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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하였다.공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공자는 부활하여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 그 유명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비판하고 이 전국시대를 주유하면서 왕도를 설파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조광조도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난세 중의 난세로 보았을 것이며,따라서 공자가 다시 살아나 재림(再臨)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어쩌면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顯身)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비교적 조광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그의 개혁중심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낡은 조선시대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도정치’란 공자가 그토록 열국을 주유하면서 구현하기를 염원하였던 정치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을 말함인데,맹자는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패도(覇道)’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는 맹자로서,맹자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맹자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며,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왕도를 유가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와는 달리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 역시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보았던 맹자는 그러므로 이상주의적인 공자와는 달리 현실적 정치관을 가졌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안내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던 공자의 화신(化神)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와 동일시함으로써 1515년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에서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적어도 3년 이내에 정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세를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 정치를 오늘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통해 공자의 왕도사상이야말로 난세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40~87년 재위) 때에 오경박사가 갖추어지면서 유학으로 정립되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통해서 중국 정치의 기본원리와 사회윤리의 발판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칠 때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유학은 자연 쇠퇴하고 있었는데,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그리고 고려시대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유교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인데,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유교의 중시조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서 크게 박해를 받았던 주자의 성리학은 송나라 멸망 후 원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하였다.공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공자는 부활하여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 그 유명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비판하고 이 전국시대를 주유하면서 왕도를 설파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조광조도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난세 중의 난세로 보았을 것이며,따라서 공자가 다시 살아나 재림(再臨)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어쩌면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의 현신(顯身)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비교적 조광조의 업적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그의 개혁중심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낡은 조선시대 풍습과 사상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도정치’란 공자가 그토록 열국을 주유하면서 구현하기를 염원하였던 정치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왕도정치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사상’을 말함인데,맹자는 ‘왕도’에 대비되는 정치사상으로 ‘패도(覇道)’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공자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는 맹자로서,맹자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데,맹자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인을 대신하는 것이 패도이고,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다.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 아니며,힘이 모자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왕도를 유가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와는 달리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패도 역시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보았던 맹자는 그러므로 이상주의적인 공자와는 달리 현실적 정치관을 가졌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안내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던 공자의 화신(化神)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을 공자와 동일시함으로써 1515년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에서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적어도 3년 이내에 정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세를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 정치를 오늘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통해 공자의 왕도사상이야말로 난세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는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낡은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책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40~87년 재위) 때에 오경박사가 갖추어지면서 유학으로 정립되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통해서 중국 정치의 기본원리와 사회윤리의 발판을 이루는 학문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칠 때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유학은 자연 쇠퇴하고 있었는데,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그리고 고려시대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유교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인데,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유교의 중시조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에는 위학(僞學)이라 하여서 크게 박해를 받았던 주자의 성리학은 송나라 멸망 후 원대에 이르러 관학으로 채택되고 과거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이 모든 것은 양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비롯되었으니,이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우리는 정상배(政商輩)라고 부른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에 대비되는 말로 소인을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으며,교만하며 태연하지 못하며,언제나 걱정근심으로 지내며,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결국 정치가 이처럼 갈림길이 많아 어지러운 것은 소인배(小人輩)들의 무리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다시 찔끔찔끔 술을 마셨다.애초에는 조광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술을 음복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점심도 거른 공복에 마신 술이었기 때문이었을까,만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지금은 태평성대인가.아니면 난세인가.당나라의 선승 조주(趙洲)는 난세야말로 호시절(好時節)이라 하였는데,그렇다면 지금은 호시절인가,아니면 비상시국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금이야말로 난세이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인 것이다.