 스쳤는데 그것이 거의 사실임을 나중에 알 수 있었다.보부아르는 따로이 혼자 편히 누워있어도 좋았을텐데라는 애정어린,염려아닌 염려와 함께 세상 곳곳에 있는 삶이 다시한번 체현되어 오기도 했다.내가 좋아하는 보들레르의 무덤은 찾을 수 없었다. ○자기생활의 보람 존중「아득히 멀고 멀어라 향기로운 낙원이여/맑은 창공아래 일체가 사랑과 기쁨 뿐인곳/사랑하는 일체가 사랑받을 만한 곳」 향기로운 낙원을 찾아 일생을 전신으로 헤매던 시인이 이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휴식이 오는것 같아 오래 머물러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유년에서 청년 장년 노년으로 변해간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것들이 한 눈에 보인다.이국이기 때문에 더욱 객관화 되어 잘 보여지는 것일까.어린 소년이 지나가면 소년 속의 청년과 노년이 함께 보인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매우 아름다운 용모에 순한 눈의 표정,그리고 독립심이 강하다.그들의 교육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같이 매우 철저하다.부모가 사람들 앞에서라도 잘못한 그 즉시에서 아이를 꾸짖고 벌 주는것을 몇번인가 보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근처에는 단체로 관람을 온 어린이들이 늘 눈에 뜨인다.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실제로 보고 배우는 학습이 몸에 배어있다.즉 문화를 즐기도록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청년이 되었을때그들의 의식은 확고해지나 보다.이 나라 젊은이들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너그럽고 자유로우며 무엇이든 직접 인간을 통해서 알고 싶어한다는 것도 그 까닭일지 모른다.집배원도 자기가 좋으면 하고 대학교수도 자기가 싫으면 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서 권위나 타성보다 오직 자기 생활의 보람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이 50%가 동거 무대설치 공부를 하고 있는 한 한국인 유학생은 같은 반 친구가 이사하는 것을 친구들 몇명이 도와주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 흘리며 일해주고 점심은 샌드위치 하나를 할당 받고 저녁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먹었다고 했다.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다른 나라의 문제를 토론하였다고. 그들의 사고는 자신이 도와줄 시간과 능력이 되면 언제나 도와주는데 네가 해줬으니까 내가 해준다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도 능력과 기회가 닿을 때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게 된다고 했다. 이 나라 젊은이들의 50% 정도는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살아본 후 문제점이 극복되는 경우는 결혼하며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고 한다.혹은 각자의 일을 하며 따로이 살면서 함께인 경우도 많다. 그들은 자유로운 반면,각자에게 철저하게 책임이 따르는데 애정문제에 있어서도 헤어지는 경우,서로의 책임이 아니라 각자의 책임으로 생각한다고 한다.「서로의 책임이 아니라 각자의 책임」이라는 이 말에서 그들 사고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것 같다.즉 그들은 오직 참 자유를 갈구하여 외롭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철저히 혼자 서는 것이다.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기주의라고도 하며 그래서 이들에게 정이 가지않는다는 얘기를 파리의 한국인들에게서 듣기도 했으나 그보다 어린 시절부터 훈련되어온 우리와 다른 사고,아마도 솔직성과 순수성이 가미된 차이가 아닐까 싶다. 파리대학의 대명사라고 하는 소르본대는 그런 자유로운 모습의 젊은이들이 가득 있었다.복도에 비친 햇빛 속을 걸어가는 세계 각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보며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내 일을 떠맡을 젊은이들이 이렇게 성심껏 살아나가고 있음을 새삼느겼다.프랑스에서 젊은이들을 황금으로 생각하듯 그들이 정말 황금덩어리인듯 한없이 바라보았다.
  • 양화나루/나루터:중(서울 6백년만상:63)

    ◎한강 첫 관문… 삼남 물산 집산지/김포·강화 길목 군사요충지… 「제진」 주둔/천주교신자 8천명 처형당한 “순교성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양화진은 지금의 양화대교북단과 당산철교북단 사이의 절두산 아래에 있었다. 당시 도성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김포·강화로 이어주던 양화진은 나루터 바로 위쪽의 잠두봉과 강 건너편의 선유봉,또 이 봉우리를 돌아나가는 한강의 돛단배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경치가 빼어났다.『기내의 경치로는 한강에서 제일인데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뜬 모양 같으며 물산이 번성하여 옷의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동국여지승람」은 양화진을 묘사한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은 양화나루를 찾아 시문을 남겼다.문인 강희맹의 「양화답설」과 진경산수화의 거목 겸제 정선의 양화진그림이 그러하다. 양화나루는 서강나루·마포나루·노들나루등과 마찬가지로 뱃길을 이용,삼남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다.특히 한강하류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에따라 양화나루에는 나라에 바쳐지는 세곡이라든가 여러가지 물자를 보관하는 광흥창과 조선조 3등급에 해당하는 병영인 「제진」이 있었다. 양화나루가 한강의 하류에 있던 관계로 이 일대에서는 고래가 잡히기도 했다.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길이나 되는 이름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됐다」고 기록한다.여기에서 하얀 생선은 돌고래로 추정된다.실제로 1922년에는 6척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에서 잡혀 이를 한강인도교변에 묻어주어 이곳을 고래무덤이라고 불렀다. 평화롭기만 하던 양화나루는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 봄 양이로 물들여진 산하를 서학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면서 8천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를 당시 잠두봉에서 처형했다.잠두봉이라는 이름은 봉우리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다는 것에서 유래됐다.잠두봉은 이후 천주교신자들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서 절두산으로고쳐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절두산에 들어선 절두산기념관은 1966년 병인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순례성당과 성인 27위의 유해를 모신 지하묘가 있다.지난 84년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방문 첫날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천주교의 순교성지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또 연산군 때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고종때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상해로 건너간 뒤 살해된 풍운아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한 곳도 양화진이다. 특히 중국은 김옥균의 시신을 송환할 때 조정에 김의 시신에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했으나 조정은 이를 묵살하고 대역부도옥균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내걸고 김옥균을 이곳에다 효수했다. 임오군란 뒤 청과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가게를 벌이고 장사를 해 외국인들이 붐비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이던 양화나루.지금 이곳은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지날 정도로 서울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 “「뜬구픔 정책」에 충격요법”/홍 부총리 「기획원 길들이기」 시동

