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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녀와 함께 역사를 배우자/3개 국립박물관 특별전 풍성

    ◎중앙­오늘부터 ‘문화재와 보존과학 97’/경주­2월1일까지 신라토우 350점 선봬/구 진주박물관선 임진왜란 관련자료 전시 새해들어 각 국립박물관들이 잇따라 볼만한 전시를 마련,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이 20일부터 시작하는 ‘문화재와 보존과학97’특별전(2월 19일까지)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토우’기획전(2월1일까지)·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의 임진왜란 유물전이 그것. 이 전시들은 각 박물관별로 문화재와 토우·역사유물 등을 특색있게 보여주는 기획으로 전문가 뿐만 아니라 방학을 맞은 학생들의 유익한 볼거리로도 관심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기획전시실에서 여는 ‘문화재와 보존과학97’ 특별전은이 박물관 보존과학실이 지난 1년간 실시했던 보존처리와 연구분석 결과를 대표적인 유물과 함께 공개하는 전시.황해도 평산에서 출토된 철제금은입사호등(통일신라)을 비롯,청주 사뇌사지 출토 청동제유물,나전칠기상자 등 60여점이 출품된다. 고대 목제류의 세포조직을 통해 그 종류를 판정하는 감식법과 고대 채색기법·고대 칠기와 조선 나전칠기의 제작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방식·금속조직사진 등을 함께 소개해 문화재에 숨겨진 미시세계도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이번에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는 진흙막이 마구의 일종인 국보 제207호 ‘천마도장니’도 화제거리다. 국립경주박물관이 마련하고 있는 ‘신라토우’기획전도 흔치않은 볼거리.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국·사립대 박물관이 소장한 토우 350점을 내놓고 있다.신라토우는 5∼6세기 무렵 작은 돌덧널무덤의 부장품으로 제작된것.신라에서만 일정기간동안 만들어진 조각인만큼 당시 신라인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사냥이나 고기잡이·말탄 사람의 모습·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 생활상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고 남녀의 성을 강조한 상들이 많아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와함께 지난 15일 국립 박물관중 최초의 전문역사박물관으로 새로 태어난 옛 국립진주박물관인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의 임진왜란 관련전시도 볼만한 전시.이 박물관은 2개의 상설 전시실과 지난해 11월 문화재급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던 김용두옹 기증문화재를 전시하기 위해 김옹의 호를 딴 두암실로 편성된 전문 박물관이다. 1층에는 울산성전투도병풍 등 회화·의약·도자문화를 비롯해 전쟁과 여성·전쟁기록 등 전쟁의 문제점들을 주제별로 구분전시하고 있고 2층 전시실에는 현자총동·화차·거북선 등 전쟁에 사용된 무기류를 보여주고 있다.한편 두암실에는 김용두옹이 기증했던 회화 도자기 목가구 금속공예품 등 문화재급 유물 114점이 전시돼 있다.
  • ‘사고의 거품’도 걷어내자/박성래 외대부총장(서울광장)

    지난 1월 6일 미국의 한 천문학자 유골이 달로 떠났다. 미국은 25년만에 달 나라에 인공 위성을 쏘아 보냈는데,정말로 달에는 물은 없을까 등등 여러가지 의문을 풀기 위한 과학적 조사를 하게 된다. ‘루나 프로스펙터’라는 이 위성은 1년 반 동안 달 주위를 돌며 달을 탐사한 다음 거기 안착하며,그때 유골을 내려 놓을 예정이다. ○달로간 미 천문학자 유골 이로써 달여행을 꿈꾸며 우주인 양성에 힘썼던 천문학자 유진 슈메이커의 무덤이 달에 생겨나게 되었다. 지난해 7월 사망한 슈메이커는 그 몇달 전부터친구들에게 달 표면에서 암석을 채집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달에 착륙해내 망치로 표면을 두드려 보지 못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아내 및 다른 동료와 함께 ‘슈메이커­레비 9호’ 혜성을 발견하기도 한 그는 한때 달 여행 기회를 얻기도 했으나 건강 문제로 우주비행사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비행사들을 훈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한이 된 그는 유언을 남겨 자기의 유골을 달에 장사지내게한 것이다. 유골 상자에는 아내와 함께 발견한 혜성의 사진과 아폴로 우주인들의 훈련 사진,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한 구절이 들어 있다고 한다. ‘루나 프로스펙터’는 앞으로 1년반 후 이 상자를 달 표면에 내려놓을예정이다. 이 뉴스를 읽으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당나라를 몰아내어 신라의 삼국 통일을완성한 임금으로 알려진 그는 681년에 죽었는데,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해 바다에 만들어졌다.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 앞 또는 월성 원자력발전소 앞의 동해 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의 무덤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동해에 묻힌 신라 문무왕 “7월 1일 임금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따라 동해 어구의 큰 바위에 장사하였다. 세상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고 하는데,그를 장사지낸 바위를 대왕석이라 부른다.”또 이 이야기를 받아 ‘삼국유사’권2 ‘만파식적’조에는 대왕암을 바라보는 자리에 세운 감은사의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짓기 시작한 절인데,그 아들 신문왕이 완성했다. 감은사 금당 밑에는 동해 바다로 이어지는 굴이 뚫려 있어서 문무왕이 변해진 용이 절을 드나들수 있게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다. 문무왕과 슈메이커­이 두 사람의 무덤은 모두 이 땅위에는 있지 않다. 이들의 유해는 모두 화장되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그것을 한 사람은 달 표면에 보냈고,다른 한 사람은 동해 바닷 속에 넣었다. 그 어느 쪽도 좌청룡 우백호를 되뇌며 후손의 발복을 기원하여 명당을 찾아 유해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 두 사람 무덤을 잘못 썼다고 타박할 수 있을까? 아마 오히려 이들 두 삶의 의미는 최고의 명당을 찾아 조상을 장사지낸 한국의 어느 집안보다도 더 훌륭한 것으로 두고두고 기념될 것이 분명하다. 거품이 심한 시대여서 더욱 그렇기도 했겠지만,작년까지 우리는 너무나 허황된 묘자리 미신에 휘둘려가며 살아 왔다. 오늘의 한국인들은 너무나 풍수지리에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너무 탐닉 좋은 무덤 자리 고르기와 지맥이나 수맥 이야기가 점점 더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 믿음을 부추기는 책들이 대중적 인기를몰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런 비합리적 사고의 유행은 한국인들의 미신 의존도를 높이고,그것이 사회 전체의 불합리성을 높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것이 걱정이다. 해마다 전국의 무덤 넓이가 여의도 만큼 커진다 하여,우리 좁은 국토 이용의 비합리성을 개탄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태도가 중단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사고를 둘러싸 짓누르고 있는 ‘사고의 거품’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어렵다. 이왕 어려운 시대를 맞아 모든 거품을 빼기로 결심할 생각이라면,우리 사고방식에서도 거품을 빼고,좀더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 첫걸음으로 우리의 지도자 누군가가 문무왕이나 슈메이커 같은 유언을 한 번 할 사람은 없을까?
  • 도이치 그라모폰 11월까지 미발표작 12장 발매

    ◎슈투트가르트 시절의 첼리비다케와의 만남 레코딩을 ‘통조림 음악’이라 혐오했던 지휘자 첼리비다케.지난해 12월 EMI가 그의 뮌헨 필 시절 라이브를 11장짜리로 내놨을때 ‘첼리’의 신도들은 안개에 가린 영봉 한 귀퉁이가 모습을 드러낸듯 반겼다.그 첼리가 올해 또다시 한꺼풀 벗는다.이번엔 창립 100주년을 맞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미발표 CD를 발매하는 것. 이번 음반이 팬들을 더욱 설레게 하는 것은 70∼82년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의 녹음이란 점.EMI의 90년대 녹음이 소 여물 씹듯 완미하는 정교하고 절묘한 앙상블을 들려준다면 슈투트가르트 시절은 한창때의 활력이 넘쳐 흐른다.생동감 넘치는 프레이징,힘차고 웅장한 스케일,다이내믹한 활력이 압권.첼리의 50년대부터 96년 죽음까지 지켜봐 왔던 이들 가운데서는 거장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이 때를 진정한 전성기로 평가하기도 한다.발매 예정인 음반은 3차에 걸쳐 모두 12장. ▲브람스 교향곡 전집 3장 ▲브루크너 교향곡 7,8,9번 등 4장 ▲차이코프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서곡’‘프란체스카 다 라미니’,라벨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어미거위 조곡’‘라 발스’‘쿠프랭의 무덤’,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스트라빈스키 ‘요정의 입맞춤’,드뷔시 ‘바다’‘관현악을 위한 야상곡’,리하르트슈트라우스 ‘돈환’‘죽음과 변용’,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등 관현악곡집 5장이다. 그의 중요한 레퍼토리면서 EMI에디션에선 빠지거나 (브람스,브루크너) 빈약했던(라벨) 곡들이 대폭 보강됐다.이밖에 드뷔시,슈트라우스,차이코프스키 등 첼리의 단골 레퍼토리들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다. DG는 이 앨범을 오는 11월까지 순차적으로 완간,전세계에 내보낸다.환율이 터무니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도 수입된다.첼리를 EMI와 DG가 분점하게 된 배경은 첼리의 후손들이 뒤탈 없게끔 메이저 레코드사를 모아놓고 판권을 나눠 팔았기 때문이라는 후문.
  • 지주회사 설립 쉽지 않을듯/재계,새정부 도입 움직임에 ‘무덤덤’