비록 하나의 국호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수많은 갈림길로 나누어진 전국시대인 것이다. 원래는 천자가 천하의 종주로서 다스리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천자가 제후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천자는 천자로서의 권능을 잃고 수많은 갈림길은 제후들과 대부들에 의해서 지배된다.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먹히거나 예속되고 있으며,쉴 새 없는 공전(攻戰)으로 땅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곳곳에서 왕들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제후라고 칭하는 신 귀족들이 일어나고 있다.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어제의 변절자가 오늘의 애국자가 되어 버린다.제후는 왕을 꿈꾸며 왕은 천자를 꿈꾸고 있다.모두들 천하통일을 꿈꾸며 진시왕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51년. 그 무렵 천하는 진(秦),초(楚),제(齊),진(晉),오(吳),월(越),노(魯),송(宋),정(鄭),위(魏)… 등의 전국시대로 갈라져 있을 때였으니,250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전국시대와는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공자는 말년에 난세를 두려워하며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었다.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니,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었다.” 2500년 전의 전국시대와 지금의 시대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과 폭행이 생겨나고 부하가 상사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공자의 전국시대와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지 않았던가.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었는데,자하(子夏)같은 제자들도 한마디도 더 보탤 여지가 없었다.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해주면서 공자는 ‘후세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나를 죄주게 되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어 단 한자도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춘추.여기에서 ‘공정한 태도로 준엄하게 역사를 비판하는 필법’인 공자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이란 말이 생겨났으니,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전국시대를 어떠한 필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 [서울의 숲]남산공원

    숲여행 참가자 홍지승(11)양은 “식물에 대한 설명 뿐만 아니라 남산과 관련된 역사 등이 자세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남산식물원에서 서울타워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시민들이 애용하는 산책로다.제법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지만 15분 정도 걸어가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팔각정에 도달한다.하지만 1·3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남산 숲 여행’에서는 이 구간이 2시간의 대장정으로 훌쩍 늘어난다.늘상 보던 나무와 풀도 숲 해설가의 입을 거치면 생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숲해설가 이희교(62)씨는 “기록에 따르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조선 태종때 경기도 장병 3000여명이 20일동안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1991∼1997년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을 통해 소나무 1만 8357그루를 심었으며 남산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율은 23%에 이른다.남산은 동서 길이가 2.7㎞ 남북은 2.1㎞이며 면적은 약 90만평이다.이씨는 또 “열매가 까만 쉬나무는 호롱불에 쓰이는 기름을 짤 수 있다.”면서 “남산에 책을 많이 읽는 선비들이 다수 살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산에는 식물 361종과 나무 191종 등 모두 85과 280속 552종이 모여있다.대표적인 수종으로는 소나무,잣나무,신갈,아까시,팥배,산벚나무 등이 있으며 활엽수종이 77%,침엽수종이 23%를 차지하고 있다.풀종류는 남산제비꽃,고사리류,단풍취,억새,맥문동 등이 자라고 있다.최근 외래초본인 서양등골나물이 급속도로 번식,고유 수종의 보존대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이씨는 “흔히 아카시아라고 불리는 아까시는 꿀을 생산하는 밀원식물로 남산의 대표적인 수종”이라면서 “하지만 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뿌리가 무덤을 파헤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숲 여행이 중반을 넘어 잠시 지루해지자 이씨는 나뭇잎 하나를 따서 씹어볼 것을 권유했다.시민들이 쓰다고 답하자 이씨는 “‘사랑의 쓴 맛’이라는 꽃말을 가진 라일락”이라면서 “한 외국인이 ‘미스김 라일락’이라는 개량종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고 덧붙였다. 숲여행 참가자 홍지승(11)양은 “지난해 서오릉 숲 여행에도 가봤는데 맨발걷기 등이 있어서 좋았다.”면서 “식물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남산과 관련된 역사 등이 자세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알게돼 참가했다는 윤정금(35·여)씨는 “아이들 교육에 그만”이라고 추천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이 모든 것은 양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비롯되었으니,이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우리는 정상배(政商輩)라고 부른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에 대비되는 말로 소인을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으며,교만하며 태연하지 못하며,언제나 걱정근심으로 지내며,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결국 정치가 이처럼 갈림길이 많아 어지러운 것은 소인배(小人輩)들의 무리 때문이 아닐 것인가. 나는 다시 찔끔찔끔 술을 마셨다.애초에는 조광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술을 음복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점심도 거른 공복에 마신 술이었기 때문이었을까,만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지금은 태평성대인가.아니면 난세인가.당나라의 선승 조주(趙洲)는 난세야말로 호시절(好時節)이라 하였는데,그렇다면 지금은 호시절인가,아니면 비상시국인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금이야말로 난세이며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인 것이다.비록 하나의 국호를 가지고 있으나 실은 수많은 갈림길로 나누어진 전국시대인 것이다. 원래는 천자가 천하의 종주로서 다스리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천자가 제후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잃게 되어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국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천자는 천자로서의 권능을 잃고 수많은 갈림길은 제후들과 대부들에 의해서 지배된다.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먹히거나 예속되고 있으며,쉴 새 없는 공전(攻戰)으로 땅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곳곳에서 왕들이 생겨나고 스스로를 제후라고 칭하는 신 귀족들이 일어나고 있다.세력을 넓히려는 패권주의에 의해서 서로 힘을 합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어제의 변절자가 오늘의 애국자가 되어 버린다.제후는 왕을 꿈꾸며 왕은 천자를 꿈꾸고 있다.모두들 천하통일을 꿈꾸며 진시왕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51년. 그 무렵 천하는 진(秦),초(楚),제(齊),진(晉),오(吳),월(越),노(魯),송(宋),정(鄭),위(魏)… 등의 전국시대로 갈라져 있을 때였으니,2500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전국시대와는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공자는 말년에 난세를 두려워하며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지었다.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겨나니,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었다.” 2500년 전의 전국시대와 지금의 시대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과 폭행이 생겨나고 부하가 상사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공자의 전국시대와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지 않았던가.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었는데,자하(子夏)같은 제자들도 한마디도 더 보탤 여지가 없었다.제자들에게 춘추를 전해주면서 공자는 ‘후세가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나를 죄주게 되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쓸 것은 쓰고 깎아낼 것은 깎아내어 단 한자도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춘추.여기에서 ‘공정한 태도로 준엄하게 역사를 비판하는 필법’인 공자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이란 말이 생겨났으니,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전국시대를 어떠한 필법으로 기록할 것인가.