    ◎관료들 “재무부와 성격 다르다”… 텃세 극복여부 관심/취임식서 「쌀알론」으로 질타/차관보,예상 깨고 파격 인사/오찬서 폭탄주 돌려 단합 강조 전천후 축구선수인「리베로」라는 별명을 지닌 홍재형 경제부총리가 예상보다 빨리 경쾌한 몸놀림으로 볼 컨트롤에 나섰다. 지난 5일 취임 일성으로 경제기획원 관료를 『구름 위에서 노는 사람들』,『쌀알』로 표현해 「파문」을 일으킨 홍부총리는 6일 공석 중인 기획원 차관보에 예상을 깬 인사를 발탁,본격적인 「기획원 길들이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기획원 차관보는 우리나라 경제정책 수립 및 집행의 실무사령탑.연초 정재석 전 경제부총리의 기구축소에 따라 대외업무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이다.기획원 출신의 고참 1급인 이기호 총리실 제 2조정관이나 장승우 국회 예결위 전문위원이 수평 전보되리라는 예상을 깨고,2급인 안병우 정책조정국장을 막바로 승진,내정했다. 홍부총리는 취임 때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하며 뭔가 과거와 다른 인사스타일을 예고했다.종전처럼 서열과 관록 위주의 인사를 지양하고 파격적으로 기획원의 간판 격인 차관보에 국장을 승진,발탁한 것은 「쌀알처럼 흩어진」 기획원의 「뜬 구름식 정책」에 충격요법식 변화를 주려는 용병술로 보인다. 이번에 친정으로 복귀한 강봉균 차관도 『기획원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고 홍부총리의 입장에 맞장구를 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지금 기획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본질적으로 라이벌 관계인 재무부와의 시각 차이에서 빚어진 측면이 크다.홍부총리가 재무장관에서 곧바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홍부총리는 『쌀알처럼 흩어진 기획원에 비해 재무부는 끈끈한 조직력에 의존한다』며 재무부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또 『기획원은 이론 뿐 아니라 현실감을 갖춰야 조정통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뼈아픈 충고를 했다.7일 기자들과 가진 오찬석상에서 홍부총리는 「폭탄주」를 딱 한잔씩 만들어 좌중에 돌리는 호기를 보였다.폭탄주에 비합리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합을 과시하는 상징으로선 여전히 유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역대 어느 경제총수들로부터도 볼 수 없던 파격이다. 기획원 관료들은 홍부총리의 현실감각 강조에 아직 무덤덤하다.세제·금융 등 핵심 정책수단을 장악한 재무부가 보수적인 반면 기획원은 창의적·진취적일 수 밖에 없고,개인능력에 의존하는 기획원 스타일은 단점이자 장점일 수 밖에 없다는 반론이다. 새 정부 들어 한리헌 청와대 경제수석,강봉균기획원·이석채농림수산·김태연노동차관과 오세민공정거래위원장,김인호철도청장 등 차관급만 해도 7∼8명을 양산한 기획원의 저력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홍부총리의 「길들이기」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그는 재무부에서도 신참 국장을 청와대로 보내는가 하면 1급인 국세심판소장에 서열이 한참 뒤지는 인물을 발탁했었다.앞으로 기획원의 후속 국장급 인사에서도 예상을 깨는 인사가 이어질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홍부총리는 7일 과천청사를 방문한 클라우스 체코수상과의 간담회에서도 『안녕하십니까』라는 체코어를 미리 외어 인사하는 등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신중한 성품이다.약속대로 경제팀의 조화를 이루고,텃세 심한 경제부처,특히 「구름 위」의 기획원을 어떻게 장악할지,「리베로 홍」의 향후 운신이 벌써부터 관심을 모은다.
  • 바가지 상혼(최두삼 귀국리포트:4)

    ◎택시·식당 손님에 「에어컨 요금」 받아/구두가게선 “「신어본 값」 내라” 강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바가지요금이 만만치 않다.모택동통치시절 청빈제일주의와는 달리 개혁개방정책으로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 폭이 넓어진데다 자본주의국가들의 갖가지 수법들이 전래되면서 바가지 요금시비가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마치 10∼20년전 한국의 각종 유원지에서 유행하던 「얄팍한 상혼」들이 요즘 중국에서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지난 1월 심양시에서는 신발을 사러갔던 아가씨 3명이 한시간이 넘도록 한 가게에 붙잡혀 있었다.이들중 한명이 신발가게에 들러 홍콩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3백60원(약3만6천원)짜리 구두를 사려고 신어본 것이 화근이었다.한번 신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그대로 나가려 하자 점원이 『신을 신어본 값 20원을 내라』는 것이었다.이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귀찮아서 5원이나 10원쯤 던져주고 가려했으나 이 점원은 기어이 중국노동자들의 하루 일당도 넘는 20원을 내야 한다며 이들을 보내주지 않았다.결국이들중 한사람이 심양시소비자보호협회에 전화를 걸어 이 협회 비서장이 상점까지 달려오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외국인이 북경에 관광차 들렀다면 반드시 들르는 곳중의 하나가 명13능이다.만리장성이 부근에 있어서 겸사겸사 꼭 들르게 되는 이곳 명나라 때의 왕들 무덤중에는 지하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곳도 있어서 외국인들의 구경거리로는 그만이다. 그런데 이들 13개 능앞에 자리잡은 개인선물가게들에서는 심심찮게 해프닝들이 벌어지곤 한다. 한번은 한국인 관광객 10명이 이곳에서 털모자를 하나씩 샀다.곧이어 만리장성에 오르자면 추울 것 같아서였다.떠돌이 잡상인들과 가게들에서는 맨 처음에는 1개에 2백원씩을 달라고 했다.한사람이 2백원에 산후 다른 한사람은 비싸다며 1백80원에 깎아서 샀다.그 다음 사람은 또 안사겠다고 피하는척 하면서 1백50원에 샀고 이어 다음 사람은 호주머니에 돈이 1백원밖에 없으니 미안하다고 했다가 『기분이요.그 돈만 내시오』해서 『이게 웬 떡이냐』며 덜렁 모자를 산후『물건을 사려면 나처럼 사야지』하며 쾌재를 불렀다.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값이 내려가기 시작한게 끝에 가선 25원까지 떨어졌다. 이들 한국인은 만리장성에 오르면서 『이게 바로 중국인들의 상술이다』,『바가지를 씌워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같은 장소에서 그럴 수 있느냐』는 등의 얘길 나누었고,만리장성에서 내려와선 무슨 분풀이라도 하듯 조금전에 산 모자를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한번 써보고나니 개털로 만들었는지 모자 털이 머리와 목주위에 수없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재래식 시장에서는 야채나 과일 고기 곡식등을 팔때 반드시 근으로 얘기한다.한근에 얼마라고 밝힌후 반드시 저울로 달아 물건을 판다.그런데 저울은 옛날 한국 시골 장터에 많았던 막대눈금 저울을 사용한다.이들 시장에서 한근에 10원씩 부르는 물건을 8원씩으로나 깎으면 잘 안깎아주려다가도 어떨 때는 잘 깎아주기도 한다.그럴 경우 집에가서 물건을 달아보면 꼭 몇근씩 부족하다.그들은 깎은 만큼 저울눈을 속여 자기들은 한푼도 손해없이 물건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상해에서는 한국인 몇이서 택시기사가 안내하는 술집에 들러 양주 몇잔을 마시고 내놓은 계산서를 보고 기절할뻔했다.자그마치 4만달러나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거기에다 계산서를 가지고 온 사내를 비롯,술집 안에는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이 정도면 강도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한국인들은 조용히 주인을 불러내 『우리는 이곳 공안(경찰)의 초청으로 방문중인데 이럴 수 있느냐』며 설득해서 겨우 4백달러에 타협하기도 했다. 여름철 서안에 들른 관광객들 중에는 택시요금 때문에 기분을 잡치는 사람들이 많다.그것은 일부 택시기사가 에어컨을 틀어주고는 별도로 에어컨 사용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이곳에서 한 한국인은 가족동반으로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가 메뉴를 보고 자기가 주문한 액수보다 훨씬 많아진 계산서에 놀라 자세한 명세를 요구했더니 식사도중 에어컨을 틀어준 값을 1인당 10원씩이나 계산하고 있어서 혀를 내두르며 주인에게 항의했으나 막무가내였다.
  • 르완다서 「학살무덤」 발견/마반자시/시체 7천여구 매장 확인

    【키갈리(르완다) AP 연합 특약】 7천여구이상의 시체가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2개의 묘지가 르완다 서부에서 발견됐다고 유엔평화유지군대변인과 르완다정부가 6일 발표했다. 이 묘지는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서 서쪽으로 약1백㎞ 떨어진 마반자에서 발견됐으며 몇달전 대량학살의 희생자들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유엔평화유지군대변인 스테파네 그레니에대위가 말했다. 그레니에는 투치정부와 키부호수가에 위치한 키부예시에 주둔한 유엔평화유지군은 최근 이 지역을 여행한 지방관리들로부터 이 묘지에 대한 사실을 통보받았다면서 묘지의 위치는 르완다 전역에 흩어져 있는 10곳의 묘지에 대한 기록에 추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백제를 다시본다를 마치고/전문가 좌담