    ◎자금난으로 계열사 지분 확보 어려움 많아/현재 출자관계 정리 과제… 시행까진 ‘험로’ 재벌들의 지주회사 설립는 가능한가.새 정부가 지주회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자 정작 재계는 ‘무덤덤한’ 반응이다. 현실적으로 설립이 어렵기 때문.설립에 난제가 많아 도입하더라고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반응이다. 지주회사란 다른 기업을 지배할 목적으로 지배 대상 기업의 지분을 필요한 만큼 보유한 회사를 말한다.그동안 재계에서는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고 지주회사가 자금조달과 인사,기술개발 등 경영지원 업무를 전담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지주회사의 도입을 요구해 왔으나 정부는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도입을 미뤄왔다.한 그룹의 지주회사는 지배하고자 하는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50% 내외로 확보해야 하는데 자금조달이 어렵다.결국 계열사들이 지주회사에 출자하고 지주회사가 출자회사의 지분을 다시 확보하는 방식이 도입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금융 상황에서는 모기업과 주력기업들의 출자가불가능하다는 그룹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이계안 부사장은 “지주회사가 설립되면 구성원은 기획실이나 비서실 임직원으로 하고 주주는 오너들이 맡고 출자는 모기업이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출자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말했다.대우그룹 경영관리팀 김우일 이사는 “별개의 법인을 설립해 주식을 취득해야 하는데 자금능력이 없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방식도 주력계열사가 지주회사에 출자하고 출자금으로 다시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순환식’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모기업의 계열사에 대한 지분이 일정치 않고 상호지급보증이 얽혀 있어 이를 정리하는 과정도 매우 복잡할 것으로 예상된다.예컨대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이 모기업으로서 계열사 지분을 많이 갖고 있었으나 현대중공업이 흑자를 내면서 지분을 확대,지분 관계가 복잡하다.때문에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사업영역의 확대나 감독권 확보라는 ‘이득’보다는 설립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지주회사를 둘 그룹은 당장 많지않을 것이라는게 재계의 분석이다.현대그룹 이부사장은 “지주회사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식으로 규제를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치치하얼시 백두산여관(흑룡강 7천리:16)

    ◎조선족 2,000여명의 ‘사랑방’ 역할/주인 30대 조선족 부부/“91년 한국에 건거가 막노동/4년동안 알뜰히 60만원 벌어 귀국/2층짜리 식당 딸린 여관 인수했디요” 치치하얼시에서 대전그룹에 대한 취재를 마치자 나는 하루 숙박료가 150원씩 하는 눈강호텔에서 싸구려 백두산여관으로 짐을 옮겼다.전날 대전그룹에서 노래방 초대를 받아가던 중 보았던 곳이다. 백두산은 아리랑과 같이 자고로 우리민족의 상징이다.중국의 어디를 가든 백두산이라는 간판이 붙은 상점이나 식당,여관을 들어가면 주인은 조선족이다.시내중심인 건화구에 위치한 백두산여관은 2층 건물인데 1층은 식당이고 식당안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에 여관방이 설치되어있다. 온돌방 하나 침대방 여덟인데 방 하나의 숙박료는 60원.나는 하루 15원씩하는 4인 침대방에 들었다.정갈하고 아담하게 꾸려진 방이 마음에 들었다.지난 3월 개업했는데 침대가 비는 날이 없이 고객이 든다고 한다.손님은 거의가 조선족이며 고급방은 한국인이 장기투숙하고 있다. 주인은 이인걸(39)씨,김영란(38)씨 부부.남편은 여관을 부인은 식당을 책임지고 있다.이씨의 할아버지 이희철의 고향은 평북 선천군 용천면인데 부친 응찬이 한 살때 중국으로 이사왔다고 한다.증조부가 선천에서 군수를 한 집안이라 지주였으나 30년대 할아버지가 지하 항일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했다.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자 만주로 도주해서 독립운동을 하다 40년 일본군에 체포돼 사망했다.그의 무덤은 하얼빈 열사능원에 있다. ○고급방은 한국인 장기투숙 아들 응찬은 26살의 청상과부 어머니손에 자라 광복을 맞고 북경에서 군관학교를 졸업,조선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와 84년 제대할 때까지 군에 복무했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목단강이어서 소학교나마 조선학교를 다닌 이인걸씨는 76년 한족중학교를 나와 철도국직원으로 들어가 근무했다.91년 9월에는 부부가 함께 한국에 갔다. “약 석달동안 막일을 하다가 풍전호텔에서도 일하게 됐습니다.삼성건설에서 부부가 함께 일했는데 일년에 15만원씩 벌었습니다.60만원을 챙겨갖고 94년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큰 돈을만지던 사람들이 중국으로 돌아오면 일손이 잡히지 않듯이 그도 철도국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월급이래야 서울에서 2일간의 수입이어서 사표를 내고 반년을 집에서 놀았다.수입은 없고 돈만 축냈다. 군인아버지한테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이씨는 95년 봄에 사업을 하기위해 천진,북경,위해,청도등 전국을 돌아다녔다.96년에는 북경에서 한국인이 차린 회사에 들어가 10달동안 일했으나 월급은 한푼도 받지 못햇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사업경험을 쌓았다.2년동안 가족을 떠나 객지에서 얻은 결론은 치치하얼에 돌아가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이 건물은 면적이 364㎡입니다.60만원에 사서 장식하는데 10만원을 투자해서 여관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흑룡강성에 있는 조선족 기업중 연간 생산량이 1백만원 이상 되는 기업은 200개,1천만원 이상되는 기업은 20개이다.석산린의 창녕그룹,최수진의 성 민족경제기술개발총회사 같은 거물급의 뒤를 이어 오성학의 대전그룹,김인한의 하얼빈쌍령급수설비기술개발유한회사,임홍덕의 대경풍화기업그룹,박성공의 하얼빈유전펌프공장,이승남의 동각구제통신설비유한회사,강관변의 대경시개발구물자회사노광석의 할빈동북계량기,강호규의 오상시천국그룹 등 기업체와 소형개체공상호와 중소형기업체가 많다.할빈과 같이 치치하얼시의 150개 조선족 업체중에서 90%,가목사시 794개 조선업체중 764개,목단강시 3천907개중 90%가 소형개체공상호이다업종은 음식·오락·서비스업이 85%,의류소매업체가 10%라고 한다. 치치하얼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천여명.시장경제에 남보다 앞서 뛰어들어 현재 식당업종의 30%가 조선족차지이다.부근의 농촌에서도 조선족들이 시내에 들어와 가라오케와 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다. ○10만원 들여 장식… 3월 개업 대개 이런 업종은 김치장사가 커서 탈바꿈한 것이다.백두산여관은 이인걸씨가 한국에서 뭉치돈을 마련해서 투자한것이므로 조선족의 식당 여관업종에서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인걸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아산 이씨입니다.한국에 있을때 버스를 타고 아산에 가서 아산 이씨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그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그 집 아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종친회에 갔습니다.종친회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그 뒤로는 종친회때마다 중국대표로 참석하고 할아버지 이름을 찾아 가평의 종중산에 가서 제도 올렸습니다” 종친을 위하는 일자체가 결국은 민족을 위하는 일이 된다. “중국에 사는 아산 이씨대표가 가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백두산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족이다.조선족들은 한족들보다 월급을 100원 이상 주어야 한다.그런데도 그는 앞으로도 조선족만 쓰겠다고 다짐했다.민족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종업원 모두 조선족 채용 백두산여관같은 조선족 기업과 경제발전은 농촌의 인력에게 취업기회를 마련해주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준다. 가목사시 조선족 기업취업인원수는 3천970명,전 조선족 인구의 31.7%이며 목단강시에는 1만1천410명이나 된다. “한국에 가보니 경제성장의 혜택을 본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한 사람들이었습니디.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데요.한국에서 땀흘려 번 돈을 보람있게 써야합니다” 그는 조선족들의 한탕주의를 경계했다.
  • 중남미 고대 문화재 수난