  • [We 동화]갈매기의 꿈

    엉뚱한 짓을 잘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있었단다.어느 바람 부는 날,그 갈매기는 생뚱맞게도 내가 날짐승들의 왕이 되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지.그래서 갈매기는 자나깨나 ‘과연 무엇이 우두머리가 될 자질인가?’를 생각했지.하늘을 날면서도 그 생각만 했어. 그러던 어느날 문득 바위산 꼭대기,가장 키 큰 나무 옆까지 어느 틈에 날아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지.굉장한 일이었어.산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이렇게 높이 올라와 보니 느낌이 아주 묘한걸! 그런데 이런 곳에서 대체 저 참새는 무얼 하는 거야?’ 갈매기는 문득 궁금해졌어.그런데 글쎄,그 참새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바람이 쌩쌩 부는 바위산 꼭대기에 말이야.그뿐이면 다행이게? 참새가 집을 짓는 것은 어떤 다른 동물의 둥우리 밑 부분이었어.둥지의 크기로 보아서 그 동물은 몸집이 큰 무서운 동물인 것 같았지.게다가 거의 틀림없이 육식을 즐길 테고. “제정신이 아니군!” 길게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갈매기는 얼른 날개를 추슬렀어.사라져버리는 것이 만수무강의 지름길일 테니까.그렇지만 그 성격에 아무리 바빠도 궁금한 것을 그대로 넘길 수는 없지.갈매기는 도망갈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은근하게 참새를 불렀지. “네가 설마 이 둥지를 네 무덤으로 정하지는 않았을 텐데,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랬더니 참새가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거야.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하긴 무리도 아니지.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 우리를 잡아먹는 천적의 눈앞에서 날 잡아잡수,하듯 둥우리에 숨어들어 집을 짓다니.” 참새는 갈매기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지.참새의 집은 커다란 둥지의 맨 아랫부분,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었어.참새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어 나를 수 없는 꽤 굵은 나뭇가지들로 둥우리가 지어졌기 때문에,몸집이 작은 참새 정도는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는 틈이 벌어져 있었지.참새는 그 틈바구니에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메우고 짚이나 마른풀을 물어 날라 푹신한 보금자리를 만든 것이었어. “내가 왜 이곳에 둥지를 짓기로 했느냐 하면….안전하고 쾌적하기 때문이야.” 갈매기는 기가 꽉 막혔어.참새가 말했지. “생각해봐.이 둥지의 주인을.우리들은 그 그림자만 봐도 천리만리 달아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판이잖아.하지만 말야,우습게도 바로 그 때문에 족제비,뱀,여우같은 동물들에게서 안전하다고.저 친구가 내 머리맡을 딱 지켜 서서 호위하는 꼴이 되니까.어때? 내 머리,꽤 쓸 만하지 않아?” 그 순간 갈매기는 깨달았어.머리! 그래.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멍청하고 흔해빠진 생각은 멀리 던져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친 거야.갈매기는 자신감이 생겼지. “연장을 쓸 줄 아는 새.그거 흔한 일 아니잖아? 나도 머리는 꽤 있는 편이라고!” 갈매기는 의기양양했지.섭조개나 대합을 잡으면,갈매기는 그것들을 바위 위에 떨어뜨려 부수고 알맹이를 먹지.연장을 쓸 줄 아는 거지.과장하자면 그런 게 바로 ‘머리’ 아니겠어? 바로 그때,갑자기 하늘에서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어.그 살벌한 바람은 갈매기 저만치 앞에서 날던 새를 낚아채면서 그쳤지. “아이쿠야!” 갈매기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바로 앞에서 날아가는 새를 덮친 것은 송골매가 분명했거든.무서운 맹금류.시속 280km를 낼 수 있는 유선형의 몸집에다,가위처럼 날카로운 부리,억센 발톱.게다가 목표물을 발견하면 그 즉시 직각으로 떨어져 내릴 수 있는 놀라운 비행술.마음이라는 것은 참 간사한 거야.눈앞에서 송골매의 섬짓한 사냥 모습을 보고,갈매기는 금방,‘머리’ 따위가 무슨 사치냐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면서 갈매기는 다시 한번 ‘힘’의 위력을 실감했지. “치! 정말 더러워서.난 아무래도 무서운 왕은 될 수 없겠는 걸!” 갈매기는 투덜거리며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겼어.혼자서 얼굴이 홧홧해졌지. 그때 어디선가 날갯짓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지.송골매가 둥지로 돌아오는 것이었어. “으악,으악,으악! 이게 바로 저 송골매의 둥지였단 말이야?” 무서운 새 인줄은 짐작했지만 송골매라니! 갈매기는 무턱대고 소리만 질렀어.참새가 허둥대는 갈매기를 얼른 둥지 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지. “몰랐어? 이게 누구 집인지?” “몰라.그나저나 이제는 정말 죽었군!” “죽기는 왜 죽어?” “왜 죽다니?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을 알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갈매기는 얼른 고개를 저었어.그러나 참새는 냉큼 말을 받았지. “벌써 알고 있는 걸!” “알고 있다구?” 갈매기는 그 순간,제풀에 기절해버렸지.참새는 갈매기의 몸을 흔들며 말했어. “아니,저 송골매가 날 노린다면 어떻게 여기 집을 짓고 살겠어?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지.이 친구야,저 송골매는 난 절대 안 건드려요.신세 좀 지겠습니다,하면서 내 놓고 굽히고 들어오는 조막만한 나를 뭐 먹을 게 있다고 잡아.송골매 마음이 그 정도는 아니야.덩치만큼 그릇이 크다고.그런 게 바로 제왕의 아량 아니겠어? 아,걱정 말아! 이렇게 미리 죽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제서야 갈매기는 눈을 번쩍 떴지.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어. “그래 너다.니가 왕이다.왕자라구.머리에,힘에,그리고 마음 씀씀이에 이르기까지.” 영문을 몰라 눈알만 디룩거리는 참새의 표정을 보면서 갈매기는 결심했지.다시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왕이 되고 싶다는 따위의 새퉁빠진 생각을 하지 않기로.절대로 하지 않기로. 글 이윤희 . 그림 길종만 ●작가의 말 여기에 더하여,신중하고,이성적인 ‘왕’을 모시고 싶습니다.저는 그 나라의 ‘국민’이고 싶습니다.˝
  •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천천히 술을 아껴 마시며 성영우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도 많구나.”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온 손님인 나,역시 이곳에 앉아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다.아아,한 발짝만 나가도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수많은 갈림길만 무성할 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문자 그대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구나. 일찍이 초나라의 평왕 때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다.이때 간신 비무기(費無忌)는 태부의 다음 벼슬인 소부로 있었는데,태자비로 간택된 진에서 데려온 미녀를 태자대신 평왕에게 권하고 아첨하여 왕의 신임을 얻는다.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를 가로챈 평왕은 여자에게 빠져버렸는데,이 사실을 알게 된 비무기는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지자 참소하여 태자를 국경으로 쫓아버린다. 