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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 사망 60여 무명용사 하천변 가매장 48년 방치

    6·25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했다 숨진 60여명의 무명용사들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천변 묘지에 가매장된 채 50년 가까이 방치되고 있어 적절한 조치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21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주민들에 따르면 이 집단 무덤은 대천동 강정초등학교 부근 하천변인 ‘난쟁이도’ 일대에 비문도 연고자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이곳에 묻힌 무명용사들은 17∼40세의 나이로 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해 북한 인민군과 싸우다 1·4후퇴 당시 제주도까지 내려온 후 강정초등학교에 수용됐다가 기아와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서귀포시는 이들의 구체적인 신원을 모른다는 이유로 충혼 묘지로 이장 등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매년 한차례 벌초나 주변환경 정비에 그치고 있다.제주 l 金榮洲 chejukyj@
  • 문화비평가 진중권씨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우익인사 비판서 눈길/박정희 추종자에게 풍자와 독설 대한민국 우익 개구리의 배를 해부했더니 썩은 내장들이 드러났다.국수주의,군국주의,전체주의,몽골 인종주의,아류 제국주의,변태적 낭만주의…. 일본에서 들여온 썩은 폐기물이다. 문화비평가 진중권씨가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소설가 이문열,이인화씨,종교인 박홍씨 등 평소 글이나 주장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해온 추종자들에게 풍자와 독설을 퍼부었다.책 제목도 조씨가 박정희에 대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맞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전2권·개마고원 펴냄)라고 지었다. 진씨는 우익인사들의 주장은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 자본주의로 덧칠되지만 실상을 벗겨보면 전체주의에 맥이 닿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이인화의 인간의 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조갑제의 박정희 철학,개발독재론 등은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일제 군국주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진씨는 이들의 글이나 주장을 인용,우익들을 논박한다.이들의 논리로 이들의논리를 반박하는 이른바 텍스트 해체 전법이다. 이 충무공 정신은 화랑도의 이조적 중흥이다. 박정희의 말이다.이후 전국국민학교 교정에는 구리로 만든 이순신과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무더기로 세워졌다.진씨는 이승복 동상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광신의 상징이라면 이순신은 박정희가 민족의 태양이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국가주의 이념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조선일보가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퍼붓고 있는 이념공세도 안보 상업주의에 기초한 수구세력의 결집과 김대중 정권의 개혁에 발목을 잡기 위해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며 조선일보와 일부 극우세력의 사상검증 요구는 명백한 ‘위헌’이며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 조치훈 기사의 1,000승 위업에 부쳐(박갑천 칼럼)

    일본에서 활약중인 조치훈 기사가 1,000승 고지에 올라선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네번째 기록이지만 프로생활 30년만의 이 위업은 가장 젊은 나이와 짧은 시일에 세웠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천’이란 큰숫자다.한데도 일상생활에서 특히 화폐단위 따위와 비겨지면서 대단찮게 여겨지는 경향이다.그래서 말인데 어린날 할머니 손을 잡고 한듬절(해남 대흥사)의 천불전(千佛殿) 본 기억이 새롭다.천개불상이 어찌 그리 많다고 느껴지던 것인고.하나,둘…하고 세어나갈때의 천이란 크고도 많은 숫자다. 그런 까닭으로 천은 숫자적 개념외에 크고 많다는 뜻을 갖는게 세계적 공통현상이다.고려가요 ‘동동’(動動)에서 “즈믄 □長存 □샬藥이라 받□노이다”하는 그 ‘즈믄□’는 ‘천년’이면서 ‘오래오래’라는 뜻을 지닌것.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임금님의 대는 천대(千代)팔천대(八千代)…”하는 그 천도 ‘영원’을 뜻한다 할것이고.한자에서 천세(千歲)천금(千金)등 천자 든 단어들이 거의 그러하다.영어 사우전드(thousand),독일어 타우젠트(Tausend),프랑스어 밀(mille) 등도 하나같이 천이면서 많다는 뜻을 함께 지닌다. 趙기사가 999승을 올린것이 10월1일이고 1,000승에 오른것이 11월5일이니 한달 닷새만이다.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역사에서 전설적무장 벤케이(辨慶)얘기가 떠오른다.그가 1,000자루 칼을 모으겠다는 소원을 세우고서 밤마다 고조(五條) 다리아래 지켜섰다가 지나가는 사무라이들의 칼을 뺏는다.999자루를 뺏고서 마지막 한자루만 채우면 되는날 밤에 만나는 사람이 우시와카마루(牛若丸)라는 소년이었다. 우시와카마루는 바로 미나모토노요시쓰네(源義經)의 아명.당대제일의 무술가 벤케이도 이 소년의 칼을 못뺏고 그의 부하가 된다.그리고 나중에 그 주군을 위해 온몸에 고슴도치같이 화살을 맞고 죽는다.999에서 단위가 달라지는 1,000으로 건너뛰기 어려움을 말해주는 일화라고도 하겠다.구마모토켄(熊本縣)의 한속신도 그런 유형이라 할까.사냥개가 사냥감 1,000마리를 잡고나면 주인한테 달려든다 하여 999마리째에서 죽이고 무덤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며칠전 메이진(名人)전을 방어해 냈으니 ‘3년연속 대삼관’ 기록까지 세우는 趙기사.그가 세워나가는 새기록들 지켜보는 재미가 쑬쑬하다.
  • ‘아름다운 시절’ 21일 관객과 조우

