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무덤
    2026-01-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516
  • [열린세상] 조상들은 바보가 아니다

    [열린세상] 조상들은 바보가 아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중정치(대의정치)가 85%를 차지했다. 개인 독재(3%), 몇 사람에 의한 수인(數人) 독재(4%), 계급독재( 3%), 모른다(5%)를 압도하고 있다.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질문에는 자본주의(14%), 사회주의(70%), 공산주의(7%), 모른다(8%) 순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뭐야, 공산주의를 찬성하는 7%에 사회주의를 찬성하는 70%를 더하면 무려 77%가 좌익 지지자들이었다고? 이렇게 좌익이 많았으니 공산화될 위험이 높았던 거야! 이런 가운데 자유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참 고생하셨어!”라는 말을 흔히 한다.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런 말들이 그 시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을 존경하지 않는 시건방진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그들에게 말한다. 당시 한국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충분히 구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영연방의 모국 영국에서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노동당이 집권해 복지국가를 만들고 사회주의 정책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으로’는 영국 노동당의 구호이자 당시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정치 슬로건이었다. 미국은 어떤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정책이나 전쟁을 치러 내려 애쓰던 시기의 미국 경제에 과연 사회주의 요소는 없었던가. 2차 대전 종전 직후 시대정신의 가장 간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인권선언은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노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도 하늘이 주신 인권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당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사회권, 노동권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 의원은 “우리가 민족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고 있다”는 취지로도 발언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나치즘을 연상시키는 위험한 표현이지만 그는 전기와 가스, 석탄 같은 에너지 그리고 철도와 항만, 수도 사업을 국영으로 하고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을 실시할 근거를 헌법 조항에 못박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을 뿐이다. 조소앙은 사회당을 만들어 전국 최다 득표로 제2대 국회에 진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당의 창당대회에 비서를 보내 축사를 전달했다. 물론 전쟁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찰나의 순간에 피아 식별이 안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혼란 속에서 북한에서 쓰는 용어는 기피하다 보니 해방, 인민 등과 함께 사회주의도 유별난 단어가 됐다. 그래서 전후(戰後)의 감각으로 전전(戰前)의 자료를 읽으면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조상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탓하는 습관이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안 됐다.” “농지개혁은 실패했다.” “일제 말기 어떤 단체에 가입한 누구는 친일파다.” “50년대, 60년대에는 민도(民度)가 낮아 막걸리와 고무신이 선거판을 좌우했다.” 이런 판단을 맘대로 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조상들이 뭘 모르고 77%나 좌익을 지지했다”고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무지한 백성을 데리고 억지로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 아니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면서 국민들과 함께 이 나라를 만들었다. 그래서 건국 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평범한 사람,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 고대 로마 엘리트층, 반려동물로 ‘인도산 원숭이’ 키웠다

    고대 로마 엘리트층, 반려동물로 ‘인도산 원숭이’ 키웠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엘리트층이 인도산 수입 원숭이를 반려동물로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인디펜던트는 인도에서 로마령 이집트(아이깁투스)로 살아있는 동물이 거래됐다는 최초 증거가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집트 동쪽 해안 도시 베레니케의 고대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묘지로 2011년 처음 발견됐다. 지금까지 동물 매장지 약 800개가 발굴됐으며, 그중 도시 외곽에서 발견된 35마리 원숭이 무덤이 가장 흥미로운 발견으로 꼽힌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폴란드 연구팀은 원숭이 유골 연대를 로마 고위 군 장교 주둔 시기인 기원후 1~2세기로 추정했다. 뼈 분석 결과 대부분 인도산 마카크(macaque) 종이었다. 연구팀은 “베레니케에서 발견된 인도산 원숭이는 고대 로마가 반려동물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수입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최초 사례”라고 로마 고고학 저널(Journal of Roman Archaeology)에 지난달 28일 발표했다. 발굴 현장엔 원숭이와 함께 목걸이·음식·무지갯빛 조개껍데기 등 사치품이 묻혔고, 일부 무덤엔 돼지 새끼·새끼 고양이도 동반됐다. 원숭이 무덤 40%에 부장품이 있었으나 개·고양이는 거의 없었다며 연구진은 “원숭이가 다른 반려동물보다 특별한 지위를 가졌던 신호”라고 분석했다. 한 원숭이 발엔 질병 치료 흔적도 포착됐다. 논문은 “인도산 원숭이 소유가 엘리트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일부 원숭이 두개골에서 영양실조 흔적이 포착됐는데, 이는 외딴 지역인 베레니케의 과일·채소 부족이 원인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이전에도 로마인들의 애완 원숭이를 길렀다는 증거는 다수 나왔지만 대부분 아프리카산이었다”면서 “(이번 발견은) 고대 로마가 초기 제국 시대에 인도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 개·고양이 아니다…고대 로마 엘리트층이 반려동물로 키운 ‘이것’

    개·고양이 아니다…고대 로마 엘리트층이 반려동물로 키운 ‘이것’

    고대 로마 제국의 엘리트층이 인도산 수입 원숭이를 반려동물로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인디펜던트는 인도에서 로마령 이집트(아이깁투스)로 살아있는 동물이 거래됐다는 최초 증거가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집트 동쪽 해안 도시 베레니케의 고대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묘지로 2011년 처음 발견됐다. 지금까지 동물 매장지 약 800개가 발굴됐으며, 그중 도시 외곽에서 발견된 35마리 원숭이 무덤이 가장 흥미로운 발견으로 꼽힌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폴란드 연구팀은 원숭이 유골 연대를 로마 고위 군 장교 주둔 시기인 기원후 1~2세기로 추정했다. 뼈 분석 결과 대부분 인도산 마카크(macaque) 종이었다. 연구팀은 “베레니케에서 발견된 인도산 원숭이는 고대 로마가 반려동물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수입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최초 사례”라고 로마 고고학 저널(Journal of Roman Archaeology)에 지난달 28일 발표했다. 발굴 현장엔 원숭이와 함께 목걸이·음식·무지갯빛 조개껍데기 등 사치품이 묻혔고, 일부 무덤엔 돼지 새끼·새끼 고양이도 동반됐다. 원숭이 무덤 40%에 부장품이 있었으나 개·고양이는 거의 없었다며 연구진은 “원숭이가 다른 반려동물보다 특별한 지위를 가졌던 신호”라고 분석했다. 한 원숭이 발엔 질병 치료 흔적도 포착됐다. 논문은 “인도산 원숭이 소유가 엘리트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일부 원숭이 두개골에서 영양실조 흔적이 포착됐는데, 이는 외딴 지역인 베레니케의 과일·채소 부족이 원인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이전에도 로마인들의 애완 원숭이를 길렀다는 증거는 다수 나왔지만 대부분 아프리카산이었다”면서 “(이번 발견은) 고대 로마가 초기 제국 시대에 인도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 바다 위 능선에서 계단식 논까지…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바다 위 능선에서 계단식 논까지…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경남 남해군 남면 해안은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가장 극적으로 맞닿는 공간이다. 그 중심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암릉의 산인 설흘산과 108층의 논이 계단처럼 이어지는 다랭이마을이 나란히 자리한다. 한쪽에서는 바다를 품은 산이 솟아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논을 일궈왔다. 해발 488m의 설흘산은 남면 홍현마을에 자리하며 망산과 이웃한 남해의 대표 조망 산이다. 설흘산은 남면 해안도로와 더불어 일출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깊숙이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펼쳐지고 조선 후기 문인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가 아늑하게 내려다보인다. 날이 좋은 날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기자기한 섬들과 남해의 망망대해까지 시야에 담긴다. 설흘산은 ‘땅 위의 산’이 아니라 ‘바다 위에 그려진 산’이라 불릴 만큼 독특한 풍경을 지녔다. 사촌마을에서 출발해 응봉산을 거쳐 설흘산 주봉을 지나 가천마을로 이어지는 약 5km의 암릉 능선은 양쪽이 거의 직벽에 가까운 바위벼랑으로 이어진다. 능선 곳곳에서는 푸른 바다가 발아래 펼쳐지고, 바다 위로 점점이 떠 있는 작은 배들까지 더해지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바다에서 바로 시작하는 산행이지만 위험한 구간은 많지 않아 사계절 산행지로 사랑받는다. 설흘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장관인 다랭이마을을 만날 수 있다. 다랭이마을은 선조들이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45도에 가까운 산비탈을 깎고 곧추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논으로 유명하다. 108개 층, 680여 개의 논이 바다를 향해 층층이 이어지며 ‘다랑이’ 또는 남해 사투리로 ‘다랭이’라 불린다. 이 계단식 논은 2005년 국가 명승 제15호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들쭉날쭉 제멋대로 생긴 논 사이에는 산책로와 전망대가 잘 조성돼 있어 누구나 편안하게 걸으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암수바위, 밥무덤, 구름다리, 몽돌해변 등을 둘러보는 데는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다랭이마을은 지금도 소와 쟁기가 농사의 필수 도구인 삶의 현장이다.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들로, 식사 시간에 앉은 자리가 곧 밥상이 될 만큼 인정이 남아 있다. 한겨울에도 눈을 보기 힘들 정도로 따뜻한 기후 덕분에 봄이면 쑥과 시금치 같은 봄나물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밀고, 개울에는 여전히 참게가 살며 가마우지가 날아든다. 여름에는 손 모내기 체험이 이루어지고, 가을에는 감성돔 낚시와 참게 잡이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척박한 땅 위에서 이어져 온 억척스러운 삶의 방식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다랭이마을은 도보 여행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근 빛담촌을 거쳐 항촌·사촌·유구·평산 바닷가로 이어지는 다랭이지겟길과, 홍현마을에서 다랭이마을 해안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남해바래길의 대표 노선으로 꼽힌다. 바다를 마주 보며 걷는 이 길은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 코스 중 하나다. 다랭이마을에서는 대표 토속음식인 멸치쌈밥과 유자막걸리를 한번 맛보는 것을 추천한다. 인근에는 보물섬캠핑장이 있어 하룻밤 캠핑을 즐기며 카약과 바다낚시를 체험할 수도 있고, 남해의 또 다른 명소인 금산 보리암과 연계한 여행도 가능하다.
  • 바다 위 능선에서 계단식 논까지…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두시기행문]

