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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직사회 “눈으로 말해요”

    “뭘 갖고 저렇게 시끄러운지 물어볼 수도 없고….” 대통령의 사생활을 언급한 여경이 좌천된 데 이어 외교통상부 일부 직원들의 ‘부적절한 발언’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공직사회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직원들끼리 나눈 대화내용이 내부 실명제보 등으로 문제로 불거지면서 공무원들은 직원들끼리도 민감한 대화를 삼가는 분위기다. 정부중앙청사 A국장은 “여경이 사석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좌천됐는지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궁금증을 갖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내용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도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절대로 묻지 않는다.”고 전했다.내용을 묻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을 꺼리고 있다는 얘기다. 과천청사의 B과장은 “공직사회에 입조심하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면서 “직원들끼리 술자리도 되도록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부처의 C국장은 “서로 대화하는 데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는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고 밝혔다.평소 거침없이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거론하던 D과장은 “나도 이제 입조심을 해야겠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공무원들은 오히려 제보자가 정부내 개혁세력인지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조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공직사회 반응이 엇갈린다.과천청사 E국장은 “공무원이 공·사석을 막론하고 국가원수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처신”이라고 말했다. 반면 대전청사 F과장은 “공무원은 정치에 관심도 갖지 말고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과천청사의 F사무관은 “대다수 공무원들은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가려서 한다.”면서 “토론문화를 강조하는 참여정부에서 대화과정에서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이에 대해 감시와 통제를 한다면 건전한 비판도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파문의 진원지인 외교통상부 간부들은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을 회피했다.한 사무관은 “정책상의 실수도 아니고 사석에서 나눈 대화내용을 갖고 징계한다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외교부 직원들의 생각”이라면서 “무덤덤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입조심을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최광숙 박승기기자 bori@
  • “集安태왕릉은 광개토왕 묘”출토 청동방울서 ‘好太王’ 글자 확인

    고구려의 옛 도읍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유물이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법종(사진·43·사학) 우석대 교수는 “최근 지안 박물관에서 지난해 5월 태왕릉에서 출토됐다는 청동방울에 ‘신묘년호태왕조구십육(辛卯年好太王造九十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관련기사 3면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다. 조 교수는 “지금까지 태왕(太王)으로 지칭된 고구려 왕은 고국원왕과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세 사람”이라면서 “그러나 호태왕이라고 불린 왕은 광대토대왕이 유일한 만큼 태왕릉은 곧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터인 지안시에는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태왕릉과 장군총이 자리잡고 있으나,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자료가 나오지 않아 학계는 단순히 두 무덤 가운데 하나가 광개토왕릉일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번에 발굴된 청동방울은 높이가 5∼6㎝,위 지름이 2.5㎝,아래 지름이 3㎝인 종모양으로 금동제 장식품 30여점과 함께 나왔다.방울에는 ‘신묘년…’이라는 명문이 세 자씩 사방을 돌아가며 뚜렷이 음각되어 있다. 조 교수는 “청동방울이 신묘년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주조된 것이라면 광개토왕비 신묘년조에 나타난 ‘…래도해파(來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닌 고구려”라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라는 점에서 학계에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러나 학계에서는 “명문의 호태왕은 존칭을 의미한다고 보면 광개토왕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서 “아직은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이라고 결론내리기에는 다소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 서울시향 - 해촉된 곽승 상임지휘자 相生 필요

    서울시교향악단의 음악감독에서 해촉된 곽승씨가 세종문화회관(사장 김신환)을 상대로 ‘음악감독 및 지휘자 지위보전 등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지휘자와 성악가 출신 사장이 음악을 놓고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세종문회회관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다고 해도,음악팬쪽에서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서울시향은 ‘대타’를 내세워 지난 8일의 신년음악회를 여느 정기연주회 처럼 무덤덤하게 치렀다.곽씨가 지휘대에 올랐다면 훨씬 열기를 내뿜는 연주회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할 음악팬은 별로 없다. 세종문화회관쪽도 마찬가지다.김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곽씨의 ‘불성실’에 초점을 맞추고 해촉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려 애쓴다.법원의 판단에 상당한 작용을 할 계약내용은 실제로 세종문화회관쪽에 유리한 것 처럼 보인다.하지만 관행에 익숙한 음악인들을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하고 있다. 곽씨는 오는 16일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신년음악회를 예정대로 지휘한다.그러나 1996년 이후 지켜온 수석지휘자 자리는 최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심기일전한다면 잃어버린 명예는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 반면 서울시향은 올 한해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한다.헝가리의 지외르지 라트를 연습 지휘자로 다시 초빙하고,한국인 부지휘자의 영입도 검토하지만,유능한 상임 지휘자의 초빙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다는 것이다. 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곽씨는 매우 실망할 것이다.그렇지만 부산시향을 전보다 더욱 갈고다듬어 서울시향에 버금가는,나아가 뛰어넘는 교향악단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반려했다고 해서 세종문화회관이 이기는 것도 아니다.곽씨의 뜻을 꺾어 하루이틀은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서울시향에는 ‘객원 지휘자를 땜질식으로 투입하는 비상체제’말고는 남는 것이 없다. 세종문화회관은 ‘곽승을 내보내 서울시향의 발전을 앞당기게 됐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이제 ‘서울시향을 발전시키려면 세종문화회관 밖에 새로운 서울시향을 하나 더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시중의 농담 아닌 농담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가 됐다. 서동철기자 dcsuh@
  • “우리당 왜 만들었나”광주토론회 시민 쓴소리에 후보들 진땀

    “도대체 열린우리당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8명의 후보들이 6일 오후 호남 민심의 한 복판 광주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시민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진땀을 흘렸다.광주MBC 주최로 생방송된 토론회에서 질문자로 나선 한 시민은 “열린우리당이 새로 생겼지만,민주당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로 빛이 바랬다.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우르르 세배 가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당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동영 후보는 “정치개혁과 햇볕정책의 확실한 계승을 위해 현상타파에 나섰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다르다.”고 강변했다.김정길 후보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했고,노 대통령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답변했다.그러나 이어 등장한 다른 시민은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몇석을 얻으려고 호남을 희생시킨다는 우려가 든다.90년 3당 합당 때처럼 호남이 고립될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이에 부산 출신의 이미경 후보는 “그동안 지역주의에 가장 큰 희생을 당한 지역이 이곳인데,그런 말을 하니 놀랍다.”고 말했다.전북 남원 태생의 신기남 후보는 “나와 정동영 후보,천정배 의원 등 신당을 주도한 사람들이 모두 호남 출신인데,호남을 소외시킬리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이어 또다른 시민은 “요즘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연합공천 얘기가 나오는데,그러려면 뭐하러 분당을 했느냐.”고 따져물었다.이에 이부영 의원은 “내 지역구가 수도권인데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다.”면서 “정치개혁 하자고 신당 만들었는데,연합공천한다면 정치인으로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격”이라고 답했다.이미경 의원도 “연합공천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으로 적절치 않다.”고 부정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시민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농민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서 후보들의 입장을 물었다.이에 유재건 후보는 “농업 대책을 철저히 한 뒤 FTA를 비준해야 한다.”고 답했다.장영달 의원은 “나의 8남매 가운데 3명만 대학을 가고,나머지는 모두 농사만 지었다.”면서 동질감을 강조했다.한편 이날 토론회에서 후보들은 저마다 민주당을 ‘한나라당과의 야합세력’으로 규정하면서 호남 민심 선점에 주력하는 한편,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구애(求愛)’성 발언을 쏟아냈다. 광주 김상연기자 carlos@
  • 기고/유아교육법 언제까지 미룰건가

    공교육이 붕괴된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육정책 결정과정에서 빚어진 두 가지 원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첫째 정치인들의 교육철학 부재와 무소신이다.교육철학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철학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권자인 특정집단의 표를 의식하여 소신 없이 행동한 결과 우리 교육은 병들고 교육정책은 표류하게 된 것이다. 둘째,부처이기주의이다.정책도입에서부터 업무처리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국민들간의 상생의 관계를 정립하고 국가발전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입법과정이나 정책 도입과정에서 벌어지는 정부부처간의 불협화음은 이를 무색하게 한다.특히 교육의 경우는,‘교육은 국가 백년대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책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유아교육법 제정’추진이 부처간 갈등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유아교육법안은 이미 국민의 정부에서부터 추진해 온 것이었으나,그때는 눈치 보기에 급급한 소신 없는 국회 교육위원들에 의해 상정된 법안이 자동 폐기되었다. 금번 제정안은 현행 초중등교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아교육관련 조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치원의 ‘교육’적 기능뿐만 아니라,‘보호’ 기능을 추가한다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생긴 주된 쟁점은 ‘교육’과 ‘보호’ 가운데 어떤 것을 더 우위에 놓느냐 하는 것이다.‘교육’이 강조되면 교육부의 위상이,‘보호’가 우선이면 보건복지부의 영역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교육부에서는 세계적인 교육변화 추세에 맞춰 질적으로 향상된 유치원 교육을 위해 초중등교육법으로부터의 유아교육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이것은 당연한 흐름이다.그러나 보건복지부 산하 어린이집,놀이방 등이 유치원으로 통합되어 전국 수만개의 보육시설들이 폐원할 수밖에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이를 반대하고 있다.이번 유아교육법제정안은 기존의 유아교육진흥법을 보다 체계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아교육법 제정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하는 보건복지부도 곤경에 처해있지만 특정 단체의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국가적 입장에서,공리주의에 따라이 법안을 바라보아야 한다.중장기적 관점에서 유치원 종사자들과 직접적인 교육과 보호혜택을 받을 아이들의 미래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특히 사립유치원 교사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이들의 당당한 권리를 내세울 수 있게 된다.시설운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최소임금으로 온갖 잡무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착취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학부모 역시 사교육비 부담을 덜고,저비용으로 양질의 교육을 선택할 수 있으며,아이들은 유아교육에서부터 일관된 교육과정과 체계 속에 성장하게 될 것이다. 현재 유아교육법은 부처의 이기주의와 특정단체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무려 7년 동안이나 표류하고 있다.‘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처럼 교육의 출발점은 초등교육이 아닌 유아교육에서부터이다.평생교육에 이르는 모든 교육은 유아교육에서 비롯된다.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교육이 배제된 채 ‘보호’만 받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보호’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교육여건이 절실히 필요하다.학부모에게도 질 높은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병설 유치원에서부터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사립유치원 교사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유치원에 대한 국가예산을 증액하는 등 유아교육법 제정에 걸맞은 제도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방탄 국회 등의 이유로 국회 해산을 종용하는 외침이 거세지는 지금,국회가 특정단체의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나 교육 백년대계를 위해 소신 있는 교육적 결단을 촉구해 본다. 최원호 한영신학대 겸임교수 명예논설위원
  •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호박(琥珀) - 김효동

