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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공사 마친 ‘예수 무덤’ 일반 공개

    복원공사 마친 ‘예수 무덤’ 일반 공개

    이스라엘 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성묘교회에 있는 예수 무덤이 21일(현지시간) 복원 공사를 마치고 22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5년 건립한 성묘교회는 1808년 화재로 손상돼 복원 공사를 시작한 이후 200여년 만에 복원 공사를 마쳤다. 사진은 예수 무덤을 보기 위해 방문객들이 줄 지어 있는 모습. 예루살렘 AFP 연합뉴스
  • 최순실, 박 전 대통령 옆 건물서 재판에도 ‘무덤덤’

    최순실, 박 전 대통령 옆 건물서 재판에도 ‘무덤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조사받는 서울중앙지검 바로 옆 건물에서 같은 시간 재판을 받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평소와 다름 없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21일 오후 2시 10분부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자신과 안종범(58)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속행공판에 출석해 평소와 같이 굳은 표정으로 재판에 임했다. 그는 본격적인 변론 시작 전 변호사와 대화하거나 피고인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증인으로 나온 김인회 KT 부사장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자 물을 들이마시거나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손톱을 뜯었다. 이는 최씨가 그간 종종 보인 일상적 행동으로, 특별한 심리 변화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앞서 최씨는 같은 시간 박 전 대통령이 법원에서 불과 350m, 도보로 5분 거리인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35분쯤부터 오후까지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는 40년 지기인 두 사람이 최근 들어 가장 근거리에 있는 상황이다. 최씨의 변호인 최광휴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뒤 “(최씨가 박 전 대통령 출석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며 “지금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으냐”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 10일 재판 중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휴정 시간에 대성통곡한 사실이 조카 장시호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양의 후예’ 대상 “인류적 가치 아름답게 구현..사전제작 성공사례”

    ‘태양의 후예’ 대상 “인류적 가치 아름답게 구현..사전제작 성공사례”

    ‘태양의 후예’가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2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태양의 후예’가 완성도 높은 대본과 출연자들의 열연을 통해 평화와 헌신이라는 인류적 가치를 아름답게 구현했고, 사전제작 방식의 성공 사례로서 국내외 방송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KBS는 2014년 ‘의궤, 8일간의 축제’로,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시대의 작창-판소리’와 ‘넥스트 휴먼’으로 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2017년에는 ‘태양의 후예가’ 대상을 받음으로써 4년 연속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쥐게 됐다. 총 16부작으로 방송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최고시청률 38.8%를 기록하며 신드롬적 인기를 얻었다. tvN ‘도깨비’는 창의발전 TV부문에서, tvN ‘시그널’은 사회문화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JTBC ‘비정상회담’은 다양성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배철수는 27년간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대중음악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배우 김응수는 ‘임진왜란 1592’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아 전쟁의 원인과 이면을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로 방송출연자상을 수상했다. <이하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수상작(자) 명단> ▲대상=KBS2 ‘태양의 후예’▲최우수상=KNN ‘배리어프리 오페라’▲우수상 창의발전 부문=tvN ‘도깨비’·EBS ‘다큐프라임-녹색동물’·울산MBC ‘소음, 그 달콤한 속삭임’▲우수상 사회문화 부문=tvN ‘시그널’·SBS ‘수저와 사다리’·부산MBC ‘사라진 역사, 귀무덤’▲우수상 지역발전 부문=KBS ‘먼바당 거믄땅’·현대HCN부산방송 ‘시간이 빚어낸 부산의 맛’▲우수상 한류 부문=MBC ‘W’·SBS ‘판타스틱 듀오’▲우수상 다양성 부문=JTBC ‘비정상회담’·에스엠브이 ‘UHD 천하우림기행’▲공로상=배철수▲바른방송언어상=KBS ‘우리말겨루기’▲방송기술상=SBS 뉴미디어개발팀▲방송작가상=강은경▲제작역량우수상=MTN·MBC스포츠플러스▲우수외주제작상=아요디아▲방송출연자상=김응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시한부 7세 소년의 마지막 소원 “엄마 곁에 묻어줘요”

    시한부 7세 소년의 마지막 소원 “엄마 곁에 묻어줘요”

    “내가 죽으면 엄마 무덤 옆에 묻어주세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7살 아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은 한 아버지가 슬픔에 잠겼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자기 힘으로는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 그런데 이들 부자에게 작게나마 기적이 일어났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성의 친구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사연을 공개하고 이후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지면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데 필요한 목표 금액의 6배에 달하는 기부금이 쏟아진 것이다. 런던에 있는 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아동병원에서 지내고 있는 7세 소년 필립 콴시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됐음에 편안함을 갖고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어머니 옆에 묻히면 죽어서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 폴란드에 살았던 필립은 2살밖에 안 됐을 때 어머니 아그니에시카를 여의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결합조직의 세포에 발생한 육종이 온몸으로 전이돼 2011년 11월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혼자 필립을 돌보게 된 아버지 피오트르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얼굴과 몸에 습진이 생겼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특별한 이상은 없다’면서 연고만 처방해줬다”고 회상했다. 이후 피오트르는 돈을 벌기 위해 필립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필립의 습진은 연고를 발라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심해졌다. 이에 아이 아버지는 다시 필립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그 결과 아이에게는 피부와 신경 등 여러 장기에 생기는 ‘신경섬유종증 1형’이라는 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전이 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체내 단백질 기능의 저하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가 2013년 필립이 3살 때였다. 또한 필립은 지난해 9월부터 코피를 흘리는 증상과 함께 다리가 아프다고 하기 시작했다. 이에 피오트르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 그런데 필립에게는 심각한 빈혈과 함께 희소성 소아 혈액암인 ‘연소성 골수 단핵구성 백혈병’(JMML)이 있다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이후 필립은 케임브리지에 있는 병원에서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현재 머물고 있는 아동병원에서도 치료를 받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피오트르는 이달 들어 의료진으로부터 “이제 방법은 통증을 억제하는 정도”라는 말과 함께 아들의 임종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이미 필립의 암은 간과 장에 전이됐고 간 기능마저 멈춘 상태였다. 또한 소화 기관도 망가져 영양 주사로 연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소년은 단지 묵묵히 심한 통증을 견뎌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본 피오트르 자신도 선천적인 척추질환인 ‘척추갈림증’을 앓는 데다가 신장 질환과 당뇨병, 고혈압 등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는 영국으로 이주한 뒤 지난 2015년에 재혼하게 되면서 아내와 그 사이에 태어난 2살 딸, 그리고 두 명의 의붓 자녀를 기르는 것도 힘겨운 상태라고 한다. 필립의 소원은 아이가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폴란드 남부 바도비체까지 가야 하는 것인데 현재 아이의 건강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생전에 폴란드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사망한 뒤에 장례를 위해 이송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랑하는 아들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던 피오트르는 친구 모니카 메마리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놨고 친구는 이런 사연을 공개해 기부금을 받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던 것이다. 지난 14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저스트기빙’에 목표 금액 6500파운드(약 907만원)을 모으기 위해 시작된 캠페인에는 거의 6배에 달하는 3만8004파운드(약 5277만원)이 모였고 지금도 기부금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자영업자 무덤 된 프랜차이즈 식당 年 1만 3000곳 폐업

