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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끔찍한 대형 화재 현장에서 돈 훔친 사람…누구?

    끔찍한 대형 화재 현장에서 돈 훔친 사람…누구?

    모든 것이 불타고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난무했던 화재 현장에서 절도 범죄가 발생한 사실이 알려졌다. 가디언 등 영국 현지 언론의 11일자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6월 14일 웨스트런던에서 발생한 그렌펠타워 화재의 진압작업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도둑이 잠입해 불타지 않은 채 남아있던 현금을 가지고 사라진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불씨가 모두 진압된 뒤 몇몇 피해자들이 집 안에 남아있는 물건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다가 현금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화재 진압 시기 및 화재와 관련한 전반적인 조사가 시작된 시점 등을 미뤄 이번 절도 사건이 화재가 난 지 6일 뒤인 6월 20일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절도 수법이나 경로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일부 현금이 그렌펠타워 화재현장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매우 심각한 범죄이며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으나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조사는 화재 현장에 접근이 가능했던 모든 인원을 대상으로 펼쳐진다. 일반인이나 전과자뿐만 아니라 화재 진압을 위해 투입됐던 소방대원과 건축전문가, 경찰 등을 모두 포함한다. 화재 당시 피해자들을 도왔던 한 자원봉사자는 “화재현장에서 도둑질을 하는 것은 무덤에서 무언가를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끔찍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화재 후 경찰의 감시가 소홀했다는 비난도 쏟아지는 가운데, 경찰 측은 “그렌펠타워의 경비를 더욱 강화했으며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모든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그렌펠타워 화재의 원인은 불량 냉장고의 전기 합선이며, 건물 외벽의 플라스틱 외장재가 불을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 바 있다. 79명의 사망자와 7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진=AP·연합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블랙’ 송승헌 VS 고아라, 죽음 앞에서 팽팽 대립 “운명 받아들여”

    ‘블랙’ 송승헌 VS 고아라, 죽음 앞에서 팽팽 대립 “운명 받아들여”

    OCN 오리지널 ‘블랙’ 송승헌, 고아라의 생사예측 미스터리가 베일을 벗었다.오는 10월 14일 첫 방송되는 OCN 오리지널 ‘블랙’(극본 최란, 연출 김홍선, 제작 아이윌미디어)이 죽음을 지키려는 死(사)자 블랙과 죽음을 예측하는 女(여)자 하람으로 변신한 송승헌, 고아라의 캐릭터 예고를 공개, 생사예측 미스터리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냉정한 송승헌과 죽음이 두렵지만 물러서지 않는 고아라는 상반된 두 캐릭터의 활약에 기대를 더한다. 공개된 티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간에게 “운명을 받아들여”라고 말하며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블랙 송승헌. 어떻게든 지시받은 영혼을 수거해 죽음을 지키는 게 그의 일이다. 인간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한 모태 死자이며, 훌륭한 업무 수행 능력 덕분에 死자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엘리트다. 과연 블랙의 무결점 커리어는 계속될 수 있을까. 고아라가 연기할 강하람은 “내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여요”라는 티저 속 대사처럼 눈을 통해 죽음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앞으로 죽을 사람에게서 검은 그림자를 보는 것. 그녀에게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그래서 그림자를 보지 않기 위해 언제나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하지만 분신과도 같은 선글라스를 내려놓고 죽음의 그림자에 손을 갖다 대는 하람은 죽음에 맞서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증을 더한다. 이처럼 블랙과 하람에게 생과 사는 온도 차가 극명하다. 그러나 천계의 룰을 어기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할 송승헌과 고아라. 죽음을 지키려는 사자 블랙은 어째서 죽음을 예측하는 여자 하람과 손을 잡게 된 것일까. 비범한 두 캐릭터가 콜라보하게 될 생사예측 미스터리에 의문과 기대가 더해지고 있다. 한편 ‘블랙’은 ‘신의 선물-14일’로 촘촘한 전개를 선사했던 최란 작가와 ‘보이스’로 장르물의 역사를 새롭게 쓴 김홍선 감독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구해줘’ 후속으로 오는 10월 14일 밤 10시20분, OCN에서 첫 방송된다. 사진제공 = ‘블랙’ 캐릭터 티저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칠레, 사상 최대 규모 원주민묘 발견…최대 1800년 전

    칠레, 사상 최대 규모 원주민묘 발견…최대 1800년 전

    칠레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주민 묘지가 발견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중남미 언론은 6일(현지시간) “칠레의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최대 18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원주민 묘지가 발굴됐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공사현장에서 무덤이 발견된 건 5년 전인 2012년.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한 건 같은 해 12월이다. 2014년 9월까지 진행된 발굴작업에선 무덤 60기가 발견됐다. 유골과 함께 묻혀 있던 그릇 96점과 목걸이 등도 함께 출토됐다. 대규모로 무덤이 발견된 점으로 볼 때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는 게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의 설명이다.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유물에서 나왔다. 발굴팀장 베로니카 레예스는 “시신과 함께 나온 유물을 보면 발견된 부덤은 200~1200년 지금의 칠레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요예로 문명의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공식 발표가 늦어진 건 발굴과 분석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린 때문이다. 유골은 지면으로부터 얕게는 30㎝에서 2m 깊이까지 묻혀 있었다. 그다지 깊게 묻히지 않은 데다 주변에 있는 마포초 강이 자주 범람해 발견된 유골과 유물의 상태도 양호하지 않았다. 상태를 관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유골과 유물을 발굴하고 분석하다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분석과 연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발굴팀은 “무덤이 조성된 시기를 보다 정확히 추정하려면 추가로 확인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발굴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분석도 늦어지다 보니 유물은 올해 7월에야 칠레 자연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자연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요예로 문명의 유물은 100여 점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유물이 배로 늘어나면서 박물관은 연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칠레 중부지방에 살던 원주민 문명에 대해선 자료가 많지 않다”면서 “발굴된 유골과 유물이 당시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그녀의 삶… 진실인 듯 진심인 듯