    ◎전후 민초들 고달픈 삶 영상화/제작기간 11년·시나리오 수정 25회/도쿄영화제 금상 수상 등 숱한 화제 총 제작기간 11년,시나리오 수정 25회,세계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현장리허설,60여 국제영화제의 초청…. 여러가지 화제를 뿌리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이광모 감독의 첫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 21일 드디어 관객과 만난다.최근 도쿄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아 다시 한번 세계적인 명성을 입증한 ‘아름다운 시절’은 그야말로 작가적 집념으로 똘똘 뭉친,우리 영화계에서 드문 작가주의 영화이다. 6·25의 상흔이 곳곳에 남은 산골마을.미군장교와 사귀는 큰딸 영숙 덕에 성민(이인)의 아버지 최씨(안성기)는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는다.최씨 집에 세든 창희네의 안성댁(배유정)은 전쟁통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며 힘겨운 삶을 꾸려간다.최씨의 주선으로 미군의 빨래일을 하게 된 안성댁은 강변에 널어놓은 빨래를 도둑맞고 변상할 길이 없자 미군의 정사 요구에 응한다.이를 본 창희(김정우)는 방아간에 불을 지른 뒤 달아나고,미군부대 물건을 빼돌리던 최씨는 온몸에 빨간 페인트칠을 당한채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구구절절 얘기를 풀어갈 수 있을텐테도 영화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카메라는 답답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등장인물은 두 아역 배우와 최씨,성민어머니(송옥숙)정도.영화의 한축을 이루는 안성댁조차 한번도 클로즈업되지 않는다.그 악착같은 ‘거리두기’는 빨래를 잃어버리고 강변에 망연히 서 있는 안성댁을 하나의 점으로 표현하고,창희의 무덤가에서 흐느끼는 그녀를 그저 원경으로 잡는데 만족한다. 18차례의 색보정 끝에 만들어냈다는,이끼 낀듯한 청동색과 황갈색의 산하는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영화속 배경은 결코 행복했다거나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다.그런데 감독은 왜 그때를 굳이 ‘아름다운 시절’이라 부른 걸까.“그 시대가 아름다웠던 게 아니라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낸 사람들의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감독이 의도를 어느정도 잘 드러냈는지 그 평가는 이제 관객의 몫이다.
  • 위기의 한국교회/윤대골 목사(기고)

    ◎군사문화속에서 몸집만 키워 ‘함께하는 교회’ 기능 상실/안으로부터 개혁 이뤄 지역사회에 봉사 다해야 한국교회가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면,한국교회의 현 상태를 운명 직전의 경우와 같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 필자의 진단으로는 한국교회의 현재를 그 이상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믿음과 삶의 기본지침)로 하는 신앙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늘의 자리를 내놓으신 분 아닌가? 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를 내놓으셨나? 버림받은 생명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하나가 되어 죽음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생들과 더불어 함께 일어서기 위함이셨다. 그뿐만인가? 모든 것을 다 내주시기까지 가난해지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까지 주셨다. 예수의 ‘내주심’의 삶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내주신 몸의 자리,무덤의 소유도 거부하셨다. 그리고 전무(全無)의 자리에 드셨다. 성서는 그것을 ‘부활’이라 한다. 한국교회,세상을 위해 무엇을주었나? 무엇을 버렸나? 한국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가? 하늘이 주는 도리로 감히 묻는다. 한국교회는 부활의 종교공동체인가? 필자가 한국교회의 부활을 크게 의심하는 큰 이유중 하나가 이미 자체조절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버린 ‘대형화’에 있다. 세계 50대교회의 꼭 절반이 한국에 있다. 한국의 대교회는 자신들이 알았거나 몰랐거나,지난 40여년간 소위 ‘조국 근대화’를 존립철학으로 했던 군사통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루어져온 산물이다. 그 주장이 그렇고,그 용어가 그렇고,그 사고가 그렇다. 지난 40년동안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무력통치를 감행해온 집단과 한국 대교회론자들은 그 궤를 같이해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세력이 꼭같이 수(數)를 지상으로 하는 ‘매머니즘’을 신앙으로 자리잡게 해버렸다. 그래도 한국교회가 죽을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지은 죄로 운명의 전야에 이르러 있다 해도,하늘이 한국교회에 내린 소명이 있는 한 한국교회는 살아야 한다.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살 길을 말한다. 첫째,원 예수교회의 회복이다. 성령께서 시작한 교회는 ‘함께’하는 교회였다. 다른 것은 다 후에 하더라도 목사들 기본급료의 호봉제 정도는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날 같이 목사되었는데,어느 목사는 500만원이나 받고 어느 목사는 50만원도 못 받는다면 그걸 어찌,교회는 그만두고 사람세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둘째,대교회를 해체해 지역에 봉사하는 건강한 중소교회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서울은 나의 교구’라는 따위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극동교회가 극서지역의,북쪽교회가 남쪽교회의 교인을 실어나르는 짓은 이제는 더 이상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선교행위가 아니다. 지역사회를 책임지는 교회들로 선교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셋째,인적 청산을 해야 한다. 세상의 구석구석에 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다. 하늘의 뜻이다. 세상의 누구도 역사가 가는 길은 막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개혁의 바람막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것이 소위 대교회라는 것이다. 개혁은 안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력에 의한 징벌을 당하게 될 것 아닌가? 군부통치 40년동안 끊임없이 군부세력을 등에 엎고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해온 무리들은 겸손하게 이제 막후로 물러나야 한다. 새 술을 더 이상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 梨大의 ‘김활란賞’ 밀어붙이기/李志運 기자·사회팀(오늘의 눈)