    자영업자 무덤 된 프랜차이즈 식당 年 1만 3000곳 폐업

    프랜차이즈 식당 폐업률이 역대 최고 수준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공정거래위원회의 가맹사업거래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폐업한 프랜차이즈 식당 수는 전년(1만 1158곳) 대비 18.7% 늘어난 1만 3241곳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36곳이 문을 닫은 셈이다.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8년 이후 가장 가파른 증가세다.●한식 최다… 치킨·주점·분식順 업종별로는 한식이 2805곳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치킨(2793곳)과 주점(1657곳), 분식(1375곳), 커피(1082곳), 패스트푸드(567곳)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2015년 새로 장사를 시작한 프랜차이즈 식당은 전년(2만 4616곳) 대비 8.5% 줄어든 2만 2536곳으로 조사됐다. 업종별 평균 폐점률은 12.0%로 전년(10.9%) 대비 1.1% 상승한 반면 평균 개점률은 20.9%로 전년(25.6%)보다 4.7% 포인트 하락했다.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데다 포화 상태에 이른 프랜차이즈업계의 경쟁 격화 등으로 문을 닫은 식당은 늘어난 반면 새로 문을 연 식당은 줄어든 것으로 풀이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최근 발표한 지난해 4분기 외식산업 경기전망지수의 현재경기지수도 65.04로 전분기보다 2.47 포인트 떨어졌다. ●불황에 경쟁 격화… 역대 최고 현재경기지수는 1년 전 상황을 100으로 놓고 최근 3개월 동안의 외식업계 성장과 위축 정도를 나타낸 지수다. 올 1분기의 외식산업 경기전망도 63.59로 반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출장음식서비스업과 치킨전문점의 경우 향후 3~6개월간 성장 및 위축 정도를 나타내는 미래경기지수가 각각 59.51, 58.54로 가장 낮았다. 세종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아내 무덤가를 11년간 복숭아꽃으로 가꾼 할아버지