    바다 위 능선에서 계단식 논까지…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두시기행문]

    경남 남해군 남면 해안은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가장 극적으로 맞닿는 공간이다. 그 중심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암릉의 산인 설흘산과 108층의 논이 계단처럼 이어지는 다랭이마을이 나란히 자리한다. 한쪽에서는 바다를 품은 산이 솟아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논을 일궈왔다. 해발 488m의 설흘산은 남면 홍현마을에 자리하며 망산과 이웃한 남해의 대표 조망 산이다. 설흘산은 남면 해안도로와 더불어 일출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깊숙이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펼쳐지고 조선 후기 문인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가 아늑하게 내려다보인다. 날이 좋은 날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기자기한 섬들과 남해의 망망대해까지 시야에 담긴다. 설흘산은 ‘땅 위의 산’이 아니라 ‘바다 위에 그려진 산’이라 불릴 만큼 독특한 풍경을 지녔다. 사촌마을에서 출발해 응봉산을 거쳐 설흘산 주봉을 지나 가천마을로 이어지는 약 5km의 암릉 능선은 양쪽이 거의 직벽에 가까운 바위벼랑으로 이어진다. 능선 곳곳에서는 푸른 바다가 발아래 펼쳐지고, 바다 위로 점점이 떠 있는 작은 배들까지 더해지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바다에서 바로 시작하는 산행이지만 위험한 구간은 많지 않아 사계절 산행지로 사랑받는다. 설흘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장관인 다랭이마을을 만날 수 있다. 다랭이마을은 선조들이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45도에 가까운 산비탈을 깎고 곧추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논으로 유명하다. 108개 층, 680여 개의 논이 바다를 향해 층층이 이어지며 ‘다랑이’ 또는 남해 사투리로 ‘다랭이’라 불린다. 이 계단식 논은 2005년 국가 명승 제15호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들쭉날쭉 제멋대로 생긴 논 사이에는 산책로와 전망대가 잘 조성돼 있어 누구나 편안하게 걸으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암수바위, 밥무덤, 구름다리, 몽돌해변 등을 둘러보는 데는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다랭이마을은 지금도 소와 쟁기가 농사의 필수 도구인 삶의 현장이다.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들로, 식사 시간에 앉은 자리가 곧 밥상이 될 만큼 인정이 남아 있다. 한겨울에도 눈을 보기 힘들 정도로 따뜻한 기후 덕분에 봄이면 쑥과 시금치 같은 봄나물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밀고, 개울에는 여전히 참게가 살며 가마우지가 날아든다. 여름에는 손 모내기 체험이 이루어지고, 가을에는 감성돔 낚시와 참게 잡이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척박한 땅 위에서 이어져 온 억척스러운 삶의 방식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다랭이마을은 도보 여행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근 빛담촌을 거쳐 항촌·사촌·유구·평산 바닷가로 이어지는 다랭이지겟길과, 홍현마을에서 다랭이마을 해안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남해바래길의 대표 노선으로 꼽힌다. 바다를 마주 보며 걷는 이 길은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 코스 중 하나다. 다랭이마을에서는 대표 토속음식인 멸치쌈밥과 유자막걸리를 한번 맛보는 것을 추천한다. 인근에는 보물섬캠핑장이 있어 하룻밤 캠핑을 즐기며 카약과 바다낚시를 체험할 수도 있고, 남해의 또 다른 명소인 금산 보리암과 연계한 여행도 가능하다.
  • 구자열 전 강원도 비서실장, 원주시장 출마 선언

    구자열 전 강원도 비서실장, 원주시장 출마 선언

    더불어민주당 소속 구자열 전 강원도지사 비서실장이 11일 내년 원주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구 전 실장은 이날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이 풍요롭고 행복한 도시, 대한민국 중부내륙의 미래 중심도시를 만들겠다”며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러면서 제2판교 육성, 제2혁신도시 유치, 의료AX 특구 조성 등 5대 권역 전략을 발표했다. 구 전 실장은 “정치적 유불리보다 시민의 삶을 최우선으로 두고, 말보다 실천을 선택하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구 전 실장은 최문순 강원도지사 시절 비서실장과 정무특보를 역임했고, 두차례 강원도의원을 지냈다. 민주당에서는 구 전 실장 외 곽문근 원주시의회 부의장, 원창묵 전 원주시장 등도 후보군으로 꼽히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원강수 현 원주시장의 재선 도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당내 경쟁자로는 김기홍·최재민 강원도의원 등이 꼽히고 있다. 무소속인 조용기 원주시의회 의장도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댐이나 피라미드 대신 죽음을”…비트 세대 시인의 강렬한 사모곡