    ◎“문화·사회사적 접근… 백제사 인식 새롭게”/금동향로서 보듯 수입문화를 자기화/학자 동원 알기쉽게 풀이… 독자이해 도와/풍납동토성·아치산성 보존대책 시급/문헌자료 부족… 역사분야 공백에 아쉬움/「백제문화권 개발」은 완벽한 역사 복원위해 학술조사 선행돼야 ▷참석자◁ 김기웅 문화재전문위원·고고학 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최몽용 서울대교수·고고학 서울신문이 10개월여에 걸쳐 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백제를 다시본다」가 30회를 끝으로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세기적 보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출현과 더불어 시작했던 이 기획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의 백제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갈채를 보내온 독자 여러분의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더 충족시켜주기 위해 관계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마련했다.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내려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기웅박사=지금까지 백제에 대한 인식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백제를 다시본다」는 일반독자들이 그동안 전문가가 독점했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백제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여기에는 참여한 학자들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써 일반독자들의 백제역사를 이해하는데 한 몫을 했지요.「백제를 다시본다」는 한마디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백제연구의 총 결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한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두운 것이 현실이었어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결과를 모아놓고 보니 백제역사의 대강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백제연구의 총결산 ▲최몽용교수=사실 이런 유의 기획은 과거 TV에서도 여러차례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TV가 지닌 한계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그런 점에서도 「백제를 다시본다」는 좋은기획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욕심이겠지만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가야·고구려도 다루었으면 해요.「백제를 다시본다」에서 보듯 한 지역문화를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이 시리즈는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지요.이 향로는 한때 무령왕릉 발굴로 바짝 달아올랐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침체되어 가는 마당에 출토되어 백제를 다시 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최=향로가 나온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그동안 이 향로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불교·도교,혹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연관시키는 등 여러가지로 논의됐습니다.여기에 악기와 의복 기타 미술사적인 연구도 활발했지요.물론 뒤에 총체적인 해석이 나오겠지만 이 향로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다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백제문화의 진수입니다. ▲김=이 향로는 결국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역량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백제는 외국문화를 수입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향로에서 보듯 절대 그대로 수용치 않고 자기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공주 벽돌무덤을 보면 중국의 묘제를 받아들였지만 연꽃모양의 벽화를 그려넣는 등 백제화 시켰습니다.당시 무덤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요.묘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집권자의 상징을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비슷한 예는 석촌동 2·4호고분과 이번에 익명의 일본사람이 기증한 3백77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백제귀고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귀고리서도 발견 ▲이=문화분야의 경우 그래도 물질자료가 상당히 출토되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합니다.그러나 문헌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역사분야는 자료의 혜택을 거의 못받아 연구상의 공백도 많습니다.아시다시피 국내 자료라고는 「삼국사기」가 거의 전부이고 「삼국유사」가 약간 보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삼국사기」도 그나마 연대기적인 간단한 자료지요.그런데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동안 백제와의 교섭을 다룬 자료가 풍부합니다.어떤 시기는 일본의 국내 사정보다 분량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그 때문인지이마니시(금서 용)라는 일본학자가 쓴 「백제사 연구」라는 책을 보면 백제는 외교만 한 나라같은 인상입니다.여기에 해방 이후 우리연구자들도 백제의 국가사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중앙관제·지방통제기구·관제·중국과의 교섭사 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연구가 정치사와 외교사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지요.그런데 백제 자체의 성격을 알려면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바람직합니다.최근 젊은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사고를 일부 동원하면서 백제사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종래 정치사에서는 백제는 지배층이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계가 서남쪽의 마한계 토착세력을 정복한 왕조로 지배세력과 토착세력의 이중성으로 심한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백제 멸망도 사회구조의 이중성에서 오는 갈등에서 연유했으리라는 추측이었지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이중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흡수통일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최=토착세력은 고구려계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나머지 공백지대는 백제에 쉽사리 동화되었지요.마한세력이 확실히 남아있었으면 이중적인 구조가 됐겠지만 이미 남하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서기 369년께에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도 이 남하세력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일본서기」에는 그들 남하세력을 「남만」이라고 썼어요.굉장히 경멸하는 표현이지요.이질적인 문화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런데 이 「남만」은 바로 백제에서 부르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름에서 보듯 백제의 남쪽이지 일본에서는 서쪽이니까요. ▲최=고구려까지 패배시킨 근초고왕의 힘이 아니었으면 남쪽까지 정벌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이 세력은 처음에는 직산이 본거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지요. ▲김=백제의 마한정벌 이후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 대안리의 백제고분을 보면 백제가 정벌 이후 행정관을 파견해 지배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백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백제의 내부관계를 알 수 있는 한 예가 되겠지요.이제 문화재 보존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일본서기 기록 많아 ▲최=백제는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한성시대,서기 538년까지 웅진시대,이후 서기 660년 멸망 때 까지 사비시대로 나눌수 있습니다.이 가운데 공주와 부여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유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정부의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조사가 착수되면 유물·유적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유물·유적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보존대책을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그런 생각을 미리 안해 실패한 예가 바로 한성백제입니다.올림픽경기장이 주위에 있는 석촌동 3·4호분과 몽촌토성은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납동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방치되어 황폐화한 상태입니다.전장이 3.5㎞에 이르는 풍납동토성은 지금 5백m만 복원 되었을 뿐 대부분 길이나는 등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강 건너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이 두 곳에 가보면 우리에게 문화정책이라는게 과연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올해가 조선을 기준으로 서울 정도 6백년이라지만 더욱 중요한 백제시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이 두 곳은 유적보존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역사관광지로 만 신경을 써도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올해가 「한국방문의 해」라지만 하다못해 문화유적을 관광수입과 연결시키는 정책만이라도 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풍납동토성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풍납동토성은 기원전 18년 백제의 기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몽촌토성은 4세기 정도로 연구되고 있지요.풍납동토성이 하북위례성,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많아요.강 대안의 고구려 성이 불안해서 도성을 쌓은 것이 몽촌토성으로 보는 거지요. ○단순 관광지 안돼야 ▲김=석촌동고분군을 발굴하니까 적석총 아래에 토광묘군이 나왔습니다.두 묘제는 전혀 이질적이에요.정복자와 피정복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이 지역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이=조금전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계획이 지역개발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그렇습니다.백제권개발계획이 이미 확정은 됐습니다만 착공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학술적 조사를 충실히 하고 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행정당국의 백제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자세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이=유적정비도 중요하고 관광휴양단지도 중요하지만 백제역사의 복원이 그 사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내실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연구원을 대폭 보강해야 하는 것인데 부여문화재연구소를 활성화시키는 일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연구소를 세워놓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그 중요한 부여에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을 합쳐 현장에 나가 발굴하고 보고서를 쓸 수 있는 학예직원은 소장·관장까지 포함해 합쳐 10명이 있을 뿐 입니다.일본의 경우 특별사적이 있는 나라에는 이보다 1백배가 넘는 연구인력이 있습니다.문화재 정책이 1백년 앞을 내다보려면 늦더라도 연구인력을 키워야 합니다.공주에도 박물관이 있고 공주대 사학과가 있지만 연구인력은 몇명이나 됩니까.유적·유물이 모두 사라지고나서 도굴됐다느니 매몰됐다느니 그래봐야 이유가 안됩니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문화재 보존·보호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 입니다.
  • 북,순장무덤 발굴