    아내 무덤가를 11년간 복숭아꽃으로 가꾼 할아버지

    복숭아 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아내를 묻은 산자락에서 11년간 홀로 복숭아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온 할아버지의 순수한 사랑이 중국 대륙을 잔잔한 감동으로 적시고 있다.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阳)시에 사는 송(71) 할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어 행복했다. 복숭아 꽃이 필 때면 아내의 얼굴에는 언제나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복숭아가 익으면 아이들은 복숭아로 주린 배를 채웠고, 이웃과 친척들에게도 두둑한 ‘복숭아 인심’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35살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집 근처 산에 묻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집 안의 복숭아 나무도 이유 없이 죽어 버렸다. 송 할아버지의 마음에도 짙은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남겨진 1남 2녀를 홀로 키웠다. 주변에서는 재혼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아내를 도저히 떠나 보낼 수가 없었다. 11년 전 마을에서는 황폐한 산을 책임지고 맡을 사람을 모집했고, 송 할아버지는 제일 먼저 신청했다. 아내가 묻힌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송 할아버지는 산 위 무덤 근처에 소박한 움집을 짓고, 개 두 마리를 데려와 살았다. 그리고 황폐한 산에 아내가 좋아했던 복숭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면 아내의 무덤 옆에 앉아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마치 아내가 옆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산 위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산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왔다. 빗물 저장 탱크를 만들어 나무에 물을 주기도 했다. 간혹 마을 사람들과 아들딸이 도와주러 오면, 그들에게 복숭아를 선물로 주었다. 가난하고 수고스러운 생활이었지만, 부족함 없고 외롭지 않은 삶이었다. 이렇게 지난 11년간 황폐했던 산 위에는 백 그루가 넘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졌다. 송 할아버지는 “복숭아 꽃이 피면 아내가 분명히 이것을 보고, 웃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매년 복숭아 꽃이 만개할 때면 더욱 아내가 그리워진다고 전했다. 그는 “사랑이 뭔지는 모르지만, 산 위에서 나무를 심을 때면 외롭지 않다”면서 “아내가 언제나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다”고 수줍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에 흐르는 ‘인간 다산’의 향기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에 흐르는 ‘인간 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그림·1762~1836)은 강진 유배 10년째를 맞은 1810년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당부하는 말을 적어 보낸다.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자른 천에 가르침을 적은 ‘하피첩’(霞?帖)이다. 자식들을 곁에서 이끌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두 아들은 그동안 28세, 25세로 장성했고 장손 대림도 태어났다.‘하피첩’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서첩에 쓰인 비단에는 바느질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3첩 가운데 한 첩은 모두 비단을 썼지만, 나머지는 비단과 종이를 섞어 썼다.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으니 애초 4첩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태종 17년(1417) 전라도의 도강(道康)현과 탐진(耽津)현을 통합했다. 강진(康津)이라는 땅이름은 짐작처럼 두 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럼에도 치소(治所)가 자리잡고 있던 고을은 여전히 탐진으로 불렀다. 다산이 강진이 아니라 탐진이라고 하는 이유다.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 시집 올 때 입었던 결혼 예복이다. 홍색은 바래고 황색도 옅어져서, 서첩으로 만들기에 꼭 맞다. 재단하여 작은 첩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붓 가는 대로 써서 두 아들에게 물려준다.…‘하피첩’이라고 한 것은 ‘붉은 치마’(紅裙)라는 말을 숨기고 바꾼 것이다’ ‘하피첩’의 머리글이다. 하피란 어깨에 두르는 일종의 겉옷이라고 한다. 부인 홍씨가 혼인 때 입었던 치마를 보낸 것을 두고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남편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다짐이라는 해석이 많지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객지에서 한눈팔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는 것이다. 정작 다산은 그렇게 ‘깊은 뜻’을 부여하지는 않은 듯하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시골 아전 황상에게 건넨 서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1814년 28조각의 천에 가르침을 적어 애제자에서 보냈는데 크기도, 빛이 바랜 정도도 모두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을 유배지의 다산은 부인의 치마,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잘라 종이 대신 썼던 것 같다. 빛바랜 천에 쓴 글은 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가족이나 제자에게만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피첩’을 넘기면서 ‘서울을 떠나지 말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중국은 문명이 훌륭한 풍속을 이루어 궁벽한 시골에서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데 장애가 없지만, 우리는 도성에서 수십리만 떨어져도 인간의 법도에 눈뜨지 못한 동네”라고 했다. 그러니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하여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다산은 자식들에게 “지금은 너희를 물러나 살게 하고 있지만, 훗날 계획은 도성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서울 동대문 밖 땅이름도 혹시 옛사람의 이런 인식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다산은 그러면서도 “고가(古家)와 세족(世族)은 저마다 상류의 명승을 점거하고 있다”며 옛 터전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했다. 마현(馬峴), 곧 마재는 다산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류한 한강이 마재에 이르면 다시 용인과 광주에서 흘러드는 소내와 만난다. 소내 혹은 우천(牛川)은 이제 경안천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마재에서 육로로는 도성까지 하루가 넘지만, 뱃길로는 순식간이다. 다산의 인식처럼 ‘한다 하는 집안’들이 한강 상류에 터를 잡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마현의 지명 유래는 정약용이 ‘다산시문집‘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마을 어르신 사이에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산천의 정기를 누르고자 쇠말(鐵馬)을 만들어 묻어 놓았고, 이후 주민들이 콩과 보리를 삶아 제사를 지내 마현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런 구전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왜구가 산천의 정기를 누른 것을 알았으면 뽑아내 폐기하거나 식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정상인데 하물며 제사를 지내느냐는 것이다. 지금 철마산(鐵馬山)은 마재 북쪽으로 20㎞도 넘게 떨어져 있다. 다산이 언급한 철마산은 멀지 않은 예빈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팔당댐은 북쪽의 예빈산과 강 건너 남쪽의 검단산 자락을 가로질러 막은 것이다. 이웃마을에 역참(驛站)이 있어 말이 넘어다니던 고개여서 마재라 이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다산설(說)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다산의 집안 시조는 고려 유민으로 조선 개국 이래 황해도 배천에 은거한 정윤종이다. 나주 정씨 집안에서 벼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다산의 12대조인 정자급부터인데, 이후 9대가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대과(大科)라는 별칭처럼 고급관리를 뽑는 시험이다. 그런데 서울을 중심으로 기반을 쌓아가던 나주 정씨는 정쟁이 치열해지면서 숙종 무렵 뿔뿔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섰다. 정시윤이 마재에 정착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다산은 5대조인 정시윤의 마재 정착 과정을 역시 ‘시문집’에 남겼다. ‘공은 만년에 소내 북쪽에 오래 머물러 살 곳을 찾아 초가 몇 칸을 짓고 임청정(臨淸亭)이라 이름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소요하고 한가히 지내며, 깨끗한 마음을 지켜 당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임청정기’(臨淸亭記)에는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큰아들이, 서쪽에는 둘째 아들이 살고, 막내에게는 이 정자를 주었다. 유산(酉山) 아래 조그마한 집을 지어 측실에서 낳은 자제를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산 아래 집은 훗날 여유당(與猶堂)으로 불리는 다산의 집이 됐고, 유산은 그의 무덤이 됐다.마재에 가 보면 다산의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산 유적지는 오늘날 그의 위상만큼이나 매우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넓게 둘러친 담장 안에 무덤과 살던 집, 사당인 문도사(文度祠)와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이 규모 있게 배치된 모습이다. 문도는 다산의 시호(諡號)다. 다산 유적 앞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실학박물관이 보인다. 물론 한 사람을 위한 박물관은 아니지만 다산이라는 인물의 상징성 때문에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산유적 기행은 마을 서쪽의 마재성지(聖地)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마재 정씨 집안의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 가운데 약현을 제외한 3형제는 천주학에 깊이 공감했다.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유박해 당시 정약종과 부인 유조이, 큰아들 철상, 작은아들 하상, 딸 정혜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이 흑산도,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천주교는 정씨 형제의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정씨 형제는 또 한국 천주교 역사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집트와 흡사한 ‘중국판 피라미드’ 고대 무덤 발견

    이집트와 흡사한 ‘중국판 피라미드’ 고대 무덤 발견

    중국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고대 건축물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민망 등 현지 언론의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일, 허난성 정저우시의 한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이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고대 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무덤은 본래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터를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발견됐으며, 같은 터에서 원통 형태의 또 다른 건축물도 함께 발견됐다. 원통 형태와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이 발견된 터는 길이 30m정도이며, 원통 형태의 건축물의 경우 입구가 동쪽을 향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진짜 무덤’인 피라미드형 건축물로 이어지는 일종의 다리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원통 형태의 건축물 위쪽에서는 지름 80㎝정도의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이 도굴꾼의 흔적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 매체와 현지 주민은 이번에 발견된 유적지를 두고 ‘중국 피라미드’라 부르며 관심을 표하고 있다. 실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훨씬 규모가 작아서 ‘미니 피라미드’라 부르기도 한다. 전문가들이 피라미드형 무덤의 정확한 건축시기와 무덤의 주인 등을 조사할 예정인데, 일각에서는 건축 양식이나 주변에서 발굴된 또 다른 무덤 등을 미뤄봤을 때 이것이 한나라 시대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이것은 약 2000년 이상 된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무덤 터 전체를 발굴하는데에 1개월가량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2300년 전 동기·동검 출토