    ◎콜롬비아의 말라가나 유적 도굴로 파헤쳐 벌집 쑤신듯/마야유물도 무방비로 노출/비싼 값에 밀매 도굴꾼 표적 【시판(페루)AP 연합】 페루,멕시코,콜롬비아,에콰도르,과테말라 등 중남미 지역에서 고대 문화재들이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하고 있다. 도굴꾼들은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문물에 눈독을 들이는 전세계 문화재 수집가들에게 고가로 팔아먹기 위해 이 고대무덤들을 정신없이 파헤치고 있다. 콜롬비아에서 금세기에 발견된 가장 중요한 고대유물로 평가되는 BC 180년∼AD 70년 경의 말라가나 보물은 거의 전량 도난당했다. 이 고대 무덤은 93년 칼리 북동부 하시엔다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신고를 받고 고고학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굴꾼들이 무덤을 벌집처럼 쑤셔놓은 뒤였다. 에콰도르에서는 당국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는 유물발굴 계획은 별로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유적지를 무단으로 파헤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정부관계당국은 약탈 문화재 밀수를 합동으로 단속하고 있지만 밀거래는 끊이지 않고 있다.과테말라에서는 북부 페텐주 광활한 밀림지대의 유적지들이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어 마야 유물을 노리는 약탈자들의 좋은 표적이 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티칼 마야 유적지가 포함된 사야 유적보호지구에서 마야문명의 유산인 길이 5m70㎝의 오벨리스크가 도난당했다.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쳐 유물을 내다파는 도굴 행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후손들도 있다.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서쪽으로 800㎞ 떨어진 시판마을의 농부들은 조상의 무덤에서 금제품,도자기,테피스트리,보석 등 BC 200년에서 AD 700년까지 이 지역에 꽃피었던 모체문명이 남긴 유물을 건져내고 있다.이렇게 약탈된 고대유물의 밀수는 마약밀매 다음의 큰 수입원이 된다. 그러나 이들 문화재 약탈­거래자들은 덜미를 잡혀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최고 20년은 옥살이를 해야 한다.
  • 친구같은 대통령/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맨해튼 서쪽끝의 헨리 허드슨 파크웨이를 타고 두시간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이드파크 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고 그 도시 한가운데 허드슨강 언덕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생가와 도서관과 무덤이 한데 어우러져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 이 작은 마을이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은 루즈벨트가 경제와 안보의 두위기,즉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극단적 위기상황에서 미국을 구한 현대적 미 대통령의 모델로 미국민들의 마음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민이 그에게 3권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미역사상 전무후무의 4선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은 그의 정치적 업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국민의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그는 취임 직후부터 ‘노변정담’이라는 라디오연설 시간을 만들어 수시로 국민과 대화를 나눴다.“친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그의 연설은 어떤 어려운 상황의 사람에게도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배도 고프지 않았고 춥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힘이 솟았다.내가 대통령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그가 현대적 대통령직의 본보기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통령과 국민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때문이었다.그의 취임후 백악관에는 하루 4천통이상의 편지가 날아들었다.전임자 후버 대통령의 40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92년 무명의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가 일약 미대통령에 당선됐을때 워싱턴 포스트는 ‘친애하는 대통령께’라는 제목하에 18세 이하를 대상으로 미지의 대통령에게 할 말 있는 청소년들의 편지를 모았다.3주만에 10만700통이 응모됐다.그렇게 할말이 많은지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며 기발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다.이들 편지는 클린턴 당선자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대통령 선거날 TV가 다투어 비춰주는 김대중 당선자의 하의도 생가를 바라보면서 루즈벨트의 하이드파크를 떠올려본다.그리고 하의도가 ‘친구대통령’을 탄생시킨 한국 대통령문화의 새출발지가 되기를 기대해보면서 짧은 편지도 써본다.“국민들은 친구 같은 대통령을 원한다.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그리고솔직한 대통령을 원한다.믿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 신윤복 ‘심계유목도’의 여인들(한국인의 얼굴:123)

    ◎계곡서 목욕 즐기는 모습 담아/원색옷차림 애로틱하게 묘사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은 풍속화를 대담하게 마무리지었다.그래서 유교적 도덕사회라는 시대상황을 무시한 그의 그림에서는 진한 에로티즘이 뿜어 나온다.혜원은 좀처럼 바깥에 드러내기를 꺼렸던 여러 짓거리를 화폭에 담아냈다.여인네들이 속내로 즐기는 여속이나 남녀간의 색정을 즐겨 묘사한 그는 당대의 이단이 분명했다. 그의 속화 ‘심계유목도’는 지극히 컬러풀한 수작이다.국보135호인 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했다.화제대로 깊은 계곡에서 목물을 즐기는 여인들을 앞세운 그림이다.그래서 ‘심계유목도’라는 화제가 붙었으나 그네를 타는 여인과 목물 뒤에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여인들이 모이는데를 부러 찾아나선 도붓장사 아주머니와 여인들만의 세상을 훔쳐보는 동자승까지 끼어들었다. 그네에 오르는 여인을 보면 계절은 단오무렵이 분명하다.다홍치마와 노란 삼호장저고리 차림의 여인은 그네에 오르느라 속곳 가랑이를 다 드러냈다.원색에 가까운 옷차림과흰색 속곳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목물을 하는 여인네들 보다 먼저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옛 사람들은 다홍빛깔 자체를 에로틱한 색채로 보았다.특히 남정네들의 젊음을 자극하는 색깔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포인트는 저고리를 벗어 젖히고 허벅지를 내놓은 물가의 여인네들이다.맨 위쪽 여인은 홑치마를 훌떡 걷어올려 볼기짝이 다 보인다.그래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여인은 목물 따위는 뒷전에 두고 시선을 멀리돌렸다.풍만한 젖무덤 한쌍이 허연 뱃살과 함께 치마말기 위로 튀어 나왔으나 그 또한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체면치레를 겁내지 않는 몸짓이나 뱃살이 오른 것으로 미루어 이 여인을 낫살이나 제법 든 퇴기쯤으로 보는이들도 있다.그런데 아직은 여인네 몸매에 탄력이 붙었다.가느다란 눈매에 코가 오뚝하고 유엽미의 눈썹이 또렸하다.그리고 붉게 물든 작은 입을 토라진듯 다물었다.한껏 멋을 부려 머리에는 다리를 얹었다. 여인의 얼굴은 제법 반반하여 몇몇 한량들의 애간장을 태웠을 법도 하다.가는 붓을 쓴 세필이라서 몸매가 뚜렸한 여인은 뱃집 말고는 탈잡을 데가 없다.그만하면 조선시대 미녀였을 것이다. 그 아래쪽 세 여인은 쪼그리거나 털석 주저않아 마주하고 있다.눈을 감은채 얼굴을 닦는 여인,머리에 얹은 다리 가체를 매만지는 여인,팔뚝을 닦는 여인 등 물을 즐기는 꼴이 제각각이다.
  • 스키타이족의 동진(중앙아시아를 가다:8)