    “댐이나 피라미드 대신 죽음을”…비트 세대 시인의 강렬한 사모곡

    “우리는 댐이나 피라미드가 아니라 죽음을, 그 벌거벗음을 준비해야 한다.”(앨런 긴즈버그, ‘응답’ 부분) 양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는 ‘불안한 평화’로 접어들었다. 안정을 바탕으로 한 풍요가 찾아오고 있었지만, 기성세대로부터 강요된 이 질서가 못마땅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저항과 개성을 중시하며 나름의 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1950년대 미국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가 대표적이다. 미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되는 앨런 긴즈버그(1926~1997)는 이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긴즈버그의 대표작 ‘카디쉬’(미행)가 얼마 전 한국어로 처음 소개됐다. 시인이자 교사였던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긴즈버그는 1940년대 미국 컬럼비아대 재학 시절 비트 세대 예술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나름의 문화적, 지적 토양을 일궜다. 그의 첫 시집 ‘울부짖음과 기타 시들’(1956년)은 그 결과물이다. ‘카디쉬’는 그가 첫 시집의 성공 이후 미국 히피문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뒤에 내놓은 시집이다. 불교를 비롯한 동양 철학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반전(反戰)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정치·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카디쉬’는 시인의 어머니를 기린 작품이다. 정신 붕괴로 강제 입원, 격리, 망상, 폭력, 자살시도 등 긴즈버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인은 어머니와 그를 둘러싼 여러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담담히 애도한다. 미행에서 출간하는 이 책에는 ‘카디쉬’ 외에도 냉전 시대 우주 개발을 다루는 ‘시 로켓’을 비롯한 ‘유럽! 유럽!’, ‘아폴리네르의 무덤에서’ 등의 시가 추가로 수록됐다. 미국시를 연구하는 손혜숙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가 번역했다.
  • “스스로 묶었지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목숨과 맞바꾼 위험한 쾌락, 혹은 비극적 실수...‘자기색정사’[듣는 그날의 사건현장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스스로 묶었지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목숨과 맞바꾼 위험한 쾌락, 혹은 비극적 실수...‘자기색정사’[듣는 그날의 사건현장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어떤 죽음은 스스로 초래한 위험한 놀이의 결과이기도 하다. 외부의 침입도, 타살의 흔적도, 그렇다고 삶을 비관한 유서도 없는 기이한 밀실 사망 사건. 현장에는 오직 싸늘한 주검과 이해하기 힘든 도구들만이 남아 있다. 법의학계에서는 이를 ‘자기색정사(自己色情死·Autoerotic death)’라 부른다. 성적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뇌로 가는 산소를 고의로 차단하다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 생을 마감하는 치명적인 사고다. 본지는 국내외 사례와 법의학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쾌락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 위험한 현상의 실체를 추적했다. # 사례 1. 서울의 어느 밀실, 기묘하게 묶인 남자 2004년, 서울의 한 주택가. 40대 남성 K씨가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현장을 처음 목격한 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기괴하고도 충격적인 장면 때문이었다. K씨는 여성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입안에는 여성용 스카프가 터질 듯이 채워져 있었고, 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끈 자국들이 선명했다. 현장 감식 결과, 목을 조른 도구는 개 목걸이와 스카프 등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끈이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튼 듯 복잡하게 엉킨 매듭은 그가 강한 힘으로 목이 졸려 사망했음을 암시했다. 더욱이 무릎과 두 발 역시 스카프로 단단히 결박된 상태였다. 누가 봐도 고문에 가까운 타살이 의심되는 상황.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으나 가족들은 누군가에 의한 살인을 강력히 주장했다.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져 부검대에 올랐다. 부검의의 칼끝이 피부를 가르자, 죽음의 원인을 가리키는 징후들이 드러났다. 얼굴 주변과 내부 장기에는 혈액이 순환하지 못해 생긴 울혈이 검붉게 뭉쳐 있었고, 안구 점막과 눈꺼풀 속, 폐 표면에서는 ‘일혈점(溢血點)’이라 불리는 좁쌀 크기의 붉은 반점들이 무수히 발견됐다. 이는 전형적인 질식사의 소견이었다. 그러나 국과원의 최종 결론은 예상을 뒤엎었다. 자살도, 타살도 아닌 ‘사고사’였다. 스스로를 결박하고 목을 조르며 성적 환각을 즐기다, 의식을 잃는 순간 줄을 풀지 못해 사망에 이른 것이다. K씨의 방은 그만의 은밀한 쾌락의 성전이자, 탈출구 없는 무덤이었다. # 사례 2. 방콕 호텔 옷장의 할리우드 스타 자기색정사는 비단 일반인들만의 일탈이 아니다. 2009년 6월, 태국 방콕의 한 고급 호텔. 영화 ‘킬빌(Kill Bill)’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할리우드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당시 72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그는 호텔 방 옷장 안에 있었으며, 밧줄로 목을 맨 상태였다. 알몸이었다. AP통신 등 전 세계 주요 외신은 일제히 ‘자살’이라는 속보를 타전했다. 화려한 스타의 비극적인 최후로 사건은 종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장을 정밀 감식한 태국 경찰의 발표는 달랐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은 맞지만, 자살은 아니다.” 방콕 경찰청 수사팀은 시신의 상태와 결박 방식에 주목했다. 알몸 상태에서 끈으로 신체 중요 부위와 목을 연결해 묶은 정황은 전형적인 자기색정 행위의 특징이었다. 오라퐁 시프리차 수사팀장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성적 행위를 하다 실수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밝혔다. 유족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미 연방수사국(FBI)에 재조사를 의뢰했고, 저명한 미국 법의학 전문가가 2차 부검을 진행했다. 그러나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타인의 침입 흔적도, 죽기 전 발버둥 친 방어흔(Defense mark)도 없었다. 그는 쾌락의 정점에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뇌를 속이는 치명적인 유혹, ‘저산소증’의 메커니즘 도대체 왜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이런 위험한 행위에 빠져드는 것일까. 법의학자와 의학 전문가들은 이를 ‘뇌의 착각’으로 설명한다. 목에 있는 경동맥을 압박하거나 흉부를 눌러 뇌로 가는 혈류량과 산소 공급을 일시적으로 줄이면, 인체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뇌는 가벼운 두통과 함께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데, 이를 몽롱한 환각 상태나 꿈을 꾸는 듯한 부유감(floating sensation)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뇌에서는 엔도르핀과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기도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생리적 변화를 극도의 성적 쾌감으로 받아들인다. 과거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서로의 목을 조르거나 명치를 눌러 기절시키는 ‘기절 놀이’ 역시 같은 원리다. 문제는 ‘임계점(Critical Point)’이다. 뇌는 산소 부족에 매우 취약하다. 쾌락을 느끼는 지점과 의식을 잃는 지점 사이의 간격은 찰나에 불과하다. 혼자서 목을 조르거나 비닐봉지를 뒤집어쓰는 행위 도중, 예상보다 빨리 의식을 잃게 되면 스스로 결박을 풀거나 도구를 제거할 힘을 잃게 된다. 그 순간, 쾌락을 위해 설치한 장치는 살인 흉기로 돌변한다. 타이밍을 놓친 대가는 곧 죽음이다. ● 현장은 알고 있다… 타살과 사고사를 가르는 ‘매듭의 비밀’ 자기색정사는 수사기관에 큰 혼선을 준다. 겉보기에 타살이나 자살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살로 오인될 경우 경찰력이 낭비되고, 자살로 오인될 경우 보험금 지급 등 유가족의 권리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현장 감식과 법의학적 분석은 진실을 규명하는 열쇠가 된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매듭’이다. 사망자는 대개 손이나 발 등 신체 일부를 묶고 있다. 법의관들은 이 결박이 ‘죽은 사람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구조인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매듭이라도 혼자서 묶고 풀 수 있는 형태가 있지만, 단순해 보여도 타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매듭이 있다. 등 뒤로 묶인 손이나 복잡한 밧줄의 경로는 타살을 의심케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혼자서 가능한 범위라면 자기색정사의 유력한 증거가 된다. 사고 장소의 특수성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대부분의 시신은 가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격리된 자기 방, 잠긴 욕실, 다락방, 지하실 등에서 발견된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어 ‘밀실’ 형태를 띤다. 또한 현장에 남겨진 소품들은 고인의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남성이 여성 속옷을 입거나 화장을 한 복장 도착증의 형태, 시신 주변에 널브러진 성인 잡지나 영상물, 그리고 자기 모습을 비추는 거울 등이 그것이다. 거울은 자신의 행위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쾌락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주로 10대에서 30대 남성에게서 많이 발견되지만, 드물게 여성의 사례도 보고된다. 국과원의 한 법의관은 “특히 여성의 경우, 현장 상황만 보면 성폭행 후 살해당한 타살 현장과 매우 유사하게 연출되는 경우가 많아 초동 수사 단계에서 형사들에게 큰 혼란을 주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 ‘불명예스러운 죽음’… 통계조차 없는 한국의 현실 이처럼 기이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는 매년 500명 정도가 자기색정적인 행위 도중 사고로 사망한다는 보고가 있다. 하루 평균 1.4명꼴로 발생하는, 절대 드물지 않은 죽음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이는 사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자기색정사에 대한 일선 경찰의 이해도가 낮아 단순 자살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유가족들의 침묵이다. 가족의 죽음이 성적 쾌락을 좇다 발생한 ‘사고’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망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남은 가족들의 사회적 체면을 위해 진실을 덮으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10년 차 법의관 A씨는 “가족들은 고인이 성적 만족을 찾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기보다는 그냥 자살을 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반기는 편”이라면서 “마지막까지 곱게 보내고 싶은 것이 가족의 마음이라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하는 것은 실질적인 문제와도 직결된다. 생명보험의 경우, 자살(고의적 자해)은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제한되는 반면, 자기색정사는 ‘재해 사망(우연한 사고)’으로 인정받아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실을 덮으려는 감정적 욕구와 경제적 이익 사이에서 유가족들은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쾌락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이 생존 본능을 억누르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꽉 조인 매듭을 풀지 못한 채 홀로 맞이하는 차가운 죽음. 그것은 쾌락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밀폐된 방 안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앞선 이들의 죽음은 무거운 경고를 보내고 있다.
  • [서울광장] 나가사키, 짬뽕, 인천