    【서울 연합】 북한은 지난 6월 평남 성천군 용산리에서 처음으로 「순장무덤」을 발굴했다고 사회과학원 실장 김종혁이 5일 밝혔다. 김종혁은 이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제2차 학술발표회」발제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이 순장무덤은 『단군조선의 형성과정과 그 국가의 사회성격을 해명하는데 중요한 실물자료로서 학계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김종혁에 따르면 이 무덤은 북한이 단군릉 발굴장소로 선전하고 있는 평양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에서 동북쪽으로 11·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덤의 동쪽에는 단군조선 시기의 것으로 전해오는 토성이 있으며 동쪽에는 산성이 있고 서남쪽에는 비류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 로마/카타콤베(아랍서 지중해까지:18)

    ◎기독교도 숨던 지하무덤… 미로수백㎞/「쿼바디스」의 아피아가도 주변에 산재… 땅굴 곳곳 교인들 수난 흔적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를 구경하다 깜박 카메라를 놓고 나왔는데 두어 블록이나 걷고 있을때 『시뇨레! 시뇨레!』하면서 주인이 쫓아왔다.베네치아에서 만들어와 판다는 세라믹 액세서리들의 그 담백한 아름다움에 잠깐 정신을 놓았었던 것 같다.자리까지 비운 채 여기까지 유실물을 갖다주러 오다니 싶어 얼굴이 붉어진 것은 비단 그 가게주인이 예쁜 아가씨였던 때문만은 아니다.잊은 물건 으레 찾으러 들이닥치겠지 싶어 필자 같았으면 오불관언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아무 것도 아닌 이런 사소한 일이 실은 한 나라의 민도랄까 문화적 수준을 제풀에 측정케 만들고 절감케 한다.이탈리아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곧잘 나서기 때문에 골탕을 먹는 수가 있다고도 하지만(하긴 필자도 그 때문에 엉뚱한 길을 헤맨 적이 한번 있기는 하다),이 아가씨의 친절은 여태까지도 쉬이 잊혀지지가 않는다.남의 얼굴에다 제 얼굴 디미는 간판들이나 판을 치는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미덕이요 소양이다.피곤한 신경으로 거리를 걷다보면 간판들의 그런 번잡스러움 같은 것까지가 그 나라의 수준을 금세 헤아리게 만든다. ○친절한 시민 인상적 소위 앞서간다는 나라들의 그것은 대체로 그저 눈에 뛸 정도의 글씨로 숨듯이 얌전한 반면 후진 나랄수록 그 요란함과 새치기는 극성스럽다.TV나 신문·잡지의 광고 역시 예외일 리가 없다.잠자리에 들기전 하다못해 잠깐이라도 TV를 켜는 새버릇이 이번 여행중에 붙은 것도 순전히 그 탓이었을 것이다.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책광고·상품광고 같은 것이 우리처럼 허풍스럽고 요란한 나라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겸연쩍고 창피했다.2등은 쓰레기처럼 잊혀지는 존재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1이어야 한다느니,「정복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하는 따위 히틀러의 발악이 무색할 지경의 광고까지 태연히 횡행하는 사회이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로마 국립공원 뜰은 장식삼아 여기저기 놓인 세계 유명인사들의 대리석 흉상들로도유명한데 관광온 이쪽의 원로 하나가 이승만 대통령의 흉상도 있을지 모른다는 농담을 듣고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는 얘기가 있다.결국 찾지 못하자 귀국해서는 그 얘기를 글로까지 썼다는 것이다.이런 얘기의 우스꽝스러움은 「유명인사」라는 그 개념상의 차질에 있다.독재를 했건 뭘 했건 유명하기만 하면 「문화적 인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이 원로는 착각을 한 것이다.인도의 간디수상도 신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일까보냐는 개탄이 나올 법도 하다.이 얘기를 해준 것은 60년대에 이주해서 30여년째 로마에서 살고있는 H씨이다.문청(문청)시절 어울려 다니던 친구로 이번에는 10여년 만의 해후인데 불혹의 연치가 완연한데도 그 유머러스하고 직재적인 사고방식은 여일했다.그 무렵의 친구들이 모르는 새 모두 소원해졌는데도 이 H씨만은 예 그대로 와락 반가운 느낌부터 앞선 것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끝내 로마에다 뼈를 묻을 작정이냐는 농담에,집과 차와 가재도구를 다 정리해 귀국해봤자 강남에서 몇달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되레 역습이다.자녀들이 장성하자 사위만은 모국청년으로 골라야겠다 싶어 몇 차례나 기회를 만들었으나 돈 타령,땅타령,줄리어드다 하버드다 하고 외국유학 얘기만 나오다 대화가 끊겨 끝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사돈될 사람들 간에도,당사자들 새에서도 대화가 그 모양으로 단절돼 내심으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데이트 몇번하면 으레 제 소유물로 알고 자질이야 있건 없건 유학물 먹은 일이나 자랑삼으면서 연애 따로,결혼 따로를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이쪽 젊은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근교의 아파트단지 식당에서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모처럼 배불리 먹여주고 그녀가 차로 데겨간 곳은 카타콤베 앞이었다.로마에 와서 뭘 봤느냐는 물음에 실은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다는 필자의 동문서답이 마음에 걸려서 였을까.카타콤베는 옛 로마 서민들의 지하무덤이다.왜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느냐고 이번에는 그녀도 묻지 않았다.숙소에서 확인한 TV채널만도 20여개가 넘고 인근 지방의 유선방송까지 합하면 천여 채널이 넘는다는 각종 정보홍수에 에워싸여 살다보면 문명이니 문화적인 혜택이니 하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온갖 빤히 눈에 보이는 세계가 되레 지겨워질 나이에 그녀 역시 이르른 것같다.정부 각 기관과 문화관과 대기업의 본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로마의 신시가지 에우르 구역을 도중에 거치면서 필자는 과천을 제풀에 연상하고 있었는데,카타콤베들은 그 너머 구아피아가도 인근에 흩어져 있었다. ○10만명 매장된 곳도 로마제국 때 닦여진 길이다.붉은 언덕과 짙은 색깔의 나무들이 갑자기 사방을 에워싸면서 차량마저 끊기다시피해 한적한 시골을 연상시키는 이 가도는 아닌게 아니라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속담을 역으로 연상시켰다.지금은 관광자원이 돼버린 옛 제국의 영화가 하층민들의 무덤까지도 그냥 버려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 무덤들이 특별히 유명해진 것은 박해를 받던 그 무렵 기독교도들의 지하 은신처요 포교활동의 근거지였다는 까닭이 더 크다.도망을 치던 베드로가 예수의 환영을 만나 저 유명한 대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읊조리던 데가 아피아가도였고 그때 남은 예수의 발자국모형이 보존된 도미네 쿼 바디스교회가 이 인근에 있다.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쿼 바디스」나 「성의」 같은 것에도 물론 카타콤베가 나온다.지하 2·3층,어떤 것은 5층까지 파내려간 이 부근의 수십기 카타콤베들은 복잡한 미로와도 같아서 혼자서는 들어갈 수가 없고,10만여명이나 매장된 곳도 있으며,그 길이를 합하면 수백㎞에 이른다고 한다. 입구에서는 각국 언어별의 가이드들이 여남은명씩 되는 관광객들의 조를 짜고 있었다.어쩌다 네덜란드어 가이드를 무심코 따라들어가 설명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구태여 그런 것이 필요한 것같지도 않았다.사람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만한 흙벽의 좁다란 통로와 역시 흙으로 된 계단을 몇번이나 꼬부라지며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가이드의 랜턴불빛에 기괴하고 참담한 낙서와 그림들이 홀연히 벽에서 나타나는가 하자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샛길들이 곁으로 불쑥불쑥 들이닥치곤 했다. 이런지하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돼버린다는 제풀의 상상은 기묘한 것이었다.나는 왜 여기 있는가,이번 여행은 뭐땜에 떠나왔는가 하는 따위 상투적인 의문들이 그제야 근거를 찾고 입지를 얻은 듯한 느낌이랄까,갑자기 천지가 막막했다.초기 기독교도들의 그것뿐 아니라 중세의 여러 종교적인 박해에도 이곳은 피난처가 됐던 모양으로 지상으로 올라오는 중간중간의 작은 방들에는 그 수난의 표상들과 기념물들이 흔적이나 조각들로 새겨지거나 놓여 있거나 했다.화살에 목이 꿰인 성 아무개,칼로 순교당한 누구 하는 식의 그런 전시물들 역시 숭엄한 분위기이기는 해도 청량한 느낌은 아니다.로마시내에는 4천여 승려들의 해골을 수백년에 걸쳐 모아놓은 해골사원이라는 으스스한 곳도 있지만,이런데를 특별히 찾는 사람들 역시 일반적인 심성의 그런 관광객들은 아닐 것도 같다. ○중세에도 피난처로 겨우 한시간 남짓이나 머물다 나온 지하에서 로마라는 한 도시의 허상을 통째로 별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하면 아마 과장일 것이다.사람사는 세상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그 말할 수 없이 구질구질한 거래와 아귀다툼들이 이를테면 로마라 해서 어떻게 이런 지하세계 같은데로 깨끗이 모두 매몰될 수가 있겠는가.필자가 카타콤베 속에서 저절로 떠올린 로마의 그 허상이란 것도 실은 숙소근처의 가게에서 사흘째 눈독을 들이고 있던 싸구려 골동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돈으로 2만여원쯤 되는 그 놋쇠물병은 연륜이랄 것도 쓸모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얄팍한 물건 같았으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곡선형태라는 그 한가지 점만으로도 어딘가 정답고 신선하게 느껴져 값을 깎자느니 안된다느니 하고 며칠째 줄다리기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도무지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는 가게의 뚱보주인은 필자가 들를 때마다 『적당하고 좋은 값』이라면서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이쪽 역시 기어이 에누리를 해서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들떠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구태여 따지기라도 한다면 한계가 빤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눈곱 정도로나 허용된 소위 그 「자유」라는 명제나 「자유스럽고 싶다」는 감정을 두고 필자도,그도 사실은 줄다리기흉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35년만의 동창회/문정희 시인(굄돌)