    월령 29일,그믐이다. 동쪽 하늘에 그믐달이 비껴 떠 있다.망원경 경통에 입을 맞추고 숨을 길게 내쉰다.경통의 옆면을 스치며 부연 입김이 날아간다.파인더에 눈을 들이댄다.그믐달은 파인더의 십자선 중앙에 꼼짝없이 잡혀 있다.접안렌즈로 눈을 옮기고 핀트를 맞추자,달 표면의 크레이터가 또렷이 나타난다.달의 바다인 습기의 바다가 거친 암영을 채워가고 있다.그 주위를 비에타나 티코와 같은 크레이터들이 점점이 두르고 있다.크게 심호흡한다.내뱉은 입김이 옅은 달무리를 만들어내다간 금세 흩어진다.눈을 떼고 고개를 젖뜨린다.금방이라도 화구를 열 듯한 하늘이지만 아직껏 짙은 어둠만 머금고 있을 뿐이다.깊은 바다의 잔잔한 침묵을 그려내는 듯하다.꼭 움켜쥐고 있던 액세서리 호박을 코밑에 가져다 댄다.발트해의 짙푸른 해수가 밀려온다.로스토크 연안 부두,김 선배는 독일에 가고 싶어 했다.오래 머물진 않을 거야.어디까지나 여행이니까…….호박이야.발트해를 상징한대.독일에 사는 이모가 보내줬는데 이젠 필요 없게 됐어.이왕이면 북해까지 돌아볼 생각이야.보트니아만을 거쳐 핀란드만까지…….북두칠성 국자의 머리 부분에 머물러 있던 눈동자가 작은곰자리를 거쳐 북극성으로 옮겨간다.호박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는다.발트해,김 선배가 그곳에서 곤충이 박힌 호박을 캐고 있다면,나는 이곳에서 놈들을 낚아야 한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부딪친다.간들거리는 고목 가지가 그믐달을 콕콕 찌르기 시작한다.할아버지를 지그시 내려다본다.방한복을 여미는 모습이 어줍다.담배는 안 돼요.할아버지는 담배를 먼저대로 담뱃갑 속에 쑤셔 넣는다.할아버지의 등 뒤로 다가가 방한모를 씌우고 요철(凹凸)형 단추를 채워 드린다. 때각! 할아버지의 어깨가 움찔한다.손전등을 입에 물고 점퍼 속에 손을 넣는다.손바닥만한 관측일지가 차가운 공기를 맞는다.9월15일,강원도 횡성,오리온자리가 희미하게 보이다.맨눈 관측,화성이나 황소자리보다는 밝은 편임…….두 달이 훌쩍 지났구나.펜을 꺼내들고 마음을 가다듬는다.11월18일,경북 문경새재.그믐달에 가까워 맨눈으로 3,4등성도 확인 가능.사자자리 부근을 향해실험 촬영.바람이 불지만 촬영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듯……. 망원경 앞으로 돌아온다.파인더를 단단히 고정하고 조심스레 미동나사를 조절한다.망원경의 방향이 찬찬히 천정(天頂)으로 향한다.하늘은 자정을 기해 이전까지의 침묵을 깨뜨릴 것이다.삼십 년을 넘게 만삭이었던 하늘이 자궁을 연다? 굉장히 매혹적이야.놈들을 사냥하는 일은 얼마나 더하겠어! 근사한 녀석들 많이 담아 와.플레이트로 고개를 돌린다.넉 대의 카메라가 좁은 플레이트 위에 빽빽이 올려져 있다.많이 잡아오면 괜찮은 놈으로 한 마리 주는 거지? 나도 꼭 찍고 싶었는데…….작년에 소백산에 갔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한 놈도 찍지 못했잖아.달이 보름달에 가까워서 큰 놈에게 희망을 걸었는데,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아서 그것마저도 물 건너갔지 뭐야.편지하면 그 주소로 보내주는 거 잊지 마.바람에 실려 온 검불이 얼굴을 스친다.망원경의 접안부를 두 손으로 꼭 감싼다.밤하늘 이곳저곳에 빛을 게우고 번뜻 사라질 녀석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긴장이 몰려온다.오늘은 기필코 대어를낚아야 한다. 문경새재는 초행이다.소백산이나 함백산에서보다 수월한 등반이 될 것이라는 지도교수의 귀띔이 이곳을 선뜻 결정하게 만들었다.잡광(雜光)이 없고 먼지가 적어 촬영이 용이한 곳이라는 정보는 관련 잡지를 통해 앞서 접한 터였다.산꼬대가 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괜찮은 촬영지다.나무가 많지 않은 나지막한 산언덕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 또한 썩 마음에 든다.고개를 들어올린다.밤하늘에 지독한 정적이 연출되고 있다.바람이 차다.귓불을 스치는 산바람은 가랑이까지 으스스하게 만들 정도다.할아버지가 으레 신경이 쓰인다.차에 계시는 편이 낫겠어요.내려가시겠어요? 할아버지의 어깨 위에 가벼이 손을 올려본다. “괜찮아요.다 늙어서 한 번 찾아온 감기가 그 무슨 대수라고.” 할아버지의 몸 상태가 영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손자를 따라나서야겠다는 얄망궂은 고집을 쉬이 꺾을 수가 없었다.두통 때문에 소다를 댓 수저 퍼먹었거든.어째 머리가 다섯 배는 더 지끈거려요.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지려나…….할아버지를 향한 불안함이 이제는부모님에 대한 섭섭함으로 옮겨간다.온천 관광을 떠나는 부모님이 홀로 집에 계시기 적적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의 동행을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서릿바람에 아이를 업고 밭에 나온 기분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수안보에서 부모님과 헤어지고 내내 말이 없던 할아버지의 입을 트게 한 것이 차가운 기침이었다는 사실을 거슬러 생각하게 된다.화분증 탓에 봄마다 기침으로 고생하는 할아버지이긴 하지만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은 없는 분이다.성치 않은 오른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가슴은 더욱 답답해져 온다.당장 차로 모셔다드릴게요.얼마 버티기 힘드실 거예요.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니까…….그나저나,등나무집 할머니 말이다.왜,너도 알잖아,얼마 전에 네 엄마가 소개시켜준…….” 낚시용 승창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청승궂다.이내 지팡이 끝으로 낙엽 더미를 헤적이기 시작한다.땅 위에 글자를 새기고 있는 듯도 하다.낙엽을 헤치는 소리가 듣기에 좋지 않다.선영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네.경영학을 전공한다고? 수치에 매우 민감하겠군.아,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난…….찻잔을 내려놓는 종업원의 행동이 거치적거린 모양이었다.남자는 말을 멈추고 김 선배의 어깨를 두드렸다.영문학과 선배야.우리 동아리 회장이었고…….이 년 전에 졸업했어.둘 다 초면이겠지? 나는 김 선배의 재킷에 박힌 장식용 버클에 시선을 고정했다.반갑네.남자는 내 시선을 밀쳐내듯 손을 내밀었다.손이 형편없이 못생겼군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꾹 삼켰다.나는 그가 청하는 악수를 건성으로 받아들였다.형편없기 짝이 없는 그 손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합니까! “성우라고 했지,아마?” 김 선배가 나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은 많이 찍어봤나? 사진 속에 별을 담는 것과 정물을 담는 것은 확연히 다르지.쉽사리 덤비지 말아야 할 것이 천체를 담아내는 일이야.한낱 취미 정도로 생각했다간 큰 오산이지.듣자하니 소질이 많다던데…….무엇이든 역량이라는 것이 중요하지.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이 녀석이 찾아왔더라고.달과 금성의 일주 사진이라고 보여주는데 볼품이 없더군.난 처음에 반딧불 사진인 줄 알았다니까.농담 삼아,개똥벌레의 일주 사진이네,감히 반딧불로 별을 대적하다니,그랬지.” 남자는 김 선배를 돌아보며 짐짓 미소를 지었다.김 선배의 얼굴로 미소가 이어졌을 때,그녀의 재킷에 달려 있는 버클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어째서 별을 찍지? 나는 남자의 점잖은 말투가 듣기에 거북했다.글쎄요,뭐든 좋아지기 시작하면 따라가는 법이죠.남자는 한동안 내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선물을 하나 할까 하는데,어떤가?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과장된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누군가 카페 바닥에 바나나 껍질을 놓아두었더라면,하고 생각했다.괜찮아,성우야? 불편해 보여.난 너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나는 김 선배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이 분야에선 알아주는 베테랑이야.물론 지금은 접은 상태지만…….작년엔 외국의 한 천문대가 주최한 천체 사진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어.나이가 많은데도 열정이 대단해.열정이라는 말로 남자의 나이를 짐짓 감추어보려는 그녀의 말투가 왠지 우스꽝스러웠다.저 사람 곧 인도로 떠날 거야.다른 세상을 접해 보고 싶대.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많이 도와줄 거니까,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만나봐.남자의 구두 소리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카페 가득 둔탁한 공명을 일으키며 다가왔다.할머니가 마음에 안 드세요,할아버지? “아니,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할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이내 기침을 토해낸다.기침 소리가 밤하늘에 긴 메아리를 긋는다.할아버지를 내려다본다.할아버지의 안경알에 그믐달이 갇혀 있다.그믐달이 거듭 요람으로 변하는 착각이 든다.할아버지의 심상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산록을 오르면서 할아버지는 내내 요람 위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되뇌었다.무릎을 매만지며 번번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요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의족이 할아버지를 지탱하기엔 무리이지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그에 아랑곳없다는 듯 쉬지 않고 내 뒤를 따랐다.점점 뒤처지는 할아버지를 이곳까지 끌어올린 것은 아마도 달의 이미지가 전하는 느긋한 안주(安住)가 아니었을까.회답이라도 하듯 북극성 주위를 오르내리던 낙엽이 요람 위에 사붓 내려앉고 있다. “할망구가 은근히 피하더구나.어쩐지 아니다 싶었어.미련일랑 한푼 남길 것도 없다.네 엄마도 그렇지,그리 줏대 없는 할망구를…….” 할아버지는 의각이 끼인 다리를 쭉 뻗는다.아닐 거예요.할머니가 일부러 피하기야 하시겠어요? 할아버지의 긴 한숨 소리가 귓가로 날아온다. 플레이트 앞으로 다가간다.카메라 한 대를 집어 든다.애지중지하는 펜탁스67 기종이다.노출을 중단하고 필름을 교체한다.노출 시간을 초과한 감이 들지만 유성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될 일은 없다.다만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필름이 아까울 뿐이다.대학에 다닐 때 처음으로 장만했던 카메라야.니콘FM2지.선배로서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자! 그믐달을 할퀴면서 한참을 꼬박거리던 나뭇가지가 툭 부러진다.배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배낭으로 고개를 돌린다.어서 받아,성우야.내년 가을에 유성을 촬영할 거라면서? 이번에 못 찍었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카메라 한 대 더 있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알면서.어서 받아.나는 김 선배를 바라보다가 남자가 건네는 카메라를 말없이 받아들었다.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별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이 끝없이 생기더군.혼자 여행을 선택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지.가면 갈수록 새로운 걸 찾게 돼.물론 과거가 바탕이 된 새로움이겠지만.인도에 대해 아는 것 좀 있나? 힌두교? 일처다부혼? 아니면,마하트마? 남자와 김 선배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동아리 선배로서 소개시켜줬을 뿐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해해.아,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야,마하트마란.김 선배는 다시 돌아와 그렇게 몇 마디 던지고는 급하게 카페를 빠져나갔다.나는 김 선배가 잠시 우주로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불안감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힘으로 나타났다.그들이 지나간 카페 홀에 문뜩 간디와 마하트마를 외치는 남자가 부딪쳤다가 분산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커피 리필해 드릴까요? 종업원은 나의 대답을기다리는 투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무안해하길 바라면서 그녀의 코밑을 계속해서 쏘아보았다.리필해 드리겠습니다.위대한 영혼 좋아하시네! 잠시 주춤하던 바람이 한달음에 몰려온다.옹그리고 있던 낙엽 더미가 소르르 흩어진다.달빛을 빌려 주위를 둘러본다.할아버지의 발 앞으로 융단이 말리듯 낙엽 더미가 굴러간다.굴러간 낙엽만큼의 양이 또다시 굴러오는 모습이 거년스럽다.할아버지의 어깨 위에 낙엽 한 장이 사부랑삽작 걸터앉는다.아니,어느새 날아간다.할아버지,녹차 드릴까요? “아니,됐다…….애초에 소개를 받는 게 아니었지,여시 같은 할망구!” 배낭에서 녹차 티백과 보온병을 꺼낸다.배낭 옆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힘없이 나동그라져 있다.다만 동아리 선배로서 소개시켜줬을 뿐이니까…….웃음이 나온다.플레이트가 놓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삼각대에 장착한 카메라와 플레이트 위에 올린 넉 대의 카메라가 하늘을 향해 조리개를 가만 열어놓고 있다.적도의 가대에 올린 카메라는 천구의 이동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가져오지 않은 남자의 카메라가 머릿속에 떠오른다.유성을 담아내기에 카메라가 적은 듯도 하다. 티백을 간닥거리며 망원경의 접안부를 들여다본다.카시오페이아와 페르세우스 사이에 웅그리고 있던 은하단이 어느 틈에 천정(天頂) 부근으로 이동해 있다.별들의 바다를 감상하기에 녹차의 양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없네,부담이 엔간히 드네,민망해서 자식들 볼 면목이 없네,다 늙어서 주책이 아닌가 싶네…….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괸다더니,뭐 그리 둘러댈 것이 많은지.보험 들으랄 때부터 알아봤지,내가! 참말로 사랑은 아무나 하나네 그려.” 녹차를 들이켜다 사레가 들린다.입술을 훔치며 할아버지를 돌아본다.할아버지의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나의 시선이 어느새 할아버지의 고개를 따라간다.성도(星圖)를 펴놓은 듯한 밤하늘이다.고개가 각각의 별자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남쪽 하늘에 고래자리가 자오선 위를 조용히 헤엄치고 있다.서쪽 하늘,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가 말없이 지고 있는 모습이다.달을 품은 동쪽하늘,쌍둥이별의 카스트로와 폴룩스가 드높게 떠 있다.가슴속에 새겨진 성도가 보이지 않는 별마저 또렷이 그려내고 있다.아마 잦은 촬영에서 밴 습관일 것이다.멀리 작은개자리의 프로키온이 외롭게 반짝인다.별을 본다는 건 말이야…….그건 결코 값싼 센티멘털리즘만으로 되지 않는 거야,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에겐.김 선배의 손가락이 작은개자리에 머물렀다.끝내 그 모습만을 유지하는 별은 없어.나 역시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진 않아.프로키온,다른 별들처럼 모여 있지 않고 외롭게 떠 있지.저 별을 보고 있으면…….아니다,값싼 감상은 내가 찾고 있네…….자,봐봐! 김 선배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였다.큰개자리의 시리우스와 베텔게우스를 연결하고 프로키온으로,다시 시리우스로 돌아오면…….김 선배의 손가락이 내 눈앞에 머물렀다.김 선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어색한 마음에 멀리 횡성군(郡)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그러니까,그렇게 그려보면 겨울의 대삼각형이 이루어지는 거야.네 손으로 한번 그려볼래?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주머니 속의 호박이 얼굴에까지 느껴진다. “생판 모르는 할망구 만나서 뭔 득을 보겠다고.내가 미쳤지!” 할아버지는 두 손을 비비며 몸을 움츠린다.몸 전체가 굼벵이처럼 오그라든다.정말 안 되겠어요,차로 돌아가요.할아버지는 대답이 없다.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치켜뜨고 달 쪽을 올려다볼 뿐이다.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 같아 안쓰럽다.달은 달일 뿐,요람은 그저 값싼 감상인 모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지독한 난시 탓에 할아버지에겐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밤하늘이라는 것마저 이곳에 와야 할 명분을 지우는 것 같아 답답하기까지 하다.어느새 할아버지의 발목까지 낙엽 더미가 덮여 있다.의족으로 낙엽을 헤치는 모습이 곰상스럽다.갑자기 할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지해 승창에서 일어선다.차로 가시겠어요? 할아버지는 지팡이로 땅을 꾹 찌른다. “칼을 들었으면 두부라도 썰어야지,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산중턱을 엷게 스친다.등나무집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칠순을 넘겨보는 할아버지에게 사랑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나에겐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기억도 나지 않는 할머니 얼굴을 등나무집 할머니의 얼굴로 대신하겠다는 생각도 없다.다만,물 건너간 사랑을 되돌리지 못할 때 찾아올 슬픔을 고스란히 할아버지 자신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작년 가을에 콤바인 예취날에 바짓부리가 걸려 발목을 잃은 할아버지에게 사랑은 그 후유증마저 낫게 할 수 있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생각지 못한 섬으로 가로막힐 때가 있다.경우에 따라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그래서일까? 할아버지의 사랑이 쉽사리 이루어지리란 기대는 들지 않는다.등나무집 할머니는 둘러대는 것이 아니다,어쩌면.할머니도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럼 만나지 말자는 게 진심이라는 게냐?” 아니,그런 것이 아니라,뭔가 사정이…….갑자기 눈 속에 번뜩하며 섬광이 스민다.고개를 젖히자 곧 하늘이다.드디어 화구를 벌린 모양이다.그대로 하늘에 눈을 처박는다.이중성단을 관통하며 희미하게나마 유성 하나가 떨어진다.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동시에 따라붙는다.단말마와 같은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따라 금세 사라진 녀석이지만 잔상으로나마 눈 속에 남는다.보셨어요? 저기…….손가락을 펴 하늘을 가리키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관심도 없는 투다.대인이 또 세상에서 사라지는구나,하고 말하면서 그 사람 이런 말을 꼭 덧붙였어.자신은 타 없어지는 유성이 아니라,우주에 버려진 별이 되고 싶다고 말이야.그 말이 무슨 뜻일까? 나는 선배가 말하는 남자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더니 결국 혼자가 되어버린 걸까? 그 사람 지금은 인도에 없어.또 다른 낯선 곳을 찾아갔겠지.김 선배는 간헐적으로 딸꾹질을 토해냈다.그러면서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었다.메클렌부르크 포어포메른…….낯선 곳에서 혼자가 되어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 번 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이번엔 네 엄마가 아니라,내가 직접 말해야겠어.만나서 담판을 짓든지…….성우야,두유 좀 가져다 다오.목이 다 탄다.” 배낭으로 다가간다.지퍼를 열고 배낭 속에 손을 넣어 두유를 찾는데 다시 유성이 떨어진다.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린다.큰곰자리 부근으로도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큰곰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북극성을 오매불망하는 듯한 눈매가 큰곰으로부터 전해져 온다.거듭 긴장이 몰려온다.오늘을 마지막으로 삼십 년 후에나 찾아올 사자자리 유성우다.모(母)혜성의 궤도 문제로 삼십 년의 주기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바 있다.무엇이든 머문다는 건 좋지 못해.머물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봐.무슨 일이 있어도 유성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싼다.김 선배가 일러주었듯,아니,그녀가 전하는 어느 화백의 말처럼 하늘은 곧 오랜 세월 품어온 정한(情恨)을 차가운 땅덩이를 향해 쏘아댈 것이다.정한이란 비타민E 다음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비타민F와 같은 인생의 알 수 없는 영양소일지도 모른다고 천경자 화백이 말했지.그 여자,아니,그 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참 재미있게 표현했었어.전시회 작품들이 대부분 오로라와 같은 몽롱한 색채로 표현돼 있었거든.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오로라를 목격했다는데,글쎄,갓 잡은 등 푸른 생선이 파닥이는 것 같더라나? 화가의 표현치고는 좀 어수선하게 느껴지지 않아? 김 선배는 말을 마치자마자 상념에 사로잡힌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김 선배의 시선은 언제부턴가 내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또 그 사람 생각하는군요? 김 선배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망원경에 눈을 들이대는 김 선배의 모습이 왠지 어색했다.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표정이었다.그런 식으로 시치미 떼지 말아요! 내뱉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서 빙빙 돌았다.김 선배는 접안렌즈에서 눈을 떼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사람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서도 머물지 않으려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상념을 자르려는 듯 의외의 말을 던졌다.성우야,횡성에 가자.너도 태기산에 간 적 있지? 나는 한참 뒤에나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렇지 않아도 오리온자리 일주 사진을 찍을 곳을 찾고 있었어요.그래요,가요.김 선배는 바지 주머니 속에서 밀황색 호박을 꺼내 코에 가져다 댔다.그래,가.가보고 싶던 곳이었어.“얘,두유가…….” 느지감치 할아버지 손에 두유를 쥐어드린다.옷깃에 달라붙은 검불을 떼어내고 버름한 방한복을 여며드린다.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라이트 버튼을 누르자 액정 화면이 흐릿하게 빛을 발한다.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노출 시간을 체크하고 카메라로 다가간다.노출 시간을 또다시 오버한 감이 든다.필름을 새로 갈아끼운다.때마침 희미한 유성 하나가 떨어진다.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연속 촬영을 한다. 다시 한 마리가 떨어진다.제법 모양을 갖춘 놈이다.운이 좋으면 긴 유성흔을 잡은 사진을 현상할 수 있을 듯하다. “땃땃하게 데운 베지밀이 최곤데 말씀이야.그,병에 든 거 말이다.” 카메라의 구도를 바꾸어본다.이번엔 복사점을 중심으로 앵글을 잡지 않고 주변의 별자리를 중심으로 구도를 잡을 생각이다.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놈들이기 때문에 천구가 모두 피사체다.사진으로 태어난 녀석들이 깨알과 같이 작다 하더라도 사진을 현상하는 동안만큼은 현장에서 느꼈던 흥분이 다시 살아나 그야말로 황홀하다.마지막이라는 말이 얼마나유혹적인지 알아? 올해를 마지막으로 그놈들을 잡을 수 있는 해는 아마도 네가 두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거나 손자도 볼 수 있는 시간들을 다 겪고 나서야 올 거야.군침이 돌지 않니? 장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유성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거의가 떨어져서 그다지 훌륭한 사진은 찍을 수 없을 거야.운이지,뭐.노벨이 태어난 해엔 한 시간 동안 무려 만 개 이상이 떨어졌다는데…….성우야? 김 선배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꼭 갈 건가요? 김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나를 가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성우야?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선배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나,인도에 갈까?” 그 사람 인도에 없다면서요? 아직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김 선배는 다소 신경질적인 내 물음에 뜬금없이,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나는 그녀의 얼굴빛에서 장난스럽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나는 내가 말했어야 하는 부분을 모욕적으로 도난당한 느낌이 들었다.널 좋아하는 것 같아.그녀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땐 수치심마저 치밀었다. “젊었을적엔 참 고왔을 얼굴인데…….에이,모르겄다.늙을수록 애가 돼 간다는데 남사시럽게…….이놈의 나이도 이냥저냥 시들어갈 판인가?” 시계를 들여다본다.12시30분.유성은 카메라를 향해 간헐적인 입김만 뿜을 뿐 탄성을 자아낼 만한 모습은 보여주질 않고 있다.어쨌든 물고 늘어져야 한다.새벽 1시에서 2시 사이가 녀석들이 한꺼번에 태어나는 극대 시각이라는 정보를 굳이 믿으라면 아직 3,40분 정도의 터울이 있는 셈이다.그때에 대비해 아껴두었던 커트필름을 꺼낸다. 갑작스레 휴대전화기가 엉덩이를 간질인다.어머니의 전화다.걱정이 되는 모양이다.할아버지를 잘 모시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이미 내 목소리에서 할아버지의 안전을 확인했을 것이다.할아버지를 내려다본다.할아버지가 나를 따라나선 것에 대한 불만이 가신 것일까.할아버지는 세상을 관조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다리를 절단하고 병원에 누워 계실 때,이제는 바라만 보며 살란다,하면서 관조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다.뭐든 간섭하고 살았는데,이젠 좀 앉아서 쉬어야지.늙어서 다리 쓸 일이 뭐가 있겠어.방바닥에 앉아서 창 밖이나 구경하면 됐지.그걸 관조라고 해도 될 거야.할아버지가 관조라는 말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라 말했을 때,사실 너무 우스웠다.세상에는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 일보다 시기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 법이니까.사학년생들끼리 전시회를 열기로 했어.작년 선배들처럼 여러 가지 테마를 가지고 전시하지는 않을 거야.그만큼 작품이 적다는 얘기겠지.그러고 보면 선배들은 참 대단해.별을 잡아온다는 게 어디 쉬워?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김 선배는 밖을 바라보며 전면 유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뽀드득뽀드득 듣기 싫은 소리가 귓전에 머물렀다.선배는 사진 많이 찍으러 다녔잖아요. “주문하시겠어요?” 검은 에이프런을 입은 여자가 테이블 앞에 섰다. “고작해야 일주 사진이 전부야…….커피 두 잔 주세요…….다른 사람들은 은하며 성단이며 그림 같은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탁자 밑에서 자꾸만 나의 구두코가 그녀의 발을 차고 있었다.그런데도 김 선배는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내가 말을 걸지 않는다면그녀는 그녀의 생각 속에 머물고 말 듯했다. “가끔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어차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말이야.아,계획은 세웠니? 유성우 말이야.할아버지 사고 때문에 작년에 찍지 못했잖아.맞다,할아버지는 괜찮으시지?” 플레이트를 돌아본다.아무래도 좁은 플레이트 위에 넉 대의 카메라는 무리이지 싶다.사진 주변에 수차(收差)가 나올 것을 감안해야 할 듯하다.옆 카메라의 릴리즈가 들어올 것도 예상해야 할 판이다.사진 표면에 검은 줄이 생길 것이 뻔하다.필름을 스캔하고 이미지 처리를 한다고 해도 작품의 질은 떨어질 것이다.망원경과 카메라를 부착하는 방법을 시도하기로 한다.카메라 한 대를 들어 망원경 앞으로 가져온다.신발 끈을 끄른다.망원경의 접안부와 카메라의 렌즈를 맞대고 신발 끈을 감는다.왜요,필요한 거 있으세요? 할아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요 좀 보련다.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해요.” 할아버지는 배낭을 걸어 놓았던 나무로 절뚝절뚝 다가간다.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크다.늦었구나! 지도교수가 내 어깨를 치고 홀을 빠져나갔다.몇 작품 전시하지 않은 전시회 치고는 꽤나 엄숙한 분위기였다.선배들의 사진전은 ‘우주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열렸다.‘끝의 향연’이었던 작년의 제목에 비하면 꽤나 성의가 없어 보이는 제목이긴 했다.사진전은 학교 도서관 입구의 홀에서 개방적으로 열렸다.얼마 안 되는 작품이 전시되었다고는 하지만 안드로메다은하나 플라아데스 성단 사진은 그 몇 안 되는 작품들까지 빛내기에 충분했다. “겸연쩍긴 하지만,그래도 차지 않은 달이 더 정이 간다니까.” 달은 고개를 젖힌 할아버지의 코끝에 붙어 있지만 바람에 끄덕이는 나뭇가지 탓에 자꾸만 명멸한다.‘달과 금성의 일주,강원도 횡성군 태기산,올림푸스 OM-1,45㎜ 광각렌즈…….’ 공책 크기만한 사진 속에 지평선을 향해 사선을 내리긋는 달과 금성의 일주가 힘차게 다가왔다.개똥벌레 일주 사진,감히 반딧불로 별을 대적하다니……. “성우야.” 어느 결에 김 선배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나는 사진 속의 달과 금성을 머릿속에 그려진 반딧불과 견주어 보았다.미친놈!“늦었구나?” 김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선배는 자신의 사진을 한번 훑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횡성에 가본 적이 있군요? 나는 물으려다 말았다.실망했지? 사진을 찍을 때도,인화할 때도 온통 딴생각이었으니…….괜찮아요.개똥벌레 같지 않은데요,뭘.정말 괜찮아요.나는 김 선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입아귀를 부풀렸다. “괜찮으면,너 가질래? 지금 가져가도 돼.” 김 선배가 조용히 물었지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때부터 김 선배의 입도 열리지 않았다.그녀는 홀 주위를 돌기만 할 뿐이었다.나는 김 선배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김 선배는 ‘개똥벌레의 일주’가 놓인 이젤을 무려 다섯 번이나 거치면서도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나는 그런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선배 사진을 내가 어떻게 가져요,하고 되뇌기만 했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 김 선배가 자신의 사진을 들고 돌연 도서관을 빠져나갔을 때에도 내 입 속에선,선배 사진을 내가 어떻게 가져요,하는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바다뱀자리와 큰개자리의경계선 부근에 섬광이 스친다.지평선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한참 만에 나타난 녀석이지만 그다지 반갑지 않다.기대를 많이 한 탓이다.플레이트 앞에 선다.50㎜ 표준렌즈를 광각렌즈로 교체한다.필름을 빼내면서 웬일인지 작품다운 작품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46도 화각으로 유성을 잡는다는 것이 무리이지 싶었다.새 필름으로 갈아끼운다.이번엔 초점비에 따라 4분에서 8분씩 노출을 주기로 한다.버름했던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망원경으로 다가간다.경통에 키스하고 힘겹게 매달려 있는 카메라로 눈을 가져다댄다.잘 보여? 힘없는 목소리로 김 선배가 물었다.오늘따라 잘 잡히지 않네요.횡성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무엇인가가 불안했다.달의 상을 또렷하게 끌어오는 것마저 힘에 부칠 정도로 불안이 온몸을 휘감았다.잘 안 되니? 김 선배는 까치발을 하면서 재킷 주머니에 손을 꼭 찔러 넣었다.천문학도 아닌데 왜 그렇게 쩔쩔매? 천문학이면 괜찮게요? 이건 완전히 막노동이니…….안 되겠어요.카메라 좀 가져다 줄래요? 그냥 찍어야 할 것 같아요. “왜,내가 있어서 그래?” 카메라를 받아들려고 했지만 김 선배는 잠시 악력을 썼다.카메라가 중요해,내가 중요해? 나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장난스레 되물었다.선배는 아빠가 좋아요,엄마가 좋아요? 김 선배가 갑자기 카메라를 놓아 버리는 바람에 몸이 뒤로 밀렸다.두 시간 동안 노출할 거니까 지겨워도 참아요.김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망원경 접안부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셔터를 누르자,김 선배가 대뜸 딸꾹질을 토해냈다.나 몰래 뭐 훔쳐 먹었어요? 나는 배낭으로 다가가 보온병과 녹차 티백을 꺼냈다.자,마셔요. “자연현상이라는 게 그 자체로 인간에게 많은 감상을 주는 거 같아.” 김 선배에게 녹차가 담긴 잔을 건넸다.안 좋은 부분이 있다면 때론 인간을 징벌하기도 한다는 점이죠.김 선배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래,맞아.때론 징벌하기도 하지.그걸 피하는 방법은 뭘까? 나는 김 선배를 돌아보았다.피할 수 없어요.다만,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답일 뿐이죠.감상만 쫓아가지 말아요,제발! 그러다간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징벌을 안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뱉어내고 싶은 말이었지만 긴 한숨으로 대신했다.프로키온,외로운 별이야.김 선배는 감상에 빠지고 있었다.그녀는 겨울의 대삼각형을 연거푸 그려댔다. 김 선배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댄 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그녀가 대뜸 일어섰다.우리 그만 내려가자.나 너무 피곤해.나도 모르게 김 선배를 쏘아보고 있었다.피곤하다니요? 올라온 지 고작해야 한 시간 지났는데.노출 끝내려면 적어도…….김 선배는 기필코 가야 한다는 표정이었다.그녀의 눈을 다시 한 번 뚫어지게 쏘아보았다.일단 내려가자.김 선배는 무턱대고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선배님,지금! 김 선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선배,이건 반칙이에요.여기까지 와서 그냥 내려간다는 건…….저따위 별들이야 언제라도 볼 수 있어! 그녀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왜 그래요? 미안해,그냥 내려가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성우야,넌 여기가 어디 같니?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봤는데,아무래도 이상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할아버지가 묻는다.주위를 둘러본다.내 눈엔 그저 낮은 산언덕으로만 보인다.무슨 겁을 주시려구요? “모르겠니? 난 아무리 봐도…….” 안 갈 거예요? 김 선배는 ‘횡성여관’ 앞에 섰다.그녀는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여관이라는 글자에서 ‘관’자의 네온사인이 끔벅이며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차 있는 곳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돼요.빨리 가요,선배! “나…….나,여기 예약했어.” 예약요? 여관도 예약이 돼요? 응,오래 전에…….할아버지 손끝에서 라이터 불꽃이 번뜩인다.깊은 고랑이 팬 이마 위에 돌연 플라아데스 성단이 나타난다.영묘한 빛을 산란하는 산개성단.할아버지는 담배를 문다.성단이 단박 사라진다.담배! 손전등을 켜고 할아버지를 향해 불빛을 겨눈다.담배요! 나도 모르게 뱉어버린 소리가 맞은편 산허리에 부딪힌다.어이없이 큰 내 목소리에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툭 불거진다.죄송해요,전 다만……. “다시 한 번 비춰보거라…….아무래도 무덤자리 같은데.” 할아버지는 손가락을 펴고 팔을 뻗어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린다.손전등 불빛이 할아버지의 손끝을 따라간다.어느새 이슬이 맺힌 언덕 주위가 불빛에 번뜩인다. “그래,맞다.무덤자리가 확실해.둔덕이 좀 진 곳이 있잖니? 오래 돼서 다 깎여 내려갔지만 그것이 봉분이고…….” 할아버지는 이번에 두 팔로 허공을 감싸는 시늉을 한다. “양쪽의 활이 엉성하게나마 살아 있잖니.저 봐라,가지가 이리저리 벌어지긴 했지만 묘목도 있잖아.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다시 주위를 비추어본다.엉성한 이팝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그루씩 자라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신경을 좀 쓰지,죽어서도 한이겠구먼.” 네,그런 것 같네요.할아버지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가 하늘로 고개를 든다.때를 맞추어 북두칠성의 국자 옆으로 상당히 밝은 유성이 떨어진다.준비해 두었던 커트필름으로 모든 카메라의 필름을 교체한다.하늘은 등갓이 손톱에 찢긴 순간처럼 번쩍 발한다.긴 유성의 꼬리가 눈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긴 궤적을 남긴 유성은 할아버지가 등진 산의 허리춤에 박히면서 소리 없이 부서진다. 망원경 접안부에 맞댄 카메라의 필름도 커트필름으로 교체한다.망원경과 카메라가 불안하게 맞대어져 있다.상이 선명하지 않잖아! 자,다시 해보자.김 선배가 내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처음엔 다 그런 거야.심호흡하고 다시 해봐! 천천히! 여자 다루어본 적 있을 거 아니야! 그래,천천히 렌즈를 돌리면서…….상을 잡아야 사진이든 뭐든 나올 거 아니야! 다시,다시! 신발 끈을 다시 단단히 매고 상이 선명해지도록 접안렌즈를 천천히 조정한다.무한대를 응시해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피하려면 파인더를 보면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그래,그래야 한다.파인더에 들이댄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아랫입술을 꼭 깨문다.다시 상이 가능한 한 선명할 때까지 망원경 접안렌즈의 초점을 맞춘다.카메라에 눈을 들이댄다.전망이 별로 감동적이지 못하다.다시 망원경의 초점을 정밀하게 맞춘다.들어온다.선명해진다.조리개를 최대한 개방하고 최대한의 노출을 유도한다.긴장이 밀려온다.검지에 힘을 주고 셔터를 누른다.순간 내 행동에 대한 반감 섞인 생각이 스친다.우주는 가만히 있어도 가슴에 소지할 수 있다는.그것 봐,하면 되잖아.어,언제 왔어요? 김 선배가 남자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나는 스스로 거역하고 있었다. “가만,그러고 보니,내가 죽은 이 위에 버릇없이 앉아 있었네 그려.” 할아버지는 승창을 들고 망원경 쪽으로 다가와 앉는다.배낭으로 다가가 녹차 티백과 두유를 꺼낸다.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간다.꼭 다시 한 번 만나보세요.좋으신 할머니 같던데.할아버지 손에 두유를 쥐어드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차갑지만 폭신한 낙엽방석이다.녹차가 담긴 컵을 가볍게 감싸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영묘하게 빛나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가 동쪽 하늘을 호령하면서 지평선 위에 드높이 떠 있다.궁수자리의 남은 마지막 밝은 별들이 서서히 지고 있다.켄타우루스와 남십자가자리의 별들 그리고 에라다누스강자리의 아케르나르가 남쪽 하늘에 깊이 박혀 있다.할아버지,돌아가는 길에 온천욕이라도 하시겠어요? “아니다.온천은 무슨…….” 들추어진 할아버지의 바짓부리를 정리해드린다.차갑고 딱딱한 의족이 손끝에 느껴진다.할아버지가 내 어깨 위에 천천히 손을 얹는다. “힘들여서 만나봐야 게 잡아 물에 넣는 꼬락서니지.안 그러냐,성우야?” 죄송하지만,삼백이호실로 방 하나 더 주세요.돈을 지불하고 김 선배의 뒤를 따랐다.층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벌건 융단을 뒤덮고 지루하게 이어졌다.관측장비가 무거운 탓인지도 몰랐다.삼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김 선배는 다시 딸꾹질을 토해냈다.미안해,괜찮아질 거야.나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나는 그녀가 괜한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 선배와 나는 삼백일호와 삼백이호 앞에 나란히 섰다.선배의 옆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그녀는 문을 향해 다시 한 번 딸꾹질을 토해냈다.괜찮아,정말이야.그녀에게 열쇠를 건네고 문손잡이를 돌렸다.꼭 자고 가야겠어요?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잖아요.더군다나 차도 있는데…….김 선배는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목에 걸린 호박을 떼어 내 앞에 들이밀었다.짐짓 어색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깔려 있었다.미안해…….오래 머물 것 같지는 않아.무엇이든 오래 머문다는 건 좋지 못해.기억이든뭐든…….그녀는 내 손바닥 위에 호박을 얹어놓고 꼭 쥐어주었다.호박이야.발트해의 상징이래.독일에 사는 이모가 보내줬는데 이젠 필요 없게 됐어.직접 가서 캐보려구…….이왕이면 북해까지 돌아볼 생각이야.보트니아만을 거쳐 핀란드만까지…….독일 북동부에 있는 발트해 연안 도시라는데.주 이름이…….아주 긴 이름이었는데……. 무척이나 밝은 대화구가 눈에 들어온다.사방이 일순 밝아진다.느낌이 좋다.큰곰자리의 꼬리 부분으로 다시 여러 개의 유성이 빗금을 그으며 떨어진다.곧 큰곰의 머리 부분으로도 유성이 떨어진다.유영하는 연어의 등지느러미처럼 은빛을 산란하며 하늘을 가른다.제법 공격적이다.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쾌감이 전해진다.맞아,포어포메른주였어.독일의 북동부,메클렌부르크 포어포메른주! 망원경 앞으로 다가간다.카메라에 눈을 들이대자 동전 크기의 유성이 망원경 안으로 날아온다.몸이 반사적으로 꺾인다.조금만 참으세요,할아버지.이것만 찍으면 다 되니까.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한다.카메라에 키스한다.너만 믿으마.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할아버지 등뒤로 다가간다. “그놈의 미련이 문제라지…….성우야,등나무집 할머니가 만나는 주겠지?” 나는 할아버지 등뒤에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때마침 유성의 꼬리가 할아버지의 긴 하품 소리를 따라 하늘에 은회색 칼날을 하늘에 긋는다.뒤이어 서너 개가 더 떨어진다.지평선 어딘가에 떨어졌을 유성의 잔상이 오래도록 눈 속에 남는다.무덤 주위를 둘러본다.하필 그곳에 가겠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호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그곳이 한때는 슬라브족의 요새였다는 거야.맞아,슬라브족의 요새.한자동맹이란 것도 그곳에서…….엉터리 수작 말아요! 입이 열릴 뻔했지만 참았다.내 손으로 호박을 채취하고 싶은 게 꿈이야.고대 생물이 들어 있는 호박 말이야.난…….김 선배는 말을 멈추고 문손잡이를 잡았다.잠깐만요! 김 선배는 여관 복도가 울릴 만큼의 내 부름에도 놀라지 않은 듯했다.김 선배는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망울에 작은 프로키온이 나타났다.우는 거예요,지금? 그녀는 다시 딸꾹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이거요,잘 구경했어요.아무리 찾아도 개똥벌레는 없던데요.나는 돌돌 만 ‘달과 금성의 일주 사진’을 점퍼에서 빼내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나,잠깐 약국에 좀 다녀올게.기다리지 말고 자.” 김 선배는 사진을 받지 않았다.나는 호박과 돌돌 만 사진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말해줘요! 아니야,내가 갔다 올게.먼저 자고 있어.그녀는 이미 층계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나는 슬라브족도 한자동맹도 아닌,김 선배가 그곳에 가겠다는 이유만을 알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기침이 다시 시작이다.할아버지를 돌아본다.할아버지의 발 앞으로 낙엽 더미가 굴러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흡사 융단이 말리는 듯하다.굴러간 양만큼의 낙엽이 또다시 굴러오는 모습이 할아버지의 발 아래 펼쳐진다.그믐달로 날아간 낙엽들이 한점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진다.주머니에 손을 넣는다.호박이 느껴진다.호박 속에 갇혀버린 것은 나일지 모른다.손님,삼백일호 손님,안에 있어요? 복도 끝,창유리를 통해 어슷하게 비쳐든 새벽의 푸른 기운이 물 위에 떠가고 있었다.발트해,삼백일호 문 아래로 차가운 해수가 밀려나오고,나는 그 위에 밤새 쥐고 있던 호박을 떨어뜨렸다.점벙! 발끝으로 밀려온 해수를 나는 나도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김 선배는 결국 호박을 캐러 떠났다.손님,손님! 이봐요! 하늘을 올려다본다.동쪽 끝에 겨우 고개를 내민 시리우스에 손가락을 찍는다.천천히 베텔게우스와 연결하고 프로키온으로 옮긴다.다시 시리우스로 손가락이 이동하지만 그만 손가락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만다.나는 겨울의 대삼각형을 그릴 수 없는 모양이다.곧 겨울이 찾아올 테지만 그때에도 삼각형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관측일지를 꺼내든다.11월19일,사자자리 감마성 부근을 복사점으로 20여 개의 유성 출현.30년 후에는…….호박을 꺼내 코밑에 가져다 댄다.발트해의 짙푸른 해수가 밀려간다.로스토크,그녀는 결국 그곳에 가고 없다.
  • 최인호가 말하는 ‘소설 儒林’/ “퇴계·조광조를 招魂하리”