    ◎BC 331년 ‘올비아전투’ 대승… 세력 확장/원래흑해 볼가강유역의 종족/중앙아·시베리아·몽골까지 점령/원정지마다 청동·황금공예 전파/고대 동방문화 일대 변혁 불러 중앙아시아 역사는 대단위 기병들이 장거리 원정을 통하여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이야기의 연속이다.그 역사의 첫 머리에 혜성처럼 등장한 기마족이 스키타이다.이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을 희랍인들은 스키타이,이란과 페르시아인들은 사케 또는 사카라 했다.그리고 중국인들은 색족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AD 450년쯤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은 용감하고 잔인한 전사들로 이름이 높았다. 적의 피를 마시고,해골을 기념으로 차고 다녔다고 한다.또 팔의 가죽을 벗겨서 화살통으로 쓰는 등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성을 보여주었다.이처럼 잔인한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흑해와 소아시아지방은 물론 광활한 중앙아시아가 그들 말발굽에 밟혔다.그리고 동쪽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까지 달려 갔다.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 스키타이인들은 원래 흑해 북쪽 볼가강 유역에 살던 종족이다.인종적으로는 이란 또는 아리안이라 불리우는 인도유럽족이었다.언어로 볼때는 고대 페르시아어에 가까웠다.흑해 지역에 있던 스키타이 세력은 기원전인 BC 331년 올비아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제가 이끄는 3만명의 강력한 마케도니아 군을 격퇴시켰다.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졌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그 이전의 아시리아 기록에 의하면 BC 680년대에 스키타이와 아시리아 사이의 혼인동맹을 맺었다.이는 스키타이인들이 당시 가장 발달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직접 교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뿐 아니라 멀리 이집트와도 교역을 했다.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발달한 청동기와 찬란한 황금공예 문화를 소개했다.이 스키타이에 앞서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그래서 주위에 발달한 위성문화를 많이 잉태시켰다.그 중의 하나가 스키타이 문화이다.스키타이는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찬란한 청동 및 황금문화를 과시했다.스키타이는 메소포타미아와 그 영향을 받은 희랍의 고대문화를 자신들의 유목생활 감각에 담아 정리하여 빛나는 예술문화를 창조했다.그리고 그 문화를 그들의 기마에 싣고 BC 7세기쯤에 이미 멀리 동쪽시베리아와 몽골지방까지 달려갔다. 그들의 동진은 마침내 스키토시베리아라는 동물형태의 미술양식을 만들어냈다.그들이 싣고온 청동·황금문화와 기마문화는 동방문화에 일대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이 나올수 있다.스키타이의 도래 이전 그러니까 BC 2000년전쯤에 이미 서양인종이 시베리아와 몽골에 먼저 도달했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3만의 마케도니아군 격퇴 우리 민족의 먼 고향으로 이해되는 곳이 알타이지방이다.이 지역에는 초기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아파나시에보 유적이 있다.이미 발굴한 이 유적의 문화를 아파나시에 보문화라 부른다.그 문화의 담당자들은 유럽족이다.그들은 최소한 BC 2000년 이전에 아파나시에보 언저리로 들어왔을 것이다.이밖에 알타이 북부의 삼림 스페프 지역에는 청동기와는 다른 볼세미문화 유적이있다.그 문화의 담당자는 몽골족이다.이 볼세미 유적은 청동기 이전의 문화를 주로 내포했다.그리고 산지 알타이지역인 카라콜에는 아파나시에보문화와 볼세미문화가 복합한 이른바 카라콜문화가 하나 더 형성되었다.그 카라콜문화는 BC 2000∼1700년쯤에 해당하는 시기의 문화인 것이다. 이들 세 문화유적은 동서양의 문화와 인종이 어떻게 섞였는가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그러니까 스키타이는 유럽족의 동방이동에 따른 제2차 파장이었다.스키타이는 물론 기마병을 이끌고 왔다.말에 대한 이야기는 BC 15세기 메소포타미아인들 입에서 나왔다.그로 미루어 적어도 BC 2000년 훨씬 이전에 동으로 간 유럽족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므로 BC 15세기무렵에 중앙아시아에 기마술이 등장했고,그 기마술은 결국 스키타이의 동방원정 길을 열어주었다. 제1차 인도유럽인들의 동방이동은 세갈래 길로 이루어졌다.첫째 흑해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이란을 거쳐 인도로 가는 남로와,둘째 카시카르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고비사막으로 이어지는 사막로가 그것이다.그리고 셋째 중앙아시아에서 알타이 산맥을 우회하는 초원로가 있었다.이들 길은 뒷날 비단길 통로의 기초가 되었다. 스텝과 사막 루트는 주의하여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이들 두 길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신강성,몽골지역에 혼혈민족과 민족연합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을 재촉했다.이와 더불어 흉노족이 등장하여 공전의 대 제국을 창건했다.중국과 동서로마제국을 위협한 흉노에 뒤를 이어 돌궐이 나타났다.기마족으로서의 흉노와 돌궐은 여러가지 면에서 스키타이의 기마문화와 미술을 자기들 품으로 끌어들였다.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 재촉 고구려와 신라는 먼 북방의 흉노와 돌궐의 제국들과 관계를 맺었다.그리고 북방의 기마민족문화를 받아들였다.그보다 앞서 우리민족이 그들과 교류한 흔적이 언어와 인종적 특성에서 어렴풋이 보인다.우리의 선사문화가 알타이 청동기문화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각저총에는 코가 큰 서역인과 씨름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스키타이인들이 즐겨 쓰던 각배가 신라무덤에서도 나온다.신라 금관은 기마민족들이 신성시하던 사슴뿔을 기하학적으로 정리한 황금관이다.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은 그 형식이 스키타이의 청동검이나 희랍의 칼과 너무많이 닮았다.우리는 청동기 초기에 청동검을 모방하여 마제석검을 만들었거니와 귀한 청동검 대신에 마제석검을 부장품으로 썼다.우연이 아니다.
  • 세밑 굵직한 2개 전시 나란히/국립현대미술관 ‘근대유화전’

    ◎중앙박물관 ‘한국고대토기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은 나란히 무게있는 장기전시로 연말연시를 장식한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지난 1세기간 우리 현대미술 발전의 토대가 됐던 근대 유화의 도입과 전개과정을 조망하는 ‘근대를 보는 눈:유화’전을 갖는다.9일부터 내년 3월10일까지. 한국 근대미술 여명의 신호인 ‘미술’이란 새로운 말이 신문활자로 등장한 것은 1884년.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08년,춘곡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에 건너가 서양미술을 공부함으로써 한국의 신미술은 막을 올린다.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적 자각과 함께 미술활동도 활발해져 에콜드 파리풍의 예술관이나 후기 인상파적 화풍이 유입됐다.이종우 나혜석 장발등이 구미 각국에서 미술수업을 하고 돌아오면서 신미술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번 전시회는 전통화단에서 서양미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지를 보여주는 18세기 후반의 양풍미술을 여명기로 잡아 1960년까지 모두 5개 시기로 나눠 대표적인 특징을보여준다.‘유화가의 탄생과 화단형성’(1910~20년대)‘그룹활동과 이념의 다양성’(1920∼1945년) ‘광복과 전쟁기의 미술’(1945∼1953년) ‘전후 근대미술의 변환’(1950년이후)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모두280점을 선보이는 가운데 미공개작품도 50여점이 포함됐다. 특히 출품작중에는 한국 최초의 누드화인 김관호의 1916년작 ‘해질녘’(도쿄미술학교소장),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서양인 직업화가인 네덜란드계 미국인 휴버트 보스의 ‘고종황제 어진’도 들어있다.또 개항기의 거리와 장터 풍경을 이방인의 흥미로운 눈으로 묘사한 폴 쟈클레와 엘리자베스 케이츠의 판화작품도 관심을 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선대들의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토기명품들을 선보이는 한국 고대토기전을 2일 개막했다.내년 2월1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의 주제는 ‘흙·예술·삶과 죽음’. 고구려·신라·가야의 토기중에서 지역과 시대별로 엄선한 명품들을 비롯,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 등 450여점이 선보이고있다.특히 국보91호와 국보275호의 기마인물형토기(기마인물형토기),국보195호 토우장식항아리,보물 636호 서수형토기 등 국보·보물급 토기는 쉽게 만나기 힘든 명품들이다. 이번에 출토된 고대 토기의 대부분은 무덤의 껴묻거리 또는 제사와 관련된 토기들로 고대인들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또다른 정신세계를 엿볼수 있다.
  • 충북 단양 현곡리/고려시대 무덤 36기 발굴

    ◎서울시립대박물관장 박희현 교수팀/모두 돌덧널무덤… 지방 세력가문의 가족묘지 추정/인골·고려청자 27점·토기류·청동제품도 다수 출토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고려시대 무덤떼가 발굴되었다.이들 무덤에서는 청자를 비롯 백자와 토기,청동공예품 등이 인골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그래서 현곡리 무덤떼는 고려시대 문화 및 사회상을 새롭게 밝혀줄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떠올랐다. 서울시립대박물관장 박희현 고수팀이 지난 10월 발굴에 들어가 5일 공개한 현곡리 고려무덤은 모두 35기.중앙고속도로 12공구 공사구간에 들어있는 무덤들은 거의가 돌덧널무덤으로 이루어졌다.이들 무덤 출토유물 가운데는 고려청자 27점과 토기병을 비롯한 많은 토기류가 포함되었다.이밖에 청동거울을 비롯 청동합과 수저,청동버클,청동세공품,철궤와 철제가위,철편 등이 나왔다.특히 15명 몫의 사람뼈가 거의 원형으로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다. 청자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구어낸 것이 대부분.청자퇴화문접시와 청자양각대접,청자운학문접시와 청자유병,청자상감국화문과형주전자 등 기형이 다양했다.해무리굽 청자 말기의 현상을 보여주는 11세기의 청자접시에서부터 청자상감으로 발전한 12세기의 작품까지 들어있다.비색순청자를 구어낸데 이어 맑고 밝은 유약을 통해 청자상감으로 고려도자문화를 한껏 꽃피운 시기가 12세기.그 도자문화를 반영한 그릇이 이번에 발굴한 청자상감국화문과 형주전자다. 이들 청자는 관요형태의 전남 강진가마 같은데서 구어낸 그릇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발굴현장을 찾은 충북대 강경숙 교수(도자미술사)는 현곡리 무덤에서 나온 청자를 관요제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지방요 최고품이라는 말로 그릇의 질을 높이 평가했다.그리고 청자와 함께 나온 백자에도 관심을 둔 강교수는 현곡리 무덤에서 멀리 않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사자빈신사지탑 근처에 가마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1022년에 세운 이 탑 근처의 가마에서는 청자를 굽다가 백자로 바꾸어 굽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번에 발굴한 현곡리 무덤떼는 가족묘지라는 것이 발굴팀의 견해.출토유물의 수량이나 값어치로 보아 고려시대 지방 세력가문의 묘지일 가능성이 높다.충주의 호족으로 고려 태조의 세번째 부인 신명순성태후를 배출한 유긍달 가문을 우선 꼽을수 있다.신명순성태후가 낳은 두왕자는 뒷날 정종(923∼949년)과 광종(925∼975년)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충주 유씨는 오랫동안 지방호족으로 군림했다.그 일족은 단양과 영월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양은 삼국 초기부터 신라와 고구려를 오가는 문화와 외교,군사적 통로에 자리했다.고려시대도 마찬가지다.개경을 떠나 서울에 와서 남한강뱃길이나 육로로 충주와 황강진,단양을 거쳐야 죽령을 넘었다.남한강 뱃길이 끝나는 단양에는 고려 조운창의 하나인 서창이 있었다.이러한 당시 교통사정을 고려하면 현곡리 무덤의 청자는 경기도 시흥 방산동을 비롯 고양 원당리,장흥 부곡리 등지의 민요에서 구어낸 그릇일 가능성도 있다.
  • 러 마지막황제 ‘쉼터’ 어디냐