    유난스러웠던 여름의 폭염과 연일 날아든 무서운 뉴스에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든 내게 뜻밖에 예쁜 소식하나가 날아들었다.그것은 바로 국민학교 동창회를 하자는 것이었다.아아,몇년만이던가.따져보니 무려 35년만이었다. 몇십리를 걸어가야했던 산너머 큰학교에서 따로 나와 흙벽돌로 동네부근에 새로지은 분교의 친구들.나는 그 친구들과 4학년까지 함께 공부하다가 도회로 전학을 했었다.35년의 시간을 뚫고 약속장소로 가는동안 내 가슴속에는 검정 책보를 허리에 매고 양철 필통을 딸그락 거리던 아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학예회때 나의 꼬마신랑이었던 담재는 어떻게 되었을까.『나는 나는 장차 녹두장군이 될테야』하고 두팔을 휘젓던 우승이는? 아니,구구단을 못외서 캄캄하도록 교실에 남아있던 착한 순이의 모습하며….너무 흥분했던 탓인가.정시에 약속장소인 음식점에 닿으니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나는 망연히 혼자 앉아서 무덤가에서 듣던 선생님의 옛날 얘기와 다리밑에서 송사리를 잡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조금후 『아니이거 정희 아니여,일찍 왔구먼』하고 중년의 낯선 남자가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는다.이어서 또 한명의 서먹한 얼굴의 중년남자가 앞에 앉으며 『아니,그 예쁘던 얼굴이 어디로 갔는가.영 딴사람이 됐구먼』하고 적기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기막혀 한다. 이어서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주름살을 매달고 있는데도 모양을 내고 줄줄이 나타났다.우리들은 서로들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악을 쓰며 추억들을 떠올렸다.그러는 사이 한 친구는 돋보기를 쓰고 주소록 작성을 하고 있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만을 겨우 나온 나의 친구들.그러나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서 아파트 경비원도 되었고,이발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또 은행원도 돼있었다.우리는 밤이 깊도록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헤어졌다.비로소 가을바람이 전신으로 불어오는 밤이었다.
  • 멸망의 원인(백제를 다시본다:30·끝)