    그녀의 삶… 진실인 듯 진심인 듯

    처음엔 극장 개봉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영화가 아니기에 결심하게 됐다. “감독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살고 있고, 너랑 똑같은 딸 낳아 고생해 보라던 엄마는 이제 저보다 더한 딸을 낳았다며 놀리세요. 예기치 못한 일들이 계속 펼쳐지지만 재미있네요. 이 작품의 배급, 홍보, 프로듀서 등을 맡은 분들이 모두 영화 일을 하다 만난 친구들이에요. 10년, 20년 동지죠. 맨날 술잔을 나누며 영화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다가 생겨난 갈증을 푼 셈이에요. 함께 뜨개질하거나 마사지 받고 쇼핑도 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하다 끝내 만들고 개봉까지 하게 됐네요.”배우 문소리(43)가 ‘입봉’한다. 각본, 연출에 주연까지 도맡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가 오는 14일 개봉한다. 한창 영화에 목말랐을 무렵, 중앙대 대학원에서 연출 제작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만든 단편 세 개를 묶었다.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관객들을 헷갈리게 하고 또 큰 웃음을 준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실제인데 펼쳐내는 이야기는 가상이다. 문소리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 또는 진심”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잘나갔던, 지금은 일감이 끊긴 데뷔 18년차 배우 문소리의 삶이 그려진다. 화려한 여배우가 아니라 엄마, 아내, 며느리 등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그려진다. 스트레스는 술로 풀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요양원에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는가 하면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딸도 건사한다. 때로는 지질하지만 때로는 유쾌하다. 문소리와 함께 작업했던 기라성 같은 감독들은 그의 입봉작에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박하사탕’(1999)을 통해 배우로 데뷔시키고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영화제 신인 여우주연상을 안긴 ‘문소리 아빠’ 이창동 감독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떻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냐며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해주겠다고 손사래 쳤다는 후문. ‘지구를 지켜라’,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유명하고, 요즘 ‘1987’ 촬영에 한창인 남편 장준환 감독은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했단다. “다른 것보다 여배우 이야기로 알았는데 자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관객 분들을 만날 때 정말 좋았어요. 변영주 감독님이 ‘이 영화 진짜 웃겨, (임)순례 언니 긴장해야 해’라고 했다는데, 진짜 재미있는 변 감독님을 웃겼다는 게 뿌듯하네요.” 여배우를 넘어 여성의 삶을 다룬 탓에 젠더 영화가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지만 문소리는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를 왜 하는지, 영화가 우리 인생에 무엇인지,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그런 질문들을 저 자신과 영화계 동료들, 또 관객들에게까지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요즘 여성 영화가 부족해 직접 메가폰을 든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그건 뭐 할리우드 언니들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런데 영화사를 보면 한때는 여배우 영화만 나오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쩌면 저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배우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냥 아쉬워한다고 시대가 바뀌고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영화가 싫으면 관두면 되는데 너무 좋아하니 도대체 영화랑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앞으로도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는 생각이지요.” 어떤 배우로 남고 싶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문소리는 잊혀져도 상관없다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한다. “문소리는 잊혀지더라도 제가 고민하고 만들었던 작품, 훌륭한 감독님들과 작업했던 영화들이 오래오래 시간을 견디며 힘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베니스에서 신인 배우에게 주는 마스트로이안니 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마스토로이안니가 누구시래, 하면서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8과 2분의1’ 등 그분이 출연한 작품을 봤더라고요. 부끄럽게도 배우를 몰랐는 데 그 작품은 이미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죠. 언제가 찾아간 오즈 야스지로 무덤 묘비명에 ‘없을 무’자가 쓰인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문소리라는 브랜드보다는 그저 작품으로 남고 싶습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한국 vs 우즈벡 마지막까지 ‘경우의 ’수…시리아가 이란 잡으면 ‘최대 변수’

    한국 vs 우즈벡 마지막까지 ‘경우의 ’수…시리아가 이란 잡으면 ‘최대 변수’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가 5일 밤 12시에 열린다.특히 이날 우리 대표팀의 경기 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란의 맞대결에도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표팀이 우즈베키스탄을 꺾으면 자력으로 본선 진출이 확정되지만, 만약 비기거나 진다면 시리아와 이란의 경기 결과에 따라 본선 진출의 향방이 갈리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기까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다. 시리아는 지난 31일 한국을 3-2로 물리쳤던 카타르를 3-1로 꺾고 이란(승점 21)과 한국(승점 14)에 이어 A조 3위(승점 12)로 뛰어올랐다. 이란을 잡으면 월드컵 본선 직행이나 플레이오프 진출도 기대할 수 있다. 한국이 우즈베키스탄과 비기고 시리아가 이란을 잡으면 시리아는 골 득실에서 앞서 2위로 올라가고, 한국은 조 3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한다. 한국이 지고, 시리아가 이기면 한국은 4위가 돼 러시아행이 좌절된다. 시리아도 월드컵 본선의 희망이 살아 있는 만큼 이란과 마지막 경기에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시리아와 이란전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전과 같은 시간인 이날 자정 열린다. 장소는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이다. 한국으로서 시리아의 마지막 경기가 이란인 점은 다행스럽다. 이란이 지금까지 그랬듯이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9차전에서도 이란은 원정이었지만, 한국에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치며 승점 1을 챙겼다. 이란은 지난 9차례 최종예선을 치르면서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란이 시리아에 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경기가 열리는 아자디 스타디움은 원정팀들의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이란이 그동안 우세한 경기를 펼쳐왔다. 그러나 시리아 역시 만만치 않다. 지난 11월 홈에서 치른 이란과 5차전에서는 0-0으로 비겼다. 최근 두 경기에서는 5골을 뽑아내며 공격력도 크게 살아나고 있다. 카타르전에서는 3골(3-1 승), 중국과 경기에서는 2골(2-2 무)을 터뜨렸다. 내전으로 시국이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월드컵 본선에 반드시 오르겠다는 ‘헝그리 정신’은 어느 팀보다 강하다는 평가다. 이에 이란이 자칫 방심했다가는 최종예선 첫 패를 당할 수도 있다.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은 한국과 경기 후 시리아가 카타르에 이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하한다”면서도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시리아가 작년 9월 한국과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그동안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승리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란을 응원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케이로스 감독은 “시리아전은 다른 경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며 “똑같은 목표를 갖고 정신력을 무장해 임하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죽음은 나의 벗’…꼼꼼히 20년 준비한 99세 할머니, 영면

    ‘죽음은 나의 벗’…꼼꼼히 20년 준비한 99세 할머니, 영면

    20년 전부터 꼼꼼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할머니가 생전에 꿈꾸던대로 편안하게 영면에 들어갔다. 스페인 루고에 살던 할머니 호세파 레고. 할머니는 만 99세로 최근 생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숨을 거둔 할머니를 고인의 생전 소원대로 자택 거실에 소중하게 보관돼 있던 관에 눕혔다. 사연인즉 이렇다. 할머니는 20년 전 남편을 잃었다. 평생을 함께한 남편을 보내면서 할머니는 미리미리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할머니가 작정하고 준비한 건 바로 관.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관을 사겠다고 하자 선뜻 팔겠다는 곳이 없었다. 결국 할머니는 한 목수를 찾아가 관을 짜달라고 부탁했다. 목수도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의 끈질긴 설득에 관을 짜주겠다고 했다. 관의 내부는 한 장례회사가 꾸며줬다. 관계자는 “당시 할머니가 틀만 제작한 관이 있다며 내부 마감을 부탁해 사연을 듣고난 뒤 작업을 해드렸다”고 말했다. 이렇게 완성된 관을 할머니는 거실에 보관했다. 할머니의 죽음 준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는 사망 후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며 사진사를 불러 관에 들어가 누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사진으로 간직하기도 했다. 이렇게 20년이 흘렀다. 할머니가 숨을 거두자 유족들은 관의 내부마감 작업을 한 장례회사에 연락해 장례식을 치르도록 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장례회사는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자택을 찾아갔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거실에 있는 할머니의 관 위에는 열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모 공동묘지에 있는 주택형 가족무덤의 열쇠였다. 관계자는 “할머니가 진짜 꼼꼼하게 마지막 길을 준비하셨다”며 “이 분야에 오래 몸담고 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죽음을 준비한 노인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3만척 규모 용장성·몽골 막은 명량 물길…삼별초 오롯이 간직한 진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3만척 규모 용장성·몽골 막은 명량 물길…삼별초 오롯이 간직한 진도