    ‘유림(儒林)’에 대한 구상은 12,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나는 그 무렵 경허를 주인공으로 하는 ‘길 없는 길’이란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었다.인도에서 출발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해동(海東)인 우리나라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 사실을 소설로 쓰면서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는 불교뿐 아니라 또 하나의 원형질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그것이 바로 2500여 년 전 중국에서 공자로부터 비롯된 유교(儒敎)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피 속을 흐르는 또 하나의 원형질인 유교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고는 우리의 민족성을 파헤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10년 전 이미 두 차례나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와 공자의 사당이 있는 태산에 올라 사전답사를 하면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공자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소설의 제목을 미리 정해두었는데,그것이 바로 ‘유림(儒林)’이었다. ●10년전 공자유적 답사… 구상 마쳐 보통 소설을 쓰다 보면 제목을 정하기가 가장 어렵고,소설을 다 쓴 후에도 제목을 못 정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통인데,‘상도(商道)’ ‘유림(儒林)’과 같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을 미리 점지해 두는 것처럼 제목이 미리 떠올라 오랫동안 마음 속에 화두처럼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써야지 하고 구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막상 소설로 형상화되는 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맞닿아야 한다.마치 봄이 되어야만 꽃이 피고,가을이 되어야만 열매 맺듯 소설에도 제 나름대로의 때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상도’ 역시 십여 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소재가 마침 연재 중에 IMF 사태가 터지고 역시 12,13년 전부터 구상해 두고 있던 유림이 2004년 오늘날에야 시작되는 것을 보면 해산의 진통을 거쳐야만 아이가 태어나듯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인 원효(元曉)를 탄생시킨 것처럼 유교 역시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인 퇴계(退溪)를 낳았다.석가모니의 불교가 원효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면 공자의 유교 역시 퇴계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원효와 이퇴계라는 불세출의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한 유례없는 정신적 문화국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 현실은 어떠한가. ‘동방예의지국’이란 이름의 찬란한 정신적 유산은 무례와 부도덕으로 얼룩지고 개국 이래 이처럼 정치가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다.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청렴하고,청빈하고,나라에 충성하고,꼿꼿한 자존심으로 무장하였던 ‘선비’사상을 낳은 국가의 이념은 부정부패한 관리들과 국민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어두운 공복(公僕)들에 의해서 혼동과 무질서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국민에 바보 지도자라니 아아,이처럼 위대한 국민에 어째서 이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바보,바보,바보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한 사람의 개인에게는 인격이 있듯이 한 국가에도 국격이 있는 것이다.이러한 인격이 그 사람의 인간성(人間性)을 이룬다면 이러한 국격을 가진 국민들이 그 나라의 국민성(國民性)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격은 어떠하고 우리의 국민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계적 성리학자 이퇴계의 초상은 천 원짜리 화폐 속에서만 존재하고,이율곡의 초상 역시 오천 원짜리 지폐 속에서만 존재하는데,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자장면을 먹고 지불하는 화폐 속에 그려져 있는 그 인물이 누구며,어떤 사람인가를 알고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에 젖어 이퇴계의 사상보다는 이퇴계의 얼굴이 그려진 그 화폐만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광조(趙光祖).성종13년(1482년)에 태어나 중종14년(1519년),37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치개혁자.썩어 빠진 정치를 바로잡으려다 실패하였던 이상주의자,조광조 역시 유교의 사상으로 나라를 구하려 하지 않았던가. ●조광조 못다이룬 정치개혁의 꿈 담을것 그의 나이 33세 때 중종은 직접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에 나아가 다음과 같은 알성문과 시험문제를 냈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그러니 그대들은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조광조는 그 유명한 답안을 쓰기 시작한다.“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임금과 백성 역시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우리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아아,나는 작가로서 이 혼란한 시대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처럼 나약한 손을 들어 글을 써 헌정함이니.공자여,과연 그대가 이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에 다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수년 안에 우리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조광조여,과연 그대가 오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국민을 위한,국민의 정치를 펼칠 수 있겠는가. 내가 굳이 박수무당이 되어 공자의 혼을 불러들이고,이퇴계와 조광조를 초혼(招魂)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니.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나폴레옹에게 패망한 독일 국민들에게 ‘독일 국민들에게 고함’이란 글을 썼다.비탄에 빠져 있는 독일 국민들에게 ‘불행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나도 감히 내 사랑하는 조선민족들에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글을 바치려 함이니.오마니,아부지,누이야,우리 이제 오마니 등에 업고,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검둥개 앞세우고 달 마중가자.그 효(孝)와 그 충(忠),그 예(禮),그 경(敬)으로 가득 찼던 숲으로 가자,유림의 숲으로 가자.
  • 정호승씨 동화·산문집 동시 출간