    ◎니콜라이2세 무덤연고권 싸고 2개주 7년째 논쟁/페테르부르그주­역대 왕족 묻힌 혁명도시에 매장해야/예카테린부르그주­유골 발견된 역사적 장소… 반출불가 “러시아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들이 묻힐 곳은 어디냐.” 올해로 7년째를 맞은 이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페테르부르그주와 예카테린부르그주가 각각 자신들의 ‘연고권’을 주장,무덤유치를 놓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러시아정부는 보리스 넴초프 제1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니콜라이2세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망경위,유골확인 등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중이다.또 내년 2월중 조사가 끝나는 대로니콜라이2세 및 가족들의 유골을 페테르부르그주로 가져가 봉분할 것을 결정해놓고 있다. 문제는 유골의 진위를 정밀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유골을 옮기라는 옐친 대통령의 포고령에 예카테린부르그주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예카테린부르그 지방법원은 최근 “유골의 소유권은 주에게 있으므로 다른 주로의 반출을 금한다”고 주정부의 ‘반출금지청원’을 받아들였다.이어 주정부는 유골이 안치돼 있는 ‘이파티예브가’에 경찰력을 동원,유골을 운송해 가져가려는 연방검찰측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물론 연방검찰도 주정부의 반출금지조치에 맞서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혁명도시’ 페테르부르그는 소위 로마노프왕가부터 니콜라이2세 이전까지 역대왕 일가들이 이곳 피터요새(페트로파블로브스크)에 묻혀 있음을 강조한다.반면 예카테린부르그주는 러시아혁명 1년후인 1918년 황제 일가족이 예카테린부르그로 끌려온 뒤 이곳에서 총살됐다는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연고권을 주장한다. 이들 두 주가 서로 ‘마지막 황제의 쉼터’가 되겠다고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러시아 전지역에서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러시아민족주의 물결 때문.소속 주 주민들은 ‘과거로의 회귀’는 ‘러시아의 영광’이며 무덤유치에 실패하면 이는 주지사가 정치를 잘못하는 것으로까지 생각하려 든다.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마지막 황제 논쟁’은 발굴된 시신이 진짜 니콜라이2세와 그가족의 것이냐였다.이 숙제는 거의 풀렸다.러시아 정부는 지난 91년 예카테린부르그주 이웃 한 무명묘에서 유골들을 발굴,이후 영국의 올더마스톤 과학수사연구소와 미국의 국방연구소에 DNA테스트와 유전자 검사를 의뢰해 똑같은 결과를 얻어냈다.발굴 유골들은 니콜라이2세 본인과 부인 알렉산드라,그리고 딸 3명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남4녀 가운데 아들과 막내딸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북한지역 고려유적 첫공개/KBS ‘일요스페셜’…만월대도 영상복원

    북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KBS-1TV ‘일요스페셜’이 현재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고려왕조의 유적과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살필수 있는 프로그램 ‘분단후 첫 공개­한눈에 보는 고려유물’을 선보인다.16일 하오 8시. 한 중국동포가 북한당국의 협조를 얻어 3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을 다니며 촬영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말로만 듣던 북한내 희귀 문화재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고려 태조인 왕건의 묘 내부가 최초로 공개돼 무덤안에 있는 십이지상 조각과 세한삼우도가 선보인다.또 1천년전에 사라진 고려 왕궁 만월대를 현재 남아있는 터와 옛 문헌들을 참조해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영상복원하며,기원(AD)4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 고분의 장대한 내부벽화를 통해 1천500년전 왕실과 일반 서민의 생활풍속을 조명한다. 898년에 지어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성불사 응진전의 화려한 단청도 볼거리.1천년 이상을 견뎌온 고려의 건축술과 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이어 고려시대의 축성방법과 구조 등을 천리장성을 중심으로살펴보고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천리장성의 모습도 재현한다. 이밖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현지 화면과 옛 문헌을 통해 다시 엮어보는 코너도 마련하며,고려조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단심가를 부르며 쓰러진 선죽교를 찾아 아직도 선혈이 남아 있다는 충절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KBS는 단순히 미공개 자료를 소개한다는 차원을 넘어 고려왕조의 탄생에서부터 멸망까지 시대별·사건별로 문화재와 유적을 이야기로 엮어 이해를 돕도록 했다.이를 위해 이호관 북한문화재 전문위원과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도움말을 보탰다.
  • 조선후기 김홍도의 ‘우물가’(한국인의 얼굴:120)

    ◎물긷는 아낙네에 남정내 불쑥/남녀유별 강조한 사회상 표출 조선시대 후기를 살았던 김홍도는 당시 풍속을 잘 그린 화가다.회화에서 풍속화라는 한 장르를 새로운 시작으로 개척하고 또 이 분야 그림에 불을 당긴 화가이기도 했다.풍속화에는 화가 주변의 세정이 짙게 배어들기 마련이다.그래서 민중 친화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궁중에 속한 화원 신분이기는 했으나 시정풍경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그의 풍속화첩에 나오는 ‘우물가’는 그런 조선의 정경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처럼 구성한 그림이다.남녀유별을 강조한 당시 사회상을 은연중 표출한 이 그림은 여인네들 끼리만 자유로워야할 우물 언저리를 소재로 했다.그런데 불쑥 나타난 남정네가 여인네들 판을 깨놓았다. 그 남정네는 창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걸쳤다.그리고 옷섶을 다 열어놓아 배꼽까지 드러났다.힘깨나 쓸만한 체구이나 우물가 여인들이 보기에는 민망한 꼴이다.정말 목이 말라서인지,아니면 부러 끼어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어떻든 내외를 할 수 밖에 없는 아낙의 볼에는 벌써 홍조가 피어났다.필부필부로 인연을 맺어 사는 아낙일 터이지만 얼굴이 퍽이나 곱다. 아낙은 갸름한 얼굴을 했다.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크지는 않으나 오뚝한 코,작게 다문 입이며 나무랄 데가 없다.과장되지 않은 미인이다.수수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은 큰 머리다.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앞쪽 아낙도 그런 머리다.당시 유행한 머리모양인가 보다.그런데 젊은 아낙 오지랖 아래로 아직은 몽실한 젖무덤이 삐죽 나왔다.치마말기속에 감추어 두어야할 부분이다.그러고 보면 아마도 초산때 첫아들 옥동자를 낳았던 모양이다. 젊은 아낙은 아들까지 낳았으니 큰일 하나는 치른 어느 집 며느리다.그러나 난데없이 우물가에 나타난 무뢰한 앞인지라 아직은 수줍다.옷고름이라도 자근자근 물고싶은 마음이지만 두레박줄을 두손에 쥐었기 때문에 그럴 처지도 아니다.엄청 수줍어하는 아낙 표정에 비해 두레박물을 마시는 남정네는 숭굴스럽다.그래서 묘한 대비를 이룬다.그림의 뜻을 말하는 화의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남정네는 망건을 쓰고 뒷짐에 갓까지 걸어두었다.막무가내로 우물가를 찾기는 했으나 그런대로 백면서생의 이력은 지녔을 법하다.남정네 얼굴을 가만히 살피면 우스꽝스러운데가 있다.자라목처럼 목이 밭고 두상도 잘 생기지는 않았다.그 두상에 그 얼굴이라고 눈과 코,입이 별 간격을 두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있다.〈황규호기자〉
  • 동양 최대·최첨단… 꿈의 인천신공항을 가다(인천신공항)