또 평왕이 태자가 반기를 든다는 비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꾸짖자 오사는 도리어 왕의 그릇됨을 간하였다.이 때문에 오사는 유폐되고,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친다.이번에는 오사의 두 아들의 보복이 두려워진 비무기가 태자의 음모를 두 아들의 조종 때문이라고 참언하였다.그래서 오사와 맏아들은 잡혀 죽고 둘째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 오자서는 그 후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체에 300번의 매질을 가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푼다. 이 처사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오자서는 말하였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은 많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늙고 쇠약하여 살 날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자서의 탄식처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도대체 유사 이래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왕조는 멸망하였고 하루아침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능욕당한 이래 간신히 독립을 하였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시대 때에도 볼 수 없는 동족간의 상잔으로 600만명의 양들이 학살당하였다.그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동생이 형을 찌르고,누이를 겁탈하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다.그 전쟁은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대리전을 벌여 오늘날,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이 되었다. 그뿐인가.시민혁명도 일어나고,쿠데타도 일어나고,젊은 장교들도 일어나 정권을 자기 밥그릇처럼 독차지하였다.정권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채우려는 더러운 야망으로 군인들도 양들을 학살하고 송두리째 껍질을 벗겨내었다.그리하여 수천 개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전라도에 경상도,충청도로 갈라진 지역의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계층별 갈림길도 생겨났다.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의 세대별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기업과 노동자간의 갈림길도 생겨났다.진보와 보수의 편 가르기 갈림길도 생겨났으며,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학력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증오와 전쟁과 복수와 대립과 갈등의 감정적 갈림길이 생겨났는가 하면,물질과 소유와 섹스의 쾌락적 갈림길도 생겨났다.˝
  •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천천히 술을 아껴 마시며 성영우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도 많구나.”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온 손님인 나,역시 이곳에 앉아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다.아아,한 발짝만 나가도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수많은 갈림길만 무성할 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문자 그대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구나. 일찍이 초나라의 평왕 때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다.이때 간신 비무기(費無忌)는 태부의 다음 벼슬인 소부로 있었는데,태자비로 간택된 진에서 데려온 미녀를 태자대신 평왕에게 권하고 아첨하여 왕의 신임을 얻는다.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를 가로챈 평왕은 여자에게 빠져버렸는데,이 사실을 알게 된 비무기는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지자 참소하여 태자를 국경으로 쫓아버린다. 또 평왕이 태자가 반기를 든다는 비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꾸짖자 오사는 도리어 왕의 그릇됨을 간하였다.이 때문에 오사는 유폐되고,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친다.이번에는 오사의 두 아들의 보복이 두려워진 비무기가 태자의 음모를 두 아들의 조종 때문이라고 참언하였다.그래서 오사와 맏아들은 잡혀 죽고 둘째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 오자서는 그 후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체에 300번의 매질을 가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푼다. 이 처사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오자서는 말하였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은 많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늙고 쇠약하여 살 날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자서의 탄식처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도대체 유사 이래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왕조는 멸망하였고 하루아침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능욕당한 이래 간신히 독립을 하였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시대 때에도 볼 수 없는 동족간의 상잔으로 600만명의 양들이 학살당하였다.그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동생이 형을 찌르고,누이를 겁탈하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다.그 전쟁은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대리전을 벌여 오늘날,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이 되었다. 그뿐인가.시민혁명도 일어나고,쿠데타도 일어나고,젊은 장교들도 일어나 정권을 자기 밥그릇처럼 독차지하였다.정권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채우려는 더러운 야망으로 군인들도 양들을 학살하고 송두리째 껍질을 벗겨내었다.그리하여 수천 개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전라도에 경상도,충청도로 갈라진 지역의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계층별 갈림길도 생겨났다.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의 세대별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기업과 노동자간의 갈림길도 생겨났다.진보와 보수의 편 가르기 갈림길도 생겨났으며,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학력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증오와 전쟁과 복수와 대립과 갈등의 감정적 갈림길이 생겨났는가 하면,물질과 소유와 섹스의 쾌락적 갈림길도 생겨났다.