    [서울광장] 나가사키, 짬뽕, 인천

    이름만 들었을 때 인천가족공원은 대형 놀이 시설 같다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넓은 계곡에 포근히 자리잡은 공원을 찾아가니 시민을 위한 장례 종합 시설이었다. 이곳이 궁금했던 것은 하나 글로버 베넷(1873~1938) 때문이었다. 일본 나가사키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글로버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옛집이 있는 글로버가든은 나가사키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됐다. 하나는 일본 사람들이 ‘구라바엔(園)’이라 부르는 글로버가든에 저택을 남긴 토머스 글로버(1838~1911)의 딸이다. 글로버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막부 정권이 막을 내리고 메이지유신이 본격화한 언저리에 일본에 서양 무기를 판매한 중개상이었다. 일본과의 거래로 고향 애버딘 조선소에 여러 척의 군함을 발주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니 1876년 강화도조약을 부른 운양호를 일본이 도입하는 데 관여했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 애버딘 조선소에서 지은 운양호는 1875년 5월 일본에 인도됐고 곧바로 9월 영종도와 강화도 해안에 불법 침입했다. 하나의 무덤은 인천가족공원 외국인 묘지에 있다. 이곳엔 영국, 미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체코 등 다양한 국적 인물의 묘비가 줄지어 있다. 이는 개항기 인천이 가졌던 국제도시의 성격을 보여 준다. 규모가 큰 중국인 묘지의 존재도 뜻밖이었다. 인천화교자은탑(仁川華僑慈恩搭)이 큼지막하게 세워지고, 토지신을 모신 복덕궁(福德宮)이라는 중국식 사당이 들어선 모습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하나의 무덤과 중국인 묘지가 나란히 자리잡은 광경을 보니 어이없게 짬뽕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나가사키 바닷가 언덕 위 글로버가든에서 내려오면 시카이로(四海褸)라는 간판의 제법 큰 건물이 보인다. 나가사키짬뽕을 처음 만든 음식점이라고 한다. 우리 짬뽕은 나가사키에서 일본화한 것을 다시 인천에서 한국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짜장면은 인천에서 한국화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인천과 나가사키는 중국 음식점이 밀집한 차이나타운이 있는 것도 닮은 꼴이다. 중국인 묘지에 한국 사람의 기호에 맞는 짜장면이나 짬뽕을 처음 만든 분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하나의 무덤 앞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소재와 무대가 됐던 나가사키의 무역상 글로버 집안의 딸’이라는 표석이 있다. 글로버가든에도 ‘나비부인’ 기념물이 있었다. 푸치니가 일본의 오페라 가수 미우라 다마키를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우라는 일본에서 ‘나비부인’ 주인공 초초상 역으로 유명했다. 글로버의 일본인 부인 아와지야 쓰루를 초초상과 연결 지으려는 의도였겠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글로버는 다른 일본 여성 가가 마키와 사이에도 구로바 도미사부로라는 아들을 두었다. 구로바로 창씨(創氏) 해 일본 호적에 올랐다. 구로바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 유학했고 이후 아버지 사업을 도왔다. 일본 서남부 지역 어류도감도 편찬했다고 한다. 글로버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닫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글로버 일가와 한국은 악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글로버가 한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았음에도 그 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적국의 스파이’로 감시 대상이 됐다. 군함을 건조하던 미쓰비시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글로버저택도 이런 의심 때문에 한때 언덕 아래로 옮겨졌다고 한다. 구로바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인 1945년 8월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에게는 광복을 안겨 준 사건이지만 ‘절반의 연합국 출신’인 그는 ‘절반의 가해자’로 복잡한 심경이었던 것 같다. 그의 스토리는 각색 없이도 ‘나비부인’보다 극적이다. 하나의 남편 월터 베넷은 인천에서 광창양행을 경영하며 영국 대리영사를 겸하기도 했다. 글로버도, 하나도, 구로바도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과 나가사키가 활발하게 소통했다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두 도시를 묶은 ‘글로버 투어’를 권하고 싶다.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에게도 의미 있는 역사 여행이 될 것이다. 짬뽕의 진화 역사 체험은 덤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 CT로 1500년 전 글자 판독… 역사 해석 ‘새 길’이 열렸다

    CT로 1500년 전 글자 판독… 역사 해석 ‘새 길’이 열렸다

    1500년 전 칼등에 새겨진 글자가 최신 과학기술로 판독되면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길이 열렸다. 국립김해박물관은 17일 경남 창녕 교동 11호분에서 출토된 상감명문대도(象嵌銘文大刀)를 재조사해 칼등에 새겨진 글자를 ‘상부선인귀상도’(上部先人貴常刀)로 판독했다고 밝혔다. 가야 무덤 중 보기 힘든 대형분으로 직경 28m에 이르는 창녕 교동 11호분에서는 1918년 발굴 당시 용·봉황 무늬 고리자루 큰 칼, 금동관, 금동제 나비 모양 관장식, 은제 허리띠 등 금속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때문에 학계는 해당 무덤을 5~6세기 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고 주목해 왔다. 발굴 유물 중에는 표면에 홈을 내고 그 안을 금실 혹은 은실로 채워 글자를 새긴 큰 칼(상감명문대도)도 있었다. 삼국시대 상감명문대도는 현재 3점만 전해질 정도로 희귀하다. 국내에 있는 것으로는 이 칼이 유일하고 나머지 2점은 일본에 있다. 그런데 칼에 새겨진 일곱 글자는 오랜 세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 칼에 글자가 있다는 것은 1984년 보존 처리 과정에서 처음 확인됐지만, 글자 표출 작업은 1990년 진행됐다. 당시 2~5번째 글자인 ‘부선인귀’는 비교적 판독이 수월했으나 첫 번째 글자 상(上)은 문맥에 의한 추정이었고, 여섯 번째 글자는 사라진 획이 많아 아예 읽지 못했다. 마지막 글자 역시 판독이 어려워 도(刀) 혹은 내(乃)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었다. 김해박물관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의 지원을 받아 컴퓨터단층촬영(CT)을 시도한 결과 미궁 속에 있던 여섯 번째 글자는 상(常)으로 드러났다. 의견이 분분했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는 각각 ‘상’과 ‘도’로 확인됐다. 전효수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소속, 관직명, 이름 순인 삼국시대 표기법을 고려하면 ‘상부 소속 선인 계급 귀상이라는 사람의 칼’로 해석할 수 있다”며 “‘선인’은 고구려에 있던 계급이라 400년에 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시기 내려왔던 사람이 썼던 칼이라는 추정 등 앞으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게 됐다”고 힘줘 말했다.
  • 도쿄돔이 좁았던 안현민…“한일전이요? 재미 있던데요”