    ◎한강유역 뺏긴뒤 서남부에 고립/의자왕,초기 전승에 자만 실정 거듭/대당외교 실패… 많은 충신 귀향보내/18만 나당연합군 침공때 동원가능 병력은 5천명 부소산성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노라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진다.1천3백년 전 이곳에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3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서기 660년 당의 침략군이 신라와의 사전협약에 따라 서해로부터 금강 하구에 소리없이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뒤 사비도성을 유린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이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란 없다.백제 멸망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역사적 인과관계에서 볼 때 우리들은 많은 멸망원인을 열거할 수 있으나 이를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이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랄까가 매우 좁았다.즉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로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백제가 기대를 건 잠재적인 동맹세력은 고구려였으나,양국은 다만 해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이었다.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것은 한 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하지만 백제는 결코 신라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와의 국경전쟁에서 헛되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내부사정은 차츰 악화되어 갔다.의자왕이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만 해도,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는 인간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성품이었고,국가중흥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왕태자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해동의 증자라는 평까지 듣던 의자왕이었다. ○신라 포위 못벗어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결행한 신라 침공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마침 642년 평양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군국의 대권을 장악했는데,의자왕은 그와 손잡고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백제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신라의 서해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화성군)의 목을 죄는 한편 신라의 낙동간 방면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경북 합천군)을 함락하여 경주를 가까이서 위협했다.이같은 전과는 의자왕의 경탄할 만한 기민성과 결단력에 힙입은 바 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자왕의 인간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전투에 잇따라 승리한 의자왕은 어느 덧 자만심에 빠져 만기를 독재하는 통치스타일로 기울어졌다.사태를 더욱 악화시긴 것은 왕비 은고의 지나친 권력욕이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여 정림사탑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는데,거기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설명하여 『의자왕이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아낙네(왕비)를 너무 믿어 형벌이 오로지 충양한 사람에게 미쳤다』고 했다.양심적인 재상인 성충이 옥사하고 흥수가 귀양을 간 것도 이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또한 해방 직후 부여에서 우연히 탑비가 발견됨으로 해서 그 실재가 확인된 대좌평 사택지적의 정계은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충신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임자 같은 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비 권력욕 지나쳐 무엇보다도 의자왕이 범한 큰 과오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당은 신라측의 끈질긴 한반도 개입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 화평관계를 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의자왕은 이같은 권고를 거듭 묵살했다.652년 이후 백제는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백제를 치기로 한 신라와 당 양국간의 비밀협상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절박한 때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바야흐로 백제 상공에는 잔뜩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었으나,의자왕은 전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서기 660년 여름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은 백제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백일하의 날벼락이었다.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국경선 깊숙이 나타났을 때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사대 5천명이 고작이었다.이 결사대는 사흘동안 황산벌(충남 연산)에서 신라군과 처절하게 싸운 끝에 전원 옥쇄했다.한편 13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금강 동쪽 기슭에 상륙,7월 11일 신라군과 합세했다. 드디어 12일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공격에 나섰다.연합군은 도성 동쪽 20여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의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했다.적군의 강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이에 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왕권을 대행했으나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이윽고 연합군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부소산성을 포위하자 절망에 빠진 지배층과 백성들이 떼지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다.그리하여 부소산성 정상에는 나당 연합군 깃발이 나부끼게 되었다. ○부흥운동 무위로 그러나 백제는 그 뒤 3년간 더 살아 꿈틀거렸다.국왕의 항복결정을 거부한 지방주둔 병력이 왕족 복신의 지휘 아래 총집결하여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다.이들은 한때 사비도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주류성(서천 한산 혹은 부안으로 짐작됨)과 임존성(예산 대흥)이 당시 부흥운동군의 일대 거점이었다. 663년 가을 백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이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3만대군을 보냈다.그러나 왜군은 백강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포착되어 네차례의 접전 끝에 섬멸되고 말았다.당시 불에 탄 왜선 4백척에서 뿜어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중 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왜군 격파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일제 공격으로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백제부흥운동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가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이식되어 그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했다.지난해말 세상에 공개된 금동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화로,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망국의 군주/의자왕 중국 북망산에 묻힌듯/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병사 우리가 고대사에서 만날 수 있는 큰 비극을 꼽자면백제패망을 다룬 AD660년의 기사가 그 하나일 것이다.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옛 이야기와 더불어 아련히 들려오는 사비도성의 황급스러운 말발굽소리는 백제사가 간직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붙잡혀 2만여 백제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 망국의 군주는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당에서 병사한 것으로만 되어있다.이는 의자왕과 휩쓸려 포로가 된 왕자 부여릉(AD615∼682년)이 당에서 남긴 비교적 소상한 활동기록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이 물음에 해답을 던져줄 가능성은 있다.의자왕의 신하로,또 왕자 부여릉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흑치상지(AD630∼689년)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9년에 발굴된 이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왕자 부여융이 주군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또 묘지명은 AD677년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었을 때 흑치상지는 속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다만 41줄 1천6백4글자나 되는 묘지명 새김글씨에 의자왕 기록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는 당나라 왕후장상들의 묘역 북망산을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다.북망산에서는 백제유민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 말고도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유민인 천생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이로 미루어 의자왕의 무덤도 북망산 묘역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백제 최후의 군주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한·중학계의 협력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학계는 북망산 한쪽에 묻혀있을 의자왕 묘지명을 찾아야할 큰 역사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볏가리 관행은 삼국시대에 시작”(건널목)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들녘에서 가을걷이가 시작되었다.그러나 콤바인과 현장탈곡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옛 농경사회의 가을걷이 모습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그 하나가 노적관행인 볏가리.이 가리의 관행을 다시 들추어 본 민속연구논문 「노적관행론」이 남근우교수(한림대·민속학)에 의해 발표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벼를 베어 단으로 묶어 말린뒤에 원형,또는 직사각형으로 쌓아놓는 노적의 호칭도 가지가지.크게 「가리」와 「누리」로 구분된다.가리는 누리를 쓰는 충북 옥천과 경북 고령을 제외하고는 골고루 분포된 보편적 호칭이라는 것.가리 앞에 벼나 나락 등을 붙여 볏가리 나락가리로 부르기도 하고 강원 충북 경북의 산촌지역에서 낟가리란 말도 쓰고있는 것으로 밝혀냈다.그리고 화전이 성행했던 영서·영동지방에는 얼룩가리,얼럭가리란 말도 남아있다고. ○…우리나라에 볏가리를 만드는 노적관행이 출현한 시기를 초기철기시대로 보는 것이 남교수의 견해.왜냐하면 철제 낫이 있어야 밑둥베기로 볏짚까지 거두는 추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그 이전까지는 반달모양돌칼(반월형석도)로 벼이삭을 잘라 추수를 했던 탓에 볏가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벼 밑둥베기를 가능케한 쇠낫은 평북 위원 용연동 유적을 비롯,대동강유역의 정백리 제365호무덤에서 출토되었다.특히 서울 성동구 구의동과 경주 제16호무덤에서 나온 쇠낫은 오늘날 사용하는 낫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생활유적에서는 쇠낫이 발견되지 않고 반달모양돌칼이 더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초기철기시대라 할지라도 밑둥베기와 이삭자르기가 병행되었을 것으로 보았다.따라서 노적관행이 본격화한 것은 쇠낫이 많이 보급되어 밑둥베기가 전체적으로 이루어진 원삼국시대 내지 삼국시대라는 것이 남교수의 결론이다.
  • 르완다 남서부서 유해 8천구 발견

    【키갈리 로이터 연합】 최근 르완다 남서부에서 총 8천구의 유해가 유엔 관계자들에 의해 새로 발견됐다고 유엔군 대변인 장 가이 플랑테 소령이 20일 밝혔다. 플랑테 대변인은 이날 남서부 국경도시 시앙구구로부터 약 15㎞ 떨어진 가푼조의 한 무덤에서 6천구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밝히고 인근 지역에서도 2천구가 추가로 발견됐다고 말했다.
  • 통일신라·고려때 석곽·토광묘 발굴/토기·청사소병 등 출토

    ◎건대조사단,충주서 건국대 박물관 발굴조사단(발굴책임 최무장교수)은 7월 18일부터 지난 4일까지 충북 충주시 단월동 일대 고분군에서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고려시대 석곽묘 2기,토광묘 6기를 발굴했다고 14일 밝혔다. 또 이들 고분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 9점과 ▲명기(매장할 때 무덤에 넣는 기물)인 고려 청자소병 1점 ▲황옥제 구슬목걸이 3점 ▲청동 수저 7점 ▲청동합(뚜껑 있는 그릇) 1점 ▲동곳 1점 ▲철제가위 2점 ▲붉은 옻칠한 주머니 3점 등 고려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다.
  • “자식들 냉대·생활고로 모실 곳 없다”/60대아들,90대노모 살해

    【광주=최치봉기자】 90대 노모를 생활고와 건강악화로 모시지 못하게된 60대 아들이 노모를 살해해 암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전남 고흥경찰서는 9일 김홍두할아버지(69·무직·경기도 시흥시 거모동)를 존속살인혐의로 구속했다. 김할아버지는 지난달 24일 상오 2시쯤 어머니 임유수씨(94)를 고향인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속칭 노루맥 야산에서 목졸라 숨지게한뒤 이곳으로부터 5m쯤 떨어진 능선에 가매장한 혐의다. 김할아버지는 경찰에서 『생활능력이 없는데다 거동조차 불편할만큼 건강이 악화됐는데도 자식들이 나와 노모를 홀대해 12년전 지병으로 숨진 아내의 무덤을 찾아 어머니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다 목을 졸랐다』고 말했다. 김할아버지는 5남3녀의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12년전 부인이 지병으로 죽으면서부터는 서울과 경기도 안산등지의 아들,딸집과 여수의 여동생집을 전전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8월 셋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울화를 못이긴 폭음으로 위장이 파열되는등 건강이급격히 악화되자 김할아버지는 지난 5월말부터는 전남 여수의 여동생(64)집에서 노모와 함께 기거해왔다는 것이다. 여동생집에 한동안 머문 김할아버지는 범행 이틀전인 지난달 22일 경기도 안산에 사는 큰아들(47·노동)집으로 갔으나 큰아들과 서울 영등포에 사는 둘째아들(42·사진관경영)등 자녀들이 박대하자 지난달 23일 하오 11시쯤 큰아들집을 나와 부인의 무덤앞에서 노모를 살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익산의 유적들(백제를 다시본다:27)