    웬지 슬픔이 떠오르는 시인,그러나 그 빛깔은 우울하지 않고 내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연노랑빛의 시인.대표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비롯,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에서 따스한 ‘슬픔의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정호승이 최근 ‘스무살을 위한 사랑의 동화’(해냄)와 산문집 ‘정호승의 위안’(열림원)을 동시에 내놓았다. ‘스무살…’은 시인이 막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보내는 문학적 메시지다.시인이 보는 20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고 오직 사랑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기쁨만으로 충만한 때”다.시인은 이 ‘빛나는 시절’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차근차근 들려준다. 1권에 실린 29편은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한 작품들이다.고슴도치와 다람쥐의 애틋한 사랑,참문어와 풀문어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 등을 징검다리 삼아 시인은 사랑의 애환을 빚어낸다.2편은 사랑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31편의 동화를 실었다.시인은 플라스틱 장미와 생화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거나(‘조화와 생화의 대화’),장미의 이름은 바꾸어도 향기는 지울 수 없다는 이야기로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장미의 향기’)을 넌지시 알게 해준다. 이처럼 ‘…동화’는 벌,개구리,검은툭눈금붕어 등 다양한 소재를 등장시키면서 막 어른이 되는 이들에게 쉽고 부드러운 형식으로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러나 달콤한 사탕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시인은 자주 매콤하고 아린 ‘고통의 힘’을 이야기한다.예컨대 바람의 시련을 견뎌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음을 전하는 ‘은행나무’나 어린 매화나무에게 추위의 의미를 들려주는 엄마 매화나무 이야기를 인용한 ‘겨울의 의미’ 등에는 아픔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사랑이나 삶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는 따끔함도 전해준다. 이런 생각의 씨앗은 산문집 ‘…위안’에도 묻혀 있다.이미 발표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에다 25편의 새 글을 보탠 이 산문집에서도 시인은 “고통이 없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사랑은 고통이다.”(135,136쪽)라고 ‘고통의 미덕’을 노래한다. 아울러 산문집은 시인의 내면 세계를 자상하게 보여준다.그 여정에서 자신의 시를 낳은 다양한 공간을 찾아다닌다.또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시인은 죽어서도 시를 쓴다.”(135쪽)는 사실을 깨달았고,이육사의 삶 앞에서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 하는 문제는 어떠한 작품을 썼느냐보다도 더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138쪽)고 고백한다.그의 독백을 따라다니며 따스한 시인의 육성을 듣노라면 어느새 메마른 가슴이 촉촉히 젖어온다.“사람마다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지니고 있다면 이 글들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위안의 말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종수기자 vielee@
  • [녹색공간] 삶과 죽음의 공존