    도쿄돔이 좁았던 안현민…“한일전이요? 재미 있던데요”

    “한일전이요? 매우 재밌었습니다.”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본 평가전 최대 성과는 ‘괴물 중고 신인’ 안현민(22·kt 위즈)의 국제 무대 경쟁력 확인이다. 대표팀을 이끄는 류지현 감독조차 “안현민이라는 선수를 찾았다는 점이 성과”라면서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본 무대에선 자기 기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생애 첫 성인 대표팀에 합류에 두 차례 한일전을 치른 안현민은 17일 김포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만난 취재진에게 “(한일전이라고) 긴장은 하나도 안 했다. 크게 다를 게 없더라”라고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로 한일전 소감을 밝혔다. 안현민은 지난 15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 1차 평가전에서 0-0으로 맞선 4회초 모리우라 다이스케(히로시마 도요카프)를 상대로 선제 2점 홈런을 터뜨리며 국제 무대에 존재감을 알렸다. 이어 1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본과 2차전에서는 5-7로 패색이 짙었던 8회 1사에서 다카하시 히로토(주니치 드래건스)를 상대로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대형 홈런으로 추격의 신호탄을 쐈다. 이날 경기에선 뛰어난 선구안을 보이며 볼넷 3개를 얻는 등 2타수 1안타 3볼넷 2득점으로 활약했다. 안현민은 “KBO리그에서나 일본에서나 좋은 투수를 상대하는 건 똑같은 것 같다”며 “특별히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고 재차 말했다. 그는 일본 현지 기자들에게 일본 야구에 관해 물어보는 등 적지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눈길을 모았다. 안현민은 이와 관련해 “일본 기자 중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기자가 있었다”며 “유명한 일본 선수가 보이지 않기에 물어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꿈의 무대인 WBC에 꼭 나가고 싶다. 만약 뽑히게 된다면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려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김민정의 일러두기] 이런 소풍, 김밥은 못 들고 가지만요

    [김민정의 일러두기] 이런 소풍, 김밥은 못 들고 가지만요

    아빠의 유골함이 새집으로 옮겨가게 됐다. 근 10개월 가까이 컨테이너 박스에 임시로 안치돼 있던 아빠의 납골함이 완공된 추모관 1층 추모실에 모셔졌다 하여 들어서고 보니 그 큰 방에 덩그러니 혼자였다. 홍보가 덜 돼 예약률이 낮은 걸까요? 유독 인기가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안내를 맡아 주신 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나도 모르게 뱉은 그 ‘인기’라는 말에 일순 겸연쩍어져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물음인가 순간 자문에 빠지기도 했다. 죽은 자를 위한 것이 결국 산 자를 위한 것이고 산 자를 위한 것이 결국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 할 적에,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라야 무궁무진하겠지만 이 맥락에서 보자면 결국 우리 다 양쪽 입장을 오가며 시소 타는 일이라 비유하고 말 적에, 여기는 참 조용하고 나는 참 시끄러웠다. 맞지, 죽음은 말이 없는 것이었지. 그치, 삶은 입이 있는 것이었지. 아니 돌아가셔야들 여기 들어오실 거 아닙니까. 아직 안 돌아가셨으니 안 들어오고 못 들어오고 계시는 거지요. 단순하면서도 명징한 이 사실을 아둔한 내가 뒤늦게야 깨닫고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1년에 한 번 유골함이 들어 있는 유리문을 열어 주신다 하니 저마다 여기 넣을 것을 제각각 준비해서 만나면 좋겠습니다. 일요일 오후 열둘이 모인 가운데 누군가는 사진을, 누군가는 묵주를, 누군가는 천사 모빌을, 누군가는 편지를, 누군가는 종이로 접은 파랑새를, 누군가는 미니어처로 제작한 밥상과 술상을, 누군가는 신년 다이어리를, 누군가는 볼펜을, 누군가는 트레이싱지에 뽑은 시 3편을…. 그때 누군가가 제 가방에서 향수를 딱 꺼내려는데 더는 놓을 자리 없이 집들이 선물로 꽉 들어찬 아빠의 새 보금자리라니. 이렇게나 좁은 걸. 이렇게도 작은 걸. 현실이 이러하니 우리는 더 열심히 쇼핑을 해야 하는 걸까, 현실이 이러하니 우리 더는 죽어도 쇼핑을 말아야 하는 걸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기에 세상에는 맥시멀리스트라 불리는 사람도 있고 미니멀리스트라 불리는 사람도 있어 만나면 반갑다고 MBTI부터 묻고 그러는 거겠지. 바람 쐬러 아빠 보러 갈래? 심심한데 아빠 보고 올까? 누가 보면 효녀 김청인 줄 알겠지만 아니다, 이야기의 궤를 꿸 수도 없이 복잡다단한 비리 뉴스에 짜증이 쌓였기도 했을 거다. 국감 현장을 보고 듣고 있는 것도 크나큰 스트레스의 요인이었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밤낮없이 늘어나는 각종 채널의 자극적인 제목에 몇 시간이고 휴대폰에 붙들리는 나의 의지박약을 새로 고침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다. 왜들 그렇게 저만 옳을까. 왜들 그렇게 막말을 일삼을까. 왜들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를까. 왜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반성하지 않을까.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거 절망이라고 시인 김수영이 말했는데, 결국에 푸른 것은 내 무덤뿐이라고 시인 최승자가 말했는데, 이쯤에서 짐작하시려는가. 내가 자꾸 무덤가로 소풍 나오려는 연유를.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 세심한 배려로 조타 떠나보낸 호날두 “내 유명세에 장례식이 서커스장 될 거라 판단”

    세심한 배려로 조타 떠나보낸 호날두 “내 유명세에 장례식이 서커스장 될 거라 판단”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포르투갈 국가대표 디오구 조타의 장례식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 나스르)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배려’ 때문이었다. 호날두는 “내가 움직이면 관심이 모두 나에게 쏠린다. 그런 광경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호날두는 7일(한국시간) 유튜브 ‘피어스 모건 언센서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다시 가지 않는다. 내 유명세 때문에 어디를 가든 서커스장이 된다. 조타의 장례식장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타는 지난 7월 스페인 사모라에서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슬하에 세 자녀를 둔 조타가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어 고향인 포르투갈 곤두마르의 교회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는데 대표팀 동료 호날두가 모습을 보이지 않아 비난받았다. 호날두는 “처음 조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여전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며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조타와 그의 가족을 위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많이 비판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 대표팀 동료 장례식 불참한 호날두…“사실은” 못간 진짜 이유

    대표팀 동료 장례식 불참한 호날두…“사실은” 못간 진짜 이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 나스르)가 지난 7월 향년 28세로 사망한 포르투갈 대표팀 동료 디오구 조타의 장례식에 불참한 이유를 4개월 만에 밝혔다. 당시 호날두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추모했지만, 장례식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축구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호날두는 6일(현지시간) 유튜브 토크쇼 ‘피어스 모건 언센서드’에 출연해 “내가 (조타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조타와 그의 가족을 위한 행동이었다”며 “사람들은 계속 비판할 수 있지만 나는 내 결정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다시 가지 않았다”며 “내가 어디를 가든, 그곳은 서커스장이 되고 만다. 내가 움직이면 관심이 모두 나에게 쏠린다. 조타의 장례식에서 그런 관심을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동료의 엄숙한 장례식이 자신 때문에 자칫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해 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조타는 지난 7월 3일 스페인 사모라 주(州)의 한 고속도로에서 동생과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생인 조타는 스페인 라리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 울버햄프턴을 거쳐 2020년부터 리버풀에서 활약했다. 호날두와 조타는 포르투갈 대표팀의 핵심으로 호흡을 맞추며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네이션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이 대회 결승전이 조타의 생전 마지막 경기가 됐다. 호날두는 조타가 사망하자 자신의 SNS에 조타의 사진과 함께 “말도 안 된다. 우리는 얼마 전에도 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는데”라며 애도했다. 다만 이후 조타의 장례식에 불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센 비난에 시달렸다. 특히 포르투갈 축구대표팀 주장인 그는 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하던 동료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포르투갈 언론은 호날두가 2005년 부친상 당시 언론의 쏟아지는 관심 속에 슬퍼하기조차 어려운 분위기를 경험한 뒤 트라우마로 참석하지 않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쏟아지는 비난에 호날두의 누나 릴리아나 카티아 아베이루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아버지의 장례식 때 몰려든 군중 탓에 호날두가 겪은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네티즌들을 일침하기도 했다. 한편 호날두는 이날 “처음 조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정말 많이 울었다”며 “여전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때마다 충격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아서 사람들이 나를 많이 비판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라며 “양심이 선하고 자유롭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 ‘영암 시종 고분군’ 기념 우표 발행