    ◎21세기 동북아의 문을 연다/여의도의 18배… 서해안 지도 바꾸기 대역사/99년 1단계 공사 완료… 현재 공정률 37.5% 인천항에서 4㎞쯤 떨어진 인천국제공항 건설현장.영종도와 신불도 삼목도 용유도 등 4개의 섬 사이 개펄 1천4백만여평을 메워 동양 최대의 국제공항을 탄생시키는 대역사의 현장이다.여의도 면적의 18배에 달하는 땅이 새로 생긴 셈이다. 인천국제공항은 영종도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우선 영종도에 가려면 인천 율도 수송기지에서 배를 타고 15분 가량을 가야 한다. 현재 공사 현장은 수십대의 포크레인과 기중기 타설기 등이 사방에 흩어져 작업을 하는 모습이 마치 사막의 유전 단지를 방불케 한다.덤프트럭은 줄지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었다.공사에 몰두하는 인부들의 얼굴에서 중동 건설 현장의 신화를 일궈낸 우리 근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 진행중인 공사는 지난 92년 11월 착공,99년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1단계 공사로 현재 37.5%의 전체 공정율을 보이고 있다.부지 조성공사는 이미 끝냈고 활주로 유도로 계류장 등의 연약지반 처리공사와 여객청사의 철근 골조물 공사가 한창이다. 취재진은 우선 제3 할주로의 연약지반 처리공사장을 찾았다.엄청난 무게의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갯벌을 메운 연약지반이 침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흙더미로 눌러 지반을 다지는 공사다.수분을 빼내는 작업도 병행해야만 한다. 신공항건설공단 건설시험소 김영웅 소장은 “모든 공사의 자재는 현장 주변에 마련해 쓰고 있다”며 “흙과 골재는 신불도를 헐었고 모래는 용유도 앞바다의 고운 모래를 준설,지하수로 세척해 사용했다”고 말했다.특히 이 지역의 갯벌은 외국의 해안 공항이 들어선 지역과 비교해 침하가 적어 공항 지반으로서 토질이 우수하다는 설명이다. 편편하게 다듬어진 지반에 수십만개의 ‘페이퍼 드레인보드’가 10m 안팎의 깊이로 땅속에 박혀 있고 땅 밖으로 10㎝쯤 삐죽이 나와 있다.폭이 10㎝의 하얀 종이가 일정한 간격으로 끝없이 땅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이 마치 국립 묘지의 묘비처럼 보였다. 드레인보드가 물기를 빨아들이고 나면 그 위에 4∼5m 높이의흙을 덮어 지반을 다진다.곳곳에 널려있는 거대한 흙무덤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다양한 공법이 사용되는 만큼 각 공법에 대한 평가를 위해 말뚝처럼 솟아 있는 계측계가 1천917개나 설치되어 있다.계측계는 간극수압,침하정도,토압,경사율 등을 측정하게 된다. 김소장은 “연약지반 처리공사에 공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만큼 신공항의 예상 침하량은 0.5m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인천국제공항과 함께 차세대 공항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간사이공항이 11.5m,홍콩의 책랍콥공항 2.5m,싱가폴 창이공항 1.8m와 비교하면 그 우수성을 피부로 느낄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취재진은 시험포장도로 자리를 옮겼다.시험포장도로는 포장설계에서 포장공법,포장단면에 대한 안전성 검증을 하기 마련된 곳이다.대역사 최초의 완공 구간인 셈이다. 폭 9m,길이 842m의 타원형 도로가 마치 경주용 자동차 레이스와 같이 펼쳐졌다.시험도로 한쪽은 콘크르트로,다른 한 쪽은 아스팔트로 포장했다.육안으로는 구별이 않되지만 콘크리트 구간은 6개의 서로 다른 공법을 사용했고 아스팔트구간은 7개의 공법을 사용했다.각각의 공법에 따라 장단점을 파악,그 결과에 따라 우수한 공법을 모든 포장 구간에 적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도로에 총 무게가 94t이나 되는 대형 견인식 주행시험차량이 24시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시속 20㎞ 정도로 속도로 한바퀴 도는데 2분30초 정도 걸린다.하루에 450회씩 3개월 동안 쉬지 않고 차가 다닌다.물론 운전자 4명이 교대로 운전대를 잡는다. 견인되는 트레일러 차량의 양쪽 뒤바퀴 사이에 가장 무거운 기종인 B747­400기의 실제와 똑같은 랜딩기어 한세트가 달려 있다.트레일러의 뒷 바퀴는 노면에 닿지 않고 이 비행기 바퀴가 도로를 달리는 셈이다.공항의 도로는 일반도로보다 10배 이상의 하중에 견디도록 설계된다. 건설시험소 김학중 과장은 “포장의 응력과 변형 관계를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도로 포장을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시험포장 도로는 모든 공사가 끝난뒤 비행기 유도로로 활용된다. 총면적 26만4천여평 규모의 여객터미널 공사현장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취재진은 20여m 높이의 전망대에 올라 현재 진행중인 강관파일공사 현장을 지켜봤다.멀리 공사현장 반대편에는 해송 등 16종 2천64그루의 각종 나무가 심어져 있는 3만여평 규모의 자생수목 시험포지가 눈에 띄었다.벌판 한 가운데 숲이 보이자 괜한 반가움이 들었다. 현재는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제1여객터미널 공사가 한창이다. 흙을 파내는 굴토공사를 대부분 마치고 강관 3만1천개를 36m 깊이로 지하에 박는 공사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공정율은 93.6%,거대한 철제 골조물이 이스트섬의 거대 석상들처럼 곳곳에 세워져 있다. 김과장은 “공사 초기에는 강관파일을 땅속에 박는 굉음이 하도 엄청나 꿈속에도 귀전에 울렸다”고 말했다.“인천항까지 전해졌다”는 우스개 소리도 곁들였다. 강관파일은 각 구조물의 기둥 역활을 하게 되며 지진이나 폭파 등 어떠한 충격에도 견딜수 있도록 규정보다 땅속에 깊게 박았다는 것이다. 각각의 강관파일에는 고유번호가 붙어 공사가 끝난 뒤에도 결함이 발견되면 생산지 등을 추적할 수 있도록 품질관리에 심혈을 기우렸다.강관파일은 각 시공업체가 현장 곳곳에 세우둔 대형 철강공장에서 생산된다. 문화재 발굴현장처럼 파헤쳐 진 거대한 흙 구덩이가 수백개는 됨직해 보였다.이곳에서 파낸 흙은 모두 15톤 트럭으로 14만대 분량.이 때문에 높이 1백30여m였던 신불도의 산이 45m 정도의 나즉막한 언덕이 되었다. 김과장은 “모든 공사용 강재는 녹씀 방지를 위해 미국 NASA 우주선에 적용되는 특수도장이나 방수용 애폭시 도장기법을 채택했다”고 자랑했다. 배의 돛대와 한국의 전통기와집의 처마선이 어우러진 외형,완전 자동화된 인테리전트 청사 등 멋들어지게 완공한 여객터미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객터미널 공사는 99년말까지 총 50개월 동안 진행된다. 다음은 배수관문 공사현장.주변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으로 바다와 갯벌 사이에 있는 배수관문으로 갯벌에서 나오는 물이 조금씩 바다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대부분의 갯벌은 이미 메워졌으나 드문드문 바닷물이 보였고 주민들이 쳐 둔 그물도 눈에 띄었다. 근처신불도 주민들이 쳐놓은 그물에는 지금도 바닷 고기가 제법 잡힌다는 것이다.주민 오세인씨(55)는 “올 초만해도 거의 줍다시피 각종 물고기를 걷어 올렸다”고 말했다.그러나 마지막 바닷물이 사라질 날도 머지 않았을 것이다. 갯벌에는 큰 고슴도치 모양의 붉은 해초들이 사방에서 자라고 있었다.갯벌의 염기를 빨아준다는 칠면초.30∼40㎝ 정도 크기로 어느 정도 염기를 흡수하고 나면 푸른빛을 띄고 이어 회색빛으로 변하면 그 갯벌에는 염기가 다 빠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이다. 대부분이 자생 해초지만 염기를 빨리 제거하기 위해 공단측이 일부러 퍼뜨린 종자도 있다. 물기가 남은 갯벌에 흙을 덮어 두었기 때문에 공사 현장은 울퉁불퉁한 달표면 같다.짚프형 차량이 아니면 도저히 다닐수 없을 정도로 움푹 파인 곳이 많았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길이 생겼다가 없어진다.취재진을 현장으로 안내하던 김과장은 자신이 알았던 길로 차를 몰았다가 거듭 길이 막히자 “하루가 다르게 길이 바뀐다”면서 당황했다.하지만 신공항 건설이 빠른 속도로진척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가건물 몇 채가 전부였던 건설현장의 공단 사무실도 올 8월 제법 그럴듯하게 마련된 가건물 수십동에 모두 입주했다.95년 6월 207평 규모로 개관한 홍보관에는 영상관 전시실 귀빈실 등이 일류 호텔의 접객시설 수준으로 마련돼 있다.외국의 국빈이 방문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공사 현장에는 모두 4백50여명의 신공항건설공단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하루에 공사 인부 등 2천여명의 공사 관계자가 이곳을 드나든다. 직원들은 율도 수송기지에서 영종도까지 1시간 간격으로 하루 14차례 다니는 자재수송선으로 출퇴근한다.하지만 보통 2시간 이상이 걸리는 출퇴근시간 때문에 여직원을 포함,상당수의 직원들이 공사 현장에서 먹고자며 1주일에 1∼2번 집에 간다는 것이다.문화시설이라곤 TV뿐이다. 건설 현장인 만큼 근무여건이 좋을 턱은 없지만 직원들은 대역사의 현장에 자신이 한몫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이 대단했다. 공단 홍보실의 심범석부장은 “21세기 동북아의 중심 공항을 만드는 현장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들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업이라는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의 산증인이 될 것이다.
  • 일본은 한반도 고고사의 일부