    2300년 전 동기·동검 출토

    13일 전북 군산 옥구읍 선제리에서 나온 검파형 동기와 세형동검. 이들 유물은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 조성된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됐다. 검파형 동기는 1960∼70년대 대전 괴정동, 충남 아산 신창면 남성리, 예산 대흥면 동서리에서 다른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적은 있지만 정식 발굴 작업을 통해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군산 연합뉴스
  • [백승종의 역사 산책] 성호 이익의 소박한 밥상

    [백승종의 역사 산책] 성호 이익의 소박한 밥상

    “올해 여름(1756년 영조 32)은 집집이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해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들 합니다. 이웃까지 구제할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경전 말씀에 윗사람이 고아를 돌봐주면 백성들도 서로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지금의 형편을 감안하면 윗사람이 남의 어린아이를 잘 보살펴 주면 백성들도 자애로운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나 할지요.”(‘성호전집’ 제26권)실학자 성호 이익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수신자는 안정복, 그는 ‘동사강목’으로 후세에 유명해진 선비였다. 그런데 아마도 스승은 유교 경전의 틈새로 파고들 뜻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자애로운 마음이 격려를 통해 일어나기란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구제하기란 성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실천에 옮길 수 있겠는지요. 성인의 말씀은 뜻이 깊어 무궁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가 거듭 생각해 봅니다.” 이익은 경전에 실린 주장이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늘 주저했다. 18세기 조선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에 시달리는 선비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조차 ‘봉제사’(奉祭祀·제사모심)와 ‘접빈객’(接賓客·손님대접)을 소홀히 하지 못했다. 특히 주자가 주를 단 ‘가례’의 내용이라면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실학자 이익은 철저한 고증 작업을 통해 ‘가례’의 신화에 맞섰다. 그는 다름 아닌 주자의 저서를 샅샅이 뒤져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구절을 찾아냈다. 주자 역시 ‘가례’에 나열된 15가지의 제수를 낭비로 여겼다. 주자의 말은 이랬다. “(제수는)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야 한다. 한 그릇의 국과 한 그릇의 밥이라도 정성을 다할 수 있다.”(‘주자어류’) 주자의 본의까지 확인한 마당이라 이익의 생각에 날개가 달린 셈이었다. “상례나 제례같이 큰일(大事)이라도 반드시 규모를 줄이고 절약에 힘써야 합니다.” 이익은 사랑하는 제자 안정복에게 속생각을 자세히 말했다. “‘가례’에 명시된 예법은 벼슬이 없는 사람(庶人)이 반드시 지켜야 할 예법이 아닙니다.” 사실 이익은 사당에다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일도 공자에게는 낯선 풍습임을 확인한 바였다. 또 한식과 추석 등 4명절의 제사며 무덤제사(墓祭)도 훗날에 만들어진 전통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확신을 제자에게 알렸다. “군자는 인의(仁義)를 소중히 여기고 재화를 천시합니다. 하나 재화가 없어서 망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가례’를 보완할 때는 이런 뜻을 기억해야겠지요.”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사대부의 제례는 간소했다. 국가가 사대부 집안을 위해 토지를 지급한 적도 없었다. 또 벼슬 높은 사대부 가문이라도 재산 규모는 차이가 심했다. 그런 점에서 국가가 제례의 규모를 성대하게 정하지 않은 것은 옳은 일이었다. 이러한 법의 취지를 이익은 십분 이해했다. 제사 지낼 물건도 아끼는 마당에 자신의 밥상을 풍성하게 차릴까. 이익은 절약을 고집했다. “나의 식사는 밥과 국, 고기 한 접시, 채소 한 접시로 국한한다. 형편이 나쁘면 더 줄여야 맞다. 만일 잘살게 된다 해도 더 늘릴 수는 없다. 내 자손들은 대대로 이 법을 따르기 바란다.”(‘성호사설’ 제11권) 오늘따라 마침 풍성하게 차려진 저녁 밥상을 받아 놓고 이익의 뜻을 잠시 헤아려 본다.
  •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뺏지 않고 지킨 일본인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뺏지 않고 지킨 일본인

    소설 다쿠미-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박봉 지음/솔과학/283쪽/1만 4000원‘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망우리 공동묘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가 걷어내지는 과정에서 그의 묘가 소중히 가꿔진 이유는 뭘까. 그는 ‘조선소반’, ‘조선도자명고’라는 두 편의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가 사라지고 잊혀지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 남긴 작품이다. 같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예술품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갈 때 그는 자신이 모은 이 땅의 민예품을 모아 우리에게 전해줬다. 얄궂은 운명으로 맺어진 두 나라 사이에서 묘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인물의 삶에 이 소설은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관군이 외면한 서인의 ‘행동대장’… 칠백의총에 서린 기개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관군이 외면한 서인의 ‘행동대장’… 칠백의총에 서린 기개