    ‘영암 시종 고분군’ 기념 우표 발행

    전남 영암문화관광재단은 시종 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을 기념하는 기념우표를 발행한다고 6일 밝혔다. 1500년 전 고대 마한의 문화적 변화와 역사적 가치를 간직한 시종 고분군은 올해 7월 7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와 내동리에 위치한 시종 고분군은 내동리 쌍무덤과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등 대형 고분 2기로 구성돼 있다. 내동리 쌍무덤에서는 금동관 등 귀중한 유물이 출토돼 당시 활발했던 문명과 외래문화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며,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은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방형 석곽 구조의 대형 고분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분군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된 기념우표는 오는 14일 오후 ‘2025 마한역사문화제’ 개막식과 함께 영암프렌즈샵에서 판매를 시작한다. 군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공정한 구매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1인당 1세트 2종으로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영암군 관계자는 “이번 기념우표 발행은 영암의 문화유산이 지닌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지역 역사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영암 시종 고분군’이 마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문화 유산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 고통 앞의 언어: 첼란, 허수경, 존 오브 인터레스트[폐허에서 무한으로]

    고통 앞의 언어: 첼란, 허수경, 존 오브 인터레스트[폐허에서 무한으로]

    편집자 주 망각忘却은 모든 문장의 운명입니다. 오래된 책은 잊힌 문장으로 가득한 폐허廢墟이지요. 책을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폐허에서 무한無限을 찾는 것 아닐까요. 먼 옛날에 쓰인 문장을 가지고 와 이어 써보려고 합니다. 저의 심폐소생으로 책이 부활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글 역시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이기에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온라인으로 연재하는 이 시리즈는 기사도 소설도 아니고 시는 더더욱 아닙니다. 옛날과 오늘날을, 필자의 짧은 상상력으로 접붙이는 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고 넘어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신 독자에게 문운文運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5. 고통과 언어: 첼란, 허수경, 존 오브 인터레스트시는 타자에게 가려고 합니다. 시에는 이 타자가 필요합니다. 마주 선 자가 필요합니다. 시는 그것을 찾아내어 말을 건넵니다.파울 첼란, ‘자오선’ 절대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어만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저 고통과 맞설 수 있을까요. 그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까요. ‘고통스럽다’는 말 안에 다 담기는 고통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도처에 널린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 ‘고통스럽다’는 말의 외연은 너무나도 작습니다. 고통은 그 안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말 너머에 있는 저 고통을 어찌해야 할까요. 말을 멈추고 모든 이해와 공감을 포기해야 할까요.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으로 독일어로 시를 썼던, 파울 첼란의 말을 가지고 와 봤습니다. 저의 질문에 첼란은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독일 문학 세기의 명연설로 꼽히는 1960년 뷔히너상 수상 연설문 ‘자오선’의 일부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말입니다. 첼란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던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아도르노의 좌절에 공감해 봅니다. ‘홀로코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계몽과 이성을 향한 신뢰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문명의 귀결이 ‘효율적인 학살’이었다니. 여기서 과연 시를 짓고 문학을 창작하고 문화를 이루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헛되고 허무할 뿐입니다. 아도르노의 문장이 던지고 있는 의문을 안은 채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겠습니다. 지난해 6월 개봉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입니다. 이 영화도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영화의 주인공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아돌프 회스입니다. 누구냐고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입니다. ‘너무나도’ 충실하게,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했던 군인이죠. 영화는 수용소와 담장을 맞대고 있는 회스의 집을 무대로 합니다. 실제로 회스는 수용소 바로 옆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앞서 다른 ‘아우슈비츠 영화들’이 수용소 내부의 모습을 그렸던 것과 달리 영화는 수용소 안은 단 한 번도 비추지 않습니다. 단란하고 행복한 회스의 집만 보여줄 뿐입니다. 회스의 아내는 정성 들여 집을 관리합니다. 커다란 개도 키우고 텃밭도 가꾸죠. 국내 개봉 포스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이토록 완벽한 집이 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이 바로 옆에 있으며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오붓하게 식사합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딸들의 침대맡에서 동화를 읽어줍니다. 그 어떤 가족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쩌면 천국이란 지옥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누구를 위한 천국입니까. 담장 넘어 수용소의 상황은 ‘소리’를 통해 전해져 옵니다. 영화 중간중간 알 수 없는 소리가 쏟아져 나옵니다. 여성의 울부짖음 같기도, 아이들의 비명 같기도 합니다. 강압적인 명령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총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기차가 오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소리가 하나로 꽉 뭉쳐져 있죠. 기괴합니다. 이 소리의 ‘덩어리’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앞에 했던 이야기와 연결하자면, 이 덩어리는 언어입니까, 아닙니까. 다시 첼란에게로. 한국에서 첼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허수경 시인입니다. 첼란의 전집이 허수경의 언어로 번역돼 있기 때문입니다. 허수경은 첼란의 삶을 명징한 시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허수경의 대표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실린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를 잠깐 보겠습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나치에게 부모를 잃고/오스트리아를 거쳐 파리로 갔다가/마침내 파리에서 자살한 시인”(‘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부분) 2018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허수경은 어느 날 한국을 훌쩍 떠나 독일에서 살았습니다. 허수경의 이 시는 독일에서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루마니아에서 온 거지에게 동전을 주려다가 멈칫하지요. 그랬더니 그 여자는 루마니아어로 된 욕설을 퍼붓습니다. 루마니아어는 시인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입니다. 독일에서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일까요. 독일에서 루마니아 시인이 독일어로 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독일에서 루마니아어로 욕을 듣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모든 알 수 없는 언어가 뭉치고 뭉쳐서 허수경에게는 무엇으로 다가갔을까요.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낯선 역사적인 존재들” 허수경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모든 ‘낯섦’ 앞에서 우리는 다만 역사를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요즘 문인들을 만나면 아직도 허수경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습니다. 한 시인은 허수경더러 “너무나도 사랑이 많았던 시인, 세상 모든 걸 사랑했던 시인”이라고 슬쩍 말하기도 했습니다. 허수경의 첼란을 잠시 가져오겠습니다. 자기의 부모를 죽인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의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말이지요. 한국에는 첼란의 대표작으로 ‘죽음의 푸가’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허수경 번역 ‘파울 첼란 전집’ 1권에 실려 있습니다. ‘푸가’의 대가였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틀어놔도 좋겠네요. “그는 휘파람으로 자신의 유대인들을 불러내 땅속에 무덤을 파게 하네/그는 우리에게 명령하네 이제 춤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라”(첼란, ‘죽음의 푸가’ 부분, 허수경 역)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갑자기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이 끼어드는 지점입니다. 굉장히 낯설고 어색합니다. 그래서 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열화상 카메라 영상은 어느 소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유대인들이 강제로 노역하고 있는 곳에 몰래 과일 등 먹을 것을 숨겨 놓습니다. 이는 감독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왜 열화상 카메라였을까요. 그 기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녀의 행동은 ‘밤’에 일어납니다. 밤은 ‘빛’이 없는 시간입니다. 지금이야 밤이 휘황찬란하지만, 그때만 해도 밤은 완전한 어둠이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 인간의 눈은 하등 쓸모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소녀의 선행을 포착할 수 없지요. 그러나 꼭 빛이 있어야만 선이 이뤄지는가요. 우리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아름다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지각이 멈춘 곳에서도 ‘인간적인 것’은 나름대로 발휘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열’로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빛은 흔히 ‘계몽’의 상징으로 이해됩니다. 계몽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를 보면 가운데 빛을 의미하는 ‘라이트’(light)가 보일 겁니다. 계몽이나 이성과 같은 단어만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순진한가요. 소녀가 간직한 열, 그 따스함은 계몽의 바깥, 이성의 바깥, 합리의 바깥에 있습니다. ‘자오선’에서 첼란은 시가 ‘침묵’(Verstummen)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하지만 첼란은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합니다. “시는 살아있음을 외치면서, ‘사라진 것’에서 ‘여전한 것’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갑니다.” 이 번역은 첼란의 ‘자오선’을 분석한 정명순 전남대 독문과 교수의 논문을 참조했습니다. ‘독일어문학’(2017)에 실린 해당 논문을 정 교수는 “불의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 … 고독한 영혼들을 이어주는 ‘자오선’ 같은 첼란의 시문학은 이제 만남의 큰 원을 그리며 독자를 향해 다가온다”고 마무리합니다. 다시, 절대적 고통 앞에 선 우리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언어는 여전히 무기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자 ‘마지막’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을 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아프다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간 들릴 겁니다. 영화 속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 저 고통의 소리들이 낱낱이 풀어 헤쳐질 때가 올 겁니다. 시라는 예술은 그 덩어리를 풀어 헤치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시는 타자를 찾아내는 것이니까요. 찾아낼 뿐만 아니라 그에게 다가서서 기어이 말을 거는 것이니까요. 유대인으로서 독일어로 시를 썼던 첼란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절대적인 고통이 꼭 아우슈비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편재(遍在)합니다. 아우슈비츠만을 보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끔찍한 폭력은 역사를 통해 무한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통받는 존재는 언제나 있었고요. 지난 4월 통영국제음악제의 대미를 장식했던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을 들어봅니다. 전능한 신을 찬미하는 가톨릭 전례문과 세계는 어째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 질문하는 윌프레드 오언의 시가 뒤섞이는 이 묵직한 음악.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전쟁과 고통 속에서 언어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훗날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수정합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게 야만적이라고 했던, 그 강력한 선언을요. 자기가 했던 말과 신념을 끝끝내 지켜내고 방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틀렸다는 느낌이 들 때 수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결단이고 용기 아닐까요. 그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문당한 자들이 비명을 지를 권리가 있듯 영원한 고통 역시 표현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 [씨줄날줄] 경주의 국제도시 귀환