  • [열린세상] 로마의 거리에 서서/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로마의 거리에 서면 나는 침묵하게 된다.그냥 침묵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 뿐이다.도대체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진리란 무엇일까? 로마의 찬란했던 문명을 보면,역사는 그저 순환하는 것일 뿐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또,로마의 기독교 유적들을 바라보면,서양 문명은 기독교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눈에 목격하게 되고,기독교의 원형(原型)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로마는 수메르와 그리스를 잇는 문명이었다.수메르는 지금부터 7000여 년 전 이라크 지역에 존재했던 찬란한 문명이다. 설형문자,성경의 창세기와 유사한 창조설화,교육제도,법 등 인류 최초의 39대 사건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어,인류문명의 고향으로 간주되곤 한다.새뮤얼 크레머 교수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는 책을 내기도 하였다. 서양에서 수메르 문명은 그리스에 의한 에게해(海)문명으로 이어졌다.그리스는 기원전 1050년 경 철기 문화를 발전시키면서,소아시아의 서해안과 이탈리아 남부까지 지배하였다. 에게해 문명을 지중해 문명으로 바꾼 주인공이 바로 로마였다.로마는 기원전 27년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3년 후 이집트를 정벌하면서 서양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로마가 이룩한 과학,예술,군사력의 수준은 여행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착각하게 한다.시멘트를 이용한 2,3층짜리 집,판테온신전,콜로세움,포로 로마노,40㎞ 길이 14개로 이룩된 상하수도 시설,조각과 예술품은 현대의 과학과 예술을 무색하게 한다. 당시 로마는 경부고속도로 200개의 길이에 해당하는 8만 5000㎞의 도로를 닦아서 사용하였고,군대는 그리스,이집트,마케도니아,스페인,영국,프랑스,아프리카를 휩쓸었다.군대,과학,예술이란 면에 있어서 로마는 하나의 완결된 수준을 이룩하고 있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에 무릎을 꿇고,서양이 기독교 문명권으로 전환된 사건은 313년 일어났다.베드로가 로마에 기독교를 전한 지 246년 만이었다.그는 어부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고향으로 가 다시 고깃배를 탔다.바다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베드로는 로마로 전도를 하러가기로 결심하였다.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로마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종교와 가치체계,진리에 대한 도전은 당연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네로의 핍박 속에 베드로는 AD 67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베드로가 순교한 지 246년만인 313년 로마는 그리스도교에 무릎을 꿇는다.군대,예술,과학이라는 면의 진리에 있어서는 세계를 지배했지만,암살과 음모로 황제가 평균 1년에 한 번 바뀌고 노예에 대한 끝없는 착취 위에 군림하던 제국이었다.그런 로마가 베드로에 의해 전파된 사랑이라는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이었다. 가장 처참하게 죽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성당이 서있다.그 어떤 왕궁도 베드로성당만큼 아름답진 못하다.한 인간이 가진 신앙,그리고 그 믿음이 바꿀 수 있는 역사의 규모와 엄숙함은 순례자를 숙연하게 만든다. 로마가 꽃피운 지중해 문명은 15세기 대서양쪽으로 이동한다.800여년 간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은 스페인은 1474년 이사벨라 1세가 즉위하면서 독립과 에스파냐 국가통일을 이룩하였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의해 침몰되면서,문명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훨씬 가까워 졌다.이후 300여년 간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문명의 중심은 미국으로 넘어왔다.그 방향으로만 친다면,태평양의 시대가 예견될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열린다던 태평양의 시대는 1990년대 한국의 IMF경제위기,일본의 부진을 겪으면서 지연되고 있는 느낌이다.로마의 거리에 서서,로마 문명의 찬란함과 그 문명의 이동행로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 中 1000년전 브래지어 발굴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연합|중국 고고학자들이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아오한치(敖漢旗)에 소재한,최소한 1000년 이상 된 요(遼)나라(916∼1125년) 무덤에서 황금색 실크 브래지어와 실크 위에 말들이 그려진 그림 조각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아오한치 신후이의 한 마을에서 발굴된 이 황금색 브래지어는 우아하게 디자인되었고,스타일과 기능 모두 현대 여성들이 착용하는 것과 아주 유사하며,면으로 패드를 대었다고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은 밝혔다. 아오한치박물관의 사오궈티옌 관장은 “브래지어 컵 속의 면 패드 대부분은 이미 부식되었다.”고 말했다.˝
  •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혼자서 마시는 낮술이 금세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백의 시구처럼 조광조와 더불어 술을 마셔서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었다.남은 술을 종이컵에 다시 따르자 술병이 바닥났다.술잔을 들고 나는 무덤 앞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았다.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심곡이라 불렸던 산골은 그러나 이제는 화류항(花柳巷)으로 변해 있었다.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광조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이 낳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죽고 또 태어난 천년의 세월을 통해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들어와 조광조의 무덤을 무인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인적은 끊기고 조광조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제비집처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조광조는 없다. 노수신은 신도비에서 조광조를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망하지도 아니하고,어기지도 아니하고,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라고 노래하였지만 이제 조광조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다.찾아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다.조광조는 이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는 것이다. 한 잔의 낮술이 내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나는 거대한 아파트들과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문득 서원 강당 위 천장에서 보았던 이재(李縡)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화 때 관직을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대학자였는데,문외출송(門外黜送)할 때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천리(天理)의 마음은 알 수가 있겠도다. 가련하도다.심어 두신 수택의 나무들이 윗가지는 솟았지만 아래는 그늘이 없네.” 이재는 서원을 방문했을 때 조광조가 직접 심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하였던 것이다.조광조가 심은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남아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심은 손때 묻은 나무가 아직도 무성히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래는 이재의 노래처럼 그늘이 없지 아니한가. 그늘이 없는 나무,조광조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無影木)인 것이다.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역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성영우(成永愚)도 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지 아니한가.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갈림길이 많구나(客來愁日暮門外政多岐).” 술 취한 내 가슴 속으로 성영우의 시구가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그렇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계절의 여왕인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저물어 가는 저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지 않은가.도대체 이렇게 많은 갈림길이 일찍이 정가에 존재하였던가.