    우리가 아는 중봉 조헌(1544~1592)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이다. 금산 칠백의총에 남은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에 새겨진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는 사실상의 유언처럼 그의 죽음은 극적이다. 그럴수록 붕당정치가 본격화하던 시절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서분당 이후 서인의 ‘사상적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조선왕조실록에는 조헌이 수없는 상소로 조정을 당혹하게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상소문에는 격렬한 표현의 강경한 비판이 담기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헌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계승한다’는 후율(後栗)이다. 이런 스승조차 제자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 마땅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오자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疏)를 올렸다. 상소는 삼소(三疏)로 이어졌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더해졌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여기에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같은 해 5월 조헌을 함경도 길주로 유배를 보낸다. 그런데 조헌은 유배가 7개월 만에 풀려 돌아오는 길에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린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며 노했다. 그러면서 “조헌은 간귀(奸鬼)”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다시 귀양을 갈 것이라는 뜻이다.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던 동인에게도 귀찮기만 한 존재였을 것이다. 임란 이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칠백의총에서 마주친 부자(父子) 때문이다. 마흔 안팎의 아버지와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이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봉분 앞에 세워진 ‘조헌 선생 일군 순의비’의 복제비 내용을 읽으면서 분개했다. 조헌 의병이 관군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방해에 시달렸다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것 봐,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정부가 문제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헌의 생애를 돌아보면 ‘조선생 일군’과 관군은 어차피 협력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헌을 인정하지 않았던 조정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관군 지휘관이 중봉 휘하에서 싸울 마음은 애초부터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옳다고 믿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지르고, 집착에 가까울 만큼 매달리는 조헌의 품성은 정치적 반대파의 부정적 평가와 순탄치 못한 벼슬길을 자초했다. 그러나 이런 저돌적인 성격이 또한 ‘금산의 감동’을 만들어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한 가닥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조헌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은 아무래도 충남 금산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칠백의총은 조헌과 영규가 의병과 의승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불교계에서는 800명 의승이 더 가세해 모두 1500명이었는데, 유림이 주도한 척불(斥佛)의 역사가 의승군의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조헌의 제자들은 금산 싸움이 있은 나흘 뒤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셨다. 선조 36년(1603)과 인조 25년(1647)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이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의총을 파헤치고 순의비는 폭파했으며, 종용사는 허물어 버렸으니 치욕이 되풀이된 꼴이었다. 칠백의총의 정문에 해당하는 의총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비각이 나타난다. 1940년 금산경찰서장 이시카와 미치오가 산산조각 냈던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다. 당시 주민들은 몰래 비석 조각들을 땅에 파묻어 보관했고, 1971년 조각을 파내어 비석을 다시 세웠다. 2009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다시 해체해 정밀하게 복원하고 몸돌에서 분리된 상태였던 머릿돌도 이어 붙였다. 일제의 비석 파괴는 조직적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1943년 경무국장에게 보낸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은 전북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비를 철거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황산대첩비가 왜구의 한반도 침입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이성계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앞서 ‘조선생 일군 순의비’가 폭파된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조헌이 칠백의총이 아닌 충북 옥천에 묻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 않겠다. 조헌의 동생 조범은 금산에서 조헌의 시신을 거두어 형이 낙향해 살던 옥천 안읍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멀지 않은 지금의 안남면으로 옮겼다. 금강을 막은 대청호가 지척으로 가슴으로 파고드는 공기에서 티끌 하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청정하다. 무덤 아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무덤으로 올라가려면 신도비를 모신 비각이 먼저 나타난다. 효종 7년(1656) 세워진 것으로 김상헌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 김상용이 비문 머리글을 전서로 썼다. 청음 김상헌이라면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표 인물로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선원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스스로 순절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원은 1637년 세상을 떠났으니 신도비 건립이 호란으로 늦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춘당 송준길 역시 두 사람과 같은 서인의 영수급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조헌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의 옛집 터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가 세워졌고 그를 기리는 우저서원(牛渚書院)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한양이나 고향 김포로 가지 않고 이웃한 옥천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먼저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었으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부방이다. 그 흔적은 후율당(後栗堂)으로 남았다. 대전과 옥천을 잇는 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지당(二止堂) 역시 조헌이 주도해 인재를 배출한 뜻깊은 장소다. 금강의 지류인 소옥천이 휘감아 도는 이지당 주변은 그야말로 선경을 방불케 한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따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했으나 송시열이 ‘시전’(詩傳)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이지당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큰 산을 우러르며 그 뜻을 따르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직후 옥천에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의승장 영규와 만나 뜻을 모은 곳도 옥천 가산사(佳山寺)다. 조헌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옥천 안내면 채운산 기슭에 있는 가산사의 영당에는 지금도 조헌과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헌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장소가 충북 청주다.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記蹟碑)는 시내 한복판의 중앙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숙종 36년(1710) 청주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옮겼다고 한다. 금산전투에 앞서 조헌 의병과 영규 의승군, 화천당 박춘무의 향토 의병이 합세해 왜군에 빼앗겼던 청주성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이 싸움을 이제는 ‘청주대첩’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금산전투도 패배한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왕조실록에는 금산전투 직후 ‘금산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비록 조헌 등의 군사가 순절하기는 했지만, 죽거나 다친 왜군이 매우 많았고 관군이 이를 틈타 공격할까 두려워해 도망가니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니 금산 싸움 역시 결과적으로는 ‘이긴 싸움’으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김지우 “박근혜 대통령 파면..살만한 대한민국 보여달라” [전문]

    김지우 “박근혜 대통령 파면..살만한 대한민국 보여달라” [전문]

    헌법재판소가 10일 재판관 전원 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가운데 배우 김지우가 한 아이의 엄마로서 견해를 밝혔다. 김지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무직이 된 그녀(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월 1200만 원의 연금이 아닌 그녀와 그녀의 빌어먹을 추종자들(최순실과 그 일가는 아무것도 안 남길 바라고)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생활지원금만이 남기를 바라고, 10년의 경호 말고 줄어들게 될 5년의 경호도 교도소에서 지내게 될 것이기에 그냥 교도관들이 해주게 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김지우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말고 그냥 쓸쓸한 어디 시골 산 중턱에서 잊히는 무덤 하나로 남길 바라고 바란다. 대한민국은 아직 살만하고 희망이 있고 정의가 있고 걸어 볼 만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달라”며 “우리 아이들과 미래가 밝게 자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고 희망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지 91일, 약 13주 만인 이날 헌법재판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고가 진행된다. <다음은 김지우 SNS 전문> 한시간후에는 우리에게는 #좋은소식 , #정의로운 소식이 들려오고 마침내 #봄 이오고, 무직이 된 그녀에게는 월 1,200만원의 #연금 이 아닌 그녀와 그녀의 #비루먹을추종자들 (시리와 그 일가는 아무것도 안남길 바라고)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생활지원금만이 남기를 바라고, 10년의 경호 말고 줄어들게될 5년의 경호도 #교도소 에서 지내게될 것 이기에 그냥 교도관들이 해주게 되길 바라고, #국립묘지 에 안장되지 말고 그냥 쓸쓸한 어디 시골 산중턱에서 잊혀지는 무덤하나로 남길 바라고 바라고 바랍니다 #대한민국 은 아직 살만하고 #희망 이 있고 #정의 가 있고 걸어볼만한 #미래 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우리 아이들과 미래가 밝게 자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바라고 바랍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길섶에서] ‘논문 청첩장’/박건승 논설위원