    ‘회(灰)칠한 무덤’은 거짓의 상징이다.무덤을 치장하기 위해 하얀 횟가루를 뿌려대도 무덤은 무덤일 뿐이다. 지난 3일 이화여대 학생문화관에서 열린 ‘金活蘭상 제정 설명회’가 그랬다.상 제정을 반대하는 학교 안팎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자리였지만 무덤에 회칠하려는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화여대측은 지난달 14일 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뒤부터 이같은 작업을 계속해왔다. 지난달 28일에는 총학생회 간부들과 간담회를 열었다.金박사의 일대기를 주제로 70여장의 사진과 업적 등을 실어 ‘여성의 빛,김활란’이란 99년판 포토 다이어리도 만들었다.학교측은 다이어리와 함께 金박사의 자서전을 동문과 사회지도층에 보낼 계획이다. 설명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됐다. 동문과 교수·학생 2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상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金모 전 교수는 “지금은 친일이니 애국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 이화인이 하나가 되어 기쁘게 상을 제정할 때”라고 운을 뗀 뒤 “金박사가 친미(親美)인사일지언정 절대 친일인사는 아니었다”면서 “당시의 상황도 모르면서 친일논쟁을 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총동창회의 한 인사는 “당시 어쩔 수 없었던 金박사의 고뇌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金박사를 친일파로 단정한 학생들의 행동을 철없는 짓이라고 규정했다.행정학과 2학년의 한 학생은 “金박사가 만일 친일을 거부하고 은둔했다면 지금의 이화가 있었겠느냐”고 말해 여러 교수들의 박수를 받았다.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꼽히는 春園 李光洙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친일행위를 했을 뿐 사실상 친일인사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설명회의 분위기는 ‘친일 불가피론’으로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여성지도자’,‘선각자’ 등의 호칭으로나,어떤 논리로 치장을 해도 친일행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는 일.‘횟가루를 뿌리려는’ 학교측의 노력이 차라리 안쓰러워 보였다.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日서 한반도 이주민 취락지 발견

    ◎후쿠오카현 고등학교서 3∼4세기경 조성 추정/부엌 갖춘 무덤형 거주지 【도쿄=黃性淇 특파원】 일본 후쿠오카(福岡)시 사와라(早良)구의 한 고등학교 건물 개축현장에서 3∼4세기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의 취락지와 유물들이 발굴됐다고 현지 교육위원회가 14일 밝혔다. 슈유칸(修猷館)고교 구내의 니시진 마치(西新町) 유적지에서 발굴된 이 취락지는 3세기 초에서 4세기 말까지의 무덤 형태 거주지로 특징지을 수 있는 고분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부터 현장에서 유물 발굴작업을 벌여온 교육위원회 관계자들은 수혈(堅穴)식 거주지 40기가 발굴됐으며,이중 5개에서는 폭 60㎝ 크기의 화덕을 갖춘 부엌터도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고기를 잡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그물과 5∼10㎝ 크기의 돌추,10∼15㎝ 높이에 직경 10㎝ 크기의 토기 100여점도 함께 발굴됐다.
  • 韓­埃 수교 3주년기념 ‘유적대탐험전’

    ◎파라오와 함께 고대이집트 여행/미라 마스크·관 등 진품유물 150점 전시/투탄카멘 무덤 등 재현/발굴현장 온듯 생생 한·이집트 수교 3주년 및 서울·카이로 자매결연을 기념하는 ‘이집트 유적대탐험전’이 내년 1월5일까지 서울 여의도 63빌딩 1층 특별전시장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는 기존의 쇼 케이스에 진열된 유물을 감상하는 평면적인 전시에서 탈피,관람객들이 탐사단 일원으로 발굴현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파크형 전시회로 꾸며져 있다. 이집트 고대유적의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진품유물 150점을 비롯해 카이로박물관측이 공인해 현지에서 제작한 투탄카문왕의 황금마스크 및 대표적인 보물,람세스 2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의 무덤벽화,람세스 2세의 초대형 석상과 미라 등이 공개된다. 진품 유물들로는 죽은 자가 저 세상으로 가는 길에 심부름하라고 같이 묻었던 샤브티,미라의 얼굴에 씌웠던 마스크와 관,살아있는 신상,영생의 상징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신구와 램프 등 일상용품,그리고 콥트시대의 직물 등이포함돼 있다. 피라미드로 이루어진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발굴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 투탄카멘왕의 무덤이 나타난다. 내부는 주제별로 ‘비운의 파라오 투탄카멘왕의 무덤’‘투탄카멘과 함께 잠들었던 보물’‘절대자 파라오의 삶’‘고대 이집트신들과 만남’‘영생의 문을 여는 열쇠,미라의 비밀’‘네페르타리왕비의 무덤여행’등이 이어진다. ‘이집트보석전’‘의상전’등 이벤트도 열리며 피라미드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를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피라미드 파워실험장’이 펼쳐진다. 또 다양한 ‘이집트 풍물시장’도 펼쳐진다. 전시회는 평일 오전 11시부터 밤 10시,주말 및 공휴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입장료는 성인 8천원이며 노인과 소인은 5천원이다.(02)789­5554
  • 한가위는 오는데…/沈雨晟 공주민속극박물관장(서울광장)