    [씨줄날줄] 경주의 국제도시 귀환

    테헤란의 이란국립박물관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봉황 모양 유리병과 닮은 전시품을 보고 반가웠던 적이 있다. 파란색 유리잔도 경주 천마총 것과 같은 장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똑같았다. 로마제국에서 새로운 착색제가 쓰이면서 널리 퍼진 유리 기술이라 로만글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란은 자신들의 왕조 이름을 따 사산글라스라고 칭하고 있었다. 경주의 로만글라스는 20점 남짓에 이른다. 모두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 무덤에서 나왔다. 신라가 이란의 옛 왕조 페르시아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경주다. 신라가 서역(西域)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와 서부아시아를 넘어 유럽 지역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흔적은 이 밖에도 적지 않다. 흔히 괘릉이라 불리는 경주 원성왕릉에는 페르시아인 모습의 석조 무인상 한 쌍이 있다. 불교의 금강역사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동서 교류의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은 다르지 않다. 경주 계림로 보검은 5세기 훈족의 아틸라제국에서 성행한 것과 닮은 모습이다.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이 비슷한 칼을 소장하고 있고,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벽화에도 매우 흡사한 장식 보검이 표현돼 있다. 처용 설화의 주인공도 서역 출신이다. 처용은 경주의 무역항인 울산 개운포를 드나들며 자신의 흔적을 스토리로 남겼다. 최근에는 경주 불국사 출토 돌십자가가 당나라에서 유행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경주가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로 들썩이고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도시로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특별전은 귀빈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다. 다음 국제행사에선 경주가 이미 삼국시대에 국제도시였음을 새길 수 있는 전시도 준비하면 좋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 신라의 정신을 담아… K컬처의 오늘, 경주를 적시다

    신라의 정신을 담아… K컬처의 오늘, 경주를 적시다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권4) 서라벌, 사라, 사로, 신라 등으로 불리며 찬란한 문화를 널리 꽃피웠던 고대 국가. 1000년이란 시간을 존속하며 화려한 황금 문화를 융성한 신라의 고도(옛 도읍) 경주 전역이 온통 미술관, 박물관으로 변모한다. 오는 31일~11월 1일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K컬처’의 뿌리인 문화유산부터 한국 현대미술의 정수까지 우리 문화의 진면목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서다. 솔거미술관석가탑 재해석, 코리아 판타지…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솔거미술관과 우양미술관에서 ‘경주 APEC 한국미술 특별전’을 마련했다. APEC 주제어인 ‘우리가 만들어 가는 지속가능한 내일: 연결, 혁신, 번영’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 국제적 담론과 조응하는 한국 미술의 확장성을 확인하는 자리다. 신라 시대 화가였던 솔거의 이름을 따 2015년 문을 연 공립 솔거미술관에서는 ‘신라한향: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전을 통해 신라의 정신과 불교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내년 4월 26일까지 선보인다. 전시에는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을 비롯해 송천 스님, 김민·박선민 작가 등이 참여했다. 김민 작가는 금박과 은박을 활용해 해와 달이 뜬 하늘 아래 놓인 석가탑, 다보탑의 형상을 표현해 냈다. 우주의 심연과 같은 검은 바탕은 전기석(電氣石)이라 불리는 투어말린을 갈아 넣어 보는 각도에 따라 반짝인다. 작품 앞에 검은 못을 놓아 작품의 형상이 수면에 비칠 수 있도록 했다. 박대성 화백은 너비 15m, 높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수묵화 속에 백두산 천지부터 한라산 백록담까지 금수강산을 그려 넣은 ‘코리아 판타지’를 선보였다. 평소 대작을 많이 선보인 작가지만 이 작품이 그의 작품 중 가장 크다. 박 화백은 “히말라야, 알프스 다 가 봤지만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최고”라며 “우리나라가 세계 모든 질서에서 상당한 위치에 가 있는 것을 돌이켜보면 이런 배경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소개했다. 작품에는 단군왕검부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사신도, 신라 천마도, 금강산과 해금강, 북두칠성 등이 담겼다. 작품의 맞은편에는 화백의 또 다른 작품 ‘반가사유상’(경북대 박물관 소장)이 걸려 있다. 상반신이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만 남은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을 소재로 그렸다. 화백의 상상력이 상반신까지 완벽한 석조반가상을 빚어냈다. 박 화백은 “외과 수술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며 농담을 건넸다. 전통 불화 기법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확장한 작품 활동을 이어 오고 있는 송천 스님의 작품들과 폐유리를 재가공한 설치 작품을 통해 환경과 예술의 순환적 관계를 시각적으로 제시한 박선민 작가의 작품 ‘시간의 연결성’도 만날 수 있다. 박 작가는 신라 시대에 유리를 귀한 재료로 여겨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로 사용한 것에 착안해 모두 250점의 유리병을 만들어 냈다. 우양미술관백남준 ‘파우스트’ 30년 만에 공개 1년여에 걸친 리모델링 뒤 다시 문을 연 우양미술관에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을 소환한다. 다음달 30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백남준 : 휴머니티 인 더 서킷츠’ 전시에서는 소장품 12점을 공개한다. 백남준의 작품은 텔레비전, 로봇, 위성, 퍼포먼스 등 다매체적 장치를 통합하며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런 ‘유기적 회로’로서의 세계관은 APEC이 추구하는 포용 그리고 혁신과 연결된다. 특히 주요작인 ‘나의 파우스트-경제학’과 ‘나의 파우스트-영혼성’은 오랜 수리, 복원 과정을 거쳐 30여년 만에 공개돼 눈길을 끈다. 1989~1991년 사이 제작된 이 연작은 독일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고전을 바탕으로 자본, 윤리, 시간, 존재라는 주제를 동서양의 철학과 기술적 상상력 안에서 교차시킨다. 국립경주박물관신라 금관으로 보는 권력과 위신 백미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오는 28일부터 12월 14일까지 열리는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에서는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던 신라의 금관 6점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한다. 1921년 집터 수리 중 나온 금관총 금관부터 금령총(1924), 서봉총(1926), 교동고분(1972), 천마총(1973), 황남대총 북분(1974)에서 출토된 금관을 선보인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최초의 기회라는 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자리에 모인 금관 6점은 개막 하루 전인 27일 언론에 공개된다. 이 밖에도 ‘왕릉뷰 미술관’으로 유명한 오아르미술관은 내년 3월 16일까지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를 선보인다. 단색화의 거장 이우환·박서보를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아우르며 한국 현대미술의 성취와 국제 미술의 흐름을 함께 조망할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 공예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2025한국공예전 ‘미래유산’이 천군복합문화공간에서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30일까지 열리며, 신라 어린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쪽샘 44호분’에서는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축조 실험 설명회를 연다. 지난해부터 앞선 10년간의 조사·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무덤을 쌓아 보는 축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세계 고고학사적으로도 유일한 실험이기도 하다.
  • 특급호텔 ‘푸르미르’ 내년 9월 호텔식요양원으로 재개장