    30년 지기 교수가 대학원 캠퍼스 커플 제자의 청첩장을 보고선 한참을 웃었단다. 형식과 내용이 학위 논문과 무척 흡사했다. ‘논문 제목: 늦은 결혼이 우리 두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지속 가능한 행복 요인을 중심으로’ 그는 혼자 보기 아까워 SNS에 올렸다. 자신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5년이 넘은 제자라니 혼기를 놓친 게 분명하다. 속지의 ‘국문 초록’ 왈.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정의한다. 어차피 놓친 혼기, 차라리 혼자 사는 게 편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통념에 상반되는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즉 혼기를 훌쩍 넘긴 사람에게 누군가 같이 있다는 것,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 문제는 새 가설이 검증되지 않아 많은 남녀가 쓸쓸히 늙고 있으며 … 이에 늦은 결혼과 개인 인생 구제의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연구하고자….’ 그 기발함이 유쾌하다. 논문 결론이 부디 ‘지속 가능한 행복’으로 도출됐으면 한다. 내년엔 신혼의 질적 연구 결과(2세)도 내놓으시길.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성인잡지 6톤의 무덤…일본 50대의 ‘슬픈 고독死’

    주변 사람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고독한 죽음에 이르는 고독사. 우리나라보다 먼저 고독사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된 일본에서는 10년간 그 수가 3배가 늘어 한해 사망자가 3만2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는 한 50대 남성이 자신이 모아놓은 야한 성인 잡지 더미 사이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고 일간 스파 등 외신이 최근 보도했다. 한때 일본 자동차 대기업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진 이 남성은 사망한 지 1개월 만에 발견됐다. 그가 살던 작은 집에는 방과 거실에 성인 잡지가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벽면에는 성인 비디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 남성의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알려졌다. 특수 청소 및 유품 정리 업체의 한 관계자는 “고독사라고 한마디로 말해도 사망한 사람의 방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혼자 사는 남성은 이렇게 자기 세계관에 빠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면서 “방 2개에 부엌 1개인 아파트였지만, 성인 잡지만 6t 분량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인의 치부가 되지 않도록 방에 있던 성인장난감 등은 유족에게도 존재를 알리지 않고 처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방에 있던 성인 잡지 더미가 시신에서 나온 체액을 흡수하는 역할을 해 아래층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망한 지 1개월 뒤면 아래층까지 체액이 스며들어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그중에는 아래층에서 잠을 자던 주민의 얼굴에 체액이 떨어져 고독사가 드러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의 고독사 사례 중에는 어떤 취미나 성적인 것에 집착하던 이들이 꽤 있으며 아이돌 상품으로 넘쳐나는 집도 가끔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강원도 삼척의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편안하지 않다. 두 무덤이 있는 미로면은 태백산맥 동쪽 경사면에 해당한다. 삼척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타고 오르다 보면 도계읍 못미처에 두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조금만 들어가도 화전민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산길을 다시 10분쯤 달려야 한다. 3월 초라고는 해도 태백산록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그런데 활기리에 접어들면 갑자기 훈훈한 기운이 느껴진다. 산골에 이런 데가 다 있을까 싶게 햇살이 거침없이 내리쬐는 개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남도에서나 있을 법한 대밭이 태백산맥 중턱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마을 뒤편의 해발 1353m 두타산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조상이 한때 자리잡았던 까닭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태조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의 무덤이다. 활기리의 준경묘와 하사전리의 영경묘는 4㎞ 남짓 떨어져 있다. 중간쯤에 두 무덤의 공동 재실(齋室)이 있다. 제사 용구를 보관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집이다. 제구는 2015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관동팔경 특별전-삼척 죽서루’에 출품되기도 했다. 자동차 길이 나기 전에는 어느 무덤으로든 가는 게 힘겨웠을 성싶다. 규모 있게 의례를 치르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준경묘는 활기리 주차장에서 두타산 등산로를 따라 다시 1.8㎞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고갯마루까지 800m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겨울에도 땀깨나 흘릴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가파르다. 하지만 나머지 1㎞는 기분 좋은 산길이다. 준경묘 일대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밀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적송(赤松)은 경복궁 복원에도 쓰였다고 한다. 줄곧 왕실의 성지(聖地)로 입에 오르내렸던 만큼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송금령(松禁令)이 철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준경묘 들머리에 접어들면 다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심심산골에 이렇듯 넓고 평탄한 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풍수지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죽은 사람의 안식처인 음택(陰宅)으로도 명당(明堂)이요, 산 사람의 보금자리인 양택(陽宅)으로도 길지(吉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왕릉보다는 조촐하게 꾸며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 호칭인 묘(墓) 자체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는 릉(陵), 그 아래 왕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무덤인 원(園)보다 위계가 낮다.●태조 4~1대조 무덤은 릉으로 격상 반면 태조의 4~1대조는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추존됐고 그 무덤도 릉으로 격상됐다.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덕릉·지릉·의릉·정릉이 그것이다. 그들의 부인인 효공왕후 이씨·정숙왕후 최씨·경순왕후 박씨·의혜왕후 최씨의 무덤 역시 안릉·숙릉·순릉·화릉으로 높여졌다. 5대조 무덤이 릉이 되지 못한 것은 성리학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이었던 만큼 왕이라도 4대 봉사를 규정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성계 집안은 본관인 전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런데 훗날 목조로 추존된 이안사가 20세 무렵 관기(官妓)와 얽힌 문제로 지방관과 다투면서 170가구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주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던 관리가 공교롭게 강원도 안찰사로 부임하자 일행은 다시 함길도 덕원으로 옮겨간다. 이성계가 함경도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다. 삼척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것은 이양무와 이안사의 부인이 모두 삼척 이씨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일대는 삼척 이씨의 세거지(世居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준경묘와 영경묘가 이양무와 삼척 이씨의 무덤으로 공인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일가가 삼척을 오래전에 떠난 만큼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전설일 뿐이었다. 태조는 한때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무덤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두 무덤은 이후 성종 12년(1481)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고 선조 13년(1580) 강원도 감사 정철이 지형도를 그려 정비를 청하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정철은 풍수적으로 이양무의 무덤은 ‘만대(萬代) 군왕의 땅’, 삼척 이씨의 묘는 ‘천자(天子)를 낳을 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조 18년(1640) 목조 부모의 무덤으로 삼척 대신 황지가 새로 떠오른다. 풍기에 사는 박지영이라는 사람이 꿈에서 무덤을 찾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지영은 ‘백두산 정맥이 태백산에 결집한 길지로, 그 기운으로 조선의 왕업이 시작되었는데 간악한 백성이 그곳을 다시 묏자리로 써서 선조의 신령이 안식을 잃었다’고 했다. 양란(兩亂)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일시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다시 삼척설(說)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대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미수 허목(1592~1682)은 삼척부사 시절 지역 문물을 엮은 ‘척주지’(陟州志)를 펴내면서 ‘미로리’(眉老里) 대목에서 두 무덤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정리해 싣고 목조 부모의 묘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미로면(未老面)이 당시는 미로리였음을 알 수 있다. 눈썹 미(眉)자가 아닐 미(未)자로 바뀐 것은 높여야 할 사람과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전주 이씨들은 삼척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폈다. 집안의 시조 이한을 모신 조경묘(肇慶墓)를 영조 47년(1771) 전주에 건립하는 데 성공한 이들의 다음 목표는 목조 부모의 무덤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당을 세우자는 주장은 물론 활기촌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우자는 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황제에 오른 고종이 대대적 정비 삼척의 무덤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자 위상이 달라졌다. 이듬해 “삼척 무덤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상소에 고종은 “먼 조상을 추모하고 장구하게 잘 모시려는 정성은 필부에게도 있는데 황제의 가(家)이겠는가” 하고는 대책을 명한다. 이때 준경과 영경이라는 묘호가 주어졌고, 제향을 위한 건물과 사적비가 세워졌다. 활기동에는 재실과 함께 고종의 친필로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地)라 새긴 비석도 세웠다. 5대조의 무덤으로 공인한 데는 정철과 허목의 명망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결국 준경묘와 영경묘의 정비는 대한제국 선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의 5대 봉사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천자는 6대조까지, 제후는 4대조까지 제사 지낼 수 있다는 ‘예기’(禮記)의 왕제(王制)를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고종 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 지낸 것도 천자국(天子國)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고종이 황제로 스스로를 격상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준경묘와 영경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삼척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글·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울시의회 이순자의원, 의약품 안전사용-환경오염 방지 길 텄다