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길은 예컨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나 먼 곳을 가는 길도,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도,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도,낮은 곳으로 가는 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보이는 곳은 천 갈래로 만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뿐,갈림길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혼자서 마시는 낮술이 금세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백의 시구처럼 조광조와 더불어 술을 마셔서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었다.남은 술을 종이컵에 다시 따르자 술병이 바닥났다.술잔을 들고 나는 무덤 앞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았다.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심곡이라 불렸던 산골은 그러나 이제는 화류항(花柳巷)으로 변해 있었다.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광조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이 낳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죽고 또 태어난 천년의 세월을 통해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들어와 조광조의 무덤을 무인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인적은 끊기고 조광조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제비집처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조광조는 없다. 노수신은 신도비에서 조광조를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망하지도 아니하고,어기지도 아니하고,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라고 노래하였지만 이제 조광조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다.찾아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다.조광조는 이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는 것이다. 한 잔의 낮술이 내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나는 거대한 아파트들과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문득 서원 강당 위 천장에서 보았던 이재(李縡)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화 때 관직을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대학자였는데,문외출송(門外黜送)할 때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천리(天理)의 마음은 알 수가 있겠도다. 가련하도다.심어 두신 수택의 나무들이 윗가지는 솟았지만 아래는 그늘이 없네.” 이재는 서원을 방문했을 때 조광조가 직접 심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하였던 것이다.조광조가 심은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남아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심은 손때 묻은 나무가 아직도 무성히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래는 이재의 노래처럼 그늘이 없지 아니한가. 그늘이 없는 나무,조광조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無影木)인 것이다.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역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성영우(成永愚)도 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지 아니한가.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갈림길이 많구나(客來愁日暮門外政多岐).” 술 취한 내 가슴 속으로 성영우의 시구가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그렇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계절의 여왕인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저물어 가는 저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지 않은가.도대체 이렇게 많은 갈림길이 일찍이 정가에 존재하였던가.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길은 예컨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나 먼 곳을 가는 길도,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도,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도,낮은 곳으로 가는 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보이는 곳은 천 갈래로 만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뿐,갈림길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 儒林(10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훗날 이율곡으로부터 ‘진귀한 새,괴이한 돌,이상한 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인.이지함처럼 이산해도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평생 조광조를 사숙하여 신도비도 함께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이산해는 묘표에서 다음과 같이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오호라, 묘비로도 진실로 선생의 경중을 나타내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다시 여기에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겠는가.” 조광조의 무덤은 두 개의 석인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이 보호하고 있었다.봉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무덤 위에 자란 풀들도 가지런히 깎여 있다.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풀 사이에 피어 있었고,한 떼의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들고 온 비닐봉지 속에서 소주병과 건어물을 꺼내어 상석 위에 내려놓았다.마개를 따고 종이컵에 술을 한 잔 부은 다음 무릎을 꿇고 조광조의 무덤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상석 위에는 누군가 꺾어 묶은 한 다발의 들꽃이 놓여 있었다.배를 올리고 나서 나는 종이컵에 든 술을 봉분 주위를 돌아가며 무덤 위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조광조는 주색에 엄격하여 절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20세도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한 여인이 추파를 보내어 머리 비녀를 보내오자 이를 여인숙의 벽에 걸어 놓고 온 것은 유명한 일화였지만,실제로도 조광조는 평생 첩을 두지 않고 일부일처로만 지냈다.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예에 속하고 있다.관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양반이면 첩 하나쯤 두는 것이 예사였고,사회적으로도 허용되던 때였음에도 조광조는 정실부인 하나만을 고집하였다. 이율곡도 첩이 둘이나 있었고,심지어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퇴계도 축첩하고 있었는데,조광조의 이러한 처사는 시대를 초월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여자를 멀리하던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기록에 의하면 중종 13년 5월,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남녀가 적합하게 서로 만나서 정도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도심(道心)이지,사사로운 욕정이 아니며,또한 도에 지나치게 거절한다면 이 또한 사람의 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술로 인한 동료들의 실수를 자주 보고는 철저하게 절주를 실천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조광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학의 정신을 철저히 지켜나간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광조도. 나는 술을 무덤의 주위에 뿌리면서 생각하였다. 막상 의금부에 의해서 한밤중에 체포되자 엉망으로 만취하였던 것이다.자신을 심문하던 이장곤에게 ‘이 못난 놈아,이 용가(龍哥)야.’하고 술주정하였으며,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아마도 그 날이 조광조가 일생일대에 만취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으니. 나는 한잔 가득 따른 술을 무덤에 남김없이 뿌리며 중얼거렸다. “조광조여,무덤 속에 들어 있는 조광조의 영령이여, 술을 권하노니 사양하지 말고 내 노래 한 곡에 귀기울여 보시오.금도 옥도 비단도 귀한 것이 못된다.다만 길게 취하여 깨어나지 않는 것이 원이로다.” 나는 술을 뿌리며 이백이 지은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을 권주가로 중얼거려 말하였다. “옛적에 성현도 다 흔적이 없고 오직 마시는 자만이 이름이 남더라.주인이 어찌 술이 적다고 하느냐.즉시 많은 술을 사올 것이다.오화마(五花馬)와 천금구(千金)를 꺼내어 좋은 술로 바꾸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다.”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라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하였다.