    90노인 아버님께선 뉴스시간이 괴롭다 하신다. 내 나라 남의 나라 할 것 없이 정치·경제가 엉망이다 보니 인심이 흉흉하여 별의별 망측한 사건이 줄을 잇고 있어 차라리 보지 않으니만 못하다 하신다. 어쩌다 이 꼴이 되고 말았을까? 앞이 막막한 참에 요 며칠 전부터는 한가위 명절이 다가옴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다. 지난 여름 그 지루했던 장마로 해서 벼농사가 엉망일 것이라 했다. 그런데 초가을 더위가 여름을 무색케 하여 평년작은 될 것이라 하니 하느님 그저 황공무지로소이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실업자가 쏟아지고,되는 사업이 없어 파산을 거듭하는 판에 무더운 가을 햇볕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한가위를 흔히 추석이라 하지만 본디 우리 말인 한가위가 한결 정겹다. 그 한가위 풍속을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살펴보자. ○수확에 감사하는 날 우리 민족의 3대 명절로 ‘설’‘단오’‘한가위’를 드는데 설이 시작의 의례이고,단오가 풍요의 기원이라면 한가위는 수확에 감사하는 날이다. 땀흘린보람으로 오곡백과를 넉넉히 거두면서 그 기쁨을 이웃과 함께 했던 따사로운 한가위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오려 송편에 토란국,햇과일로 차려진 차례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천지신명과 조상께 먼저 올린 천신(薦新)의 마음씨가 더욱 그러하다. 열을 지어 산을 오르내리는 성묘객들이 높푸른 가을 하늘아래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니 산소에서 올리는 차례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름 모를 가을꽃이 화사한 산소에 차례상을 마련하면 먼저 고추잠자리가 날아들고,아이들이 거기에 대고 절을 해댔다. 음복(飮福)도 예의라 했으니 조상께서 흠향(歆饗)하신 음식은 자손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법,으례 산소 앞에서 가족잔치가 벌어졌다. 남은 음식을 정갈히 싸들고 돌아오는 길목에 잡초 우거진 주인 잃은 무덤이 있으면 그대로 지나치질 않았다. 송편과 과일 몇 개를 놓아주었던 넉넉한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그립다. ○‘거북놀이’의 이웃사랑 ‘반기 목판’을 아시는가. 옛날에는 제사나 잔치 끝에 이웃에 음식을 담아 돌리기 위한 목판을 마을 가구 수 만큼씩 마련하는 것이 필수였다. 사방 한뼘 크기의 이 나무접시가 명절이면 매우 바빴다. ‘반기’란 음식을 이웃에 돌리는 것인데,명절에 음식 없는 집이 없으니 음식이라기 보다 정(情)이 오가는 것이었다. 한가위 무렵의 ‘거북놀이’는 수숫대로 엮은 거북이를 앞세워 추념을 해서는 어려운 이웃에 아무도 모르게 훌쩍 떡쌀을 넘겨줬던 나눔의 놀이였는데 이제는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누가 얼마를 내놨다는 식의 이웃돕기가 아닌,거북놀이의 이웃 사랑이 올 한가위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되살아났으면 싶다.
  • 3당 총무 긴급 紙上토론

    ◎정국파행 원인­“야 당리당략­편파수사 탓”/정국해법­“무조건 등원­야당파괴 중단”/국회정상화 시점­“추석전후로” 의견 모아져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 파행정국의 원인과 해법을 국민회의 韓和甲,자민련 具天書,한나라당 朴熺太 총무 등 여야 3당 총무의 긴급 지상토론으로 짚어본다. ▷정국파행 원인◁ ▲韓총무=한나라당이 국민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국회를 당리당략적으로 이용,정국을 꼬이게 하고 있다. ▲具총무=한나라당이 과거 여소야대적 행태를 지속,당리적 대응으로 일관해온 것이 정국경색의 원인이다. ▲朴총무=야당파괴를 목적으로 한 야당의원 빼가기와 야당에 대한 편파·표적·보복 사정을 펴고 있는 정부·여당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정치권 사정◁ ▲韓총무=사정주체는 검찰이다. 여당은 개혁차원에서 하고 있는 정치권 사정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있다. ▲具총무=개혁이 필요하고 부패구조 청산이 불가피하다. 다만 파행국회를 조기 정상화시키기 위해 이미 조사되고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사정을 평상체제로 전환하는것도 필요하다. ▲朴총무=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이렇게 철저히 정치적 의도하에 사정이 진행된 적이 없었다. 야당만이 대상인 사정,정계개편 수단으로서의 사정,대통령에게 저항했거나 경쟁했던 인물에 대한 사정이 현재 진행되고 있어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됐다. ▷정국 해법◁ ▲韓총무=정치권 사정과 국회 등원은 별개다. 국세청 불법 정치자금 사건은 범법행위로 정치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나라당은 전제조건 없이 등원,영수회담 등 현안을 논의해야 한다. 대화를 위해 TV토론이 필요하다. ▲具총무=사정과 등원은 별개 사안이므로 분리처리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야당도 두가지 문제를 연계시킴으로써 당리만 챙기려는 행태를 보여왔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의무를 저버려선 안된다. 3당 총무간 공개토론회를 갖는 것도 한 방안이다. ▲朴총무=정부·여당에서 야당의원 빼가기와 편파·표적·보복 사정을 중단하면 정국은 간단히 풀린다. 지금처럼 야당의원들에 대한 정치목적의 사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의원들이 제대로 국정현안을 다룰수 없다. ▷국회 정상화 시점◁ ▲韓총무=한나라당이 서울집회를 강행한 만큼 주말까지 냉각기가 필요하다. 장외로 나가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태에서 협상을 할 수는 없다. ▲具총무=야당도 장회집회 등을 통해 입장을 충분히 국민들에게 알린 상황이고 여당도 더 이상 국정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추석을 전후해 정상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朴총무=사정을 빨리 끝내겠다는 대통령의 언명이 빨리 구체화되어 국회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가능하다면 추석 전이라도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웃음보따리를 안겨야 한다. ▷상대에 대한 요구◁ ▲韓총무=민생법안에 대한 심의를 위해 단독국회는 불가피하다. 한나라당은 ‘세풍’사건 등을 피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국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具총무=국가가 어려운 마당에 국회를 저버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국민들은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朴총무=단독국회는 국회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무덤을 파는 행위다. 여당은 큰 가슴으로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 죽어서도 마음 편한 나라/서해성 소설가(굄돌)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무덤이 단지 문화적인 행태를 갖추어 주검을 폐기하는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전통적으로 무덤을 유택,죽은 이가 사는 영혼의 집이라고 한 건 죽음을 삶의 연장선에 놓고 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평민들의 무덤은 거의가 살던 집과 그닥 머잖아서 망자의 숨결이 현실에서 생생히 숨쉴 수 있었으며,잘 닦인 터는 인근아이들의 놀이공간이기도 했다.대개의 무덤 모양은 마치 산모가 아이를 가진 배 형상이어서 새로운 생명이나 가치를 잉태하는 대지를 상징한 듯 보이기도 한다.알다시피 대지는 실로 모든 생명의 어머니다. 후손들이 여기서 무언가 발원되기를 비는 일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게다가 육탈을 촉진하는 약산성의 이 나라 땅은 알맞게 빠른 시신의 부패를 명당자리의 중요한 요소로보게끔 만들었다. 그러므로 대단위 묘지가 들어설 일도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가로막을일도 없었다. 전적으로 이는 산업사회가 거대도시를 부추기면서 파생시킨 산물일 따름이다.서구기본사회의 가치는 이제 어쩌면 마지막으로 전통적인영면의 가치마저 수정하기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땅을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묘지가 생산은커녕 점유를 넘어 잠식으로만 보이게 된게 되레 너무 늦은 발상이 아닌가 싶다.효율적 운운이란 정확하게 말해 근본적으로 고정불변의 것인 대지를 좀더 과학적으로 착취하겠다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효율을 앞세운 가치체계가 대지에 저지른 문명의 범죄에 관해 언급하는 건 차라리 구차하리라.사실 제 아무리 묘지가 많기로서니 골프장보다 더할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 생을 간난한 처지로 살다가는 사람들이 후대에라도 발복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좋은 묘 자리를 찾아온 일마저 탓할 수는 없으리라.매장문화의 방향이 바뀌기 위해서는 명당도 매장도 필요 없는 사회가 먼저 요구된다고 말해야 옳지 않겠는냐는 뜻이다.추석 밑에,죽어서도 마음이 편한 나라를 부질없이 꿈꾸어 본다.
  • 姜元龍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목사(국난극복의 지혜를 듣는다)