    서울시의회 이순자의원, 의약품 안전사용-환경오염 방지 길 텄다

    서울시의회 이순자 의원(더불어민주당, 은평구 제1선거구)이 대표발의한 「서울시 의약품 안전사용 환경조성 조례안」이 3일 서울시의회 제272회 정례회를 통과했다. 이순자 의원은 조례안 제정 목적과 관련하여 “의약품을 의사와 약사의 안내에 따라 안전하게 복용하지 않고 시민이 임의로 비전문가의 권유나 광고를 믿고 의약품을 부적절하게 복용하거나, 유통기한이 지날 정도로 방치되거나 폐기될 의약품을 사용할 경우에는 복용자의 건강에 해로울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사용하지 않은 의약품을 적정하게 소각하지 않고 일반쓰레기와 함께 폐기한다면 추가적인 환경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울시가 의약품 안전사용 환경을 조성하고 시민의 건강과 환경까지 생각할 수 있는 통합적 행정 구현을 위한 제정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본 조례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조례안이 규정한 ‘안전사용 환경’은 의약품의 구입과 복용부터 불용과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의 통합적 대시민 서비스를 의미한다. 즉, 의약품의 임의복용을 방지하고, 폐·불용의약품의 관리 사업 및 유통의약품의 수거 및 검사 사업 등을 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서울시가 이를 시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시민건강차원에서 평가한다면, 전문의약품은 의약품안심서비스(DUR)를 통해 안전한 처방과 복용이 가능하나, 일반약국 등에서 자신의 복약이력을 밝히지 않고 일반의약품을 구입하게 되는 경우에는 부적절한 복용으로 인하여 개인의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 의약품의 경우 생활폐기물로 처리되어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겨 버려지는 데 이를 딸에 묻거나 소각할 때 환경오염문제도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일부 하천수에서 일명 슈퍼박테리아로 불리는 다제내성균이 발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는 지적이다. 이순자 의원은 ”복지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강조하며, ”서울시의 모든 서비스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약품의 복용이라는 요람부터 불용과 폐의약품의 폐기라는 무덤까지 모든 서비스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자 의원은 본 조례를 통해 서울시가 시민의 건강과 안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당부하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만진의 도시탐구] 돈을 세지 않은 LH 행복주택