  • 儒林(10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훗날 이율곡으로부터 ‘진귀한 새,괴이한 돌,이상한 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인.이지함처럼 이산해도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평생 조광조를 사숙하여 신도비도 함께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이산해는 묘표에서 다음과 같이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오호라, 묘비로도 진실로 선생의 경중을 나타내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다시 여기에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겠는가.” 조광조의 무덤은 두 개의 석인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이 보호하고 있었다.봉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무덤 위에 자란 풀들도 가지런히 깎여 있다.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풀 사이에 피어 있었고,한 떼의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들고 온 비닐봉지 속에서 소주병과 건어물을 꺼내어 상석 위에 내려놓았다.마개를 따고 종이컵에 술을 한 잔 부은 다음 무릎을 꿇고 조광조의 무덤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상석 위에는 누군가 꺾어 묶은 한 다발의 들꽃이 놓여 있었다.배를 올리고 나서 나는 종이컵에 든 술을 봉분 주위를 돌아가며 무덤 위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조광조는 주색에 엄격하여 절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20세도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한 여인이 추파를 보내어 머리 비녀를 보내오자 이를 여인숙의 벽에 걸어 놓고 온 것은 유명한 일화였지만,실제로도 조광조는 평생 첩을 두지 않고 일부일처로만 지냈다.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예에 속하고 있다.관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양반이면 첩 하나쯤 두는 것이 예사였고,사회적으로도 허용되던 때였음에도 조광조는 정실부인 하나만을 고집하였다. 이율곡도 첩이 둘이나 있었고,심지어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퇴계도 축첩하고 있었는데,조광조의 이러한 처사는 시대를 초월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여자를 멀리하던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기록에 의하면 중종 13년 5월,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남녀가 적합하게 서로 만나서 정도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도심(道心)이지,사사로운 욕정이 아니며,또한 도에 지나치게 거절한다면 이 또한 사람의 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술로 인한 동료들의 실수를 자주 보고는 철저하게 절주를 실천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조광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학의 정신을 철저히 지켜나간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광조도. 나는 술을 무덤의 주위에 뿌리면서 생각하였다. 막상 의금부에 의해서 한밤중에 체포되자 엉망으로 만취하였던 것이다.자신을 심문하던 이장곤에게 ‘이 못난 놈아,이 용가(龍哥)야.’하고 술주정하였으며,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아마도 그 날이 조광조가 일생일대에 만취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으니. 나는 한잔 가득 따른 술을 무덤에 남김없이 뿌리며 중얼거렸다. “조광조여,무덤 속에 들어 있는 조광조의 영령이여, 술을 권하노니 사양하지 말고 내 노래 한 곡에 귀기울여 보시오.금도 옥도 비단도 귀한 것이 못된다.다만 길게 취하여 깨어나지 않는 것이 원이로다.” 나는 술을 뿌리며 이백이 지은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을 권주가로 중얼거려 말하였다. “옛적에 성현도 다 흔적이 없고 오직 마시는 자만이 이름이 남더라.주인이 어찌 술이 적다고 하느냐.즉시 많은 술을 사올 것이다.오화마(五花馬)와 천금구(千金)를 꺼내어 좋은 술로 바꾸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다.”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라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하였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22)

    유림 99에 憂憤이 나온다.憂는 마음 속에 근심이 있음을 뜻하는 글자다.심장을 본뜬 心( )이 들어간 한자는 거의가 忌(꺼릴 기:己 몸기+心),忍(참을 인),忘(잊을 망),忙(바쁠 망),忿(분할 분),怒(성낼 노),悟(깨달을 오),悲(슬플 비),悼(슬퍼할 도),情(뜻 정),惻(슬퍼할 측),感(느낄 감),懺(뉘우칠 참)처럼 그 뜻은 마음(心, )과 관련되어 있으며,음은 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된다.憂자가 들어간 한자는 優(넉넉할 우,광대 우), (탁식할 우), (곰방메 우)처럼 ‘우’라고 읽는다.무성하게 돋아난 풀을 본뜬 卉(풀 훼)자와 조개를 본뜬 貝(조개 패)자로 구성된 憤자는 언짢은 일로 마음이 부풀어오름(賁 클 분)을 뜻하는데,분함도 마음의 한 작용이므로 이 들어간다.賁자가 들어간 한자 역시 墳墓(분묘)라고 할 때의 墳(무덤 분),噴水(분수)라고 할 때의 噴(뿜을 분)처럼 ‘분’이라 읽는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근심 속에는 다음 일화와 같이 알고 보면 근심할 것이 아닌 쓸데없는 근심을 하는 경우가 있다.열자(列子)에 보면 중국 杞(기)나라에 근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 있었다.그는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하나.”하며 잠도 못자고 食飮(식음:먹고 마심)도 끊었다.그러자 이 일을 안 한 사람이 그에게 “하늘은 공기만 차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무너질 일이 없소.”라며 안심시켰다.그러자 걱정 많은 사람은 “그렇다면 해나 달 또는 별이 떨어지지는 않겠소? 그것들이 떨어지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소.”라며 계속 근심했다.이에 “해와 달과 별은 공기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니,그것들이 떨어져도 우리가 부딪쳐 죽지 않을 것이니 근심 마시오.”라며 이해시켰다.그러자 이번에는 “땅이 무너지면 어떡하오.”라며 계속 걱정하는 것이었다.이에 “땅은 흙이 쌓인 것인데 흙이 四方에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뛰고 밟아도 꼼짝하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라며 근심을 풀어주었다.여기서 나온 말이 ‘杞나라 사람의 근심’이라 해서 杞憂 또는 杞人之憂(기인지우)인데,이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라는 뜻이다.우리 주위에서도 어설프게 알아서 그것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니,안타까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다음 일화에서 나온 識字憂患(식자우환:학식이 있는 것이 도리어 근심을 사게 됨)인 경우도 있다.유비(劉備)가 諸葛亮(제갈량)을 영입하기 전에는 徐庶(서서)가 유비의 참모로 曹操(조조)를 여러모로 어렵게 만들었다.이에 조조는 서서의 어머니가 자신의 영역인 魏(위)나라에 있다는 점과,서서가 孝子(효자)라는 점을 이용하여 서서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그의 일환으로 조조의 참모 程昱(정욱)의 꾀에 따라 서서의 어머니 筆體(필체)를 흉내내어 서서에게 급히 집에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서서가 歸家(귀가)하자 평소 학식이 높고 의리를 중시하며 늘 한 君主만 잘 섬기라고 아들을 격려해온 그의 어머니가 놀라 自初至終(자초지종:처음부터 끝까지)을 알아보니,그것은 자신의 필체를 흉내낸 가짜 편지 때문이었음을 알았다.이에 서서의 어머니는 ‘女子가 글자(字)를 안다(識)는 것(者)은 근심(憂患)을 부르는 원인이 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상으로 볼 때 憂憤은 근심과 분함 또는 근심하며 분하게 여김 등으로 해석된다.佛經(불경) 중 華嚴經(화엄경)에 一體唯心造(일체유심),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사람의 온갖 감정인 喜怒哀樂(희로애락:기쁨과 노염과 슬픔과 즐거움)은 어느 상황에서라도 자신이 조정할 수 있어야 하는 바,이를 위한 수양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박교선 ˝