    특급호텔 ‘푸르미르’ 내년 9월 호텔식요양원으로 재개장

    경기 화성의 특급호텔 ‘푸르미르호텔’이 요양원으로 새롭게 탈바꿈한다. 건설공제조합과 호텔 인수 계약을 체결한 단국대학교기술지주 자회사인 단국상의원은 호텔 리모델링을 거쳐 내년 9월 ‘휴앤락푸르미르호텔&요양원’로 재개장할 예정이다. 푸르미르호텔은 대지 8600평, 건축면적 7200여평 규모의 지상 4층 건물로 300여 개 객실을 갖춘 대형 특급호텔이다. 인수와 리모델링이 마무리되면, 기존 호텔을 기반으로 일정 구역을 요양시설로 전환해 ‘특급호텔이 운영하는 국내 첫 요양원’이 탄생하게 된다. 호텔은 수원대학교와 정조대왕의 능인 융릉·건릉 인근에 자리한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과 정조의 무덤인 건릉, 그리고 용주사 등 인근의 역사문화자원과도 인접해 있다. ‘푸르미르’라는 이름 역시 ‘푸른 용’을 뜻하며, 건물 외관 또한 용의 형상을 본떠 설계됐다. 단국상의원은 자사 요양 브랜드인 ‘휴앤락요양원’을 바탕으로 호텔의 객실 구조를 최대한 살린 1인실 중심의 요양시설을 꾸민다. 디럭스급 객실과 스위트룸은 전문 간호 중심의 너싱홈(Nursing Home)으로, 일반 객실은 독립형 1인실로 운영될 예정이다. 전체 250여 개 객실은 1인실과 특별실로 나뉘며, 특별실에는 24시간 케어 서비스를, 일반실에는 1대1 맞춤 돌봄을 제공한다. 1층 객실과 컨벤션홀, 지하 식음시설은 호텔식으로 유지해 입소 어르신에게 호텔 수준의 식사와 휴식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운영진에는 서울 프라자호텔 대표를 지낸 인사를 영입해 서비스 품질을 높였다. 단국상의원은 대학 내 교수진과 산업 전문가들이 5년간 개발한 치매·재활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으며, 입소자의 건강 상태에 맞춰 전문 프로그램을 적용할 예정이다. 일반 요양시설과 달리 상주 전문의가 직접 상시 진료를 맡아 응급 상황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운영된다. 최규동 단국상의원 대표이사(단국대 행정법무대학원 초빙교수)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지역에서 어르신들의 존엄한 노후를 위한 새로운 요양 모델을 제시하겠다”며 “8600평 규모의 정원을 활용한 산책과 재활 프로그램으로 치매·재활 특화형 호텔식 요양서비스를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 1600년 만에 깨어난 신라 장수… 무덤 밑 또 다른 무덤 있었다

    1600년 만에 깨어난 신라 장수… 무덤 밑 또 다른 무덤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서라벌 금동관 출토 경주 무덤 밑 상당수 발굴 가능성시종으로 추정되는 순장 인골도 신라 장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4세기 후반~5세기 초 무덤에서 역대 신라 왕경(서라벌) 발굴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금동관이 출토됐다. 해당 무덤이 5세기 후반 무덤 바로 밑에서 발견됐다는 점에 비춰 학계는 현재 발굴된 경주 무덤 아래 이런 형태의 무덤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고 주목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경주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중 하나인 황남동 120호분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밑에서 적석목곽분 이전 시기에 먼저 조성됐던 1600년 전 목곽묘(덧널무덤)를 새롭게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적석목곽분은 나무로 짠 곽 주변에 돌을 쌓고 봉분을 조성한 신라 특유의 무덤이며, 덧널무덤은 나무로 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만든 무덤이다. ‘경주 황남동 1호 목곽묘’로 이름 붙은 무덤 안에서 사람과 말의 갑옷과 투구 일체, 금동관 일부, 무덤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성 장수 인골과 순장된 시종 추정 인골 등 165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신라의 무덤 양식이 목곽묘에서 적석목곽분으로 변화하는 전환기적 요소를 보여 주는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장 자문을 맡은 심현철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적석목곽분 밑에 앞선 시기의 목곽묘가 있는 전모를 보여 준 첫 번째 사례”라며 “지금 경주의 묘들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의 적석목곽분인데 그 하부에 또 다른 형태의 무덤이 잔뜩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존 목곽묘 자리에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적석목곽분을 또 만든 이유와 두 무덤의 관계는 앞으로 학계가 확인해야 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목곽묘는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으로 구성돼 있다. 주곽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치아가 확인됐다. 치아 마모 상태를 토대로 국가유산청은 30세 전후로 추정했다. 오른쪽 상체 부근에서는 철제 큰 칼이 발견됐으며 머리 위쪽에서는 금동관 일부가 출토됐다. 무덤 주인공이 신라의 장수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부곽에선 각종 부장품과 함께 시종으로 추정되는 순장 인골 1구가 확인됐다. 순장 인골은 팔을 벌린 상태였으며 다리는 ‘오’(O)자 형태로 벌어진 채 발견됐다. 성별은 알 수 없지만 160~165㎝ 신장으로 추정됐다.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대부분의 순장은 사지를 똑바로 펴서 매장하는 신전장(伸展葬) 형태지만 이번 순장자는 순장 공간에 비해 키가 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무덤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목숨을 끊은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곽에서는 사람과 말의 갑옷과 투구 일체도 출토됐다. 말이 착용하는 갑옷인 마갑(馬甲)은 경주 쪽샘지구 C10호분에 이어 신라 고분에서는 두 번째로 발견됐다. 중장기병의 실체와 함께 5세기 전후 신라의 강력한 군사력과 지배층의 위상을 보여 주는 자료다. 유산청은 이번에 발굴한 유물 전체와 발굴 현장을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을 맞아 일반에 공개한다. 황남동 1호 목곽묘 발굴 조사 현장은 APEC 기간을 포함해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공개되며, 주요 출토 유물은 같은 기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신라월성연구센터(숭문대)에 전시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