    전남 진도에 가려면 울돌목에 1984년 놓인 진도대교를 건너야 한다. 우리말 울돌목을 한자로 옮긴 것이 명량(鳴粱)이다. 그런데 외적(外敵)을 격퇴하고자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선조는 왜군(倭軍)에 대대적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에 그치지 않는다.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략에 맞섰던 삼별초(三別抄) 역시 이곳을 방어수단으로 삼았다.배중손 장군이 지휘한 삼별초는 1270년(원종 11) 6월 1일 고려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의 출범을 선포한다. 6월 3일에는 1000척 남짓한 선박에 나누어 타고 강화도를 출발한다. 삼별초는 역시 명량대첩의 역사가 서려 있는 벽파진으로 진도에 상륙한 다음 용장산성에서 이듬해 5월까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오늘은 진도에 남은 삼별초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별초의 항전(抗戰)은 고려에 침입한 몽골과 그런 몽골에 복속을 선택한 고려 왕조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삼별초에는 다양한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가를 좌지우지한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私兵)이었다는 점에서 항전이 아닌 난(亂)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몽골 침략기 임시수도 강화에서 정규군과 삼별초의 역할을 구분 짓는 것은 쉽지 않다는 연구도 잇따르고 있다.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진도를 돌아보면 섬답지 않게 상당한 규모의 농토가 곳곳에 흩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품만 들이면 언제나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바다가 있으니 어느 시대나 크게 풍요로울 것은 없어도 크게 아쉬울 것도 없는 고장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내륙국가 군대는 수전(水戰)에 약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려왕조는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자 고을을 버리고 산성(山城)과 도서(島嶼)에 들어가 싸우는 이른바 입보(入保) 전략을 폈고, 산으로 갔던 사람들도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지면 다시 섬으로 옮겨 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점에서 진도는 장기 항전에 최적의 여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좋겠다. 진도는 최씨 정권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최씨 정권은 경상도의 사천, 진주, 하동, 남해와 전라도의 군산, 화순, 보성, 강진, 순천, 진도 일대를 영지(領地)로 삼고 있었다. 한반도의 곡창지대를 망라한 꼴이다. 그런데 진도와 울돌목이란 개경이나 강화로 가는 경상도 세곡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다. 그러니 고려 조정의 시각에서 ‘진도의 반란군’이란 그 자체로 국가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삼별초에게 울돌목이란 몽골군의 침입을 막는 물길이자 세곡선을 단속하는 길목이었다. 흔히 최씨 무신 정권이라고 하면 최충헌과 최이, 최항, 최의 4대가 이어서 집권한 1196년(명종 26)부터 1258년(고종 45)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이 왕위를 잇기는 한다. 하지만 명종과 희종은 최충헌이 제 손으로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세웠으니 모든 권력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최씨 무신정권의 3대 실력자 최항(?~1257)과 진도의 인연은 흥미롭다. 어린 시절 이름이 만전(萬全)이었던 최항은 순천 송광사에서 출가해 화순 쌍봉사 주지를 지내다 아버지 최우의 명으로 환속한 인물이다. ‘고려사’에는 ‘그때 최이의 아들인 승려 만전이 진도의 한 절에 머물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승려란 곧바로 정치인이나 행정가와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순천이나 화순, 진도는 모두 최씨 정권의 땅이었다. 어머니가 창기 출신이었다는 비아냥이 따라다니는 최항이지만, 전라도 지역의 재산은 물론 경상도 지역에서 나오는 이익까지 철저하게 챙긴 결과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로 등용된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무신정권은 일찍부터 진도를 ‘강화도 이후’의 항전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도 곳곳에 삼별초 유적이 있지만 용장성을 먼저 둘러보는 게 순리다. 둘레가 12.85㎞에 이르는 용장성은 해상 보급 통로 역할을 했을 벽파진에서부터 삼별초 본진이 머물렀을 궁궐터 및 용장사를 아우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용장성이 3만 8741척(尺)이라고 했으니, 강화 고려외성의 3만 7076척보다도 큰 규모다. 울돌목 쪽으로 솟은 해발 229.2의 선황산은 망루 역할을 톡톡히 해냈을 것이다. 궁궐터는 목포대박물관이 2009~2010년 발굴조사를 벌여 전모가 드러났다. 경사지를 이용해 계단식으로 조성한 궁궐터는 고려·몽골 연합군에 쫓기던 삼별초가 허겁지겁 지은 건물터로 보기는 어렵다. 전각의 규모가 크다고 할 수는 없어도 계획적으로 조성된 왕궁터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천도 계획’에 따라 일찍부터 조성된 것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궁궐터 왼쪽에는 용장사가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고려시대 창건됐다고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절은 최근 지어진 것이다. 고려는 관사를 새로 지을 때는 주변에 절을 함께 짓곤 했다. 용장사도 용장성을 쌓고 궁궐을 지으며 함께 조성한 것은 아닐까. 극락전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석불좌상이 있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만큼 약사여래로 추정된다. 진도군이 용장사 아래 지은 용장산성홍보관은 삼별초의 역사를 성의 있게 보여 주고 있다. 패널을 꼼꼼히 읽고, 많지는 않지만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유물을 살펴보면 삼별초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왕궁터 주변을 돌아보다가 상당히 질이 좋은 청자 각항아리의 큼지막한 파편을 하나 주웠다. 삼별초 고위 지도자가 쓰던 그릇이 아니었을까.여기서 벽파진은 차로 10분쯤 달려야 한다. 벽파진 바위 언덕에는 1956년 세워진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우뚝하다. 그 아래 1207년(고려 희종 3) 처음 지은 것을 지난해 복원한 벽파정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벽파진에서 삼별초의 역사는 마음으로만 새겨야 한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온의 것으로 전하는 무덤은 진도읍내를 지나 운림산방으로 가는 왕무덤재 너머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금갑포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하는데 용장산성에서부터 뒤쫓은 몽골장수 홍다구(洪茶丘)가 이곳에서 온을 참살했다고 한다. 금갑포 쪽으로 더 가면 삼별초궁녀둠벙이 있다. 여몽연합군에 쫓기던 삼별초 궁녀들이 집단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있다. ‘삼별초의 낙화암’이라고 할 수 있다.배중손 장군의 사당인 정충사(精忠祠)는 금갑포에서 국립남도국악원을 지나 남도석성 쪽으로 가는 길 중간 굴포리에 있다. 역시 여몽연합군에 쫓긴 배중손 일행은 이곳 뻘밭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1년이 채 못 되는 삼별초의 진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통정 장군이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간 삼별초는 항파두성에서 항전을 이어 갔지만 결국 1273년 4월 28일 패망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여기는 남미] 조폭영화 같은 현실…무서운 브라질

    [여기는 남미] 조폭영화 같은 현실…무서운 브라질

    조폭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브라질에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브라질의 범죄조직 PCC가 또 다른 범죄조직의 조직원 2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에 태우는 동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살해된 두 사람은 각각 22살과 17살 된 사촌형제로 사망 전 자신들이 묻힌 구덩이를 직접 팠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문제의 사건은 지난달 25일(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남부 포르토 알레그레 인근의 숲에서 벌어졌다. 동영상을 보면 살해된 두 사람이 잔뜩 겁에 질린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을 정체불명의 세 남자가 총을 겨누며 지켜보고 있다. 세 남자는 땅을 파는 사촌형제를 향해 “긴 고통은 없을 테니 겁내지 마라”며 섬뜩한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순간 화면이 바뀌면서 사촌형제는 이미 구덩이 안에 누워 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세 남자는 총구를 겨누고 마구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최소한 10회 이상 총성이 울린 뒤 세 남자는 살해한 사촌형제의 소지품을 구덩이에 던졌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구덩이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장면으로 동영상은 끝난다. 두 사람의 유해는 지난달 28일 발견됐다. 동영상을 찍은 건 총을 겨누고 있던 세 남자 중 한 명이다. 촬영자는 “장난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동영상을 찍는다”면서 “이들을 봐라, 제 무덤을 파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세 남자는 “우리는 PCC의 (하부조직인) 안티발라다”라는 말도 한다. PCC는 브라질에서 가장 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악명 높은 범죄조직이다. 살해된 사촌형제는 PCC와 경쟁하는 또 다른 범죄조직 ‘발라엔라카라’의 조직원이었다. 범죄조직 사이에 벌어진 보복범죄라는 추측이 힘을 얻는 이유다. 마약이라는 막대한 이해관계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두 조직이 포르토 알레그레의 마약공급권을 놓고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엘살바도르서 2500년 전 유골 2기 발견