    ◎전국고고학대회 참석 니시다니 다다시 교수 밝혀/남서해안·동부지역 한반도계 유물 다수 발굴/나가사키겐 고인돌무덤 신석기 말기의 흔적 일본열도에서는 최근 들어서도 한반도계 유적 및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한국고고학회가 지난 8일 광주 전남대에서 연 전국고고학대회에 초청받은 큐수대 니시다니 다다시(서곡정) 교수에 의해 확인되었다.그가 발표한 주제는 ‘요즘 일본에서 발굴한 한·일관계 새 자료’.그는 한반도계 유적발굴 실상을 소개하고 일본에 존재하는 한반도계 유적을 문화흐름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주로 1994∼97년까지 아주 최근에 발굴한 유적만을 한국학자들에게 전해주었다.먼저 나가사키겐(장기현)기타마츠우라군(북송포군) 우쿠마츠바라(우구송원)유적에서 지난해 6기의 고인돌무덤과 3기의 널무덤이 발굴되었다고 소개했다.특히 고인돌무덤에서 나온 붉은 간토기는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한반도유물로 결론지었다.또 고인돌무덤과 널무덤에서 발굴한 일곱 사람몫의 인골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른바 도래인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들을 일본에 벼농사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추정했다. 우큐마츠바라유적은 한반도와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리적 입지에 위치했다는 그는 다른 고인돌유적도 들추어냈다.나가사키 사가겐(좌하현) 모리다(삼전)등 신석기시대 말기의 한반도계 유적이 계속 발굴되었다는 것이다.이들 일본열도 남서해안 유적 뿐 아니라 동일본 지역에서도 한반도계 유골이 나온다는 사실을 중시했다.이를테면 나가노겐(장야현) 네즈카(근총)유적인데,지난해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최말기의 철검 2자루가 나왔다고 밝혔다.이 가운데 칼자루와 날 사이에 돌기가 돋아난 칼 1자루는 일본에서 나온 예가 얹는 유물.그는 이 철검의 원류를 경남 김해시 양동리유적 출토품인 다래덩굴무늬 칼자루가 달린 철검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 유적에서도 한반도와의 관계를 살폈다. 지난 1995년 교토부(경도부) 다케노군(죽야군) 다쿠오카기다(내구강북)1호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도질토기와 굽다리잔은 가야토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가야토기라는 이야기다.그는 이들 토기를 가야와 왜가 교류를 하는데 필요한 일정한 해상루투가 동해상에 존재한 사실을 보여준 유물로 평가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올해와서 관동지방 북부인 군마겐(군마현) 다카사키시(고산시) 여러 유적에서 나온 유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5세기 중엽 주거유적 출토품 연질토기와 5세기중엽∼6세기쯤의 네모꼴돌무지무덤 출토품 연질토기병 및 금제느리개가 달린 귀걸이가 그것.그는 이들 유물을 통해 일본 고대유적의 가야문화를 중시하고 지난 1994년에 5세기 전반의 도질토기가 나온 도쿄도(동경도) 아다치구(족입구) 무사시이코(무장이흥) 유적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1994년 후쿠오카겐(복강현) 아케노구치 유적에서 발굴한 4세기 전반과 5세기쯤의 온돌유구는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과 하남시 미사동 원삼국시대의 움집 온돌과 일치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또 후쿠오카겐 유쿠하시(항교시)를 중심으로 쌓은 일본 고대산성의 기원을 백제산성에서찾은 그는 아오야마겐(강산현)에도 백제계 산성이 분포되었다고 말했다.
  • 뉴질랜드 첫 여 총리 유력/시플리 운송장관(뉴스의 인물)

    ◎전 총리에 퇴진종용 뚝심의 여걸/복지체제 대수술 전력… 강경 우파 4일 뉴질랜드 집권 국민당 당수겸 총리 후임자로 선출됨으로써 이 나라 최초의 유력한 여성 총리감으로 떠오른 제니 시플리(45) 운송장관은 강경한 우파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이번에 제임스 볼저 총리겸 당수를 몰아내고 국민당 당수직과 총리 후임자리를 이어받는 과정에서도 특유의 뚝심을 여지없이 발휘했다.그녀는 2일 볼저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명예로운 퇴진과 치욕적인 추방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종용,스스로 총리가 될 발판을 마련했다.이를 반영,분석가들은 이 담판을 ‘조용한 쿠데타’로 표현했다.시플리는 이때 전체 의석 120석중 44석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당 의원 가운데 24명의 지지를 확보해둔 상태였다. 시플리의 이같은 강성 이미지는 90년 사회복지장관으로 취임한 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하던 복지체제에 일대수술을 가하면서 일찍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녀는 그러나 국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뉴질랜드제일당(NZF)의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총리 승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장로교회 성직자의 딸로 태어나 교직에 몸담은 적이 있으며 농부의 아내로서 87년 의회에 첫발을 들여았다.90년 사회복지장관,94년 보건장관 등을 역임했다.
  • 새로운 각성(중앙아시아를 가다:1)

    ◎중국 능가했던 주체적 고구려문화/집안 오회분의 ‘달님­해님’ 그림 독창적 솜씨/중원에 업은 샅바싸움 강건한 기상의 무예 서울신문은 민족문화 원류를 탐사하는 새 주간기획물 ‘중앙아시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중국 동북지방에서 중원을 거쳐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사막을 찾은 서울대 윤이흠 교수(세계종교사)가 엮는 로망의 문화기행입니다.이 시리즈는 현지에서 확인한 고구려와 발해문화를 통해 고대 민족문화 루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그래서 낙양과 서안,돈황을 거쳐 천산산맥 남북 기슭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볐습니다.거기에는 우리 고대문화와 유사한 흔적을 간직한 옛 소련땅 독립국가들의 문화유산 모두가 포함되었습니다.민족문화를 역동적으로 끌어올린 고대문화 통로를 찾는데 물론 역점을 두었지만,중앙아시아에서 만난 동포들의 삶도 함께 다룰 예정입니다. 만주 벌판의 광활한 땅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에 이른다.그 웅비하는 산세를 접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여기가 우리 민족의발원지려니 하는 마음을 갖는다.7년전 100명의 제천단을 이끌고 처음 백두산을 올랐을때 감격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째서 여기를 민족의 기원지라 믿게 되는 것일까.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그래서 발길을 먼저 연변지역으로 돌렸다. 우리는 흔히 문화의 뿌리와 기원에 대한 질문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으려 한다.기원과 본질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혼돈스러운 것이다.이는 아주 오래된 인간의 사유습관으로 정착했다.그 오래된 습관이 민족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는 우리 문화와 중국문화의 관계에서 드러난다.그 관계를 컴퓨터용어를 빌려 설명하면,우리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중국문화가 우리의 고유문화를 덮어씌운 것이다. ○중국시각서 탈피할때 그래서 모든 고유 개념어들이 중국문화 내용으로 대체되었다.이를테면 삼재사상같은 것이 그런 경우다.천지인을 말하는 삼재사상은 주대에 시작해서 한대에 와서 완성되었다.따라서 그 이전 단군조선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럼에도 삼재사상이 한국문화의 뿌리이자 본질인 양 착각한다.이는 분명히 오래된 사유습관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중국 일변도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다. 그런데 북방에서 만난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오류에 대한 각성 그것이었다.집안 고구려 고분인 오회분 4,5호 묘에서 비는 달님 ‘여와’ 및 햇님 ‘복희’의 그림과 각저총의 격투기 및 씨름 그림은 중국문화에 예속하지 않은 고구려인의 솜씨다.두꺼비가 있는 달을 머리에 인 여와는 물론 중국 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다.그러나 7세기에 그린 이 그림은 흐트러지고 유연한 당시 중국의 비천과는 전혀 다른 강건한 기상을 담았다. 그러니까 고구려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문헌전통을 받아들였으되,미의 감각 만큼은 자신들의 것을 버리지 않았다.그들은 고구려의 정서라는 그릇에 중국의 문화를 담았던 것이다.이는 고구려문화에 나타난 일관된 현상이다.무예대결의 그림수박도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자기수련 전통이 배었다.또한 샅바를 맨 씨름은 중국에 없는 무예다.특히 고구려인과 대결중인 상대방 얼굴의 코는 유난히 높게 강조되었다.서역(서역)의 서양인이 분명했다.이는 고구려인들이 중국 밖에 사는 사막과 스텝의 민족들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림이다. 중국 대륙은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 전까지는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철저히 유린되었다.그 오합지졸의 상태였던 시기에 고구려는 대륙 동북방에서 강성한 제국을 이루었다.고구려는 당시 대륙에서 크게 봐야할 국가도 없었고,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었다.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녔던 고구려는 유교나 불교,도교와 같은 외래종교를 등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었다.그러나 고구려의 태도는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또 방대한 스텝지방에 자리한 돌궐제국의 칸들과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서역과 활발한 물물교류를 가졌다. ○외래종교 등거리서 조정 고구려가 망하면서 발해가 대신 나서 그 고토를 차지했다.고구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만주족을 끌어안고 나라를 세운 발해인들의 애환은 흔히 만주라 일컫는중국 동북지방 곳곳에 스며있다.그 많은 발해 무덤에서는 화려했던 문화의 흔적이 속속 드러났다.근·현대에 걸쳐 일어난 압록·두만강 건너로의 민족대이동은 어쩌면 귀소본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잡았다.항일독립전쟁에도 힘이 되어준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고구려 고토에 살고 있다. 북하의 중국쪽 두만강변 언덕에는 조선족 민족시인 이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다.그 시를 읊조려보며 내려다 본 강건너 무산시는 무척 적막했다.동양 제일이었다는 철광도시가 폐허로 변한 무산은 적막하다 못해 살벌했다.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지않은 땅 무산.그의 시가 구구절절 절실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 암울했던 시대에 더러는 일제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삼위로 들어갔다.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스탈린은 그들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고려인 삶도 조명 옛날 고구려인들이 칸들과 교류하던 바로 그 스텝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고구려인이 그들이다.그래서 중앙아시아 이방인들 틈새에서 외롭게 살아온 고구려인들도 만나기로 했다.우리 민족문화의 원초적 잔영이 어슴프레 보이는 땅으로까지 역류하여 들어간 고구려인의 이주는 우연이었을까.그러나 역사는 필연적일수 밖에 없다. 어떻든 이번 ‘민족 문화의 원류’를 탐사한 여행목적은 우선 고구려인이 서역과 문화를 교류하는데 뒤따랐던 두가지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중국 서안에서 돈황을 거치는 비단길과 그 밖의 북방통로를 살피는 것으로 압축된다.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 신라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짚어본다는 의도도 깔았다.그리고 비단길이 지나던 중국 오지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서 세계속의 한민족 위치를 발견코자 노력했다. □필자 약력 △1940년 서울생 △서울대 종교학과졸 △미 밴더빌트대 대학원석사 △미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철학박사(종교학) △정신문화연구원연구원 △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 분묘내부 제문 첫 발견/영주시 이산면서 16세기 유물 대량출토