    얼마 전,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안방에 모셔둔 채 6개월을 함께 살았던 중학생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이웃간의 왕래가 없는 세태를 한탄하기도 하고,소년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기도 했으며,결국은 따뜻한 인정을 모아 소년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함께 사는 이웃의 역할을 다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을 그리 간단히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그렇다고 이 사건이 주는 정서적 떨림을 그대로 가라앉히기에는 주검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너무 예민하다. 썩어 들어가는 어머니의 주검 곁에서 일상을 살았을 소년에게 죽음이란 떠나감이나 이별이 아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살아내야 할 일상의 짐이 조금 더 무거워졌음을 의미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그렇게 그는 썩어가는 주검 곁에서 죽음과 함께 반년의 삶을 푹푹 삶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행동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담아낼 문화적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것이다.그러나 이 세상에는 주검과 함께 살아가는 전통을 가진 문화도 많다.함께하는 방식도,부모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보살피는 유교적 전통에서부터,죽은 이의 시신이 새나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함으로써 영원한 자연의 순환에 들도록 하는 장례 풍습,유명인의 시신을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교회에 보관하는 유럽 기독교의 전통,그리고 심지어는 죽은 이의 살을 먹음으로써 그 영혼이 후손의 몸속에서 부활한다고 믿는 식인풍습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이처럼 대부분의 전통문화에서는 죽음을 우리의 삶과 매우 가까운 곳에 두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죽음을 가능한 한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려고 한다.공동묘지는 깊은 산 속에 있어야만 하고,화장장이 들어설 예정인 곳에서는 연일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으며,죽은 사람의 모습은 TV 화면에서도 모자이크 처리되어 일상과 격리된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라도 임종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서 인생을 정리하던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집에서 요양하던 환자라도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빠지면 병원으로 달려가게 마련이고,거기서 온갖 기계에 매달린 채 죽음과의 전투를 치르다가 최후를 맞는 것이 당연시된다.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니라 공포의 상징,극복해야할 대상,심지어는 무찔러야 할 적으로까지 여겨진다. 이처럼 죽음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낳는다.그래서 삶과 죽음은 연속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양 극단이 되어버린다.죽음의 시점을 뒤로 미루는 각종 의학기술이 발전하고,심지어는 영원히 살기 위해 유전자가 동일한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제 삶은 질이 아니라 양으로 평가된다.그리하여 더 많은 삶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진다.생명은 곧 투쟁에서 쟁취한 전리품의 양으로 평가되며,죽음은 이 투쟁에서의 패배일 뿐이다.원래 하나였던 생명이 이제는 너와 나의 생명으로 분열되고,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삶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생명의 황폐화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철저히 부정하고 지나치게 삶에 집착한 결과다.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는 것을 생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또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보다 능동적으로 그 죽음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그러기 위해 먼저 죽음에 덧씌워진 음습한 이미지를 털어내고 그것과 친해지는 연습을 시작해야겠다.본래 생명이란 삶과 죽음의 절묘한 조화가 아니었던가. 강 신 익 인제대 의대교수 의철학
  • [2003 사건속 인물](5)수지김 유족들 배상판결 이후