    ◎회개하라 정치인이여/IMF 검은 태풍속 한심한 잇속 다툼/국민분노 폭발 직전/반성 모습 보여야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처음 메시지는 ‘회개하라’였다.왜냐하면 지옥같은 역사 속에 임하여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어온 모든 분야에 먼저 대전환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과 특히 기층문화 속에는 21세기의 세계안에서 큰 빛을 끌어낼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회개(패러다임의 전환)없이는 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오래전에 베네딕트란 사람은 동양문화는 서구의 죄책문화 대신 수치문화(Shame Culture)라고 했다. 간단한 예를 들면 히틀러의 야수같은 정치가 붕괴된 후 독일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회개운동을 전개했다.많은 예가 있지만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 후 학살당한 유대인 무덤에 엎드려 통곡을 했었다.이런 회개의 힘이 전후 독일을 폐허에서 구해내고 큰 피해를 주었던 유럽국가들과의 관계도 정상화될 수 있었다.10월7일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데 일본은 독일이 전후에 보여준 이런회개를 전혀 한 일이 없다.문제는 한·일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21세기는 5,000년간 축적된 우리의 잠재능력을 세계사 속에서 꽃피우느냐,아니면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하느냐의 기로다.가장 시급한 것은 회개문화의 형성이다. 해방후 역사만 보아도 우리는 일제의 유산을 회개를 통하여 청산하지 못한 채 정부를 세웠고 6·25를 겪으면서 미·소 강대국이 덮어 씌운 국토와 민족분단정책을 그대로 수용한 잘못도 회개하지 못했다. 4·19 학생의거에서 회개의 기회를 가졌으나 민주당 정부는 추잡한 신·구파 싸움만 하다가 군사혁명을 유발했으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까지도 회개한 일이 없다.박정희정권 하에서 19년동안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정경유착으로 돈과 권력을 숭배해온 과오를 회개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대 최고의 국가원수로 치켜세우기까지 하고 있다. 문민정부 하에서 외채 400억달러가 1,650억달러가 되어 IMF 사태를 초래했다고 하는데그런 기막힌 역사를 만들어온 장본인들이 회개의 모습은 고사하고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인데도 구태의연한 추잡한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새로운 국민정부는 길고 긴 야당생활로 불가피하게 개미군단같은 조직과 저항을 해오다가 집권당이 되었으니 과감한 방향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개혁으로 방향전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이번에 ‘제2의 건국’도 대한민국이란 배가 도착해야 할 항구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는 과거에 비해 훨씬 새로운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수단은 될지언정 목표가 될 수는 없다.우리의 목표를 뚜렷하게 하고 그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바꾸어야 한다.IMF사태는 우리의 항로에 태풍이 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이 태풍권을 벗어나기까지는 내 보따리 찾는 싸움을 하지 말고 모든 힘을 하루빨리 이 태풍권을 벗어나는 일에 모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태풍권을 벗어나면 우리가 도착할 항구의 모습,즉 민족의 비전을 뚜렷이 제시해야 한다.그리고 지금까지 내려온 권력과 금력이 숭배받는 사회의 계승이 아니라 권력도,경제도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고 정치권 경제권만이 아니고 각계각층에 걸쳐 과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 ‘메밀꽃 필 무렵’의 달밤에 移葬이라(박갑천 칼럼)

    유명한 시나 소설 등에 나오는 고장은 사람들 기억속에 깊이 자리잡게 된다.노산 이은상의 ‘가고파’가 마산(馬山) 앞바다를 가슴마다에 한폭의 그림으로서 심어놓은 것과 같이.이름모를 경상도땅 평사리도 박경리의 로 해서 전통사회 마을의 전형으로 새겨졌다. 스페인북부 바스크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는 어떤가.스페인내전중인 1937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공군이 인구1만에 지나지않는 이 소도시를 폭격한다.무방비 도시를 바수지른 무차별폭격이라는 데서 세계의 비난여론이 들끓었지만 전쟁중의 비인도적 살상행위야 흔히 있어온일.한데도 이 비극의 도시가 유독 세계인의 가슴속으로 파고든건 피카소의 대작‘게르니카’의 호소력 때문이었다.이 작품이 2차대전후에는 반파시즘운동의 상징으로,동서냉전중에는 평화의 상징으로 되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강원도 산골의 봉평이라는 곳.그 외진 고장이 오늘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것은 可山 李孝石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이다.“…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묘사하면서 가슴가슴에 서정을 깔아놓는다.지금이야 어찌가산이 살던때의 메밀꽃밭을 볼수있다 하랴.하건만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80리길’은 상기도 메밀꽃 필 무렵이면 하얀 들판일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향기높은 작품의 여운이란 그런 힘을 갖는 모양이다. 이효석하면 메밀꽃,메밀꽃하면 봉평이 떠오르는건 한국인의 자연스런 감정이다.한데 요 얼마전 이효석무덤의 이장문제가 세상에 불거져 나오면서 그 감정 위에 물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실랑이끝에 뜻을 못이룬 유족측에서는 법적으로 대응할 요량이라 하더니 8∼9일밤 사이 감쪽같이 파주의 실향민묘지로 이장해버렸다.열여드레의 이울어가는 달이 걸려있던 밤.바람결따라 밀려온 메밀꽃내음이 이 작업을 지켜봤던 것이리라.가산의 영혼은 마치 ‘도굴’이라도 해가는듯한 이장행렬을 따라갔던 것일까. 그동안 유족측 심기를 편찮게 해온것만은 사실이다.묘역을 두번이나 옮긴 것하며 기념사업 주도권다툼 등등.비록 그렇다해도 무덤을 굳이 옮겨야만 했을까 싶어지는 마음.지하의 가산이 달빛아래 하얀 봉평메밀꽃을 즐기는듯해서 더욱 그렇다.씁쓸해진다.하지만 묘가 없다하여 평창고을에서 이효석의 문학정신까지 스러지는건 아닐게다.
  • 리게티 오페라‘그랑 마카버’(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10·끝)