    엘살바도르서 2500년 전 유골 2기 발견

    최소한 2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남미 엘살바도르에서 발견됐다. 엘살바도르 문화청은 지난 29일(현지시간) 켈레파 지역에서 고전기이전시대 중기(BC 1200~BC 400년)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 2구가 발굴됐다고 밝혔다. 2구의 유골은 1㎡가 채 안되는 공간에 포개져 누워 있었다. 1구는 등을 바닥에 댄 상태로, 또 다른 1구는 오른쪽을 보는 자세로 등을 굽힌 채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이 묻힌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건 함께 발견된 토기들이다. 2구 유골 주변에선 사발 4개, 접시 2개, 곡물을 빻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도구 1개 등이 나왔다. 문화청의 고고학자 미셀 톨레도는 “발굴된 유물을 보면 무덤은 최소한 2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무덤에서 유물이 발견된 건 당시의 문화와 죽음에 대한 의식 등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전기 이전시대 중기 죽음은 고통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으로 여겨졌다. 고통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로 무덤에 음식을 넣어주는 게 관례였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유골은 도시개발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켈레파는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지만 이번에 무덤이 발견된 곳은 유적지와는 다소 떨어진 장소다. 대규모로 무덤이 조성된 흔적은 없어 개발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될 예정이다. 문화청은 발견된 유골과 유물을 산살바도르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유물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돼 곧 일반에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현지 언론은 “유물이 메소아메리카 문명과 당시 남미에서 북상한 문명의 만남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반공법 1호 필화 ‘분지’의 남정현선생 가옥…함석헌 기념관·김수영 문학관엔 친필 원고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반공법 1호 필화 ‘분지’의 남정현선생 가옥…함석헌 기념관·김수영 문학관엔 친필 원고

    서울 도봉구 일대에는 남정현 가옥, 함석헌 기념관, 김수영 시비 등 걸출한 문화예술인의 족적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남정현 가옥에는 84세의 원로 소설가가 실제 거주하고 있다. ‘한국의 간디’ 함석헌 선생(1901~1989)이 살던 집은 함석헌 기념관으로 단장했다. 또 북한산 국립공원 안에 외롭게 서 있는 김수영 시인의 시비를 대신해 근사한 5층짜리 문학관이 손님을 맞는다.쌍문동의 2층짜리 주택에 살고 있는 남정현 선생은 반공법 제1호 필화사건 ‘분지’의 작가이다. 1965년 3월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한 뒤 같은 해 7월 기소됐다. 작가가 표현한 분지란 구릉지가 아니라 미국에 지배당하는 한국을 ‘똥덩어리 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삼각산이 한눈에 보이는 풍광이 좋아서 돈암동에서 이사를 왔고, 서울미래유산 동판이 붙은 집 대문을 아들과 함께 자랑스럽게 드나들고 있다고 말했다.함석헌 가옥은 선생이 1982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6년간 말년을 보낸 곳이자 선생의 둘째 아들 함우용씨 부부가 1978년부터 살던 집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전태일 열사의 집이 있었으나 열사의 집터는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시인, 교육자, 사상가, 언론인, 역사가로 항일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선생은 한국인 최초로 1979년과 1984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었다. ‘씨알 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이념을 주창했다. 2015년 문을 연 기념관에는 보리수가 있는 앞마당과 선생이 즐겨 가꾸던 식물 온실도 꾸몄다. 1층 전시실에는 육필 원고와 편지는 물론 옷과 가구가 남아 있다.김수영 시비는 1969년 도봉동 산 107의 2 시인의 무덤 앞에 세워졌지만 당시 시신을 화장해 유골함을 묻었으니 문학관이 묘소라고 할 수 있다. 방학 3동 문화센터를 리모델링해서 문학관으로 개장했다. 1층엔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고, 벽면엔 시인이 시와 산문에 자주 쓰던 단어를 자석카드로 만들어 모아 놓았다. 2층은 일상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은 작은 도서관과 열람실, 4층은 세미나와 시낭송회가 열리는 대강당이 있다. 꼭대기 5층은 옥외 쉼터와 휴게공간 용도로 쓰인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큰 바위에 새겨진 ‘공동묘지’… 왕실 여인들의 마지막 흔적일까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큰 바위에 새겨진 ‘공동묘지’… 왕실 여인들의 마지막 흔적일까

    오늘은 서울 근교의 불암산(佛巖山)으로 간다. 서울 동부의 노원구와 경기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불암산은 바위 봉우리가 송낙을 쓴 부처의 모습이어서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송낙이란 완만한 삼각 모양의 승려들이 쓰는 모자다. 불암산은 천보산(天寶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산의 동쪽 기슭인 남양주 별내면에는 불암사(佛巖寺), 서쪽 기슭인 노원구 중계동에는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두 곳에서는 흔치 않은 마애부도 혹은 마애사리탑을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다.부도(浮屠)란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이다.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를 음역한 것이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의 스투파(stupa)나 팔리어의 투파(tupa)가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부처를 가리키거나 부처의 유골을 모신 탑(塔) 혹은 탑파(塔婆)를 의미한다.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국가지정문화재는 이제 ‘부도’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승탑’(僧塔)으로 표기한다. 국보 제53호 ‘구례 연곡사 동(東) 승탑’도 과거에는 ‘구례 연곡사 동 부도’로 불렀다. 흔히 탑이라 부르는 불탑(佛塔)과 승려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묘탑을 구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만 시·도 지정 문화재는 지금도 부도라는 이름을 쓴다.하지만 부처의 무덤이 아닌 불교식 묘탑은 꼭 승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함안 안국사에는 15세기 전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행호조사 모탑’(行乎祖師 母塔)이 있다. 세종시대 이 절을 중창한 행호조사가 출가하지 않은 어머니의 무덤을 이런 모습으로 조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른바 재가신자(在家信者)의 묘탑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은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에 ‘청평산에 절이 있고 절 옆에는 고려시대 처사 이자현이 살던 곡란암 옛터가 있는데, 그가 죽자 절의 승려가 세운 부도가 지금도 산 남쪽 10리 남짓한 곳에 남아 있다’고 적었다. 이자현(1061~1125)이라면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선학(禪學)을 닦았다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승탑의 조성은 선종(禪宗) 불교의 도래와 궤를 같이한다.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은 때마침 발호하던 호족에게도 ‘세력을 키우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리잡았고 결국 송도 호족 왕건이 신라를 무너뜨리고 고려 왕조를 세우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통일신라 시대에는 선문(禪門)을 이끌 정도의 고승(高僧) 반열에 올라야 승탑 건립 대상이 됐다. 고려 시대에도 국사(國師)나 왕사(王師)급 지위에 올라야 승탑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러니 크고 화려한 승탑과 탑비(塔碑)의 건립은 국가적 역량을 한데 모아야 하는 작업이었다. 조선시대 상황은 다르다. 억불(抑佛)의 강도가 높아 불사(佛事) 자체가 위축됐던 초기에는 승탑 건립 역시 부진했다. 하지만 불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위상도 다시 높아졌다. 18세기가 되면 지위가 높지 않은 승려라도 입적하면 묘탑을 다투어 세우게 된다. 불교국가에서 승탑의 건립은 정치적 의미가 큰 의례였지만 역설적으로 유교국가에서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신자들의 묘탑이 늘어나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었다. 18세기 중반부터 본격 조성된 재가신자들의 묘탑은 19세기가 되면 더욱 늘어난다. 이자현 부도나 행호조사 모탑만 해도 고정관념에 매몰되지 않은 신선한 파격이었지만, 이제 신자들의 묘탑을 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19세기 서울 주변 지역에서는 마애부도가 다투어 출현한다. 곧 바위에 조각한 부도다. 승려보다 재가신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징을 지녔다.불암사는 산 아래 별내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찾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곧 절이다. 그런데 마애부도를 찾기는 쉽지가 않다. 절의 일을 돕는 보살님에게 그 존재를 물었지만 처음 듣는 얘기란다. 마애부도는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등산로를 따라가야 만날 수 있다. 작은 시내를 건너 올라가다 보면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포장도로를 내기 전에는 굽이돌아가는 이 길이 주(主)통행로였을 것이다. 바위에 가까이 다가서면 나란히 직사각형의 구획을 지어 조각하고 그 위에 사리공(舍利孔)에 해당하는 감실(龕室)을 판 흔적이 보인다. 바위 남쪽면의 마애부도는 다섯 기다. 주인공의 이름을 새기지 않은 맨 왼쪽 것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네 기는 모두 조선 후기 조성한 것이다. 서쪽면에도 최근의 마애부도 두 기가 있다. 옆에는 역시 근해의 원구형 부도 두 기도 보이니 명실상부한 불암사의 부도밭이다. 일반적인 부도가 개인 묘지라면 큰 바위에 복수로 새겨진 부도는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서쪽면 부도의 주인공은 오른쪽부터 청신녀 덕원(德元), 청신녀 정심(淨心), 청신녀 상념(常念)이다. 정심의 부도에는 ‘가경(嘉慶) 17년’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1812년 조성된 것이다. 가경은 청 인종의 연호다. 청신녀(靑信女)란 재가 여성신자를 가리킨다. 많은 시주 등으로 절과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 왼쪽은 청송당(靑松堂) 성감선사(性鑑禪師)의 승탑이다. 조각에서 승려와 신자의 위계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불암사는 세조가 한양 사방에 왕실 원찰(願刹)을 정하며 동불암(東佛巖)으로 낙점했던 만큼 마애부도의 청신녀들은 왕실과 주변 여인들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불암산 서쪽의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 도선사(道詵寺) 주변에는 ‘김상궁정광화지사리탑’(金尙宮淨光花之舍利塔)이라는 명문이 있는 마애부도가 있다. 서울 서대문 안산 자락의 봉원사(奉元寺)에서도 또 다른 ‘상궁 김씨’의 마애부도를 찾을 수 있다. 상궁을 비롯한 궁인들이 출궁 이후 근교 절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음을 방증한다. 학도암의 마애부도 역시 왕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중계동 아파트 단지와 주택 밀집지역의 골목 사이로 구부러진 도로를 따라 학도암을 찾아가는 길은 복잡하기만 하다. 하지만 학도암에 오르면 서울에 이런 곳에 있을까 싶을 만큼 시원한 풍광이 펼쳐진다. 두 기의 마애부도는 학도암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 바위에 있다. 왼쪽은 청신녀 월영(月影)의 묘탑, 오른쪽은 환□당(幻□堂) 취근(就根)선사의 승탑이다. 월영탑에는 1819년 조성했음을 알리는 명문이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취근선사 것도 비슷한 시기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학도암은 높이 22m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높이 13.4m의 관음보살로 유명한 절집이다. 마애관음은 1872년 명성황후가 시주해 조성한 것으로 사지(寺誌)는 기록하고 있다.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불암사에서도, 학도암에서도 등산객과 참배객은 대부분 무심하게 마애부도 곁을 지난다. 무심하다기보다 마애부도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더불어 마애부도가 유행한 이유를 밝히는 학계의 노력도 아직은 부족하다.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부도의 명칭에도 여운이 남는다. 문화재청이 쓰는 ‘승탑’이라는 표현은 재가신자의 묘탑을 수용하지 못한다. 신자의 묘탑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가 없으니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서울시는 시 마애부도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마애사리탑’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재가신자의 무덤을 사리탑이라고 부르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마애부도의 성격을 밝히면서 용어의 재정립도 필요하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남아공 주민 300명 인육 먹어…21세기 카니발리즘