    넉달 만에 만난 김옥경(46·여·서울 강동구 둔촌동)씨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17년 동안 ‘간첩 가족’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온 통한의 세월이 배상판결 하나로 위로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며칠 전 김씨는 마침 집을 찾은 여동생 옥희(36·충북 충주시)씨와 함께 언니 수지김(본명 김옥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겼다. 김씨는 집에서 쉬고 있는 남편 등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웃 ‘반찬가게’에서 밤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 돌아왔다.올해 달라진 것이 있느냐고 묻자 “정부의 무신경이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홍콩의 언니 무덤으로 데려가 실컷 울게 해준다던 정부와 국정원이 지난 8월 배상 판결 이후 아무 말이 없어요.몇 차례 독촉했지만 ‘알았다.’고만 할 뿐이에요.” 그는 “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이라도 홍콩으로 가고 싶지만,무덤이 군사지역 안에 있어 정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진솔한 사죄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돈 받고 떨어지라.’는 식의 반응에 화가 치민다.”며 울먹였다. 수지김의 둘째 동생인 그는 가족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지난 8월14일 승소,42억원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받았다.국민들은 살인자와 야합한 국가기관에 뒤늦게나마 책임을 인정한 데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김씨는 “언니의 원한을 풀고 법원의 판결이 좀더 떳떳해지려면 ‘공소시효’가 폐지돼 사건을 은폐·조작한 책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김씨는 “언니와 같은 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가족이 공소시효법 하나는 바꿔 놓았어야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김씨의 여동생 옥희씨도 “국가기관에 살인 면죄부를 주는 악법을 없애지 못하고 한해가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고 말했다.김씨와 동생들은 올 한해 국회의사당을 밥 먹듯이 찾아가는 등 공소시효폐지 운동을 벌였지만,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김씨는 풍비박산난 가족 생각이 간절하다.이역만리 타향에 누워 있는 언니,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홧병으로 숨진 어머니,술로 화를 삭이다 교통사고로 숨진 오빠,그리고 정신병을 앓다 숨진 큰 언니.김씨는 “오는 24일 충북 청주 창용사에서 기일이 비슷한 언니와 아버지,어머니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기로 했다.”면서 “가족 대부분이 사건 후유증으로 이혼을 당하거나 집에서 쫓겨나는 등 피폐한 삶을 살아 왔지만,이날만큼은 모두 모여 새해 새로운 삶을 기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반인권적인 국가범죄는 올해로 막을 내렸으면 한다.”면서 “새해에는 인권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받은 42억원 중 일부를 인권옹호를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적당한 사용처를 궁리 중이다. 이영표 기자
  • [2003 사건속 인물](3)‘지하철참사’ 故이현진양 어머니

    “그동안 잘 있었니.이곳에는 벌써 눈이 내렸구나.춥지는 않니?” 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난 2월18일 오전 10시3분 불이 붙은 1080호 죽음의 전동차. “안돼 엄마.이러면 안돼.”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만 남긴 채 이현진(19·대구외국어고 3년)양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현진이는 아버지 고향인 경북 청송의 작은마을 산자락에 가 있었다.‘작은 시지프스 이현진 잠들다.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학번 2003-10713)’이라 적힌 묘비명 위로 겨울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엄마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구나.단 한번이라도 너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현진아 현진아…” 대구에서 2시간여 가파른 산길을 달려온 이숙자(45·남구 대명동)씨의 눈가에는 금세 이슬이 맺혔다.그녀는 지난 3월3일 딸의 영정을 끌어안고 서울대 입학식에 참석해 자식을 가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울려버렸다. “대학생이 된다며 입학식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네가 왜 여기 누워 있느냐.현진아 현진아…” 물을 찾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 하나를만들어주기 위해 아무리 밀어올려도 다시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영원히 밀어올려야만 했던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를 좋아했던 소녀.직업 외교관이 돼 유엔본부에서 코리아를 위해 일하겠다는 당찬 꿈을 키우던 현진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니.낮에는 네가 좋아하던 시도,노래도 불러보고 밤에는 밤하늘의 별도 헤아려 보려무나.” 현진이가 떠난지 300여일.주말이면 어김없이 현진이를 찾아와 눈물을 쏟아내는 애절한 모정은 아직 딸을 못 보내고 있었다.친구들도 아직 현진이를 떠나 보내지 못했다.“현진아 조금만 기다려.곧 너의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가 생길 거야.” 친구들은 내년 봄 현진이를 위해 무덤가에 시지프스 상을 세워주기로 했다.“현진아 너의 바위는 지금 어디쯤 오르고 있니.힘들지 않니.엄마가 한번만이라도 밀어줄 수만 있다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애절한 모정은 짧은 겨울해가 아쉬운 듯 오랫동안 딸의 무덤가를 서성거렸다.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불타버린 역사는 다시 단장되고 멈추었던 지하철은 다시 달리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의 시계는 아직도 잔인했던 2월에 멈추어 있다.우울증에다 아직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부상자 148명에게도 그날의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17일 대구에서는 학계,종교계,시민단체 등이 아직도 안전을 나몰라라하는 당국을 더이상 못 믿겠다며 ‘대구지하철안전시민연대’를 결성,가연성 전동차 내장재의 조속한 교체를 촉구했다. 글·사진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 간이역등 29곳의 공간 문학적 서정으로 메워/최재봉 ‘…사이버스페이스까지’