    ◎무왕 익산에 새도읍 건설 추진한듯/미륵사와 왕릉 추정의 쌍릉 이웃에/왕궁리 4∼5㎞ 주변 토성·산성 산재/중국문헌에 “무광왕 천도” 기록… 출토유물도 문헌과 일치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은 주로 도읍지와 그 도성 밖 가까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수도와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고구려와 백제는 몇 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기면서 그 이웃에 귀족문화흔적을 펼쳐놓았다.수도를 단 한번도 바꾸지 않은 신라 역시 경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형의 문화를 영조했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 과정에는 대개 몇가지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난다.그 하나가 화려한 왕궁을 건설하는 일이다.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문화현상인 것이다.이어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데,사찰은 국가가 관장하는 국립사찰형태로 창건했다.불교는 사회문화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전제왕국의 호국이념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도성을 지척에 둔 자리에는 반드시 왕릉이 축조되었다.삼국시대의 왕릉은 규모도 물론 컸거니와 묘제를 적용한 방법이나 껴묻거리(부장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이들 왕릉을 통해 당대의 문화상이 어떠했는가는 백제의 경우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증거하고 있다.이렇듯 수도로서의 도읍을 경영하는데 왕릉이 수반된다는 사실 이외에 왕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성의 경영도 필수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기록엔 없어 이들 삼국의 도읍지는 모두 역사기록에 나오는 수도들이다.그런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왕도의 모습이 보인다.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어렴풋이나마 왕도로 떠오르는 땅은 바로 오늘날 전북 익산군 금마면과 왕궁면일대다.그래서 일찍부터 이른바 「백제 익산천도설」이 제기되었다.익산을 왕도로 볼 수 있는 정황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이 지역 금마면 기양리에는 우선 백제 최대의 가람규모를 자랑하는 그 유명한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5층석탑의 잔영을 겨우 전하고 있지만,미륵사터에 대한 장기적인 고고학발굴에서 찬란한 백제불교문화상을 속속 파헤쳐냈다.그리고 미륵에서 2㎞ 떨어진 금마면 연동리에는 백제불상광배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석불이 남아 이 지역에 융성했던 불교의 실상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우리가 「백제 익산천도설」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익산지역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이를테면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도 그러한 지역의 하나다.여기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실제 백제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현재 5층석탑 1기가 남아 있고,그 이웃에서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든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제석사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는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궁려사」 기와 출토 이 왕궁리에서는 고고학발굴결과 사구석유구와 함께 관궁사라고 새긴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익산천도설에 더 가까이 접근한 바도 있다.어떻든 왕궁리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자리한 가운데 왕실의 원찰로서의 제석사가 창건되었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이 왕궁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은미륵사다.왕궁평에서 3㎞에 불과한 미륵사는 도성 이웃의 대가람으로 창건되어 미륵하생의 이상향적 불국토를 염원하는 불심을 담았을 것이다.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한 반경 4∼5㎞ 안에는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있다.미륵산성을 비롯,왕궁리토성,익산토성 등이 그것이다.왕궁평을 왕궁이 세워졌던 자리로 본다면,북쪽으로 국립사찰격의 미륵사와 주변 성곽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8·15이전에 이미 익산일대의 유적배치상을 통해 중국 낙양의 수도경영형식과 근사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익산지역에는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 수도 경영형식과 꼭 맞아떨어진다.이에 따라 「백제 익산천도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문헌사학과 현존 유적및 고고학발굴성과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익산천도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얼마전에 소개되었다.일본인학자 목전체량이 중국문헌에서 백제천도 사실을 적은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9세기경에 찬술된 이 자료는 「백제무광왕천도 지모밀지 신영정사 이정관십삼년… 천대뢰우 수재제석정사」라고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우선 정관13연은 AD639년으로 백제 무왕40년에 해당한다.그리고 무광왕으로 표기한 왕은 무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이 중국문헌에 나오는 지모밀지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 지은 절이 제석정사라고 기술함으로써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들어 있는 익산 왕궁리 출토 명문기와의 절이름과 일치한다.또 제석사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후 목탑에서 꺼낸 유물들을 일일이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왜냐하면 현존하는 왕궁리 5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김판금강반약경·사리함·사리병 등이 목탑속에서 꺼냈다는 불구유물기록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비와 별군 추정도 그렇다면 중국 문헌자료에 나오는 제석정사와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는 제석사는 같은 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 제석사 목탑에서 꺼냈다는 불구들과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불구유물 역시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이로 미루어 지모밀지는 오늘날 익산 왕궁면 왕궁리일대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특히 정관13년은 백제 무왕의 재위 연간이고,익산 미륵사를 무왕때 창건했다는 「삼국유사」기록을 신빙성을 가지고 다시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들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들은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인지 모른다.그러나 학계는 대체로 사비도성의 별도로 익산지역을 수도로 경영했을 것이라는 쪽과 천도를 준비한 단계로 보는 쪽도 있다.백제 익산천도의 꿈이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끝내 실현을 못보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앞으로 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정부가 현재 이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 국책발굴사업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왕이 왜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구체화했는가를 짚어볼 차례다.거기에는 광활한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거점확보정책이 깔려 있을 것이다.또 한편으로는 무왕 때까지도금마일대에 활거한 마한의 세력집단을 융합 내지 통합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왕동 쌍릉/능산리고분과 같은 굴식돌방무덤/“무강왕릉” 구전… 무왕부부묘 가능성 무왕(?∼641년)은 사비시대 백제의 지위를 한껏 격상시킨 정복군주다.불교문화를 꽃피우면서 신라를 위협,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특히 익산천도의 꿈을 키운 군주로도 유명하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떠나 그가 묻힌 지역도 익산지방이라는 설이 제기되어왔다.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이리시 석황동에 있는 쌍릉을 무왕의 능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무강왕릉이라는 전설을 지닌 이 쌍릉은 북쪽의 것을 대왕묘,남쪽의 것을 소왕묘로 부르고 있다.1915년 일본인 다니이(곡정제일)에 의해 백제말기인 7세기경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밝혀졌다. 대왕묘는 지름 30m,높이 5m 정도이고 소왕묘는 지름 24m,높이 3.5m정도인데 모두가 원분이다.내부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부여 능산리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의 널돌(판석)을 사용했다.대왕묘의 경우 널방(현실)을 남북 장축의 장방형 편면을 이루었다.남벽 중안에 널길(선도)이 나 있고 널길은 널돌로 막았다.4면의 벽과 바닥·천장은 다듬은 널돌로 조립한 형태다. 그리고 바닥 중앙에는 한 단이 높은 석재 한장을 가지고 널받침을 마련해 놓았다.조사당시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널만은 그냥 남아 있었다.이 나무널은 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이 널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렸다.관고리에는 여덟 잎사귀의 연꽃형 밑동쇠(좌금구)가 달려 호사스럽다.널의 크기는 길이 2.4m,너비 0.76m,높이 0.7m로 되어 있다. 이 능묘는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 등의 유적이 이웃에 산재한 사실을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도 엿보인다.특히 무왕의 익산천도의지와 연관해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짙다.설령 익산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장차 꿈을 실현시킬 염원을 가지고 무왕 스스로가 생전에 이 지역에 묻히길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 6세기 횡혈식 석실분 발굴/김해 유하리서

    ◎호석·시상대 등 구조 완벽/동의대 박물관팀 부산 동의대박물관 발굴단(단장 임효택)은 7일 경남 김해군 장유면 유하리 654의 1에서 원형의 봉분·호석·묘도·연도·시상대 등 거의 완전한 구조의 6세기 후반경 횡혈식 석실분과 어린이·노인을 포함한 5명 이상의 사람뼈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도굴로 인해 약간의 토기조각과 철도자편 1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유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고분이 전해오는대로 가락국 2대왕인 거등왕의 능이거나 장군묘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단은 이 고분이 6세기 후반께 이 지역을 장악했던 지배자와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횡혈식 석실분이 이처럼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당시 묘제와 사회상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 5명 이상의 유골이 한꺼번에 발굴됨에 따라 가야말기부터 가족을 한무덤에 잇따라 장사지내는 추가장이 횡구·횡혈식 석실분을 통해 이루어졌음이 입증되는 한편 고대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을 밝히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평양 성역화」에 열올린다(오늘의 북한)