    남아공 주민 300명 인육 먹어…21세기 카니발리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사람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마을 주민 중 300여 명도 무덤을 파내 인육을 먹은 것으로 드러나 더 큰 충격을 주고있다. 최근 남아공 뉴스24 등 현지매체는 동남부에 위치한 마을 에스트코트에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식육주의)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충격적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마을의 한 남자가 현지 경찰서로 자수를 하면서다. 남자는 "인육을 먹는 것이 지쳤다. 자수하겠다"면서 함께 가져온 사람의 손과 다리 일부를 경찰에 내밀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용의자 4명을 체포했으며 이들의 집에서 부패한 시신의 일부를 찾아냈다. 경찰이 공개한 사건의 전말은 영화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끔찍하다. 먼저 이들 용의자 중 3명은 한 여성을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해 먹었다. 경찰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던 지난 21일에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최근 열린 에스트코트 마을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971명 중 3분의 1의 주민들이 용의자 네 명의 권고로 인육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보도에 따르면 체포된 용의자 중 2명은 이 지역의 주술사로, 주민들은 인육을 먹으면 가족의 번영과 건강을 유지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이같은 짓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지언론은 "신체의 일부가 건강에 좋다는 미신이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뿌리깊게 내려오고 있다"면서 "주술사들이 마을 주민들을 유혹해 무덤도 파헤쳤다"고 보도했다. 이어 "용의자들은 모두 30대의 젊은 남자로 살인 및 살인 공모 등의 혐의로 체포됐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79개월 동안 ‘0점짜리 이란전’… 申은 킬러가 필요해

    79개월 동안 ‘0점짜리 이란전’… 申은 킬러가 필요해

    수비 위주 경기 ‘원샷 원킬’ 필요 이동국 대표팀 유일 2득점 경험 ‘물오른’ 황희찬·권창훈도 기대 한국 축구에 이란은 지난 몇 년 동안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다.역대 성인대표팀 전적 9승7무13패에서 보듯 다소 열세지만 2011년 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1-0 승·윤빛가람 득점) 이후 이겨본 적이 없다. 한 번의 친선경기를 포함한 네 차례의 경기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모두 0-1 패로 무릎을 꿇었다. 특히 테헤란 아자디스타디움은 ‘무덤’이었다. 2006년 2월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에서 0-1로 끌려가다 종료 9분 남기고 박지성의 극적인 골로 간신히 1-1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앞뒤 4차례의 ‘아자디 원정’에서도 매번 쓴잔을 들이켰다. 더욱 심각한 건 지난 10차례 경기에서 득점이 달랑 3골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란과 22일 현재까지의 기록에서 공교롭게도 나란히 33개의 골 득실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첫 A매치가 열린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5-0 승) 당시와 비교하면 전반적인 전력, 득점력의 우월함에서 ‘역전 현상’이 두드러진다. 지난 21일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로 16명의 멤버를 불러들인 신태용 대표팀 감독은 “내 스타일의 축구를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당면한 두 차례의 경기, 특히 이란과의 최종예선 9차전 홈 경기를 겨냥한 말이다. 골 몇 개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이란을 이겨 본선에 가는 게 중요하다. 내 ‘축구 신념’을 접고 오직 이기는 경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일주일이나 앞당겨 소집한 16명 중에 대부분의 수비 자원이 포함된 건 수비 위주의 경기로 실점을 차단해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겠다는 생각이다. 안전한 축구로 실점을 최대한 억제하고, 공격라인의 결정적인 한 방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복안이다. 자연스럽게 ‘스리백 카드’가 엿보인다. 신 감독은 20세 이하(U20)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당시에도 스리백을 썼다. 더욱이 수비자원 8명 가운데 김민우(수원), 고요한(FC서울) 등은 스리백에 특화된 수비수다. 수비형 미드필더 권경원(톈진), 장현수(FC도쿄) 등도 센터백을 병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수비 위주의 경기에서 ‘원샷 원킬’의 주인공이다. 현역 중에서는 이란전 멀티골(2골)을 넣은 역대 7명 가운데 이동국(전북)이 유일하다. 최근 발끝에 킬러 본능을 발산하는 황희찬(21·잘츠부르크)을 비롯해 권창훈(23·디종)도 주목할 만하다. 2011~13년 브라질월드컵 예선에서 중동팀을 상대로 한 네 경기에서 5골을 넣었던 이근호(32·강원)도 킬러의 발끝을 갈고 있다. 이근호는 22일 훈련에 앞서 “이란의 수비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득점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승부처에서 작은 차이로 진 것”이라면서 “이번에는 한 번의 기회가 곧 한 골이 될 것”이라며 3년여 만의 A매치 득점을 자신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런웨이 조선] 가장 기쁜 날도 가장 슬픈 날도 함께한 ‘인생 예복’