    간이역,카페,절,무덤,사막,숲…. 우리 문학에 풍부한 자양분을 공급해온 소재들이다.어쩌면 우리 문학사는 그 ‘빈 사이(空間)’를 나름대로의 서정과 상상력으로 메워온 숱한 작가들의 고백이 아닐까? 이룸출판사에서 나온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최재봉 지음)는 그 공간들을 다룬 다양한 작품들을 저자가 발로 누빈 기록이다.10여년 동안 한겨레신문 문학기자였던 그가 연재한 기사를 바탕으로 새로 잇고 누비고 한 이 글은 같은 ‘틈’이 보기에 따라서 얼마나 다채롭게 변주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공간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빈집’을 비롯한 29곳의 공간을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동일한 공간을 채우는 다양한 목소리의 작품들을 일일이 캐낸 저자의 열정이 묻어있다. 예컨대 저자는 ‘포장마차’라는 공간에서 시인 안도현의 ‘숭어회 한 접시’와 임영태의 ‘포장마차’에 담긴 “매혹적 자태”를 끄집어 낸다.이어 김승옥의 단편 ‘서울,1964년 겨울’의 한대목으로 안내한 뒤 포장마차가 지닌 매혹의원인을 “따스한 인정,낯선 사람들끼리의 의기투합” 등으로 분석한다. 저자의 공간을 통한 문학보듬기는 다양하다.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에서 저항의 상징은 문학.투옥된 문인들이 유달리 많았던 터라 ‘감옥’은 문학의 단골 소재였다.그 곳은 “억압적인 현실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상징”(김지하)하거나 ,“확고한 투쟁 의지로 강고한 성채를 이루면서도 뜻밖의 따뜻한 서정성을 발휘”(김남주)한다.여기에 송기원·김영현·황석영의 경우처럼 빼어난 작품을 낳은 ‘문학적 자궁’이기도 하다는게 저자의 시선이다. 이종수기자 vielee@
  • “백제유적 종합전시장”수촌리유적 발굴지도위원회 열려 1호분서 금동허리띠 등 추가 발굴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백제무덤 발굴이라는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유적의 발굴성과와 앞으로의 조사방향을 점검하는 지도위원회가 10일 현장에서 열렸다.참석자들은 현장과 출토유물을 둘러보고는 “백제유적의 종합전시장”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언론에 보도된 것 이상으로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표시했다. 지도위원회에는 유적의 중요성을 보여주듯 이강승 충남대 교수 등 지도위원과 이남석 공주대 교수 등 자문위원을 비롯한 고고학 및 역사학자들, 노태섭 문화재청장 등 정부관계자와 보도진 등 2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소의 강종원 연구위원은 현장설명에 나서 “1호분에서 금동허리띠 한점이 추가로 나오는 등 발굴이 진척됨에 따라 유물이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 “일단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기존에 확인된 유물의 수습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장 책임자인 이훈 문화재연구부장은 “2호분에서는 굽은옥(곡옥)이 달린 목걸이와귀걸이 등 백제시대 귀부인이 어떻게 치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왔다.”면서 “특히 피장자의 머리쪽에서 나온 붉은색 구슬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하나인 동수묘의 여인 모습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말했다. 지도위원인 최병현 숭실대 교수는 “이 유적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 백제왕실이 의탁하여 웅진으로 천도할 만한 세력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라면서 “그동안 일본에서는 다수 나왔지만 국내에서는 출토지가 확실치 않아 일본에서 역수입됐다는 설까지 나왔던 호등(등자)이 나온 것도 큰 성과”라고 밝혔다.들떠있는 분위기를 경계하는 지적도 있었다.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분석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이 관장은 “고고학자는 고고학적으로 판단해야지 역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면서 “수촌리에서 나온 유물이 중앙의 사여품이니 하는 것은 고고학자가 할 만한 얘기가 아닐 것”이라며 섣부르게 유적의 성격을 판단하려는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현장에는 주민들도 나와 관심있게 지도위원회를 지켜봤다.한 주민은 “이번에 유물이 나온 문둘기산에는 옛날부터 왕의 무덤이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면서 “40여년 전 이웃한 수촌초등학교를 지을 때도 백제토기가 많이 나왔다.”고 전했다. 한편 공주시청 관계자는 이날 “의당농공단지를 조성하려고 이미 50억원을 들였는데 유적이 발견됐다.”면서 “어려운 지방자치단체의 사정을 감안하여 정부가 이 부지를 매입, 공주시가 농공단지를 다른 곳에 조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참석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공주 서동철기자 dcsuh@
  • “성숙해진 앨런 기대하세요”연극 ‘에쿠우스’ 주연 조재현· 연출 김광보씨

    올 한해 충무로와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낸 두 남자가 만났다.영화배우 조재현(38)과 연극연출가 김광보(39). 조재현은 지난 1월 TV 드라마 ‘눈사람’을 시작으로 ‘청풍명월’‘목포는 항구다’‘맹부삼천지교’ 등 세편의 영화에 내리 출연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며 눈코뜰새없이 지냈다.연극 ‘인류 최초의 키스’부터 ‘산소’‘당나귀들’‘프루프’‘웃어라 무덤아’까지 연달아 5편의 흥행작을 내놓은 김광보도 그에 못지않다. ●최민식 대타로 13년전 5대 ‘앨런' 발탁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이들이 작심하고 의기투합한 무대는 내년 1월29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막올리는 연극 ‘에쿠우스’.지난 20년간 대표작들만 뽑아 연중시리즈로 기획된 ‘연극열전’의 첫번째 대극장 작품이다. 조재현이 13년 만에 주인공 ‘앨런’역으로 복귀하는 데다 근래 가장 주목받는 김광보 연출가가 가세한다고 해서 벌써부터 연극계 안팎의 기대와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8일 늦은 오후,서울 혜화동 연습실에서 첫 대본연습을 막 끝낸 두사람과 마주했다.“오랜만에 대본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조재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그에게 ‘에쿠우스’의 앨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1991년 신인배우였던 조재현은,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의 뒤를 이어 5대 앨런으로 발탁되면서 비로소 배우로서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에쿠우스’는 말의 눈을 찔러 실명하게 한 소년 앨런과 그의 심리상태를 추적하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이다. “그땐 최민식 선배 대타였어요.갑자기 앙코르 공연에 투입되느라 한달도 채 연습을 못하고 무대에 섰는데 그게 무려 8개월이나 가더군요.” 앨런은 당시 모든 20대 남자배우들의 꿈이었고,조재현은 자신에게 다가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은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에게 ‘초심’을 되돌아보게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굳이 더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은 없어요.다만 그때는 어려서 배역을 얼마나 잘 흉내내느냐에 급급했는데 이젠 좀더 진실되게 앨런의 내면을 표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한살차이 20년지기 ‘라이벌로 친구로' 하지만 마흔을 눈앞에 둔 나이에 17살 소년의 감성을 연기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터.김광보 연출가도 처음엔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좀 무리가 아닐까 싶었는데 오늘 첫 연습을 하면서 기우라는 걸 알았습니다.다른 배우라면 몰라도 조재현이라면 가능하구나 싶었지요.” 한살 차이인 두 사람은 20년 지기이다.80년대 중반 조재현은 부산 경성대 연극반 주연이었고,김광보는 가마골소극장의 주연 배우였다.그때 김광보의 연기를 봤던 조재현은 “자존심에 잘한다고는 못하고,참 열심히 하더라는 얘기만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김광보는 연출가로 데뷔하기 이전 배우와 조명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았다. 두 사람은 1989년 이윤택 연출가의 ‘청부’에서 각각 주인공과 조명감독으로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이번에 공동작업을 하게 됐다. ●말의 형상화등 비주얼한 부분 강조 김광보 연출가에게도 이번 ‘에쿠우스’는 새로운 도전이다.1975년 초연 이후 극단 실험극장의 자존심이 된작품에 ‘치기어린 장난’은 하지 않을 생각.“작품 해석을 다르게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합니다.대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대신 말(馬)의 형상화 등 비주얼적인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이전 작품들과 차별성을 만들어내겠습니다.” 이 시대의 명배우 조재현과 흥행연출가 김광보가 빚어낼 환상의 호흡이 벌써 궁금해진다. 이순녀기자 coral@
  • 의당 발굴 싸고 학계 논쟁/‘강력한 한성백제’ 드러나나

    공주 의당 수촌리 백제무덤에서 금동관모와 신발,환두대도,중국 도자기 등이 쏟아져 나오자 학계에서는 ‘백제사를 다시 써야할 발굴’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어떤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지에 이르면 첨예한 시각차이가 드러난다. 한성백제(BC18∼AD475)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 한성지역에서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발굴로 증명됐다고 보는 학자들과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이번 발굴이 백제가 3세기에나 국가체제를 갖추었다는 학계의 기존 주장을 뒤엎고 있다는 점에서 풍납토성 발굴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라고 환영한다.유물이 증명하는 대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이런 정도의 문화를 공주지역에 남겼다면 한성백제의 세력과 역사는 당연히 이에 걸맞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풍납토성 발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은 의당발굴을 역사해석을 위한 재료로 삼기보다는 대거 출토된 화려한 유물과 유례가 드물게 시대적 변천을 보여주는 무덤군(群)을 통하여 당시 사회를 재구성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듯한 인상이다. 발굴작업을 진두지휘한 이훈 충남역사문화연구소 문화재연구부장은 “이번 발굴은 웅진 천도 이전에 백제의 세력이 공주지역에 미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역사적 해석을 배제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도 “수촌리 발굴로 이 무렵 백제가 금강유역 지역에 대한 영역적 지배를 달성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이훈 부장의 의견과 비슷한 것 같지만,한성백제가 이 시기에 근접해서야 공주지역을 장악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 다르다. 반면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공주지역에서 이렇듯 훌륭한 선진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한성백제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그는 닭머리 모양의 장식이 달린 4세기 중국 동진(東晋)시대의 계수호(鷄首壺) 등도 “금강수계를 장악하고 중국과 직접 교역하면서 한성백제의 외곽세력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집단이 공주지역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이번 발굴이 ‘1971년 무령왕릉 이후 최대’라는 신문 및 방송 등 보도기사의 ‘헤드라인’부터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뛰어난 유물이 쏟아진 결과를 축하하는 의미의 단순한 수사이거나,‘충남지역’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런 표현은 1996년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삼국사기에는 공주에서 가까운 지금의 아산 탕정면에 온조가 탕정성을 쌓았고,25년에도 아산원에 사냥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당시의 수렵이란 영토확장을 위한 무혈 순무(巡撫)라는 점에서 한성백제는 이미 1∼2세기 당시에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 사진 공주 서동철기자 dcsuh@ ■의당 발굴 ‘이제부터 시작' 학계는 박물관을 하나 새로 세워야 할 만큼 많은 유물을 쏟아낸 공주 의당 백제고분발굴을 놓고 “이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의당은 그동안 금강 북쪽으로 공산성과 무령왕릉 등이 밀집해 있는 강 남쪽보다 눈길을 끌지 못했다.그러나 이번에 위기에 처한 한성백제의 수도를 옮겨왔을 만큼 강력한 토착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은 “이번 발굴은 300평 정도에서 불과 6개의 무덤을 파낸 것”이라면서 “백제무덤은 넓은 지역에 40∼50개가 모여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주변에 훨씬 더 많은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이 곳에서 무령왕릉만큼 화려한 유물은 나오지 않을지 모르지만,역사적인 가치는 더 클 것”이라면서 “하루빨리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발굴조사 지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이훈 충남역사문화연구소 문화재연구부장도 “농공단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이번에 발굴이 이루어진 곳보다 오히려 이웃한 사유지가 더욱 지형적으로는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땅주인과 협의를 거쳐 추가발굴조사를 벌이는 것이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시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커진 만큼 의당면 일대에 대한 종합적인 지표조사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훈 부장은 “그동안 의당면 일대는 문화유적지도를 만들기 위한 간단한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 제대로 된 지표조사는 없었다.”면서 “당연히 의당면 전역에 걸쳐 정밀 지표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넓게 펼쳐진 의당벌을 백제산성인 율정리산성과 오인리산성,그리고 통일신라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으나 재조사가 불가피한 수촌리토성이 감싸고 있다는 것도 내부에 상당한 크기의 ‘도시’가 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한편 충남역사문화연구소는 10일 현장에서 지도위원회를 갖는데 이어 11일 오전 10시부터는 지역주민은 물론 관심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발굴 현장과 출토유물들을 공개한다. 공주 서동철기자
  • [열린세상] 카드 위기의 근본 대책은