    ◎죽음의 추문을 씻는 방법/좋은 이들 모두 모르리 자신의 시간 끝나는지/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모든 걸 숨기는 오페라/육체와 죽음의 추문들 씻어내는 현대의 제의/미세 다성음악의 원조 인류 비극 자신에 육화 1.‘대기괴’(大奇怪)쯤으로 번역되는 리게티 오페라 ‘그랑 마카버’는 이런 6중창으로 끝맺고 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좋은 사람들 모두/ 아무도 모르지 자신의 시간이 언제 그치는 지를./그리고 그때가 오면 그냥 그렇게 둬…./안녕,그때까지는…명랑하게 살 것’ 중세에 ‘기괴한 춤’이라는 소재가 있었다.아릿따운 소녀를 끔찍한 죽음의 몰골이 껴안는 형상이다.슈베르트 ‘죽음과 소녀’는 그것을 낭만주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결과다.그리고 케테 콜비츠 판화 ‘딸을 위해 죽음과 싸우는 어머니’는 그 ‘사회주의적 변형’이다.그런 기괴,더군다나 ‘대기괴’의 마지막에 이 무슨 상투적 권하는 말씀? 아니,그 전에,오페라의 줄거리는 정말 말도 안되는 추문의 극치다.모든 것이 괴상망칙한 브뤼겔의 나라.보통사람 피에트가 모국을예찬하면,연인 미란다와 아만도가 합류한다.둘은 성교(性交)중이고 그치지않는 오르가즘을 열망한다.네크로차르(그가 ‘대기괴’이다)가 세상을 끝장내겠다고 선포하고 피에트를 조수로 부린다.두 연인의 성교는 무덤 속으로 이어진다. 장면이 바뀌면 한 천문학자와 부인이 더 열렬하게,그리고 변태적인 성교를 벌이고 있다.남편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아내는 비너스에게 ‘더 센’ 남자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그때 대기괴가 나타나 그녀를 과격한 사랑으로 죽여버린다. 대기괴,피에트,천문학자 세사람이 이제 청년 군주 고고의 궁정으로 향한다.궁정에선 흰 장관과 검은 장관이 서로 앙숙이라 골치가 아프다.비밀경찰 총수 게포포가 위협을 알리고 ‘대기괴’가 등장,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2.음악은 더 뒤죽박죽이다.‘진노의 날’ 선율,몬테 베르디 ‘포페아의 대관식’,베르디 ‘팔스타프’,로시니 ‘세빌랴 이발사’,심지어 베토벤 ‘영웅교향곡’까지 동원되면서 하이 소프라노의 괴성­절규에 찢기고 베이스의 신음­무게에 짖눌린다.그리고 크게왜곡되고 악용된다.값싼 춤음악과 진부한 팡파르들이 세계의 종말에 달한다.그 결말에서 위의,권고의 말씀이라.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다가오므로,그게 언제인지 알 수조차 없으므로,그때 까지 열락에 몸을 담그라는 뜻? 아니다.리게티는 직접 이렇게 말하고 있다.두려움이 전혀없는 삶,쾌락에 전적으로 바쳐진 삶,그것은 사실 심각하게 슬픈 삶이다….그렇다면? 과도한 음탕이 과도한 죽음을 낳는다.거꾸로도 마찬가지다.즉,죽음은 음탕하고 음탕은 죽음이다.‘그랑 마카버’의 이,매우 우스꽝스러운 깨달음은 음악,특히 오페라음악에 대한 역사적이고 현대적,그러므로 비극적인 통찰의 결과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아니 음악의 아름다운 의상을 듣는다.그렇게 ‘음악속’이 들리거나,보이지 않는다.오페라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모든 것을 숨긴다.그렇게 이야기의 ‘음악속’이 들리거나,보이지 않는다.왜냐하면 음악은 사랑과 교접사이를 흐르면서 교접을 선율로,미­육체화(美­肉體化)하고 그것을 의상화한다.그러나,본질은?혹 그 모든 것은 육체의,그리고,그러므로 죽음의 추문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 아니었을까? 3.쇤베르크는 음악 의상의 조화를 찢어버렸다.그 깨진 거울 뒤로,음악이전의,성욕(性慾)의 추악한 전모가 언뜻언뜻 보인다.그렇다.‘그랑 마카버’는 추문의 음악화를 통해 음악의 추문을,그렇게 육체와 죽음의 추문을 씻어내려는 현대 제의(祭儀)에 다름 아니다.이 제의 속에서 번제물 역할을 하는 것은 서양음악사 전체이다. 서양음악사,아니 역사는 그렇게 조롱받으며 스스로의 추문을 정화(淨化)할 밖에 없다.쇤베르크 이래 모든 현대음악은 폭로 혹은 자기파멸로만 치달았다.쇤베르크의 기법을 이어 받았지만,쇤베르크가 염원한,파경이후 새로운 음악적 총체는 점점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왜냐하면,인류는 지식을 넓혀갔지만,동시에 자신의 악마성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그러므로,음악이 음악을,음악적으로,번제물 삼는다.리게티는 헝가리 태생이다.1956년 헝가리 민주화운동을 소련군 장갑차가 진압했을 때 그는 33세,부다페스트에 있었다. 당시 전위음악의 총아였던 슈토크하우젠음악 ‘청년의 노래’를 몰래 라디오로 들으며 그는 창밖으로 계엄령 상황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곧장 서방으로 망명,딱 두 달 만에 콜로뉴 전위음악파의 선두로 부상한다. 그는 서양음악의 현대적인 기법을 두루 탐구하고 발전시켰다.스스로 자신의 음악방식을 ‘미세(微細) 다성음악’이라 명명하면서 그는 1960년 서양현대음악 전체의 최첨단에 달할 수 있었다.1970년대는 오페라 ‘그랑 마카버’ 작곡에 바쳐졌다.그의 모든 기법과 사상이 총동원된 이 오페라 작업은 그로 하여금 현대음악의 막다른 골목에 회의를 느끼게하는 계기로 작용한다.아니,그는 파탄에 이른 현대음악에 회의를 느꼈으므로 이 오페라에 진력했다. 그는 비극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다.아버지와 형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그도 강제노동에 처해졌다.나치이후 공산주의 정권은 그의 급진적인 음악을 금지했다.그리고,그러나,그 비극성이 그에게 ‘총체성의 마지막 보루’로 작용한다.전 인류의 고통이 그의 고통으로 특수화­심화하면서‘총체를 위한 번제’의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리듬과 화음을 찾겠다….그는 ‘그랑 마카버’이후 그렇게 공언했다.오늘 소개하는 것은 현대음악 처녀지이자 성지(聖地)인 베르고 레이블이 자랑하는,리게티 자신의 숨결이 연주에 배인 음반이다. 1987.녹음,1991.wergo wer6170­2 ORF­합창단과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 ORF­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엘가 하워스
  • 다이애나 사망 1주기/시드는 商魂 조용한 추모