    [런웨이 조선] 가장 기쁜 날도 가장 슬픈 날도 함께한 ‘인생 예복’

    시속(時俗)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 현대인은 인터넷을 검색한다. 그렇다면 선현들은 궁금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 해결하거나 스스로 옛것을 고증하면서 그 연원을 찾았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고 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시속은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그럼에도 예를 실천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시대에 맞게 고치자는 사람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하나로 합쳐지는 대동(大同)의 풍속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늘 패션이 있었다.조선의 유학자 박만선(朴萬善)은 혼인할 때와 죽어 무덤에 들어갈 때 어떤 복장을 해야 할지 좀처럼 기준이 서지 않았다. 그즈음 시속의 여인들은 두 경우 모두 ‘원삼’(圓衫)을 입곤 했는데 이것이 과연 예에 합당한지, 또 허리띠는 어떻게 생긴 것을 해야 예법에 맞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예학자인 송시열에게 글을 보냈다. 이에 송시열은 “명백하게 혼사와 상사에는 옷을 구분하여 입어야 한다. 혼사에는 염의(?衣)를 입고, 상사에는 심의(深衣)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며, “허리띠도 각각의 옷에 맞는 것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예학자로서 당연한 답변이었다고 볼 수 있다.●유학자 심의에 붉은 띠 두른 혼례복 그렇다면 송시열이 말한 혼사에 입는 ‘염의’와 상사에 입는다는 ‘심의’는 어떤 옷일까. 이 두 옷의 기원은 모두 심의에서 출발한다. 심의는 유학자에게 최고의 예복(禮服)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따로 마름질하여 허리에서 연결한 포(袍)다. 특히 심의는 깃, 소매 끝, 옷자락의 가장자리에 검은색의 선을 둘러 꾸민다. 혼사에 입는 염의는 여기에 붉은색 선을 둘러 혼례복으로서의 의미를 더한다. 두 옷이 똑같은 형태로 선의 색깔만 다를 뿐이다. 예복에서의 허리띠는 단순히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실용적인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띠를 묶지 않게 되면 옷이 풀어지고 가슴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창피(猖披)다. 그러니 당시 예학자들에게 있어 띠는 예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심의에 두르는 허리띠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흰색의 허리띠에는 심의에서와 같이 가장자리에 검은색의 선을 두른다. 허리띠 전체에 검은색의 선을 두르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허리 부분은 빼고 허리띠를 묶는 부분과 묶고 난 후 아래로 늘어뜨려진 부분에만 선을 두른다. 옷을 꾸몄을 뿐 아니라 입었을 때 흑백의 조화가 유학자의 모습을 보다 경건하고 기품 있게 만들어 준다. 염의는 혼례복이다. 경건함보다는 밝고 화려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심의에 두른 검은색 대신 붉은색을 두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같은 옷에서 출발했지만 의미에 따라 장식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예복으로서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땅으로 시집가는 날’ 상례복으로도 그런데 문제는 원삼이다. 김장생(1548~1631)의 ‘사계전서’에는 “부인의 상(喪)에 대수(大袖)를 입는다”고 하면서 대수는 원삼이라고 했다. 또 그의 아들 김집도 ‘신독재유고’에서 “수의로 원삼에 대대(大帶)를 사용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했다. 그러니 송시열 이전부터도 이미 혼례복인 원삼을 상사에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원삼이 어떤 옷이기에 일생에서 가장 기쁜 날에도 입고 가장 슬픈 날에도 입게 된 것일까.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원삼은 외재 이단하(1625~1689)의 부인이 입었던 옷이다. 원삼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옷깃을 맞대어 둥글게 만들었으며, 좌우 깃이 포개지지 않고 앞 중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대금(對襟)이다. 또한 앞이 뒤보다 짧으며, 앞길과 뒷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고 터져 있다. 소매 끝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색의 색동을 달고 마지막에 흰색의 한삼을 달았다. 특히 어깨와 소매, 앞·뒷길의 끝부분에 금박을 하고, 가슴과 등에 흉배를 붙여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더욱이 긴 허리띠는 뒷자락과 함께 늘어져 뒷모습까지 품위를 드러낸다. 크고 긴 소매와 길게 늘어진 옷자락과 허리띠. 화려한 금박 등의 장식은 의식을 보다 성대하고 화려하게 만든다. 조선 후기 이재가 쓴 ‘사례편람’에는 “원삼은 큰 옷으로 색깔 있는 견(絹)이나 명주로 만들며, 이른바 가례(嘉禮)의 대수(大袖)”라고 했던 것처럼 화려한 원삼은 여전히 상복으로 기능했다.분명 혼례복이 있고, 상례복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혼례복을 상례에 입혔을까. 이는 죽음을 ‘땅으로 시집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 시집을 가든, 땅으로 시집을 가든 혼사와 관계된 일이니 혼례 때 입었던 원삼을 수의로 입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시대가 바뀌며 옷의 형태가 바뀌고 명칭이 달라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옷이 갖고 있는 의미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으로 재탄생하는 복식이야말로 예를 지켜 나가는 새로운 방법일 것이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관 사고 화장터 투어…日 ‘엔딩 페어’ 확산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묘지와 장례 방법, 장례 상품 등을 직접 고르고 미리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엔딩 산업’, ‘종활(終活) 페어’가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고령자 인구가 늘고,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세대’가 70대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스스로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탓이다. 종활은 장례 방식과 무덤 등을 미리 선택·준비하고, 자신의 일생을 글이나 비디오로 남기는 ‘엔딩 노트’ 준비 등 종말이나 사후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의미다. 노인들 사이에서 2000년대 후반부터 많이 쓰여 오다가 2012년에는 유행어로 꼽히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1일 최근 초대형 마트인 이온의 도쿄 니시아라이점에서 열린 ‘종활 페어’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온이 마련한 엔딩 페어에서는 장례 방식 및 무덤 선택을 위한 관련 설명, 영정 사진 촬영, 승려 등의 상담 등 장례와 죽음을 준비하는 다양한 메뉴가 마련됐다. 관이 매장에 진열돼 미리 관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됐을 때 처리해 주는 비영리단체와의 계약 프로그램 등도 포함돼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유골을 절에 우송해서 보관하게 하는 방안, 저렴하게 스님을 모셔 장례를 치르는 방법 등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서비스도 차례차례 등장하고 있다. 화장터를 고르는 일일 버스 투어에 2000명의 참가자가 몰리기도 했고, 종활을 주제로 한 투어를 전문적으로 기획해 운영하는 여행 업체도 생겨났다. 여행 업체 클럽 투어리즘은 해마다 공원이나 산골을 여행하면서 죽음과 장례 등을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2014년 이후 100회 정도 운영했다. 후생노동성 조사 결과 노인 세대 가운데 6할은 자식이 없거나 있어도 혼자 또는 부부만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자식 등과 세대 간 동거하는 경우는 11%에 불과했다. 핵가족화한 동거 형태도 이 같은 추세를 더 부추기고 있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北 “개성서 고려 숙종릉 발굴”

    北 “개성서 고려 숙종릉 발굴”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19일 공개한 고려 15대왕 숙종의 무덤 전경. 북한은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개성 선적리에서 발굴을 진행했으며, 문헌기록 자료와 위성에 의한 공간정보기술을 통해 고려왕릉의 위치를 확증했다고 밝혔다. 금박을 입힌 나무관 껍질 조각들, 청동숟가락꼭지 등 고려시대 유물들도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 독립운동가 죽인 친일파들…이승만 정권 보도연맹 학살사건