  •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둘째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둘째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儒林(10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무덤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 거대한 신도비가 우뚝 서 있었다.신도비는 지난날 종 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비였다. 이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선조 18년(1585년)으로 조광조 사후 66년이 흐른 뒤였다. 어명을 받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노수신(盧守愼)이고,비문을 쓴 사람은 이산해(李山海)였다.노수신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는데,어명으로 자신이 신도비명을 짓게 된 이유를 비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은 지금 임금(선조)의 원년이다.정암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다음해에 시호를 도덕이 있고,견문이 넓으며,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뜻으로 문정(文正)이라고 내리셨다.이윽고 어명으로 그의 행동을 기록하게 하시고,서원과 사우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이는 천심을 나타내고 사람의 도리를 붙잡아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선비된 자들이 안심하게 되었다.그뒤 11년 만에 진신포의(縉紳布衣)들이 모두 그 묘도(墓道)에 비각이 없다 하여서 모두들 나에게 와서 비명을 부탁하였다….” 서문에 나오는 ‘진신포의’ 중에서 진신은 옛날 벼슬하는 자가 홀(笏)을 꽂고 신(紳)을 드리웠기 때문에 관복을 입는 말이며,포의는 베로 지은 옷으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그러므로 여기서는 벼슬한 사람,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도비를 세울 것을 원하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석비의 앞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조광조의 생애를 비롯하여 그의 업적과 행장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비명은 다음과 같은 찬사로 끝맺음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큰 자리에서 옛것을 참고하여 새것을 도모하였도다.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바람처럼 움직여서 교화가 퍼져 갔도다. 진실로 총명하여 사리를 통달하면 물욕(物慾)의 가리움도 저절로 없어지니 나의 병이 아니로다. 그러나 소인들은 속으로 원을 품어 무리들이 이를 가니 꺼진 재가 다시 타도다. 얼굴 표정 바라보고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자나 깨나 모의하네.하지만 선생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케 여겨 나라 위한 그 단충은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배어나는 샘이로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어 사방의 모든 선비 보호하고 호위하니 아직까지도 전한 것이 있도다. 공(功)은 비록 두어 해를 깊이깊이 닦았으나 은택(恩澤)은 백성에게 흘러서 내려가도다. 온전함을 더욱 밝게 볼 수 있어 잘 모르는 그들에겐 내 이렇게 고하노니,두려워하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고,어진 이와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 주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며 패하는 건 하느님께 맡겨두리.” 신도비.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跡)을 기리는 비석.대개 무덤의 남쪽을 향해서 세우는데,여기서 신도란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곧 신령의 길이란 뜻이다.그렇다면 이 오솔길은 조광조의 신령과 만나러 가는 유일한 신도(神道)일 것인가.˝
  • 儒林(10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무덤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 거대한 신도비가 우뚝 서 있었다.신도비는 지난날 종 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비였다. 이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선조 18년(1585년)으로 조광조 사후 66년이 흐른 뒤였다. 어명을 받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노수신(盧守愼)이고,비문을 쓴 사람은 이산해(李山海)였다.노수신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는데,어명으로 자신이 신도비명을 짓게 된 이유를 비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은 지금 임금(선조)의 원년이다.정암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다음해에 시호를 도덕이 있고,견문이 넓으며,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뜻으로 문정(文正)이라고 내리셨다.이윽고 어명으로 그의 행동을 기록하게 하시고,서원과 사우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이는 천심을 나타내고 사람의 도리를 붙잡아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선비된 자들이 안심하게 되었다.그뒤 11년 만에 진신포의(縉紳布衣)들이 모두 그 묘도(墓道)에 비각이 없다 하여서 모두들 나에게 와서 비명을 부탁하였다….” 서문에 나오는 ‘진신포의’ 중에서 진신은 옛날 벼슬하는 자가 홀(笏)을 꽂고 신(紳)을 드리웠기 때문에 관복을 입는 말이며,포의는 베로 지은 옷으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그러므로 여기서는 벼슬한 사람,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도비를 세울 것을 원하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석비의 앞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조광조의 생애를 비롯하여 그의 업적과 행장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비명은 다음과 같은 찬사로 끝맺음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큰 자리에서 옛것을 참고하여 새것을 도모하였도다.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바람처럼 움직여서 교화가 퍼져 갔도다. 진실로 총명하여 사리를 통달하면 물욕(物慾)의 가리움도 저절로 없어지니 나의 병이 아니로다. 그러나 소인들은 속으로 원을 품어 무리들이 이를 가니 꺼진 재가 다시 타도다. 얼굴 표정 바라보고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자나 깨나 모의하네.하지만 선생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케 여겨 나라 위한 그 단충은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배어나는 샘이로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어 사방의 모든 선비 보호하고 호위하니 아직까지도 전한 것이 있도다. 공(功)은 비록 두어 해를 깊이깊이 닦았으나 은택(恩澤)은 백성에게 흘러서 내려가도다. 온전함을 더욱 밝게 볼 수 있어 잘 모르는 그들에겐 내 이렇게 고하노니,두려워하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고,어진 이와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 주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며 패하는 건 하느님께 맡겨두리.” 신도비.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跡)을 기리는 비석.대개 무덤의 남쪽을 향해서 세우는데,여기서 신도란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곧 신령의 길이란 뜻이다.그렇다면 이 오솔길은 조광조의 신령과 만나러 가는 유일한 신도(神道)일 것인가.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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