    ◎만사 등 원형 그대로 보존… 복식연구 가치도 커/문화재 지정 신청… 99년부터 일반에 공개키로 지난 3월 영주시에서 대량 출토,16세기 장의제도를 규명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 제문 등 유물이 문화재 지정신청과 일반공개를 앞두고 있어 관련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유물은 국도 5호선 편입부지인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마을앞 야산에서 조선 중종 21∼23년(1526∼1528년) 장예원 판결사를 지낸 김흠조 부부의 묘소를 이전하던 후손들에 의해 묘관내부에서 출토된 것.즉시 영주시에 기증된 이들 유물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제문과 만사 각 19점을 비롯,백자호 분청호 백자매병 유리구슬 장신구 명정 등 모두 20종 92점.깊이 2m70㎝ 지점의 무덤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외관위에 두께 15㎝의 회판과 30㎝ 정도의 숯을 깔고 매장돼 잘 보존된 상태였다. 영주시는 이들 유물을 전문가들에게 의뢰,과학적인 보존방법을 강구한 뒤 학계와 문화재 전문위원 등의 고증을 거쳐 문화재 지정을 정부에 신청하기로 했다.아울러 순흥역사문화단지내에 건립될 소수박물관에 전시,99년부터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출토유물을 살펴본 문화재 전문위원과 학계 전문가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과학적인 보존대책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학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관속 장지에 먹으로 쓴 제문과 만사,당시의 수의와 의류 등으로 4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또 출토된 제문은 당시의 형조판서 등 관직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연명으로 기록,보통의 제문이 각자가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의 제문을 쓴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는 “피장자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관상태가 좋은 제문과 만사가 발견돼 피장자와 당시 사림(사림)들의 학맥·교류관계,필적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윤용진 전 경북대 교수(고고인류학)도 “지난 91년 5월 경북 칠곡군 북삼면 인평리 야산 벽진 이씨 분묘에서 수습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선조 18년(1585년)에 사망한 피장자(신원이 밝혀지지 않음) 묘관에서 만장 12점과 수의와 의류 등 16점이 출토된 것이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묘관내부에서 제문과 만사가 같이 출토된 사례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제문과 만사의 경우 대부분 탈상시까지 빈소에 전시되거나 비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분묘에서 제문과 만사 특히 제문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16세기 전반기 조선 중종(1520년대)때의 복식이 대량출토 된 것도 복식사 연구에 소중한 고증자료라는 평가다. 김영숙 문화재 전문위원은 “옷감이 교직물(두가지 이상의 실로 섞어서 짬)을 사용,칠보무늬 등 문양이 특이하고 저고리가 전단후장(앞은 짧고 뒤는 긴 옷)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며 “절대 부족한 조선 전기의 복식연구를 위한 귀중한 고증자료”라고 말했다.
  • 애 진출 서양음악 프로모터 고전

    ◎클래식·재즈·하드록 팝 청중외면 흥행실패/애 배경 오페라대작 ‘아이다’도 객식구 취급 고대문명의 나라 이집트에 진출한 서양음악 프로모션업체들이 청중들의 외면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위대한 고대유산을 지닌 이집트인들의 ‘자부심’탓일까. 이집트인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클래식 음악뿐아니라 재즈,그리고 하드록 팝에 이르기까지 서양음악 전반에 대해서다. ○죽은 여 가수 음률 선호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지오세페 베르디의 대작 오페라 ‘아이다’도 마찬가지다.1871년 수에즈운하 개통과 카이로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으로 이집트 정부가 오페라의 거장 작곡가 이탈리아의 베르디에게 위촉해 만든 ‘아이다’는 광대한 스케일과 이집트 고대 역사를 장엄하게 읽어낸 서사물로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수작 오페라.서양 뿐아니라 우리나라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의 대형 오페라단들이 거액을 들여 한번쯤 무대에 올리고 싶어하는 작품.그러나 정작 고향 이집트에선 여전히 객식구 취급을 받고 있다. 지난 12일 전설적인 고대 이집트왕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 75주년을 기념해 이집트 남부도시 룩소의 핫셉수트 여왕 신전 특설무대에 올려진 아이다 공연도 신전 자체의 극적인 무대효과에도 불구,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순회공연 때마다 수십만 단위의 관중을 모으는 세계적인 팝의 왕 마이클 잭슨도 이곳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이집트 젊은이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집트의 최고 여가수 옴 칼숨의 늘쩍지근하고 우울한 음률을 더 즐기고 있다. 하킴이라는 가수를 발굴,최근 이집트에서 ‘잘 나가는’인기 가수로 키워낸 프로듀서 하니 사베트씨는 ‘어쩔수 없는 유전적인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한다.84년까지 서양음악 제작을 하다 채산성이 없어 아랍음악으로 돌아섰다는 사베트씨는 “이집트 젊은이들은 하드록이나 테크노 리듬보다는 동양적인 1과2분의1 박자 리듬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전통 아랍리듬에 재즈를 소화한 작곡자 파티 살라마씨는 “이집트인들이 다른 음악을 감상할 줄 모르는게 아니다”면서 그러나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음악을 어떻게 좋아하겠느냐며 반문한다.그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이집트 음반시장에 내놓으려 노력하다 결국 포기하고 스위스 음반회사와 계약을 체결,타깃을 유럽으로 돌렸다고 푸념했다. ○마이클 잭슨도 실패 클래식음악의 경우 연주회에서 청중이 객석의 반만 차면 성공으로 인식되는데 이나마도 초대관객에 의지한다.그 자신 테너이자 오페라하우스의 고문인 하산 카미씨는 클래식음악의 경우 카이로에서 오페라가 처음공연된 1869년 이후 나세르 정권이 들어선 1952년까지 100여년 동안 이집트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친숙해졌었다고 말한다.나세르의 혁명 이후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던 돈많은 유태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떠났고 그 뒤로는 서양 클래식 음악은 이집트인들로부터 멀어졌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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