    독립운동가 죽인 친일파들…이승만 정권 보도연맹 학살사건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국민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살해한 보도연맹 학살에 대해 추적했다.19일 방송된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에서는 경남 마산의 여양리 인근에서 발견된 뼈무덤의 유해를 찾아갔다. 제작진은 당시 발굴 유해를 분석했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반세기 전에 묻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유해발굴 과정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한 폐광이 발견됐다. 누군가 입구를 흙으로 막아둔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차곡차곡 쌓여있던 23구의 시신이었다. 전문가는 구덩이에 사람을 넣고 총으로 쏴 살해했다고 추정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1950년 여름 그날 마산 여양리에 사람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도둑골 골짜기로 향했다고 증언했다. 그 여름 도둑골로 향했던 163명의 사람들은 살해당했던 것이다. 마을의 가장 연장자인 맹노환 어르신은 “살려고 꼬박꼬박 시키는대로 보도연맹 가입해라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은 다 따라가서 죽은거다”고 말했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만들어졌지만 결국 보도연맹 가입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가 국민을 살해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보도연맹에 좌익과 무관한 국민들이 가입됐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글을 모르거나 먹을 것이 필요했던 국민들은 보도연맹에 대해 잘 모르고 가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죽임을 당해야 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연맹원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보도연맹은 친일파가 친정부 성향을 띄며 권력을 잡으려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보도연맹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하에 친일파를 수호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보도연맹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이 목적이었던 보국연맹와 유사한 형태를 띄며 좌익을 격리하는 역할을 했다.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이었던 고 선우종원은 지난 2007년 인터뷰에서 “보도연맹에 빨갱이 아닌 것들이 많다. 관제 빨갱이라고 한다. 관에서 만든 관제 빨갱이라고”라고 말했다.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누구일까. 고 선우종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김창룡 육군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창룡은 현충원에 잠들어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한 그는 수많은 공안사건 조작 혐의도 많다. 민간인 희생자이자 독립운동가 김영생 님의 손녀 효전스님은 악랄한 살해를 폭로했다. 효전스님은 “할아버지는 밀양의열단이었다. 빨갱이라고 하면 죽이면 되니까 독립군 의열단 한 사람들은 A급 빨갱이로 몰았다”고 밝혔다. 학살 당한 사람중 보도연맹원이 아닌 사람도 있다. 안용봉이라는 독립운동가는 해방 후 지역사회 시민들로부터 존경받았으나 이승만 정권 쪽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돼 학살 당했다. 장경근 보도연맹 부총재, 백한성 보도연맹 부총재, 오제도 보도연맹 기획 검사 등은 모두 일제시대부터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다. 이태희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 아들은 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는 말에도 “친일인명사전 만든 사람들도 정신 나갔다. 100년전 이야기를 들춰 뭘하겠다는거냐. 과거는 잊어야 한다. 지나간 일에서 뭘 배우겠냐”고 반응했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뒤 가족들은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호소했다. 그러나 국가 폭력으로 숨진 이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유족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학살은 불법이지만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판결이었다. 유족들에게는 죽음을 추모하고 절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5.16 쿠데타 이후 군인들이 묘를 파해쳐 유골을 산산조각 내 뿌려버리기도 했다. 침묵이 강요되고 폭력이 당연했던 시절, 오랫동안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들의 것이었다. 전문가는 “빨갱이의 탄생은 이 땅에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유령이라고 할까요. 그 낱말을 사용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라며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언니는 살아있다 양정아, 다솜과 함께 빗속 석고대죄 ‘위기 탈출할 수 있을까’

    언니는 살아있다 양정아, 다솜과 함께 빗속 석고대죄 ‘위기 탈출할 수 있을까’

    ‘언니는 살아있다’ 양정아와 다솜이 빗속에서 함께 무릎을 꿇었다. 19일 SBS ‘언니는 살아있다!’ 제작진 측은 이계화(양정아 분)의 정식 며느리가 된 양달희(김다솜 분)가 시어머니를 위해 무릎을 꿇은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 속 계화는 집에서 쫓겨난 듯 두 개의 트렁크를 옆에 두고 대문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그 옆에는 아들 세준(조윤우 분)과 갓 결혼한 며느리 달희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계화의 편에 앉아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열악한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애틋해 고부간의 갈등은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악행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한 배를 탄 동지애가 빛나는 순간이다. 지난 방송에서 계화는 구필모(손창민 분) 회장이 놓은 덫에 걸렸다. 녹음기가 달려있는 부엉이인형인 줄 모르고 그 앞에서 모략을 꾸미다가 구회장에게 모든 정황이 들켜버린 것. 더욱이 과거 사군자(김수미 분) 앞에서 자작극을 펼친 사실까지 드러나 구회장의 분노가 하늘 끝까지 폭발했다. 이에 집밖으로 쫓겨난 이계화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며느리인 달희가 시아버지인 구필모 회장을 설득하고자 함께 읍소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한껏 착한 척을 하는 달희의 속마음도 모른 채 계화는 함께 석고대죄를 하는 며느리가 고마워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자신이 파놓은 무덤으로 재벌집 사모에서 한순간에 집밖으로 쫓겨난 이계화가 과연 양달희의 도움으로 구회장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19일 토요일 저녁 8시 45분 2회 연속 방송. 사진=SBS ‘언니는 살아있다’ 제공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그것이 알고싶다’…마산 여양리서 발견된 200여구 시신의 비밀