    ◎김정일 권력승계와 연계,「상징조작」 한창/규명안된 단군릉 근거 “민족의 수도” 억지/시조새석화 발견후에 “인류 발생지” 운운/역사·문화·혁명의 시원지로 미화 북한이 최근 단군릉 개건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등 이른바 「혁명의 수도」인 평양에 대한 성역화를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북한은 지난해 10월2일 평양 강동읍 서북쪽 대박산무덤에서 출토된 원시인 유골이 단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단군릉 개건공사를 시작한 바 있다.당시 북한당국은 진위가 불분명한 단군릉 발굴 사실을 발표하면서 이를 근거로 단군이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는 논리를 폈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에 따르면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단군릉 복원공사를 오는 개천절안에 끝내도록 지시를 내려놓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정권의 민족사적 정통성 확보를 위한 각본에 따른 예정된 수순이라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일반적 분석이다.왜냐하면 북측은 지난해 10월 신의주 백토동에서 시조새 화석을 발견한 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지역이 인류발생지라고 강조하는 등 평양 성지화를 겨냥한 의도적인 움직임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중앙방송이 논단프로에서 「평양은 혁명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시원이 열린 민족의 성지」라고 규정한데서도 이같은 기류가 감지된다.이 방송은 더 나아가 평양을 「고대문명의 시원지인 동시에 민족문화 발전의 중심지이며 인류발상지의 하나」라고까지 미화했다. 북한은 평양을 인류발상지의 하나로 내세우기 위한 근거로 71년 평양 역포구역 대현동에서 발견되었다는 역포인,79∼80년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에서 발굴됐다는 만달인 등 구석기인의 유골과 유물까지 총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이처럼 평양의 오랜 인류문화사적 전통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 이면에는 북한식 표현에 따르자면 「혁명의 수도」인 평양을 「민족의 수도」로까지 승격시키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평양 성역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는 오랜 폐쇄노선으로 세계사의 대세에서 밀려나고 남한과의 국력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데 따른 그들 나름의 자구책적인 성격도 띠고 있다.요컨대 체제유지를 위한 상징조작의 일환으로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평양의 민족사적 이미지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북한역사학이 한때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이라는 사실까지 부인했던 사실에 견준다면 역설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73년 출간된 북한의 조선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첫노예제국가인 고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은 현재 중국땅인 요하 하류 동쪽 유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더욱이 북측은 지난 72년까지도 그들이 구헌법에서 서울을 수도로 명시했으나 그해 12월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서 수도를 평양으로 바꾼 바 있다. 다른 한편 북한이 최근 들어 부쩍 단군릉 개건공사 등 평양 성역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은 김정일의 권력승계 시점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즉 오는 10월10일 노동당 창당기념일에 앞서 현재 주석궁에 안치돼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의 시신을 단군릉에 매장하거나 근처에 건설중인 「김일성기념관」으로 옮긴 직후 당총비서 선출 등 김정일의 권력승계 공식화 절차를 밟을 가능성도 크다는 추론이다.
  • 김정일이 외화관람계층 분류(북한 이모저모)

    ○당간부용·안전부용·평양시민용으로 ○…북한 김정일은 자신이 본 모든 외국영화의 관람대상과 범위를 직접 선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평양에서 발행된 「조선문화예술론」에 의하면 김정일은 입수된 모든 외국영화를 감상한 후 ▲당간부용 ▲국가보위부 및 사회안전부용 ▲평양시민용 ▲일반주민용등으로 나눠 관람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외국영화 수집광으로 알려진 김정일은 세계각국의 영화필름 수천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해외공관 및 대외무역 종사자 등을 통해 연간 약 6백여편의 외국영화를 사들이고 있다고. ○기원전 12C 쇠거울 발견/평양송석리 돌곽무덤서 ○…북한은 최근 평양에서 기원전 12세기에 만들어진 쇠거울을 발굴했다고 주장. 이 쇠거울은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1호 돌곽무덤에서 사람뼈와 함께 발굴됐는데,크기는 직경 15㎝,두께 0.5㎝의 둥근 모양에 앞면은 매끈하고 뒷면에는 1개의 꼭지가 붙어있다고 노동신문 최근호는 보도. 이 신문은 사람뼈의 절대연대 측정치가 3천1백4년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이로미루어 한반도에선 기원전 12세기부터 철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것이라고 주장. ○“뒷굽 높아야 건강·미용에 좋다”/잡지 천리마/여중생때부터 적극 권장 ○…북한은 최근 여성들의 몸매를 아름답게 하고 건강에도 좋다는 이유로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을 것을 적극 권장. 평양에서 발간되는 월간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는 북한의 신발공장에서 굽 높이가 30㎜에서 80㎜에 이르는 여러가지 신발들이 생산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을 때의 좋은 점을 소개.이 잡지는 신는 시기는 중학교때부터가 적절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발뼈와 발근육이 완전히 자라지 않아 뼈마디와 힘살이 그에 맞게 발달되므로 몸매가 고와지고,성인이 된 다음 굽이 높은 신발을 신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제시. ○“청바지는 미국깡패들 옷”/김정일 한마디에 단속나서 ○…북한 당국은 최근 청바지 착용을 더욱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고. 북한에서는 지난 89년 여름에 열린 평양축전때 청바지가 소개된 이후 청소년들이 가장 입어보고 싶어하는 옷으로 꼽히고 있을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청바지 착용이 비사회적인 현상으로 비쳐지면서 지난해 8월부터 착용에 제동이 걸렸던 것.청바지착용이 금지된 것은 지난해 여름 김정일이 평양시찰도중 몸에 꽉끼는 청바지를 입고가는 여성을 보고 『조선사람의 풍모가 없다.청바지는 미국의 깡패옷인데 조선사람들이 입어서야 되느냐』고 한마디한 때부터인데 요즈음은 단속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 ○강성산·김용순 수업차관/각급학교 새학년 개학식 ○…북한은 1일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일제히 개학모임을 갖고 새학년도 첫 수업을 시작. 북한은 우리와 달리 9월부터 새학년이 시작되는데 이날 개학식에는 총리 강성산을 비롯,당비서인 계응태·황장엽·김기남·서관희,김용순과 부총리 장철 등 당정고위 간부들이 각각 참석했다고 중앙방송이 보도.특히 김정일이 40여년전 재학한 바 있는 평양 제4인민학교에는 강성산·장철·박남기(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 등이 찾아가 첫 수업을 참관하고 교직원들과 함께 학교시설들을 둘러보는 등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 종파간 유혈충돌/예멘,33명 사망

    【아덴(예멘) AP 연합】 옛 남예멘수도 아덴에서는 지난 이틀동안 회교원리주의자들과 무장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군인들간에 시가전이 벌어져 최소한 33명이 죽었다고 보안소식통들이 3일 밝혔다. 소식통들은 군인들이 이날 새벽 인구조밀지역인 크레이터지구로 난입,바주카포와 자동소총및 수류탄으로 무장한 회교원리주의들을 급습,20여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양측 시가전의 발단은 전날 예멘 지하드(성전)를 표방한 수니파 회교원리주의신도들이 크레이터지구에서 전설적인 수피파의 「아우리아(성인)」들의 무덤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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