    엘지 카드가 2조원의 긴급 자금지원으로 부도를 면했다.그러나 이는 임기 응변일 뿐 정상화는 불투명하다.엘지 카드의 경우 총부채가 22조원에 이른다.이 중 내년 1분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것이 3조 5000억원이나 된다.이런 상황에서 소비 심리의 냉각과 카드에 대한 신뢰 붕괴로 정상적 영업이 어렵다.올 들어 3분기까지 영업누적 적자가 이미 1조원이 넘는 상태이다.여기에 카드채 발행이 어려워 신규 자금 조달은 거의 불가능하다.결국 빠져 나올 길이 없다는 뜻이다. 엘지 카드가 부도날 경우 금융권 전체를 부실화시켜 금융 대란을 초래할 수 있다.엘지카드는 회원수 1400만 명의 국내 최대 카드회사이다.엘지카드가 무너질 경우 신용불량자의 양산과 자금시장의 경색으로 다른 카드사들의 경영난이 가중된다.실로 문제는 은행·증권·투신·보험 등 카드채를 보유하지 않은 금융기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이미 국민은행 등 주요은행들은 영업 이익의 3분의 1 이상을 대손충당금으로 쌓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순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현재 카드사들이 발행한 카드채는 80조원에 이른다.이 중 40% 이상이 내년 상반기에 한꺼번에 만기가 도래한다.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실로 금융기관들은 총체적인 위기에 빠질 수 있다.더욱이 카드 돌려막기의 실패로 추가 발생할 수 있는 신용불량자가 100만명이나 된다.이에 따라 총신용불량자가 460만명에 이르면 사회적 혼란은 극도에 달한다.IMF 때에 버금가는 제2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 카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주요 원인은 정부정책에 편승한 카드사들의 무모한 사업 팽창이다.카드사들은 정부가 소비촉진 정책을 내놓자 마구잡이식으로 카드를 발급하여 서민들로 하여금 빚잔치를 벌이게 했다.카드사들은 영업의 건전화를 통한 부실의 방지에 나서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카드사들은 돈을 못갚는 소비자들에게 고리의 현금서비스를 제공하여 부도덕한 돈벌이에 박차를 가했다.이 후 서민들은 카드 돌려막기의 덫에 걸려 대거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자금 회수가 어려운 카드사들은 부도위기를 자초하기에 이르렀다.결국 카드사들이 돈벌이에 눈이 멀어 서민들을 빚수렁에 빠뜨리고 자신들도 부도의 무덤을 판 셈이다. 여기에 공범자 역할을 한 것이 정부이다.IMF 위기 이후 정부는 160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며 구조개혁에 나섰다.그러나 경제의 근본적인 경쟁력 회복이 지연되고 경기가 침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그러자 정부는 카드의 무제한 발급 허용 등 무모한 소비촉진책을 내 놓았다.빚 소비판이라도 벌여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정치적 논리이다.이후 경제에는 소비와 투기의 거품이 일었다.여기에서 카드사들은 부실을 확대 재생산하는 팽창경영에 몰두하여 스스로 위기의 수렁에 빠졌다.결국 정부와 카드사들의 합작으로 금융 불안이 야기되고 카드 회사들은 밑빠진 독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카드 위기에 대한 근본 대책은 무엇인가.우선 카드 회사들은 부실채권의 처분을 서둘러야 한다.동시에 채권단 지원자금을 출자전환하여 재무 건정성을 높여야 한다.다음,기존 주식의 감자 또는 소각을 추진하고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겨야 한다.이렇게 하여 카드사의 경영을 정상화시킨 후 매각 또는통폐합을 추진하여 카드 산업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이러한 방법으로 구조개혁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는 부실 카드사들의 퇴출도 불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융 부실의 암세포가 경제 전체로 확산되어 모든 것을 망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여기서 자구노력이란 명분으로 종업원들만 해고시키는 책임 전가식 대책은 지양해야 한다.이는 집에 빚이 많다고 먹는 것을 줄이기 위해 식구를 내쫓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IMF 위기는 부실기업을 계속 지원하다가 기업과 금융기관이 동반 붕괴한 위기였다.이제 부실 카드사를 계속 지원하면서 소비자와 금융기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고통과 혼란이 따르더라도 위기의 뿌리를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근본적인 카드 산업의 수술이 필요하다. 이 필 상 고려대 교수 경제학
  • 5세기초 백제 금동관모등 대량출토/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규모

    충남 공주에서 5세기 초반 것으로 보이는 백제시대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금제귀걸이 및 환두대도 등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충남발전연구원은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유적을 발굴조사한 결과 4세기 후반∼5세기 초·중반의 백제무덤 6기와 부장품을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목곽묘인 1호분에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환두대도가 출토됐고,석실분인 4호분에서는 금동신발 1켤레가 환두대도와 함께 나왔다.석실분인 5호분에서는 중국청자 3점과 금동신발 1켤레가 역시 관모와 함께 발굴됐다.백제지역에서 이처럼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것은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처음이다. 이훈 책임조사연구원은 “무덤 대부분은 백제가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오기 전 조성된 것”이라면서 “웅진에는 천도 이전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현지세력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비극적 70대 할머니역 온몸으로 표현/ ‘웃어라 무덤아’ 주연 문경희씨

    극단 청우가 문예진흥원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웃어라 무덤아’(고연옥 작,김광보 연출,30일까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단돈 100만원이 탐나 피붙이처럼 살갑던 할머니에게 물리적 폭력보다 더한 말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웃 주민들의 양면성은 당혹감을 넘어 섬뜩하게 다가온다. 연극 특유의 내지르는 화법 대신에 일상의 언어로 나직하게 풀어가는 이 작품에서 70대 할머니로 분한 배우 문경희(32)의 연기는 누구보다 빛을 발한다. 홀로 사는 외로움을 이웃에 대한 허물없는 정으로 표현하는 아이같은 천진난만함과 자식처럼 여겼던 그들이 가슴에 못질을 할때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으며 서러움을 삼키는 비극적 연기를 그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냈다. “그동안 그리스 비극이나 실험연극 등에서 무겁고,진지하고,에너지가 강한 역할을 주로 해왔어요.그러다보니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이번엔 일상적인 역할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대학 연극영화과에 낙방하자 곧바로 현대극장에 들어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 14년째.그동안 연극 ‘길 떠나는 가족’‘종로 고양이’‘하녀들’‘평심’,뮤지컬 ‘올리버’‘아가씨와 건달들’,그리고 무용극 ‘거울속의 내가’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쌓았다. 지난 95년 극단 청우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 10년 가까이 김광보 연출가와 작업해왔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배우”라는 김광보의 말처럼 역할에 온전히 몰입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그는 이젠 좀더 여유로운 태도로 연기에 임하려고 한다. “관객들이 제 연기를 보면서 ‘저 배우와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더도 덜도 아닌 딱 그 배역만큼의 연기를 소화하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이순녀기자 coral@
  • [사설] 결혼이 직장여성 ‘무덤’ 돼서야

    직장여성 10명 중 6명이 결혼한 뒤 회사를 그만둔다는 조사결과가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지에 발표됐다.기혼여성 3245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결혼전 직장생활을 하던 여성 62%가 결혼 뒤 사표를 냈고 58.3%는 아이를 낳은 뒤 퇴사했다는 것이다.이는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결혼이 곧 직업의 ‘무덤’이 되는 후진적 여성 경제활동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다. ‘결혼 퇴직’을 강요하는 사회적 현상이 개별 여성의 피해만으로 끝난다면 무슨 큰일이 되겠는가.문제는 이것이 여성의 결혼 지연 및 기피,출산 기피로 이어져 오늘날 저출산-노령사회 가속화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정부는 뒤늦게 육아휴직제,출산휴가제 등 모성보호 관련제도를 강화하고 공보육 정책과 출산 장려정책까지 펴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별로 신통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제도는 미약한데 뿌리깊이 박혀있는 남성가부장적 사회문화는 그 제도까지 무력화시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일과 결혼생활을 병행할 수 있게 하려면 ‘육아·가사는 여성의 일’이라는 공식을 확실하게 깨트려주어야 한다.육아휴직제의 경우 해당자의 절반 이상이 상사·동료의 눈치 때문에 신청을 엄두도 못 낸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남성 육아휴직 1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일본처럼 남성 육아휴직 촉진책을 써볼 것을 제안한다.여성 육아휴직 활성화와 육아 문화 개선에 효과가 있을 것이다.육아및 보육비의 사회부담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결혼이 직장여성의 무덤이 돼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희망이 없다.
  • [열린세상] 우리안에 있는 이방인

    시대에 따라 질문하는 방식도 바뀐다.‘나는 누구인가.’ 대신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 시대 특유의 질문방식처럼 보인다.옛날에는 태어난 곳에서 한평생 살다가 무덤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디에’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거나 여행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지’에서 ‘내지’로의 공간이동은 일본제국주의 시대부터 비롯되었다.식민지 근대와 더불어 ‘외지’ 지식인들은 제국으로의 순례여행을 다녀옴으로써 출세를 보장받았다.그들은 제국의 언어와 민족언어를 동시에 구사함으로써 제국의 문화가 들어오는 채널이 되었다.그들은 제국의 명령을 번역하고 훈육하고 계몽했다.근대 이후 이 땅에서 권력의 중심부로 편입하려는 사람들에게 제국으로의 유학과 순례여행은 의례 통과해야 될 과정의 일부였다. 소위 말하는 ‘탈’식민주의 시대에 이르면,특권층만이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다국적 금융자본과 군산복합체는 욕망의 상층기류를 타고 날아다닌다.그들에게 조력과 정보를 제공하면서 마름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은 그들의 뒷좌석에 앉아 분주하게 세계를 떠돈다.국제화 시대는 매판지식인이라는 단어조차 없애버렸다.반면 욕망의 저류에는 무수히 많은 노동력이 세계를 유랑한다.무슨 관광여행을 다닌다는 말이 아니다.자기 땅으로부터 뿌리뽑힌 자들은 세계를 떠돌지 않을 수 없다.매춘노동자들은 러시아로부터 남진하고,산업노동자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동진한다. 이들은 국경선을 넘어 타국으로 들어가지만 그곳에서도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비천한 존재가 된다.오늘도 작별을 고하면서 지구 저편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고향을 등진 자들은 새로운 땅에서도 이방인에 불과하다.불법취업 노동자들은 일회용 소모품으로 사용하다가 강제출국시킬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을 합법화해 달라고 세계 곳곳에서 절규하고 있다.명동성당에서도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들린다. 노동력과 욕망은 전지구촌으로 떠돌지만 민족국가의 경계선은 더욱 완강해지는 양가적인 시대,혹은 신자유주의시대에 들어와 이산(離散)의 무리들은 점점 더 비체화되어 간다.국제화를 외치면서도 민족국가의 경계선은 더욱 삼엄해진다.노동의 유연화를 위해 민족국가의 경계를 없애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족국가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어야만 노동의 국제적인 유연화,혹은 착취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국제화를 부르짖지만 민족 국가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부적절한’ 존재 혹은 비체가 된다.이처럼 경계선의 안과 바깥,‘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전존재가 결정되어 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한국 국적이라는 경계선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다.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혹자는 ‘우리’ 문제도 산적한 마당에 ‘그들’의 인권씩이나 거론할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한민족 순수혈통주의 신화에 절어 있어서 타민족,타인종에 대한 감수성이나 인권 문제에는 맹목인 지점이 있다. 주한 미군이 주둔한 지 반세기가 넘어도 남한은 혼혈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땅이다.기지촌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서는 외딴 섬이다.비체화된 그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외국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 과거 한 때 남한 사회는 남아도는 노동력을 열심히 수출했다.소위 말하는 1세계의 노동력으로 수출된 사람들이 경험했던 인종차별에 대해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함께 분노했다.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안의 이방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보호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임 옥 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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