    오늘은 영국 다이애나비 1주기.다이애나비는 1주기를 맞아서야 좀 쉬게 되는 것 같다.최근 분위기가 ‘조용한 추모’쪽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그간은 상업주의의 이상 열풍에 무덤 속에서조차 시달려야 했다. 최근 영국 데일리 텔레그라프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3%가 ‘어떤 추모행사에도 참가할 의사가 없다’고 응답.과반수가 ‘장점 뿐 아니라 단점도 지닌 평범한 여인’(44%),‘대중적으로 과대포장된 특혜받은 여인’(13%)이라며 우상화를 거부했다. 사고 발생지 파리의 추모행사도 시내 중심부 한 작은 정원에 다이애나 이름을 붙이는 것 정도다.민간·상업단체의 ‘마지막 여정 단체 답사’ 프로그램은 인원이 안 차거나 당국의 거부로 잇따라 불발되고 있다.지난 1년간 각국마다 다이애나 상품 수백종을 쏟아내 ‘다이애나 산업’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하지만 이것도 한풀 꺾이고 있다.
  • 故 崔鍾賢 회장 火葬… 한줌 재되어 흙으로

    ◎‘재계 거두’ 死後 더 빛나다/“값싸고 훌륭한 화장터 지어 사회 기증” 유언/故 崔 회장의 굳은 의지로 장례문화 개선 기대/LG­삼성회장·高建 서울시장 등 협조 표명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을 하도록 해요” 30일 하오 4시 경기도 수원시 봉담면의 가족묘지.지난 26일 타계한 崔鍾賢 SK그룹 회장이 한줌의 재가 돼 흙으로 돌아갔다. 이날 하관식은 5대 재벌의 총수이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3번이나 역임한 재계 거두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촐하게 치러졌다.복잡한 절차 없이 유골함만 묘지에 안장됐다. 화장은 崔회장 유언에 따라 이루어졌다.崔회장은 생전에 자신의 사후 화장을 당부했다.아울러 “화장문화를 국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SK가 값싸고 훌륭한 화장터(장례식장)를 지어 사회에 기증하고 그룹이 앞장서 화장문화를 계도하라”고 유언했다. 이에 따라 崔회장 유해는 이날 상오 9시 워커힐빌라 빈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곧바로 벽제화장터로 가 지난해 6월 타계한 부인 朴桂姬 여사의 유해와 함께 화장됐다.이어 서울 을지로SK그룹 본사,전국경제인연합 회관,SKC수원공장,고인의 수원 평동 생가 등에서 노제를 지낸 뒤 안장됐다. 崔회장은 평소 그룹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SUPEX·‘최고 수준’을 의미하는 슈퍼 액설런트의 영문 약자)추구협의회 등에서도 자주 “영혼이 떠나간 육신을 땅에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땅덩어리도 좁은 나라에서 죽을 때마다 무덤을 만들면 국가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매장문화의 불합리성을 지적해 왔다고 李魯鍾 SK그룹 상무는 전했다. 崔회장의 화장은 앞으로 장례문화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좀체 활성화되지 않았던 화장문화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지난 27일 빈소를 찾았던 LG그룹 具滋暻 명예회장과 삼성그룹 李健熙 회장,高建 서울시장도 이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이들은 SK그룹에서 화장터를 만든다면 자신들도 이곳을 이용하겠다고 약속했고,특히 高시장은 모든 행정 절차 면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9월1일 차기 그룹 대표로 추대될 장남崔泰源 SK(주) 대표이사 부사장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가족납골당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우리나라의 火葬 실태◁ 우리나라의 화장 비율은 20.5% 수준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다.일본이 97%,태국 90%,홍콩 72%,영국 60% 등이다.중국은 정부에서 매장을 금지해 공식적인 화장률이 100%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국의 묘지 면적이 서울 면적의 1.6배에 이르는 등 국토잠식이 심각하다.매년 묘지면적이 서울 여의도의 1.2배인 9㎢씩 늘어나고 있다. 오는 2045년에는 묘지 면적이 1,400㎢로 국토 면적의 1.5%에 이를 전망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싸고 간소한 화장이 활성화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비용도 3만∼6만원으로 돈이 거의 들지 않는 장점 때문에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매장 원칙을 고수해온 성균관조차 ‘화장문화 보급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또 불교계 등에서 납골당을 잇따라 설치하면서 매장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보건복지부 가정복지과 金惠珍 사무관은 “崔회장의 화장은 일반국민들의 화장문화에 대한 인식을 전환케 하는 큰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 귀순자들의 대화/北의 가족 그리움에 애간장(탈북 그 이후:5)