    [최만진의 도시탐구] 돈을 세지 않은 LH 행복주택

    우리나라 공동주택의 효시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1960년대에 건설한 마포아파트다. 이는 당시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주거난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행된 사업이었다. 이 때문에 마포아파트는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상징이었고, 준공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분위기를 띄웠다고 한다. 아파트의 인기가 그야말로 고공행진을 하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불패 신화를 이룩한 강남아파트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아파트는 투자의 대상으로 변했고, 온 나라가 부동산 투기로 몸살을 앓게 됐다. ‘강남 복부인’은 이때 생긴 유명한 신조어였고, 아파트의 크기와 위치는 곧 부와 사회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에 시행된 신도시 사업으로 정점을 찍었고, 외환위기로 잠시 잦아들었다가 경기가 회복된 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원래 마포아파트는 근대 건축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안’을 본떠 만든 것인데, 그 핵심은 저층의 조밀한 건축물 대신 초고층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고, 남은 공간은 외부 공지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시 내의 인구밀도를 늘리면서도 자연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목표를 가졌다. 또한 정돈된 기하학적인 질서, 유리로 된 고층 건물, 서정적 자연 공간 등이 어우러진 눈부신 풍광을 연출한다는 의미에서 ‘빛나는 도시’라 명명했다. 하지만 우리의 아파트는 대량 생산화와 고층화 아이디어는 차용하면서 워낙 빼곡하게 지어 공지 정원과 서정적 경관을 조성하는 것은 도외시했다. 이러한 변형된 형태의 아파트는 무미건조한 회색 콘크리트 도시 경관을 만들어 냈고, 도시 정주 환경을 피폐시켰다. 또한 지나친 경제 논리에 따른 주택 건설로 빈부격차의 심화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고 경제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나온 정책이 ‘행복주택’이다. 이는 도심의 철도 부지 또는 빈 땅에 지어지는 이른바 도심형 공공 임대아파트로 주로 대학생, 신혼부부, 사회 초년생, 근로자, 노인과 취약 계층에게 저렴하게 제공된다 하여 반값 임대주택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아파트를 지금까지의 투기 및 재산 형성 개념이 아닌 순수한 주거 건축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주택의 최우선 과제는 양질의 주거 환경을 만드는 데에 있고, 이를 위해서는 코르뷔지에의 원래 개념을 충실하게 따라갈 필요가 있다. 즉 건물은 고밀도의 고층 형태를 취하되 외부 공간의 질과 양을 매우 높이고, 주민 공동 및 커뮤니티 시설의 확충을 통해 주민의 자긍심과 사용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은 가난하고 힘없는 시절 잠시 살다 떠나거나, 경제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도시의 슬럼가로 전락할 것이 강 건너 불 보듯이 빤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특히 LH와 같은 주택 전문 공사가 주도해 주민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지역 여건과 입주자 특성에 따른 특화형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성과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외부 정원, 다양한 복지시설, 서정적 경관을 창출해 내지 못한 행복주택은 그 지속 가능성을 잃어버려 머지않아 슬그머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의 아파트가 돈을 세고 있는 곳이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터전이 돼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 ‘매파’ 옐런 내성 생겼나… 금리인상 속도론에도 시장 무덤덤

    ‘매파’ 옐런 내성 생겼나… 금리인상 속도론에도 시장 무덤덤

    “새달 인상 가능성 배제 못해” 지난달 미국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조기 금리 인상론이 강하게 대두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증시는 거의 변동하지 않는 등 시장 반응은 무덤덤했다.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의 ‘매파’(조기 금리 인상) 발언에 시장의 내성이 생겼다는 분석도 나온다.22일(현지시간) 연준이 공개한 1월 FOMC 정례회의록을 보면 다수 위원이 “고용과 물가 지표가 전망과 일치하거나 양호할 경우 ‘아주 가까운’ 시기에 금리를 올리는 게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몇몇 위원은 “다음달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경제상황 변화에 유연한 정책적 대응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시장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101.23으로 오히려 0.2% 하락했다. 뉴욕 증시는 다우존스30(0.16%)은 소폭 오른 반면 S&P500(-0.11%)과 나스닥(-0.09%)은 약간 떨어지는 등 혼조세를 보였다. 코스피는 전날보다 1.02포인트(0.05%) 오른 2107.63에 장을 마쳤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5.3원 내린 1137.3원에 마감됐다. 김진평 삼성선물 연구원은 “FOMC 위원(17명) 중 통화정책 결정 투표권을 갖고 있는 위원(10명)은 상대적으로 금리 결정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며 “지난달 옐런 의장이 미국 상원에서 한 연설 이상의 매파적인 내용을 찾기 어려워 시장이 ‘비둘기’(점진적 금리 인상)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다음달 인상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시각도 많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가 집계한 다음달 금리 인상 확률은 회의록 발표 전 17.7%에서 발표 후 22.1%로 4.4% 포인트 상승했다. 5월 금리 인상 확률도 45.9%에서 52.1%로 6.2% 포인트 높아졌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자문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최근 미국 경제지표를 보면 시장이 예측하는 다음달 금리 인상 확률이 너무 낮다”며 “50~60%로 잡는 것이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다음번 FOMC는 새달 14~15일 열린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무덤 속 들어가 명상하는 여성들

    단체로 작은 무덤을 파고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 눕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공개됐다. 정체가 무엇일까. 중국 남서부 충칭시 외곽에 모인 몇 명의 여성들 앞에는 마치 무덤을 연상케 하는 길고 네모난 구덩이가 파여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여성들은 모두 구덩이에 들어가 누운 뒤 눈을 지긋하게 감고 합장하듯 가슴 앞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이들이 하는 행동은 일종의 명상이다. 다만 이곳에 여성들만 있는 이유는 이 ‘무덤 명상’이 이혼한 여성들의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은 올해 서른 살의 리우타이제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사람이 절망을 느끼게 되면 성별과 관계없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서 “무덤에 누움으로써 내 학생들은 죽음을 경험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덤 명상’은 그들이 삶에서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하고, 동시에 지나간 것들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행위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한 한 여성은 무덤 명상을 하던 중 가슴에 담아 둔 울분이 터진 듯 고함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리우씨는 2015년 이혼의 상처를 겪었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 21살 때에는 자녀도 출산했다. 2014년에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실패한 뒤 결국 이혼까지 이르게 됐다. 그녀는 “여자가 버려질 때 어떤 느낌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이혼으로 마음고생 할 당시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1년 동안 방황하다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무덤 명상’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리우씨는 2~3개월에 한 번씩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무덤 명상을 주최하고 있다. 그녀는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혼한 모든 여성들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또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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