    ‘그것이 알고싶다’…마산 여양리서 발견된 200여구 시신의 비밀

    19일 밤 방송되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경남 마산 여양리에 있는 뼈 무덤의 비밀을 파헤친다.여양리에는 골짜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마을이 흩어져있다. 도둑골로 들어서면 저수지를 따라 낡은 집들이 있다. 도둑골엔 이따금씩 흉흉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사고에 관한 것이었다. 여양리 버스 운전기사는 “여긴 혼자 오기가 무서워요. 아무도 없는데 버스 벨이 울린다니까”라고 말했다. 여양리는 마산 버스 운전기사들에게 피하고 싶은 노선이다. 여양리 버스 종착역에 다다르면, 희끄무레한 여인의 형상이 보인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오래전 마을의 비극을 떠올렸다. 그리고 침묵했다. 마을의 비극이 세상에 드러난 건 2002년이었다. 태풍 루사로 여양리에 큰비가 내렸다. 비에 휩쓸려 수십 여구의 유골이 밭으로 쏟아졌다. 밭 주인은 놀라 경찰에 신고했지만 마을 노인들은 묵묵히 유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이내 오랜 침묵을 깼다. 이 마을의 맹씨 할아버지는 “국민 학교 올라올 때 여기서 죽이는 거 봤거든. 총으로 쏴 죽이는 거”라고 말했다. 마을 이장 박씨는 “온통 빨갰어요. 비가 와서 냇가가 벌겋게 물들어있었다고”라고 증언했다. 마을에 유골이 쏟아져 내려 한바탕 난리가 나고 2년 뒤에 경남 지역 유해 발굴팀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수 십 여구에 불과한 줄 알았던 유골은, 구덩이마다 쌓여있었다. 총 200여구의 시신이 여양리 뒷산에 긴 시간 잠들어있었던 것이다. 해진 양복과 구두 주걱, 탄피 등도 유해와 함께 발굴됐다. 발굴팀은 유류품을 토대로, 죽음을 당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추적에 나섰다. 동네 주민은 “모내기하는 사람도 끌려갔고 뭐 집에서 그냥 일 보던 사람도 끌려갔고. 여긴 얼마 안 죽였어. 한 200명”이라고 말했다. 1950년 여름날의 마산 여양리, 맹씨 할아버지는 그날도 비가 많이 내렸다고 기억했다. 미끄러운 길을 뛰어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할아버지가 가던 길을 멈춘 건 수십 대의 트럭 때문이었다. 여양리 너머에서부터 낯선 얼굴들이 트럭에 실려 왔다고 했다. 이내 어디선가 큰 총소리가 들려왔고, 비명이 이어졌다. 얼마 후 경찰은 마을 청년들을 시켜 죽은 사람들을 묻으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포승에 묶인 채 총을 맞은 시신과, 도망가려다 시체에 깔려 죽어 뒤엉킨 시신을 묻어주었다.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그런데 조직을 키운다는 이유로 사상과 무관한 국민들도 비료며 식량을 나눠 준다며 가입시켰다. 심지어 명단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투와는 관련 없는 지역에서 보도연맹원을 대량 학살했다. 좌익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며, 언제든 인민군과 연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나서 보호하겠다던 보도연맹원들은 이유도 모른 채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불순분자로 간주됐다. 당시 여양리 유해 발굴 취재 기자는 “지금도 유족회에 나오지 않는 유족들이 많아요. 아직도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을 두려워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보도연맹의 원형은 친일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반대자들과 독립운동가의 사상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 이른바 ‘보국연맹’이며 ‘야마토주쿠’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친일 검사와 경찰들이 야마토주쿠와 꼭 닮은 보도연맹을 창설한 것이다. 보도연맹을 기획한 검사 선우종원은 “빨갱이 만들면 어떻게 해요? 큰일이지. 그걸 막으려고 한 게 보도연맹이지. 일제시대 야마토주쿠 그런 걸 만드려고 한 거거든”이라고 밝혔다. 친일파는 친일이라는 치부를 덮고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빨갱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실체조차 불분명한 오랜 혐오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남하한 우익민족주의자도,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저항한 시민들도,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도 ‘빨갱이’로 불리고 위험한 존재로 몰렸다. 그리고 그 낙인은 지금도 이어진다.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보도연맹 위원의 아들은 “세상이란 건 그런 거예요. 언제든지 공평하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요. 과거로 세월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국가의 힘이 낭비된다고요”라고 말했다.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의 아들은 “우리 빨갱이 자손으로 보니까 그렇잖아요. 우리 아버지 빨갱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길에 나가서 고함지르고 다닐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광복절 주간을 맞아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국가 폭력 간의 관계를 파헤치고, ‘빨갱이’와 ‘친일파’라는 한국 사회의 오랜 갈등의 근원을 풀기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알아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당집 뒷마당서 나온 고대 유물… 동아시아 교류·해양 제례 흔적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당집 뒷마당서 나온 고대 유물… 동아시아 교류·해양 제례 흔적

    전라북도 부안이라면 주민들 스스로가 ‘축복의 땅’이라고 일컬을 만큼 관광 자원의 보고다.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같은 고찰(古刹)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서해 바다 그 자체가 무한대의 가치를 지닌 관광자원이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에 이어 최근에는 자연친화적 관광 붐을 타고 곰소염전도 각광받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반도(半島)인 부안군에서도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변산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의 하나다.변산이라면 해수욕장과 함께 채석강과 적벽강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가 깃든 중국 명승의 이름을 딴 것은 그만큼 경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붉은색 바위 절벽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 적벽강과 수만권 책을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한 퇴적암층으로 이루어진 남쪽 채석강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 격포 죽막동(竹幕洞)이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죽막동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큰 바다를 건너야 하는 뱃사람들의 기원이 담긴 국제적 해양제사유적이 확인됐다. 꼭 큰 바다를 건너지 않더라도 변산 앞바다를 삶의 밑천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과거든, 현재든 해신(海神)에 목숨을 의탁하기 마련인데, 민간신앙의 전통은 지금도 남아 있는 당집 수성당(水城堂)에서 활발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부안의 관광자원을 이야기한 것은 죽막동 유적의 가치가 아직은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죽막동은 고대 한·중·일 세 나라의 해양 교류 및 해양 제례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보여 주는 동북아시아 유일의 유적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부안이 국내용 관광지였다면 죽막동 유적의 존재로 국제적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죽막동 유적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관광객이 승용차를 몰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나서 변산에 이르는동안 유적을 알리는 이정표는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격포에 들어서면 수성당으로 가는 작은 이정표가 하나 보일 뿐이다. 변산의 자연과 묶으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역사 관광 자원으로 죽막동 유적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가장 많은 사람이 쓴다는 내비게이션에도 ‘죽막동 유적’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죽막동 유적에 가려면 ‘수성당’을 입력해야 한다. 수성당이 1974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일 것이다. 다행히 최근 문화재청이 ‘부안 죽막동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예고했다니 조만간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바다로 내민 해발 57m의 죽막동 언덕에 서면 왜 옛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라는 표현이 실감이 나는데, 먼바다는 고사하고 변산 앞바다의 위도와 칠산바다에도 수많은 어민들의 고혼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수성당은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작은 기와집이다. 상량문은 1850년(철종 원년) 이전에도 신당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1864년(고종 원년)에 3차로 중수한 것을 1940년에 다시 중수했는데, 지금의 신당은 1973년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은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수성당은 지금도 살아 있는 민간신앙의 현장이다. 당집인 수성당뿐 아니라 주변에 무속인들이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다양하게 마련해 놓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다 쪽으로 앉힌 작은 고깃배 한 척이다. 쌍촛대와 향로를 올려 놓았으니 풍어와 안전은 물론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리는 장소일 것이다. 죽막동 유적이란 수성당 바로 뒤편의 넓지 않은 마당이다. 전주박물관에 따르면 유적은 발굴조사 당시에 이미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1980년대 이후 해안경비가 강화되고 참호, 막사, 창고, 철책 등 군사시설물이 설치되면서 유적의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대로 원형이 남아 있는 면적은 가로 8m에 세로 13m 정도였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50일 남짓한 발굴조사에서 거둔 성과는 엄청났다. 유물은 30㎝ 남짓한 두께로 종류도 다양하게 집중 퇴적되어 있었다. 해신에게 제사 지내는 데 사용한 용구를 의도적으로 파쇄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백제 유물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유물도 그릇류를 중심으로 소량이 출토됐다. 규모가 큰 해양제사는 백제시대에 집중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죽막동 유적의 출토 유물은 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각종 항아리와 큰 독, 술잔, 기대(器臺)를 비롯한 토기와 무기, 마구, 갑옷, 거울을 비롯한 금속유물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수량도 많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집중된 유물의 양상은 같은 시기 수장급 무덤의 부장품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제사의 주체가 지역 수장이거나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학계에 따르면 토기류는 백제 것과 함께 대가야나 왜(倭) 계통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금속유물도 대가야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돌로 만든 쇠도끼, 칼, 갑옷 등의 모조품은 일본 후쿠오카현 오키노시마 제사유적 출토품과 형태, 크기, 재질, 제작수법이 대부분 일치했다고 한다. 여기에 중국 남조(317~581)의 청자도 나왔다. 흙으로 빚은 말의 모형도 여럿 나왔는데 하나같이 머리와 다리는 떨어져 나간 채였다. 말을 바쳐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푸는 의식은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흔히 행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말의 축소 모형은 해신에게 바치는 공물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기와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만 나왔으니 백제시대에는 노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정보를 종합하면 죽막동 유적이 국제적 성격의 제사터라는 것은 자명하다. 백제가 주도한 제사에 대가야, 왜, 중국 남조의 사신, 상인, 선원이 참여한 것인지, 각각의 세력이 별도로 제사를 지낸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런 의문과 관계없이 당시 죽막동이 동아시아 해양 교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죽막동 유적을 찾는다면 전주박물관도 여행코스에 넣는 것이 좋다. 발굴 현장과 출토 유물을 함께 보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격포에서는 닭이봉 전망대에도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채석강과 죽막동, 적벽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해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데 죽막동보다 더 영험 있는 곳은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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