    ◎“세월이 약이겠지” 무덤덤하게 시름 달래/각종 모임서 ‘두고온 가족’ 얘기가 큰 위안 “이제 와서 얘기하면 뭐 합네까,가슴속에 묻어둔 아픈 사연들이 되살아날까 두려울 뿐이야요” 탈북자들은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점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대개는 ‘세월이 약이겠지’라며 애써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탈북 7년째인 金모씨(32·여)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혈육의 정에 애간장을 태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고향 얘기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金씨는 “대다수의 탈북자들은 하루빨리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죄책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잡았던 마음도 명절이나 부모의 생일 때가 되면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향수병이 도지는 탓이다. 이내 눈시울이 촉촉히 젖는다. 감정에 복받쳐 종일 울 때도 있다고 한다. 지난 95년에 탈북한 崔모씨(46·사업)는 “부모님의 생일이 되면 통일전망대로 가 ‘불효자의 한’을 달랜다”면서 “북녘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올 연말 착한 색시를 만나 결혼할 예정”이라는 柳모씨(31·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은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수 없는 현실이 그저 야속할 뿐”이라면서 “지난 번 꿈속에서 부모님께 결혼 날짜를 알려드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나마 이들에겐 ‘탈북자들의 모임’이 큰 위안이다. 숭의동지회,통일연구회 등을 통해 ‘우리들만의 대화’시간을 갖는다. 지난 연말에는 자유총연맹 주최로 ‘귀순자 망년회’를 처음 갖기도 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자체적으로 만든 ‘미니모임’이 더 활발하다. 탈북자 불교모임을 주도해 온 金명철씨(36·전 남순지장회 회장)는 “정신적·문화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어려움을 서로 이해하고 북돋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IMF한파 등으로 먹고 살기에 바빠 최근에는 잘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구소련동구유학생모임의 회장인 金지일씨(35·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종합대학 출신·컴퓨터소프트웨어개발회사 대표)는 “탈북 8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면서 “탈북 유학생들끼리 유대관계를 갖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게 큰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사회 적응과 이산의 아픔이라는 이중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탈북자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도 얼굴 한켠에는 감춰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고향의 사연’을 뒤로 한채 남북이 통일돼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 삶을 가꿔나가고 있다.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1,400년만에 다시보는 가야문화/국립김해박물관 개관

    ◎출토유물 마을·무덤모형 전시/시대·물질별 문화흐름 한눈에 국립김해박물관(경남 김해시 구산동)이 지난 29일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4∼6세기 낙동강 중심으로 형성됐던 가야제국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동시에 가야사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기능을 맡은 고고학 전문박물관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93년부터 5년여동안 2백6억원 가량을 들여 완공한 이 박물관은 1만5천여평의 부지에 지상 3층,지하 1층에 연건평 3천평의 현대식 건물. 박물관은 외양부터 철기문화의 이미지를 풍긴다. 건물외벽 윗부분은 ‘철의 왕국­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강판을 사용했다. 또 고분의 봉분을 상징하는 몸체는 검은 벽돌로 쌓아 철광석과 숯의 이미지를 나타냈다. 이와함께 가야문화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실의 입구와 출구를 별개 구조로 설계하는 한편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수장고에 오동나무로 만든 특수시설을 설치했다. 900평 가량의 전시장은 상설전시실과 2개의 기획전시실로 구성했으며 신석기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 시대별,물질별 문화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물을 배치했다. 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사시대의 마을모형,무덤모형 등을 만들어 놓았고 컴퓨터 안내시스템과 가야유적의 문화권별,종류별 유적분포 전광판도 설치했다. 상설전시실인 제1 전시실의 ‘신석기시대’ 코너는 김해 수가리,부산 영선동,통영 연대도,통영 욕지도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돌도끼와 흑요석,조개팔찌,골각기 등을 전시한다. ‘청동기시대’는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으로 나눠 ‘삶의 공간’에는 울산 검단리,산청 묵곡리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와 방추자,갈돌을,‘죽음의 공간’에는 산청 강루리에서 옮겨온 고인돌을 전시해 놓았다. 또 ‘초기 철기시대’코너는 철이 등장했던 당시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가야성립기’는 창원 다호리 1호묘에서 출토된 통나무관과 출토유물을 실물크기로 재현,김해 양동유적에서 출토된 칠조동검과 와질토기,칠기 등을 전시해 놓았고 ‘금관가야’ 코너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등에서 발굴한 다양한철기 및 토기와 외래계 유물을 전시한다. 제2 전시실에 있는 ‘아라가야’ 코너에는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과 함안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입사고리자루칼,차륜식 토기,마늘쇠 등을 시대별로 배치해놓고 있다.‘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문화권의 결속을 화려한 금세공품과 통형기대 등 제사토기를 통해 보여준다. 고령 지산동고분군,합천 옥전고분군,남원 월산리고분군의 유물과 자료도 있다. 이밖에 ‘소가야’는 고성 연당리고분군과 고성 동의동 조개더미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상을 알려준다. 김해국립박물관은 개관 이후 한달동안 관람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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